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鶴)의 오딧세이(Odyss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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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11 - 불국사 권역(영지, 괘릉, 구정동방형분)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저번에 불국사 일대를 다니다가 시간이 모자라서 집으로 돌아간 뒤에 다시 날을 잡아서 불국사 권역을 답사하기로 마음을 먹고 경주로 향했다. 경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는 경주 어디에든지 가는 시내버스가 있어 편리는 하지만 버스의 배차 시간이 너무 멀어서 목적지로 가는 버스를 타려면 제법 기다려야 한다.

 

 괘릉(원성왕릉)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타고 약 한 시간이 걸려서 괘릉입구에 도착했다.

 

괘릉입구 표시

 

 한가하게 제법 걸어서 괘릉에 도착했다. 괘릉은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에 있는 능으로,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라 신라 38대 원성왕릉(元聖王陵)으로 추정된다. 왕릉이 만들어지기 전에 원래는 작은 연못이 있었는데, 연못의 모습을 변경하지 않고 왕의 시체를 수면 위에 걸어 장례하였다는 속설에 따라 괘릉(掛陵)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능은 원형의 봉토분으로, 아랫부분에는 호석을 두르고 12지신상을 새겨 장식했다. 봉분의 지름은 약 23m이며 높이는 약 6m이다

 능침이 위치한 괘릉마을 주민들은 괘릉을 '능할배'라고 부르며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신다.

 

괘릉 입구 안내판

 

괘릉의 전경

 

 봉분 바로 앞에에는 4각 석상이 놓였고 그 앞으로 약 80m 떨어진 봉분 입구 좌우에는 석조상이 배치되어 있다. 문인 2점, 무인 2점, 사자상 4점, 무덤을 표시해주는 화표석(華表石) 2점으로 총 10점이다.  이 석조물들의 조각수법은 매우 당당하고 치밀하여 신라 조각품 중 가장 우수한 것으로 꼽히고 있는데, 특히 힘이 넘치는 모습의 무인석은 중앙아시아의 터번을 두르고, 오른팔을 위로 하여 주먹을 움켜지고있으며, 왼손은 철퇴를 잡고 있다. 이 무인석은 서역인의 얼굴을 하고 있어 페르시아인이라는 주장도 있어 동서교류의 측면에서 크게 중시되고 있는 자료이다. 또 원성왕릉을 지키는 네 마리의 사방을 바라보며 능을 지키는데 싱글벙글 웃고 있는 순박한 모습을 볼 수 있는 조금은 다른 모습이다.

 

무인석

 

돌사자상

 

입구 전경

 

원성왕릉

 

 원성왕릉을 나와 영지를 향하여 걸어갔다. 버스를 기다려 타고 가는 시간이나 걸어가는 시간이나 비슷하기에 편안하게 걷기로 작정하고 걸으니 금방 영지 입구에 도착한다.

 

영지 입구 표시

 

 영지(影池)는 외동읍 괘릉리에 있는 연못으로 석공 아사달과 아사녀의 슬픈 사랑의 이야기가 전설로 전해 내려오는 곳이다.

 

 751(신라 경덕왕 10) 김대성이 불국사를 지을 때 백제에서 온 석공 아사달은 불국사 다보탑을 완성하고 석가탑을 만드는 데 여념이 없었다. 남편을 그리워하던 아사녀는 서라벌로 찾아갔으나, 탑이 완성될 때까지 기다려 달라는 주지의 뜻을 받아들여 탑의 그림자가 비칠 때까지 못 가에서 기다렸다. 남편을 지척에 두고 만나지 못하던 아사녀는 문득 못 속에서 탑의 환상을 보고 아사달을 그리며 연못으로 뛰어들었고 석가탑을 완성하고 아사녀가 기다리는 영지로 찾아온 아사달 역시 아내의 죽음을 알고 그 곳에서 아내의 죽음을 알게 된 아사달은 넋 놓아 울며 근처의 큰 바위를 만지기 시작했고, 바위는 아사녀를 닮은 불상이 되어 갔다. 불상을 완성한 그는 사랑하는 부인의 뒤를 따랐다.

 이후 아사녀가 남편을 기다릴 때 탑의 그림자가 이 연못에 비추었다 하여 그림자 연못(영지)이라 하였고 그림자를 비춘 다보탑을 유영탑(有影塔), 비추지 않은 석가탑을 무영탑(無影塔)이라고 불렀다. 연못가의 소나무 숲에 그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웠다는 영사(影寺)의 영지석불좌상(影池石佛座象)이 남아 있으며 영지못 주변으로 나무데크로 조성된 수변 산책로와 구름다리가 조성되어 있다.

 

 저수지 옆은 경주 벚꽃길로 유명하며 조각공원, 어린이 놀이터, 짚라인, 설화체험관이 있다. 불국사를 방문한 후 석가탑의 전설을 따라 함께 방문하여 그들의 사랑의 아름다움을 되새겨 보기를 바란다.

 

영지의 여러 모습

 

 영지를 돌아보고 압구로 나와 영지석불좌상을 보러 갔다. 영지석불좌상(影池石佛坐像)은 괘능리에 있는 석불좌상이다. 대좌와 몸 뒷부분에 조각된 광배가 있는 불상으로 광배 일부와 머리 부분은 심하게 닳아서 형태를 알아보기 어렵다.

 건장한 신체와 허리, 부피감 있는 무릎 표현 등에서 통일신라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오른손은 손끝이 땅을 향하게 하며, 왼손은 왼쪽 무릎 위에 놓고 손바닥이 밖을 향하게 하였다. 8각형의 섬세하고 고운 연꽃대좌와 불신과 같이 하나의 돌에 새겨진 광배에는 번잡한 불꽃무늬 안에 작은 부처가 화려하게 새겨져 있어 당시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아사녀가 불국사 석가탑을 만든 아사달을 찾아와 기다리다 몸을 던져 죽은 후 아사달이 그녀를 위하여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영지석불좌상

 

 영지를 나와 입구에서불국로타리 주변에 있는 구정동방형분을 찾아갔다. 제법 버스를 기다려 타고 불국로타리에 내리니 바로 옆에 방형분이 보인다.

 

 구정동 방형분(九政洞 方形墳)은 경주에서 불국사로 가는 길의 북쪽 구릉자락에 위치한 통일신라시대의 무덤이다. 이 방형분은 한 변의 길이가 9.5m 높이가 2m이다. 무덤의 형태는 정사각형이고 흙을 덮어 만든 봉분 아래에는 무덤을 보호하는 의미를 갖는 12지 신상이 조각된 둘레돌이 배치되어 있다. 둘레돌을 배치하는 것은 삼국시대 이후부터 내려오는 전통인데, 통일신라시대 경주지방의 왕릉에서는 12지신상을 조각한 둘레돌을 흔히 볼 수 있다. 12지신상의 조각 수법 양식으로 미루어 통일신라 말기의 최고 귀족층 무덤으로 생각된다. 신라 무덤 중 유일한 네모무덤으로, 그 계통을 알 수 없으나 고려 전기에 나타나는 둘레돌을 갖춘 네모무덤의 선구적 모습으로 평가된다. 또 이 고분은 특이하게 고분으로 들어가는 석문이 있다.

 

구정동방형분 전경

 

 고분의 석문을 보니 열려 있었다. 그래서 궁금증을 참지 못해 몸을 구부리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안에는 석실ㄴ만 있고 아무 것도 없었다.

 

고분의 내부

 

 이번 경주 순례는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다. 그러나 그 나름대로 특이한 유적과 슬픈 전설이 서려 있는 곳으로 가볍게 돌아볼 수 있는 곳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이날의 순방을 끝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