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 함께 터키문명 산책 - 이스탄불 4 (아야소피아 박물관)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이 겹쳐진 고대 건축의 걸작 아야소피아 박물관
‘성스러운 지혜’를 뜻하는 이름을 가진 아야소피아(그리스어 : 하기아소피아 : Hagia Sophia Museum)는 1453년 메흐메드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점거하기 직전까지 그리스 정교회의 총본산으로 바티칸의 성베드로 대성당이 지어지기 전까지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성당이었다.
오늘날 비잔틴미술의 최고 걸작이라는 찬사를 받는 아야소피아 성당이 처음 건립된 것은 360년 콘스탄티누스 2세에 의해서였다. 이후 화재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으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인 532년부터 5년에 걸친 개축 공사로 현재의 대성당이 완성되었다. 황제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라는 당시의 기독교적 우주관을 한 눈에 볼 수 있게 네모난 건물위에 둥근 돔 모양의 지붕을 얹도록 했다. 그리고 교회가 하나임을 표현하기 위해 내부에는 기둥이 없도록 하였다. 당시 건축기술로는 말도 안되는 조건이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대성당은 완성되었다.
이 건물의 구조에 대해서는 나는 자세히 설명할 재주가 없다. 백과 사전 등을 참조하시기를.....
그 아름다움이 극에 달하여, 재건축을 명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537년의 헌당식 날 “솔로몬이여, 내가 그대에게 승리했도다!”를 외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성당은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과 레바논 바르베크의 아폴론 신전에서 운반해 온 기둥, 세계 곳곳에서 가져온 석재들을 이용해 건설되었다고 한다.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드 2세는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하자마자 곧장 이 전설적인 대성당으로 향하여 그 자리에서 아야소피아를 모스크로 사용하겠다고 선언했다. 오스만 정복자들은 성당 건물 주위에 이슬람식 첨탑(미나레)을 세웠고, 내부의 모자이크화는 회벽과 코란의 문자들로 덮었다.
헌당 당시, 성당을 빛내고 있었을 6세기의 모자이크는 8∼9세기의 성상 파괴운동 때에 없어지고, 그 후에 제작된 모자이크도 15세기 이후, 이슬람교의 점거 하에 거의 없어졌으나, 최근의 조사에 의하여 앞방과 2층 복도의 벽면에서, 석회 속에 그려져 있던 9∼13세기의 모자이크의 일부가 발견되어, 그 고도의 기술과 뛰어난 표현이 주목을 끌고 있다. 건물내에는 비잔틴의 세련된 장식 조각들이 적지 않게 남아 있다.
1923년 터키공화국이 수립되었을 때 유럽 각국은 아야소피아의 반환과 종교적 복원을 강력하게 요구했지만, 터키 정부는 이곳에서 기독교든 이슬람이든 종교적 행위를 금지하고 박물관으로 운영하기로 결정하여 1935년에 박물관으로 공개되었다. 현재 이곳에는 성당으로서의 흔적과 모스크로서의 흔적이 사이좋게 같이 공존하고 있다. 현재 정식 명칭은 아야소피아 박물관이다.
세계 각지에서 종교적 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현대에 이 아야소피아는 오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종교적인 분쟁을 초월하고 살아남은 역사적 유적이다. 당시 이슬람 지도자들의 종교적 관용도 그 이유 중의 하나이겠지만, 시공을 뛰어 넘는 절대적 가치를 지닌 예술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보존된 것으로 생각된다.
아야소피아는 외부 복도와 내부 복도, 본당 1~2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입구 왼쪽 안에 있는 나선형 통로를 지나 2층의 갤러리로 올라가면 금색으로 반짝이는 모자이크 화를 가까이에서 감상할 수 있다. 모자이크 화는 9세기 초 콘스탄티노플의 성상 파괴 이후 그려진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최후의 심판에 임하는 예수와 성모마리아,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묘사한 작품이 가장 유명하다. 또한 아야소피아 성당의 출구 뒤편에는 비잔틴제국의 황제들이 성모마리아에게 콘스탄티노플과 아야소피아 성당을 봉헌하는 모습을 나타낸 모자이크 화가 있다. 그냥 지나치기 쉬우니 성당 내부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눈여겨 찾아보자.
아야소피아 전경
아야소피아 구조 설명판
*판토크라토르(전능하신 주) 그리스도와 황제 레오 6세
아야소피아의 입구를 지나면 외랑과 내랑을 거쳐 본당으로 들어가는 청동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문으로 들어가게 된다. 높고 웅장한 문은 황제가 사용하는 문으로 '황제의 문' 또는 '제국의 문'으로 불린다. 문 위에는 예수와 성모 마리아, 대천사 가브리엘이 그려져 있는 모자이크가 있는데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사람은 레오 6세이다. 레오 6세는 비잔틴제국의 기틀을 다진 뛰어난 황제였지만 그 자신의 삶은 기구했다고 한다. 이 모자이크의 내용은 네 번이나 결혼하면서까지 아들 콘스탄티누스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는 과정에서 자신이 저지른 죄를 속죄하는 모습이라고 한다. 천하를 다 가진 것 같은 황제도 신 앞에는 항상 겸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내부로 들아는 입구 : 제국의 문
내부에 들어서면 입구 양쪽에 거대한 항아리가 눈에 보인다. 이 항아리는 페르가몬에서 가져 왔다고 하는 대리석으로 만든 항아리다. 발견 당시에는 세 개로 항아리 안에 은화가 가득했다고 하는데 이것을 발견한 농부에게 상으로 하나를 주고 두 개만 이곳에 남아 있다고 한다.
본당에 들어서면 40개의 창문을 통하여 빛이 쏟아진다. 중앙 돔의 아래에는 원래 4명의 천사가 그려져 있었다는데, 모스크로 사용하는 도중에 세 명의 천사는 얼굴은 보이지 않고 날개와 몸 부분만 남아서 아쉬움을 자아낸다. 또 돔 바로 아래에는 원형 나무판에 금빛의 커다란 이슬람 문자가 새겨져 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성지를 빼앗긴 상처의 흔적으로 남았지만, 현재는 기독교의 성당과 코란 문자가 어우러져 아야소피아 그 자체로 보인다.
돔의 가장 안쪽에는 술탄의 전용 좌석이 있으며, 원래는 성당의 제단이었던 곳을 이슬람의 제단으로 바꾸면서 메카를 향해 제단의 방향을 살짝 틀었다고 한다. 이 제단 뒤쪽으로는 섬세한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 있고 그 위의 작은 돔에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황금빛 모자이크가 새겨져 있다.
이 아야소피아는 지금도 내부 복원을 위해 작업 중이다. 언제 이 복원이 완성되어 찬란한 모습을 보게 될는지????
복원 공사 중인 내부
아야소피아 본당 내부의 여러 모습
이슬람 문자판
소원의 기둥(일명 땀 흘리는 기둥)
그레고리우스 성인이 자신의 치유 능력을 옮겨 놓았다는 본당 왼편에 위치한 대리석 기둥을 '소원의 기둥'이라 부른다. 아야소피아를 세 번째 지었던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머리가 아플 때 이 기둥에 기댄 뒤 두통이 나았다는 전설이 있는 곳으로, 아야소피아를 찾은 사람들은 이 기둥에 아픈 곳을 낫게 해달라는 소원을 빈다. 대부분의 시간에 사람들이 줄을 길게 늘어서 있으니 쉽게 찾을 수 있다. 낫고 싶은 곳을 손으로 문지르고, 가운데 구멍에 엄지손가락을 대고 나머지 손을 펼치고, 손을 떼지 않고 한 바퀴를 돌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회랑
나선형 구조로 실제로는 7층 정도의 높이를 올라가야 한다.
2층에 전시된 전시물들
아야소피아에서 유명한 것은 2층의 모자이크이다. 오스만 제국 시절 모자이크 대부분은 회칠로 덮이고, 그 위에 이슬람의 성경인 코란이 새겨졌었다. 이 과정에서 살아남은 모자이크 작품들을 보면 아야소피아 박물관이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성지순례 장소인 동시에, 이슬람교인의 성지순례가 되는 이유를 알 수 있게 해준다.
* 2층의 모자이크
자미 안에 회벽으로 가려져 있던 모자이크는 1931년 미국의 조사단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 뒤 아타튀르크의 지시로 복원이 진행되었고 1964년까지 복원 작업이 계속되어 그 해 2층 회랑이 처음으로 개방되었다. 원래의 모자이크는 성상파괴운동 때 거의 다 지워졌고, 지금 우리가 감상하는 모자이크는 성화가 우상 숭배가 아니라고 규정한 787년 니케아 공의회 이후의 작품들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이레네 2세가 큰 역할을 하였기에 동방 정교회에서는 그녀를 성상 공경을 부활시킨 성인으로 추앙하고 있다.
천국의 문
데이시스(간청, 탄워) - 심판의 날 모자이크
2층으로 올라가 ‘천국의 문’이라고 부르는 문을 지나면 데이시스(Deësis) 모자이크를 먼저 볼 수 있다. '데이시스'란 간청 혹은 애원을 의미한다. 심판을 주관하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세례 요한이 왼쪽에는 마리아가 죄인의 벌을 가볍게 해달라고 간청하는 내용을 표현한 것으로 1261년에 제작되었다. 아야소피아 박물관에 있는 성화들 가운데 가장 심하게 훼손되어 전체의 2/3 정도가 보이지 않지만 아야소피아에서 가장 아름답고 섬세한 모자이크로 꼽힌다. 그리스도와 세례자 요한은 상반신의 상당 부분이 남아 있지만 마리아는 얼굴과 왼쪽 어깨 부분만 남았다.
남쪽 창에 가까이 걸려있는 이 그림은 창을 통하여 들어오는 자연의 빛을 받아 더 빛나고 있다. 모자이크에 등장하고 있는 세 사람의 배경으로 조개모양의 황금빛 문양이 보이는데 햇빛이 조개껍질의 가장자리를 따라 반사되는데, 특히 예수상의 후광 부분이 더욱 빛난다.
(위키 백과에서 가져옴)
데이시스 모자이크의 맞은 편 바닥에는 HENRICUS DANDOLO라고 새겨진 대리석 판이 있다. 1204년 제4차 십자군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플에 쳐들어온 베네치아의 단돌로의 무덤이 있던 자리의 표시이다. 그는 평소 십자군들이 그동안 베네치아에 진 빚을 갚으려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는 길밖에 없다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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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점령은 기독교 역사에서 재앙이었다. 57년간 자행된 약탈로 비잔틴제국의 온갖 성물과 보물들은 해외로 팔려 나갔고 유적지는 황폐화되었다. 이 약탈로 동방정교회와 라틴 교회는 씻을 수 없는 불화에 빠졌고, 그 뒤 교황이 두 번에 걸쳐 사과와 유감을 표시했다. 그 골이 얼마나 깊었던 지 사건이 발생한지 800년 가까이 된 2001년에 아테네를 방문한 교황은 그리스 정교회 흐리스토둘로스 대주교에게 다음과 같이 사과의 뜻을 분명히 했다.
"저는 오랫동안 동방 그리스도 신앙의 보루였던 콘스탄티노플의 불행스러운 약탈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지 회복을 위해 떠난 십자군이 같은 그리스도교 형제들을 기습한 사건은 비극이었습니다. 특히 그들이 라틴교회에 속한 그리스도교들이었기에 가톨릭교회로서는 더더욱 유감스러운 마음을 갖게 됩니다."
콘스탄티노플 탈환 이후 그의 무덤은 파헤쳐지고 뼈는 개에게 던져졌는데 개들조차 그의 뼈를 외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콘스탄티노플 사람들은 단돌로의 무덤을 파헤쳐 유골을 내다버린 것도 모자라 무덤이 있던 자리에 이름을 새겨 밟고 다녔다고 한다.
내 사진 기록에 아무리 찾아도 이 사진이 없어 위키 백과에서 가져 왔다.
요한 2세와 이레네 황후 가운데 왕좌에 앉아 있는 마리아와 축복을 내리는 아기 예수
2층 회랑 끝에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를 중심으로 요한 2세 콤네누스 황제와 이레나 황후가 성모로부터 축복을 받는 모습을 표현한 성화 '콤네누스' 모자이크가 있다. 이 성화는 1122년에 제작된 것으로, 황제가 들고 있는 자루에는 돈이 들어 있고 황후가 들고 있는 것은 봉납명세를 적은 문서로 교회에 대한 황실의 기부를 의미한다. 그리고 황태자인 장남 알렉시오스 콤네누스의 모습은 성화의 옆으로 튀어나온 기둥의 옆면에 그려졌다. 황후는 항가리의 공주였는데 콘스탄티노플로 온 후에는 동방 정교회로 개종할 만큼 아주 신앙심이 깊었고, 황제도 유능하고 신앙심이 깊었으나 불행한 가족이다. 황제와 황후 그리고 아들들이 모두 병이 들어 일찍 죽었다.
콘스탄티누스 9세와 황후 조에 가운데 왕좌에 앉아 축복을 내리는 그리스도 모자이크
2층 남쪽 회랑의 또 다른 쪽에는 황후 조에의 모자이크가 걸려 있다. 11세기에 제작된 이 모자이크는 파란색 옷을 입고 왼손에 성경을 든 그리스도가 조에 황후와 그녀의 세 번째 남편 콘스탄티노스 9세를 축복하는 모습을 담았다. 파란만장한 인생의 조에는 스스로가 여제가 되었다가 세 번째 결혼을 한 콘스탄티누스 9세의 황후가 된다. 조에 황후는 남편이 바뀔 때마다 남편의 얼굴과 명문, 조에의 얼굴 부분을 바꾸었다고 한다. 그래서 다른 성화와는 달리 이 성화를 조에의 모자이크라고 한다. 콘스탄티노스 9세 역시 교회에 헌납하는 돈 자루를 들고 있고 조에는 봉납명세를 적은 문서를 들고 있다.
설교단 모자이크
1층 본당의 설교단 안쪽에 예수를 안은 성모를 중심으로 가브리엘과 미카엘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원래 6세기에 그려진 것인데 성상파괴운동으로 파괴되었다가 9세기에 다시 그린 것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그림으로 추정한다. 밑에서 위를 쳐다보면 아름다운 성상이 사람들에게 항상 희망을 주는 열굴로 내려 보고 있다.
1층 회랑의 유물
남서쪽문 모자이크
2층을 한 바퀴 돌아 1층으로 내려 오면, 남서쪽문으로 나간다. 이 문위에는 예수를 안은 성모마리아와 좌우에 황제가 새겨져 있는 모자이크가 있는데, 오른쪽의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콘스탄티노플을, 왼족의 유스티아누스 황제는 소피아 대성당을 봉헌하는 장면이다.
아야소피아 외부 유물
아야소피아의 옆면
아야소피아 분수
시내를 여러 곳 돌아다니다 아야소피아를 구경하기 전에 점심을 먹기로 하니 아들이 또 자기가 찾아 놓은 곳으로 가자고 한다. 아들을 따라 가니 아야소피아 바로 뒤의 골목에 있는 레스토랑인데 겉으로 보기에도 만만해 보이지는 않는 집이다. 그래도 이제 여행도 끝나가고 비용에 별로 구애를 받지 않고 싶고, 아들이 나를 이끌고 이 긴 여행을 무사히 마쳐 가는데 그 정도의 희망은 들어주어야 하기에 곧장 가자고 했다. 들어가 보니 상당히 고급의 레스토랑이다. Matbah라는 곳인데 원래의 이 단어의 뜻은 술탄의 부엌이라는 의미이다. 그만큼 고급스럽고 자부심이 강한 곳으로 값도 상당하지만 적당하게 음식을 시켜 먹었다. 분위기도 좋고 음식도 훌륭한 레스토랑이었다.
점심을 먹은 레스토랑 전경
메뉴판 - 고급스런 냄새가 난다.
식사가 나오기 전에 주는 음료
먼저 나온 에피타이저와 빵
레스토랑에서 보는 아야소피아
메인 디쉬와 후식
레스토랑 내부 모습
이 집은 상당히 유명한 집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인터넷을 검색하니 이 집 상호만 넣어도 바로 이스탄불 구 시가지의 레스토랑이라고 검색이 된다. 가격이 절대 만만한 집이 아니니 적당히 조심해야 한다.
아야소피아를 보고 나서
아야소피아는 이스탄불의 상징뿐만 아니라 인류 문화유산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처음의 성당 건설은 당시의 유명한 수학자인 밀레토스의 이시도로스와 트릴레이스의 안테미오스의 설계로 5년 10개월 동안 진행되었다 한다. 56m의 높이 위에 31m 짜리 돔을 기둥을 하나도 받치니 않고 올리겠다는 것은 당시의 기술로는 너무나 무모한 설계였다. 그래서 공사 중에 계속 설계가 바뀌고 외부 보강 공사를 하였다. 특히 돔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해 아치가 변형되어 완벽한 반원 형태가 아닌 곳이 많고, 외벽에는 돔이 바깥으로 밀려나는 것을 막기 위해 지지대가 계속 보강되었다. 그 뒤에도 많은 보강 공사가 있었지만 이런 여러 결함에도 불구하고 아야소피아는 고대건축사에 길이 남을 건물이다. 자세한 설명은 여기서 하지 않겠다.
그리스와 터키를 여행하면서 많은 고대의 유적과 건축물을 보면서 감탄사를 끊임없이 토했다. 하지만 이 아야소피아를 보고 그 건물의 건축과정과 내부의 아름다운 모습, 종교적인 경건함을 함께 느낄 때 우리는 아무런 지적인 호기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그저 우리는 눈으로 아야소피아를 보고 가슴으로 감상하고 즐기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아야소피아를 내 눈으로 보는 것만 해도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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