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鶴)의 오딧세이(Odyssey)

마음대로 가는 발칸 여행 -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발칸의 파리 부쿠레슈티

 

 아침에 일어나 일찍이 이동을 준비한다. 오늘은 부쿠레슈티로 이동을 해야 한다.

 

 아침을 먹고 브라쇼브역으로 가서 부쿠레슈티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약 3시간이 걸려서 부쿠레슈티에 도착했다. 브라쇼브에서 부쿠레슈티로 오는 도중에 보는 산에 눈이 쌓여 있는 설국의 경치가 펼쳐졌다. 이제 4월말로 5월이 다 되어가는 계절인데 아직 눈을 구경하며 기차로 이동했다.

 

 부쿠레슈티(Bucharest)는 인구가 이백 만이 넘는 큰 도시로, 루마니아 남부 루마니아 평야의 중앙부에 위치하며, 도나우 강의 지류인 딤보비차 강이 시내를 흐른다. 지명은 '환락의 도시, 즐거운 도시'라는 뜻이다. 일설에는 부쿠르(Bucur)라는 양을 사육한 데서 지명이 나왔다고도 한다. 고고학적인 발견으로는 오래된 도시임이 확인되고 있으나, 이곳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1459년에 루마니아 공국의 블라드 체페슈가 요새를 만들었을 때로 되어 있다. 그 후 왈라키아 지방의 중심지로서 발전하였으며, 17세기부터는 루마니아 공국의 수도가 되었다. 1862년에는 통일 루마니아 왕국의 수도가 되어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 이후 부쿠레슈티는 급속도로 성장, 동쪽의 파리라는 별칭을 얻었다. 발칸 반도의 교통의 최대 중심지이며, 주변의 여러 나라와 국제철도로 연결되어 있다. 2차 세계 대전 전에는 경공업이 중심 산업이었으나, 후에는 기계, 차량 등의 중공업이 발달하였다. 풍부한 석유와 천연 가스를 바탕으로 대단위 공업 단지가 건설되어 있다. 루마니아의 교육과 문화의 중심지며, 시내에는 공원과 녹지대가 많은데 북부의 8개 호수를 이용하여 만든 헤라스트라우 공원은 스포츠와 레저에 이용된다.

 

 부쿠레슈티에 오래 머물지 않고 다른 곳으로 이동을 예정하였기에 역에서 불가리아의 벨리코 투르노보로 가는 기차표를 알아 보고 숙소에 짐을 풀고 시내로 갔다.

 

 부쿠레슈티 북역은 부쿠레슈티의 중앙역 역할을 하는 곳으로 국내 외의 많은 열차들이 이 곳에서 출발하고, 도착한다. 역안에는 온갖 편의 시설이 다 갖추어져 있고, 매우 번잡하다.

 

 

루마니아 음악당

 

 

 

 

부쿠레슈티 북역

 

 

 

 

북역 안의 여러 편의 시설들

 

 부쿠레슈티 시내는 아주 오래 된 옛 건물들은 찾아 볼 수가 없다. 비교적 근대에 만들어진 도시이기 때문에 오래 되었다고 해도 이백 년이 되지 않는 건물들이다. 더구나 차우셰스크의 독재정권으로 인하여 회색 빛의 도시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이제는 그 흔적마저도 관광자원이 되어 수 많은 광광객을 이끌고 있다.

 

 부쿠레슈크 여행에는 다른 것은 필요가 없다. 그저 거리를 걸어가면서 도심 속에 살아 숨쉬는 장소를 즐기면 된다. 버스에서 내려서 정해진 목적지도 없이 그냥 거리를 걸어다니며 구경을 했다.

 

 

 

 

무슨 건물인지 모르나 그냥 멋있게 보여서.....

 

 부쿠레슈티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는 Celea Victoriei(Victory Avenue)다. 이 거리를 중심으로 부쿠레슈티의 볼거리가 밀접해 있다. 이 거리는 전해지기로 1814년부터 밤에도 촛불을 밝혀서 오늘날의 가로등과 조명으로 시가지를 밝혔다고 한다. 이 거리는 1692년에 벌써 나무로 길을 깔아 진흙탕 길을 벗어났다고 하는 거리다. 그러다가 나무 길이 너무 빨리 파손되었으므로 1842년에는 돌로 길을 만들었다가 지금은 아스팔트로 포장되었다. 이 주변의 옛 건물들은 지금은 은행이나, 식당, 호텔 그리고 전 세계의 유명 브랜드의 상품을 판매하는 쇼핑타운으로 변모해 현재 부쿠레슈티의 가장 번화한 거리로 바뀌었다.

 

 

 빅토리에이 거리 남단에 있는 루마니아 국립 역사박물관(National Museum of Romanian History)60개의 전시실이 있다. 주요 전시물은 루마니아 지역에서 인류가 살기 시작한 60만 년 전의 유물을 비롯해 기원전 1세기 경에 형성된 다치아 왕국 시대, 중세 이후 오스만 투르크와의 투쟁 시기, 20세기 이후 사회주의 시기의 유물과 역사적 자료 및 예술 작품 등이다 1900 건축가 알렉산드루 사불레스쿠(Alexandru Savulescu)가 중앙우체국으로 설계한 것으로 1960년대까지 중앙우체국으로 사용되다가 1970년 역사박물관으로 바뀌었다. 국립 역사박물관이 세워질 당시 루마니아는 소련으로부터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외교 노선을 천명하면서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려던 시기로 루마니아 정부는 이 같은 취지로 국립 박물관을 수도에 세웠다.

 

 

국립 역사박물관 입구에 로마신화에 나오는 늑대를 안고 서 있는 동상

 

 루마니아라는 이름이 로마인들이 살던 곳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래서 로마의 신화를 형상화한 동상이 있다.

  

 

입구의 조각

 

 

 

 

루마니아 국립 역사박물관

 

 Caru' cu Bere라는 루마니아식당이 유명하다기에 이 식당을 찾아 갔다. 레스토랑이 매우 컸는데 사람들이 북적거라고 있어 자리가 없었다. 웨이트가 오래 기다려야 한다고 해서 이곳에서 식사를 못하고 그냥 나왔다.

 

 

 

Caru' cu Bere라는 루마니아식당

 

 

 

Caru' cu Bere라는 루마니아식당 간판

 

 

 

 

 

 

너무 아름다운 CEC Bank 건물

 

 이 건물은 프랑스의 건축가 폴 고테르(Paul Gottereau)에 의해 설계된 건물로 부쿠레슈티의 바로크양식의 건물 중에 가장 아름다운 건물이라고 한다. 지금 국책은행이라고 한다.

 

 

시내 중심가 Celea Victoriei(Victory Avenue) 이정표

 

 

 

Biserica Zlatari 정교회당

 

 

 

 

 

쇼핑가의 입구 - 장엄한 문 위에 좌우로 조각상이 서 있다.

 

 

 

 

쇼핑가

 

 

웅장하게 보이는 이 건물은 사실은 Cercul Militar National이라는 식당이다.

 

 

 

Hotel Capitol 건물

 

 

건물 이름이?????

 

 원어명 Piata Revolutiei인 혁명광장은 부쿠레슈티 빅토리에이 거리 남쪽에 있는 광장으로, 독재자 차우셰스쿠에 저항하여 198912월 혁명이 일어났던 곳이다. 처음에는 1939년에 화재와 혹시 있을지 모르는 폭동에 왕궁을 보호하기 위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왕궁 광장', 공산정권 시절에는 '공화국 광장'이라고 불렸으며, 1989년 혁명 이후 '혁명광장'이라고 불리고 있다.

 

 광장 주변의 석조 건물에는 지금도 탄흔이 선명하게 남아 격렬했던 순간들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시위 장면은 국영 텔레비전을 통해 루마니아 전역에 방송되었고 후에는 전 세계에 방송되어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25m 높이의 삼각형 조형물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데, 1989년 당시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한 혁명 기념비이다.

 

 

 

 

혁명광장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비

 

 크레출레스쿠교회(Kretzulescu Church)는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에 소재하는 루마니아정교회에 속하는 독립교회로 빅토리에 거리에 위치한 18세기 교회이다. 대법관이었던 이오르다케 크레출레스쿠(Iordache Kretzulescu)와 그의 아내 사프타(Safta)가 세웠고 루마니아의 유명한 화가 게로게 타타레스쿠(Gheroghe Tattarescu)가 내부 벽화를 그렸다. 1720부터 1722년 사이에 건물이 세워졌지만, 내부의 벽화는 그보다 100여 년 뒤인 1859년부터 1860 사이에 그려졌다. 내부의 프레스코화는 웅장하면서도 위언이 있다. 교회 앞에 서 있는 흉상은 반공산주의 운동을 한 루마니아의 정치가 Corneliu Coposu 이다.

 

 

 

크레출레스쿠 교회

 

 부쿠레슈티 국립미술관 (Muzeul National de Arta Bucuresti) 은 루마니아에서 가장 큰 미술관으로 부쿠레슈티에 있는 옛 왕궁을 개조한 것이다. 원래는 1812년 상인 디누쿠 골레스쿠(Dinucu Golescu)의 저택이었는데 그 아들이 건물을 팔았고, 대대적인 확장공사를 거쳐 1859년 왕궁으로 쓰게 되었다. 이 건물이 미술관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48년부터이며, 주로 루마니아 중세와 현대 미술가들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또한 모네, 엘 그레코, 틴토레토, 루벤스, 렘브란트 등 다른 나라 대가들의 작품도 일부 소장하고 있다. 한때 왕궁으로 쓰였던 만큼 외관도 웅장하고 화려하지만 혁명광장 서북쪽 모퉁이에 위치해 있어 1989년 혁명 때 심각한 손상을 입게 되었다. 이후 보수에 오랜 시일이 걸려 일부 전시실은 2002년에야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루마니아 국립미술관

 

 국립미술관과 마주 보는 부쿠레슈티대학 도서관 앞에는 청동 기마상이 있다.

 

 

루마니아 초대 왕 카롤 1세 기마상

 

 루마니아 음악당은 고대 그리스 신전을 보는 듯하다. 이 음악당은 1888년에 세워졌는데당시 대중들의 기부로 지어졌다고 한다. 음악당 앞의 정원에는 루마니아의 유명한 시인 Mihai Eminescu의 동상이 있다. 내부 벽면의 프레스코는 루마니아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담고 있다고 하는데 들어가 보지 못했다

 

 

 

 

루마니아 음악당

 

 부쿠레슈티를 지나가는 한 도시로 생각하고 시간의 여유를 가지지 않은 것이 참으로 잘못임을 시내를 돌아보면서 느꼈다. 아주 오래된 고대의 도시는 아니지만 발칸의 파리라 일컬을 만큼 아름다운 도시라는 것을 알았다. 거리를 걸어가면서 보는 건물들은 하나도 그냥 지나치기가 아쉽운 생각이 들었고, 아름다운 거리도 한가로이 거닐며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 정해진 시간에 부쿠레슈티를 구경하고 떠나야만 하는 안타까움이 자꾸 마은을 아프게 한다. 이 부쿠레슈티를 떠나면서 언젠가는 다시 시간의 여유를 가지고 이 도시에 와서 도시의 진면목을 즐기리라 생각하였다.

 

 아쉽지만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든다. 내일은 하루 종일을 이동해야 하는 여정이라 좀 피곤한 일정이다.

 

 

여행도 이제 막바지에 다가가니 몸도 피로도가 쌓인 것 같다.

 

마음대로 가는 발칸 여행 - 루마니아, 브라쇼브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중세가 살아 있는 브라쇼브

 

 드라큘라성을 다녀 와서 브라쇼브 시내를 구경하러 나갔다. 브라쇼브에 몇 일을 머물면서 아직 브라쇼브를 보지 않아서 시내를 나갔다.

 

 브라쇼브(Brasov)는 루마니아 브라쇼브 현의 현도로 트란실바니아 지방의 중심이 되는 공업 도시이다. 카르파티아산맥 기슭에 있으며, 교통의 요충지로 트랙터와 각종기계공업이 번성하고 인구는 약 삼십 만 명 정도이다1385~1425년 고딕 풍의 교회가 있으며 중세의 분위기를 가진 오래된 집들이 남아 있다. 공과대학, 국립오페라극장 등이 있으며, 1415세기에 건립된 고딕 양식의 ‘검은교회’가 유명하다.

 13세기에 독일 이주민이 건설한 이래로 시는 옛 시내의 시청사와 검은교회를 중심으로 발전하여 루마니아인은 오랫동안 시내 거주가 허용되지 않았다. 18세기 이후 시외에 살고 있던 루마니아인이 세력을 확장하여 차츰 옛 시내에서의 영업권과 거주권을 획득하여 19세기에는 루마니아인의 교육·문화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브라쇼브는 루마니아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어 근교 여행의 기점이 된다. 아일랜드 작가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로 유명한 브란 성이나 시기쇼아라, 시나이아 등을 다녀오기가 편하다.

 

 브라쇼브 구시가지를 구경하기 위해 버스를 타고 가서 우리나라의 버스 환승센타 같은 Livada Postei에 내려서 구시가지를 걸어 갔다. 브라쇼브 구시가지는 크지 않기 때문에 한가로이 걸어 다니면서 구경해도 한나절이면 충분하다. 급할 것도 없는 여행이라 한가로이 이곳 저곳을 다니며 구경을 하였다.

 

 먼저 간 곳이 스파톨루이 광장이다 이 광장 주변에는 구경할 여러 곳이 모여 있다.

 

 

브라쇼브의 상징 검은교회

 

 

무슨 건물인지 기억이?????

 

  원어명이 Muzeul de Istorie인 브라쇼브 역사 박물관(Brasov History Museum)은 브라쇼브 지역 역사에 관한 자료를 주로 전시한다. 브라쇼브는 원래 독일인이 세운 도시로  교통의 요지에 자리를 잡고 있어 오스만 투르크, 합스부르크 가문 등으로부터 여러 차례 침략을 받기도 했다. 브라쇼브 역사 박물관은 이처럼 독특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브라쇼브 지역의 전통을 보존하고 알리자는 취지에서 세워졌다. 박물관이 전시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는 투박해 보이는 상아색의 건물은 1420년 지어진 시청 건물로 시청 건물 외에 직공의 요새(The Weaver's Bastion)와 시계탑으로 이루어져 있다. 직공의 요새는 브라쇼브 내 상인과 수공업자 길드에서 세운 8개 요새 중 하나였는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곳이다. 박물관 옆에는 거대한 높이의 시계탑이 붙어 있다. 사방에서 시계를 볼 수 있도록 설계된 시계탑은 1494년 외세에 맞서기 위해 만든 망루로 1689년 대화재 이후 개축된 모습이다. 탑 내부에 전쟁과 관련된 무기 등을 전시하고 있다.

 17개 전시실에서 구석기, 청동기 시대의 무기와 농기구부터 19세기의 베틀 등 3,000여 점의 유물을 전시한다. 16세기 트란실바니아풍 르네상스 양식으로 꾸며진 상인들의 방에서는 색슨족 지배 당시 유물을 볼 수 있다. 주요 전시물은 오랫동안 외세의 침략을 받은 도시의 박물관답게 중세시대의 갑옷과 창 등 전쟁 관련 자료가 많이 전시돼 있다.

 

 

스파툴루이 광장 구시청사(역사박물관)

 

 

구시청사 시계탑

 

 

루마니아 정교회 대성당

 

 

탐파산의 브라쇼브 간판

 

 미국의 할리우드를 모방하여 브라쇼브라는 입간판을 세웠는데, 브라쇼브 주민들은 탐탇하지 않게 생각한다고 한다. 브라쇼브 구시가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케이블카가 운행되고 있으니 타고 올라가면 된다.

 

 

시내의 풍경

 

 브라쇼브 도시 중앙 광장에 있는 '검은 교회(Black Church)'는 원래 로마 가톨릭 대성당이었는데, 16세기에 트란실바니아의 위대한 종교 개혁가 요한네스 혼테루스에 의해 루터파 교회로 바뀌었다. 1385년 착공해 1477년 완공까지 100여 년이 걸린 브라쇼브의 상징적인 건축물로 1689년 합스부르크의 공격으로 인한 화재로 검게 타버린 외관 때문에 이름 붙여진 루마니아에서 가장 큰 독일식 고딕양식의 교회이다. 화재 후 재건에 100여 년이 걸렸으며, 재건 과정에서 65.5m의 거대한 탑 2개가 만들어졌고 탑 속에는 6,300kg짜리 종 3개가 있다. 1839년 총 4,000개의 튜브 관이 있는 남동 유럽에서 가장 큰 오르간이 만들어졌고 현재도 음악회에 사용된다.

 '검은 교회'의 길이는 약 88m가량으로, 남쪽 현관에 있는 1477년에 제작된 오크 나무 문, 1472년에 기증된 이 지역에서 세공한 청동 분수, 1476년에 그려진 남쪽 입구 부분의 벽화 등은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 감상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검은 교회'가 소유한 가장 가치 있는 보물은 총 119개의 아나톨리아(소아시아, 오늘날의 터키 부분) 카펫 컬렉션이다. 17-8 세기에 독일 상인들이 험준한 카르파티아산맥을 넘어 무사히 도착함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기부한 카펫인데, 이 카펫을 보호하기 위해 높은 창문에는 특별한 유리가 설치되어 자연광만을 들여보냄으로써 이 카펫들이 태양 자외선에 손상을 입지 않도록 막아 준다. 그리고 사진촬영은 엄격히 금지한다.

 

 

 

검은교회

 

 

 

무늬가 아름다운 문

 

 교회 옆에 서 있는 '요하네스 혼테루스(Johannes Honterus, 1498~1549))'의 동상이다. Vienna 대학을 졸업한 혼테루스는 이 지역에서 종교개혁을 주도하고 이 곳에서 일생을 마친 '트란실바니아의 사도였다. 인도주의자이며 신학자로 선교활동과 교육에 큰 공헌을 하였으며 1535년에는 이곳에 트란실바니아 최초의 인쇄소를 세웠다.

 

 "지금 주님께서 새로운 민족을 눈뜨게 해 그분 앞으로 부르실 때가 왔도다."

 요하네스 혼테루스, 트란실바니아의 종교 개혁에서

 

 

종교 개혁가 Johannes Honterus의 동상

 

 

 

검은교회 시계탑의 아름다운 모습

 

시나고그는 유대인들의 회당을 지칭한다. 브라쇼브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있었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1940년 경에는 약 6,000명 정도가 있었으며 2차 세계대전 중에도 수용소로 보내지지 않고 비교적 안전하게 생활했으나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못하는 등 괄시를 받았다고 한다. 현재의 시나고그는 2001년에 복원한 모습이다.

 

 

 

시나고그

 

 신 고전주의 양식의 슈케이문은 1827년부터 1828년에 구시가지와 외곽 마을을 연결하기 위해 세워졌다. 3개의 아치로 된 문의 중앙아치 밑으로는 현재 자동차가 다니고 그 옆의 두 개의 아치는 보행자들이 다닌다.

 

 

 

슈케이문

 

 

마을의 성벽 길

 

캐서린 문은 중세시대 4 개의 성문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문이다. 1526년 홍수에 파괴된 문을 대신하여 1559년에 세운 문으로, 이곳에 있던 성 캐서린 수도원 이름을 따서 붙였다고 한다. 독일인들은 루마니아인들을 구시가지에 정착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성문 출입도 금하였다고 한다. 19세기에 와서 루마니아인들의 출입을 허락하면서 만든 문이 슈케이 문이라고 한다.

 

 

 

 

캐서린문

 

 

멀리 보이는 검은 교회

 

이 모든 중세의 유적들이 오밀조밀하게 붙어 있다. 그래서 무엇을 먼저 보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저 눈에 보이는 곳을 가서 보고 구경하면 된다. 여행객에게 참으로 편리한 곳이다.

 

흑색탑과 백색탑은 브라쇼브의 언덕에 있는 감시탑이다. 브라쇼브에 정착한 색슨족은 오스만투르크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성곽을 만들었다. 이 성곽의 유적들이 지금도 비교적 잘 보존되어 마을을 돌아보면 성벽 길이 많이 보여 중세로 우리를 이끌고 있다. 구시가지를 감싸고 흐르는 개울을 따라 산책로가 있고 다리를 건너면 15세기에 만들어진 흑색탑을 볼 수 있다. 흑색탑에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백색탑이 있다. 원래는 적의 침입을 감시하던 탑이었지만 지금은 브라쇼브의 전망대 역할을 하는 탑이다. 특히 흑색탑 우에서 보는 브라쇼브 구기가지는 붉은 지붕의 집들이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는 풍경이 동화의 한 마을같이 느껴진다.

 

 

 

 

흑색탑

 

 

브라쇼브 성곽 설명판

 

 

 

 

 

 

흑색탑에서 보는 시가지 모습

 

 

 

 

백색탑

 

 

거리의 벽화

 

 

 

  버스 환승센타 Livada Postei

 

 

 

브라쇼브를 한 바퀴 돌고 나니 어느 새 어둠이 몰려 오고 있다.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서 버스를 타는 곳으로 가니 브라쇼브의 모든 버스가 이곳에서 출발한다. 우리나라의 환승센터와 같은 곳이다. 넓은 광장에 노선 별로 표시를 해서 비교적 찾기가 편리했다. 숙소로 돌아와서 저녁을 먹고 가볍게 루마니아의 맥주로 하루의 피로를 달래고 잠자리에 든다.

 

 내일은 브라쇼브를 떠나 부쿠레슈티로 가야 한다. 제법 먼 거리를 기차로 이동해야 하기에 시간에 맞추어 움직이어야 한다.

 

마음대로 가는 발칸 여행 - 루마니아, 브란성(드라큘라성)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드라큘라로 더 유명한 브란 성

 

 브라쇼브에서 브란성은 거리는 크게 멀지는 않으나 교통편이 흔하지 않다. 아침을 먹고 Auto Gare 2에서 버스를 타고 약 한 시간이 걸려서 브란성에 도착했다. 아주 조그만 마을인데 이 브란성을 관광자원으로 해서 이 마을 사람들이 모두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 같다.

 

 브란성은 루마니아 브라쇼브 남서쪽 32km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흡혈귀 소설 '드라큘라'의 가상모델인 블라드 3세가 잠시 머물렀던 곳으로 '드라큘라의 성'으로 알려지면서 루마니아를 찾는 사람들에게는 동유럽 최고의 관광지가 되었다.

 

 1212년 독일 기사단의 요새로 만들어졌는데, 15~16세기에는 오스만 투르크로부터 헝가리 왕국을 지키는 관문이 되었다. 건물에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새로운 양식이 추가되어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등 다양한 양식이 결합되어 있다. 1920년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리 여왕이 소유하면서 대대적인 개조를 통해 요새로서의 모습이 사라지고 낭만적인 여름 궁전으로 바뀌었다. 그 뒤 공산 정궝하에서 우여곡절을 겪다가 2006년 합스부르크 왕가의 후손이 성의 소유권을 되찾았다.

 브란성은 처음에 방어용 요새였기 때문에 외관은 아주 단순하고 작은 성으로 보이지만 내부는 좁고 가파른 비밀 통로가 많으며 복잡하게 얽혀 있다.  

 

 

 

브란 성의 전경

 

 

 

성 내부의 뜰

 

4월 말경인데 눈이 와서 덮여 있다.

 

 

 

 

 

성으로 가는 길에서 보는 성의 모습

 

성안의 십자가

 

 

성으로 들어가는 입구

 

 

 

성 내부 - 마리 여왕의 초상

 

 

성안에서 보는 바깥 모습

 

 

 

 

성안의 침실과 공예품

 

 

미로같은 성안의 통로

 

 

성에서 보는 브란 마을

 

 

 

성의 가구

 

 

 

 

 

성안의 창문을 통해 보는 성의 부분들

 

 

 사실과 허구가 너무 얽혀 있으면 그 둘을 분간하기가 어려워 허구가 더 사실인양 인식될 때가 있다. 브란 성이 바로 그러하다. 장소와 인물의 관계가 매우 의심스러운 셔우드 숲이 로빈 후드의 거처로 알려진 것과 마찬가지로, 브란 성도 본래의 이름보다 현재 드라큘라의 성(Dracula’s Castle)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하다.

 

 브란성이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460년경 잠시 이 성에 머물렀던 것으로 추정되는, 왈라키아 공국의 군주 블라드 3세 바사라브(Vlad III Basarab) 때문에 드라큘라의 성으로 알려지면서 부터다. 블라드는 드라큘이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Dracul)’이라는 작위를 받은 그의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생각해 자신의 이름을 블라드 드라큘이라고도 했다고 한다. 그는 재위기간에 적과 범죄자를 가혹하게 다뤄 악명을 떨쳤는데, 1897년 아일랜드 작가 브램 스토커가 '찔러 죽이는 자 블라드'라는 별명으로 더욱 유명한 블라드 체페슈(체페슈는 루마니아어로 꼬챙이를 뜻하는데 전쟁 포로나 범법자를 긴 꼬챙이로 잔인하게 처형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로부터 영감을 받아 쓴 흡혈귀 소설 드라큘라를 쓰면서 블라드 3세를 가상모델로 삼았다. 이처럼 소설의 모델이 될 정도로 잔혹한 인물로 알려져 있으나 루마니아 역사에서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군대를 물리친 용장으로 유명하다.

 

 이후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는 소설은 물론 영화, 드라마에까지 등장하면서 전 세계에 유명세를 떨쳤고, 루마니아인들의 영웅이었던 블라드 드라큘라는 역사적 사실과 무관하게 스토커의 드라큘라와 동일시되고, 브란 성은 드라큘라가 실존했던 증거인 양 관심을 모았지만 흡혈귀 전설에 어울리는 음습한 공간이라기보다는 동화 속에 나오는 낭만적인 성에 가까운 모습이다.

 

 블라드와 이 성의 관계는 아무리 연관 지어 보려 해도 아주 희박할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불명확한 관계에도, 이 성의 압도적인 외관이 무시무시한 전설에 어울리는 매력적인 배경이라고 생각하는 관광객들이나 기념품 판매인들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왈라키아 공국의 군주 블라드 3세 바사라브의 초상

 

 

왈라키아 공국의 군주 블라드 3세 바사라브의 가계도

 

 

브램 스토커의 작품 '드라큘라'에 대해서

 

 내가 이 성을 들어가면서 말을 했다. 루마니아 정부는 브램 스토커에게 훈장이라도 주어야 한다고. 어찌되었던 이 한적한 시골마을을 전 세계에 알려서 관광객들이 몰려 와서 돈을 쓰고 가게 만들었다. 입장료만 해도 무시하지 못할 수입이며, 기념품이나 관광 비용만 해도 적지 않은 돈이다. 나는 기념품은 사지 않는 것이 여행의 철칙이라서 아무 것도 사지 않았지만 마을의 레스토랑에 들러 점심을 먹엇다. 그 비용만 해도 하루에도 엄청난 수입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성안에 들어와 보니 이와 같이 '드라큘라'를 기념하는 곳도 있었고, 브램 스토커를 영예롭게 기념하고 있었다.

 

 

 

왕관 등 소장품

 

 

왕가의 문장인데 사진이 좀.....

 

 

 

 

여러 병장기의 전시

 

 

 

 성을 한 바퀴 돌면서 구경하고 1층으로 내려 오면 이 같은 무시무시한 모습을 본다. 옛날에 고문을 하던 장소로 나무 갑옷 모양의 고문기구이다.

 

 

 

 

성 안의 자그마한 뜰에 있는 우물 : 문양이 너무 좋다.

 

 

 

 

 

우물 곁에 있는 도구 - 아마 고문용 도구인 듯??

 

 

 

 

 

성안 정원의 연못

 

 

 

기념품 가게의 관광객들

 

 

매표소 입구

 

성에서 보는 브란 마을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성 빆의 마을

 

 드라큘라의 모델이 블라드 공이라는 사실에 대해, 현지에서는 두 가지 상반된 입장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관광에 이용할 수 있다고 좋아하는 이들도 있는 반면, 조국의 영웅을 괴물 취급하는 것에 대해 불쾌해 하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하여튼 지금도 전 세계의 관광객들은 어릴 때 누구나 한번은 영화로든 소설로든 보았을 드라큘라라는 이름에 대한 향수와 추억과 낭만을 꿈꾸며 찾아온다.

 브란성이라는 이름으로 찾아 오는 사란은 드물다.

 

 이 드라큘라성을 나오며 나는 방명록에 '드라큘라 만세'라고 적었다. 이유는 살아서는 조국을 외적의 침입에서 지켰고, 죽어서는 관광객을 끌어 모아서 주변의 살마들을 먹여 살리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대로 가는 발칸 여행 - 루마니아, 시기쇼아라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중세 요새도시 시기쇼아라

 

 브라쇼브에 짐을 부리고 근처를 여러 곳 다녀오기로 계획을 하고 아침에 일찍부터 서둘러 시기쇼아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약 3시간이 걸려 시기쇼아라역에 도착했다. 이번 발칸 여행에서 기차를 탈 때마다 느끼는 것은 우리나라의 기차가 참 편리하다는 것이다. 속도면에서만 아니라 열차의 성능이나 내부시설이 너무나 뒤떨어져 있는 곳이 발칸이다. 하지만 이것도 습관이 되어선지 이제는 그러려니 하면서 기차를 타고 다닌다.

 

 트란실바니아 중심부의 고원 위에 발달되어 있는 시기쇼아라는 인구 약 30,000 명 정도의 작은 도시로, 트르나바(Trnava) 강의 굽이진 부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이 주를 이루고 있다. 트란실바니아는 11세기에 헝가리 왕국의 영토가 되었는데, 12세기에 헝가리 왕국은 이 지역의 방어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독일계의 장인들과 상인들을 이주시켰는데, 이곳으로 이주해온 장인과 상인들은 작센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 작센 인들은 1191년에 시기쇼아라 시를 세웠다. 13세기에 독일의 장인과 상인들은 헝가리 군주들로부터 트란실바니아를 정복하고  지킬 것을 명령받았다. 이들은 구석기 시대의 흔적이 남아 있던 시티 힐(City Hill, 언덕 위의 도시)’정착했으며, 1280년에 라틴어로 카스트룸 섹스(Castrum Sex  :  작센인이 트란실바니아지방에 세운 7개의 성채도시 가운데 여섯 번째라는 뜻)로 알려진 이 도시는 장인들의 강력한 길드(guild) 덕분에 상업 활동에 활기를 띠었고 각 길드는 탑을 건설해 방어를 책임졌다.

 

 1999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유산으로 선정된 시기쇼아라 역사 지구가 있으며 블라드 체페슈가 태어난 곳으로 유명한 도시이다.

 

 평범한 고원 위의 작은 요새 도시는 낡은 듯하면서도 작고 알록달록한 색색의 작은 집들, 돌길, 창문에 꽃들로 장식된 소소한 풍경은 한폭의 그림처럼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게 만드는 도시이다.

 

 역에서 내려 천천히 걸으면서 역사지구로 발을 옮겼다. 시기쇼아라의 신시가지는 별로 볼 것이 없고 역사지구에 대부분이 모여 있다. 시간이 많으면 차분히 신시가지도 구경하겠으나 한정된 시간이라 보고 싶은 것만 보기로 했다.

 

 

시기쇼아라 시계탑

 

 

트르나바강과 멀리 보이는 역사지구

 

 

트르나바강 건너편에 보이는 역사지구

 

 중세 성채 도시의 외관이 잘 보존되어 있어서 루마니아의 보석이라고도 불리는 시기쇼아라 역사 지구(Historic Centre of Sighişoara)가파르게 경사진 고원 전체에 넓게 퍼져 요새화된 유적으로 이루어졌고, ‘시티 힐과 그 아래로 숲이 우거진 경사가 있는 저지대 도시가 주를 이룬다.

 

 시기쇼아라 역사지구는 수공업자와 상인이 중심이 되어 세운 도시로, 외부 침략으로부터 자체 방어가 가능한 요새도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성채 주변에 도시를 방어하기 위한 14개의 탑을 세웠는데, 현재 9개가 남아 있다. 각 탑들은 도시의 수공업자나 상인 조합의 길드에서 세우고 그 길드의 이름을 붙여서 불렀다. 때문에 재단사의 탑, 모피상의 탑, 제화업자의 탑 등등의 흥미로운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시기쇼아라의 남아있는 건축물 중 도시가 자치권을 얻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 14세기 후반에 세워진 남쪽 요새 벽 중앙에 있는 인상적인 시계탑은 이 도시의 상징으로서 역사지구에 있는 세 광장을 모두 차지하고 있으며, 위쪽 도시와 아래쪽 도시를 연결하는 계단을 보호하고 있다. 이제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 외 성벽 남쪽의 산상교회와 그곳으로 올라가는 목조 계단 등도 관광 명소로 유명하다. 

 시기쇼아라에 있는 14세기 시계탑은 시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건물로 도시의 관문을 지키는 망루 역할을 함과 동시에 시의회 건물로 사용되었다. 도시를 대표하는 탑답게 눈에 띄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애초 30m 높이였으나 16세기에 현재와 같은 64m 높이로 증축되었다. 1676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이듬해 재건되었고 이후에도 몇 차례 수리를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탑에 시계가 장착된 것은 1604년이다. 처음에는 나무로 만든 시계를 설치했다가 1648년에 금속 시계로 교체했다. 시계 옆 벽감에 있는 나무 상들도 흥미롭다. 요새를 향하고 있는 벽에는 올리브 가지를 든 평화의 신, 칼과 저울을 든 정의의 신이 시간을 나타낸다. 그 옆의 두 천사는 일의 시작과 끝을 나타내는데 오전 6시와 오후 6시마다 바뀐다고 한다. 도시를 향하고 있는 벽에는 요일을 나타내는 행성의 신들이 날짜에 따라 움직인다. 시계탑 내부는 1899년부터 트란실바니아 지역 상업발전 과정을 보여주는 역사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시계탑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보는 시계탑

 

 

 

 

 

여러 방향에서 보는 시계탑

 

 

 

시계탑 상층부의 아름다운 모습

 

 

 

 

시계탑에서 보는 시기쇼아라와 시내와 역사지구

 

 

역사지구의 아름다운 건물들

 

사진의 왼쪽에 보이는 탑이 양철공의 탑이다.

 

 

 

 

 

 

 

 

시계탑박물관 소장 유물

 

 

 

시기쇼아라 옛 역사지구 모형

 

 

 

제화공 탑

 

 

역사지구의 일반 주택가

 

 

 재단사의 탑(The Taylors' Tower) 시기쇼아라 역사지구의 입구 역할을 하는 망루로 재단사 길드에서 세운 탑이다. 재단사 조합은 시기쇼아라에서도 가장 돈이 많은 길드여서 재단사의 탑은 디자인은 단순하지만 규모는 큰 편이다. 14세기에 처음 세웠을 때는 도시의 상징물인 시계탑과 같은 높이였는데, 1676년 근처의 화약저장고에서 폭발이 일어나 상층부가 파괴되었다고 한다. 망루 아래는 아치형으로 뚫려 있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재단사의 팁

 

 

이정표

 

 

 

 

모피상의 탑과 푸줏간의 탑

 

 

 

 

 

여러 탑의 모습

 

 시기쇼아라의 9개의 탑을 모두 돌아보려고 했으나 길을 막아 놓은 곳이 많아 다 보지를 못하고 멀리서 사진만 찍은 탑도 있다. 다소 아쉽게 생각이 들었으나 이 정도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또 드라큘라백작의 탄생지가 있었으나 어떤 역사적인 유적도 아니고 그저 상술로 만들어 놓은 듯 해서 그냥 지나쳤다. 내일은 바로 드라큘라로 유명한 브란성을 직접 갈 예정이어서 별로 흥미가 없었다.

 브라쇼브에서 다소 거리가 멀고 교통편이 그렇게 좋은 곳이 아니기에 주마간산식으로 구경을 하고 점심을 먹고 하니 어느 새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브라쇼브역에 도착하니 벌써 저녁도 늦은 시간이다.

 

 내일도 브라쇼브를 떠나 브란성으로 가야겠기에 서둘러 저녁을 먹고 잠을 창한다.

마음대로 가는 발칸 여행 - 루마니아, 티미쇼아라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이제 헝가리를 떠나 루마니아로 간다. 루마니아의 첫 여행지는 티미쇼아라다. 세게드역에서 열차표를 사려고 하니 직원들이 전혀 영어를 알아듣지 못하고, 인터네셔날이라고 적힌 창구로 가라고 한다. 그 창구에는 능숙하지는 않으나 영어가 통하는 직원이 있었다. 나도 영어가 능통하지 않는 것이 더 편하다. 외국을 돌아다닐 때 영어가 능통하지 않는 것이 어떤 점에서는 편하다. 그들도 영어는 외국어라 능숙하게 말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니 필요한 단어만 가지고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다. 하여튼 표를 구입하여 국제열차를 타고 약 5시간이 걸려서 티미쇼아라에 도착했다.

 

 티미쇼아라(Timişoara)는 루마니아 서부, 티미슈 현의 공업도시로 부쿠레슈티 서북서쪽, 티미슈 강 중류 연변에 있는 인구가 35만 정도의 제법 큰 도시이다. 지명은 마자르 어로 '티미시 강가에 있는 도시', 또는 '(var)'이라는 뜻이다. 교통의 요충지로 여러 공업이 발달했다. 고대 로마의 식민지였으며, 1247년 기록이 전하는 오랜 도시로 1552~1716년 투르크의 지배를 거쳐 제1차 세계 대전 전까지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았고 1920년 루마니아에 합병되었다. 15세기의 성과 18세기의 대성당, 대학이 있다.숙소에 여장을 풀고 시내 구경을 나갔다. 티미쇼아라는 브라쇼브를 가기 위해 거쳐 가는 도시라 이번 여행에서 중요한 곳은 아니다. 그러나 티미쇼아라도 나름대로 볼거리가 있다. 내일은 브라쇼브로 가야 한다.

 

 

티미쇼아라 가는 길

 

 

티미쇼아라에서 머문 숙소

 

 

 

The Mitropoly Cathedral

 

 

 

시내의 공원

 

 

 

Freedom Square

 

 

광장의 조각상

 

 

Libertatii(자유) 광장의 표시

 

 티미쇼아라 구시가 중심에는 여러 개의 광장이 있는데 그 광장들은 모두 연결되어 있고, 광장을 중심으로 시가지가 발달되어 있어 천천히 걸어서 구경하기가 편하다. 광장 주변에 역사적·건축학적으로 가치가 높은 많은 건축물들이 들어서 있다.  1748년에 세운 가톨릭 성당, 1734년에 세운 세르비아인들의 정교회, 미술관, 19세기 바로크 양식의 대저택들이 있다.

 또 광장에는 과거의 흔적뿐 아니라 테라스가 있는 레스토랑, 카페, 술집 등이 있어 사람들이 항상 북적거리며 활기가 넘친다. 광장 주변에는 수 많은 가게가 지나가는 행인들의 눈을 끌고 있다. 광장에 마련되어 있는 벤치나 잔디밭 모퉁이, 분수대 주변에 많은 시민들이 휴식을 취하거나 느긋하게 산책을 하고 있다. 특히 이곳 분수대는 ‘기적의 샘물’이라고 불리는데, 병을 치유하는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병에 물을 담거나 분수에 손을 담그고 성호를 그리는 시민들을 종종 볼 수 있다. 분수대 안에는 빈에서 제작되어 배로 이곳까지 옮겨왔다는 바로크 양식의 삼위일체상이 서 있다.

 

 

시내를 걸어가다 어느가게에서 보는 아름다운 표지

 

 

 

 

국립극장과 오페라 하우스

 

 티미쇼아라의 중심지이자 가장 큰 광장인 빅토리에이(Victoriei) 광장 한쪽에 있다. 1871년 건설을 시작해 1875년에 완공했다. 이후 두 차례 화재로 파괴되었기 때문에 애초 모습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현재 모습은 1920년 두 번째 화재 후 루마니아 건축가 두일리우 마르쿠(Duiliu Marcu)가 설계했으며, 20세기 초 루마니아에서 유행했던 네오비잔틴 양식으로 지은 것이다. 프레스코화는 화가 키리아코프(Kiriakoff)의 작품으로, 루마니아 역사나 전설 속의 인물들을 묘사하고 있다.(두산백과에서)

 

 

빅토리에이 광장

 

 

성당 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시내의 건물

 

 티미쇼아라 시내를 가벼운 마음을 걸어다니며 구경을 하다가, 시장해서 레스토랑에 들어가 저녁을 먹었다. 작은 도시에 비하여 상당히 고급스러운 식당이었다. 내가 잘못 들어갔는지는 모르겠으나 내부도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고 손님들도 부유하게 보였다. 아마도 이곳에서 제법 비싼 레스토랑인 것 같았다. 하여튼 저녁을 먹고 시내를 돌아보다가 숙소로 돌아 왔다.

 

 

 티미소아라를 가볍게 구경하고 브라쇼브로 이동했다. 브라쇼브는 너무마 멀다. 기차로 이동하는 시간이 열 시간이 더 걸렸다. 하루 종일을 이동하는데 다 보냈다. 4월이 다 지나가는 시간에 눈이 내리고 있다. 기차를 타고 가면서 보는 풍경이 설국이다. 온 사위가 하앻게 변한 세상이다. 한국에서도 눈을 보기 어려운 곳에 살고 있는데 머나먼 타국에서 눈을 보면서 즐긴다. 여행지에서 겪는 또 다른 재미다.

 

 

 

 

 

 

 

 

 

브라쇼브로 가는 도중의 풍경

 

 

 브라쇼브에 도착하니 벌써 저녁도 늦은 시간이다. 숙소에 짐을 부리고 나가서 저녁을 해결하고 내일부터의 일정을 계획하고 잠자리에 든다.

 

 오늘은 하루 종일 이동만 한 날이다.

마음대로 가는 발칸 여행 - 헝가리 페치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새로운 만남의 장소 - 페치(PECS)

 

 다음 날은 우리나라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페치라는 곳을 가 보기로 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헝가리를 가면 99%는 부다페스트만 간다. 하지만 다른 고장도 좋은 곳이 많다.

 

 페치는 헝가리 보로니오주 메체크산맥의 남쪽 경사면에 위치하며 인구는 약 십칠 만 명 정도이다. 동쪽 교외에 탄전이 있고 최근에는 우라늄광의 산출로 유명해졌다. 헝가리의 도나우강 이남에서는 가장 오래된 도시로 로마시대에는 이 지방의 중심지였다. 그 뒤에는 마자르족이 살았고, 11세기 초에는 주교구청이 있었으며, 중세에는 수공업과 농산물의 교역으로 번창하였다. 16세기 중엽부터 17세기 말까지 오스만 투르크에 점령당했는데 지금도 시내의 이슬람교사원(현재는 로마가톨릭교회)과 이슬람교첨탑(미너렛)에서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로마가톨릭의 대성당(11세기)1367년 창립된 헝가리 최고의 페치대학이 있다.

 

 버스타미널로 가는 도중에 눈발이 내린다. 4월도 다 지나가는 시간인데 늦은 눈이 내리니 기상의 변화가 심하다. 페치는 제법 먼 곳에 있어 하루에 다녀올려면 제법 시간이 걸린다. 약 4시간이 걸려 페치에 도착하여 버스터미널에서 대강의 방향을 정하고 눈비가 오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온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페치에 초기 기독교의 유적이 유네스코에 등록되어 있다는 설명을 보고 그 곳으로 걸어 갔다.

 

 

CELLA SEPTICHORA 전경

 

 

세게드 버스타미널

 

 

 

버스 차창으로 보는 눈덮인 풍경

 

 

 

온 사위가 눈으로 덮여있다.

 

 

 

 

벌판에 피어 있는 유채

 

 

 

Hussan Jakovali 모스크- 원형이 거의 보존되어 있다.

 

 

 

 

 

성 베드로와 바울의 성당

 

 4개의 종탑이 성당의 사면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문을 잠가 놓고 있으며 시간에 맞추어 문을 연다. 관리사무소에서 미리 이야기를 하고 시간을 맞추어야 한다.

 

 

 

 

 

웅장한 외양

 

 

 

 

 

 

 

 

 

 

 

 

 

성당의 내부는 지하층과 2층으로 되어 있다.

 

 성당을 나와 아래로 내려 가면 초기 기독교의 지하 묘지가 있는데 처음에는 입구를 찾지 못해 조금 헤매였다. 주변의 관리인에게 위치를 물어 지하 묘지의 입구로 들어가니 이 공간은 교육의 장소로 이용하기 위해 여러 구조를 나누어 설명하고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CELLA SEPTICHORA의 방문객 센터와 초기 기독교의 공동묘지로 2000년에 유네스코에 등재된 곳이다. 지하로 내려 가면 로마시대의 초기 기독교의 자취를 볼 수 있다.

 

 4세기 무렵 화려하게 장식된 일련의 묘지들이 ‘소피아나(Sopianae)’라는 로마 지방 마을의 네크로폴리스(공동묘지)에 건설되었다. 소피아나는 오늘날 헝가리 바라냐(Baranya) 주에 있는 도시, 페치(Pécs)이다. 묘지는 지하에는 매장실, 지상에는 추모 예배당의 구조로 건설되었기 때문에 구조적·건축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또 묘지는 다른 언어와 기독교적인 주제를 탁월하게 묘사한 벽화로 풍부하게 장식되어 있어서 예술적 측면에서도 역시 매우 중요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페치(소피아나)의 초기 기독교 네크로폴리스 [Early Christian Necropolis of Pécs(Sopianae)] 에서 따 왔다. 더 상세한 설명은 네이버에서 보시기를....

 

 이곳은 아직도 발굴이 진행 중이며 교육의 현장으로 곳곳에 설명하는 장소가 마련되어 있다.

 

 

입구에서 나누어 주는 모형도

 

 

 

지하 묘지 입구

 

 

 

 

 

 

 

 

초기 기독교의 문양이 보인다.

 

 

 

 

많이 퇴색되었으나 초기의 벽화

 

 

 

 

 

 

 

 이 지하 묘지에 대해서는 내가 설명을 할 지식이 없다. 그래서 사진만 보여 드리고 자세한 것은 위에 말한 네이버를 참고하면 어느 정도의 지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지하 묘지를 구경하고 비가 내리는 중앙 광장으로 갔다. 어느 새 시간이 많이 흘렀으나 점심을 먹지 않아 광장 주변의 카페에 들어가니 많은 젊은이들이 앉아서 차를 마시거나 식사를 하면서 떠들썩하게 모여 있다. 어디에서나 젊음이 좋은 것이다.

 

 

 

 이 중앙 광장이 페치의 가장 중심되는 지역이다. 각종 학교와 박물관 유적이 모두 집결되어 있는 곳이다. 또한 대학이 있어 젊은이들이 항상 붐비는 곳이다.

 

 

 

 

 세치니 광장의 뒤편에 보이는 모스크는 지금은 교회로 사용되고 있다. 앞에 보이는 조각상은 성 삼위일체 조각상이다.

 

 이곳을 구경하고 다시 세게드로 돌아오니 시간이 늦어 벌써 밤 9시가 되었다. 늦은 저녁이지만 간단하게 해결하고 오늘을 마무리한다.

 

목적지를 정해 놓지 않고 여행을 다니면서 다시 목적지를 정해 갔다 오는 여행은 참으로 피곤한 일이다. 하지만 전혀 알지도 못한 곳에서 기대하지 못한 경치나 유적을 구경하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다. 새로운 만남이 있는 것이 여행의 참맛이 아닐까? 길은 길에 이어져 새로운 길을 밝혀 준다. 항상 새로운 길을 찾아 가는 기쁨이 오늘 있어 즐겁다.

마음대로 가는 발칸 여행 - 헝가리 세게드, 세르비아 수보티차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오늘은 이동이 주된 목적인 날이다. 아침부터 서둘러 이동 준비를 하였다. 아침 밥을 먹고 부다페스트의 뉴카티역으로 가서 세게드행 기차를 타야 한다. 기차는 뉴카티를 10시 50분경 출발하여약 4시간이 걸려서 세게드역에 도착했다. 세게드는 헝가리에서는 제법 큰 도시다. 숙소를 찾아가면서 길가를 살펴 보니 상당히 큰 건물들도 보이고 제법 사람들도 많이 보인다. 이곳에서 짐을 부리고 이 주변의 여러 도시를 갔다 올 생각이어서 먼저 버스 터미널과 기차역에서 교통편을 확인하였다.

 

 다음 날 세르비아의 수보티차를 관광하기 위해서 버스를 타고 국경을 넘었다. 국경을 통과하는 절차를 거치고 수보티차에 도착하여 관광하였다. 수보티차는 조그마한 마을이기에 시간이 별로 걸리지 않고 한 바퀴 돌아볼 수 있었다.

 

 수보티차(Subotica)는 세르비아 북부의 보이보디나주에 있는 도시로 인구는 약 십오만 정도이다. 헝가리 국경에 가까우며 다뉴브 강 연변 평야에 있으며, 베오그라드에서 부다페스트로 가는 기차의 중간역이다. 오래전부터의 도시였으나 13세기 타타르의 침입 때 파괴된 것으로 보이며, 1391년 저바드커라는 이름의 헝가리 왕국의 정착지로 처음 역사에 등장했다. 이후 헝가리의 세력 아래에 있었고, 1차 세계대전 후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패배로 주민의 대부분이 헝가리 인이지만, 유고슬라비아에 속하게 되었다. 세르비아 북부의 농업·공업 중심지이며, 교통의 요지로 주변 농산물을 집산한다. 베오그라드대학의 분교(법학부)가 있다.

 

 

아름다운 조형물이 있는 광장

 

 

 

아마 시청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헝가리의 영향으로 카톨릭의 모습이 보인다.

 

 

기념비

 

 

 

 

 

외부 장식이 아름다운 성당

 

 

 

 

외양이 아름다운 건물 - 무엇인지는 기억이....

 

 

도서관이었던 것 같다.

 

 

 

무엇인가를 상징하는 숫자

 

 

 

 수보티차를 다녀오니 시간이 제법 남아 세게드 일대를 구경하였다. 세게드에서는 사흘이나 머물기 때문에 시간이 나는대로 주변을 이곳 저곳 다녔다. 

 세게드(Szeged)는 인구 약 이십만 명 정도의 헝가리 남쪽에 있는 도시로 세르비아 국경에서 5km, 루마니아 국경에서 20km 지점에 위치한다. 도나우 강 지류인 티사강 연안에 자리한 하항으로, 지명은 '왕의 흰 성'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10~15세기에 아르파드 왕조의 군사적인 거점이었다. 1879년 홍수에 의해 시의 일부가 파괴되었으나 근대적인 도시로 재건되었다. 식품(살라미소시지), 섬유, 피혁, 시멘트, 목재가공 등 공업과 축산이 활발하다. 문화·학술 중심지로서, 대학, 박물관 등 문화시설이 많다.

 

 

Saint Demetrius Tower

 

 

 

 The Votive 예배당

 

 

 

 

Dom Square - 헝가리의 위대한 인물들을 기리기 위해 그들의 조상을 걸어 놓은 건물

 

 

세게드의 표지

 

 

세게드 광장의 야경

 

 세게드 숙소로 가는 도중에 구경도 하고 궁금증을 풀기 위해 식당으로 갔다. 어제 길가를 구경하면서 보니 'Korea Chicken House'라는 간판이 있었다. 이 시골에 무슨 한국 치킨집이 하고 보니 문을 닫아 놓았다. 그래서 오늘은 그 집을 가 보기로 했다. 치킨집에 가니 문을 열어 놓아 들어가니 진짜로 한국인 남자가 운영을 하고 있다. 주인도 깜짝 놀라며 말하기를 이곳에 한국인 관광객은 일년에 몇 사람이 오지도 않는 곳인데 어떻게 왔느냐고 묻는다. 주인과 이야기를 하면서 보니 아내는 헝가리인이었다. 그런데 주위에 한국의 20살 정도의 남자 두 명이 밥을 먹고 있었다. 호기심에 이야기를 해 보니 유학생이란다. 이곳 세게드의 의대가 유명하여 유학을 왔다고 한다. 그러면서 한국 유학생이 백 명도 넘게 있다고 한다. 정말 놀라웠다. 여기에 무슨 유학생이.... 그런데 그 학생들이 말하기를 일본과 중국의 유학생은 한국 학생보다 더 많다고 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동양 삼국의 교육의 폐해라고 생각되는 현상이다. 한국에서 의대를 가지 못해서 부모들이 이곳으로 유학읗 보낸 것이다. 한 십년전에는 필리핀을 갔으나 필리핀이 치안이 불안해서 이곳으로 유턴한 것이다. 그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서울의 한 유학원에서 몽땅 보낸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앞날이 걱정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이곳에서 의대를 졸업해도 한국에서는 개업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주인과 이야기를 해 보니 이곳의 물가도 싸고 해서 학생들의 부모가 여행 겸 학생들의 숙식을 해결해 주기 위해서 이곳에 같이 머무는 경우도 많다고 하였다. 씁슬한 현실이다.

 

 이곳에서 저녁으로 비빔밥을 한 그릇 먹고 숙소로 돌아오니 무언가 마음이 무겁다. 여행을 하면서 이런 일도 볼 수가 있다고 생각하며 하루를 마친다.

마음대로 가는 발칸 여행 - 헝가리 부다페스트 4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부다페스트에서의 부활절

 

 오늘은 일요일이며 부활절이다. 부다페스트에서 맞이하는 부활절이라 특별히 이슈트반 대성당에서 부활절 미사를 보고 하루를 좀 차분히 보내자고 생각했다. 여행이 길어짐에 따라 서서히 완급을 조절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전에는 미사에 참여하고 오후에는 저번에 제대로 보지 못했던 부다왕궁의 국립미술관을 다시 가서 채 못 본 그림을 보고 한가로이 시내를 거닐면서 소요하기로 하고 아침을 먹고 이슈트반 대성당으로 갔다.

 

 헝가리는 전통적인 카톨릭 국가라 부활절을 아주 성대하게 지내는 것 같았다. 성당에 가니 수 많은 사람들이 미사에 참여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성당과는 좀 다르게 이 곳의 성당에는 앉는 의자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서 그냥 미사에 참여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서서 사제의 의식에 따라 경건하게 미사에 참여하고 있다. 오늘이 부활절이라 추기경이 직접 예식을 집전하였다. 영성체 때는 추기경이 직접 줄을 선 모든 신자에게 성체를 주었다. 나도 추기경님에게 영성체를 하였다. 아주 감동적이었다. 미사가 끝나고 성당의 성가대들이 파이프오르간의 연주에 맞추어 헨델의 메시아중 할렐루야응 부를 때는 그 엄숙함과 장엄함이 전체를 압도하였다. 파이프오르간의 소리가 이렇게 좋은 줄을 이번 여행에서 확실히 느꼈다.

 

 미사가 끝나고 이슈트반 성당의 내부를 찬찬히 돌아 보며 사진을 찍었다.

 

 

미사에 참여한 사람들

 

 

 

아름답다기보다 찬란한 내부의 장식

 

 

성 이슈트반 상

 

 

천정화

 

 

 

제단

 

 

 

스테인드글라스

 

 

 

성가대의 할렐루야

 

 부활절미사에 참여하고 숙소로 돌아와서 점심을 먹고 다시 부당왕궁으로 향했다. 국립미술관을 가기위해서다. 가는 도중에 여러 곳의 기념관도 있고, 무슨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서인 것 같이 공연을 위해 젊은 남녀 학생들이 헝가리 민속춤을 연습하고 있는 광경이 보여 잠시 구경을 했다.

 

 

 

헝가리 민속춤을 연습하고 있는 모습

 

 

 

중간에 들른 곳인데 어딘지 기억이??? - 모빌로 꾸며 놓은 곳인데....

 

 여러 곳을 눈요기로 구경을 하면서 부다왕궁의 국립미술관에 들어가서 저번에 보지 못하고 돌아온 곳부터 그림을 다시 보기 시작해서 관람을 마치니 오후가 벌써 늦은 시간이 되었다. 국립미술관에는 정말로 좋은 작품이 많았다. 그 중에서 내 마음에 든 작품들을 사진을 찍어 왔다.

 

 

 

 

 

 

 

 

 

누구의 초상인지 모르겠으나 묘하게도 나의 마음을 끈 작품이다.

 

 

 

 

 

 

 

 

 

 

 

 이 국립미술관에는 수 세기에 걸친 헝가리의 미술작품이 전시되어 있으니 부다페스트를 가는 사람들은 부다왕궁의 외형만 보지 말고 꼭 국립미술관에서 그림을 감상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미술관의 통로와 외부 벽에 있는 작품들

 

 

 

조금 에로틱한 조각상 - 아이가 보지 못하게 아이의 머리를 누르고 있다.

 

 

 

폰으로 찍은 사진

 

국립미술관을 나와 부다왕궁을 내려오면서 옆을 보니 부다왕궁과 아래를 연결해 주는 푸니쿨라가 다니고 있다. 부다왕궁이 제법 경사가 있는 언덕에 있어 통행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다.

 

 

 

왕궁으로 올라가는 푸니쿨라

 

 

왕궁에서 보는 세체니 다리

 

오늘로서 부다페스트에서의 일정은 끝났다. 약 일주일을 있었는데 막상 부다페스트를 떠나려고 하니 보지 못한 곳이 너무 많은 곳 같다. 언젠가 내가 글에서 이야기했듯리 내가 태어나고 자란 도시도 아직 다 모르는데 하물며 외국의 도시를 어떻게 몇 일만에 알 수 있으랴? 그저 수박 겉만 구경하고 속살은 먹어 보지도 못한 것이다. 아쉽지만 이 정도에 만족하고 부다페스트의 일정을 끝내어야 한다. 왕궁에서 내려 와서 여러 거리를 걸으면서 구경을 하고 시장도 구경하고 돌아오면서 보니 대형 마트 같은 곳은 모두가 부활절이라 문을 닫고 있었다. 여행을 하는 사람들은 이런 점을 알아야 한다. 우리나라처럼 하루 종일 문을 열고 장사를 하는 곳은 드물다.

 

 내일은 부다페스트를 떠나 헝가리 남쪽에 있는 세게드로 간다. 거기에 짐을 부리고 몇 일을 머물면서 그 주변의 여러 곳을 다닐 생각이다. 몇 군데의 국경을 넘어 갔다 오는 여정이지만 한 곳에 베이스를 치고 다니는 것이 편해서 세게드에 짐을 부리기로 생각했다.

 

 내일은 하루 종일 이동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