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鶴)의 오딧세이(Odyssey)

아들과 함께 터키문명 산책 - 이스탄불 2 (술탄 아흐멧지구)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이제는 흔적밖에 남지 않은 술탄 아흐멧광

 

 아야 소피아 건너편에는 블루 모스크가 있고 그 옆에는 넓게 펼쳐진 광장이 있다. 이 광장의 터키어 정식 명칭은 술탄 아흐멧광장이지만 히포드로모스(히포드롬)로 더 알려져 있다.

 서기 3세기경에 비잔티움에 세워진 히포드로모스(전차 경주에 사용되던 경기장)는 동로마 제국의 스포츠와 사교 생활의 중심지였다. 서기 324,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티움으로 이전하면서 콘스탄티노플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이고, 히포드롬 경기장을 450m×130m 넓이에 1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확장되었다. 콘스탄티누스와 그의 후계자들은 제국 곳곳에서 기념물을 가져와서 이곳을 장식하였다. 하지만 제 4차 십자군 전쟁으로 철저히 파괴되어 지금은 자취도 찾아보기가 어렵다. 지금 남아 있는 것으로는 콘스탄티누스의 명에 따라 델포이에 있는 아폴론 신전으로부터 이곳으로 옮겨온 청동기둥과 서기 390,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가져온 오벨리스크, 뼈대 부분이 남아 있는 콘스탄티누스의 오벨리스크 정도이다.

 히포드롬은 비잔틴 제국 시대에 중요한 정치적인 중심지로 전차 경주를 응원하던 집단들이 정치조직으로 바뀌어 종종 정치와 종교적인 소동이 일어나곤 했다. 십자군전쟁으로 콘스탄티노플이 약탈당한 이후 히포드롬은 사용되지 않고 버려지게 되었다. 1451년 이 도시를 탈환해 수도로 삼은 오스만투르크인들은 전차 경주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이곳에서 말을 타고 창을 던지는 경기를 하였기에 이곳을 '말의 광장'이라는 의미의 터키어 이름인 '앗 메이단'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이스탄불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이 광장을 중심으로 이스탄불 역사지구를 관광한다. 이 주변을 둘러보는 데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가장 중요한 아야 소피아, 블루 모스크, 톱카프 궁전, 고고학박물관, 지하저수조 등등 그 외 여러 유적을 이루 셀 수 없다. 또 여기에서 시르케지역이나 그랜드 바자르 등도 가깝기 때문에 여유가 있으면 걸어다니면서 구경하기를 권한다.

 

 우리가 머문 숙소와 술탄 아흐멧 광장은 얼마 떨어져 있지 않고, 또 술탄 아흐멧 광장 지역이 이스탄불 역사지구라 수시로 왔다 갔다 하였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아야 소피아는 뒤에 보기로 하고 주변의 여러 곳을 거닐면서 구경을 했다.

 

 

이 광장의 주인 블루 모스크

 

 

술탄 아흐멧광장에서 보는 아야 소피아

 

 

*예레바탄 지하저수조

 

 이스탄불의 아야 소피아 옆에 위치한 동로마 제국 시절의 저수조로, 로마 시대에 바실리카가 있던 자리라 바실리카 저수지(Basilica Cistern) 또는 터키어로 지하궁전이라는 예레바탄 사라이(Yerebatan Sarayi)’로 불리기도 한다. 콘스탄티누스 시대부터 시작해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대인 532년에 에 끝난 대규모 지하 저수조로 길이 141m, 73m에 달하는 거대한 공간이다. 원래는 예레바탄 사룬치(지하 저수장)’라 불리었으나, 그 규모로 인해 예레바탄 사라이(지하궁전)’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지하궁전이라고 불리는 12열로 정렬되어 있는 336개의 돌기둥은 당시 주변에 있던 수많은 신전 등의 기둥을 동원해서 세웠다고 한다. 기둥들을 잘 살펴보면 동일한 양식이 아닌 매우 다양한 양식의 기둥들이 쓰였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기둥들 중 헤라의 신전에서 가져왔다고 전해지는 눈물의 기둥과 메두사의 머리가 받침으로 사용된 기둥이 매우 유명하다. 여러 모양의 기둥들 중에서도 가장 이색적인 것은 거대한 메두사 얼굴이 초석으로 사용되고 있는 기둥으로, 옆으로 뉘어 있거나 거꾸로 놓여 있는 메두사의 얼굴은 음침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이 기둥이 놓인 방식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을 한다. 메두사라는 괴물자체가 마주보면 돌이 되는 저주에 걸려있기에 눈길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얼굴을 뒤집어놓은 거라는 얘기도 있고, 건설하던 기독교도들이 이교도를 멸시하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놓았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또 그냥 높이를 맞추기 위해서라는 설이 있다. 또 다른 추측으로는 비잔틴 제국에 기독교가 공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메두사를 은근히 수호신처럼 여기고 또 두려워하자 당시 황제였던 유스티니아누스가 메두사의 머리를 받침으로 사용해 이교도적인 믿음을 상징적으로 끝냈다고도 한다. 이 저수조에서 메두사의 얼굴은 가장 낮고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지만 현재는 가장 사랑받는 기둥으로 사람들에게 보여지고 있다.

 

현재 기둥 아래를 보면 물고기들이 보이는데 관상용으로 현대에 풀어 놓은 것만이 아니라, 과거에도 저수조에 물고기를 풀어 놓아 물의 수질을 확인했다고 한다. 어두운 열주 사이를 불빛을 따라 걷다 보면 물방울이 떨어진다.

 

신비롭고 인상적인 지하 풍경 덕분에 이곳에서 영화 007시리즈 '나를 사랑한 스파이'와 '인페르노'의 촬영지로 쓰이기도 했고, 간혹 콘서트나 여러 행사가 열리기도 한다.

   

한 가지 단점은 지하에 조명이 밝지 않아 사진을 찍기가 너무 어려웠다.

 

 

지하 저수조 외벽

 

 

 

예레바탄 지하저수조(지하궁전) 외부

 

 

지하 저수조 입구

 

 

지하 저수조로 내려 가는 입구

 

 

 

 

지하에 늘어 선 열주들 - 최소의 조명으로 어둡다.

 

 

 

눈물의 기둥 설명판

 

 다른 기둘들은 아무런 장식이나 문양이 없이 그냥 울퉁불퉁한 표면으로만 되어 있는데 이 기둥에는 독특한 문양이 새겨져 있다. 사람의 눈과 비슷한 문양으로 물이 기둥을 따라 흐르는 모양이 사람이 눈물을 흘리는 것과 비슷하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메두사의 기둥 설명판

 

 

 

메두사 두상

 

 이 저수조는 아직 밑에 쌓인 진흙을 걷어내면서 발굴이 진행중이었다. 내가 간 날에도 일부는 막아 놓고 인부들이 작업을 하고 있었다.

 

 

 *소욱 체쉬메 골목

 

 소욱 체쉬메 골목은 대개가 잘 돌아보지 않는 곳이다.  톱카프 궁전의 벽을 따라 길게 이어진 골목으로 그냥 걷고 보면서 지나가는 곳이다. 이 골목의 남동쪽 끝이 아야 소피아쪽의 작은 광장으로 통한다. 이곳을 지나면 자그마하지만 아름다운 건물이 눈을 끈다. 바로 술탄 아흐멧 3세의 샘이다. '차가운 샘'이라는 골목 이름이 이 샘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샘은 오스만 제국의 번성기를 열었던 대재상 아브라함이 1728년에 아흐멧 3세를 위해 지은 것으로 굉장히 인상적이다.

 

 

 

 

책 모형과 골목의 벽

 

 

 

 

 

 

황제의 샘

 

 

이 광장에는 조금 덜 알려졌지만 많은 유적들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이 술탄의 무덤이다. 이 술탄들의 무덤을 보면서 아주 화려하게 지어진 건물과 현란하게 치장된 아름다운 내부에 감탄한다. 여러 명의 술탄을 함께 모시고 내부에는 각각의 무덤이 따로 분리되어 있다. 아쉽게도 내가 지금 이 건축물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여튼 이 광장에 있으니 꼭 구경해 보시기를 바란다.

 

 

 

술탄들의 묘

 

 

 

내부의 아름다운 치장을 보면 술탄들의 권력과 권위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술탄 아흐멧 3세의 무덤 설명판

 

 

 

술탄 세림 2세의 무덤 설명판

 

 

외부 전경

 

 

 

 

술탄 무스타파 1세의 무덤 설명판

 

 

 

 

광장 주변의 유적

 

 

 *콘스탄티누스 오벨리스크

 

 콘스탄티누스 오벨리스크는 정확한 건축 연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4세기경으로 추정되는 술탄 아흐멧 광장 중앙에 있는 오벨리스크 중 하나이다. 원래 이 탑은 32미터 높이의 대리석에 금박 청동 장식물을 입한 아름다운 기둥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거칠게 깎은 벽돌 모양의 돌을 쌓아 올린 모습이다. 869년에 지진으로 꼭대기가 일부가 무너진 뒤 콘스탄티누스 7세가 보수했다. 당시에는 콘스탄티누스 7세의 조부인 바실 1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황금빛 청동으로 표면을 장식했던 아름다운 기념탑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제 4차 십자군이 청동을 벗겨 약탈해 가면서 옛 모습을 잃고 그것을 붙였던 자리만 보기 흉하게 남아있다. 현재의 것은 1894년 다시 복구한 것이다.

 

 이 광장에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그리스 델포이에서 가져와 경마장 광장에 세워두었던 2마리의 청동 말 조각이 있었는데 제4차 십자군들이 이 말들을 베네치아로 가져갔다고 한다.

 

 

콘스탄티누스의 오벨리스크 설명판

 

 

 

 

오벨리스크 전 후면의 모습

 

 

 

오벨리스크 기단

 

 * 세 마리 뱀의 기둥

 

 이 기둥은 그리스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 앞에 있던 것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새로운 수도를 장식하기 위해 330년에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나의 글 그리스 델포이편에서 아폴론 신전을 이야기하면서 이 청동 기둥의 복제품이 아폴론 신전에 남아 있고 진품은 이곳 술탄 아흐멧 광장에 있다고 소개하였다. 바로 그 기둥이다.

 기원전 479년에 있었던 플라테이아 전투에서 31개의 그리스 도시국가 연합군이 페르시아를 물리친 것을 기념하기 위해 페르시아에게서 빼앗은 전리품인 청동방패를 녹여 만들어 기원전 478년에 아폴론 신에게 바친 것으로 아직도 기둥 밑에는 31개 도시의 명칭이 새겨져 있다.

 원래는 기둥 꼭대기에 3개의 뱀 머리와 황금 그릇이 있었지만 제 4차 십자군 전쟁에서 황금 그릇이 사라졌고, 1,700년경에 뱀 머리가 사라졌다고 한다. 그러다가 1847년에 일부가 발견되어 지금은 이스탄불고고학박물관에 있다.

 

 

뱀의 기둥 설명판

 

 

일명 뱀의 기둥

 

*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Obelisk of Theodosius, Obelisk of Tutmoses III]

 

 히포드로모스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광장 한가운데 있는 '테오도시우스의 오벨리스크'. 기원전 15세기경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 투트모스 3세가 룩소르 카르나크신전의 제 7탑문 앞에 세운 오벨리스크로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2세가 357년에 알렉산드리아로 오벨리스크를 옮겼으며, 390년에 테오도시우스 1세가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이 오벨리스크는 원래60미터였고 총무게도 800톤이었는데 당시에 그대로 옮기기에 너무 무겁고 위험해서 당시 사람들이 이를 셋으로 잘라 그 가운데 윗부분만 이집트에서 가져와서 세웠다. 오벨리스크를 받치고 있는 기단 네 면에는 이것을 세울 당시의 조각품들이 있다.

 아스완(Aswan)에서 생산되는 붉은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오벨리스크의 높이는 본래 하단부를 포함해 30m 정도였으나 현재는 25.6m이다. 오벨리스크의 4면에는 각각 투트모스 3세가 유프라테스강 유역을 점령한 것을 기리는 내용이 상형문자로 새겨져 있다. 흰 대리석으로 된 하단부는 테오도시우스 1세 때 새로 만들어진 것으로, 히포드로모스의 전차 경주와 황제 가족들의 모습의 부조가 새겨져 있다.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 설명판

 

 

 

 

 

오벨리스크의 네 면의 모습

 

 

오벨리스크 기단의 모습

 

 

 * 술탄 아흐멧 자미(Sultan Ahmed Mosque : 일명 블루 모스크)

 

 터키를 대표하는 이스탄불 술탄 아흐멧광장에 서 주인같이 위용을 자랑하며 있는 사원으로, 사원의 내부에 3만 개의 파란색과 녹색의 타일로 장식되어 있기 때문에 '블루 모스크'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졌다. 이 모스크는 17세기 초에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술탄 아흐멧 1세가 1609년에 짓기 시작하여 1616년에 완공했다. 아야 소피아를 능가하는 건물을 짓겠다는 의도로 아야 소피아와 비슷한 구조를 가진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다 하는데.... 의문이다. 술탄 아흐멧 모스크는 건설 당시에 "alti(여섯)""altin(황금)"을 혼동한 번역상의 오류로 황금 미나레(Minare : 첨탑) 하나를 세우는 대신 6개의 미나레가 세워졌다고 한다. 다행히 술탄은 미나레를 너무나 마음에 들어 했고, 덕분에 6개의 미나레와 그리고 건축가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오늘날 술탄 아흐멧은 터키에서 유일하게 6개의 미나레를 자랑하는 모스크이다. 이스탄불의 아시아 쪽에서 볼 수 있는 최고의 풍경은 배로 이스탄불로 들어올 때 멀리서도 스카이라인을 장식하는 모스크의 웅장한 실루엣을 보는 것이다. 황혼 무렵 보스포루스 해협의 크루즈를 타면 이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뚝 서 있는 미나레 6개는 술탄의 권력을 상징하며, 이슬람교도가 지키는 15회의 기도를 뜻하기도 한다. 사원 앞의 정원에는 언제나 화사한 꽃이 피어 있어 사람들에게 편안한 휴식처를 제공한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며 정신없는 이스탄불 한복판에서 평화로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술탄 아흐멧 모스크에 들어가 한낮의 뜨거운 햇빛을 피하면서 잠시 경건한 마음을 가지도록 하자. 모스크 밖에는 뾰족하고 날렵한 미나레가 위용을 자랑하며 하늘을 찌르고 있다. 이 모스크는 외부 정원과 내부 정원, 본당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외부 정원에는 술탄 아흐멧 1세의 무덤이 있고, 내부 정원에는 기도를 드리기 전에 손발을 씻는 분수대가 있다.

 

 모스크의 정원에는 많은 사람들이 벤치에 앉아 분수를 바라보고 있다. 커다란 안뜰을 지나가면 모스크 내부로 이어지는데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과 관람객들의 출입구는 다르다. 관람객의 출입구로 실내로 들어갈 때는 신발은 벗어야 하며, 복장도 통제를 한다. 안으로 들어가면 낮게 매달린 샹들리에가 섬세하고 정교한 푸른 타일에 빛을 반사시키고 있다. 고요한 실내에서 차분하게 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보면 경탄과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며, 누구라도 한번은 자신을 잊어버리고 경건한 마음을 가진다. 기도 시간이 지나면 관람객에게 장소를 자유로이 비워준다.

 

 

블루 모스크의 미나레

 

 

 

 

블루 모스크의 전경

 

 

술탄 아흐멧 모스크(블루 모스크) 설명판

 

 

블루 모스크 전체 사진

 

 

 

 

 

 

 

블루 모스크 외부 모습

 

 

 

 

 

 

 

 

 

 

 

블루 모스크 내부의 화려한 모습

 

 

 

블루 모스크에서 보는 아야 소피아

 

 * 터키이슬람예술박물관(Türk ve İslam Eserleri Müzesi)

 

 터키이슬람예술박물관은 술탄 아흐멧 광장 북서쪽에 있는데 광장에서 길만 하나 건너면 된다. 터키 이슬람 문화와 역사를 살필 수 있는 예술품과 유물들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1983년에 개관했다. 박물관 건물은 1524년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수상이었던 이브라힘 파스하(İbrahim Pasha)의 궁전이었다. 그가 사망한 뒤 여러 용도로 사용되다가 1983년 박물관으로 개조한 뒤 일반에 공개했다.

 이 박물관에는 종교 미술품과 정교한 수공예품 등 총 4만점 이상의 터키 이슬람 문화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중에서 이곳에 소장되어 있는 카펫들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카펫으로 불린다. 가장 큰 전시실에 전시되어 있고, 꽃들을 모티브로 한 것에서 동양적인 테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양이 새겨진 카펫은 모두 수작업으로 만들었는데 섬세하고 화려한 문양과 정교함이 묻어 있으며, 크기에서도 세계적인 것으로 꼽힌다.

 또 금박으로 장식된 코란과 가위 등은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필사본 책자와 석공예품 등도 함께 전시돼 있다.

 

 

터키이슬람예술박물관 입구

 

 

터키이슬람예술박물관 전경

 

 

 

금박의 코란

 

 

 

 

화려한 공예품

 

 

 

 

 

엄청난 크기의 카펫들

 

*그랜드 바자르

 

 이스탄불에 위치한 그랜드 바자르(Grand Bazaar)는 터키의 전통 특산품과 기념품을 판매하는 대표적인 관광명소이다. 터키 이름으로 '지붕이 있는 시장'이라는 의미의 카팔르 차르쉬(Kapar Carsi)라는 시장은 아치형 돔 지붕으로 덮인 대형 실내 시장으로, 일반적으로 그랜드 바자르로 알려져 있다.

 

 1455~1461년 술탄 메메드 2(Mehmed II)의 명에 의해서 원래는 마굿간이었던 자리에 건축되었으며 16세기 술탄 술레이만 1(Suleiman I) 통치 시기의 대대적인 확장을 비롯하여 1896년 지진과 1954년 화재 이후에 대규모의 복원을 통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하나의 작은 도시라고도 할 수 있는 카팔르 차르쉬는 30,700의 면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실내 시장으로, 현재 60여 개의 미로 같은 통로에 5,000여 개의 상점이 있으며 2개의 주요 통로 끝에 있는 입구 4개를 포함하여 모두 20여 개의 입구가 있다. 시장에는 각종 보석류, 피혁류, 카펫, 향신료, 형형색색의 도자기와 기념품을 포함한 각종 공예품과 특산품 등등 없는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많은 물품을 판매하고 있다.

 

 이 곳은 유럽과 아시아 두 대륙을 연결하는 지리적 특성으로 비잔틴시대부터 동서양의 교역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 오늘날에는 하루에 3-4십만 명의 관광객이 터키를 관광한 기념품을 사는 곳이다. 관광객이 물건을 살 때는 상당히 흥정을 잘 해야 한다. 반값에 구입해도 바가지일 경우가 많다. 자신이 생각한 가격이 정가라고 믿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롭다.

 

 

 

 

시장의 외부와 한 출입구

 

 

 

Grand Bazaar라고 적혀있고 1461년이라는 표시가 있는 아름다운 문

 

 

 

 

 

 

 

 

 

 

 

시장 내부의 여러 모습

 

 우리가 머문 숙소가 이 시장과 가까워 그랜드 바자르를 몇 번이고 갔다. 그리고 간단한 선물을 사기도 하였다. 아들은 이 시장에서 구두와 가죽 신발을 구입했다. 가격과 기능에 만족하면서 짐만 되지 않으면 더 사고 싶은 물건이 많다고 아쉬움이 가득하며 말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제품의 품질이 뛰어나다. 특히 가죽제품은 우리가 말하는 가성비로 볼 때 우리 물건보다 나은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서 터키에서 가장 유명한 장미 오일을 구입했다. 물론 적당한 흥정을 하였는데, 내가 부른 가격에 별다른 의의를 달지 않고 선뜻 응하는 것을 보고는 더 깍아도 되지 않았나 생각하였으나, 내가 희망한 가격이라 만족했다.

 

 

아들과 함께 터키문명 산책 - 이스탄불 1 (갈라타지역 주변)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여러 겹겹의 도시, 이스탄불

 

 이스탄불은 발칸 반도와 아나톨리아, 흑해와 지중해 사이에 있는 보스포루스 반도에서 전략적 위치에 있다 이 도시는 북쪽으로는 자연 항구인 골든 혼(Golden Horn), 동쪽으로는 보스포루스 해협, 남쪽으로는 마르마라(Marmara) 해에 둘러싸인 반도에 있다.

 

 이스탄불은 인구 약 1400만으로 지중해와 흑해를 잇는 해상 교통과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육상교통의 요지다. 아시아와 유럽에 걸쳐 있는 이스탄불은 기원전 660년 그리스시대에는 비잔티움이라고 불렀으며, 서기 330년 콘스탄티누스가 동로마제국의 수도로 삼으면서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불렀다. 395년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열되면서 콘스탄티노플은 비잔틴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서로마제국은 쇠퇴하여 결국 멸망하였고, 비잔틴제국이 번성일로를 걷게 되자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동방무역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1453년 술탄 메메드 2세가 이곳을 점령하면서 오스만제국의 중심적인 도시가 되었다.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의 3대륙을 아우르는 대제국인 오스만제국의 수도로서의 이스탄불은 상업도시였을 뿐만 아니라 문화도시이기도 하여 전통적인 비잔틴 문화와 이슬람 문화가 조화된 새로운 복합문화가 창출되기도 하였다. 오랫동안 번영을 누려오던 이스탄불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만제국이 무너지자 전승국들에 의해 점령당한다. 1920810일 전승국은 오스만 정부에게 세브르 조약을 강요하고, 이스탄불을 포함한 해협지대를 국제 관리위원회의 관리를 받도록 하였다. 이 조약에 반대한 무스타파 케말 파샤가 앙카라에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여 소아시아에 침입한 영국군을 격파하였다. 이 승리로 신생 앙카라 정권과 전승국 간에 로잔 조약이 체결되었고, 이스탄불은 다시 터키인들의 수중으로 돌아왔다. 19241029일 터키공화국이 선포되고 앙카라가 수도로 결정되었다. 이로써 이스탄불은 수도로서의 위치를 잃고 터키공화국의 한 도시로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1923년까지 1,600년 동안 수도였던 이스탄불에는 그리스·로마시대부터 오스만 제국시대에 이르는 다수의 유적들이 분포해 있다.

 

 이스탄불은 보스포루스해협, 골든혼(Golden Horn), 마르마라해()에 의하여 베욜루, 이스탄불(파티프), 위스퀴다르의 3지구로 나뉘고, 골든혼의 갈라타교와 아타튀르크교로 연결되어 있다. 골든혼의 남쪽인 이스탄불은 옛날의 이스탄불이 자리 잡았던 전통 있는 지구로, 지금도 비잔틴시대의 성벽이 서쪽 경계를 둘러싸고 있다. 아흐메드 사원(블루모스크), 하기아 소피아(현재 박물관), 토프카 궁전(현재 박물관), 고고학박물관, 터키-이슬람 미술관, 고대 오리엔트미술관, 그리고 이스탄불대학 등이 있으며 이 도시의 전성기를 생각나게 하는 대시장(그랜드 바자르)도 있다. 대개의 관광객들이 머무는 곳이다.

 

 이스탄불은 오래된 역사의 도시고 넓기 때문에 여러 지역으로 나누어 소개한다. 상당한 날을 이스탄불에 머물렀지만 제대로 본 것 같지가 않다. 저번 봄에 이스탄불에 머무면서 구경한 것까지 포함해서 소개를 한다.

 

 먼저 소피아성당은 뒤에 보기로 하고 시르케지역 중심의 시내를 구경하면서 해협을 지나 갈라타 지역으로 간다.  

 

 

갈라타 타워

 

 

갈라타 타워 위에서 필자

 

 

 

 

점심을 먹은 케밥 집 - 자기 집이 유명한 집이라고 선전을 많이 하고 있다.

 

 

 

 

 

 

 

 

수선 중인 시르케지역

 

 처음 오리엔트 특급이 다니기 시작하던 시절의 시르케지 역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파리를 출발해 여러 도시를 거쳐 이스탄불로 오는 오리엔트 특급(Orient Express) 열차가 188310월부터 이 역에서 운행되기 시작했다. 유럽 대륙의 마지막 기차역인 시르케지 역은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의 유명세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지만, 그전부터 복잡하기는 마찬가지였다. 1883년부터 프랑스 파리와 터키 이스탄불 구간을 운행했던 오리엔트 특급 열차는 여러모로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었다. 파리에서 출발하여 로잔, 베네치아, 베오그라드, 소피아를 거쳐 이스탄불에 도착하는 이 열차는 사람들에게 유럽을 기차를 타고 횡단한다는 놀라움과 기쁨으로 호기심을 자극했다. 여러 인종과 민족으로 구성된 유럽 사람들은 이 기차 안에서 서로 겹쳐지고 섞여서 여행을 했다. 비행기의 발달로 19775월에 운행이 축소되어 부다페스트까지만 운행되다가 2007년부터 다시 비엔나까지 확장되어 운행한다. 지금 소피아로 가는 국제선은 다른 역에서 출발하지만 이 역에서 표를 팔고 버스로 이동을 한다. 역 안에는 오리엔트 특급열차를 주제로 한 레스토랑과 대합실이 남아 있다. 지금은 초라한 역사로 보이지만 오리엔트특급열차가 운행되던 때에는 유럽의 부호들이 모두 이 역사에서 열차를 기다렸다.

 

 

 

저 멀리 보이는 갈라타 타워

 

 

 

 

 

 

 어디에나 보이는 거리의 악사

 

 

 

 

 

갈라타 다리

 

 

 

갈라타 다리 위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 사람들

 

 갈라타 다리(터키어: Galata Köprüsü)는 도개교(跳開橋)로서, 총 길이는 490m이고, 폭은 42m, 이스탄불의 카라쾨이(Karaköy)와 에미뇌뉘(Eminönü)를 연결하는 다리이다. 양방향으로 각각 3차선 차도와 도보가 있으며, 중앙에 트램(Tram) 노선이 지나간다. 19세기 후반부터 갈라타 다리는 터키 문학, 영화, , 소설 등에서 꾸준히 등장하고 있다.

금각만에 세워진 다리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6세기경 유스티니아누스 1세 당시의 기록에서 볼 수 있다. 1453년에는 콘스탄티노플의 함락 당시 오스만 투르크 군대는 배를 서로 연결해서 임시 부교를 만들었다. 1502년에 세기의 천재였던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다리 설계를 하였으나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취소되었다. 현재의 갈라타 다리는 다섯 번째 다리로, 터키의 건설회사인 STFA가 네 번째 다리가 있던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지었다. 199412월에 완공됐다.

 현재는 갈라타 다리에서 낚시를 즐기는 터키인들로 유명하고, 이 모습을 지켜보고 이스탄불의 경치를 감상하고자 하는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다리 아래층에는 생선요리 식당과 술집 등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어 관광객을 끌고 있다.

 

 이 갈라타다리에서 겪은 에페소드 하나를 소개하면, 저번 봄에 왔을 때, 다리에는 구두를 딱는 사람들이 많다. 걸어 가는 도중에 그 중 한 사람이 솔을 흘리고 지나가서 주워주니 고맙다고 구두에 솔질을 해 주면서 딱아 준다. 처음에는 감사의 표시인 줄 알았는데 조금있다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돈을 요구한다. 아이들이 병이 들었다, 아내가 아프다는 등등의 이야기를 하면서 돈을 주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완전히 장사를 위해 일부러 도구를 흘리는 것이다. 뒤에 숙소로 돌아와서 보니 이스탄불에서 조심해야 하는 일 중의 하나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하지만 여행 중에 이런 조그마한 에피소드도 있는 것이 재미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그렇게 많은 돈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생 오렌지 주스

 

 주문을 하면 즉석에서 주스를 짜 준다. 너무나 달콤하고 시원한 맛에 반해서 아들은 이 주스를 수시로 사 먹었다. 값도 비싸지 않고, 여행에 지친 몸의 피로를 달래 줄 수 있는 좋은 음료다. 탄산 음료만 마시면서 여행을 하기보다 시원한 생과일 주스로 입안을 향긋하게 하고 피로를 씻기를 바란다.

 

 

 

 

 

 

 

 

 

에미 뇌뉘에서 보는 보르포루스 해협의 여러 모습

 

 에미뇌뉘는 보스포르스해협을 운행하는페리들이 출벌하는 중심지이다. 이곳은 항상 크루즈승객을 끌어 모우는 호객꾼의 모습과 음악소리가 시끄럽게 들린다. 고등어케밥과 홍합으로 만든 밥이 유명하며 노점상들이 북적이는 곳이다.

 

 갈라타 다리를 건너면 갈라타 타워쪽으로 올라가는 언덕에 조그마한 지하철인 튀넬이 있가. 튀넬 (Tünel)은 런던 지하철(1863) 다음으로 오래된 지하철로, 이스탄불의 지하에 지어진 강삭철도로 길이가 600m도 안되는 세계에서 가장 짧은 지하철이다. 1875117일에 개통된 튀넬은 금각만의 북쪽 해안에 위치하며, 카라쾨이(Karaköy)와 베이욜루(Beyoğlu)의 구역을 연결하는 2개의 역이 있다. 19세기 후반에 페라(현 베이욜루)와 갈라타(현 카라쾨이)의 지역은 큰 언덕으로 분리되고 경사가 심하여 이 두 지구를 오가는 것이 어려웠다. 1867년 프랑스 기술자인 유진 앙리 가방드가 이 두 지역을 연결하는 방법으로 언덕을 오르내리는 강삭철도를 생각해냈다. 건설은 1871730일에 시작되어 1875117일에 개통하였다.

아래 역은 카라쾨이이고 위쪽 역은 베이욜루다. 위쪽 역은 아래역보다 61.55m 높다. 이 노선은 원래 두 개의 평행선으로 지어졌으나, 현재는 두 개의 열차가 중간에 나란히 통과하는 복선 구간을 제외하고는 단선으로 운행한다. 현재는 수 많은 관광객들이 이용하는 관광열차다.

 

 

 

 

 

튀넬 기차

 

 

 

 

 

 

튀넬의 역사를 전시해 놓았다.

 

 튀넬에서 내려 조금 걸으면 갈라타 타워에 도착한다. 갈라타 타워는 이 지역의 랜드마크로 가장 높은 곳에서 위치하고 있으며 타워의 전망대에서는 유럽과 아시아를 가르는 해협인 보스포루스 해협과 골든혼 그리고 이스탄불 시내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특히 해질 무렵의 이스탄불의 풍경은 환상이라고 한다. 원래 있었던 타워는 제4차 십자군 전쟁 때 파괴되었고, 1348년에 제노아 자치령에 의해 타워 오브 크라이스트 (그리스도의 탑)라는 이름으로 재건축되었다. 전쟁포로를 가두는 감옥으로도 사용되었고, 화재감시탑으로도 사용되는 등 여러 용도로 사용되다가 1960년대에 목재로 된 내부를 콘크리트로 바꾸고 일반인들이 관람할 수 있도록 공개했다. 타워의 높이는 62.59m이며 꼭대기의 장식물까지 포함하면 66.90m이다. 이것이 건축될 당시에는 그 도시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다.

이 타워는 비잔틴 인들에게는 메가로스 피르고스’(Megalos Pyrgos: 큰탑이란 의미)로 불리었고, 1638년에 헤자르펜 아흐멧 첼레비라는 사람이 자신이 만든 날개를 달고 이 타워의 꼭대기에서 보스포루스 해협을 지나 아시아 쪽인 우스크다르 언덕까지 날아가는 비행을 성공하였다고 해서 일반인들에게는 그의 이름을 딴 헤자르펜 타워라고 불리기도 했다.

 

 

 

 

 

우리나라 경주와 실크로드 우호협력 기념비

 

 

 

 

분수와 설명판

 

 

 

갈라타 타워의 내부

 

 

 

 

 

 

 

 

 

 

 

 갈라타 타워 전망대에서 한 비퀴 돌면서 보는 이스탄불의 사방 풍경

 

 

 

터키식 커피

 

 * 므스르 차르쉬(이집션 바자르)

 

 1663년 메흐멧 4세의 어머니인 하티제가 지은 시장으로, 그 당시에 향신료의 대부분을 이집트에서 수입했기 때문에 므스르(이집트)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한다.지금은 관광객들을 위한 상품을 팔고 있지만 이스탄불의 향신료 거래의 중심지이다.  예니 자미에 딸린 복합건물로 음식물부터 온갖 종류의 물품이 있어 기념품을 사기에는 적합한 곳이다. 물품이 아주 다양하며, 값도 그렇게 비싸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물건을 흥정을 아주 잘 해야 한다. 그들이 부른 값에서 반이상을 깍아도 아마 될 것이다. 나도 여기서 가죽 신발을 한 컬레 사서 여행 중에 요긴하게 신었고, 한국에 돌아와서도 구두 대용으로 잘 신고 다닌다.

 

 

 

 

 

 

 

 

 

 

므스르 차르쉬 입구 현판 - 1664년이란 표시가 보인다.

 

 

 

 

 

 

여러 곳의 구경을 마치고 다시 시르케지 역 부근에 있는 과자점을 들렀다. 죽기전에 꼭 먹어야 하는 음식이다는 터키식 딜라이트를 먹기 위해서다. 과자점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집이라는 곳을 들어갔다. 여기서 케이크와 아이스크림을 먹고 나오면서 한국의 여러사람들에게 줄 기념품으로 과자들을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가게 상호와 연혁을 표시

 

 

 

 

 

가게 내부와 손님들

 

 창가에 앉아 바다를 보면서 과자를 먹으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겨우 자리가 나올 수 있다. 그런 기대는 아예 하지 마시고 자리가 있는대로 앉아서 그냥 맛있는 케익과 아이스크림을 맛보는 것이 상책이다.

 

 

가게 외부 전경

 

 이스탄불은 너무나 큰 도시이고 오랜 역사의 도시이기에 몇 일간의 여정으로는 주마간산식의 구경밖에 못한다. 그래서 구역을 나누어 보고 싶은 곳을 집중하여 볼 수 밖에 없다. 오늘은 주로 에미뇌뉘와 시르케지 주변, 그리고 갈라타 타워를 중심으로 하루를 즐겼다. 내일은 또 어디를 집중하여 갈 것인지를 아들과 상의를 해야 한다. 여태까지 아들을 따라 다녔지만 이스탄불은 내가 봄에 약 열흘을 머물렀던 곳이라서 대강은 알기에 아들도 내 의견을 물어 다니기로 한다. 

 

 

 

 

 

 

아들과 함께 터키문명 산책 - 셸축(셸주크)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초기 기독교의 성지 셸축

 

 에페소스가 있는 셸축은 셸주크라고도 한다. 셸축은 터키 서부 이즈미르(Izmir) 주에 있는 도시로 에페소스 유적이 있어 유명하다. 이즈미르 시에서 남쪽으로 73거리에 있으며, 인구는 약 40,000명이 채 안되는 조그만 도시다. 고대 지명은 아이오스 테올로고스(Ayios Theologos)이며, 현재 지명은 12세기 무렵 이 지역에 정착한 셀주크투르크족에서 유래하여 1914년에 붙여졌다. 도시 전체에는 그리스, 기독교, 이슬람 문화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평화로운 도시다. 시내에 성 요한교회와 비잔틴 수도교, 이사 베이(Isa Bey) 모스크가 있으며, 고고학박물관과 아르테미스 신전이 우리 눈길을 끈다. 시 외곽에는 성모 마리아의 집과 에페소스유적이 있다. 에페소수가 너무 유명해서 셸축에서 에페소스만 생각하지만, 사실 이 도시에는 그리스도교와 매우 많이 연관이 있는 도시다.

 

 

박물관에 있는 아르테미스 여신상

 

 *성모 마리아의 집 

 

 셸축 숙소에서 성모 마리아의 집까지 가려고 하니 교통편이 마땅하지 않다. 그래서 택시를 또 부르기로 했다. 여행의 경험상 택시비가 비싸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역시나 성모 마리아의 집을 왕복하고, 우리가 구경하는 시간까지 약 2시간 반이나 걸렸는데 50리라(우리돈 15,000원 정도)이다.

 

 택시로 편안하게 간 곳이 성모 마리아의 집(또는 동정녀 마리아의 집)이다.

 

성모 마리아의 집(터키어: Meryemana 또는 Meryem Ana Evi)은 터키 셀주크에서 7킬로미터 떨어진 에페소스 인근의 코레소스 산에 자리한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공동 순례지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이곳은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선종하여 승천할 때까지 사도 성 요한과 함께 머물렀던 곳이라고 한다.

 

 성모 마리아의 집터에 당도하면 집터의 중간지점에 작은 마리아의 동상이 자비롭게 서 있다. 세례 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곳을 지나면 돌로 쌓아 지어진 성모 마리아의 집이 나타난다. 전 세계의 많은 카톨릭 신자들이 참배하여 기도를 드리는 곳이다. 이곳을 찾은 사람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누구나 촛불을 밝히며 기도를 올리거나 소원을 빈다. 계단 아래엔 만병을 치료한다는 성수를 수도시설로 만들어 놓아 사람들이 성수를 마시거나 병에 담아가기도 한다. 성수 터 옆에는 개인의 간절한 소원을 적은 천 조각과 종이 조각들이 촘촘히 벽에 걸려 있다.

 

 이 곳에서 18811018일 프랑스의 아베 줄리앙 꾸예 신부가 작은 석조건물과 고대 에페소 유물을 발견했다. 신부는 그 건물이 클레멘스 브레타노의 저서에 기재된 독일 수녀 안나 가타리나 에메리히(1774-1824)가 환시를 통해 본 성모 마리아가 예수가 사망한 뒤 남은 생을 보냈던 집의 형태와 놀랍게도 일치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으나 발견 당시에는 별로 주목받지 못하였다. 10년 후, 프랑스의 마리 드 망다 그랑시 수녀에 의해 폴린 신부와 융 신부 등 두 명의 라자로회 선교사들이 1891729일 꾸예 신부의 안내서를 보고 그 건물을 재발견하였다. 이들은 폐허가 되어 지붕도 없는 이 돌집이 오랫동안 이곳 주민들이 거룩한 장소로 여기고 있는 곳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곳 주민들은 초대 교회 시절 에페소에 살던 그리스도인들의 후손들이었다. 그들은 이곳을 터키어로 동정녀의 문간(Panaya Kapulu)’이라고 불렀다. 마리 드 망다 그랑시 수녀는 이곳 마리아의 집에 조그마한 가톨릭 성당을 하나 세웠다. 동정 마리아의 집 발견은 12세기부터 이야기된 동정 마리아의 에페소 선종 전승의 신빙성을 한층 높여주었다. 1961년 교황 요한 23세는 이곳을 성모 마리아의 집으로 공식 선포한다. 이후 1967년 교황 바오로 6세와 1979년 요한 바오로 2세가 직접 방문하면서 성지로 자라매김을 하였다.

 

 

성모 마리아의 집 입구 표시판

 

 

입구에 보이는 구유

 

 

 

유네스코 유적 표시와 이정표

 

 

이곳을 소개하는 설명판이 여러 국어로 쓰여 있는데 그 중에 한국어 설명판도 있다.

 

 

성모상

 

 

 

 

 

 

 

성모 마리아의 집 외부와 내부

 

 내부에서는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바깥에서 내부를 찍은 사진인데, 이 사진을 찍고 아들 녀석에게 심한 질책을 들었다. 내부를 찍지 못하게 하면 안 찍어야 된다고......

 

 

성모상

 

 

 

이곳에서 나오는 성수 - 수도 시설을 해 놓았다.

 

 

 

성수 옆의 벽에 매달아 놓은 소원 쪽지

 

 

 

 

 

 

 

 

 

주변의 여러 모습

 

 

 

성모상

 

 이곳 구경을 마치고 입구쪽으로 가면 조그마한 기념품가게가 있다. 물론 기념품은 카톨릭의 용품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곳은 카톨릭에서는 중요하게 생각하는 성모 마리아의 승천지이다. 그러므로 많은 카톨릭신자들은 조그마한 병에 담긴 성수나 십자가, 묵주 등을 기념으로 구입한다.

 

 

점심 먹은 레스토랑의 간판

 

 

 

 

시내 풍경

 

 

 점심을 먹고 길을 걸으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하며 도착한 곳이 성 요한교회[St. John's Cathedral]이다.

 

 *성 요한교회

 

 성 요한교회는 예수의 12제자 중 사도 요한을 기념하는 교회다. 요한은 예루살렘에서 추방당한 뒤 셸축으로 들어와 노년을 보냈다. 4세기경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요한의 무덤에 세운 교회를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6세기경에 사도 요한을 추념하기 위해 교회를 증축했다.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에는 순례자들의 꼭 들러야 하는 가장 중요한 교회로 여겼다. 교회는 길이 110m, 폭 140m에 6개의 돔을 가진 거대한 십자가 형태의 건물이다. 7세기에는 교회 주변에 성을 쌓아 교회로 들어가려면 성벽 문부터 지나야 한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이곳에서 많이 순교했기에 박해의 문이라고 부른다. 14세기에는 자미로 사용되다가 몽고의 침입으로 파괴되었다. 오늘날에는 교회 터와 건물 유적이 남아 있으며 많은 유적들이 복원되어 있다. 본당의 동쪽 끝에는 사도 요한의 무덤이 있으며, 대리석 석판위에는 이곳은 나의 영원한 쉴 자리, 여기서 살게 될 것이다.’라는 글이 적혀 있다. 카톨릭의 중요한 성지순례 장소로 내가 이곳을 갔을 때에도 한국의 순례단이 버스 3대로 와 있었다.

 

 

멀리 보이는 성 요한 교회

 

 

성 요한 교회 표지판

 

 

성 요한 교회로 들어가는 입구

 

 

 

 

요한의 생애 설명판

 

 

 

 

성 요한의 무덤 표시판

 

 

 

 

성 요한의 무덤

 

 

십자가 모양의 건물 구조 조감도

 

 

 

 

 

 

 

성 요한 교회 설명판

 

 

성 요한 교회 전경

 

 

성 요한 교회 외부 성벽

 

 

요한 교회에서 보는 이사 베이 자미

 

 이 자미는 1375년에 다마스쿠스 출신의 건축가 디마쉬클리 알리가 설계한 것으로, 독특한 담백함이 있다.

 

 

 

Isa Bey Hamam 유적지 설명판

 

 

아르테미스 신전으로 가는 길에 있는 DR. SABRI YAYLA를 기념하는 거리 

 

 

 

 

 거리를 제법 걸어 가니 이름은 너무나 유명하지만 유적은 거의 폐허와 다름 없는 아르테미스 신전이 나온다.

 

 *아르테미스 신전

 

 아르테미스 신전(아르테미시온)은 드물게는 디아나 신전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여신의 신전으로 BC 8세기경에 120년에 걸쳐서 세워졌는데, 장대하고 화려하여 고대세계의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꼽힌다. 신전은 2중 주주식의 이오니아양식으로 바닥면이 세로 55m 가로115m에, 높이 19m의 기둥 수 127개의 거대한 규모이며, 원주 수십 기의 기단부에는 인물의 부조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그 자취도 없다. 현재는 신전의 토대와 조각 파편만이 기둥 하나와 외로이 남아있다.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의 목록을 작성한 시돈의 안티파트로스는 당대의 아르테미스 신전을 이렇게 묘사했다.

  "나는 전차(戰車)를 위한 길이 나 있는 바빌론의 높이 치솟은 성벽을 보았고, 알페우스가 세운 제우스 신상(神像), 공중정원, 태양의 거상과 수많은 노동력으로 지은 높은 피라미드와 거대한 마우솔로스의 묘를 봤었다. 그러나 내가 구름 위에 치솟은 아르테미스의 집을 보았을 때, 그들 다른 불가사의들은 그 빛을 잃었다. 그리고 나는 말했다. '보라, 올림푸스를 빼면, 어떤 장대한 것에도 태양이 비추지 아니하였구나'"

 

 아르테미스 여신 신앙은 1세기 무렵까지 강하게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약성서 사도행전 1921절에서 41절에는 바오로가 에페소스에서 겪은 아르테미스 신전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사도 바울이 신의 이름으로 우상 숭배를 금하자 에페소스인들이 격렬하게 저항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아르테미스 신전은 파괴된 뒤 오랫동안 잊혀졌다가, 대영박물관이 후원하고 존 터틀 우드가 이끄는 탐사대가 6년의 탐색 끝에 1869년에 발굴하였다. 그 때 발견된 유물의 대부분이 지금 대영박물관에 있다 한다. 지금 우리는 달랑 서 있는 기둥 하나만 본다. 거의 폐허와 같이 보이는 이 신전에서 과거의 영화롭던 시절의 신전의 모습을 찾을 수는 없다. 무상한 역사의 흐름에서 우리의 상상을 얼마나 끌어 올려야 이 신전을 회상할 수 있을까?

 

 

아르테미스 신전 표시판

 

 

신전 설명판

 

 

유네스코 표지판

 

 

옛 신전의 조감도

 

 

아르테미스 신전 전경

 

 

 

아르테미스를 마지막 지키고 있는 기둥 하나

 

  

 

 

 

 

아르테미스 신전의 여러 모습

 

 잡초 사이로 아르테미스 신전의 유적이 돌무더기로 뒹굴고 있다. 이 신전은 그리스도교를 공인하면서 버려졌다. 그 뒤에 신전의 돌들을 이용하여 성 요한 교회와 하기아 소피아 성당들을 짓는데 사용하였기에 복구는 영원히 불가능한 상태다. 그저 과거의 영광의 흔적만을 엿보고 우리는 발길을 돌린다.

 

 

 * 에페소스고고학박물관 

 

 에페소스고고학박물관은 터키 서부 이즈미르 주 셸축(Seljuk)에 있는 박물관이다. 에페소스 박물관은 에페소스 유적지, 아르테미스 신전 및 주위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대부분 영국이나 다른 유럽국가로 반출되자, 터키 정부는 이후 에페소스 유적지에서 발굴된 유물의 해외 반출을 엄격히 금지하고 독자적인 전시시설을 만들 계획을 세우고, 이 계획에 따라 1983년에 박물관을 세웠다.

 이 박물관 가장 큰 특징은 유물을 연대기별로 전시하지 않고, 대신 주제별로 전시를 하거나 유물이 발굴된 장소를 기준으로 전시하고 있는 점이다. 출토 장소별로 전시하며, 정확한 복원도를 함께 보여주기 때문에 관람객이 이해하기 쉽다. 전체 소장유물은 약 25000여 점으로 알려져 있으나 전시되는 것은 1,000여 점에 불과하여 조금 아쉬운 생각이 많이 드는 박물관이다. 가장 중요한 유물은 아르테미스 여신상인데, 하나는 아르테미스 신전, 다른 하나는 에페소스의 플리타네이온에서 출토된 것이다.

 

 로마시대에 에페소스는 소아시아와 로마를 잇는 중심 도시로 번영을 누렸고 이 때 유적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아르테미스 에페시아 상은 에페소스 유적 중 하나로 로마의 테오도시우스 1세가 그리스도교를 공식화하면서 그리스의 다신교를 박해하고 신전을 모두 닫게 했는데, 당시 종교 주관자들이 이 성상을 파괴하지 못하도록 몰래 숨겨왔다고 한다.

 

 

 

 

에페소스고고학박물관을 가리키는 이정표와 박물관

 

 

박물관 뜰에 있는 부조물

 

 

입구에 있는 입상

 

 

얼굴과 손 발이 다 잘린 아프로디테상

 

 

제우스의 두상

 

 

프리아포스 상

 

 프리아포스는 디오니소스와 아프로디테의 아들로 들판, 정원, 과수원의 신이다. 과장되어 있는 남근이 특징으로 다산과 풍요를 상징한다. 남근 위에는 농작물이 한 가득 놓여져 있다.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여러 전시물들

 

 

 

 

박물관 전시물에 대한 설명

 

 

 

 

 

 

 

 

 

여러 조각상과 부조들

 

 

 

 

두 개의 아르테미스 여신상

 

 가슴 부분에 달려 있는 20여 개의 알 모양은 여신의 유방, 소의 고환, 꿀벌의 알 등 다양하게 해석된다. 이런 알 모양이나 여신상에 새겨진 여러 조각은 모두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상징물들이다.

 

 

 에페소스고고학박물관을 끝으로 셸축과 에페소스의 산책을 마친다. 내가 전혀 꿈꾸지 못하고 있던 에페소스를 보게 된 것은 이번 여행에서 얻은 또 하나의 기쁨이며 즐거움이었다. 지나온 많은 유적지와 유물들에 비해서 에페소스는 전혀 규모나 아름다움에서 뒤떨어지지 않는 곳이다. 아니 내눈을 더 즐겁게 하고 내 가슴을 벅차게 만들었다. 지금으로부터 2 - 3천년전에 이런 장엄하고 거대한 신전과 건물을 지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도저히 내 생각으로는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인간의 위대함은 지금이나 미래가 아니라 인간 자체가 있었던 그날부터이다라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이제 이 여행도 막바지를 향해 간다. 이제 셸축을 떠나 이스탄불로 간다. 터키 여행의 백미인 이스탄불을 볼 것이다. 사실은 지난 봄에 이스탄불에서 약 열흘을 머물러 많은 것을 보고 즐겼지만 아들과 함께 또 이스탄불을 찾게 되니 새로운 느낌으로 가슴이 설렌다. 

 

 

 

아들과 함께 터키문명 산책 - 에페소스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장대하고 화려한 살아 있는 도시 에페소스

 

 에페소스는 터키에서는 에페소(Efes)라 부른다. 성경에서는 '에베소'라고 하며 소아시아 7대 교회중 하나가 있는 빼 놓을 수 없는 곳이다.

 소아시아 서쪽 연안의 옛날도시로, 기원전 2000년대로 역사가 소급되나 B.C. 334년 알렉산더 대왕에 의하여 해방되어 헬레니즘 문화, 이어서 로마 문화가 번영하고 중요한 건축물이 수없이 많이 세워졌다. 특히 풍요와 생명의 여신으로 숭배받던 아르테미스신전은 B.C. 7세기 이후 몇 번이고 중건되어 B.C 4세기에 이르러서는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꼽히는 대 건축물로 완성되었으나 그리스도교 시대가 되자 그 모습은 완전히 파괴되어 버렸다. 현존하는 고대 유적은 헬레니즘 시대의 아고라와 극장, 하드리아누스제의 신전, 켈수스의 도서관 등이 있고 또한 근래에 발굴된 남쪽 경사면의 고대 로마의 주거지로부터는 벽화가 다수 발견되었다.

 

 이 도시는 그리스도교 시대에 들어와 성 바울이 편지를 보낸 곳으로도 유명하지만 특히 431년에 종교회의가 열려 성모가 신의 어머니라 인정된 것이 역사상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리스도교 건축에서 가장 대규모인 것은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치세 때 건립한 하기오스 요안네스 테오로고스의 바실리카인데 현재는 거의 붕괴해 버렸다. 이슬람 시대의 것으로는 이사 베이의 모스크가 있다

 

 에페소스 유적의 거리를 걷는 것은 마치 로마시대의 세월이 비껴간 어느 모퉁이에 와 있는 느낌이다. 유적의 입구는 남쪽 북쪽 두 군데인데 나는 남문으로 들어가 북문으로 나오는 방법을 선택했다. 

 

 

 

에페소스의 상징 - 겔수스도서관

 

 

남문 입구

 

 

로마시대의 에페소스 설명판

 

 

고대도시 에페소스 조감도

 

 

 남쪽 입구로 들어서면 바실리카 스토아(열주)들이 연이어 늘어선 거리 앞으로 소극장터인 오데온이 있다. 지붕이 있던 약 1500명을 수용하는 소극장으로 시낭송이나 음악회가 열렸던 곳이었다. 오데온 앞으로는 거대한 아고라가 자리하고 있으며 오른쪽으로 2세기에 지어진 바리우스의 욕장터가 3개의 아치와 함께 흔적만을 남기고 남아있다.

 오데온 소극장 정상에 올라 앉아 지나간 시대의 흔적을 느껴보며 세월의 무상함을 느껴본다. 지금도 이곳을 오고 가는 사람들, 과거에도 이곳을 지나갔던 사람들, 그리고 흘러가는 시간은 오늘도 어제에 이어 유유히 흘러간다.

 

 

 

바리우스욕장 - 로마시대의 욕장

 

 

바실리카 스토아(열주량) 설명판

 

 

 

 

 

오데온 설명판 - 설명판에는 Bouleuterion이라고 적혀 있다.

 

 

오데온의 입구

 

 

 

 

 

관청건물 설명판

 

이 건물은 고대 에페소스의 행정을 담당하던 건물인데 지금은 옛 자취를 알 수 없고 기둥만 남아 있다. 이곳에서 발굴된 두개의 아르테미스 여신상이 지금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멤미우스 기념비

 

1세기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 멤미우스가 그의 할아버지 술라를 기념하여 건립한 것으로, 술라가 에페소스를 탈환하는 장면과 승리를 칭송하는 글이 새겨져 있다.

 

 

 

도미티아누스 신전 설명판

 

 

 

도미티아누스 신전

 

 81 -96년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대에 만들어진 신전으로 에페소스에 황제 이름을 따서 지은 최초의 건축물이다. 제2의 네로로 불리는 그는 그리스도교를 박해하였고, 가신들에게 암살 당한 후 그의 이름을 띤 모든 건물이 파괴되었다 한다.

 

 

폴리오 기념비와 도미티아누스 샘 설명판

 

 

 

 

그 당시의 기록물 보관소

 

 

Hydrekdocheion(물의 궁전) 설명판

 

 

 

 

승리의 여신 니케 부조

 

 멤미우스의 기념비 맞은 편에 있는 부조로 선명하게 월계관과 날개가 남아 있다. 다른 니케 여신상들보다 선명하게 조각되어 눈길을 끌지만 길가에 조그마한 부조라 모르고 지나칠 수 있다.

 

 

 

쿠레테스 거리

 

 쿠레테스 거리는 완만한 경사지로 바닥이 미끄럽다. 수 천년 전의 대리석이 닳고 닳아 반질반질한 정도가 유리알과 같다. 쿠레테스 거리 우측에는 2세기경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바쳐진 신전이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여신 티케, 메두사, 다양한 신과 황제의 모습을 조각한 부조들이 눈길을 끌고 주변으로는 스콜라스티카의 목욕장과 공중 화장실 등 당시의 삶의 흔적들과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헤라클레스문 설명판

 

 

 쿠레테스 거리가 시작되는 지점에 양쪽 기둥에 헤라클레스 상이 있는 개선문이 있다. 4세기에 운반되어 온 돌기둥으로 지어진 헤라클레스 문은 2층으로 된 개선문으로 6개의 기둥 중 현재는 2개만이 남아 있다. 헤라클레스의 상징인 사자의 가죽을 지닌 모습이 부조로 남아 있는데, 원래는 큰 건물의 일부였다고 하는데 다른 부분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누군가를 모르겠는 입상

 

 

트리아누스 샘 설명판

 

 

 

 2세기경 트리아누스 황제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분수로 12m 높이의 중앙에는 황제의 동상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조각상 일부만 남아 있다. 에페소스박물관의 디오니소스나 아프로디테 상 등이 여기서 발견되었다 한다.

 

 

로마주택지(Terrace House) 1 설명판

 

 

 

 

 

바리우스 욕장 설명판

 

 

스토아(열주) 설명

 

 

 

 

 

하드리아누스 신전 설명판

 

 

 

 

 

 2세기경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신전으로 쿠레테스 거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이중으로 된 아름다운 아치에 조각된 조각품과 대칭적으로 보이는 아치의 조형미는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한다. 이 신전의 앞쪽 아치에는 행운의 여신 디케의 조각이, 뒤의 아치에는 메두사의 조각이 보인다. 여기에는 비잔틴의 황제 테오도시우스, 그의 가족, 아르테미스 등등의 그림이 있는데 모조품이고 진품은 에페소스고고학박물관에 있다. 고대 에페소스를 건립한 안드로클로스의 전설이 조각된 벽도 있다.

 

 

 

Terrace House 2 설명판

 

 앞의 테라스 하우스 1은 아마도 일반 평민들이 살았던 주거지인 듯하여 주거지 모양을 띠고 있지만 아무런 꾸밈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 테라스 하우스 2는 귀족들과 부유층의 주거지였을 것으로 짐작한다. 세계에서 가장 잘 보존된 로마시대의 주택지로 알려져 있는 이 주거지는 기원전 1세기부터 7세기경까지 건축된 건물로, 안에는 수많은 벽화와 프레스코 모자이크 등이 잘 보존되어 있다. 이 테라스 하우스 2 구역은 차단벽으로 가려져 있으며 따로 입장료를 받고 있다. 아들과 나는 처음에는 그대로 지나치려고 하다가, 무언가가 있으니 입장료를 또 받겠지 하고 보고 가기로 했다. 결론만 말하면 보지 않았으면 진짜 후회했을 것이다. 이 테라스 하우스 2를 다 보고난 뒤 아들과 나는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입장료가 전혀 아깝지 않고 더 받아도 된다고. 그만큼 아름다운 벽화와 프레스코, 모자이크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게 아름답게 잘 보존되어 있는 유적이다. 아직도 발굴이 다 끝나지 않았는지 계속 발굴중이었다. 이 아름다운 건물 내부를 찍은 사진을 보여 드리니 감상해 보시기를......

 

 그리고 에페소스를 가는 사람은 꼭 이 테라스 하우스 2를 입장료를 또 주고도 보시기를 간절히 빈다.

 

 하드리아누스 신전 바로 앞에 있는 이 테라스 하우스 2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4층인지 5층인지로 되어 있다. 맨 아래에서 위로 올라 가면서 본 유적과 유물들이다. 아무런 설명을 할 지식이 없으므로 그냥 보여 드리겠다.

 

 

 

 

 

내부설명판

 

 

 

 

 

 

 

 

 

 

 곳곳에 설명판이 있다. 하지만 그냥 눈으로 보고 지나가는 것이 좋다. 우리가 전문적인 역사학도가 아닌 이상 그냥 보고 즐기면 된다.

 

 

 

건물의 내부 구조와 유물 설명판

 

 

 

 

 

 

 

 

 

 

 

 

 

 

 

 

 

여기까지가 테라스 하우스 2의 내부 광경입니다.

 

 

테라스 하우스 2의 상층으로 나와서 보는 에페소스

 

 

하드리아누스의 문 설명판

 

 

하드리아누스의 문

 

 

쿠레테스 거리

 

 

Heroon of Androclos의 설명판

 

이곳은 에페소스에 있는 기독교 성지순례지로 알려져 있다. 밑의 사진에서 선명하게 기독교의 문양과 십자가가 보인다.

 

 

 

 드디어 장대한 에페소스의 자랑 켈수스도서관에 도착했다. 화려한 코린트식 열주가 변함없이 당당한 자태를 자랑하는 켈수스 도서관 전면에 서면 그 장엄함에 압도 당한다. 

 2세기 중반 학문을 사랑하던 아시아 주 총독 켈수스를 기념하기 위해 그의 아들 율리우스 아킬라가 아버지의 묘 위에 지은 도서관은 화려한 석주 건물로 코린트식 열주의 정문 석주가 강한 인상을 풍긴다. 정면 4개의 입구 앞에는 지혜와 지식, 지성과 용기를 상징하는 여성의 동상들이 자리하고 있어 도서관의 웅장함에 아름다움을 더한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복제품이다. 진품은 비엔나박물관이 가지고 있다. 그 당시에 12,000여권의 두루마리 형태의 서적을 소장하고 있었고, 서적이 상하지 않게 온도와 습도를 조절하는 구조로 만들었다고 한다. 도서관 입구 계단에서는 여행자들이 휴식을 취하고 사진을 찍으면서 에페소스 신비에 휩싸인 듯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한다.

 

 

켈수스도서관 설명판

 

 

 

 

 

아고라의 남문(마제우스와 미트라다테스문) 설명판

 

 

 겔수스도서관을 바라보면서 오른쪽에 있는 문으로 상업아고라로 이어지는 문이다. 노예였던 마제우스와 미트리다테스가 노예에서 해방되면서 아우구스투스황제에게 감사의 표시로 바친 문이라 한다. 이런 거대한 문을 노예신분이었던 그들이 어떻게 지었는지 궁금할 뿐이다.

 

 

 

 

 

겔수스도서관의 내부와 측면 벽

발자국 표시

 

 켈수스 도서관 앞에 있는 마제우스 미트리다테스문 아래에는 대리석 거리의 지하도를 통해서 사창가로 가는 통로였다고 한다. 도서관 앞에 사창가가 있었다니 조금은 의아한데 좀 부끄러웠든지 지하를 통과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사창가 입구 골목의 길가 바닥에는 발 그림과 여인의 상체가 그려진 대리석이 있는데, 이것은 발자국보다 큰 발을 가진 사람, 즉 성인만 사창가를 출입할 수 있다는 표시였다고 하고, 그 발자국 오른쪽에 새겨진 여인은 미인이 있음을 알리는 세계 최초의 광고이고. 발자국 위편의 둥근 구멍은 화대를 내야 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상업아고라 설명판

 

 

 

 상업아고라는 고대 에페소스의 중앙시장으로 에페소스 주민들의 상업중심지로 번창하였으나, 지금은 모두 파괴되고 기둥만 남아 있다.

 

 

 대리석 길

 

마제우스와 미트리다테스 문을 나서면 마지막 회랑으로 이어지며 아고라가 펼쳐진다. 돌길이 아닌 흙길을 밟으며 세월의 흐름속에 사라진 에페소스를 다시 생각한다. 겔수스도서관에서 원형 대극장까지 이어져 있는 길로 고대에는 아르테미스 신전까지 이 길이 이어져 있었다고 한다.

 

 

 

대극장(원형극장) 설명판

 

 문명의 쇠락과 역사의 흔적을 더듬으며 피온의 언덕에 올라선다. 파나 유르산 언덕에 지어진 야외 대극장은 2만 5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규모로 그 웅장함에 압도당한다.

거의 완벽하게 원형이 보존되어 있고, 오늘날의 극장과 비교해도 현대의 극장이 따라가지 못한다. 극장은 기원전 3세기에 건설을 시작하여 여러 번의 개축을 거쳐 로마 초기인 41년 - 117년 사이에 대대적인 개축을 통해 로마식으로 바뀌어 지금 전한다. 중앙 무대정면 건물에는 부조와 조각들로 장식했다. 음향시설을 완벽하게 설계되어 지금도 에페소스 국제음악제가 여기에서 열린다 한다. 특히 이 극장은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여신 숭배와 기독교의 갈등이 빗어진 곳이다. 사도 바울이 이곳에서 우상숭배 철폐의 설교를 하다가 추방된 곳이다. 

 

 엄청난 규모와 아름다운 극장의 외형에 감탄하면서 잠시 객석에 앉아 지난 날의 영화를 회상하면서 지금은 묻혀버린 고대의 항만을 바라본다. 2,000년 전의 영화를 회상하며 시간의 도도한 흐름속에서 사라져 버린 인간의 모습을 흑백 필름처럼 가슴속에 떠 올려 본다. 헬레니즘 시대의 고대 유적지 에페소스의 신비를 바라보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깊은 역사의 지혜를 깨우친다.

 

 

 

대극장 앞부분

 

 

 

 

 

 

대극장의 여러 모습

 

 

 

 

아르카디아 거리

 

 대극장을 나오면 헬레니즘시대에 세워져 수 많은 사람들에 의해 반들반들해진 대리석 도로가 나온다. 아르카디아 거리다. 대극장에서 항구를 향하여 뻗어 있는 거리인데 비잔틴시대에 황제 아르카디아가 수리하면서 명명된 거리다. 너비가 약 11m이며 길이는 약 500m로 길 양 옆에는 상점이 늘어서 있어 번화한 거리였다고 한다. 강의 토사가 쌓여 항구가 제 기능을 상실하면서 점점 쇠퇴하였다.

 

 

극장연무장 설명판

 

 

 

 

 

항만체육장설명판

 

 

성모 마리아교회 설명판

 

 

 

 대극장에서 북문으로 나가기전에 보이는 유적으로, 성모 마리아를 모신 최초의 교회로 알려져 있다. 원래는 바실리카였는데 증축을 하여 교회로 사용한 곳이다. 431년 삼위일체를 그리스도교 정통 교의로 확인하는 에페소스공의회가 열린 곳이다.

 

 

 에페소스를 보고나니 가슴이 멍하다. 이런 장대한 유적을 인간이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인간의 위대함이 또 느껴진다. 오랜 세월의 흐름에서 이곳을 만든 사람들이나, 이곳에서 살던 사람들은 지금 사라져 버렸으나 그들의 삶의 흔적은 고스란히 우리에게 전해진다.

 

 이 에페소스에서 우리는 위대한 건축물을 수 없이 본다. 하지만 나는 무엇보다도 그들의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테라스 하우스 2가 마음속 깊이 새겨졌다. 에페소스를 가는 사람은 꼭 이 테라스 하우스 2를 구경하기를 다시 한번 말한다. 무엇보다 소중한 우리의 유산이며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보고이다.

 

 에페소스 유적에서 받은 감동을 제데로 간직하고 이 감동을 잃어버리기 전에 빨리 고고학박물관에 가서 에페소스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보아야겠다.

 

 

 

아들과 함께 터키문명 산책 - 파묵칼레 2 (히에라폴리스)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성스러운 도시 히에라폴리스

 

 눈처럼 하얀 석회층 위에는 고대도시 히에라폴리스가 있다. 석회층에서 자연의 경이로움을 느끼다가 맨 위로 올라가면 페르가몬의 왕인 에우메네스 2세가 기원전 190년에 건설한 히에라폴리스가 있다. 이 이름은 '성스러운 도시'란 뜻으로 헬라클레스의 아들이자 페르가몬의 시조인 텔레포스의 아내 '히에라'에서 유래되었다 한다.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 히에라폴리스로 불렸던 이 도시의 인구는 최대 10만 명으로 추정한다. 현장 안내판에 그려진, 히에라폴리스 황금기의 조감도에는 대형 아고라와 2개의 극장, 2개의 공중목욕탕, 신전과 체육관 사이로 주택이 빼곡하게 밀집해 있는 것이 보인다. 지금 보아도 큰 도로인 폭 13.5m, 길이 1,500m 정도의 대로는 남북을 관통하고 있고, 대로를 따라 흩어진 유적은 당시의 도시 규모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한다. 1,000개가 넘는 석관묘가 늘어선 고대 공동묘지인 네크로폴리스는 터키에서 가장 큰 규모인데 목욕탕과 어울려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왜 이곳에 공동묘지가 만들어졌을까? 이 석관들이 치료와 휴양을 위해 몰려들었던 병자들의 무덤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 도시는 1354년대 대지진으로 사라졌다가 1887년 독일 고고학계의 발굴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으나, 진정한 발굴은 이탈리아의 고고학자 파울로 베르조네의 일생을 바친 복원을 통해 우리에게 드러났다. 1957년부터 시작된 발굴은 2008년까지 계속되었다.

 

 옛날의 대리석 기둥이 밑바닥에 가득 채워진 현재의 노천탕은 후예들이 폐허가 된 유적지에 온천물을 담아 언덕 위에 온천 수영장을 만든 것이다. 노천탕 주변은 쉼터로 만들어 고대 로마시대 온천을 즐기던 체험을 재현하고 있다.

 

 히에라폴리스의 역사는 소아시아 반도의 다른 많은 헬레니즘 도시들과 같은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기원전 129년에 로마인들에게 점령당한 히에라폴리스는 로마제국에서 번영했다. 이곳은 그 당시의 여러 국가들의 사람들이 뒤섞여 지내는 국제 도시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 온천으로 와서 물을 가져가고 또 휴양과 교역을 하였다.

 

 세베루스(Severus) 시대에 만들어진 극장은 에페소스(Ephesos)의 아르테미스(Artemis)에게 바치는 의식과 희생 제물을 묘사한 멋진 프리즈(frieze)로 장식되어 있다.

 

 히에라폴리스의 기독교 유적들은 초기 기독교 건축물의 우수한 예로 지금도 남아 있다.

 기독교의 역사에 따르면, 히에라폴리스를 기독교로 개종시킨 사도 필립보(Philip)87년경에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황제에 의해 이곳에서 십자가형을 당했다고 한다.

4세기와 6세기 사이에 세워진 히에라폴리스의 기독교 기념물들은 대성당, 세례당, 교회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가운데 가장 뛰어난 건축물은 순교자 성 필립보 기념 성당(martyrium of St Philip)이다.

 

 

 

히에라폴리스 전체 설명 조감도

 

 

고고학박물관 현판

 

 이 고고학박물관은 히에라폴리스에서 발굴된 유물을 전시하는 곳이다. 특이하게 2세기경 지은 로마시대의 욕장을 복원하여 전시장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각 전시장은 섹션이 나누어져 전시되어 있다.

 

 

조각 및 부조물 전시장

 

 

석관 부조(라오디키아 유물)

 

 

 

 

Isis의 여신(여성 사제)상

 

 

로마시대의 욕장 구조물

 

 

히에라폴리스 극장 유물관

 

 

 

 

 

전시물

 

 

외부 전시물

 

 

야외 유적온천장 입구

 

 

 

 

 

 푸른 온천물 아래에 보이는 돌들은 로마시대의 유적이다. 이 온천을 관광객들에게 유료로 개방한다고 했는데 내가 간 날은 개방을 하지 않았다. 과거 로마시대부터 이 히에라폴리스온천은 피부병에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아름다운 모습을 가지고 싶은 처녀들은 이 온천에 몸을 담그는 풍속이 남아 있다고 한다. 고대의 유적 위에 온천수를 공급하여 야외온천으로 만들어 관광객을 끄는 방법이 아주 참신하다. 아마 이곳에서 온천을 즐기는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로마의 황제가 된 기분일 것이다.

 

 

멀리 보이는 원형극장

 

 

고대국가의 히에라폴리스 열주 설명

 

 

 

 

6세기경 지붕이 있는 교회 설명판

 

 

 

 

원형극장 가는 길에서 보는 히에라폴리스 유적지

 

 

 

로마극장의 설명과 극장 발굴에 대한 설명

 

 

 

 

 

 

로마극장

 

서기 60년에 남동쪽 언덕에 지은 극장으로 북문 근처에 있던 극장이 지진으로 인해 파괴되었는데 그 석재를 이용해서 이 극장을 지었다고 한다. 언덕위에 지은 극장으로 약 50열의 관람석에는 15,000명 정도를 수용하는 큰 규모이다. 여기서 출토된 아포론과 아르테미스, 디오니소스 등의 유물들은 박물관에 따로 전시실을 마련하여 전시하고 있다.

 

 

 

 

저 멀이 보이는 사도 필립보의 순교기념 교회

 

 

Phillip의 무덤 설명판

 

 

돌로 만든 무덤 교회 설명판

 

 

 

 

 필립보의 무덤으로 추측되는 곳에 기념건물을 세웠으나 무덤은 발견되지 않았다. 원래는 이중의 건물 구조로 되어 있었다 하는데 외부 건물은 무너져 내려 알 수 없다. 아치가 남아 있는 중앙부 건물이 무덤이었을 것으로 추청한다.

 

 

선명하게 새겨진 십자가의 대리석판

 

 

사도 필립보 순교기념관 유물

 

 

Aghiasma(Sanctuary Fountain) 설명판

 

 

 

9 - 11 세기의 비잔티움 건물 설명판

 

 

 

 

4 - 5 세기에 만든 Flight of steps 설명판

 

 

 

 

 

성 필립보의 무덤과 교회로 가는 계단

 

 저 멀리에 필립보 순교기념관이 보인다. 유적 온천과 아고라 사이의 풀밭에서 언덕위의 기념관으로 올라 가는 약 600m 길이의 옛 계단이 있다.

 

 

 

아폴론 신전 표지판

 

 

 

아폴론 신전

 

 히에라폴리스의 주신인 아폴론을 모셨던 신전인데 지금은 거의 흔적을 볼 수 없고 기단 정도만 남아 있다. 이곳에서는 유독가스가 나와 그 당시의 사제들이 가스에 취한 상태에서 신탁을 받았다고 한다. 지금도 소량의 가스가 나온다고 하는데 그 성분은 일산화탄소로 밝혀졌다.

 

 

님파에움(Nymphaeum) 설명판

 

 

 

 아폴론신전 바로 앞에 2세기경 지은 기념 분수로 이 도시의 물을 공급하던 곳이다. 현재의 벽은 아폴론 신전의 안뜰 일부로 지어진 것이다. 이곳에서 발굴된 여사제 조각상이 박물관에 있다.

 

 

 

 

히에라폴리스 전경

 

 

멀리서 보는 극장

 

 

 

 

 

 

 

열주로와 아고라

 

 고대 히에라폴리스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대로로 설명판에는 이곳의 총독이었던 프론티누스의 이름을 따서 'Frontinus Street'라고 이름을 붙여 놓았다. 지금 열주는 도미티아누스문의 기둥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파괴되어 하단부만 남아 있다. 하지만 쭉 늘어선 모습만 보아도 경이롭기만 하다.

 

 

히에라폴리스북문 표시(일명 도미티아누스문)

 

 

 

 

 

도미티아누스의 문은 서기 84년 이곳 총독이 로마황제 도미티아누스에게 봉헌한 문으로 세 개의 아치가 아름다운 자태를 지금도 뽐내고 있다. 로마양식의 문으로 로마 게이트라고 불리기도 한다.

 

 

 

 

 

로마욕장

 

건설 당시에는 온천, 냉탕, 사우나 등 휴양에 알맞는 용도로 지어졌으나 그 뒤에 개조하여 교회로 사용되었다 한다. 현재는 건물이 거의 파괴되어 전체를 볼 수 없고 길쪽의 아치만 남아 있다.

 

 

무덤 설명판

 

 

 

 

 

네크로폴리스 표지

 

 

 

 

죽은 사람들의 도시 네크로폴리스의 여러 모습

 

 네크로폴리스(necropolis)는 고대도시 가까이의 많은 묘로 형성된 지역을 가리킨다. 그리스나 로마 문화의 영향을 받은 지역에는 네크로폴리스가 성벽 밖에서 성문에서 시작되는 길을 따라 있었다. 네크로폴리스는 시가지 밖에 있어 발굴이 쉽고 많은 부장품이 있어 학문연구에 중요한 유적이 되고 있다. 이곳에는 1000개가 넘는 무덤이 있는데 천년이 넘게 형성된 무덤군으로 무덤의 양식도 헬레니즘시대부터 비잔틴시대가지 다양하다고 한다. 수 많은 무덤에서 발견된 비문만을 따로 번역해서 출판되었다고도 한다. 

 

  히에라폴리스를 가는 방법으로 사람들은 차를 타고 북문으로 가서 유적을 보고 다시 차를 타고 파묵칼레로 간다. 하지만 나는 생각하기를 파묵칼레 마을에서 석회층을 걸어 올라가서 히에라폴리스 전체를 구경하고 다시 석회층을 통해 파묵칼레로 내려 오는 길을 권하고 싶다. 그러면 석회층이 시간에 따라 변하는 모습을 볼 수도 있고 시간도 절약되는 것 같다. 물론 선택은 각자가 알아서 하면 된다. 

 

 터키를 여행하면서 계속 감탄을 하는 것이 있다. 그리스 문화나 로미시대의 흔적을 터키에서 너무 잘 볼 수 있다는 것이 좋았고, 또 유적의 규모가 그리스보다 엄청나게 크게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 도시의 유적보다 터키의 유적이 훨씬 크게 보이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이제 파묵칼레 여정도 마치고 이제 또 다른 경이로운 유적 에페소스를 보기 위해서 셸축으로 간다.  

 

 

 

 

 

 

 

 

 

 

 

 

 

 

 

아들과 함께 터키문명 산책 - 파묵칼레 1 (라오디키아와 석화층)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고대 최대의 도시 라오디키아(라오디게아)

 

 아프로디시아스를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에 데니즐리와 파묵칼레 중간에 있는 라오디키아유적으로 향했다. 라오디키아는 아직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가 않은 곳으로, 한참 발굴중인데 아직 10%도 발굴되지 않았다고 한다. 라오디키아는 무려 기원전 5000녀부터 사람이 살고 교역이 활발하여 번영을 누리던 도시였다. 특히 소아시아 7대 교회중의 하나로 요한묵시록에 이곳이 언급되면서 기독교 순례객들에게는 중요한 순례지이다.

 너무나 유적지가 크고 아직도 발굴이 조금밖에 진행되지 않아서 황량하게 보이는 곳이지만 그리스나 터키의 고대도시가 가지고 있는 건물들을 모두 가지고 있고, 규모가 엄청나다. 황량한 벌판이고 휴식을 취할 곳이 전혀 없다는 점을 유의하여 관람을 해야 한다. 이곳에서 파묵칼레를 보면 하얀 석회층이 햇빛 아래 빛나는 모습을 구경할 수 있다.

 

 

라오디키아 유적

 

 라오디키아는 터키 남서부에 셀레우코스왕조가 건설한 고대도시로. ‘백성의 정의란 뜻을 가진 지명은 시리아왕 셀레우코스2세의 왕비 라오디케’(Laodice)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도시로 데니즐리 북서쪽 있다. 라오디키아(Laodikeia) 유적은 규모로만 보면 가장 큰 고대도시로 추정되는데 현재 발굴된 것은 10%에 불과하고, 관광지로 개방된 것도 불과 몇 년에 지나지 않는다. 이곳이 주목 받는 다른 이유는 요한묵시록에  라오디키아 신자에게 보내는 말씀에 소아시아의 7개 교회 중 가장 크게 책망을 받은 곳으로 기록하고 있어 기독교인들에게 특별한 곳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라오디키아는 눈병을 고치는 안약의 산지로 유명 하였다. 라오디키아 교회에 보낸 요한묵시록에는 영적인 눈을 뜨기 위하여 안약을 사서 바르게 하라고 기록 되어있다.(요한묵시록 3:18)

 이 도시가 멸망 한 것은 파묵칼레와의 중간에 있는 강이 큰 홍수로 범람하여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하는데, 하느님의 징벌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특히 이곳에 많이 재배되었던 양귀비꽃으로 마약에 중독되어 사람들은 타락과 범죄와 향락에 빠진 삶이었다고 말한다.

 

 의료도시로 이름이 난 라오디게아유적에는 로마시대의 석재들이 여기 저기 널려있다. 1950년부터 발굴 복원사업을 하고 있다고 하나 지지부진하여 버려진 곳과 같은 느낌이다. 여기도 지진으로 인한 피해가 매우 컸다고 하지만 지금 넘어지지 않고 있는 석주로 짐작할 때 대단히 광대한 지역에 걸친 거대도시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길가의 라오디키아 표지

 

 이 표지에서 제법 먼 길을 걸어 가면 입구가 있다. 약 1.5km쯤 되는 거리다. 그런데 입구에서 입장표를 사서 들어가면 아무 것도 없고 길만 보인다. 그 길을 따라 또 제법 먼 길을 걸어 올라가면 유적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놀랄 정도로 넓은 곳에 아직 발굴이 진행중이라 폐허와 같은 유적이 곳곳에 돌무더기같이 보인다. 그러나 시간을 가지고 돌아보면 그 방대한 규모에 감탄한다. 그리고 이 유적이 제대로 발굴되면 얼마나 멋진 곳이 될까?하고 생각해 보는 것도 즐겁다. 지금은 폐허같이 보이지만 남아 있는 유적만으로도 그 웅장하고 위엄있었던 과거의 영화롭던 시절을 머리에 상상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유적지에서 보는 파묵칼레

 

저 멀리 보이는 하얀 산정은 눈이 아니라 바로그유명한 파묵칼래 석회층이다.

 

 

라오디키아 유적 설명판

 

 

라오디키아의 역사 설명판

 

 

유적 이정표

 

 

 

 

 

 

 

템플 A라고 칭하는 유적 설명판

 

 

 

 

 

 

 

 

 엄청나게 넓은 벌판에 무너진 도시의 모습이 폐허처럼 보이지만 수천년의 세월을 지탱해온 역사의 흔적이다. 아직 제대로 정리된 것이 없어 온전한 설명도 되어 있지 않다. 그저 이곳이 한 때는 소아시아에서 가장 영화를 누리던 도시라고 생각하고 이 자취만으로 그 때의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것도 즐거움이다. 내가 그리스와 터키의 옛 유적을 산책하면서 이렇게 큰 도시가 제대로 보전이나 발굴이 되지 않은 것은 아마 보지 못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젠가 이 유적지가 제대로 발굴되어 옛 모양을 보여주는 날이 있을 것이다. 그 때 이 유적을 다시 볼 수 있을는지가 의문이다.

 

 

 

아름다운 문양을 갖춘 유적

 

 

라오디키아 교회 설명판

 

특이하게 이 라오디키아 유적은 아직 완전히 조사되지 않아 각 유적지에 plan이라는 번호를 매겨 놓고 있다. 정확하게 유적의 용도나 역사가 규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생각되고, 또 발굴을 위한 번호라 생각된다.

 

 

 

 

 

 

 

서쪽원형극장 설명판

 

서쪽극장이라는 설명으로 보아 다른 쪽에도 극장이 있었으리라 짐작이 되는데 한 도시안에 여러 개의 극장이 있을 정도라면 이 도시의 크기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거의 폐허와 같이 보이는 서쪽 원형극장. 그러나 크기는 엄청나다.

 

그리스와 터키를 여행하면서 본 원형극장은 거의 완전하게 복원된 것이 많았는데 이 원형극장은 아직 복원하기에는 세월이 멀다. 설명에 의하면 약 8000석을 갖추고 있다 하는데 크기가 그 이상으로 보인다.

 

 

각 유적을 가리키는 이정표다

 

 

스타디움 거리 설명판

 

 

 

 

선명하게 십자가가 보이는 석판

 

 

님파에움(nymphaeum) 설명판

 

 

 

 

에페수스 거리 열주 설명판

 

 

 

latrine(옥외 뒷간 정도로 이해) 설명판

 

 

특별히 보관되어 있는 프레스코

 

 

발굴중이라 출입을 통제하고 있는 거리

 

 

 

 

 

 

곳곳이 발굴이 진행중이라 내부를 볼 수가 없는 것이 아쉽다.

 

 라오디키아는 과거의 영화롭던 시절의 방대한 규모에 비해 지금은 다른 유적지에 비해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비교적 현대에 발굴이 시작되어 아직도 수 많은 유적이 그대로 있다. 제대로 우리에게 알려지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수 많은 시간이 흘러도 이 도시가 잊혀져 있던 시간보다는 짧을 것이다. 빠른 시간에 이 도시가 제 모습을 찾아 우리에게 보여진다면 우리는 또 하나의 문화유산을 간직할 것이다.

 

 

 라오디키아를 구경하고 숙소로 돌아가니 오늘이 12월 31일이다. 어느 새 또 한해가 다 지나간다. 외국에서 새해를 맞이한게 언젠인가를 생각하고 아들에게 물으니 한 10년전에 아들녀석과 일본에서 연말 연시를 맞이한 기억이 있고, 아들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지만 아들이 네살 때 싱가포르에서 새해를 맞이한 기억이 있다. 모두 여행을 가서 타국에서 새해를 맞은 것이다. 저녁이 되어 숙소에서 휴식을 취하며 한해를 보내는 회포를 풀며 맥주를 마시고 있으니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이 몇 명 들어온다. 터키를 여행중이라 한다. 카파도키아를 거쳐 왔다 하여 발룬을 탔는가 물어보니 못탔다고 하며 바로 우리가 발룬을 탄 그날 이후로 한번도 발룬이 운행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젊은이들 가운데 부산 학생이 있어 이야기를 하며 아버지와 함께 여행을 해 보라고 권했다. 아들도 옆에서 아버지와 여행하는 것도 참 의미있는 일이라 하며 거든다. 어느 새 자정이 되니 이곳에서도 축하의 불꽃을 쏘아 올린다. 물론 거대한 불꽃 쇼는 아니고 자그마하지만 새해를 알리는 것이다. 조금 쉬다가 잠자리에 든다.

 

 다음 날 아침 2018년 1월 1일이다. 여행중이라 다른 생각도 없이 또 여행에 나선다.

 

 파묵칼레 석회층

 

 오늘은 파묵칼레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석회층을 보고 히에라폴리스를 답사하는 일정을 정했다. 석회층은 우리 숙소 바로 뒤에 있기에 가는 것은 쉬웠다.

 

 원래 파묵칼레(Pamukkale)는 터키 남서부 데니즐리에 위치한 석회층을 말한다. 파묵칼레의 뜻은 터키어로 파묵이 목화이고 칼레는 성이므로 목화성이란 뜻이다. 석회층이 목화의 하얀 솜처럼 보여 일컫는 명칭이다. 파묵칼레(Pamukkale)는 우리나라 사람에게도 꽤 알려진 곳으로, 3만년 세월이 만들어낸 하얀 석회암 절벽, 바람과 물결에 씻겨 만들어진 물결모양의 테라스, 약 35도 정도의 온천수로 가득 찬 크고 작은 웅덩이로 만들어진 높이가 약 160m 절벽에 2,700m 정도 길이의 하얀 성과 같은 모양으로 데니즐리 부근 어디에서 보아도 한눈에 들어온다. 새하얀 눈이나 소금이 쌓인 것처럼 보이는 석회층은 언덕 위에서 아래까지 생긴 모습은 흡사 계단식 다랭이논을 닮았다. 소금가루를 겹겹이 쌓아놓은 듯 하얀 석회층이 절벽 한 면을 빼곡히 채운다. 하얀 석회층에 푸른 온천수가 고여 있는 풍경은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다. 그리고 이 석회층들은 하루에도 여러 차례 색이 변한다. 웅덩이에 고인 푸르던 물은 희게 변색되며 해 질녘에 띠는 색깔은 붉은빛이다. 관광객들은 정해진 이동로를 따라 정상부위에서 중턱까지 짧은 거리지만 신비한 순백의 여행을 즐길 수 있다. 석회층의 훼손을 막기 위해 반드시 맨발로 들어가야 한다. 눈으로 보기에는 미끄러워 위험할 것 같으나 감촉이 거칠고 미끄럽지 않다. 요즈음에는 온천수가 충분하지 못해 요일에 따라 유량을 조절하기 때문에 물이 가득하지 않을 경우도 있다.

 

석회층을 걸으면서 온천수에 발을 담그고 망중한을 즐겨 보는 것도 여행의 한 즐거움이다.

 

 

 

 

 

 

 

파묵칼레 자연 공원

 

석회층 아래에 만들어 놓은 공원으로 숲이 우거진 연못이 인공적으로 만들어져 있고 여러 산책로를 만들어 놓았다. 석회층에서 흘러 내리는 물로 가득한 이 공원 연못에는 유람선 같은 것도 있는 유원지이다.

 

 

 

 

 

석회층을 걸어가기 위해서 신발을 벗는 곳

 

 

 

두껍게 쌓여 있는 석회층

 

 

 

 

석회층에서 보는 파묵칼레 마을

 

 

 

 

석회층을 흐르는 온천수

 

 

 

 

 

 

석회층의 여러 모습

 

 

 

 

 

 

 

 

 석회층에는 다양한 모습의 물웅덩이가 만들어져 있다. 사람들은 모두들 그 웅덩이에 발을 담그고 즐거워한다. 동심의 세계로 들어선 사람들은 웃고 떠들면서 각자 자기 나름대로 추억을 만들어 간다.

 

 

석회층가로 흐르는 온천 수로

 

 

 

 

 

 

 

 

석회층의 여러 모습

 

 

석회층 자연 공원에서 보는 석회층

 

석회층을 갈 때는 반드시 비닐 봉지를 여러 개 준비하는 것이 좋다. 먼저 신발을 벗어야 하니 신발을 넣을 봉지가 있어야 하고 석회층 가에 흐르는 온천수에 발을 담그고 앉기 위해서 비닐 깔판이 있는 것이 좋다. 그런 비닐이 없어 곤란해 하는 사람들이 많앗다. 우리는 다행히 비닐을 여러 장 가져 갔기에 사용하고 버리려고 하니 주변 사람들이 다 사용했는가 물으며 자기에게 달라고 해서 주니 고맙다고 인사를 한다. 명심하시기를 ....

 

 

내가 묵었던 호텔

 

 

 파묵칼레는 이스탄불, 카파도키아와 함께 터키를 가면 꼭 가는 유명한 곳이라 대체적으로 여행객들을 위한 시설이 제법 잘 갖추어져 있다. 식당도 곳곳에 보이고 음식도 나무랄 데 없이 괜찮은 편이다. 얼마나 많은 한국 사람이 오는지 한글로 된 식당 메뉴판이 길가에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이곳에서도 발룬이 운행되고 있다. 물론 카파도키아와 같이 엄청난 규모는 아니고 몇 개 정도가 운행되고 있다. 하지만 카파도키아에서 발룬을 타지 못하였거나, 이곳의 경치를 하늘에서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좋은 경험이 될 수 있다.

카파도키아의 자연도 신비롭지만 파묵칼레의 석회층도 자연의 경이로움을 우리에게 준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는 석회층을 걸어 보면서 관광하는 것은 자연공원쪽에서 걸어 올라 갔다가 다시 걸어 내려오는 것이 여러 면에서 편리하다고 생각한다. 먼저 석회층 상부족에 가려면 파묵칼레 마을에서 제법 많이 떨어져 있어 시간이 제법 걸린다.

아들과 함께 터키문명 산책 - 아프로디시아스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에게 바친 도시 아프로디시아스(Aphrodisias)

 

 이즈미르에서 약 5시간 가량 기차를 타고 데니즐리에 도착하여 돌무쉬를 타고 파묵칼레로 향했다. 밤늦게 숙소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 저녁을 먹으려고 나가니 모두들 문을 닫고 있다. 겨우 조그마한 음식점을 찾아 물으니 영업을 한다고 하여 끼니를 때웠다. 숙소로 돌아오면서 맥주를 사려고 하니 쉽지가 않다. 터키는 다른 이슬람국가에 비해 주류에는 좀 여유로운 편이지만 우리나라와 같이 아무 곳에서나 주류를 팔지는 않는다. 그래서 몇 군데 슈퍼를 돌아 겨우 맥주를 몇 캔 구입하여 숙소에 돌아와 아들과 한잔하면서 피로를 풀었다. 몇 일간은 짐을 풀어 놓고 있을 수 있는 것이 여간 마음이 편안환 것이 아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한국의 젊은이가 한명 들어온다. 물어보니 오늘 아침에 도착했고 다른 한국의 젊은이 몇 명이 오후에 온다고 한다. 잠시 이야기를 하다가 오늘은 먼저 아포르디시아스와 라오디키아 유적을 돌아 보기로 하고 일정을 시작한다.

 

 아포르디시아스는 파묵칼레에서 100km 정도 멀리 떨어져 있어 교통편이 여간 어렵지 않다. 대중교통이 있지만 아들과 나는 시간을 아끼기로 약속했고, 저번에 말한대로 대절비가 그렇게 비싸지 않다. 왕복 200리라(약 60,000원)에 계약하고 개인영업용 차를 타고 갔다. 물론 우리가 관광을 하는 시간을 기다려 준다는 조건이다. 약 100km를 가는 도중에 전방 10m도 보이지 않는 안개가 자욱하게 끼여 겁이 났으니 기사는 능숙하게 차를 몰고 갔다. 약 2시간이나 걸려 아포르디시아스 유적에 도착하여 오후 2시에 데리러 오라고 하고 유적 관광을 시작했다.

 

 

아프로디시아스의 상징적 문 - 테트로필론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에게 바친 도시 아프로디시아스(Aphrodisias)

 

 아프로디시아스는 현재명 게이레(Geyre)인 터키 남서부에 임한 고대도시유적으로 20세기 초 여러 번 발굴이 시도되었으나 전쟁으로 인하여 무산되었다가 1961년부터 뉴욕 대학 에림(Kenan T.Erim)에 의하여 발굴이 진행되었으며, 지금도 발굴중이다. 도시 유적 중심에 있는 아프로디테 신전은 하드리아누스제 시대의 것인데 6세기에 비잔틴 성당으로 전용됨으로 인해 많이 개조되었다. 아프로디테 사원은 기원전 3세기에 건축되었고, 그리고 1세기 뒤에 도시가 건설되었다.

 유적 북단에는 약 3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규모의 스타디움이 잘 보존되어 있다. 유적지내에는 오데온, 하드리아누스의 욕장, 엄청난 규모의 극장, 티베리우스 황제의 포르티코, 바실리카, 사교관 등등 여러 건물이 있다. 특히 이 지역은 질 좋은 대리석이 많이 생산되어 로마시대의 조각의 원형이 대부분 이곳에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아프로디시아스 파라고 불리웠던 조각가들은 북아프리카(레프티스 마그나에서 서단까지), 이탈리아 등에서 활약하였다고 한다.

 

 혹자들은 아테네의 파르테논신전보다 더 웅대하고 예술적으로 뛰어난 유적이라고 말하는데, 아직은 우리나라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지만 한번 구경을 하게 되면 그 매력에 푹 빠질 것이다.

 

 특히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 모두 이곳 박물관에 있다. 빼놓지 않고 관람하기를 권한다.

 

 아프로디시아스는 로마제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도시였다. 왜냐하면 로마를 건설한 트로이의 아이네이아스가 아프로디테의 아들이었고, 로마황제들은 그의 자손임을 칭했으므로 아프로디테는 그들의 어머니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에도 이곳에서는 여신숭배가 계속되었고, 이 때문에 비잔틴시대 이후에 기독교에 의해 아름다운 조각들과 건물이 파괴되고 쇠퇴했다. 그러다가 지진과 셀주크 제국의 공격으로 큰 타격을 입고 사라진 도시다.

 

 이 유적은 발굴된 것도 비교적 최근이고, 유네스코에 등재는 2017년에 되었다. 아직은 사람의 손때가 비교적 적은 유적이다.

 

 

고대 아프로디시아스 도시 표지판

 

 

당당하게 터키의 보물이라 붙여 놓았다.

 

 

 

 

입구에 있는 석관

 

아프로디시아스로 들어가는 입구는 고대 그리스 당시 만들어진 석관들로 뒤덮여 있다. 석관 사방에는 메두사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석관을 부수거나 안의 물건을 훔쳐가지 말라는 경고다. 메두사는 저주의 화신으로 정면으로 보는 즉시 돌로 변하게 만든다고 한다.

 

 

 

아프로디시아스 모형도

 

 

 

사자상과 아마 황제의 부조인 듯.

 

 

건물 방향 표시

 

 

 

아프로디시아스의 유물

 

 

테트라필론 설명판

 

 

 

 

 

 

 

 

 

 

테트라필론의 여러 모습

 

 이 건물은 아프로디테 신전 동쪽에 있는 기념문으로 아프로디시아드의 상징이 될만한 건축물이다. 폐허가 된 신전에 비해 거의 완전하게 복원된 모습으로, 테트라필론이란 4방향으로 문이 모두 있다는 뜻으로 4개의 원 기둥이 세워져 있다. 지금의 테트라필론은 당시 세웠던 원본을 발굴하여 원래의 자리에 거의 완전히 복원하였다. 이 건축물을 보는 순간 멍해졌다. 그리스와 터키를 여행하면서 고대 건축물을 많이도 보았고, 감탄도 하였는데 이 건물의 아름다움을 어느 곳에서도 비교할 수가 없는 것 같았다. 참 거대하면서 웅장하고, 아름다운 조각과 조형미를 무어라 말하기가 어렵다. 그저 눈으로 보고 감탄만 할 뿐이다.

 

 

 

케난 에림(Kenan T.Erim) 교수의 무덤

 

테트라필론 근처의 하얀 대리석 무덤은 케난 에림(Kenan T.Erim) 교수의 무덤이다.

 아프로디시아드를 발굴한 공로로 터키 정부가 이 유적지 안에 무덤을 만들 수 있게 허락하여 이곳에 그의 무덤이 있다. 그는 1959년 우연히 이곳에서 신전의 기둥 하나를 발견하고 일생을 숙명처럼 아프로디시아드의 발굴에 쏟았다. 아프로디시아드와 영원히 함께 살고 싶었던 그의 소망이 이루어져 그는 1990년 이후에 영원히 이곳에 살고 있다.

 

 

 

 

아프로디테 신전

 

도시의 수호신인 아프로디테를 위한 신전으로 이 도시에서 가장 성스럽게 여긴 건물이다. 하지만 지금은 안내판이 없다면 그냥 지나칠 만한 유적지다. 12세기의 지진으로 폐허가 된 곳에 지금은 높은 기둥이 14개 늘어서 있지만,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를 떠올릴 만한 그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4세기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이면서 아프로디테 신전은 철저히 파괴된다. 아프로디테스 신전은 5세기 말에는 교회로 전용되고 관련 유적이나 유물은 전부 말살된다. 기독교가 우상숭배라는 차원에서 그리스 신화 속의 유적들도 파괴한 일이. 신전의 서쪽에는 나르텍스(고대 기독교 교회에서 본당 입구에 짓는 넓은 홀), 동족에는 기독교 성화가 그려진 아프시스(교회당 동쪽 끝에 튀어나온 반원형 부분)가 지어졌고, 신전 정원에는 무덤이 만들어지면서 중요한 유적이 파괴되었다. 현재 이슬람국가의 고대 유적 파괴 문제가 세계적 뉴스로 취급되고 있지만, 4세기 당시 벌어진 기독교도가 종교라는 이름으로 파괴한 유적은 21세기를 조족지혈로 여길 정도로 엄청났다.

 

 

아프로디테 신전 설명판

 

 

 

아프로디테 신전의 여러 모습

 

 

북쪽 성역 설명판

 

 

 

 

스타디온 가는 길

 

 

스타디온(경기장) 설명판

 

 

 

 

 

 

 엄청난 크기의 경기장이다. 약 30,000명을 수용했다고 하는 로마식 경기장으로 현재 터키에 남아 있는 경기장 가운데 가장 크다고 한다. 길이가 약 270m, 폭이 약 60m인 타원형 경기장으로 현대의 경기장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이 경기장은 관중석 어디에서나 경기장이 잘 보이게 설계되어 있다. 그 당시에 이 조그마한 도시에 이런 거대한 경기장이 왜 필요했는가? 아마도 각 지방에서 참가한 선수들이 아프로디테에게 바치는 경기를 열었을 것이다.

 

 

주교관(Bishop palace) 설명판

 

 

 

 

 

 

하드리아누스 욕장 설명판

 

 

 

 

설명판

 

 

 

 

하드리아누스 욕장 구조 설명

 

하드리아누스의 욕장는 2세기경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이 곳을 다녀간 기념으로 건설한 욕장이다. 남자와 여자를 분리하여 탈의실과 냉탕과 온탕을 갖추었고, 대리석으로 만든 풀장도 있다. 당시의 인구로 볼 때 거대하고 화려한 욕장이다.

 

 

남쪽 아고라 설명판

 

 이 남쪽 아고라는 '티베리우스황제에게 바친다.'라는 비문이 있어 '티베리우스의 주랑'이라고도 불린다. 넓은 공간의 가운데에 있는 저수지는 길이가 약 260m, 폭이 약 25m에 깊이가 1.2m로 하드리아누스 욕장을 위한 물 저수지로 사용되었으며, 홍수를 통제하기 위해 물을 저장하는 곳으로도 사용되었다 한다. 아직 완전히 발굴되지 않아 정확한 용도를 알 수 없고 짐작만 할 뿐이다.

 

 

 

 

 

 

남쪽 아고라(티베리우스의 주랑)

 

 

 

티베리우스의 주랑에서 극장으로 가는 길

 

 

극장 상부의 모습

 

 

극장 설명판

 

 

 

 

극장의 모습

 

기원전 1세기경에 시작하여 기원전 27년에 완공하였다는 극장은 8000명 수용이 가능하다고 한다. 아프로디시아스의 최전성기의 인구는 2만 명 정도라고 전한. 원형극장에서는 오락이 아니라 신에 대한 의식과 모두가 함께 공유해야 할 가치와 상식을 공연하였다고 한다. 오이디푸스신화와 같은 교훈극이 당시의 연극이다. 그리스 비극은 시대를 넘어서 인간 모두에게 전해질 교훈이자 상식에 해당된다. 이 극장은 케난교수가 발굴을 결심햇을 때는 마을이 위에 있었다 한다. 1966년 이 마을을 이주시키고 본격적인 발굴을 하였는데, 마을이 있은 덕분에 원형이 거의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고, 많은 조각과 비문들을 발견하였다. 비문의 내용에 의하면 많은 유물이 있어야 하나 비잔틴 시대에 기독교화 하는 과정에서 아마 거의가 없어져 버린 것 같다. 아프로디시아스의 원형극장은 다른 지역과 달리 특별석이 많다. 특별석이란 등받이를 갖춘 의자형 좌석으로 관람하기 편한 앞줄과 한가운데 들어서 있다  

 

 

 

 

멀리서 보는 아고라 전경

 

 

세바스테이온 설명판

 

 

 

 

 

세바스테이온의 웅장한 모습

 

아프로디시아스 입구에서 왼쪽으로 100m 정도 들어가면 보이는 약 10m 높이의 거대한 기념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각종 신의 모습과 더불어 로마 황제 네로의 조각품도 볼 수 있다. 3층 구조로 1층은 기둥, 2층과 3층이 조각형 입체 벽화로. 전체 길이는 80m 정도다. 세바스테이온(Sebasteion)이라 불리는 건축물로 로마 황제를 신으로 모신 기념 사원, 즉 신전이다.

 

 모두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곳이었는데 1970년 발굴에서 80여 점의 입체 조각벽화가 발견되어 아프로디시아스 박물관에 80여 점 전부를 전시하고 있다. 전 세계 어디에서도 보기 어려운 최고 수준의 그리스 신화와 관련된 대리석 조각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흥미롭게 황제의 조각이 그리스 신들과 동등한 위치에 놓여 있다. 로마는 황제를 인간이기보다는 신으로 받드는 사회였다. 그래서 곳곳에서 황제의 신전을 만들려고 하였고, 황제신전을 만들려면 로마로부터의 특별한 허락이 필요했다고 한다. 그래서 여러 식민지와 도시는 개별적 차원의 황제신전을 갖고 있지만, 아프로디시아스는 로마 황제 모두를 기리는 종합신전을 갖고 있다. 그만큼 아프로디시아스는 특별한 곳이었다.

 

 

 

아프로디시아스 박물관 입구

 

 

승리의 여신 니케상

 

 

 

 

옥타비아누스의 노예로 이 아프로디시아스를 건립하는데 큰 공헌을 한

율리우스 조이로스를 기념하는 기념관에 대한 설명과 기념관의 부조들

 

 

 

네로와 아그리피나

 

 

 

 

아우구스투스와 빅토리아

 

 

안키세스와 아프로디테

 

 

아이네이아스

 

 

여러 조각상들

 

 

 

 

 

 

 이 박물관의 백미로 꼽히는 세바스테이온(Sebasteion)에서 1970년 발굴된 80여 점의 입체 조각벽화로 아프로디시아스 내 박물관은 80여 점 전부를 전시하고 있다. 전 세계 어디에서도 보기 어려운 최고 수준의 그리스 신화 관련 대리석 조각이다.

 

 

 

무언가 중요한 것이라 사진을 찍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 아프로디시아스의 주인공 아프로디테 여신상

 

 박물관에 전시된 아프로디테 입상은 우리의 소중한 보물이다. 오랜 세월을 지나 세상에 나온 아프로디테는 완전한 모양이 아닌 몸체만 남아 있다. 머리와 팔은 어디에 있는가? 5세기경 기독교도가 파괴한 뒤 아무렇게나 버린 것이다. 그래도 살아 남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아프로디시아스의 아프로디테는 아름다운 미의 여신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듯하다. 옷을 입은 자세로 서 있다. 의상 앞면 한가운데는 땅의 여신 게(Ge)와 하늘의 신 우라노스(Uranos), 태양의 신 헬리오스(Helios)와 달의 여신 세레네(Selene)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또 염소 머리에다 물고기 몸을 한 상상의 동물에 올라선 반라의 여인 조각도 의상의 다리 부분에 새겨져 있다.

 

 이 아프로디테스 입상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관능적 차원의 미의 상징과 거리가 멀고, 모든 것을 다 가지고 포용하는 어머니로서의 이미지가 한층 강하다. 아프로디테가 가진 원래의 미와는 다른 이미지를 가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여러 가지의 가설이 있겠지만 나는 로마의 어머니인 아프로디테를 온 우주의 어머니로 형상화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드리아누스 욕장에서 나온 2세기경의 여신상

 

 

 

박물관 외부의 조각상

 

 아프로디시아스박물관의 규모는 다른 유명한 박물관에 비해 아주 작다. 하지만 여기에 전시되어 있는 유물은 어느 곳보다 알차다. 하드리아누스의 욕장, 티베리우스의 주랑, 극장, 그리고 세바스테이온(Sebasteion)의 입체조각벽화 등 이곳에서 발굴된 조각상과 부조물을 한자리에 모아 놓았다. 비록 이 조그만 도시 아프로디시아스에서 발굴된 유물만을 모아 놓았지만 질적인 면에서 다른 박물관을 압도하고 있다. 로마시대의 최고의 작품들을 볼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찍 이런 것을 알았더라면 더 많은 시간을 투자했을 것인데 그러지 못해 아쉬운 마음만을 가득한 채 아프로디시아스를 떠나야 한다.

 

 

케난 에림(Kenan T.Erim) 교수 기념관 입구 동판

 

역사를 바꾸는 방법은 다양하다. 어떤 사람은 권력으로, 어떤 사람은 부로 자신이 이름을 역사에 새긴다. 그러나 그런 방법이 아니라 자신의 일생을 한 가지 목적을 위해 바치는 위대한 사람들을 본다. 이번 여행에서 만났던 트로이의 슐리이만이나. 크노소스의 에반스, 그리고 이 아프로디시아스의 케난 에림 같은 사람들에 의해 우리는 우리 인간의 역사를 잊어 버리지 않고 간직하게 된 것이다.

 

 아프로디시아스를 구경한 것은 참으로 행운이었다. 나는 사실 이같은 도시가 있었는지를 모르고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 비로소 이 아름다운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에게 바치는 도시가 있음을 알고 즐기게 되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고대 그리스문명을 보고 싶으면 터키로 가라는 말이 과연 사실이다는 것을 또 다시 깨닫게 해 주는 유적이다. 

 

 이 같은 구경을 한번씩 할 때마다 나는 내 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가진다. 내 혼자서는 언제 이렇게 방대한  여행을 계획하고 진행할 수 있겠는가?

 

 마음 가득히 감동을 담고 다음 목적지로 이동한다.

아들과 함께 터키문명 산책 - 이즈미르(스미르나)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거대한 아고라의 아름다운 건축이 있는 도시

 

 베르가마를 떠나 이즈미르로 오니 비는 계속해서 왔다가 거치기를 반복한다.

 

 사람이 살기 좋은 기후와 지리적 조건으로 옛날부터 이민족의 침입과 정복이 반복된 터키 서부의 이즈미르(Izmir)는 인구가 약300만 가까이 되는 에게해에 접한 터키 제 3의 대도시로 고대명은 스미르나(Smyrna). 성경에서 서머나라고 언급되는 스미르나는 소아시아 7대 교회 중 한 곳으로 초기 그리스도교 역사에는 의미가 깊은 곳이다. B.C. 3000년대 전반부터 발전한 도시로 이곳은 북방의 트로이와 함께 당대 소아시아 서부에서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B.C.10세기 이후 그리스 인이 이주하여 그리스의 식민도시였다가, BC 627년 리디아의 공격으로 멸망하였다가 이후 알렉산더대왕이 새로 성채를 짓고 사람들을 이주시키면서 스미르나라는 이름이 붙었다 한다. 이즈미르가 가장 번성한 때는 로마의 자유도시로 존재한 기원전 1세기경이다. 178년과 180년에 대지진에 휩싸여 이즈미르는 큰 피해를 입었으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에 따라 부흥되었다. 그 뒤 역사의 변화에 따라 부침을 계속하다가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이 지방에 침입한 그리스군에 의해서 파괴되고 그리스 령이 되었으나 터키 독립의 아버지인 무스타파 케말 파샤(아타튀르크)의 노력으로 1923년 터키에게 반환되었다. 현재는 터키 제1의 수출무역항으로 활기를 띠고 있다.

 

 1948~51년 쿠크(J.Cook)와 아쿠르갈(E.Akurgal)에 의하여, 1966년 이후는 아쿠르갈에 의하여 고고학적인 발굴이 행해졌다. B.C. 9 ~ A.D. 6세기의 건축, 미술의 중요한 자료가 되는 출토품의 대부분은 시내의 고고학박물관에 있다. 2세기 중반 경에 세워지고 178년의 지진 뒤 재건된 시내에 있는 고대의 아고라에는 대리석의 열주, 포세이돈과 데메테르의 상 등이 발굴되었고, 파구스의 언덕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무장(武將)이 축조한 성새가 있다. 호메로스의 출생지로도 알려져 있다.

 

 

 고대의 멀티프렉스 아고라

 

 아침부터 비가 제법 내리며 항구도시라 바람이 제법 거세다. 먼저 이즈미르의 자랑거리인 아고라로 갔다. 시내를 제법 걸어가니 아고라가 있다. 알렉산더대왕 시절의 아고라는 3층 규모에 가로가 200m, 세로가 170m의 크기로 엄청난 위용을 자랑했다. 아고라에는 자유로운 민중집회의 상설토론장과 다양한 실내점포들이 건물 한편을 차지했고, 건물 오른쪽에는 사법부가, 그 반대편에는 종교집회장이 마련돼 종교, 문화, 행정이 어우러진 복합적인 기능의 장소였다. 하늘을 찌를 듯한 대리석 열주들은 아고라 건물 앞에 나열되어 있으며, 그 아래로 아치형 지붕들이 정교하게 이어져 있다.

 아고라는 거대한 크기뿐만 아니라 기능적인 면에서도 지금 놀라고 있다. 2천 년 전 설치된 하수 시설은 지금도 작동에 문제가 없으며, 물론 식수로는 사용할 수 없지만 지금 수도꼭지를 돌리면 물이 나올 정도로 상수도도 정상적인 기능을 유지하고 있다. 또 건물 곳곳의 지붕에는 구멍이 뚫여 있어 자연채광과 함께 실내 환기를 도와준다.

 178년 발생한 대지진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부인인 파우스티나가 재건하였는데 파우스티나의 얼굴을 새겨놓은 아치가 지금도 남아 있다.

 최근 본격적인 발굴 작업을 진행하면서 이즈미르 고대도시가 서서히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지만. 아고라에서 생활했던 사람들은 모두 시간 속에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쉬지 않고 물을 쏟아내는 식수대와 같이 지금도 이즈미르는 유구한 역사를 토해내고 있다.

 

 

아고라 입구 표지

 

 

 

아고라 입구에서 왼쪽, 오른쪽으로 보는 모습

 

 

아고라 입구의 사자상

 

 

 

 

 

 

아고라의 유물들

 

 

 

멀리서 보는 열주들

 

 

 

 

지진으로 파괴된 아고라를 재건하는데 도움을 준 Damokharis를 기리는 기념비문

 

 

 

서쪽 열주 설명도

 

 

스미르나 고대도시와 아고라 설명

 

 

 

 

열주 앞의 아름다운 아치들

 

 

알렉산더대왕의 꿈(네메시스 여신의 현몽) 설명

 

 

지금도 물이 나오는 수도

 

 

 

아치 아래 통로에 있는 수로

 

 

아치 아래에서 바라보는 아치로 이루어진 통로

 

 

 

아치가 쭉 늘어서 있는 아름다운 모습

 

 남아있는 건축물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은 아고라 동서 양면에 있는 17.5m 높이의 2층 회랑 및 서쪽 회랑의 두 번째 아치에 있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황후 파우스티나(Faustina)의 흉상이라고 하나 철조망으로 막아 놓아 볼 수 없었다.

 

 거대한 아고라에서 쭉 늘어선 열주와 아치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통로 등을 보고 비오는 거리를 조금 걸어 가니 이즈미르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시장 지역인 아나팔탈라르 거리가 시작된다. 이 거리를 쭉 지나가면 서쪽의 코낙광장으로 나간다. 사실 시장은 우리나라 시장보다 화려하다거나 크지는 않다. 단지 이 도시에서 터키의 여러 물건을 팔고 있는 오래된 거리겸 시장이다.

 시장을 구경하고 광장으로 나간다. 비는 아직도 오고 있다.

 

 

 

아나팔탈라트 거리(시장)

 

 

 

 

광장의모습 - 수많은 비둘기가 날고 있고, 사람들은 그 비둘기에게 모이를 준다.

 

 

 

광장의 시계탑

 

 이 조그마한 광장은 터키역사에 중요한 장소이다. 그리스와의 전쟁의 첫 총성이 울린 곳이며, 터키공화국이 시작된 장소이다. 해마다 10월 29일에 터키공화국 건국기념행사가 열리는 곳이다. 시계탑은 1901년에 세워졌는데 네 방향의 시계는 1차세계대전의 동맹국인 독일이 선물한 것이다. 옆에는 조그마한 자미가 있고, 목숨걸고 침략을 막은 터키시민을 기리는 동상도 있다. 바다에 바로 접해 있어 풍경이 아주 좋다하는데 오늘은 비가 오고 있다.

 

 

 이즈미르 고고학 박물관(Izmir Arkeoloji Müzesi)

 

 터키 이즈미르 시 코낙(Konak) 지구에 1927년 설립되어 1984년 현재의 위치로 옮긴 박물관으로 인근 이즈미르 아고라 등과 소아시아 지역의 그리스, 로마 유적지에서 발굴된 약 1,500점의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다.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대형 동상과 석조 흉상, 부조 등이 1층 전시홀과 박물관 입구인 중간층, 정원에 전시되어 있다. 이중 아고라에서 발굴된 포세이돈, 데메테르, 아르테미스 동상이 제법 유명하고, 위층에는 이아소스에서 발굴된 B.C.3세기경 도자기를 비롯해 여러 유물들, 그리고 복원된 B.C.3세기 무덤 등이 있고, 그 중 청동으로 제작된 운동선수의 전신상이 유명하다. 3층 전시실에는 여러 보석 세공품,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동전, 데메테르 청동 조각 등도 볼 수 있다.

 

 

이즈미르고고학박물관

 

 

 

박물관 전시실 밖에 있는 여러 석조 부조

 

 

고대터키 지역도

 

 

 

 

 

내 마음을 가장 사로잡았던 벽화

 

 

 

 

운동하는 전신상

 

 

 

 데메테르여신

 

 

 

포세이돈 상

 

 

 

 

전시중인 여러 유물들

 

 

민속학박물관

 

 고고학박물관과 경내에 마주 보고 있는 건물이 민속학박물관이다. 모르고 그냥 지나칠 수 있는데 한번 구경할 만하다. 19세기초 병원으로 사용되던 건물에 터키의 전통복장과 집안 모습, 나자르 본주우나 카펫 등을 만드는 장인의 모형들도 볼 수 있다.

 

 

 

 

 

민속학박물관 전시품

 

 

비오는 이즈미르 항구

 

 

 

 

 

 

 

비오는 이즈미르시내 - 현대화된 고층건물이 많이 눈에 뜨인다.

 

 

 

1922년 터키독립을 위해 싸운 이즈미르 시민들의 동상

 

 아산쇼르 -이름만큼은 아닌 전망대

 

 해안가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시내를 걸어서 이곳 저곳을 구경하고 다녔다. 터키 제 3의 도시라 현대화된 건물이 곳곳에 서 있고, 또 시내 곳곳에 건물을 짓고 있었다.한참 개발이 진행중인 도시였다. 거리를 걸어 다니다가 지하철을 타고 아산쇼르로 갔다.

 

 아산쇼르는 유대인 부호인 네심 레비가 1907년에 만든 엘리베이트 전망대이다. 처음에는 부근 주민들이 낮은 지대에서 높은 지대로 걸어서 올라가는 노고를 덜어주기 위해서였는데, 지금은 관광전망대로 더 유명하다. 이 전망대에서는 이즈미르 일대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렇게 돈을 주고 전망대에 들어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 주변의 전망대도 또 있고, 주변의 카페에서 보는 전망과 동일하다. 또 뛰어난 절경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아산쇼르 전경

 

 

 

 

 

아산쇼르에서 보는 이즈미르시내

 

 

아산쇼르 카페

 

 아산쇼르카페에서 차를 한잔 마시고 내려와 지하철로 숙소로 돌아 왔다,

 

 다시 이동을 해야 한다. 하루에 한번씩 짐을 풀었다가 또 짐을 사서 이동하는 일정이 그렇게 편안하지 않다. 상당히 피곤한 일이다. 하지만 터키는 너무 크다. 한 곳에서 머물면서 다른 유적을 보려면 매우 긴 길을 가야 한다. 더구나 교통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발달되어 있지 않다. 우리나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들은 한 100km 정도 떨어져 있으면 적어도 세 시간 이상 걸린다. 그래서 이동을 자주한다.

 

 파묵칼레로 간다.

파묵칼레에서는 몇 일을 머물면서 주변을 구경할 것이니 좀은 편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