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鶴)의 오딧세이(Odyss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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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4 - 낭산 일대와 분황사, 황룡사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저번에 경주를 갔다와서 겨울 추위가 매섭게 닥쳐 경주 순례를 삼사일 쉬다가 다시 경주로 향했다. 이번에는 좀처럼 잘 가지 않는 낭산 일대와 황룡사 부근을 보고 싶었다. 시외버스터미널에서 걷기를 시작하여 대릉원을 지나 잠시 방향을 잘못 들어서 쪽샘쪽으로 갔다. 경주는 올 때마다 다른 유적지가 발견되는 것 같다. 내가 제법 경주를 다녔지만 쪽생이라는 명칭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물론 내가 과문한 탓도 있겠지만.

 

  쪽샘지구는 대릉원 동쪽에 위치한 황오리 고분군(황오동, 황남동, 인왕동) 일대를 일컫는 것으로, 4~6세기 신라 왕족과 귀족의 집단 묘역으로 총면적은 384000m2 정도의 국내 최대 규모의 왕족과 귀족들이 집단 묘역으로 유물 발굴지다. 1960년대 이후 이곳에 민가가 들어서면서 고분 유적의 훼손이 심각해짐에 따라 문화재청과 경주시는 고분군 발굴을 위해 이 지역 민가와 사유지 등을 사들인 뒤 2007년부터 발굴을 시작하였다. 경주시는 연면적 1,900, 2층 규모의 쪽샘지구유적발굴관을 지어 수장고와 함께 내부에 유물 발굴 공간을 직접 볼 수 있는 관람 통로 등을 설치하였고, 2층 전체는 유리로 마감되어 쪽샘지구 발굴 현장을 한눈에 관람할 수 있도록 하였다. 경주시는 쪽샘을 정비하여 이 일대를 쪽샘지구로 명명하였다.

 

쪽샘의 모습

 

 이 쪽샘 주변의 여러 고분군을 구경하고 여러 유적지를 지나 걸어갔다. 내가 걷는 것은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기에 동궁과 월지를 지나 시내를 따라 난 도로를 걸어 낭산으로 향했다.

 

 낭산은 누에고치처럼 남북으로 길게 누워 높이 108m의 낮은 구릉을 이루는 산으로 예로부터 서라벌의 진산으로 신성한 산으로 여겨졌다. 신라 실성왕 12(413)에 구름이 일어 누각같이 보이면서 오랫동안 향기가 피어올랐다. 기록에는 왕이 낭산에 상서로운 구름이 서린 것을 보고 신하들에게 신령이 하늘에서 내려와 노는 곳이니 당연 복을 주는 지역이므로 이제부터는 낭산의 나무 한 그루도 베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7세기부터는 불교의 성스러운 산으로 왕실에 복을 주는 장소로 변하기 시작하였고, 선덕여왕의 유언에 따라 만든 여왕의 능을 비롯하여 신라 향가의 현장인 사천왕사지, 문무왕의 화장터로 여겨지는 능지탑, 바위에 부처를 새긴 마애불, 구황리 삼층석탑 등 신라 유적이 많이 있다.

 

낭산 표지

 

 길을 따라가니 낭산과 선덕여왕릉 표지가 나타났다. 내가 이곳을 온 주된 목적은 선덕여왕릉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약 20여년 전에 초등학생이었던 아들과 함께 이곳을 지나가다가 선덕여왕릉 표시가 너무 초라헤 되어 있는 것을 보고 아들이 문화재관리국(정확하지는 않다.)에 여왕이라고 표시가 소홀한 것이 아닌가하고 의견을 제시한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선덕여왕릉으로 올라 가면서 먼저 보는 것이 '능지탑지'다.

 

 능지탑은 남산에 흐트러져 있던 탑의 재료를 새로 맞추어 놓은 것으로 예로부터 능시탑 또는 연화탑이라고도 한다. 기단 사방에 12지신상을 새긴 돌을 세우고, 그 위에 연꽃무늬가 있는 석재를 쌓아 올린 5층 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문무왕이 임종 후 10일 안에 왕궁 밖 뜰에서 화장하고 장례를 검소하게 하라고 유언하였으며, 탑 주변에서 문무대왕릉비 조각이 발견되고 사천왕사, 선덕여왕릉, 신문왕릉 등과 가까운 것으로 보아 이곳이 문무왕의 유언을 받들어 왕을 화장한 터로 전해진다.

 현재의 능지탑의 외관은 1979년에 보수할 때 임시로 정사각형 평면의 2층 석조 축단(築壇)으로 복원되었다. 현재 터의 향좌측에는 보수할 때 사용하고 남은 연화석 36개가 쌓여 있고, 그 옆에 성격이 구명되지 않은 토단 유구가 남아 있다.

 

능지탑지

 

경주 낭산 설명판

 

 이곳을 지나 선덕여왕릉으로 가는 길은 제법 걸어가야 한다. 선덕여왕릉은 울창한 소나무 숲길을 지나 거의 산 정상까지 올라가야 한다.

 

선덕여왕릉 가는 길

 

 경주시 보문동 산79-2번지 낭산의 정상에 있는 신라 제27대 선덕여왕릉(善德女王陵)646년경에 조성되었고, 1969827일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낭산(狼山) 보호구역에 포함된다. 사천왕사(四天王寺) 위 낭산의 정상에 있는데, 현재의 상태는 봉토(封土) 밑에 둘레돌을 쌓은 원형의 토분(土墳)이다. 둘레돌은 잡석을 비스듬히 2단으로 쌓았고 그 밖으로 드문드문 둘레돌의 높이와 비슷한 대석을 기대어 놓았다. 그 외에는 다른 표식의물(表飾儀物)이 없고 다만 전면에 상석(床石)이 있으나 이것은 후세에 설치된 것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선덕여왕이 죽을 날을 예언하며 부처의 나라인 도리천에 묻어 달라고 했다고 한다. 도리천은 불교설화의 수미산 밑을 이야기하는데 어디를 말하는지 몰라 신하들이 묻자 낭산 기슭이라 대답하였고, 이 기슭에서 장사를 지냈다. 이후 문무왕이 삼국통일을 한 후 낭산에 사천왕사를 지었다. 사천왕이란 도리천의 호불신으로 선덕여왕의 무덤은 결국 도리천에 있는 셈이 되어 비로소 신하들이 낭산의 정상이 도리천이라 한 여왕의 뜻을 알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 밖에 유명한 선덕여왕 지기삼사라는 설화도 전해지고 있다. 주변에 신문왕릉, 효공왕릉, 신무왕릉, 효소왕릉 등 여러 왕릉이 있다.

 

선덕여왕릉

 

 선덕여왕릉을 내려와서 주변의 왕릉을 보지 않고 분황사로 향했다. 도로를 따라 걸어가니 선덕여왕릉으로 올 때 보았던  '독서당'이 나와서 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기에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독서당(讀書堂)은 배반동 낭산(狼山) 서쪽 기슭에 있는 서당으로, 신라 말기의 학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학문을 닦던 곳이라고 전하나 이후 여러 차례 보수가 이루어져 본래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1850(철종 1) 건립된 최치원유허비가 건물 왼쪽 비각 안에 놓여 있으며 담장 밖에 최치원이 심었다고 전하는 향나무가 있다. 그러나 문을 굳게 잠가 놓아서 밖에서 구경만하고 돌아섰다.

 

독서당의 여러 모습

 

 독서당을 내려와서 오랜만에 분황사로 간다. 지금은 황룡사 발굴터로 더 유명한 곳 바로 옆에 분황사가 있다.

 

멀리 보이는 황룡사 역사문화관

 

분황사 당간지주

 

 이 분황사 당간지주는 지금 황룡사 발굴 구역에 있다. 왜 분황사 당간지주가 분황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지가 의문이다. 분황사가 매우 큰 절이라 당간지주가 있는 이곳까지 분황사 터엿는지도 모를 일이다.

 

황룡사역사문화관

 

 황룡사 발굴타 바로 옆에 분황사가 있다. 내 기억에는 과거베 본 분황사의 '모전석탑'이 생생하다.

 

  분황사(芬皇寺)는 삼국시대 634(선덕여왕 3)에 창건한 사찰로 왕분사(王芬寺)라고도 한다. ‘분황(芬皇)’향기날 분’, ‘황제 황자로 향기나는 황제절이란 뜻으로, 신라 최초로 여왕이 왕위에 올라선 것을 알리는 상징적인 절이다. 분황사 석탑에서 나온 사리장엄구에도 가위 등 여자와 관련된 유물이 있었다. 창건 당시 가람은 석탑을 남쪽 중앙에 배치하고 그 북쪽에 남향의 삼금당을 ()’자형으로 배치한 소위 일탑삼금당식가람배치였다. 1~3차 중건으로 가람은 1동의 대형 금당을 배치한 일탑일금당식으로 바뀌었다.

신라를 지키는 호국룡이 살고 있는 신성한 절로 여겨졌고, 이 절의 석탑은 신라 석탑 중 가장 오래된 석탑이며, 솔거가 그린 분황사의 관음보살이 유명하다.

 국보 제30호로 지정된 모전석탑(模磚石塔)을 비롯하여, 화쟁국사비 비석대(和諍國師碑 碑石臺석정(石井석조(石槽초석(礎石석등·대석(臺石)과 사경(寺境) 이외에 당간지주(幢竿支柱)가 남아 있어 보존되고 있다.

 

분황사 입구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은 분황사 모전석탑(芬皇寺模塼石塔)은 높이 9.3m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모전석탑으로, 분황사 창건과 동시에 건립되었다고 생각되나 뒤에 몇 차례 보수되어 어느 정도까지 원형이 남아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기단(基壇)은 한 변 약 13m, 높이 약 1.06m의 막돌로 쌓은 토축(土築) 단층기단인데, 밑에는 상당히 큰 돌을 사용하였고 탑신(塔身) 밑이 약 36높아져 경사를 이루었다. 기단 위에는 서면 남북 모서리에 수사자상 각 한 마리씩과 동면 남북 모서리에 암사자상 각 한 마리씩이 지키고 있으나 원래 두 마리가 더 있어 총 여섯 마리의 사자가 있었다. 나머지 두 마리는 국립경주박물관의 정원으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현재 탑신부는 3층까지 남아 있으며 회흑색의 안산암(安山岩)을 작은 벽돌모양으로 잘라서 쌓았는데 위의 폭이 아래폭보다 약간 좁다. 탑신 4면에는 입구가 뚫려져 있는 감실(龕室)을 개설하고, 입구 좌우에 거의 원각(圓刻)에 가까운 인왕상(仁王像)을 배치하였으며 두 짝의 돌문을 달아 여닫게 하였다.

 <동경잡기(東京雜記)>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왜병에 의하여 허물어지고 그 뒤 분황사의 중이 개축하려다가 또 허물어뜨렸다고 하나 그 실상은 알 수 없다. 1915년에는 일본인들이 해체수리하였는데 현재의 상태는 이 때의 현상대로 복원한 것이다.

 지금 분황사 경내에는 이 탑을 수리할 때 남은 석재가 따로 보관되어 있어 지금의 모습이 창건 당시의 형태가 아님을 알 수 있으며, <동경잡기>에는 분황사9층탑(芬皇寺九層塔)’이라고 되어 있으나 그대로 믿을 근거가 못 된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모전석탑의 사면

 

분황사의 여러 모습

 

 분황사 뜰에는 석정이 있다. 분황사 석정(芬皇寺 石井)198585일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석정은 바위 틈 사이로 솟거나 흐르는 물을 고이게 바위를 옴폭하게 파고, 그 위에 다시 시설(施設)을 해 만든 우물이다. 분황사의 석정은 신라시대의 유물로, 벽체(壁體)를 둥글게 쌓아올리고 외부는 8각으로 다듬었다. 이런 형태는 불교의 팔정도(八正道)와 원융(圓融)의 의미를 지닌다.

 호국룡(護國龍) 변어정(變魚井)이라고 불리는 이 우물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분황사의 이 우물과 서라벌 동북쪽 금학산(琴鶴山) 기슭의 동천사(東泉寺)에 있는 동지(東池)와 청지(靑池)라는 두 우물에는 신라를 지키는 호국룡이 살고 있었다. 원성왕(元聖王) 때 신라에 온 당나라 사신이 이 용들을 3마리의 물고기로 변신시킨 뒤 잡아가지고 길을 떠났다. 하루 뒤 두 여인이 원성왕 앞에 나타나 이런 사실을 알리고 그들을 찾아 줄 것을 호소하였다. 왕이 사람을 시켜 당나라 사신을 쫓아가 그가 가지고 가던 물고기를 되찾아서 각각의 우물에 놓아주고 다시 살게 하였다고 한다.

 

석정

 

화쟁국사 비부

 

분황사 표석

 

 분황사를 나와 실제의 모습을 전혀 볼 수 없지만 지금 한참 복원이 논의 중이고 옛 발굴터에 여러 유물을 모아 놓은 황룡사역사문화관으로 발을 옮겼다.

 

 황룡사(皇龍寺)는 월성(月城)의 동쪽 용궁의 남쪽에 있었던 절로 칠처가람지(七處伽藍址, 과거 7불이 주석했다는 경주 일원의 일곱 사찰의 유적지)의 하나로서 규모나 사격(寺格)에서 신라 제일의 사찰이며, 신라의 사상과 예술에서도 그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553(진흥왕 14)에 새로운 대궐을 본궁 남쪽에 짓다가 거기에서 황룡이 나타났으므로 이를 불사(佛寺)로 고쳐 황룡사라 하고 17년 만인 569년에 완성하였다. 불국사와 함께 신라를 대표하는 사찰이며, 백제의 미륵사, 고구려의 정릉사와 함께 삼국시대를 대표하는 호국 사찰이었다.

 

삼국유사에서 설명한 칠처가람지는

금교(金橋) 동쪽 천경림(天鏡林) - 흥륜사(興輪寺)

삼천기(三川歧) - 영흥사(永興寺)

용궁(龍宮) 남쪽 - 황룡사(皇龍寺)

용궁 북쪽 - 분황사(芬皇寺)

사천미(沙川尾) - 영묘사(靈妙寺)

신유림(神遊林) - 사천왕사(四天王寺)

서청전(婿請田) - 담엄사(曇嚴寺)로 알려져 있다.

 

 신라인들은 과거불인 가섭불(迦葉佛)의 연좌석(宴坐石)이 있는 이 절을 가섭불시대부터 있었던 가람터로 보았는데, 이는 신라인이 염원하는 불국토(佛國土)가 먼 곳이 아닌 신라 땅이라는 자각과 관련된 것이다.

신라삼보(新羅三寶) 중에서 이보(二寶)인 장륙존불(丈六尊佛)과 구층탑이 이 절에 있었고, 화성(畵聖) 솔거(率居)의 금당벽화가 이곳에 있었다.

 

황룡사 발굴터

 

 황룡사역사문화관에는 옛날의 황룡사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많은 노력을 한 흔적이 보인다. 그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목조구층탑이다. 이 절의 중심인 구층목탑은. 당나라로 유학갔던 자장이 태화지(太和池) 옆을 지날 때 신인(神人)이 나와서, “황룡사 호국룡은 나의 장자로 범왕(梵王)의 명을 받아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본국에 돌아가서 그 절에 9층탑을 이룩하면 이웃나라가 항복하고 구한(九韓)이 와서 조공하며 왕업이 길이 태평할 것이요, 탑을 세운 뒤에 팔관회(八關會)를 베풀고 죄인을 구하면 외적이 해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자장은 643(선덕여왕 12)에 귀국하여 탑을 세울 것을 왕에게 청하였다. 자장은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 100()을 탑 속에 봉안하였다.

 이 탑의 각 층은 아래에서부터 일본, 중화(中華), 오월(吳越), 탁라(托羅), 응유(鷹遊), 말갈, 단국(丹國), 여적(女狄), 예맥(濊貊)의 아홉 나라를 상징하는데, 이는 이들 나라로의 침략을 막을 수 있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고 한다. 이 탑은 1238(고종 25)에 몽고군의 병화(兵火)로 가람 전체가 불타버린 참화를 겪은 뒤 중수되지 못하였다.

 

복원을 고대하는 목조구층탑의 모형

 

황룡사에서 발굴된 거대한 치미

 

황룡사역사문화관 내부

 

 이 밖에도 이 절에는 국립경주박물관의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보다도 4배나 더 크고 17년 앞서서 주조된 종이 있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전하지만, 이 종도 몽고군의 병화 때 없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절터는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현재 황룡사 복원은 초반 단계인 고증 연구와 발굴 탐색, AR복원에 머물러있다. 현재 중문과 남측 회랑을 AR로 복원하였으며 20년대 중반까지 금당과 내부 불상, 9층목탑의 AR복원 계획을 명시했다. 하지만 경주시와 정부는 여전히 황룡사의 실물 복원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AR복원으로 잠정 확정된 복원 안들에 대해 국민들의 사회적 공감대를 얻으면 실물 복원을 추진하는 것으로 초장기 로드맵을 구상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꼭 복원을 하여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복원을 한다고 처음 그대로 만들 수는 전혀 없으니 폐허는 폐허대로 두는 것도 역사의 한 면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황룡사터

 

 황룡사역사문화관을 둘러 보는 것으로 오늘의 경주 탐방을 끝내고 집으로 향한다. 올해의 겨울 날씨가 비교적 한파가 많아 날씨를 보아가면서 경주 나들이를 계속할 것이나 다음의 일정이 언제일는지가 의문이다. 이제 젊은 나이도 아니고 해서 기상상태를 보고 다시 올 것이다.

 

 다음은 남산 일대를 돌아볼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