학(鶴)의 오딧세이(Odyssey)

부산 아홉산숲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사람이 가꾼 아홉산숲

 

부산 기장군 철마면 아홉산 자락에 한 집안이 400여년을 두고 가꾸어 온 숲이 있다. 아홉산숲이라 일컫는 숲이다. 오랜 세월을 두고 한 집안에서 가꾸어 온 숲은 이제 자연의 하나가 되어 수 많은 생명체가 살아가고 있다. 산토끼, 고라니 등의 여러 동물과 금강소나무, 편백나무, 삼나무, 참나무 군락을 비롯한 여러 식물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 특히 이 곳에 있는 하늘을 찌를 듯이 쭉쭉 뻗어 있는 여러 종류의 대나무들은 공기를 청량하게 해 줄뿐만 아니라 사람의 마음까지도 청량하게 한다.

 

 나즈막한 언덕 길을 따라 걸으며 조용하게 자연을 음미할 수 있고, 마음의 평화로움을 얻을 수도 있다. 긴 길이 아니라 한 바퀴를 돌아보는데 사람마다 편차는 있겠지만 두시간만 하면 충분히 돌아 볼 수 있는 편안한 길이다.

 

 살아있는 생명을 느낄 수 있는 숲으로 여러분을 안내하겠습니다.

 

 

평지대밭(맹종죽숲)

 

 

아홉산숲 입구 지정표

 

 

아홉산숲 보호수 안내도

 

 

아홉산숲 입구

 

한 집안이 가꾸고 꾸며온 숲이기에 가정집 대문을 들어서는 것 같은 느낌의 입구다.

 

 

종합안내도

 

 

이정표

 

 

대숲으로 가는 길

 

 

 

 

대숲 가는 길 도중의 금강소나무숲(보호수군락지)

 

 

 

맹종죽숲

 

 맹종죽(孟宗竹)은 죽순을 식용하고 있으므로 다른 명칭으로 죽순대라 하며 외떡잎식물 벼목 화본과의 대나무이다. 중국산이기에 강남죽(江南竹)이라고도 한다 높이 10-20m, 지름 20cm 정도로 대나무 중 가장 굵다. 산지는 한반도 남부 지역으로 죽피에 흑갈색의 반점이 있는데다 윤기가 적으며 매우 단단하다. 탄력성이 적어 부러지기 쉬운 단점이 있어 주로 동공(洞空)을 그대로 사용하는 일이 많다. 필통이 그 대상이 되며, 속이 비고 밑둥이 굵기 때문에 사용에 편리한 점이 많아 표면에 음각이나 양각을 장식하여 쓴다

 

 

이곳에서 촬영한 영화들

 

 

맹종숲 안내

 

 

 

 

 

 

 

 

맹종죽숲

 

얏 100여년전에 중국에서 들여온 맹종죽을 처음 심은 곳으로 맹종죽이 빽빽하게 심어져 있어 한 여름에도 시원함을 느낄 수 있다. 대숲으로 들어가 하늘을 바라보면 나무사이로 빛나는 하늘을 볼 수 있다.마음까지 시원하게 만드는 숲이다. 대나무가 울창하여 여기에서 많은 영화를 찍었다는 표지가 있다.

 

 

 

 

편안하게 산책하는 흙길

 

 

이정표

 

 

 

영화 '대호'촬영 때 만들어 놓은 서낭당

 

 

 

 

편백나무숲 이정표

 

 

 

 

 

편백나무숲

 

 

이정표

 

 

안내판

 

 

 

오솔길

 

 

평지대밭 이정표

 

 

 

 

 

 

 

 

 

 

 

 

 

 

 

 

 

 

 

 

청량함이 느껴지는 평지대밭

 

 

 

 

수리정

 

아홉산숲을 나와 버스정류장에 보면 아담한 정자가 있다.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에 잠시 구경을 하면 좋을 것이다.

 

 아홉산숲은 우리가 알고 있는 자연휴양림이나 거대한 규모의 수목원에 비하면 규모나 시설에서 많이 뒤떨어진다. 하지만 한 집안이 공을 들여 꾸미지 않고 자연을 살려가면서 가꾼 숲이다. 꾸미지 않고 자연의 한 상태로 그대로를 간직하면서 보존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맹종죽숲은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햇빛을 가려주며, 대나무의 청량하고 시원한 맛을 느끼게 해 주는 곳이다. 도심의 찌든 때를 잠시라도 씻을 수 있는 곳으로 부ㄷ멊이 즐길 수 있다.

 

한 가지 흠이라면 숲을 거닐며 탐방하는 도중에 물을 얻을 수 있는 곳이 없다. 반드시 자기가 마실 물이나 음료를 준비해야 한다.

마음대로 가는 발칸 여행 - 불가리아, 릴라수도원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구원의 장소 릴라수도원

 

 소피아를 떠나 릴라수도원으로 향했다. 소피아에서 릴라수도원을 가는 버스는 오전에 잠시 있고 오후 늦게 한편이 있는 아주 이상한 시간표였다. 아마 늦게 출발하면 돌아오는 시간대가 맞지 않아서인지 모르겠다.

 

 릴라 수도원(Rila Monastery)은 불가리아 남서부 릴라 산맥에 위치한 동방 정교회 수도원이다. 소피아에서 버스로 약 세시간이 걸리는 남서쪽으로 117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 수도원 안에는 교회, 주거 구역, 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외부에서 보면 마치 요새 같은 모습을 한 이 수도원은 927년 치유 능력을 지녔다고 해서 유명했던 이반 릴스키(릴라의 이반)에 의해 설립되었다. 이 수도원은 오랜 세월에 걸친 여러 가지 사건을 겪으며 외국 세력의 지배와 간섭을 견뎌 왔다. 중세의 통치자들은 무척이나 이반 릴스키의 유골을 손에 넣고 싶어 했으나, 유골은 1183년 에스테르곰으로 갔다가 비잔틴 제국과 불가리아를 거쳐 결국 1469년 릴라 수도원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수도원 건물도 빈번하게 약탈당하고 다시 짓고 하였는데, 현재의 건물은 1833년에는 화재로 인해 파괴되기도 했지만 1834년부터 1862년까지 진행된 불가리아 국민들의 지원을 통해 재건되었다. 험악해 보이는 벽 안으로 일단 발을 디디면 건물이 지닌 매력과 그 규모에 놀란다. 당당한 모습의 '예수 탄생 교회'는 불가리아에서 가장 큰 수도원 부속 교회이며, 줄무늬와 체크무늬로 단장한 4단으로 된 주랑 발코니가 불규칙한 형태의 안뜰을 둘러싸고 있다. 아무렇게나 건축한 것 같은 붉은 타일로 덮인 지붕과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돔이 전체적인 매력을 더해 준다.

 

 1976년에는 불가리아 국립사적지로 지정되었으며 1983년에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1991년 이후부터는 불가리아 정교회 소유로 남아 있다. 2002525일에는 불가리아를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이 곳을 순례하기도 했다.

 

 이 수도원은 단지 매력적이기만 한 장소는 아니다. 수도원 박물관은 '릴라 십자가'라는 뛰어난 작품과 1790년에서 1802년에 걸쳐 라파일이라는 수사가 조각한 양면 예수 수난상을 소장하고 있다. 주 교회는 화려하게 채색된 극적인 장면의 프레스코화로 덮여 있는데, 그림은 구원받은 자와 죄인을 기다리고 있는 서로 다른 운명을 생생하게 나타낸다.

 

 

릴라수도원 전경

 

 버스를 타고 가는 길에는 먼 산에 눈이 아직도 쌓여 있었다. 벌써 오월인데도 높은 산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고지대라 눈이 녹지 않고 쌓여 있다.

 

 

 

 

 

수도원 가는 길에 보이는 풍경

 

 수도원 가까이 있는 마을에 잠간 휴식을 위해 버스가 멈추었다. 이 마을도 제법 운치가 있는 곳이었다. 마을을 돌아보는 마차가 여행객들을 태우고 한 바퀴를 돌고 있었다. 제법 오래된 마을로 나름대로의 유적도 있는 곳이었다. 이 휴식지에서 한국의 젊은이 둘을 만났다. 같은 버스를 타고 온 젊은이로 한쌍의 남녀였다. 이야기를 해 보니 남자는 회사를 그만두고 여행을 한다고 하였다.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고 시베리아를 횡단한 후 여기로 왔다고 하여, 나도 3년 전에 한달간 시베리아를 횡단하였다 하니 놀란다. 자기는 그냥 기차만 타고 횡단하였다고 하였다. 여자는 헝가리에 유학온 학생으로 귀국 전에 여행읗 한다고 하였다. 둘이 아침에 공항에서 만나 같은 동포라고 같이 다니고 있다고 하였다. 내 생각으로는 참 기특한 젊은이들이라 느껴졌다. 젊을 때 세상을 배우고 익히는 것보다 더 큰 지혜는 없으리라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마을에서 잠시 쉬다가 릴라수도원으로 향했다. 수도원 입구에 가니 많은 전세 버스가 있었고, 노선 버스는 거의 없었다.

 

 

 

릴라수도원 전경

 

 

릴라수도원 뒷 산 풍경

 

 

 

좌우의 주랑

 

 

 

흐렐류탑

 

 14세기 중반 이후 릴라 수도원의 흐렐류 탑과 같이 많은 수도원들은 오스만 제국의 침입 하에 요새화하였다. 이러한 요새들은 도나우 강, 발칸 산맥, 로도피 산맥, 흑해 연안을 따라 완벽한 방어 네트워크를 형성하였다. 비딘, 실리스트라, 체르벤, 레베츠, 소피아, 플로프디프, 류티챠, 우스트라 등에 많은 성들이 세워졌다.

 

 

 

 

 

 

 

 

 

 

수도원의 여러 모습

 

 

 

 

아름다운 조각의 분수대

 

 

 

 

 

예수 탄생 교회의 내부

 

 

릴라수도원으로 들어가는 입구

 

 

 

수도원 설명 이정표

 

 수도원을 구경하면서 그 당시로는 엄청난 산골이었을 이곳에 세속의 모든 것을 떨쳐버리고 오직 신에게 자신을 바치고 헌신을 약속했을 수도사들을 생각하였다. 인간이 가진 모든 욕망과 희로애락에 물들지 않고 신에게 자신의 구원을 빌었을까? 아니면 자신의 욕망을 주체하지 못해서 신에게 자신의 소망을 빌었을까? 어찌 되었든지 세속의 인간은 그들을 가만히 두지 못하였다. 신에게 헌양되었을 이곳도 여러 제국들의 패권 다툼에 의해 파괴되고 변화를 거듭했던 것이다. 그것도 신이 인간에게 준 섭리인지.....

 

 수도원에서 소피아로 돌아와서 마지막 여행지이며 이 여행의 출발지이기도 한 이스탄불로 가는 열차를 타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소피아에서 이스탄불로 가는 기차는 밤 기차로  국경을 통과해야 하는 여정이다. 이스탄불에서 소피아로 오는 기차와 정반대로 움직인다.

 

 

 

 다음 날 아침에 이스탄불에 도착했다. 이스탄불 교외에 기차가 멈추고 대기한 버스를 타고 이스탄불 시내로 이동을 하는 것이다. 이스탄불을 출발할 때도 이스탄불 시내에서 버스로 역까지 이동을 해 주었는데 이번에는 반대로 이동을 해 준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너무 불편한 방법이지만 이들이 이렇게 역을 지었으니 어쩔수 없이 따라야 한다.

 

 이제 이번 여행도 끝이 나간다. 이스탄불에 몇 일 머물다가 귀국을 할 것이다.

 

 이스탄불의 이야기는 다른 곳에서 글을 썼기에 여기에서는 생략한다.

 

 참 오래 여행을 하였다. 이스탄불과 발칸을 합하여 총 50일 정도를 여행하였다. 건강에 이상이 없이 무사히 돌아다니며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즐겼다. 내가 평생을 살아오면서 책을 통하여서 보았던 많은 것들을 이제 직접 내 눈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기쁘고 즐겁게 만들었다. 하지만 여행이 모두 즐거운 것만은 아니었다. 특히나 투어여행이 아니고 직접 버스와 기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숙소를 잡고 유적지나 명승지를 찾아다니는 일이라 여러 가지 어려움도 많았다. 그러나 별다른 탈이 없이 무사히 여행을 마치고 귀국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을 때는 그 어려움은 모두 추억이 되었다.

 

 여행은 항상 즐거운 것이다.

 

 다음에는 다른 여행기를 계속해서 올릴 생각이다.

 

마음대로 가는 발칸 여행 - 불가리아, 소피아 3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소피아 국립미술관 

 

 벨리코 투르노보를 떠나 소피아로 돌아 왔다. 소피아는 이스탄불을 떠나 발칸을 여행하기 시작하며 맨 처음에 들른 곳이다. 그 때 소피아의 대부분은 보았다고 생각하지만 이번 여정이 발칸을 한 바퀴 돌고 다시 이스탄불로 복귀하는 여정이라 다시 소피아로 돌아왔다. 이제 여행도 막바지에 가까와지고 있기에 소피아에서 저번에 가 보지 못한 곳을 가보고 시간의 여유도 가지고 좀 휴식도 취하려는 의도였다. 숙소를 저번에 소피아에 머물던 곳에 다시 정했다. 그 숙소가 교통편을 이용하기도 편리하고 시내도 가깝고 시장도 가까워서 편리했기 때문이다.

 

 

국립미술관 소장 작품

 

 

숙소 주변의 풍경

 

 

 

카페에 한가로이 담소를 나누는 시민들

 

 오늘은 휴식을 취하면서 소피아 시내를 그냥 돌아다녀 보기로 했다. 처음으로 간 곳이 국립 미술관이다. 저번에 소피아에 머무르고 있을 때 시간이 맞지 않아 미술관을 관람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다. 그래서 돌아오는 길에 보기로 마음을 먹은 곳이다.

 

 국립미술관은 불가리아에서 가장 중요한 회화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이 미술관 건물은 원래는1880년에서 1882년에 왕궁으로 지어진 건물인데, 1934년부터 미술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왕궁을 미술관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불가리아 거장들의 작품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화려한 내부도 같이 둘러 볼 수 있다는 장접이 있다. 건물의 일부는 민속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미술관의 작품에 대해서 소장품이 별로 없다고 한다. 물론 서구의 큰 미술관에 비하면 아주 작은 규모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불가리아의 독립이후부터 20세기의 불가리아 작품 약 3만 점이 보관되어 있다고 하는 작지 않은 미술관이다. 뿐만 아니라 불가리아의 미술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장점도 있다.

 

 

미술관 앞 광장

 

 

 

미술관 건물

 

 

국립 미술관 표시 동판

 

 

 

화려한 내부

 

 

 

 

 

많은 작품 가운데 내가 흥미를 가진 작품들

 

 

 

 

국립미술관 앞 광장

 

 

바로 옆에 있는 국립고고학박물관

 

 국립미술관 관람을 마치고 점심을 먹기 위해서 주변에서 제법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을 찾아 갔다.

 

 

점심을 먹은 레스토랑

 

 

 

 

 점심을 먹고 레스토랑에서 휴식을 취하고 난 뒤 내일 갈 릴라수도원의 위치와 교통편을 확인하기 위해서 버스터미널로 가서 교통편의 시간을 확인했다. 트램을 타고 기사에게 물어가면서 버스를 확인하니 릴라수도원으로 가는 버스가 몇 편 되지 않는다. 확인을 하지 않았더라면 일정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었다.

 

 버스 시간을 확인하고 다시 시내로 돌아와서 한가로이 시내를 배회하면서 저번에 보았던 유적을 다시 구경하고 소피아의 백화점으로 가서 기념품을 구경하였다. 이제 여행이 끝나 가기에 여유를 가지고 시간을 보냈다.

 

마음대로 가는 발칸 여행 - 불가리아, 벨리코 투르노보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불가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 - 벨리코 투르노보

 

 오늘은 하루를 이동하는데 시간을 다 보내야 하는 일정이다. 부쿠레슈티에서 불가리아의 벨리코 투르노보로 이동해야 한다. 열차가 자주 있는 것이 아니고 간혹 있어 시간을 맞추니 12시 경에 국경을 넘어가는 열차가 있다. 처음에는 벨리코 투르노보까지 기차를 타고 가려고 계획을 했으나 이쪽 동네의 기차는 우리와는 달리 상당히 완행이다. 그래서 모험을 해 보기로 하고 국경을 넘어 루세까지만 기차를 타고 루세에서는 버스를 타기로 하고 과감하게 루세까지만 표를 끊었다. 루세에서는 어떤 이동 수단이 있는지도 모르고 사람 사는 동네이니 이동수단이 있으리라 생각을 했다. 결과적으로 이 판단이 맞았다. 루세역에서 버스 정류장은 멀지 않았고 루세에서 벨리코 투르노보로 가는 버스는 상당히 있었다. 그래서 상당히 시간도 절약하고 편안하게 벨리코 투르노보에 도착했다. 오후 6시 경에 숙소를 찾아가 짐을 풀고 저녁도 먹고 벨리토 투르노보를 구경하기 위해서 시가지로 향했다.

 

 

아센기념비와 미술관

 

 

 

기차에서 보는 루마니아 평원 - 유채다.

 

 이쪽에서는 유채를 많이 재배하고 있었다. 헝가리 대평원을 지날 때도 들판에 가득 심어져 있는 것이 유채였다. 아마도 식용이 아니라 기름을 짜는 것 같았다.

 

 

 

 

 

루마니아와 불가리아 국경을 흐르는 강

 

 벨리코투르노보(Veliko Tarnovo)는인구가 십만도 안 되는 작은 도시로 과거에는 투르노보라고 불렀지만 1965년 도시의 역사적 가치를 기념하기 위해 ", 위대한"이라는 뜻을 가진 형용사인 "벨리코"(Велико)를 붙여 지금의 이름이 되었다. 불가리아 북부 로베치 주 남동부의 얀트라 강 상류 연안에 위치하며 소피아에서 동쪽으로 240km 떨어져 있다.

 2차 불가리아 왕국의 수도였던 곳이고 아센 2(1218~1241)시대에는 슬라브 문화의 중심지가 되어 불가리아의 아테네라고 불렸기 때문에 볼 곳이 많다. 1393년 오스만 제국의 침략으로 왕국은 멸망하여 마을과 교회, 수도원 대부분이 화재로 인해 사라졌다. 13941877년 터키의 지배 아래 있었으나 5세기에 걸쳐 문화와 교육의 중심지로 번창하였다. 1867년에는 오스만에 저항하는 중심지가 되었고, 1877년 러시아가 투르노보를 해방시켰고, 480년 동안에 걸친 오스만 제국의 지배도 막을 내리게 된다. 1878년 베를린 조약에 따라 승인된 불가리아 공국은 투르노보를 수도로 삼았다. 1879417일 최초의 불가리아 의회가 이 곳에서 소집되어 불가리아 최초의 헌법을 제정했다. 이 헌법에는 수도를 소피아로 이전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소피아는 지금도 불가리아의 수도로 남아 있다. 1908105일 페르디난드 1세가 이 곳에서 불가리아의 완전 독립을 선언했다. 불가리아 왕국 군주의 장남이자 왕위계승자의 칭호가 투르노보 공이었다. 2차 세계대전 때에는 반()파시즘 운동의 최대 거점이었다.

 

 벨리코 투르노보는 신시가지와 구시가지, 3개의 언덕 등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도시이다. 주요 관광 명소는 구시가지와 언덕 주변에 집중되어 있으나 도시로서의 기능은 주로 신시가지에서 이루어진다. 시내 중심은 99일 광장으로 광장 한가운데에는 불가리아 어머니 동상이 세워져 있다. 신시가지와 언덕 사이에 위치하며 디미트로프 거리가 블라고에프 거리로 이름이 바뀌는 지점에서부터 구시가지가 시작된다. 구시가지에서는 민족적인 양식의 가옥들과 벨리코 투르노보 특유의 전통 공예방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벨리코 투르노보 버스터미널 부근

 

숙소 앞이 공원이라 그 공원을 가로 질러 가면 벨리코 투르노보의 구시가지로 갈 수 있었다. 그래서 한가로이 공원을 배회하면서 오늘 저녁에는 그냥 배회하면서 시가를 둘러 보고 저녁을 먹기로 했다.

 

 

공원에 꽃이 핀 나무

 

 

 

숙소 호텔

 

 거리를 배회하며 구경하다가 저녁을 먹으려고 들어간 레스토랑의 경치가 그만이었다. 비록 창문을 통해서 보는 경치지만 벨리코 투르노보의 진면목을 다 보는 것 같았다. 얀트라강이 휘어져 흐르는 물돌이 마을과 같은 풍경이 펼쳐지고, 그 물돌이의 땅에 서 있는 미술관과 아센기념비가 보이는 곳이었다. 조용히 앉아서 말없이 흐르는 강을 바라보며 아름다운 경치에 즐기며 저녁을 만끽했다. 여기서 한 가지 흠이라면 어디에서나 젊은이들의 치기는 있게 마련이다. 아마도 대학생인 듯한 젊은이 몇 명이 모여서 주변은 생각하지 않고 너무 떠들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좀 귀에 거슬렸다. 좀 자제했으면 하는 느낌이었으나 그냥 지나치고 경치만 즐겼다. 경치를 즐기다 보니 어느 새 어둠이 몰려와서 늦은 시간이 되어 숙소로 돌아왔다.

 

 

 

 

레스토랑 창으로 보는 얀트라강이 굽어 흐르는 모습

 

 

 

 

멀리 보이는 미술관과 아센 기념비

 

 

공원에 있는 제 1차 서계대전 전몰 용사 기념탑

 

 다음 날 벨리코 투르노보의 차레베츠요새로 가기 위해서 아기자기한 시내를 걸어 갔다. 아직 시간이 일러서인지 가게도 문을 열지 않았다. 유럽을 여행하면서 공통적으로 느낀 것은 이 사람들은 아침을 우리처럼 일찍 시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느지막하게 문을 열고 대신에 밤에는 제법 늦게까지 영업을 하거나 놀이를 즐기고 있다. 문도 열지 않은 가게 거리를 지나 요새로 갔다.

 

 

 

구시가지의 건물들

 

 

 

 

 

요새로 가는 도중에 보는 요새 맞은 편의 마을 풍경

 

 

성녀 강탄 교회

 

 

 

전통적인 옛 건물

 

 

 제법 긴 길을 걸어서 요새에 도착했다.

 

 중세 불가리아의 도시는 언덕에 지어진 요새와 산기슭에 펼쳐진 주거 지역 및 상점들로 구성되었다. 요새는 천험의 땅에 건설되었고, 그러한 도시의 요새와 거주지의 구조는 수도 투르노보를 기반으로 하였다. 핵심적인 요새인 투르노보는 마을 전체가 성벽으로 둘러 싸여 있었고, 언덕에는 요새와 요새화한 수도원이 세워졌다. 가장 높은 곳에 차레베츠 요새가 구축되었고 내부에는 궁전, 수좌주교구 교회, 귀족들과 그들의 하인들의 거주구들이 세워져 있었다. 도시 거주민은 다양하였으며, 하층민들은 요새 밖 얀트라 강둑에 거주하였다. 벨리코 투르노보에 있는 차베레츠 언덕은 트라키아인과 로마인들의 정착지로, 비잔틴시대인 5세기와 7세기 사이에 이 언덕 위에 처음 요새가 건립되었다. 요새는 8세기와 10세기에 불가리아와 슬라브인들에 의해 재건축되었으며, 12세기 초 비잔티움제국에 의해 다시 요새화되었다. 불가리아 제 2왕정 때 최고의 부흥기를 맞이하였으나, 1393년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점령되어 파괴되어 폐허가 되었다. 지금의 모습은 불가리아 건국 1,300주년을 맞이하여 1930년부터 1981년까지 복원한 모습이다.

 

 현재는 400개 이상의 주택, 18개의 교회, 여러 개의 수도원, 상점, 성문과 타워 등이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요새의 벽을 따라가다 보면 이러한 유적들을 볼 수 있다.

 

 이 요새는 밤이 되면 불가리아의 주요 역사를 빛과 소리로 표현하는 레이저 쇼가 펼쳐진다고 하는데 보지를 못했다.

 

 

요새의 전경 - 맨 위에 성당이 보인다.

 

 

 

차레베츠 요새(Tsarevets Fortress) 입구

 

 많은 사람들이 이 요새를 보기 위해 북적거렸다. 또 우리나라와 같은 체험학습인지 봄소풍인지 모르겠으나 초,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많은 학생들이 교사의 인솔을 받으며 이 요새로 가고 있었다. 요새를 돌아보는 도중에도 이 학생들과 자주 만나게 되었는데 교사들이 이 요새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었다.

 

 

입구에서 보는 요새

 

 

 

 

요새로 들어가는 입구

 

 천험의 요새라 이 입구만 방어를 잘 하면 요새로 들어 갈 수가 없다. 이 입구를 제외하고는 절벽과 강으로 둘러 싸여 있는 곳이다. 제 2차 불가리아 제국 시절에는 도개교로 만들어 요새 안으로 진입을 방어하였다.

 

 

요새 맞은편 마을

 

 

 

 

요새의 여러 모습

 

 

 

 

요새에서 보는 요새 밖의 마을

 

 

 

종들

 

 

 

 

요새의 성벽

 

 

 

 

 

 

요새의 맨 위에 있는 성모 승천 대주교 성당

 

 이 성당은 11-12 세기에 지어졌는데 역시 1393년에 소실되었다. 지금은 완전히 복원되어 요새 안에서 가장 완전한 건물로 남아 있다.

 

 

 

내부의 성화

 

 

 

요새에서 보는 구시가지쪽 풍경

 

 

 

요새의 여러 유적

 

 

 

요새 성벽

 

 

 

 

요새 망루의 내부

 

 

 

 

망루에서 보는 요새 밖의 트라페지차 마을 풍경 - 얀트라강이 굽어 흐른다.

 

 

요새 밖 마을의 방어용 요새

 

 요새를 한 바퀴 돌아보고 나서 요새에서 보이는 요새 밖의 마을로 갔다. 강을 사이에 두고 요새와 거리를 두고 있는 요새 밖 마을은 외적의 침입에서 일차적인 방어용 기지의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이었다. 강 주변에는 옛날의 방어용 진지같은 것이 많이 보였다. 강을 건너오는 적을 막기 위해서 일반 평민들이 살고 있는 곳이다.

 

 

 

요새 밖 마을과 요새를 연결해 주는 현재의 다리

 

 

 

 

조금 위에 있는 옛 다리

 

 

요새 밖에서 보는 요새

 

 

 

요새 밖 마을의 모습

 

 요새와 요새밖 마을을 구경하고 아침에 왔던 길을 다시 돌아 간다. 가면서 보니 아침에는 문을 열지 않았던 공방들이 모두 문을 열고 기념품을 팔고 있다. 공방에서는 직접 장인들이 여러 수제품의 공예품을 만들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이 거리가 사모보드스카 차르시아라는 거리다.

 

 사모보드스카 차르시아는 전통 가옥이 즐비한 라코브스키 거리(Rakovski St.)에서 게오르기 키르코브 광장(pl. Georgi Kirkov)까지 이어지는 공예방 거리다. 차르시아는 불가리아여로 시장을 의미한다. 라코브스키 거리 양옆으로 상점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데, 한적하게 산책하며 둘러보기 좋다. 입구에는 거리의 지도가 붙어 있다. 장인이 직접 운영하는 작은 공방이 대부분으로 주얼리 아티스트, 유리작가, 금속공예가, 도예가, 화가 등 다양한 분야의 장인들이 직접 작품 활동을 하며 상점을 운영하고 있기에 작업 과정을 볼 수 있다. 품질은 보장할 수 있다지만 가격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장인이 직접 작업하고 있는 모습

 

 

여러 목공예품

 

 

 

 

사모보드스카 차르시아 거리

 

 

 

다시 보는 아센기념비와 미술관

 

 얀트라강이 U자 모양으로 휘감고 지나가는 곳에 물돌이 섬처럼 남겨진 땅에 1985년에 아센기념비가 세워졌다. 제 2차 불가리아제국은 이반 아센 2세를 거치면서 최전성기를 누리며 번창했다. 이를 기념하여 800주년이 되는 해에 기념비를 세웠다. 중앙의 칼은 제 2차 불가리아 제국의 힘과 번영을 상징한다고 한다.

 

 기념비 뒤에 있는 미술관은 벨리코 투르노보에서 가장 상징적이고 아름다운 건물로 꼽힌다. 1934년에 개관라였으며 불가리아 예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벨리코 투르노보를 하루 종일 걸어다니멱 구경을 하고 나니 이제 좀 피곤하였다. 벌서 여행을 시작한 지가 한 달이 지났고 앞으로도 한 열흘은 더 다녀야 하는데 이제 제법 피로가 쌓인 것 같다. 이럴 대는 휴식이 최고다. 일찍 저녁을 먹고 숙소에서 가볍게 맥주를 한 잔하고 잠자리로 향한다. 내일은 다시 소피아로 갈 예정이다.

마음대로 가는 발칸 여행 -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발칸의 파리 부쿠레슈티

 

 아침에 일어나 일찍이 이동을 준비한다. 오늘은 부쿠레슈티로 이동을 해야 한다.

 

 아침을 먹고 브라쇼브역으로 가서 부쿠레슈티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약 3시간이 걸려서 부쿠레슈티에 도착했다. 브라쇼브에서 부쿠레슈티로 오는 도중에 보는 산에 눈이 쌓여 있는 설국의 경치가 펼쳐졌다. 이제 4월말로 5월이 다 되어가는 계절인데 아직 눈을 구경하며 기차로 이동했다.

 

 부쿠레슈티(Bucharest)는 인구가 이백 만이 넘는 큰 도시로, 루마니아 남부 루마니아 평야의 중앙부에 위치하며, 도나우 강의 지류인 딤보비차 강이 시내를 흐른다. 지명은 '환락의 도시, 즐거운 도시'라는 뜻이다. 일설에는 부쿠르(Bucur)라는 양을 사육한 데서 지명이 나왔다고도 한다. 고고학적인 발견으로는 오래된 도시임이 확인되고 있으나, 이곳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1459년에 루마니아 공국의 블라드 체페슈가 요새를 만들었을 때로 되어 있다. 그 후 왈라키아 지방의 중심지로서 발전하였으며, 17세기부터는 루마니아 공국의 수도가 되었다. 1862년에는 통일 루마니아 왕국의 수도가 되어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 이후 부쿠레슈티는 급속도로 성장, 동쪽의 파리라는 별칭을 얻었다. 발칸 반도의 교통의 최대 중심지이며, 주변의 여러 나라와 국제철도로 연결되어 있다. 2차 세계 대전 전에는 경공업이 중심 산업이었으나, 후에는 기계, 차량 등의 중공업이 발달하였다. 풍부한 석유와 천연 가스를 바탕으로 대단위 공업 단지가 건설되어 있다. 루마니아의 교육과 문화의 중심지며, 시내에는 공원과 녹지대가 많은데 북부의 8개 호수를 이용하여 만든 헤라스트라우 공원은 스포츠와 레저에 이용된다.

 

 부쿠레슈티에 오래 머물지 않고 다른 곳으로 이동을 예정하였기에 역에서 불가리아의 벨리코 투르노보로 가는 기차표를 알아 보고 숙소에 짐을 풀고 시내로 갔다.

 

 부쿠레슈티 북역은 부쿠레슈티의 중앙역 역할을 하는 곳으로 국내 외의 많은 열차들이 이 곳에서 출발하고, 도착한다. 역안에는 온갖 편의 시설이 다 갖추어져 있고, 매우 번잡하다.

 

 

루마니아 음악당

 

 

 

 

부쿠레슈티 북역

 

 

 

 

북역 안의 여러 편의 시설들

 

 부쿠레슈티 시내는 아주 오래 된 옛 건물들은 찾아 볼 수가 없다. 비교적 근대에 만들어진 도시이기 때문에 오래 되었다고 해도 이백 년이 되지 않는 건물들이다. 더구나 차우셰스크의 독재정권으로 인하여 회색 빛의 도시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이제는 그 흔적마저도 관광자원이 되어 수 많은 광광객을 이끌고 있다.

 

 부쿠레슈크 여행에는 다른 것은 필요가 없다. 그저 거리를 걸어가면서 도심 속에 살아 숨쉬는 장소를 즐기면 된다. 버스에서 내려서 정해진 목적지도 없이 그냥 거리를 걸어다니며 구경을 했다.

 

 

 

 

무슨 건물인지 모르나 그냥 멋있게 보여서.....

 

 부쿠레슈티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는 Celea Victoriei(Victory Avenue)다. 이 거리를 중심으로 부쿠레슈티의 볼거리가 밀접해 있다. 이 거리는 전해지기로 1814년부터 밤에도 촛불을 밝혀서 오늘날의 가로등과 조명으로 시가지를 밝혔다고 한다. 이 거리는 1692년에 벌써 나무로 길을 깔아 진흙탕 길을 벗어났다고 하는 거리다. 그러다가 나무 길이 너무 빨리 파손되었으므로 1842년에는 돌로 길을 만들었다가 지금은 아스팔트로 포장되었다. 이 주변의 옛 건물들은 지금은 은행이나, 식당, 호텔 그리고 전 세계의 유명 브랜드의 상품을 판매하는 쇼핑타운으로 변모해 현재 부쿠레슈티의 가장 번화한 거리로 바뀌었다.

 

 

 빅토리에이 거리 남단에 있는 루마니아 국립 역사박물관(National Museum of Romanian History)60개의 전시실이 있다. 주요 전시물은 루마니아 지역에서 인류가 살기 시작한 60만 년 전의 유물을 비롯해 기원전 1세기 경에 형성된 다치아 왕국 시대, 중세 이후 오스만 투르크와의 투쟁 시기, 20세기 이후 사회주의 시기의 유물과 역사적 자료 및 예술 작품 등이다 1900 건축가 알렉산드루 사불레스쿠(Alexandru Savulescu)가 중앙우체국으로 설계한 것으로 1960년대까지 중앙우체국으로 사용되다가 1970년 역사박물관으로 바뀌었다. 국립 역사박물관이 세워질 당시 루마니아는 소련으로부터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외교 노선을 천명하면서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려던 시기로 루마니아 정부는 이 같은 취지로 국립 박물관을 수도에 세웠다.

 

 

국립 역사박물관 입구에 로마신화에 나오는 늑대를 안고 서 있는 동상

 

 루마니아라는 이름이 로마인들이 살던 곳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래서 로마의 신화를 형상화한 동상이 있다.

  

 

입구의 조각

 

 

 

 

루마니아 국립 역사박물관

 

 Caru' cu Bere라는 루마니아식당이 유명하다기에 이 식당을 찾아 갔다. 레스토랑이 매우 컸는데 사람들이 북적거라고 있어 자리가 없었다. 웨이트가 오래 기다려야 한다고 해서 이곳에서 식사를 못하고 그냥 나왔다.

 

 

 

Caru' cu Bere라는 루마니아식당

 

 

 

Caru' cu Bere라는 루마니아식당 간판

 

 

 

 

 

 

너무 아름다운 CEC Bank 건물

 

 이 건물은 프랑스의 건축가 폴 고테르(Paul Gottereau)에 의해 설계된 건물로 부쿠레슈티의 바로크양식의 건물 중에 가장 아름다운 건물이라고 한다. 지금 국책은행이라고 한다.

 

 

시내 중심가 Celea Victoriei(Victory Avenue) 이정표

 

 

 

Biserica Zlatari 정교회당

 

 

 

 

 

쇼핑가의 입구 - 장엄한 문 위에 좌우로 조각상이 서 있다.

 

 

 

 

쇼핑가

 

 

웅장하게 보이는 이 건물은 사실은 Cercul Militar National이라는 식당이다.

 

 

 

Hotel Capitol 건물

 

 

건물 이름이?????

 

 원어명 Piata Revolutiei인 혁명광장은 부쿠레슈티 빅토리에이 거리 남쪽에 있는 광장으로, 독재자 차우셰스쿠에 저항하여 198912월 혁명이 일어났던 곳이다. 처음에는 1939년에 화재와 혹시 있을지 모르는 폭동에 왕궁을 보호하기 위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왕궁 광장', 공산정권 시절에는 '공화국 광장'이라고 불렸으며, 1989년 혁명 이후 '혁명광장'이라고 불리고 있다.

 

 광장 주변의 석조 건물에는 지금도 탄흔이 선명하게 남아 격렬했던 순간들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시위 장면은 국영 텔레비전을 통해 루마니아 전역에 방송되었고 후에는 전 세계에 방송되어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25m 높이의 삼각형 조형물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데, 1989년 당시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한 혁명 기념비이다.

 

 

 

 

혁명광장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비

 

 크레출레스쿠교회(Kretzulescu Church)는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에 소재하는 루마니아정교회에 속하는 독립교회로 빅토리에 거리에 위치한 18세기 교회이다. 대법관이었던 이오르다케 크레출레스쿠(Iordache Kretzulescu)와 그의 아내 사프타(Safta)가 세웠고 루마니아의 유명한 화가 게로게 타타레스쿠(Gheroghe Tattarescu)가 내부 벽화를 그렸다. 1720부터 1722년 사이에 건물이 세워졌지만, 내부의 벽화는 그보다 100여 년 뒤인 1859년부터 1860 사이에 그려졌다. 내부의 프레스코화는 웅장하면서도 위언이 있다. 교회 앞에 서 있는 흉상은 반공산주의 운동을 한 루마니아의 정치가 Corneliu Coposu 이다.

 

 

 

크레출레스쿠 교회

 

 부쿠레슈티 국립미술관 (Muzeul National de Arta Bucuresti) 은 루마니아에서 가장 큰 미술관으로 부쿠레슈티에 있는 옛 왕궁을 개조한 것이다. 원래는 1812년 상인 디누쿠 골레스쿠(Dinucu Golescu)의 저택이었는데 그 아들이 건물을 팔았고, 대대적인 확장공사를 거쳐 1859년 왕궁으로 쓰게 되었다. 이 건물이 미술관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48년부터이며, 주로 루마니아 중세와 현대 미술가들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또한 모네, 엘 그레코, 틴토레토, 루벤스, 렘브란트 등 다른 나라 대가들의 작품도 일부 소장하고 있다. 한때 왕궁으로 쓰였던 만큼 외관도 웅장하고 화려하지만 혁명광장 서북쪽 모퉁이에 위치해 있어 1989년 혁명 때 심각한 손상을 입게 되었다. 이후 보수에 오랜 시일이 걸려 일부 전시실은 2002년에야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루마니아 국립미술관

 

 국립미술관과 마주 보는 부쿠레슈티대학 도서관 앞에는 청동 기마상이 있다.

 

 

루마니아 초대 왕 카롤 1세 기마상

 

 루마니아 음악당은 고대 그리스 신전을 보는 듯하다. 이 음악당은 1888년에 세워졌는데당시 대중들의 기부로 지어졌다고 한다. 음악당 앞의 정원에는 루마니아의 유명한 시인 Mihai Eminescu의 동상이 있다. 내부 벽면의 프레스코는 루마니아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담고 있다고 하는데 들어가 보지 못했다

 

 

 

 

루마니아 음악당

 

 부쿠레슈티를 지나가는 한 도시로 생각하고 시간의 여유를 가지지 않은 것이 참으로 잘못임을 시내를 돌아보면서 느꼈다. 아주 오래된 고대의 도시는 아니지만 발칸의 파리라 일컬을 만큼 아름다운 도시라는 것을 알았다. 거리를 걸어가면서 보는 건물들은 하나도 그냥 지나치기가 아쉽운 생각이 들었고, 아름다운 거리도 한가로이 거닐며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 정해진 시간에 부쿠레슈티를 구경하고 떠나야만 하는 안타까움이 자꾸 마은을 아프게 한다. 이 부쿠레슈티를 떠나면서 언젠가는 다시 시간의 여유를 가지고 이 도시에 와서 도시의 진면목을 즐기리라 생각하였다.

 

 아쉽지만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든다. 내일은 하루 종일을 이동해야 하는 여정이라 좀 피곤한 일정이다.

 

 

여행도 이제 막바지에 다가가니 몸도 피로도가 쌓인 것 같다.

 

마음대로 가는 발칸 여행 - 루마니아, 브라쇼브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중세가 살아 있는 브라쇼브

 

 드라큘라성을 다녀 와서 브라쇼브 시내를 구경하러 나갔다. 브라쇼브에 몇 일을 머물면서 아직 브라쇼브를 보지 않아서 시내를 나갔다.

 

 브라쇼브(Brasov)는 루마니아 브라쇼브 현의 현도로 트란실바니아 지방의 중심이 되는 공업 도시이다. 카르파티아산맥 기슭에 있으며, 교통의 요충지로 트랙터와 각종기계공업이 번성하고 인구는 약 삼십 만 명 정도이다1385~1425년 고딕 풍의 교회가 있으며 중세의 분위기를 가진 오래된 집들이 남아 있다. 공과대학, 국립오페라극장 등이 있으며, 1415세기에 건립된 고딕 양식의 ‘검은교회’가 유명하다.

 13세기에 독일 이주민이 건설한 이래로 시는 옛 시내의 시청사와 검은교회를 중심으로 발전하여 루마니아인은 오랫동안 시내 거주가 허용되지 않았다. 18세기 이후 시외에 살고 있던 루마니아인이 세력을 확장하여 차츰 옛 시내에서의 영업권과 거주권을 획득하여 19세기에는 루마니아인의 교육·문화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브라쇼브는 루마니아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어 근교 여행의 기점이 된다. 아일랜드 작가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로 유명한 브란 성이나 시기쇼아라, 시나이아 등을 다녀오기가 편하다.

 

 브라쇼브 구시가지를 구경하기 위해 버스를 타고 가서 우리나라의 버스 환승센타 같은 Livada Postei에 내려서 구시가지를 걸어 갔다. 브라쇼브 구시가지는 크지 않기 때문에 한가로이 걸어 다니면서 구경해도 한나절이면 충분하다. 급할 것도 없는 여행이라 한가로이 이곳 저곳을 다니며 구경을 하였다.

 

 먼저 간 곳이 스파톨루이 광장이다 이 광장 주변에는 구경할 여러 곳이 모여 있다.

 

 

브라쇼브의 상징 검은교회

 

 

무슨 건물인지 기억이?????

 

  원어명이 Muzeul de Istorie인 브라쇼브 역사 박물관(Brasov History Museum)은 브라쇼브 지역 역사에 관한 자료를 주로 전시한다. 브라쇼브는 원래 독일인이 세운 도시로  교통의 요지에 자리를 잡고 있어 오스만 투르크, 합스부르크 가문 등으로부터 여러 차례 침략을 받기도 했다. 브라쇼브 역사 박물관은 이처럼 독특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브라쇼브 지역의 전통을 보존하고 알리자는 취지에서 세워졌다. 박물관이 전시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는 투박해 보이는 상아색의 건물은 1420년 지어진 시청 건물로 시청 건물 외에 직공의 요새(The Weaver's Bastion)와 시계탑으로 이루어져 있다. 직공의 요새는 브라쇼브 내 상인과 수공업자 길드에서 세운 8개 요새 중 하나였는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곳이다. 박물관 옆에는 거대한 높이의 시계탑이 붙어 있다. 사방에서 시계를 볼 수 있도록 설계된 시계탑은 1494년 외세에 맞서기 위해 만든 망루로 1689년 대화재 이후 개축된 모습이다. 탑 내부에 전쟁과 관련된 무기 등을 전시하고 있다.

 17개 전시실에서 구석기, 청동기 시대의 무기와 농기구부터 19세기의 베틀 등 3,000여 점의 유물을 전시한다. 16세기 트란실바니아풍 르네상스 양식으로 꾸며진 상인들의 방에서는 색슨족 지배 당시 유물을 볼 수 있다. 주요 전시물은 오랫동안 외세의 침략을 받은 도시의 박물관답게 중세시대의 갑옷과 창 등 전쟁 관련 자료가 많이 전시돼 있다.

 

 

스파툴루이 광장 구시청사(역사박물관)

 

 

구시청사 시계탑

 

 

루마니아 정교회 대성당

 

 

탐파산의 브라쇼브 간판

 

 미국의 할리우드를 모방하여 브라쇼브라는 입간판을 세웠는데, 브라쇼브 주민들은 탐탇하지 않게 생각한다고 한다. 브라쇼브 구시가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케이블카가 운행되고 있으니 타고 올라가면 된다.

 

 

시내의 풍경

 

 브라쇼브 도시 중앙 광장에 있는 '검은 교회(Black Church)'는 원래 로마 가톨릭 대성당이었는데, 16세기에 트란실바니아의 위대한 종교 개혁가 요한네스 혼테루스에 의해 루터파 교회로 바뀌었다. 1385년 착공해 1477년 완공까지 100여 년이 걸린 브라쇼브의 상징적인 건축물로 1689년 합스부르크의 공격으로 인한 화재로 검게 타버린 외관 때문에 이름 붙여진 루마니아에서 가장 큰 독일식 고딕양식의 교회이다. 화재 후 재건에 100여 년이 걸렸으며, 재건 과정에서 65.5m의 거대한 탑 2개가 만들어졌고 탑 속에는 6,300kg짜리 종 3개가 있다. 1839년 총 4,000개의 튜브 관이 있는 남동 유럽에서 가장 큰 오르간이 만들어졌고 현재도 음악회에 사용된다.

 '검은 교회'의 길이는 약 88m가량으로, 남쪽 현관에 있는 1477년에 제작된 오크 나무 문, 1472년에 기증된 이 지역에서 세공한 청동 분수, 1476년에 그려진 남쪽 입구 부분의 벽화 등은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 감상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검은 교회'가 소유한 가장 가치 있는 보물은 총 119개의 아나톨리아(소아시아, 오늘날의 터키 부분) 카펫 컬렉션이다. 17-8 세기에 독일 상인들이 험준한 카르파티아산맥을 넘어 무사히 도착함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기부한 카펫인데, 이 카펫을 보호하기 위해 높은 창문에는 특별한 유리가 설치되어 자연광만을 들여보냄으로써 이 카펫들이 태양 자외선에 손상을 입지 않도록 막아 준다. 그리고 사진촬영은 엄격히 금지한다.

 

 

 

검은교회

 

 

 

무늬가 아름다운 문

 

 교회 옆에 서 있는 '요하네스 혼테루스(Johannes Honterus, 1498~1549))'의 동상이다. Vienna 대학을 졸업한 혼테루스는 이 지역에서 종교개혁을 주도하고 이 곳에서 일생을 마친 '트란실바니아의 사도였다. 인도주의자이며 신학자로 선교활동과 교육에 큰 공헌을 하였으며 1535년에는 이곳에 트란실바니아 최초의 인쇄소를 세웠다.

 

 "지금 주님께서 새로운 민족을 눈뜨게 해 그분 앞으로 부르실 때가 왔도다."

 요하네스 혼테루스, 트란실바니아의 종교 개혁에서

 

 

종교 개혁가 Johannes Honterus의 동상

 

 

 

검은교회 시계탑의 아름다운 모습

 

시나고그는 유대인들의 회당을 지칭한다. 브라쇼브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있었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1940년 경에는 약 6,000명 정도가 있었으며 2차 세계대전 중에도 수용소로 보내지지 않고 비교적 안전하게 생활했으나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못하는 등 괄시를 받았다고 한다. 현재의 시나고그는 2001년에 복원한 모습이다.

 

 

 

시나고그

 

 신 고전주의 양식의 슈케이문은 1827년부터 1828년에 구시가지와 외곽 마을을 연결하기 위해 세워졌다. 3개의 아치로 된 문의 중앙아치 밑으로는 현재 자동차가 다니고 그 옆의 두 개의 아치는 보행자들이 다닌다.

 

 

 

슈케이문

 

 

마을의 성벽 길

 

캐서린 문은 중세시대 4 개의 성문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문이다. 1526년 홍수에 파괴된 문을 대신하여 1559년에 세운 문으로, 이곳에 있던 성 캐서린 수도원 이름을 따서 붙였다고 한다. 독일인들은 루마니아인들을 구시가지에 정착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성문 출입도 금하였다고 한다. 19세기에 와서 루마니아인들의 출입을 허락하면서 만든 문이 슈케이 문이라고 한다.

 

 

 

 

캐서린문

 

 

멀리 보이는 검은 교회

 

이 모든 중세의 유적들이 오밀조밀하게 붙어 있다. 그래서 무엇을 먼저 보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저 눈에 보이는 곳을 가서 보고 구경하면 된다. 여행객에게 참으로 편리한 곳이다.

 

흑색탑과 백색탑은 브라쇼브의 언덕에 있는 감시탑이다. 브라쇼브에 정착한 색슨족은 오스만투르크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성곽을 만들었다. 이 성곽의 유적들이 지금도 비교적 잘 보존되어 마을을 돌아보면 성벽 길이 많이 보여 중세로 우리를 이끌고 있다. 구시가지를 감싸고 흐르는 개울을 따라 산책로가 있고 다리를 건너면 15세기에 만들어진 흑색탑을 볼 수 있다. 흑색탑에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백색탑이 있다. 원래는 적의 침입을 감시하던 탑이었지만 지금은 브라쇼브의 전망대 역할을 하는 탑이다. 특히 흑색탑 우에서 보는 브라쇼브 구기가지는 붉은 지붕의 집들이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는 풍경이 동화의 한 마을같이 느껴진다.

 

 

 

 

흑색탑

 

 

브라쇼브 성곽 설명판

 

 

 

 

 

 

흑색탑에서 보는 시가지 모습

 

 

 

 

백색탑

 

 

거리의 벽화

 

 

 

  버스 환승센타 Livada Postei

 

 

 

브라쇼브를 한 바퀴 돌고 나니 어느 새 어둠이 몰려 오고 있다.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서 버스를 타는 곳으로 가니 브라쇼브의 모든 버스가 이곳에서 출발한다. 우리나라의 환승센터와 같은 곳이다. 넓은 광장에 노선 별로 표시를 해서 비교적 찾기가 편리했다. 숙소로 돌아와서 저녁을 먹고 가볍게 루마니아의 맥주로 하루의 피로를 달래고 잠자리에 든다.

 

 내일은 브라쇼브를 떠나 부쿠레슈티로 가야 한다. 제법 먼 거리를 기차로 이동해야 하기에 시간에 맞추어 움직이어야 한다.

 

마음대로 가는 발칸 여행 - 루마니아, 브란성(드라큘라성)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드라큘라로 더 유명한 브란 성

 

 브라쇼브에서 브란성은 거리는 크게 멀지는 않으나 교통편이 흔하지 않다. 아침을 먹고 Auto Gare 2에서 버스를 타고 약 한 시간이 걸려서 브란성에 도착했다. 아주 조그만 마을인데 이 브란성을 관광자원으로 해서 이 마을 사람들이 모두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 같다.

 

 브란성은 루마니아 브라쇼브 남서쪽 32km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흡혈귀 소설 '드라큘라'의 가상모델인 블라드 3세가 잠시 머물렀던 곳으로 '드라큘라의 성'으로 알려지면서 루마니아를 찾는 사람들에게는 동유럽 최고의 관광지가 되었다.

 

 1212년 독일 기사단의 요새로 만들어졌는데, 15~16세기에는 오스만 투르크로부터 헝가리 왕국을 지키는 관문이 되었다. 건물에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새로운 양식이 추가되어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등 다양한 양식이 결합되어 있다. 1920년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리 여왕이 소유하면서 대대적인 개조를 통해 요새로서의 모습이 사라지고 낭만적인 여름 궁전으로 바뀌었다. 그 뒤 공산 정궝하에서 우여곡절을 겪다가 2006년 합스부르크 왕가의 후손이 성의 소유권을 되찾았다.

 브란성은 처음에 방어용 요새였기 때문에 외관은 아주 단순하고 작은 성으로 보이지만 내부는 좁고 가파른 비밀 통로가 많으며 복잡하게 얽혀 있다.  

 

 

 

브란 성의 전경

 

 

 

성 내부의 뜰

 

4월 말경인데 눈이 와서 덮여 있다.

 

 

 

 

 

성으로 가는 길에서 보는 성의 모습

 

성안의 십자가

 

 

성으로 들어가는 입구

 

 

 

성 내부 - 마리 여왕의 초상

 

 

성안에서 보는 바깥 모습

 

 

 

 

성안의 침실과 공예품

 

 

미로같은 성안의 통로

 

 

성에서 보는 브란 마을

 

 

 

성의 가구

 

 

 

 

 

성안의 창문을 통해 보는 성의 부분들

 

 

 사실과 허구가 너무 얽혀 있으면 그 둘을 분간하기가 어려워 허구가 더 사실인양 인식될 때가 있다. 브란 성이 바로 그러하다. 장소와 인물의 관계가 매우 의심스러운 셔우드 숲이 로빈 후드의 거처로 알려진 것과 마찬가지로, 브란 성도 본래의 이름보다 현재 드라큘라의 성(Dracula’s Castle)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하다.

 

 브란성이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460년경 잠시 이 성에 머물렀던 것으로 추정되는, 왈라키아 공국의 군주 블라드 3세 바사라브(Vlad III Basarab) 때문에 드라큘라의 성으로 알려지면서 부터다. 블라드는 드라큘이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Dracul)’이라는 작위를 받은 그의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생각해 자신의 이름을 블라드 드라큘이라고도 했다고 한다. 그는 재위기간에 적과 범죄자를 가혹하게 다뤄 악명을 떨쳤는데, 1897년 아일랜드 작가 브램 스토커가 '찔러 죽이는 자 블라드'라는 별명으로 더욱 유명한 블라드 체페슈(체페슈는 루마니아어로 꼬챙이를 뜻하는데 전쟁 포로나 범법자를 긴 꼬챙이로 잔인하게 처형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로부터 영감을 받아 쓴 흡혈귀 소설 드라큘라를 쓰면서 블라드 3세를 가상모델로 삼았다. 이처럼 소설의 모델이 될 정도로 잔혹한 인물로 알려져 있으나 루마니아 역사에서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군대를 물리친 용장으로 유명하다.

 

 이후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는 소설은 물론 영화, 드라마에까지 등장하면서 전 세계에 유명세를 떨쳤고, 루마니아인들의 영웅이었던 블라드 드라큘라는 역사적 사실과 무관하게 스토커의 드라큘라와 동일시되고, 브란 성은 드라큘라가 실존했던 증거인 양 관심을 모았지만 흡혈귀 전설에 어울리는 음습한 공간이라기보다는 동화 속에 나오는 낭만적인 성에 가까운 모습이다.

 

 블라드와 이 성의 관계는 아무리 연관 지어 보려 해도 아주 희박할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불명확한 관계에도, 이 성의 압도적인 외관이 무시무시한 전설에 어울리는 매력적인 배경이라고 생각하는 관광객들이나 기념품 판매인들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왈라키아 공국의 군주 블라드 3세 바사라브의 초상

 

 

왈라키아 공국의 군주 블라드 3세 바사라브의 가계도

 

 

브램 스토커의 작품 '드라큘라'에 대해서

 

 내가 이 성을 들어가면서 말을 했다. 루마니아 정부는 브램 스토커에게 훈장이라도 주어야 한다고. 어찌되었던 이 한적한 시골마을을 전 세계에 알려서 관광객들이 몰려 와서 돈을 쓰고 가게 만들었다. 입장료만 해도 무시하지 못할 수입이며, 기념품이나 관광 비용만 해도 적지 않은 돈이다. 나는 기념품은 사지 않는 것이 여행의 철칙이라서 아무 것도 사지 않았지만 마을의 레스토랑에 들러 점심을 먹엇다. 그 비용만 해도 하루에도 엄청난 수입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성안에 들어와 보니 이와 같이 '드라큘라'를 기념하는 곳도 있었고, 브램 스토커를 영예롭게 기념하고 있었다.

 

 

 

왕관 등 소장품

 

 

왕가의 문장인데 사진이 좀.....

 

 

 

 

여러 병장기의 전시

 

 

 

 성을 한 바퀴 돌면서 구경하고 1층으로 내려 오면 이 같은 무시무시한 모습을 본다. 옛날에 고문을 하던 장소로 나무 갑옷 모양의 고문기구이다.

 

 

 

 

성 안의 자그마한 뜰에 있는 우물 : 문양이 너무 좋다.

 

 

 

 

 

우물 곁에 있는 도구 - 아마 고문용 도구인 듯??

 

 

 

 

 

성안 정원의 연못

 

 

 

기념품 가게의 관광객들

 

 

매표소 입구

 

성에서 보는 브란 마을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성 빆의 마을

 

 드라큘라의 모델이 블라드 공이라는 사실에 대해, 현지에서는 두 가지 상반된 입장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관광에 이용할 수 있다고 좋아하는 이들도 있는 반면, 조국의 영웅을 괴물 취급하는 것에 대해 불쾌해 하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하여튼 지금도 전 세계의 관광객들은 어릴 때 누구나 한번은 영화로든 소설로든 보았을 드라큘라라는 이름에 대한 향수와 추억과 낭만을 꿈꾸며 찾아온다.

 브란성이라는 이름으로 찾아 오는 사란은 드물다.

 

 이 드라큘라성을 나오며 나는 방명록에 '드라큘라 만세'라고 적었다. 이유는 살아서는 조국을 외적의 침입에서 지켰고, 죽어서는 관광객을 끌어 모아서 주변의 살마들을 먹여 살리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대로 가는 발칸 여행 - 루마니아, 시기쇼아라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중세 요새도시 시기쇼아라

 

 브라쇼브에 짐을 부리고 근처를 여러 곳 다녀오기로 계획을 하고 아침에 일찍부터 서둘러 시기쇼아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약 3시간이 걸려 시기쇼아라역에 도착했다. 이번 발칸 여행에서 기차를 탈 때마다 느끼는 것은 우리나라의 기차가 참 편리하다는 것이다. 속도면에서만 아니라 열차의 성능이나 내부시설이 너무나 뒤떨어져 있는 곳이 발칸이다. 하지만 이것도 습관이 되어선지 이제는 그러려니 하면서 기차를 타고 다닌다.

 

 트란실바니아 중심부의 고원 위에 발달되어 있는 시기쇼아라는 인구 약 30,000 명 정도의 작은 도시로, 트르나바(Trnava) 강의 굽이진 부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이 주를 이루고 있다. 트란실바니아는 11세기에 헝가리 왕국의 영토가 되었는데, 12세기에 헝가리 왕국은 이 지역의 방어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독일계의 장인들과 상인들을 이주시켰는데, 이곳으로 이주해온 장인과 상인들은 작센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 작센 인들은 1191년에 시기쇼아라 시를 세웠다. 13세기에 독일의 장인과 상인들은 헝가리 군주들로부터 트란실바니아를 정복하고  지킬 것을 명령받았다. 이들은 구석기 시대의 흔적이 남아 있던 시티 힐(City Hill, 언덕 위의 도시)’정착했으며, 1280년에 라틴어로 카스트룸 섹스(Castrum Sex  :  작센인이 트란실바니아지방에 세운 7개의 성채도시 가운데 여섯 번째라는 뜻)로 알려진 이 도시는 장인들의 강력한 길드(guild) 덕분에 상업 활동에 활기를 띠었고 각 길드는 탑을 건설해 방어를 책임졌다.

 

 1999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유산으로 선정된 시기쇼아라 역사 지구가 있으며 블라드 체페슈가 태어난 곳으로 유명한 도시이다.

 

 평범한 고원 위의 작은 요새 도시는 낡은 듯하면서도 작고 알록달록한 색색의 작은 집들, 돌길, 창문에 꽃들로 장식된 소소한 풍경은 한폭의 그림처럼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게 만드는 도시이다.

 

 역에서 내려 천천히 걸으면서 역사지구로 발을 옮겼다. 시기쇼아라의 신시가지는 별로 볼 것이 없고 역사지구에 대부분이 모여 있다. 시간이 많으면 차분히 신시가지도 구경하겠으나 한정된 시간이라 보고 싶은 것만 보기로 했다.

 

 

시기쇼아라 시계탑

 

 

트르나바강과 멀리 보이는 역사지구

 

 

트르나바강 건너편에 보이는 역사지구

 

 중세 성채 도시의 외관이 잘 보존되어 있어서 루마니아의 보석이라고도 불리는 시기쇼아라 역사 지구(Historic Centre of Sighişoara)가파르게 경사진 고원 전체에 넓게 퍼져 요새화된 유적으로 이루어졌고, ‘시티 힐과 그 아래로 숲이 우거진 경사가 있는 저지대 도시가 주를 이룬다.

 

 시기쇼아라 역사지구는 수공업자와 상인이 중심이 되어 세운 도시로, 외부 침략으로부터 자체 방어가 가능한 요새도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성채 주변에 도시를 방어하기 위한 14개의 탑을 세웠는데, 현재 9개가 남아 있다. 각 탑들은 도시의 수공업자나 상인 조합의 길드에서 세우고 그 길드의 이름을 붙여서 불렀다. 때문에 재단사의 탑, 모피상의 탑, 제화업자의 탑 등등의 흥미로운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시기쇼아라의 남아있는 건축물 중 도시가 자치권을 얻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 14세기 후반에 세워진 남쪽 요새 벽 중앙에 있는 인상적인 시계탑은 이 도시의 상징으로서 역사지구에 있는 세 광장을 모두 차지하고 있으며, 위쪽 도시와 아래쪽 도시를 연결하는 계단을 보호하고 있다. 이제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 외 성벽 남쪽의 산상교회와 그곳으로 올라가는 목조 계단 등도 관광 명소로 유명하다. 

 시기쇼아라에 있는 14세기 시계탑은 시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건물로 도시의 관문을 지키는 망루 역할을 함과 동시에 시의회 건물로 사용되었다. 도시를 대표하는 탑답게 눈에 띄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애초 30m 높이였으나 16세기에 현재와 같은 64m 높이로 증축되었다. 1676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이듬해 재건되었고 이후에도 몇 차례 수리를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탑에 시계가 장착된 것은 1604년이다. 처음에는 나무로 만든 시계를 설치했다가 1648년에 금속 시계로 교체했다. 시계 옆 벽감에 있는 나무 상들도 흥미롭다. 요새를 향하고 있는 벽에는 올리브 가지를 든 평화의 신, 칼과 저울을 든 정의의 신이 시간을 나타낸다. 그 옆의 두 천사는 일의 시작과 끝을 나타내는데 오전 6시와 오후 6시마다 바뀐다고 한다. 도시를 향하고 있는 벽에는 요일을 나타내는 행성의 신들이 날짜에 따라 움직인다. 시계탑 내부는 1899년부터 트란실바니아 지역 상업발전 과정을 보여주는 역사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시계탑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보는 시계탑

 

 

 

 

 

여러 방향에서 보는 시계탑

 

 

 

시계탑 상층부의 아름다운 모습

 

 

 

 

시계탑에서 보는 시기쇼아라와 시내와 역사지구

 

 

역사지구의 아름다운 건물들

 

사진의 왼쪽에 보이는 탑이 양철공의 탑이다.

 

 

 

 

 

 

 

 

시계탑박물관 소장 유물

 

 

 

시기쇼아라 옛 역사지구 모형

 

 

 

제화공 탑

 

 

역사지구의 일반 주택가

 

 

 재단사의 탑(The Taylors' Tower) 시기쇼아라 역사지구의 입구 역할을 하는 망루로 재단사 길드에서 세운 탑이다. 재단사 조합은 시기쇼아라에서도 가장 돈이 많은 길드여서 재단사의 탑은 디자인은 단순하지만 규모는 큰 편이다. 14세기에 처음 세웠을 때는 도시의 상징물인 시계탑과 같은 높이였는데, 1676년 근처의 화약저장고에서 폭발이 일어나 상층부가 파괴되었다고 한다. 망루 아래는 아치형으로 뚫려 있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재단사의 팁

 

 

이정표

 

 

 

 

모피상의 탑과 푸줏간의 탑

 

 

 

 

 

여러 탑의 모습

 

 시기쇼아라의 9개의 탑을 모두 돌아보려고 했으나 길을 막아 놓은 곳이 많아 다 보지를 못하고 멀리서 사진만 찍은 탑도 있다. 다소 아쉽게 생각이 들었으나 이 정도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또 드라큘라백작의 탄생지가 있었으나 어떤 역사적인 유적도 아니고 그저 상술로 만들어 놓은 듯 해서 그냥 지나쳤다. 내일은 바로 드라큘라로 유명한 브란성을 직접 갈 예정이어서 별로 흥미가 없었다.

 브라쇼브에서 다소 거리가 멀고 교통편이 그렇게 좋은 곳이 아니기에 주마간산식으로 구경을 하고 점심을 먹고 하니 어느 새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브라쇼브역에 도착하니 벌써 저녁도 늦은 시간이다.

 

 내일도 브라쇼브를 떠나 브란성으로 가야겠기에 서둘러 저녁을 먹고 잠을 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