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鶴)의 오딧세이(Odyssey)

중국 운남 여행 2 - 쿤밍, 구향풍경구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울창한 삼림 속의 석회암 동굴지대 - 구향풍경구

 

아침에 일찍 일어나 구향풍경구로 가기 위해 동부터미널로 향했다. 구향풍경구로 직접 가는 버스가 없어 쿤밍에서 이양으로 가서 다시 구향으로 가는 버스를 갈아타고 구향풍경구 입구에 도착하니 벌써 점심 때가 되었다. 아침에 일찍 서둘렀기에 아침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부실하게 먹었기에 좀 빠르지만 먼저 점심을 해결하고 풍경구 관람을 하기로 하고 길거리에 있는 음식점에 들러 점심을 해결했다.

 

 주샹 동굴(Jiuxiang Cave)이라고 불리는 구향풍경구는 쿤밍에서 동쪽으로 90Km 정도 떨어져 있는 전체 면적이 277로 중국 3대 종유굴 중 하나로 울창한 삼림 속에 있는 석회암 동굴지대로 한 여름에도 서늘해 피서지로 인기가 많은 곳이다. 1984년에 발견되었으며 1994년에 국가지정 풍경명승구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총 66개의 동굴 중 일부만 관광객에게 공개하고 있는데 입장권을 구입하고 한참을 아래로 내려가면 드디어 동굴 입구가 보인다. 동굴은 협곡 구간, 동굴 구간, 로프웨이 구간으로 나뉘는데 루트를 따라 차례로 관람하면 된다  

 

 

구향동굴 신전의 모습

 

 

 

구향풍경구 입장권

 

 

음취협 보트 승선권

 

 

점심으로 먹은 국수

 

 

구향풍경구 입구

 

 

 

 

구향풍경구 투어 설명판

 

 

음취협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트

 

 

석벽에 새겨져 있는 구향풍경구 음각

 

 입구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취협'으로 내려가면 바로 보트 선착장이 나온다.

취협 보트 투어는 약 600m의 짧은 구간이지만 깍아지른 계곡의 웅장함이 압권으로 래프팅을 즐기는 코스이다. 보트를 운행하는 사람들이 따로 있으므로 관광객들은 높이가 50m 달하는 협곡을 둘러싼 양안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풍경을 한가로이 즐기면 된다. 보트를 타고 유유히 펼쳐지는 풍경이 관람객의 눈을 사로잡는다.

 

 

이정표

 

 

 

보트를 타러 가는 도중의 풍경

 

 

 

 

 

 

 

 

 

 

 

 

 

 

 

음취협의 풍경과 보트를 즐기는 사람들

 

 

 

 

 

 

보트를 내려 주상동굴로 가는 도중의 풍경

 

 레프팅이 끝나면 보트는 경혼협(凉魂峽) 아래 정박하는데 이제 본격적인 동굴 투어의 시작이다. 협곡 구간을 지나 나타나는 동굴 구간 안에는 석순과 종유석이 가득하며 이곳저곳에서 빛나는 화려한 색채의 조명으로 더욱 눈부시다. 동굴은 30m 높이의 자웅폭포(雌雄瀑布), 우리나라 계단식 논처럼 생긴 연못 신전(神田), 혼협(魂峽), 웅사대청(雄獅大廳), 신녀궁(神女宮), 이가채(彛家寨), 지하도림석(地下倒林石), 취협(翠峽), 여유(旅遊) 9개 지역으로 나뉜다. 무지막지한 수압으로 높이 30m에서 떨어져 내리는 자웅 폭포(雌雄瀑布)와 중국내 수 많은 동굴에서도 찾아 볼수 없는 신기한 경관을 자랑하며 자연적으로 형성되었다는 계단식 논 모양의 신전(神田)은 보는 이의 탄성을 절로 자아낸다. 동굴 안에는 동굴 음악회가 열렸다는 웅사대청(雄獅大廳)과 이 지역의 소수민족인 이족(彛族)이 공연하는 동굴 공연장인 이가채(彛家寨)도 있다. 정해진 시간에 공연하므로 시간대가 맞다면 공연을 볼 수 있다. 동굴 안에는 그림벽화나 사냥을 하고 살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대부분의 명소에는 한글명칭이 붙어있고, 간단한 설명도 되어 있어 편리하다.

 

 

 동굴 내부는 상당히 미끄러우니 반드시 편하고 미끄러움에 강한 신발을 신도록 하자

 

 

 

 

구향동굴입구

 

 

 

 

신녀궁

 

 

옥수경화

 

 

 

 

 

 

곳곳에 조명을 밝혀 빛나는 종유석과 석순들

 

 

 

자연이 만든 경이로움 : 신전(뒤에 다시 나옴)

 

 

 

선옹취와(신선이 취해서 누워 있다.)

 

 

용봉쌍축

 

 

 

 

 

 

 

형형색색의 석순과 종유석

 

 

와현호굴 설명퍈

 

 

 

 

 

천항 설명판

 

 

동굴안에서 하늘을 바라볼 수 있게 뻥 뚤려 있다.

 

 

 

소수민족의 아름다운 복식

 

 

변석패 설명판

 

 

 

 

 

 

 

 

오랜 시간의 용융과 침식등의 자연의 변화로 칼슘과 마그네숨 등이 쌓여서 기묘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관음청폭

 

 

 

 

 

 

 

동굴 안을 흐르는 냇물이 폭포를 이루고 있는 모습

 

 

자웅폭포 설명판

 

 

 

 

 

 

 

신전의 여러 모습

 

 

구조동굴 설명판

 

 

 

 

억년의 미소

 

 

소수 민족의 공연

 

 

소수 민족 여인의 머리 장식

 

 

 

악어 석판

 

 

악어 석판 설명

 

 

구향동굴표지

 

 

풍취석만 설명

 

 

종유석이 거꾸로 달려 있는 모습 : 마치 석림을 연상하게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동굴을 구경하였다. 하지만 땅이 큰 대륙의 동굴은 우리나라 동굴보다 크기가 다르다. 종유석이나 석순들은 우리나라에도 볼 수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었던 여러 자연의 경이로움이 빗어낸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이 큰 행운이다.

 구향동굴을 나오면 로프웨이(리프트)를 타는 곳까지는 제법 오르막 구간이다. 그래도 그 구간을 힘겹게 올라가면 허공을 가르는 리프트를 탄다. 공중에서 보는 구향동굴의 모습은 원시림에 둘러 쌓여 있다. 좀 전에 구향동굴안에서 천항으로 보던 광경이 리프트에서 보인다.

 

 

 

허공을 가로질러 있는 리프트

 

 

 

 

구향동굴의 외부 모습

 

 

리프트 하차장

 

 리프트를 타고 내려 오면서 모자를 잃어 버렸다. 모자를 쓰고 있는데 바람이 엄청 세게 불었다. 허공에 매달려 있으니 어찌 할 수가 없이 바람에 모자가 벗겨져 날아가 버렸다. 여행 초반에 부주의한 나의 행동에 대한 대가를 치렀다. 이 대가로 여행에 좀 더 조심해야겠다는 경각심을 가졌다.

 

 구향풍경구를 일주하고 나니 어느 새 시간이 많이 흘렀다. 다시 버스를 타고 이양으로 가서 쿤밍으로 돌아오니 벌써 저녁 때가 제법 지났다. 쿤밍역 주변을 좀 구경하다가 저녁을 먹고 슈퍼에 둘러 내일 리장으로 갈 준비를 하였다. 내일은 하루 종일 리장으로 이동을 하여야 한다. 쿤밍은 이 여행의 마지막을 다시 쿤밍에서 마무리할 것이기에 그 때 시내와 다른 구경을 하기로 하고 리장으로 향하기로 결정했다.

중국 운남 여행 1 - 쿤밍, 석림풍경구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특이한 카르스트지형 - 쿤밍 석림풍경구

 

 운남을 다녀 온 지가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운남 여행기를 쓸까? 말까? 하고 고민을 좀 하였는데, 결국은 약 한 달간을 배낭을 메고 운남의 기차나 로칼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여행한 동서남북을 나의 여행의 자취이자 생생한 여행기를 쓰기로 한다.

 

 윈난성(雲南省:운남성) 약칭하여 '뎬(滇)' 또는 '(云)'이라고 하며, 성도(省都)는 쿤밍[昆明]이다. 중국의 남서쪽 변경에 있으며, 미얀마, 라오스, 베트남과 인접하여 있다. 윈링(云岭)의 남쪽에 있다 하여 윈난(云南)이라고 이름하였다. 대부분의 지역이 윈구이(雲貴) 고원에 위치해 있어 기후가 온화하여 농업이 발달하였고, 쿤밍에서는 기계, 석탄, 전력, 화학공업이 발달하고 있다.

 

 아시아 대륙에서 고대 인류의 요람지로서 400만 년 전부터 '동방인(東方人)'인 위안머우원인(元谋原人)이 살았으며, 187만 년 전에 이미 직립보행을 하던 위안머우인(元谋人)이 거주하였다. 원나라 이후에 개간과 채광을 위하여 많은 인구가 이주해왔고, 항일전쟁 시기에도 대량의 인구가 유입되었다. 주민은 한족(汉族)52개 민족이 있으며, 소수민족의 비율은 약 33%이다. 소수민족은 노래와 춤에 능하며, 4월 중순에 열리는 타이족의 물뿌리기 축제와 6월 하순에 열리는 이족의 횃불 축제, 타이족의 독특한 대나무 건축 등 다채로운 문화를 이룬다.

 

 처음 운남 일대를 여행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쿤밍으로 가는 비행편을 조사하고 교통편을 조사해 보니 쿤밍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교통편이 상당히 불편한 것 같았다. 하지만 기우였다. 공항에서는 시내로 가는 셔틀 버스가 매우 많아 편리했다. 특히 숙소로 잡은 호텔이 공항버스의 종착지라 더 편리했다. 홍콩을 거쳐서 쿤밍에 도착하여 숙소인 Jin Jiang 호텔로 가니 호텔이 시내의 번화가였고, 쿤밍역에서 가까이 있어 북적거리는 곳이었다. 일단 숙소에 짐을 풀고 쿤밍역으로 가서 내일 갈 석림의 열차표를 구입했다. 석림을 가는 교통편을 대개는 버스를 이용하지만 기차를 타고 가 보기로 하고 표를 구입했다. 쿤밍역은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것이 우리나라 어디에도 그런 곳은 없는 것 같았다. 중국이 인구가 많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는 곳이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석림으로 가는 기차를 타러 역으로 가서 기차를 타니 기차의 객차가 우리나라 1960년대의 구식이었고, 지극히 느린 완행이었다. 하지만 이 기차에서 중국인들의 삶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 또 좋은 경험이었다.

 

 

석림표지

 

 

 

쿤밍에서 석림으로 가는 기차

 

석림역에 도착하여 돌아가는 기차를 확인하니 시간이 맞지 않았다. 어떻게 할 수 없어 돌아갈 때는 버스를 타기로 하고 역을 벗어나니 벌써 돌기둥이 곳곳에 보인다. 역에서 택시를 타고 석림으로 갔다. 석림 입구에서 입장권과 전기차이용 티켓을 구입하고 먼저 점심을 먹었다. 일찍 출발하여 아침을 좀 부실하게 먹었기에 점심을 좀 일찍 먹었다.

 

 

석림역

 

 

석림입구 티켓 매표소

 

 

석림입장권

 

 

석림전기차탑승권

 

 

석림안내도

 

 

석림조감도

 

 

 

 

 

점심으로 먹은 돈육면 : 자기가 알아서 양념과 소스를 넣어 먹어야 한다. 상당히 맛있다.

 

 

 

 

석림 들어가기전의 입구 풍경

 

 약 27천만 년 전에 형성된 윈난석림(云南石林) 풍경구는 전형적인 카르스트지형으로 기암괴석 봉우리가 숲을 이루고 있는 세계적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천하제일경관으로 불리고 있다. 석림의 주요 경관으로는 소석림, 대석림, 석림장호(石林长湖), 부초산(步哨山), 리자원천(李子园箐), 기풍동(奇风洞), 석림지운동이 있다. 풍경구는 산과 물이 어울리고 동굴과 폭포, 지하수가 서로 엇갈려 있어 관광객들에게 선경에 온 느낌을 준다. 높이는 보통 510m이나 가장 높은 것은 3040m에 이른다. 최근 석림 동북부의 버섯 모양으로 생긴 링즈림(靈芝林)은 나이구스린(乃古石林) 또는 헤이쑹옌(黑松岩)으로 부른다. 윈난스린에서 유일하게 석회동굴인 곳이 있는데, 동굴 꼭대기에 남아 있는 파도의 흔적이 마치 하늘의 구름과 비슷하여 예로부터 바이윈둥(白雲洞)이라고 부른다. 석림부근에는 쯔윈둥(紫雲洞), 톈성교(天生橋), 창호(長湖), 웨호(月湖), 다뎨수이(大疊水) 폭포 등 유명한 관광지가 많다. 윈난의 석림(石林)2007UNESCO의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석림 들어가는 문

 

 석림 출입구를 통해 들어가면 거대한 인공호수를 만난다. 역시 중국은 땅덩어리가 크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호수의 크기가 장난이 아니게 크다.

 

 

석비

 

 

 

 

석림의 호수 -돌기둥이 보인다.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표시

 

 

석림 설명판

 

 

 

 

 

 

석림 초입의 석병풍 돌기둥

 

 

석병풍 설명판

 

 

 

 

 

 

돌기둥에 무슨 글귀를 그렇게 많이 새겨 놓았는지....

 

 

 

 

 

 

망봉정 올라가는 깅에 보는 박쥐 모양의 돌기둥

 

 제법 높은 곳에 위치한 망봉정으로 올라가는 길은 아주 좁은 길이었다. 하지만 망봉정에 올라 사방을 둘러 보면 힘이 들더라도 이 망봉정에는 꼭 올라가야 함을 느낄 수 있다.

 

 

 

 

 

 

 

 

망봉정에서 보는 사방의 석림

 

 

망봉정 설명판

 

 

망봉정을 내려오면서 멀리 보이는 망봉정을 찍었다.

 

 

 

 

망봉정에서 점봉지로 내려오는 길 풍경

 

 

석림안에 있는 점봉지 설명판

 

 

암벽 사이의 굴을 지나가면 점봉지가 나온다.

 

 

 

 

 

 

돌기둥에 둘러 쌓인 점봉지

 

 

 

 

거대한 돌기둥에 석림이란 글자가 선명하게 보인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석림 앞 - 멀리 망봉정이 보인다.

 

이제부터는 석림의 내부에서 벗어나 전기차를 타고 석림 외부를 한바퀴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석림은 내부의 모습도 아름답고 좋지만 한가로이 전기차에 앉아서 주변을 완상하면서 보는 풍경도 일품이다.

 

 

 

 

 

 

 

전기차에서 보는 석림의 외부 풍경

 

 

 전기차를 타고 다니다 소석림지구에 내려서 소석림지역을 구경했다. 소석림지역은 벚꽃이 화려하게 피어 들어가는 입구부터 화사했다. 지금까지 본 대석림 지구의 돌기둥이 웅장하고 거대한데 비하여 소석림지역의 석림은 아기자기한 맛이 있다.

 

 

 

 

 

소석림 표지판

 

 

 

 

소석림 내부의 못

 

 

소석림에 핀 벚꽃

 

 

 

소석림의 여러 모습

 

소석림을 나오면 호수 위에 마련된 무대에서 소수민족인 나시족의 민속 춤이 시간에 맞추어 공연을 한다. 돌아다니다 다소 피곤함을 느낄 무렵에 객석에 앉아 공연을 즐기면서 망중한을 즐기면 된다. 꼭 잊지 말고 보기를 권한다.

 

 

 

 

 

 

 

 

 

 

 

 민속춤 공연을 보고나니 어느 새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천천히 입구로 걸어가면서 나머지 풍경을 완상하였다.

 

 

 

 

 

중간에 보이는 이정표

 

 

 

 

 

 

 

입구로 나오면서 보는 여러 풍경

 

 어느 새 쿤밍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무려 5시간 정도를 석림풍경구를 돌아보았다. 전부를 다 보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많이 본 것이다. 투어를 따라다니며 한시간 정도로 겉만 보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내 발로 걸어다니며 대부분의 풍경을 본 것 같아 만족스럽다.

 

 쿤밍으로 돌아오는 버슨느 약 1시간 30분이 걸려서 쿤밍동부터미널에 내려준다. 갈 때 기차는 약 3시간이 걸렸다. 여기서 다시 중앙터미널로 가는 버스를 타고 쿤밍역으로 가서 다음에 갈 리장행 열차표를 미리 예약했다. 여행을 다니면서 가지고 있는 원칙이 항상 다음 여정의 차편을 미리 예약하는 것이다. 그것이 아주 편리하다.

 

 여기서 쿤밍의 버스체계를 간단히 셜명하겠다. 처음에는 대단히 혼란스러웠는데 알고 보니 단순했다. 쿤밍에는 동서남북과 중앙에 모두 더섯 개의 터미널이 있고 각 터미널로 가는 버스가 연결되어 있다. 땅이 넓은 곳이라 그런지  각 지역으로 가는 버스가 다 다른 터미널에서 출발한다. 그러니 자기가 머물고 있는 곳이 어딘지를 빠리 파악하고 자기가 가야하는 곳이 어디에 있는 터미널에서 출발하는지를 알고 시내에서 터미널간 버스를 이용해서 가야 한다. 이런 설명이 아무 곳에도 없어 처음에 좀 당황하였다.

 

 하루를 마치면서 맛있는 저녁을 먹고 숙소로 돌아와 내일을 위해 잠을 청했다.

국립중앙박물관 - 우리 역사의 흔적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우리의 삶을 볼 수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은 우리 역사와 문화의 중요한 가치를 배우고 즐겁게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곳에는 구석기시대의 소박한 손도끼에서부터 삼국시대의 화려한 금관, 고려시대의 청자, 조선시대의 회화, 근대의 사진들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역사와 문화예술이 한데 모여 있다.

 6개의 상설전시관과 다양한 주제로 기획된 크고 작은 전시, 관람객의 이해를 돕기 위한 여러 가지 전시안내프로그램, 신나는 어린이박물관과 다채로운 교육 프로그램들은 더 편안하고 재미있게 박물관을 체험하고 보다 많은 문화향유의 기회를 누릴 수 있게 한다. 수목이 우거져 상쾌함을 주는 박물관 정원은 차분히 산책하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홈페이지에서 발췌)

 

 국립중앙박물관은 역사가 꽤나 기구하다. 현재 연혁의 시작을 순종황제가 지은 제실박물관으로 상정해 놓았다. 지금의 국립중앙박물관 컬렉션의 기초는 조선총독부 박물관과 이왕가박물관, 그리고 송석하가 지은 남산의 국립민족박물관 소장품을 합친 것이다. 그러다가 1946년에 덕수궁 안의 석조전 건물에서 개관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후 경복궁 경내의 총독부박물관 자리에 그대로 있다가 한국전쟁으로 부산으로 피난가게 되었다. 1953년 휴전 이후 서울로 오면서 경복궁 경내로 돌아왔으나 그해 11월에 덕수궁 석조전으로 이전하였고 이듬해 2월에 개관하였다. 그 뒤 1972년에 지금의 국립민속박물관 건물을 신축해 이전하였다.

 이후 미군 용산기지 골프장을 돌려받아 조성된 용산가족공원 내에 크고 아름다운 건물을 지어서 2005년에 안착하여 비로소 지금의 형태로 개장하였다. 현재 앞마당에 국립한글박물관이 201410월 개관하였으며 차후 주변 부지도 기증 받아 국립민속박물관을 이전하고 전쟁기념관까지 연결하여 거대한 뮤지엄 파크를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전경

 

 

 

 

 

 

박물관 앞마당의 연못과 정자

 

 

박물관으로 들어가는 입구 계단

 

 

 

 

입구 계단에서 보는 앞마당 연못

 

 

 

 

전시관 입구

 

 

전시관 내부 전경

 

 

 

전시관 안내판

 

 * 엄청나게 많은 전시물이 있다. 그 중에서 각 전시관의 중요한 유물을 한 두개씩만 보겠다.

 

 먼저 선사·고대관으로 발을 옮겼다. 선사·고대관은 구석기시대부터 남북국시대까지 우리 역사와 문화를 시대별로 살펴볼 수 있게 전시해 놓았다. 우리 조상들이 남긴 생활용품과 도구, 예술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세련된 모습을 보여주는 돌칼

 

 

 

 

낙랑 무덤 출토품

 

 

 

 

 

평안남도 남포시 쌍영총의 널길에 그려진 벽화(말탄 사람의 그림)

 

 아래의 벽화가 그 유명한 강서대묘 사신도이다.

동쪽에는 청룡이 서쪽에는 백호가 남쪽에는 주작이 북쪽에는 현무가 그려져 있다.

아마 중, 고등학교 시절에 익히 들었을 것이다.

 

 

 

 

 

 

 *백제관에서는 화려한 문양의 전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철의 왕국이라고 부르는 가야관에서는 철기문화의 유물을 많이 볼 수 있다.

 

 

 

 

 

 

 

*신라관의 자랑은 무어라 해도 어난 세공술을 자랑하는 화려한 왕관이다.

 

 

*박물관 내부의 중앙에는 경천사 십층석탑이 위용을 자란하며 서 있다.

 

 

 

경천사 십층석탑

 

*복도를 지나 맞은 편으로 들어가면 통일신라시대와 발해가 우리를 맞이한다.

 

 

 

 

십이지상

 

 발해의 유물을 보는 것은 쉽지가 않다. 발해는 우리가 잃어버린 영토라고 할 수 있다. 저번에 러시아를 여행하면서 우스리스크와 하바롭스크에서 발해의 유물을 보고 발해의 유적지를 갔던 기억이 다시 새롭다.

 

 

 

 

*이제 고려다. 청자가 많이 보이며, 불교를 국교로 한 고려의 불교 유물이 보인다.

 

 

 

 

 

 

*조선과 대한제국실에서는 우리의 과학유산이 많이 보이며, 인쇄술의 발달로 여러 가지의 전적이 눈에 뜨인다.

 

 

 

 

 

 

 

 

 

*내가 간 날에 특별전으로 "지도예찬"을 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여러 지도를 전시하여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자료로 눈을 호사스럽게 하였다.

 

 

 

 

 

 

 

 

 

 

 

 

 

 

 

*1층의 구경을 마치고 2층으로 올라가면 기증한 유물을 전시하는 기증관이 나온다.

 기증관을 구경하고 맞은편에는 여러 종류의 회화를 전시하는 회화관이 있다.

 

 

 

 

 

 

 

 

 

 

 

 

 

 

 

 

 

 공예관과 서화관을 구경하고 난 뒤 3층으로 올라가면 드디어 내가 박물관을 온 주 목적인 반가사유상이 나온다. 이 반가사유상을 보려고 국립박물관에 온 것이다. 한 20여년 전에는 이 반가사유상을 어두운 암실 같은데 전시하고 있었는데, 그 때도 넋을 잃고 한 시간이상이나 본 기억이 있다. 이번에는 보니 밝은 곳에 전시하고 사진을 찍어도 되었다.

 과거에는 무조건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여 안타까웠는데 이제 우리 인식도 많이 변하여 이런 전시물을 사진을 마음대로 찍게 한다. 물론 특수한 유물에는 다소간 금지하는 것도 있으나 그것은 이해할 수 있다.

 

 

 

 

 

 

 

 

반가사유상의 여러 측면

 

 반가사유상을 보고 기쁜 마음으로 나오면 여러 가지의 공예품을 만난다. 사실은 반가사유상을 보고 나니 좀 시들했다. 그래도 여러 공예품을 감상하며 지나오면 외국의 여러 유물을 또 만난다.

 

 

 

 

 

 

물가풍경무늬완과 물가풍경무늬표주박모양 주자

 

 

버드나무무늬 통모양 병

 

 

 

 

*박물관 건물을 벗어나 정원을 거닐면 여러 가지 유물을 만난다.

 

 

 

 

 

조선의 장명등

 

 

 

문 무인석

 

 

 

은녕군 석곽

 

 

오랜만에 국립중앙박물관을 다녀왔다.

 

 예전에 경복궁내에 있을 때는 자주 갔는데 용산으로 옮기고는 그렇게 자주 가지를 못했다. 서울에 갈 때마다 간다고 생각만 하다가 가지 못하였는데 모처럼 시간을 내어 다녀왔다. 내가 간 날은 가을이 늦어가는 시간이었다. 박물관 정원에는 단풍이 아름답게 물들어 눈을 즐겁게 하였다.

 

 여러 유물을 구경한 것도 즐거운 일이지만 반가사유상을 다시 보게 된 것만 해도 만족한 하루였다. 더구나 뜻하지 않았던 특별전 지도예찬까지 보게 된 것은 망외의 소득이었다. 앞으로 자주 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을 다녀오고 난 뒤 갔다 온 곳이 많아 다른 글을 써다 보니 국립중앙박물관을 늦게야 정리하게 되었다.

 

가야국 탄생신화 - 구지봉, 김수로왕릉, 수로왕비릉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고대 왕국 가야의 탄생신화의 현장 - 구지봉, 수로왕릉, 수로왕비릉

 

 김해박물관을 필두로 하여 가락국의 역사와 건국신화가 서린 장소를 찾아 보았다. 벌써 이곳을 돌아 본지도 40년도 더 지나 옛날의 자취를 찾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이곳을 한번 답사해 본다고 생각만 하다가 시간을 내어 김해 일대를 돌아다니며 가야의 옛 정취를 느껴 보았다.

 

 먼저 김해박물관 뒷편에 있는 구지봉을 올라가니 그저 황량한 동산에 불과하다. 신라의 경주나 백제의 부여를 보다가 김해를 보면 아직 가야는 우리 역사에서 많이 잊혀지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구지봉(龜旨峰)은 경상남도 김해시 구산동에 있는 산으로 가야의 시조 가야의 시조 수로왕(首露王)이 탄강(誕降)하였다고 전해지는 곳으로 높이 200m의 산으로 사적 제429호이다원래는 거북 머리 모양을 닮았다 하여 구수봉(龜首峰)이라 하였는데, 지금 수로왕비릉(首露王妃陵:사적 74)이 있는 평탄한 위치가 거북의 몸체이고, 서쪽으로 쭉 내민 봉우리의 형상이 거북의 머리 모양 같다고 하여 이같은 이름이 붙었다.

 

 가야의 건국설화인 구지가(龜旨歌)의 산실로 널리 알려져 역사적인 봉우리로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가야 건국설화에 따르면, 가야 땅을 다스리던 아홉 추장이 구지봉에 모여 제사를 지내는데, 문득 하늘에서 알 여섯 개가 담긴 금합이 붉은 실에 매달려 내려왔다. 그 알 여섯 개가 차례로 깨어지며 아이가 하나씩 나왔다고 한다. 그 가운데 맨 먼저 나온 이가 가락국의 시조인 김수로왕이 되었다고 전한다.

 

 산봉우리 동쪽에는 수로왕비 허왕후릉(許王后陵)이 자리 잡고 있다. 구지봉 정상에는 1908년에 건립된 대가락국태조왕탄강지지(大駕洛國太祖王誕降之地)’라고 새겨진 비가 있다. 정상부에는 기원전 4세기경의 것으로 보이는 남방식 고인돌이 있다. 고인돌은 56개의 짧은 받침돌 위에 지름 2.5m 정도 되는 덮개돌이 덮여 있고 그 위에 한호(韓濩)가 쓴 것이라 전해지는구지봉석(龜旨峰石)’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거북의 목에 해당하는 부분에 고의적으로 도로를 개설하여 거북 모양의 원래 모습이 훼손되었다고 한다.

 

 

수로왕릉

 

 

김해박물관 뒤의 구지봉가는 길 안내판

 

 

구지봉 고인돌 설명판

 

 

 

 

구지봉 고인돌

 

 

 

구지봉터와 '대가락국태조왕탄강지지' 비석

 

 황량한 구지봉을 뒤로 하고 박물관 반대쪽으로 내려오면 수로왕비릉을 만날 수 있다. 묘하게도 신라나 백제의 왕릉은 많이 있으나 왕비릉이라 밝혀진 것은 없는데 가야의 수로왕비릉은 따로 역사적 유적지로 남아 있다. 하나의 아이러니라고 볼 수도 있다.

 

 

 

수로왕비릉 입구의 구지봉 설명판

 

 

구지가(일명 영신군가) 비

 

 

수로왕비릉에서 보는 구지봉

 

* 김해 수로왕비릉(金海 首露王妃陵)

  

 수로왕비릉은 경상남도 김해시 구산동(龜山洞)에 있는 가야시대의 능묘로 사적 제74호다. 지정면적 32,920. 무덤의 지름 16m. 높이 약 5m로 왕비는 인도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로 성은 허() 이름은 황옥(黃玉)이라고 알려져 있다. 금관가야 시조인 수로왕의 비로 허황후(許皇后)라고도 한다. 김해김씨(金海金氏)김해허씨(金海許氏)의 시조모로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에 따르면 본래 인도의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인데 상제(上帝)의 명을 받아 공주를 가락국 수로왕의 배필이 되게 하였다. 그녀가 인도 아유타국에서 왔다는 것은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후에 윤색된 것으로 보이며, 본래의 시조설화에는 왕후가 먼 바다를 건너온 것으로 되어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대형의 원형 토분이나 특별한 시설은 없다. 능의 전면에는 장대석(長大石)으로 축대를 쌓고 주위에는 범위를 넓게 잡아 얕은 돌담을 둘렀다. 능 앞에는 1647(인조 25) 수축 때 세운 '가락국수로왕비 보주태후허씨릉(駕洛國首露王妃 普州太后許氏陵)'이라고 2행으로 각자(刻字)한 능비가 있다.

 

 

수로왕비릉 입구

 

 

수로왕비릉 안내도

 

 

 

 

수로왕비릉 전경

 

 수로왕비릉 앞에 조그마한 비각이 있는데 이곳에는 석탑이 보존되어 있다. 역시 허황후의 설화가 서려 있는 석탑으로 파사석탑이라 한다.

 

 * 파사석탑[ 婆娑石塔 ]

 

 경상남도 김해시 구산동의 수로왕비릉 구역에 있는 가야시대의 석탑으로, 수 천 년 전, 운명적인 사랑을 꿈꾸던 소녀가 있었다. 어느 날 부모님 꿈에 하늘의 상제가 나타나 배를 타고 동쪽 끝까지 올라가 닿는 나라에 딸의 배필이 있다고 알려준다. 그 말을 들은 딸은 부모의 말에 따라 배를 타고 고국을 떠났다. 하지만 거친 파도가 문제였다. 몇 번이나 항해에 실패하자 소녀의 아버지는 파도를 잠재우는 신령스러운 탑 파사석탑을 배에 실었다. 진풍탑인 파사석탑의 보호 아래, 소녀는 무사히 가락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 이야기는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나오는 설화이다. 소녀의 이름은 허황옥. 가야 김수로왕의 황후로 알려진 인물이다.

 

 원래 호계사(虎溪寺)에 있었는데 폐사(廢寺)된 뒤 부사 정현석이 현재의 자리로 옮긴 것이다. 탑의 부재(部材) 5층만 남아 있는데 조각이 기이하고 돌에 붉은 빛이 도는 희미한 무늬 같은 것이 남아 있다. 신농본초(神農本草)에 닭볏의 피를 찍어서 시험했다는 것이 바로 이 탑이어서 신비를 더하고 있다.

 

 

파사석탑 설명판

 

 

 

 

 

파사석탑

 

 

수로왕비릉 설명판

 

 

 

 

단순한 토분인 수로왕비릉

 

수로왕비릉을 뒤로 하고 수로왕릉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제법 걸어가면 웅장하게 보존되어 있는 왕릉이 나온다. 어느 시대의 왕릉보다 더 보존이 잘되어 있다. 큰 규모를 자랑하며 많은 부속 건물이 도열해 있어 하나의 왕릉으로는 엄청난 규모를 자랑한다.

 

 * 김해수로왕릉[ 金海首露王陵 ]

 

 수로왕릉(首露王陵)은 사적 제73호로, 가락국(駕洛國), 곧 금관가야의 시조이자 김해김씨의 시조인 수로왕(재위 42199)의 무덤으로 납릉(納陵)이라고 부른다. 경상남도 김해시 가락로93번길 26 (서상동)번지에 있다. 1963121일에 사적 제73호로 지정되었다. 수로왕릉은 2011728일에 김해 수로왕릉으로 공식명칭이 변경되었다.

 

 수로왕에 대한 이야기는삼국유사』「가락국기(駕洛國記)에 전하고 있으나 무덤이 정확히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왕릉의 외형은 원형봉토분으로 무덤의 높이는 약 5m이다. 봉분 이외에 아무런 시설도 없는 원형 토분이다. 1580(선조 13) 영남관찰사 허엽(許曄)이 왕릉을 수축하여 상석 · 석단 · 능묘 등을 갖추었고, 1647(인조 25)에 가락국수로왕릉(駕洛國首露王陵)이라 새긴 능비가 있다.

 

 왕릉의 경내에는 신위를 모신 숭선전(崇善殿)안향각(安香閣), 전사청(典祀廳제기고(祭器庫납릉정문(納陵正門숭재(崇齋동재(東齋서재(西齋신도비각(神道碑閣홍살문·숭화문(崇化門) 등의 건물이 있다. 아울러 신도비·문무인석(文武人石마양호석(馬羊虎石공적비 등의 석조물이 배치되어 있다.

 

 무덤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580(선조 13)에 당시 영남관찰사이며 수로왕의 후손인 김허수가 수로왕비릉(허왕후묘)와 더불어 대대적으로 개축한 뒤였다.

 

 

수로왕릉 하마비

 

 

수로왕릉 설명판

 

 

수로왕릉의 대문인 숭화문

 

 

입구에서 보는 수로왕릉 전경

 

 

납릉(수로왕릉) 정문

 

 

 

 

 

 

 

수로왕릉의 여러 모습

 

 

 

숭신

 

 

 

신도비

 

 

 

연화대석

 

 

멀리서 보는 수로왕릉

 

 

숭정각

 

 

문을 열어 놓지 않아서 보이는 듬 사이로 찍은 존영

 

 

포덕문

 

 

숭안전

 

 

숭인문

 

 

숭선전 설명

 

 

숭선전

 

 

안향각 설명

 

 

안향각

 

 

 

숭안전

 

 

숭안전 설명

 

 

 

 

숭안전에 모신 8왕의 표지석

 

 

 

 

숭모전

 

 

숭경문

 

 

 

경모문

 

 

 

사적 73호 수로왕릉 표지석

 

 구지봉과 수로왕비릉, 그리고 수로왕릉은 교육의 장소로 좋은 곳이다.

 

 모두들 중학교나 고등학교 시절에 학교에서 '구지가'를 배웠을 것이다. 그리고 그 노래에 얽힌 신화적 세계를 공부하였을 것이다. 이곳이 바로 그 역사의 현장이다. 가야국의 건국신화가 서려 있는 역사적 장소이다. 그뿐 아니라 또 하나의 설화인 수로왕비의 이야기도 신화적인 이야기를 벗어나 동화적인 이야기로 우리에게 아름다운 이야기로 전해 온다.

 

 이 역사적인 장소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더 잘 가꾸어져 있다. 우리는 신라의 경주나 백제의 부여는 잘 찾아가지만 가야의 김해는 찾아가는 경우가 더물다. 왜 그럴까? 누군가는 말했다. 가야는 잊혀진 왕국이라고.....

 

 하지만 가야는 엄연하게 우리 역사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가야의 찬란한 문화는 일찍부터 일본에 전하여졌다고 알려져 있다. 일본 대마도에 가면 일본 신화의 신사가 있는데 이 신사의 문은 정확히 우리나라 김해를 향하여 있다. 바로 가야가 그들의 고향이라는 이야기이다.

 

 좀더 이 가야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일혀져 가는 우리 역사를 올바르게 되살려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바로 가야의 역사적 출발인 이 김해를 많이 찾아보기를 희망한다.

 

김해국립박물관 - 가야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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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의 왕국 가야를 간직한 국립김해박물관

 

 1998. 07. 29에 개관한 국립김해박물관은 가야 문화권의 유물을 집대성하여 시대별 문화 흐름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가야 문화의 이해와 우수성을 알리기 위하여 건립된 고고학 전문박물관이다. 연건평 9,574의 규모로 경상남도 김해시 가야의길 190(구산동 232번지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산하의 국립 박물관으로, 부산김해경전철 박물관역에서 가까워 접근이 편리하며, 주변에 구지봉, 수로왕릉, 수로왕비릉, 연지공원, 대성동고분군 등의 유적이 있어 교육의 장소로 좋은 곳이다.

 

 건물 전체를 검은 벽돌로 외장하여 철광석과 숯의 이미지로 철의 왕국 가야를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전시실과 전시실로 나뉘어져 있는데, 전시실에는 가야 문화의 기반이 되는 선사시대와 변한 및 전기 가야를 대표하는 금관가야 유물이 총망라되어 있고, 전시실에는 각 지역별로 형성된 가야 문화의 독창성과 변화상을 보여주는 각종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전시물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각종 복원 모형과 첨단 영상시설을 설치하여 가야 문화상과 유물의 용도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꾸며졌다. 1300여 점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부산김해경전철을 타고 박물관역에 내려서 박물관을 향해 걸어가면 여러 가지의 조형물을 만난다.

 

 

국립김해박물관에 전시된 가야의 금동관

 

 

춤추는 시계탑

 

 

민주운동가 김병곤 추모 조형물

 

 

 

 

김종출선생 문학비

 

 

 

 

국립김해박물관 전경

 

 

 

전시실 외양

 

 

전시실 입구

 

 

전시실로 들어가면 보이는 '가야로가는 길'

 

이 박물관은 비교적 시대적 분류를 잘 해 놓고 입간판을 이해하기 쉽게 붙여 놓았다. 박물관의 설명대로 따라가면서 관람을 했다.

 

 

먼저 나오는 석기 시대의 유물들

 

 

 

타제석기와 마제석기들을 볼 수 있다.

 

 

도기를 만들던 시대

 

 

 

제법 생활용기가 갖추어진 시대다.

 

 

차츰 문명의 흔적이 보인다.

 

 

 

동물의 뼈나 조개 껍질 등을 이용하고 있다.

 

 

농경이 시작되다.

 

 

자연물의 채취를 벗어나 농사를 짓게 되다.

 

 

부족국가의 시기

 

 

안전한 도구를 만들고 사용하던 시기의 유물

 

 

무늬와 색을 입히던 시기

 

 

여러 형태의 도기에 무늬가 새겨져 있다.

 

 

바위에 그림을 그리다.

 

 

 

 

바위에 새긴 그림

 

 

 

 

부산 가덕도 유물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배의 유물

 

 

 ※ 이제부터 가야왕국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는 곳이다.

 

 

 

 

 

다호리유적의 특이한 통나무관

 

 

 

 

 

가야왕국의 성립과 발전상

 

 

 

가야의 토기

 

 

철의 왕국 가야의 모습

 

 

 

 

 

 

 

 

아름다운 가야 금동왕관

 

 

 

 

 

가야에서 신라로 넘어가는 시기의 유물

 

 

 

 

 

 

신라의 문화가 가미된 가야의 유물

 

 

 

가야사람들의 생활상

 

 

 

 

토기에 보이는 가야의 집 모양

 

 

토기들

 

 

 

 

다른 박물관에서 보기 어려운 아름다운 새모양 토기

 

 

여러 유물들

 

 

철을 이용해 농기구를 만들다.

 

 

쇠로 만든 농기구들

 

 

다양한 가야 토기들

 

 

 

 

 

 

수레바퀴 모양의 토기

 

 

 

 

 

아주 많은 다양한 토기

 

 

철의 왕국 가야

 

 

 

 

 

갑옷과 말 장식품

 

 

 

 

 

 

 

 

 

말에게도 갑옷을 입히다.

 

 

해상왕국 가야

 

 

 

 

국립김해박물관은 가야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박물관이다. 물론 가야왕국이 성립되기이전에 이 땅에 있었던 문명의 흔적도 보여준다. 즉 김해를 중심으로하는 석기시대부터 이 땅에 살아왔던 사람들의 삶의 흔적을 보여주는 곳이다.

 

 우리에게 가야는 다른 왕조와는 다르게 크게 부각되지 않은 왕궁이다. 어떤 사람들은 잊혀진 왕국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가야는 훌륭한 문화와 역사를 가진 왕국이었다. 우리의 역사가 승자 중심의 역사기술이었던 과거에 가야를 변방의 조그마한 부족 정도로만 생각했으나 그것은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가야는 한 때는 아주 번창했던 왕국이었다. 일본에 고대에 처음 문화를 전파한 곳이 가야였다면 믿을 수 있을까?

 

 일본 대마도의 일본신화의 신사가 정확하게 김해를 향하고 있다.

 

 이 국립김해박물관은 우리의 숨겨져 있던 역사를 잘 볼 수 있는 곳으로 중요한 곳이다.

 

황금문명 엘도라도- 신비의 보물을 찾아서(국립김해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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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도라도 - 피로 물든 전설의 황금의 땅

 

 황금이 넘쳐난다는 전설의 이상향인 거대한 도시로 도시 전체를 금으로 도배했다고 16세기 스페인 정복자들 사이에서 전승되어 왔으며, 대항해시대 당시 스페인 정복자들은 이 엘도라도를 찾으러 혈안이 되었고, 이후에도 영국과 프랑스의 탐험가들이 찾아 나서지만 별 소득 없이 돌아오거나 항해와 탐사 중 사망하였다. 그러나 황금의 땅은 욕망의 깊이에 반비례하여 아직도 사람들의 접근을 거부하고 있다.

 

 사실 엘도라도 전설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황금의 땅 엘도라도의 전설은 다음과 같다.

 

 오리노코강 지류의 수원에 있는 거대한 호수 기슭에 도시를 세워 살던 그 부족의 정식 명칭은 마노아라고 한다. 그들이 살던 도시는 건물에서부터 무기와 모든 생활용품, 그리고 장식품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태양처럼 빛나는 재료를 사용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호수 기슭에 퇴적되는 무수한 사금을 써서 이러한 것들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황금이 그다지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주민들의 신앙에서는 황금이 커다란 역할을 한다. 특별히 매년 한 번씩 치르는 중요한 의식에 황금은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황금으로 만든 둥그런 집에 사는 '태양의 아들', 즉 부족의 왕은 호수 기슭에서 그 의식을 행한다. 그는 전라(全裸)의 몸에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빈틈없이 황금 가루를 바른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등장한다. 황금으로 온몸을 치장한 '태양의 아들'에게 사람들은 더 많은 황금과 보석을 헌납하기 때문에 그의 발치에는 황금과 보석이 산더미처럼 쌓인다. 황금으로 만든 여러 가지 물건들이 산더미처럼 쌓인 뗏목을 타고 호수 중앙에 도착하면 그는 그 황금 헌납품들을 모두 호수 안으로 던져 넣는다. 이것은 호수에 사는 악마에게 드리는 제물이다. 이렇게 해서 의식이 끝나고 왕은 사람들의 환희에 찬 목소리를 들으며 다시 호숫가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나중에 잉카 제국을 정복한 피사로의 부관이었던 남자가 전했다는 체험담이다. 그는 피사로의 지시로 부대를 이끌고 페루를 출발하여 대서양 쪽으로 나올 수가 있었고 그 도중에 만난 것이 이 도시가 엘도라도 즉 '황금향(黃金鄕)'이었다. 엘도라도라는 명칭의 유래는 그가 말한 '황금의 사람' 또는 '황금왕'을 의미한다.

 

 물론 실제로 아직까지 엘도라도를 발견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특히 이 엘도라도로 주목받은 곳이 구아타비타 호수로 해발 2,700미터의 사화산 화구에 생긴 호수이다.  이 구아타비타 호수는 많은 인디오들의 신앙 중심지로서 해마다 많은 순례자들이 이 호수를 찾아와서 제물로 황금이나 에메랄드 물건들을 물속에 던지는 관습이 있었다고 한다만일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호수 밑바닥에는 황금이나 에메랄드 같은 제물이 쌓여 있어서 수중 황금 도시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상상이 사람들을 충동질했다. 그래서 호수의 물을 전부 퍼내는 엄청난 일에 착수했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물이 없어진 호수 밑바닥에서는 작은 황금상이 몇 개 출토되었을 뿐이었다. 호수 밑바닥은 부드러운 진흙이 퇴적되어 마치 한 번 빠지면 빠져나올 수 없는 늪과 같았다. 황금처럼 무거운 물건은 진흙 깊숙이 가라앉아버렸을 것임이 분명했다.

   

 1912, 영국의 콘트랙터즈 사()라는 기업이 당시로서는 최신 기계를 들여와서 호수 밑바닥을 탐색했다. 그리고 호수 밑바닥의 일부를 들어내는 것에 성공했는데 그곳에서 건져올린 것은 시커먼 진흙 덩어리뿐이었다. 그들은 부근 호수도 마찬가지 '조사'를 해서 황금으로 만든 작은 뗏목 황금 몇 점을 발굴했다. 그래도 그 황금 뗏목은 '황금의 사람'을 상상할 수 있을 만큼 정교하게 만든 것이기는 했다.

 

 그 뒤 콜롬비아 정부가 구아타비타 호수를 보호 구역으로 지정하면서 구아비아타 호수의 보물은 전설로만 남게 된다.

 

 이 전설의 문명 엘도라도 황금문명전을 국립김해박물관에서 기획하여 전시하고 있어 시간을 내어 구경을 하였다.

 

 

공식 포스터

 

 

김해박물관 홈페이지에 소개되어 있는 엘도라도전

 

 

박물관 외부의 현수막

 

 

내부의 현수막

 

 

전시장으로 가는 입구

 

 

전시장의 엘도라도 소개 글

 

 

 

 

 

 

 

 

 

 

 

 

 

금으로 만든 각종 세공품

 

 

 

 

 

 

뒤의 실루엣으로 사람의 모습이 형상화 되어 있다.

 

 

 

 

 

 

 

 

 

 

 

 

 

 

 

무이스카 뗏목

 

탐험가들이 그렇게 찾아왔던 엘도라도의 실체를 보여주는 가장 아름답고 귀중한 유물인데 실제로는 보지 못하고 사진만 전시되어 안타깝다.

 

 

 

 

 

 

 

 

 

 

 

 

 

 

 

이 문명에 대해 과문한 내가 무슨 설명을 덧붙이랴. 그래서 전시회에서 설명하고 있는 설명판을 사진으로 찍어서 대신하였다.

 

 하지만 이 전시회를 보고난 나의 감상은 표시할 수 있다.

가장 먼저 가진 느낌은 생각보다는 좀 실망이라는 것이다. 규모면에서도 가장 크게 실망했으며 금 세공품의 세공적인 면에서도 조금은 실망이었다. 어쩌면 우리나라의 박물관에 있는 금 세공품보다 세공 기술이 뒤떨어져 보였다. 그저 투박하게만 보였다. 내가 박물관구경을 좋아하여 우리나라 박물관뿐만 아니라 외국을 여행할 때마다 꼭 구경을 하는 곳이 그 지역의 박물관인데 이 엘도라도전에서는 기대가 너무 컸는지 조금은 실망이었다.

 

 그래도 좋았다. 내가 처음 접하는 문명의 흔적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다. 이 문명전을 보고나니 실제를 보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린다. 언제쯤 가 볼 수 있을런지.....

 

서울대공원 - 식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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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대공원 식물원

 

 1985년도에 개원한 서울대공원 식물원은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청계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으며, 20156월에 서울시 기관으로는 최초로 공립수목원으로 등록하였다.

 주요시설로는 온실식물원, 식물표본전시시설, 테마가든이 있으며, 보유식물로는 관엽식물, 선인장다육식물, 식충양치식물, 장미 등 총 1,26241,989본이 있다.

온실식물원에는 열대·아열대식물이 수집되어 있고 많은 희귀식물이 있다. 식물표본전시실에는 식물표본 및 사진이 전시되어 있으며 테마가든에는 장미와 야생화가 식재되어 있다. (서울대공원 홈페이지에서)

 

 우리나라의 여러 곳을 다니며 식물원을 구경하는 것을 참 좋아한다. 그래서 서울대공원에서도 특별히 식물원을 중심으로 구경하였다. 식물에 대한 지식은 별로 없지만 그래도 자꾸 보면서 하나씩 알아가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식물원 입구

 

 식물원에 들어가서 처음 마주친 곳이 사막관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선인장류가 주류를 이루며 전시되어 있다.

 

 

 

 

 

 

 

 

 

 

사막관을 지나 열대1관으로 발길을 돌린다.

 

 

 

 

 

 

 

다음으로 나오는 곳이 온대관이다.

 

 

다음이 열대2관이다.

 

 

물위에 수련이 피어 있다.

 

 

 

 

 

다음이 식충식물관이다.

 

 

 식물원을 한 바퀴 돌아보고 나서는 솔직하게 실망이다.

 내가 너무 기대가 큰 탓이었는지 도무지 마음에 차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여러 수목원을 다니면서 본 것으로는 규모가 전혀 아니었다.

물론 수목원과 식물원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래도..... 규모가 너무 작았다.

대마도 - 상도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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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마도 상부의 섬(상도) 일대

 

 대마도는 크게 두 개의 섬으로 나눈다.  일명 상도와 하도라고 한다. 원래는 하나의 섬인데 이 두 섬 사이에 아소만이 있어 두 개의 섬으로 보인다.

 

 대마도의 대중교통이 발달되어 있지 않아 섬을 돌아다니기에는 상당히 불편하다. 그래서 관광객들을 따라 상부 섬 일대를 돌아보는 과정을 선택했다. 편하게 따라서 다니면 되는 여정이다.

 

 

에보시다케에서 보는 아소만

 

 

 

 

만세키바시 다리

 

 1901년 일본해군이  뚫은 인공해협에 놓인 다리로 쓰시마의 나쪽과 북쪽을 연결하고 있다. 이 인공해협으로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해군이 러시아를 이길 수 있었다 한다.

 

 1896년 러시아의 남하에 대항하기 위해 조선과 최단 거리의 대마도 아소만 타케시키에 해군기지를 건설한 후, 옛날(1762년)에 굴착한 오후나고시가 수심이 얕아 해군함정이 통과할 수 없자, 대안으로 수심이 깊은 만관세토를 1987년에 굴착하여 1900년에 완성했다.

 

 

 

 

다리 위에서 보는 만관세토 해협의 풍경

 

 

에보시다케산으로 올라가는 이정표

 

 

 

 

 

 

 

 

 

 

 

 

 

 

 

 

 

 

 

에보시다케에서 보는 아소만 풍경

 

 와타즈미신사 뒤로 우뚝 솟아 있는 에보시다케산은 아소만을 북쪽에서 바라보는 최적의 장소이다. 일본 유수의 리아스식 해안인 아소만의 변화무쌍한 모습은 우리 눈을 즐겁게 한다. 360도 방위로 아소만을 볼 수 있으며 날씨가 맑으면 부산에서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이날은 가랑비가 오고 있어 부산은 보이지 않는 대신에 좀더 몽환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다. 대마도의 하롱베이라고 칭하고 있는데 하롱베이에 비하여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풍경을 보여 주었다.

 

 

 

 

길가에서 보는 아소만 풍경

 

 

대마도 관광안내도

 

 대마도 유일의 용왕신사인 와타즈미 신사는 도요타마마치의 유래이기도 한 도요타마히메노미코토와 '우미히코 야마히코' 신화로 알려진 히코호호데노미코토를 신으로 모시는 해궁이다. 바다에 세운 도리이는 만조일 때 최대 2m나 바닷물에 잠긴다고 한다.

 

 

와타즈미신사 도리이(산쪽) - 이문의 방향이 정확히 김해를 향해 있다 한다.

 

 

신사 내려가는 길

 

 

 

 

 

 

 

 

와타즈미 신사의 여러 모습

 

 

 

 

 

바닷물에 잠겨 있는 와타즈미 신사 도리이

 

 

 

 

신화 자연공원 표시

 

 

쓰시마버거 집

 

 

한국전망대 - 날이 맑으면 부산이 보인다 하는데 날이 흐려서 보이지 않았다.

 

 

 

조선국 역관사 순난지 비

 

 1991년에 건립된 이 비석은 1703년 2월 5일에 부산을 출발하여 대마도로 오던 배가 와니우라에서 침몰했다. 선박 3쳑, 역관사 108명, 대마도 선원 4명 등이 물속으로 사라졌다. 1703년 3월 2일 죽은 역관사들의 고국인 한국의 부산이 보이는 언덕에 사망자들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112개의 영석으로 조선국 역관사 순난자비를 세웠다. 그 뒤 대마도 종가문 고사료를 정리하다가 당시의 역관사 한천석 등 108명의 명단과 4명의 대마도인 성명이 발견되어 이들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한천석 외 111명의 이름을 돌판에 새겨 기념비를 세웠다. 

 

 

 

 

한국전망대 주변

 

 미우다 해수욕장은 쓰시마에서는 보기 드문 모래로 된 해수욕장으로 맑고 깨끗한 물과 넓게 펼쳐진 모래는 우리나라 어느 해수욕장에 비해 뒤지지 않아 보였다. 더구나 사람들이 많이 오지 않아 조용하며, 아름다운 바다 경치를 즐기기도 좋은 곳이다. 바로 옆에는 본격적인 설비를 갖춘 캠핑장도 있고 지금 호텔도 신축중이었다. 관광휴양지로 개발중인 해수욕장이다.

 

 

 

 

 

 

 

 

 

 

미우다 해수욕장의 풍경

 

 

히타카쓰항에 정박해 있는 오션플라워 호

 

 

히타카쓰항 전경

 

 짧은 시간에 대마도를 주마간산식으로 둘러 보았다.

 

 대략적으로 둘러보고 난 감상은 언젠가 여유로운 시간을 내어 다시 이곳을 여행하리라는 것이다. 우리가 선입견으로 알고 있는 대마도보다는 훨씬 볼 곳도 많고 우리나라와 관련된 흔적도 많이 보였다. 우리는 너무 선입견을 많이 가지고 있다. 대마도라고 하면 아무 것도 볼 것이 없다고 말들을 하는데 아마도 대마도의 속살을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이유는 대마도의 대중교통편이 너무 불편해서 제대로 움직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한가롭게 걸으면서 구경을 하는 것도 좋은 일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