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 함께 터키문명 산책 - 차낙 칼레(트로이)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신들의 전쟁에서 인간의 역사로
드디어 일찍부터 오기를 기대했던 트로이에 왔다.
내가 트로이를 동경했던게 언제였나? 50여년 전에 일리아드 오딧세이를 처음에는 소설로 읽었을 때, 이 이야기가 실제 역사의 현장을 호머가 대서사시로 썼고, 슐리이만에 의해 트로이가 발굴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언젠가는 꼭 트로이를 내 눈으로 보고 느껴볼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제야 트로이를 오게 되었다. 이번 여행을 계획하면서 저번에 터키일대를 여행할 때 트로이를 보지 못한 것이 너무나 아쉬웠기에 꼭 트로이를 가자고 아들에게 말했다. 아들이 일정 관계상 좀 어렵다고 했지만 내가 강권하여 트로이를 보는 여정으로 바꾸었다. 물론 아들도 트로이가 보고 싶었다 한다.
카파도키아에서 버스로 약 5시간을 걸려서 앙카라에 도착했다. 앙카라공항에서 밤 11시 40분 비행기로 차낙 칼레에 도착하니 새벽 1시 30분이다. 차낙칼레(Çanakkale)는 항구도시로 차낙칼레 주의 주도이며, 유럽과 아시아를 이어주는 다르다넬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킬리트바히르(Kilitbahir) 시와 마주보고 있다. 차낙칼레는 고대부터 해상 교통수단 및 해군 시설이 발달하여 역사적으로 중요한 해군 기지의 역할을 해 왔다. 특히 차낙칼레는 고대 그리스의 영웅 서사시에 나오는 트로이로 향하는 항구 도시이기도 하다. 또 1차 세계 대전 때 방어 진지 역할을 한 치멘리크 요새(Çimenlik Fortress)가 이곳에 있다. 시 외곽으로는 고대 유적지가 많이 있는데, 특히 남쪽의 트로이(Troy)가 유명하며, 해안에는 브래드 피터가 주연한 영화 ‘트로이’의 대형 목마가 세워져 있으며, 최근에는 관광지로도 각광받고 있다. .
빨리 호텔을 찾아가서 잠을 자고 일어나 드디어 트로이로 향했다. 트로이는 교통편이 좀 좋지 않아 호텔에 부탁하여 택시를 불렀다. 터키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없는 버스를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택시를 타기를 권하고 싶다. 택시비는 우리보다 엄청 싸다.
트로이까지 왕복 30Km도 더 되는 거리인데 우리가 트로이를 관광할 때까지 기다려 주고 우리 돈으로 약 50,000원 정도밖에 하지 않는다. 편할뿐만 아니라 시간이 엄청 절약된다. 여행에서는 시간을 절약하는 것이 가장 큰 일이다. 물론 비용이 너무 많이 들면 시간을 절약하는 의미가 없지만......
호머에게는 일리오스라 불리었던 트로이는 아나톨리아 지방 북서부, 스카만데르 강 북쪽과 헬레스폰트 해협의 남쪽 어귀로부터 약 6.4킬로미터 떨어진 트로아스 평야 히사를리크 언덕에 있다. 바다에서 6km 정도 떨어져 있어 바다로부터의 습격을 받을 위험은 적었으나 바다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에게해와 흑해를 잇는 헬레스폰투스(다르다넬스 해협)의 입구에 있어, 옛날부터 번영을 누려왔다.
이 트로이의 발굴은 너무 잘 알려져 있어 간단히만 말한다.
어릴 때 호머의 일리아드와 오딧세이를 읽고 이것이 신화가 아니라 역사라고 믿은 독일 고고학자 슐리이만이 1870년 4월, 이 지역에서 처음 발굴을 시작하여 1873년 6월 드디어 트로이의 유적을 발견했다. 그후 1930년대 칼버트의 연구와 슐리이만의 노력으로 발견된 트로이는 도시 위에 도시가 건설되어 있는 대단히 복잡한 복합 유적이었다. 유적은 9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상세한 설명은 줄인다. .
트로이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슐리만은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 그는 호머의 서사시에 등장하는 시대만을 염두에 두고 발굴했기 때문에 B.C. 2000년 이후의 유적은 파괴하고 말았다. 그래서 그리스 이후의 유적은 영원히 잃어버리게 되었다.
최초 발굴 당시 슐리이만은 제2층의 트로이를 호메로스가 말한 트로이라고 단정했으나, 그후 연구를 통해 트로이 전쟁의 무대는 제7층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당시 트로이는 미케네 문화권에 속했으며, 주변 해협을 지배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여서 무역으로 번영을 누렸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트로이는 지금도 계속 조사 발굴이 이루어지고 있다.
트로이의 목마
트로이 오데온
트로이에 도착하여 택시 기사에게 기다리라 하고 구경을 나섰다. 처음 눈에 띄는 것이 거대한 목마다. 물론 조금도 고증이 되지는 않은 것이지만 그냥 트로이를 말할 때 상징적으로 이야기 하는 것이 목마다. 목마를 구경하고 본격적으로 트로이유적을 구경하러 간다.
트로이는 폐허다. 온전하게 갖추어진 유적은 없다. 그러나 여기는 트로이다.
트로이유적지 설명판
트로이유적 입구에 있는 트로이 목마
사람들은 말한다. 차낙칼레항구에 서 있는 브래드피터 주연의 영화 '트로이'에 나오는 목마(뒤에 볼 수 있음)가 더 잘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나는 이 목마가 더 친근감이 들었다. 영화의 목마는 너무 세련된 모습이다. 과연 그 시대에 그렇게 꾸밈을 만들었을까? 그냥 거대한 나무 말을 만들었지 않았을까? 과연 어느 것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목마에 대한 기록만 있지 어떤 모양인지는 모른다. 아니 진짜로 목마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나의 이야기일 뿐이다.
트로이의 기후에 대한 설명
입구에 있는 옛 유물들
길 표시판
호머가 말한 일이오스 표시
동쪽벽과 문 - 트로이 6기에 만들어진 성벽의 흔적이다.
트로이의 동 식물 구성 설명도
북동쪽 성채 설명도
아테나신전 설명도
트로이 8기에 지어진 신전이라고 하나 거의 흔적도 볼 수가 없어 아쉽다.
트로이의 지층을 나타내는 이정표
길가에 뒹굴고 있는 유물들
성벽설명도
메가톤
트로이 2기 시대에 만들어진 진흙 벽돌 구조물로 지금은 유실을 방지하기 위해서 임시로 간이 지붕을 덮어 놓았다.
요새벽
귀족거주지 설명
슐리이만의 참호
이곳은 트로이 유적지를 처음으로 발견한 독일의 슐리이만 참호라고 부르는 곳으로, 트로이 1시기(기원전 3000년)의 거주지로 추정되며, 그가 당시에 트로이의 프리아모스 유적을 발굴하기 위하여 무분별하게 파헤쳐 놓았다.
트로이 각 층의 설명판
트로이 유적지는 기원전 3000년전 청동기시대부터 로마시대까지의 유적 층이 겹겹이 쌓여 있다. 시기별로 9층으로 표시해 놓았다.
경사로
트로이 2기의 유적으로 성안으로 들어가는 경사로로 대리석으로 포장되어 있다. 이곳이 슐리만이 프리아모스의 보물이라고 불리는 유물을 발견한 장소이다. 1992년에 처음 발견된 상태로 원형이 복원되었다고 한다.
건물 6
트로이 6기의 건물의 일부로 추정되는 구조물로 이 곳에서 큰 용기들이 발굴되었기에 부엌으로 짐작한다.
성역
유적의 남서쪽에 있는 성역은 의식을 행하던 곳이다. 최근에 발굴된 당시 제단으로 사용되었던 장소와 우물을 볼 수 있다.
오데온
9기에 만들어진 로마 극장으로 거의 완전하게 복원되어 있다. 마지막 9기는 기원전 150년경부터 로마시대였던 서기 500년까지로 추정된다. 이곳은 로마의 시조인 아이네이아스가 태어난 곳으로 알려져 로마황제들의 관심이 많았던 곳이다. 이 오데온과 극장은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지어졌다고 한다. 한 때는 번창했으나 차츰 쇠퇴하다가 5세기 말경 지진에 의해 파괴되고 폐허로 방치되어 있었다.
그리스에서 엄청난 규모의 원형극장만 보다가 조그마한 오데온을 보니 더 정감이 간다.
트로이 로고
남쪽문
성안의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였던 곳으로 추정되며 중간에 수로의 흔적이 있다.
트로이 단층의 구조에 대한 물음
트로이 전쟁
이 전쟁이 신화냐? 역사냐? 하는 의문은 슐리이만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질문이었다. 전쟁의 시작은 신화에 기초한다. 어느 날 여신 헤라와 아테나, 아프로디테가 서로 자신이 가장 아름답다고 다투는 일이 있었다. 심판을 맡았던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는 아프로디테의 손을 들어주고, 그 대가로 그리스 제일의 미녀 헬레네를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유부녀였던 핼레네를 빼앗긴 남편이었던 메넬라오스는 아내를 되찾기 위해 미케네의 왕 아가메논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대규모 원정군을 이끌고 트로이로 쳐들어갔다. 수 많은 영웅과 신들이 양쪽의 군대에 참가하여 전투를 벌이고 여러 신화적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후 10년 동안 양측의 싸움으로 수많은 영웅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갔다. 그러나 그리스는 '트로이의 목마' 작전이 성공을 거두어 마침내 길고도 지루했던 전쟁은 끝을 맺게 되었다.
이것이 흔히 세상에서 이야기하는 '트로이 전쟁'을 아주 간단하게 요약한 줄거리다.
과연 트로이 전쟁은 헬레나 때문에 일어났을까? 정말 신들이 인간의 전쟁에 개입한 것일까? 호머가 역사에 기초하여 꾸민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된다. 트로이는 교통의 요충지로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교역을 하는데 가장 큰 불만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가메논을 중심으로 한 미케네와 그리스 연합군과 아나톨리아의 트로이군이 해상무역권을 두고 벌인 전쟁이라는 것이 역사의 진실이 아닌가라고 역사가들은 말한다.
호머의 대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도 등장하는 트로이 전쟁은 실제 유적이 발굴되기 전까지만 해도 신화 속의 이야기라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무언가 사실에 기초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마침내 땅 속에 묻혀 있던 전설 속의 트로이를 발견한 사람이 있었다. 그가 하인리히 슐리이만으로 고고학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굴을 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후에 미케네도 발견하여 고고학 역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1930년대에 미국의 블레겐이 트로이 유적에 대한 과학적인 재조사를 시행한 결과, 트로이전쟁이 사실성을 갖는다면 9층으로 이루어진 유적 가운데 BC 1250년의 것으로 추정되는 제7층 A가 여기에 해당한다고 주장하였다.
트로이 유적을 보고 나니 큰 감동이다. 사람들은 흔히 맣했다. 트로이에 가 보았자 폐허만 볼 뿐이고 실망한다고. 물론 트로이는 폐허다. 하지만 역사의 엄청난 현장이다. 트로이를 보면서 영화에서 보던 트로이의 한 장면을 실감하고, 그리스연합군과 맞서고 있는 트로이 군대를 생각해 본다. 이 역사의 현장이 지금 폐허면 어떠랴. 우리는 여기에서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으면 가장 복받은 것이다.
트로이를 보고 나서 차낙칼레의 모든 것은 거저 나에게 지나가는 과정에 불과했다.
트로이를 보고 난 후 시시내 항구로 가서 차낙칼레 일대를 구경했다.
이스켈레광장과 시계탑 - 1897년에 건립된 시계탑
항구 주변의 모습
항구 주변에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시가지가 항구와 연결되어 있어서인지 사람들이 항구 주변에 즐비하게 늘어선 카페에 앉아 담소를 나누거나 망중한을 즐기고 있다. 터키 사람들은 차를 참 좋아한다. 수시로 차를 마시면서 삶의 여유를 즐기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바쁘게만 움직이는 우리나라 사람의 눈으로는 좀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차낙칼레 항구 주변에 있는 브래드 피터 주연의 영화 트로이에 나오는 트로이 목마
트로이목마 주위에 있는 고대트로이 모형
차낙칼레 전투 기념 전시관
1934년 안작데이(4월 25일) 기념사 중에서 - 아타튀르크 -
당신 아들을 먼 나라로 보낸 어머니들
눈물을 닦으라.
당신의 아들은 우리의 품속에 편안하게 누웠다.
생명을 이 땅에 바쳤기에 그들도 우리의 아들이다.
기념관의 전시물들
점심 때가 되어 점심을 먹으려니 아들이 또 자기가 찾아 둔 곳이 있다며 가자 한다. 따라가니 길가의 노천음식점이다. '샤르달예(Sardalye)'라는 이름의 음식점인데 식사시간이 되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곳이었다. 여러 가지의 해산물(정어리, 홍합, 오징어 등등)을 튀겨서 빵에 넣어 주기도 하고, 따로 주기도 한다. 간단한 음식으로 사람들이 간편하게 먹을 수 있고 저렴하게 한끼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가게의 모습
메뉴표와 조리하는 모습
주문한 음식
거리를 거닐며 항구일대를 구경하고 차낙칼레 군사박물관[Çanakkale Military Museum, Çanakkale Naval Museum]으로 갔다. 차낙칼레 군사박물관은 차낙칼레시 중심부 치멘리크 요새(Çimenlik Fortress)에 있는 박물관으로 오스만투르크 시대와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차낙칼레 지역에서 벌어진 주요 해전(海戰)에 관한 자료를 주로 전시하고 있으며, 해군 관련 유물 및 전함을 소장하고 있다. 시멘리크 요새는 술탄 메메드 2세(Mehmet II)가 다르다넬스 해협을 오가는 선박을 통제하기 위해 1452년에 세운 것으로, 매우 견고하여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주요 전시물은 터키 해군 및 1차 세계대전 당시 최대 접전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겔리볼루(갈리폴리) 전투에 관한 자료들이다. 겔리볼루 전투는 1차 세계대전 때 터키와 영국 프랑스의 연합군 함대가 겔리볼루 반도에서 접전을 벌인 전투로 양측 모두 25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낸 격렬한 전투 끝에 터키 군대가 승리했다. 차낙칼레 군사 박물관에는 전쟁 당시 사용했던 군함 <누스라트(Nusrat)> 호를 비롯해 적군이었던 연합군의 함선이 야외 전시장에 잘 보존되어 전시되어 있다. 이외에 당시 전투에서 사용된 무기와 함포, 군함 모형, 군사 작전용 지도 등 다양한 해군 자료들이 전시하고 있다.
박물관입구
이 박물관은 특이하게 해군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입구를 들어가려니 군인들이 있으며 어디에서 왔는지 물어 코리아라고 하니 반가워 한다. 아마 그들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국가라 더 반가운 모양이다. 터키를 돌아다니며 한국에서 욌다고 하며 사람들이 참으로 반갑게 대해 주었다. 우리 한국전쟁에 그들이 참전했는데 우리가 더 고마워 해야 하는데 오히려 그들이 반가워 한다.
1915년 차낙칼레 해전 기념비
이 곳이 차낙칼레이기에 차낙칼레 전투라고도 하지만 정확히는 갈리폴리전투다. 이 전투는 열악한 조건의 터키가 거대한 연합군을 물리친 전투로 전쟁사에 기록되어 있는 유명한 전투다. 전투의 상세한 설명은 생략하고 그 당시 터키의 무스타파 케말대령(뒤에 아타튀르크가 됨)이 장병들에게 한 연설로 그 전투를 대신한다.
"우리가 무너지면 오스만 제국 본국이 무너지고, 우리가 이젠 노예가 되는 생활이 기다리고 있다. 제군들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오늘은 살아남기 위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죽기 위해서 싸워야 한다. 그러나 이는 개죽음이 아니다. 오늘 우리들의 죽음이 조국을 지키는 밑거름이 될 것이며 그대들 이름은 남을 것이다. 나 역시 여기에서 무너지면 제군들과 같이 시체로 뒹굴고 있으리라."
야외에 전시되어 있는 전시물들
치멘리크성채
이 성채안에는 이 주변에 있었던 여러 전쟁의 모습을 보여 준다. 특히 카낙칼레 전투를 그들은 상당히 자랑스럽게 여기기에 아주 상세하게 영상까지 도원하여 설명한다. 한번쯤은 구경할 만하다.
군사박물관에서 보는 해협 건너편 모습
박물관을 나와 거리를 돌아 다니며 구경을 하다 카페에 앉아 휴식을 하면서 항구를 구경하며 오늘 보았던 트로이에 대해 아들과 이야기를 한다. 서로의 관심과 취향이 같다는 것이 여행을 하는데는 참으로 좋은 일이다. 사실 역사에 관심을 가질 수는 있지만 고고학적 유적이나 유물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그런데 아들과 나는 좀 특이하게 이런 점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 힘께 여행하면 이야기가 끊이지를 않는다.
휴식을 취하닥가 오늘 다시 베르가마로 가야 하기에 자리에서 일어나 숙소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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