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코스가 끝나고 아들내외와 손자를 만나 즐겁게 지내고 다음날 아침 96코스 시작점인 자유공원앞까지 아들이 차로 데려다 주어서 편하게 시작을 한다.그런데 96코스 시작점에서 아무리 찾아도 안내판이 보이지 않고 자유공원 들어가는 입구에 조그마한 인증표만 붙어 있다.
96코스 시작점 표시
서해랑길 96코스는 자유공원 입구에서 시작하여 신포 문화의 거리, 송림초등학교를 지나 백범로를 지나 장고개로를 걸어 함봉산과 원적산을 넘어가서 대우 하나 아파트 입구에서 끝이 나는 14.4km의 비교적 짧은 길이나 코스의 마무리가 산을 넘는 것이라 쉽지는 않다..
자유공원 올라가는 입구
인천광역시 중구 송학동 해발 69m의 야트막한 산인 응봉산 일대 전역에 조성돼 있는 자유공원(自由公園)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 근대식 공원이며, 개항 당시에는 각국조계에 해당된다. 이 공원이 조성된 것은 인천항 개항 초기인 1888년이다. 당시 인천항을 통해 들어온 외국인 거주자들이 꽤 있었는데 이들이 여가를 즐길 수 있는 공원이 필요했다. 그래서 러시아 출신 토목 기사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이 1888년 응봉산(鷹峰山) 일대에 공원을 설계했고 꾸준한 확장 작업을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서울의 탑골공원보다 조성 시기가 9년이나 빠르기 때문에 이곳이 대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이자 근대식 공원이다.
공원 조성 당시 시민들은 이를 각국공원(各國公園)이라고 불렀고 그 뒤 일본의 세력이 커지면서 1914년 각국 거류지의 철폐와 함께 공원 관리권이 인천부로 넘어가면서부터 공원 명칭이 '서(西)공원'으로 바뀌었고, 1945년 해방 후에는 공원 명칭이 만국공원(萬國公園)으로 바뀌었다. 명칭이 '자유공원'으로 바뀐 것은 1957년부터다. 1950년 9월 인천 상륙 작전을 지휘한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공을 기리는 뜻에서 시민들이 성금을 모아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만들었고 공원 남동쪽 부지에 장군의 동상을 세웠다. 그리고 당시 인천시장에 의해 공원 명칭이 '자유공원'으로 명명됐다.
공원 내에는 맥아더 장군 동상을 비롯해 1982년 한-미 수교 100주년 기념탑이 세워져 있고 석정루나 연오정 등 팔각지붕의 전통 형식의 건물도 있다. 특히 석정루나 자유공원 광장에서 내려다보는 인천항 전경이 꽤 멋있는데 석양이 아름다운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매년 12월 31일에 서구 정서진과 월미도 등과 함께 해넘이 행사가 자유공원 광장에서 진행되곤 한다.
또 1919년 4월 23일 24인의 국민대회 13도 대표자들이 이 공원에서 모여 <국민대회 취지서>를 발표하고 <임시정부 선포문>을 선언함으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 축이자 한반도 유일의 임시정부였던 한성 임시정부의 수립을 의결한 곳도 바로 이 공원이다. 자유공원 광장에 임시정부 수립의 터전이었다는 것을 기념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효도권장비
멀리 아침이 밝아오는 광경
자유공원 설명판
맥아더장군 동상
인천학도의용대 호국기념탑
자유공원을 통과하여 내려오니 신포국제시장이 보인다. 하지만 아직은 이른 아침이라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이라 멀리서 보면서 통과한다.
신포국제시장
신포국제시장을 조금 지나 골목길로 들어가면 답동성당이 나타난다.
답동성당(天主敎 仁川敎區 主敎座 沓洞 聖 바오로 聖堂)은 인천광역시 중구 답동에 위치한 천주교 인천교구의 주교좌 대성당으로, 주보성인은 성 바오로이다.
19세기말 제물포에 성당이 건립된 것은 이곳이 서울의 관문이고 외국 무역의 거점이 될 수 있는 좋은 입지라는 점을 중시한 당시 조선교구장 블랑(1884∼90년 파리외방전교회) 주교의 결정에 의해서였다.
구한말 1897년에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코스트 신부의 설계로 처음 건립되었고, 페낭신학교에 있던 빌렘(홍 요셉 1860∼1938년)신부가 초대 주임신부를 맡아 인천지역 첫 번째 본당인 제물포본당(답동본당의 원래 이름)을 설립하게 되는데, 이때가 1889년 7월 1일이다.
답동성전의 건립은 빌렘 신부가 이듬해 지금의 성당 자리인 답동 언덕에 대지를 매입함으로써 첫 발을 내딛게 된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잠시 중단되었던 성전 건립은 1895년 정초식을 갖고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간다. 이듬해 종탑이 완공되고 마침내 1897년 7월 4일 조선교구장 뮈텔(1890∼1933년 재임) 주교가 참석한 가운데 300평 규모로 전면에 3개의 종탑을 갖춘 로마네스크 양식의 역사적인 성전 축성식이 거행됐다. 1937년에 시잘레 신부의 설계로 증축된 991.74m²(300평) 규모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벽돌조 건물이며 한국의 성당 중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근대 건축물 중 하나이다. 웅장하고 화려한 자태로 인천 시민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아온 답동성당은 문화 예술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1981년 사적 287호로 지정됐다.
서울로 들어오는 관문이자 외국 무역의 거점이 될 수 있는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는 제물포에 건립된 이후 답동성당의 아름다운 자태와 위용으로 인천의 역사적인 건축물이자 종교 유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답동성당의 여러 모습
답동성당의 여러 곳을 둘러보고 성전에 들어가 잠시 기도를 한 후에 길을 다시 걸어 시가지로 향한다. 시가지 길을 이리저리 걸어가니 백범로가 나오고 백석중고등학교가 보인다.
시가지의 여러 모습
시가지 길을 계속 걸어가니 장고개라는 설명판이 보이고 이제 산으로 올라가게 한다. 여기서부터 함봉산으로 가는 길이다. 함봉산은 부평도서관 뒷산을 지칭한다. 옛날 이 산에는 나무가 울창하여 호랑이가 살았다는 말이 있어서 함봉산이란 호랑이가 우는 소리가 들리는 산이란 뜻인데 이것은 한자 풀이일 뿐 확실치 못하다.
장고개 설명
한남정맥 안내도
높지 않은 함봉산을 지나니 원적산이 나타난다. 원적산(元積山)은 부평구와 서구의 경계에 위치한 산이다. 원래 표기는 ‘元’이 아니라 ‘怨’으로 원한이 맺힌 산이란 뜻이라고 한다.그 이유는 조선시대 세곡을 뱃길로 운반할 때 삼남지방의 세곡선이 김포를 지나 강화해협을 지나는데 손돌목에서 자주 좌초되어 서해바다와 한강을 연결하는 굴포작업을 하는데 원통이 고개를 파니 암석만 나와 실패하고 또 다시 안아지 고개를 파도 뜻을 이루지 못하자 원통하고 원한이 맺힌 산이라 해서 원적산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원적산공원은 부평구 산곡동, 청천동 2개동에 걸쳐 남북으로 길게 위치한 공원으로, 인천의 중요한 녹지축이 되는 공원으로 인조잔디구장, 다양한 체육활동 공간과, 생태습지, 발물놀이터 등이 마련되어, 많은 시민의 사랑을 받고 있는 공원이다.
원적정
원적산 등산 안내도
원적산을 내려오니 멀리 종점인 대우하나아파트가 보이고 아파트 버스정류장에서 이 코스는 끝이 난다.
저번에 서해랑길 94코스를 걷고 겨울이 와서 눈도 내리고 기온이 많이 떨어져 걷기를 쉬다가 따뜻한 봄이 오길래 나머지 구간을 걷기로 마음먹고 집을 떠나 95코스로 갔다. 부산에서 인천의 선학역까지 가는 길이 만만하지 않으나 내가 걸어야 하는 길이기에 일찍 부산을 출발했다.
서해랑길 95코스는 선학역 3번 출구에서 시작하여 문학산을 넘고 인천의 신구 시가지를 따락 걸으며 인천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볼 수 있는 길로 마지막 종점은 차이나타운을 지나 자유공원 입구이다.
95코스 안내판
선학역 3번 출구에서 출발하여 문학산 입구로 가니 식당이 즐비하다. 점심 때도 되어 점심을 먹고 문학산으로 올라가려니 인천의 연수둘레길과 같이 가는 표시가 있다.
연수구 음식특화거리
연수둘레길 안내판
문학산은 인천의 고대 왕국이었던 미추홀의 진산으로 인천의 역사와 함께 하였지만, 1965년부터 50여 년간 군부대가 주둔한 때문에 시민들은 오래도록 정상을 오르지 못했다. 그러다가 2015년 10월 15일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제 옷을 갈아입는 문학산을 오르는 길은 다양하다. 문학산은 해발 217m로 그리 높지 않은 산이나 바위가 많아 등산화 착용은 필수다. 정상에 오르면 문학산 표지석과 예전 봉수대를 재현한 상징물을 만나게 된다. 도시 전경이 숨결처럼 산자락을 타고 오르고, 시계가 좋으면 청량산을 넘어 팔미도와 무의도까지 보인다고 하는데 오늘은 미세 먼지가 뿌옇게 덮여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이 산에 있는 문학산성은 인천광역시기념물 제1호로, 임진왜란 때는 인천부사였던 김민선이 백성과 함께 나라를 지킨 구국의 현장이기도 하다. 성 둘레는 577m, 현존하는 부분은 339m이다.
문학산 오르는 길
문학산에서 보는 풍경(문학야구장)
문학산 주변 문화유산 설명
문학산의 명칭은 조선 전기 관찬 지리지인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문학산이라는 명칭은 보이지 않고, 남산(南山)이라고만 기록되어 있어 이 때까지는 앞산이라는 의미에서 남산으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문학산은 원래 '학산(鶴山)'이라고 하던 것을 근처 문묘(文廟)에서 '문(文)'자를 따와 문학산으로 부르게 된 것인데, '학산'이라는 명칭은 이 산에 학이 많이 살았기 때문이라거나 산세가 날개를 펼친 학의 모양을 닮아서라는 설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문학산 정상의 모습
문학산 정상에서 내려오는 길가에는 문학산 주변의 여러 역사적 사실을 설명해 놓은 것이 많이 눈에 띈다. 특히 이곳이 비류백제의 미추홀이었다는 역사를 중시하여 미추홀에 대한 설명을 많이 해 놓았다.
일송정
산을 내려오면서 일송정을 지나 조금 더 내려오니 무슨 역사적 유적을 발굴하고 있다. 나도 한 때는 이 방면에 관심이 많아 참여도 해 보았기에 궁금해서 발굴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청동기시대의 주거지를 발굴 중이라고 하엿다.
발굴현장
산을 내려와 시내를 따라 걸으니 백제사신길이라는 표시가 있고 사신의 행렬들을 설명하고 있는 벽화가 계속 늘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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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중국으로 파견 가는 백제 사신들은 부평별 고개와 사모지 고개를 거쳐 지금의 옥련동 한나루에서 배를 타고 떠났다. 이곳에 서서 세 번 이름을 부르고 이별하던 고개라 하여 삼호현이라 불렀다.
조각의 거리에 서 있는 조각품
옥련시장
계속 시내를 따라 걸어가니 능허대가 나온다. 지금은 공원 일대를 공사중이라 통행을 금지해 놓아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 능허대(凌虛臺)는 백제가 근초고왕 27년(372년)에 처음으로 중국에 사신을 파견한 이래 중국으로 가는 우리의 사신들이 출발했던 나루터가 있던 곳으로 이 나루터는 한나루(漢津)라 불렸다. 능허대지(凌虛臺址)는 인천광역시 연수구 옥련동에 있는 문화재로 1990년 11월 9일 인천광역시의 기념물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아파트와 유원지가 개발되어, 도심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현재 능허대 공원으로 조성된 이곳에는 작은 정자와 연못이 있으며, 연못에는 인공폭포와 분수대가 있다.
능허대의 명칭은 소동파의「적벽부」에 나오는‘능만경(凌萬頃)’의 ‘능(凌)’과 ‘빙허어풍(憑虛御風)’의 ‘허(虛)’를 따서 ‘만경(萬頃)을 넘어(능 : 凌) 을 하늘(허 : 虛)을 오른다.’라는 뜻이다.
능허대의 여러 모습
능허대를 지나 남항해안공원으로 가는 길은 인천이ㅡ 갯벌을 옆에 끼고 걷는 시내 길이다. 한쪽에서는 자동차가 싱싱 달리고 한쪽은 바다 갯벌이 펼쳐지는 길을 따라 걷는다.
갯벌과 남항그린공원 모습
시내를 계속 걸어가면서 보니 조금 생소한 교회가 보인다. '천부교'라는 교회다. 집에 돌아와서 찾아보니 천부교(天父敎)는 박태선 장로가 1955년에 창시한 반기독교 성향의 신흥종교로 박태선을 하나님으로 믿으며 박장로교 또는 전도관(傳道館)이라고도 하며,우리에게는 교인들의 신앙공동체인 신앙촌으로도 유명하다. 박태선 교주를 육신을 입고 내려온 신(하나님)으로 주장하고 그를 ‘감람나무 하나님’이라고 부르기도 해서 영미권에서는 감람나무 교회(Olive Tree Church)라고 불린다고 한다.
천부교 교회
계속 길을 걸어가니 인천개항누리길이 나온다. 인천 개항 누리길은 인천광역시 중구 인천역 부근 개항장 일대에 조성된 길로 근대 개항기 역사와 문화를 체험하며 걷는 테마길이다.
인천의 올레길로 불리는 누리길(세상을 즐기는 길)은 2006년부터 운영해 온 도보 관광 코스로 근대 역사 건축물 등 문화유적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춘 문화관광해설사의 재미있고 유익한 해설을 들으며 도보로 관광할 수 있는 테마관광코스이다. 이 길을 걸어가면서 오래된 개항기의 건물들을 볼 수 있다.
구 인천유체국 건물
구 인천 일본 제1은행 지점(舊仁川日本第一銀行支店)은 일본 제1은행이 개화기 인천에 설치한 지점으로 근대건축물로 인천광역시 중구 신포로23번길에 있으며 1982년에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됐다.
1883년 인천을 개항한 후, 일본 제1은행 부산지점이 개설한 인천출장소가 전신으로, 초기에는 해관 통관세를 취급하였다. 1899년(고종 광무 3년)에 지금의 건물을 신축하여 1911년에는 조선은행 인천지점, 1950년 한국은행 인천지점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조달청 인천사무소, 법원 등기소 등으로 활용되다가 2010년 인천개항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건물은 일본인 니이노미 다카마사가 설계하여 모래, 자갈, 석회를 제외한 나머지의 모든 건축 재료를 일본에서 직접 가져와 만들었다. 1899년에 만들어진 지상 1층 건물로 석재 기단부와 수평 줄눈의 안정되고 견고한 외관을 지니고 있다. 돌출된 출입문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으로 구성된 석조 건축물이다. 현관 상부는 아치 구조이며 지붕에는 중앙 돔과 작은 천창을 설치하였다. 처마 부분에는 동그란 구멍이 뚫린 석조 난간을 올렸다.
구 인천제1은행 지점 건물
우리나라 최초의 태극기
인천의 개항누리길을 따라가면서 여러 건물을 구경라며 다다른 곳이 유명한 인천의 차이나타운이다.
인천차이나타운은 1883년 인천항이 개항되고 이듬해 청나라 조계지가 설치되면서 중국인들이 현 선린동 일대에 이민, 정착하여 그들만의 생활문화를 형성한 곳이다. 화교들은 소매잡화 점포와 주택을 짓고 본격적으로 상권을 넓혀 중국 산둥성 지역에서 소금과 곡물을 수입, 1930년대 초반까지 전성기를 누렸다. 1920년대부터 6·25전쟁 전까지는 청요리로 명성을 얻었는데 공화춘, 중화루, 동흥루 등이 전국적으로 유명하였다. 한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각종 제도적 제한으로 화교들이 떠나는 등 차이나타운의 화교사회가 위축되었으나 한중수교의 영향으로 활기를 되찾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차이나타운'이라고 말하면 이곳을 꼽는 이들이 많다. 서울, 부산, 대구 등에도 차이나타운이 있지만 인천 차이나타운의 규모가 압도적으로 넓은데다 대한민국에서 대표적으로 꼽는 중국 음식인 짜장면의 탄생지가 이곳이라서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차이나타운으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에는 역사적 의의가 깊은 관광명소로서 권역별로 변화하고 있으며, 현재 이곳에는 화교 2,3세들로 구성된 약 170가구, 약 500명이 거주하고 있다.
인천차이나타운에 공화춘이라는 식당이 있지만 그 공화춘은 1911년 개업한 공화춘이 아닌 판권을 구입하고 부지를 고친 공화춘이며 재한 화교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진짜 공화춘 창업자 가문이 운영하는 가게는 인천역 건너편에 있는 신승반점이다. 1983년 원조 공화춘이 폐업하기 3년 전에 공화춘 주방에서 일하던 창업주인 우희광의 막내딸 우란영과 사위 왕입영이 독립하여 세운 가게가 신승반점이다
차이나타운의 여러 모습
차이나타운을 지나면 이어지는 마을이 송월동 동화마을로 2013년 4월 인천광역시 중구 송월동 2가~3가에 조성된 벽화마을이다.
1883년 개항 이래로 송월동은 외국인들이 거주하던 부촌이었으나 마을이 노후화되며 젊은 사람들은 떠나 빈집이 늘고 고령층만 남게 되었다. 그래서2013년 4월에 열악한 주거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고전동화를 테마로 하여 낡은 담에는 벽화를 그리고, 곳곳에 조형물을 세웠고,. 몇몇 주택은 개조되어 카페나 음식점 등이 들어서기도 했다.
벽화 및 조형물의 모티브가 된 동화로는 서구의 신데렐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오즈의 마법사, 피노키오, 알라딘, 잠자는 숲속의 공주, 백설공주, 라푼젤, 밤비, 엄지공주, 빨간 모자, 미녀와 야수, 피터팬, 헨젤과 그레텔, 브레멘 음악대, 노아의 방주 등과 우리나라의선녀와 나무꾼, 도깨비 방망이, 혹부리 영감, 흥부전, 별주부전, 그리고 리틀 프린세스 소피아 등이 있으며, 이 외에도 마을에는 못난이인형, 무지개다리 포토존 등이 설치되어 있다.
송월동 동화마을의 여러 풍경
송월동 동화마을을 지나 자유공원 담장을 따라 조금 가면 삼국지의 여러 모습을 벽화로 그림 그림이 나오고 삼국지거리를 지나면 초한지를 벽화로 그림 거리가 나온다. 차이나타운의 벽화거리는 삼국지 벽화거리가 먼저 조성된 후 인기를 끌자 추후에 초한지를 주제로 초한지 벽화거리를 조성했다.초한지 이야기는 유방이 천하의 패권을 쥐고 새로운 통일제국 한나라에 황제로 취임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하지만 초한지 벽화거리의 마지막 벽화는 마치 역사와 이야기는 끝맺음 없이 흐른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 그 이후 한나라의 몰락과 위·촉·오 세 나라의 이야기인삼국지를 예고하고 있다. 벽화 거리에 있는 그림은 서양 미술에서 보던 작품과 구도를 공유한다. 이를테면 6번 그림은 진승·오광의 난을 묘사하는데 외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오마주(Homage)했다. 15번 항우의 무용은 말탄 나폴레옹 황제의 그림을 떠올리게 한다. 51번 그림 패왕별희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본떴다고 생각하면 된다.
벽화거리의 모습
인천역 앞의 차이나타운 올라가는 길
여기에서 자유공원으로 올라가는 입구에서 95코스는 끝이 난다. 오늘은 여기에서 끝을 내고 인천에 사는 큰 아들을 만나서 즐겁게 회포를 풀 생각이다. 그리고 편안하게 쉬고 내일의 여정을 시작할 것이다.
경주의 역사적 유적을 탐방하다가 오늘은 사람이 사는 시가지를 걸어 보기로 하였다. 경주시외버스터미널 앞의 버스정류장 부근에 경주읍성마을거리의 안내판이 서 있다. 그래서 오늘은 웁성마을을 중심으로 경주 시내를 소요해 보기로 한다.
경주읍성마을거리 안내
버스를 타고 가기에는 별로 멀지 안은 거리라 천천히 걸어서 읍성마을로 가니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물이 조금 특이한 것을 전시하는 경주 벼루박물관이다. 그래서 구경을 하려고 하니 출타 중이라면서 문을 닫아 놓았다. 하는 수 없이 외관만 보고 읍성으로 갔다.
경주벼루박물관
경주읍성 (慶州邑城)은 신라 왕경의 북쪽에 해당하는 경주시 동부동과 북부동 일대에 위치하는 둘레 2,412m의 석축 평지성이다. 경주읍성은 1933년에 발행된 지리서 『동경통지』에 ‘읍성의 시축 연대는 불명이지만, 고려 우왕(1378)에 개축하였고 둘레가 4,075척, 높이가 12척 7촌으로 석축이다’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고려 때의 석축 읍성으로 추정된다. 안타깝게도 일제의 근대 도시계획에 따라 개축된 읍성 대부분이 헐려 현재는 동쪽 성벽만 50m 남짓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다행으로 2002년부터 꾸준히 발굴 조사와 복원 사업이 추진되고 있지만 현재는 일부 성벽과 문만 복원되어 있다. 하지만 이 읍성을 돌아 다녀보면 어디가 어딘지를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관광객들을위해 안내판이나 표지판 정도는 세워 두어야 하는데 안타깝다. 복원이 끝나면 고려에서 조선을 거쳐 현대까지 경주 역사의 층위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경주읍성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걍주읍성 언내
복원된 성벽
향일문
반대쪽에서 보는 향일문
경주문화원과 이웃한 동경관(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은 본래 신라 왕실에서 집기를 보관할 용도로 지은 건축물이다. 고려와 조선 시대에는 외국 손님이나 서울의 벼슬아치가 지방에 오면 머무는 관아의 객사 건물로 이용했다. 일제강점기 때 학교로 사용되다가 광복 후 6.25전쟁을 거쳐 일부가 헐리고 서쪽 건물만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몇 차례 이전되면서 형태 변화가 발생했지만 영·정조 시기의 역사성을 품고 있는 건축물로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동경관
읍성을 나와서 조금 시내쪽으로 길을 가면 나오는 경주문화원과 동경관 사이 화랑수련원 간판을 내걸고 있는 건축물은 1920년경 경주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이었던 구 야마구치병원으로 추정되는 건물이다. 건축물 자체도 독특하지만 1930년대 이 병원 의사 다나카 도시노부가 경주의 어느 골동품상에서 ‘신라의 미소’로 일컬어지는 ‘경주 얼굴무늬 수막새’를 구입했고, 훗날 경주박물관에서 그로부터 어렵사리 수막새를 기증받은 이야기가 얽혀 있어 눈길을 주게 된다.
화랑수련원(구 야마구찌 병원)
금리단길
발길이 가는대로 가다가 보니 문정현이라는 곳이 보인다. 문정헌은 풀이하면 '글이 샘솟는 집'이란 뜻으로 2012년 경주에서 개최되었던 제78차 국제 PEN대회의 성공적인 마무리를 기념하여 건립한 한옥 도서관이자 북 카페이다. 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5천여 권의 도서는 대부분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회원들의 기증으로 채워져 의미를 더했다. 도서관은 북 카페로 커피 한 잔과 함께 여유롭게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졌다. 문정헌 안에는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작은 우물이 있다. 또 뒷마당의 쪽문은 봉황대가 있는 노동동 고분군으로 이어져 함께 둘러보기 좋다.
문정헌
다시 발을 돌려 구 경주역으로 갔다. 우리 세대에게는 너무 친근한 역이다. 어릴 때 경주를 올 때는 항상 이 역을이용하던 생각이 났다.
경주역(폐역)은 철도역 중앙선의 폐지된 철도역으로 1918년 11월 1일 협궤선 영업을 시작으로 2021년에 폐지된 역으로 지금은 경주문화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문을 닫아 놓아서 내부를 보지는 못했다.
경주역 일대는 경주 구시가지의 교통의 요지로 대부분의 대중교통이 경주역 앞을 통과한다. 역 앞에는 재래시장 성동시장이 위치하고 있으며, 대릉원 등 유적관광지와도 가까운 곳이다.
구 경주역(경주문화원)
역전 광장에 있는 황오동 삼층석탑은 원래 효공왕릉(孝恭王陵)부근인 경주시 동방동 장골의 사자사지(獅子寺址)에 무너져 있었는데,1936년경주역을 사정동으로부터 옮길 때 석탑재(石塔材)를 모아 이전·복원하였다. 1985년 8월 5일 경상북도의 문화재자료 제8호로 지정되었다.
이 탑은 신라 석탑의 형태를 보이나, 다른 석탑과는 달리 이중의 기단에 놓인 1층의 탑신은 너비에 비하여 높이가 매우 높다. 2·3층 탑신도 너비는 그다지 줄지 않으나 높이가 많이 줄었다. 이러한 특징과 함께, 전체적으로 안정된 기초 위에 조성된 날렵한 모습으로 미루어 고려 석탑으로 변천하는 과도기 양식으로 추정된다.
경주 황오동 삼층석탑
구 경주역 앞에는 경주에서 유명한 성동시장이 있다. 성동시장은 300여 개의 점포와 30여 명의 노점상들이 있다. 지난 1971년 개설 이래 지역의 대표적 재래시장으로 자리 잡았다. 날로 침체 상태로 접어드는 재래시장 환경개선 사업으로 경쟁력을 높여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기여하고자 시가 사업비 16억여 원을 투자해 착공에 들어간 성동시장 현대화 사업은 시장 입구 조형물 설치, 뒤 상가 및 먹자골목 아케이드 설치, 하수도 정비, 전기소방시설, 바닥정비, 와이드 칼라 250점을 게시해 새롭게 단장했다. 시는 성동시장 환경개선 사업을 신라 천년고도 이자 국제적인 문화·관광도시에 어울리는 재래시장으로 조성하고자 지역에 산재한 소중한 문화유산 250여 점을 소재로 와이드 칼라 사진에 담아 아케이드 벽면에 게시하여 경주를 찾아오는 관광객들에게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하는 또 하나의 명물로 부상함으로써 재래시장 활성화가 기대되고 있다.
성동시장의 풍경
성동시장을 벗어나 조금 길을 가니 성동성당이 보인다.올해가 천주교에서 말하는 전대사의 해인데 이성당이 '전대사 수여를 위한 순례성당'이라는 휘장이 걸려 있다. 그래서 성당에 들어가니 아무런 인기척도 없어 혼자서 본당에 들어가 잠시 기도를 하고 나왔다. 나오면서 성당 뜰을 보니 옛날 천주교인들이 박해를 받던 시절의 돌형구가 놀여 있었다.
성동성당
성당을 나와 아래로 더 걸어가면 중앙시장이 나온다. 경주중앙시장은 1900년대 초부터 농민 및 보부상들이 주축이 되어 장터를 형성하고 70여 년간 일반시장으로 운영된 오랜 역사가 있는 시장이다. 1983년에 현대화 시장으로 변화되었으며, 경주 사람들은 아래 시장으로 부르기도 한다. 천년고도 경주의 문화관광형시장으로 700여개의 점포가, 3개소의 주차장이 있는 비교적 규모가 큰 전통시장이다. 최근 대형 소매업체와의 경쟁력 향상을 위해 조형물설치, 시장통로 비가림시설 설치, 상하수도 및 바닥정비, 소방시설 설치등 시장현대화사업을 적극으로 추진해 쾌적한 전통시장으로 변화하고 있다.
경주중앙시장은 다양한 세대 간의 문화를 접할 수 있는 전통시장과 매 2, 7일째에 열리는 전통 오일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지역 주민들이 직접 재배한 싱싱한 현지 특산물과 토산품, 경주토종한우, 한우소머리곰탕, 활어회 센터, 돔베기, 두치, 닭강정등 다양한 먹거리와 볼거리 그리고 즐길거리가 준비되어있는 문화관광형 시장이다.
특히 매주 목, 금, 토, 일요일 오픈되는 경주중앙시장 야시장인 달빛미행은 많은 시민, 관광객들에게 인기있는 핫플레이스가 되고 있다.
경주중앙시장
한가롭게 시내 일대를 배회하면서 이곳 저곳을 구경하다가 보니 어느 새 시간이 많이 지났다. 오늘은 신라의 유적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그냥 배회하면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을 돌아다녔다.. 역사적 유물이나 유적도 중요하지만 일반적인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도 아주 중요한 일이다.
오늘은 경주 북부 권역에서 우리에게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는 동학의 발자취를 찾아보기로 하였다. 일찍이 경주로 가서 북부 권역중 용담정쪽으로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려 타고 먼저 최제우의 생가에서 내려 걸어갔다.
지금까지 우리 역사에서 동학에 대한 평가는 최제우가 득도하고 개창했던 경신년(1860년)보다 전봉준(全琫準, 1855~1895)이 선봉에 섰던 갑오년(1894년)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즉 신앙과 자주적 근대 사상의 출발지인 경주보다 호남의 격전지에 더 주목해 왔다. 하지만 갑오년 혁명의 힘이 분출되는 자양분을 마련했던 곳은 동학의 발상지인 경주의 용담정이다.
그러므로 동학 유적을 대표하는 구미산 용담정은 근대적 사상과 동학의 출발이자 신앙의 원천인 종교의 발상지로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
용담정에 앞서 찾아간 최제우 생가는 용담정 입구에거 약 1km 떨어진 가정리의 한적한 농촌에 있다. 생가 입구 오른쪽에 자리해 있는 1971년 세워진 5m높이의 유허비는 귀부와 이수를 갖추고 있고 최제우의 행적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곳에는 유허비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2014년 동학발상지 성역화 사업으로 안채와 사랑채, 별채, 곳간 등의 건물이 복원되었다. 구미산의 품에 아늑하게 싸여 절로 평온한 기분이 들게 하는 분위기이다.
최제우 생가 앞의 '동학 가는 길' 안내판
최제우 생가 전경
생가 설명
생가 입구의 유허비
최제우 생가는 조금 큰 한옥으로 큰 특징은 없는 집이다. 그저 최제우의 생가라는 의의가 있을 뿐인 거의 현대적으로 복원한 집으로 역사적인 의미만 부여할 뿐이다.
사랑채
방앗간
안채(수운고택)
생가의 여러 모습
생가를 나와 생가 앞에 있는 안내소에 가서 안내 팜플렛을 요청하니 아직 팜플렛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며 미안해 한다. 이런 점은 다소 아쉽게 생각이 되었다.
안내소 앞에 있는 아래 사진에서 보는 나무에 봄이 오는 빛이 보였다. 그런데 너무 특이한 모습이라 무슨 나무인지가 궁금하였다. 그래서 식물 이름을 가르쳐 주는 앱에 물음을 보내니 '백합나무'라는 답이 왔다. 참 편리한 세상이다.
백합나무
생가에서 나와 길을 걸어 내려가면 용담정 입구의 버스정류장이 나온다. 여기서부터 용담정까지는 약 2km의 아스팔트 길을 걸어 가야 한다.
용담정 버스 정류장
용담정 올라가는 길에서 보는 풍경
용담정 입구(포덕문)
경주시에서 서쪽으로 약 12㎞에 가정리가 있고 그 앞산이 바로 구미산(龜尾山)이며, 그 산 계곡에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가 한울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정자인용담정이 있다. 이곳은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봄, 가을철 아름다운 풍광을 뽐내 계절여행지로서의 매력도 있는 곳이다.
용담정은 최제우의 아버지 최옥(崔○)이 나이 60이 넘도록 자식이 없어 구미산 계곡에서 시를 읊조리며 소일하던 곳이다. 최옥은 나이 63세 되던 해 한 씨를 세 번째 부인으로 맞아 1824년 10월 28일 최제우를 낳았다. 태어나던 날 구미산이 사흘 동안 크게 진동하였다고 전해진다.
최제우는 동학(東學)의 창시자로, 호는 수운(水雲), 수운재(水雲齋)이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행상을 하던 최제우는 제세구민(濟世救民)의 뜻을 품고 울산, 양산 등을 떠돌며 수련해 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1859년 고향 경주로 돌아와 용담정에 정착했다. 이곳에서 수련을 이어가던 중 1860년 4월5일 한울님으로부터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이라는 무극대도(無極大道, 끝없이 훌륭한 진리)의 가르침을 받게 됐다. 그는 용담에서의 종교체험을 서학에 대립되는 동학이라 이름하고 민족의 고유신앙을 계승한 새로운 종교로 창시하게 된다. 그는 〈용담가〉를 지어 이 득도의 과정과 내용을 서술하였는데, 〈용담가〉라는 가사의 명칭은 용담정의 이름을 딴 것이다.
포교를 시작한 후 불과 1년이 되지 않아 수 만의 신도가 운집하였고, 광범위한 계층에 걸쳐 교세를 확장하고 1863년 접소가 14개 소에 이르렀다. 1863년 제자인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에게 도통을 계승하고, 그러나 나라에서는 이를 ‘이단지도(異端之道)’라 하여 ‘좌도난정(左道難正)’이라는 죄명으로 이듬해 용담정에서 혹세무민의 죄목으로 체포하여 그를 참형에 처하였다. 대구에서 처형되었으며, 1907년 복권되었다.
1975년 2월 천도교는 구미용담성역화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거교적인 사업으로 용담정 · 포덕문 · 용담정사 · 성화문 등을 건립하여 성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에 따라 천도교에서는 가정리를 중심으로 한 일대에서 천도교의 지상천국을 의미하는 궁을촌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최제우 동상
최제우가 한울님과 만나는 과정을 기록한 글인 ‘포덕문’의 이름을 그대로 따온 용담정의 정문 포덕문을 지나 정자 용담정까지 오르는 길은 수려한 풍광을 자랑하는 숲길이다. 포덕문으로 들어서서 최제우 동상을 지나, 수도원을 거치면 또 하나의 문인 성화문을 만난다. 여기에서부터 용담정까지 아름다운 숲길이 이어진다. 약간의 경사는 있지만 길이 잘 단장되어 있어 걷기에 불편함은 없다.
멀리 보이는 용담정
용담정은 원래 작은 암자였는데, 최제우의 할아버지가 사들여 정자로 고쳤고, 부친은 용담정에서 제자를 가르쳤다고 전한다. 최제우는 이곳 용담정에서 한울님을 만났다고 한다. 그리고 하늘과 대화를 나누는 기이한 경험의 과정을 기록한 '포덕문'을 쓰고, 기본 이념이 시천주(侍天主)인 동학을 창시했다.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이 하늘을 모신다는 뜻인 이것을 다르게 생각하면 하늘 아래의 모든 만물은 동등한 지위를 가진다고 말할 수 있다.
용담정
용담정 위의 용추각
용담정에 있는 최제우 초상
용담정 정자에서 멍하니 눈앞의 풍광을 바라보면서 자연스럽게 주변의 소리가 귀를 기울이면 도시에서는 멀게만 느껴졌던 바람소리,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귓속을 파고든다. 최제우가 이곳에서 하늘의 소리를 들을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용담정 주변의 풍경
용담정 안내도
용담정을 벗어나 길을 따라 내려오면 동학수련원과 수운기념관이 있다. 아직까지는 구색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 보이나 최제우의 일생과 동학에 대해서는 알 수 있는 곳이다.
수운기념관 전경
수운기념관 내부
용담가 비
수운기념관 앞 풍경
수운기념관을 나와 길을 걸어 내려와서 용담정 입구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려 타고 경주 시내로 돌아오니 오늘은 생각보다 일찍 여정을 마치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나에게 끝없이 드는 의문은 용담이란 못을 가리키는데 어디에 그 못이 있는지 아무런 설명이 없다.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인지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
경주를 숱하게 갔다왔다를 거듭하며 많은 곳을 다녔는데 오늘은 비교적 옛 신라의 유적괴는 거리가 먼 북부권을 돌아보기로 하였다. 경주 북부권은 불교와 유교문화의 전통까지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우리나라 최대 규모인 조선시대의 양반마을인 양동마을과 유학의 상실인 옥산서원 등은 빼놓을 수 없는 답사 코스이다.
경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양동마을까지는 상당히 먼 길이나 너긋하게 기다렸다가 버스를 타고 양동마을로 향했다.
양동(良洞)마을은 안동의 하회마을과 더불어 조선시대 양반 마을의 전형으로 ‘물(勿)’자 형국의 명당으로 알려진 양동마을은 경주에서 포항 쪽으로 16킬로미터 정도 가다 만나는 형산강 중류쯤에, 기름진 안강평야의 생산력을 바탕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 마을은 월성손씨(月城孫氏)와 여강이씨(驪江李氏)의 양대 문벌로 이어 내려온 동족마을로 이곳에서 회재 이언적은 외가인 월성 손씨가의 서백당(書百堂)에서 태어났다. 서백당 집터는 지관이 양동마을의 물(勿) 자형 혈맥이 맺혀 삼현선생지지(三賢先生之地)라고 하였다는 곳이다.
가장 번창했던 17세기 무렵 집이 6백~7백여 채쯤 되었다던 이 마을은, 1979년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기와집 124채와 초가집 27채가 남아 있다.
집들의 기본구조는 대개 경상도 지방에서 흔히 나타나는 ‘ㅁ’자형이거나 튼 ‘ㅁ’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간혹 대문 앞에 ‘一’자형 행랑채를 둔 예도 있다. 또한, 혼합배치 양식으로 ‘ㄱ’자형이나 ‘一’자형도 있지만, 대체로 집의 배치나 구성은 영남지방 가옥의 일반적인 특색을 따르고 있다.
마을 입구에 버스를 내리니 너무 많이 변하였다. 관광객이 많이 오는 곳이지만 너무 콘크리트로 뒤덮여 옛날 마을의 입구라는 말이 무색하다. 내가 시대에 뒤딸어진 것인지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 영 마땅하지가 않았다. 그래서 마을의 옜 풍경을 중심을 하였다.
마을은 자그마한 여러 동산이 모이고 집들은 이 동산을 배경으로 펼쳐져 있어서 처음 이 마을을 찾는 일반인들이 보고 가는 것은 실제 양동마을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양동마을은 항아리처럼 입구는 좁고 뒤로 갈수록 넓어지는 모양이다. 따라서 마을 구석구석을 대충 보더라도 반나절의 여유는 있어야 한다. 일반적인 평지 마을은 대개 뒷산을 주산으로 형성되지만, 양동마을은 산지형으로 산 능선을 따라 두 가문의 종가와 후손들의 집들이 줄지어 있어 자연과 더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마을의 전체적인 모습을 보려면 안산인 성주산에 올라가 보아야 한다. 그러면 한눈에 전체적인 ‘물(勿)’자 모양의 마을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나뭇잎이 다 떨어진 겨울철이 좋다.
이 같은 마을 방문에서는 다리품을 팔아야 제멋을 느낄 수 있다. 걸어서 들어오면 확연하고 자세히 보이는 경우가 많다.
마을 초입에는 1913년에 세워진 양동초등학교가 있는데 학교를 지나면 구멍가게를 앞에 두고 마을의 전경이 서서히 모습을 나타낸다. 전면으로는 마을 한중간에 가장 크고 멋진 향단(香壇) 건물과 관가정(觀稼亭)이 보이는데 이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마을의 모습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특히 대부분의 마을이 산자락 아래에 옹기종기 모여 산다는 표현에 걸맞게 마을의 초입을 바라보고 구성되어 있는 것과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앞의 조그마한 산 위에서 보는 양동마을 전경
양동마을을 거닐어보면 작은 오솔길을 많이 만나게 된다. 오솔길을 따라 숨바꼭질 하듯 숲속에 숨어 있는 집들을 찾아다니는 일도 매우 재미있는 경험이다. 양동마을은 집들마다 자신만의 담장이 있고 사대부 집들은 좀 더 멀리 거리를 이격하여 자리 잡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양동마을의 가옥과 건물들은 지형에 잘 조화돼 자연과 일체화된 경관을 이루고 있다. 이것은 지형의 경사에 기대어 집의 자리를 잡고, 집에서 바라보이는 조망점을 풍수의 원칙에 따라 조정한 결과이다. 아름답고 매력적인 자연환경과 집들이 잘 조화를 이루어 정감어린 모습으로 다가오고, 숲속의 산새소리에 젖어드는 안온한 분위기가 양동마을의 큰 특징이다.
마을의 오솔길
차가운 날씨에도 어김없이 봄은 온다 - 매화
서호당고택
경산서당
양동마을을 나와 다시 버스를 기다려 타고 옥산서원으로 향한다. 이번 길에는 교통편이 좋지 않아 버스를 제법 기다려야 했다. 버스를 타고 제법 먼 길을 가니 옥산서원 입구에 정류소가 있다.
옥산서원은 조선시대의 성리학자인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을 제향하고 후진을 교육하기 위해 1572년(선조 5)에 설립되었으며, 1574년(선조 7)에 '옥산(玉山)'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이 서원은 조선 후기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제외된 47개의 서원 중 하나로, 각 건물들의 건축적 의미는 크지 않지만 공간적 배치방법이 돋보인다. 옥산서원에서 북쪽으로 700m 떨어진 곳에 회재의 별장이자 서재였던 독락당(獨樂堂)이 있다.
회재의 고향은 양동마을이다. 회재는 관직을 그만두고 양동에서 그리 멀지 않은 안강읍 옥산의 한 시냇가에 자리를 잡고 거주처로 안채를 짓고 개울에 면하여 사랑채 독락당(獨樂堂)과 정자 계정(溪亭)을 경영하고 자연을 벗삼으며 성리학 연구에만 전념하였다. 그런 연유로 회재가 세상을 떠난 후 독락당에서 가까운 곳에 계곡을 사이에 두고 옥산서원이 창건되었다. 옥산서원은 4산 5대의 명당으로 이름 높다. 자옥산, 무학산, 도덕산, 화개산의 네 산이 둘러싸고 탁영대, 관어대, 영귀대, 세심대, 징심대의 다섯 개의 반석돌이 계곡을 따라 자리하며 서원을 보호한다는 이야기는 높은 수준의 학문과 사상의 깊음을 자연 또한 흠모하고 아낀다는 뜻을 지닌다. 옥산서원은 오대(五臺) 중 세심대에 위치하고 있다. 세심대에 흐르는 계곡물은 상중하 폭포로 용추를 이루며 서원 오른쪽인 북쪽에서 남쪽으로 감돌아 흘러나간다. 세심대는 용추에서 떨어지는 물로 마음을 씻고 자연을 벗삼아 학문을 구하는 곳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옥산서원은 서향을 했는데, 동, 서, 북쪽은 산으로 둘러 있고 남쪽은 트여 있다. 서원의 외삼문인 역락문(亦樂門)을 들어서면, 앞으로 작은 내가 흐르고 이곳을 건너면 2층 다락 건물인 무변루(無邊樓)에 이르게 된다.
역락문과 무변루 사이의 작은 내는 계곡물을 끌어들여 흐르게 한 서원의 명당수이다. 역락문은 <논어(論語)>의 학이(學而)편에 나오는 "벗이 멀리서 찾아오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하냐.(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에서 취한 것이다.
옥산서원 입구 길 안내
옥산서원 소개 간판
유네스코 등재 한국의 서원
옥산서원 전경
옥산서원 정문 역락문
무변루
옥산서원 건물 구조 설명
옥산서원 현판이 걸려 있는 구인당
민구재
암수재
무변루
비각
이언적 신도비
부변루에서 보는 구인당
세심대
세심대를 건너 보는 옥산서원 전경
옥산서원을 나와 세심대를 건너서 약 700m 떨어져 있는 독락당으로 향했다. 마을 길을 따라 제법 걸어가니 아직도 사람이 살고 있는 독락당이 나온다.
독락당(獨樂堂)은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에 있는 회재 이언적 선생의 제사를 받드는 옥산서원 뒤편에 있는 사랑채이다. 독락당은 회재 이언적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지은 별장으로 옥산정사(玉山精舍)라고도 한다. ‘어진 선비도 세속의 일을 잊고 자신의 도를 즐긴다.’는 이름을 가진 독락당에서 그는 학문을 닦았다. 독락당은 무엇보다도 주변 경관과 잘 어우러진 공간이다. 건물 옆쪽 담장에는 좁은 나무로 살을 대어 만든 살창을 달아서 대청에서 계곡을 내다볼 수 있다. 독락당 뒤쪽의 시내에 있는 정자 또한 자연에 융합하려는 공간성을 드러내 준다고 하겠다.
계정과 함께 가옥의 한 공간을 차지하는 사랑채를 독락당이라 칭하지만 특별한 구분이 없이 안채와 사랑채, 별채를 함께 독락당이라 부르기도 한다. 유달리 뾰족한 솟을대문을 지나 만나게 되는 것은 나지막한 담장이다. 안채와 사랑채를 가로지르는 담장은 부녀자의 생활공간인 안채를 분리시키고 찾아오는 이방인들을 자연스럽게 사랑채 공간으로 안내한다. 현재도 안채는 생활공간으로 출입을 금하고 있다.
1964년 11월 14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413호로 지정되었고, 2010년 양동마을의 일부 구성물로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은 노계 박인로의 '독락당'이라는 가사를 고등학교 시절에 익히 들었을 것이다. 노계의 가사가 바로 이 독락당을 노래한 것이다.
독락당 전경
독락당 소개 글
독랑당 정문
옥산정사, 독락당 현판
계정
독락당 현판 글
독락당 전경
독락당을 보고 다시 옥상서원 방향으로 내려오니 올라갈 때 보지 못했던 하마비가 길가에 보인다. 옥산서원하마비였다.
옥산서원 하마비
옥산서원과 독락당을 보고 버스를 타려고 정류장에 가니 하필 버스 배차 시간 간격이 엄청나게 긴 시간대였다. 자신의 승용차를 가져오지 않은 사람들은 불평을 하였으나 어쩔 수가 없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으니 지나가던 마을 사람이 정류장의 버스 시간표를 참조하라고 알려 주었다. 여기에 그 시간표를 보여 드리니 뒤에 오는 사람들은 참조하기를 바란다.
오래 기다려 버스를 타고 경주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하니 제법 늦은 시간이었다. 경주 북부 권역은 교통편이 불편하여 제대로 계획한 대로 보지를 못하고 집으로 향했다.
오늘 돌어보지 못한 곳은 다음에 다시 오기로 마음을 먹고 가벼운 마음으로 오늘의 여정을 마친다. 아무런 급할 것도 없는 여행이니까.
저번에 불국사 일대를 다니다가 시간이 모자라서 집으로 돌아간 뒤에 다시 날을 잡아서 불국사 권역을 답사하기로 마음을 먹고 경주로 향했다. 경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는 경주 어디에든지 가는 시내버스가 있어 편리는 하지만 버스의 배차 시간이 너무 멀어서 목적지로 가는 버스를 타려면 제법 기다려야 한다.
괘릉(원성왕릉)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타고 약 한 시간이 걸려서 괘릉입구에 도착했다.
괘릉입구 표시
한가하게 제법 걸어서 괘릉에 도착했다. 괘릉은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에 있는 능으로,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라 신라 38대 원성왕릉(元聖王陵)으로 추정된다. 왕릉이 만들어지기 전에 원래는 작은 연못이 있었는데, 연못의 모습을 변경하지 않고 왕의 시체를 수면 위에 걸어 장례하였다는 속설에 따라 괘릉(掛陵)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능은 원형의 봉토분으로, 아랫부분에는 호석을 두르고 12지신상을 새겨 장식했다. 봉분의 지름은 약 23m이며 높이는 약 6m이다.
능침이 위치한 괘릉마을 주민들은 괘릉을 '능할배'라고 부르며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신다.
괘릉 입구 안내판
괘릉의 전경
봉분 바로 앞에에는4각 석상이 놓였고 그 앞으로 약80m떨어진 봉분 입구 좌우에는 석조상이 배치되어 있다. 문인 2점, 무인 2점, 사자상 4점, 무덤을 표시해주는 화표석(華表石) 2점으로 총 10점이다. 이 석조물들의 조각수법은 매우 당당하고 치밀하여 신라 조각품 중 가장 우수한 것으로 꼽히고 있는데,특히 힘이 넘치는 모습의 무인석은 중앙아시아의 터번을 두르고, 오른팔을 위로 하여 주먹을 움켜지고있으며, 왼손은 철퇴를 잡고 있다. 이 무인석은 서역인의 얼굴을 하고 있어 페르시아인이라는 주장도 있어 동서교류의 측면에서 크게 중시되고 있는 자료이다. 또 원성왕릉을 지키는 네 마리의 사방을 바라보며 능을 지키는데 싱글벙글 웃고 있는 순박한 모습을 볼 수 있는 조금은 다른 모습이다.
무인석
돌사자상
입구 전경
원성왕릉
원성왕릉을 나와 영지를 향하여 걸어갔다. 버스를 기다려 타고 가는 시간이나 걸어가는 시간이나 비슷하기에 편안하게 걷기로 작정하고 걸으니 금방 영지 입구에 도착한다.
영지 입구 표시
영지(影池)는 외동읍 괘릉리에 있는 연못으로 석공 아사달과 아사녀의 슬픈 사랑의 이야기가 전설로 전해 내려오는 곳이다.
751년(신라 경덕왕 10) 김대성이 불국사를 지을 때 백제에서 온 석공 아사달은 불국사 다보탑을 완성하고 석가탑을 만드는 데 여념이 없었다. 남편을 그리워하던 아사녀는 서라벌로 찾아갔으나, 탑이 완성될 때까지 기다려 달라는 주지의 뜻을 받아들여 탑의 그림자가 비칠 때까지 못 가에서 기다렸다. 남편을 지척에 두고 만나지 못하던 아사녀는 문득 못 속에서 탑의 환상을 보고 아사달을 그리며 연못으로 뛰어들었고 석가탑을 완성하고 아사녀가 기다리는 영지로 찾아온 아사달 역시 아내의 죽음을 알고 그 곳에서 아내의 죽음을 알게 된 아사달은 넋 놓아 울며 근처의 큰 바위를 만지기 시작했고, 바위는 아사녀를 닮은 불상이 되어 갔다. 불상을 완성한 그는 사랑하는 부인의 뒤를 따랐다.
이후 아사녀가 남편을 기다릴 때 탑의 그림자가 이 연못에 비추었다 하여 그림자 연못(영지)이라 하였고 그림자를 비춘 다보탑을 유영탑(有影塔), 비추지 않은 석가탑을 무영탑(無影塔)이라고 불렀다. 연못가의 소나무 숲에 그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웠다는 영사(影寺)의 영지석불좌상(影池石佛座象)이 남아 있으며 영지못 주변으로 나무데크로 조성된 수변 산책로와 구름다리가 조성되어 있다.
저수지 옆은 경주 벚꽃길로 유명하며 조각공원, 어린이 놀이터, 짚라인, 설화체험관이 있다. 불국사를 방문한 후 석가탑의 전설을 따라 함께 방문하여 그들의 사랑의 아름다움을 되새겨 보기를 바란다.
영지의 여러 모습
영지를 돌아보고 압구로 나와 영지석불좌상을 보러 갔다. 영지석불좌상(影池石佛坐像)은 괘능리에 있는 석불좌상이다. 대좌와 몸 뒷부분에 조각된 광배가 있는 불상으로 광배 일부와 머리 부분은 심하게 닳아서 형태를 알아보기 어렵다.
건장한 신체와 허리, 부피감 있는 무릎 표현 등에서 통일신라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오른손은 손끝이 땅을 향하게 하며, 왼손은 왼쪽 무릎 위에 놓고 손바닥이 밖을 향하게 하였다. 8각형의 섬세하고 고운 연꽃대좌와 불신과 같이 하나의 돌에 새겨진 광배에는 번잡한 불꽃무늬 안에 작은 부처가 화려하게 새겨져 있어 당시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아사녀가 불국사 석가탑을 만든 아사달을 찾아와 기다리다 몸을 던져 죽은 후 아사달이 그녀를 위하여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영지석불좌상
영지를 나와 입구에서 불국로타리 주변에 있는 구정동방형분을 찾아갔다. 제법 버스를 기다려 타고 불국로타리에 내리니 바로 옆에 방형분이 보인다.
구정동 방형분(九政洞 方形墳)은 경주에서 불국사로 가는 길의 북쪽 구릉자락에 위치한 통일신라시대의 무덤이다. 이 방형분은 한 변의 길이가 9.5m 높이가 2m이다. 무덤의 형태는 정사각형이고 흙을 덮어 만든 봉분 아래에는 무덤을 보호하는 의미를 갖는 12지 신상이 조각된 둘레돌이 배치되어 있다. 둘레돌을 배치하는 것은 삼국시대 이후부터 내려오는 전통인데, 통일신라시대 경주지방의 왕릉에서는 12지신상을 조각한 둘레돌을 흔히 볼 수 있다. 12지신상의 조각 수법 양식으로 미루어 통일신라 말기의 최고 귀족층 무덤으로 생각된다. 신라 무덤 중 유일한 네모무덤으로, 그 계통을 알 수 없으나 고려 전기에 나타나는 둘레돌을 갖춘 네모무덤의 선구적 모습으로 평가된다. 또 이 고분은 특이하게 고분으로 들어가는 석문이 있다.
구정동방형분 전경
고분의 석문을 보니 열려 있었다. 그래서 궁금증을 참지 못해 몸을 구부리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안에는 석실만 있고 아무 것도 없었다.
고분의 내부
이번 경주 순례는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다. 그러나 그 나름대로 특이한 유적과 슬픈 전설이 서려 있는 곳으로 가볍게 돌아볼 수 있는 곳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이 날의 순방을 끝냈다.
경주를 순례한 지가 벌써 이번 순례의 10번째지만 아직 경주의 대표적인 유적지인 불국사와 석굴암을 가지 않았다. 물론 과거에는 수 차례 갔다왔지만 이번 순례에는 아직 다녀오지 않아 오늘은 불국사 일대를 목적지로 정하고 집을 나섰다. 불국사 일대는 구경하는데 시간이 많이 들 것으로 생각하고 좀 일찍 서둘러 경주에 도착하여 불국사로 향했다.
경주는 올 때마다 주변이 정돈되어 새롭게 보인다. 불국사 일대도 깨끗이 정비되어 시내버스를 내려 걸어서 절을 향해 가는 길이 정돈이 잘 되어 있다.
불국사 가는 길 주변
불국사에 대한 설명은 여러 자료를 바탕으로 다소 길지만 정리해 보았다.
신라의 오악(동악 토함산, 서악 계룡산, 남악 지리산, 북악 태백산, 중악 팔공산) 가운데 신라인들은 경주 토함산을 호국의 산으로 신성시 했기에, '구름을 마시고 토한다'는 토함산(吐含山, 745m)에 최고의 사찰을 짓고 싶어 했고 그 결과물이 바로 불국사와 석굴암이다. 불국사( 佛國寺)는 토함산 서쪽 중턱에 있는 통일신라 김대성의 발원으로 창건한 사찰로 알려져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이다.
불국사는 751년(경덕왕 10)에 김대성(金大城)의 발원으로 창건하였다고 전하나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 의하면, ‘이차돈(異次頓)이 순교한 이듬해인 528년(법흥왕 15)에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迎帝夫人)과 기윤부인(己尹夫人)이 이 절을 창건하고 비구니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574년(진흥왕 35)에는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부인(只召夫人)이 이 절을 중창하고 승려들을 득도하게 하였으며, 왕의 부인은 비구니가 된 뒤 이 절에 비로자나불상과 아미타불상을 봉안하였다.’고 한다. 또한, ‘670년(문무왕 10)에는 이 절의 강당인 무설전(無說殿)을 짓고 신림(神琳) · 표훈(表訓) 등 의상(義湘)의 제자들을 머물게 하였다.’고 전한다.
이들 기록과 신라 불교의 역사를 통해서 볼 때 다소의 모순이 있지만, 현재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는 불상의 복장기에서 이 불상들이 ‘681년(신문왕 1) 4월 8일에 낙성되었다’고 하였으므로 당시의 불국사가 대규모는 아니었지만, 대웅전과 무설전을 갖춘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불국사가 대찰이 된 것은 김대성에 의해서였다. <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현세의 부모를 위해서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절은 751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774년(혜공왕 10) 12월에 그가 생애를 마칠 때까지 완공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 뒤 국가에서 완성시켰다. 원래 불국사는 경덕왕이 아버지 성덕왕을 기리기 위해 중창하였고, 석굴암도 마찬가지로 이유로 창건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아들 혜공왕이 시해당하면서 통일신라의 왕위는 순수한 진골 혈통과 단절되어 버렸다. 후에 왕위에 오른 원성왕은 성덕왕과 경덕왕의 사당까지 없애버린다. 자신과 혈통이 다른 왕들을 추모하는 절을 그대로 둘 수 없었기에, 창건자를 재상 김대성으로 만들어 소문을 내었다고 한다. 이것이 일연이 삼국유사를 저술하던 고려시대는 물론,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다는 설이다.
따라서 이 절은 김대성 개인의 원찰(願刹)이라기보다는 ‘국가의 원찰로 건립되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준공 당시 이 절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대웅전,극락전,비로전,관음전,지장전 등을 중심으로 한 5개의 지역으로 구분되어 있었으며이 밖에도 그 위치를 알 수 없는 건물의 이름이 45종이나 나열되어 있다.
김대성이 중창한 뒤 임진왜란 전까지 이 절은 9차례의 중창 및 중수를 거쳤다. 1593년(선조 26) 5월 왜구가 침입하여 대웅전, 극락전, 자하문 기타 2,000여 칸이 모두 불타버렸고, 값진 보물들이 거의 불에 타거나 약탈되었다. 금동불상과 옥으로 만든 물건과 석교(石橋)와 탑만이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때 타버린 목조건물들은 20년이 지난 뒤부터 점차 복구되었다. 1920년 이전에는 일부 건물과 탑만이 퇴락한 채 남아 있었으나, 지속적인 원형복구 및 보수로 국보 7점을 간직한 오늘날 대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특별한 것은 이 절은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의 발원으로 중창되었다는 것이다. 이때의 대복원공사를 위하여 1969년에는 문화재위원(현, 문화유산위원)들의 발굴조사가 진행되었고, 1970년 2월에 공사를 착공하여 준공하였다. 당시까지 유지로만 남아 있던 무설전, 관음전, 비로전(毘盧殿), 경루, 회랑 등은 이때 복원되었고, 대웅전, 극락전, 범영루(泛影樓), 자하문 등을 새롭게 단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불국사는 신라인이 그리던 불국(佛國)인 이상적인 피안의 세계를 옮겨놓은 것이다. 불국을 향한 신라인의 염원은 세 가지 양상으로 이곳에 나타나 있다. 하나는 <법화경>에 근거한 석가모니불의 사바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무량수경(無量壽經)>에 근거한 아미타불의 극락세계이며, 또 다른 하나는 <화엄경>에 근거한 비로자나불의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이다. 이 셋은 각각 대웅전을 중심으로 하는 일곽과 극락전을 중심으로 하는 다른 일곽과 비로전으로 종합되는 전체의 구성을 통하여 그 특징적인 표현을 이루어놓았다.
불국사 정문(일주문)
산문을 들어가면서 이제 불국토로 들어선다. 정문을 지나면 조그마한 연못이 나오는데 이 연못은 영지가 아니다. 영지는 제법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
작은 연못
천왕문의 사천왕상
천왕문을 지나면 불국사가 나타난다. 불국사 본전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우리를 맞이하는 뜰에서 보는 전경이 너무 좋다. 내가 꿈에서도 그리며 보는 모습이다.
나무에 가린 전경
불국사의 경내는 석단으로 크게 양분되어 있다. 이 석단은 그 아래와 위의 세계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석단의 위는 부처님의 나라인 불국토이고, 그 밑은 아직 거기에 이르지 못한 속세를 나타낸다. 석단의 멋은 소박하게 쌓아올린 거대한 돌의 자연미에 있고, 대척적(對蹠的)으로 병렬된 2단의 석주(石柱)에 있다. 석단은 불국세계의 높이를 상징함과 동시에 그 세계의 반석 같은 굳셈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두 모퉁이 위에는 경루(經樓)와 종루(鐘樓)를 만들어서 한없이 높은 하늘을 향하여 번져가는 묘음(妙音)의 위력을 나타내었다.
이 석단에는 1962년 국보로 지정된 대웅전을 향하는 청운교(靑雲橋) 백운교(白雲橋)와 극락전을 향하는 연화교(蓮華橋) 칠보교(七寶橋)의 두 쌍의 다리가 놓여 있다. 청운교 백운교는 석가모니불의 불국세계로 통하는 자하문에 연결되어 있고, 칠보교 · 연화교는 아미타불의 불국세계로 통하는 안양문에 연결되어 있다.
청운교와 백운교는 대웅전을 향하는 자하문과 연결된 다리를 말하는데, 다리 아래의 일반인의 세계와 다리 위로의 부처의 세계를 이어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전체 34계단으로 되어 있는 위로는 16단의 청운교가 있고 아래로는 18단의 백운교가 있다. 청운교(靑雲橋)를 푸른 청년의 모습으로, 백운교(白雲橋)를 흰머리 노인의 모습으로 빗대어 놓아 인생을 상징하기도 한다. 청운교에 비해 아래쪽인 백운교의 높이와 너비가 조금씩 더 커서 시각적으로 안정감과 상승감을 준다. 다리를 계단 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형태로 청운교와 백운교가 이어지는 부분은 둥근 무지개다리로 되어 있다. 다리가 있는 석축 아래쪽으로 연못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지금도 계단 왼쪽에 물이 떨어지도록 만들어 놓은 장치가 남아 있다. 이곳에서 물이 떨어지면 폭포처럼 부서지는 물보라에 의해 무지개가 떴다고 전하고 있어, 무척이나 아름다웠을 옛 불국사를 그려보게 된다.
경덕왕 10년(751)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당시 다리로는 유일하게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매우 귀중한 유물이다. 또한, 무지개모양으로 이루어진 다리 아래 부분은 우리나라 석교나 성문에서 보이는 반원아치모양의 홍예교의 시작점을 보여주고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청운교와 백운교를 오르면 자하문이 있다.자하문이란 붉은 안개가 서린 문이라는 뜻으로 이 자하문을 통과하면 세속의 무지와 속박을 떠나서 부처님의 세계가 눈앞에 펼쳐진다는 것을 상징한다.부처님의 몸을 자금광신(紫金光身)이라고도 하므로 불신에서 발하는 자주빛을 띤 금색 광명이 다리 위를 안개처럼 서리고 있다는 뜻에서 자하문이라 한 것으로 세간의 번뇌를 자금색 광명으로 씻고 난 뒤,들어서게 되는 관문이다.자하문의 좌우에는 임진왜란 후의 중건 때에 만든 동서회랑이 있었지만1904년경에 무너졌다.회랑의 양 끝에 역시 경루와 종루가 있었지만,동쪽 경루는 일찍이 없어지고,서쪽의 종루만 남아 있다가, 1973년 복원 때에 좌경루(左經樓)와 더불어 옛 모습을 찾았다.
청운교 백운교와 자하문
불국사 외부 전경
범영루는 처음에 수미범종각(須彌梵鐘閣)이라고 불렀다. 수미산모양의 팔각정상에 누를 짓고 그 위에 108명이 앉을 수 있게끔 하였으며, 아래에는 오장간(五丈竿)을 세울 수 있도록 하였다. 여기에서 108이라는 숫자는 백팔번뇌를 상징하는 것으로, 많은 번뇌를 안은 중생들을 제도한다는 의미에서 108명이 앉을 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 범영루는 751년(경덕왕 10)에 건립하였고 여러 번의 중건을 거쳤다. 현재의 건물은 1973년의 복원공사 때 중건된 것으로 옛 모습대로 정면 1칸, 측면 2칸이며 3층으로 된 아담한 누각이다. 범영루의 동편의 좌경루도 1973년의 복원공사 때 재건하였다. 경루는 경전을 보존한 곳으로 보아야 하겠지만, 원래의 구조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범영루
범영루 설명
연화교, 칠보교(蓮華橋, 七寶橋)는 극락전으로 오르는 돌계단으로 연화교는 10단으로 디딤돌에 끝이 뾰족하고 옆으로 길게 퍼진 연꽃잎을 새겼다. 칠보교는 계단에 아무런 장식이 없으며 8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연화교와 칠보교 밑에는 완만한 곡선을 지닌 무지개다리[虹霓]가 있다. 계단의 양쪽 끝에는 4개씩 정교하게 다듬은 돌기둥을 세워 원형의 난간대를 끼웠고 난간대 하부 중앙에는 난간동자를 세워 받쳤다. 청운교 및 백운교와 비교할 때 구조는 유사하나 규모가 작으며 무지개다리의 구조도 다르다. <불국사사적(佛國寺事蹟)>에는 연화(蓮花)와 칠보(七寶) 2개의 다리로 아미타불과 보살들이 오르내리는 계단을 삼았다고 한다. 연화교와 칠보교는 아미타불이 거주하고 있는 극락이 연화와 칠보로 장식되어 있다는 불경 내용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연화교와 칠보교를 오르면 연화교와 칠보교는 751년(경덕왕 10)부터 774년(혜공왕 10)까지 김대성에 의해 불국사가 중창될 때 함께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1973년 불국사를 전체적으로 복원 정비할 때 없어진 난간을 복원하였다.
연화교 칠보교를 올라 안양문을 지나면 아미타불이 있는 서방의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극락전에 이른다. 안양은 극락의 다른 이름이며, 안양문은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뜻이다. 극락전을 중심으로 하는 이 일곽도 751년에 지어졌고, 그 당시에는 회랑을 비롯하여 석등 및 많은 건물과 석조물들이 있었다고 한다. 견고한 석단 위에 목조로 세워진 극락전은 임진왜란 때 불탄 뒤 1750년에 오환(悟還) · 무숙(武淑) 등이 중창하였고, 1925년 3월에 다시 중수하였는데 목조의 수미단은 그때 만들어진 것이다.
최근까지 극락전 안에는 아미타불과 비로자나불의 두 불상이 안치되어 있었는데, 비로자나불은 원래 대웅전에 있던 것을 일제시기 때 중수하면서 이곳으로 옮겼던 것으로, 지금은 비로전으로 옮겼다. 극락전 안의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은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연화교 칠보교와 안양문
불국사 전경
불국사 앞 뜰에서 불국사의 외부 전경을 완상하고 경내로 들어가면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대웅전 앞에 동서에 서 있는 두 탑이다. 사찰에서 쌍탑은 보통 모양이 똑같거나 아주 흡사해 동탑, 서탑이라 부른다. 하지만 불국사(佛國寺)에서만 두 탑 모양이 다르고 이름도 다르다. 석가탑은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하는 내용을 표현한 탑이고, 다보탑은 과거의 부처인 다보여래가 불법을 증명하는 것을 상징하는 탑이다. 다보탑은 따라서 다보여래가 머무는 환상적인 궁전인 셈이다. 다보여래는 석가여래와 한 쌍을 이루기에 다보탑은 석가탑과 한 쌍이다.
불국사다보탑(佛國寺多寶塔)은 석가탑과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석탑으로, 높이도 10.4m로 같다. 절내의 대웅전과 자하문 사이의 뜰 동서쪽에 마주 보고 서 있는데, 동쪽탑이 다보탑이다. 다보탑은 특수형 탑을, 석가탑은 우리나라 일반형 석탑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이 탑과 석가탑의 관계는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견보탑품(見寶塔品)」에 근거한 것으로 다보여래가 진리를 설법하는 석가모니를 찬양한 후 다보탑 안의 자리 반쪽을 비워 나란히 앉도록 했다는 것이 중심내용이다.
석가탑을 보면 2단의 기단(基壇)위에 세운 3층탑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지만, 다보탑은 그 층수를 헤아리기가 어렵다. 십(十)자 모양 평면의 기단에는 사방에 돌계단을 마련하고, 8각형의 탑신과 그 주위로는 네모난 난간을 돌렸다. 1925년경 일본인들에 의하여 전면 해체·보수되었으나 이에 관한 보고서 간행은 물론 간단한 기록조차 전하지 않으며, 탑 속에 장치된 사리를 비롯한 많은 유물에 대한 기록도 없다. 다만 당시 일인 감독자의 이름으로 금동불상 2구를 총독부에 인계한다는 내용의 인계서가 남아 있을 뿐이며, 이 불상 또한 행방을 모른다.
다보탑은 석가여래의 설법을 증명하기 위해 땅속에서 솟아난 다보여래의 몸[法身]을 표현·상징하기 때문에 땅에 서 있지만 실은 공중에 떠있는 것이다. 땅에서 솟아났기에 다보탑의 구성은 상층부로부터 하층으로 원, 팔각, 사각이라는 구성으로 진행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계단 위쪽에 자리한 사자는(원래 4마리였으나 현재는 1마리만 남아 있음) 불법을 수호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부처님의 진신(眞身)이 머물러 있는 탑 기단 모서리에 사자를 넣어 사자좌 위에 탑이 서 있는 독특한 모습으로 만들어진 이러한 형식의 여러 탑의 연원은 바로 불국사다보탑에 있다.
예전의 우리나라 십원짜리 동전에는 다보탑이 새겨져 있었고, 사자의 모양도 선명하게 나타나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 사자가 동전에서 사라져 버렸다.
다보탑의 사면
다보탑의 지척에 석가탑이 있다. 불국사 삼층석탑(佛國寺 三層石塔)의원래 이름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釋迦如來常住設法塔)이며 흔히 줄여서 석가탑(釋迦塔)이라고도 한다. 석가탑은 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탑,무영탑이라고도 불리는데,이것은 석가탑을 지은 백제의 석공 아사달을 찾아 신라의 서울 서라벌에 온 아사녀가 남편을 만나지도 못한 채 연못에 몸을 던져야 했던 전설에서 유래되었다. 불국사 대웅전 앞뜰에 다보탑과 나란히 서 있으며, 대한민국의 국보 제2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탑은 일반적으로 751년(경덕왕 10년) 김대성이 불국사를 중수할 무렵에 세워졌다고 추정하지만, 742년에 완성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이 탑은 고려 초에 일어난 지진 때문에 1024년과 1038년에 중수되었다.
높이 10.75m. 신라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을 대표하는 가장 우수한 예이며,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과 상륜부가 있는데 각 부분의 체감비율이 적당하며 간결하다. 이 탑의 특이한 점은 탑 주위에 장방석을 돌려서 형성한 탑구(塔區)에 연꽃무늬를 조각한 팔방금강좌(八方金剛座)가 있는 것과 탑의 기단부를 자연석이 받치고 있는 것 등이다. 석가탑의 위대함이 다시 세상의 주목을 받은 것은 1966년 해체·수리에서 나온 사리장엄구에서였다. 도굴범에 의해 석가탑이 훼손되어 10월 전면적인 해체·수리가 이루어졌는데 이때 2층 몸돌 윗부분에서 집 모양의 사리기와 사리병 등 각종 장엄구가 발견되었다. 특히 함께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종이질이나 글씨체가 8세기 초기의 것이며, 너비가 비록 8㎝에 지나지 않지만 길이는 무려 6m에 이르는 두루마리 경전으로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로 밝혀졌다.
석가탑의 사면
대웅전 앞의 석등
대웅전(大雄殿)은 조선시대의 건축물이다. 2011년 12월 30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744호로 지정되었다. 석가여래 부처님을 모시는 법당으로, 불국사 경 내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
이 대웅전 안의 중앙 정면에는 수미단(須彌壇)이 있고, 그 위에 목조석가삼존불이 안치되어 있다.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미륵보살과 갈라보살(竭羅菩薩)이 협시(脇侍)하고 있으며, 다시 그 좌우에 흙으로 빚은 가섭(迦葉)과 아난(阿難)의 두 제자상이 모셔져 있다.
대웅전의 동·서 측면에는 익랑(翼廊)이 놓여 동·서 회랑과 연결되고 남회랑의 동측 모서리에는 좌경루(左經樓)가 있고, 서측 모서리에는 범영루(泛影樓)가 배치되어 있다. 자하문 남측에는 청운교와 백운교의 석계를 마련하여 대웅전으로 진·출입할 수 있도록 꾸몄다.
대웅전은 불국사고금창기에 의하면 조선 시대에 여러 번에 걸쳐 보수 중창되었다. 그 후 퇴락된 것을 일제 강점기인 1918년부터 1925년까지 조선총독부 주관으로 개수한 바 있으며, 그 뒤 또 다시 심하게 퇴락되어 가던 것을 1970년 대에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지시로 중창되었다.
지금은 대웅전을 보수 중이라 장막으로 가려 놓아 전체 건물을 볼 수 없는 아쉬움이 있다.
대웅전의 석가모니불
다보탑과 석가탑
목어
장막으로 가려진 대웅전
대웅전을 돌아 뒤로 가면 여러 전각이 나타난다. 대웅전 바로 뒤에 있는 무설전은 불국사의 여러 건물 가운데 제일 먼저 만들어진 건물이다. 670년(문무왕 10)에 이 건물을 짓고 문무왕은 의상과 그의 제자 오진(悟眞) 표훈 등 몇 명의 대덕(大德)에게 『화엄경』의 강론을 맡게 하였다. 이 건물도 임진왜란 때에 불탄 뒤 1708년(숙종 34)에 중건하여 1910년 이전까지 보존되었으나, 그 뒤 허물어진 채 방치되었다가 1972년에 복원하였다.
경론을 강술하는 장소이므로 아무런 불상도 봉안하지 않고 설법을 위한 강당으로서만 사용하였으며, 무설전이라고 이름 붙인 까닭은 진리의 본질, 불교의 오의가 말을 통하여 드러나는 것이 아님을 지적한 것이다.
무설전
무설전 뒤의 한층 높은 언덕에 있는 관음전은 751년 김대성이 6칸으로 지었던 것을 1470년에 중수하였는데, 1593년 임진왜란의 병화로 불타버렸다. 그 직후 1604년에 해청(海淸)이 중창하였고, 1694년과 1718년에 다시 중창하였다. 원래 이 관음전 안에는 관세음보살상이 안치되어 있었다. 이 관음상은 922년에 경명왕비가 낙지공(樂支工)에게 명하여 전단향목(栴檀香木)으로 만든 것이었다.
『속전』에 의하면, ‘중생사(衆生寺)의 관음상과 함께 영험력이 크다’하여 매우 존숭받았다.'고 한다. 이 관음상은 1674년(숙종 즉위년)과 1701년 · 1769년의 세 차례에 걸쳐 새로 금칠[改金]을 하였다. 마지막 개금기록으로 보아 18세기 중엽까지는 이 관음상이 있었음이 틀림없는데, 언제 관음상이 없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현재는 1973년의 복원 때 새로 조성한 관음입상을 봉안하고 있다.
관음전
관음전 아래 서편에 있으며, 비로자나불을 봉안하고 있다. 이곳에 비로자나불을 모신 전각을 따로 건립한 것은 『화엄경』에 의한 신앙의 흐름이 불국사의 성역 안에 자리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비로전은 751년 김대성이 18칸으로 지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60년에 중수하였으나, 조선 말에 무너져서 터만 남아 있었다. 1973년의 복원공사 때에 현재의 건물을 지어서 극락전에 임시로 안치하였던 1962년 국보로 지정된 금동비로자나불좌상을 옮겨 봉안하였다.
비로전
사리탑
나한전
극락전과 안양문 설명
불국사 회랑
불교미술관
이 불교미술관은 명칭이 무색하게 상업적인 목적의 건물로 기념품만을 팔고 있다. 왜 '불교미술관'이라 이름을 붙였는지가 의아스럽다.
범종각
불국사 경내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앞 뜰로 나오니 칠보교 앞에 당간지주가 보인다. 그 외 다수의 여러 유물을 보고 경내를 벗어나 정문이 아닌 후문의 불이문을 통과하여 나왔다.
당간지주
불이문
오랜만에 찾은 불국사라 여러 곳을 천천히 돌아보니 어느듯 시간이 많이 지났다. 하지만 오늘의 주된 목적지인 불국사를 마음컷 돌아다녔다는 뿌듯함이 마음속에 벅차 올랐다. 그리고 불국사에는 수 많은 유적과 유물이 있어 설명이 좀 장황하게 되었다.
여기서 다시 정문쪽으로 가서 불국사와는 조금 거리가 있는 경주가 낳은 현대문학의 두 거장 박목월과 김동리의 문학관으로 발을 옯겼다.
동리목월문학관(東里木月文學館)은 경주시 불국사 입구에 있는 경주 출신인 소설가 김동리와 시인 박목월의 문학 및 시론 등을 전시하는 전시관으로 경주시에서 운영하는 공립문학관이다. 그래서 동리목월문학관은 2006년에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동리관」,「목월관」,「신라를 빛낸 인물관」으로 나누어 전시하고 있다.
동리목월문학관
동리목월문학관을 나오면 불국사 일주문 주차장 옆에 석굴암으로 올라가는 버스정류장이 있다. 걸어서 산길을 오를까?하고 생각도 했으나 날도 춥고 거리도 제법 멀어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으니 한국인보다 외국인이 더 많이 보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자기 차로 석굴암을 가기 때문이었다. 한시간에 한번 움직이는 버스를 기다려서 타고 석굴암으로 올라가서 주차장에서 석굴암까지 걸어가면서 보는 동쪽은 탁 트여 가슴을 상쾌하게 했다.
김대성이야기의 그림판
석굴암 가는 길에서 보는 동해
불국사에서 산등성이를 타고 약 3㎞ (포장도로 석굴로는 9㎞) 정도 올라가면 동양 제일의 걸작으로 알려진 여래좌상의 본존불이 동해를 마주 바라보고 있는 유명한 석굴암이 있다.
고요한 모습은 석굴 전체에서 풍기는 은밀한 분위기 속에서 신비로움의 깊이를 더해 내면에 깊고 숭고한 마음을 간직한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 모든 중생들에게 자비로움이 저절로 전해지는 듯하다.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창건을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에 완성하였으며, 건립 당시에는 석불사라고 불렀다. 토함산 중턱에 백색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인위적으로 석굴을 만들고, 내부공간에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위 벽면에 보살상 및 제자상과 역사상, 천왕상 등 총 40구의 불상을 조각했으나 지금은 38구만이 남아있다.
원형의 주실 입구에는 좌우로 8각의 돌기둥을 세우고, 주실 안에는 본존불이 중심에서 약간 뒤쪽에 안치되어 있다. 주실의 벽면에는 입구에서부터 천부상 2구, 보살상 2구, 나한상 10구가 채워지고, 본존불 뒷면 둥근 벽에는 석굴 안에서 가장 정교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이 서 있다. 여래좌상이 바라보는 시선은 문무왕 수중왕릉인 봉길리 앞 대왕암을 향한다.
석굴암의 배치는 법화경의 첫머리에 나오는, 석가모니가 가장 많이 설법한 인도 영취산의 풍경을 재현한 것이다. 석가모니 본존불이 가운데 있고 주변을 십대제자와 과거불들, 팔부신중 등이 둘러싸고 있다. 석굴암의 가운데에 앉아 있는 본존불은 한국 불교미술사의 석불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이때를 기점으로 이후의 석불들은 조형적인 완성도에서 오히려 점차 쇠퇴한다고 평가받는다.
원숙한 조각 기법과 사실적인 표현으로 완벽하게 형상화된 본존불, 얼굴과 온몸이 화려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 용맹스런 인왕상, 위엄있는 모습의 사천왕상, 유연하고 우아한 모습의 각종 보살상, 저마다 개성 있는 표현을 하고 있는 나한상 등 이곳에 만들어진 모든 조각품들은 동아시아 불교조각에서 최고의 걸작으로 손색이 없다.
현재 석굴암은 내부 전면 공개 관람 시 항온항습 등의 문제가 우려되어 1976년부터 유리벽을 통한 외부관람을 실시하고 있다. 관람을 할 때는 실제 석굴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으며 유리 차단막이 설치된 통로 밖에서 지나가며 관람하는 것만 가능하다. 예외적으로 부처님오신 날에는 차단막 안으로 들어가 옛 신라인들이 했던 것처럼 본존불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다. 단 내부에서 사진 촬영은 금지된다. 또 석굴암은 지하수 샘물이 솟아나는 암반 위에 있는데, 이것은 석굴 내부의 냉각 기능을 하는 아주 중요한 지형이었다.
석굴암 외부 전경
여기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석굴암 본존불은 사진을 찍지 못하게 금지해 놓았다는 것이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다. 사진을 찍지 못하는 예술품은 색이 바랠 우려가 있는 경우인데 석불이 어떤 우려가 있다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석불을 사진을 찍지 못하면 우리나라 곳곳에 있는 마애불이나 부처상, 그리고 건물도 찍지 못하는 것이 아닌지가 의심스럽다. 내가 많은 곳은 아니나 각국을 여행하면서 사진을 찍지 못하게 금지해 놓은 곳은 아주 특별한 것이 아니면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석굴암 본존불은 네이버 이미지에서 차용하였다.
석굴암 본존불
석굴암에서 보는 동해
석굴암의 석물들 - 어디에 쓰인 것인지도 모른다.
석굴암을 내려오니 시간이 많이 지났다. 원래 계획으로는 다른 여러 곳을 가는 것이었는데 불국사에서 많은 시간을 관람하는데 사용해서 원래의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나 조금도 걱정은 되지 않는다. 시간에 구애되지 않고 다음에 다시 와서 오늘 가보지 못한 곳을 가면 되는 것이다.
겨울의 매서운 추위가 한동안 기승을 부려 경주 순례를 멈추었다가 날씨가 풀려 다시 경주로 향했다. 이번 길에는 동쪽을 돌아 보기로 작정하고 경주시외버스터미널 앞에서 골굴사를 가는 버스를 기다리니 배차 간격이 길어 제법 기다려야 했다. 기다렸다가 버스를 타고 약 한 시간이 걸려 골굴사입구에 도착했다. 경주의 동쪽은 아직은 답사하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골굴사 가는 길 표시
버스에서 내려 제법 먼 길을 걸어가면 골굴사 입구가 나온다. 예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변한 것을 보고 세월의 무상함도 느끼고 '나도 이제 나이가 많이 들었구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골굴사 입구 표시
골굴사 입구에서 산문을 향해 가는 길에는 골굴사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선무도의 형상이 늘어서 있다.
골굴사 산문의 선무도 형상
골굴사는 함월산에 위치한 선무도(禪武道)의 총본산으로 한국의 소림사라는 별명이 붙어 있는 사찰이다. 약 1,500여 년 전 인도에서 온 광유 선인 일행이 함월산에 정착하면서 골굴사와 기림사를 창건하였는데, 골굴사는 광유스님 일행이 인도를 본떠 석굴사원 형태로 조성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석굴사원이다.
조선 중기 겸재 정선의 <골굴 석굴도>로 볼 때 골굴사는 여러 석굴들 앞에 목조 전실을 만들고 여기에 기와를 얹은 형태였다. 조선 중후기에 화재로 소실된 상태로 방치되었다가 지금으로부터 약 70여 년 전 경주에 사는 박씨 일가가 상주하면서 다시 사찰로 만들었고, 1989년에 한 개인에게 매매되어 넘어간 상태였던 것을 당시 기림사 주지였던 설적운 스님이 매입해서 지금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본사 불국사의 말사로 등록되었다.
근래에 이르러 골굴사에는 불가의 전통 수행법인 선무도 수련원이 개설되어 내국인은 물론 수많은 외국인들이 전통의 불교무예를 배우는 도량으로 자리 잡았다.
범종루
산문을 통과하여 임도길을 따라가는 길 중간에 포대화상과 개 동상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골굴사의 마스코트인 ‘동아보살’ 상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외국에도 소개되었던 골굴사의 마스코트다. 동아보살이 처음 TV에 등장했던 건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프로그램이었다. 새벽 4시만 되면 일어나 법당에서 방석을 차지하고 앉아 새벽예불을 드리는 개로 소개되어 화제가 되었다. 지금은 생이 다해 이 땅에 없지만 골굴사 주지 설적운이 동아보살상 옆에 쓴 글을 보면 뭉클해온다.
‘동아보살’
강아지 때부터 새벽예불을 대중들과 함께했으며
모든 행이 예사롭지 않았으며 여느 개 답지 않게
살생을 하지 않았다. 만년에 치매와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하였으나 죽는 날 아침까지 새벽예불에 참석했다.
매년 음력 2월 15일을 동아의 기제사일로 정했다.
모든 불자들은 그를 동아보살이라 불렀다.
'동아보살' 상
여러 전각들
길을 따라 올라가면 거의 맨 위에 마애불이 보인다. 멀리서 보는 마애불은 암벽위에 우둑 서 있다.
함월산 기슭의 골굴암에는 수십 미터 높이의 거대한 응회암에 12개의 석굴이 나있으며, 암벽 제일 높은 곳에는 돋을새김으로 새긴 마애불상이 있다. 9세기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골굴사 마애여래좌상은 응회암 재질의 암벽에 조성된 불상으로 골굴사의 주불이라 할 수 있다. 동해를 바라보게 조성된 이 불상은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상호에 화려한 연꽃과 불꽃이 조화를 이룬 광배가 바라보는 사람들 마음까지 편안하게 한다. 굴과 굴로 통하는 길은 바위에 파놓은 가파른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정상에 새겨진 마애불로 오르려면 자연 동굴을 지나게 되어 있다. 절벽 꼭대기에 새겨진 높이 4m, 폭 2.2m 정도의 보물로 지정된 마애불상은 모래기가 많이 섞인 화강암에 새긴 터라 보존상태가 썩 좋지 않고 오랜 풍화 작용에 의해 훼손이 심해 유리 지붕을 씌어 놓았다. 마애여래좌상은 문무대왕의 수중릉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골굴사에 석굴사원이 조성되고 지금은 불교 고유의 무술인 선무도가 전승되는 도량으로 자리 잡는 데에 있어 같은 축선 상에 놓인 감은사와 대왕릉은 서로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닌가 추측하게 된다. 이 중심으로 주변에 관음굴, 지장굴, 약사굴, 나한굴, 신중단, 칠성단, 산신당 등의 굴법당과 더불어 남근바위, 여궁 등의 민간 전례신앙의 흔적까지 있어 한국적인 석굴사원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마애불 설명판
마애불로 올라가는 계단
멀리 보이는 마애불
마애불 올라가는 도중의 모습
마애불
마애불에서 보는 동쪽
골굴암 전경
마애불을 내려와 조금 올라가면 휴식을 할 수 있게 만들어진 공간이 있고 여기에 오륜탐이 세워져 있다. 여기서 잠시 앉아 쉬다가 골굴암을 내려 왔다.
오륜탑
골굴사는 일반적으로 선무도(禪武道)로 알려져 있는 불교 무술 금강영관의 본원이 있는 절이기도 하다. 매일 오후 3시에 대적광전(돌계단을 올라가다 보면 표지판이 보이는 '큰법당')에서 무술 시범을 하는데 흔히 아는 소림사의 공연과 비슷한 느낌이다.
매일 공연이 벌어지는 대적광전
골굴사를 돌아보고 내려와서 약 3km 떨어진 기림사로 간다. 기림사는 내가 유별하게 좋아하는 사찰이라 여러 번 왔기에 새로울 것이 없지만 항상 정감이 가는 절이다. 사람들마다 느끼는 것이 다르겠지만 나는 네 계절 중에서 기림사의 여름이 제일 좋다. 봄의 기림사도 단풍이 든 가을의 기림사도 고즈녁한 겨울의 기림사도 좋지만 수국이 만발하는 무렵의 기림사는 온갖 꽃들이 피어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 당긴다. 그래서 기림사의 사진은 예전에 찍어 놓은여름과 가을의 사진을 원용하였다.
기림사 입구의 돌다리
기림사는 27대 선덕여왕 때인 643년 창건되었다고 전하며, 당시 이름은 ‘임정사’였는데 원효대사가 와서 ‘기림사’로 바꾸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31대 본산의 하나로 불국사를 비롯해 60여 개의 말사를 거느린 거대한 사찰이었다.
지금은 불국사의 말사가 되었지만, 비로자나 삼신불이 봉안된 대적광전(보물제 833호)과 약사전, 오백나한을 모신 응진전, 임진왜란 당시 승군들의 지휘본부로 사용된 진남루 등 귀한 유산을 품고 있다.
대적광전은 기림사의 본전이다. 보물 415호인 대적광전은 조선 초기 불상의 전형을 갖추고 있는 삼존불을 모시고 있다. 대적광전과 진남루 사이 서쪽에 오백나한전이 있고, 그 바로 앞에 높이 3m쯤 되는 아담한 3층 석탑이 있다. 배흘림 양식으로 세워진 탑은 처마 끝은 살짝 들리어 가뿐한 느낌을 주고, 위로 갈수록 줄어들면서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대적광전을 마주보고 좌측계단에 오르면 삼천불전이 있다. 삼천 개의 하얀 불상이 본존불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데 한 눈에 들어오기 힘들만큼 웅장하다.(경주문화관광에서 가져 옴)
기림사 입구의안내판
기림사 일주문
기림사 오종수 이야기 설명
매월당 영당
기림사 표시
진남루
대웅전 앞의 소나무와 삼층석탑
대적광전의 전경과 현판
대적광전의 처마와 문 창살의 기하학적 무늬
삼천불전
삼천불전 주변의 여러 모습
유물관 앞의 돌절구
1920년대의 기림사 전경
기림사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으나번잡한 산사는 아니디. 그러니 세사의 번잡함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고 싶으면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기 좋은 곳이다. 수 많은 볼거리 가운데 나의 마음에 다가온 것은 돌절구였다. 돌절구에 새겨져 있는 세월의 흔적이 보이기도 하고 비바람의 풍상에 절은 모습이 마음을 아프게도 하였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뛰어 넘은 돌절구 자체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은 무어라 말할 수 없었다.
기림사를 돌아보고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길은 먼길이었으나 천천히 걸어가면서 나를 돌이켜 보는 시간을 가졌다. 버스정류장에서 제법 기다려 경주 시내 버스를 타고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하니 하루가 지났다. 경주 동쪽은 아직 거리도 멀고 교통이 그렇게 편하지 않음을 다시 생각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