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10 - 불국사, 석굴암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경주를 순례한 지가 벌써 이번 순례의 10번째지만 아직 경주의 대표적인 유적지인 불국사와 석굴암을 가지 않았다. 물론 과거에는 수 차례 갔다왔지만 이번 순례에는 아직 다녀오지 않아 오늘은 불국사 일대를 목적지로 정하고 집을 나섰다. 불국사 일대는 구경하는데 시간이 많이 들 것으로 생각하고 좀 일찍 서둘러 경주에 도착하여 불국사로 향했다.
경주는 올 때마다 주변이 정돈되어 새롭게 보인다. 불국사 일대도 깨끗이 정비되어 시내버스를 내려 걸어서 절을 향해 가는 길이 정돈이 잘 되어 있다.
불국사 가는 길 주변
불국사에 대한 설명은 여러 자료를 바탕으로 다소 길지만 정리해 보았다.
신라의 오악(동악 토함산, 서악 계룡산, 남악 지리산, 북악 태백산, 중악 팔공산) 가운데 신라인들은 경주 토함산을 호국의 산으로 신성시 했기에, '구름을 마시고 토한다'는 토함산(吐含山, 745m)에 최고의 사찰을 짓고 싶어 했고 그 결과물이 바로 불국사와 석굴암이다. 불국사( 佛國寺)는 토함산 서쪽 중턱에 있는 통일신라 김대성의 발원으로 창건한 사찰로 알려져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이다.
불국사는 751년(경덕왕 10)에 김대성(金大城)의 발원으로 창건하였다고 전하나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 의하면, ‘이차돈(異次頓)이 순교한 이듬해인 528년(법흥왕 15)에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迎帝夫人)과 기윤부인(己尹夫人)이 이 절을 창건하고 비구니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574년(진흥왕 35)에는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부인(只召夫人)이 이 절을 중창하고 승려들을 득도하게 하였으며, 왕의 부인은 비구니가 된 뒤 이 절에 비로자나불상과 아미타불상을 봉안하였다.’고 한다. 또한, ‘670년(문무왕 10)에는 이 절의 강당인 무설전(無說殿)을 짓고 신림(神琳) · 표훈(表訓) 등 의상(義湘)의 제자들을 머물게 하였다.’고 전한다.
이들 기록과 신라 불교의 역사를 통해서 볼 때 다소의 모순이 있지만, 현재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는 불상의 복장기에서 이 불상들이 ‘681년(신문왕 1) 4월 8일에 낙성되었다’고 하였으므로 당시의 불국사가 대규모는 아니었지만, 대웅전과 무설전을 갖춘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불국사가 대찰이 된 것은 김대성에 의해서였다. <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현세의 부모를 위해서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절은 751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774년(혜공왕 10) 12월에 그가 생애를 마칠 때까지 완공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 뒤 국가에서 완성시켰다. 원래 불국사는 경덕왕이 아버지 성덕왕을 기리기 위해 중창하였고, 석굴암도 마찬가지로 이유로 창건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아들 혜공왕이 시해당하면서 통일신라의 왕위는 순수한 진골 혈통과 단절되어 버렸다. 후에 왕위에 오른 원성왕은 성덕왕과 경덕왕의 사당까지 없애버린다. 자신과 혈통이 다른 왕들을 추모하는 절을 그대로 둘 수 없었기에, 창건자를 재상 김대성으로 만들어 소문을 내었다고 한다. 이것이 일연이 삼국유사를 저술하던 고려시대는 물론,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다는 설이다.
따라서 이 절은 김대성 개인의 원찰(願刹)이라기보다는 ‘국가의 원찰로 건립되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준공 당시 이 절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대웅전, 극락전, 비로전, 관음전, 지장전 등을 중심으로 한 5개의 지역으로 구분되어 있었으며 이 밖에도 그 위치를 알 수 없는 건물의 이름이 45종이나 나열되어 있다.
김대성이 중창한 뒤 임진왜란 전까지 이 절은 9차례의 중창 및 중수를 거쳤다. 1593년(선조 26) 5월 왜구가 침입하여 대웅전, 극락전, 자하문 기타 2,000여 칸이 모두 불타버렸고, 값진 보물들이 거의 불에 타거나 약탈되었다. 금동불상과 옥으로 만든 물건과 석교(石橋)와 탑만이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때 타버린 목조건물들은 20년이 지난 뒤부터 점차 복구되었다. 1920년 이전에는 일부 건물과 탑만이 퇴락한 채 남아 있었으나, 지속적인 원형복구 및 보수로 국보 7점을 간직한 오늘날 대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특별한 것은 이 절은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의 발원으로 중창되었다는 것이다. 이때의 대복원공사를 위하여 1969년에는 문화재위원(현, 문화유산위원)들의 발굴조사가 진행되었고, 1970년 2월에 공사를 착공하여 준공하였다. 당시까지 유지로만 남아 있던 무설전, 관음전, 비로전(毘盧殿), 경루, 회랑 등은 이때 복원되었고, 대웅전, 극락전, 범영루(泛影樓), 자하문 등을 새롭게 단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불국사는 신라인이 그리던 불국(佛國)인 이상적인 피안의 세계를 옮겨놓은 것이다. 불국을 향한 신라인의 염원은 세 가지 양상으로 이곳에 나타나 있다. 하나는 <법화경>에 근거한 석가모니불의 사바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무량수경(無量壽經)>에 근거한 아미타불의 극락세계이며, 또 다른 하나는 <화엄경>에 근거한 비로자나불의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이다. 이 셋은 각각 대웅전을 중심으로 하는 일곽과 극락전을 중심으로 하는 다른 일곽과 비로전으로 종합되는 전체의 구성을 통하여 그 특징적인 표현을 이루어놓았다.
불국사 정문(일주문)
산문을 들어가면서 이제 불국토로 들어선다. 정문을 지나면 조그마한 연못이 나오는데 이 연못은 영지가 아니다. 영지는 제법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
작은 연못
천왕문의 사천왕상
천왕문을 지나면 불국사가 나타난다. 불국사 본전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우리를 맞이하는 뜰에서 보는 전경이 너무 좋다. 내가 꿈에서도 그리며 보는 모습이다.
나무에 가린 전경
불국사의 경내는 석단으로 크게 양분되어 있다. 이 석단은 그 아래와 위의 세계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석단의 위는 부처님의 나라인 불국토이고, 그 밑은 아직 거기에 이르지 못한 속세를 나타낸다. 석단의 멋은 소박하게 쌓아올린 거대한 돌의 자연미에 있고, 대척적(對蹠的)으로 병렬된 2단의 석주(石柱)에 있다. 석단은 불국세계의 높이를 상징함과 동시에 그 세계의 반석 같은 굳셈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두 모퉁이 위에는 경루(經樓)와 종루(鐘樓)를 만들어서 한없이 높은 하늘을 향하여 번져가는 묘음(妙音)의 위력을 나타내었다.
이 석단에는 1962년 국보로 지정된 대웅전을 향하는 청운교(靑雲橋) 백운교(白雲橋)와 극락전을 향하는 연화교(蓮華橋) 칠보교(七寶橋)의 두 쌍의 다리가 놓여 있다. 청운교 백운교는 석가모니불의 불국세계로 통하는 자하문에 연결되어 있고, 칠보교 · 연화교는 아미타불의 불국세계로 통하는 안양문에 연결되어 있다.
청운교와 백운교는 대웅전을 향하는 자하문과 연결된 다리를 말하는데, 다리 아래의 일반인의 세계와 다리 위로의 부처의 세계를 이어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전체 34계단으로 되어 있는 위로는 16단의 청운교가 있고 아래로는 18단의 백운교가 있다. 청운교(靑雲橋)를 푸른 청년의 모습으로, 백운교(白雲橋)를 흰머리 노인의 모습으로 빗대어 놓아 인생을 상징하기도 한다. 청운교에 비해 아래쪽인 백운교의 높이와 너비가 조금씩 더 커서 시각적으로 안정감과 상승감을 준다. 다리를 계단 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형태로 청운교와 백운교가 이어지는 부분은 둥근 무지개다리로 되어 있다. 다리가 있는 석축 아래쪽으로 연못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지금도 계단 왼쪽에 물이 떨어지도록 만들어 놓은 장치가 남아 있다. 이곳에서 물이 떨어지면 폭포처럼 부서지는 물보라에 의해 무지개가 떴다고 전하고 있어, 무척이나 아름다웠을 옛 불국사를 그려보게 된다.
경덕왕 10년(751)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당시 다리로는 유일하게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매우 귀중한 유물이다. 또한, 무지개모양으로 이루어진 다리 아래 부분은 우리나라 석교나 성문에서 보이는 반원아치모양의 홍예교의 시작점을 보여주고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청운교와 백운교를 오르면 자하문이 있다. 자하문이란 붉은 안개가 서린 문이라는 뜻으로 이 자하문을 통과하면 세속의 무지와 속박을 떠나서 부처님의 세계가 눈앞에 펼쳐진다는 것을 상징한다. 부처님의 몸을 자금광신(紫金光身)이라고도 하므로 불신에서 발하는 자주빛을 띤 금색 광명이 다리 위를 안개처럼 서리고 있다는 뜻에서 자하문이라 한 것으로 세간의 번뇌를 자금색 광명으로 씻고 난 뒤, 들어서게 되는 관문이다. 자하문의 좌우에는 임진왜란 후의 중건 때에 만든 동서회랑이 있었지만 1904년경에 무너졌다. 회랑의 양 끝에 역시 경루와 종루가 있었지만, 동쪽 경루는 일찍이 없어지고, 서쪽의 종루만 남아 있다가, 1973년 복원 때에 좌경루(左經樓)와 더불어 옛 모습을 찾았다.
청운교 백운교와 자하문
불국사 외부 전경
범영루는 처음에 수미범종각(須彌梵鐘閣)이라고 불렀다. 수미산모양의 팔각정상에 누를 짓고 그 위에 108명이 앉을 수 있게끔 하였으며, 아래에는 오장간(五丈竿)을 세울 수 있도록 하였다. 여기에서 108이라는 숫자는 백팔번뇌를 상징하는 것으로, 많은 번뇌를 안은 중생들을 제도한다는 의미에서 108명이 앉을 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 범영루는 751년(경덕왕 10)에 건립하였고 여러 번의 중건을 거쳤다. 현재의 건물은 1973년의 복원공사 때 중건된 것으로 옛 모습대로 정면 1칸, 측면 2칸이며 3층으로 된 아담한 누각이다. 범영루의 동편의 좌경루도 1973년의 복원공사 때 재건하였다. 경루는 경전을 보존한 곳으로 보아야 하겠지만, 원래의 구조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범영루
범영루 설명
연화교, 칠보교(蓮華橋, 七寶橋)는 극락전으로 오르는 돌계단으로 연화교는 10단으로 디딤돌에 끝이 뾰족하고 옆으로 길게 퍼진 연꽃잎을 새겼다. 칠보교는 계단에 아무런 장식이 없으며 8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연화교와 칠보교 밑에는 완만한 곡선을 지닌 무지개다리[虹霓]가 있다. 계단의 양쪽 끝에는 4개씩 정교하게 다듬은 돌기둥을 세워 원형의 난간대를 끼웠고 난간대 하부 중앙에는 난간동자를 세워 받쳤다. 청운교 및 백운교와 비교할 때 구조는 유사하나 규모가 작으며 무지개다리의 구조도 다르다. <불국사사적(佛國寺事蹟)>에는 연화(蓮花)와 칠보(七寶) 2개의 다리로 아미타불과 보살들이 오르내리는 계단을 삼았다고 한다. 연화교와 칠보교는 아미타불이 거주하고 있는 극락이 연화와 칠보로 장식되어 있다는 불경 내용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연화교와 칠보교를 오르면 연화교와 칠보교는 751년(경덕왕 10)부터 774년(혜공왕 10)까지 김대성에 의해 불국사가 중창될 때 함께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1973년 불국사를 전체적으로 복원 정비할 때 없어진 난간을 복원하였다.
연화교 칠보교를 올라 안양문을 지나면 아미타불이 있는 서방의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극락전에 이른다. 안양은 극락의 다른 이름이며, 안양문은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뜻이다. 극락전을 중심으로 하는 이 일곽도 751년에 지어졌고, 그 당시에는 회랑을 비롯하여 석등 및 많은 건물과 석조물들이 있었다고 한다. 견고한 석단 위에 목조로 세워진 극락전은 임진왜란 때 불탄 뒤 1750년에 오환(悟還) · 무숙(武淑) 등이 중창하였고, 1925년 3월에 다시 중수하였는데 목조의 수미단은 그때 만들어진 것이다.
최근까지 극락전 안에는 아미타불과 비로자나불의 두 불상이 안치되어 있었는데, 비로자나불은 원래 대웅전에 있던 것을 일제시기 때 중수하면서 이곳으로 옮겼던 것으로, 지금은 비로전으로 옮겼다. 극락전 안의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은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연화교 칠보교와 안양문
불국사 전경
불국사 앞 뜰에서 불국사의 외부 전경을 완상하고 경내로 들어가면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대웅전 앞에 동서에 서 있는 두 탑이다. 사찰에서 쌍탑은 보통 모양이 똑같거나 아주 흡사해 동탑, 서탑이라 부른다. 하지만 불국사(佛國寺)에서만 두 탑 모양이 다르고 이름도 다르다. 석가탑은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하는 내용을 표현한 탑이고, 다보탑은 과거의 부처인 다보여래가 불법을 증명하는 것을 상징하는 탑이다. 다보탑은 따라서 다보여래가 머무는 환상적인 궁전인 셈이다. 다보여래는 석가여래와 한 쌍을 이루기에 다보탑은 석가탑과 한 쌍이다.
불국사다보탑(佛國寺多寶塔)은 석가탑과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석탑으로, 높이도 10.4m로 같다. 절내의 대웅전과 자하문 사이의 뜰 동서쪽에 마주 보고 서 있는데, 동쪽탑이 다보탑이다. 다보탑은 특수형 탑을, 석가탑은 우리나라 일반형 석탑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이 탑과 석가탑의 관계는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견보탑품(見寶塔品)」에 근거한 것으로 다보여래가 진리를 설법하는 석가모니를 찬양한 후 다보탑 안의 자리 반쪽을 비워 나란히 앉도록 했다는 것이 중심내용이다.
석가탑을 보면 2단의 기단(基壇)위에 세운 3층탑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지만, 다보탑은 그 층수를 헤아리기가 어렵다. 십(十)자 모양 평면의 기단에는 사방에 돌계단을 마련하고, 8각형의 탑신과 그 주위로는 네모난 난간을 돌렸다. 1925년경 일본인들에 의하여 전면 해체·보수되었으나 이에 관한 보고서 간행은 물론 간단한 기록조차 전하지 않으며, 탑 속에 장치된 사리를 비롯한 많은 유물에 대한 기록도 없다. 다만 당시 일인 감독자의 이름으로 금동불상 2구를 총독부에 인계한다는 내용의 인계서가 남아 있을 뿐이며, 이 불상 또한 행방을 모른다.
다보탑은 석가여래의 설법을 증명하기 위해 땅속에서 솟아난 다보여래의 몸[法身]을 표현·상징하기 때문에 땅에 서 있지만 실은 공중에 떠있는 것이다. 땅에서 솟아났기에 다보탑의 구성은 상층부로부터 하층으로 원, 팔각, 사각이라는 구성으로 진행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계단 위쪽에 자리한 사자는(원래 4마리였으나 현재는 1마리만 남아 있음) 불법을 수호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부처님의 진신(眞身)이 머물러 있는 탑 기단 모서리에 사자를 넣어 사자좌 위에 탑이 서 있는 독특한 모습으로 만들어진 이러한 형식의 여러 탑의 연원은 바로 불국사다보탑에 있다.
예전의 우리나라 십원짜리 동전에는 다보탑이 새겨져 있었고, 사자의 모양도 선명하게 나타나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 사자가 동전에서 사라져 버렸다.
다보탑의 사면
다보탑의 지척에 석가탑이 있다. 불국사 삼층석탑(佛國寺 三層石塔)의 원래 이름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釋迦如來常住設法塔)이며 흔히 줄여서 석가탑(釋迦塔)이라고도 한다. 석가탑은 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탑, 무영탑이라고도 불리는데, 이것은 석가탑을 지은 백제의 석공 아사달을 찾아 신라의 서울 서라벌에 온 아사녀가 남편을 만나지도 못한 채 연못에 몸을 던져야 했던 전설에서 유래되었다. 불국사 대웅전 앞뜰에 다보탑과 나란히 서 있으며, 대한민국의 국보 제2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탑은 일반적으로 751년(경덕왕 10년) 김대성이 불국사를 중수할 무렵에 세워졌다고 추정하지만, 742년에 완성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이 탑은 고려 초에 일어난 지진 때문에 1024년과 1038년에 중수되었다.
높이 10.75m. 신라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을 대표하는 가장 우수한 예이며,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과 상륜부가 있는데 각 부분의 체감비율이 적당하며 간결하다. 이 탑의 특이한 점은 탑 주위에 장방석을 돌려서 형성한 탑구(塔區)에 연꽃무늬를 조각한 팔방금강좌(八方金剛座)가 있는 것과 탑의 기단부를 자연석이 받치고 있는 것 등이다. 석가탑의 위대함이 다시 세상의 주목을 받은 것은 1966년 해체·수리에서 나온 사리장엄구에서였다. 도굴범에 의해 석가탑이 훼손되어 10월 전면적인 해체·수리가 이루어졌는데 이때 2층 몸돌 윗부분에서 집 모양의 사리기와 사리병 등 각종 장엄구가 발견되었다. 특히 함께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종이질이나 글씨체가 8세기 초기의 것이며, 너비가 비록 8㎝에 지나지 않지만 길이는 무려 6m에 이르는 두루마리 경전으로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로 밝혀졌다.
석가탑의 사면
대웅전 앞의 석등
대웅전(大雄殿)은 조선시대의 건축물이다. 2011년 12월 30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744호로 지정되었다. 석가여래 부처님을 모시는 법당으로, 불국사 경 내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
이 대웅전 안의 중앙 정면에는 수미단(須彌壇)이 있고, 그 위에 목조석가삼존불이 안치되어 있다.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미륵보살과 갈라보살(竭羅菩薩)이 협시(脇侍)하고 있으며, 다시 그 좌우에 흙으로 빚은 가섭(迦葉)과 아난(阿難)의 두 제자상이 모셔져 있다.
대웅전의 동·서 측면에는 익랑(翼廊)이 놓여 동·서 회랑과 연결되고 남회랑의 동측 모서리에는 좌경루(左經樓)가 있고, 서측 모서리에는 범영루(泛影樓)가 배치되어 있다. 자하문 남측에는 청운교와 백운교의 석계를 마련하여 대웅전으로 진·출입할 수 있도록 꾸몄다.
대웅전은 불국사고금창기에 의하면 조선 시대에 여러 번에 걸쳐 보수 중창되었다. 그 후 퇴락된 것을 일제 강점기인 1918년부터 1925년까지 조선총독부 주관으로 개수한 바 있으며, 그 뒤 또 다시 심하게 퇴락되어 가던 것을 1970년 대에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지시로 중창되었다.
지금은 대웅전을 보수 중이라 장막으로 가려 놓아 전체 건물을 볼 수 없는 아쉬움이 있다.
대웅전의 석가모니불
다보탑과 석가탑
목어
장막으로 가려진 대웅전
대웅전을 돌아 뒤로 가면 여러 전각이 나타난다. 대웅전 바로 뒤에 있는 무설전은 불국사의 여러 건물 가운데 제일 먼저 만들어진 건물이다. 670년(문무왕 10)에 이 건물을 짓고 문무왕은 의상과 그의 제자 오진(悟眞) 표훈 등 몇 명의 대덕(大德)에게 『화엄경』의 강론을 맡게 하였다. 이 건물도 임진왜란 때에 불탄 뒤 1708년(숙종 34)에 중건하여 1910년 이전까지 보존되었으나, 그 뒤 허물어진 채 방치되었다가 1972년에 복원하였다.
경론을 강술하는 장소이므로 아무런 불상도 봉안하지 않고 설법을 위한 강당으로서만 사용하였으며, 무설전이라고 이름 붙인 까닭은 진리의 본질, 불교의 오의가 말을 통하여 드러나는 것이 아님을 지적한 것이다.
무설전
무설전 뒤의 한층 높은 언덕에 있는 관음전은 751년 김대성이 6칸으로 지었던 것을 1470년에 중수하였는데, 1593년 임진왜란의 병화로 불타버렸다. 그 직후 1604년에 해청(海淸)이 중창하였고, 1694년과 1718년에 다시 중창하였다. 원래 이 관음전 안에는 관세음보살상이 안치되어 있었다. 이 관음상은 922년에 경명왕비가 낙지공(樂支工)에게 명하여 전단향목(栴檀香木)으로 만든 것이었다.
『속전』에 의하면, ‘중생사(衆生寺)의 관음상과 함께 영험력이 크다’하여 매우 존숭받았다.'고 한다. 이 관음상은 1674년(숙종 즉위년)과 1701년 · 1769년의 세 차례에 걸쳐 새로 금칠[改金]을 하였다. 마지막 개금기록으로 보아 18세기 중엽까지는 이 관음상이 있었음이 틀림없는데, 언제 관음상이 없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현재는 1973년의 복원 때 새로 조성한 관음입상을 봉안하고 있다.
관음전
관음전 아래 서편에 있으며, 비로자나불을 봉안하고 있다. 이곳에 비로자나불을 모신 전각을 따로 건립한 것은 『화엄경』에 의한 신앙의 흐름이 불국사의 성역 안에 자리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비로전은 751년 김대성이 18칸으로 지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60년에 중수하였으나, 조선 말에 무너져서 터만 남아 있었다. 1973년의 복원공사 때에 현재의 건물을 지어서 극락전에 임시로 안치하였던 1962년 국보로 지정된 금동비로자나불좌상을 옮겨 봉안하였다.
비로전
사리탑
나한전
극락전과 안양문 설명
불국사 회랑
불교미술관
이 불교미술관은 명칭이 무색하게 상업적인 목적의 건물로 기념품만을 팔고 있다. 왜 '불교미술관'이라 이름을 붙였는지가 의아스럽다.
범종각
불국사 경내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앞 뜰로 나오니 칠보교 앞에 당간지주가 보인다. 그 외 다수의 여러 유물을 보고 경내를 벗어나 정문이 아닌 후문의 불이문을 통과하여 나왔다.
당간지주
불이문
오랜만에 찾은 불국사라 여러 곳을 천천히 돌아보니 어느듯 시간이 많이 지났다. 하지만 오늘의 주된 목적지인 불국사를 마음컷 돌아다녔다는 뿌듯함이 마음속에 벅차 올랐다. 그리고 불국사에는 수 많은 유적과 유물이 있어 설명이 좀 장황하게 되었다.
여기서 다시 정문쪽으로 가서 불국사와는 조금 거리가 있는 경주가 낳은 현대문학의 두 거장 박목월과 김동리의 문학관으로 발을 옯겼다.
동리목월문학관(東里木月文學館)은 경주시 불국사 입구에 있는 경주 출신인 소설가 김동리와 시인 박목월의 문학 및 시론 등을 전시하는 전시관으로 경주시에서 운영하는 공립문학관이다. 그래서 동리목월문학관은 2006년에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동리관」,「목월관」,「신라를 빛낸 인물관」으로 나누어 전시하고 있다.
동리목월문학관
동리목월문학관을 나오면 불국사 일주문 주차장 옆에 석굴암으로 올라가는 버스정류장이 있다. 걸어서 산길을 오를까?하고 생각도 했으나 날도 춥고 거리도 제법 멀어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으니 한국인보다 외국인이 더 많이 보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자기 차로 석굴암을 가기 때문이었다. 한시간에 한번 움직이는 버스를 기다려서 타고 석굴암으로 올라가서 주차장에서 석굴암까지 걸어가면서 보는 동쪽은 탁 트여 가슴을 상쾌하게 했다.
김대성이야기의 그림판
석굴암 가는 길에서 보는 동해
불국사에서 산등성이를 타고 약 3㎞ (포장도로 석굴로는 9㎞) 정도 올라가면 동양 제일의 걸작으로 알려진 여래좌상의 본존불이 동해를 마주 바라보고 있는 유명한 석굴암이 있다.
고요한 모습은 석굴 전체에서 풍기는 은밀한 분위기 속에서 신비로움의 깊이를 더해 내면에 깊고 숭고한 마음을 간직한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 모든 중생들에게 자비로움이 저절로 전해지는 듯하다.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창건을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에 완성하였으며, 건립 당시에는 석불사라고 불렀다. 토함산 중턱에 백색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인위적으로 석굴을 만들고, 내부공간에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위 벽면에 보살상 및 제자상과 역사상, 천왕상 등 총 40구의 불상을 조각했으나 지금은 38구만이 남아있다.
원형의 주실 입구에는 좌우로 8각의 돌기둥을 세우고, 주실 안에는 본존불이 중심에서 약간 뒤쪽에 안치되어 있다. 주실의 벽면에는 입구에서부터 천부상 2구, 보살상 2구, 나한상 10구가 채워지고, 본존불 뒷면 둥근 벽에는 석굴 안에서 가장 정교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이 서 있다. 여래좌상이 바라보는 시선은 문무왕 수중왕릉인 봉길리 앞 대왕암을 향한다.
석굴암의 배치는 법화경의 첫머리에 나오는, 석가모니가 가장 많이 설법한 인도 영취산의 풍경을 재현한 것이다. 석가모니 본존불이 가운데 있고 주변을 십대제자와 과거불들, 팔부신중 등이 둘러싸고 있다. 석굴암의 가운데에 앉아 있는 본존불은 한국 불교미술사의 석불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이때를 기점으로 이후의 석불들은 조형적인 완성도에서 오히려 점차 쇠퇴한다고 평가받는다.
원숙한 조각 기법과 사실적인 표현으로 완벽하게 형상화된 본존불, 얼굴과 온몸이 화려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 용맹스런 인왕상, 위엄있는 모습의 사천왕상, 유연하고 우아한 모습의 각종 보살상, 저마다 개성 있는 표현을 하고 있는 나한상 등 이곳에 만들어진 모든 조각품들은 동아시아 불교조각에서 최고의 걸작으로 손색이 없다.
현재 석굴암은 내부 전면 공개 관람 시 항온항습 등의 문제가 우려되어 1976년부터 유리벽을 통한 외부관람을 실시하고 있다. 관람을 할 때는 실제 석굴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으며 유리 차단막이 설치된 통로 밖에서 지나가며 관람하는 것만 가능하다. 예외적으로 부처님오신 날에는 차단막 안으로 들어가 옛 신라인들이 했던 것처럼 본존불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다. 단 내부에서 사진 촬영은 금지된다. 또 석굴암은 지하수 샘물이 솟아나는 암반 위에 있는데, 이것은 석굴 내부의 냉각 기능을 하는 아주 중요한 지형이었다.
석굴암 외부 전경
여기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석굴암 본존불은 사진을 찍지 못하게 금지해 놓았다는 것이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다. 사진을 찍지 못하는 예술품은 색이 바랠 우려가 있는 경우인데 석불이 어떤 우려가 있다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석불을 사진을 찍지 못하면 우리나라 곳곳에 있는 마애불이나 부처상, 그리고 건물도 찍지 못하는 것이 아닌지가 의심스럽다. 내가 많은 곳은 아니나 각국을 여행하면서 사진을 찍지 못하게 금지해 놓은 곳은 아주 특별한 것이 아니면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석굴암 본존불은 네이버 이미지에서 차용하였다.
석굴암 본존불
석굴암에서 보는 동해
석굴암의 석물들 - 어디에 쓰인 것인지도 모른다.
석굴암을 내려오니 시간이 많이 지났다. 원래 계획으로는 다른 여러 곳을 가는 것이었는데 불국사에서 많은 시간을 관람하는데 사용해서 원래의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나 조금도 걱정은 되지 않는다. 시간에 구애되지 않고 다음에 다시 와서 오늘 가보지 못한 곳을 가면 되는 것이다.
불국사와 석굴암을 돌아본 것만으로도 뿌듯하게 마음의 풍요로움을 느끼며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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