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鶴)의 오딧세이(Odyss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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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3 - 계림과 교촌마을 오릉 일대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오늘은 대릉원 주변에서 저번에 가지 못한 반대방향을 돌아보기로 하고 경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대릉원 경내를 지나 먼저 간 곳이 숭혜전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는 않지만 신라왕을 모시고 있는 곳으로, 경주의 유적지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대부분 민가에 가까이 있듯이 이 숭혜전 주변도 민가가 많이 들어서 있다.

 

 경주시 황남동에 있는 신라시대 사묘재실인 숭혜전(崇惠殿)1992718일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숭혜전에는 신라 최초의 김씨 임금인 13대 미추왕(味鄒王)과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룩한 30대 문무대왕(文武大王), 그리고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敬順王)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원래는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敬順王)의 덕을 기리기 위해 경주시 인왕동의 경주 월성에 지은 사당으로 경순왕의 영정을 모시고 제향해 왔다.

 

 조선시대 1592(선조 25)에 임진왜란으로 사당이 소실되었고 그 뒤부터 위패를 모시고 제향했다. 1627(인조 5) 당시 관찰사 김시양(金時讓)이 동천촌에 사당인 동천묘를 다시 짓고 경순왕의 위패만 모셨다. 1723(경종 3) 조태억의 간청으로 경순왕전으로 고쳐 부르다가 1794(정조 18)에 당시의 도백 조진택이 나라의 허락을 받고 지금의 자리로 옮겨 짓고 이름을 황남전으로 바꾸어 불렀다. 1887(고종 24)에는 김만제(金滿濟)의 간청으로 미추왕(味鄒王)의 위패도 이곳에 모시게 되었으며 이듬해 판부사 김홍집(金弘集)의 간청으로 문무대왕의 위패도 함께 모시게 되었다.

그뒤 고종이 경주부윤 김철희(金喆熙)에게 명하여 사당을 증축하게 하고 숭혜전으로 선액(宣額)하였다.

 

 앞면 5, 옆면 3칸인 맞배집으로 왼쪽에 영육재(永育齋), 오른쪽에 경모재(敬募齎)가 있다. 앞에는 경순왕 신도비와 비각이 있고, 길 건너에 계림세묘(雞林世廟)가 있다.

 

숭혜전의 여러 모습

 

 숭혜전을 나와 계림쪽으로 걸어가면 오른쪽으로 동부사적지대가 보인다.내물왕릉을 비롯하여 여러 왕릉이 있고 아직 발굴을 진행하고 있는 듯하다.

 

 경주 동부사적지대(慶州 東部史蹟地帶)는 황남동에 위치한 신라의 여러 사적이 모여있는 곳을 보존하기 위해 하나의 단위로 1968년 사적으로 지정된 구역이며, 지정면적은 669293이다. 유적으로 동서는 동궁과 월지부터 교동까지, 남북은 월성 남쪽의 남천에서 고분공원 앞 첨성로가 있는 곳까지의 지역이다.

 

 이곳에는 동궁과 월지, 경주 월성, 첨성대, 계림, 내물왕릉 등 외에도 수십기에 달하는 신라 무덤이 완전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경주시 전역에 흩어져 있는 신라시대의 역사 유적들은 그 성격에 따라 5개 지구로 나뉘는데, 이들 5개 지구는 모두를 통틀어 경주역사문화지구로 일컬어지며,그 런데 경주 월성(사적, 1963년 지정), 첨성대(국보, 1962년 지정), 계림(사적, 1963년 지정), 내물왕릉(사적, 1969년 지정) 등과 함께 1968년 사적으로 지정된 경주 동부 사적지대도 경주역사문화지구에 포함되면서 200012월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

 

유네스코 경주역사문화우산 표석

동부사적지대의 여러 고분들

 

 동부사적지대의 옆으로 난 길을 걸어가니 왼쪽으로 첨성대가 보이고 앞으로는 월성이 보인다. 월성으로 가지 않고 오른쪽으로 발을 옮기니 계림이 나타난다.

 

 경주 계림(慶州 鷄林)의 어원에는 두 가지 이설이 있는데, 원래 이름은 시림(始林)이었지만 김알지가 태어난 이후 계림으로 바꿨다고 한다. 신라 김씨 왕조의 시조 김알지가 태어났다고 알려진 장소의 이름이었지만, 후에 신라 전체를 뜻하는 이름이 되었다는 설이 일설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서기 65년 봄 3월에 김알지를 발견하며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 왕이 금성 서쪽 시림 숲 사이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리고 온통 환한 빛으로 가득하여, 날이 밝은 후 신하를 보내어 살피도록 하였다. 신하가 시림에 이르러 보니 금으로 된 조그만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 울고 있어 돌아와 고하니, 왕이 즉시 시림으로 가서 궤짝을 열어 보았다. 그 속에는 총명하게 생긴 사내아이가 있었고, 왕은 하늘에서 보낸 아이라 하여 태자로 삼았다. 또한 시림의 이름을 계림으로 바꾸었으며 국호로 삼았다고 전한다. 반면 삼국유사에서는 서기608월에 호공이 직접 시림을 걷다가 신령한 기운이 내려와 발견하는 것으로 달리 전한다. 또한 여기서는 계림의 어원이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같은 책 혁거세조에서는 처음 왕이 난 곳이 계정(鷄井)이므로 국호를 계림이라 하였다고 전하여 차이가 있다.

 혹은 높은 땅을 가리키는 '''서벌(서라벌=경주)'이 합쳐지면 '달스벌/달스불'이 되고, 당시 닭()을 닥, 달 등으로 발음했기 때문에 '달스벌/달스불'을 각자 음차 및 훈차하는 방식으로 닭+수풀, 즉 계림(鷄林)으로 표기하였다는 설이 있다.

 같은 시기 중국과 일본에서 신라의 국호를 계림으로 인식했던 기록도 전해진다. 구당서에서는 당고종이 신라에 계림도독부를 세웠다고 전하며, 김대문 역시 자신의 책 이름을 계림잡전으로 지었다. 고려의 이야기를 중국에서 적은 책의 제목도 계림유사로 지어졌다. 일본서기에서도 신라의 국호를 계림으로 적은 부분이 있다.

 

 다만 현재 알려진 계림은 사실은 경주 향교의 홍수 방지용 숲이고 실제 계림은 다른 곳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설도 있다.

 

 1963년 사적 제19호로 지정되었다. 지정면적 7,273m2으로 신라의 건국초부터 있던 숲으로 알려져 있고 느티나무와 물푸레나무, 회화나무, 싸리나무 등의 교목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계림에서 보는 월성

 

계림 설명판

 

계림의 여러 모습

 

 계림을 벗어나 조금 가면 경주향교가 나타난다.

 

 경주시 교동에 있는 경주향교(慶州鄕校)19851015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경북향교재단이 소유하고 있으나 언제 창건되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경상북도에서 가장 큰 향교로, 향교의 위치는 계림(鷄林) 서쪽, 문천(文川) 북쪽에 해당하는데, 신라의 국가 최고교육 기관인 국학(國學)이 있었던 자리로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원효(元曉)가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의 과부 공주를 만난 요석궁(瑤石宮)에 대해 지금의 학원이 이곳이다.’(今學院是也)라는 주석을 남기고 있다. 신라 멸망 뒤에 서라벌이 경주로 개칭되면서 고려시대에는 향학(鄕學), 조선시대에는 향교로 이어져온 유서 깊은 곳으로 나주향교(羅州鄕校)와 함께 향교 건물 배치의 표본이 된다.

 

 2011127일 경주향교 대성전이 대한민국 보물 제1727호로 지정되었다. 향교 안에는 선조 34(1601) 당시 제독관 손기양(孫起陽)이 흩어져 있던 각종 학규(學規)를 엮어서 작성한 <경주향교학령>(慶州鄕校學令)이 남아 전하고 있는데, 일종의 교내 학칙으로써 이는 조선 전기 향교 교육의 실태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 중 하나이다.

 

경주향교 표석

 

향교가 있는 교촌마을 표지

 

경주향교 안내판

 

 향교 정문은 열어 놓지 않고 동쪽문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동쪽문으로 들어가니 먼저 반기는 것이 우물이다. '총명수'라고 이름이 붙어 있는 우물로 지금도 사용하고 있지는 않는 것 같아 보였다. 우물울 지나 향교의 여러 곳을 돌아보니 대단히 규모가 큰 것 같아 보였다.

 

경주향교의 여러 모습

 

 향교를 나와 앞에 흐르는 남천을 보니 예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월정교가 보인다.

 

 월정교란 이름은 <삼국사기>에 통일신라 경덕왕 19궁궐 남쪽 문천에 월정교, 춘양교 두 다리를 놓았다.’는 기록을 통해 알려졌다.

 조선시대에 유실되어 없어진 것을 10여 년간의 조사 및 고증과 복원을 진행해 20184월 모든 복원을 완료했다. 2013년 교량복원을 먼저 마치고, 이후 다리 양쪽의 문루(門樓)를 마저 지었다. 문루 2층에는 교량의 복원과정을 담은 영상물과 출토 유물을 볼 수 있는 전시관이 있다.

낮에는 월정교의 자태를 오롯이 볼 수 있어 좋고, 밤의 월정교는 또 다른 매력으로 우리를 유혹한다고 한다.

 

월정교를 앞에 두고 한옥으로 마을을 이루고 있는 교촌마을의 아름다운 풍경이 보인다. '교촌마을'은 향교가 있는 마을을 뜻한다. 즉 교촌마을이 경주에 있는 교촌마을을 뜻하는 것만은 아니다. 경주 교촌마을은 신라 신문왕2(682)에 설립된 신라 최초의 국립대학인 국학이 있던 곳으로 교육기관인 국학의 변화는 고려시대에는 향학, 조선시대에는 향교로 이어졌다.

 교촌마을 주변에는 삼국유사 속 이야기보따리가 곳곳에 숨겨져 있다. 김알지가 태어난 계림, 원효스님과 요석공주의 사랑을 이어준 문천교(蚊川橋), 김 유신이 살던 재매정, 월정교와 충담스님, 도화녀를 사랑한 진지왕, 선덕여왕이 만든 첨성대 등 수 많은 이야기 현장이 교촌과 남천을 따라 흩어져 있다.

 

 교촌마을은 새롭게 복원 조성되어 문화유적의 원형을 잘 보존하면서도 보고 즐기는 관광지가 될 수 있도록 힘을 쓰고 있다. 국내 최대 규모의 목조 교량인 월정교가 새롭게 복원되어 목조건축의 웅장함을 느낄 수 있고, 야간에는 화려한 조명으로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해 관광객들이 꼭 찾는 야경코스가 되었다.

 

 교촌마을에는 국가민속문화재 경주 최부자댁, 중요무형문화재 경주교동법주가 있다.

 

교촌마을

 

월정교

 

교동법주

 

교동법주양조장

 

 음식점으로 모양을 바꾼 '요석궁'과 교동법주 양조장 등을 포함한 이 구역이 유명한 경주 최부자집이다.

 

 경주 최부자집은 조선조 최진립의 가문인 경주 최씨가 17세기 초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약 300년 간 부를 이어온 것을 의미한다. 12대로 대대손손 가훈을 지켜가며 부를 쌓았고, 나그네나 거지들 에게 돈을 나누어 주고 밥을 먹여주는 좋은 선행을 했다. 이렇듯 후손을 엄격하게 교훈하며 탐욕을 줄여갔던 최부잣집은 조선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예로 여겨지며, 세간의 존경을 받았다.

12대 최준은 일제강점기에도 독립자금 마련을 위해 백산무역주식회사를 세워 안희제와 운영하며 임시정부 재정부장을 맡아 독립운동 자금줄 역할을 했으며 그 증거 문서들이 2018년 고택 광에서 발견되기도 하였다. 해방 후엔 전 재산을 모두 털어 대구대학(현재의 영남대학교)과 계림학숙을 세웠다.

 

 최부자집이 후손들에게 항상 지킬 것을 마음에 새기게 한 육훈은 다음과 같다.

  1.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말라

  2. 1년에 1만 섬 이상 재산을 모으지 말라

  3. 흉년에는 남의 논밭을 사지 말라

  4. 집에 온 손님은 융숭하게 대접하라

  5.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6. 가문에 시집 온 며느리들은 3년 동안 무명옷을 입도록 하라

 

최부자집의 여러 모습

 

교촌교에서 보는 남천과 월정교

 

 교촌마을을 나와 오릉쪽으로 발을 옮기면 바로 사마소가 나온다.

 

 경주사마소(慶州司馬所)는 조선시대 과거에 합격한 그 지방의 생원과 진사들이 이곳에서 유학(儒學)을 가르치거나 정치(政治)를 토론하던 건물로 지위가 높은 사람도 자기 수양을 위해 이곳을 찾아왔다고 한다.

 처음 세워진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선조 25(1592)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진 뒤 영조 17(1741)에 다시 지어 풍영정(風詠亭)이라 불렀다. 이 건물은 원래 이곳으로부터 동쪽으로 300m 거리에 있는 신라시대 월정교(月精橋)터의 북쪽 교대(橋臺) 위에 세워져 있던 것을 1984년 이곳으로 옮겨왔다. 건물 안에는 건물을 고친 내용이 담긴 현판들이 걸려 있어 그 내력을 알려주고 있다.

건물은 앞면 4, 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사마소(司馬所)’라는 현판은 영조 38(1762) 당시 부윤벼슬을 지내던 홍양한이 쓴 것이다.

 

사마소의 여러 모습

 

사마소 바로 옆에 황량한 벌판에 '재매정'이 있다.

 

 재매정(財買井)은 신라의 김유신 장군 집에 있던 우물로 화강암을 벽돌처럼 쌓아 올려 만들었는데, 이 일대가 장군의 집이 있었던 자리로 추정된다. 김유신 장군이 오랜 기간을 전쟁터에서 보내고 돌아오다가 다시 전쟁터로 떠날 때, 자신의 집 앞을 지나면서 가족들을 보지도 않고 우물물을 떠오게 하여 말위에서 마시고는, “우리집 물맛은 옛날 그대로구나하고 떠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1993년 발굴조사에서 재매정을 중심으로 사방 70m 지역을 발굴하였다. 우물의 깊이는 5.7m이며, 가장 넓은 부분은 1.8m이고, 바닥의 지름이 1.2m로 벽돌같이 다듬은 돌로 만들었다. 우물 옆에 비각이 있고 비각안에 조선 고종 9(1872)에 이만운이 쓴 비석이 있다.

 1976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지정면적 5,481로 현재 위치는 경주 흥륜사(興輪寺)터와 월성(月城)터의 중간에 있다.

 

 

재매정의 여러 모습

 

문천교에서 보는 남천

 

 문천교를 지나 큰 길을 따라 제법 가면  '오릉'이 나타난다.

 

 경주 오릉(慶州 五陵)은 탑동에 있는 능묘(陵墓)4기의 봉토무덤과 1기의 원형무덤이다. 1969827일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봉분의 높이는 10m 내외이고, 지름은 20m 내외이다.

 

 신라 초기의 왕릉으로 시조(始祖) 박혁거세(朴赫居世)와 알영부인(閼英夫人), 2대 남해왕(南解王), 3대 유리왕(儒理王), 5대 파사왕(婆娑王) 5명의 분묘라 전해진다. 네 왕들의 공통점은 모두 박씨라는 것으로, 가운데 하나를 두고 나머지 네 무덤이 한쪽 면에 자리하였다. 일명 사릉(蛇陵)이라고도 하는데 이러한 명칭은 박혁거세가 승하 후 7일 만에 그 유체(遺體)가 다섯 개로 되어 땅에 떨어졌으므로 이를 합장하려 하자 큰 뱀이 나와 방해하므로 그대로 다섯 군데에다 매장하였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연유되었다. 능 입구의 홍살문을 세운 기둥은 원래 당간지주(幢竿支柱)로 이곳에 담엄사(曇嚴寺)가 있었다는 설과 일치한다.

 

 오릉 경내에 알영부인이 계룡에 의해 탄생한 전설상의 장소인 알영정 우물과, 혁거세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당 숭덕전, 조선시대에 세운 왕릉비가 있으며, 능원 서남쪽 소나무숲에는 숭덕전 남쪽에 있던 담암사지에서 출토된 석재를 옮겨 놓았다. 멀지 않은 거리에 박혁거세 탄생설화의 배경인 나정이 있다.

 

오릉 주위로 숲이 울창하게 조성되었는데, 별로 넓지도 않은데도 능역에 고라니가 살아 가끔 관람하다 마주친다고 한다. 오릉 경내에는 곳곳에 여러 야생 동물에 대한 주의가 붙어 있다.

 

오릉의 여러 모습

 

 오릉을 한 장면으로 사진을 찍으려면 여러 구도를 맞추어 보아야 한다. 그래서 여러 곳을 배회하다가 한 컷에 들어오는 제법 먼 곳에서 사진을 찍었다.

 

 오릉을 보고 알영정으로 갔다. 알영정(閼英井)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비() 알영부인이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우물로 경주오릉 내 숭덕전 대나무 숲 속에 위치하고 있다. <삼국사기><삼국유사>에 알영정에 관한 기록이 전하는데, 이와 같은 정천신앙에 따른 탄생설화는 동북아시아에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다. 현재 알영정의 정확한 위치를 확인할 수는 없으나 <동경잡기>에 따르면, 경주부의 남쪽 5리에 있었다고 한다.

 

알영정의 모습

 

 알영정에서 바로 이어진 있는 숭덕전(崇德殿)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왕(朴赫居世王)의 제향을 받드는 제전(祭殿)으로 오릉(五陵)의 남쪽에 있다. 조선 세종 11(1429)에 세웠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선조 33(1600)에 다시 지었고 숙종 20(1694)에 수리하였다. 지금 경내에는 조선 영조 35(1759)에 세운 박혁거세와 숭덕전의 내력을 적은 신도비가 있다.

 

숭덕전의 모습

 

 오릉을 끝으로 오늘의 계획한 여정을 마쳤다. 오릉을 나와 버스정류장에서 시내버스를 조금 기다려서 타고 시외버스정류장으로 가서 집으로 향했다. 예정한 시간에 맞추어 오늘도 하루를 재미있게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