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 - 이즈하라 일대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우리나라에 더 가까운 대마도
쓰시마(Tsushima Island)는 일본 나가사키현[長崎縣]에 딸린 섬으로 면적은 약700㎢이고 인구는 약 4만 정도가 된다.
쓰시마는 일본에서 우리나라와 가장 가까운 지역으로 섬 전체가 쓰시마시(市)에 속한다. 시는 6개의 읍이 있고, 이즈하라에 쓰시마시청이 있다. 중앙부의 아소만(淺茅灣)과 인공적으로 굴착된 만제키세토(萬關瀨戶:수로)에 의해 상도(上島), 하도(下島)의 두 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부산에서 쓰시마를 볼 때 두 마리의 말이 마주보고 있다고 해서 지명이 대마(對馬)라고 불리어졌다고 한다. 일본 신화에 따르면 창조 신들이 쓰시마를 일본 최초의 섬 중 하나로 만들었다고 한다.
섬 전체가 산지이고, 농경지는 총면적의 4%에 불과하다. 아소만에서는 진주조개 양식이 번성하고 있다. 매년 8월에는 조선통신사를 소재로 한 아리랑 축제가 열린다. 부산에서 정기여객선이 운항되고 있다.
쓰시마는 부산에서 약 50km의 거리에 있고 일본 규슈(九州) 본토와는 132km 떨어져 있어 한국과 관계가 깊다. 고려 말부터 조공을 바치고 쌀·콩 등의 곡식을 답례로 받는 관계에 있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대마도를 근거지로 출몰하는 왜구의 폐해가 막심하여, 조선에서는 이들을 퇴치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실패하자 세종 때에는 이종무(李從茂)가 대마도 원정(遠征)에 나선 바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49년 1월 신년 기자회견에서 대마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일본에게 대마도의 반환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연말에 잠시 짬을 내어 대마도로 향했다. 부산에서 아침에 배를 타고 이즈하라항에 도착하니 아직 점심 때도 되지 않았다. 그만큼 우리에게는 가까운 곳이다.
이즈하라는 7세기부터 쓰시마국의 관청이 설치되어 행정, 문화의 중심지로 번성해 옸다. 후추라고도 불렸으며 메이지유신이후로 이즈하라로 명칭이 바뀌었다. 에도시대 쓰시마번주 소가문은 막부로부터 10만석의 재력을 가진 번으로 인정받았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높은 지위였다. 외교 문화사절단 "조선통신사"는 쓰시마번의 안내와 호위를 받으며 후추를 거쳐 에도로 향했다. 쓰시마는 조선의 문화, 무역 창구로 번영했고, 부산에는 쓰시마번주민 600여명이 체류하는 왜관이 설치되는 등, 독자적인 외교 무역 기능을 발휘하였다.
1945년 광복이후에는 일본의 밀수 기지로도 악명을 높였다.
야구라문 : 가네이시성 정원 입구의 문
이즈하라항구의 모습 - 아주 조그마한 항구다.
부산에서 이즈하라를 운행하는 오션플라워호
항구 바깥의 일반인집
항구 맞은 편에 보이는 풍경
항구 주변의 풍경
전형적인 일본식 가옥
아주 오래된 식품회사
길가에 있는 조그마한 기도처
방화벽
일본은 목조저택이고 다다미이기에 불에 취약하다. 그래서 돌담을 쌓아서 방화벽을 만들었다. 저택의 돌담과는 다르게 불에 거을린 흔적이 남아 있는 방화벽으로 쓰인 돌담은 높이가 약 3m, 폭이 약 1.5m 정도이며 현재 남아 있는 수는 몇 안된다고 한다. 방하벽에는 만들어진 날짜 등을 새겨서 기념물로 보존하며, 허물지 않고 담벽과 같이 사용하고 있다.
길가의 오래 된 나무
조선통신사를 맞이하기 위해 막부에서 파견된 사자가 머물렀다는 기념비다. 흔히들 조선통신사가 머물렀던 곳이라고 생각하는데 잘못 안 것이다. 이즈하라에 이 비석이 12개가 있다고 한다.
곳곳에 보이는 신사 입구
일본식 돈까스 정식
무가저택돌담
이즈하라에는 쓰시마번 조카마치 당시의 저택 돌담이 남아 있다. 이 돌담은 에도시대 초기부터 만들어졌고, 1911년 조선통신사의 일본 방문에 맞추어 더욱 아름답게 정비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곳곳에 많이 남아 있다.
야구라문 : 가네이시성 정원 입구의 문
가네이시성 유적 설명판
덕혜옹주 결혼 기념비 이정표
새로 짓고 있는 박물관
멀리 산위에 보이는 시미즈야마성터
이 성은 임진왜란을 즈음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1591년에 세웠다고 알려진 산성이다. 이치노마루에서 산노마루까지 약 500m에 이르는 유적이 남아 있다 한다. 조카마치 이즈하라마을의 전경과 규슈쪽 바다를 조망할 수 있다고 하는데 올라가지 못했다.
이정표
가네이시성 정원
소가의 거처지였던 가네이시성의 정원으로 17세기 후반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오랫동안 땅속에 묻혀 있었는데 발굴조사 결과 근세 정원으러서는 드문 디자인과 구조를 갖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 가네이시성터에는 이 정원 외에도 성벽, 성문의 흔적 등이 있다.
덕혜옹주 결혼봉축 기념비
조선 26대 국왕 고종의 딸(덕혜옹주)과 쓰시마번주 소 다케유키의 결혼을 기념하여 1931년 쓰시마에 거주했던 조선인들이 세운 기념비다. 전쟁후, 덕혜옹주가 정신분열증세로 이혼하였고, 가념비는 철거되었다가 2001년에 복원하였다. 덕혜옹주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영화로 잘 알려졌지만 영화는 어디까지나 약간의 허구가 더해진 것이다. 사실과는 좀 다르다. 한말 비운의 희생양인 덕혜옹주는 결혼봉축기념비란 이름하에 한국인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성신지교린(誠信之交隣) 비
이 비석은 1990년에 건립되었다. 1689년 쓰시마번에서 조선외교를 담당했던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 1668 - 1755)가 만년에 조선교역에 있어서 대마도주가 취할 자세를 54개 항목으로 나누어 만든 지침서에 있는 구절이다.
성신지교린 비에서 바라보는 가네이시겅의 야구라문. 치미는 잉어이다.
이 조그마한 섬에 많이 눈에 듸는 것이 치괴이다.
하치만구신사
이 신사는 이즈하라 중심부에 위치하며 옛부터 쓰시마번주를 비롯한 주민들의 숭배를 받아온 오래된 신사이다. 진구황후가 시미즈야마에서 제사를 지내고 타국의 침입으로부터 땅을 지킬 수 있도록 기도했다고 전한다. 쓰시마 초재번주의 아내인 마리아(고니시 유키나가의 딸)는 카톨릭신자였으나 하치만구 신사안에 있는 이마미야 와카미야 신사에 모셔져 있다.
쓰시마 초대번주 宗義智상
관광안내도
나카라이 토스이 기념관
일본 5천엔권 지폐의 주인공인 소설가 히구치 이요이의 스승이자 연모의 대상으로 알려져 있는 나카라이 토스이는 메이지시대의 신문기자이자 소설가이다. 1860년에 출생하여 1926년에 사망한 그는 어려서 아버지를 따라 초량 왜관에서 살았다. 그래서 한국어에 능통했다고 한다. 그는 우리 춘향전을 일본어로 번역하여 신문에 연재하였다. 그가 태어난 이즈하라마치 나카무라지구는 지금도 조카마치의 정취가 남아 있으며, 생가가 있던 자리에 기념괸으로 정비되어 있다.
저녁을 먹은 대마도 멧돼지 고기집 - 고기 맛이 우리 입맛에 잘 맞았다.
대마도는 우리나라에 가까이 있다 보니 우리나라 사람들은 별로 볼 것이 없다는 선입견을 가진다. 특히 부산에서는 당일로 갔다 올 수도 있어 사람들에게 큰 감흥을 주지 못하는 곳이다. 하지만 대마도도 자세히 보면 상당히 볼 거리가 많은 곳이다. 특히 우리나라와 옛날부터 교역이 활발하였고, 근세의 아픈 역사의 현장이 보존되어 있기도 한 곳이다. 그리고 일본말보다 한국말이 더 친근하게 들리는곳이 대마도이니 언어의 장벽이 조금도 없어 편한다.
한가지 단점으로는 대중교통 수단이 발달하지 않아 좀 불편하다. 대마도의 인구가 많지 않아 그러니 어쩔수 없다. 이즈하라에서 차를 렌트해서 돌아다니면 편할 것이다. 이즈하라 일대는 가볍게 걸어다녀도 하루면 대부분의 관광을 할 수 있으니 차분하고 한가롭게 거닐어 보는 것도 재미일 것이다.
그래도 외국이라고 밤에는 선술집에라도 둘러 한잔의 술로 낭만을 즐겨도 된다. 가격은 그렇게 비싸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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