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鶴)의 오딧세이(Odyssey)

'2025/02'에 해당되는 글 4건

  1. 경주10 - 불국사, 석굴암
  2. 경주9 - 동쪽(골굴사, 기림사)
  3. 경주8 - 동해안
  4. 경주7 - 서악 일대 1

경주10 - 불국사, 석굴암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경주를 순례한 지가 벌써 이번 순례의 10번째지만 아직 경주의 대표적인 유적지인 불국사와 석굴암을 가지 않았다. 물론 과거에는 수 차례 갔다왔지만 이번 순례에는 아직 다녀오지 않아 오늘은 불국사 일대를 목적지로 정하고 집을 나섰다. 불국사 일대는 구경하는데 시간이 많이 들 것으로 생각하고 좀 일찍 서둘러 경주에 도착하여 불국사로 향했다.

 

경주는 올 때마다 주변이 정돈되어 새롭게 보인다. 불국사 일대도 깨끗이 정비되어 시내버스를 내려 걸어서 절을 향해 가는 길이 정돈이 잘 되어 있다.

 

불국사 가는 길 주변

 

 불국사에 대한 설명은 여러 자료를 바탕으로 다소 길지만 정리해 보았다.

 

 신라의 오악(동악 토함산, 서악 계룡산, 남악 지리산, 북악 태백산, 중악 팔공산) 가운데 신라인들은 경주 토함산을 호국의 산으로 신성시 했기에, '구름을 마시고 토한다'는 토함산(吐含山, 745m)에 최고의 사찰을 짓고 싶어 했고 그 결과물이 바로 불국사와 석굴암이다. 불국사( 佛國寺)는 토함산 서쪽 중턱에 있는 통일신라 김대성의 발원으로 창건한 사찰로 알려져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이다.

 

 불국사는 751(경덕왕 10)에 김대성(金大城)의 발원으로 창건하였다고 전하나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 의하면, ‘이차돈(異次頓)이 순교한 이듬해인 528(법흥왕 15)에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迎帝夫人)과 기윤부인(己尹夫人)이 이 절을 창건하고 비구니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574(진흥왕 35)에는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부인(只召夫人)이 이 절을 중창하고 승려들을 득도하게 하였으며, 왕의 부인은 비구니가 된 뒤 이 절에 비로자나불상과 아미타불상을 봉안하였다.’고 한다. 또한, ‘670(문무왕 10)에는 이 절의 강당인 무설전(無說殿)을 짓고 신림(神琳) · 표훈(表訓) 등 의상(義湘)의 제자들을 머물게 하였다.’고 전한다.

이들 기록과 신라 불교의 역사를 통해서 볼 때 다소의 모순이 있지만, 현재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는 불상의 복장기에서 이 불상들이 ‘681(신문왕 1) 48일에 낙성되었다고 하였으므로 당시의 불국사가 대규모는 아니었지만, 대웅전과 무설전을 갖춘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불국사가 대찰이 된 것은 김대성에 의해서였다. <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현세의 부모를 위해서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절은 751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774(혜공왕 10) 12월에 그가 생애를 마칠 때까지 완공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 뒤 국가에서 완성시켰다. 원래 불국사는 경덕왕이 아버지 성덕왕을 기리기 위해 중창하였고, 석굴암도 마찬가지로 이유로 창건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아들 혜공왕이 시해당하면서 통일신라의 왕위는 순수한 진골 혈통과 단절되어 버렸다. 후에 왕위에 오른 원성왕은 성덕왕과 경덕왕의 사당까지 없애버린다. 자신과 혈통이 다른 왕들을 추모하는 절을 그대로 둘 수 없었기에, 창건자를 재상 김대성으로 만들어 소문을 내었다고 한다. 이것이 일연이 삼국유사를 저술하던 고려시대는 물론,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다는 설이다.

 

 따라서 이 절은 김대성 개인의 원찰(願刹)이라기보다는 국가의 원찰로 건립되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준공 당시 이 절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대웅전, 극락전, 비로전, 관음전, 지장전 등을 중심으로 한  5개의 지역으로 구분되어 있었으며 이 밖에도 그 위치를 알 수 없는 건물의 이름이 45종이나 나열되어 있다.

 

 김대성이 중창한 뒤 임진왜란 전까지 이 절은 9차례의 중창 및 중수를 거쳤다. 1593(선조 26) 5월 왜구가 침입하여 대웅전, 극락전, 자하문 기타 2,000여 칸이 모두 불타버렸고, 값진 보물들이 거의 불에 타거나 약탈되었다. 금동불상과 옥으로 만든 물건과 석교(石橋)와 탑만이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때 타버린 목조건물들은 20년이 지난 뒤부터 점차 복구되었다. 1920년 이전에는 일부 건물과 탑만이 퇴락한 채 남아 있었으나, 지속적인 원형복구 및 보수로 국보 7점을 간직한 오늘날 대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특별한 것은 이 절은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의 발원으로 중창되었다는 것이다. 이때의 대복원공사를 위하여  1969년에는 문화재위원(, 문화유산위원)들의 발굴조사가 진행되었고, 19702월에 공사를 착공하여 준공하였다. 당시까지 유지로만 남아 있던 무설전, 관음전, 비로전(毘盧殿), 경루, 회랑 등은 이때 복원되었고, 대웅전, 극락전, 범영루(泛影樓), 자하문 등을 새롭게 단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불국사는 신라인이 그리던 불국(佛國)인 이상적인 피안의 세계를 옮겨놓은 것이다. 불국을 향한 신라인의 염원은 세 가지 양상으로 이곳에 나타나 있다. 하나는 <법화경>에 근거한 석가모니불의 사바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무량수경(無量壽經)>에 근거한 아미타불의 극락세계이며, 또 다른 하나는 <화엄경>에 근거한 비로자나불의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이다. 이 셋은 각각 대웅전을 중심으로 하는 일곽과 극락전을 중심으로 하는 다른 일곽과 비로전으로 종합되는 전체의 구성을 통하여 그 특징적인 표현을 이루어놓았다.

 

불국사 정문(일주문)

 

 산문을 들어가면서 이제 불국토로 들어선다. 정문을 지나면 조그마한 연못이 나오는데 이 연못은 영지가 아니다. 영지는 제법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

 

작은 연못

 

천왕문의 사천왕상

 

 천왕문을 지나면 불국사가 나타난다. 불국사 본전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우리를 맞이하는 뜰에서 보는 전경이 너무 좋다. 내가 꿈에서도 그리며 보는 모습이다.

 

나무에 가린 전경

 

 불국사의 경내는 석단으로 크게 양분되어 있다. 이 석단은 그 아래와 위의 세계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석단의 위는 부처님의 나라인 불국토이고, 그 밑은 아직 거기에 이르지 못한 속세를 나타낸다. 석단의 멋은 소박하게 쌓아올린 거대한 돌의 자연미에 있고, 대척적(對蹠的)으로 병렬된 2단의 석주(石柱)에 있다. 석단은 불국세계의 높이를 상징함과 동시에 그 세계의 반석 같은 굳셈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두 모퉁이 위에는 경루(經樓)와 종루(鐘樓)를 만들어서 한없이 높은 하늘을 향하여 번져가는 묘음(妙音)의 위력을 나타내었다.

 

 이 석단에는  1962년 국보로 지정된 대웅전을 향하는 청운교(靑雲橋백운교(白雲橋)와 극락전을 향하는 연화교(蓮華橋칠보교(七寶橋)의 두 쌍의 다리가 놓여 있다. 청운교  백운교는 석가모니불의 불국세계로 통하는 자하문에 연결되어 있고, 칠보교 · 연화교는 아미타불의 불국세계로 통하는 안양문에 연결되어 있다.

 

 청운교와 백운교는 대웅전을 향하는 자하문과 연결된 다리를 말하는데, 다리 아래의 일반인의 세계와 다리 위로의 부처의 세계를 이어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전체 34계단으로 되어 있는 위로는 16단의 청운교가 있고 아래로는 18단의 백운교가 있다. 청운교(靑雲橋)를 푸른 청년의 모습으로, 백운교(白雲橋)를 흰머리 노인의 모습으로 빗대어 놓아 인생을 상징하기도 한다. 청운교에 비해 아래쪽인 백운교의 높이와 너비가 조금씩 더 커서 시각적으로 안정감과 상승감을 준다. 다리를 계단 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형태로 청운교와 백운교가 이어지는 부분은 둥근 무지개다리로 되어 있다. 다리가 있는 석축 아래쪽으로 연못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지금도 계단 왼쪽에 물이 떨어지도록 만들어 놓은 장치가 남아 있다. 이곳에서 물이 떨어지면 폭포처럼 부서지는 물보라에 의해 무지개가 떴다고 전하고 있어, 무척이나 아름다웠을 옛 불국사를 그려보게 된다.

 경덕왕 10(751)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당시 다리로는 유일하게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매우 귀중한 유물이다. 또한, 무지개모양으로 이루어진 다리 아래 부분은 우리나라 석교나 성문에서 보이는 반원아치모양의 홍예교의 시작점을 보여주고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청운교와 백운교를 오르면 자하문이 있다. 자하문이란 붉은 안개가 서린 문이라는 뜻으로 이 자하문을 통과하면 세속의 무지와 속박을 떠나서 부처님의 세계가 눈앞에 펼쳐진다는 것을 상징한다. 부처님의 몸을 자금광신(紫金光身)이라고도 하므로 불신에서 발하는 자주빛을 띤 금색 광명이 다리 위를 안개처럼 서리고 있다는 뜻에서 자하문이라 한 것으로 세간의 번뇌를 자금색 광명으로 씻고 난 뒤, 들어서게 되는 관문이다. 자하문의 좌우에는 임진왜란 후의 중건 때에 만든 동서회랑이 있었지만 1904년경에 무너졌다. 회랑의 양 끝에 역시 경루와 종루가 있었지만, 동쪽 경루는 일찍이 없어지고, 서쪽의 종루만 남아 있다가, 1973년 복원 때에 좌경루(左經樓)와 더불어 옛 모습을 찾았다.

 

청운교 백운교와 자하문

 

불국사 외부 전경

 

 범영루는 처음에 수미범종각(須彌梵鐘閣)이라고 불렀다. 수미산모양의 팔각정상에 누를 짓고 그 위에 108명이 앉을 수 있게끔 하였으며, 아래에는 오장간(五丈竿)을 세울 수 있도록 하였다. 여기에서 108이라는 숫자는 백팔번뇌를 상징하는 것으로, 많은 번뇌를 안은 중생들을 제도한다는 의미에서 108명이 앉을 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 범영루는 751(경덕왕 10)에 건립하였고 여러 번의 중건을 거쳤다. 현재의 건물은 1973년의 복원공사 때 중건된 것으로 옛 모습대로 정면 1, 측면 2칸이며 3층으로 된 아담한 누각이다. 범영루의 동편의 좌경루도 1973년의 복원공사 때 재건하였다. 경루는 경전을 보존한 곳으로 보아야 하겠지만, 원래의 구조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범영루

 

범영루 설명

 

 연화교, 칠보교(蓮華橋, 七寶橋)는 극락전으로 오르는 돌계단으로 연화교는 10단으로 디딤돌에 끝이 뾰족하고 옆으로 길게 퍼진 연꽃잎을 새겼다. 칠보교는 계단에 아무런 장식이 없으며 8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연화교와 칠보교 밑에는 완만한 곡선을 지닌 무지개다리[虹霓]가 있다. 계단의 양쪽 끝에는 4개씩 정교하게 다듬은 돌기둥을 세워 원형의 난간대를 끼웠고 난간대 하부 중앙에는 난간동자를 세워 받쳤다. 청운교 및 백운교와 비교할 때 구조는 유사하나 규모가 작으며 무지개다리의 구조도 다르다. <불국사사적(佛國寺事蹟)>에는 연화(蓮花)와 칠보(七寶) 2개의 다리로 아미타불과 보살들이 오르내리는 계단을 삼았다고 한다. 연화교와 칠보교는 아미타불이 거주하고 있는 극락이 연화와 칠보로 장식되어 있다는 불경 내용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연화교와 칠보교를 오르면 연화교와 칠보교는 751(경덕왕 10)부터 774(혜공왕 10)까지 김대성에 의해 불국사가 중창될 때 함께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1973년 불국사를 전체적으로 복원 정비할 때 없어진 난간을 복원하였다.

  연화교 칠보교를 올라 안양문을 지나면 아미타불이 있는 서방의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극락전에 이른다. 안양은 극락의 다른 이름이며, 안양문은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뜻이다. 극락전을 중심으로 하는 이 일곽도 751년에 지어졌고, 그 당시에는 회랑을 비롯하여 석등 및 많은 건물과 석조물들이 있었다고 한다. 견고한 석단 위에 목조로 세워진 극락전은 임진왜란 때 불탄 뒤 1750년에 오환(悟還) · 무숙(武淑) 등이 중창하였고, 19253월에 다시 중수하였는데 목조의 수미단은 그때 만들어진 것이다.

 최근까지 극락전 안에는 아미타불과 비로자나불의 두 불상이 안치되어 있었는데, 비로자나불은 원래 대웅전에 있던 것을 일제시기 때 중수하면서 이곳으로 옮겼던 것으로, 지금은 비로전으로 옮겼다. 극락전 안의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은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연화교 칠보교와 안양문

 

불국사 전경

 

 불국사 앞 뜰에서 불국사의 외부 전경을 완상하고 경내로 들어가면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대웅전 앞에 동서에 서 있는 두 탑이다. 사찰에서 쌍탑은 보통 모양이 똑같거나 아주 흡사해 동탑, 서탑이라 부른다. 하지만 불국사(佛國寺)에서만 두 탑 모양이 다르고 이름도 다르다. 석가탑은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하는 내용을 표현한 탑이고, 다보탑은 과거의 부처인 다보여래가 불법을 증명하는 것을 상징하는 탑이다. 다보탑은 따라서 다보여래가 머무는 환상적인 궁전인 셈이다. 다보여래는 석가여래와 한 쌍을 이루기에 다보탑은 석가탑과 한 쌍이다.

 

 불국사다보탑(佛國寺多寶塔)은 석가탑과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석탑으로, 높이도 10.4m로 같다. 절내의 대웅전과 자하문 사이의 뜰 동서쪽에 마주 보고 서 있는데, 동쪽탑이 다보탑이다. 다보탑은 특수형 탑을, 석가탑은 우리나라 일반형 석탑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이 탑과 석가탑의 관계는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견보탑품(見寶塔品)에 근거한 것으로 다보여래가 진리를 설법하는 석가모니를 찬양한 후 다보탑 안의 자리 반쪽을 비워 나란히 앉도록 했다는 것이 중심내용이다.

 

 석가탑을 보면 2단의 기단(基壇)위에 세운 3층탑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지만, 다보탑은 그 층수를 헤아리기가 어렵다. ()자 모양 평면의 기단에는 사방에 돌계단을 마련하고, 8각형의 탑신과 그 주위로는 네모난 난간을 돌렸다. 1925년경 일본인들에 의하여 전면 해체·보수되었으나 이에 관한 보고서 간행은 물론 간단한 기록조차 전하지 않으며, 탑 속에 장치된 사리를 비롯한 많은 유물에 대한 기록도 없다. 다만 당시 일인 감독자의 이름으로 금동불상 2구를 총독부에 인계한다는 내용의 인계서가 남아 있을 뿐이며, 이 불상 또한 행방을 모른다.

 

 다보탑은 석가여래의 설법을 증명하기 위해 땅속에서 솟아난 다보여래의 몸[法身]을 표현·상징하기 때문에 땅에 서 있지만 실은 공중에 떠있는 것이다. 땅에서 솟아났기에 다보탑의 구성은 상층부로부터 하층으로 원, 팔각, 사각이라는 구성으로 진행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계단 위쪽에 자리한 사자는(원래 4마리였으나 현재는 1마리만 남아 있음) 불법을 수호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부처님의 진신(眞身)이 머물러 있는 탑 기단 모서리에 사자를 넣어 사자좌 위에 탑이 서 있는 독특한 모습으로 만들어진 이러한 형식의 여러 탑의 연원은 바로 불국사다보탑에 있다.

 

 예전의 우리나라 십원짜리 동전에는 다보탑이 새겨져 있었고, 사자의 모양도 선명하게 나타나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 사자가 동전에서 사라져 버렸다.

 

다보탑의 사면

 

 다보탑의 지척에 석가탑이 있다. 불국사 삼층석탑(佛國寺 三層石塔)의 원래 이름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釋迦如來常住設法塔)이며 흔히 줄여서 석가탑(釋迦塔)이라고도 한다.  석가탑은 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탑, 무영탑이라고도 불리는데, 이것은 석가탑을 지은 백제의 석공 아사달을 찾아 신라의 서울 서라벌에 온 아사녀가 남편을 만나지도 못한 채 연못에 몸을 던져야 했던 전설에서 유래되었다. 불국사 대웅전 앞뜰에 다보탑과 나란히 서 있으며, 대한민국의 국보 제2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탑은 일반적으로 751(경덕왕 10) 김대성이 불국사를 중수할 무렵에 세워졌다고 추정하지만, 742년에 완성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이 탑은 고려 초에 일어난 지진 때문에 1024년과 1038년에 중수되었다.

 

 높이 10.75m. 신라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을 대표하는 가장 우수한 예이며,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과 상륜부가 있는데 각 부분의 체감비율이 적당하며 간결하다. 이 탑의 특이한 점은 탑 주위에 장방석을 돌려서 형성한 탑구(塔區)에 연꽃무늬를 조각한 팔방금강좌(八方金剛座)가 있는 것과 탑의 기단부를 자연석이 받치고 있는 것 등이다. 석가탑의 위대함이 다시 세상의 주목을 받은 것은 1966년 해체·수리에서 나온 사리장엄구에서였다. 도굴범에 의해 석가탑이 훼손되어 10월 전면적인 해체·수리가 이루어졌는데 이때 2층 몸돌 윗부분에서 집 모양의 사리기와 사리병 등 각종 장엄구가 발견되었다. 특히 함께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종이질이나 글씨체가 8세기 초기의 것이며, 너비가 비록 8에 지나지 않지만 길이는 무려 6m에 이르는 두루마리 경전으로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로 밝혀졌다.

 

석가탑의 사면

 

대웅전 앞의 석등

 

 대웅전(大雄殿)은 조선시대의 건축물이다. 20111230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744호로 지정되었다. 석가여래 부처님을 모시는 법당으로, 불국사 경 내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

이 대웅전 안의 중앙 정면에는 수미단(須彌壇)이 있고, 그 위에 목조석가삼존불이 안치되어 있다.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미륵보살과 갈라보살(竭羅菩薩)이 협시(脇侍)하고 있으며, 다시 그 좌우에 흙으로 빚은 가섭(迦葉)과 아난(阿難)의 두 제자상이 모셔져 있다.

 대웅전의 동·서 측면에는 익랑(翼廊)이 놓여 동·서 회랑과 연결되고 남회랑의 동측 모서리에는 좌경루(左經樓)가 있고, 서측 모서리에는 범영루(泛影樓)가 배치되어 있다. 자하문 남측에는 청운교와 백운교의 석계를 마련하여 대웅전으로 진·출입할 수 있도록 꾸몄다.

대웅전은 불국사고금창기에 의하면 조선 시대에 여러 번에 걸쳐 보수 중창되었다. 그 후 퇴락된 것을 일제 강점기인 1918년부터 1925년까지 조선총독부 주관으로 개수한 바 있으며, 그 뒤 또 다시 심하게 퇴락되어 가던 것을 1970년 대에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지시로 중창되었다.

 

지금은 대웅전을 보수 중이라 장막으로 가려 놓아 전체 건물을 볼 수 없는 아쉬움이 있다.

 

대웅전의 석가모니불

 

다보탑과 석가탑

 

목어

 

장막으로 가려진 대웅전

 

 

 

 대웅전을 돌아 뒤로 가면 여러 전각이 나타난다. 대웅전 바로 뒤에 있는 무설전은 불국사의 여러 건물 가운데 제일 먼저 만들어진 건물이다. 670(문무왕 10)에 이 건물을 짓고 문무왕은 의상과 그의 제자 오진(悟眞) 표훈 등 몇 명의 대덕(大德)에게 화엄경의 강론을 맡게 하였다. 이 건물도 임진왜란 때에 불탄 뒤 1708(숙종 34)에 중건하여 1910년 이전까지 보존되었으나, 그 뒤 허물어진 채 방치되었다가 1972년에 복원하였다.

 경론을 강술하는 장소이므로 아무런 불상도 봉안하지 않고 설법을 위한 강당으로서만 사용하였으며, 무설전이라고 이름 붙인 까닭은 진리의 본질, 불교의 오의가 말을 통하여 드러나는 것이 아님을 지적한 것이다.

 

무설전

 

 무설전 뒤의 한층 높은 언덕에 있는 관음전은 751년 김대성이 6칸으로 지었던 것을 1470에 중수하였는데, 1593년 임진왜란의 병화로 불타버렸다. 그 직후 1604년에 해청(海淸)이 중창하였고, 1694년1718년에 다시 중창하였다. 원래 이 관음전 안에는 관세음보살상이 안치되어 있었다. 이 관음상은 922년에 경명왕비가 낙지공(樂支工)에게 명하여 전단향목(栴檀香木)으로 만든 것이었다.

 

 『속전에 의하면, ‘중생사(衆生寺)의 관음상과 함께 영험력이 크다하여 매우 존숭받았다.'고 한다. 이 관음상은 1674(숙종 즉위년)1701· 1769년의 세 차례에 걸쳐 새로 금칠[改金]을 하였다. 마지막 개금기록으로 보아 18세기 중엽까지는 이 관음상이 있었음이 틀림없는데, 언제 관음상이 없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현재는 1973년의 복원 때 새로 조성한 관음입상을 봉안하고 있다.

 

관음전

 

 관음전 아래 서편에 있으며, 비로자나불을 봉안하고 있다. 이곳에 비로자나불을 모신 전각을 따로 건립한 것은 화엄경에 의한 신앙의 흐름이 불국사의 성역 안에 자리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비로전은 751년 김대성이 18칸으로 지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60년에 중수하였으나, 조선 말에 무너져서 터만 남아 있었다. 1973년의 복원공사 때에 현재의 건물을 지어서 극락전에 임시로 안치하였던 1962년 국보로 지정된 금동비로자나불좌상을 옮겨 봉안하였다.

 

비로전

 

사리탑

 

나한전

 

극락전과 안양문 설명

 

불국사 회랑

 

불교미술관

 

 이 불교미술관은 명칭이 무색하게 상업적인 목적의 건물로 기념품만을 팔고 있다. 왜 '불교미술관'이라 이름을 붙였는지가 의아스럽다.

 

범종각

 

 불국사 경내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앞 뜰로 나오니 칠보교 앞에 당간지주가 보인다. 그 외 다수의 여러 유물을 보고 경내를 벗어나 정문이 아닌 후문의 불이문을 통과하여 나왔다.

 

당간지주

 

불이문

 

 오랜만에 찾은 불국사라 여러 곳을 천천히 돌아보니 어느듯 시간이 많이 지났다. 하지만 오늘의 주된 목적지인 불국사를 마음컷 돌아다녔다는 뿌듯함이 마음속에 벅차 올랐다. 그리고 불국사에는 수 많은 유적과 유물이 있어 설명이 좀 장황하게 되었다.

 

 여기서 다시 정문쪽으로 가서 불국사와는 조금 거리가 있는 경주가 낳은 현대문학의 두 거장 박목월과 김동리의 문학관으로 발을 옯겼다.

 

 동리목월문학관(東里木月文學館)은 경주시 불국사 입구에 있는 경주 출신인 소설가 김동리와 시인 박목월의 문학 및 시론 등을 전시하는 전시관으로 경주시에서 운영하는 공립문학관이다. 그래서 동리목월문학관은 2006년에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동리관,목월관,신라를 빛낸 인물관으로 나누어 전시하고 있다.

 

동리목월문학관

 

 동리목월문학관을 나오면 불국사 일주문 주차장 옆에 석굴암으로 올라가는 버스정류장이 있다. 걸어서 산길을 오를까?하고 생각도 했으나 날도 춥고 거리도 제법 멀어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으니 한국인보다 외국인이 더 많이 보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자기 차로 석굴암을 가기 때문이었다. 한시간에 한번 움직이는 버스를 기다려서 타고 석굴암으로 올라가서 주차장에서 석굴암까지 걸어가면서 보는 동쪽은 탁 트여 가슴을 상쾌하게 했다.

 

김대성이야기의 그림판

 

석굴암 가는 길에서 보는 동해

 

 불국사에서 산등성이를 타고 약 3(포장도로 석굴로는 9) 정도 올라가면 동양 제일의 걸작으로 알려진 여래좌상의 본존불이 동해를 마주 바라보고 있는 유명한 석굴암이 있다.

고요한 모습은 석굴 전체에서 풍기는 은밀한 분위기 속에서 신비로움의 깊이를 더해 내면에 깊고 숭고한 마음을 간직한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 모든 중생들에게 자비로움이 저절로 전해지는 듯하다.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10(751)에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창건을 시작하여 혜공왕 10(774)에 완성하였으며, 건립 당시에는 석불사라고 불렀다. 토함산 중턱에 백색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인위적으로 석굴을 만들고, 내부공간에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위 벽면에 보살상 및 제자상과 역사상, 천왕상 등 총 40구의 불상을 조각했으나 지금은 38구만이 남아있다.

원형의 주실 입구에는 좌우로 8각의 돌기둥을 세우고, 주실 안에는 본존불이 중심에서 약간 뒤쪽에 안치되어 있다. 주실의 벽면에는 입구에서부터 천부상 2, 보살상 2, 나한상 10구가 채워지고, 본존불 뒷면 둥근 벽에는 석굴 안에서 가장 정교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이 서 있다. 여래좌상이 바라보는 시선은 문무왕 수중왕릉인 봉길리 앞 대왕암을 향한다.

석굴암의 배치는 법화경의 첫머리에 나오는, 석가모니가 가장 많이 설법한 인도 영취산의 풍경을 재현한 것이다. 석가모니 본존불이 가운데 있고 주변을 십대제자와 과거불들, 팔부신중 등이 둘러싸고 있다. 석굴암의 가운데에 앉아 있는 본존불은 한국 불교미술사의 석불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이때를 기점으로 이후의 석불들은 조형적인 완성도에서 오히려 점차 쇠퇴한다고 평가받는다.

원숙한 조각 기법과 사실적인 표현으로 완벽하게 형상화된 본존불, 얼굴과 온몸이 화려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 용맹스런 인왕상, 위엄있는 모습의 사천왕상, 유연하고 우아한 모습의 각종 보살상, 저마다 개성 있는 표현을 하고 있는 나한상 등 이곳에 만들어진 모든 조각품들은 동아시아 불교조각에서 최고의 걸작으로 손색이 없다.

 

 현재 석굴암은 내부 전면 공개 관람 시 항온항습 등의 문제가 우려되어 1976년부터 유리벽을 통한 외부관람을 실시하고 있다. 관람을 할 때는 실제 석굴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으며 유리 차단막이 설치된 통로 밖에서 지나가며 관람하는 것만 가능하다. 예외적으로 부처님오신 날에는 차단막 안으로 들어가 옛 신라인들이 했던 것처럼 본존불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다. 단 내부에서 사진 촬영은 금지된다. 또 석굴암은 지하수 샘물이 솟아나는 암반 위에 있는데, 이것은 석굴 내부의 냉각 기능을 하는 아주 중요한 지형이었다.

 

석굴암 외부 전경

 

 여기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석굴암 본존불은 사진을 찍지 못하게 금지해 놓았다는 것이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다. 사진을 찍지 못하는 예술품은 색이 바랠 우려가 있는 경우인데 석불이 어떤 우려가 있다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석불을 사진을 찍지 못하면 우리나라 곳곳에 있는 마애불이나 부처상, 그리고 건물도 찍지 못하는 것이 아닌지가 의심스럽다. 내가 많은 곳은 아니나 각국을 여행하면서 사진을 찍지 못하게 금지해 놓은 곳은 아주 특별한 것이 아니면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석굴암 본존불은 네이버 이미지에서 차용하였다.

 

석굴암 본존불

 

석굴암에서 보는 동해

 

석굴암의 석물들 - 어디에 쓰인 것인지도 모른다.

 

 석굴암을 내려오니 시간이 많이 지났다. 원래 계획으로는 다른 여러 곳을 가는 것이었는데 불국사에서 많은 시간을 관람하는데 사용해서 원래의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나 조금도 걱정은 되지 않는다. 시간에 구애되지 않고 다음에 다시 와서 오늘 가보지 못한 곳을 가면 되는 것이다. 

 

 불국사와 석굴암을 돌아본 것만으로도 뿌듯하게 마음의 풍요로움을 느끼며 집으로 향했다.

 

경주9 - 동쪽(골굴사, 기림사)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겨울의 매서운 추위가 한동안 기승을 부려 경주 순례를 멈추었다가 날씨가 풀려 다시 경주로 향했다. 이번 길에는 동쪽을 돌아 보기로 작정하고 경주시외버스터미널 앞에서 골굴사를 가는 버스를 기다리니 배차 간격이 길어 제법 기다려야 했다. 기다렸다가 버스를 타고 약 한 시간이 걸려 골굴사입구에 도착했다. 경주의 동쪽은 아직은 답사하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골굴사 가는 길 표시

 

 버스에서 내려 제법 먼 길을 걸어가면 골굴사 입구가 나온다. 예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변한 것을 보고 세월의 무상함도 느끼고 '나도 이제 나이가 많이 들었구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골굴사 입구 표시

 

골굴사 입구에서 산문을 향해 가는 길에는 골굴사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선무도의 형상이 늘어서 있다.

 

골굴사 산문의 선무도 형상

 

 골굴사는 함월산에 위치한 선무도(禪武道)의 총본산으로 한국의 소림사라는 별명이 붙어 있는 사찰이다. 1,500여 년 전 인도에서 온 광유 선인 일행이 함월산에 정착하면서 골굴사와 기림사를 창건하였는데, 골굴사는 광유스님 일행이 인도를 본떠 석굴사원 형태로 조성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석굴사원이다.

조선 중기 겸재 정선의 <골굴 석굴도>로 볼 때 골굴사는 여러 석굴들 앞에 목조 전실을 만들고 여기에 기와를 얹은 형태였다. 조선 중후기에 화재로 소실된 상태로 방치되었다가 지금으로부터 약 70여 년 전 경주에 사는 박씨 일가가 상주하면서 다시 사찰로 만들었고, 1989년에 한 개인에게 매매되어 넘어간 상태였던 것을 당시 기림사 주지였던 설적운 스님이 매입해서 지금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본사 불국사의 말사로 등록되었다.

 근래에 이르러 골굴사에는 불가의 전통 수행법인 선무도 수련원이 개설되어 내국인은 물론 수많은 외국인들이 전통의 불교무예를 배우는 도량으로 자리 잡았다.

 

범종루

 

 

 산문을 통과하여 임도길을 따라가는 길 중간에 포대화상과 개 동상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골굴사의 마스코트인 ‘동아보살’ 상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외국에도 소개되었던 골굴사의 마스코트다. 동아보살이 처음 TV에 등장했던 건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프로그램이었다. 새벽 4시만 되면 일어나 법당에서 방석을 차지하고 앉아 새벽예불을 드리는 개로 소개되어 화제가 되었다. 지금은 생이 다해 이 땅에 없지만 골굴사 주지 설적운이 동아보살상 옆에 쓴 글을 보면 뭉클해온다.

 

 ‘동아보살

강아지 때부터 새벽예불을 대중들과 함께했으며

모든 행이 예사롭지 않았으며 여느 개 답지 않게

살생을 하지 않았다. 만년에 치매와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하였으나 죽는 날 아침까지 새벽예불에 참석했다.

매년 음력 215일을 동아의 기제사일로 정했다.

모든 불자들은 그를 동아보살이라 불렀다.

 

'동아보살' 상

 

여러 전각들

 

 길을 따라 올라가면 거의 맨 위에 마애불이 보인다. 멀리서 보는 마애불은 암벽위에 우둑 서 있다.

 

 함월산 기슭의 골굴암에는 수십 미터 높이의 거대한 응회암에 12개의 석굴이 나있으며, 암벽 제일 높은 곳에는 돋을새김으로 새긴 마애불상이 있다. 9세기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골굴사 마애여래좌상은 응회암 재질의 암벽에 조성된 불상으로 골굴사의 주불이라 할 수 있다. 동해를 바라보게 조성된 이 불상은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상호에 화려한 연꽃과 불꽃이 조화를 이룬 광배가 바라보는 사람들 마음까지 편안하게 한다. 굴과 굴로 통하는 길은 바위에 파놓은 가파른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정상에 새겨진 마애불로 오르려면 자연 동굴을 지나게 되어 있다. 절벽 꼭대기에 새겨진 높이 4m, 2.2m 정도의 보물로 지정된 마애불상은 모래기가 많이 섞인 화강암에 새긴 터라 보존상태가 썩 좋지 않고 오랜 풍화 작용에 의해 훼손이 심해 유리 지붕을 씌어 놓았다. 마애여래좌상은 문무대왕의 수중릉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골굴사에 석굴사원이 조성되고 지금은 불교 고유의 무술인 선무도가 전승되는 도량으로 자리 잡는 데에 있어 같은 축선 상에 놓인 감은사와 대왕릉은 서로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닌가 추측하게 된다. 이 중심으로 주변에 관음굴, 지장굴, 약사굴, 나한굴, 신중단, 칠성단, 산신당 등의 굴법당과 더불어 남근바위, 여궁 등의 민간 전례신앙의 흔적까지 있어 한국적인 석굴사원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마애불 설명판

 

마애불로 올라가는 계단

 

멀리 보이는 마애불

 

마애불 올라가는 도중의 모습

 

마애불

 

마애불에서 보는 동쪽

 

골굴암 전경

 

 마애불을 내려와 조금 올라가면 휴식을 할 수 있게 만들어진 공간이 있고 여기에 오륜탐이 세워져 있다. 여기서 잠시 앉아 쉬다가 골굴암을 내려 왔다.

 

오륜탑

 

 골굴사는 일반적으로 선무도(禪武道)로 알려져 있는 불교 무술 금강영관의 본원이 있는 절이기도 하다. 매일 오후 3시에 대적광전(돌계단을 올라가다 보면 표지판이 보이는 '큰법당')에서 무술 시범을 하는데 흔히 아는 소림사의 공연과 비슷한 느낌이다.

 

매일 공연이 벌어지는 대적광전

 

 골굴사를 돌아보고 내려와서 약 3km 떨어진 기림사로 간다. 기림사는 내가 유별하게 좋아하는 사찰이라 여러 번 왔기에 새로울 것이 없지만 항상 정감이 가는 절이다. 사람들마다 느끼는 것이 다르겠지만 나는 네 계절 중에서 기림사의 여름이 제일 좋다. 봄의 기림사도 단풍이 든 가을의 기림사도 고즈녁한 겨울의 기림사도 좋지만 수국이 만발하는 무렵의 기림사는 온갖 꽃들이 피어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 당긴다. 그래서 기림사의 사진은 예전에 찍어 놓은여름과 가을의 사진을 원용하였다.

 

기림사 입구의 돌다리

 

기림사는 27대 선덕여왕 때인 643년 창건되었다고 전하며, 당시 이름은 임정사였는데 원효대사가 와서 기림사로 바꾸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31대 본산의 하나로 불국사를 비롯해 60여 개의 말사를 거느린 거대한 사찰이었다.

 

지금은 불국사의 말사가 되었지만, 비로자나 삼신불이 봉안된 대적광전(보물제 833)과 약사전, 오백나한을 모신 응진전, 임진왜란 당시 승군들의 지휘본부로 사용된 진남루 등 귀한 유산을 품고 있다.

 

대적광전은 기림사의 본전이다. 보물 415호인 대적광전은 조선 초기 불상의 전형을 갖추고 있는 삼존불을 모시고 있다. 대적광전과 진남루 사이 서쪽에 오백나한전이 있고, 그 바로 앞에 높이 3m쯤 되는 아담한 3층 석탑이 있다. 배흘림 양식으로 세워진 탑은 처마 끝은 살짝 들리어 가뿐한 느낌을 주고, 위로 갈수록 줄어들면서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대적광전을 마주보고 좌측계단에 오르면 삼천불전이 있다. 삼천 개의 하얀 불상이 본존불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데 한 눈에 들어오기 힘들만큼 웅장하다.(경주문화관광에서 가져 옴)

 

기림사 입구의안내판

 

기림사 일주문

 

 

기림사 오종수 이야기 설명

 

매월당 영당

 

기림사 표시

 

진남루

 

대웅전 앞의 소나무와 삼층석탑

 

대적광전의 전경과 현판

 

대적광전의 처마와 문 창살의 기하학적 무늬

 

삼천불전

 

삼천불전 주변의 여러 모습

 

유물관 앞의 돌절구

 

1920년대의 기림사 전경

 

 기림사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으나번잡한 산사는 아니디. 그러니 세사의 번잡함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고 싶으면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기 좋은 곳이다. 수 많은 볼거리 가운데 나의 마음에 다가온 것은 돌절구였다. 돌절구에 새겨져 있는 세월의 흔적이 보이기도 하고 비바람의 풍상에 절은 모습이 마음을 아프게도 하였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뛰어 넘은 돌절구 자체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은 무어라 말할 수 없었다.

 

 기림사를 돌아보고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길은 먼길이었으나 천천히 걸어가면서 나를 돌이켜 보는 시간을 가졌다. 버스정류장에서 제법 기다려 경주 시내 버스를 타고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하니 하루가 지났다. 경주 동쪽은 아직 거리도 멀고 교통이 그렇게 편하지 않음을 다시 생각하게 했다.

 

경주8 - 동해안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경주를 탐방하는 사람들이 놓치기 쉬운 곳이 경주의 동해안이다. 요즈음은 대중교통수단이 발달하여 비교적 쉬워졌지만 아직도 먼길이라 쉽게 다가가지 못한다. 하지만 동해안은 시내 일대에서 보기 어려운 여러 가지가 있으니 경주를 탐방하는 분들은 꼭 동해안을 가 보시기를 둘러 보시기를 바란다.

 

 동해안은 제법 길이 멀기에 하루에 돌아보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내가 해파랑길을 걸을 때 경주 일대의 동해안을 걸으면서 보았던 것을 기본으로 기록한다.

 

 경주의 문화적 유적이 아니고 자연의 특이한 풍경을 구경하는 첫째가 주상절리다. 우리나라 여러 곳에 주상절리가 많지만 경주의 주상절리는 솟아 오른 것도 있지만 누워 있는 것이 특징이다.

 

 주상절리(Columnar joints, 柱狀節理)는 기둥모양의 절리(節理, joint)라는 뜻으로, 절리는 지형 용어로 암석에 생기는 갈라진 틈 또는 결을 의미한다. 주로 화산 지대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화산암인 현무암에서 주상 절리가 많이 나타난다. 마그마가 흘러나와 급격히 식을 때에는 부피가 수축하여 사이사이에 틈이 생기게 되는데, 오랜 시간 동안 풍화 작용을 받게 되면 굵은 틈이 나타난다. 이것이 바로 절리인데, 주상 절리는 단면의 모양이 4~6각형의 긴 기둥 모양을 이루는 절리를 말한다. 보통 단면의 크기는 수 센티미터에서 수 미터에 이르기도 하며, 기둥의 길이는 수 미터에서 긴 것은 수십·수백 미터에 이르기도 한다. 주상절리는 보통 육각형의 단면을 가지는 돌기둥들이 규칙적으로 붙어서 연속적으로 나타나, 그 독특한 형상으로 인해 관광지로 개발된 곳이 많다.

  제주도 중문해안에는 기둥 모양의 주상 절리가 절벽을 이루고 있으며, 정방폭포와 천지연 폭포가 주상 절리에 해당 한다. 광주 무등산의 입석대와 서석대를 이루는 주상절리는 둘레가 7m, 길이가 약 10m가 되는 큰 규모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경기도 연천의 재인폭포, 임진강 주상절리, 강원도 철원의 직탕폭포, 경북 포항 달전리 주상절리, 경주 읍천리 해안가 와상절리 등 여러 곳이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국가지질공원 및 각종 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으며,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북한에 있는 총석정도 유명한 주상절리에 해당하는데 가 볼 수가 없으니 안타깝다.

  한편 주상절리와는 달리 쪼개지는 절리의 방향이 수평으로 넓게 나타나는 절리를 판상(板狀)절리라 한다.

 

 경주 양남 주상절리군(慶州 陽南 柱狀節理群)은 경주시 양남면 읍천항과 하서항 사이의 해안을 따라 약 1.5km에 이르는 2012925일에 천연기념물 제536호로 지정된 주상절리이다. 신생대 제3기의 에오세(5400만 년 전)에서 마이오세(460만 년 전) 사이에 경주와 울산 해안지역 일대의 활발했던 화산활동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이곳의 주상절리는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거나 수평 방향으로 발달해 있으며, 부채꼴(방사형)로 퍼져나간 것도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렇게 형태가 다양한 것은 마그마가 지표면 위로 분출하지 못하고 지각 얕은 곳으로 스며들어간 상태에서 냉각과정을 거쳤기 때문인 것으로 본다. 수평, 수직, 경사, 방사 형태 등 모든 방향의 주상절리가 대규모로 모여 있고, 흔히 볼 수 없는 부채꼴 주상절리가 발달해 있다는 점에서 희소성이 있다.

  이곳 해변에는 10m가 넘는 정교한 돌기둥들이 1.7에 걸쳐 분포해 있으며, 주름치마, 부채꼴, 꽃봉오리 등 다양한 형태의 주상절리가 존재한다. 그리고 몽돌길, 야생화길, 등대길, 데크길 등 해안 환경을 고려한 테마로 1.7에 걸쳐 주상절리 전 구간을 산책할 수 있는 파도소리길이 조성되어 있다.

 

주상절리의 여러 모습

 

멀리 보이는 양남면 주상절리 전망대

 

여러 형태의 주상절리

 

양남면 주상절리 전망대

 

 양남녕 주상절리 전망대에 올라가서 보는 주상절리는 실제로 아래에서 보는 것보다 못하다. 더구나 2층의 테라스는 바람이 조금 불어도 개방을 하지 않으니 무용지물이다, 내려와서 전망대 주변에서 보는 주상절리가 더 깨끗하고 아름답게 보인다. 예전에 이 전망대가 없을 때도 주상절리를 잘 보았는데 별 쓸모도 없는 전망대를 만들어 놓은 것 같은 기분이다. 전망대를 만드는데 들어간 예산도 많을 것이고 지금 유지하는 경비도 적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니 전형적인 행정의 오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월성원자력발전소의 도움으로 건립되었다 하지만......

 

여러 형태의 주상절리

 

 양남면 주상절리지대를 지나 바닷가를 따라가면 문무대왕릉이 나온다.

 

 경주 문무대왕릉(慶州 文武大王陵)은 경상북도 경주시 문무대왕면 봉길리 봉길해수욕장 맞은 편 동해 바다에 있는 작은 바위섬으로 사적 제158호로 대왕암(大王岩)이라고도 한다. 삼국통일을 이룬 문무왕(文武王)은 국가의 안위를 위해 죽어서도 국가를 지킬 뜻을 가졌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7 문무왕 편에 의하면 ‘71일에 왕이 돌아가시므로 문무라 시호하였는데 그 유언에 따라 동해구의 대석상에 장사하였다. 속전에는 왕이 용으로 화하였다하여 그 돌을 가리켜 대왕석이라고 하였다.’(김종권역)고 전한다.

 육지에서 불과 200여 미터 떨어진 가까운 곳에 있는 대왕암은 큰 바위가 주변을 둘러싸고 있고, 중앙에 약간의 넓은 공간이 있는데, 이 공간에 대석을 이동하여 배치한 것으로 여겨진다. 중앙의 대왕암 주변 네 방향으로 자연적으로 물길이 나 있는 상태이나 약간의 인공을 가하여 튀어나온 부분을 떼어내어 물길이 난 가운데 공간을 약간 가다듬은 흔적이 발견되었다.

 대석의 안치 방법과 유골의 수장 여부에 대한 의문점을 풀기 위해 20013월 한 방송사에서 역사연구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 초음파 탐지기 등을 이용하여 바위의 조직과 바위의 내부 및 수면 아래를 조사한 결과 유골이나 부장품이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하였다.

 대왕암이 1967년에 '발견'했다고도 알려져 있지만, 이미 일제강점기인 1939년에 고유섭이 발표한 <경주기행의 일절>에서도 '모름지기 경주에 가거든 동해의 대왕암을 찾아 문무왕의 정신을 기려 보라'고 할 정도로, 이미 대왕암이 문무왕의 유적이란 건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결론적으로 대왕암은 문무왕의 유골함이나 부장품은 없지만, 문무왕을 기리는 추모 공간이자 사적으로서 '해중왕릉'의 의미는 여전히 충분하다.

 

 문무대왕릉 부근은 그냥 평범한 바닷가다. 이 부근을 유적지로 개발하여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예를 들면 문무대왕릉 주변을 도는 유람선 같은 것을 정기적으로 취항하면 어떨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문무대왕릉 주변과 안내판

 

  여기서 감은사지로 발길을 돌려 걸으면 제법 큰 하천이 나오는데 이름이 대종천이다. 그리고 그 하천을 건너는 다리 이름이 대종교이다. 왜구가 침입하여 큰 종을 약탈해 가다가 이 하천에 종을 빠뜨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대종천

 

이정표

 

 대종천을 거슬러 올라가면 오른쪽으로 조금 높은 땅에 두개의 석탑이 보인다. 감은사지 석탑이다.

 

 경주 감은사지(慶州 感恩寺址)는 신라를 통일하고 동해 바다의 용이 된 문무왕을 위하여 만들었다는 설화가 전해지는 감은사 절터로 사적 제31호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이곳은 동해에서 서라벌로 들어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 길을 통해 왜구의 침입이 잦아지자 부처님의 힘으로 물리치기 위하여 문무왕이 감은사를 짓기 시작하였으나 끝내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신문왕이 그 뜻을 이어 682년에 절을 완공하여 감은사라 이름하였다. 이는 불심을 통한 호국이라는 부왕의 뜻을 이어받는 한편 부왕의 명복을 비는 효심의 발로였던 것이다. 절터는 동해에 이르기 직전의 산기슭에 있는데, 거기에는 큰 3층 석탑 2기가 동남으로 흐르는 대종천(大鐘川)을 앞에 두고 서 있다. 감은사지 삼층석탑은 통일시기 신라인의 기상을 나타내는 큰 탑으로, 이후 만들어지는 신라 삼층석탑의 원형이 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멀리서부터 잘 보이는 두 개의 삼층석탑은 금당 앞으로 동과 서에 하나씩 놓여 있다.

 

 두 개의 탑보다 이야기로 남아 오랫동안 기억되는 것은 금당 자리의 석축이다. 금당 아래 석축 사이로 제법 큰 공간이 비어 있음을 볼 수 있는데, 동해 바다의 물이 드나드는 길로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이 오가던 길이라고 한다. 문무왕이 죽어서 묻혔다는 수중 능도 가까이 있어 그 이야기가 정말일까 고개를 끄떡이게 한다. 곳곳에 놓인 석재에는 보통 절에서 사용하지 않는 문양인 태극무늬가 새겨져 있어 이색적이다.

 또한 중문의 남쪽으로 정교하게 쌓은 석축이 있으며, 이 석축의 바깥으로는 현재 못이 하나 남아 있다. 이를 용담이라 부르는데, 통일신라 당시 감은사가 대종천변에 세워졌고 또 동해의 용이 드나들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이 못이 대종천과 연결되어 있고 또 금당의 마루 밑 공간과도 연결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감은사지 석탑의 여러 모습

 

 경주 동해안의 자연과 문화유적은 과거 해파랑길을 걸으며 찍어두었던 사진을 추려서 편집하엿다. 해파랑길 소개에는 더 많은 사진이 있으니 나의 블로그 해파랑길 10코스와 11코스를 참조하시기를 바란다.

경주7 - 서악 일대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서남산을 다녀온 뒤에 우리 명절 설날이 다가와서 잠시 경주 순례를 멈추었다가, 설날이 지나고 다시 경주로 향했다. 경주라는 곳은 보면 볼수록 무궁무진하게 즐길 곳이 많다. 몇 년을 다녀도 경주를 다 볼 수는 없기에 내가 보고 싶은 곳을 중심으로 경주를 다녀보기로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서악 일대를 중심으로 돌아보기로 하고 집을 나섰다. 시외버스터미널에 가니 내가 도착해서 가장 가까운 버스는 만차가 되어 다음 차를 타고 경주로 갔다. 처음부터  계획하는 것과 시간의 차이가 생겼다. 하지만 바쁠 것이 없기에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돌아볼 생각이었다.

 

경주시외버스터미널 옆에 있는 읍성 안내판

 

 경주시외버스정류장에서 내려 먼저 김유신장군묘를 찾아가기로 하고 형산강을 가로지르는 서천교를 건너 길을 걸어갔다. 제법 거리가 멀었지만 교통 정보를 보니 버스를 타고 가는 시간이나 걸어가는 시간이나 비슷하기에 나의 특기를 살려서 걸기로 하엿다. 그런데 이날 따라 기온이 급강하하였고 바람도 세차게 불어 걷기는 상당히 어려웠으나 걷기에는 어느 정도 익숙하기에 무리가 되지는 않앗다.

 

서천교

 

서천교에서 보는 형산강

 

김유신장군(흥무대왕)묘 입구

 

 김유신장군묘 입구에서 묘까지는 상당한 거리를 걸어야 한다. 호젓하게 오솔길을 걸어가니 장군의 묘역이 나온다. 장군의 묘역은 신라의 여러 왕보다도 더 크고 더 장식이 잘 되어 있어 장군의 위용을 알 수가 있다.

 

 김유신묘(金庾信墓)는 경주시 충효동에 있는 옥녀봉 동쪽 능선 한가운데에 위치한 고분으로, 신라의 장군이자 재상이었던 김유신의 무덤으로 전하고 있다. 1963년 사적 제21호로 지정되었다.

 신라에 투항한 금관가야 왕족의 후손인 김유신은 김춘추(후의 태종무열왕)와 혈연 관계를 맺어 정치적 발판을 마련하고,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대로 멸망시키고 당()의 침략을 막아 당대 신라의 중요한 공신이 되었다. 그가 죽었을 때 문무왕이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르고 그의 공덕을 기리는 비를 세웠으며, 흥덕왕(興德王)은 그를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받들었다.

 

 무덤은 신라의 역대 왕릉 가운데 가장 넓은 부지를 차지하고 있다. 직경 15.8m에 높이는 5.6m이고, 묘제는 횡혈식 석실분에 해당한다. 봉분 자락에는 면석과 탱석(각각 24개씩)을 사용한 호석 구조를 하고 회랑에는 박석을 깔았다. 탱석에는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부조되어 8세기 후반에서 9세기 전반에 이르는 기간 동안 조영된 전형적인 신라 왕릉의 형식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서남쪽에는 조선 숙종 36년에 당시의 경주부윤이었던 남지훈이 세운 '신라태대각간김유신묘(新羅太大角干金庾信墓)'라고 새긴 묘표가 있다.

 

  흥덕왕 때 김유신을 흥무대왕으로 높여 부르면서 둘레돌과 십이지신상을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통설과는 달리 이 무덤이 실제 김유신의 무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주장은 사학자 이병도가 최초로 ()김유신묘고()(1968)를 발표하여, 세간에 김유신의 묘라고 알려진 바와는 달리 이 무덤은 사실 신라 신무왕(神武王)의 무덤이며, 태종무열왕릉 옆의 전()김인문묘(속칭 각간묘角干墓)가 진정한 김유신의 무덤이라고 주장하였지만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김유신묘라고 인정한다.

 

묘지 입구의 안내 표시

 

묘지 입구의 신도비각

 

묘지 입구

 

묘지 올라 가는 길

 

김유신장군묘

 

흥무왕릉비

 

태대각간김유신묘비

 

십이지신상 중 말과 쥐

 

 

 옛날의 기록에는 이 묘역을 관리하는 금산재가 있었다고 하였는데 사라져서 새로 금산재를 지어 이 묘역을 관리한다고 하였으나 금산재는 문을 굳게 닫아 놓아 안으로 들어가 볼 수가 없었다.

 

금산재의 여러 모습

 

 김유신장군묘역을 벗어나 형산강을 따라 걸어 금장대를 찾아갔다. 영하의 날씨에 강바람이 세차게 불어 얼굴을 때려 걷기가 편하지 않았으나 버스도 다니지 않기에 무작정 걸으며 겨울 형산강의 풍경을 즐겼다. 강의 둔치에는 요즈음 성행하고 있는 파크 골프장이 잘 조성되어 있었다.

 

 

 형산강(兄山江)은 동해로 흐르는 강 중 가장 긴 강으로, 현재까지 발원지가 어디인지의 논란이 많으나 환경부에서 발간한 한국하천일람에서 공인한 형산강의 최장 발원지는 '경주시 서면 도리, 인내산'이다. 평야는 형산강평야(兄山江平野)라고 부르며, 현재는 동해선과 국도 제7호선이 강을 따라 위치하고 있어 교통은 편리하다. 신라 시대에는 수도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하천 중의 하나였다. 강 주변에는 신라 때의 고분군이나 유적들이 많아, 경주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형산이라는 이름은 경주시와 포항시의 접경에서 제산(弟山)과 마주하고 있는 형산(兄山)에서 유래됐다. 옛날 포항과 경주 사이에 형제산이 있었다. 형제산은 형산과 제산으로 갈라지고, 그 사이로 강이 흐르게 되었는데, 그 강을 형산강이라고 하였다는 민간에 전하는 설이 있다.

 

장군교의 모습

 

형산강의 여러 모습

 

금장대 가는 길의 김동리의 '무녀도' 소개 글

 

 경주에는 세 가지 진귀한 보물과 여덟 가지 기이한 현상을 뜻하는 삼기팔괴에 대한 이야기가 전한다. 이 중 금장대는 금장낙안(金丈落雁)이라고 하여 경주의 서천과 북천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금장대에서 바라본 아름다운 풍경 때문에 기러기도 쉬어간다는 이야기로 알려졌다.그만큼 금장대는 빼어난 경치와 조망을 자랑한다.

2010년 이 이야기의 위치로 유력한 곳을 발굴 조사한 결과 건물터와 다량의 기와, 공양석상, 철판 등의 유물이 나왔고 이후 2012년 복원을 완료하여 대중에 공개하였다. 발굴된 유물로는 언제 지어졌는지를 정확히 가늠할 수 없지만 대략 8~9세기 경에 지어진 건물로 예상하고 있다.

 

금장대는 김동리의 소설 '무녀도'의 무대가 된곳으로 위에서 보는 것과 같이 '무녀도' 입간판이 서 있다.

 

금장대와 금장대에서 보는 풍경

 

 금장대 바로 밑에는 우리가 잘 알지 못하지만 고고학적으로는 중요한 '석장동 암각화'가 있다. 지금은 거의 다 마모되어 쉽게 식별하기는 어렵지만, 전문가ㄷ들의 연구에 의하면 경주석장동암각화(慶州錫杖洞岩刻畵)는 초기철기시대에 속하는 바위그림 유적으로 금장대(金丈臺) 수직 암면 8부 능선쯤에 서천을 향하여 만들어져 있다. 이 바위그림은 1994년 동국대 경주캠퍼스 고고미술사학과 학술조사팀이 발견하였다. 이곳에서는 가로, 세로가 9.0×1.7m 크기의 남변 긴 바위면에 검파형(劍把形) 바위그림 8점을 비롯하여 돌검(石劍), 돌화살촉(石鏃), 돌창(石槍)의 요소를 갖춘 그림 11, 사람 발자국 4, 여자 성기 3, () 1, 그 외 동물상과 동물 발자국, 기타 해석이 곤란한 기하학문 바위그림이 있다. 이와 비슷한 유적으로는 영일 칠포리 유적이 있으며, 사람 발자국 그림은 안동 수곡리(水谷里) 한들 마을의 신선바위에도 1점 있다.

 

 이 암각화가 더 이상 마모되지 않게 보존을 하였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경주 삭장동 암각화

 

금장대 습지공원

 

 금장대를 나와 무열왕릉을 찾아가는 길은 너무 멀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활 수도 없기에 지도를 보니 약 한 시간을 걸으면 갈 수잇는 거리라 걸어가기로 하였다. 우리나라를 전부 걸어다니고 있는 나이기에 걷는 것은 크게 무리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약 한 시간을 걸어 서악지구에 도착하니 멀리 산등성이에 고분들이 보인다.

 

멀리 보이는 고분군

 

서악지구 안내판

 

 서악지구에 도착하여 길을 따라 먼저 서악서원으로 갔다. 서악서원(西岳書院)은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서원으로 조선 명종(明宗) 16(1561) 당시의 경주부윤(慶州府尹) 이정(李楨)이 김유신(金庾信)을 기리기 위해 선도산 아래에 처음 세웠다. 이정은 이퇴계의 의견을 따라 선도산 아래에 서악정사를 세워 김유신의 제사 및 교육을 위한 장소로 삼게 되었다. 이것이 서악정사(西岳精舍)이다. 이후 경주 유생들에 의해 홍유후 설총(薛聰)과 문창후 최치원(崔致遠)의 위패(位牌)도 합사하자는 건의가 들어오자, 이정은 다시 이퇴계와 의논하여 두 사람도 함께 모시게 되었고, 이퇴계가 '서악정사'라는 친필 현판을 써주었다고 한다.

인조 1(1623) 경주의 유학자였던 진사(進士) 최동언(崔東彥) 등이 부윤 여우길(呂祐吉)을 통해 조정에 사액(賜額)을 청하였고, 조정에서는 서악서원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폐쇄되지 않고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로 경주에서 옥산서원(玉山書院)과 함께 단 두 곳만이 존속했을 만큼 유서 깊은 서원이다.

 

서악서원의 여러 모습

 

서악서원 앞의 선도산 유적안내도

 

 서악서원을 나와 무열왕릉으로 갔다. 경주시 서악동 구릉의 동사면에 종렬한 5기의 대형 원분 가운데 가장 아래쪽에 위치한 무열왕릉(武烈王陵)196312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신라 최초의 진골 출신인 무열왕릉의 외형은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밑지름 36.3 m, 높이 8.7m이다. 밑둘레를 따라 비교적 큰 자연석을 사용하여 무덤의 보호석으로 드문드문 놓았으며, 능 앞에는 혼유석(魂遊石)이 있다. 경내의 비각에는 국보 제25호로 지정된 태종무열왕릉비의 귀부와 이수만이 남아있는데, 이수에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 새겨져 있어 흥덕왕릉과 함께 신라 왕릉 가운데 매장된 왕이 명확한 유이한 능이다. 발굴조사는 하지 않았으나, 형태는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으로 추정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다른 무덤에 비해 봉분장식이 소박한 편이다.

 

무열왕릉 입구에 있는 무열왕과 문명왕후의 이야기 판

 

무열왕릉 입구

 

 무열왕릉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바로 보이는 전각이 태종무열왕릉비(太宗武烈王陵碑)가 있는 전각이다. 무열왕릉에 있는 신라 중기(7세기)에 건립된 신라 태종무열왕의 능비(陵碑)19621220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25호로 지정되었다.

 귀부(龜趺)의 길이 약 3.33미터, 2.54미터, 이수(螭首)의 높이 약 1.1미터이다. 비신(碑身)은 현재 없고 귀부와 이수만이 남아 있는데 화강석으로 되었으며, 귀부는 장방형의 기석(基石) 위에 얹혀 있다. 이수는 6()이 서로 능을 향해 구부리고 있는 모습으로 윤곽을 이루는데, 웅장한 구 자세는 당시 석조 예술의 뛰어난 솜씨를 잘 보여준다.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 의하면 이 비는 무열왕이 승하한 661년에 건립되었으며, 이수 중앙에는 김인문(金仁問)의 글씨로 전하는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는 글이 전서(篆書)로 양각되어 있으나 정확한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태종무열왕릉비

 

태종무열왕릉

 

 무열왕른 바로 뒤에 서악동 고분군이 있다. 서악동 고분군(西岳洞 古墳群)은 경주시 서악동 무열왕릉 바로 뒷편의 구릉에 분포하는 4개의 대형 무덤을 가리키며, 1964829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이 고분들은 경주분지의 대형 고분과 비슷한 형태로 둥글게 흙을 쌓아 올린 원형봉토 고분이다. 아직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내부구조를 알 수는 없으나, 봉분이 거대한 점, 자연돌을 이용해 둘레돌을 두른 점 및 무열왕릉보다 높은 곳에 있는 점, 고분들이 일렬을 이루며 능선의 상위에서 하위로 조영되었을 가능성과 일렬을 이룬다는 것은 직계의 가계를 의미하고 있을 가능성 등을 고려하면 학계 일부에서 왕릉으로 추측하나 아직 증거는 불충분한 상태라 하겠다.

 무덤의 주인에 대해 첫 번째 무덤은 경주 법흥왕릉, 두 번째 무덤은 경주 진흥왕릉, 세 번째 무덤은 경주 진지왕릉, 네 번째 무덤은 문흥대왕릉 등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또 이 고분들의 북서에 있는 선도산성 안 곳곳에서도 고분들이 조사되었고, 동편의 왕릉들을 감싸고 길게 뻗는 능선들과 남편의 대구-경주간 국도가 통과하는 소태고개의 좌우 능선들에도 많은 고분들이 분포하고 있다.

 

서악동 고분군

 

서악동 고분군에서 내려보는 무열왕릉

 

 무열왕릉의 앞 길을 건너면 무열왕의 직계 자손인 김인문(金仁問)의 묘와 김양(金陽)의 묘가 자리잡고 있다,

 

 김인문의 묘 앞에는 서악동 귀부라고 일컫는 비석이 있다. ()김인문묘 옆에 위치한 귀부는 193112월 경주 서악서원(西嶽書院) 누문 근처 땅속에서 발견되었다. 발견될 당시 비석은 두 조각으로 쪼개진 채 상당히 풍화되어 있었다. 현재의 두께는 18 cm, 1m, 높이는 75 cm 정도이며 원래 서있었을 당시의 크기는 대략 폭 4자 이상, 높이는 6자 정도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비석의 보존상태는 완벽하지 않아 겨우 원형의 3분의 1 정도 남은 비면이지만 400자 이상의 글자가 있다. 글자 중엔 누군가에 의해 고의로 글자를 쪼아서 훼손시킨 흔적도 있다.

 묘비의 절반 이상은 결손되고 마멸이 심해 글자를 알아보기 힘들다. 다만, 비면에 남아 있는 글귀로 미루어보아 김인문묘비로 추정된다.

 

서악동 귀부

 

 귀부를 지나면 김인문의 묘가 나타난다. 김인문묘(金仁問墓)는 신라 문무대왕의 친동생 김인문의 묘는 198284일 경상북도의 기념물 제32호로 지정되었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책을 많이 읽었고 특히 글씨를 잘써 태종 무열왕의 비문을 썼고 활쏘기와 말타기에도 능하였다. 또한 넓은 식견과 훌륭한 재주와 솜씨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외교술에 능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 당나라에게 신라 측 협조사항을 받아내는데 큰 공을 세워 신라의 삼국통일에 큰 역할을 하였다. 당나라에서 관직을 지내다가 효소왕 3(694)에 죽었다. 당 고종은 그의 시신을 호송하여 신라로 보냈으며 효소왕은 그에게 태대각간(太大角干)의 벼슬을 내렸고 서악에서 장례를 치르게 했다. 특별한 시설이 없이 높이 6.5m의 흙으로 높이 쌓아 올린 원형봉토분이다.

 

김인문의 묘

 

 김인문의 묘 바로 뒤에 다소 작은 묘는 김양의 묘다. 김양은 신라 45대 신무왕 때의 공신이며 무열왕의 9대손으로 알려져 있다. 봉분은 별다른 특징이 없는 흙무덤이다.

 

김인문과 김양의 묘

 

멀리 보이는 고분들

 

 이곳을 벗어나 효현동 삼층석탑과 서악동 마애여래삼존입상을 찾아가려고 했으나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무열왕릉 입구에 표시가 한번 있고 주변을 돌아다녀도 다른 이정표가 없어 찾을 수가 없었다. 시간도 많이 지났기에 이것도 내가 볼 정도를 벗어난 것으로 생각하고 다음을 기약하고 그냥 집으로 향한다.

 

 오늘의 탐방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는 금장대다. 경주를 찾는 사람은 꼭 이 금장대를 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