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鶴)의 오딧세이(Odyssey)

영주 소수서원 - 최초의 서원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 - 소수서원(紹修書院)

 

 서원은 조선의 선비들이 공부하던 곳이다. 그런데 역사나 유학에 관심 있는 사람들 빼고는 서원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거나 알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서원을 지나간 시대의 유산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얼마든지 교육적으로활용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유산이다

 소백산 비로봉으로부터 흘러내리는,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시원해지는 맑은 죽계천가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우리나라 사립교육기관의 첫 발자취인 소수서원이 있다. 소수서원(紹修書院)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다.

 소수서원은 주세붕(周世鵬)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풍기 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은 우리나라 성리학의 선구자 문성공 안향 선생이 젊어서 공부하던 이곳 백운동에 1542에 영정을 모신 사묘(祠廟)를 세웠다. 이듬해인 1543811일에 완공하여 안향의 영정을 봉안하고, 중국에서 주자가 세운 백록동서원을 본떠 사당 동쪽에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같은 해에 설립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 후 퇴계 이황이 풍기 군수로 부임하면서 명종 5년에 왕에게 진언을 올려 紹修書院’(소수서원)이라는 현판을 하사받아 최초의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면서, 조정에 의하여 서원이 성리학의 정통성을 인정받는 계기가 된다. 소수서원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 살아남은 47개소에 들었으며 사적 제55호이다.

 

 

소수서원 표지비

 

 

소수서원 입구

 

 

가을이 짙게 물든 죽계천

 

 

 

 

소수서원 입구의 풍경

 

 

안축의 고려 경기체가 '죽계별곡'

 

 안축은 안향의 삼종손(三從孫)이다. 그가 지은 관동별곡(關東別曲)죽계별곡(竹溪別曲)은 이름난 경기체가(景幾體歌)로 국문학사상 귀중한 사료이다.

 

 

 

소수서원 입구 앞의 풍경

 

 

 

소수서원 입구 이정표

 

 

소수서원 입구

 

 

소수서원 건물 배치 설명판

 

 소수서원 입구에는 은행나무 두 그루가 서 있고, 바로 그 지점에서 지면이 한 단 높아져, 이곳부터 서원 경내임을 알 수 있다. 서원 출입문인 사주문(四柱門)으로 통하는 길 왼쪽으로는 성생단(省牲壇)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죽계수(竹溪水)가 내려다보이도록 지은 경렴정(景濂亭)이 있다

 

 

 

 

지락재(至樂齋)와 학구재(學求齋)

 

 

영정각

 

 

주자와 안축

 

 

주세붕과 ???

 

 

허목과 이원익

 

 

장서각

 

 

 

 

문성공(안향)묘

 

현판 글씨는 중국 명나라 사신 주지번()이 썼다. 사방에 흙담을 둘러 다른 공간과의 위계를 구분하고 있다. 매년 3월, 9월 초정일()날 제향을 올린다. 현존하는 초상화 가운데 가장 오래 되었다고 전하는 안향의 초상화(국보 111), 안향이 원나라에서 가져왔다는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殿, 보물 485)가 안치되어 있다. 명호를 사()가 아닌 묘()로 지칭하는 몇 안 되는 사당 중의 하나로, 문성공묘의 품격을 짐작할 수 있다.

 

백운동정자

 

 

 

 

 

경렴정

 

 경렴정은 원생들이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던 정자이다. 정자의 이름 '경렴정'은 북송의 성리학자인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頣)를 경모하는 뜻으로 그의 호에서 빌어왔다.

 

 

경자바위와 취한대 설명판

 

 경렴정 동쪽에서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죽계 건너편에는 물가로 튀어나온 경자바위[敬字岩]가 있는데, 거기에 새겨진 ''자는 주세붕이 백운동서원을 창건하고 쓴 글씨이다. ''은 성리학에서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는 수양론의 핵심으로, 선비들의 지침이 되었다. 퇴계는 풍기군수로 있을 당시 이곳에 송백과 죽을 심어 취한대(翠寒臺)라고 이름짓고, ''자 위에 '백운동' 석 자를 써서 음각하고 이곳의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경자바위와 취한대

 

 

안내판

 

 

 

소수서원 표지비

 

 

 

 

일신재

 

 

영귀천(우물)

 

 

 

 

 

소수서원 주변 풍경

 

 서원은 오늘날로 보면 사립교육기괸이다.

과거에는 글을 배우고 학문은 익히는 것은 양반만의 특권이었다. 글을 익힌 양반은 과거에 응시하여 관직에 나가는 것이 꿈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관직에는 초탈하게 자연을 벗삼아 풍류를 즐기면서 학문을 도야하는 사람들도 있엇으니 그들을 선비라고 칭하기도 한다. 학문을 실제 생활에 응용하여 국태민안을 위해 사용하였든가 자신의 인격을 도야하며 청정하게 삶을 살아왔든가 간에 하여튼 이곳은 선비들의 수양처이다. 현대에서 보면 고리타분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우리 조상들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곳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우리의 옛 자취를 무시하는 버릇이 좀 생긴 것 같다.

 지나간 과거를 무시하고 오늘이 있을 수는 없다. 현재는과거의 토대 위에서 만들어진 것이고, 또 미래는 현재를 토대로 하여 만들어진다. 도도한 역사의 흐름에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는 없다.

 

 온고이지신이라고 옛것을 토대로 하여야 풍족한 현재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수서원은 어린 학생들에게 우리 선현들의 모습을 볼 수 있게 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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