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5 - 남산지역, 동남산 일대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제법 긴 날을 한파가 계속되다가 추위가 조금 진정되면서 겨울이라기에 너무 따뜻한 어느 날 남산을 돌아보려고 집을 떠났다. 남산은 너무 넓기에 하루에 다 돌아볼 수도 없고 모든 문화의 자취를 돌아보기에도 어려워 경주시에서 나온 안내도를 따라 먼저 동남산쪽으로 오늘의 여정을 정하였다.
안내도에 의하면 경주박물관 옆에서 난 길을 따라가도록 되어 있지만 이정표가 하나도 없다. 이런 점이 상당히 아쉽게 생각되었지만 현대문명의 이기인 스마트폰으로 지도를 찾아 박물관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갔다.
겨울 박물관 옆 벌판
박물관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제법 걸어가니 문천이 나타나고 양지마을이 나온다. 햇볕이 잘드는 마을이라 양지마을이라고 일컫는 곳에는 남산과 관련된 인물로 유명한 고청 윤경렬(古靑 尹京列1916~1999)기념괸이 있다. 선생은 남산의 수호신이 되고 싶다고 하실 정도로 남산을 사랑했다. 함경북도 주을 출신으로, 40년대 경주로 내려오시어 '마지막 신라인'으로 살며 경주 남산과 우리의 토우, 조각을 연구하고 만들었다. 그의 생가(고청정사)는 경주시 인왕동 남산 바로 앞 양지마을에 있으며, 고청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기념관을 구경하려고 가니 하필 월요일이라 문을 닫고 있어 내부는 돌아보지 못하고 외부만 보고 남산의 한 구역인 동남산으로 발길을 옮겼다.
경주남산(慶州南山)은 경주시에 있는 불교 유적과 관련된 산으로 금오산이라고도 하며, 북쪽 금오산과 남쪽 고위산 사이의 산들과 계곡 전체를 통칭해서 남산이라 한다. 또한 남산은 신라 사령지(四靈地) 가운데 한 곳으로 <삼국유사>에 의하면, 이곳에서 모임을 갖고 나랏일을 의논하면 반드시 성공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남산에 얽힌 전설과 영험의 사례가 풍부하고 다양하다. 박혁거세가 태어난 곳이 남산 기슭의 나정이며, 불교가 공인된 528년(법흥왕 15) 이후 남산은 부처님이 상주하는 신령스러운 산으로 존숭되어 왔다.
남산의 지세는 크게 동남산과 서남산으로 나뉜다. 동남산과 서남산에는 각각 16개의 계곡이 있고, 남쪽의 2개와 합하여 모두 34개의 계곡이 있다. 현재까지 발견된 유물과 유적의 숫자로 보면 서남산쪽이 동남산보다 월등히 많다. 수십 곳의 골짜기에는 100여 곳의 절터와 80여 구의 석불, 60여 기의 석탑 등 다양한 불교 문화재가 남아 있으며 신라의 불교 문화를 폭넓게 볼 수 있는 노천박물관으로 불리고 있다.
김시습이 한국 최초의 소설 금오신화를 쓴 곳이 이 산에 있던 용장사다. '금오'는 남산의 주봉우리인 금오봉을 의미한다. 참고로 금오신화라는 이름은 '금오산의 신화'라는 뜻의 金鼇神話가 아닌, '금오산의 새 이야기'라는 뜻의 金鼇新話이다.
이곳에 있는 남산성은 남산 해목령을 중심으로 사방 4㎞ 되는 성으로서 진덕여왕 때 쌓았던 것을 문무왕 때 대규모로 수축하였다. 성벽의 높이는 일정하지 않고, 다만 지세에 맞추어 그 높낮이를 조정하였다.
유적뿐만 아니라 남산은 자연경관도 뛰어나다. 변화무쌍한 많은 계곡이 있고 기암괴석들이 만물상을 이루며, 등산객의 발길만큼이나 수많은 등산로가 있다. 엄지손가락을 곧추 세워 남산을 일등으로 꼽는 사람들은 “남산에 오르지 않고서는 경주를 보았다고 말할 수 없다.”라고 한다. 곧, 자연의 아름다움에다 신라의 오랜 역사, 신라인의 미의식과 종교의식이 예술로서 승화된 곳이 바로 남산인 것이다.
문천의 겨울
윤경렬 기념관을 지나 문천을 따라 내려가면 먼자 나타나는 이정표는 불곡마애여래좌상으로 이제부터 동남산의 불국토를 탐방하는 것이다. 길에서 제법 떨어진 산위로 올라가면 여래좌상이 나온다.
이정표
남산고분지구 표시
산길을 제법 걸어 언덕을 넘어가면 고분지구가 나오고 길을 따라 내려가면 마애여래좌상이 나타난다.
경주 남산 불곡 마애여래좌상(慶州 南山 佛谷 磨崖如來坐像)은 경주시 남산 동쪽 기슭 부처 골짜기의 한 바위에 깊이가 1m나 되는 석굴을 파고 만든 삼국시대 마애불 좌상으로,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98호 경주남산불곡석불좌상(慶州南山佛谷石佛坐像)으로 지정되었다가, 2010년 8월 25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이 석불은 높이 3m, 폭 4m 정도 되는 바위에 높이 1.7m, 폭 1.2m, 깊이 0.6m의 감실을 파 그 안에 새긴 것으로 불상의 높이는 1.4m 정도이다. 감실은 입구가 아치형으로 되어 있고 석굴의 느낌을 주는데 산죽이 무성한 대숲 사이 작은 바위 속에 새겨진 석불좌상은 조각양식으로 보아 고 신라의 것으로 보이며 현재 남아 있는 남산의 불상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 불상으로 인하여 계곡 이름을 부처 골짜기라고 부르게 되었다.
불곡마애여래좌상
불곡마애여래좌상에서 탑곡마애불상군으로 가는 이정표를 따라 탑곡으로 갔다. 그런데 가는 길에 보이는이정표가 탑곡 혹은 탑골로 표기되어 있다. 물론 한자어 표기와 우리말 표기의 차이지만 하나로 통일하고 병기하는 것이 올바른 표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는 길에 울창한 대숲
탑곡(塔谷)은 남산 전망대 부근에서 북동쪽으로 흐르는 계곡이다. 마애불상군이 있는 부처바위에 삼층석탑이 한 기 서 있는데, 그 탑 때문에 탑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탑골은 남산의 동쪽 면인 동남산에서 세 번째로 깊다. 남산 북쪽 기슭에 신라의 궁성인 반월성이 있고, 그 앞에 남천이 흐르고 있는데, 반월성 앞 남천을 동쪽으로 1.6킬로미터쯤 거슬러 가면 탑골의 계곡물이 남천으로 흘러드는 곳에 탑골마을이 있다. 마을에서 탑골 여울을 거슬러 150미터쯤 들어가면 옥룡암이라는 작은 암자가 있다. 이육사가 이곳에서 요양한 적이 있으며, 지금은 불무사라 이름을 고쳤으나, 여전히 옥룡암이라 부르는 이들이 많다. 이 암자의 산령각과 칠성각 사잇길로 들어가면 자그마한 대숲이 있고, 대숲을 지나면 마애불상군이 새겨진 바위가 나타난다.
곳곳에 보이는 유적 설명
경주 남산 탑곡 마애불상군(慶州 南山 塔谷 磨崖佛像群)은 경주시 남산 탑곡에 있는 남북국 시대 신라의 마애불 여럿이다. 9미터나 되는 사각형의 커다란 바위의 네 면에 거의 빈틈없이 마애불상군의 만다라적인 조각이 회화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불상, 보살상, 스님의 조각상, 비천상 등 23구의 조상이 있을 뿐 아니라 9층탑·7층탑과 사자상, 보리수로 보이는 나무 등을 조각하여, 천상과 지상의 정토를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모두 암벽을 갈아 부조로 새긴 것이며, 남면에 입체 여래상 1구가 있다.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201호 경주남산탑곡마애조상군(慶州南山塔谷磨崖彫像群)으로 지정되었다가, 2010년 8월 25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남산 탑곡 마애불상군의 여러 모습
옥룡사
여기에서 하나 의아스러운 점이 보였다. 남산 탑곡 마애불상군을 가리키는 표시에 옥룡사 경내에서는 남산 탑곡 마애조상군이라는 옛 명칭으로 표시가 되어 있었다. 이런 점은 제대로 고쳐서 표시를 만들어야 하는데 무언가 조금은 미흡한 것 같았다. 그래서 경주시 관광안내국에 전화로 알려 주었다.
옥룡사를 내려오니 미륵곡석조여래좌상으로 가는 이정표가 보여 발길을 옮겼다.
이정표
미륵곡 석조여래좌상(彌勒谷 石造如來坐像)은경주시 배반동 미륵골에 있는 보리사(菩提寺)에 있는 석불좌상으로 통일신라시대의 화강석제 불상이며 1963년 1월 21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전체 높이 4m, 불상 높이 2.35m, 광배(光背) 2.7m이다. 얼굴은 둥글지만 풍만하지 않으며, 가는 눈과 날카로운 코, 뚜렷한 입에 침잠(沈潛)한 웃음이 8세기 신라인의 정신적 고고함과 비범한 조각솜씨를 보여준다. 1,300여년 전에 조성된 8세기 신라 불상의 세련된 불격(佛格)을 사실주의 조각으로 성공시킨 당대의 역작으로 높이 평가된다.
미륵곡 석조 여래좌상
보리사에서 보는 경주 일원
미륵곡 석조 여래좌상을 보고 보리사 마애불상을 보려고 하니 제법 가파른 산길로 올라가야 했다. 산을 오를 준비도 하나도 갖추지 않아 포기를 하고 보리사를 내려와 길을 따라 걸으니 경상북도 산림환경연구소의 울창한 숲이 나오고 계속 길을 따라 가니 화랑교육원이 나온다.
경상북도 산림환경연구소의 울창한 숲
화랑교육원(花郞敎育院)은 1971년 착공해서 1973년 5월 30일에 준공된 우리나라 최초의 학생교육원으로 개원한 이래 화랑의 얼을 계승하여, 국가관을 확립해 바른 품성과 인격을 도야하기 위해 교원 연수교육과 청소년 수련교육, 재외 교포학생, 교육과 사관생도 교육 그리고 일반 대학교 학생들은 교육과 공무원 교직 등을 담당하고 있다.
화랑교육원을 지나 조금 가면 헌강왕릉이나오고 조금 더 가면 정강왕릉이 나온다. 별다른 특징이 없고 다른 왕릉에 비하며 다소 작은 릉이다.
헌강왕은 이름은 정(晸)이며, 경문왕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문의왕후(文懿王后), 비는 의명부인(懿明夫人)이다. 875년에 즉위하여 886년에 승하할 때까지 12년간 재위하면서 문치와 내정에 힘썼다. 헌강왕릉은 1969년 8월 27일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면적은 6만 9,626㎡이다.
무덤 양식은 널길을 동벽에 편향해서 설치한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墓〕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헌강왕이 승하한 뒤 보리사(菩提寺)의 동남쪽에 장사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보리사를 기준으로 이에 해당하는 무덤을 헌강왕릉으로 비정하는 것이다.
헌강왕릉
정강왕릉(定康王陵)은 1969년 8월 27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보호구역이 35만 6,400m2이고, 887년(진성여왕 즉위)경에 조성되었다. 정강왕은 신라 제50대 왕으로 별로 치적이 없음에도 능의 형식이 선왕인 헌강왕릉의 것과 같은 것은 태평성세를 누렸기 때문인 듯하다.
정강왕릉
정강왕릉을 내려와 통일전으로 가는 길에 굽은 소나무가 눈길을 끌었다. 우리나라 곳곳에 굽은 나무가 보이는 곳이 많지만 또 다른 자태를 나타내고 있었다.
굽은 소나무
통일전에 도착하여 안으로 들어가려니 월요일이라 문을 열지 않았다. 그래서 안내원과 잠시 이야기를 하고 지도를 얻고 서출지로 향했다.
통일전은 삼국통일의 정신을 계승하고, 다가올 남북통일을 기원하는 국민의 전당이다. 경내에는 태종무열왕, 문무대왕, 김유신 장군의 영정이 모셔져 있으며, 통일의 격전을 생생히 보여주는 기록화가 긴 회랑을 따라 전시되고 있다. 남산 답사 도중 잠시 호국영령을 참배하고 너른 잔디밭에서 쉬는 것도 좋을 듯하다.
통일전
통일전 바로 옆에 서출지라는 연못이 있다. 서출지(書出池)는 남산동에 있는 삼국시대의 연못으로 신라 소지왕 때 이 못 근처에서 왕비의 비행(非行)을 알리는 봉투가 나온 곳이라 해서 서출지라 부른다. 1964년 사적 제138호 서출지로 지정되었다가, 2011년 경주 서출지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488년에 왕이 남산 기슭에 있던 ‘천천정’이라는 정자로 가고 있을 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더니 쥐가 사람의 말로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쫓아 가보라’ 하니 괴이하게 여겨 신하를 시켜 따라 가보게 하였다. 신하는 이 못에 와서 두 마리의 돼지가 싸우는 것에 정신이 팔려 까마귀가 간 곳을 잃어버리고 헤맸다. 못 가운데서 한 노인이 나타났는데 그 노인이 어떤 봉투를 건네줘서 왕에게 그것을 올렸다. 왕은 봉투 속에 있는 내용에 따라 궁에 돌아와 화살로 거문고집을 쏘게 하니, 왕실에서 향을 올리던 중과 궁주가 흉계를 꾸미고 있다가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 못에서 글이 나와 계략을 막았다 하여 이름을 서출지(書出池)라 하고, 정월 보름날은 오기일(烏忌日)이라 하여 찰밥을 준비해 까마귀에게 제사지내는 풍속이 생겨났다. 서출지의 전설은 전통적 민속신앙 속에 새로운 불교문화가 전래되는 과정에 빚어지는 갈등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서출지 가에 있는 이요당은 조선시대의 정자이다. 조선후기의 학자 이요당(二樂堂) 임적(任勣:1612~1672)이 1664년(현종 5)에 건립하였다고 한다. 서출지에 둘러싸여 있는 이요당 주변은 경주에서도 명승지로도 꼽힌다. 특히 한여름에 연꽃이 만발하고 배롱나무가 만화할 때 연못 풍경은 가히 환상적이라 할 수가 있다. 배롱나무들이 붉은 꽃을 피우고, 연못의 연꽃들이 피어올라 다양한 색채의 장관을 이루기도 한다고 전한다.
서출지와 이요당
서출지 옆의 무량사
서출지에서 다시 길을 따라 가면 나오는. 남산동 동·서 삼층석탑(南山洞 東西 三層石塔)은 통일신라 시기에 조성된 2기의 석조 불탑으로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동탑 높이 7.04m, 서탑 높이 5.55m로 탑의 규모와 제작된 형식이 서로 다르게 생겼으며 동쪽과 서쪽에 마주하며 배치되어 있다. 남산 사지의 쌍탑 중 동탑은 모전석탑(模塼石塔)이고 서탑은 일반형 석탑이다.
남산동 동·서 삼층석탑
여기서 칠불암가는 길을 따라 제법 가면나오는 이름도 조금 이상한 (전)염불사지 동·서 삼층석탑(傳 念佛寺地 東‧西 三層石塔)은 남산동에 있는 삼층석탑 2기로 동탑의 높이는 583cm, 서탑의 높이는 585cm로 남산동 전 염불사지에 있으며 2022년 11월 25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석탑이 위치한 장소는 8세기에 창건되어 12세기까지 운영된 사찰이 있었던 자리로 추정된다. 이곳에 위치했던 사찰의 명칭은 '염불사', '피리사', '봉구곡사' 등 다양한 명칭이 기록으로 전하고 있으나, 사찰의 명칭을 단정할 수 있는 결정적인 자료가 부족하여 전(傳: 전할 전) 염불사지로 명명되었다.
석탑 건립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언제 석탑이 세워졌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석탑의 건축양식을 볼 때 8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에 촬영된 사진에 의하면 그때 당시에도 사찰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았고, 염불사지 대부분이 농경지로 사용되고 있었으며, 석탑도 모두 붕괴된 상태였다. 이후 여러 차례 발굴 조사를 거쳐 2007년부터 2009년까지 동탑과 서탑의 이전 및 복원 공사를 진행하였고, 2009년 복원이 완료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염불사지 동·서 삼층석탑
경주 동남산 전경
여기까지를 돌아보고 나니 벌써 시간이 많이 지났다. 오늘만이 날이 아니기에 다음날을 기약하고 통일전까지 걸어가서 버스를 타고 경주시외버스터미널로 가서 집으로 향했다.
다음은 남산 삼릉골 주변을 돌아볼 생각이다.
'鶴이 날아 갔던 곳들 > 발따라 길따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경주4 - 낭산 일대와 분황사, 황룡사 (0) | 2025.01.16 |
---|---|
경주3 - 계림과 교촌마을 오릉 일대 (2) | 2025.01.09 |
경주2 - 월성일대와 박물관 (1) | 2025.01.07 |
경주1 - 대릉원주변 고분들 (4) | 2025.01.05 |
서해랑길 94코스(남동체육관입구 - 오봉산 - 논현포대근린공원 - 선학역 3번출입구) (2) | 2024.12.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