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鶴)의 오딧세이(Odyssey)

평화의 길 1코스(강화평화전망대 - 강화고려천도공원 - 연미정 - 문수산성 남문)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DMZ 평화의 길은 동··남해와 DMZ 접경지역을 하나로 연결한 약 4,500km의 코리아둘레길의 북쪽 길이다. 인천 강화평화전망대에서 출발하여 강원도 고성통일전망대까지 한반도의 마지막 청정 자연환경을 자랑하는 DMZ 일대를 따라 구축한 총 34개 코스, 510km의 걷기 여행길로, DMZ 초입인 민간인통제선 인근에 자리한 최전방 마을, 전적지, 평야와 강, 산악 지형을 지나며 한반도 중부의 사무치도록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고, 평화와 통일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길이다. 이 길은 자유롭게 방문 가능한 횡단노선과 투어 예약 후 방문이 가능한 테마노선으로 나누어진다. '테마노선'은 민통선 이북의 생태·문화·역사자원을 통해 국민이 안보, 평화와 자유의 소중함을 직접 체험하도록 조성한 길로 각 테마길은 비무장지대를 비롯한 접경지역에 서식하는 각종 야생 동식물의 보호와 참여자의 안전을 위해 차량으로 이동하되 주요 구간에서는 군부대의 협조를 받아 참가자가 직접 철책 길을 따라 걷는 구간으로 구성돼 있다.

 

평화의 길 노선도(두루누비에서 가져 옴)

 

 어느새 코리아둘레길을 걷기 시작하여 해파랑길, 남파랑길, 서해랑길을 다 걷고 마지막 남은 DMZ 평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한국의 길을 걸으면서 아름다운 우리 국토를 만끽하고 즐기며 걸으니 알지 못하고 있던 여러 일도 알게 되었고 알게 모르게 건강한 몸도 가지게 된 것도 큰 소득이었다.

 

서해랑길 걷기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여러 다른 일도 하면서 보내다가 다시 DMZ 평화의 길을 걷기 위해서 집을 나섰다. 부산 집에서 강화도 평화전망대까지 가는 길이 너무 먼 길이고 몇 번을 대중교통편을 갈아타고 해서 평화전망대에 도착하니 아침 일찍이 부산을 출발했는데 벌써 오후다.

 

평화의 길 1코스는 인천 강화구간으로 강화도 평화전망대를 출벌하여 고려천도공원 연미정을 거쳐 강화대교를 건너 문수산성 남문에서 끝이 나는 18.9km의 길이다. 이 길은 한강 하구의 철책을 옆에 두고 걷는 길이 대부분이라 도로를 단순하게 따라 걷는 길이 대부분이나 많은 구경거리가 있는 길이다.

 

1코스 시작점에 있는  'DMZ 평화의 길’ 종합안내도

 

멀리 보이는 북한 땅

 

이정표

 

왼쪽으로 한강 하구를 따라 이어진 철책선

 

 평화전망대에서 출발하여 도로를 따라 걸으면 철산리검문소가 나타난다. 근무를 하는 군인에게 사진을 찍어도 되는지를 물으니 찍을 수 없는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아쉽지만 그대로 통과하여 도로를 따라 걸으니 왼쪽으로는 철책이 가로막고 있고 한강을 사이에 두고 빤히 보이는 곳이 북한의 황해도 땅이 보인다. 하늘을 날고 있는 새들은 철책이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고 지나가는데 우리는 갈 수가 없는 곳이다. 부산에서 살면서 이런 감정을 가지는 일도 드문네 이런 경험을 하는 것도 걷는 길에서 얻는 소득이다.

 

 도로를 따라 걸어가면 고려천도공원이 나온다. 고려천도공원은 강화군 송해면 12에 민통선 안보 관광코스 조성사업의 하나로 2019년에 개장한 역사 테마공원으로 우리의 아픈 역사를 되새겨 볼 수 있는 곳이다.. 강화천도는 몽골에 항전하기 위해 고려 고종이 1232년 도읍을 강화도로 옮긴 일이다. 이후 38년간 고려의 임시수도였던 역사를 천도문을 시작으로 고종사적비까지 강화 해안가를 따라 돌아볼 수 있게 조성되었다. 천도문을 지나 천도문 광장에 들어서면, 고려 시대 대몽 항쟁을 위해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하던 모습을 볼 수 있고, 그 외 팔만대장경과 상정고금예문 등에 대한 자료와 강화도에 흩어져 있는 역사문화 유적지들을 소개하고 있다

 

고려 천도 길 설명

 

팔만대장경 비

 

고려천도공원 간판

 

 고려천도공원을 지나 철책선을 따라 난 길을 걸어가면 연미정이 나온다. 이 길에는 여러 돈대가 있지만 가 볼 수는 없고 표지만 보고 지나왔다.

 

 

 연미정 가까이에는 역시 검문소가 있다. 이곳이 최북단임을 증명하듯이 지나가는 차들을 모두 검문을 하지만. 배낭을 메고 길을 걷는 나같은 사람은 그냥 지나가게 한다. 검문소를 지나 연미정에 올라갔다. 연미정에서 보는 북쪽과 동쪽은 탁 트여 있다. 북쪽으로는 멀리 황해도가 보였다.


 강화군 강화읍 월곶리에 위치한 연미정은 1995년 3월 1일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정자다. 자연경관을 보며 풍류를 즐기거나 학문을 공부하던 정자로, 건립연대는 정확하지 않지만, 고려 1244년 왕이 사립교육기관인 구제(九齊)의 학생들을 이곳에 모아 면학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1510년  삼포왜란 때 큰 공을 세운 황형에게 이 정자를 주었다고 하며, 1627정묘호란 때에는 인조가 청나라와 굴욕적인 형제관계의 강화조약을 맺었던 곳이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6.25 전쟁을 거치며 여러 차례 시련을 겪고 파손된 것을 1976년 강화 중요 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으로 현재와 같이 복원하였다. 서남쪽 모서리의 기둥은 6.25전쟁 때 포탄에 맞아 세 동강 난 것을 붙여 다시 세운 것이다. 정자는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 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의 겹처마로 돌기둥 위에 10개의 기둥을 얹어 건축한 민도리집이다. 한강임진강의 합해진 물줄기가 하나는 서해로, 또 하나는 강화해협으로 흐르는데, 이 모양이 마치 제비꼬리 같다고 해서 정자 이름을 연미정이라 지었다고 한다. 이곳은 강화십경의 하나로 손꼽히는 자리로서 절경을 이루고 있으며, 월곶돈대 꼭대기에 세워져 있어 이 정자에 오르면 북으로 개성시파주시, 동으로 김포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옛날에는 서해로부터 서울로 가는 배가 이 정자 밑에 닻을 내려 조류를 기다려 한강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연미정 앞에 배가 머물던 곳이였고, 성곽과 성문을 복원한 것으로 보아 앞쪽으로 나루가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강화로 사람들이 드나들던 곳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은 과거에 민간인통제구역으로 일반인의 출입에 제한이 있었으나, 2008년 해제되어 현재 일반인들이 자유롭게 드나들고 있다. 연미정에서 바라보는 탁 트인 바다의 풍광과 정자 양쪽에 수백 년 된 수령의 느티나무 두 그루가 웅장한 자태로 정취를 더해주고 있다.

 

연미정 올라가는 길

 

월곶돈대

 

연미정

 

연미정에서 보는 풍경

 

월곶진 안내판

 

 연미정을 내려오니 평화전망대에서 여기까지 오면서 보지 못했던 슈퍼가 보인다. 날이 너무 더워 가게에 들어가 차가운 음료수를 사서 마시다가 바로 옆 검문소에 근무하는 군인들이 생각났다. 하지만 그들에게 시원한 음료수를 가져다줄 수가 있는지 조금 의문이 들었다, 함부로 음식물을 주기도 조금은 의심스러워 가게 주인에게 물으니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하엿다. 그래서 차가운 음료를 세 통을 구입해서 그들에게 주니 고맙다고 진심으로 인사를 한다. 내 아들보다 더 어린 젊은이들이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고 있는 현장을 보면 꼭 무엇이라도 하나를 주고 싶은 마음인데 조금은 조심스러운 것이 현실이다. 슈퍼에서 잠시 쉬다가 다시 길을 간다. 길을 가다가 보니 강화도 와이너리를 선전하는 선전물이 곳곳에 붙어 있다.

 

외이너리 선전

 

 

 계속 철책 가로 난 길을 따라가니 6.25 참전용사 기념공원이 나타난다.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자그마한 공원인 곳으로 6.25 참전 유엔 16개국의 기념비가 있다.

 

6.25 참전용사 기념공원 입구

 

참전 16개국 기념비

 

 

 계속 길을 따라가니 강화대교 밑에 갑곶나루 선착장 표지석이 있고 그 옆으로 갑곶성지가 나타난다. 내가 걷는 길에서는 조금 벗어나지만 길만을 걷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길 주변의 여러 역사적 현장이나 아름다운 경치를 보는 것도 걷는 길의 즐거움이라 갑곶순교성지로 올라갔다.

 

 갑곶순교성지(甲串殉敎聖地)의 조성은 19세기의 천주교 박해에서 시작된다. 1866년 프랑스인 성직자 9명을 처형한 책임을 물어 프랑스 함대가 갑곶돈대로 상륙했다. 이로 인해 강화 지방에서는 혹독한 박해가 시작됐고 갑곶성지가 보이는 백사장에서 많은 신자가 순교했다. 또 1866년의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빌미삼아 1871년 군함을 앞세우고 강화도 해역을 침범한 신미양요(辛未洋擾)가 일어난 후 대원군은 더욱 심하게 천주교를 박해하게 된다. 미국 군함이 물러간 후 고종은 철저하게 천주교인을 잡아 처벌하라는 교서를 내리게 되는데 이때 미국 함대에 왕래했던 박상손(朴常孫), 우윤집(禹允集), 최순복(崔順福) 등이 제일 먼저 잡혀 갑곶진두(갑곶나루터)에서 목이 잘려 효수되었다. 후에 천주교 인천 교구는 갑곶 진두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 지금의 갑곶 순교성지를 조성하고 2004년 2월 10일 갑곶 순교성지 첫 미사를 드렸다. 강화도 성지로 일만 위 순교자 현양 동산, 진무영(鎭武營) 순교성지, 관청리 형방이 있으며, 십자가의 길, 순교자 삼위비, 박순집 베드로 묘 등을 순례할 수 있다.

 

갑곶나루선착장 표석

 

순교선지 갑곶 표석

 

갑곶순교성지의 여러 모습

 

 갑곶순교성지를 나와 구 강화대교를 건너가면 이제 강화를 벗어나 김포도 들어간다. 강화대교(江華大橋)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에서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포내리까지 연결하는 연륙교로 1997에 개통되었다. 1970에 개통된 기존의 교량인 강화교가 노후화되어 새로 건설된 다리이다.

 

구 강화교

 

구 강화교에서 보는 강화대교

 

평화의 길 안내판

 강화교를 지나 길을 따라가니 비교적 최근에 복원한 문수산성 남문이 멀리 보이고 조금 더 가니 1코스의 마지막 지점이 나타난다.

 

1코스의 마지막 지점 주변 안내판

 

 그런데 이곳에 도착하여 주변을 돌아보니 아무리 찾아도 코스의 안내판이 없다. 해파랑길, 남파랑길, 서해랑길에는 모두 각 코스의 안내판 크게 서 있어 다음 코스를 대강 알 수 있었는데 평화의 길에는 코스 안내판이 없다. 그리고 코스를 인증하는 두루누비의 인증 QR코드도 찾기가 상당히 불편하고 힘들다. 주변의 코스 말뚝이나 안내판 그리고 여러 곳을 잘 찾아야 한다. 

 

 또 이 주변에는 숙박을 할 곳도 없어 버스를 타고 통진읍으로 가야 숙박을 할 수 있으니 빨리 움직여야 했다. 내가 코스 종점에 도착해 QR 코드를 찾으니 젊은 여인이 말뚝에 붙어 있다고 알려주어 코드를 찍고 나오다가 길을 걷는 사람을 만나 여러 이야기를 하였다. 김포에 살면서 여러 길을 걷는다는 아직은 젊은 나이인 그 여자는 은퇴하면 여러 길을 걷고 싶다고 이야기를 하여 내가 걸은 여러 길을 이여기해 주고 나는 통진읍의 통진 성당에서 내려 숙소로 향했다.

 

서해랑길 103코스(창후항 - 별악봉 - 강화평화전망대)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서해랑길의 103코스는 서해랑길의 마지막 구간으로 창후항에서 출발하여 산길을 걸어 별악봉을 지나 강화평화전망대까지 가는 13.1km의 짧은 길이다. 이 길에는 아무런 특별한 곳도 없이 그냥 산길을 걸어 마지막 평화전망대로 가는 길이다.

 

103코스 안내판

 

창후항 엠블렘

 

창후항 풍경

 

 창후항에서 출발하니 오른쪽 언덕 위에 카페가 보였다. 커피나 한잔하고 잠시 쉬기로 하고 카페로 가니 손님은 아무도 없이 나이가 지긋한 주인 여인만 있었다. 커피를 한잔시키니 주인도 무료한지 옆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였다. 주인은 서울 방배동에서 갈다가 고향인 이곳으로 돌아와서 카페를 차려 여유롭게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길을 가다가 카페에 들어가 이야기를 하다보면 이런 사람들이 많이 보았다. 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 보면 대부분이 재물에 욕심을 내지 않고 자신의 삶을 여유롭게 즐기는 사람들이었다. 과거의 물질만능의 사회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카페에서 쉬고 다시 길을 나서니 바로 옆에 무태돈대가 보인다.

 

 강화군 화도면 창후리 선착장에서 북쪽으로 난 비포장길을 따라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는 무태돈대(無殆墩臺)1679(숙종 5)에 쌓은 48개의 중 하나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여러 돈대와 함께 무태돈대는 인화보의 관리 아래 감시소와 방어진지로서 역할을 했다. 직사각형 형태인 무태돈대는 둘레 210m 성곽 폭은 2m이며 해안을 향해 포좌 4문을 설치했으나 동쪽과 서쪽의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있으나 남쪽 성벽은 하부만 남아있어 최근 새로 상부를 쌓았다.

 

무태돈대의 여러 모습

 

 무태돈대를 지나 바닷가 길을 따라가니 이곳이 최북단이라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해안에는 철조망으로 가로막아 통행을 못하도록 하였고 길을 따라 걷게만 하였다.

 

바닷가의 철조망

 

평화전망대 이정표

 

 

 길을 가니 성덕산으로 올라가게 한다. 그리고 여러 이야기가 있는 바위를 가리키는 이정표가 보인다. 산길을 따라 가면 이 바위들을 만나는데 조금은 잘 맞지 않는다는 생각도 들었다.

 

성덕산 이정표

 

선녀바위의 설명

 

장군 바위 설명

 

두꺼비바위 설명

두꺼비 바위(모양이 상당히 닮았다.)

 

 두꺼비바위를 지나 마지막 구간인 별악봉으로 가는 이정표가 보인다. 이제 정말로 서해랑길 다 걸은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무런 특징이 없는 산길을 걸어가니 산을 내려가 도로를 따라 조금 가니 평화전망대에 도착한다.

 

평화전망대 이정표

 

강화평화전망대 입구 표시판

 

서해랑길 마지막 안내판

 

 서해랑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강화평화전망대로 올라가는 길은 조금 더 가야 한다. 여기까지 왔으니 당연히 평화전망대에 가서 실제로는 가지는 못하는 북녘 땅을 눈으로라도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평화전망대에 가서 여러 구경을 하였다.

 

 강화도 최북단 양사면 제적봉에 있는 강화평화전망대는 남한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북한 주민의 생활상을 육안으로 볼 수 있어 이북 실향민과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다. 민족 동질성 회복과 평화적 통일의 기반구축을 위한 문화관광 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 민통선북방지역에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로 건립되어 200895일 개관하였다. 강화 평화전망대에서 북한 황해북도 개풍군 대성면 삼달리까지의 거리는 2.3km로 해안가를 건너 예성강이 흐르고, 좌측으로는 황해도 연안군 및 백천군으로 넓게 펼쳐진 연백평야가 있으며, 우측으로는 개풍군으로 북한주민의 생활모습과 선전용 위장마을, 개성송수신 탑, 송악산 등을 조망할 수 있다.

 

평화전망대

 

평화전망대에서 보는 북녘 땅

 

 평화전망대에서 내려와서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쉬다가 다음에 걸을 평화의 길 1코스의 시작점에서 사진을 찍고 돌아가기 위해서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으니 나와 같이 배낭을 메고 길을 걷는 사람이 말을 걸어온다. 자기도 지금 서해랑길 완보를 마쳤다면 하기에 서로 하이 파이브를 하며 기쁨을 나누었다. 그 사람은 평화의 길을 바로 시작한다며 함께 걷기를 청했으나 나는 다른 약속이 있어 돌아가서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약 1,900km의 긴 길을 드디어 완보하였다. 처음 출발할 때 예상했던 시간보다는 훨씬 많이 걸렸다. 지난해에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느라고 걷기 좋은 계절을 모두 거기에 소비하였고 작년 여름은 유난히도 더워서 걸을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리고 올 봄에 걷기를 다시 했으나 뜻하지 않은 무릎에 이상이 있어 두 달을 허비하였다. 그러다 보니 예상보다 일 년이 더 걸렸으나 완보를 하였다는 일이 중요하다. 그리고 길을 걷는 구간은 교통편을 단 1m도 이용하지 않았다는 자부심을 가진다.

 

 해남 땅끝에서 출발하려 강화도 평화전망대까지 오는 길에 참 아름다운 우리나라의 경치를 즐겼다. 걷지 않으면 절대 볼 수 없는 풍경을 눈으로 보고 가슴에 담으며 뿌듯함을 느끼게 하는 여정이었다.

 

서해랑길 102코스(외포항 - 계룡돈대 - 망월돈대 - 창후항)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서해랑길 102코스는 외포항에서 출발하여 바닷길을 따라 걸으며 경치를 즐기다 보면 여러 곳에서 돈대가 나오고 창후항에서 끝이 나는 10.9km의 아주 짧은 길이다.

 

102코스 안내판

 

외포항의 여러 모습

 

 아침 일찍 일어나 간단히 도시락으로 아침을 먹고 외포항을 떠나 걷기로 했다. 오늘 가야 할 길은 멀지는 않았지만 강화도 최북단에서 돌아가는 길이 만만하지 않기에 되도록 빨리 마지막 종착점에 도착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른 아침의 외포항은 인적이 보이지 않는 고요한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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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청저수지로 가는 이정표

 

 황청저수지로 가는 이정표를 따라 나지막한 산으로 올라가니 유스 호스텔이 보이고 그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걷게 한다. 유스 호스텔 옆의 공터에 풍물놀이를 하는 석상이 세워져 있어 잠시 보다가 길을 재촉하였다.

 

유스 호스텔

 

예수의 성모관상수도원

 

 길을 가다가 보니 수도원이 보인다. '예수의 성모수도원'이라는 현판을 보고 들어가서 경내를 구경하고, 성전에 들어가려니 신발을 벗고 들어가게 하였다. 그래서 등산화를 벗기도 번거롭고 하여 바깥을 조금 구경하고 잠시 기도를 하고 나왔다.

 

예수의 성모수도원

 

황청저수지

 

 

 

 황청저수지를 지나 내려오니 바닷가의 방죽위로 길을 내어 걸어가게 한다. 제법 먼 길을 바다를 보면서 가니 계룡둔대가 나타난다.

 

 돈대는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 영토 내 접경지역이나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한 초소로, 대개 높은 평지에 쌓아두는데 밖은 성곽으로 높게 하고, 안은 낮게 하여 포를 설치해 두는 시설물이다. 1679(숙종 5) 5월에 완성된 48돈대에 이후 5개 돈대가 추가로 지어졌다. 48돈대는 황해도, 강원도, 함경도 승군 8,900명과 어영청 소속 어영군 4,262명이 80일 정도 걸려서 쌓았다고 한다. 특히 강화도에 있는 돈대들은 조선 인조 14(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 강화도가 함락되자, 이에 놀란 조정에서 해안 경비를 튼튼히 하기 곳곳에 쌓아두도록 한 것이다.

 

바다를 보고 걷는 길

 

 망월평야 남서방향의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는 계룡돈대(鷄龍墩臺)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내가면 황청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돈대로 199531일 인천광역시의 기념물 제22호로 지정되었다.

  현지 안내문에 의하면 계룡돈대(鷄龍墩臺)는 조선 숙종 5(1679)에 강화유수 윤이제가 황청리 앞 들판 끝자락의 작은 동산에 서해를 바라보게 쌓은 작은 돈대이다. 장방형 화강암으로 길이 30m, 너비 20m, 석축높은 3~5m 규모로 쌓았는데, 바깥벽 동벽 석축 하단에 "강희 184월일 경상도 군위어영(康熙十八年四月日慶尙道軍威禦營)"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강화지역 53개 돈대 중 유일하게 그 쌓은 연대를 알 수 있는 곳이다.

 

계룔돈대의 외부와 내부

 

 계룡돈대를 지나 바닷가 길을 따라가면 멀지 않은 곳에 망월돈대가 보인다.

 

 망월돈대및장성(望月墩臺長城)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에 있는 돈대로 199531일 인천광역시의 문화재자료 제11호 망월돈대 및 장성으로 지정되었다가, 2008818일 현재의 명칭 망월돈대(望月墩臺)로 변경되었다.

 

 망월돈대는 48돈대 가운데 하나로 진무영에서 직접 관할하는 영문 소속 돈대였다. 대개 돈대들이 해안가 높은 지대에 위치하는 것과 달리 망월돈대는 갯가 낮은 지대에 설치됐다. 그래도 시야를 가리는 방해물이 없어 경계초소로 부족함이 없었고, 남쪽으로 계룡돈대, 북쪽으로 무태돈대가 있다. 돈대와 함께 있는 이 장성은 고려 고종이 이곳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면서 해안방어를 튼튼히 하기 위해 쌓아 올린 것으로, 누각을 설치한 출입문이 6, 물길이 드나드는 문이 7곳 마련되어 있었다.

 

망월돈대의 여러 모습

 

 망월돈대를 지나 바다의 풍경을 즐기면서 길을 가면 작은 창후항이 나타난다. 바닷가에는 제법 큰 수산물센터가 있으나 사람들이 왕래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무론 내가 지나는 시간이 너무 이른 시간이었지만.....

 

 

 창후항에 도착하여 102코스는 끝이 났다. 시간이 아직 오전 10시도 되지 않았지만 이 주변에서 무엇을 보거나 즐길 것도 없어 바로 다음 코스로 발을 옮긴다.

 

서해랑길 101코스(곤릉버스정류장 - 강화가릉 - 건평항 - 외포항)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서해랑길 101코스는 곤릉버스정류장에서 출발하여 고려시대의 여러 능을 지나고 건평항을 지나서 외포항에서 끝이 나는 비교적 쉽고 짧은 13.4km의 길이다.

 

길가에 있는 101코스 안내판

 

 강화 곤릉(江華 坤陵)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에 있는 고려 후기 제22대 강종의 왕비 원덕태후 유씨의 능으로 강화 천도기(1232~1270)에 조성된 왕릉 가운데 하나이다. 13세기 몽골과의 전쟁 기간 동안 공식적으로 개경을 대체한 강도(江都)의 위상을 보여 주는 유적이다.

 1974년에는 봉분과 능역이 파괴된 것을 보수, 정비하였고,  2004년 발굴 조사를 통해 조사 결과를 토대로 현재의 모습으로 정비되었다. 1992310일 사적 제371호로 승격되었고, 2011년 곤릉에서 강화 곤릉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하지만 가는 길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 있어 가보지는 않았다.

 

 길가의 곤릉버스정류장에서 잠시 쉬고 101코스의 길을 떠나니 마을 이름이' 예쁜마을'인 자그마하지만 아름다운 마을이 나온다. 이름과 같이 예쁜마을로 정감이 깊은 마을이었다. 이름뿐이 아니라 그 미을을 지나며 보는 꽃들도 아름다웠다.

 

예쁜마을의 풍경

 

 마을을 지나 높지 않은 진강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아무도 다니지 않아 호젓하게 걸을 수 있었다. 높지 않은 산길을 걸어가니 석릉이 나온다.

 

진강산 길

 

 강화 석릉(江華 碩陵)은 진강산(441.3m) 동쪽 능선의 남사면에 자리하고 있는 고려 제21대 희종이 안장된 왕릉이다. 수창궁 사변으로 폐위된 뒤 교동도에 유배되어 있던 희종은 1237810일 근처의 절인 법천정사에서 승하하였다. 이후 1237(고종 24) 1019일에 석릉(碩陵)에 장사를 지냈다.

석릉은 오랜 시간 동안 존재가 잊혔다가, 조선 현종 5(1664) 강화유수로 재직하던 조복양(趙復陽)이 현종의 명을 받아 보수하였다. 이후 관원들이 해마다 순찰을 돌며 능역을 관리하였고, 고종 4(1867) 위치가 확인된 고려왕릉 전체를 일시에 정비하면서 '고려희종석릉(高麗熙宗碩陵)'이라 적힌 표석이 세워졌다.

오랜 시간이 흘러 본래의 모습을 많이 잃었으나 2000년과 2001년에 발굴 조사를 통해 석실과 능역의 자세한 구조를 확인하였고, 그 결과를 토대로 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전해오고 있다.

 

서해랑길에서는 조금 떨어져 있지만 길에서 올라가니 곧 석릉이 나타났다. 석릉 주변에는 등산을 하는 사람들이 서너 명 모여서 휴식을 하고 있었다.

 

석릉과 안내판

 

 석릉을 지나 산길을 따라 조금 가면 강화 능내리 석실분과 거의 붙어 있는 강화 가릉이 연이어 나온다.

 

 강화 능내리 석실분(江華 陵內理 石室墳)은 고려시대의 왕릉급 무덤으로 강화군 양도면 능내리에 있으며 199532일 인천광역시의 기념물 제28호로 지정되었다.

고려시대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진 이 고분은 보존·정비의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됨에 따라 발굴을 2006년 말에서 2007년 초에 이르기까지 실시되었다. 출토유물로는 소량이지만 다양하게 출토되었는데 특히 봉황머리를 나타낸 은제장식편의 경우 문양이 있는 곳에만 도금으로 처리하여 장식적 효과가 뛰어나도록 한 것이 특징적이다. 봉황문양은 전통적으로 왕비를 상징하는 문양으로 대몽항쟁기 강화에서 사망하였으나 능이 확인되지 않은 희종의 왕비인 성평왕후나 고종의 왕비인 안혜태후의 묘로 추정하고 있다.

 

강화 능내리 석실분

 

 강화 가릉(江華 嘉陵)은 고려 제24대 국왕 원종의 제1왕후 순경태후가 안장된 왕릉으로 1992년 사적 제370호로 지정됐다. 현재의 가릉은 1974년에 처음 보수한 이후 2004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조사사업을 시행하여 재정비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고려 고종의 홍릉, 고려 희종의 석릉, 고려 강종 비 원덕태후의 곤릉과 함께 남한에 남아있는 몇 안 되는 고려왕릉 중 하나이다.

강화 가릉

 

 강화 가릉을 지나 산길을 따라 조금 가면 조선 후기 학자이자 강화학의 태두인 정제두(1649~1736)의 묘 나온다. 정제두 묘(鄭齊斗 墓)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에 있는, 이다. 2007226일 인천광역시의 기념물 제56호로 지정되었다.

 

정제두의 묘

 

이정표

 

건평항

 

 아주 조그마한 건평항을 지나가니 뜻밖에 조그마한 공원이 있고  '천상병귀천공원'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 여기서 천상병을 이야기하지 않겠으나 이 공원이 왜 여기에 만들어졌는지는 이해가 필요하다. 강화군 건평항 근처에 위치한 천상병 귀천(歸天) 공원은 천상병의 대표 시 귀천의 시상을 떠올리게 한 건평 포구의 하늘을 구경할 수 있는 공원이다. 일본에서 태어나 경남 마산에서 자란 천상병은 마산의 바닷가를 그리워했지만, 대신 강화도를 자주 찾았다고 한다. 건평포구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순수한 마음을 적은 메모가 귀천이라고 한다. 공원에서 만날 수 있는 천상병의 동상은 보는 각도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고 하는데, 정면은 한없이 해맑고 측면에서는 외로움이 느껴지기도 한다. 시비는 천상병의 육필을 새긴 것이라고 하니 눈여겨보면 좋을 것이다.

 

천상병 귀천공원

 

 공원을 지나 조금 저 가면 제법 큰 어항이 나타난다. 외포항이다. 강화도 섬의 북단에 있는 포구로는 상당히 큰 포구로 사람들의 왕래도 많은 포구다.

 

 외포항(外浦港)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내가면 외포리 547지선에 있는 어항으로,. 해상교통이 빈번한 곳으로서 석모도의 보문사를 비롯하여 주문도, 볼음도를 방문하는 관광객이 붐비고 있다. 당초 명칭은 정포항이었으나, 201879일 외포항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외포항젓갈수산시장은 전국 추젓의 70%가 생산되는 곳으로 새우부터 낙지, 오징어, 조개, 명란, 창난 등 젓갈류를 전문으로 판매하는 수산시장이다. 옛날에는 좌판이었으나 현재는 천정에 아케이드를 설치하고 현대식으로 정비하여 쾌적한 환경에서 장을 볼 수 있다. 특히 매년 10월이면 강화도 새우젓 축제가 외포항에서 열리고 김장을 위해 젓갈을 구매하러 온 사람들로 붐빈다.

 

외포항의 모습

 

 101코스의 종착점인 외포항에 도착하니 오후 4시도 되지 않은 이른 시간이었으나 여기서 오늘의 여정을 끝내기로 했다. 내일 걸을 길이 길지 않은 길이기에 휴식도 하면서 천천히 걸을 생각이었다.

 

 숙소를 정하고 샤워를 하고 쉬다가 저녁을 먹으러 나가니 지금이 밴댕이 철이라 밴댕이 정식을 파는 식당이 있어 들어가니 2인분을 판다고 하였으나 1인분을 주문하여 맛있게 밴댕이 정식을 먹었다. 사실 밴댕이는 크게 맛있는 생선은 아니지만 별미로 밴댕이회. 밴댕이구이. 밴댕이무침으로 한상을 차려주는 정식은 한번쯤은 먹어 보아야 할 것이다. 길을 가면서 그 고장의 계절에 맞는 음식을 먹는 것도 여행의 큰 즐거움이다. 내가 식당에 들어갈 때는 손님이 아무도 없고 나 혼자였는데 내가 들어가고 손님이 만원이 될 정도였다. 어디에서든지 내가 식당에 가면 손님이 뒤따라 들어와 북적거린다. 이것도 나의 복이라 생각하고 식당에 좋은 일을 한 것 같아 뿌듯했다.

 

 맛있게 식사를 하고 숙소에 들어와서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다.

 

서해랑길 100코스(대명포구 -초지대교 - 이규보선생묘 - 곤릉버스정류장)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서해랑길 100코스는 대명포구에서 출발하여 초지대교를 건너 전등사입구를 지나서 곤릉버스정류장까지 가는 16.5km의 비교적 짧으며 편안한 길이다.

 

100코스 안내판

 

 99코스를 끝낸 시간이 너무 이른 시간이라 100코스를 어느 정도 걷기로 했다. 사전에 초지대교를 지나면 숙박을 할 곳이 많이 있다고 조사를 하였기에 그 곳까지 갈 생각이었다. 대명포구의 풍경을 즐기면서 제법 걸어가니 초지대교가 보인다.

 

대명포구 풍경

 

 강화초지대교(江華草芝大橋)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草芝里)와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약암리(藥岩里)를 잇는 아치형 4차선 다리로, 길이 1.2, 17.6m4차선 교량인데, 19996월부터 인천광역시가 공사를 맡아 2002828일 개통하였다.

 

초지대교 진입부

 

초지대교에서 보는 풍경

 

 초지대교를 건너서 숙박할 곳을 찾으니 멀리에 24시 해수탕이 보였다. 코로나가 성행하기 이전에는 여행을 하면서 편리하기도 하고 비용도 저렴하여 24시 사우나를 많이 이용하였는데 코로나시절부터 24시 사우나가 거의 없어져서 불편하였는데 24시 사우나를 보니 반가웠다. 그래서 찾아가서 문의를 하니 잠도 잘 수가 있었다. 오랜만에 비용도 절감하고 예전의 기억도 되살리며 목욕도 하고 편안하게 하루 밤을 지냈다.

 

24시 인삼해수탕

 

 아침 일찍 일어나서 출발하니 바로 옆에 초지광장이 나온다. 광장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계속 가니 전등사 입구가 나온다 .전등사로는 가지 않고 그 입구의 도로를 따라가는 길이 100코스의 길이다. 늦었지만 전등사 입구에서 아침을 먹고 다시 길을 가니 저수지에 낚시터를 조성하여 많은 사람이 낚시를 즐기고 있는 길상낚시터가 나오고 조금 더 가니 성당이 나온다.

 

길상낚시터

 

이정표

 

온수성당

 

 이 날이 일요일이라 성당에 들러 잠시 참배를 하려고 가니 미사를 보는 중이었다. 그래서 미사에는 참석하지  못하고 가볍게 혼자서 기도를 드리고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이제는 길을 가다 성당이 보이면 잠시 참배를 하는 것이 습관화 된 듯했다.

 

 성당을 지나 제법 마을이 형성된 거리를 지나니 금풍양조장이라는 제법 오래 되어 보이는 집이 나타난다.

 

 1931년 이전부터 막걸리를 제조한 금풍양조장은 김학제씨가 설립하였으며, 1969년 지금 주인의 조부인 양환탁씨가 인수하여 2대 양재형씨가 약 50년을 운영하였고 현재는 3대인 양태석씨가 운영중이다. 금풍양조장은 3대째 이어져 오는 전통이 살아 숨 쉬는 강화도 전통주의 역사로 100년 전통의 막걸리는 쌀이 좋기로 소문난 강화섬쌀, 그 중에서도 무농약쌀과 물이 좋은 온수리 지하수로 정성껏 빚은 막걸리로 강화도 전통주의 역사이다. 강화도 최초의 지역특산주로 탄산이 없고 참외 향과 부드럽고 묵직한 맛이 일품인 금풍양조 막걸리는 이양주 방식으로 15일 가량 발효 숙성시킨 순곡주다.

금풍양조는 할아버님이 1969년 금풍양조장을 인수하여 새롭게 양조를 시작한 해를 기념하기 위해 알콜도수를 6.9도로 만들었다. 2021년 강화도 최초로 지역 특산주(탁주, 약주) 면허를 획득, 지역 원료 소비와 세계화 주류 제조라는 목표를 가지고 전진하고 있으며, 특징적인 것은 쌀 포대를 업사이클링 한 패키지를 제작하여 새로운 이목을 끌고 있다.

 

 금풍양조장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설립되어 현재까지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천정의 트러스구조는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고 지금까지 지하수로 술을 빚은 금풍양조장은 10미터 깊이의 우물이 아직도 양조장의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어 양조장의 역사와 세월을 느낄수 있다.

 건축물대장은 1931년으로 되어있으며, 폐쇄등기부등본(건물)의 기록에 의하며 최초 등기접수는 소화12(1937) 129일로 되어 있어 그 시대상을 미루어 짐작하기로 금풍양조장이 실제로 건축되어 등기 및 건축물 신고까지는 실제 설립연도와 약간의 차이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금풍양조장 외부 전경과 안내 설명

 

내부 모습

 

 

 금풍양조장을 지나 조금 가니 조그마한 장터가 보이고 꽃집의 꽃들이 싱그럽게 보였다. 그 장터를 지나 조금 더 가니 우리나라 전통양식으로 지어진 제법 큰 건물들이 보인다.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지만 이쪽 지방에서는 제법 잘 알려져 있는 성공회 교당이다.

 

 

 대한성공회 온수리성당(大韓聖公會 溫水里聖堂)은 대한제국 시기인 1906(고종 43) 영국인 주교 조마가(Mark N. Trollope)가 지은 성당으로 우리나라에 전래된 초기 서양 기독교의 교회양식을 볼 수 있는 목조건물이다. 1906년에 건립된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소속의 한옥 성당으로, 강화군의 강화성당과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토착화된 건물로 평가되어 20031027온수리 성공회 성당의 본채인 예배당 건물과 2층 종탑은 인천광역시의 유형문화재 제52호 강화 온수리 성공회성당(江華溫水里聖公會聖堂)으로 지정되었다. 1900년대 중반, 강화성당을 중심으로 한 선교활동으로 온수리에 성공회 신자가 급증하자, 당시 교구장이었던 아서 터너 주교는 힐라리 신부(Frederick Hillary,1868~1937)의 책임 아래 성당을 건축하기 시작해서 1906년 가을에 준공하여 축성하였다.

 당시 온수리성당은 지금의 인천길상초등학교의 전신인 진명학교를 설립하기도 하고, 신명유치원을 설립하는 등 교육사업에 매우 활발했고 독립운동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1996년 김갑수(요나, 1915~2006)의 기증으로 땅을 기부 받아 새성당을 착공하였으나, 공사에 여러 어려움이 있어 무려 8년 뒤인 2004년 완공 후 성 베드로의 이름으로 봉헌하였다.

 

  한국의 전통적인 건축기법을 활용하여 종교적인 성당건축 방법과 공간 구성을 확립한 동서 절충식 강당형의 목조건물로, 초기 성공회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종교사 및 건축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성공회 온수성당의 여러 모습

 

 

성공회 온수성당을 나와 길을 계속 가면 길상공원과 보호수, 길상저수지를 지나고 이규보 묘에 도착한다.

 

 

 이규보 묘(李奎報 墓)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길릭리에 있는 고려시대의 문신이자 문장가인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11681241) 선생의 묘로 199532일 인천광역시의 기념물 제15호로 지정되었다.

 이규보는 천도와 함께 강화에 옮겨 와 살다가 1241(고종 28) 974세로 사망한 뒤 진강산 동쪽 기슭에 묻혔다. 봉분과 석물, 묘역의 형태는 후대에 정비되어 본래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졌으나, 이규보의 생애와 강도 시기 강화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유적이다.

 

이규보 묘 주변의 여러 모습

 

 이규보 묘에서 잠시 길을 헤매었다. 설마 묘를 통과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묘 밑에 난 길을 따라가니 길이 아니었다. 그래서 다시 자세히 보니 길 안내 리본이 묘를 위로 통과하도록 되어 있었다. 묘를 아래에서 위로 관통하여 다시 길을 가니 야트막한 언덕길을 지나고 곤릉버스정류소에서 이 코스가 끝이 난다.

 

때 이르게 핀 수국

 

이름이 특이한 '참기름 롤러장'

 

 

 100코스는 미처 생각도 못한 역사적인 장소가 많아 눈길을 끌었다. 강화도는 우리에게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 길을 걸으며 많은 것을 알게 된 것도 큰 소득이었다.

 

서해랑길 99코스(가현산입구 -학운산 -수안산성 - 승마산 -대명포구)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서해랑길 99코스는 가현산입구에서 출발하여 대명포구까지 가는 13.1km의 아주 짧은 길이지만 나는 이 코스에서 엄청나게 고생을 하였다.

 

99코스 안내판

 

 99코스의 시작은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는 산 입구에 있다. 98코스가 끝나는 지점은 산을 내려와 큰 도로를 건너는 육교 옆에 설치되어 있어 여기는 아주 황량하게 보이는 곳이다. 이곳에서 잠시 쉬고 길을 가려니 왼쪽 무릎에 갑지가 망치로 때리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렇지만 산중이라 계속 길을 가니 통증이 자꾸 느껴졌다. 내가 아주 오래 길을 걸으면서 처음 느껴보는 아픔이었다. 하지만 마을도 없는 곳이라 사람이 사는 마을까지는 내려가야 했다. 통증을 참으며 가현산입구에 출발하여 수안산으로 향했다.

 옛 수안현(守安縣)의 이름을 따라 지명이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 수안산(遂安山)은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에 위치한 해발 147m의 김포평야지대에 있는 나지막한 산으로 대곶면과 통진면 일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산의 정상부에는 테를 두른 듯한 형태로 원수골을 둘러싸는 삼국시대에 축성된 김포 수안산성의 유적인 토석성(土石城)이 있다. 동국여지승람이나 통진읍지에 의하면 부남20리에 있으며 성 주위는 2(800m), 성 높이는 십척(3m)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봉수대가 있다 하였다.

 

수안산 길

 

수안산 신령지단

 

상마리입구

 

 수안산을 내려오는 도중에 무릎의 통증이 심해졌다. 그래서 중간에서 멈추고 돌아가기로 작정하니 이곳에서 돌아갈 일도 아득했다. 어쩔 수 없이 인천에 사는 아들에게 전화를 하여 좀 데리러 오라고 하니 아들이 크게 걱정하면서 먼 길을 지체 없이 와서 인천으로 가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와서 즉시 병원을 가니 뼈나 인대 등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하고 아마도 좀 무리해서 염증이 생긴 것 같다고 하였다. 아마도 97, 98코스를 걸으며 가파른 길을 무리하게 걸은 때문이라고 짐작하며 통증이 가 앉기를 기다렸는데 무려 두 달이나 지났다. 그래서 약 두 달이 지나 다시 99코스를 상마리입구에서 시작하였다. 내가 사는 부산에서 상마리입구까지 오는 길은 너무 멀었다. 일찍 ktx를 타고 부산을 출발했는데도 상마리입구에 도착하니 점심때가 되었다. 그래서 입구의 어탕 집으로 가서 맛있는 어탕국수로 점심을 먹고 길을 떠났다. 처음에는 무릎에 이상이 있을까 걱정을 조금하였는데 다행히도 무릎이 아프지는 않았다.

 

상마리어탕국수집

 

 

 어탕국수집을 나와 공단거리를 조금 걸어가 승마산으로 오른다. 승마산(乘馬山)은 김포시 대곶면 남서부에 위치한 해발 130m의 조그마한 산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약산(藥山)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약초가 많은 산이어서 지명이 유래하였고 이로부터 약암리라는 마을 이름이 유래하였다.

 

승마산 길

 

승마산에서 보는 서해

 

승마산 이정표

 

멀리 보이는 대명포구

 

 승마산을 내려와 대명포구로 향해 가니 제법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대명항은 김포시의 유일한 어항이며, 대명포구 또는 대명포라고 불린다. 대명포구(大明浦口)는 강화해협을 사이로 강화도와 마주보는 곳에 있으며, 규모는 작지만 어시장과 어판장에서 여러 수산물을 살 수 있고, 즐비한 횟집에서는 횟감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 서울에서 가깝고 인근에 역사의 현장인 덕포진과 덕포진교육박물관, 천연 미네랄 라듐천인 약암온천 등이 있어 주말에는 크게 붐빈다고 하였는데 내가 간 날이 토요일이었다.

 

대명포구의 모습

 

 대명포구 길을 걸어가니 함상공원이 나타난다. 김포함상공원(金浦艦上公園)은 퇴역한 초계 군함 LST-671운봉함을 전시관으로 개조하여 정박하고 있는 공원으로 2010910일 개장하였다. 일반인이 해군 군함 내부를 체험할 수 있는 전시장으로 개조되었다. 공원 입구 정면 바다 위에 정박해 있는 LST-671운봉함은  2006년 해군에서 공식 퇴역한 군함으로, 전시관으로 개조한 후 대명항 부두에 정박하여 일반인들에게 안보체험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멀리 보이는 초지대교

 

김포함상공원의 여러 모습

 

 김포함상공원을 나와 조금 가니 99코스의 종착점이 나오고 여기서부터 .'평화누리길'이라는 표시가 보인다. 하지만 내가 걸어가야 하는 길은 이 길이 아니다. 그래서 발길을 돌려서 100코스를 걷기를 시작하였다.

 

99코스 종착점

 

 99코스를 걷는 도중에 뜻하지 않았던 일이 일어나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다. 무릎이 아파 쉬면서 이 일도 나를 자만심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이라 생각하고 절대 무리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우여곡절 끝에 99코스를 마쳤다.

 

나를 찾아 걸은 까미노 산티아고 출간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나의 까미노의 기록이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책의 내용을 모두 보여드릴 수는 없어 들어가기 부분을 통하여 이 책의 내용을 알아 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들어가기는 아래와 같습니다.

 

 까미노에 가기 전에

 

 내가 까미노Camino에 관심을 가지고 내 여행의 버킷 리스트에 올린 지는 벌써 오래되었다. 그러다가 실행하려고 떠날 준비를 하던 때 느닷없이 코로나가 전 세계를 강타하여 강제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코로나가 잠잠해지고도 차일피일하다가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생각에 2024년에는 꼭 실행하기로 결심하고 준비하였다.

 

 내가 까미노에 큰 관심을 가지면서도 가끔은 회의가 들곤 하였다. 까미노는 과연 무엇이며, 왜 나는 이 길을 걸으려고 하는가? 무엇을 얻기 위해서 이 길을 걷는가? 등등의 의구심이 들었다. 누군가 말하기를 까미노 길은 ‘나를 찾아가는 길’이라 하였고, ‘용서의 길, 화해의 길, 은총의 길, 구원의 길, 치유의 길’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이 길을 걷는 사람이 자신이 이루고 싶은 무엇인가를 마음속으로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적은 나이에 무엇을 찾겠다고 이 길을 걷고 싶은 걸까? 하는 의문과 무엇을 얻겠다는 것 자체가 헛된 욕심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당시 친구들은 한국의 ‘코리아 둘레길’을 걷는 나에게도 ‘왜 길을 걷느냐?’는 의문을 끊임없이 제기했는데 까미노를 걷겠다고 이야기하자 대부분은 의아해하였다. 하지만 세
상을 살다 보면 이유 없이 끌리는 일도 있지 않은가. 나는 이 길을 걷고 싶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 까미노를 끝내는 날에 무언가를 얻을 수가 있다면 그것 또한 나에게 주어지는 축복이고, 아무것도 얻지 못하면 즐겁게 여행한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떠나기로 하였다.

 

 떠나기로 하고 작년에 혼자서 까미노 길을 걸은 아들에게 이야기하였다. 아들이 나에게 당부하기를 아버지는 나이가 많아 숙소 잡기가 쉽지 않으니, 숙소를 잡아 주는 여행사의 상품을 택하여 가는 것이 좋다고 조언하였다. 여러 여행사에 문의하여 검토한 뒤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좋은 조건인 까미노만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여행사에 예약하고 떠날 날을 기다리며 준비하였다. 아들은 간단한 스페인어와 숫자를 익히길 권했고, 나는 아들의 말을 참고하여 매일 스페인어를 익혔는데 결과적으로는 큰 도움이 되었다.

 

 인간은 누구나 멀리 떠나고 싶어 한다. 가벼운 짐을 꾸린 뒤 세상사를 모두 잊고 훌쩍 떠나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길을 걸으며 자신을 돌이켜 보는 상상을 한 번쯤은 해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국내에도 걷는 길이 많이 개척되었고, 사람들은 국내의 길도 많이 걷는다. 하지만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까미노를 걷는 꿈을 꾸고 있다. 까미노의 여러 길 중에서 우리가 가장 잘 아는 길인 ‘까미노’는 프랑스의 생 장 피에드포르Saint Jean Pied de Port에서 시작해 피레네산맥을 넘고 나바라Navarra와 라 리오하 지방, 부르고스, 팔렌시아, 메세타, 레온, 갈리시아, 칸타브리아산맥을 돌아 성 야고보의 무덤이 있는 산티아고Santiago로 이어지는 길이다. 이 길은 약 800km를 35일 정도 걸어야 하기에 ‘까미노’라는 세 글자만 들어도 벅차오르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무엇보다 용기가 필요하다. 길을 걸을 용기만 있으면 이미 까미노는 시작된 것이다.

 

 이 책은 나의 까미노 기록으로 까미노 프란세스Camino Francés 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프랑스의 국경 마을 생 장 피에드포르에서 출발하여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la까지 약 800km를 35일간 걸어가면서 보고 느낀 것을 기록한 것이다. 그 먼 길을 걸으면서 보는 자연과 유적들, 그리고 거기에서 사는 사람들, 같은 길을 걸으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느끼는 많은 감정을 생각나는 대로 기록하였다. 사실 까미노 길을 가는 도중에 지나가는 수많은 마을에는 여러 이야기가 얽힌 역사적 유적이 많이 있으나, 우리에게는 이 이야기가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자료도 충분하지 않다. 까미노의 기록은 대부분 감상문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까미노를 걷는 사람들이 이 길에 얽힌 이야기와 길 중간에서 만나는 여러 유적에 대해 알고 걸을 수 있도록 내 나름대로 자료를 찾아서 설명을 하도록 노력했다. 나의 노력이 충분하지 않겠지만 까미노를 걷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이 책에서 설명하는 역사적 사실이나 전설, 설화, 그리고 지리적 설명 등은 네이버 지식백과의 두산백과, 위키백과와 ‘산티아고 순례자 협회’의 자료를 참고하며 정리하였음을 미리 밝혀 둔다. 그리고 곳곳에 나오는 그림은 내가 길을 걸으면서 찍은 사진을 바탕으로 친구 박재영 님이 그린 걸 사용하였다.

 

 덧붙여 말하면 까미노를 걸으면서 많은 사진을 찍었지만, 모든 사진을 책에 실을 수 없어서 안타깝다. 그러니 더 많은 사진을 보려는 사람들은 ‘Daum’에서 나의 블로그 ‘학의 오딧세이1’를 검색하여 한번 방문하면 이 책보다 엄청나게 많은 까미노의 여러 곳을 보여 주는 사진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책 표지

 

  이 책은 단순한 감상문이 아니라 까미노 산티아고에 얽혀있는 여러 이야기를 여러 문헌을 통하여 조사하고 정리한 기록입니다. 까미노는 많은 이야기가 서려 있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 길의 이야기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막연하게 길을 걷기만 하는 안타까움이 있었습니다. 이 글을 통하여 까미노에 얽힌 여러 이야기를 사전에 준비하시고 더 좋은 까미노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까미노 산티아고를 준비하거나 동경하는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서해랑길 98코스(검암역 - 가현산 - 가현산입구)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서해랑길 98코스는 검암역 광장에서 시작하여 경인아래뱃길 위로 난 고가도로를 걸어 독정역을 거친다. 거기에서 이름도 정겨운 힐메산으로 올라가서 가볍게 지나고 마전역을 지나 가현산으로 올라가서 김포시의 가현산 입구에서 끝이 나는 11.7km의 짧은 길이나 그렇게 쉽게 걸을 수 있는 길은 아니다.

 

98코스 안내판

 

 어제 저녁에 인천 서구청 주변에서 인천에 사는 지인과 회포를 나누면서 가볍게 소주를 한잔하고 푹 쉬고 아침에 일어나 검암역 광장으로 와서 98코스를 시작한다. 광장에서 출발하여 잠시 길이 헷갈려 머뭇거리다가 고가도로 위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걷기를 시작한다. 고가도로 위를 걸어가야 한다는 생각은 미처 못하고 약간 머뭇거렸다.

 

검암역

 

 고가도로는 경인아라뱃길 위로 난 길이라 길을 걸으며 보는 아라뱃길이 제법 볼만하다. 서천교에서 뱃깅의 동쪽을 보니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다.

 경인아라뱃길은 2012525일 개통한 국내 최초의 내륙 운하로 김포 한강에서 인천 서해 바다까지 연결된 물길로, 아라뱃길의 아라는 우리 민요 아리랑의 후렴구 아라리오에서 따온 말이다. 행주대교(서울시 강서구 개화동) 인근 아라 한강갑문에서부터 시작하는 물줄기는 김포시를 지나 인천시 계양구를 거쳐 인천시 서구를 통해 바다로 나아가, 서해와 한강을 잇는 우리 민족의 멋과 얼, 정서와 문화가 흐르는 뱃길이다. 경인아라뱃길에서는 수상에서는 유람선, 요트, 카누 등의 레저를 체험할 수 있고, 수변공간에서는 전망대, 함상공원, 문화관 등 문화시설을 관람하거나, 18Km 뱃길 수변을 따라가며 산책, 피크닉등을 할 수 있다.

주운수로는 인천시 서구 오류동(서해) ~ 서울 강서구 개화동(한강)에 이르는 18km (방수로 구간 14.2km 포함) 이며, 주민생활 편의를 위해 주운수로에 평균 1km 간격으로 횡단교량을 건설했다.

 아라뱃길에는 총16개의 다리가 있는데, 다리의 형식은 여객선과 다리 위에서 뱃길 조망시 시야를 방해하지 않고 개방감을 느낄 수 있도록 주로 거더교 형식으로 건설되었다.

 

서천교에서 보는 아라뱃길

 

 아라뱃길 위로 난 고가도로를 내려와서 시내를 걸으면 독정역이 나오고 조금 지나서 이름도 정겨운 힐메산으로 들어간다.

 

 독정역과 완정역 사이의 남북으로 이어진 할메산은 고도 105m의 낮은 산이지만 본디 이름으로는 큰() ()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강화 문수산으로 이어지는 한남정맥 구간으로, 산 자체보다는 산맥의 의미가 강하게 투영된 이름을 지녀 당하동 사람들의 뒷동산 쉼터로 자리매김해 가고 있다.

이름도 재밌는 할메산의 이름을 누가 정했는지는 모르지만 워낙에 변형되어 불리는 이름이 많으니 곧이곧대로 파악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데도 할머니 할아버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정겨운 산이다.

 

 

 야트막한 할메산을 오르니 날이 몇 일 따뜻해서인지 올해 처음 보는 진달래가 보인다. 아직 진달래가 피는 때가 아닌데 벌써 따뜻한 양지녁에 피었다.(내가 이곳을 지난 일시는 3월 23일이다.)  올해 처음 보는 진달래라 사진을 찍어 곳곳에 보내니 모두들 봄이 왔는가 보다고 감탄을 하였다.

 

양지에 핀 진달래

 

할메산 안내도

 

 할메산을 내려와 검단도서관 옆을 지나 아파트 단지를 계속 지나가면 현무체육공원이 나오고 뒤이어 가현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타난다.

 

현무체육공원

 

 가현산(歌鉉山)은 인천광역시의 서구와 경기도 김포시 양촌면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는 215m의 나지막한 높이의 산이다. 고려시대부터 산의 형세가 코끼리 머리와 같이 생겼다 하여 '상두산', 칡이 번성한다 하여 '갈현산'이라고도 불렸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서해바다의 빼어난 풍광을 감상하며 거문고를 타고 노래를 불렀다 하여 '가현산'이라 고쳐 불렀는데 이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안성 칠장산에서 시작해 김포 문수산까지 이어지는 한남정맥을 잇는 산들 중 하나로, 등산 난이도가 평이하면서도 정상의 풍광이 좋아 많은 등산객들이 즐겨 찾는다.

예전에는 서해바다가 가까워 풍광이 매우 좋았으나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바다가 멀리 떨어져 예전만큼은 아니라고 한다.

 

세자봉 

 

가현산 정상

 

가현산 수애단 안내

 

정상의 팔각정

 

 가현산 정상 팔각정에서 가현산을 내려오면 큰 도로가 보이고 그 도로를 가로지르는 육교가 놓여있고 거기에서 98코스는 끝이 난다. 아무 것도 없는 황량한 산의 초입에서 다음 코스가 시작하는 안내판이 서 있어 다소 황당하게 느껴지는 코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