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鶴)의 오딧세이(Odyssey)

서해랑길 96코스(자유공원입구 - 원적산 -대우하나아파트버스정류장)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95코스가 끝나고 아들내외와 손자를 만나 즐겁게 지내고 다음날 아침 96코스 시작점인 자유공원앞까지 아들이 차로 데려다 주어서 편하게 시작을 한다.그런데 96코스 시작점에서 아무리 찾아도 안내판이 보이지 않고 자유공원 들어가는 입구에 조그마한 인증표만 붙어 있다.

 

96코스 시작점 표시

 

서해랑길 96코스는 자유공원 입구에서 시작하여 신포 문화의 거리, 송림초등학교를 지나 백범로를 지나 장고개로를 걸어 함봉산과 원적산을 넘어가서 대우 하나 아파트 입구에서 끝이 나는 14.4km의 비교적 짧은 길이나 코스의 마무리가 산을 넘는 것이라 쉽지는 않다..

 

자유공원 올라가는 입구

 

 인천광역시 중구 송학동 해발 69m의 야트막한 산인 응봉산 일대 전역에 조성돼 있는 자유공원(自由公園)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 근대식 공원이며, 개항 당시에는 각국조계에 해당된다. 이 공원이 조성된 것은 인천항 개항 초기인 1888년이다. 당시 인천항을 통해 들어온 외국인 거주자들이 꽤 있었는데 이들이 여가를 즐길 수 있는 공원이 필요했다. 그래서 러시아 출신 토목 기사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이 1888년 응봉산(鷹峰山) 일대에 공원을 설계했고 꾸준한 확장 작업을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서울의 탑골공원보다 조성 시기가 9년이나 빠르기 때문에 이곳이 대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이자 근대식 공원이다.

 공원 조성 당시 시민들은 이를 각국공원(各國公園)이라고 불렀고 그 뒤 일본의 세력이 커지면서 1914년 각국 거류지의 철폐와 함께 공원 관리권이 인천부로 넘어가면서부터 공원 명칭이 '(西)공원'으로 바뀌었고, 1945년 해방 후에는 공원 명칭이 만국공원(萬國公園)으로 바뀌었다. 명칭이 '자유공원'으로 바뀐 것은 1957년부터다. 19509월 인천 상륙 작전을 지휘한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공을 기리는 뜻에서 시민들이 성금을 모아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만들었고 공원 남동쪽 부지에 장군의 동상을 세웠다. 그리고 당시 인천시장에 의해 공원 명칭이 '자유공원'으로 명명됐다.

 

 공원 내에는 맥아더 장군 동상을 비롯해 1982년 한-미 수교 100주년 기념탑이 세워져 있고 석정루나 연오정 등 팔각지붕의 전통 형식의 건물도 있다. 특히 석정루나 자유공원 광장에서 내려다보는 인천항 전경이 꽤 멋있는데 석양이 아름다운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매년 1231일에 서구 정서진과 월미도 등과 함께 해넘이 행사가 자유공원 광장에서 진행되곤 한다.

 또 191942324인의 국민대회 13도 대표자들이 이 공원에서 모여 <국민대회 취지서>를 발표하고 <임시정부 선포문>을 선언함으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 축이자 한반도 유일의 임시정부였던 한성 임시정부의 수립을 의결한 곳도 바로 이 공원이다. 자유공원 광장에 임시정부 수립의 터전이었다는 것을 기념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효도권장비

 

멀리 아침이 밝아오는 광경

 

자유공원 설명판

 

맥아더장군 동상

 

인천학도의용대 호국기념탑

 

 자유공원을 통과하여 내려오니 신포국제시장이 보인다. 하지만 아직은 이른 아침이라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이라 멀리서 보면서 통과한다.

 

신포국제시장

 

 신포국제시장을 조금 지나 골목길로 들어가면 답동성당이 나타난다.

 

 답동성당(天主敎 仁川敎區 主敎座 沓洞 聖 바오로 聖堂)은 인천광역시 중구 답동에 위치한 천주교 인천교구의 주교좌 대성당으로, 주보성인은 성 바오로이다.

19세기말 제물포에 성당이 건립된 것은 이곳이 서울의 관문이고 외국 무역의 거점이 될 수 있는 좋은 입지라는 점을 중시한 당시 조선교구장 블랑(188490년 파리외방전교회) 주교의 결정에 의해서였다.

구한말 1897년에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코스트 신부의 설계로 처음 건립되었고, 페낭신학교에 있던 빌렘(홍 요셉 18601938)신부가 초대 주임신부를 맡아 인천지역 첫 번째 본당인 제물포본당(답동본당의 원래 이름)을 설립하게 되는데, 이때가 188971일이다.

답동성전의 건립은 빌렘 신부가 이듬해 지금의 성당 자리인 답동 언덕에 대지를 매입함으로써 첫 발을 내딛게 된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잠시 중단되었던 성전 건립은 1895년 정초식을 갖고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간다. 이듬해 종탑이 완공되고 마침내 189774일 조선교구장 뮈텔(18901933년 재임) 주교가 참석한 가운데 300평 규모로 전면에 3개의 종탑을 갖춘 로마네스크 양식의 역사적인 성전 축성식이 거행됐다. 1937년에 시잘레 신부의 설계로 증축된 991.74m²(300) 규모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벽돌조 건물이며 한국의 성당 중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근대 건축물 중 하나이다. 웅장하고 화려한 자태로 인천 시민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아온 답동성당은 문화 예술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1981년 사적 287호로 지정됐다.

서울로 들어오는 관문이자 외국 무역의 거점이 될 수 있는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는 제물포에 건립된 이후 답동성당의 아름다운 자태와 위용으로 인천의 역사적인 건축물이자 종교 유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답동성당의 여러 모습

 

 답동성당의 여러 곳을 둘러보고 성전에 들어가 잠시 기도를 한 후에 길을 다시 걸어 시가지로 향한다. 시가지 길을 이리저리 걸어가니 백범로가 나오고 백석중고등학교가 보인다.

 

시가지의 여러 모습

 

시가지 길을 계속 걸어가니 장고개라는 설명판이 보이고 이제 산으로 올라가게 한다. 여기서부터 함봉산으로 가는 길이다. 함봉산은 부평도서관 뒷산을 지칭한다. 옛날 이 산에는 나무가 울창하여 호랑이가 살았다는 말이 있어서 함봉산이란 호랑이가 우는 소리가 들리는 산이란 뜻인데 이것은 한자 풀이일 뿐 확실치 못하다.

 

장고개 설명

 

한남정맥 안내도

 

 높지 않은 함봉산을 지나니 원적산이 나타난다. 원적산(元積山)은 부평구와 서구의 경계에 위치한 산이다. 원래 표기는 이 아니라 으로 원한이 맺힌 산이란 뜻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조선시대 세곡을 뱃길로 운반할 때 삼남지방의 세곡선이 김포를 지나 강화해협을 지나는데 손돌목에서 자주 좌초되어 서해바다와 한강을 연결하는 굴포작업을 하는데 원통이 고개를 파니 암석만 나와 실패하고 또 다시 안아지 고개를 파도 뜻을 이루지 못하자 원통하고 원한이 맺힌 산이라 해서 원적산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원적산공원은 부평구 산곡동, 청천동 2개동에 걸쳐 남북으로 길게 위치한 공원으로, 인천의 중요한 녹지축이 되는 공원으로 인조잔디구장, 다양한 체육활동 공간과, 생태습지, 발물놀이터 등이 마련되어, 많은 시민의 사랑을 받고 있는 공원이다.

 

원적정

 

원적산 등산 안내도

 

 원적산을 내려오니 멀리 종점인 대우하나아파트가 보이고 아파트 버스정류장에서 이 코스는 끝이 난다.

 

서해랑길 95코스(선학역 3번 출입구 - 문학산 - 자유공원 입구)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저번에 서해랑길 94코스를 걷고 겨울이 와서 눈도 내리고 기온이 많이 떨어져 걷기를 쉬다가 따뜻한 봄이 오길래 나머지 구간을 걷기로 마음먹고 집을 떠나 95코스로 갔다. 부산에서 인천의 선학역까지 가는 길이 만만하지 않으나 내가 걸어야 하는 길이기에 일찍 부산을 출발했다.

 

서해랑길 95코스는 선학역 3번 출구에서 시작하여 문학산을 넘고 인천의 신구 시가지를 따락 걸으며 인천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볼 수 있는 길로 마지막 종점은 차이나타운을 지나 자유공원 입구이다.

 

95코스 안내판

 

 선학역 3번 출구에서 출발하여 문학산 입구로 가니 식당이 즐비하다. 점심 때도 되어 점심을 먹고 문학산으로 올라가려니 인천의 연수둘레길과 같이 가는 표시가 있다.

 

연수구 음식특화거리

 

연수둘레길 안내판

 

 문학산은 인천의 고대 왕국이었던 미추홀의 진산으로 인천의 역사와 함께 하였지만, 1965년부터 50여 년간 군부대가 주둔한 때문에 시민들은 오래도록 정상을 오르지 못했다. 그러다가 20151015일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제 옷을 갈아입는 문학산을 오르는 길은 다양하다. 문학산은 해발 217m로 그리 높지 않은 산이나 바위가 많아 등산화 착용은 필수다. 정상에 오르면 문학산 표지석과 예전 봉수대를 재현한 상징물을 만나게 된다. 도시 전경이 숨결처럼 산자락을 타고 오르고, 시계가 좋으면 청량산을 넘어 팔미도와 무의도까지 보인다고 하는데 오늘은 미세 먼지가 뿌옇게 덮여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 산에 있는 문학산성은 인천광역시기념물 제1호로, 임진왜란 때는 인천부사였던 김민선이 백성과 함께 나라를 지킨 구국의 현장이기도 하다. 성 둘레는 577m, 현존하는 부분은 339m이다.

 

문학산 오르는 길

 

문학산에서 보는 풍경(문학야구장)

 

문학산 주변 문화유산 설명

 

 

 

 문학산의 명칭은 조선 전기 관찬 지리지인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문학산이라는 명칭은 보이지 않고, 남산(南山)이라고만 기록되어 있어 이 때까지는 앞산이라는 의미에서 남산으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문학산은 원래 '학산(鶴山)'이라고 하던 것을 근처 문묘(文廟)에서 '()'자를 따와 문학산으로 부르게 된 것인데, '학산'이라는 명칭은 이 산에 학이 많이 살았기 때문이라거나 산세가 날개를 펼친 학의 모양을 닮아서라는 설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문학산 정상의 모습

 

 문학산 정상에서 내려오는 길가에는 문학산 주변의 여러 역사적 사실을 설명해 놓은 것이 많이 눈에 띈다. 특히 이곳이 비류백제의 미추홀이었다는 역사를 중시하여 미추홀에 대한 설명을 많이 해 놓았다.

 

일송정

 

 산을 내려오면서 일송정을 지나 조금 더 내려오니 무슨 역사적 유적을 발굴하고 있다. 나도 한 때는 이 방면에 관심이 많아 참여도 해 보았기에 궁금해서 발굴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청동기시대의 주거지를 발굴 중이라고 하엿다.

 

발굴현장

 

 산을 내려와 시내를 따라 걸으니 백제사신길이라는 표시가 있고 사신의 행렬들을 설명하고 있는 벽화가 계속 늘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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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시대, 중국으로 파견 가는 백제 사신들은 부평별 고개와 사모지 고개를 거쳐 지금의 옥련동 한나루에서 배를 타고 떠났다. 이곳에 서서 세 번 이름을 부르고 이별하던 고개라 하여 삼호현이라 불렀다.

 

조각의 거리에 서 있는 조각품

 

옥련시장

 

 계속 시내를 따라 걸어가니 능허대가 나온다. 지금은 공원 일대를 공사중이라 통행을 금지해 놓아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 능허대(凌虛臺)는 백제가 근초고왕 27(372)에 처음으로 중국에 사신을 파견한 이래 중국으로 가는 우리의 사신들이 출발했던 나루터가 있던 곳으로 이 나루터는 한나루(漢津)라 불렸다. 능허대지(凌虛臺址)는 인천광역시 연수구 옥련동에 있는 문화재로 1990119일 인천광역시의 기념물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아파트와 유원지가 개발되어, 도심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현재 능허대 공원으로 조성된 이곳에는 작은 정자와 연못이 있으며, 연못에는 인공폭포와 분수대가 있다.

 능허대의 명칭은 소동파의적벽부에 나오는능만경(凌萬頃)’()’빙허어풍(憑虛御風)’()’를 따서 만경(萬頃)을 넘어(: ) 을 하늘(: )을 오른다.’라는 뜻이다.

 

능허대의 여러 모습

 

 능허대를 지나 남항해안공원으로 가는 길은 인천이ㅡ 갯벌을 옆에 끼고 걷는 시내 길이다. 한쪽에서는 자동차가 싱싱 달리고 한쪽은 바다 갯벌이 펼쳐지는 길을 따라 걷는다.

 

갯벌과 남항그린공원 모습

 

 

 

 시내를 계속 걸어가면서 보니 조금 생소한 교회가 보인다. '천부교'라는 교회다. 집에 돌아와서 찾아보니 천부교(天父敎)는 박태선 장로가 1955년에 창시한 반기독교 성향의 신흥종교로 박태선을 하나님으로 믿으며 박장로교 또는 전도관(傳道館)이라고도 하며, 우리에게는 교인들의 신앙공동체인 신앙촌으로도 유명하다. 박태선 교주를 육신을 입고 내려온 신(하나님)으로 주장하고 그를 감람나무 하나님이라고 부르기도 해서 영미권에서는 감람나무 교회(Olive Tree Church)라고 불린다고 한다.

 

천부교 교회

 

 계속 길을 걸어가니 인천개항누리길이 나온다. 인천 개항 누리길은 인천광역시 중구 인천역 부근 개항장 일대에 조성된 길로 근대 개항기 역사와 문화를 체험하며 걷는 테마길이다.

 인천의 올레길로 불리는 누리길(세상을 즐기는 길)2006년부터 운영해 온 도보 관광 코스로 근대 역사 건축물 등 문화유적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춘 문화관광해설사의 재미있고 유익한 해설을 들으며 도보로 관광할 수 있는 테마관광코스이다. 이 길을 걸어가면서 오래된 개항기의 건물들을 볼 수 있다.

 

구 인천유체국 건물

 

 

 

 구 인천 일본 제1은행 지점(舊仁川日本第一銀行支店)은 일본 제1은행이 개화기 인천에 설치한 지점으로 근대건축물로 인천광역시 중구 신포로23번길에 있으며 1982년에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됐다.

1883년 인천을 개항한 후, 일본 제1은행 부산지점이 개설한 인천출장소가 전신으로, 초기에는 해관 통관세를 취급하였다. 1899(고종 광무 3)에 지금의 건물을 신축하여 1911년에는 조선은행 인천지점, 1950년 한국은행 인천지점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조달청 인천사무소, 법원 등기소 등으로 활용되다가 2010년 인천개항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건물은 일본인 니이노미 다카마사가 설계하여 모래, 자갈, 석회를 제외한 나머지의 모든 건축 재료를 일본에서 직접 가져와 만들었다. 1899년에 만들어진 지상 1층 건물로 석재 기단부와 수평 줄눈의 안정되고 견고한 외관을 지니고 있다. 돌출된 출입문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으로 구성된 석조 건축물이다. 현관 상부는 아치 구조이며 지붕에는 중앙 돔과 작은 천창을 설치하였다. 처마 부분에는 동그란 구멍이 뚫린 석조 난간을 올렸다.

 

구 인천제1은행 지점 건물

우리나라 최초의 태극기

 

 인천의 개항누리길을 따라가면서 여러 건물을 구경라며 다다른 곳이 유명한 인천의 차이나타운이다.

 

 인천차이나타운은 1883년 인천항이 개항되고 이듬해 청나라 조계지가 설치되면서 중국인들이 현 선린동 일대에 이민, 정착하여 그들만의 생활문화를 형성한 곳이다. 화교들은 소매잡화 점포와 주택을 짓고 본격적으로 상권을 넓혀 중국 산둥성 지역에서 소금과 곡물을 수입, 1930년대 초반까지 전성기를 누렸다. 1920년대부터 6·25전쟁 전까지는 청요리로 명성을 얻었는데 공화춘, 중화루, 동흥루 등이 전국적으로 유명하였다. 한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각종 제도적 제한으로 화교들이 떠나는 등 차이나타운의 화교사회가 위축되었으나 한중수교의 영향으로 활기를 되찾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차이나타운'이라고 말하면 이곳을 꼽는 이들이 많다. 서울, 부산, 대구 등에도 차이나타운이 있지만 인천 차이나타운의 규모가 압도적으로 넓은데다 대한민국에서 대표적으로 꼽는 중국 음식인 짜장면의 탄생지가 이곳이라서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차이나타운으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에는 역사적 의의가 깊은 관광명소로서 권역별로 변화하고 있으며, 현재 이곳에는 화교 2,3세들로 구성된 약 170가구, 500명이 거주하고 있다.

 

 인천차이나타운에 공화춘이라는 식당이 있지만 그 공화춘은 1911년 개업한 공화춘이 아닌 판권을 구입하고 부지를 고친 공화춘이며 재한 화교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진짜 공화춘 창업자 가문이 운영하는 가게는 인천역 건너편에 있는 신승반점이다. 1983년 원조 공화춘이 폐업하기 3년 전에 공화춘 주방에서 일하던 창업주인 우희광의 막내딸 우란영과 사위 왕입영이 독립하여 세운 가게가 신승반점이다

 

차이나타운의 여러 모습

 

 차이나타운을 지나면 이어지는 마을이 송월동 동화마을로 20134월 인천광역시 중구 송월동 2~3가에 조성된 벽화마을이다.

 1883년 개항 이래로 송월동은 외국인들이 거주하던 부촌이었으나 마을이 노후화되며 젊은 사람들은 떠나 빈집이 늘고 고령층만 남게 되었다. 그래서 20134월에 열악한 주거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고전동화를 테마로 하여 낡은 담에는 벽화를 그리고, 곳곳에 조형물을 세웠고,. 몇몇 주택은 개조되어 카페나 음식점 등이 들어서기도 했다.

 벽화 및 조형물의 모티브가 된 동화로는 서구의 신데렐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오즈의 마법사, 피노키오, 알라딘, 잠자는 숲속의 공주, 백설공주, 라푼젤, 밤비, 엄지공주, 빨간 모자, 미녀와 야수, 피터팬, 헨젤과 그레텔, 브레멘 음악대, 노아의 방주 등과 우리나라의 선녀와 나무꾼, 도깨비 방망이, 혹부리 영감, 흥부전, 별주부전, 그리고 리틀 프린세스 소피아 등이 있으며, 이 외에도 마을에는 못난이인형, 무지개다리 포토존 등이 설치되어 있다.

 

송월동 동화마을의 여러 풍경

 

 송월동 동화마을을 지나 자유공원 담장을 따라 조금 가면 삼국지의 여러 모습을 벽화로 그림 그림이 나오고 삼국지거리를 지나면 초한지를 벽화로 그림 거리가 나온다. 차이나타운의 벽화거리는 삼국지 벽화거리가 먼저 조성된 후 인기를 끌자 추후에 초한지를 주제로 초한지 벽화거리를  조성했다. 초한지 이야기는 유방이 천하의 패권을 쥐고 새로운 통일제국 한나라에 황제로 취임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하지만 초한지 벽화거리의 마지막 벽화는 마치 역사와 이야기는 끝맺음 없이 흐른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 그 이후 한나라의 몰락과 위··오 세 나라의 이야기인삼국지를 예고하고 있다. 벽화 거리에 있는 그림은 서양 미술에서 보던 작품과 구도를 공유한다. 이를테면 6번 그림은 진승·오광의 난을 묘사하는데 외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오마주(Homage)했다. 15번 항우의 무용은 말탄 나폴레옹 황제의 그림을 떠올리게 한다. 51번 그림 패왕별희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본떴다고 생각하면 된다.

 

벽화거리의 모습

 

인천역 앞의 차이나타운 올라가는 길

 

 여기에서 자유공원으로 올라가는 입구에서 95코스는 끝이 난다. 오늘은 여기에서 끝을 내고 인천에 사는 큰 아들을 만나서 즐겁게 회포를 풀 생각이다. 그리고 편안하게 쉬고 내일의 여정을 시작할 것이다.

 

경주14 - 경주읍성과 시내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경주의 역사적 유적을 탐방하다가 오늘은 사람이 사는 시가지를 걸어 보기로 하였다. 경주시외버스터미널 앞의 버스정류장 부근에 경주읍성마을거리의 안내판이 서 있다. 그래서 오늘은 웁성마을을 중심으로 경주 시내를 소요해 보기로 한다.

 

경주읍성마을거리 안내

 

 버스를 타고 가기에는 별로 멀지 안은 거리라 천천히 걸어서 읍성마을로 가니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물이 조금 특이한 것을 전시하는 경주 벼루박물관이다. 그래서 구경을  하려고 하니 출타 중이라면서 문을 닫아 놓았다. 하는 수 없이 외관만 보고 읍성으로 갔다.

 

경주벼루박물관

 

 경주읍성 (慶州邑城)은 신라 왕경의 북쪽에 해당하는 경주시 동부동과 북부동 일대에 위치하는 둘레 2,412m의 석축 평지성이다. 경주읍성은 1933년에 발행된 지리서 동경통지읍성의 시축 연대는 불명이지만, 고려 우왕(1378)에 개축하였고 둘레가 4,075, 높이가 127촌으로 석축이다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고려 때의 석축 읍성으로 추정된다. 안타깝게도 일제의 근대 도시계획에 따라 개축된 읍성 대부분이 헐려 현재는 동쪽 성벽만 50m 남짓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다행으로 2002년부터 꾸준히 발굴 조사와 복원 사업이 추진되고 있지만 현재는 일부 성벽과 문만 복원되어 있다. 하지만 이 읍성을 돌아 다녀보면 어디가 어딘지를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관광객들을위해 안내판이나 표지판 정도는 세워 두어야 하는데 안타깝다. 복원이 끝나면 고려에서 조선을 거쳐 현대까지 경주 역사의 층위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경주읍성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걍주읍성 언내

 

복원된 성벽

 

향일문

 

반대쪽에서 보는 향일문

 

 경주문화원과 이웃한 동경관(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은 본래 신라 왕실에서 집기를 보관할 용도로 지은 건축물이다. 고려와 조선 시대에는 외국 손님이나 서울의 벼슬아치가 지방에 오면 머무는 관아의 객사 건물로 이용했다. 일제강점기 때 학교로 사용되다가 광복 후 6.25전쟁을 거쳐 일부가 헐리고 서쪽 건물만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몇 차례 이전되면서 형태 변화가 발생했지만 영·정조 시기의 역사성을 품고 있는 건축물로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동경관

 

 읍성을 나와서 조금 시내쪽으로 길을 가면 나오는  경주문화원과 동경관 사이 화랑수련원 간판을 내걸고 있는 건축물은 1920년경 경주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이었던 구 야마구치병원으로 추정되는 건물이다. 건축물 자체도 독특하지만 1930년대 이 병원 의사 다나카 도시노부가 경주의 어느 골동품상에서 신라의 미소로 일컬어지는 경주 얼굴무늬 수막새를 구입했고, 훗날 경주박물관에서 그로부터 어렵사리 수막새를 기증받은 이야기가 얽혀 있어 눈길을 주게 된다.

 

화랑수련원(구 야마구찌 병원)

 

금리단길

 

 발길이 가는대로 가다가 보니 문정현이라는 곳이 보인다. 문정헌은 풀이하면 '글이 샘솟는 집'이란 뜻으로 2012년 경주에서 개최되었던 제78차 국제 PEN대회의 성공적인 마무리를 기념하여 건립한 한옥 도서관이자 북 카페이다. 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5천여 권의 도서는 대부분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회원들의 기증으로 채워져 의미를 더했다. 도서관은 북 카페로 커피 한 잔과 함께 여유롭게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졌다. 문정헌 안에는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작은 우물이 있다. 또 뒷마당의 쪽문은 봉황대가 있는 노동동 고분군으로 이어져 함께 둘러보기 좋다.

 

문정헌 

 

 다시 발을 돌려 구 경주역으로 갔다. 우리 세대에게는 너무 친근한 역이다. 어릴 때 경주를 올 때는 항상 이 역을이용하던 생각이 났다.

 경주역(폐역)은 철도역 중앙선의 폐지된 철도역으로 1918111일 협궤선 영업을 시작으로 2021년에 폐지된 역으로 지금은 경주문화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문을 닫아 놓아서 내부를 보지는 못했다.

 경주역 일대는 경주 구시가지의 교통의 요지로 대부분의 대중교통이 경주역 앞을 통과한다. 역 앞에는 재래시장 성동시장이 위치하고 있으며, 대릉원 등 유적관광지와도 가까운 곳이다.

 

구 경주역(경주문화원)

 

 역전 광장에 있는 황오동 삼층석탑은 원래 효공왕릉(孝恭王陵) 부근인 경주시 동방동 장골의 사자사지(獅子寺址)에 무너져 있었는데,   1936년  경주역을 사정동으로부터 옮길 때 석탑재(石塔材)를 모아 이전·복원하였다. 198585일 경상북도의 문화재자료 제8호로 지정되었다.

이 탑은  신라 석탑의 형태를 보이나, 다른 석탑과는 달리 이중의 기단에 놓인 1층의 탑신은 너비에 비하여 높이가 매우 높다. 2·3층 탑신도 너비는 그다지 줄지 않으나 높이가 많이 줄었다. 이러한 특징과 함께, 전체적으로 안정된 기초 위에 조성된 날렵한 모습으로 미루어 고려 석탑으로 변천하는 과도기 양식으로 추정된다.

 

경주 황오동 삼층석탑

 

 구 경주역 앞에는 경주에서 유명한 성동시장이 있다. 성동시장은 300여 개의 점포와 30여 명의 노점상들이 있다. 지난 1971년 개설 이래 지역의 대표적 재래시장으로 자리 잡았다. 날로 침체 상태로 접어드는 재래시장 환경개선 사업으로 경쟁력을 높여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기여하고자 시가 사업비 16억여 원을 투자해 착공에 들어간 성동시장 현대화 사업은 시장 입구 조형물 설치, 뒤 상가 및 먹자골목 아케이드 설치, 하수도 정비, 전기소방시설, 바닥정비, 와이드 칼라 250점을 게시해 새롭게 단장했다. 시는 성동시장 환경개선 사업을 신라 천년고도 이자 국제적인 문화·관광도시에 어울리는 재래시장으로 조성하고자 지역에 산재한 소중한 문화유산 250여 점을 소재로 와이드 칼라 사진에 담아 아케이드 벽면에 게시하여 경주를 찾아오는 관광객들에게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하는 또 하나의 명물로 부상함으로써 재래시장 활성화가 기대되고 있다.

 

성동시장의 풍경

 

 성동시장을 벗어나 조금 길을 가니 성동성당이 보인다.올해가 천주교에서 말하는 전대사의 해인데 이성당이 '전대사 수여를 위한 순례성당'이라는 휘장이 걸려 있다. 그래서 성당에 들어가니 아무런 인기척도 없어 혼자서 본당에 들어가 잠시 기도를 하고 나왔다. 나오면서 성당 뜰을 보니 옛날 천주교인들이 박해를 받던 시절의 돌형구가 놀여 있었다.

 

성동성당

 

 성당을 나와 아래로 더 걸어가면 중앙시장이 나온다. 경주중앙시장은 1900년대 초부터 농민 및 보부상들이 주축이 되어 장터를 형성하고 70여 년간 일반시장으로 운영된 오랜 역사가 있는 시장이다. 1983년에 현대화 시장으로 변화되었으며, 경주 사람들은 아래 시장으로 부르기도 한다. 천년고도 경주의 문화관광형시장으로 700여개의 점포가, 3개소의 주차장이 있는 비교적 규모가 큰 전통시장이다. 최근 대형 소매업체와의 경쟁력 향상을 위해 조형물설치, 시장통로 비가림시설 설치, 상하수도 및 바닥정비, 소방시설 설치등 시장현대화사업을 적극으로 추진해 쾌적한 전통시장으로 변화하고 있다.

 경주중앙시장은 다양한 세대 간의 문화를 접할 수 있는 전통시장과 매 2, 7일째에 열리는 전통 오일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지역 주민들이 직접 재배한 싱싱한 현지 특산물과 토산품, 경주토종한우, 한우소머리곰탕, 활어회 센터, 돔베기, 두치, 닭강정등 다양한 먹거리와 볼거리 그리고 즐길거리가 준비되어있는 문화관광형 시장이다.

 특히 매주 목, , , 일요일 오픈되는 경주중앙시장 야시장인 달빛미행은 많은 시민, 관광객들에게 인기있는 핫플레이스가 되고 있다.

 

경주중앙시장

 

 한가롭게 시내 일대를 배회하면서 이곳 저곳을 구경하다가 보니 어느 새 시간이 많이 지났다. 오늘은 신라의 유적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그냥 배회하면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을 돌아다녔다.. 역사적 유물이나 유적도 중요하지만 일반적인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도 아주 중요한 일이다.

 

경주 13 - 동학의 자취(최제우 생가, 용담정)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오늘은 경주 북부 권역에서 우리에게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는 동학의 발자취를 찾아보기로 하였다. 일찍이 경주로 가서 북부 권역중 용담정쪽으로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려 타고 먼저 최제우의 생가에서 내려 걸어갔다.

 

 지금까지 우리 역사에서 동학에 대한 평가는 최제우가 득도하고 개창했던 경신년(1860)보다 전봉준(全琫準, 1855~1895)이 선봉에 섰던 갑오년(1894)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즉 신앙과 자주적 근대 사상의 출발지인 경주보다 호남의 격전지에 더 주목해 왔다. 하지만 갑오년 혁명의 힘이 분출되는 자양분을 마련했던 곳은 동학의 발상지인 경주의 용담정이다.

 그러므로 동학 유적을 대표하는 구미산 용담정은 근대적 사상과 동학의 출발이자 신앙의 원천인 종교의 발상지로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

 

 용담정에 앞서 찾아간 최제우 생가는 용담정 입구에거 약 1km 떨어진 가정리의 한적한 농촌에 있다. 생가 입구 오른쪽에 자리해 있는 1971년 세워진 5m높이의 유허비는 귀부와 이수를 갖추고 있고 최제우의 행적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곳에는 유허비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2014년 동학발상지 성역화 사업으로 안채와 사랑채, 별채, 곳간 등의 건물이 복원되었다. 구미산의 품에 아늑하게 싸여 절로 평온한 기분이 들게 하는 분위기이다.

 

최제우 생가 앞의 '동학 가는 길' 안내판

 

최제우 생가 전경

 

생가 설명

 

생가 입구의 유허비

 

 최제우 생가는 조금 큰 한옥으로 큰 특징은 없는 집이다. 그저 최제우의 생가라는 의의가 있을 뿐인 거의 현대적으로 복원한 집으로 역사적인 의미만 부여할 뿐이다.

 

사랑채

 

방앗간

 

안채(수운고택)

 

생가의 여러 모습

 

 생가를 나와 생가 앞에 있는 안내소에 가서 안내 팜플렛을 요청하니 아직 팜플렛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며 미안해 한다. 이런 점은 다소 아쉽게 생각이 되었다.

 

 안내소 앞에 있는 아래 사진에서 보는 나무에 봄이 오는 빛이 보였다. 그런데 너무 특이한 모습이라 무슨 나무인지가 궁금하였다. 그래서 식물 이름을 가르쳐 주는 앱에 물음을 보내니 '백합나무'라는 답이 왔다. 참 편리한 세상이다.

 

백합나무

 

 생가에서 나와 길을 걸어 내려가면 용담정 입구의 버스정류장이 나온다. 여기서부터 용담정까지는 약 2km의 아스팔트 길을 걸어 가야 한다.

 

용담정 버스 정류장

 

용담정 올라가는 길에서 보는 풍경

 

용담정 입구(포덕문)

 

 경주시에서 서쪽으로 약 12에 가정리가 있고 그 앞산이 바로 구미산(龜尾山)이며, 그 산 계곡에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가 한울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정자인 용담정이 있다. 이곳은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 가을철 아름다운 풍광을 뽐내 계절여행지로서의 매력도 있는 곳이다.

 

 용담정은 최제우의 아버지 최옥()이 나이 60이 넘도록 자식이 없어 구미산 계곡에서 시를 읊조리며 소일하던 곳이다. 최옥은 나이 63세 되던 해 한 씨를 세 번째 부인으로 맞아 18241028일 최제우를 낳았다. 태어나던 날 구미산이 사흘 동안 크게 진동하였다고 전해진다.

 

 최제우는 동학(東學)의 창시자로, 호는 수운(水雲), 수운재(水雲齋)이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행상을 하던 최제우는 제세구민(濟世救民)의 뜻을 품고 울산, 양산 등을 떠돌며 수련해 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1859년 고향 경주로 돌아와 용담정에 정착했다. 이곳에서 수련을 이어가던 중 186045일 한울님으로부터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이라는 무극대도(無極大道, 끝없이 훌륭한 진리)의 가르침을 받게 됐다. 그는 용담에서의 종교체험을 서학에 대립되는 동학이라 이름하고 민족의 고유신앙을 계승한 새로운 종교로 창시하게 된다. 그는 용담가를 지어 이 득도의 과정과 내용을 서술하였는데, 용담가라는 가사의 명칭은 용담정의 이름을 딴 것이다.

 

 포교를 시작한 후 불과 1년이 되지 않아 수 만의 신도가 운집하였고, 광범위한 계층에 걸쳐 교세를 확장하고 1863년 접소가 14개 소에 이르렀다. 1863년 제자인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에게 도통을 계승하고, 그러나 나라에서는 이를 이단지도(異端之道)’라 하여 좌도난정(左道難正)’이라는 죄명으로 이듬해 용담정에서 혹세무민의 죄목으로 체포하여 그를 참형에 처하였다. 대구에서 처형되었으며, 1907년 복권되었다.

 

 19752월 천도교는 구미용담성역화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거교적인 사업으로 용담정 · 포덕문 · 용담정사 · 성화문 등을 건립하여 성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에 따라 천도교에서는 가정리를 중심으로 한 일대에서 천도교의 지상천국을 의미하는 궁을촌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최제우 동상

 

 최제우가 한울님과 만나는 과정을 기록한 글인 포덕문의 이름을 그대로 따온 용담정의 정문 포덕문을 지나 정자 용담정까지 오르는 길은 수려한 풍광을 자랑하는 숲길이다. 포덕문으로 들어서서 최제우 동상을 지나, 수도원을 거치면 또 하나의 문인 성화문을 만난다. 여기에서부터 용담정까지 아름다운 숲길이 이어진다. 약간의 경사는 있지만 길이 잘 단장되어 있어 걷기에 불편함은 없다.

 

멀리 보이는 용담정

 

 용담정은 원래 작은 암자였는데, 최제우의 할아버지가 사들여 정자로 고쳤고, 부친은 용담정에서 제자를 가르쳤다고 전한다. 최제우는 이곳 용담정에서 한울님을 만났다고 한다. 그리고 하늘과 대화를 나누는 기이한 경험의 과정을 기록한 '포덕문'을 쓰고, 기본 이념이 시천주(侍天主)인 동학을 창시했다.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이 하늘을 모신다는 뜻인 이것을 다르게 생각하면 하늘 아래의 모든 만물은 동등한 지위를 가진다고 말할 수 있다.

 

용담정

 

용담정 위의 용추각

 

용담정에 있는 최제우 초상

 

 용담정 정자에서 멍하니 눈앞의 풍광을 바라보면서 자연스럽게 주변의 소리가 귀를 기울이면 도시에서는 멀게만 느껴졌던 바람소리,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귓속을 파고든다. 최제우가 이곳에서 하늘의 소리를 들을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용담정 주변의 풍경

 

용담정 안내도

 

 용담정을 벗어나 길을 따라 내려오면 동학수련원과 수운기념관이 있다. 아직까지는 구색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 보이나 최제우의 일생과 동학에 대해서는 알 수 있는 곳이다.

 

수운기념관 전경

 

수운기념관 내부

 

용담가 비

 

수운기념관 앞 풍경

 

 수운기념관을 나와 길을 걸어 내려와서 용담정 입구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려 타고 경주 시내로 돌아오니 오늘은 생각보다 일찍 여정을 마치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나에게 끝없이 드는 의문은 용담이란 못을 가리키는데 어디에 그 못이 있는지 아무런 설명이 없다.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인지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

 

경주12 - 북부(양동마을과 옥산서원)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경주를 숱하게 갔다왔다를 거듭하며 많은 곳을 다녔는데 오늘은 비교적 옛 신라의 유적괴는 거리가 먼 북부권을 돌아보기로 하였다. 경주 북부권은 불교와 유교문화의 전통까지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우리나라 최대 규모인 조선시대의 양반마을인 양동마을과 유학의 상실인 옥산서원 등은 빼놓을 수 없는 답사 코스이다.

 

 경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양동마을까지는 상당히 먼 길이나 너긋하게 기다렸다가 버스를 타고 양동마을로 향했다.

 

 양동(良洞)마을은 안동의 하회마을과 더불어 조선시대 양반 마을의 전형으로 ()’자 형국의 명당으로 알려진 양동마을은 경주에서 포항 쪽으로 16킬로미터 정도 가다 만나는 형산강 중류쯤에, 기름진 안강평야의 생산력을 바탕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 마을은 월성손씨(月城孫氏)와 여강이씨(驪江李氏)의 양대 문벌로 이어 내려온 동족마을로 이곳에서 회재 이언적은 외가인 월성 손씨가의 서백당(書百堂)에서 태어났다. 서백당 집터는 지관이 양동마을의 물() 자형 혈맥이 맺혀 삼현선생지지(三賢先生之地)라고 하였다는 곳이다.

 

 가장 번창했던 17세기 무렵 집이 6~7백여 채쯤 되었다던 이 마을은, 1979년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기와집 124채와 초가집 27채가 남아 있다.

 

 집들의 기본구조는 대개 경상도 지방에서 흔히 나타나는 자형이거나 튼 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간혹 대문 앞에 자형 행랑채를 둔 예도 있다. 또한, 혼합배치 양식으로 자형이나 자형도 있지만, 대체로 집의 배치나 구성은 영남지방 가옥의 일반적인 특색을 따르고 있다.

 

 마을 입구에 버스를 내리니 너무 많이 변하였다. 관광객이 많이 오는 곳이지만 너무 콘크리트로 뒤덮여 옛날 마을의 입구라는 말이 무색하다. 내가 시대에 뒤딸어진 것인지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 영 마땅하지가 않았다. 그래서 마을의 옜 풍경을 중심을 하였다.

 

 

 

 마을은 자그마한 여러 동산이 모이고 집들은 이 동산을 배경으로 펼쳐져 있어서 처음 이 마을을 찾는 일반인들이 보고 가는 것은 실제 양동마을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양동마을은 항아리처럼 입구는 좁고 뒤로 갈수록 넓어지는 모양이다. 따라서 마을 구석구석을 대충 보더라도 반나절의 여유는 있어야 한다. 일반적인 평지 마을은 대개 뒷산을 주산으로 형성되지만, 양동마을은 산지형으로 산 능선을 따라 두 가문의 종가와 후손들의 집들이 줄지어 있어 자연과 더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마을의 전체적인 모습을 보려면 안산인 성주산에 올라가 보아야 한다. 그러면 한눈에 전체적인 ()’자 모양의 마을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나뭇잎이 다 떨어진 겨울철이 좋다.

 

 

  이 같은 마을 방문에서는 다리품을 팔아야 제멋을 느낄 수 있다. 걸어서 들어오면 확연하고 자세히 보이는 경우가 많다.

 마을 초입에는 1913년에 세워진 양동초등학교가 있는데 학교를 지나면 구멍가게를 앞에 두고 마을의 전경이 서서히 모습을 나타낸다. 전면으로는 마을 한중간에 가장 크고 멋진 향단(香壇) 건물과 관가정(觀稼亭)이 보이는데 이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마을의 모습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특히 대부분의 마을이 산자락 아래에 옹기종기 모여 산다는 표현에 걸맞게 마을의 초입을 바라보고 구성되어 있는 것과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앞의 조그마한 산 위에서 보는 양동마을 전경

 

 

 

 양동마을을 거닐어보면 작은 오솔길을 많이 만나게 된다. 오솔길을 따라 숨바꼭질 하듯 숲속에 숨어 있는 집들을 찾아다니는 일도 매우 재미있는 경험이다. 양동마을은 집들마다 자신만의 담장이 있고 사대부 집들은 좀 더 멀리 거리를 이격하여 자리 잡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양동마을의 가옥과 건물들은 지형에 잘 조화돼 자연과 일체화된 경관을 이루고 있다. 이것은 지형의 경사에 기대어 집의 자리를 잡고, 집에서 바라보이는 조망점을 풍수의 원칙에 따라 조정한 결과이다. 아름답고 매력적인 자연환경과 집들이 잘 조화를 이루어 정감어린 모습으로 다가오고, 숲속의 산새소리에 젖어드는 안온한 분위기가 양동마을의 큰 특징이다.

 

마을의 오솔길

 

차가운 날씨에도 어김없이 봄은 온다 - 매화

 

서호당고택

 

경산서당

 

 

 

 양동마을을 나와 다시 버스를 기다려 타고 옥산서원으로 향한다. 이번 길에는 교통편이 좋지 않아 버스를 제법 기다려야 했다. 버스를 타고 제법 먼 길을 가니 옥산서원 입구에 정류소가 있다.

 

 옥산서원은 조선시대의 성리학자인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을 제향하고 후진을 교육하기 위해 1572(선조 5)에 설립되었으며, 1574(선조 7)'옥산(玉山)'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이 서원은 조선 후기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제외된 47개의 서원 중 하나로, 각 건물들의 건축적 의미는 크지 않지만 공간적 배치방법이 돋보인다. 옥산서원에서 북쪽으로 700m 떨어진 곳에 회재의 별장이자 서재였던 독락당(獨樂堂)이 있다.

 

 회재의 고향은 양동마을이다. 회재는 관직을 그만두고 양동에서 그리 멀지 않은 안강읍 옥산의 한 시냇가에 자리를 잡고 거주처로 안채를 짓고 개울에 면하여 사랑채 독락당(獨樂堂)과 정자 계정(溪亭)을 경영하고 자연을 벗삼으며 성리학 연구에만 전념하였다. 그런 연유로 회재가 세상을 떠난 후 독락당에서 가까운 곳에 계곡을 사이에 두고 옥산서원이 창건되었다. 옥산서원은 45대의 명당으로 이름 높다. 자옥산, 무학산, 도덕산, 화개산의 네 산이 둘러싸고 탁영대, 관어대, 영귀대, 세심대, 징심대의 다섯 개의 반석돌이 계곡을 따라 자리하며 서원을 보호한다는 이야기는 높은 수준의 학문과 사상의 깊음을 자연 또한 흠모하고 아낀다는 뜻을 지닌다. 옥산서원은 오대(五臺) 중 세심대에 위치하고 있다. 세심대에 흐르는 계곡물은 상중하 폭포로 용추를 이루며 서원 오른쪽인 북쪽에서 남쪽으로 감돌아 흘러나간다. 세심대는 용추에서 떨어지는 물로 마음을 씻고 자연을 벗삼아 학문을 구하는 곳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옥산서원은 서향을 했는데, 동, 서, 북쪽은 산으로 둘러 있고 남쪽은 트여 있다. 서원의 외삼문인 역락문(亦樂門)을 들어서면, 앞으로 작은 내가 흐르고 이곳을 건너면 2층 다락 건물인 무변루(無邊樓)에 이르게 된다.

 

 역락문과 무변루 사이의 작은 내는 계곡물을 끌어들여 흐르게 한 서원의 명당수이다. 역락문은 <논어(論語)>의 학이(學而)편에 나오는 "벗이 멀리서 찾아오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하냐.(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에서 취한 것이다.

 

 

옥산서원 입구 길 안내

 

옥산서원 소개 간판

 

유네스코 등재 한국의 서원

 

옥산서원 전경

 

옥산서원 정문 역락문

 

무변루

 

옥산서원 건물 구조 설명

 

옥산서원 현판이 걸려 있는 구인당

 

민구재

 

암수재

 

무변루

 

비각

 

이언적 신도비

 

부변루에서 보는 구인당

 

세심대

 

세심대를 건너 보는 옥산서원 전경

 

 옥산서원을 나와 세심대를 건너서 약 700m 떨어져 있는 독락당으로 향했다. 마을 길을 따라 제법 걸어가니 아직도 사람이 살고 있는 독락당이 나온다.

 

 독락당(獨樂堂)은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에 있는 회재 이언적 선생의 제사를 받드는 옥산서원 뒤편에 있는 사랑채이다. 독락당은 회재 이언적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지은 별장으로 옥산정사(玉山精舍)라고도 한다. ‘어진 선비도 세속의 일을 잊고 자신의 도를 즐긴다.’는 이름을 가진 독락당에서 그는 학문을 닦았다. 독락당은 무엇보다도 주변 경관과 잘 어우러진 공간이다. 건물 옆쪽 담장에는 좁은 나무로 살을 대어 만든 살창을 달아서 대청에서 계곡을 내다볼 수 있다. 독락당 뒤쪽의 시내에 있는 정자 또한 자연에 융합하려는 공간성을 드러내 준다고 하겠다.

 

 계정과 함께 가옥의 한 공간을 차지하는 사랑채를 독락당이라 칭하지만 특별한 구분이 없이 안채와 사랑채, 별채를 함께 독락당이라 부르기도 한다. 유달리 뾰족한 솟을대문을 지나 만나게 되는 것은 나지막한 담장이다. 안채와 사랑채를 가로지르는 담장은 부녀자의 생활공간인 안채를 분리시키고 찾아오는 이방인들을 자연스럽게 사랑채 공간으로 안내한다. 현재도 안채는 생활공간으로 출입을 금하고 있다.

 

 19641114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413호로 지정되었고, 2010년 양동마을의 일부 구성물로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은 노계 박인로의 '독락당'이라는 가사를 고등학교 시절에 익히 들었을 것이다.  노계의 가사가 바로 이 독락당을 노래한 것이다.

 

독락당 전경

 

독락당 소개 글

 

독랑당 정문

 

옥산정사, 독락당 현판

 

계정

 

독락당 현판 글

 

독락당 전경

 

 독락당을 보고 다시 옥상서원 방향으로 내려오니 올라갈 때 보지 못했던 하마비가 길가에 보인다. 옥산서원하마비였다.

 

옥산서원 하마비

 

 옥산서원과 독락당을 보고 버스를 타려고 정류장에 가니 하필 버스 배차 시간 간격이 엄청나게 긴 시간대였다. 자신의 승용차를 가져오지 않은 사람들은 불평을 하였으나 어쩔 수가 없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으니 지나가던 마을 사람이 정류장의 버스 시간표를 참조하라고 알려 주었다. 여기에 그 시간표를 보여 드리니 뒤에 오는 사람들은 참조하기를 바란다.

 

 

 

 오래 기다려 버스를 타고 경주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하니 제법 늦은 시간이었다. 경주 북부 권역은 교통편이 불편하여 제대로 계획한 대로 보지를 못하고 집으로 향했다.

 오늘 돌어보지 못한 곳은 다음에 다시 오기로 마음을 먹고 가벼운 마음으로 오늘의 여정을 마친다. 아무런 급할 것도 없는 여행이니까.

경주11 - 불국사 권역(영지, 괘릉, 구정동방형분)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저번에 불국사 일대를 다니다가 시간이 모자라서 집으로 돌아간 뒤에 다시 날을 잡아서 불국사 권역을 답사하기로 마음을 먹고 경주로 향했다. 경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는 경주 어디에든지 가는 시내버스가 있어 편리는 하지만 버스의 배차 시간이 너무 멀어서 목적지로 가는 버스를 타려면 제법 기다려야 한다.

 

 괘릉(원성왕릉)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타고 약 한 시간이 걸려서 괘릉입구에 도착했다.

 

괘릉입구 표시

 

 한가하게 제법 걸어서 괘릉에 도착했다. 괘릉은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에 있는 능으로,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라 신라 38대 원성왕릉(元聖王陵)으로 추정된다. 왕릉이 만들어지기 전에 원래는 작은 연못이 있었는데, 연못의 모습을 변경하지 않고 왕의 시체를 수면 위에 걸어 장례하였다는 속설에 따라 괘릉(掛陵)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능은 원형의 봉토분으로, 아랫부분에는 호석을 두르고 12지신상을 새겨 장식했다. 봉분의 지름은 약 23m이며 높이는 약 6m이다

 능침이 위치한 괘릉마을 주민들은 괘릉을 '능할배'라고 부르며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신다.

 

괘릉 입구 안내판

 

괘릉의 전경

 

 봉분 바로 앞에에는 4각 석상이 놓였고 그 앞으로 약 80m 떨어진 봉분 입구 좌우에는 석조상이 배치되어 있다. 문인 2점, 무인 2점, 사자상 4점, 무덤을 표시해주는 화표석(華表石) 2점으로 총 10점이다.  이 석조물들의 조각수법은 매우 당당하고 치밀하여 신라 조각품 중 가장 우수한 것으로 꼽히고 있는데, 특히 힘이 넘치는 모습의 무인석은 중앙아시아의 터번을 두르고, 오른팔을 위로 하여 주먹을 움켜지고있으며, 왼손은 철퇴를 잡고 있다. 이 무인석은 서역인의 얼굴을 하고 있어 페르시아인이라는 주장도 있어 동서교류의 측면에서 크게 중시되고 있는 자료이다. 또 원성왕릉을 지키는 네 마리의 사방을 바라보며 능을 지키는데 싱글벙글 웃고 있는 순박한 모습을 볼 수 있는 조금은 다른 모습이다.

 

무인석

 

돌사자상

 

입구 전경

 

원성왕릉

 

 원성왕릉을 나와 영지를 향하여 걸어갔다. 버스를 기다려 타고 가는 시간이나 걸어가는 시간이나 비슷하기에 편안하게 걷기로 작정하고 걸으니 금방 영지 입구에 도착한다.

 

영지 입구 표시

 

 영지(影池)는 외동읍 괘릉리에 있는 연못으로 석공 아사달과 아사녀의 슬픈 사랑의 이야기가 전설로 전해 내려오는 곳이다.

 

 751(신라 경덕왕 10) 김대성이 불국사를 지을 때 백제에서 온 석공 아사달은 불국사 다보탑을 완성하고 석가탑을 만드는 데 여념이 없었다. 남편을 그리워하던 아사녀는 서라벌로 찾아갔으나, 탑이 완성될 때까지 기다려 달라는 주지의 뜻을 받아들여 탑의 그림자가 비칠 때까지 못 가에서 기다렸다. 남편을 지척에 두고 만나지 못하던 아사녀는 문득 못 속에서 탑의 환상을 보고 아사달을 그리며 연못으로 뛰어들었고 석가탑을 완성하고 아사녀가 기다리는 영지로 찾아온 아사달 역시 아내의 죽음을 알고 그 곳에서 아내의 죽음을 알게 된 아사달은 넋 놓아 울며 근처의 큰 바위를 만지기 시작했고, 바위는 아사녀를 닮은 불상이 되어 갔다. 불상을 완성한 그는 사랑하는 부인의 뒤를 따랐다.

 이후 아사녀가 남편을 기다릴 때 탑의 그림자가 이 연못에 비추었다 하여 그림자 연못(영지)이라 하였고 그림자를 비춘 다보탑을 유영탑(有影塔), 비추지 않은 석가탑을 무영탑(無影塔)이라고 불렀다. 연못가의 소나무 숲에 그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웠다는 영사(影寺)의 영지석불좌상(影池石佛座象)이 남아 있으며 영지못 주변으로 나무데크로 조성된 수변 산책로와 구름다리가 조성되어 있다.

 

 저수지 옆은 경주 벚꽃길로 유명하며 조각공원, 어린이 놀이터, 짚라인, 설화체험관이 있다. 불국사를 방문한 후 석가탑의 전설을 따라 함께 방문하여 그들의 사랑의 아름다움을 되새겨 보기를 바란다.

 

영지의 여러 모습

 

 영지를 돌아보고 압구로 나와 영지석불좌상을 보러 갔다. 영지석불좌상(影池石佛坐像)은 괘능리에 있는 석불좌상이다. 대좌와 몸 뒷부분에 조각된 광배가 있는 불상으로 광배 일부와 머리 부분은 심하게 닳아서 형태를 알아보기 어렵다.

 건장한 신체와 허리, 부피감 있는 무릎 표현 등에서 통일신라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오른손은 손끝이 땅을 향하게 하며, 왼손은 왼쪽 무릎 위에 놓고 손바닥이 밖을 향하게 하였다. 8각형의 섬세하고 고운 연꽃대좌와 불신과 같이 하나의 돌에 새겨진 광배에는 번잡한 불꽃무늬 안에 작은 부처가 화려하게 새겨져 있어 당시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아사녀가 불국사 석가탑을 만든 아사달을 찾아와 기다리다 몸을 던져 죽은 후 아사달이 그녀를 위하여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영지석불좌상

 

 영지를 나와 입구에서 불국로타리 주변에 있는 구정동방형분을 찾아갔다. 제법 버스를 기다려 타고 불국로타리에 내리니 바로 옆에 방형분이 보인다.

 

 구정동 방형분(九政洞 方形墳)은 경주에서 불국사로 가는 길의 북쪽 구릉자락에 위치한 통일신라시대의 무덤이다. 이 방형분은 한 변의 길이가 9.5m 높이가 2m이다. 무덤의 형태는 정사각형이고 흙을 덮어 만든 봉분 아래에는 무덤을 보호하는 의미를 갖는 12지 신상이 조각된 둘레돌이 배치되어 있다. 둘레돌을 배치하는 것은 삼국시대 이후부터 내려오는 전통인데, 통일신라시대 경주지방의 왕릉에서는 12지신상을 조각한 둘레돌을 흔히 볼 수 있다. 12지신상의 조각 수법 양식으로 미루어 통일신라 말기의 최고 귀족층 무덤으로 생각된다. 신라 무덤 중 유일한 네모무덤으로, 그 계통을 알 수 없으나 고려 전기에 나타나는 둘레돌을 갖춘 네모무덤의 선구적 모습으로 평가된다. 또 이 고분은 특이하게 고분으로 들어가는 석문이 있다.

 

구정동방형분 전경

 

 고분의 석문을 보니 열려 있었다. 그래서 궁금증을 참지 못해 몸을 구부리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안에는 석실만 있고 아무 것도 없었다.

 

고분의 내부

 

 이번 경주 순례는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다. 그러나 그 나름대로 특이한 유적과 슬픈 전설이 서려 있는 곳으로 가볍게 돌아볼 수 있는 곳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이 날의 순방을 끝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