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랑길 70코스는 의항출장소를 출발하여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사구 중의 하나인 신두리해안사구를 지나서 아름다운 구례포해수욕장을 지나 해넘이가 너무 멋진 학암포해변에서 끝이 나는 19.2km 의 길이다.
70코스 안내판
69코스를 끝내고 이어서 바로 70코스 길을 걷는다. 원래 예정이 오늘 70코스까지 걷는 것을 목표로 하였기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길을 간다. 의항포구에서 해안을 따라 가니 오랜만에 갯벌의 물이 빠져서 생기는 기하학적인 무늬를 본다. 항상 물이 빠진 갯벌을 보면 자연의 신비로움을 느낀다. '왜 물이 빠지면 정해진 곳에만 고랑이 생길까?'하는 의문을 항상 가지면서 길을 간다.
의항포구 버스 정류장
의항포구의 모습
이정표
물이 빠진 갯벌에서 고기를 잡는 낚시꾼
의항포구를 지나 해안 길을 따라 걸어가면서 물이 빠진 서해 바다를 보고 걸으니 갯벌의 물이 조금 있는 곳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는 사람이 모습이 보인다. 그곳에 어떤 물고기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유유자적하며 낚싯대를 드리운 그 사람의 모습은 세월을 낚는 강태공과 같았다.
여유로운 풍경을 보면서 길을 가니 소근진성이라는 표지가 보이고 조금 가니 성이 있는 마을 입구가 나온다.
소근진성(所斤鎭城)은 태안군에서 서북쪽으로 13.6km 떨어진 소원면 소근리에 해안가에 있는 조선시대 읍성으로 조선 중종 9년(1514)에 쌓은 것이다. 이 곳에 성을 쌓게 된 동기는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였는데, 특히 고려 말부터 이 지역에 나타난 왜구의 침입으로 인해 지역 주민들의 피해가 심각했다고 한다. 1993년 12월 31일 충청남도의 기념물 제93호로 지정되었다.
소근진성 안내판
소근진성을 지나 해안을 따라가면 넓게 펼쳐지는 모래밭이 나오고 국내 최대의 모래언덕이라는 신두리해안사구가 나타난다.
2001년 천연기념물 제431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는 신두리 해안사구는 길이 3.4km, 폭 0.5~1.3km 국내 최대의 모래언덕으로 뒤에 위치한 두웅습지와 함께 한국지리 교과서에도 많이 나오며 바다 풍경도 좋아 관광지로도 인기가 많은 곳이다.
아프리카나 아메리카의 사막을 가 본적은 없지만 영화나 TV를 보면 가도 가도 끝없이 펼쳐지는 모래밭과 모래바람만 휘몰아치는 사막을 본다. 그런데 광활하게 펼쳐진 해변에서 만나는 모래벌판은 때로는 꿈을 꾸는 무대가 되기도 한다. 그런 분위기를 느끼는 동양 최고의 해안사구인 신두리해안사구는 물은 맑고 깨끗하며 고운 모래로 된 넓은 백사장의 해수욕장을 끼고 있다. 신두리해안사구는 빙하기 이후 약 15,000년 전부터 서서히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강한 바람에 모래가 파랑에 의해 해안가로 운반되면서 오랜 세월을 거쳐 모래언덕으로 만들어졌다. 북서계절풍을 직접 받는 지역으로, 강한 바람에 모래가 파도에 의해 해안가로 운반되어 무한한 세월에 걸쳐 이룬 퇴적지형의 모래언덕이다. 이 모래언덕은 내륙과 해안을 이어주는 완충 역할과 해일로부터 보호 기능을 하고 있다.
신두리해안사구는 자연이 그대로 살아 있는 생태계의 보고로 독특한 생태계가 조성되어 식물군으로는 전국 최대의 해당화 군락지, 통보리사초, 모래지치, 갯완두, 갯매꽃을 비롯하여 갯방풍과 같이 희귀식물들이 분포하여 있다. 동물군으로는 표범장지뱀, 종다리, 맹꽁이, 쇠똥구리, 사구의 웅덩이에 산란을 하는 아무르산개구리, 금개구리 등이 서식하고 있다.
해안사구를 구경하면서 걸어가니 쇠똥구리보호구역이라는 팻말이 보이고 넓은 들판에 몇 마리의 소가 한가로이 서 있는 모습도 보인다.
신두리해안사구의 여러 모습
해안사구를 지나 해안을 조금 따라 걷다가 산으로 올라간다. 산이라고 하지만 작은 언덕과 같은 길을 따라 가니 탁 트인 바다를 바라보는 곳에 조그마한 능파사라는 절이 있다. 그 절을 지나 언덕을 내려가 바닷가로 가니 시원한 약수가 나오는 거북 모형의 수도시설이 있다. 시원하게 물을 마시고 세수를 하고 다시 높지 않은 산길을 걸어간다.
이정표
능파사
거북 모양의 약수 수도
먼동전망대에서 보는 서해
먼동해변 풍경
계속 해안을 보면서 서해의 아래쪽 해안은 갯벌이 발달되어 있는데 위로 오면 갯벌도 나타나지만 넓게 펼쳐지는 모래밭이 많이 보인다. 그러니 해수욕장이 발달하여 여름에는 많은 피서객들이 이곳에서 즐기는 것이다. 계속 가니 아주 넓게 펼쳐진 백사장이 보이고 구례포라는 이정표가 있다.
원북면 황촌리에 있는 구례포해수욕장(九禮浦海水浴場)은 1993년 KBS 1TV 사극 ‘먼동’의 촬영지로 널리 알려져, 방영 이후 구례포의 바다에 반해 피서객이 몰렸고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이다. 잔잔한 바닷물과 양쪽으로 펼쳐진 백사장 그리고 아름다운 해변은 한 편의 그림을 보는 느낌을 준다.
구례포해변
구례포를 지나니 바로 이어서 오늘의 종점인 학암포가 보이기 시작한다. 이제는 날이 제법 싸늘해져서 물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없지만 넓게 펼쳐져 있는 모래밭에는 제법 사람들이 보였다.
해변에 물이 빠졌을 때 드러나는 바위의 형상이 마치 학의 모습처럼 보인다 하여 유래된 학암포(鶴岩浦)해변은 태안읍에서 북쪽으로 20km 떨어진 원북면 방갈리에 있는 포구이다. 이 포구 앞의 대분점도(大盆店島)에 커다란 학바위(鶴岩)가 있는데 거기서 지명이 유래하였다. 그전에는 분점포(盆店浦)라고 하여 조선 시대에 명나라와 교역을 하던 무역항이었는데, 교역품으로 질그릇을 만들어 수출하였으므로 분점(盆店)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주변 일대의 백리포, 천리포, 만리포해변을 포함하여 태안해안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학암포해수욕장 풍경
학암포이야기와 학 모형
태안 바라길 안내 벽화
학암포에서 머물기로 예정을 하여 숙소를 정하고 시간을 맞추어 해넘이를 보러 갔다. 학암포의 해넘이가 장관이라는 말을 들었기에 시간을 맞추어 나가니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기 위하여 일명 대포 카메라를 들고 모여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카메라를 가져가지 않았기에 좋다고 생각되는 자리를 잡고 휴대폰을 이용하여 사진을 찍었다. 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시간의 변화에 따라 해가 지는 광경을 한 지점만을 중심으로 찍는 것도 묘미가 있었다. 학암포의 해넘이는 다른 곳에서 보는 해넘이와는 달리 크게 바다를 물들이지는 않고 다른 느낌을 주었다.
학암포의 해넘이 풍경
해넘이를 구경하고 숙소에 붙어 있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숙소로 올라가 피곤한 몸을 자리에 눕히고 내일을 위해 잠을 청하였다.
서해랑길 69코스는 만리포해수욕장을 출발하여 해안의 언덕길을 걸어 태안의 아름다운 천리포, 백리포, 십리포, 구름포해변을 보고 즐기고, 서해를 한눈에 조망하는 태배전망대를 지나서 의항출장소까지 가는 13.4km의 비교적 짧은 거리다.
오랜만에 서해랑길을 다시 걷는다. 4월말까지 서해랑길을 갇다가, 나의 버킷리스트를 실행하려고 5월부터 6월까지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왔다. 그리고 조금 쉬다 보니 이번 여름은 너무 더워서 길을 걸을 엄두도 내지 못하고 산티아고 까미노길 여행기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새 9월도 지나고 10월이 되니 기온도 내려가고 가을 하늘이 맑았다. 그러니 방랑하는 병이 있는 내 몸이 먼저 반응을 하여 또 다시 길을 떠나기로 했다.
그런데 시작점인 만리포까지 가는 길이 너무나 멀었다. 부산에서 아침에 출발하여 천안으로 가서 다시 만리포가지 가는 버스를 타고 만리포해수욕장에 도착하니 벌써 하루가 지났다.
서해랑길 69코스 안내판
숙소를 정하고 만리포해수욕장을 구경하러 나갔다. 만리포사랑 노래비가 있는 옆에 '정서진'이라는 표석이 있고, 표석에는 대한민국 서쪽 땅끝이라고 표기되어 있으나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표석이다. 물론 관광지로 선전을 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를 하지만 좀 더 사실에 맞아야 한다.
만리포사랑 노래비와 정서진 표시
만리포해변
해변을 거닐다가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해변의 야경을 즐기려고 제법 긴 해안을 따라 걸으며 밤바다의 파도소리를 들었다. 한가하게 왔다 갔다 하면서 보니 나 말고도 여러 사람들이 해변의 야경을 즐기고 있었다.
밤의 해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예전과 같이 걷기에 나선다. 오랜만에 걷는 길이 다소 생소하게 느껴졌으나 몇 년이나 길을 걸었기에 곧 익숙해지리라 생각을 하였다. 아침의 만리포해변에는 아무런 인적도 없이 혼자서 해변을 걷다가 곧 언덕길로 올라간다. 산도 아니면서 산과 비슷한 길을 따라 조금 가면 멀리 천리포해변이 보인다.
아침의 만리포 해변
만리포의 옛이름 설명
해변 끝에 있는 희망광장의 희망의 고리
이정표
산 언덕길
소원면 의항리에 있는 천리포해수욕장(千里浦海水浴場)은 수심은 1~2m, 백사장 길이는 약 1km이고 따뜻한 수온의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다. 남쪽으로 2km 떨어진 곳에 만리포해수욕장이 있고, 북쪽으로는 2km 정도 떨어져 백리포(방주골) 해수욕장이 있다. 원래는 고기를 잡던 어막이 많아서 막동이라고 불리던 곳이나 1955년 만리포 해수욕장을 개장하면서 이곳에도 피서 인파가 몰려들어 천리포로 불리게 되었다.
저녁 일몰의 천리포 해변 바다 풍경은 매우 아름다워 여름이 아닌 계절에도 많은 이들이 찾는다. 주변에 2개의 닭섬이 있는데 육지에 붙어 있는 산을 뭍닭섬, 바다에 떠 있는 섬을 섬닭섬이라 하며 자연적인 방파제 역할을 한다. 주변에는 미국인 밀러(한국이름은 민병갈)가 60ha 면적으로 일군 천리포수목원이 있다.
멀리 보이는 천리포해변
국사봉에서 보는 천리포해변
태안 해변길 2코스 안내판
천리포를 벗어나 조금 가면 이어 백리포가 나온다. 만리포, 천리포. 백리포는 그냥 이어진 해변이라고 해도 그렇게 틀렸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가까이 붙어 있다.
태안군 소원면 의항리에 있는 백리포해수욕장은 천리포 수목원을 지나 북쪽으로 산기슭을 넘으면 비탈진 숲 아래에 있는 자그마한 해변으로 서해안의 절경 중 바닷물이 맑고 모래가 제일 으뜸이다. 원래 '방주골해수욕장'이라는 이름이었으나 만리포해수욕장, 천리포해수욕장과 연결되어 있어 현재 이름으로 바뀌었다.
숲과 숲 사이에 해변이 펼쳐져 있고 해변 양쪽에 절벽이 있는데 어떤 유명한 절벽보다 더 아름답다. 병풍처럼 펼쳐진 주변의 소나무 숲이 아름답고, 인적이 드문 바닷가 해변에는 껍질이 예쁜 꽃 조개가 심심치 않을 정도로 많고, 물에 빠진 바위에는 홍합이 제법 많다. 원하는 만큼 주워 끓여 먹는 맛이 일품이다.
멀리 보이는 백리포해변
망산고개를 가리키는 이정표
수망산 산길
망산고개에서 보는 서해
망산고개를 넘어가면 멀리 의항해수욕장이 보인다.
일명 십리포해수욕장이라고도 부르는 의항리에 있는 의항해수욕장(蟻項海水浴場)은 남쪽으로 백리포, 천리포, 만리포, 어은돌, 파도리 해수욕장이 이어진다. 해변의 지형적인 생김새가 개미의 목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으로, 경사가 완만하며 밀물 때에도 깨끗한 바닷물 상태를 유지하여 준다. 온통 조약돌로 구성된 백사장이 햇볕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일품이며 포근한 곡선 모양의 해변은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백사장은 가지각색의 조약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경사가 완만하고 바닷물이 깨끗해 가족 피서지로 적합하다.
의항해수욕장
여름에는 많은 사람들이 들끓었을 해변에는 인적이 없다. 이제 해수욕철이 지나고 내가 걷는 날이 주말도 아니어서 넓은 백사장에는 바다물만 넘실거리고 있을 뿐이다.
화영섬의 여러 모습
태배전망대로 가는 이정표
길을 가는 도중에 뜻밖에 이태백의 동상이 있고 그의 시가 쓰여 있는 비석이 있다. '이곳에 무슨 이태백이?' 하고 의아심을 가지고 지나니 여러 곳에 비석이 보였다. 그리고 구름포라는 이색적이며 꿈같은 이름의 해수욕장이 보인다.
태안군 소원면 의항리에 있는 구름포해수욕장은 해변의 길이가 짧고 규모가 작은 해수욕장으로만리포에서 북쪽으로 가면 천리포수목원을 지나고 천리포, 백리포, 십리포, 구름포해수욕장이 차례대로 나온다. 물이 맑고 수심이 얕아 가족 단위의 휴양지로 적합하지만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아 한산한 편이다.
‘옛날 중국의 시성인 이태백이 조선에 왔다 이 지역의 빼어난 자연경관에 빠져 머물렀다’는 유래에서 지명이 붙여질 만큼 경관이 빼어난 이곳엔 국토교통부가 2010년 전국의 아름다운 해안경관 풍광 17곳을 선정해 ‘해안경관 조망 공간’ 장소로 조성한 ‘태배 전망대’가 있다.
이태백의 동상과 시판
구름포해수욕장
구름포해변을 지나 높지는 않지만 편안하지는 않는 산길을 걸어가면 태배전망대가 나온다.
태배전망대에서는 광활한 서해바다와 칠뱅이섬(일곱개의 섬) 등 아기자기한 섬들, 불같이 타오르는 황홀한 낙조의 아름다운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또 전망대에는 2007년 유류사고 당시 피해극복을 위해 바위의 기름을 닦는 자원봉사자의 모습 등 극복과정이 사진에 생생하게 담겨져 전시돼 있어 당시의 아픔과 치유의 과정을 모두 체험할 수 있는 공감과 역사의 장이기도 하다.
태배전망대에서 보는 서해
전망대에서 서해를 조망하고 내려오니 옆의 휴게소에 나 정도의 나이의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나도 휴식을 하기 위해 그 옆에 앉으니 그들은 태안의 노인자원봉사자로 해변길을 돌아보는 중이었다. 잠시 이야기를 나무며 커피를 한잔 얻어 마시고 인사를 하고 내가 갈 길을 다시 떠났다.
전망대를 내려와 해안을 따라 걸으니 해변에서 조금 안으로 들어간 곳에 돌로 띠를 두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나라 해안의 곳곳에 보이는 전통적인 고기잡이인 독살이었다. 이와 같은 모습을 보면 항상 드는 생각은 '어린 아이들이 이런 경험을 하게 해 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것이다. 도시의 어두운 환경에서 이런 자연을 보면서 즐겁게 놀 수 있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니 안타까운 생각만 든다.
독살
나지막한 산을 내려와 바다 가를 걸어가니 여러 조형물과 그림이 그려진 해안 벽이 보인다. 의항(개목)마을이다. 그리고 이 마을의 이름의 유래를 알리기 위해서 꾸며 놓은 곳이었다. 이 해안을 지나 조금 가니 의항출장소가 나오고 69코스는 끝이 난다.
의항(개목)마을 이름의 유래
해안길의 조형물과 그림
오랜만에 걷는 길이지만 예전에 걷던 습관이 남아 있어 힘들거나 어려움은 전혀 느끼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걷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즐겁게 길을 가니 지루함도 없이 즐거움만 있다.
오늘부터 귀국하는 날까지는 쉬면서 스페인의 몇 곳을 여행한다. 오늘은 산티아고에 머물면서 무시아와 피스테라를 다녀오고 대성당을 다시 가보고 그 주변을 다닐 예정이다. 아침에 여행사에서 마련한 버스를 타고 무시아로 가는 도중에 아름다운 다리가 있어 그 곳에 버스가 멈추어 구경을 한다. 어제까지 쉬지도 않고 걷다가 갑자기 버스를 타고 움직이니 새로운 세상에 온 것 같다.
폰테 마세이라(Ponte maceira)는 네그레이라 지방 동쪽에 탐브레 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작은 마을로, 2019년부터 '스페인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이 마을에는 13세기 탐브레 강 위에 지어진 원시 정착지, 오래된 방앗간, 댐, 예배당, 현대식 장원 집, 다리 등등 많은 기념비적인 건축물이 있다.
마을을 이어주는 폰테 마세이라 다리의 가장 뛰어난 모습은 탐브레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와 강 자체의 아름다움이다. 강이 흐르는 모습도 한 폭의 그림이지만 그 위의 다리는 화룡점정이다. 폰테 마세이라 다리는 12세기에 탐브레를 넘어 이 마을의 입구에 세워졌으며, 이 다리는 이전 로마 다리의 기둥을 사용했다고 한다. 5개의 메인 아치와 2개의 릴리프 아치로 구성되어 있으며, 다리의 중앙 아치에는 현저하게 뾰족한 둥근 천장이 있다. 오랜 기간 동안의 구조물의 안정성은 기반암 위에 기둥의 일부가 기초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도로서 야고보의 임무는 서유럽을 기독교화 하는 것이었다. 선교 후에 그는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서기 44년에 참수형을 당했다. 그의 제자들 중 아타나시에(Atanasie)와 테오도미로스(Teodomiros)는 산티아고의 시신을 되찾았고, 기독교인의 장례식을 위해 그를 갈리시아로 데려가는 데 성공했다. 갈리시아에 있는 산티아고의 제자들은 머리 없는 사도의 시신을 묻을 장소를 찾고 있었다. 사도 야고보의 제자들이 로마 군단의 추격을 받으면서 남쪽으로 피신할 때 기독교인들은 가까스로 폰테 마세이라 다리를 건넜으나 로마인들이 그들을 따라가려 하자 '신성한' 개입으로 다리가 무너져 기독교인들만 탈출할 수 있었다는 전설이 있다. 이 전설은 실제로 폰테 마세이라 다리 상류 또는 하류에서 일어났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네그레이라 문장에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이상한 것은 '머리 없는 몸'이라는 표현이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지하실에 있는 산티아고의 은관에 사도의 머리가 없다는 언급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있는 성 야고보 대성당의 붉은 대리석 조각으로 표시되고 6개의 봉헌 등불로 둘러싸인 제단 아래에 그의 머리가 묻혀 있다고 한다. 오직 가톨릭의 관계 성당만이 이 문제에 대해 해답의 빛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다리 아래를 흐르는 강물은 아침의 안개에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깨끗하고 맑은 물은 우리 마음을 깨끗하게 해 주는 것 같아서 사람들은 다리를 건너며 아름다운 경치에 감탄을 한다. 다리를 건너 강 아래로 내려가서 보는 풍경은 또 다른 매력이 있다. 다리 건너에 있는 성 블라사의 작은 예배당은 18세기의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졌고 19세기에 반원형의 네오 로마네스크 아페스가 추가되었다.
이 곳에서 다리도 건너고 다리 아래로도 내려가서 강을 보면서 제법 노닐다가 다시 버스를 타고 무시아로 향한다.
강 안개가 낀 몽환적인 분위기
산 블라사 예배당
폰테 마세이라 마을 설명판
스페인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 인증서
강 아래에서 보는 풍경
무시아(Muxía)는 갈리시아의 아코루냐주에 있는 피스테라 곶에 위치한 자치단체로, 무시아는 '죽음의 해안'을 뜻하는 코스타 다 모르트의 일부이다. 이는 이 지역을 코스타 데 라 무에르테라고 부른 것을 갈리시아어로 옮긴 것으로 해안에 돌이 너무 많아서 수많은 배들이 침몰했기 때문에 이 같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무시아라는 이름은 이곳에서 3km 거리에 위치하는 베네딕토회 수도원이었던 상 슐리앙 드 모라이므 성당을 처음 세운 수도사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고 전해지며 스페인어로는 무히아라고 한다. 본래 12세기 초에 세워진 모라이므 수도원이 성당의 모태이나 수도원은 1105년 노르만 해적의 약탈로 파괴되었는데 당시 미래의 알폰소 7세가 이곳에 머무르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그래서 1119년 알폰소 왕자는 막대한 자금을 출연하여 수도원을 복구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종착지 가운데 하나인 무시아의 대표적인 명소로는 상 슐리앙 드 모라이므 성당 외에 비르시 다 바르카 성소가 있다. 이곳은 본래 켈트족의 성소였으나 12세기 갈리시아 지역이 기독교화된 이후 주민들은 이곳을 기독교 성소로 만들었다. 전설에 따르면 갈리시아 지역의 선교가 지지부진해 좌절한 기독교도에게 성모 마리아가 나타나 위로한 장소라고 알려져 있다. 17세기 성소는 성당으로 개축되었으나, 2013년 번개가 떨어져 전소되어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무시아에 도착하여 성당을 한 바퀴 돌고 언덕위의 조형물로 올라가 구경을 하고 주변이 언덕에 올라가 일망무제로 펼쳐지는 대서양 바다와 주변을 눈에 담고 해안으로 갔다. 해안에는 배 모양과 흡사한 제법 큰 바위가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성 야고보가 타고 온 배가 돌로 변하였다고 하는데 믿고 말고는 각자의 몫이다.
성당 주변
전망탑 표시
옛날의 십자가
성 야고브의 배라는 돌
바닷가에 새로 지은 성당
무시아를 잠시 구경하고 이제 피스테라로 간다.
중세시대부터 갈리시아 토박이들은 코스타 다 모르트를 피스테라(Fisterra)라고 불렀다.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90km 떨어져 있는 작은 마을인 피스테라는 '지구의 땅 끝'이라는 라틴어의 Finis(끝) + Terrae(땅)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중세시대부터 세계의 끝(End of the world) 혹은 땅 끝(Land's end)이라고 불렸으나, 정확히는 스페인의 땅 끝도 유럽 대륙의 땅 끝도 아니다. 실제로 이베리아 반도에서 서쪽 땅 끝은 포르투갈의 호카 곶이고, 스페인 본토에서 가장 서쪽 땅 끝은 무시아 자치단체의 토리냥 곶이다. 그러나 고대 사람들은 이 지역의 피스테라 곶을 세상의 끝으로 여겼기 때문에 이 같은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진 것이다.
로마시대에 하루의 마지막 해를 볼 수 있는 피스테라 곶을 방문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중세에 병원들이 피스테라 곶 인근에 형성되어 순례자들을 보살폈기 때문에 이 풍습은 중세까지도 이어졌고, 지금도 순례자 일부는 피스테라 곶 인근에 위치한 피스테라 지방을 순례의 최종적인 목적지로 삼고 걷기도 한다.
피스테라는 서기 44년 예루살렘에서 순교한 야고보의 유해를 나룻배에 실어 보내자, 그 시신이 해안에 닿았다는 설화가 있어 많이 방문하는 순례지다. 성 야고보 유적 발견 이후 순례자들은 산티아고에서 피스테라까지 도착해 성 그리스도상 앞에서 예배를 드리고, 산 길레르메의 유물을 관람하며, '지구의 끝'을 보기 시작했다. 1479년에는도착한 순례자들을 수용할 병원이 지어졌다. 항구에서 3km 정도 이동하면 등대를 향해 이동할 수 있으며, 0km라고 적힌 표지석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 도착한 순례자들은 신발이나 옷가지를 태워 대서양에 뿌리는 의식을 행했으나 현재는 금지되어 순례자들이 물건을 태운 흔적만 발견할 수 있다.
피스테라에는 18세기에 지어진 노사 세뇨라 도 본 수초 성당이 광장에 있다. 피스테라 곶 끝에 있는 600m 높이의 전망대 '몬테 파초'에 등대가 있다. 원래 몬테 파초는 켈트족 네리오족이 태양을 기리는 제물과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다. 등대로 올라가는 길에는 산토크리스토 예배당이 있는 산타 마리아 데 피스테라 교구 성당이 있다.
0km 표시석
피스테라 등대
멋어 놓은 신발 조형물
바닷가의 십자가
피스테라에 도착하여 버스를 타고 온 일행들은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자유롭게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보면서 즐긴다. 30일 넘게 제대로 구경이라고는 하지도 못하고 길만 걸은 사람들에게 이만큼의 자유로움도 마음에 벅차다.
순례자들이 벗어 놓은 신발의 조형물은 우리 모두의 가슴을 멍하게 만든다. 오랜 시간을 걸쳐 먼 길을 걸어 최종목적지에 도착한 순례자는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이 땅 끝에서 자신의 발을 보호하고 자신과 함께 고난을 겪으며 걸어온 신발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신발을 벗어 더 이상의 고생을 하지 않도록 바위위에 올려놓고 감사를 표시한다.
피레스테가 항구라 주변에는 여러 조형물이 보이는데 종교적인 의미를 가진 것은 별로 없고 비교적 현대에 만들어진 조형물들이다. 주변을 구경하다가 언덕위의 카페에 올라가 느긋하게 맥주를 한잔 마시면서 대서양을 바라보며 생각에 빠졌다가 돌아갈 시간이 되어 버스로 가니 길가에 백 파이프를 연주하는 사람이 있어 약간의 돈을 기부하고 버스를 타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돌아왔다.
누군가 벗어 놓은 신발 -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여러 나라의 도시를 가리키는 팻말 - 우리나라는 없다.
피스테라 안내 조형물
거리의 악사
산티아고로 돌아와서 점심을 먹고 대성당을 다시 보러 갔다. 대성당의 광장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순례를 마친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어제는 다소 황망하여 주마간산으로 보았던 정문으로 가까이 가서 영광의 문도 다시 보고 첨탑의 조각들도 조용히 다시 보고, 광장의 기념품 가게에서 산티아고의 기념품을 조금 사고 광장을 배회하고 있으니 길을 걸으면서 만났던 사람들의 모습이 또 보인다. 하루의 시차를 두고 도착한 것이었다.
대성당의 여러 모습
대성당 광장에서 대성당의 여러 모습을 눈에 담고 성당 밑의 음식점이 모여 있는 거리로 내려갔다. 함께 길을 걸은 4명이 여정을 끝낸 망중한을 즐기려고 음식점에 앉아 갈리시아의 해산물요리와 맥주를 시켜 마시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으니 낯익은 얼굴들이 많이 지나가며 인사를 한다. 이제 이 여정도 끝이 났기에 한가롭게 우리가 걸어온 길의 이모저모를 이야기하면서 담소를 즐기다가 숙소로 돌아왔다.
이제 까미노는 공식적으로 끝이 났다. 내일은 마드리드로 가서 이틀을 쉬고 귀국행 비행기를 탄다.
오늘의 걷기 길 : 오 페드로우소 - 오 아메날(3.7km) - 산 파이오 아 코루냐(4,0km) - 아 라바코야(1.8km) - 산 마르코스 아 코루냐(5.3km) - 몬테 델 고소(0.4km) - 포르타도 카미노(4.6km) -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0.2km)
오늘은 이 까미노의 마지막 길을 걷는다. 이제 오 페드로우소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는 약 20km가 남았다. 많은 사람들은 오 페드로우소에서 15km 떨어진 몬테 도 고소에서 머물고 다음날 출발하여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대성당 미사에 참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감격과 기쁨의 마지막 길은 기대에 못 미친다. 이 길에서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향하는 고속도로와 수많은 차로가 얽혀있는 풍경을 주로 볼 뿐이다. 또 주변의 작은 마을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위한 마을로 도시화되었고 라바코야 국제공항은 길을 멀리 돌아가게 만들지만, 이 여정의 진정한 기쁨과 아름다움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산 마르코스의 언덕에서 처음으로 산티아고 대성당의 탑을 바라보는 순간 당신은 이미 순례자의 왕이 되었음을 마음속에 느낄 것이다..
오늘은 평소보다 더 일찍 길을 떠나야 한다. 12시에 있는 대성당의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 일찍 대성당의 광장에 도착해야 하기에 모두들 새벽에 일어나 길을 떠난다. 나도 새벽 5시에 길을 떠나니 다른 사람들은 벌써 떠나고 없다.
오 페드로우소를 나오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나와 일행은 어제 지나온 길로 다시 가서 어둠 속에서 전등을 밝히고 까미노 표시를 따라 걸으니 서양인 한 사람도 같은 길을 걷고 있다. 사위가 어둠에 둘러싸여 지척도 구별하지 못해 잠시 길을 잘못 들었다가 그 사람과 같이 길을 바로 잡아 걸어서 어둠에 덮인 여러 마을을 지나며. 까미노 표시를 따라가서 도로를 넘어 유칼립투스 나무 사이로 편안하게 이어지는 완만한 오르막을 오르면 라바코야 국제공항을 볼 수 있다.
다시 나무가 우거진 숲길을 지나 거대한 공장지대를 지나 이어지는 길을 따라 바레이라 언덕을 올라 얼마 걷지 않아서 산 파이오가 나온다.
산 파이오 표시
산 파이오에서 까미노 표시를 따라 라바코야 국제공항으로 향하는 고속도로 밑으로 이어지는 터널을 통과하면 순례자는 라바코야로 내려가는 아스팔트 포장길을 만난다.
부근에 아름다운 숲과 깨끗한 시내가 있는 라바코야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국제공항 근처의 작은 마을로, 칼릭스티누스 사본은 라바코야를 ‘산티아고에서 10km 정도 떨어진 숲이 우거진 마을에 시내가 흐르는데, 프랑스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순례자들은 모두 이곳에서 사도 야고보를 만나기 위해 옷을 벗고 손발과 더러워진 몸을 모두 씻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이 마을 이름이 ‘라바’(Lava; 씻다) ‘코라’(Cola; 꼬리)’에서 유래되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가장 설득력이 있는 주장은 이 시내에서 순례자들이 산티아고에 좀 더 우아한 모습으로 도착하기 위해 ‘코야스’(Collas; 중세에 사용하던 칼라)를 빨았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렇지만 이런 순례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을 먼 거리를 걸어온 사람들의 몸에는 좀처럼 지워 지지 않는 냄새가 남아있었을 것이다.
라바코야 성당
라바코야에서 산 마르코스까지 내려가는 길에 순례자를 위한 캠핑장과 갈리시아의 지방 방송국인 TVG를 지난다. 방송국 건물을 지나기 전에 비는 부슬부슬 오기에 잠시 쉬어가려고 바에 들러 늦었지만 간단하게 오렌지 주스와 약간의 빵으로 허기를 때운다. 그런데 30여 일을 걸으면서 조금은 이상한 현상을 발견했다. 내가 비교적 음식을 많이 먹는 편인데 거의 매일 아침을 먹지 않고 먼 길을 걸어도 배가 고픈 것을 모르겠다.
산 마르코스와 몬테 델 고소는 같은 마을로 볼 수 있게 붙어 있다. 오늘의 목적지가 바로 눈앞에 있을 것 같은 조급함에 지나칠 수도 있으나 산 마르코스 소성당의 왼쪽으로 유명한 몬테 델 고소가 있다. 대부분의 순례자가 이곳에서 처음으로 꿈처럼 떠오르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의 탑을 본다.
멀리 보이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포장도로를 따라 왼쪽으로 몬테 델 고소의 계단을 내려가서 다리를 건너 고속도로와 사르 강, 철길 위를 지나 콩코르디아 공원을 만나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산 라사로에 도착한 것이다. 이제는 정말로 마지막 길을 걷는다.
순례자 기사단 상
12사도(使徒)의 한 사람인 성(聖) 야고보(스페인어로 산티아고)의 순교지로 알려져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la)는 갈리시아 자치지역에 있는 도시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당의 이름을 따서 도시 이름이 지어졌다. 성 야고보(산티아고 )가 순교하여 유해의 행방이 묘연하던 중, 별빛이 나타나 숲속의 동굴로 이끌어 가보니 성 야고보의 무덤이 있었다고 한다. 그 후 그곳을 ‘별의 들판’이란 뜻으로 캄푸스 스텔라(Campus Stellae)라고 불렀다. 알폰소 2세 시절에 이리아의 테오데마르 주교가 성 야고보의 유해가 발견됐다고 주장하여 성 야고보를 기념하기 위해 그의 유해가 있던 곳에 성당을 세웠고 이를 계기로 순례자들의 중심지로 부상하여 산티아고는 로마와 예루살렘에 버금가는 가톨릭 성지가 되어 해외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왔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나폴레옹 전쟁 때 프랑스군에 점령되어 성 야고보의 것으로 보이는 유해가 1세기 넘게 실종되었다. 그러나 유해는 교회 지하에 있는 석실에 감춰져 있었다. 1884년 교황 레오 13세가 교서를 내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유해의 정통성을 인정했지만 이후 교황청은 그 유해가 성 야곱의 것인지에 대해 공인하지 않으면서 순례할 것을 권장했다. 19세기~20세기에 진행된 성당 발굴 과정에서 로마시대 순교자 묘지가 발견되었다. 2010년 스페인을 방문한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순례의식을 치렀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갈리시아지방 중심도시의 하나로 수공업이 성하다. 12세기에 건설된 성야고보를 모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을 비롯하여 성 프란체스코회와 성 아우구스티누스회의 수도원, 성당, 교회, 대학 등 중세의 건물이 많이 남아 있다.
1985년 구도심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고, 대성당이 있는 오브라도이로 광장 주변에 시 청사, 수도원, 대학교 등 중세시대 건물들이 많다.
산티아고의 엠불렘
산티아고 시내 입구 Praza da Concordia의 조형물
십자가
멀리 보이는 첨탑
계속 직진하여 아베니다 데 루고 거리를 지나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구시가지가 나오지만 대성당까지는 아직 한참을 걸어야 한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옛 시가지(Santiago de Compostela Old Town)는 전설이 담긴 십자가상이 세워진 산 페드로 광장(Plaza de San Pedro)에서부터 시작한다.산 페드로 거리를 내려와 포르타 도 카미뇨를 지나면 길은 여러 거리와 광장이 있는 마지막 구간을 지난다. 스페인의 기독교가 이슬람교와 벌인 항쟁을 상징하는 곳이기도 하는이 도시는10세기 말에 무슬림에 의해 파괴되었다가11세기에 완전히 재건되었다.로마네스크,고딕,바로크 양식으로 지은 건물들이 있는 산티아고(Santiago)의 옛 시가지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다.가장 오래된 기념물들은 성 야고보(St James)의 무덤과 대성당 주변에 모여 있는데,포르티코 데 라 글로리아(Pórtico de la Gloria,영광의 문)가 특히 유명하다.
포르타 도 카미노를 지나면 성인의 숨결이 느껴지는 산 페드로 거리에 도착한다. 이제부터는 눈에 보이는 건물이 모두 유적이다.좁은 거리와 여러광장을 지나면대성당 옆에 여러 성당과 수도원 옛 병원 건물이 보인다. 그 건물들도 화려하고 눈을 끌지만 우리의 목적지는 대성당이다. 마침내 산티아고 대성당을 향한 마지막 길인 아시베체리아 거리로 들어서면 오른쪽에 17세기에 만들어 산 마르티뇨 피나리오 수도원(Monasterial San Martino Pinario)의 웅장한 정문이 있다. 이어서 스페인에서 가장 인상적인 회랑을 만나게 되고, 대성당의 오래된 로마네스크 양식의 천국의 문을 만난다.윤이 나도록 닳은 돌로 만든 도로를 따라 아치를 통과하면 마침내 오브라도이오 광장이 나타나고이제 순례자의 눈에는 그토록 갈망했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이 보인다.
성당 뒤의 건물(Hospedaria San Martino Pinario와 Mosteiro deSan Martino Pinario)
오브라도이로 광장(Praza do Obradoiro)에 있는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Cathedral of Santiago de Compostela)을 보는 순간 말도 나오지 않는 감탄을 한다. 이 길을 걸으면서 크고 작은 수많은 성당을 보았다. 작은 성당은 작은 성당대로 나름의 특징이 있었고, 얽힌 이야기도 있었다. 그리고 부르고스 대성당의 화려함과 레온 대성당의 장엄함을 보고 감탄을 하였다. 그런데 이 대성당은 무어라 말 할 수 없는 감동을 주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Cathedral of Santiago de Compostela)은 외관의 화려함이나 장엄함 그리고 크기가 모두를 압도했다. 광장에서 아무리 구도를 맞추어 보아도 한 컷에 다 들어가지가 않는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Cathedral of Santiago de Compostela)은 예수의 열두 사도 중 한 사람인 성 야고보의 유해를 보관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현재의 성당은 1078년에 주교디에고 페라에스에 의해 기공되어 1128년경 미완성인 채 헌당식을 가졌다. 외부는 여러 시대에 걸쳐 증축과 개축이 이루어졌다. 거대한 둥근 지붕은 15세기에, 16세기에는 회랑이 완성되었다. 바로크 양식의 파사드는 관청들로 둘러싸인 커다란 오브라도이로 광장의 일부가 되었다. 네 개의 계단 위에 위치한 주 출입문 양쪽에는 다윗과 솔로몬의 상이 서 있다. 이 성당의 건축학적 보석은 12세기에 만들어진 포르티코 데 라 글로리아(영광의 문)로, 바로크 파사드 뒤에 있다. 대성당 앞의 마름모꼴 계단을 통해서 올라가면 오브라도이로 문(Fachada de Obradoiro)이 있고,그 안으로 들어서면 영광의 문(Portico de la Gloria)이다. 네이브로 통하는 통로의 팀파눔과 세 개의 아치 위 장식 홍예 위에는 12세기 초 거장 마테오 데우스탐벤이 신약 성서의 요한 묵시록을 근거로 조각한'최후의 심판'에 등장하는200여 개의 상이 조각되어 있다. 바로크 풍의 토레 데 렐로(Torre de Reloj, 시계탑)는 1680년 도밍고 안드라데가 만든 것이다. 화강암을 주재료로 하였으며 라틴 십자가 모양의 평면 설계로, 길이는 98m, 너비는 67m로 이루어져 있다.
대성당은 갈리시아 지방의 화강암으로 지어졌는데, 좌우에 있는 두 개 탑의 높이는 각각 74m다. 대성당 앞의
중앙의 기둥에는 성 야고보의 상과 함께 성모와 다윗의 아버지 이세의 가계도가 새겨져 있다. 중앙 기둥의 하단부에는 사도 마테오의 흉상이 있는데 이 흉상에 머리를 부딪치면 사도의 지혜를 닮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보호를 위하여 철책으로 막아놓아 감사의 의식을 치르기는 어렵다. 영광의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제단 위에 황금으로 만든 천사의 호위를 받으며 백마를 타고 칼을 휘두르는 있는 산티아고 마타모로스(Santiago Matamoros; 전사 산티아고) 상이 있다.
산티아고 대성당의 전경
대성당의 여러 모습
대성당 광장에 도착한 순례자들은 모두 감격에 겨워 서로를 끌어안고 축하한다. 이 먼 길을 걸어온 사람들은 누구나 축하를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다. 예전에는 이 광장에 도착한 순례자들 중에는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감격한다고 하였는데 이제는 우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나는 눈물이 났다. 왜 눈물이 나는지는 모르겠으나 앉아서 울고 있다가 감정을 추스르고 일어나니 같이 걸은 일행이 다가와서 서로 안으며 축하를 해 주고 사진도 찍고 광장에 주저앉아 광장의 사람들은 구경한다. 같은 길을 걸어오며 만났던 사람들의 모습도 보인다. 우리와 거의 같은 길을 걸은 한국의 모녀와 젊은이들, 대만의 여인, 일본인 모두 완주를 기뻐하며 서로 축하를 한다.
대성당 주변의 모습
광장에 앉아 쉬다가 정오의 순례자 미사에 참석하려고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성당을 들어 갈 때 큰 짐이나 남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도구는 가지고 들어갈 수가 없으니 미리 조치해야 한다. 매일 정오에 시작되는 순례자를 위한 미사에는 여러 나라의 사제들이 자국어로 강복을 한다. 우리나라의 사제도 있어 한국어로 강복을 하니 느낌이 달랐다. 가끔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에서 집행하는 미사를 더욱 널리 유명하게 만든 보타푸메이로(Botafumeiro)강복 의식을 하는데 이런 경우8명의 수사들이 힘을 다해 흔드는 황금 빛 향로가 대성당의 천장을 크게 비행하는 감동적인 광경을 볼 수 있다. 보타푸메이로(Botafumeiro)의 원래 뜻은 연기 방출기라는 뜻이나 지금은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에 있는 거대한 향로를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된다. 오늘은 다행히도 보타푸메이로강복 의식을 거행하려고 수사들이 준비를 하고 미사 끝부분에 거행하였다. 사람들은 누구나 휴대폰을 꺼내어 사진을 찍느라고 바쁘다.
순례자들끼리 많이 하는 농담 중에‘파리는 순례자의 친구’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이는 중세나 현재나 마찬가지로 한 달이 넘게 땀이 베인 단 몇 벌의 옷만을 가지고 보도 여행을 하는 순례자에게는 항상 냄새가 나기 마련이라는 자조 섞인 농담이다.중세의 경우에는 더욱 심했을 것으로,라바코야에서 아무리 깨끗이 몸을 씻었어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에 모여든 순례자의 몸에서는 냄새가 풍겼을 것이다.그래서 보타푸메이로는 미사 도중 순례자들에게서 풍기는 고약한 냄새를 없애기 위해 순례자의 머리 위에서 커다란 향로를 피웠던 것에서 유래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보타푸메이로(Botafumeiro)강복 의식
대성당 내부와 미사(향로 미사 포함)
미사가 끝나고 사람들은 성 야고보의 유해가 안치된 관을 보러 간다.
대성당의 후면에는‘면죄의 문’이라고 불리는 거룩한 문이 있고,대성당의 지하묘소에는 순은을 입혀서 조각한 성 야고보의 유골과 그의 제자인 테오도로와 아타나시오의 유해가 들어있는 함이 안치되어 있다. 야고보의 관을 지나가면 대성당의 금빛 찬란한 중앙 제대에는 순례자들이 뒤에서 포옹을 하는 산티아고의 좌상이 모셔져 있다.산티아고 상을 포옹하기 위해서는 제단 뒤의 별실로 가야 하는데 제대 오른쪽으로 가서 옆으로 난 좁은 계단을 올라가면 황금으로 장식된 산티아고 상의 뒷면에 도달하게 되고, 순례자들은마침내 성인을 포옹하고 입맞춤을 한다.
성 야고보의 유골안치소 표시
성 야고보의 관
성 야고보상
성당 내부
대성당을 방문한 순례자들은 순례를 마쳤음을 산티아고의 주교회에서 보증하는 순례인증 증서인 콤포스텔라(Compostela)를 순례자 사무실에서 발급받는다. 사무실에 순례를 하면서 받은 수많은 스탬프가 찍혀있는 순례자 여권인 크렌디시알을 제출하여 심사를 받고 라틴어로 쓰인 콤포스텔라를 받는다. 순례자에겐 이 순간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길의 마침표다.
미사에 참석하고 나와 성당 주위를 구경하다가 오늘의 숙소를 찾아 시내를 걸어가다가 일본식 스시뷔페를 발견하고 점심을 먹으러 갔다. 이 뷔페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뷔페와 조금 다르게 특이했다. 뷔페라 많은 종류의 음식이 있는데 미리 만들어 늘어놓은 것이 아니라 메뉴판을 보고 음식을 주문하면 주방에서 그 음식을 만들어 주는 방식이었다.
점심을 먹고 호텔에 가서 그 동안의 땀으로 절은 몸을 깨끗이 씻고 피로도 풀고 쉬었다.
오늘로 공식적인 산티아고 까미노는 다 끝났다. 30일이 넘게 약 800km를 걸어 온 것이다. 무엇 때문에 왜 걸었는지는 답이 나오지 않지만 이 길을 걷고 난 뒤에 무엇인가를 얻는 것은 천천히 생각해 보아도 될 것이다.
오늘의 걷기 길 : 아르수아 - 아 페로사(3.3km) - 아 칼자다(2.5km) - 아 카야(2.0km) - 살세다(3.3km) - 아 브레아2.5km) - 산타 이레네(2.7km) - 아 루아 오 피노 아 코루냐(1.6km) - 오 페드로우소(1.3km)
아르수아에서 오 페드로우소에 이르는 오늘은 약 20km로 쉽게 걸을 수 있는 길이다. 오늘만 걸으면 내일 산티아고에 입성한다는 생각에 길을 떠나는 순례자들은 이제 정말 다 왔다는 흥분감과 안도감에 급하게 걷기도 하지만 이 길은 짧고, 부드러운 산길이 아름답다. 마지막 부분에 살세다를 지나서 페드로우소에 도착하기까지는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와 자주 마주치게 되므로 안도감을 버리고 교통에 조심해야 한다. 이 길의 중간에서 만나게 되는 살세다와 아 브레나에는 두 명의 순례자가 사망한 기념물이 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넘어 피스테라와 무시아의 바다냄새를 맡을 수 있다는 산타 이레네의 언덕도 완만하며 이곳에서 3km 정도의 내리막을 내려가면 오 페드로우소에 도착한다. 이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는 단 하루만이 남았다.
아침에 일어나니 길을 걷던 일행들은 모두들 가벼운 흥분에 들떠있는 것 처럼 보인다. 오랜 시간에 먼 거리를 걸어서 이제 마지막 목적지가 눈앞에 들어오니 누군들 흥분하지 않겠는가!
알베르게 앞의 아르수아 엠블렘
알베르게에서 큰 도로를 따라 걷다가 왼쪽으로 걸어가면 산티아고 39km의 표시가 나오고 조금 더 가면 오래 된 성당이 나온다. 어제 미사를 본 lgrexade Santiago de Arzua 성당 바로 옆에 오래 된 막달레나 소성당(Capilla de la Madalena)이 있다. 어제 사진도 찍지 못하여 사진을 찍고 지나간다.
산티아고 39km 표지석
막달레나 소성당(Capilla de la Madalena)
막달레나 소성당(Capilla de la Madalena)은 고딕 양식 건물로 르네상스 양식이 일부 결합되어있는 성당으로 옛날에는 순례자를 위한 병원과 함께 수도원의 일부였으나, 지금은 바로 옆에 새 성당을 있어 성당으로서의 역할은 끝이 난 곳이다.
막달레나 소성당(Capilla de la Madalena)을 지나 산길과 언덕길을 따라 조금 가니 수녀원은 아닌 것 같은데 수녀님들이 나와서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물을 나누어 주며 은총을 빌어 준다. 너무나 고마워 물을 한 병 가져오면서 약간의 헌금을 하였다.
수녀원(?)
이 건물에는 두 개의 현판이 붙어 있는데, 위의 글은 '순례자들, 라 프로비덴시아의 성모 마리아의 딸들 우리는 여러분을 위해 여기 있습니다.'이며 아래의 글은 '하느님과 함께 즐겁게 걷는 사람'이다.
아르수아의 루고 거리와 까미뇨 데 산티아고 길을 통과하여 완만한 경사의 오솔길을 오르면 프레곤토뇨 마을에 도착한다. 순례자는 아 카야에 도착하기 전에 아 페로사, 아 칼사다와 같은 작은 마을을 지난다. 아 페로사를 떠나 떡갈나무 숲과 라드론 강변을 지나 유칼립투스 나무 사이로 이어지는 길을 걸으면 아 칼사다에 다다른다. 이어서 마을 출구의 다리를 넘고 완만한 경사 길을 따라서 올라가면 아 카야를 만난다. 아 카야를 떠나 완만한 언덕을 넘으면 살세다에 도착한다. 이 길을 걷는 도중에 가랑비가 오기 시작하더니 제법 굵은 비가 내려 모두들 우의를 입고 길을 걷는다. 갈리시아에서는 일 년에 300일은 비가 온다는 이야기가 있듯이 비는 거의 매일 오다가 멈추고를 반복한다.
어느 신부님의 추모비
스위스의 Tuyet han이라는 이름의 여인
비가 계속 오기에 잠시 쉬었다 가려고 바에 들러 따뜻한 커피를 한잔 마시고 있으니 옆의 좌석에 며칠을 계속 보아온 미소가 너무 예쁜 여인이 자리를 하고 쉬고 있었다. 그래서 이야기를 해 보니 너무 상냥하게 말을 받으며 웃는다. 내가 먼저 나는 한국에서 왔다고 하며 이름을 밝히고, 어디에서 왔으며 이름이 무엇인가를 물으니 종이에 이름을 적어 주었다. 오래 이야기하기에는 외국어 능력이 짧아 간단히 이야기하고 사진을 찍어도 되느냐고 물으니 허락을 해서 사진을 찍었다. 이 길을 걸으며 많은 사람을 만나고 헤어졌지만 이렇게 순박한 웃음을 웃는 사람은 보지 못하였다. 사람에 대한 인상은 각자가 느낌이 다 다르지만 나에게는 이 여인이 웃는 모습이 사람을 편안하게 해 주는 느낌을 받아 너무 좋았다.
체험학습에 나온 스페인 학생들
호레오
이제 비도 가늘어져 걷기에는 별로 어렵지 않아 비를 계속 맞으며 걸어가니 곳곳에 곡식저장 창고인 호레오가 눈에 보인다. 지나는 길에 초등학생 쯤 되어 보이는 스페인 학생들이 무리를 지어 걷는 것도 보인다. 아마도 우리나라의 체험학습 비슷한 것을 하는 것 같았다.
벗어 놓은 신발들
순찰 중인 기마 경찰
별 특이점도 없는 길을 그냥 목적지를 향하여 걸어가니 말을 탄 경찰이 여유롭게 순찰을 돌고 있다. 여러 번을 보았는데 아마 순례자들의 안전을 위해 순찰을 도는 것 같았다. 이 길에서는 다른 특이한 건물이나 유적 성당도 보이지 않는다. 아마 산티아고가 지척에 있기에 다른 유적은 없는 것이라 생각된다.
살세다에서는 잠시 포장도로를 벗어나 오솔길을 따라 걸으면, 순례 중에 유명을 달리한 기예르모 와트를 기리는 기념비가 있다. 그는 1993년 8월 25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하루 남기고 69세의 나이로 하느님을 영접했다고 새겨져 있다. 청동으로 만든 등산화 안에는 지나가던 순례자들이 놓아둔 꽃과 여러 추도를 하는 물품과 글들이 넘쳐난다. 다시 도로를 건너서 오솔길을 걸어가 오 센을 지나면 완만한 내리막길이다. 이제부터 순례자는 촘촘하게 붙어있는 마을들을 지난다. 라스를 통과하는 길을 따라가면 아 브레아로 향하게 되며 중간에는 왼쪽에 1993년 순례 중 사망한 마리아노 산체스 코비사를 기리는 비석이 서 있다.
기예르모 와트의 추모비
까미노 길은 아 브레아를 거쳐 산타 이레네 언덕의 정상에서 도로의 아래를 지나는 터널로 이어지다 산타 이레네를 만난다. 산타 이레네는 까미노 데 산티아고에서 바다의 산들바람 냄새를 처음으로 맡을 수 있는 곳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전통적인 가옥이 있는 작은 마을이다. 길을 가다가 보니 바다가 60m 떨어져 있다는 표시가 있었지만 가서 보지는 못했다.
바다 60m 표시
산타 이레네에서 오 페드로우소까지는 3km도 남지 않았다. 까미노 표시를 따라 유칼립투스 숲길을 내려가면 곧 아 루아가 나온다. 마을을 통과하여 아스팔트 길을 따라 걸어가면 학교가 나오고 계속 아스팔트를 걸어가면 오 페드로우소에 도착한다. 아르카도 피노(Arcado Pino)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오 페드로우소는 철저하게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향하는 순례자를 위하여 만들어진 마을로 많은 알베르게와 식당 슈퍼 등이 잘 갖추어져 있다.그래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하루가 남은 순례자들은 여기서 머물면서 마지막 휴식을 한다..
오 페드로우소의 알베르게를 찾아가서 비에 젖은 몸을 씻고 주변 슈퍼에 가서 마지막 날을 보낼 준비를 한다. 오늘이 산티아고에 들어가기 전날이라 모두들 약간의 들뜸이 있다. 약 30일을 걸어왔는데 내일 하루쯤이야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오늘은 푹 쉬기로 한다. 일행들이 모여 슈퍼에서 닭을 비롯해 여러 음식물을 사서닭을 삶아 먹기로 했다. 물론 남자들의 세계이니 알콜이 빠질 수는 없었다.
닭에 파, 마늘, 홍합 등을 넣고 푹 고아서 닭은 꺼내고 쌀을 넣어 죽을 끓였다. 닭고기를 안주로 삼아 와인과 맥주를 마시며 여태까지 걸어온 길에 대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웃고 떠들고 있으니 주방을 지나가던 많은 사람들이 인사를 한다. 모두가 같은 길을 걸었기에 어느 새 동료의식이 생긴 것이다. 우리와 많은 날을 걸어오면서도 인사만 했던 다리를 절면서 걸은 대만의 여인은 유봉영이라는 이름을 가르쳐 주고, 일본인 여인은 영어로 AIKO MATSUMOTO라고 적어 준다. 둘 다 70에 가까운 나이였다. 조금 있으니 한국의 김해에서 왔다며 우리와 자주 만나 인사를 했던 60 정도의 남자가 합석을 하여 술을 마시고 떠들면서 회포를 풀었다.
제법 마신 술과 이제는 다 왔다는 안도감에 취기가 조금 돌아 쉬다가 저녁에 미사에 참석했다. lgrexa de Santa Eulalia de Arca 성당에서 미사가 끝나니 며칠 전부터 보이던 성가대가 이곳에서 합창을 한다고 한다. 아마도 순회를 하면서 각 마을에서 성가를 합창하는 모양이었다. 성가대의 합창을 끝까지 듣고 나니 제법 늧은 시간이었다. 낮에 마신 술로 약간 취기가 오라서 알베르게로 돌아와 빨리 잠자리에 든다.
lgrexa de Santa Eulalia de Arca 성당
lgrexa de Santa Eulalia de Arca 성당 앞에 예쁘게 핀 수국
lgrexa de Santa Eulalia de Arca 성당 앞의 십자가
성당 내부와 합창
오늘도 길을 걸으며 많은 만남과 헤어짐을 하였다.
나만 그런지 모르겠으나 사람이란 누구나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거의 다 이루어졌다고 생각이 들면 조금은 정신이 해이해지는 것 같다. 여태까지 아주 엄격하게 자신을 통제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긴장의 끈이 조금 풀어진 것 같다.
오늘의 걷기 길 : 팔레스 데 레이 - 산 수리안(3.4km) - 아 폰트 캠파나(1.1km) - 카사노바 루고(1.2km) - 오 코투 아 코루나(2.8km) - 오 레보레이로 아 코루나(0.7km) - 메리데(5.6km) - 오 리이도(3.2km) - 보엔테(2.5km) - 아 카스테네다(2.2km) - 리바디소 다 바이(3.1km) - 아르수아(3.0km)
오늘은 팔레스 데 레이에서 아르수아까지 약 30km의 먼 길을 걷는다. 오늘의 길은 까미노의 여정에서 거리가 긴 일정 중의 하나며,또 계속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어 발걸음은 무거울 것이다. 그래서 중간에 위치한 멜리데에서 머물고 싶은 유혹이 크지만 아르수아까지 참고 가야 한다.
이 길에서 순례자는 루고 땅을 지나 코루냐 땅을 밟게 되어 변화된 풍경과 지방색을 느낄 것이다.
전날 머물렀던 알베르게
아침 일찍부터 길을 나서는 시간이 너무 이르나 오늘은 제법 먼 길을 걸으므로 출발한다.
팔라스 데 레이의 순례자 거리의 샘터에서 오른쪽으로 빠져 도로를 건너 라구아 연못을 지나면 산 수리안으로 내려가는 아스팔트 포장길로 바뀐다. 유칼립투스 나무와 소나무가 터널처럼 드리워진 시원한 내리막길을 내려가면 팜브레 강을 만나게 되고, 시멘트로 만들어진 평범한 다리를 건너면 인적이 없는 아 폰트 캠파니에 도착하고, 곧 루고 지방의 마지막 마을 카사노바에 도착한다.
빽빽한 떡갈나무 숲 가운데에 목가적인 루고 지방의 마지막 마을 카사노바를 지나면 오래된 로마 가도가 나오며 이 길을 따라 2km 정도 오솔길을 걸어 내려가 포르토 강을 건너면 코루냐 지방이 나온다.
팔레스 데 레이 거리
아 그라나 표시
라 코루냐(La Coruña)는 헤라클레스가 거인 헤리온을 물리친 세상의 끝이면서 전설적인 켈트인들의 왕이었던 브레오간이 태어난 마법 같은 곳으로, 스페인 북서부의 갈리시아 지방의 주로 북부와 서부는 대서양에 면하고 남부는 포르투갈과 접해 있다. 주도는 라 코루냐로 고대부터 항구도시로 발전했으며, 곶에는 2세기 로마인이 세운 유일한 로마식 등대인 토레 데 에르쿨레스(Torre de Hercules; 헤라클레스의 탑)가 있다. 라 코루냐는 대부분이 산지로 연안은 리아스식 해안이며 비가 많이 온다.
라 코루냐 지방은 산티아고로 가기 위해 순례자가 발걸음을 내딛는 마지막 지방이다. 코루냐 지방의 주요 도시는 코루냐와 까미노의 최종 목적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다.
완만한 경사로를 걸어 우요아 강가의 작은 마을인 캄파니야를 지나면 유칼립투스 나무가 우거진 아스팔트 포장길을 지나 코루냐 지방의 첫 번째 마을인 오 코토에 도착한다. 오 코토에서 오래된 로마길을 걸어 500m만 가면 코루냐 지방의 아름다운 전원마을인 레보레이로에 다다른다.
작은 마을 레보레이로는 라 코루냐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준다. 이곳의 깨끗한 로마 가도는 지친 순례자를 반겨주고, 양 옆의 집들과 오래된 십자가상은 매력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마을을 나오면 돌로 포장된 길과 과수원, 세꼬 강의 작은 다리를 건넌다. 레보레이로라는 마을의 이름은 캄푸스 레부라리우스(Campus Levurarius)라는 라틴어에서 파생되었다 하는데, 이 말은 ‘산토끼의 들판’이라는 뜻으로 이 지역에서 산토끼가 많이 살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로마네스크에서 고딕 양식으로 넘어가는 시기의 아름다운 건축물로, 첨두아치 문의 팀파눔에는 아름다운 성모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으며 성당의 내부에는 16세기에 만들어진 그림과 요염한 성모로 알려져 있는 중세 시대의 성모상이 있는 산타 마리아 데 라스 니에베스 성당(La Iglesia de Santa Maria de las Nieves)의 건립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전설에 따르면 원래 성당 자리에 낮에는 신비로운 향이 풍기는 샘물이 솟아나왔고, 밤에는 신비로운 빛이 퍼져 나왔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기적이라 생각하고 그 주변을 파자 아름다운 성모상이 나왔다고 한다. 사람들은 성모상을 마을의 성당으로 옮겼으나 다음 날 성모상은 원래의 장소에서 다시 발견되었다. 계속해서 성당으로 옮겨도 샘 옆에 계속 성모상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이 샘터에 새로운 성당을 짓기로 했다. 그리고 샘터에서 발견한 성모상과 똑같이 생긴 성모상을 만들어 마을 성당의 팀파눔에 놓기로 결정했다. 그 후 성모상은 움직이지 않고 제단 뒤에 계속 자리 잡았다. 레보레이로 사람들은 아직도 어두운 밤에 아무도 없을 때 성모가 샘물에 나타나 목욕을 하고 머리를 빗는다는 전설을 믿고 있다.
레보레이로 성당 표시
산타 마리아 데 라스 니에베스 성당(La Iglesia de Santa Maria de las Nieves)와 카베세이로 (Cabeceiro)
성당 앞에는 카베세이로(Cabeceiro)라는 특이한 형태의 집이 있다. 카베세이로(Cabeceiro)는 ‘가난한 이들의 호레오’라고 부르는 전통적인 창고 구조물로, 현재 레보레이로에 남아있는 것 이외에는 찾아보기 힘들다고 한다. 기둥 위에 버드나무 가지로 엮은 커다란 광주리를 올리고 짚으로 덮은 형태로 전통적으로 식량을 보관하기 위해 사용했다.
레보레이로의 바에서 휴식을 하고 간단히 빵과 커피로 아침을 대신하고 다시 길을 떠나니 비가 오기 시작한다. 비가 많이 오는 고장이라는 실감이 나게 비가 자주 온다. 오는 비를 맞으며 길을 계속 가니 비가 한여름에 우리나라에서 오는 폭우와 같이 쏟아지는데 비를 피할 곳이 아무 곳도 없다. 하는 수 없이 비를 맞으며 모두들 우의에 의존하여 길을 걷는데 앞도 보이지 않고 우의도 별 소용이 없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로만 브릿지
레보레이로 출구의 십자가상을 지나 길을 따라 세꼬 강을 건너 푸렐로스 강 쪽으로 내려와 로마네스크 양식의 다리를 건너서 완만한 오르막을 2km정도만 가면 코루냐로 들어가 처음으로 만나는 도시인 멜리데에 도착한다.
박물관 표시
멜리데에는 코루냐 지역에서 가장 위풍당당한 성과 오래된 광장이 있다. 주요 산업은 관광객과 순례자를 위한 서비스로 이 지역의 경제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멜리데는 까미노 프란세스와 까미노 데 오비에도(Camino de Oviedo)가 만나는 곳이다. 중세의 많은 순례자들은 오비에도의 산 살바도르 대성당(Catedral de San Salvador)에 있는 카마라 산타(Camara Santa)의 유물을 경배하기 위해 이 길을 걸었다고 한다.
멜리데의 산 페드로 성당은 14세기에 순례자를 위한 상티 스피리투스 병원이 들어서면서 만들어진 부속성당으로 고딕 양식의 요소와 바로크와 신고전주의 양식이 추가되고 증축되어 산 페드로 성당이 만들어졌다. 현재 정확히 주인을 알 수 없는 중세 시대의 무덤과 봉헌화 등이 보존되어 있다.
메리데의 산 페드로 성당(Iglesia de San Pedro)
비가 계속 와서 바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가 조금 후에 다시 걷기를 시작한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걷는데 몰두해서 주변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지나왔다. 비는 조금 적게 오지만 계속해서 오기에 비를 맞으며 걸어가니 곳곳에 갈리시아의 곡식창고인 호레오가 다양한 형태로 보인다.
멜리데를 뒤로 하고 카타솔 강을 지나는 다리를 넘어 유칼립투스 나무가 울창한 길을 지나면 순례자 쉼터가 나오고 오 라이도에 도착한다. 다시 길을 가서 완만한 오르막을 오르면 보엔테가 나온다. 멜리데에서 보엔테까지는 약 5.5km의 길이다. 보엔테를 지나 계곡을 거쳐 오르막을 오르면언덕의 끝에는 산티아고 대성당의 석회를 만들기 위한 가마가 있었던 아 카스타녜다가 있다. 팔라스 데 레이에서 카스타녜다까지 25km를 걸어온 순례자는 이 조용한 마을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남은 5km를 걷는다. 그러나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오르막과 내리막은 계속해서 순례자를 괴롭힌다. 내리막을 내려가면 작은 마을인 리오를 지나고, 계속해서 아름답게 펼쳐진 이소 계곡을 지나 그림 같은 전원주택 사이를 걷다 보면 리바디소 다 바이쇼에 도착한다.
지나는 마을의 바에 들러 잠시 휴식을 하였다. 잠시 쉬고 있는 중에, 서양인의 나이를 짐작하기 어렵지만 한 40살 정도 되어 보이는 서양 여인이 웃고 있었다. 물론 나를 보고 웃는 것은 아니지만 몇일을 계속 보았던 여인으로 여인은 항상 웃고 있었고 그 웃음에 너무 맑아서 마음을 청량하게 해 주었다.
코로나에 헌신한 사람들에 대한 감사
우의를 입고 걷는 사람들
강가의 아담한 집
여기서부터 아르수아까지 가장 힘든 오르막이 3km에 걸쳐 계속된다. 리바디소 다 바이쇼 마을을 빠져나와 도로를 건너 이어지는 꼬불꼬불한 오르막길은 순례자를 지치게 하지만, 이 오르막의 끝에는 오늘의 여정을 마칠 수 있는 아르수아가 순례자를 내려다보고 있다.
푸른 목초지와 유칼립투스 나무가 순례자의 지친 몸과 마음을 감싸 안아주는 아르수아는 마을의 입구에서 중심부까지가 걸어서 1km가 조금 넘는 현대적 마을이지만 예술적인 건축물은 많지 않다. 그렇지만 아르수아에는 떼띠야(작은 젖가슴)라고 불리는 전통 치즈로 유명한 마을로 아르수아 치즈는 팔레스 데 레이의 우요아 치즈와 같이 철저하게 원산지 표기를 해서 보호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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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비가 그쳐서 해가 하늘 위에서 빛을 내고 있다. 아르수아 알베르게에 도착하여 비에 젖은 몸을 씻고 세탁을 하여 햇볕에 늘어놓고 시내를 구경하러 갔다. 항상 같이 다니는 일행들과 시내를 돌아다니며 바에 들러 맥주도 마시고 이제 끝나가는 여정의 마지막을 아쉬워하면서 실없는 농담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알베르게에 돌아오니 또 낯익은 얼굴들이 보인다. 항상 같은 길을 걷고 있는 한국인 모녀, 한국의 젊은 부부, 그리고 많은 서양인들 그들 모두 이제는 이 긴 여정이 끝난다는 생각에 아쉬움이 많은 것 같았다. 그 중 한국인 모녀 중에 딸과 이야기를 제법 많이 하였다. 처음 이 여정을 시작에서 발이 아파 쉬고 있던 그녀에게 파스를 준 인연으로 제법 친근하게 서로 대화를 했던 젊은이는, 이태리에 유학하여 이태리 요리사 자격을 가지고 있다가 이번에 직장을 그만두고 엄마와 함께 이 길을 걷는다고 하며 돌아가면 다시 취업을 한다고 하였다. 젊은이들이 도전과 용기가 부러웠다.
저녁을 먹고 성당에 가서 저녁 미사를 보았다. 성당은 현대에 지어진 것으로 별 다른 특징은 없는 곳이었다. 성당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모여 미사를 보고 있었고 그 중에는 나와 같은 이방인들도 많이 보였다.
미사를 본 성당
미사를 마치고 알베르게로 돌아오니 비에 젖은 신발과 빨래가 아직 다 마르지 않았다. 마침 헤어 드라이를 가지고 있는 한국인이 있어 빌려서 신발과 양말 옷 등을 말리고 잠자리에 들었다. 순례자에게 한 마디 조언을 하면 헤어 드라이는 길을 가면서 아직 마르지 않은 옷을 말리는데 아주 유용하다. 그러니 여러 명이 함께 가면 꼭 가지고 가면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비가 너무 많이 오는데 비를 맞고 걸어 카메라가 비에 젖어 고장이 났다. 처음에는 메모리에 에러가 뜨더니 메모리를 닦아 주니 메모리는 정상이 되었는데 이제는 전원이 나가 버린다. 여러 가지로 손을 보아도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아마 비가 내부로 들어간 것 같았다.기계야 귀국해서 고치면 되지만 메모리에 저장된 사진이 문제였다. 만약 메모리에 이상이 있으면 거의 한 달의 기록이 모두 없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걱정은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이제부터는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야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귀국해서 메모리를 보니 이상이 없어 사진은 모두 저장되어 있어 다행이었다.
오늘은 비교적 어려운 길을 걸었다. 길 자체가 어렵고 먼 길이 아니라 비가 엄청나게 쏟아지는 바람에 고생을 하였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 비교적 날씨가 좋아서 순조로웠는데 막바지에 한번 시련을 주시는 것 같았다. 그래도 아무 탈 없이 길을 걷는 모두가 무사히 걸은 것에 대하여 감사를 드릴 뿐이다.
오늘의 걷기 길 : 포르토마린 - 곤사르(8.5km) - 오스피탈 다 크루즈(3.5km) - 벤다스 데 나론(1.5km) - 리곤데(3.2km) - 아이레세(1.0km) - 포르토스(2.0km) - 팔라스 데 레이(5.5km)
오늘은 포르토마린에서 팔라스 데 레이까지 약 25km를 걷는다. 포르토마린에서 팔라스 데 레이까지 25km의 길은 비교적 안정적이다. 그러나 리곤데까지 약 15km는 고도를 300m 이상 올라야 하는 길이니 초반에 오버페이스를 하지 않도록 주의하여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 순례자는 치즈로 유명한 벤다스 데 나론을 지나고 리곤데의 라메이로스 십자가상을 만난다. 팔라스 데 레이에 도착하기 전의 약 10km는 아스팔트 포장길과 나란히 흙으로 만들어진 길을 걷는다.
포르토마린을 떠나기 위해서는 미뇨 강의 지류인 토레스 강 위를 지나는 좁은 다리를 건넌다. 강가에서 산언덕으로 난 길을 따라 오르막을 올라간다. 길은 밤나무와 유칼립투스 나무가 만들어주는 시원한 그늘을 따라 이어지며 오솔길로 변한다. 포르토마린에서 곤사르까지 약 9km는 순례자를 힘들게 하는 오르막이 이어진다.
포르토마린 거리
미뇨강 주변
강을 지나 언덕을 오르는 지점에서 같이 길을 걷던 일행 중에 길을 잘못 들어 다른 길로 갔다는 사람이 있다. 표시가 여러 개가 있어 다른 길로 가 강을 계속 따라갔다는 것이다. 물론 뒤에서는 다시 만나겠지만 우회하는 길이라 다시 돌아와서 같이 길을 걷는다.
호레오(HORREO) - 곡물 저장 창고
갈리시아를 걷다가 이상한 모양의 건축물이 다양한 형태로 집에 있는 것을 보았다. 처음에는 무엇인지를 몰라 길가는 일행들이 모두 추측성 말을 하며 궁금해 하였는데 알고 보니 호레오였다. 기록에 따르면 13세기부터 있었다는 호레오(HORREO)는 곡물을 저장하는 일반적인 헛간으로 대부분은 갈리시아에 존재하고 프랑스, 영국 제도, 스칸디나비아에도 유사한 곡물 창고가 있다. 호레오는 저장된 곡물을 설치류로부터 보호할 목적으로 돌이나 땅에 기둥을 세워 건축하며, 대부분 직사각형과 정사각형 모양을 가지고 있다.
곤사르 가는 언덕 길
곤사르는 샘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떡갈나무 숲과 시원한 그늘이 있어서 순례자들이 휴식을 취하기에 좋다. 옛날 켈트인이 살던 흔적과 예루살렘 성요한 기사단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오늘날엔 소박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 주변에 아담한 시골집뿐이다.
곤사르를 지나 약 1km 가량 더 가면 나오는 가스트로마이오르의 산타마리아 성당(lgrexa de Santa Maria de Castromaior)은 곤사르의 교구성당과 비슷한 건축양식을 보이는 소박한 로마시대 이전의 건축물이다.
카스트로마이오르 성당 설명
길가의 집
곤사르에서 약3km떨어져있는 오스피탈 다 크루즈로 가는 길은 경사가 심한 오르막이며 주위는 적막하다.오스피탈 다 크루즈는 마을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순례자를 위한 병원이 있었던 곳으로,아주 작은 마을이다.이 마을 출구에서는 까미노 표시가 잘 보이지 않아서 당황하기 쉽다.다리를 넘어서 오우렌세에서 루고로 들어가는 도로를 건너면 금방 벤타스 데 나론에 도착하게 된다.다음 길이 경사가 급한 해발756m의 리곤데 언덕이라 이 언덕을 오르기 위해서는 벤타스 데 나론에서 휴식을 가지는 것이 좋다.
이상하게 이 길에서는 마을의 표시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제까지 길을 걸을 때에는 마을이 가까우면 마을의 표시가 보여 이정표의 구실을 하였는데 오늘의 길에서는 마을 표시가 없어 어느 마을을 지나는지도 모르고 마을을 지나 길을 걷는다. 어느 마을인지를 모르겠으나 조그마한 성당이 있어 들어가니 눈이 먼 관리인이 지나가는 순례자에게 세요를 찍어주고 있다. 세요를 찍기 위해서 그 관리인의 손을 잡고 자기의 크렌디시얼에 맞추어 순례자들은 도장을 찍는다. 그리고 작은 돈을 헌금을 한다. 모두가 마음이 너그러워진 것 같다.
마그다레나 성당(Capilla de la Magdalena) 설명
마그다레나 성당(Capilla de la Magdalena)
리곤데로 가는 길에 몬테로사(Monterrosa)라는 조그마한 마을을 지난다. 이 마을을 지나는 길에 지금까지 걸어오며 본 일이 없었던 아이들이 보인다. 마을의 나무에 모여서 놀고 있는 아이들이 보여서 사진을 찍자고 하니 웃으며 포즈를 취해 준다. 어디에서나 아이들은 쉽게 사진의 모델이 되어 주는데 어른들은 꼭 아이들을 찍지 못하게 한다. 어른들이 가진 선입견이 무섭다.
몬테로스 안내도
마을 아이들
몬테로사(Monterrosa)를 지나 조금 가서 휴식을 하려고 바에 들어가니 한 무리의 스페인 사람들이 모여서 빵과 음료를 먹으며 휴식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순례를 하고 있는 사람들인 것 같아 보였다. 그들은 음식을 함께 가지고 다니면서 쉼터에서 나누어 먹고 또 나머지는 다시 가지고 길을 떠나고 있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음식을 나누는 사람에게 말을 하더니 나에게 빵을 나누어 주어 고맙게 얻어먹었다. 참으로 순박하고 여유로운 사람들이었다. 자신이 먹을 음식을 나누는 것은 참으로 쉽지가 않은 행동이다.
lgrexa de Santiago de Lestedo
아름다운 문장이나 특이한 파사드로 장식된 전통집들이 모여 있는 마을 리곤데는 미뇨 강과 우야강의 발원지이며 우요아 산과 시몬 산이 만나는 곳으로 아이레세는 상당히 가까우며 여기에서 파요타 산으로 이어지는 길을 올라야 한다. 이어서 인적이 없는 포르토스가 나오고 아스 로사리오 언덕을 오르면 팔라스 데 레이가 저 멀리에 보인다. 팔라스 데 레이에 가까운 곳에 Meson A Brea라는 작은 마을이 있고, 그곳을 지나면 팔라스 데 레이로 들어간다.
팔라스 데 레이 표시
팔라스 데 레이에 들어가는 길은 상당히 멀다. 길을 따라서 가니 여러 도시의 시설물들이 보이고 공원을 가꾸는 사람들도 보인다. 조금 더 가니 관광안내소가 있어 세요를 찍으러 가니 안내인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물어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도장을 찍어 주었다. 그곳에서도 제법 걸어가니 오늘의 숙소인 알베르게가 보인다.
팔라스 데 레이라는 이름은 ‘왕의 궁전’(El Palacio de un Rey)이라는 의미다. 이곳에는 서고트의 왕 위티사가 그의 아버지 에히까의 치세 동안 갈리시아 지방의 총독을 맡아서 살던 궁전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명명되었다.
아 우요아 지역의 중심도시인 팔라스 데 레이는 선사 시대의 고인돌, 로마 시대 이전의 성벽, 로마 시대의 건축물, 성과 수도원, 아름다운 자연 경관이 모여 있는 곳이다. 또한 까미노 데 산티아고와 관련된 흔적도 많이 남아 있다.
숙소에 머무르다가 슈퍼에서 고기와 야채 등을 사서 저녁을 만들어 먹고 쉬다가 저녁 미사에 참석하러 갔다. 크지는 않은 성당이었는데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미사에 참석하고 있었다. 신부님이 하는 말은 알아들을 수가 없지만 의식은 한국과 같으므로 따라 하고 있으니 어던 의미인지 모르겠으나 눈물이 났다. 무언가 성령의 힘이 깃든 것인지 아니면 이제 다 왔다는 안도감에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미사를 끝내고도 잠시 앉아 마음을 다스렸다.
미사를 마치고 나오니 같이 길을 걷고, 미사를 보았던 한국의 여성분이 말하기를 자기도 미사 도중에 눈물이 나서 주체할 수가 없었다고 이야기를 하였다. 같은 느낌을 받은 동류의식으로 걸어오면서 서로의 많은 이야기를 하고 숙소에 돌아와서 잠자리에 들었다.
lglesia de San Tirso de Palas de Rei
하루를 보내는 시간은 항상 일정하다. 물리적인 시간은 하루를 24시간으로 구성해 놓았고 우리는 그 시간에 맞추어 생활하고 있다. 하지만 사람은 항상 동일한 시간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을 길에서 만나고 헤어지고 하였다.
항상 길가며 보았던 대만의 여인은 오늘도 다리를 쩔뚝이며 길을 갔다. 다리는 불편하지만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걷는 힘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아무 말도 알아들을 수 없는 성당의 미사에서 눈물이 나는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우리가 생각하는 범위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 많은 날이었다.
오늘은 사리아에서 포르토마린까지 약 22km 남짓한 길을 걷는다. 사리아에서 포르토마린까지 걷는 길에서 순례자는 조그만 흥분으로 가슴이 뛰는 것을 느낄 것이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100km가 남았다는 거리표시가 있는 표지석 때문이다. 이 표지석 앞에서 순례자는 기념사진을 찍고 스스로가 걸어온 길과 앞으로 걸어갈 길을 생각하며, 이제 이 여정의 목적지가 눈앞에 보이는 것 같은 행복한 기쁨을 즐길 것이다.
사리아에서 오늘 통과하는 루고 지방은 까미노에서 가장 쾌적한 구간으로 비옥한 땅과 향기로운 과수원이 펼쳐진다. 페레이로스를 지나면서 포르토마린까지의 내리막 이외에는 특별하게 힘든 오르막이나 내리막이 없으며 떡갈나무와 밤나무 숲속의 그늘로 편안히 걸을 수 있다.
역시 바쁘게 움직이는 한국 사람들은 오늘도 늦게까지 잠을 자지 않는다. 새벽같이 일어나 길을 떠날 준비를 하고 동도 트기 전에 길을 떠난다. 같은 숙소에 머무는 다른 사람들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일과에 맞추어 길을 떠나는 사람이 많다. 숙소가 신시가지에 가까워서 길을 떠나면 구시가지쪽으로 발을 옮긴다. 인적이 없이 적막함 속에서 길을 떠나니 구시가지에 있는 막달레나 수도원(Convento de la Magdalena)이 나온다.
사리아 표시
멀리 보이는 사리아 신시가지
막달레나 수도원(Convento de la Magdalena)
사리아의 구시가지 언덕 위에 위치해 있으며 도시와 근교의 멋진 풍경을 감상하기에 좋은 막달레나 수도원(Convento de la Magdalena)은. 이사벨 여왕 시대에 만들어진 고딕 양식 성당으로, 플라테레스코 양식 문과 고딕에서 르네상스로 넘어가는 양식의 회랑이 있다.
막달레나 수도원을 지나 도시를 빠져나와 약 1km 정도를 걸어 강을 건넌다. 다리를 건너 과수원과 목장 사이의 평화로운 숲길로 가서 작은 마을들을 지나 아스팔트로 포장된 완만한 오르막을 오르면 수도원의 유적이 남아있는 바르바델로다. 사리아의 출구에서 바르바델로까지는 약 한 시간이 걸린다.
길가의 오래 된 고목들
바르바델로 신티아고 성당 설명 - 산티아고 가는 길을 발전시킨 공로를 표현한 설명
바르바델로 산티아고 성당(Iglesia de Santiago)
수도원 때문에 오 모스테이로(O Mosteiro; 수도원)라고도 불리는 바르바델로는, 중세 시대에 수도원을 중심으로 번성했지만 지금은 오래된 수도원의 유적에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과 요새의 약간 부분만 남아 있다. 갈리시아 지방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전형적인 성당은강인해 보이는 탑과 팀파눔과 주두의 부조가 돋보ㅇ니다.성당 안에는 순례자 산띠아고의 상이 있다. 팀파눔에는 어떤 남자가 장미와 십자가로 둘러싸인 채 팔을 펼치고 있는 장면이 새겨져 있는데, 이 장면이 템플 기사단의 입회자가 로사크루스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이라고 한다.
이 길을 걸으며 만나는 작은 마을에는 루고라는 명칭이 마을 뒤에 붙어 이곳이 루고지방임을 알리고 있다.
루고주(Lugo)는 스페인 갈리시아 자치지방에 있는 주로 주도(州都)는 루고이다. 북쪽으로 비스케이만(灣)에 면하며, 내륙에는 칸타브리아산맥이 동서로 달리고, 서남부를 흐르는 미뇨강 유역에는 규모가 작은 마을들이 교구(敎區)를 중심으로 넓게 분포한다. 대체로 산이 많고 경작지가 적어서 축산이 중요한 산업이며, 철·구리 등 지하자원이 풍부하다. 18세기 이후 새로운 일을 찾아 신대륙으로 나가는 사람이 많았고,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유럽의 산업국가들로 이민가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중간에 만나는 알베르게 - 마잔 말
넓게 펼쳐지는 평원
산티아고의 조각상이 있는 성당을 지나면 바르바델로에서 렌테까지는 약1km정도로,마을 출구에서 오르막을 걸어가면 멀리 아름다운 오르비오 산의 봉우리들이 눈에 들어오고 렌테에 도착한다.조금만 더 가면 드디어 순례자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100km가 남았다는 표지석을 만난다. 100km가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잠시 먹먹해진다.이제부터 걸어갈 거리는 걸어온 거리에 비해서 아무 것도 아니고 이제는 다 왔다는 안도감에 잠시 빠진다.많은 순례자들이 모두 이 표지석에서 사진을 찍는다.서로가 서로를 찍어주며 수고했다고 칭찬을 한다.잠시 사진을 찍고 휴식을 한 뒤 모르가데까지 걸어가면 페레이로스로 이어지는 오르막길이 나온다.
산티아고 100km 표지석
돌집의 쉼터
여기서 페레이로스까지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여러 마을을 통과한다. 페레이로스에서 오늘의 목적지인 포르토마린까지는 약 9km가 남아있으며 여러 작은 마을을 지난다. 작은 마을의 바에서 휴식한 후에 다시 길을 가서 빌라차에 다다르면 강 맞은편으로 벨레사르 댐 때문에 도시 자체를 온전히 이동했다고 알려진 포르토마린이 보인다. 여기서 두 갈래의 길이 나타나면 어느 쪽으로 가도 비슷한 거리로 같은 곳에서 마주친다. 아스팔트 포장 길을 따라 내려가 긴 다리를 건너면 포르토마린에 도착한다.
포르토마린 표시
과거 로마인들이 미뇨 강 위에 다리를 놓았을 때부터 포르토마린은 강가에 위치한 마을이었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였다. 이런 이유로 마을의 다리는 남편 알폰소 1세와 맞섰던 도냐 우라까의 명령으로 파괴되었고, 이 다리는 산티아고 대성당을 건축한 마테오 데우스탐벤의 아버지이자 ‘순례자 페드로’로 불렸던 페드로 데우스탐벤에 의해 재건되었다. 1946년에 스페인 역사예술단지로 지정되었지만 포르토마린 역시 근대화의 물결을 막을 수는 없었다. 1963년 포르토마린은 벨레사르 저수지를 건설하면서 강의 왼쪽에 있는 성 베드로 마을과 오른쪽에 있는 성 요한 마을을 이어주던 중세부터 순례자들이 건너오던 아름다운 다리는 수몰되었지만 산 니콜라스 요새 성당, 산 페드로 성당의 파사드, 마사 백작의 집, 베르베토의 궁전 등 역사적으로 중요한 건물들의 일부가 새 도시로 자리를 옮겨 보존될 수 있었다. 그래서 새로운 포르토마린은 과거와 현재의 조합이 잘 이루어진 매력적인 곳이 되었다. 새로 몬테 데 크리스토 언덕 위에 만들어진 포르토마린은 미뇨 강에서 이 마을을 바라보면 환상적이라고 한다. 역사적인 건축물 외에도 포르토마린에는 여러 곳의 관광지가 있으며, 강 계곡의 길에서 여러 개의 다리와 풍차 등을 보며 산책을 즐길 수도 있다.
포르토마린 엠블렘
미뇨강을 건너 몬테 데 크리스토 언덕 위에 만들어진 포르토마린으로 올라가면 제법 높은 계단을 올라가서 문을 통과하면 신시가지가 펼쳐진다. 새로 만들어진 도시답게 새로운 건물들이 늘어서 있고 도시는 편리하게 조성되어 있다. 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니 오늘의 숙소인 알베르게가 길가에 있다.
알베르게에 들어가니 바로 옆에 슈퍼가 있어 편리했다. 슈퍼에 가서 내일을 위한 먹거리와 저녁을 위해 약간의 주류를 구입하고 거리로 나가니 어제 사리아에서 본 스페인 학생들이 무리를 지어 있다. 그들도 여기서 오늘하루를 마치고 머무르는 것이다. 거리를 따라 조금 올라가니 산 니콜라스 요새 성당(Iglesia Fortaleza de San Nicolas)이 나온다.
산 니콜라스 요새 성당(Iglesia Fortaleza de San Nicolas)은 예루살렘의 성 요한 기사단이 12세기 말에 설립한 로마네스크 양식 성당으로 망루가 있는 벽과 건물의 높이가 요새로서 사용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특히 장미창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대성당과 매우 비슷한 외양의 정문 장식이 아름답다. 이 정문을 장식하고 있는 24명 인물상은 산티아고 대성당을 건축한 거장 마테오 데우스탐벤(Mateo Deustamben)의 작품이라고 알려져 있다. 수태고지 장면을 조각한 부분을 보면 성모와 천사 사이에 다산과 불멸을 상징하고 가톨릭의 삼위일체를 의미하는 세 개의 솔방울이 있다. 주두 장식에는 왕관을 쓴 사람 머리에 새의 몸통을 한 동물의 부조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마테오 데우스탐벤의 아버지이자 까미노의 가장 훌륭한 건축가 페테로 데우스탐벤(Pedro Deustamben)의 작품이다.
원래 성당 건축의 규칙은 제단이 있는 곳이 동쪽이나 예루살렘을 향해 있고 파사드가 서쪽을 향하는 것이다. 그러나 돌을 하나씩 옮겨 성당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원인은 알 수 없으나 이 규칙이 지켜지지 않았다. 결국 성당의 제단과 파사드의 방향이 잘못되었는데 이 때문에 다른 성당에서 느낄 수 없는 독특한 빛의 향연을 만끽 할 수 있다고 한다.
성당 외부를 돌아보고 안으로 들어가려니 문을 닫아 놓아서 들어가지를 못하고 문 앞에 보니 오후 7시에 미사를 한다고 붙어있다. 그래서 그 시간에 맞추어 미사에 참석하고 내부를 구경하기로 하고 주변을 보니 여러 건물이 눈에 띈다.
성당 설명
Cruceiro de San Nacolas(산 니콜라스의 십자가)
성당 외부에 Cruceiro de San Nacolas(산 니콜라스의 십자가)가 서 있다. 이 길을 걸으며 숱하게 많은 십자가를 보았는데 이 십자가는 '하늘로부터의 용서'를 뜻한다. 즉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이 십자가를 세운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의미는 길가는 여행자 즉 순례자를 보호한다는 뜻도 있다고 한다. 갈리시아만 해도 약 12,000개 정도가 있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죄를 용서받기를 원했으며 순례자를 보호하려는 의지도 강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산 니콜라스 요새 성당(Iglesia Fortaleza de San Nicolas)
위에서 이야기한 마을의 역사 설명
갈리시아의 순타상
의회
산 니콜라스 요새 성당(Iglesia Fortaleza de San Nicolas) 주변의 광장에는 여러 조형물들이 보인다. 모두 수몰된 옛 마을에서 가져온 곳으로 완전한 것도 있고 일부만 복원한 것도 있다. 그 중 의회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은 페드로 성당의 일부를 복원한 것이다. 산 페드로 성당(Iglesia de San Pedro)은 12세기에 만들어진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현재에는 성당의 문을 포함한 정면 부분만 옮겨져 남아 있다.
성당 내부는 나중에 보기로 하고 우리 일행 4명은 저녁을 먹으러 식당으로 갔다. 이곳의 여러 음식 중에서 츌레톤(chuleton)이라는 스페인식 왕갈비가 유명하다고 작년에 이곳을 거쳐간 아들이 미리 알려주어서 4인분을 시키니 티본 스테이크와 같은 거대한 갈비를 구워온다. 고기가 담긴 그릇이 달구어진 쇠그릇이라 계속 익히면서 고기를 잘라 먹게 하였고 식판이 식으면 다시 갈아 주었다. 가격에 비하여 양이 상당히 많았고 맛도 있어 오랜만에 소고기를 맛있게 먹고 떠들면서 와인도 마시며 주변을 보니 한국인이 눈에 많이 띈다. 모두들 즐겁게 저녁을 끝내니 어느 새 저녁 미사를 할 시간이 되었다.
츌레톤
천주교 신자도 아닌 일행 모두 나와 같이 성당에서 미사를 보는 것이 보편화된 행동이 되어 함께 미사에 참석하니, 길을 걸으며 만난 많은 사람들이 미사에 참석하고 있었다. 서로 반갑게 인사를 하고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길을 무사히 걷기를 서로가 빌어 주었다. 미사가 끝나니 순례자들을 위해 특별히 강복이 있고 세요를 성당에서 찍어 주었다.
산 니콜라스 요새 성당(Iglesia Fortaleza de San Nicolas) 내부
미사를 마치고 주변을 조금 배회하다가 숙소로 돌아와 하루의 피로를 가볍게 풀기 위해서 맥주를 한잔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담소를 나누고 잠자리에 든다.
오늘도 많은 사람을 만나고 또 헤어지고 하였다. 특히 캐나다에 살면서 거의 매년 이 길을 걸어 17번째 길을 걷는다는 한국인, 불편한 다리를 끌고 쉬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 대만의 여인, 그리고 불편한 다리를 지팡이에 의존하여 길을 걷고 있는 서양인, 그들 모두는 무엇 때문에 이 길을 걷고 있는지를 알 수가 없지만 그들 자신만의 동기가 있고 얻음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며 '나는 왜 이 길을 걷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다시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