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鶴)의 오딧세이(Odyssey)

경주12 - 북부(양동마을과 옥산서원)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경주를 숱하게 갔다왔다를 거듭하며 많은 곳을 다녔는데 오늘은 비교적 옛 신라의 유적괴는 거리가 먼 북부권을 돌아보기로 하였다. 경주 북부권은 불교와 유교문화의 전통까지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우리나라 최대 규모인 조선시대의 양반마을인 양동마을과 유학의 상실인 옥산서원 등은 빼놓을 수 없는 답사 코스이다.

 

 경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양동마을까지는 상당히 먼 길이나 너긋하게 기다렸다가 버스를 타고 양동마을로 향했다.

 

 양동(良洞)마을은 안동의 하회마을과 더불어 조선시대 양반 마을의 전형으로 ()’자 형국의 명당으로 알려진 양동마을은 경주에서 포항 쪽으로 16킬로미터 정도 가다 만나는 형산강 중류쯤에, 기름진 안강평야의 생산력을 바탕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 마을은 월성손씨(月城孫氏)와 여강이씨(驪江李氏)의 양대 문벌로 이어 내려온 동족마을로 이곳에서 회재 이언적은 외가인 월성 손씨가의 서백당(書百堂)에서 태어났다. 서백당 집터는 지관이 양동마을의 물() 자형 혈맥이 맺혀 삼현선생지지(三賢先生之地)라고 하였다는 곳이다.

 

 가장 번창했던 17세기 무렵 집이 6~7백여 채쯤 되었다던 이 마을은, 1979년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기와집 124채와 초가집 27채가 남아 있다.

 

 집들의 기본구조는 대개 경상도 지방에서 흔히 나타나는 자형이거나 튼 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간혹 대문 앞에 자형 행랑채를 둔 예도 있다. 또한, 혼합배치 양식으로 자형이나 자형도 있지만, 대체로 집의 배치나 구성은 영남지방 가옥의 일반적인 특색을 따르고 있다.

 

 마을 입구에 버스를 내리니 너무 많이 변하였다. 관광객이 많이 오는 곳이지만 너무 콘크리트로 뒤덮여 옛날 마을의 입구라는 말이 무색하다. 내가 시대에 뒤딸어진 것인지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 영 마땅하지가 않았다. 그래서 마을의 옜 풍경을 중심을 하였다.

 

 

 

 마을은 자그마한 여러 동산이 모이고 집들은 이 동산을 배경으로 펼쳐져 있어서 처음 이 마을을 찾는 일반인들이 보고 가는 것은 실제 양동마을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양동마을은 항아리처럼 입구는 좁고 뒤로 갈수록 넓어지는 모양이다. 따라서 마을 구석구석을 대충 보더라도 반나절의 여유는 있어야 한다. 일반적인 평지 마을은 대개 뒷산을 주산으로 형성되지만, 양동마을은 산지형으로 산 능선을 따라 두 가문의 종가와 후손들의 집들이 줄지어 있어 자연과 더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마을의 전체적인 모습을 보려면 안산인 성주산에 올라가 보아야 한다. 그러면 한눈에 전체적인 ()’자 모양의 마을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나뭇잎이 다 떨어진 겨울철이 좋다.

 

 

  이 같은 마을 방문에서는 다리품을 팔아야 제멋을 느낄 수 있다. 걸어서 들어오면 확연하고 자세히 보이는 경우가 많다.

 마을 초입에는 1913년에 세워진 양동초등학교가 있는데 학교를 지나면 구멍가게를 앞에 두고 마을의 전경이 서서히 모습을 나타낸다. 전면으로는 마을 한중간에 가장 크고 멋진 향단(香壇) 건물과 관가정(觀稼亭)이 보이는데 이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마을의 모습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특히 대부분의 마을이 산자락 아래에 옹기종기 모여 산다는 표현에 걸맞게 마을의 초입을 바라보고 구성되어 있는 것과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앞의 조그마한 산 위에서 보는 양동마을 전경

 

 

 

 양동마을을 거닐어보면 작은 오솔길을 많이 만나게 된다. 오솔길을 따라 숨바꼭질 하듯 숲속에 숨어 있는 집들을 찾아다니는 일도 매우 재미있는 경험이다. 양동마을은 집들마다 자신만의 담장이 있고 사대부 집들은 좀 더 멀리 거리를 이격하여 자리 잡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양동마을의 가옥과 건물들은 지형에 잘 조화돼 자연과 일체화된 경관을 이루고 있다. 이것은 지형의 경사에 기대어 집의 자리를 잡고, 집에서 바라보이는 조망점을 풍수의 원칙에 따라 조정한 결과이다. 아름답고 매력적인 자연환경과 집들이 잘 조화를 이루어 정감어린 모습으로 다가오고, 숲속의 산새소리에 젖어드는 안온한 분위기가 양동마을의 큰 특징이다.

 

마을의 오솔길

 

차가운 날씨에도 어김없이 봄은 온다 - 매화

 

서호당고택

 

경산서당

 

 

 

 양동마을을 나와 다시 버스를 기다려 타고 옥산서원으로 향한다. 이번 길에는 교통편이 좋지 않아 버스를 제법 기다려야 했다. 버스를 타고 제법 먼 길을 가니 옥산서원 입구에 정류소가 있다.

 

 옥산서원은 조선시대의 성리학자인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을 제향하고 후진을 교육하기 위해 1572(선조 5)에 설립되었으며, 1574(선조 7)'옥산(玉山)'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이 서원은 조선 후기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제외된 47개의 서원 중 하나로, 각 건물들의 건축적 의미는 크지 않지만 공간적 배치방법이 돋보인다. 옥산서원에서 북쪽으로 700m 떨어진 곳에 회재의 별장이자 서재였던 독락당(獨樂堂)이 있다.

 

 회재의 고향은 양동마을이다. 회재는 관직을 그만두고 양동에서 그리 멀지 않은 안강읍 옥산의 한 시냇가에 자리를 잡고 거주처로 안채를 짓고 개울에 면하여 사랑채 독락당(獨樂堂)과 정자 계정(溪亭)을 경영하고 자연을 벗삼으며 성리학 연구에만 전념하였다. 그런 연유로 회재가 세상을 떠난 후 독락당에서 가까운 곳에 계곡을 사이에 두고 옥산서원이 창건되었다. 옥산서원은 45대의 명당으로 이름 높다. 자옥산, 무학산, 도덕산, 화개산의 네 산이 둘러싸고 탁영대, 관어대, 영귀대, 세심대, 징심대의 다섯 개의 반석돌이 계곡을 따라 자리하며 서원을 보호한다는 이야기는 높은 수준의 학문과 사상의 깊음을 자연 또한 흠모하고 아낀다는 뜻을 지닌다. 옥산서원은 오대(五臺) 중 세심대에 위치하고 있다. 세심대에 흐르는 계곡물은 상중하 폭포로 용추를 이루며 서원 오른쪽인 북쪽에서 남쪽으로 감돌아 흘러나간다. 세심대는 용추에서 떨어지는 물로 마음을 씻고 자연을 벗삼아 학문을 구하는 곳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옥산서원은 서향을 했는데, 동, 서, 북쪽은 산으로 둘러 있고 남쪽은 트여 있다. 서원의 외삼문인 역락문(亦樂門)을 들어서면, 앞으로 작은 내가 흐르고 이곳을 건너면 2층 다락 건물인 무변루(無邊樓)에 이르게 된다.

 

 역락문과 무변루 사이의 작은 내는 계곡물을 끌어들여 흐르게 한 서원의 명당수이다. 역락문은 <논어(論語)>의 학이(學而)편에 나오는 "벗이 멀리서 찾아오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하냐.(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에서 취한 것이다.

 

 

옥산서원 입구 길 안내

 

옥산서원 소개 간판

 

유네스코 등재 한국의 서원

 

옥산서원 전경

 

옥산서원 정문 역락문

 

무변루

 

옥산서원 건물 구조 설명

 

옥산서원 현판이 걸려 있는 구인당

 

민구재

 

암수재

 

무변루

 

비각

 

이언적 신도비

 

부변루에서 보는 구인당

 

세심대

 

세심대를 건너 보는 옥산서원 전경

 

 옥산서원을 나와 세심대를 건너서 약 700m 떨어져 있는 독락당으로 향했다. 마을 길을 따라 제법 걸어가니 아직도 사람이 살고 있는 독락당이 나온다.

 

 독락당(獨樂堂)은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에 있는 회재 이언적 선생의 제사를 받드는 옥산서원 뒤편에 있는 사랑채이다. 독락당은 회재 이언적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지은 별장으로 옥산정사(玉山精舍)라고도 한다. ‘어진 선비도 세속의 일을 잊고 자신의 도를 즐긴다.’는 이름을 가진 독락당에서 그는 학문을 닦았다. 독락당은 무엇보다도 주변 경관과 잘 어우러진 공간이다. 건물 옆쪽 담장에는 좁은 나무로 살을 대어 만든 살창을 달아서 대청에서 계곡을 내다볼 수 있다. 독락당 뒤쪽의 시내에 있는 정자 또한 자연에 융합하려는 공간성을 드러내 준다고 하겠다.

 

 계정과 함께 가옥의 한 공간을 차지하는 사랑채를 독락당이라 칭하지만 특별한 구분이 없이 안채와 사랑채, 별채를 함께 독락당이라 부르기도 한다. 유달리 뾰족한 솟을대문을 지나 만나게 되는 것은 나지막한 담장이다. 안채와 사랑채를 가로지르는 담장은 부녀자의 생활공간인 안채를 분리시키고 찾아오는 이방인들을 자연스럽게 사랑채 공간으로 안내한다. 현재도 안채는 생활공간으로 출입을 금하고 있다.

 

 19641114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413호로 지정되었고, 2010년 양동마을의 일부 구성물로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은 노계 박인로의 '독락당'이라는 가사를 고등학교 시절에 익히 들었을 것이다.  노계의 가사가 바로 이 독락당을 노래한 것이다.

 

독락당 전경

 

독락당 소개 글

 

독랑당 정문

 

옥산정사, 독락당 현판

 

계정

 

독락당 현판 글

 

독락당 전경

 

 독락당을 보고 다시 옥상서원 방향으로 내려오니 올라갈 때 보지 못했던 하마비가 길가에 보인다. 옥산서원하마비였다.

 

옥산서원 하마비

 

 옥산서원과 독락당을 보고 버스를 타려고 정류장에 가니 하필 버스 배차 시간 간격이 엄청나게 긴 시간대였다. 자신의 승용차를 가져오지 않은 사람들은 불평을 하였으나 어쩔 수가 없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으니 지나가던 마을 사람이 정류장의 버스 시간표를 참조하라고 알려 주었다. 여기에 그 시간표를 보여 드리니 뒤에 오는 사람들은 참조하기를 바란다.

 

 

 

 오래 기다려 버스를 타고 경주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하니 제법 늦은 시간이었다. 경주 북부 권역은 교통편이 불편하여 제대로 계획한 대로 보지를 못하고 집으로 향했다.

 오늘 돌어보지 못한 곳은 다음에 다시 오기로 마음을 먹고 가벼운 마음으로 오늘의 여정을 마친다. 아무런 급할 것도 없는 여행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