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鶴)의 오딧세이(Odyssey)

아들과 함께 터키문명 산책 - 파묵칼레 2 (히에라폴리스)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성스러운 도시 히에라폴리스

 

 눈처럼 하얀 석회층 위에는 고대도시 히에라폴리스가 있다. 석회층에서 자연의 경이로움을 느끼다가 맨 위로 올라가면 페르가몬의 왕인 에우메네스 2세가 기원전 190년에 건설한 히에라폴리스가 있다. 이 이름은 '성스러운 도시'란 뜻으로 헬라클레스의 아들이자 페르가몬의 시조인 텔레포스의 아내 '히에라'에서 유래되었다 한다.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 히에라폴리스로 불렸던 이 도시의 인구는 최대 10만 명으로 추정한다. 현장 안내판에 그려진, 히에라폴리스 황금기의 조감도에는 대형 아고라와 2개의 극장, 2개의 공중목욕탕, 신전과 체육관 사이로 주택이 빼곡하게 밀집해 있는 것이 보인다. 지금 보아도 큰 도로인 폭 13.5m, 길이 1,500m 정도의 대로는 남북을 관통하고 있고, 대로를 따라 흩어진 유적은 당시의 도시 규모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한다. 1,000개가 넘는 석관묘가 늘어선 고대 공동묘지인 네크로폴리스는 터키에서 가장 큰 규모인데 목욕탕과 어울려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왜 이곳에 공동묘지가 만들어졌을까? 이 석관들이 치료와 휴양을 위해 몰려들었던 병자들의 무덤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 도시는 1354년대 대지진으로 사라졌다가 1887년 독일 고고학계의 발굴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으나, 진정한 발굴은 이탈리아의 고고학자 파울로 베르조네의 일생을 바친 복원을 통해 우리에게 드러났다. 1957년부터 시작된 발굴은 2008년까지 계속되었다.

 

 옛날의 대리석 기둥이 밑바닥에 가득 채워진 현재의 노천탕은 후예들이 폐허가 된 유적지에 온천물을 담아 언덕 위에 온천 수영장을 만든 것이다. 노천탕 주변은 쉼터로 만들어 고대 로마시대 온천을 즐기던 체험을 재현하고 있다.

 

 히에라폴리스의 역사는 소아시아 반도의 다른 많은 헬레니즘 도시들과 같은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기원전 129년에 로마인들에게 점령당한 히에라폴리스는 로마제국에서 번영했다. 이곳은 그 당시의 여러 국가들의 사람들이 뒤섞여 지내는 국제 도시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 온천으로 와서 물을 가져가고 또 휴양과 교역을 하였다.

 

 세베루스(Severus) 시대에 만들어진 극장은 에페소스(Ephesos)의 아르테미스(Artemis)에게 바치는 의식과 희생 제물을 묘사한 멋진 프리즈(frieze)로 장식되어 있다.

 

 히에라폴리스의 기독교 유적들은 초기 기독교 건축물의 우수한 예로 지금도 남아 있다.

 기독교의 역사에 따르면, 히에라폴리스를 기독교로 개종시킨 사도 필립보(Philip)87년경에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황제에 의해 이곳에서 십자가형을 당했다고 한다.

4세기와 6세기 사이에 세워진 히에라폴리스의 기독교 기념물들은 대성당, 세례당, 교회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가운데 가장 뛰어난 건축물은 순교자 성 필립보 기념 성당(martyrium of St Philip)이다.

 

 

 

히에라폴리스 전체 설명 조감도

 

 

고고학박물관 현판

 

 이 고고학박물관은 히에라폴리스에서 발굴된 유물을 전시하는 곳이다. 특이하게 2세기경 지은 로마시대의 욕장을 복원하여 전시장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각 전시장은 섹션이 나누어져 전시되어 있다.

 

 

조각 및 부조물 전시장

 

 

석관 부조(라오디키아 유물)

 

 

 

 

Isis의 여신(여성 사제)상

 

 

로마시대의 욕장 구조물

 

 

히에라폴리스 극장 유물관

 

 

 

 

 

전시물

 

 

외부 전시물

 

 

야외 유적온천장 입구

 

 

 

 

 

 푸른 온천물 아래에 보이는 돌들은 로마시대의 유적이다. 이 온천을 관광객들에게 유료로 개방한다고 했는데 내가 간 날은 개방을 하지 않았다. 과거 로마시대부터 이 히에라폴리스온천은 피부병에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아름다운 모습을 가지고 싶은 처녀들은 이 온천에 몸을 담그는 풍속이 남아 있다고 한다. 고대의 유적 위에 온천수를 공급하여 야외온천으로 만들어 관광객을 끄는 방법이 아주 참신하다. 아마 이곳에서 온천을 즐기는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로마의 황제가 된 기분일 것이다.

 

 

멀리 보이는 원형극장

 

 

고대국가의 히에라폴리스 열주 설명

 

 

 

 

6세기경 지붕이 있는 교회 설명판

 

 

 

 

원형극장 가는 길에서 보는 히에라폴리스 유적지

 

 

 

로마극장의 설명과 극장 발굴에 대한 설명

 

 

 

 

 

 

로마극장

 

서기 60년에 남동쪽 언덕에 지은 극장으로 북문 근처에 있던 극장이 지진으로 인해 파괴되었는데 그 석재를 이용해서 이 극장을 지었다고 한다. 언덕위에 지은 극장으로 약 50열의 관람석에는 15,000명 정도를 수용하는 큰 규모이다. 여기서 출토된 아포론과 아르테미스, 디오니소스 등의 유물들은 박물관에 따로 전시실을 마련하여 전시하고 있다.

 

 

 

 

저 멀이 보이는 사도 필립보의 순교기념 교회

 

 

Phillip의 무덤 설명판

 

 

돌로 만든 무덤 교회 설명판

 

 

 

 

 필립보의 무덤으로 추측되는 곳에 기념건물을 세웠으나 무덤은 발견되지 않았다. 원래는 이중의 건물 구조로 되어 있었다 하는데 외부 건물은 무너져 내려 알 수 없다. 아치가 남아 있는 중앙부 건물이 무덤이었을 것으로 추청한다.

 

 

선명하게 새겨진 십자가의 대리석판

 

 

사도 필립보 순교기념관 유물

 

 

Aghiasma(Sanctuary Fountain) 설명판

 

 

 

9 - 11 세기의 비잔티움 건물 설명판

 

 

 

 

4 - 5 세기에 만든 Flight of steps 설명판

 

 

 

 

 

성 필립보의 무덤과 교회로 가는 계단

 

 저 멀리에 필립보 순교기념관이 보인다. 유적 온천과 아고라 사이의 풀밭에서 언덕위의 기념관으로 올라 가는 약 600m 길이의 옛 계단이 있다.

 

 

 

아폴론 신전 표지판

 

 

 

아폴론 신전

 

 히에라폴리스의 주신인 아폴론을 모셨던 신전인데 지금은 거의 흔적을 볼 수 없고 기단 정도만 남아 있다. 이곳에서는 유독가스가 나와 그 당시의 사제들이 가스에 취한 상태에서 신탁을 받았다고 한다. 지금도 소량의 가스가 나온다고 하는데 그 성분은 일산화탄소로 밝혀졌다.

 

 

님파에움(Nymphaeum) 설명판

 

 

 

 아폴론신전 바로 앞에 2세기경 지은 기념 분수로 이 도시의 물을 공급하던 곳이다. 현재의 벽은 아폴론 신전의 안뜰 일부로 지어진 것이다. 이곳에서 발굴된 여사제 조각상이 박물관에 있다.

 

 

 

 

히에라폴리스 전경

 

 

멀리서 보는 극장

 

 

 

 

 

 

 

열주로와 아고라

 

 고대 히에라폴리스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대로로 설명판에는 이곳의 총독이었던 프론티누스의 이름을 따서 'Frontinus Street'라고 이름을 붙여 놓았다. 지금 열주는 도미티아누스문의 기둥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파괴되어 하단부만 남아 있다. 하지만 쭉 늘어선 모습만 보아도 경이롭기만 하다.

 

 

히에라폴리스북문 표시(일명 도미티아누스문)

 

 

 

 

 

도미티아누스의 문은 서기 84년 이곳 총독이 로마황제 도미티아누스에게 봉헌한 문으로 세 개의 아치가 아름다운 자태를 지금도 뽐내고 있다. 로마양식의 문으로 로마 게이트라고 불리기도 한다.

 

 

 

 

 

로마욕장

 

건설 당시에는 온천, 냉탕, 사우나 등 휴양에 알맞는 용도로 지어졌으나 그 뒤에 개조하여 교회로 사용되었다 한다. 현재는 건물이 거의 파괴되어 전체를 볼 수 없고 길쪽의 아치만 남아 있다.

 

 

무덤 설명판

 

 

 

 

 

네크로폴리스 표지

 

 

 

 

죽은 사람들의 도시 네크로폴리스의 여러 모습

 

 네크로폴리스(necropolis)는 고대도시 가까이의 많은 묘로 형성된 지역을 가리킨다. 그리스나 로마 문화의 영향을 받은 지역에는 네크로폴리스가 성벽 밖에서 성문에서 시작되는 길을 따라 있었다. 네크로폴리스는 시가지 밖에 있어 발굴이 쉽고 많은 부장품이 있어 학문연구에 중요한 유적이 되고 있다. 이곳에는 1000개가 넘는 무덤이 있는데 천년이 넘게 형성된 무덤군으로 무덤의 양식도 헬레니즘시대부터 비잔틴시대가지 다양하다고 한다. 수 많은 무덤에서 발견된 비문만을 따로 번역해서 출판되었다고도 한다. 

 

  히에라폴리스를 가는 방법으로 사람들은 차를 타고 북문으로 가서 유적을 보고 다시 차를 타고 파묵칼레로 간다. 하지만 나는 생각하기를 파묵칼레 마을에서 석회층을 걸어 올라가서 히에라폴리스 전체를 구경하고 다시 석회층을 통해 파묵칼레로 내려 오는 길을 권하고 싶다. 그러면 석회층이 시간에 따라 변하는 모습을 볼 수도 있고 시간도 절약되는 것 같다. 물론 선택은 각자가 알아서 하면 된다. 

 

 터키를 여행하면서 계속 감탄을 하는 것이 있다. 그리스 문화나 로미시대의 흔적을 터키에서 너무 잘 볼 수 있다는 것이 좋았고, 또 유적의 규모가 그리스보다 엄청나게 크게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 도시의 유적보다 터키의 유적이 훨씬 크게 보이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이제 파묵칼레 여정도 마치고 이제 또 다른 경이로운 유적 에페소스를 보기 위해서 셸축으로 간다.  

 

 

 

 

 

 

 

 

 

 

 

 

 

 

 

아들과 함께 터키문명 산책 - 파묵칼레 1 (라오디키아와 석화층)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고대 최대의 도시 라오디키아(라오디게아)

 

 아프로디시아스를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에 데니즐리와 파묵칼레 중간에 있는 라오디키아유적으로 향했다. 라오디키아는 아직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가 않은 곳으로, 한참 발굴중인데 아직 10%도 발굴되지 않았다고 한다. 라오디키아는 무려 기원전 5000녀부터 사람이 살고 교역이 활발하여 번영을 누리던 도시였다. 특히 소아시아 7대 교회중의 하나로 요한묵시록에 이곳이 언급되면서 기독교 순례객들에게는 중요한 순례지이다.

 너무나 유적지가 크고 아직도 발굴이 조금밖에 진행되지 않아서 황량하게 보이는 곳이지만 그리스나 터키의 고대도시가 가지고 있는 건물들을 모두 가지고 있고, 규모가 엄청나다. 황량한 벌판이고 휴식을 취할 곳이 전혀 없다는 점을 유의하여 관람을 해야 한다. 이곳에서 파묵칼레를 보면 하얀 석회층이 햇빛 아래 빛나는 모습을 구경할 수 있다.

 

 

라오디키아 유적

 

 라오디키아는 터키 남서부에 셀레우코스왕조가 건설한 고대도시로. ‘백성의 정의란 뜻을 가진 지명은 시리아왕 셀레우코스2세의 왕비 라오디케’(Laodice)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도시로 데니즐리 북서쪽 있다. 라오디키아(Laodikeia) 유적은 규모로만 보면 가장 큰 고대도시로 추정되는데 현재 발굴된 것은 10%에 불과하고, 관광지로 개방된 것도 불과 몇 년에 지나지 않는다. 이곳이 주목 받는 다른 이유는 요한묵시록에  라오디키아 신자에게 보내는 말씀에 소아시아의 7개 교회 중 가장 크게 책망을 받은 곳으로 기록하고 있어 기독교인들에게 특별한 곳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라오디키아는 눈병을 고치는 안약의 산지로 유명 하였다. 라오디키아 교회에 보낸 요한묵시록에는 영적인 눈을 뜨기 위하여 안약을 사서 바르게 하라고 기록 되어있다.(요한묵시록 3:18)

 이 도시가 멸망 한 것은 파묵칼레와의 중간에 있는 강이 큰 홍수로 범람하여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하는데, 하느님의 징벌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특히 이곳에 많이 재배되었던 양귀비꽃으로 마약에 중독되어 사람들은 타락과 범죄와 향락에 빠진 삶이었다고 말한다.

 

 의료도시로 이름이 난 라오디게아유적에는 로마시대의 석재들이 여기 저기 널려있다. 1950년부터 발굴 복원사업을 하고 있다고 하나 지지부진하여 버려진 곳과 같은 느낌이다. 여기도 지진으로 인한 피해가 매우 컸다고 하지만 지금 넘어지지 않고 있는 석주로 짐작할 때 대단히 광대한 지역에 걸친 거대도시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길가의 라오디키아 표지

 

 이 표지에서 제법 먼 길을 걸어 가면 입구가 있다. 약 1.5km쯤 되는 거리다. 그런데 입구에서 입장표를 사서 들어가면 아무 것도 없고 길만 보인다. 그 길을 따라 또 제법 먼 길을 걸어 올라가면 유적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놀랄 정도로 넓은 곳에 아직 발굴이 진행중이라 폐허와 같은 유적이 곳곳에 돌무더기같이 보인다. 그러나 시간을 가지고 돌아보면 그 방대한 규모에 감탄한다. 그리고 이 유적이 제대로 발굴되면 얼마나 멋진 곳이 될까?하고 생각해 보는 것도 즐겁다. 지금은 폐허같이 보이지만 남아 있는 유적만으로도 그 웅장하고 위엄있었던 과거의 영화롭던 시절을 머리에 상상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유적지에서 보는 파묵칼레

 

저 멀리 보이는 하얀 산정은 눈이 아니라 바로그유명한 파묵칼래 석회층이다.

 

 

라오디키아 유적 설명판

 

 

라오디키아의 역사 설명판

 

 

유적 이정표

 

 

 

 

 

 

 

템플 A라고 칭하는 유적 설명판

 

 

 

 

 

 

 

 

 엄청나게 넓은 벌판에 무너진 도시의 모습이 폐허처럼 보이지만 수천년의 세월을 지탱해온 역사의 흔적이다. 아직 제대로 정리된 것이 없어 온전한 설명도 되어 있지 않다. 그저 이곳이 한 때는 소아시아에서 가장 영화를 누리던 도시라고 생각하고 이 자취만으로 그 때의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것도 즐거움이다. 내가 그리스와 터키의 옛 유적을 산책하면서 이렇게 큰 도시가 제대로 보전이나 발굴이 되지 않은 것은 아마 보지 못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젠가 이 유적지가 제대로 발굴되어 옛 모양을 보여주는 날이 있을 것이다. 그 때 이 유적을 다시 볼 수 있을는지가 의문이다.

 

 

 

아름다운 문양을 갖춘 유적

 

 

라오디키아 교회 설명판

 

특이하게 이 라오디키아 유적은 아직 완전히 조사되지 않아 각 유적지에 plan이라는 번호를 매겨 놓고 있다. 정확하게 유적의 용도나 역사가 규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생각되고, 또 발굴을 위한 번호라 생각된다.

 

 

 

 

 

 

 

서쪽원형극장 설명판

 

서쪽극장이라는 설명으로 보아 다른 쪽에도 극장이 있었으리라 짐작이 되는데 한 도시안에 여러 개의 극장이 있을 정도라면 이 도시의 크기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거의 폐허와 같이 보이는 서쪽 원형극장. 그러나 크기는 엄청나다.

 

그리스와 터키를 여행하면서 본 원형극장은 거의 완전하게 복원된 것이 많았는데 이 원형극장은 아직 복원하기에는 세월이 멀다. 설명에 의하면 약 8000석을 갖추고 있다 하는데 크기가 그 이상으로 보인다.

 

 

각 유적을 가리키는 이정표다

 

 

스타디움 거리 설명판

 

 

 

 

선명하게 십자가가 보이는 석판

 

 

님파에움(nymphaeum) 설명판

 

 

 

 

에페수스 거리 열주 설명판

 

 

 

latrine(옥외 뒷간 정도로 이해) 설명판

 

 

특별히 보관되어 있는 프레스코

 

 

발굴중이라 출입을 통제하고 있는 거리

 

 

 

 

 

 

곳곳이 발굴이 진행중이라 내부를 볼 수가 없는 것이 아쉽다.

 

 라오디키아는 과거의 영화롭던 시절의 방대한 규모에 비해 지금은 다른 유적지에 비해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비교적 현대에 발굴이 시작되어 아직도 수 많은 유적이 그대로 있다. 제대로 우리에게 알려지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수 많은 시간이 흘러도 이 도시가 잊혀져 있던 시간보다는 짧을 것이다. 빠른 시간에 이 도시가 제 모습을 찾아 우리에게 보여진다면 우리는 또 하나의 문화유산을 간직할 것이다.

 

 

 라오디키아를 구경하고 숙소로 돌아가니 오늘이 12월 31일이다. 어느 새 또 한해가 다 지나간다. 외국에서 새해를 맞이한게 언젠인가를 생각하고 아들에게 물으니 한 10년전에 아들녀석과 일본에서 연말 연시를 맞이한 기억이 있고, 아들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지만 아들이 네살 때 싱가포르에서 새해를 맞이한 기억이 있다. 모두 여행을 가서 타국에서 새해를 맞은 것이다. 저녁이 되어 숙소에서 휴식을 취하며 한해를 보내는 회포를 풀며 맥주를 마시고 있으니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이 몇 명 들어온다. 터키를 여행중이라 한다. 카파도키아를 거쳐 왔다 하여 발룬을 탔는가 물어보니 못탔다고 하며 바로 우리가 발룬을 탄 그날 이후로 한번도 발룬이 운행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젊은이들 가운데 부산 학생이 있어 이야기를 하며 아버지와 함께 여행을 해 보라고 권했다. 아들도 옆에서 아버지와 여행하는 것도 참 의미있는 일이라 하며 거든다. 어느 새 자정이 되니 이곳에서도 축하의 불꽃을 쏘아 올린다. 물론 거대한 불꽃 쇼는 아니고 자그마하지만 새해를 알리는 것이다. 조금 쉬다가 잠자리에 든다.

 

 다음 날 아침 2018년 1월 1일이다. 여행중이라 다른 생각도 없이 또 여행에 나선다.

 

 파묵칼레 석회층

 

 오늘은 파묵칼레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석회층을 보고 히에라폴리스를 답사하는 일정을 정했다. 석회층은 우리 숙소 바로 뒤에 있기에 가는 것은 쉬웠다.

 

 원래 파묵칼레(Pamukkale)는 터키 남서부 데니즐리에 위치한 석회층을 말한다. 파묵칼레의 뜻은 터키어로 파묵이 목화이고 칼레는 성이므로 목화성이란 뜻이다. 석회층이 목화의 하얀 솜처럼 보여 일컫는 명칭이다. 파묵칼레(Pamukkale)는 우리나라 사람에게도 꽤 알려진 곳으로, 3만년 세월이 만들어낸 하얀 석회암 절벽, 바람과 물결에 씻겨 만들어진 물결모양의 테라스, 약 35도 정도의 온천수로 가득 찬 크고 작은 웅덩이로 만들어진 높이가 약 160m 절벽에 2,700m 정도 길이의 하얀 성과 같은 모양으로 데니즐리 부근 어디에서 보아도 한눈에 들어온다. 새하얀 눈이나 소금이 쌓인 것처럼 보이는 석회층은 언덕 위에서 아래까지 생긴 모습은 흡사 계단식 다랭이논을 닮았다. 소금가루를 겹겹이 쌓아놓은 듯 하얀 석회층이 절벽 한 면을 빼곡히 채운다. 하얀 석회층에 푸른 온천수가 고여 있는 풍경은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다. 그리고 이 석회층들은 하루에도 여러 차례 색이 변한다. 웅덩이에 고인 푸르던 물은 희게 변색되며 해 질녘에 띠는 색깔은 붉은빛이다. 관광객들은 정해진 이동로를 따라 정상부위에서 중턱까지 짧은 거리지만 신비한 순백의 여행을 즐길 수 있다. 석회층의 훼손을 막기 위해 반드시 맨발로 들어가야 한다. 눈으로 보기에는 미끄러워 위험할 것 같으나 감촉이 거칠고 미끄럽지 않다. 요즈음에는 온천수가 충분하지 못해 요일에 따라 유량을 조절하기 때문에 물이 가득하지 않을 경우도 있다.

 

석회층을 걸으면서 온천수에 발을 담그고 망중한을 즐겨 보는 것도 여행의 한 즐거움이다.

 

 

 

 

 

 

 

파묵칼레 자연 공원

 

석회층 아래에 만들어 놓은 공원으로 숲이 우거진 연못이 인공적으로 만들어져 있고 여러 산책로를 만들어 놓았다. 석회층에서 흘러 내리는 물로 가득한 이 공원 연못에는 유람선 같은 것도 있는 유원지이다.

 

 

 

 

 

석회층을 걸어가기 위해서 신발을 벗는 곳

 

 

 

두껍게 쌓여 있는 석회층

 

 

 

 

석회층에서 보는 파묵칼레 마을

 

 

 

 

석회층을 흐르는 온천수

 

 

 

 

 

 

석회층의 여러 모습

 

 

 

 

 

 

 

 

 석회층에는 다양한 모습의 물웅덩이가 만들어져 있다. 사람들은 모두들 그 웅덩이에 발을 담그고 즐거워한다. 동심의 세계로 들어선 사람들은 웃고 떠들면서 각자 자기 나름대로 추억을 만들어 간다.

 

 

석회층가로 흐르는 온천 수로

 

 

 

 

 

 

 

 

석회층의 여러 모습

 

 

석회층 자연 공원에서 보는 석회층

 

석회층을 갈 때는 반드시 비닐 봉지를 여러 개 준비하는 것이 좋다. 먼저 신발을 벗어야 하니 신발을 넣을 봉지가 있어야 하고 석회층 가에 흐르는 온천수에 발을 담그고 앉기 위해서 비닐 깔판이 있는 것이 좋다. 그런 비닐이 없어 곤란해 하는 사람들이 많앗다. 우리는 다행히 비닐을 여러 장 가져 갔기에 사용하고 버리려고 하니 주변 사람들이 다 사용했는가 물으며 자기에게 달라고 해서 주니 고맙다고 인사를 한다. 명심하시기를 ....

 

 

내가 묵었던 호텔

 

 

 파묵칼레는 이스탄불, 카파도키아와 함께 터키를 가면 꼭 가는 유명한 곳이라 대체적으로 여행객들을 위한 시설이 제법 잘 갖추어져 있다. 식당도 곳곳에 보이고 음식도 나무랄 데 없이 괜찮은 편이다. 얼마나 많은 한국 사람이 오는지 한글로 된 식당 메뉴판이 길가에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이곳에서도 발룬이 운행되고 있다. 물론 카파도키아와 같이 엄청난 규모는 아니고 몇 개 정도가 운행되고 있다. 하지만 카파도키아에서 발룬을 타지 못하였거나, 이곳의 경치를 하늘에서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좋은 경험이 될 수 있다.

카파도키아의 자연도 신비롭지만 파묵칼레의 석회층도 자연의 경이로움을 우리에게 준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는 석회층을 걸어 보면서 관광하는 것은 자연공원쪽에서 걸어 올라 갔다가 다시 걸어 내려오는 것이 여러 면에서 편리하다고 생각한다. 먼저 석회층 상부족에 가려면 파묵칼레 마을에서 제법 많이 떨어져 있어 시간이 제법 걸린다.

아들과 함께 터키문명 산책 - 아프로디시아스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에게 바친 도시 아프로디시아스(Aphrodisias)

 

 이즈미르에서 약 5시간 가량 기차를 타고 데니즐리에 도착하여 돌무쉬를 타고 파묵칼레로 향했다. 밤늦게 숙소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 저녁을 먹으려고 나가니 모두들 문을 닫고 있다. 겨우 조그마한 음식점을 찾아 물으니 영업을 한다고 하여 끼니를 때웠다. 숙소로 돌아오면서 맥주를 사려고 하니 쉽지가 않다. 터키는 다른 이슬람국가에 비해 주류에는 좀 여유로운 편이지만 우리나라와 같이 아무 곳에서나 주류를 팔지는 않는다. 그래서 몇 군데 슈퍼를 돌아 겨우 맥주를 몇 캔 구입하여 숙소에 돌아와 아들과 한잔하면서 피로를 풀었다. 몇 일간은 짐을 풀어 놓고 있을 수 있는 것이 여간 마음이 편안환 것이 아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한국의 젊은이가 한명 들어온다. 물어보니 오늘 아침에 도착했고 다른 한국의 젊은이 몇 명이 오후에 온다고 한다. 잠시 이야기를 하다가 오늘은 먼저 아포르디시아스와 라오디키아 유적을 돌아 보기로 하고 일정을 시작한다.

 

 아포르디시아스는 파묵칼레에서 100km 정도 멀리 떨어져 있어 교통편이 여간 어렵지 않다. 대중교통이 있지만 아들과 나는 시간을 아끼기로 약속했고, 저번에 말한대로 대절비가 그렇게 비싸지 않다. 왕복 200리라(약 60,000원)에 계약하고 개인영업용 차를 타고 갔다. 물론 우리가 관광을 하는 시간을 기다려 준다는 조건이다. 약 100km를 가는 도중에 전방 10m도 보이지 않는 안개가 자욱하게 끼여 겁이 났으니 기사는 능숙하게 차를 몰고 갔다. 약 2시간이나 걸려 아포르디시아스 유적에 도착하여 오후 2시에 데리러 오라고 하고 유적 관광을 시작했다.

 

 

아프로디시아스의 상징적 문 - 테트로필론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에게 바친 도시 아프로디시아스(Aphrodisias)

 

 아프로디시아스는 현재명 게이레(Geyre)인 터키 남서부에 임한 고대도시유적으로 20세기 초 여러 번 발굴이 시도되었으나 전쟁으로 인하여 무산되었다가 1961년부터 뉴욕 대학 에림(Kenan T.Erim)에 의하여 발굴이 진행되었으며, 지금도 발굴중이다. 도시 유적 중심에 있는 아프로디테 신전은 하드리아누스제 시대의 것인데 6세기에 비잔틴 성당으로 전용됨으로 인해 많이 개조되었다. 아프로디테 사원은 기원전 3세기에 건축되었고, 그리고 1세기 뒤에 도시가 건설되었다.

 유적 북단에는 약 3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규모의 스타디움이 잘 보존되어 있다. 유적지내에는 오데온, 하드리아누스의 욕장, 엄청난 규모의 극장, 티베리우스 황제의 포르티코, 바실리카, 사교관 등등 여러 건물이 있다. 특히 이 지역은 질 좋은 대리석이 많이 생산되어 로마시대의 조각의 원형이 대부분 이곳에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아프로디시아스 파라고 불리웠던 조각가들은 북아프리카(레프티스 마그나에서 서단까지), 이탈리아 등에서 활약하였다고 한다.

 

 혹자들은 아테네의 파르테논신전보다 더 웅대하고 예술적으로 뛰어난 유적이라고 말하는데, 아직은 우리나라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지만 한번 구경을 하게 되면 그 매력에 푹 빠질 것이다.

 

 특히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 모두 이곳 박물관에 있다. 빼놓지 않고 관람하기를 권한다.

 

 아프로디시아스는 로마제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도시였다. 왜냐하면 로마를 건설한 트로이의 아이네이아스가 아프로디테의 아들이었고, 로마황제들은 그의 자손임을 칭했으므로 아프로디테는 그들의 어머니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에도 이곳에서는 여신숭배가 계속되었고, 이 때문에 비잔틴시대 이후에 기독교에 의해 아름다운 조각들과 건물이 파괴되고 쇠퇴했다. 그러다가 지진과 셀주크 제국의 공격으로 큰 타격을 입고 사라진 도시다.

 

 이 유적은 발굴된 것도 비교적 최근이고, 유네스코에 등재는 2017년에 되었다. 아직은 사람의 손때가 비교적 적은 유적이다.

 

 

고대 아프로디시아스 도시 표지판

 

 

당당하게 터키의 보물이라 붙여 놓았다.

 

 

 

 

입구에 있는 석관

 

아프로디시아스로 들어가는 입구는 고대 그리스 당시 만들어진 석관들로 뒤덮여 있다. 석관 사방에는 메두사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석관을 부수거나 안의 물건을 훔쳐가지 말라는 경고다. 메두사는 저주의 화신으로 정면으로 보는 즉시 돌로 변하게 만든다고 한다.

 

 

 

아프로디시아스 모형도

 

 

 

사자상과 아마 황제의 부조인 듯.

 

 

건물 방향 표시

 

 

 

아프로디시아스의 유물

 

 

테트라필론 설명판

 

 

 

 

 

 

 

 

 

 

테트라필론의 여러 모습

 

 이 건물은 아프로디테 신전 동쪽에 있는 기념문으로 아프로디시아드의 상징이 될만한 건축물이다. 폐허가 된 신전에 비해 거의 완전하게 복원된 모습으로, 테트라필론이란 4방향으로 문이 모두 있다는 뜻으로 4개의 원 기둥이 세워져 있다. 지금의 테트라필론은 당시 세웠던 원본을 발굴하여 원래의 자리에 거의 완전히 복원하였다. 이 건축물을 보는 순간 멍해졌다. 그리스와 터키를 여행하면서 고대 건축물을 많이도 보았고, 감탄도 하였는데 이 건물의 아름다움을 어느 곳에서도 비교할 수가 없는 것 같았다. 참 거대하면서 웅장하고, 아름다운 조각과 조형미를 무어라 말하기가 어렵다. 그저 눈으로 보고 감탄만 할 뿐이다.

 

 

 

케난 에림(Kenan T.Erim) 교수의 무덤

 

테트라필론 근처의 하얀 대리석 무덤은 케난 에림(Kenan T.Erim) 교수의 무덤이다.

 아프로디시아드를 발굴한 공로로 터키 정부가 이 유적지 안에 무덤을 만들 수 있게 허락하여 이곳에 그의 무덤이 있다. 그는 1959년 우연히 이곳에서 신전의 기둥 하나를 발견하고 일생을 숙명처럼 아프로디시아드의 발굴에 쏟았다. 아프로디시아드와 영원히 함께 살고 싶었던 그의 소망이 이루어져 그는 1990년 이후에 영원히 이곳에 살고 있다.

 

 

 

 

아프로디테 신전

 

도시의 수호신인 아프로디테를 위한 신전으로 이 도시에서 가장 성스럽게 여긴 건물이다. 하지만 지금은 안내판이 없다면 그냥 지나칠 만한 유적지다. 12세기의 지진으로 폐허가 된 곳에 지금은 높은 기둥이 14개 늘어서 있지만,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를 떠올릴 만한 그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4세기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이면서 아프로디테 신전은 철저히 파괴된다. 아프로디테스 신전은 5세기 말에는 교회로 전용되고 관련 유적이나 유물은 전부 말살된다. 기독교가 우상숭배라는 차원에서 그리스 신화 속의 유적들도 파괴한 일이. 신전의 서쪽에는 나르텍스(고대 기독교 교회에서 본당 입구에 짓는 넓은 홀), 동족에는 기독교 성화가 그려진 아프시스(교회당 동쪽 끝에 튀어나온 반원형 부분)가 지어졌고, 신전 정원에는 무덤이 만들어지면서 중요한 유적이 파괴되었다. 현재 이슬람국가의 고대 유적 파괴 문제가 세계적 뉴스로 취급되고 있지만, 4세기 당시 벌어진 기독교도가 종교라는 이름으로 파괴한 유적은 21세기를 조족지혈로 여길 정도로 엄청났다.

 

 

아프로디테 신전 설명판

 

 

 

아프로디테 신전의 여러 모습

 

 

북쪽 성역 설명판

 

 

 

 

스타디온 가는 길

 

 

스타디온(경기장) 설명판

 

 

 

 

 

 

 엄청난 크기의 경기장이다. 약 30,000명을 수용했다고 하는 로마식 경기장으로 현재 터키에 남아 있는 경기장 가운데 가장 크다고 한다. 길이가 약 270m, 폭이 약 60m인 타원형 경기장으로 현대의 경기장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이 경기장은 관중석 어디에서나 경기장이 잘 보이게 설계되어 있다. 그 당시에 이 조그마한 도시에 이런 거대한 경기장이 왜 필요했는가? 아마도 각 지방에서 참가한 선수들이 아프로디테에게 바치는 경기를 열었을 것이다.

 

 

주교관(Bishop palace) 설명판

 

 

 

 

 

 

하드리아누스 욕장 설명판

 

 

 

 

설명판

 

 

 

 

하드리아누스 욕장 구조 설명

 

하드리아누스의 욕장는 2세기경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이 곳을 다녀간 기념으로 건설한 욕장이다. 남자와 여자를 분리하여 탈의실과 냉탕과 온탕을 갖추었고, 대리석으로 만든 풀장도 있다. 당시의 인구로 볼 때 거대하고 화려한 욕장이다.

 

 

남쪽 아고라 설명판

 

 이 남쪽 아고라는 '티베리우스황제에게 바친다.'라는 비문이 있어 '티베리우스의 주랑'이라고도 불린다. 넓은 공간의 가운데에 있는 저수지는 길이가 약 260m, 폭이 약 25m에 깊이가 1.2m로 하드리아누스 욕장을 위한 물 저수지로 사용되었으며, 홍수를 통제하기 위해 물을 저장하는 곳으로도 사용되었다 한다. 아직 완전히 발굴되지 않아 정확한 용도를 알 수 없고 짐작만 할 뿐이다.

 

 

 

 

 

 

남쪽 아고라(티베리우스의 주랑)

 

 

 

티베리우스의 주랑에서 극장으로 가는 길

 

 

극장 상부의 모습

 

 

극장 설명판

 

 

 

 

극장의 모습

 

기원전 1세기경에 시작하여 기원전 27년에 완공하였다는 극장은 8000명 수용이 가능하다고 한다. 아프로디시아스의 최전성기의 인구는 2만 명 정도라고 전한. 원형극장에서는 오락이 아니라 신에 대한 의식과 모두가 함께 공유해야 할 가치와 상식을 공연하였다고 한다. 오이디푸스신화와 같은 교훈극이 당시의 연극이다. 그리스 비극은 시대를 넘어서 인간 모두에게 전해질 교훈이자 상식에 해당된다. 이 극장은 케난교수가 발굴을 결심햇을 때는 마을이 위에 있었다 한다. 1966년 이 마을을 이주시키고 본격적인 발굴을 하였는데, 마을이 있은 덕분에 원형이 거의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고, 많은 조각과 비문들을 발견하였다. 비문의 내용에 의하면 많은 유물이 있어야 하나 비잔틴 시대에 기독교화 하는 과정에서 아마 거의가 없어져 버린 것 같다. 아프로디시아스의 원형극장은 다른 지역과 달리 특별석이 많다. 특별석이란 등받이를 갖춘 의자형 좌석으로 관람하기 편한 앞줄과 한가운데 들어서 있다  

 

 

 

 

멀리서 보는 아고라 전경

 

 

세바스테이온 설명판

 

 

 

 

 

세바스테이온의 웅장한 모습

 

아프로디시아스 입구에서 왼쪽으로 100m 정도 들어가면 보이는 약 10m 높이의 거대한 기념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각종 신의 모습과 더불어 로마 황제 네로의 조각품도 볼 수 있다. 3층 구조로 1층은 기둥, 2층과 3층이 조각형 입체 벽화로. 전체 길이는 80m 정도다. 세바스테이온(Sebasteion)이라 불리는 건축물로 로마 황제를 신으로 모신 기념 사원, 즉 신전이다.

 

 모두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곳이었는데 1970년 발굴에서 80여 점의 입체 조각벽화가 발견되어 아프로디시아스 박물관에 80여 점 전부를 전시하고 있다. 전 세계 어디에서도 보기 어려운 최고 수준의 그리스 신화와 관련된 대리석 조각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흥미롭게 황제의 조각이 그리스 신들과 동등한 위치에 놓여 있다. 로마는 황제를 인간이기보다는 신으로 받드는 사회였다. 그래서 곳곳에서 황제의 신전을 만들려고 하였고, 황제신전을 만들려면 로마로부터의 특별한 허락이 필요했다고 한다. 그래서 여러 식민지와 도시는 개별적 차원의 황제신전을 갖고 있지만, 아프로디시아스는 로마 황제 모두를 기리는 종합신전을 갖고 있다. 그만큼 아프로디시아스는 특별한 곳이었다.

 

 

 

아프로디시아스 박물관 입구

 

 

승리의 여신 니케상

 

 

 

 

옥타비아누스의 노예로 이 아프로디시아스를 건립하는데 큰 공헌을 한

율리우스 조이로스를 기념하는 기념관에 대한 설명과 기념관의 부조들

 

 

 

네로와 아그리피나

 

 

 

 

아우구스투스와 빅토리아

 

 

안키세스와 아프로디테

 

 

아이네이아스

 

 

여러 조각상들

 

 

 

 

 

 

 이 박물관의 백미로 꼽히는 세바스테이온(Sebasteion)에서 1970년 발굴된 80여 점의 입체 조각벽화로 아프로디시아스 내 박물관은 80여 점 전부를 전시하고 있다. 전 세계 어디에서도 보기 어려운 최고 수준의 그리스 신화 관련 대리석 조각이다.

 

 

 

무언가 중요한 것이라 사진을 찍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 아프로디시아스의 주인공 아프로디테 여신상

 

 박물관에 전시된 아프로디테 입상은 우리의 소중한 보물이다. 오랜 세월을 지나 세상에 나온 아프로디테는 완전한 모양이 아닌 몸체만 남아 있다. 머리와 팔은 어디에 있는가? 5세기경 기독교도가 파괴한 뒤 아무렇게나 버린 것이다. 그래도 살아 남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아프로디시아스의 아프로디테는 아름다운 미의 여신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듯하다. 옷을 입은 자세로 서 있다. 의상 앞면 한가운데는 땅의 여신 게(Ge)와 하늘의 신 우라노스(Uranos), 태양의 신 헬리오스(Helios)와 달의 여신 세레네(Selene)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또 염소 머리에다 물고기 몸을 한 상상의 동물에 올라선 반라의 여인 조각도 의상의 다리 부분에 새겨져 있다.

 

 이 아프로디테스 입상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관능적 차원의 미의 상징과 거리가 멀고, 모든 것을 다 가지고 포용하는 어머니로서의 이미지가 한층 강하다. 아프로디테가 가진 원래의 미와는 다른 이미지를 가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여러 가지의 가설이 있겠지만 나는 로마의 어머니인 아프로디테를 온 우주의 어머니로 형상화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드리아누스 욕장에서 나온 2세기경의 여신상

 

 

 

박물관 외부의 조각상

 

 아프로디시아스박물관의 규모는 다른 유명한 박물관에 비해 아주 작다. 하지만 여기에 전시되어 있는 유물은 어느 곳보다 알차다. 하드리아누스의 욕장, 티베리우스의 주랑, 극장, 그리고 세바스테이온(Sebasteion)의 입체조각벽화 등 이곳에서 발굴된 조각상과 부조물을 한자리에 모아 놓았다. 비록 이 조그만 도시 아프로디시아스에서 발굴된 유물만을 모아 놓았지만 질적인 면에서 다른 박물관을 압도하고 있다. 로마시대의 최고의 작품들을 볼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찍 이런 것을 알았더라면 더 많은 시간을 투자했을 것인데 그러지 못해 아쉬운 마음만을 가득한 채 아프로디시아스를 떠나야 한다.

 

 

케난 에림(Kenan T.Erim) 교수 기념관 입구 동판

 

역사를 바꾸는 방법은 다양하다. 어떤 사람은 권력으로, 어떤 사람은 부로 자신이 이름을 역사에 새긴다. 그러나 그런 방법이 아니라 자신의 일생을 한 가지 목적을 위해 바치는 위대한 사람들을 본다. 이번 여행에서 만났던 트로이의 슐리이만이나. 크노소스의 에반스, 그리고 이 아프로디시아스의 케난 에림 같은 사람들에 의해 우리는 우리 인간의 역사를 잊어 버리지 않고 간직하게 된 것이다.

 

 아프로디시아스를 구경한 것은 참으로 행운이었다. 나는 사실 이같은 도시가 있었는지를 모르고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 비로소 이 아름다운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에게 바치는 도시가 있음을 알고 즐기게 되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고대 그리스문명을 보고 싶으면 터키로 가라는 말이 과연 사실이다는 것을 또 다시 깨닫게 해 주는 유적이다. 

 

 이 같은 구경을 한번씩 할 때마다 나는 내 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가진다. 내 혼자서는 언제 이렇게 방대한  여행을 계획하고 진행할 수 있겠는가?

 

 마음 가득히 감동을 담고 다음 목적지로 이동한다.

아들과 함께 터키문명 산책 - 이즈미르(스미르나)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거대한 아고라의 아름다운 건축이 있는 도시

 

 베르가마를 떠나 이즈미르로 오니 비는 계속해서 왔다가 거치기를 반복한다.

 

 사람이 살기 좋은 기후와 지리적 조건으로 옛날부터 이민족의 침입과 정복이 반복된 터키 서부의 이즈미르(Izmir)는 인구가 약300만 가까이 되는 에게해에 접한 터키 제 3의 대도시로 고대명은 스미르나(Smyrna). 성경에서 서머나라고 언급되는 스미르나는 소아시아 7대 교회 중 한 곳으로 초기 그리스도교 역사에는 의미가 깊은 곳이다. B.C. 3000년대 전반부터 발전한 도시로 이곳은 북방의 트로이와 함께 당대 소아시아 서부에서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B.C.10세기 이후 그리스 인이 이주하여 그리스의 식민도시였다가, BC 627년 리디아의 공격으로 멸망하였다가 이후 알렉산더대왕이 새로 성채를 짓고 사람들을 이주시키면서 스미르나라는 이름이 붙었다 한다. 이즈미르가 가장 번성한 때는 로마의 자유도시로 존재한 기원전 1세기경이다. 178년과 180년에 대지진에 휩싸여 이즈미르는 큰 피해를 입었으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에 따라 부흥되었다. 그 뒤 역사의 변화에 따라 부침을 계속하다가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이 지방에 침입한 그리스군에 의해서 파괴되고 그리스 령이 되었으나 터키 독립의 아버지인 무스타파 케말 파샤(아타튀르크)의 노력으로 1923년 터키에게 반환되었다. 현재는 터키 제1의 수출무역항으로 활기를 띠고 있다.

 

 1948~51년 쿠크(J.Cook)와 아쿠르갈(E.Akurgal)에 의하여, 1966년 이후는 아쿠르갈에 의하여 고고학적인 발굴이 행해졌다. B.C. 9 ~ A.D. 6세기의 건축, 미술의 중요한 자료가 되는 출토품의 대부분은 시내의 고고학박물관에 있다. 2세기 중반 경에 세워지고 178년의 지진 뒤 재건된 시내에 있는 고대의 아고라에는 대리석의 열주, 포세이돈과 데메테르의 상 등이 발굴되었고, 파구스의 언덕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무장(武將)이 축조한 성새가 있다. 호메로스의 출생지로도 알려져 있다.

 

 

 고대의 멀티프렉스 아고라

 

 아침부터 비가 제법 내리며 항구도시라 바람이 제법 거세다. 먼저 이즈미르의 자랑거리인 아고라로 갔다. 시내를 제법 걸어가니 아고라가 있다. 알렉산더대왕 시절의 아고라는 3층 규모에 가로가 200m, 세로가 170m의 크기로 엄청난 위용을 자랑했다. 아고라에는 자유로운 민중집회의 상설토론장과 다양한 실내점포들이 건물 한편을 차지했고, 건물 오른쪽에는 사법부가, 그 반대편에는 종교집회장이 마련돼 종교, 문화, 행정이 어우러진 복합적인 기능의 장소였다. 하늘을 찌를 듯한 대리석 열주들은 아고라 건물 앞에 나열되어 있으며, 그 아래로 아치형 지붕들이 정교하게 이어져 있다.

 아고라는 거대한 크기뿐만 아니라 기능적인 면에서도 지금 놀라고 있다. 2천 년 전 설치된 하수 시설은 지금도 작동에 문제가 없으며, 물론 식수로는 사용할 수 없지만 지금 수도꼭지를 돌리면 물이 나올 정도로 상수도도 정상적인 기능을 유지하고 있다. 또 건물 곳곳의 지붕에는 구멍이 뚫여 있어 자연채광과 함께 실내 환기를 도와준다.

 178년 발생한 대지진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부인인 파우스티나가 재건하였는데 파우스티나의 얼굴을 새겨놓은 아치가 지금도 남아 있다.

 최근 본격적인 발굴 작업을 진행하면서 이즈미르 고대도시가 서서히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지만. 아고라에서 생활했던 사람들은 모두 시간 속에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쉬지 않고 물을 쏟아내는 식수대와 같이 지금도 이즈미르는 유구한 역사를 토해내고 있다.

 

 

아고라 입구 표지

 

 

 

아고라 입구에서 왼쪽, 오른쪽으로 보는 모습

 

 

아고라 입구의 사자상

 

 

 

 

 

 

아고라의 유물들

 

 

 

멀리서 보는 열주들

 

 

 

 

지진으로 파괴된 아고라를 재건하는데 도움을 준 Damokharis를 기리는 기념비문

 

 

 

서쪽 열주 설명도

 

 

스미르나 고대도시와 아고라 설명

 

 

 

 

열주 앞의 아름다운 아치들

 

 

알렉산더대왕의 꿈(네메시스 여신의 현몽) 설명

 

 

지금도 물이 나오는 수도

 

 

 

아치 아래 통로에 있는 수로

 

 

아치 아래에서 바라보는 아치로 이루어진 통로

 

 

 

아치가 쭉 늘어서 있는 아름다운 모습

 

 남아있는 건축물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은 아고라 동서 양면에 있는 17.5m 높이의 2층 회랑 및 서쪽 회랑의 두 번째 아치에 있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황후 파우스티나(Faustina)의 흉상이라고 하나 철조망으로 막아 놓아 볼 수 없었다.

 

 거대한 아고라에서 쭉 늘어선 열주와 아치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통로 등을 보고 비오는 거리를 조금 걸어 가니 이즈미르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시장 지역인 아나팔탈라르 거리가 시작된다. 이 거리를 쭉 지나가면 서쪽의 코낙광장으로 나간다. 사실 시장은 우리나라 시장보다 화려하다거나 크지는 않다. 단지 이 도시에서 터키의 여러 물건을 팔고 있는 오래된 거리겸 시장이다.

 시장을 구경하고 광장으로 나간다. 비는 아직도 오고 있다.

 

 

 

아나팔탈라트 거리(시장)

 

 

 

 

광장의모습 - 수많은 비둘기가 날고 있고, 사람들은 그 비둘기에게 모이를 준다.

 

 

 

광장의 시계탑

 

 이 조그마한 광장은 터키역사에 중요한 장소이다. 그리스와의 전쟁의 첫 총성이 울린 곳이며, 터키공화국이 시작된 장소이다. 해마다 10월 29일에 터키공화국 건국기념행사가 열리는 곳이다. 시계탑은 1901년에 세워졌는데 네 방향의 시계는 1차세계대전의 동맹국인 독일이 선물한 것이다. 옆에는 조그마한 자미가 있고, 목숨걸고 침략을 막은 터키시민을 기리는 동상도 있다. 바다에 바로 접해 있어 풍경이 아주 좋다하는데 오늘은 비가 오고 있다.

 

 

 이즈미르 고고학 박물관(Izmir Arkeoloji Müzesi)

 

 터키 이즈미르 시 코낙(Konak) 지구에 1927년 설립되어 1984년 현재의 위치로 옮긴 박물관으로 인근 이즈미르 아고라 등과 소아시아 지역의 그리스, 로마 유적지에서 발굴된 약 1,500점의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다.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대형 동상과 석조 흉상, 부조 등이 1층 전시홀과 박물관 입구인 중간층, 정원에 전시되어 있다. 이중 아고라에서 발굴된 포세이돈, 데메테르, 아르테미스 동상이 제법 유명하고, 위층에는 이아소스에서 발굴된 B.C.3세기경 도자기를 비롯해 여러 유물들, 그리고 복원된 B.C.3세기 무덤 등이 있고, 그 중 청동으로 제작된 운동선수의 전신상이 유명하다. 3층 전시실에는 여러 보석 세공품,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동전, 데메테르 청동 조각 등도 볼 수 있다.

 

 

이즈미르고고학박물관

 

 

 

박물관 전시실 밖에 있는 여러 석조 부조

 

 

고대터키 지역도

 

 

 

 

 

내 마음을 가장 사로잡았던 벽화

 

 

 

 

운동하는 전신상

 

 

 

 데메테르여신

 

 

 

포세이돈 상

 

 

 

 

전시중인 여러 유물들

 

 

민속학박물관

 

 고고학박물관과 경내에 마주 보고 있는 건물이 민속학박물관이다. 모르고 그냥 지나칠 수 있는데 한번 구경할 만하다. 19세기초 병원으로 사용되던 건물에 터키의 전통복장과 집안 모습, 나자르 본주우나 카펫 등을 만드는 장인의 모형들도 볼 수 있다.

 

 

 

 

 

민속학박물관 전시품

 

 

비오는 이즈미르 항구

 

 

 

 

 

 

 

비오는 이즈미르시내 - 현대화된 고층건물이 많이 눈에 뜨인다.

 

 

 

1922년 터키독립을 위해 싸운 이즈미르 시민들의 동상

 

 아산쇼르 -이름만큼은 아닌 전망대

 

 해안가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시내를 걸어서 이곳 저곳을 구경하고 다녔다. 터키 제 3의 도시라 현대화된 건물이 곳곳에 서 있고, 또 시내 곳곳에 건물을 짓고 있었다.한참 개발이 진행중인 도시였다. 거리를 걸어 다니다가 지하철을 타고 아산쇼르로 갔다.

 

 아산쇼르는 유대인 부호인 네심 레비가 1907년에 만든 엘리베이트 전망대이다. 처음에는 부근 주민들이 낮은 지대에서 높은 지대로 걸어서 올라가는 노고를 덜어주기 위해서였는데, 지금은 관광전망대로 더 유명하다. 이 전망대에서는 이즈미르 일대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렇게 돈을 주고 전망대에 들어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 주변의 전망대도 또 있고, 주변의 카페에서 보는 전망과 동일하다. 또 뛰어난 절경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아산쇼르 전경

 

 

 

 

 

아산쇼르에서 보는 이즈미르시내

 

 

아산쇼르 카페

 

 아산쇼르카페에서 차를 한잔 마시고 내려와 지하철로 숙소로 돌아 왔다,

 

 다시 이동을 해야 한다. 하루에 한번씩 짐을 풀었다가 또 짐을 사서 이동하는 일정이 그렇게 편안하지 않다. 상당히 피곤한 일이다. 하지만 터키는 너무 크다. 한 곳에서 머물면서 다른 유적을 보려면 매우 긴 길을 가야 한다. 더구나 교통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발달되어 있지 않다. 우리나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들은 한 100km 정도 떨어져 있으면 적어도 세 시간 이상 걸린다. 그래서 이동을 자주한다.

 

 파묵칼레로 간다.

파묵칼레에서는 몇 일을 머물면서 주변을 구경할 것이니 좀은 편할 것이다.

 

 

 

 

아들과 함께 터키문명 산책 - 베르가마(페르가몬)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신전과 학문의 왕국 중심지 베르가마(Bergama)

 

 트로이를 구경하고 벅찬 감정을 제대로 추스리지도 않고 새로운 문명의 흔적을 찾아 베르가마로 왔다.

 베르가마는 터키 이즈미르에서 북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아담하고 평화로운 인구 약 6만의 작은 도시다. 베르가마(Bergama)의 도시명은 페르가몬이며, 신약성경의 요한계시록에는 버가모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이 도시의 유래는 트로이 전쟁 때로 올라가지만 중요한 역사적 등장은 알렉산더 대왕이 죽자 리시마쿠스가 베르가마 산의 정상에 성을 쌓고 아크로폴리스를 형성하면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그 후 페르가몬 왕국시대로부터 로마, 비잔틴 시대에 이르기까지 왕국의 중심지로서 산업과 무역이 활발하였고, 문화와 의학의 도시로 번영하였다. 당시 페르가몬의 앞선 문명은 그리스의 델피나 아테네의 건설에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기원전 197년에 왕위를 이은 에우메네스 2세는 여러 건축물을 지었는데, 그 중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모델로 한 페르가몬도서관을 건축함으로 페르가몬을 문학과 학문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기원전 133년 페르가몬은 로마에 이양된다. 로마제국의 속주가 된 페르가몬은 인구 15만의 거대 상업도시로 번창하다가 차츰 쇠퇴하여, 7-8세기경 아랍의 침입을 받아 소도시로 전락한다. 그후 오스만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베르가마에는 소아시아 초대 일곱 교회 중 버가모 교회가 있었던 곳으로 지금도 많은 기독교인들의 성지 순례의 한 장소이기도 하다. 소아시아 최대 도시로 산꼭대기에 거대한 베르가마 왕국의 유적이 보이는데, 그 정상을 바라보노라면 마치 전설 속의 나라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크로폴리스 트리이아누스신전

 

 아침에 일어나니 날이 흐리다. 날씨가 어제는 아주 깨끗하고 맑았는데 하루 사이에 변화가 많다, 일기가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을 어쩌겠는가. 여행을 하는 도중에 비를 만난 날이 하루 이틀도 아니라 비가 오면 오는대로 날이 맑으면 맑은대로 여행을 계속할 뿐이다. 비가 오지만 우리의 여행은 계속된다.

 

 먼저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레드 홀로 가기로 하고 걸어간다. 이곳은 우리 숙소에 아주 가까이 있어 걸어가도 되는 거리였다.

 

  레드 홀 버가모 교회의 자취, 세라피스 신전

 

 성지 순례자들이 소아시아 7대 교회의 하나인 버가모 교회로 찾아오는 레드 홀(일명 크즐 아블루) 이다. 처음에는 태양의 신 세라피스를 위한 신전이었는데 신전의 레드 홀(Red Hall)이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교회의 유적으로 남아 있다. 사실 이 신전은 2세기에 로마 하드리아누스황제가 건설한 것으로 이집트의 신 세라피스, 이시스, 하르포클라스 등 고대 이집트 신을 모셨던 곳이다. 뒤에 그리스도교 공인 후에 버가모 기념교회로 바뀌었고, 비잔틴시대에는 사도 요한교회로 사용되었다. 붉은 벽돌로 지어져 붉은 정원이란 뜻의 '크즐 아블루'라고도 불린다. 가로 100, 세로 260, 높이도 20의 초대형신전으로 규모가 매우 웅장하였으나, 지금은 대부분이 소실되어 건축물의 벽채만 남아 있다. 하지만 그 벽채의 모습만으로도 이 신전의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신전은 기독교가 공인된 후에 버가모 교회로 사용되었다. 요한묵시록 212-13절에 페르가몬 신자들에게 보내는 말씀에 "나는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안다. 곧 사탄의 왕좌가 있는 곳이다. 그렇지만 너는 내 이름을 굳게 지키고 있다. 나의 충실한 증인 안티파스가 사탄이 사는 너의 고을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너는 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한국천주교주교회의 번역 성경에서)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버가모 교회의 교인들은 신전이 산재해 있는 도시, 우상 숭배가 극심한 상황에서 순교자를 배출하였고, 신도들이 끝까지 그리스도의 신앙을 저버리지 않았음을 말해 준다. 여기서 순교한 안티파스는 버가모 교회의 초대 감독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지금은 이 건물의 일부가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신전에서 교회로, 다시 이슬람 사원으로, 역사의 아이러니를 보는 듯하다.

 

 

레드 홀 전경

 

 

레드 홀 표지(이집트 신을 모신 신전이라 설명)

 

 

 

 

엄청난 규모를 복원 중이다

 

 

 

레드 홀 설명도

 

 

복원 중인 모습

 

 

레드 홀 전체 설명

 

 

 

 

 

 

아침부터 중국인 단체 관광객이 왔다. 요즈음은 어디를 가도 중국인 단체 관광객을 본다.

 

 

 

 

 

곳곳에 나뒹구는 유물들

 

 

 

 

신전의 여러 모습

 

 

 

세크메트 (Sachmet)는 이집트 신화에 등장하는 암사자 머리를 한 파괴의 여신이다.

 

 

 

신전의 전경

 

 거대한 신전을 구경하고 어디부터 먼저 갈까?하고 아들과 의논하여 아크로폴리스로 가기로 했다. 비가 오는 거리를 구경하면서 걸어서 아크로폴리스로 갔다. 아크로폴리스는 걸어 올라가는 길도 있으나, 시간도 많이 걸리고 더구나 비가 제법 많이 내려 케이블카를 타기로 했다. 케이블카를 타고 가면 10분도 걸리지 않는데 걸어가면 한시간도 더 걸린다.

 

 

 고대의 영광, 페르가몬 아크로폴리스

 

 산정(山頂)에 세워진 왕궁, 아크로폴리스는 경사가 심한 언덕위에 세워졌다. 아크로폴리스는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요새를 말하는 것으로 아크로는 높다는 뜻을 가졌다. 지형적으로 천연적인 요새임을 말해주는 산정에 오르니 베르가마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산 정상의 가파른 언덕 끝에 위치한 아크로폴리스는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성채의 인상을 강하게 풍기고 있으며, 고대에는 적들에 의해 점령당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산 정상의 아크로폴리스 비록 지진과 전쟁으로 많이 파괴되어 기둥이나 기단만 남아 있는 것이 많으나, 아테네나 알렉산드리아에 비교될 정도로 엄청난 규모의 사원과 신전, 그리고 도서관 등을 건설하여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가 된 곳이었다. 특히 50만권이나 있었다는 도서관이나, 만명이상을 수용할 수 있다는 야외 극장을 볼 때 소아시아 최대 도시로 일컫는 페르가몬 왕국을 상상할 수 있다.

 아크로폴리스의 많은 신전은 페르가몬 왕국의 화려했던 영광을 말해 주고 있다. 고대에 지어진 웅장한 도서관은 신전 바로 옆에 있다. 낮은 테라스에 제우스 신전이 있던 장소에 현재는 3그루의 소나무가 서 있다. 특히 이 아크로폴리스에는 헬레니즘 극장이 위용을 자랑하며 있는 모습은 장관이다. 그리고 수 많은 신전을 보면서 아무리 신들의 나라라고 하지만, 어떻게 이토록 많은 신전들을 지어 신들에게 봉헌했을까? 하는 궁금증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아크로폴리스를 올라가는 케이블카

 

 

 

 

케이믈카에서 보는 옛 유적과 베르가마 시내

 

 

 

 

케이블카에서 내려 아크로폴리스 올라가는 입구와 아크로폴리스 모형도

 

 

이정표

 

 

 

헤로온(heroon) 신격화 혹은 반신격화된 죽은자에게 용납된 신사 또는 예배소.

 

 그리스 사람드은 영웅들이 죽으면 그들을 신격화하여 숭배햇는데, 이 영웅들을 위해 지은 건물을 헤로온이라 일컫는다. 이 곳은 아틸레스 1세와 에메네우스 2세를 숭배하기 위해 지었다고 한다.

 

 

 

여러 유적의 이정표

 

 

 

 

폐허의 돌 무더기만 남아 있다.

 

 

 

 

제우스 신전 터

 

 페르가몬의 대제단은 제우스(Zeus) 신을 숭배하기 위해 기원전 164년~156년에 세운 것이다. 지금 이곳에는 큰 소나무 세 그루만 서 있다.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은 모두 베를린 페르가몬박물관에 있다. 역사학에 관심이 많았던 독일인 칼 휴만이 우연하게 이곳을 발굴하여 모두 독일로 가져 갔다. 무상한 세월을 이야기하는 소나무만이 이 현장에서 옛날의 영화롭던 자취를 지키고 있다.

 

 페르가몬 유적 발굴은 당시 독일이 국가적으로 추진하던 대사업이었다. 독일제국의 초대 제상 비스마르크는 독일을 강대국으로 만들기 위해 문화정책에 역점을 두었다. 이에 페르가몬 대제단과 대제단을 둘러싼 프리즈를 전시할 공간도 새로 건축했다. 그 공간이 바로 베를린에서 가장 많은 방문객을 자랑하는 페르가몬 박물관이다. 페르가몬의 대제단 계단을 올라가면 위에는 제단 회의실(Altar Chamber)이 등장한다. 전시관의 대제단은 높이 9.6 m 둘레는 36.4m에 이른다. 프리즈(Frieze·고전 건축에서 기둥머리가 받치고 있는 세 부분 중 가운데)의 총 길이는 113m이다.

 

 언젠가는 이 박물관에서 아크로폴리스의 진짜 유물을 보는 날이 있기를 기대한다.

 

 

멀리 보이는 원형 야외극장

 

 제우스신전터를 뒤로 하고 내려가서 야외극장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가는 도중에 여러 유적들이 길가에 뒹굴고 있다. 좁은 길을 따라 계속 가니 거대한 극장이 나온다.

 

 

 

 

 

원형 야외극장

 

 에우메네스 2세가 건립한 약 1만석 이상의 규모를 자랑하는 야외극장으로 약 80열의 관객석은 가파르게 경사가 진 것도 특징이다. 이 극장은 음향시성이 아주 뛰어나게 갖추어졌다고 한다. 무대에 선 배우가 보통의 목소리로 말해도 맨 위의 관객이 똑똑하게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극장을 중심으로 여러 유적지를 쉽게 갈 수 있다. 또 막힘이 없이 앞이 탁 트이어 일대를 조망할 수 있는 곳에 극장이 있어 관람을 하기에는 일품이었을 것이다. 

 

 

 

야외극장에서 보는 베르가마시내

 

 

극장과 테라스 설명

 

 

 

 

 

 

 

극장의 여러 모습

 

 

 

극장 위에 있는 극장으로 내려가는 입구

 

 극장의 맨 위에는 극장으로 내려가는 통로가 있다. 나는 극장 아래에서 올라 왔기에 처음에는 몰랐다. 하지만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 보니 여러 신전에서 극장으로 통하는 길이 있었다. 극장 위에는 디오니소스 신전, 아테네신전, 제우스신전, 트라이아누스신전 등이 극장을 둥글게 싸고 있는 구조다.

 

 이번 여행을 하면서 나는 그리스부터 터키에서 많은 극장을 보고 매료되었다. 수많은 건축물과 유물을 보았고, 문화사적으로 중요한 유적지나 건축물들을 보았으나 아직도 나의 머리에 가슴에는 극장의 모습이 강하게 남아 있다. 원형극장이 무엇이 나를 사로 잡았을가? 하고 생각해 보니 아무런 이유도 없다. 그저 내 마음에 들었을 뿐이다.

 

 

 

페르가몬 도서관

 

 페르가몬 도서관 장서가 50만권이 있었다는 큰 규모다. 그 당시에 50만권이나 되는 장서를 가진다는 것이 좀 믿어지지 않는다. 인쇄술이 발달한 오늘날도 웬만한 도서관의 장서가 50만권이 되기가 어렵는데 종이도 제대로 만들지 못하고 파피루스에 글을 적었고, 이집트가 파피루스의 수출을 금지하자 양피지를 꿰매어 책을 만들었다 하는데 50만권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지금은 그 자취를 조금도 엿볼 수 없어 아쉽다.

 

 

트라이아누스 신전 설명도

 

 

 

 

 

이 곳이 트라이아누스 신전터라는 설명

 

 

 

트리이아누스 성역 설명

 

 

 

 

 

 

 현재 이 아크로폴리스에는 복원 작업이 계속되고 있는데 이 트리이아누스신전은 아크로폴리스에서 가장 높은 곳에서 페르가몬 왕국의 상징적 건물로 자리하고 있다. 원래는 18m짜리의 기둥이 54개가 있어 지붕을 받치고 있었다 하는데 현재의 것은 발굴 도중에 다시 세워진 것이다.

 

 이 거대한 규모의 아크로폴리스를 세세하게 돌아보기에는 시간이 너무 모자란다. 더구나 비가 오고 바람도 불어 폐허와 같이 보이는 여러 왕궁터와 아테네신전 터 등을 눈으로 보고 길을 따라 내려 왔다. 너무나 먼 과거여행을 한 것 같다. 이 곳에는 먼 시간의 미로가 있어 페르가몬왕국이 나를 과거로 이끌어가는 느낌이 들 정도로 매혹적인 곳이다.

 

 아크로폴리스를 내려 오니 비가 제법 세차게 온다. 길가에서 차를 기다리고 있으니 아마도 동네 노인들인 듯한 사람들이 천막을 치고 꿀을 팔고 있으며 들어오라고 한다. 들어가니 간이 정류소 같았다. 그들에게 부탁하여 택시를 불러 달라고 하고 꿀을 한병 구입했는데 우리 우유팩 정도의 병인데 값이 얼마냐 하면 우리 돈으로 3,000원 정도였다. 너무나 싼 천연 꿀이다. 이 꿀이 요긴하게 우리가 저녁에 피로를 푸는데 사용되었다.

 

 택시를 타고 간 곳이 베르가마고고학박물관이다, 현재 페르가몬 유적과 부근의 여러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베르가마고고학박물관에는 헬레니즘 예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페르가몬 조각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1871년 발굴을 시작한 독일 발굴단이 유물 거의 전부를 독일로 가져갔다. 이들이 현재 베를린 페르가몬박물관의 자랑거리다. 하지만 그후에 페르가몬 및 그 주변에서 출토한 고대유품은 베르가마의 고고미술관에 수장되어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안타깝게도 아크로폴리스의 가장 중요한 제우스 신전을 우리는 보지 못한다. 우리가 보는 것은 발굴 당시의 사진과 모형뿐이다. 베를린에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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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에는 승리의 여신 니케와 아스클레피온에게 바치는 황금귀 등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민속학 파트에서는 베르가마의 특산품 카펫 등을 볼 수 있다.

 

 

베르가마고고학박물관 전경

 

 

 

 

 

여러 대리석 부조

 

 

 

 

민속학 파트의 카펫과 마네킹

 

 

 

 

 

 

승리의 여신 니케상

 

 

 

 

 

 

 

 

 

 

 

각종 전시물

 

 

 

 

 

 

 

 

 

제우스신전 모형도와 각종 사진들

 

 박물관을 나오니 비가 그쳤다. 비가 그치고 조금 있으니 맑은 하늘이 나타난다. 길을 따라 걸으며 아크로폴리스에서 마주 보였던 아스클레피온으로 간다.

 

 

 세계 최초의 종합병원 아스클레피온

 

 아스클레피온의 이름은 그리스 신화의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Asclepius)에서 유래하며, 그에게 봉헌된 신전으로 본래는 신전의 기능만 했으나 이 지역 출신의 의사이자 알렉산드리아, 그리스 등지에서 의술을 익힌 갈렌(Galen)에 의해 의료 시설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세계 최초로 정신 요법을 중심으로 한 치료 방법을 써서, 현대적 의미로 일반 치료는 물론 명상 요법, 음악 요법, 목욕 요법, 심리 요법, 운동 요법, 일광욕, 맨발 걷기 요법 다양한 치료 및 해몽을 통한 심리 분석이 이 곳에서 시술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 환자들을 위하여 이처럼 다양한 요법의 치료 방법을 이용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이곳의 입구에는 신의 이름으로 말하노니 죽음은 이곳에 들어갈 수 없다.”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고 하며, 수백년 동안 공식적으로는 단 한명의 사망자도 나오지 않았다고 말하니 ??????

 

 아스클레피온으로 들어가는 성스러운 길은 폭 20, 길이 820로 길게 뻗어 있으며, 길 양편에는 15의 석주가 세워져 있어 거대한 도시국가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고 했는데, 지금은 약 150m의 일부 흔적만 남아 있다. 성스러운 길이 끝나는 곳에는 뱀 조각이 새겨진 원기둥의 기단이 있다. 허물을 벗는 뱀은 과거의 병이나 아픔을 벗어 버리고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뜻한다고 한다. 신전의 전체 규모는 남북으로 250m, 동서로 200m에 달하며 중앙 건물은 동쪽을 제외한 모든 면이 회랑으로 둘러싸여 있다. 내부에는 아스클레피오스 신전, 회복의 신 텔레스포루스 신전, 도서관, 목욕탕 등이 있으며, 건물 북쪽 회랑 바깥으로 음악요법을 진행하던 작은 로마 원형 극장이 있다. 광장 가운데에는 당시 치료에 사용한 성스러운 샘물이 남아 있다. 치료실의 남쪽에는 일광욕을 위한 테라스와 수로가 설치되어 있다. 동쪽 면은 페르가몬 시가지로 향하는 대로로 이어져 있다.

 

 이 병원 건물은 지진으로 대파되었으나 아직도 그 잔해가 남아 웅장한 규모였음을 한눈에 보여주고 있다.

 

 1967년에 발굴된 이 건축물은 기원전 4세기경에 건축된 것으로 알려져 있고, 기원 후 4세기경까지 약 800년간 소아시아에서 의료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도 이곳에서 일했다고 하니 보통의 병원은 아닌 게 분명했다.

 

 

 

아스클레피온 입구

 

 

유네스코지정 표지

 

 

 

목욕탕 - 성스러운 길로 들어가기 전에 몸을 깨끗하게 씻어야 한다.

 

 

 

페르가몬과 아스클레피온 설명도

 

 

이정표

 

 

 

 

 

성스러운 길

 

 

성스러운 길가에 있는 Heroon

 

 

성스러운 길가의 유적들

 

 

 

제우스신전 이정표와 설명도

 

 

제우스신전

 

 

성스러운 길이 끝나는 위치에서의 이정표

 

 

성스러운 길이 끝나고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

 

 

 

극장 앞 도서관 유적과 긴 열주

 

 

 

 

 

 

 

 

 

병원의 여러 유적들

 

 

지하통로와 치료건물 이정표

 

 

지하통로입구

 

 

치료건물모형도와 설명

 

 

 

 

성스러운 샘물 - 이물로 목욕을 하면 병이 낫는다고 한다.

 

 

 

     Incubation Room(배양실)
 
 

 

작은 노천 목욕장

 

 

극장설명도

 

 

음악요법으로 환자를 치료하기 위한 극장 전경

 

 

 

 

 

극장

 

 

성스러운 길의 거대한 열주들

 

 

이정표

 

 

 

성스러운 길이 끝나는 곳

 

 

 

아스클레피온성역 설명도

 

 

 

성스러운 길에 늘어서 있는 열주들

 

 

멀리 보이는 아크로폴리스

 

 베르가마는 옛 페르가몬왕국의 영화로움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비록 지금은 폐허가 되어 있으나 옛날의 흔적을 여실히 볼 수 있다. 세월의 흐름은 모든 것을 뛰어 넘는 것같다. 아무리 번창하던 도시라도 세월은 어쩔 수 없다. 역사의 흐름도 있지만 잦은 자연의 변화로 도시가 무너지고 파괴되며 흙더미에 감추어진다.

 

 하지만 인간은 위대하다. 신화로만 알려지거나, 혹은 아렷하게 역사로 전해질 뿐인 이야기를 위대한 인간은 그것을 진실로 알고 도전하여 새로운 사실을 밝혀 내었다. 그들에 노고에 의해 보통의 우리는 보고 즐길뿐이다.

 

 트로이나 크노소스, 미케네 또 이 페르가몬 모두 역사적 사실로 인식하고 그들의 꿈을 실현한 사람들의 공로다. 물론 그들을 발굴을 폄하하는 일도 있지만 우리는 그들의 공로를 인정해야 한다.

 

 페르가몬의 위대한 유적지를 보고 꿈꾸듯이 하루를 정리했다.

 

 내일은 이즈미르를 또 구경할 것이다.

아들과 함께 터키문명 산책 - 차낙 칼레(트로이)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신들의 전쟁에서 인간의 역사로

 

 드디어 일찍부터 오기를 기대했던 트로이에 왔다.

내가 트로이를 동경했던게 언제였나? 50여년 전에 일리아드 오딧세이를 처음에는 소설로 읽었을 때, 이 이야기가 실제 역사의 현장을 호머가 대서사시로 썼고, 슐리이만에 의해 트로이가 발굴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언젠가는 꼭 트로이를 내 눈으로 보고 느껴볼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제야 트로이를 오게 되었다. 이번 여행을 계획하면서 저번에 터키일대를 여행할 때 트로이를 보지 못한 것이 너무나 아쉬웠기에 꼭 트로이를 가자고 아들에게 말했다. 아들이 일정 관계상 좀 어렵다고 했지만 내가 강권하여 트로이를 보는 여정으로 바꾸었다. 물론 아들도 트로이가 보고 싶었다 한다.

 

 카파도키아에서 버스로 약 5시간을 걸려서 앙카라에 도착했다. 앙카라공항에서 밤 11시 40분 비행기로 차낙 칼레에 도착하니 새벽 1시 30분이다. 차낙칼레(Çanakkale)항구도시로 차낙칼레 주의 주도이며, 유럽과 아시아를 이어주는 다르다넬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킬리트바히르(Kilitbahir) 와 마주보고 있다. 차낙칼레는 고대부터 해상 교통수단 및 해군 시설이 발달하여 역사적으로 중요한 해군 기지의 역할을 해 왔다. 특히 차낙칼레는 고대 그리스의 영웅 서사시에 나오는 트로이로 향하는 항구 도시이기도 하다. 1차 세계 대전 때 방어 진지 역할을 한 치멘리크 요새(Çimenlik Fortress)가 이곳에 있다 시 외곽으로는 고대 유적지가 많이 있는데, 특히 남쪽의 트로이(Troy)가 유명하며, 해안에는 브래드 피터가 주연한 영화 트로이의 대형 목마가 세워져 있으며, 최근에는 관광지로도 각광받고 있다. . 

 

 빨리 호텔을 찾아가서 잠을 자고 일어나 드디어 트로이로 향했다. 트로이는 교통편이 좀 좋지 않아 호텔에 부탁하여 택시를 불렀다. 터키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없는 버스를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택시를 타기를 권하고 싶다. 택시비는 우리보다 엄청 싸다.

트로이까지 왕복 30Km도 더 되는 거리인데 우리가 트로이를 관광할 때까지 기다려 주고 우리 돈으로 약 50,000원 정도밖에 하지 않는다. 편할뿐만 아니라 시간이 엄청 절약된다. 여행에서는 시간을 절약하는 것이 가장 큰 일이다. 물론 비용이 너무 많이 들면 시간을 절약하는 의미가 없지만......

 

 호머에게는 일리오스라 불리었던 트로이는 아나톨리아 지방 북서부, 스카만데르 강 북쪽과 헬레스폰트 해협의 남쪽 어귀로부터 약 6.4킬로미터 떨어진 트로아스 평야 히사를리크 언덕에 있다. 바다에서 6km 정도 떨어져 있어 바다로부터의 습격을 받을 위험은 적었으나 바다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에게해와 흑해를 잇는 헬레스폰투스(다르다넬스 해협)의 입구에 있어, 옛날부터 번영을 누려왔다.

 

 이 트로이의 발굴은 너무 잘 알려져 있어 간단히만 말한다.

어릴 때 호머의 일리아드와 오딧세이를 읽고 이것이 신화가 아니라 역사라고 믿은 독일 고고학자 슐리이만이 18704, 이 지역에서 처음 발굴을 시작하여 18736월 드디어 트로이의 유적을 발견했다. 그후 1930년대 칼버트의 연구와 슐리이만의 노력으로 발견된 트로이는 도시 위에 도시가 건설되어 있는 대단히 복잡한 복합 유적이었다. 유적은 9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상세한 설명은 줄인다. .

 

 트로이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슐리만은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 그는 호머의 서사시에 등장하는 시대만을 염두에 두고 발굴했기 때문에 B.C. 2000년 이후의 유적은 파괴하고 말았다. 그래서 그리스 이후의 유적은 영원히 잃어버리게 되었다.

 

 최초 발굴 당시 슐리이만은 제2층의 트로이를 호메로스가 말한 트로이라고 단정했으나, 그후 연구를 통해 트로이 전쟁의 무대는 제7층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당시 트로이는 미케네 문화권에 속했으며, 주변 해협을 지배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여서 무역으로 번영을 누렸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트로이는 지금도 계속 조사 발굴이 이루어지고 있다.

 

 

 

트로이의 목마

 

 

 

트로이 오데온

 

트로이에 도착하여 택시 기사에게 기다리라 하고 구경을 나섰다. 처음 눈에 띄는 것이 거대한 목마다. 물론 조금도 고증이 되지는 않은 것이지만 그냥 트로이를 말할 때 상징적으로 이야기 하는 것이 목마다. 목마를 구경하고 본격적으로 트로이유적을 구경하러 간다.

트로이는 폐허다. 온전하게 갖추어진 유적은 없다. 그러나 여기는 트로이다.

 

 

트로이유적지 설명판

 

 

 

 

트로이유적 입구에 있는 트로이 목마

 

사람들은 말한다. 차낙칼레항구에 서 있는 브래드피터 주연의 영화 '트로이'에 나오는 목마(뒤에 볼 수 있음)가 더 잘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나는 이 목마가 더 친근감이 들었다. 영화의 목마는 너무 세련된 모습이다. 과연 그 시대에 그렇게 꾸밈을 만들었을까? 그냥 거대한 나무 말을 만들었지 않았을까? 과연 어느 것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목마에 대한 기록만 있지 어떤 모양인지는 모른다. 아니 진짜로 목마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나의 이야기일 뿐이다.

 

 

트로이의 기후에 대한 설명

 

 

입구에 있는 옛 유물들

 

 

길 표시판

 

 

호머가 말한 일이오스 표시

 

 

 

 

 

 

동쪽벽과 문 - 트로이 6기에 만들어진 성벽의 흔적이다.

 

트로이 6기에 만들어진 도시 성벽이다.  트로이 6기는 기원전 1800년부터 1275년까지로 추정된다.

 

 

트로이의 동 식물 구성 설명도

 

 

북동쪽 성채 설명도

 

 

 

아테나신전 설명도

 

트로이 8기에 지어진 신전이라고 하나 거의 흔적도 볼 수가 없어 아쉽다.

 

 

트로이의 지층을 나타내는 이정표

 

 

 

길가에 뒹굴고 있는 유물들

 

 

성벽설명도

 

 

 

메가톤

 

트로이 2기 시대에 만들어진 진흙 벽돌 구조물로 지금은 유실을 방지하기 위해서 임시로 간이 지붕을 덮어 놓았다.

 

 

 

요새벽

 

 

 

귀족거주지 설명

 

 

 

슐리이만의 참호

 

이곳은 트로이 유적지를 처음으로 발견한 독일의 슐리이만 참호라고 부르는 곳으로, 트로이 1시기(기원전 3000년)의 거주지로 추정되며, 그가 당시에 트로이의 프리아모스 유적을 발굴하기 위하여 무분별하게 파헤쳐 놓았다.

 

 

트로이 각 층의 설명판

 

 

 

 트로이 유적지는 기원전 3000년전 청동기시대부터 로마시대까지의 유적 층이 겹겹이 쌓여 있다. 시기별로 9층으로 표시해 놓았다.

 

 

 

 

경사로

 

트로이 2기의 유적으로 성안으로 들어가는 경사로로 대리석으로 포장되어 있다. 이곳이 슐리만이 프리아모스의 보물이라고 불리는 유물을 발견한 장소이다. 1992년에 처음 발견된 상태로 원형이 복원되었다고 한다.

 

 

 

 

 

 

건물 6

 

트로이 6기의 건물의 일부로 추정되는 구조물로 이 곳에서 큰 용기들이 발굴되었기에 부엌으로 짐작한다.

 

 

 

 

 

성역

 

 유적의 남서쪽에 있는 성역은 의식을 행하던 곳이다. 최근에 발굴된 당시 제단으로 사용되었던 장소와 우물을 볼 수 있다.

 

 

 

 

오데온

 

 9기에 만들어진 로마 극장으로 거의 완전하게 복원되어 있다. 마지막 9기는 기원전 150년경부터 로마시대였던 서기 500년까지로 추정된다. 이곳은 로마의 시조인 아이네이아스가 태어난 곳으로 알려져 로마황제들의 관심이 많았던 곳이다. 이 오데온과 극장은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지어졌다고 한다.  한 때는 번창했으나 차츰 쇠퇴하다가 5세기 말경 지진에 의해 파괴되고 폐허로 방치되어 있었다.

 

 그리스에서 엄청난 규모의 원형극장만 보다가 조그마한 오데온을 보니 더 정감이 간다.

 

 

트로이 로고

 

 

 

 

 

남쪽문

성안의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였던 곳으로 추정되며 중간에 수로의 흔적이 있다.

 

 

트로이 단층의 구조에 대한 물음

 

 

 트로이 전쟁

 

 이 전쟁이 신화냐? 역사냐? 하는 의문은 슐리이만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질문이었다. 전쟁의 시작은 신화에 기초한다. 어느 날 여신 헤라와 아테나, 아프로디테가 서로 자신이 가장 아름답다고 다투는 일이 있었다. 심판을 맡았던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는 아프로디테의 손을 들어주고, 그 대가로 그리스 제일의 미녀 헬레네를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유부녀였던 핼레네를 빼앗긴 남편이었던 메넬라오스는 아내를 되찾기 위해 미케네의 왕 아가메논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대규모 원정군을 이끌고 트로이로 쳐들어갔다. 수 많은 영웅과 신들이 양쪽의 군대에 참가하여 전투를 벌이고 여러 신화적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후 10년 동안 양측의 싸움으로 수많은 영웅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갔다. 그러나 그리스는 '트로이의 목마' 작전이 성공을 거두어 마침내 길고도 지루했던 전쟁은 끝을 맺게 되었다.

 

 이것이 흔히 세상에서 이야기하는 '트로이 전쟁'을 아주 간단하게 요약한 줄거리다.

 

 과연 트로이 전쟁은 헬레나 때문에 일어났을까? 정말 신들이 인간의 전쟁에 개입한 것일까? 호머가 역사에 기초하여 꾸민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된다. 트로이는 교통의 요충지로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교역을 하는데 가장 큰 불만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가메논을 중심으로 한 미케네와 그리스 연합군과 아나톨리아의 트로이군이 해상무역권을 두고 벌인 전쟁이라는 것이 역사의 진실이 아닌가라고 역사가들은 말한다.

 

  호머의 대서사시 일리아스오디세이아에도 등장하는 트로이 전쟁은 실제 유적이 발굴되기 전까지만 해도 신화 속의 이야기라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무언가 사실에 기초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마침내 땅 속에 묻혀 있던 전설 속의 트로이를 발견한 사람이 있었다. 그가 하인리히 슐리이만으로 고고학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굴을 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후에 미케네도 발견하여 고고학 역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1930년대에 미국의 블레겐이 트로이 유적에 대한 과학적인 재조사를 시행한 결과, 트로이전쟁이 사실성을 갖는다면 9층으로 이루어진 유적 가운데 BC 1250년의 것으로 추정되는 제7A가 여기에 해당한다고 주장하였다.

 

 트로이 유적을 보고 나니 큰 감동이다. 사람들은 흔히 맣했다. 트로이에 가 보았자 폐허만 볼 뿐이고 실망한다고. 물론 트로이는 폐허다. 하지만 역사의 엄청난 현장이다. 트로이를 보면서 영화에서 보던 트로이의 한 장면을 실감하고, 그리스연합군과 맞서고 있는 트로이 군대를 생각해 본다. 이 역사의 현장이 지금 폐허면 어떠랴. 우리는 여기에서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으면 가장 복받은 것이다.

 

 트로이를 보고 나서 차낙칼레의 모든 것은 거저 나에게 지나가는 과정에 불과했다.

 

트로이를 보고 난 후 시시내 항구로 가서 차낙칼레 일대를 구경했다.

 

 

이스켈레광장과 시계탑 - 1897년에 건립된 시계탑

 

 

 

 

 

 

 

 

항구 주변의 모습

 

 항구 주변에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시가지가 항구와 연결되어 있어서인지 사람들이 항구 주변에 즐비하게 늘어선 카페에 앉아 담소를 나누거나 망중한을 즐기고 있다. 터키 사람들은 차를 참 좋아한다. 수시로 차를 마시면서 삶의 여유를 즐기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바쁘게만 움직이는 우리나라 사람의 눈으로는 좀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차낙칼레 항구 주변에 있는 브래드 피터 주연의 영화 트로이에 나오는 트로이 목마

 

 

 

트로이목마 주위에 있는 고대트로이 모형

 

 

차낙칼레 전투 기념 전시관

 

 

 

1934년 안작데이(4월 25일) 기념사 중에서 - 아타튀르크 -

 

당신 아들을 먼 나라로 보낸 어머니들

눈물을 닦으라.

당신의 아들은 우리의 품속에 편안하게 누웠다.

생명을 이 땅에 바쳤기에 그들도 우리의 아들이다.

 

 

 

 

기념관의 전시물들

 

점심 때가 되어 점심을 먹으려니 아들이 또 자기가 찾아 둔 곳이 있다며 가자 한다. 따라가니 길가의 노천음식점이다. '샤르달예(Sardalye)'라는 이름의 음식점인데 식사시간이 되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곳이었다. 여러 가지의 해산물(정어리, 홍합, 오징어 등등)을 튀겨서 빵에 넣어 주기도 하고, 따로 주기도 한다. 간단한 음식으로 사람들이 간편하게 먹을 수 있고 저렴하게 한끼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가게의 모습

 

 

 

메뉴표와 조리하는 모습

 

 

 

 

주문한 음식

 

 거리를 거닐며 항구일대를 구경하고 차낙칼레 군사박물관[Çanakkale Military Museum, Çanakkale Naval Museum]으로 갔다. 차낙칼레 군사박물관은 차낙칼레시 중심부 치멘리크 요새(Çimenlik Fortress)에 있는 박물관으로 오스만투르크 시대와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차낙칼레 지역에서 벌어진 주요 해전(海戰)에 관한 자료를 주로 전시하고 있으며, 해군 관련 유물 및 전함을 소장하고 있다. 시멘리크 요새는 술탄 메메드 2(Mehmet II)가 다르다넬스 해협을 오가는 선박을 통제하기 위해 1452년에 세운 것으로, 매우 견고하여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주요 전시물은 터키 해군 및 1차 세계대전 당시 최대 접전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겔리볼루(갈리폴리) 전투에 관한 자료들이다. 겔리볼루 전투는 1차 세계대전 때 터키와 영국 프랑스의 연합군 함대가 겔리볼루 반도에서 접전을 벌인 전투로 양측 모두 25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낸 격렬한 전투 끝에 터키 군대가 승리했다. 차낙칼레 군사 박물관에는 전쟁 당시 사용했던 군함 <누스라트(Nusrat)> 호를 비롯해 적군이었던 연합군의 함선이 야외 전시장에 잘 보존되어 전시되어 있다. 이외에 당시 전투에서 사용된 무기와 함포, 군함 모형, 군사 작전용 지도 등 다양한 해군 자료들이 전시하고 있다.

 

 

 

 

박물관입구

 

이 박물관은 특이하게 해군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입구를 들어가려니 군인들이 있으며 어디에서 왔는지 물어 코리아라고 하니 반가워 한다. 아마 그들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국가라 더 반가운 모양이다. 터키를 돌아다니며 한국에서 욌다고 하며 사람들이 참으로 반갑게 대해 주었다. 우리 한국전쟁에 그들이 참전했는데 우리가 더 고마워 해야 하는데 오히려 그들이 반가워 한다.

 

 

1915년 차낙칼레 해전 기념비

 

 이 곳이 차낙칼레이기에 차낙칼레 전투라고도 하지만 정확히는 갈리폴리전투다. 이 전투는 열악한 조건의 터키가 거대한 연합군을 물리친 전투로 전쟁사에 기록되어 있는 유명한 전투다. 전투의 상세한 설명은 생략하고 그 당시 터키의 무스타파 케말대령(뒤에 아타튀르크가 됨)이 장병들에게 한 연설로 그 전투를 대신한다.

 

 "우리가 무너지면 오스만 제국 본국이 무너지고, 우리가 이젠 노예가 되는 생활이 기다리고 있다. 제군들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오늘은 살아남기 위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죽기 위해서 싸워야 한다. 그러나 이는 개죽음이 아니다. 오늘 우리들의 죽음이 조국을 지키는 밑거름이 될 것이며 그대들 이름은 남을 것이다. 나 역시 여기에서 무너지면 제군들과 같이 시체로 뒹굴고 있으리라."

 

 

 

야외에 전시되어 있는 전시물들

 

 

치멘리크성채

 

 이 성채안에는 이 주변에 있었던 여러 전쟁의 모습을 보여 준다. 특히 카낙칼레 전투를 그들은 상당히 자랑스럽게 여기기에 아주 상세하게 영상까지 도원하여 설명한다. 한번쯤은 구경할 만하다.

 

 

군사박물관에서 보는 해협 건너편 모습

 

 박물관을 나와 거리를 돌아 다니며 구경을 하다 카페에 앉아 휴식을 하면서 항구를 구경하며 오늘 보았던 트로이에 대해 아들과 이야기를 한다. 서로의 관심과 취향이 같다는 것이 여행을 하는데는 참으로 좋은 일이다. 사실 역사에 관심을 가질 수는 있지만 고고학적 유적이나 유물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그런데 아들과 나는 좀 특이하게 이런 점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 힘께 여행하면 이야기가 끊이지를 않는다.

 

 휴식을 취하닥가 오늘 다시 베르가마로 가야 하기에 자리에서 일어나 숙소로 간다.

아들과 함께 터키문명 산책 - 카파도키아 4 (괴레메 야외박물관)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이제 카파도키아의 마지막 날이다.

 

 그 동안 유보해 놓았던 괴레메야외박물관으로 가기로 했다. 괴레메야외박물관은 괴레메시내에서 얼마 멀지 않기에 우리는 우리 특기를 살려 걸으면서 주변의 풍경을 구경하면서 갔다. 몇 일간을 보는 풍경이지만 매번 볼 때마다 기이하게 보이고 우리 지구행성의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닌 것같은 기분이 든다. 여떻게 이런 자연이 만들어졌을까? 자연의 경이로움에 감탄할 뿐이다. 거대한 자연에 비해 조그마한 미물에 불과한 우리 인간이 어떻게 알겠는가? 그저 놀랄 뿐이다.

 

 야외박물관까지 계속 보아왔던 광경을 또 다시 보며 한가로이 약 한 시간 정도를 걸어서 야외박물관에 도착했다.(빨리 걸으면 30분도 안 걸리는 거리다) 카파도키아에 오는 관광객은 다른 곳은 안가도 모두 이곳을 거쳐 간다. 그러다 보니 비수기이지만 너무 유명한 곳이라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카파도키아 기독교의 성지 괴레메야외박물관에는 평균 30m 높이의 돌기둥이 늘어서 있는데, 초기 기독교시대부터 신자들의 공동체가 만들어졌던 곳으로 초기 기독교인들이 이 돌기둥을 파서 교회와 거주공간을 만들어 생활했다. 이 곳에는 365개의 교회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 약 30개의 교회가 공개되고 있다. 교회의 모양은 카파도키아의 동굴교회와 비슷하고 단순하지만 이곳의 내부 벽에는 예수의 생애 등을 기록한 프레스코 벽화를 비롯해  초기 기독교 시대의 십자가와 천국의 대추나무, 석류와 신앙고백의 상징인 물고기 그림 등이 많이 있다. 8-9세기의 성상파괴운동으로 많은 성화가 파괴되었다가 다시 그위에 나무나 기하학적 문양, 물고기 등 여러 문양을 그렸다가, 중세이후 다시 성화가 그려졌다고 한다. 이 박물관에는 다양한 형태의 프레스코 성화가 가득한데 내부사진을 찍지 못하게 막는 곳이 대부분이다. 그저 눈으로만 보고 다시 오라는 것같다. 물론 성화를 보존하기 위한 한 방법이지만 관람을 하는 나는 아쉬운 마음이 너무 크다.

 

 

괴레메야외박물관 전경

 

 

 

 

 

박물관으로 가는 도중에 보는 풍경

 

 

 

괴레메야외박물관 주변 모습

 

 

괴레메야외박물관 표지

 

 

괴레메야외박물관 수도원과 교회 설명도

 

 

 

성 바실리오스 예배당 설명

 

박물관 입구쪽에 있어 제일 먼저 들어간 곳이다. 장식이 거의 없고 예수의 상반신이 그려진 프레스코가 있으나 많이 퇴색해 있다.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한 성화에 대한 설명판

 

 

 

사과교회의 설명(성화도 게시해 놓았다)

 

 사과교회라는 명칭은 내부에 있는 성화에 사과 모양의 둥근 물체를 쥐고 있는 모습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일설에는 사과 모양이 지구를 의미한다고도 한다.

 

 

성 바르바라예배당 설명

 

 

바르바라예배당

 

 바르바라는 전설적인 가톨릭 성녀로 3세기경 소아시아의 니코메디아(일설에는 히에라폴리스)에서 출생했다 한다. 이교도인 디오스코루스의 딸로, 그녀는 306년경에 순교한 것으로 여겨지며, 순교 장소는 여러 곳으로 전해지나 확실한 것은 없다. 바르바라가 실제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많고 그녀에 관한 전설도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아 1969년부터는 교회력에 그녀의 축일이 삭제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미모인 까닭에 이교도인 부친 디오스코루스에 의해 탑에 유폐되었으나 탑 내에서 개종하여 세례를 받고, 삼위일체를 나타내는 3개의 창을 탑에 뚫어 그리스도교 신자가 된 사실을 알자 분노한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를 죽이려고 하였고, 아버지에 의해 재판관에게 넘겨져 배교하라는 요구를 거부하여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때 그녀의 아버지는 직접 바르바라를 참수시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번개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안에는 바르바라의 모습이 프레스코로 남아 있다.

 

 

 

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는 교회인듯????

 

 

아마 식량 창고였던 것 같은데.....

 

 

뱀교회 설명

 

뱀교회라는 이름은 성 요르기오스와 성 테오도로스가 뱀과 싸우는 벽화의 모습에서 따온 것이다.

 

 

 

 

어느 교회에서 찍은 사진인데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암흑교회 설명

 

암흑교회의 벽화는 보존 상태가 가장 좋다.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 곳이라 암흑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덕분에 프레스코가 거의 선명하게 남아 있다. 하지만 사진을 찍을 수 없게 통제를 한다. 사람들은 특히 한국인들이 살짝 눈을 피해가며 찍기도 하지만 눈으로만 보고 즐긴다.

 

 

 

 

샌들교회 전경

 

 

 

 

샌들교회 설명

 

 2층 구조의 교회로 철계단을 올라가서 2층을 구경한다. 예수 승천 벽화 아래에 발자국 모양이 남아 있어 샌들교회라 일컫는다. 여러 벽화가 그려져 있고,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샌들교회

 

 

 

 박물관에서 보는 풍경

 

 괴레메야외박물관을 구경하고 나니 아쉬운 마음이 크다. 여러 프레스코를 보았는데 사진을 전혀 찍을 수가 없어 이 글을 쓰는 도중에 너무 안타까운 마음만 든다. 물론 보존을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사람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 특히 여행을 하는 사람들에게 눈으로 보는 것은 기억의 한계가 있어 사진으로 보존하려고 하는 것이다. 특히 아름다운 성화들의 프레스코는 그 순간이 지나면 어디에 무엇이 있었는지 기억하기가 어렵다.

 

 그래도 이 박물관의 교회나 예배당 등의 입구의 설명판에는 그 곳의 유명한 프레스코를 사진으로 보여주고 있으니 그 설명판을 찍은 사진으로라도 만족해야 한다. 생각보다 아직 괴레메야외박물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찾을 수가 없어 글을 쓰는데 어려움이 있다. 

 

 구경을 마치고 괴레메 중심지로 돌아와 점심을 먹었다. 유럽을 다니면서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이들은 아침을 상당히 늦게 시작하고 밤 늦게까지 일을 하거나 놀이를 즐긴다. 우리와는 조금 다른 생활습관이다. 우리는 점심 때가 되어서 식당에 갔으나 아직 사람들이 거의 없다. 점심을 주문하고 아들과 다음 일정을 이야기하다가 음식이 나와 밥을 먹는다.

 

 

 

 

식당의 전경과 내부

 

 

 

 

 

 

 

 밥을 먹고 다음 여행지로 가지 전에 아들녀석의 신발을 사러 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그리스에서 좀 말썽이었던 신발이 드디어 신을 수가 없게 되었다. 조그마한 시내라 신발을 파는 집이 거의 없었다. 계속해서 걸어 다니며 가게를 찾으니 한 집에 신발이 보인다. 들어가니 다행히도 아들의 발에 맞는 신을 구할 수가 있었다. 신을 구입하고 숙소에 가서 짐을 챙겨서 나와 버스를 타러 간다.

 

 드디어 꿈에서도 갈망하던 트로이로 간다. 이 카파도키아에서 트로이가 있는 차낙 칼레로 가는 방법으로 우리는 앙카라를 거쳐 가기로 했다. 그래서 앙카라가지는 버스로 이동하고 앙카라에서 차낙 칼레는 비행기로 이동하기로 했다. 좀 번거롭지만 이 여정이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하고 선택했다. 조금은 먼 거리를 제법 많은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우리나라와 같이 좁은 땅이 아니고 교통도 우리나라만큼 잘 발달해 있지도 않은 곳이다.

 

 어려움이 있지만 내일은 트로이를 볼 것이다.

 

아들과 함께 터키문명 산책 - 카파도키아 3 (그린투어)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이번 여행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투어를 따라가는 여정을 택했다.

 

 카파도키아는 너무나 넓고 명소들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고, 대중교통도 발달하지 않아서 자신이 차를 운행하지 않으면 투어를 따라 갈 수밖에 없다. 투어의 종류로는 조금 먼 곳을 가는 그린 투어, 우리가 어제 걸었던 코스인 레드투어, 그리고 가까운 로즈 밸리를 트레킹하는 로즈밸리투어, 발룬을 타는 발룬투어 등이 있어 각자의 여정에 맞추오 이용하면 된다.

 우리는 첫날에는 투어를 선택하지 않고 걸어 다니면서 여러 명소를 구경하였고, 괴레메 야외박물관을 가는 여정도 우리 일정에 맞추어 걸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나머지 코스는 걸을 수 없는 먼 곳에 위치하기에 할 수 없이 그린투어를 선택했다. 투어 버스가 우리를 목적지에 데려다 주면 관람만 하면 되는 편리한 여정이다.

 

 아침 일찍 발룬을 타고 숙소로 돌아와서 아침을 먹고 투어 버스를 타고 맨 처음 도착한 곳이 데린쿠유 지하도시다. 이 데린쿠유는 히타이트시대부터 비잔틴까지 지하도시가 만들어졌는데, 기원전 5세기경 그리스의 역사학자 크세노폰의 언급이 있으나 정확한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1960년의 어느 날, 마을에서 닭 한 마리가 작은 구멍 속으로 빠졌는데 나오지 않자 주인은 땅을 파기 시작했고, 뜻밖에도 그 아래에서 사람이 충분히 들어가고도 남을 정도의 큰 지하동굴이 발견되었다. 이후 본격적인 발굴작업이 시작되어 인근의 지하도시가 하나씩 발견되기 시작했고 유네스코의 지원을 등에 업고 민간에 공개되기 시작했다.

 

 '깊은 우물'이라는 의미를 지닌 데린쿠유 지하도시(Derinkuyu Underground City)는 터키 중부 카파도키아 지역 데린쿠유 행정구에 있는 개미굴처럼 지하 곳곳으로 파내려간 깊이 약 85m 지하 8층 규모의 거대한 지하도시이다. 현재 발굴된 깊이가 지하 8층인데 아직도 더 깊은 곳을 발굴하고 있다고 한다. 내부 통로와 환기구가 지하 각층으로 연결돼 있고 교회와 학교, 그리고 침실, 부엌, 우물 등이 존재한다. 이 곳은 지하로 계속 파 내려갔기 때문에 지금 완전히 발굴되지 않았으나 최대 5만 명이 있었으리라 짐작하는 큰 곳이다.

 

 터키에서 지금까지 발굴된 많은 지하도시 중에서(지금까지 40개 이상이 발견되었다) 가장 큰 곳으로, 최초의 터널과 동굴들은 4천 년이나 그 전에 처음으로 파였던 듯하며, 기원전 700년에는 그 안에 많은 이들이 자리를 잡았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처음에는 이 땅의 정착민들은 혹독한 날씨를 피해 기꺼이 지하로 들어가 보호를 받았지만, 그 뒤에는 종교박해를 피해 온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이, 7세기부터는 그리스도교인들이 이슬람교의 박해를 피하는 데 사용하는 등 주로 종교적인 이유로 은신하려는 사람들이 살았으며 이곳에서 현재 발견되는 거주지 유적은 모두 AD 5~10세기의 중기 비잔틴시대에 속하는 것들이다종교적인 신념을 위해서 온갖 어려움을 감수한 그들에게 경의를 표할뿐이다.

 

 내부에는 외부의 침입에 대비해 둥근 바퀴모양의 돌덩이로 통로를 막을 수 있게 하였고 독특한 기호로 길을 표시해 침입자는 길을 잃도록 여러 갈래의 통로를 뚫어 놓았다. 현재는 길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화살표로 길 표시를 선명하게 해 놓았다. 화살표를 따라 가며 안내인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괴레메파노라마에서 보는 괴레메의 전경

 

 

 

데린쿠유입구

 

 

 

 

 

 

 

 

 

 

 

데린쿠유의 여러 모습

 

 

데린쿠유지하도시의 전체 모형도

 

 데린쿠유를 구경하고난 뒤 으흘라라 계곡의 끝 부분에 있는 셀리메 대성당(수도원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정식 명치은 성당이다)으로 간다. 셀리메 대성당은 바위산을 깎아 만든 동굴집이다. 동로마시절 기독교 박해를 피해 찾아온 신자와 성직자가 살았던 곳으로 실크로드를 이용하던 상인들도 여기서 묵고 갔다고 한다.

 

 개미집 같기도 하고 지상에 올라온 지하도시 같기도 한 이곳의 여기저기 뚫려있는 구멍은 각자의 방으로 사용하던 구멍이었다. 천정에 구멍을 뚫어 창과 환풍구로 사용하고 벽에는 홈을 파서 비둘기의 집으로 사용했단다. 왜냐하면 이들은 비밀리에 통신을 하는 수단으로 비둘기를 사용했다고 한다. 방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예배당이 있는데 굴을 파고 그 안에 2층짜리 교회를 만든 것이 놀랍다.

 

 전에는 6층까지 개방했다 하는데 이곳이 좀 미끄럽기에 낙상사가 있은 후로 3층까지만 개방한다고 한다. 실내로 들어가서 바깥을 보면 자연스럽게 뚫린 동굴의 입구가 있고, 그 앞으로 펼쳐진 계곡의 자연 풍경이 한 폭의 그림이다. 옛날 이곳 사람들은 하늘과 자연을 보고 살았으니 데린쿠유지하도시 사람들보다는 더 밝고 긍정적인 사고를 지니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나즈막한 기둥을 따라 깨알같이 새겨놓은 성인들의 그림과 벽화들은 이곳에 거주했던 사람들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8세기경에 그려졌다는 프레스코는 보존상태가 좋지 않아 너무 아쉬웠다.

 

 

 

셀리메 대성당 표지

 

 

 

 

대성당의 전경

 

 

 

 

여러 곳의 모습

 

 

 

 

셀리메 대성당에서 보는 풍경 - 푸른 하늘이 너무 맑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에머랄드나 사파이어와 같이 파란 하늘로 슴을 탁 트이게 하는 하늘이다.

 

 

 

 

암굴의 내부

 

 

물고기 문양이 그려져 있는 입구

 

 

 

 

교회의 내부 - 벽화가 퇴색되어 그 본 모습을 보기가 어렵다.

 

 

 

 

 

 

 

 

셀리메 대성당 곳곳의 모습

 

 

 셀리메대성당을 나오니 점심 때가 되었다. 투어를 따라 다니기 때문에 주는대로 점심을 먹어야 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 그냥 점심을 먹는데 그런대로 괜찮았다. 우리가 머문 숙소에 아침에 보니 한국 아가씨가 있었는데 투어도 같이 하게 되어 점심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했다. 오스트리아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연말에 터키로 여행을 왔다고 한다. 서른은 되지 않은 듯한 나이인데 얼굴이 우수에 젖어 있는 그런 인상이었다. 그 아가씨와 투어를 다니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점심을 먹은 식당과 점심

 

 점심을 먹고 으흘라라 계곡으로 갔다. 으흘라라 계곡은 물이 흐르고 초록의 숲이 있는 곳이다. 카파도키아는 붉은 바위와 기이한 버섯 모양의 바위 집들로 우주의 어느 행성 같은 비현실적 도시인데 이곳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와 같은 모습이다. 100~200m에 이르는 깎아지른 절벽이 병풍같이 늘어선 이런 협곡이 16km가량 이어진다는데 오르막이라고는 없는 걷기 좋은 길이다.

 

 카파도키아 곳곳이 초기 기독교시대에 박해를 피해 사람들이 모인 곳인데, 이곳도 주변에는 5000호의 주택과 105곳의 교회 흔적이 남아있다. 트레킹 출발 지점에 있는 아가칼티교회 벽면에는 그리스도 승천 장면이 그려져 있다.

 

 트레킹은 멜렌디즈라는 이름의 제법 큰 하천을 따라 걷는다. 겨울이지만 물이 얼지 않고 흐르며, 주변의 사람이 사는 곳에서는 여러 가축들도 만난다. 카파도키아에서 항상 건조한 동굴 집만 보다가 물과 숲을 만나니 마음이 조금은 촉촉해지며 여유로워진다.

 

 이 계곡에서도 사람들이 동굴에 살았던 흔적으로 절벽에 구멍들이 보인다. 아래쪽 큰 구멍에는 사람이 살았고, 위쪽 작은 구멍들은 비둘기 집이었다고 한다. 당시 비둘기 고기는 주요 단백질 공급원이 됐고, 비둘기 배설물은 프레스코화의 회벽을 만드는 데 쓰여 지금까지도 선명한 색상을 유지하는데 일조했다. 비둘기 배설물은 비료와 연료, 무기를 만드는 데도 사용됐고, 비둘기 알의 흰자는 벽화를 코팅하는 데 쓰였다 하니 당시엔 비둘기가 가장 중요한 가축이었던 셈이다.

 

 한 해가 끝나가는 12월이지만 으흐랄라 계곡은 봄기운이 완연한 한국의 어느 뒷산에 오른 것 같은 풍경으로, 한쪽으로 흐르는 개울물과 그렇게 높지도 낮지도 않은 나무들 사이로 난 길을 걸어가면 평범한 사람들이 그저 산책을 하는 듯한 장소이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략 두어 시간 정도를 걸으니 이 계곡 트래킹은 끝나고 다시 뾰족 솟아오른 괴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담을 하나하면 이 계곡을 걸어가는 도중에 앞에서 오는 젊은 남녀가 인사를 하고 지나간다. 훤출한 키에 아주 선량하게 보이는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들으니 중국인이었다. 그런데 이 아가씨의 웃음이 너무 예뻤다. 생긴 모습도 아주 착하게 보이는 눈에 뜨이는 미인이었는데 마음도 아주 착한듯 했다. 무언가 사람을 기분 좋게 해 주었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스의 나프폴리오에서 보았던 중국여인은 눈에 확 뜨이는 미인이었고 오늘 길에서 만난 아가씨는 사람을 아주 편안하게 해 주는 미인이었다.

 

 여행을 하면서 이렇게 모르는 사람에게서도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주 상쾌한 일이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찍은 풍경 - 저 멀리 산위에는 눈이 제법 많이 쌓여 있다.

하늘은 너무 푸르다. 사람의 마음을 상쾌하게 한다. 

 

 

 

 

 

 계곡입구에서 계곡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프레스코 벽화가 제법 선명한 조그마한 암굴교회를 만난다. 그리스도의 승천이 그려져 있는 아아찰트교회이다. 조그마한 교회라 잠깐 구경하고 내려가면 계곡을 접한다. 계곡은 우리나 여기나 비슷하다.

 

 

계곡 설명도

 

 

 

 

 

 

으흘라라계곡 입구 주변 - 깍아지른듯한 암석들이 보인다

 

 

 

계곡을 흐르는 맑은 물 - 오염원이 없어 맑은 것 같다.

 

 

 

 

계곡입구의 여러 모습 - 암벽 중간에 옛날에 사람이 살았던 주거지가 보인다.

 

 

으흘라라계곡에서 갈 수 있는 곳의 이정표

 

 

 

 

 

계곡 중간중간의 여러 모습

 

 이 계곡은 아주 평탄한 길이기 때문에 나이가 든 사람이든 어린아이든 전혀 무리가 없이 누구든지 쉽게 걸을 수 있다. 중간에는 찻집과 휴식처 그리고 식당도 마련되어 있으니 시간에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한가로이 거닐면서 여유로움을 즐기면 좋을 것이다. 우리는 이 좋은 길을 조금 급하게 걸었다. 투어를 따라 왔기에 시간을 어긋날 수는 없기에......

 이런 점이 내가 투어를 하지 않는 이유인데 이번에는 어쩔 수 없었다.

 

 

 

 

옛날 종교적인 박해를 피해 있었다는 거주지

 

 기분 좋게 으흘라라계곡 트래킹를 마치니 버스가 우리를 기념품과 보석을 파는 가게로 인도한다. 물론 어느 나라에서나 있는 과정이다. 우리는 물건을 살 계획은 전혀 없으므로 구경만 하고 거기에서 주는 차를 마시고 나왔다. 가게를 나와서 간 곳이 석양의 아름다운 괴레메를 볼 수 있는 피전밸리전망대인 괴레메 파노라마다.

 이곳에서는 괴레메의 대부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어제 걸어 다니면서 보았던 풍경들. 기암괴석으로 가득한 로즈밸리나 레드밸리도 한눈에 들어온다. 괴레메를 일망무제로 조망할 수 있는 곳으로 여기에서 괴레메를 구경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피전밸리전망대에서 괴레메파노라마를 보는 풍경

 

 

 

 

 

 

 

 

피전밸리전망대 괴레메파노라마의 일몰 풍경

 

 서서히 해가 진다. 아침에는 발룬을 타고 하늘에서 해가 떠는 광경을 보았는데 저녁에는 땅에서 해가 지는 모습을 본다, 하늘에서 보았던 괴레메의 풍광을 이제는 땅위에서 전체를 다시 본다. 걸어 다니면서 보는 풍경은 자세히 볼 수 있으나 전체를 조망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하늘에서나 이 피전밸리전망대에서 괴레메의 전체를 조망할 수 있어서 좋다. 나무를 보아야 좋은 것도 있고, 숲을 보아야 좋은 것도 있다.

 

 

 

나자르 본주우 ( 터키어: Nazar boncuğu )

 

 이 전망대의 가게 앞의 나무에 푸른 빛을 띤 사람의 눈 모양의 물건이 달려 있다. 터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 푸른 빛깔의 물건은 나자르 본주우(터키어: Nazar boncuğu)로 사람들의 불행을 막아준다는 터키의 부적이다. 푸른 유리에 눈이 그려져 있으며, 재앙을 물리친다고 한다. 터키의 대표적인 기념품이다. 옛날 사람들은 악마의 눈은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을 해치는 힘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악마의 눈을 가두어 놓은 부적을 만들었다. 세상 어디에서나 원시 샤마니즘 사회에서는 이같은 부적이 있었다. 예전에는 여러 재료를 이용해서 만들었지만 지금은 대개가 유리나 플라스틱으로 만들어 기념품으로 판매하고 있다. 터키를 여행하면서 자신을 지켜주는 나자르 본주우 를 하나쯤은 골라 보는 재미도 있을 것이다.

 

 아침 일찍부터 발룬을 타느라고 바쁘게 움직였고 또 먼 곳을 투어를 따라 다니며 여러 곳을 구경하고 난 뒤에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먹으러 간다. 몇 번이나 말했지만 아들은 먹는 것을 엄청 중시한다. 그래서 구글에서 그 지역의 특색있는 음식점을 항상 검색하여 나에게 가자고 한다. 나는 따라가서 맛있게 먹고 비용만 지불하면 된다.

 

 

 

 

 

식당의 외부와 내부

 

 

 

터키는 이슬람 국가지만 주류도 있어 비교적 자유롭다. 곳곳에서 마실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식당에서 팔지는 않는다.

 

 

 

 

유명한 항아리케밥

 

 우리나라 여행자들이 카파도키아를 여행할 때 꼭 먹어본다는 항아리 케밥이다. 원래 명칭은 Testi Kebap이다. 이 음식은 흙으로 만든 항아리에 고기나 야채들을 함께 넣고 푹 끓여내는 음식이다. 지금은 카파도키아의 명물음식이 되어 인기를 끌고 있는데, 아마도 우리식성에 잘맞는 음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국이 있어야 밥을 잘 먹는데 항아리속에서 푹 고아지면서 국물이 흥건하게 생긴다. 밀봉된 항아리를 뚝 깨어서 먹는 재미도 있다.

 

 

 

저녁식사

 

 

 저녁을 먹고 시내를 좀 배회하니 아직은 비수기라서 관광객이 적어 시내가 좀 하가하다. 이곳 저곳의 가게를 눈으로먼 쇼핑을 하다가 숙소로 돌아와 잠자리에 든다.

 

 발룬을 탔다는 것만으로도 오늘은 행복한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