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鶴)의 오딧세이(Odyssey)

삼랑진 만어사 - 신화와 전설이 함께하는 자그마하고 아담한 절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불현듯 만어사를 가고 싶었다. 만어사를 가 본지가 언제인가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작정을 하고 만어사로 향했는데 하필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안개가 자욱하게 끼여 제대로 풍경을 보지 못하고 아쉬움만 가득 가지고 돌아왔다. 그래서 다음에 또 날을 잡아 작정하고 만어사에 갔다. 여름 끝자락의 상쾌한 하늘과 맑은 공기는 마음을 씻어주고 맑게 하였다.

 

 밀양 시내를 흘러내린 밀양강이 낙동강과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낙동강 포구 삼랑진의 만어산(670m)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通度寺)의 말사인 만어사에 가면, 크고 작은 돌이 쏟아져 내린 듯 또는 쏟아 부은 듯한 너덜지대가 크고 장관을 이루고 있다. 폭이 약 100m 길이가 약 500m 정도로 규모도 엄청나지만 물고기가 입질하는 모양의 너덜지대를 이루는 돌 하나하나의 생김새가 예사롭지 않다. 골짜기를 가득 메운 입질하는 물고기 모양의 크고 작은 검은 돌들은 두드리면 신비하게도 쇠 종소리가 나는 돌들도 있다. 이 때문에 만어석이라 불리는 이 돌들은 두드리면 맑은 종소리가 나 종석이라고도 불린다. 이 돌들에는 신비한 전설이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옛날 옛적 동해 용왕의 아들이 자신의 수명이 다한 것을 깨닫고 낙동강 건너에 있는 무척산이란 곳의 신승(神僧)을 찾아가 새로 살 곳을 마련해줄 것을 부탁했다. 신승은 용왕의 아들에게 가다가 멈추는 곳이 바로 그곳이라고 말해 주었다. 용왕의 아들이 길을 떠나자 수많은 고기떼가 그의 뒤를 따랐는데, 그가 멈춘 곳이 만어사이다. 만어사에 이르자 용왕의 아들은 큰 미륵돌로 변했고, 그를 따르던 수많은 고기들 또한 크고 작은 돌로 변했다

 

 그런가 하면 삼국유사(이병도 역주) ‘탑상(塔像)’어산불영’(魚山佛影)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고기에 말하기를 만어사는 옛날의 자성산 또는 아라기산인데 그 옆에 아라국(가야)이 있었다. 예적에 하늘에서 알이 바닷가에 내려와 사람이 되어 나라를 다스렸으니 곧 수로완이다. 이 때에 경내에 옥지가 있어 못속에 독룡이 살고 있었다. 만어산에 다섯 나찰녀(羅刹女)가 있어 그 독룡과 서로 왕래 교통하였다. 그러므로 번개와 비를 때때로 내려 4년 동안 오곡이 되지 않았다. 왕이 주술로 이를 금하려 하엿으나 능히 금치 못하여 머리를 조아리며 부처에 청하여 설법한 후에야 나찰녀가 오계(五戒)3)를 받아 그 뒤에는 재해가 없어졌다. 그러므로 동해어룡이 마침내 화하여 동중에 가득찬 돌이 되어 각기 종성의 소리가 난다고 하였다. 또한 생각컨대 대정(大定) 12년 경자(庚子) 즉 명종 11년에 처음으로 만어사를 창건하였다.”는 것이다.

 

 또 다른 설화로는 옛날 중국의 진시황은 아방궁을 짓고 천하의 쇠붙이란 쇠붙이는 모두 거두어들여 녹인 다음, 이것으로 사람의 모양을 크게 만들어 아방궁 근처에 띄엄띄엄 세워놓았다. 쇠붙이를 모두 거두어들인 것은 사람들이 쇠로 무기를 만들어 자신의 나라를 침범치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진시황은 그렇게 하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이번에는 천하의 돌을 전부 날라다가 만리장성을 쌓기로 했다. 당시 풍월가를 잘 읽고 귀신을 어르는 재주가 있는 마고할미가 있었다. 마고할미도 만리장성을 쌓는 데 돌을 갖다 보태야 할 사정이었는데, 이 할미는 돌을 고기로 만드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이에 마고할미가 우리나라 부산울산양산 등지의 돌을 있는 대로 거두어들여 모두 고기로 만든 뒤 중국까지 수 천리를 가다가, 만어산에 이르렀을 때 이미 만리장성을 모두 쌓았다는 소식이 들렸다. 더 이상 돌이 필요 없게 된 마고할미는 고기로 변한 돌을 모두 그 자리에 놓아두었다. 지금 만어산의 돌들이 모두 북쪽으로 머리를 두고 있는 것은, 중국을 향해 가다가 그대로 멈추어 버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먼저 보는 사진들은 안개가 자욱한 날에 찍은 사진들이다.

 

 

 

지금부터가 다시 날이 좋은 맑고 깨끗하게게 하늘이 빛나는 날의 사진들이다.

 

만어산 암괴류 설명판

 

넓게 펼쳐져 있는 암괴류

 

만어사 대웅전 올라가는 길

 

자그마하고 아담한 대융전

 

삼층석탑

 

 가야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는 절이지만 믿을 수 없고, 지금의 만어사에는 고려 때의 삼층석탑이 대웅전 앞에 서 있다. 탑의 조성연대는 삼국유사어산불영의 기록을 참고하여 고려 명종 11(1181)으로 추정하고 있다. 높이 3.7m 정도의 만어사 삼층석탑은 단층기단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지대석과 기단부가 안정적이고 몸돌과 지붕돌의 체감률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석탑 역시 너덜지대의 만어석 또는 종석으로 만들어졌는지 두드리면 맑은 종소리가 난다고 하는데 믿거나 말거나..... 석탑이 서 있는 자리나 모습이 마치 너덜지대의 만어석을 굽어보는 듯하여 이색적인 너덜지대의 터를 다스리기 위해 세운 비보탑이 아니냐?고 추정하는 이도 있다. 만어사 삼층석탑은 보물 제466호로 지정돼 있다.

 

무엇인가를 뜻하는 음각

 

마애불

 

양쪽에서 보는 만어사 전경

 

미륵전 가는 길에 피어 있는 꽃무릇

 

 미륵전 가는 길에 문득 보이는 꽃이 있어 보니 내가 제일 좋아하는 꼿무릇이다. 벌써 꽃무릇이 피어나? 하고 생각하니 어느 새 꽃무릇이 피는 9월이었다.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바쁘게 지냈는가?하고 생각하니 불현득 선운사 꽃무릇이 또 보고 싶다.

 

 

미륵전 앞에서 보는 암괴류

 

미륵전 안의 미륵바위

 

 수 많은 바위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지금 미륵전을 지어 보호하고 있는 미륵바위또는 미륵불상이라고 불리는 높이 5m 크기의 자연석이다. 전설 속 동해 용왕의 아들이 변한 돌이며, 삼국유사 어산불영불영을 증명이라도 하듯, 자연석 표면에 붉은색이 감도는 부분이 마치 가사(袈裟)와 같아 더욱 신비롭게 여겨진다. 이 미륵바위에는 해마다 0.3씩 큰다는 신비스런 이야기도 있고, 조선시대의 국가적 재난이나, 근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에는 돌의 오른쪽 면에서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고 한다.

 

 

 만어사는 바다를 이룬 너덜지대의 장관과 더불어 멀리 발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낙동강의 전망이 매우 좋아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고 있다. 만어사 너덜지대의 만어석을 두드리며 전설을 확인하는 재미와 아울러 만어석의 울림만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서 울려오는 소리에 귀기울여보는 사색의 공간으로 삼아봄이 좋을 듯하다. 돌을 두드렸을 때 그 맑은 정도가 사람 됨됨이를 나타내는 지표가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상상도 즐겁다.

중국 운남 여행 20 - 톈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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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의 마지막 - 톈츠호

 

오랜 시간의 마지막 여행지가 톈츠호가 되었다. 운남민족촌을 돌아보고 민족촌에서 버스를 타고톈츠에 가니 어느 새 저녁 시간이 되어 호수 주변만 돌아보고 와야 하는 것이 너무나 아쉽다. 하지만 이제는 오랜 여정도 끝을 내어야 하는 시간이라 아쉬움을 뒤로 하고 호수를 구경하였다.

 

 윈난성 쿤밍 남서쪽에 위치한 원난성 최대의 호수이며 중국 6대 담수호로 유명한 '덴츠'는 쿤밍 호로도 불리는 길이 40km, 8km에 이르는 거대한 호수이다. 면적은 300정도이며 호수 수면의 해발고도는 1900m 가장 깊은 곳은 8m 평균수심은 5.5m이다. 단층이 함몰되어 형성된 호수이고 동쪽은 진마산, 서쪽의 비지산, 북쪽의 서산용문, 남쪽의 바이러산 등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있다. 매년 겨울 붉은부리갈매기 4만여 마리가 월동을 위해 덴츠를 찾아오기에 한꺼번에 많은 갈매기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고, 직접 먹이도 줄 수 있어 겨울철 쿤밍을 찾는 관광객들이 붉은부리갈매기를 볼 수 있는 최고의 관람 명소이다.

 뎬츠는 역사문화 지역으로 대관루, 반룡사, 채산정왕묘 등 사방에 수많은 명승고적이 있으며 산수가 수려해 고원명주라는 별명이 있다.

 

톈츠호 입장권

 

톈츠 표지석

 

톈츠호 주변 경관

 

 

 톈츠호 주변의 길에는 Eucalyptus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다. 속명의 Eucalyptus는 그리스어의 ‘아름답다’와 ‘덮인다’의 합성어로 꽃의 모양에서 유래한다. 70m 정도로 자라는 교목()의 속성수로 오스트레일리아가 주로 자라는 나무인데 이 곳의 가로에 심어져 위용을 자랑한다.

 

 Eucalyptus 나무에 대한 설판 - 중국 제일수라는 살명이 있다.

 

 Eucalyptus

 

 톈츠호에서 지는 해를 바라보며 이제는 현실의 시간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되었음을 알았다.

 

 이제야 이 여행이 끝나는 것이다. 내일이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무작정 배낭을 메고 한국을 떠난지가 벌써 한달이 되었다. 비교적 우리에게 잘 알려진 운남의 쿤밍시에서부터 리장, 따리등을 구경하고 호도협 트레킹까지도 하였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비교적 알려지지 않았던 류구호와 샹그릴라, 텽츙까지도 돌아다니면서 여러 가지를 보고 즐겼다.

 

 꽉 짜인 투어여행이 아니고 비교적 자유롭게 여행한 배낭여행이라 보고 싶은 곳을 찾아다니면서 보고,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먹으면서 자유롭게 지냈다. 하지만 막상 여행이 끝나니 보지 못하고 하지 못하고 가는 아쉬움이 앞선다. 얼하이에서 배를 타고 유람도 못했고, 인상여강 공연도 보지 못했고 매리설산도 멀리서만 보았다. 그러나 이런 것이 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이리라 생각하며 아쉼움을 달랜다. 하고싶은대로, 보고싶은대로 만족스러운 인생이 어디에 있는가? 부족함이 있어야 다시 또 오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중국 운남 여행 19 - 운남 민족촌 2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저번에 이어서 운남의 소수 민족촌을 소개한다.

 

 * 납호족 마을

 

 납호족은 동남아시아와 중국에 사는 소수민족 중의 하나로, 중국에서 공인한 56개의 소수민족으로 운남성에 약 45만 명이 살고 있고, 미얀마, 태국, 라오스, 베트남에도 소수가 살고 있으며, 베트남 정부 공인 54개의 소수민족 중 하나이다. 한국인과 비슷한 혈통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한족, 타이족과 교류한 산악 민족으로 고대에는 수렵생활을 하였으나 점차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주민들은 대나무 층집을 지어 아래층에 가축우리를 설치하고 위층에서 거주한다. 혼인 제도는 일부일처제이고 원시종교를 믿는다

 예전에는 화전을 중심으로 생활해 왔지만, 지금은 정착하여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납호족의 언어는 티베트미얀마어족에 속하는 라후어를 사용하고 1957년에는 라후문자를 창제하였다. 라후어의 기본구문은 SOV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문법이나 발음이 쉽기 때문에, 산악민족 사이에 널리 사용되고 있다.

 

 

 

 *기낙족 마을

 

 기낙족(基諾族, 지눠족)은 중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56개 민족의 하나로 1979.6에 확인된 윈난성(云南省) 지역의 민족이다.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며 인구는 약 2만 명 정도이다. 주로 윈난성 시솽반나(西雙版納 타이족 자치주를 중심으로 모여 살고 있다. 언어는 티베트미얀마어족에 속하는 지눠어를 사용하며 문자는 없고 한문을 쓴다.

 주민들은 대개 농작물을 경작하여 생활하는데 대나무로 지은 다락집에서 주거한다. 전통 의상으로 여자들은 목깃 없이 화려한 수를 놓은 윗옷과 빨간 띠를 두른 검정 치마를 입고, 흰 천으로 만든 삼각형 모자를 쓰기도 한다. 남자들은 윗옷으로 목깃이 없는 흰 베옷과 두루마기를 입고 남색이나 흰색의 긴 바지를 입는다.

 혼인제도는 일부다처제이고 만물에 영혼이 있다고 여기며 자연과 조상을 숭배하는 원시종교를 믿는 민족이다.

 

 

 *몽고족 마을

 

 인류학적으로 우리와 같은 인종인 몽고족(蒙古族 - Mongghol)은 몽골고원 및 그 주변에 사는 알타이어계의 몽골어군(語群) 민족으로 만주와 중국 북부 등의 지역에 걸쳐 거주하던 유목민족으로 몽고는 넓은 의미로는 황색 인종에 대한 범칭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원래 고원 북동부의 초원과 삼림이 상접한 지대에 살면서 반목 반렵(半牧半獵)생활을 하였으나, 9세기 중엽 이래 점차 남하하여 전형적인 기마유목민(騎馬遊牧民)이 되어 부족국가를 세웠다. 11-12세기의 몽고고원에는 나이만(Naymann), 케레이트(Kereyid), 메르키드(Merkid), 타타르(Tatar), 옹구트(Ongghud) 등의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몽고족(Mongghol)도 이러한 여러 부족 중의 하나였다. 몽고부족 보르지기드(Borjigid) 씨족 출신의 테무친[鐵木眞]1206년 분열된 몽고고원의 통일을 이룩하고 몽고족과 튀르크계의 모든 유목민족을 지배하게 되었다. 테무친 자신은 칸[]에 추대되어 칭기즈칸[成吉思汗]이라 칭하고 대몽고국(大蒙古國)을 세웠다. 칭기즈칸은 대양(大洋)의 군주혹은 황제 중의 황제등으로 해석된다

 

 

 *바이족 마을

 

 바이족(Bai, 白族)은 윈난성[雲南省]에 거주하는 소수민족으로 한민족(漢民族)으로부터 민차[民家]라고 불려 왔으나 중국이 되면서 바이족(白族)으로 개칭되었다. 바이족은 하얀 색을 숭앙하며, 스스로 하얀 사람들이라는 의미의 '바아훠',‘바이지’, ‘바이니라고 부르는 소수민족이다. 바이족의 여인은 전통적으로 흰 옷에 검은 색 옷깃으로 장식을 해서 입는다. 인구는 2000년 통계에 따르면 대략 185.8만이다. 주로 다리(大理) 일대를 중심으로 운남성 일대에 살고 있으며 1956년 다리바이족(大理白族) 자치주가 설립되었다. 언어계통은 바이족(白族) 언어인 바이어(白语, 백어)를 사용한다. 문자는 당나라 때부터 한자를 기본으로 하는 백족 문자를 사용하고 있다.

 그들의 조상은 예로부터 얼하이(洱海) 주변에 거주하며 세력을 쌓아, 당나라 때 남조국(南詔國), 송나라 때 대리국(大理國)의 주요 부족이었던 백만(白蠻)이라고 여겨진다. 대리국에 살던 관계롤 집을 대리석으로 지으며 배추김치를 먹는다고 한다. 일찍부터 벼를 경작하였고, 한문화(漢文化)의 영향도 깊으며, 당나라 때 전하여진 불교 신앙 외에 조상숭배, 마을의 시조에 대한 제사 등이 행하여진다.

 

 

 

 *장족 마을

 

 좡족(장족, 壮族 Zhuàngzú)은 중국 최대의 소수 민족으로 광시 좡족 자치구에 주로 살고 있다. 인구는 1800만 명으로 한족 다음으로 많다. 중국 남부나 베트남 북부에 주거 하는 태국계의 민족으로 언어는 티베트어, 장어(壯语), 태국어를 사용하고 있다. 과거에는 한자를 기반으로 한 표의문자인 방괴장자를 사용했으나 1955년 라틴어 모음을 기초로 하여 좡족어 문자를 만들었다.

좡족의 원래 이름은 獞族(퉁족, 동족)이었다. 그런데 글자 """야생 개과"를 뜻하는 글자이기도 해서 인종적인 오명으로 간주되었다. 이 때문에 1948년에 부수를 큰 개를 뜻하는 ""에서 사람을 뜻하는 ""으로 바꾸어 僮族(동족)이 되었다. 하지만 동()의 의미가 좋지 않아 1965년에 동()과 발음이 같은 장()으로 개칭되었다.

  좡족(壮族, 장족)은 예로부터 가무를 좋아하였고 공예품으로 오색의 실로 아름답게 자수를 입힌 장금(壮錦)이 유명하며 전통복식은 남녀 모두 흑색을 사용하고 있다. 좡족은 전통적으로 손님맞이를 좋아해 낯선 사람이라도 후하게 대접하는 풍습이 있고 같은 민족 간에 단합이 잘 되어 산채를 짓고 집단으로 거주하기도 하며, 농업에는 근면하지만 상업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납시족 마을

 

  운남성(雲南省) 북서부에 있는 나시족 자치현을 중심으로 거주하는 소수민족으로 2000년 통계에 의한 인구는 약 30.8만이다. 재미있는 것은 힘든 일은 모두 여자들이 하고 남자들은 아기를 보거나 책이나 보면서 소일하며 인생을 마친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계사회는 아니라고 라고 말 하지만 모계사회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 이 풍습은 과거 몽골의 지배 당시 징기스칸의 아들 쿠빌라이칸에 의해 남자의 전투력을 아끼기 위해서 내려진 조처가 계속 이어져왔다고 전해지기도 합니다.

 그들은 나시(흑인이라는 뜻)라고 자칭하지만, 한민족은 그들을 모소(麽些)라고 하였다가 최근에야 나시족으로 개칭하였다. 원래 티베트북동부에 살던 유목민으로 생각되는데, 먼 옛날에 현재의 장소에 정착하고 명나라이후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농업이 생업이지만, 산지에서는 양 등의 목축도 중요시하고 있다. 나시족(纳西族, 납서족)은 동파교(东巴教)라는 종교를 믿고 있는데 이는 일종의 다신교로 무술사(巫術師)인 톰바가 의식을 집행하며, 경전으로 동파경(东巴经)이 있다. 또한 일부는 장전불교(藏传佛教)를 신봉하고 있다. 독특한 상형문자와 많은 경전이 있다. 나시족(纳西族, 납서족)의 언어는 티베트버마제어족(語族)에 속하는 고유의 언어인 나시어(纳西语)와 동파문(东巴文) 및 가파문(哥巴文)2종의 문자를 보유하고 있으며, 이 중 동파문은 세계에서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는 유일한 상형문자이다.

 

 * 나시족의 동파교

 

나시족의 동파교(東巴敎)는 나시족이 신봉하는 원시종교이며, 운남성과 사천성 등지의 나시족 지역에서 믿고 있다. 동파교는 그림과 상형부호로 구성된 동파문자로 작성한 경전인 동파경(東巴經)이 있다. 동파문은 11세기 중엽부터 광범위하게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며, 주로 경전을 쓰는 데 사용되었다. 중국 내에는 약 1,100여 종의 각종 동파경문이 현존하는데, 동파교와 원시종교 그리고 인류의 초기 문화를 연구하는 데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모쒀족 마을

 

 운남성 동북쪽에 해발 고도가 2700m에 이르는 루구호 일대에 모쒀족이 살고 있다. 모쒀족(摩梭族)또는 모쒀인(摩梭人) 혹은 때때로 모수오족은 중국의 미식별 소수민족의 하나로 중국에서는 나시족의 일파로 분류한다. 가족의 가장은 가장 나이가 많은 여자가 맡고 새로 태어나는 아기들은 어머니의 성을 따르는 철저한 모계사회로 결혼제도가 없고 농사도 여성이 짓는다. 집안의 호주와 가장은 물론 할머니 또는 어머니이다. 그래서 모수오족 안에서는 할아버지, 아버지, 남편 등의 단어는 물론 개념조차도 없다고 한다. 대신 남성은 가축 도살과 어획에 종사한다.

 

*모쒀족의 혼인제도(아사혼)

 

 모쒀족의 여자가 아샤혼을 치를 수 있는 나이는 13살이다. 하지만 대부분 10대 후반부터 관계를 시작한다. 여자는 13살이 되면 니찬지라고 불리는 자기만의 방을 부여받아 그곳에서 매일 밤 남자를 기다린다. 모쒀족은 결혼이라는 제도적 장치를 따로 두지 않았다. 철저하게 사랑이 지속되는 동안만의 남녀관계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청춘 남녀가 마을의 축제나 잔치에서 마음에 드는 상대를 찾으면 여자(아샤)는 밤에 남자(아주)가 자신의 처소로 올 수 있도록 대문이나 창문을 살짝 열어놓는다. 남자는 해가 저물기를 기다려 여자 집에 들어간다. 긴 밤을 보낸 남자는 동이 틀 무렵에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 집안을 위해 일한다. 이렇게 두 남녀가 각자 자기 어머니의 집에서 살면서 밤에만 만나는 일종의 혼인을 쩌우훈(走婚) 또는 아샤혼이라고 부른다.

한번 아샤혼을 맺었다고 해서 의무감이 따르는 것은 아니다. 만일 여자의 마음이 변하면 밤에 문 열어두는 것을 그만두어 남자가 자기 집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남자의 맘이 변하면 여자의 집에 더 이상 찾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상대를 찾는다. 하지만 한 사람과의 아샤혼이 오랫동안 지속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가 중년에 접어들면 대부분의 남자들은 여자의 집에 들어간다.

 

 *이족 마을

 

 ()나라 때에는 뤄뤄(羅羅), (), ()나라 때에는 만쟈(蠻家), 이쟈(夷家) 등으로 불렸다. 중국에서의 공식명칭은 이족(彛族)이다. 2000년 제5차 전국인구조사 통계에서는 인구는 약 6백만 명으로 중국정부가 공인하는 56개의 민족 중에서 8번째로 많다이족의 상당수는 복잡한 노예제도를 가지고 있어, 흑이(귀족)와 백이(평민)로 나눌 수 있다. 1956년 공산화가 완료되기까지는 흑이(黑彛)로 불리는 노예주 집단이 지배하는 노예제사회를 지속해 왔다. 흑이는 이족의 7%에 불과하지만 순수 이족으로 간주되었고 몸집이 크고 기마목축민적인 세계관을 지니고 있으며, 피모라고 하는 무속(巫俗) 신앙을 믿고 노예주와 그 일족으로 이루어진 부계(父系) 씨족집단으로서 이족사회에서의 귀족 무사층(武士層)을 형성하였다. 이와는 반대로 백이(白彛)로 불리는 노예층은 흑이에 정복된 타이족과 먀오족 등의 농경민을 주축으로 하고 있는데 그 언어와 문화는 이족화하였고, 신체도 일반적으로 작다. 같은 이족이라도 종래에는 흑이와 백이 사이에는 통혼이 허용되지 않았다. 백이는 노예로 다루어졌지만, 고위의 노예는 자신의 토지를 경작하는 것이 허용되며 자신의 노예를 소유할 수 있고, 가끔 자유를 살 수도 있었다.

 현재는 그런 제도가 모두 사라졌고, 대부분이 보리·메밀 등을 재배하는 농업과 말·양 등을 기르는 목축에 종사하며 볶은 보리나 메밀가루를 반죽하여 익혀 먹는 등 식습관도 티베트인과 비슷하고, 언어도 티베트 버마어군에 속하며, 티베트처럼 주어+목적어+술어형의 어순을 가진 이어를 사용한다. 본시 독특한 상형문자(象形文字)를 가지고 있었으나 현재는 로마 자모로 된 새로운 글자를 사용하고 있다. 정령신앙을 신봉하여 비마우(Bimaw)라는 사제가 선도한다. 도교나 불교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운남민족촌은 그대로 관광객을 끌어 모우는 관광지는 되지만 사람을 구경거리로 한다는것이 좀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물론 자기들만의 고유한 삶의 방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소수민족의 정체성을 보호하며 독특한 문화를 보호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들이 살고 있는 고장을 특화하여 그들이 자연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이 더 좋다. 동물원의 원숭이처럼 관광자원으로 모아 놓은 것은 어쩐지.......

 실제로 모수오족이 살고 있는 류구호 근방이나 얼하이로 주변의 백족, 나시족마을 등등이 아직 우리의 눈길을 끌고 있었다. 민족촌보다 그들이 살고 있는 마을을 직접가서 보는 것이 더 좋은 관광이 될 것이다.

부처님의 영상이 비친 곳 - 불영사, 그리고 월계서원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불영사. 이름도 거룩하게 느껴지는 곳이다. 언제였던가? 이곳을 와본지가 기억에도 가물가물한다. 이 주변은 여러 차례 지나갔건만 교통편이 워낙에 불편한 곳이고 이곳만을 목적지로 하지 않았기에 시간이 제대로 허락하지를 않았서 이곳을 직접 탐방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울진을 온김에 꼭 불영사를 둘러보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역시 교통편이 여의치 않아 고심하다가 이왕 마음먹은 것 돈이 좀 들어도 가기를 하고 택시를 대절하여 불영사에 왔다. 택시기사가 친절하게도 불영사 매표소에 이야기를 하여 일주문을 통과하여서 불영사까지 운행을 해 주어 시간도 절약하고 편리하기도 했다.

 

 불영사는 경북 울진군 울진읍에서 서쪽으로 약 20km 떨어진 천축산 서쪽기슭에 자리 잡은 의상(義湘)651년에 창건한 신라의 옛 절로, 이 절을 중심으로 하원리까지 13km에 걸쳐서 비경을 이루는 불영사계곡이 펼쳐진다. 이 절의 건립에는 아래와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의상이 경주로부터 해안을 따라 단하동(丹霞洞)에 들어가서 해운봉(海運峰)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니 서역의 천축산을 옮겨온 듯한 지세가 있었다. 또 맑은 냇물 위에서 다섯 부처님 영상이 떠오르는 모습을 보고 기이하게 여겨 내려가서 살펴보니 독룡(毒龍)이 살고 있는 큰 폭포가 있었다. 의상은 독룡에게 법()을 설하며 그곳에다 절을 지으려 하였으나, 독룡이 말을 듣지 않았으므로 신비로운 주문을 외워 독룡을 쫓은 뒤 용지(龍池)를 메워 절을 지었다. 동쪽에 청련전(靑蓮殿) 3칸과 무영탑(無影塔) 1좌를 세우고 천축산 불영사라 하였다. 676년에 의상이 다시 불영사를 향해서 가다가 선사촌(仙槎村)에 이르렀는데, 한 노인이 "우리 부처님이 돌아오셨구나." 하면서 기뻐하였다. 그 뒤부터 마을 사람들은 불영사를 부처님이 돌아오신 곳이라 하여 불귀사(佛歸寺)라고도 불렀다. 의상은 이 절에서 9년을 살았으며, 뒤에 원효도 이곳에 와서 의상과 함께 수행하였다 한다. 청련전과 무영탑은 환희료(歡喜寮)와 환생전(還生殿)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때 병화를 입어 모두 소실되었으나 응진전(應眞殿)만은 피해를 면했다고 한다. 그 후 1609년 진성법사(眞性法師)가 재건한 것을 비롯하여 여러 승려들의 손으로 중수가 거듭되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보물 제730호인 불영사 응진전(佛影寺應眞殿)을 비롯하여 극락전 대웅보전 명부전(冥府殿) 조사전(祖師殿) 칠성각 범종각 산신각 황화당(黃華堂) 설선당(說禪堂) 응향각(凝香閣)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35호인 불영사삼층석탑을 비롯하여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62호인 불영사부도(佛影寺浮屠), 그 밖에도 대웅전 축대 밑에 있는 석귀(石龜)와 배례석(拜禮石불영사사적비 등이 있다.

 

불영사 일주문

 

일주문 옆길- 대개는 이 길을 걸어 불영사로 간다.

 

불영사로 들어가는 도중에 있는 석교와 계곡

 

택시기사의 친절함으로 쉽게 불영사에 도착했다. 크지 않은 자그마한 절이다.

 

불영사 근방의 채소밭

 

절 입구에서 보는 전경

 

천축산 불영사 안내도- 상당히 자세하다.

 

불영사 연못과 법영루

 

발길을 옮겨 안으로 들어가면 먼저 보이는 것이 큰 나무다. 보호수란다.

 

보호수(은행나무)

 

불영사 대웅보전

 

불영사 삼층석탑

 

대웅보전과 삼층석탑

 

대웅보전 옆의 황화전

 

전각 사이의 아름다운 모습

 

마당에 피어 있는 초롱꽃

 

대웅전의 영산회상도

 

응진전

칠성각

 

법영루와 불전사물 설명

 

불영사 주변의 바위

 

불영사의 여러 모습

 

 사실 불영사를 가기 전에 울진 읍내를 조금 걸으며 구경을 하였다.

시내의 다리를 건너는데 왜가리 같은 새가 냇물에 있는 모습이 보여 담았다.

 

 

 

*월계서원

 

시간의 순서로는 이 월계서원 (月溪書院)을 불영사보다 먼저갔다

 

 월계서원은 울진군 울진읍 고성리에 있는 서원으로 울진장씨의 관시조(貫始祖)인 장말익(張末翼)과 장말익의 8세손 장양수(張良守)를 배향하는 서원으로 해마다 10월 정일(丁日)에 향사를 올린다. 1856년 향유들의 장계에 의해 울진읍 호월리에 월계사(月溪祠)가 세워졌고, 1862년에 예조 관문승원예에서 사액을 내려 월계서원이 되었다. 1868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손되었다가 1925년 현 위치에 복원되어 세덕사(世德祠)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광복 후 월계서원으로 복칭되었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에월계서원(月溪書院)’,‘월계강당(月溪講堂)’이라는 현판이 나란히 걸린 서원이 있다. 서원 뒤 내삼문을 지나면 사우인 경덕사(景德祠)1998년 건립한 국보각(國寶閣)이 나오는데 국보각 안에는 국보 제181호인 장양수 급제패지(張良守及第牌旨)’가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장양수 급제패지는 현존하는 패지(牌旨; 위임장 등의 공식문서)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고려시대 과거제도를 연구하는 데 있어 귀중한 자료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문을 잠가 놓아서 내부는 구경하지 못하고 외부만을 보고 돌아왔다.

 

월계서원, 월계강당

 

 

월계서원과 주변의 여러 모습

 

 월계서원과 불영사를 갔다와도 택시를 이용하였기에 시간적 여유가 있어 카페에 앉아 한가로이 커피를 한잔하면서 망중한을 즐겼다. 그러다 보니 어느 새 친구들과 만나기로 한 시간이 다 되었다.

 카페를 나와 울진시외버스터미널로가 친구들을 기다리나 곧 부산과 서울에서 먼 길을 달려서 친구들이 도착했다. 이제부터는 이 친구들과 울진 금강소나무숲길과 삼척 무릉계곡을 구경하러 다니며 밤에는 한잔 술을 마시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밤 새워 할 것이다.

 

 인생에 있어 벗과 함께 아무른 이해가 없이 그저 떠들면서 술을 마시며 이야기로 밤을 보내는 것도 큰 즐거움이리라.

 

 

 

 

 

 

우리 민족의 영산 - 태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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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랫 동안 오른다는 생각만 하면서 가지 못했던 태백산을 모처럼 오르려고 집을 떠났다. 친구들과 울진에서 만나 금강소나무숲길을 걷고 삼척 무릉계곡으로 모임이 정해졌기에 겸사하여 일찍 출발하여 태백으로 향했다. 예전에 태백산을 오를 때는 항상 겨울이라 모진 바람과 눈에 고생을 하였는데 이번에는 비가 와서 좀 편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왕 마음을 먹은 것이라 비가 오는 도중에도 집을 떠났다. 일기예보에 의하면 남부지방에는 제법 많은 비가 오지만 중부에는 큰 비는 오지 않을 곳이라는 예보를 믿고, 부산에서 출발하여 울진을 거쳐 태백으로 가는 도중에 비는 계속 조금씩 오고 있었다. 태백에 도착하여 택시를 타고 유일사입구로 가니 비가 좀 오기 시작한다. 그러나 길을 가지 못할 정도는 아니기에 산을 향해 길을 떠났다. 평일이고 비가 오기 때문인지 산을 오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나 혼자만이 호젓하게 산을 오르고 있었다.

   

 태백산은 백두대간의 중앙부에 솟아 있는 민족의 영산으로, 높이 1,566.7m인 장군봉을 주봉으로 하는 .태백산맥의 종주(宗主)이자 모산(母山)으로 삼신산 가운데 하나인 산으로 알려져 있다.정상부에는 고산식물이 많이 자생하며 특히 국내의 대표적 주목 군락지로 유명하며,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려 매년 눈 축제가 개최된다. 함경남도 원산의 남쪽에 있는 황룡산(黃龍山)에서 비롯한 태백산맥이 여러 산을 거쳐 이곳에서 힘껏 솟구쳤으며, 여기에서 서남쪽으로 소백산맥이 분기된다. 강원도 태백시 소도동(所道洞)에 중심위치를 두고 영월군 정선군 경북 봉화군에 접하며, 1989 강원도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이후, 2016512일에 국립공원으로 승격하였다. 국립공원은 높이 1,567m의 장군봉과 태백석탄박물관, 한강의 발원지인 검룡소(儉龍沼), 낙동강의 발원지 황지(黃池) , 용정(龍井) 등 태백산 일원의 명소 및 문화유적을 포함한다.

 

 태백산은 천년병화(千年兵火)가 들지 않는 영산(靈山)이며, 단종이 산의 악령(嶽靈)이 되었다 하여 단종의 넋을 위무하기 위해 산 정상 부근에 단종을 모신 단종비각(端宗碑閣)이 있다. 또한 소도동에는 단군성전(檀君聖殿)이 자리하고 있으며 산 정상에는 예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천제단(天祭壇:중요민속자료 228)이 있는데, 이 곳에서 매년 개천절에 태백제가 열린다. 652년에 자장(慈藏)이 창건한 고찰 망경사(望鏡寺)를 비롯해 크고 작은 사찰이 퍼져 있으며, 망경사 입구에는 한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은 샘물인 용정이 있다

 

 

유일사 입구의 이정표

 

비가 오는 유일사 가는 길

 

조난 구조표

 

산을 오르면서 보는 함박꽃(산목련)

 

이름 모르는 꽃

 

장군봉 이정표

장군봉 가까이의 주목들

 

 빗속을 뚫고 걸어 장군봉에 올랐다. 비를 맞는 것보다 땀으로 흘리는 것이 더 많이 땀이 났다. 장군봉에는 천제단이 있고, 장군봉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천제단이 또 있다. 아마 장군봉 천제단이 먼저 만들어진 것 같지만 천제단이 더 크고 잘 만들어져 있다.

 

장군봉 천제단

 

장군봉 표지석(해발 1567m라 표시)

 

비 안개가 자욱한 장군봉의 모습과 태백산 표시

 

 장군봉을 지나 천제단으로 향했다. 얼마 가지 않아 천제단에 도착했다. 우리가 잘 아는 천제단은 태백산의 가장 높은 곳이 아니다. 가장 높은 봉우리는 장군봉이다. 그렇지만 천제단이 더 잘 알려져 있다.

 19911023일 국가민속문화재 제228호로 지정된 천제단은 돌을 쌓아 만든 타원형의 거대한 제단으로 높이 3m, 둘레 27m, 너비 8m의 제단으로 태백산 정상에 있으며 천왕단(天王壇)’이라고도 한다. 돌계단은 원래 아홉 단이어서 9단 탑이라 불리기도 한다. 태백산은 백두대간의 중추인 산으로 예로부터 정상에서 하늘에 제사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신라 때에는 137년 일성이사금 510월에 왕이 친히 북순하여 태백산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지금도 천제단에서는 매년 개천절에 제의를 행하는데 이를 천제 또는 천왕제라고 한다. 개천절 때 제의는 원래 지방의 장이 맡았으나 지금은 선출된 제관에 의해서 집례된다고 한다.

 산꼭대기에 이와 같은 큰 제단이 있는 곳은 한국에서 하나밖에 없다. 제작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치는 동안 수령과 백성들이 이곳에서 천제를 지냈으며, 한말에는 쓰러져가는 나라를 구하고자 우국지사들이 천제를 올렸다. 특히 한말 의병장 신돌석은 백마를 잡아 천제를 올렸고 일제 때는 독립군들이 천제를 올린 성스런 제단이다.

 

태백산 천제단

 

비 안개에 흐릿하게 보이는 천제단 주병 풍경

 

 천제단에 잠시 머물러 휴식을 하면서 가져간 점심을 먹고 당골광장쪽으로 발을 옮겼다.

 

천제단 주변의 이정표

 

 천제단에서 당골광장쪽으로 조금 내려오면서 망경사 못 미쳐서 자그마한 단종비각이 나온다.  태백산은 단종을 산의 영혼으로 모시기에 단종비각이 이 높은 곳에 있다. 단종비각(端宗碑閣)에는 영월에서 죽은 단종의 혼이 백마를 타고 이곳에 와서 태백산 산신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단종비각(조선국태백산단종대왕지비)

 

 단종비각을 지나 조금 내려 오면 망경사와 용정을 만난다. 망경사는 월정사의 말사로 652년 자장(慈藏)이 창건하였다 한다. 자장은 태백산 정암사(淨巖寺)에서 말년을 보내던 중 이곳에 문수보살 석상(石像)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암자를 지어 그 석상을 모셨다고 한다.

 

 

용정과 망경사

 

 무더운 여름 산행 길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는 약수 용정에서 차가움 물을 한 바가지 들이키고 다시 아래로 길을 겯는다.

 

 

 망경사를 뒤로 하고 이제 계속 당골광장으로 내려가면서 주변의 풍경을 즐기면 된다. 계속 오던 비도 어느새 그쳤다. 산을 오를 때는 계속 오는 비를 맞으며 땀을 얼마나 흘렸는지를 모르는데 이제는 시원한 바람을 즐기며 한가로이 걸는다.

 

호식종

 

시원하게 흐르는 계곡물과 물에 끼인 이끼

 

장군바위

 

초록의 융단을 깔아놓은 듯한 돌위의 이끼

 

암괴류

 

함박꽃 나무

 

 당골광장을 거의 도달할 무렵에 단군성전ㅇ으을을 만난다. 우리나라 여러 곳에 단군성전이 있듯이 역시 태백산에도 있다.

 

단군성전

 

 단군성전을 지나 당골광장에 거의 도착하는 길가에 석장승이 서 있다. 좀처럼 보기 어려운 석장승이다.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장승은 나무로 만들었는데 이곳에는 돌로 만든 장승이 있다.

 이곳에 있는 석장승은 2기로 199239일 강원도 민속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었다. 머리에 관을 쓰고 홀을 든 문인석과 같은 모습으로 태백산 입구 길 양쪽에 세워져 있다. 석장승은 현재위치에서 북쪽 1.2지점 미륵둔지에 약 10m 간격으로 마주 서 있었으나, 1987년 태백문화원 주관으로 현 위치인 소도당골로 이전하였다.

 석장승은 화강암 재질로 자연석 받침돌 위에 올려놓은 좌측 석장승 하단에 천장(天將), 우측에 지장(地將)이라고 새겨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임을 표시하였다. 이 석장승의 제작 시기는 알 수 없으며, 석장승의 옆에 있는 솟대 꼭대기에는 영동지역의 장승들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새가 만들어져 달려 있다. 태백산 천제단(天祭壇)과 천제신앙과 관련하여 태백산신의 수호신상으로 추측된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조선 선조 13(1580) 강원도 관찰사로 와있던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태백산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이것을 제작했다고도 한다.

 

석장승

 

당골광장

 

당골광장 성황당

 

 오랜만에 산을 올라 내려오니 기분이 상쾌하다. 더구나 비가 조금씩 오는 산에 아무도 없이 혼자서 조용히 산행을 즐겼다. 유일사입구에서 출발하여 장군봉, 천제단을 거쳐 당골광장까지 내려오는데 점심먹고 쉬는 시간까지 합하여 약 세시간 반이 걸렸다. 아직은 걸을만한 체력이 남아 있는 것이 너무나 감사했다. 조금은 걱정했는데.....

 

 당골광장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태백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가 버스를 타고 태백으로 나간다. 원래는 오늘은 태백에서 머물렀다가 내일 울진으로 가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산을 내려왔기에 오늘 바로 울진으로 가는 일정을 바꾸어야겠다.

중국 운남 여행 18 - 운남 민족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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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의 막바지에 운남 민족촌을 찾았다.

 

 운남성은 중국 전체 소수 민족의 1/3이 살고 있을 정도로 소수민족의 비중이 높은 곳이다. 중국은 한족을 비롯하여 56개 소수민족이 집합된 다민족국가인데 그중에 운남성에만 상주하는 소수민족이 52개에 달하고, 인구가 5천명 이상이며 각각의 고유한 문화를 갖고 살아가는 민족도 26개나 된다고 한다. 그들은 곤명(昆明)주위의 작은 도시들에 흩어져 살고 있는데, 장족, 이족, 따이족, 먀오족, 하니족, 나시족 등등으로 불리는 그들은 중국속의 이방인이라 할 수 있다.

소수민족의 문화와 생활양식을 보여주는 운남민족촌은 곤명시 남서쪽으로 8Km에 위치하고 있는데 19922월 당시에는 13개 민족 마을이 있었으나 그 뒤에 계속 증가하여 현제까지 1350ha의 광활한 지역에 총 26개 마을로 확장되었다. 소수민족의 삶을 주제로 한 민족촌으로는 중국에서 가장 크다고 한다. 이 민족 마을에는 언제나 크고 작은 공연이 벌어진다. 소수민족의 마을을 방문하여도 축제 때나 볼 수 있는 공연들이니 반드시 공연을 즐기는 것이 좋다.

마이너리티(minority0라는 이유로 관광자원이 된 그들의 모습에는 좀 안타까운 감정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운남민족촌 앞 광장

 

민족촌 입구

 

곤명서산, 민족촌 안내도

 

민족촌 5층탑

 

옛 차마고도의 길 표시 동판

 

공연 및 소수민족 거주 안내도

 

 * 징포족 마을 : 운남성에 사는 소수민족으로 인구수는 약 13,000정도라고 한다.

 

징포족의 북:  북을 치면 복을 받는다고 한다. 북치는 가격은 한번에 3원이라 적혀 있다.

 

소수민족의 공연 모습

 

 * 장족 마을

 

장족사원(라마교사원) 안내

 

 장족 라마교 사원은 포타라(Potalaka)궁을 본 딴 사원으로 포타라는 관음의 현신처를 말한다.

장족은 일명 티벳트족이라 하며 약 460만명이 분포하여 살고 있다. 그중 210만명은 티베트자치구에 살고 있으며 나머지는 사천 운남성 등에 살고 있다. 장족, 기골이 장대하다고 한다.

 

* 아창족 마을

 

 

아창족 민거 : 실제로 생활하고 있는 집

 

 

* 더앙족 마을

 

더앙족 마을의 사원

 

 

* 하니족 마을

 

 

*공작원의 공작

 

 

* 태족 마을

 

* 태족의 신을 모신 곳

 

* 민족촌 안의 호수를 건너는 다리

 

다리 중간에 있는 기념품 가게

 * 수족 마을

 

 

* 포의족 마을

 

*포랑족마을

 

* 와족 마을

 

 

 

* 묘족 마을

묘족은 중국에서 가장 긴 역사를 지닌 소수민족으로 4천여 년전의 사적으로 남만(南蠻)으로 기록되어 있다. 인구 740만명으로 운남성, 귀주정 등 여러 성에 분포되어 있으며 일부일처의 가부장적 제도를 지키고 있다. 종교는 만물이 영혼을 지니고 있다는 원시종교를 신봉하나 18세기 영국선교사의 선교로 지금은 기독교인이 많다.

민속촌내에 있는 교회에서 예배가 드려지고 있으며 결혼식도 자주한다고 한다.

 

* 독룡족 마을

 

* 누족마을

 

* 푸미족 마을

 

 

* 율속족 마을

 

* 만족 마을

 

* 회족 마을

 

* 요족 마을

 

 

 소수 민족의 마을이 너무 많아서 한번에 모두를 소개하기에는 분량이 너무 많다. 그래서 중간을 끊고 나머지는 다음 장에서 소개하려고 한다.

 

 

 

중국 운남 여행 17 - 취호공원 주변과 쿤밍 시내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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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쿤밍으로 - 시내관광

 

 텅충에서의 짧은 여정을 마치고, 함께 다녔던 프랑스 아낙과 헤어지고 쿤밍행 야간 버스를 타고 버스안에서 잠을 자면서 16시간이 걸려 쿤밍에 도착했다. 엄청나게 오랜시간을 버스에서 지내며 중국인들과 같이 버스안에서 잠을 자는 색다른 경험을 하였다. 지난 날 시베리아를 여행하면서 기차안에서 러사아 사람들과 함께 숙식을 같이 하면서 지냈던 기억이 새롭게 났다.

 이 여행의 시작을 쿤밍에서 했지만 그 때는 시내를 돌아보지는 않고 외지를 돌다가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쿤밍시내를 구경하기로 일정을 짰기 때문에 쿤밍의 호텔에 짐을 풀고 잠시 쉬다가 쿤밍 시내를 구경하기 위해 나섰다. 먼저 간 곳이 쿤밍 사람들의 휴식처라고 알려진 취호 공원이다.

 

  이름 그대로 "푸른 뚝 길의 봄 아침"으로 알려진 추이후공원(Cuihu Park , Green Lake Park)"도시 속의 벽옥(碧玉)"으로도 유명하다. 쿤밍시 뤼펑산(螺峰山)아래우화산시루(五华山西麓)윈난대학(云南大学)정문 맞은편에 있는 호수를 둘러싸고 조성된 쿤밍 시내 최대 규모의 공원이다. 호수는 주변 식물들의 푸른 잎사귀와 조화를 이루어 물비취(水翠), 대나무비취(竹翠), 버드나무비취(柳翠)가 이루는 아름다운 광경으로 1900년부터 '추이(비취색, 청록색)(호수)'라는 이름이 정식명칭이 되었다. 원래는 14세기 이전에는 뎬츠(전지)와 연결된 하나의 호수이었는데, 텐츠의 수위가 점차 내려가면서 분리된 호수가 되었다고 한다. 공원은 크게 5개 풍경구로 나뉘는데, 호심도(湖心島)에는 호심정(湖心亭)과 관어루(觀魚樓) 등 청대 건축물이 있고, 동남쪽에는 수월헌(水月軒)과 금어도(金魚島), 동북쪽에는 죽림도(竹林島)와 구룡지(九龍池), 남쪽에는 호로도(葫瀘島)와 구곡교(九曲橋), 서쪽에는 해심정(海心亭) 등이 있다. 호수 안에 있는 여러 개의 섬은 다리로 연결되어 모두 돌아볼 수 있다

  아름다운 공원은 사람과 동물 모두의 휴식처로 사계절 내내 사랑받고 있다. 특히 겨울에는 월동하기 위해 멀리 시베리아에서 날아온 붉은부리갈매기가 수천 마리나 모여들어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호수 주변의 무성한 버드나무, 수면 가득한 연꽃잎, 푸른 호수에서 피어오르는 안개가 장관을 이루고 쿤밍 시내 한복판에 위치해 사시사철 다양한 전시회나 모임이 열리며 시민들이 태극권을 하거나 전통악기 연주나 노래 연습을 하는 장소로 자주 이용한다.

  긴 여행에 지쳐 하루쯤 휴식을 취하고 싶다면 추이후 공원과 '윈난 대학'을 돌아보며 여유를 즐길 수 있다. 추이후 공원 정문 앞에 조성된 '추이후난루'에는 아기자기한 액세서리 가게와 아담한 카페가 많아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기에 좋다.

추이후 공원 앞에 있는 노란색 건물도 눈여겨보자. 항일운동 시기에 유능한 생도들을 배출해 낸 사관학교인 '육군강무당' 건물이다. 외국인 졸업생도 있었으며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대첩에서 활약한 이범석 장군도 이 학교 출신이라 한다.

 

 

텅충에서 쿤밍으로 오는 야간 버스안의 모습

 

취호공원 입구

 

취호공원의 모습

 

취호공원 주변의 풍경 - 소수민족들의 공연이 끊이지 않는다.

 

취호공원의 여러 철새

 

취호공원 주변

 

한국식당 아리랑

 

쿤밍시내 중심가의 야경

 

시내를 다니다가 만난 우리나라의 포장마차촌과 같은 곳

 

과일가게

 

 숙소가 쿤밍역 부근이라 시내를 돌아다니다 밤 늦은 시간에 숙소 가가이 돌아와서 쿤밍역과 주변의 야시장에 들러 한잔의 술을 마시며 끝나가는 여행을 다시 생각하였다. 아무런 사전 지식도 없이 쿤밍 공항에 내려 이곳 저곳을 다닌 생각이 다시 새록새록 났다. 어떻게 보면 너무 무모한 여행일 수도 있으나 여행은 가지 않고 생각만 하면 아무 곳도 갈 수 없다. 어디든지 조금의 어려움은 극복하면서 다녀야 한다.

 

쿤밍역 부근의 야시장

 

 쿤밍에 머물면서 여러 곳에서 식사를 하였으나 숙소에서 조금 떨어진 조그마한 가게가 마음에 들었다. 메뉴도 내 입맛에 잘 맞고 비교적 다양했다. 너무 자주 갔는지 어느 새 이 가게의 아가씨와 구면이 되어 지나가면 인사를 하곤 했다. 채 20도 안 되어 보이는 참한 아가씨가 만두를 만드는 것을 보면 능숙한 장인과 같았다.

 

쿤밍에 있으면서 자주 들렀던 조그만 식당

 

쿤밍역 풍경

 

 어느 도시나 시내를 구경하는 것은 즐겁다. 그런데 우리는 여행을 하면서 시내구경을 제대로 하는 일이 별로 없다. 그저 이름난 명승지만 찾아가서 그 곳의 풍경만을 보고 여행을 다 한 것으로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잘못된 여행관이다. 여행이란 경치가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는 것도 있지만 그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호흡을 해 보는 것이 올바른 여행이다. 그들과 함께 모든 생활을 같이 하지는 못하지만 그들이 살고 있는 방식이나 그들이 먹는 음식을 같이 먹어 보면서 그들의 생활을 이해해 보는 것이 올바른 여행이다. 주어진 환경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그들과 함께 이동하고, 그 사람들이 평소에 먹는 식당에서 같은 음식으로 식사를 하면서 말이 비록 제대로 통하지 않아도 손짓과 몸짓만으로도 같이 느껴보는것이 좋은 여행이다.

 

 

 

중국 운남 여행 16 - 텅충, 화순교향(고진)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조용한 즐거움이 있는 오래된 마을 화순

 

 텅충의 마지막 여정은 화순으로 정했다.

 

 운남성 보산(保山)시 텅충(騰沖)현 경내에 위치해 있는 화순교향은 텅충현에서 불과 10여분의 거리에 있으며 600여년의 역사를 가진 오래된 마을로, 명나라 때 호남성에서 이주를 해 온 사람들은 2/3는 군사적 이유였고 1/3은 농사가 주 목적이었다고 한다. 예전에는 이 곳의 날씨에 의하여 양문돈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가 청의 강양제 시기에는 살기 좋고 서로 다투지 않아 화순교향이라고 했으며 마을 입구의 두 다리를 멀리서 보면 쌍 무지개가 뜨는 것과 같아 우의교라 불리기도 한다. 이 두 다리를 건너면 화순의 마을 안으로 진입을 할 수가 있다화순의 인구는 거의 80%가 화교이고, 나머지가 원주민이라고 한다.

 

 이 화순 역사의 뒤안길에는 지진 10번에도 견딘다는 토성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사라져 볼 수가 없다. 토성의 옛 사진에 의하면 토성의 높이는 7m, 너비는 3.8m였다고 한다.

그리고 길의 담장이 화산석으로 되어 있는데 이 담장을 청수담장이라고 한다.

 

화순고진 입장권

 

화순고진으로 들어가는 대문

 

 화순에 들어서면 그림처럼 아름다우며 지나간 세월의 소박하고 조용한 분위기가 물씬 풍겨온다. 아늑한 골목 양옆에는 검은 기와를 쓴 오래된 저택들과 장엄하면서도 우아한 사당과 패방, 자그마하면서도 정교한 누각과 정자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 건물들 사이로 푸른 나무들이 아름답게 자라고, 나무의 그늘 아래서는 주민들이 환담을 하거나 명상에 잠겨 있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 광경에 접하면 누구든지 저도 모르게 마음이 평안해진다.

 

화순고진 경내 안내도

 

웅장하고 아름다운 문

 

화순표지석

 

화순의 마을 사이를 흐르는 냇물

 

 이곳에는 건립 시기는 1924년도인 중국에서 단 하나 밖에 없는 향교 도서관이 있으며 책만 7만여 권이 있으며 옛 고서들 또한 1만여 권이 비치가 되어 있다 한다. 1만여 권의 가치는 이 곳의 가이드 말에 의하면 단 한 권만을 팔아도 집을 살 수 있는 큰 가치가 있다고 한다. 이 도서관은 외지에 나간 화교들이 돈을 보내와 지었으며 책도 화교들이 희사하였다고 한다. 도서관 내의 사진들을 보면 이 향촌을 빛낸 인물들 위주로 전시가 되어 있으며 대표적인 여러 사람 중에 중국의 5대 비취왕 중에 한 분의 얼굴이 가장 인상적이다.

 안으로 들어가면 창천루라는 건물이 있는데 이 건물은 쉽게 들어 갈 수 없게 되어 있으며 이 안의 책들은 모두 고서들로 위에 언급을 한 것처럼 가치가 무지 소중하다고 한다.

 

화순도서관의 모습

 

옛날 방식으로 종이를 만드는 방법을 보여 주는 곳

 

화순 마을의 아름다운 풍경

 

 

 차마고도(茶馬古道)는 실크로드 함께 인류 최고(最古)의 교역로 중국 서남부 운남성, 사천에서 티베트를 넘어 네팔·인도까지 이어지는 육상 무역의 길로, ()와 말을 교역하던 중국의 높고 험준한 옛길로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교역로이며 이 길을 따라 중국의 차와 티베트의 말이 오갔다고 하여 차마고도(茶馬古道)라는 이름이 붙었다.

 한나라 이전인 기원전 시기부터 형성되었고 당·송 시대를 거치면서 번성하였으며 이후 네팔, 인도, 유럽까지 연결됐다. 길이가 약 5000에 이르며 평균 해발고도가 4,000m 이상인 높고 험준한 이 길을 따라 물건을 교역하던 상인 조직을 마방이라고 하는데, 수십 마리의 말과 말잡이인 '간마런'으로 이루어지며 교역물품은 차와 말 외에 소금, 약재, 금은, 버섯류 등 다양하게 변했다. 근대에 차마고도를 따라 많은 도로가 건설되었지만 아직도 일부 마방이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차마고도의 출발점이라고 하면서 기념 조형물을 설치해 놓았다.

 

어병부

 

검은 기와를 쓴 오래된 저택들

 

화순 마을의 길 모습

 

유씨종사

 

백세방 문 - 이 문을 통과하고 난 길을 걸으면 장수한다는 길이다.

 

 화순고진은 중국의 다른 고성과는 달리 물로 둘러 쌓여 있다. 고진내에는 넓은 호수가 있으며 마을 사이사이로 흐르는 냇물은 마을을 깨끗하고 평화롭게 보여 준다.

 

호수의 수상주루

 

화순의 호수(야압호 : 야생오리호수)

 

  이 곳 화순의 가장 안쪽에는 애사기(艾思奇) 기념관이 있는데 그 앞의 광장에 있는 수령이 250년 이상인 이름이 용수(榕樹)라고 하는 큰 나무가 멋있게 뻗쳐 있다.

  애사기(艾思奇 1910~1966)17세에 중국 공산당에 입당을 하였으며 마르크스주의를 중국에 전하는데 엄청난 공헌을 했으며 중국의 실직적인 공산주의의 대가라고 할 수 있다. 애사기의 원명(原名)"이 생선"으로 그는 모택동 주석으로 부터 '애사기'라는 시호를 받게 되었다 한다. 애사기라는 이름의 뜻은 "쑥을 생각하니 기이하구나"라는 뜻인데 더 깊이 그 의미로 "쑥은 어떠한 악조건의 환경 속에서도 끈질긴 생명으로 세상에 싹을 올리는 식물이며 많은 사람들에게 참으로 이로운 식물이다." 라는 의미를 가졌다고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시간상 이곳을 찾아가지를 못했다.

 

화순의 길가에 붙어 있는 객잔 안내

 

 이 골목길을 따라 거닐다 보면 음식을 파는 노점 비슷한 곳이 많이 나온다. 아무 곳이나 앉아서 한끼를 해결하면 좋을 것이다. 가격은 비싸지 않으며 음식은 그 지방의 음식이라 조금 색다르다.

 

화순 마방 박물관

 

 화순을 거닐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지나간 긴 세월과 풍부한 문화를 느낄 수 있다. 화순사람들은 농사와 장사, 유교를 완전무결하게 하나로 접목시키는 지식과 문화를 자자손손 이어오고 있다. 화순은 살아 있는 도시이다. 선조들이 물려준 나무집에서 조용히 살아오던 화순 사람들은 오늘날 몰려드는 외지의 관광객을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예전부터 개방된 자세로 살아온 화순 사람들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넓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 지난 시대에는 동남아로부터 그들의 문화를 배웠고 오늘날은 관광객들을 통하여 그들의 선진적인 문화와 이념을 본받으려 한다. 그래서 그들은 관광객을 통하여 더 좋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로 본다.

바로 화순문화의 포용성과 다원성으로 인해 화순에서는 여러 가지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운남의 여러 고성 중에서 가장 좋은 느낌을 받은 곳이다. 리장이나 다리, 그리고 수허고성 등 등 많은 고성을 다녔으나 대부분이 사실 너무 상업적으로 번찬하고 관광객 위주로 꾸며져 있었다. 하지만 이 화순은 아직 옛스런 정취가 많이 남아 고요하게 마을을 돌아 보는 것이 즐거웠다. 특히 마을을 안고 있는 넓은 호수는 사람의 마음을 더 포근하게 해 주었다.

 

 여행의 일정이 조금 차질이 있어 화순의 곳곳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떠나게 되어 많이 아쉬웠다. 다음에 시간의 여유를 가지고 화순을 다시 찾아와서 구석구석을 제대로 볼 기회가 있기를 기대하고 아쉬운 발길을 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