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鶴)의 오딧세이(Odyssey)

경주2 - 월성일대와 박물관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대릉원 주변의 고분군에서 길을 따라가면 첨성대가 나온다. 봄과 가을에는 첨성대 주변의 야생화단지에 아름다운 꽃이 만발하여 눈을 즐겁게 하지만 지금은 한겨울이라 꽃은 보지 못하고 첨성대를 구경하는 사람들만 본다. 오랜만에 보는 첨성대는 예전에 보는 것과 다르다. 첨성대뿐만 아니라 경주의 유적지 모두가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것같다.

 

 첨성대(瞻星臺)는 다른 별칭으로 점성대(占星臺)라고도 하며 삼국시대 신라 시기의 천문관측소다. 높이는 약 9.5m로 첨성대가 위치한 곳은 옛날에는 경주부(慶州府) 남쪽 월남리(月南里)라고 하였고, 계림(鷄林)의 북방 약 150200m, 내물왕릉 동북방 약 300m 되는 곳이다. 이 근방을 속칭 비두골이라고도 한다.

 첨성대는 <삼국유사> 기이(紀異) 2의 별기(別記)이 왕대(王代)에 돌을 다듬어서 첨성대를 쌓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신라 선덕여왕 때(재위 632647)에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같은 책 왕력(王曆) 1에 신라 제17대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 이야기 끝에 능은 점성대(占星臺) 서남에 있다.’라는 기사가 있는데 현재의 내물왕릉과 첨성대의 위치 관계와 잘 부합된다. 이 기록에서 첨성대가 별명으로 점성대라고 불렸던 것을 알 수 있다.

 구조는 아래의 기단부(基壇部), 그 위의 술병형의 원통부(圓筒部), 다시 그 위의 정자석(井字石) 정상부(頂上部) 등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고, 1315단에 걸쳐서 정남에서 동쪽으로 약 16°가 되는 방향을 향하여 한 변이 약 95인 정방형의 창구(窓口)가 나 있다.

 첨성대의 석재는 화강석(花崗石)인데 표면에 노출된 부분은 모두 다듬어져 있다. 한편 첨성대의 문이 탑의 중간에 위치한 것은 석가모니가 어머니 마야부인의 겨드랑이(혹은 옆구리)에서 태어난 것을 상징하며, 첨성대에 사용된 364개의 화강암 벽돌은 각각 1년의 하루를 상징하고 거기에 선덕여왕의 1이 추가되어 1365일이 완성된다는 해석이 있다. 석재의 개수는 종래 365개라고 하였으나 기단석까지 포함하느냐 않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따라서 정확히 365개는 아니다.

 첨성대를 중심으로 경주의 대릉원 내 고분과 미추왕릉, 중요 유적들은 하늘의 별자리가 그대로 지상에 내려와 앉은 것처럼 모양새가 일치한다는 주장도 있었으며, 첨성대에서 창문으로는 반월성의 궁궐 전각이 바로 보인다.

 20169월 경주에 발생한 지진의 여파로 석축이 지진 발생 전에 비해 약 1.2 cm 정도 벌어졌지만 균열은 없었다고 한다.

 

첨성대 옆에 있는 문호사

 

첨성대에서 보는 고분들

 

첨성대의 여러 모습

 

 이제는 내가 나이를 들었는지 예전에 보던 첨성대보다는 작게 보인다. 첨성대는 그대로인데 내가 보는 시선이 달라진 것이다. 세월이 참 많이도 흘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첨성대를 벗어나 월성쪽으로 가는 길에 경주 동부사적지대라는 입간판이 보이고 발굴이 진행 중이다. 경주는 땅만 파면 유적이고 유물이 나온다는 말과 같이 아직도 곳곳에서 발굴이 진행 중이다.  무려 천년의 세월 동안을 한 국가의 수도였으니 그럴만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경주동부사적지대

 

 동부사적지대 발굴지를 지나니 월성이 보이기 시작하고 월성 앞에 펼쳐져 있는 해자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해자를 따라 걸으니 해자 안의 물고기를 노리는 새가 띄이어 새가 날아오르기를 기다렸으나 새는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의 먹이만 노리고 있었다. 자연에서의 생존 본능을 느끼게 하는 광경이었다.

 

월성해자 앞에서 멀리 보이는 첨성대

 

월성해자

 

 월성(月城)은 경주시 인왕동에 있는 101(파사왕 22)에 축조한 신라 때의 성으로 196312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재성(在城)이라고도 하였고, 반월성(半月城)이라고도 불린다. <삼국사기>에서는 101(파사 이사금 22)에 월성을 쌓았다고 전하나, 2021년의 발굴조사 결과 문헌 기록과 약 250년 차이 나는 4세기 중엽부터 쌓기 시작해 5세기 초에 이르러 완공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삼국사기>에 보면 주위가 1,023()이며, 자연적인 언덕 위에 반월형으로 흙과 돌을 혼용하여 쌓았고, 여기에 신라 역대 왕들의 궁성이 있다고 기록되었다. <동경잡기(東京雜記)>에는 290(유례왕 7) 큰 홍수로 월성이 무너져 이듬해 보수하였으며, 487(소지왕 9)에 다시 이곳으로 옮겼다고 적혀 있다.

 

 옛 기록에 따르면 월성을 중심으로 궁성의 많은 문과 누각이 있었으며. 또 관청도 많았다고 한다. 왕궁으로는 내성(內省) 임해전(臨海殿) 안압지(雁鴨池) 동궁(東宮) 동궁만수방(東宮萬壽房) 영창궁(永昌宮) 영명궁(永明宮) 월지궁(月池宮) 내황전(內黃殿) 내전(內殿) 내정(內庭) 등이 있다. 영명궁은 태후의 궁이었고 월지궁은 왕태자의 궁이었다. 천존고(天存庫)에는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文武王)의 전설과 관계가 있는 만파식적(萬波息笛)이 보관되어 있었다.

 

 <삼국유사>를 보면 월성터(月城址)는 원래 충신인 호공(瓠公)의 거주지였는데, BC 19(박혁거세 39) 석탈해(昔脫解)가 금성(金城)의 지리를 살펴본 뒤에 가장 좋은 길지(吉地)로 호공의 집터를 지목하여 거짓 꾀를 부려 호공의 집을 빼앗아 월성을 쌓았다. 이 공으로 석탈해는 남해왕(南解王)의 맏사위가 되었고, 그 후에 신라 제4대 왕위에 올랐다. 기록에 따르면 월성의 주인은 여러 차례 바뀌었다. 처음에는 왜계 사람인 호공이 소유하였다가 얼마 뒤에는 바깥으로부터 경주분지로 진입한 석탈해의 점유가 되었다. 특이하게도 외부 세계로부터 사로 지역으로 진입한 새 이주민이 교대로 월성을 장악하였다는 것은 서로 점거하기 위해 다툴 만한 대상지로 이곳이 갖는 중요성을 시사해주는 증거로 채택된다. 그 뒤 박씨인 파사 이사금이 월성을 축성한 사실은 곧 패권 장악과 함께 석씨 족단에게서 넘겨받았음을 뜻하는 것으로도 여겨진다. 마침내 정치적 주도자로 새롭게 부상한 김씨 마립간이 신라왕조의 건설에 성공하자 그 표상으로서 자신들의 원래 거소 대신 월성을 왕궁으로 삼게 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결과적으로 월성은 사로국 및 신라의 패권을 장악한 자의 몫이 되었다.

 

 성의 동쪽 서쪽 북쪽은 흙과 돌로 쌓았으며, 남쪽은 절벽인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성벽 밑으로는 물이 흐르도록 인공적으로 마련한 방어시설인 해자가 있었으며, 동쪽으로는 경주 동궁과 월지로 통했던 문터가 남아있다. 성 안에 많은 건물터가 남아있으며, 1741년에 월성 서쪽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석빙고가 있다.

 

 성 바로 북동쪽에 동궁과 월지가 있다. 지금은 월성과 동궁 사이에 원화로라는 도로가 났지만 원래는 하나의 궁처럼 연결되었다고 추정한다. 또한 바로 남동쪽에는 국립경주박물관이 있는데 여기도 1974년 건설 당시, 그리고 2000년에 왕궁터로 추정되는 유물이 발굴되어 역사학자들이 동궁과 함께 남궁(南宮)이 있었는데 그 터에 박물관을 세웠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월성탐방로

 

 월성탐방로를 한가로이 걸어가면서 이곳저곳을 구경하고 있으니 제법 많은 사람들이 한가하게 이 곳을 거닐고 있었다. 탐방로를 따라 계속 가니 석빙고가 나타난다. 그런데 이 석빙고는 신라 시대의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막연하게 신라시대의 것이려니 하고 착각을 하지만 신라의 것은 아니다.

 

 경주 석빙고(慶州 石氷庫)는 얼음을 저장하기 위하여 만든 석조 창고를 말한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얼음을 채취하여 저장하는 일은 신라 때부터 있었다고 하는데, 그러나 신라 때 축조된 빙고는 현재 남아 있는 것이 없으며, 고려시대에도 정종, 문종 때 얼음을 나누어주는 기록이 나오지만 그 얼음을 저장했을 석빙고 유구(遺構)는 지금까지 발견되거나 조사된 바 없다. 경주 석빙고는 1738년 경주시 인왕동 월성(月城)의 북쪽에 축조한 조선시대의 화강석 얼음창고로 1963121일 보물로 지정되었고, 규모는 길이 18.8m, 홍예(紅霓) 높이 4.97m, 너비 5.94m이다.

 

 내부는 연석(鍊石)으로 5개의 홍예를 틀어 올리고 홍예와 홍예 사이에 길쭉한 네모 돌을 얹어 천장을 삼았다. 천장에는 3곳에 환기 구멍을 마련하여 외기와 통하게 하였는데, 조각한 돌로 구멍을 덮어 비와 이슬을 막고 있어 다른 석빙고와는 달리 정연한 양식과 축조를 보여 주목을 끈다. 석빙고 옆에는 석비가 있어 축조연대를 알 수 있는데, ‘崇禎紀元後再戊午1738(영조 14)에 해당하고, 다시 입구의 미석(楣石)崇禎紀元後再辛酉移基改築이라 새겨져 있어, 축조한 지 4년 만에 현위치에 옮겨 개축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서쪽으로 약 100m 되는 곳에 옛터로 전하는 자리가 있다.

 

 조선 후기에 곳곳에 여러 석빙고를 축조하였으나, 그 규모나 기법에서 이 석빙고가 가장 정연한 걸작으로 꼽힌다.

 

경주 석빙고

 

아직도 진행 중인 월성 발굴지

 

 월성을 한가로이 거닐며 구경하고 내려와서 길을 건너면 동궁과 월지가 나타난다. 사실 이곳은 옛날부터 안압지로 우리에게 더 잘 알려진 곳이다.

 

 경주 동궁과 월지(慶州 東宮月池)는 안압지 서쪽에 위치한 신라 왕궁의 별궁터이다. 다른 부속건물들과 함께 왕자가 거처하는 동궁으로 사용되면서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이곳에서 연회를 베풀었다고 한다. 674(문무왕 14) 경주시 인왕동에 신라 왕궁의 별궁(別宮)으로 동궁(東宮) 안에 창건된 전궁(殿宮) 터로 196312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삼국사기>의 임해전에 관한 기록을 보면 임해전은 정사(政事)를 보는 궁이 아니고, 잔치나 나라의 손님들을 모시는 기능을 하였으며, 그 시기는 대개 3월 또는 9월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는 임해전과 월지의 경치가 가장 좋은 때이기도 하다.

 

 이 월지와 임해전의 유적은 1974~1976년에  발굴 조사되었다. 월지는 이 동궁에 붙은 정원의 못이다. <삼국사기>에는 임해전에 대한 기록만 나오고 안압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는데, 조선시대 <동국여지승람>에서 안압지의 서에는 임해전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현재의 자리를 안압지로 추정하고 있다. 임해전은 별궁에 속해 있던 건물이지만 그 비중이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이며 안압지는 신라 원지(苑池)를 대표하는 유적이다.

 

 그래서 1980년에 임해전으로 추정되는 곳을 포함하여 서쪽 못가의 신라 건물터로 보이는 5개 건물터 중 3곳과 안압지를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동궁과 월지의 여러 모습

 

 동궁과 월지를 이곳저곳 구경하며 다니니 한 무리의 여인들이 사진을 찍어 달라고 요청하여 여러 장 찍어 주었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여인들은 친구들인 것같은데 여가를 틈타서 옛날의 추억을 살리고 있는 듯했다.

 

 동궁과 월지를 벗어나서 조금 걸어가면 국립경주박물관이 나온다. 여러 번 이곳에서 말했듯이 나는 박물관 탐방을 아주 좋아한다. 그래서 어디를 가든지 꼭 박물관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래서 경주박물관은 숱하게 왔지만 올 때마다 새롭다.

 

박물관입구

 

 박물관을 들어가면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이 일명 에밀레종이라고 알려져 있는 성덕대왕신종이다.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은 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범종이다. 742년부터 신라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의 공덕을 널리 알리기 위해 만들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손자 혜공왕이 771년에 완성했다. 봉덕사에 달았다가 조선시대인 1460년 수해로 봉덕사가 없어지자 영묘사(靈妙寺)로 옮겼으며, 다시 봉황대(鳳凰臺) 아래에 종각을 짓고 보존하다가 경주읍성 남문인 징례문에 걸어두었다가 19158월 경주고적보존회에 의해 구()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다. 19755월 국립경주박물관이 신축됨에 따라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이 종은 처음에 봉덕사에 달았다고 해서 봉덕사종이라고도 하며, 아기를 시주하여 넣었다는 전설로 아기의 울음소리를 본따 에밀레종이라고도 한다. 19621220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29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3.66m, 입지름 2.27m, 두께 1125cm이며, 무게는 1997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정밀측정한 결과 18.9톤으로 확인되었다.

 

 종의 맨 위에는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音筒)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동종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이다. 종을 매다는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龍鈕)는 용머리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다. 종 몸체에는 상하에 넓은 띠를 둘러 그 안에 꽃무늬를 새겨 넣었고, 종의 어깨 밑으로는 4곳에 연꽃 모양으로 돌출된 9개의 연꽃봉우리를 사각형의 연곽(蓮廓)이 둘러싸고 있다. 유곽(乳廓) 아래로 2쌍의 비천상(飛天像)이 있고, 그 사이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撞座)가 연꽃 모양으로 마련되어 있으며, 몸체 앞·뒷면 두 곳에는 종에 대한 내력이 새겨져 있다. 특히 종 입구 부분이 꽃모양으로 굴곡진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어 이 종의 특징이 되고있다.

 

 1992년 제야에 서른세 번 종을 친 뒤 한동안 타종을 중단하였다가, 1996년 학술조사를 위해 시험으로 다시 타종을 하였다. 200412월 안전 보존을 위해 더 이상 타종을 중단했다.

 

 지금은 정해진 시간에 예전 타종 시에 녹음을 해 두었던 소리를 들려준다. 내가 약 45년 전에 이곳을 찾았을 때 이 박물관에 학예관으로 있던 선배가 이 종을 그날 타종한다고 해서 듣고 가라고 해 기다렸다가 실제 타종의 모습과 종소리를 들은 기억이 새롭다. 이런 것도 나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하나의 좋은 추억이다.

 

성덕대왕신종의 사면

 

 성덕대왕신종을 구경하며 녹음된 소리를 듣고 박물과 내부로 향했다.

 

 경주시에 있는 국립경주박물관(國立慶州博物館)은 성덕대왕신종(국보)를 비롯한 신라시대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1913년 경주고적보존회(慶州古蹟保存會)가 결성되고, 1915년 옛 객사(客舍) 건물을 이용하여 신라 유물을 수집·전시하였다. 1929년 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慶州分館)이 되었으며, 19458·15광복과 함께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으로 출범하였다. 197572일 인왕동 신박물관으로 이전하였으며 같은 해 820일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승격되었다.

 소장유물은 8만 여 점이며 그 중 3,000여 점을 상설 전시하고 있다. 2009225일 기준 소장하고 있는 지정문화유산은 국보 13, 보물 30점이다. 옥외전시관에는 성덕대왕신종(국보), 고선사터 삼층석탑(국보) 등의 석조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박물관 본관의 여러 전시 유물

 

특별전시관의 유물들

 

 박물관을 나오니 벌써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원래 집에서 출발할 때에 정했던 여정을 반밖에 돌아보지 않았는데 벌써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아무런 바쁜 일정도 없기에 편안하게 마음대로 다니니 제법 시간이 많이 걸렸다. 하지만 남는 것이 시간이니 천천히 다음 날을 기약하고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