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랑길 96코스(자유공원입구 - 원적산 -대우하나아파트버스정류장)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95코스가 끝나고 아들내외와 손자를 만나 즐겁게 지내고 다음날 아침 96코스 시작점인 자유공원앞까지 아들이 차로 데려다 주어서 편하게 시작을 한다.그런데 96코스 시작점에서 아무리 찾아도 안내판이 보이지 않고 자유공원 들어가는 입구에 조그마한 인증표만 붙어 있다.

96코스 시작점 표시
서해랑길 96코스는 자유공원 입구에서 시작하여 신포 문화의 거리, 송림초등학교를 지나 백범로를 지나 장고개로를 걸어 함봉산과 원적산을 넘어가서 대우 하나 아파트 입구에서 끝이 나는 14.4km의 비교적 짧은 길이나 코스의 마무리가 산을 넘는 것이라 쉽지는 않다..

자유공원 올라가는 입구
인천광역시 중구 송학동 해발 69m의 야트막한 산인 응봉산 일대 전역에 조성돼 있는 자유공원(自由公園)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 근대식 공원이며, 개항 당시에는 각국조계에 해당된다. 이 공원이 조성된 것은 인천항 개항 초기인 1888년이다. 당시 인천항을 통해 들어온 외국인 거주자들이 꽤 있었는데 이들이 여가를 즐길 수 있는 공원이 필요했다. 그래서 러시아 출신 토목 기사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이 1888년 응봉산(鷹峰山) 일대에 공원을 설계했고 꾸준한 확장 작업을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서울의 탑골공원보다 조성 시기가 9년이나 빠르기 때문에 이곳이 대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이자 근대식 공원이다.
공원 조성 당시 시민들은 이를 각국공원(各國公園)이라고 불렀고 그 뒤 일본의 세력이 커지면서 1914년 각국 거류지의 철폐와 함께 공원 관리권이 인천부로 넘어가면서부터 공원 명칭이 '서(西)공원'으로 바뀌었고, 1945년 해방 후에는 공원 명칭이 만국공원(萬國公園)으로 바뀌었다. 명칭이 '자유공원'으로 바뀐 것은 1957년부터다. 1950년 9월 인천 상륙 작전을 지휘한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공을 기리는 뜻에서 시민들이 성금을 모아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만들었고 공원 남동쪽 부지에 장군의 동상을 세웠다. 그리고 당시 인천시장에 의해 공원 명칭이 '자유공원'으로 명명됐다.
공원 내에는 맥아더 장군 동상을 비롯해 1982년 한-미 수교 100주년 기념탑이 세워져 있고 석정루나 연오정 등 팔각지붕의 전통 형식의 건물도 있다. 특히 석정루나 자유공원 광장에서 내려다보는 인천항 전경이 꽤 멋있는데 석양이 아름다운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매년 12월 31일에 서구 정서진과 월미도 등과 함께 해넘이 행사가 자유공원 광장에서 진행되곤 한다.
또 1919년 4월 23일 24인의 국민대회 13도 대표자들이 이 공원에서 모여 <국민대회 취지서>를 발표하고 <임시정부 선포문>을 선언함으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 축이자 한반도 유일의 임시정부였던 한성 임시정부의 수립을 의결한 곳도 바로 이 공원이다. 자유공원 광장에 임시정부 수립의 터전이었다는 것을 기념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효도권장비

멀리 아침이 밝아오는 광경

자유공원 설명판

맥아더장군 동상

인천학도의용대 호국기념탑
자유공원을 통과하여 내려오니 신포국제시장이 보인다. 하지만 아직은 이른 아침이라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이라 멀리서 보면서 통과한다.

신포국제시장
신포국제시장을 조금 지나 골목길로 들어가면 답동성당이 나타난다.
답동성당(天主敎 仁川敎區 主敎座 沓洞 聖 바오로 聖堂)은 인천광역시 중구 답동에 위치한 천주교 인천교구의 주교좌 대성당으로, 주보성인은 성 바오로이다.
19세기말 제물포에 성당이 건립된 것은 이곳이 서울의 관문이고 외국 무역의 거점이 될 수 있는 좋은 입지라는 점을 중시한 당시 조선교구장 블랑(1884∼90년 파리외방전교회) 주교의 결정에 의해서였다.
구한말 1897년에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코스트 신부의 설계로 처음 건립되었고, 페낭신학교에 있던 빌렘(홍 요셉 1860∼1938년)신부가 초대 주임신부를 맡아 인천지역 첫 번째 본당인 제물포본당(답동본당의 원래 이름)을 설립하게 되는데, 이때가 1889년 7월 1일이다.
답동성전의 건립은 빌렘 신부가 이듬해 지금의 성당 자리인 답동 언덕에 대지를 매입함으로써 첫 발을 내딛게 된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잠시 중단되었던 성전 건립은 1895년 정초식을 갖고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간다. 이듬해 종탑이 완공되고 마침내 1897년 7월 4일 조선교구장 뮈텔(1890∼1933년 재임) 주교가 참석한 가운데 300평 규모로 전면에 3개의 종탑을 갖춘 로마네스크 양식의 역사적인 성전 축성식이 거행됐다. 1937년에 시잘레 신부의 설계로 증축된 991.74m²(300평) 규모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벽돌조 건물이며 한국의 성당 중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근대 건축물 중 하나이다. 웅장하고 화려한 자태로 인천 시민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아온 답동성당은 문화 예술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1981년 사적 287호로 지정됐다.
서울로 들어오는 관문이자 외국 무역의 거점이 될 수 있는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는 제물포에 건립된 이후 답동성당의 아름다운 자태와 위용으로 인천의 역사적인 건축물이자 종교 유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답동성당의 여러 모습
답동성당의 여러 곳을 둘러보고 성전에 들어가 잠시 기도를 한 후에 길을 다시 걸어 시가지로 향한다. 시가지 길을 이리저리 걸어가니 백범로가 나오고 백석중고등학교가 보인다.




시가지의 여러 모습
시가지 길을 계속 걸어가니 장고개라는 설명판이 보이고 이제 산으로 올라가게 한다. 여기서부터 함봉산으로 가는 길이다. 함봉산은 부평도서관 뒷산을 지칭한다. 옛날 이 산에는 나무가 울창하여 호랑이가 살았다는 말이 있어서 함봉산이란 호랑이가 우는 소리가 들리는 산이란 뜻인데 이것은 한자 풀이일 뿐 확실치 못하다.


장고개 설명







한남정맥 안내도
높지 않은 함봉산을 지나니 원적산이 나타난다. 원적산(元積山)은 부평구와 서구의 경계에 위치한 산이다. 원래 표기는 ‘元’이 아니라 ‘怨’으로 원한이 맺힌 산이란 뜻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조선시대 세곡을 뱃길로 운반할 때 삼남지방의 세곡선이 김포를 지나 강화해협을 지나는데 손돌목에서 자주 좌초되어 서해바다와 한강을 연결하는 굴포작업을 하는데 원통이 고개를 파니 암석만 나와 실패하고 또 다시 안아지 고개를 파도 뜻을 이루지 못하자 원통하고 원한이 맺힌 산이라 해서 원적산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원적산공원은 부평구 산곡동, 청천동 2개동에 걸쳐 남북으로 길게 위치한 공원으로, 인천의 중요한 녹지축이 되는 공원으로 인조잔디구장, 다양한 체육활동 공간과, 생태습지, 발물놀이터 등이 마련되어, 많은 시민의 사랑을 받고 있는 공원이다.





원적정

원적산 등산 안내도
원적산을 내려오니 멀리 종점인 대우하나아파트가 보이고 아파트 버스정류장에서 이 코스는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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