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鶴)의 오딧세이(Odyssey)

스페인, 산티아고 까미노 길을 걷다. 13(05.29, 아헤스 - 부르고스)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오늘의 걷기 길 : 아헤스 - 아타푸에르카(2.5km) - 카르데 뉴엘라 리오피코(6.2km) - 오르바네하 리오피코(2km) - 비야 프리아(3.6km) - 부르고스(7.9km)

 

 오늘은 아헤스에서 출발하여 부르고스까지 가는 약 22km의 비교적 짧은 길이다. 일찍 San Anton Abad 알베르게서 일어나 옆에 있는 거실 같은 곳을 가니 아침 해가 떠오르는 경치가 장관이다. 이곳은 호텔을 겸하고 있기에 쉬는 공간도 아주 넓게 자리 잡고 소파도 갖추어져 있었다. 그리고 휴게실을 기품이 있으며 아름답고 여유롭게 꾸며 놓았다.

 

 San Anton Abad 알베르게 창밖으로 보는 일출의 모습

 

 San Anton Abad 알베르게에서  아헤스의 알베르게에서 보내준 차를 타고 아헤스에 도착하니 다른 날에 비해서는 상당히 늦은 시간이다. 하지만 오늘의 길은 그렇게 어려운 길이 아니기에 길을 떠났다. 길을 떠나면서 옆을 보니 텐트가 보인다. 어제 우리가 아헤스에 도착했을 때 개를 데리고 다니는 술에 취한 나그네가 있었는데 그가 개와 함께 텐트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아마 순례자인 것 같았는데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그 사람의 행동도 모두 자신의 인생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했다.

 

아헤스의 거리

 

 아헤스에서 아타푸에르카에 이르는 길은 산 후안 데 오르테가의 노력으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 사이에 펼쳐지는 평원은 중세 나바라의 왕 가르시아 엘 데 나헤라의 군대와 그의 형제 페르난도 데 카스티야의 군대가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이 전투에서 가르시아 왕이 사망하고 나바라의 군대는 패배하여 결국 이베리아 반도에서 나바라 왕국의 왕위 다툼이 끝났다.

 전설에 따르면 살아남은 왕의 부하들이 죽은 왕의 내장을 아헤스 성당의 입구 반석 밑에 묻었다고 한다.

 

아타푸에르카로 가는 길 표시

 

아타푸에르카로 가는 길의 평원

 

 아타푸에르카로 가는 길에 갑자기 돌들이 원형으로 늘어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고대 원시인의 형상이 그려진 아타푸에르카의 간판이 보인다. 이제 순례자는 유럽 대륙에서 제일 오래되었다는 인류의 고향 아타푸에르카(Atapuerca)에 도착한다. 마을 입구에는 마을에서 약 3km 정도 떨어져있는 최초의 인류인 안테세소르의 유적으로 가는 샛길이 있다. 이 유적의 발견은 유사이전 인류의 동굴생활과 매장관습 등 고고학적으로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궁금점이 생기고 호기심도 있었지만 내가 가야 하는 길과는 멀리 떨어져 있어 가 보지는 못했다. 그래서 자료로만 소개한다.

 

 부르고스주에 있는 자치시인 아타푸에르카(Atapuerca)는 전혀 20세기 최고의 고고학적 유적이 발견된 곳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작고 볼품없는 마을이지만, 지금까지 발견된 증거로 볼 때 언덕의 복잡한 동굴들은 약 100만 년 전부터 다양한 현생 인류의 주거지로 사용되었음이 확실하다. 80만 년 전에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인류의 유골 잔해가 발견된 그란돌리나와 시마 데 로스후에소스 유적에서는 아프리카에서 서유럽으로 이주한 초기 현생 인류의 신체적 특성과 풍습에 대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1977년에 이 새로운 종족을 '호모 안테세소르(Homo Antecessor)'라는 신종 인류로 명명하였는데 이는 라틴어로 '탐험가'라는 뜻이다. 호모 안테세소르는 네안데르탈인과 더불어 현생인류의 마지막 공동 조상으로 추정된다. 근처에 있는 시마 데 로스후에소스는 '뼈 구덩이'라는 뜻인데 수천 명에 달하는 유골이 발견되어 세계에서 연구 대상이 가장 풍부한 고고학적 유적지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아타푸에르카 고고 유적(Archaeological Site of Atapuerca)은 스페인의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2000년에 등재되었다.

 

 아타푸에르카 고고 유적(Archaeological Site of Atapuerca) 표시

 

 아타푸에르카(Atapuerca) 마을 주변의 여러 가지설명판

 

 유적지를 안내하는 표지를 지나 약간의 언덕을 따라 올라가니 아타푸에르카(Atapuerca) 마을이 나온다. 마을의 카페에서 시간이 제법 지난 아침이지만 커피와 빵으로 간단히 요기를 하고 다시 길을 떠난다.

 

 아타푸에르카 마을 출구에서 왼쪽으로 나있는 오르막길은 숲길로 이어지는데 철조망과 평행하게 까미노가 이어져 있다. 철조망 안에는 여러 종류의 목장이 보인다. 아마 목장과 까미노 길을 구별하기 위해서 철조망을 둘러친 것 같다. 떡갈나무 숲으로 이루어진 완만한 언덕을 올라 정상에 오르면 눈앞에 펼쳐져 있는 광활한 평원이 내려다보인다. 저 멀리 아스라이 보이는 부르고스 대성당의 높다란 탑을 바라보며 돌과 나무로 만들어진 높다란 십자가상을 지나면 비얄발에 도착한다. 조그만 마을 비얄발과 다음 마을인 카르데뉴엘라 리오 피코는 거의 붙어있다. 2km 정도 떨어져있지 않은 조그마한 마을 카르데뉴엘라 리오 피코와 오르바네하 리오피코를 지나간다.

 

 카르데뉴엘라 리오피코(Cardeñuela Riopico)는 부르고스 지방의 피코강 계곡에 있는 소규모 마을로 아타푸에르카 산의 남쪽에 위치하는 해발고도가 933m에 이르는 산간마을로 카르데뉴엘라 리오피코 마을과 비얄발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이 지역은 선사시대부터 인류가 살던 곳으로 석기와 동굴 벽화가 발견됐다. 오르바네하 리오피코(Orbaneja Riopico)는 부르고스주에 있는 산티아고로 가는 순례길이 지나는 피코 강변에 위치한 조용한 마을이다.

 

 

철조망 안에 보이는 목장

 

언덕 정상부의 십자가

 

비얄발 표지

 

카르델뉴엘라 리오피코 안내도

 

길가의 푸드 트럭

 

카르델뉴엘라 리오피코 마을

 

카르델뉴엘라 리오피코 마을 안내도

 

지나는 길에 보는 고목

 

 

 오르바네하 리오 피코의 출구에서는 자동차 전용도로를 따라 다리를 건너 오른쪽으로 향하면 고속도로와 평행하게 지나는 비야프리아를 지나는 까미노 길을 만나게 된다.

 비야프리야를 지나는 까미노는 약 10km에 걸쳐 공장지대의 어수선함과 고속도로가 주는 소음이 기다리고 있다. 원래의 루트보다는 약 1km가 짧지만 까미노가 주는 기쁨을 누리기에는 부족함이 많다. 대도시 부르고스의 입구에 도착한 순례자는 대성당까지 도착하기 위해서는 도시의 반대편까지 신시가지의 중심부를 통과하여야 하며 거리는 약 4km가 넘는다.

 

 

 부르고스(스페인어: Burgos)는 스페인 중북부의 도시로 카스티야 레온 지방 부르고스 주의 주도로 산티아고 순례길 루트 중에 있는 주요 도시 중 하나이다. 고대부터 켈트족의 취락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9세기 말 아스투리아스 왕국에 의해 요새 도시가 건설되었다. 해발 850m 정도의 언덕에 위치하고 있으며, 1035년부터 1560년까지 카스티야 왕국의 머리'라고 불렸던(Cabeza de Castilla) 중심지 중 하나인 유서 깊은 도시로 중세시대에 지은 교회와 성당, 수도원 등 역사 유적이 즐비하다. 11세기경 무어인을 상대로 활약한 전설적 영웅 시드 캄페아도르(엘시드)의 출생·활약지로서 스페인 사람들이 자랑으로 삼고 있다.

 스페인 내전 당시 국민파의 수도였으며, 1936년부터 1939년까지 스페인 군사 정부의 임시 수도였다. 엘 시드의 탄생지로 유명하고, 부르고스 대성당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고 그 외에 인류 진화 박물관이 있다. 부르고스를 대표하는 산타 마리아 대성당과 같은 아름다운 성당 건축물과 오래된 거리는 순례자들에게 중세의 장엄함을 아낌없이 나눠준다.

 현지 특산물로 모르씨야(morcilla)라 하는 순대는 생긴 거나 맛이 한국 순대와 거의 똑같아서 한국의 여행자들에게 아주 좋은 선물이다. 순댓국도 있으니 메뉴나 식당 점원에게 morcilla con caldo(모르씨야 꼰 깔도, 국물을 넣은 순대)라 물으면 된다.

 

 부르고스 시내로 들어가면 신시가지가 나온다. 알베르게가 집중되어 있는 곳은 구시가지인 대성당 주변이다. 도시가 아주 크지만 길을 잃을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 거리에 붙어있는 까미노 표시만 잘 보고 가면 시내를 벗어나 대성당 앞으로 인도한다. 도시의 아름다운 모습을 즐기며 신시가지를 걸어가면 여러 동상들을 본다. 부르고스와 연관이 있는 인물들이다. 

 

순례자상

 

'인간의 진화' 박물관 표시

 

부르고스 시내

 

로드리드 리아스 백작(엘 시드) 상

 

도나 히메냐 - 엘 시드의 아내상

 

 신시가지 시내를 지나 대성당 가까이에 가니 공원이 있다. 공원에 앉아 휴식을 좀 하고 대성당으로 가기로 했다. 아무래도 대성당에 가면 구경을 하느라 쉬지를 못할 것 같았다.

 

멀리 보이는 대성당의 탑

 

대성당 주변의 공원

 

카를로스 3세 상

 

 

 

 부르고스의 구 시가지에는 흥미로운 유적들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대성당을 중심으로 수많은 광장이 조성되어 있고 그 광장마다 부르고스의 많은 유명한 건축물들이 있다. 그 중에서 대성당 조금 위의 산 후안 단지는 16세기에 만들어진 산 후안 문, 15세기 건축물인 산 후안 수도원, 부르고스의 수호성인이 산 레스메스의 무덤이 있는 산 레스메스 성당 그리고 15세기에 만들어진 산 후안 병원이 모여 있는 구역이다. 순례자 사이에서 많이 알려져 있는 산 후안 단지의 문은 오래된 성벽을 따라서 줄지어 있다. 그 외에도 16세기에 까를로스 5세를 기려 만들어진 산타 마리아 아치, 돌과 벽돌이 조화를 이룬 건축물로 무데하르 양식의 영향이 두드러진 산 에스테반 문, 부르고스를 떠날 때 만나게 되는 두 개의 탑인 산 마르틴의 문 등등이 있다.

 

 수많은 광장 중에서 .이제 대성당이 있는 산타 마리아 광장으로 들어선다. 광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대성당을 구경을 하고 있다.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고딕 양식의 대성당은 외양만 볼 것이 아니라 꼭 내부도 둘러보아야 한다. 성당을 처음 본 느낌은 무어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외양만 보아도 너무 화려한 모양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사실 이 주변만 둘러보려고 해도 하루 이상을 부르고스에 머물러야 하는데 이 길을 걷는 나그네는 그럴 여유가 없다. 그래서 대성당을 중심으로 구경을 한다.

 

 부르고스 대성당(Burgos Cathedral)이라고 흔히 말하는 산타 마리아 대성당 (Catedral de Santa Maria)은 스페인에서 성당 건물 하나가 1984년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만큼 역사성, 예술성이 높은 건물이다. 레온 대성당과 카스티야를 대표하는 고딕 대성당으로서 경쟁하는 사이로 프랑스의 고딕 양식이 스페인에 융합된 훌륭한 예를 보여주는 건축물이다.

 이 성당은 이름에서 보듯이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하기 위하여 건축된 것으로, 1221년 마우리시오(Mauricio) 주교가 주도하여 공사를 시작하였다. 1293년 가장 중요한 첫 단계 공사가 완성된 후 중단되었다가 15세기 중반에 재개되어 1567년에 완공되었다. 뛰어난 건축 구조와 성화(聖畵), 성가대석, 제단 장식벽, 스테인드글라스 등의 예술 작품과 독특한 소장품 등 고딕 예술의 역사가 집약된 건축물로서 이후의 건축 및 조형 예술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대성당의 건축물에 대한 설명과 내부의 여러 성화나 예술품, 구조 등을 설명하기에는 우리가 가진 지식이 너무 적다. 그래서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으니 백과사전을 참조하는 것이 좋다.

 

 이 성당은 11세기 레콩키스타(Reconquista이슬람교도에게 점령당한 이베리아 반도 지역을 탈환하기 위한 기독교도의 국토회복운동)의 부르고스 출신의 영웅 로드리고 디아스 데 비바르(Rodrigo Díaz de Vivar)의 묘지로 유명하다. '엘시드(El Cid])'라는 별칭으로 더 잘 알려진 그의 유해는 1919년 아내인 도냐 히메나(Doña Jimena)의 유해와 함께 성당 중앙, 플라테레스크(Plateresque) 양식의 금속 세공으로 장식한 돔 아래에 안치되었다.

 

대성당 외부의 여러 아름다운 모습

 

 대성당 외부를 이곳저곳 다니면서 구경을 하고 내부로 들어가는 입장권을 구입하려니 순례자는 50%를 할인을 해 준다. 배낭에 매여 있는 조가비를 보고는 인정을 한다. 함께 간 일행은 바깥에서 나를 기다리고 혼자서 내부에 들어가니 장엄함과 황홀함에 눈을 둘 데가 없다. 대성당 내부만 돌아보려고 해도 한나절은 걸릴 것 같은 느낌이라 후일을 기약하고 대략 한 바퀴를 돌아보았다.

 

대성당의 내부

 

 이 길을 걸은 사람들 중에서 많은 사람이 레온이나 산티아고의 성당보다 이 부르고스의 성당이 더 아름답고 하는 이유를 조금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사람을 압도하는 여러 예술품을 보니 이것을 보지 못했다면 너무나 아쉬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당을 나와 광장을 지나 알베르게를 찾아가는 길에 산타 마리아 아치를 통과한다. 산타 마리아 아치(Arco de Santa Maria)는 황제 까를로스 5세를 기리며 16세기에 건설되었다. 성벽을 통해 부르고스로 들어가는 여러 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입구로, 현재는 부르고스 주의 수도인 이 도시에서 문화적으로 가장 중요한 곳으로 1943년 스페인 문화 자산으로 지정되었다.

 

산타 마리아 아치(Arco de Santa Maria)

 

부르고스를 흐르는 강

 

 대성당을 구경하고 알베르게를 찾아가 일행들과 오늘 저녁은 부르고스에 있는 한식당에 가기로 약속하고 잠시 쉬다가 식당문이 열리는 시간에 맞추어 식당으로 가니 한국 사람들이 많이 줄을 서고 있다. 소풍2라는 이름을 가진 한식당은 한국인이 운영하면서 한국에서 가져온 라면이나 소주, 그리고 여러 한국음식을 파는 곳이었다. 앞에서 말한 우리 일행 4명은 한 테이블에 앉아 비빔밥을 시키고 오랜만에 한국의 정취를 느껴 보려고 소주를 청하여 마셨다. 스페인에서는 주류 가운데는 와인이 가장 싸고 그리고 맥주도 싸기에 여태까지 주로 이 술을 마셨는데 오늘은 이곳에서는 아주 비싼 한국의 소주를 마신다.

 

소풍2 한식당

 

슈퍼 마켓 풍경

 

광장에 있는 병사 상

 

 저녁을 먹고 다시 대성당으로 가서. 대성당 뒤에 있는 부르고스를 일망무제로 볼 수 있는 전망대에 올라갔다. 전망대에서 보는 부르고스는 또 다른 풍경을 보여주었다. 우리가 대성당에 집착하여 대성당 주변을 보는 것은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한 것과 같았다. 전망대에서 보는 부르고스는 나무가 아니라 숲이었다. 넓게 펼쳐진 시내에는 여러 유적지의 건물들이 보이고 해가 지기 직전의 풍경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다리 밖에서 보는 대성당

 

산 에스테반 성당

 

전망대에서 보는 해질 무렵의 부르고스

 

 전망대에서 부르고스의 경치를 즐기다가 카페에 앉아 카페가 문을 닫을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 새 해가 지고 있었다. 전망대에서 내려오니 부르고스 대성당에 조명이 비치어 또 다른 경치를 자아낸다. 대성당의 밤경치가 좋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을 하였는데 의도하지 않게 대성당에 조명이 비치는 광경을 보게 되는 행운을 즐겼다.

 

조명을 밝힌 부르고스 대성당의 야경

 

밤의 부르고스 거리

 

 전망대에서 내려와 알베르게로 돌아오니 이번 까미노 길에서 가장 늦은 시간이었다. 보통 저녁 9시 이전에 잠자리에 드는 것이 보편적이었는데 오늘은 벌써 밤 11시가 되었다. 모두들 시간이 늦어 빨리 잠자리에 들고 내일을 기약한다.

 

스페인, 산티아고 까미노 길을 걷다. 12(05.28, 벨로라도 - 아헤스)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오늘의 긷기 길 : 벨로라도 - 토산토스(4.8km) - 비얌비스티야(1.9km) - 에스피노사 데 까미노(1.6km) - 비야프랑카 몬테스 데 오카(3.6km) - 산 후안 데 오르테가(12km) - 아헤스(3.6km)

 

 오늘은 아헤스까지 약 28km의 길로 길지도 짧지도 않은 거리이다. 이제는 익숙해진 시간을 맞추어 정해진 순서대로 기계와 같이 일어나고 움직여서 길을 떠나는 시간은 아침 6시 30분이다. 너무 일찍 떠나는 느낌도 있지만 알베르게에 머물던 순례자들은 거의 대부분이 벌써 떠나고 몇이 남아 있지 않다. 순례자를 위한 여러 서비스를 제공하는 마을 벨로라도를 떠나는 오늘의 여정은 거리는 길지 않지만 해발 고도를 400m 가까이 올라가야 한다. 하지만 어려운 길이 아니기에 평소와 같은 마음으로 길을 걸으면 된다.

 

 아쉬운 미련을 마음속에 가지고 벨로라도를 나와 토산토스를 거쳐 에스피노사 델 까미노까지의 길은 아주 완만한 구릉이 계속되는 평야지대로 지난 여정과 같이 고속도로와 나란히 도로의 오른쪽을 따라 이동한다.

 길을 걸어가면서 보는 그림자가 앞으로 길게 뻗어 이 길이 서쪽으로 쭉 이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나는 서쪽으로 계속해서 길을 가는 키다리 아저씨와 같은 모습이다.

 

 

 

알베르게 벽의 순례자 그림

 

길바닥의 표식(순례자를 격려하는 글인 듯하지만 의미를 모르겠다.)

 

벨로라도 거리

 

산티아고 까미노 길을 지나 - 부르고스 지방 안내 설명

 

벨로라도를 건너는 티룬 강의 다리

 

건물 벽에 그려진 뷰엔 까미노(Buen camino) 그림

 

키다리 아저씨의 그림자

 

 약 한 시간을 넘게 길을 따라 가서 오른쪽에 들어가면 나타나는 토산토스는 오카 산의 굽이치는 풍경 안에 자리 잡은 조그만 마을이다. 토산토스의 입구에서 정면에 보이는 거대한 돌산에는 몇 개의 동굴이 뚫려 있으며 가운데에 소박하고 단순한 모양의 라 뻬냐 성모의 바위 위 성당이 있다는데 올라가지 못했다. 토산토스에 도착하니 이른 아침인데도 문을 연 카페가 있어 들어가서 커피를 한잔 마시고 쉬다가 다시 길을 떠났다. 언제부터인가 아침에 길을 가면서 커피를 한잔 마시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마을 뒤로 이어지는 까미노 길을 따라 아름다운 밀밭 사이를 걷다 보면 어느새 밀밭 사이로 비얌비스티야 성당이 보이지만 그냥 지나 에스피노사 델 까미노로 향한다. 토산토스에서 비얌비스티야까지는 1.9km의 짧은 거리고 거기서 또 에스피노사 델 까미노까지는 1.6km의 짧은 거리다. 짧은 거리에 여러 마을이 계속해서 나오는 구간이다. 길을 가면서 보는 벌판과 하늘은 너무나 고요하고 맑아서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계속해서 보는 풍경이지만 볼 때마다 감탄을 하는 것은 우리가 너무 이런 풍경에 목말라 했던 것이 아닐까? 이런 풍경을 보고 즐기는 것만으로도 이 길을 걷는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티없이 맑게 파란 하늘

 

카페 선전 

 

비얌비스티야 입구

 

 밀밭 사이로 이어지는 까미노 길을 약 1km 걸으면 나오는 공원을 오른쪽으로 끼고 고속도로를 건너 가다보면 왼쪽에 에스피노사 델 까미노 마을이 보인다. 전원풍의 아름다운 목조건물들이 특색을 이루는 마을로 평화로운 모습이다. 별다른 특징이 없는 에스피노사 델 까미노 마을을 통과하여 비야프랑코 몬테스 델 오카로 가는 길은 평탄한 들판을 지나는 길이다. 스페인을 걸으며 엄청 보던 밀밭이 펼쳐지는 들판이다. 밀밭 사이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언덕을 올라가면 멀리 비야프랑카 몬테스 데 오카가 보인다. 내리막을 내려오면 산 펠리세스 수도원의 유적을 만나며 오카 강을 건너 마을에 도착한다.

 

리오질라 부르갈레사(오카계곡과 티란계곡 사이) 설명

 

계속 이어지는 밀밭길

 

쭉 뻗은 아스팔트길

 

비야프랑카 거리 표시

 

눈을 맑게 하는 탁 트인 벌판과 푸른 하늘

 

비야프랑카 몬데스 데 오카 안내도

 

 마을 입구의 안내도를 보며 마을로 들어선다. 비야프랑카 몬테스 데 오카는 맑고 푸른 개울이 있고, 마을의 근교에는 오래된 떡갈나무 서식지이면서 너도밤나무와 자작나무 숲이 있다. 이 숲에는 노루와 늑대가 살고 있다고 한다.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와 부르고스의 중간에 위치한 이 마을에는 여러 전설과 많은 전통이 남아 있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오카산의 전설은 다음과 같다.

 

 오카 산은 오랫동안 순례자들을 노린 도둑들이 들끓던 곳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이곳에서 한 순례자가 도둑에게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빼앗기고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슬픔에 잠긴 순례자의 부모가 간절하게 야고보에게 기도를 올리자 죽었던 순례자가 다시 살아났다고 한다.

 

비야프랑카 몬데스 데 오카 거리

 

 거리를 걸어가면서 보는 산티아고 교구 성당 (Iglesia Parroquial de Santiago)18세기 후반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성당으로, 필리핀에서 가져왔다고 전해지는 거대한 조개껍데기로 장식한 세례반이 있다.

 

비야프랑카 몬데스 데 오카의 유적 설명판

 

성당 옆에 비야프랑카 몬데스 데 오카의 유적을  설명하는 안내판이 서 있다. 이 안내판에는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쳤던 산 펠리세스 데 오카 수도원 (Monasterio de San Felices de Oca), 산티아고 교구 성당 (Iglesia Parroquial de Santiago), 오카의 성모 소성당 (Ermita de la Virgen de la Oca) 등이 설명되어 있고, 아헤스까지 길도 안내되어 있다.

 

 산티아고 교구 성당 (Iglesia Parroquial de Santiago)

 

 비야프랑카 몬테스 데 오카의 카페에서 주스를 마시고 쉬다가 길을 떠나 산티아고 교구 성당 (Iglesia Parroquial de Santiago)의 옆길로 올라가니 아주 옛날 건물의 느낌이 나는 알베르게가 있다. 이런 곳에서 숙박을 했으며 하는 안타까운 생각을 하고 지나쳤는데 우여곡절 끝에 결국 여기서 숙박을 하게 되었다. 그이야기는 뒤에서 다시 하겠다.

 

 비야프랑카 몬테스 데 오카를 출발하기 전에는 충분한 휴식과 물을 충분히 준비하는 것이 좋다. 떡갈나무와 소나무 숲으로 우거진 오카 산의 정상을 오르는 길과 산 후안 데 오르테가로 가는 내리막길의 12km나 되는 길에는 휴식을 취할만한 곳이 없다.

 

 비야프랑까 몬떼스 데 오까에서 나오는 길은 산티아고 성당을 왼쪽으로 끼고 오래된 병원의 모퉁이를 돌아 오카 산을 향한 험한 비탈길로 이어진다. 길은 떡갈나무와 소나무로 우거진 숲을 지나게 되며 까미노는 철책을 가로질러 내리막을 내려가면 조그마한 시내가 나오고 오늘의 길에서 가장 어렵다는 오르막 비탈길을 만나게 되지만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우리나라에서 산을 좀 올라 본 사람에게는 심하게 어려운 길이 아니다. 떡갈나무 숲을 통해 산의 정상을 오르면 거대한 고원지대를 만나게 되고, 길은 어렵지 않은 내리막 산책길로 변한다. 이제 산 후안 데 오르테가 마을이 이제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부르고스 지방 안내도(오카 산맥도 설명)

 

끝이 보이지 않는 숲길

 

공동묘지 표시

 

 오카 산의 정상에서 조금 내려오니 추모비 같은 것이 보였다. 비 표면을 보니 1936이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보는 순간,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기억은 바로 프랑코 정권에서의 스페인 내전이다. 국제정세의 복잡한 이해관계에 의한 내전을 한마디로 정리할 수는 없지만 우리에게는 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와 피카소의 걸작 '게르니카'로 잘 알려져 있는 전쟁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을 당한 비극적인 전쟁이었는데 역시나 그 학살당한 사람들을 추모하는 추모비였다.

 

1936년 스페인 내전에서 학살당한 사람들의 추모비

 

길가의 간이 푸드 트럭

 

산 후안 데 오르테가의 표시

 

산 후안 데 오르테가에서 부르고스까지 안내도

 

 산 후안 데 오르테가는 12세기부터 교황을 비롯하여 평범한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의 헌신과 노력으로 만들어진, 까미노에서 가장 오래된 유적 도시이다. 이들의 노력으로 외딴 마을은 순례자들은 편히 쉴 수 있는 아름다운 도시로 변했다. 산 후안 데 오르테가는 오래된 숲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마을로 로마네스크와 고딕, 바로크 양식 등의 우아한 건물이 있으며, 지금도 눈으로 경험 할 수 있는 빛의 기적이 일어나는 곳이다.

 

 빛의 기적이란 춘분(321)과 추분(921)이 되면 산 후안 데 오르테가 성당의 주두에 일어나는 단순한 우연이라고만은 할 수 없는 신기한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오후가 되면서 약 10분 정도 햇빛이 성당 주두의 부조를 비춘다. 처음으로 그리스도가 태어날 것이라고 성모에게 나타난 대천사의 부조부터 시작하여 예수의 탄생, 예수를 경배한 동방박사, 목동들에게 예수가 태어났다고 알려주는 장면을 차례로 비춘다.

 첫 번째 부조에서는 성모는 천사가 아니라 주두를 비추는 빛을 바라보는 것처럼 보인다. 빛이 만들어내는 신비로운 자연현상이자 잊을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이 현상을 빛의 기적이라고 부른다.

 

무슨 표시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 마을에 있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산 후안 데 오르테가 수도원 (Monasterio de San Juan de Ortega)12세기에 만들어졌다. 건물 내부에는 복잡하게 장식된 주두가 눈에 띄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인정되는 고딕 양식의 천개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조각된 산 후안 데 오르떼가 성인의 석관이 있다. 이 석관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진다.

 

 산 후안 오르테가 성인은 임신과 다산을 도와준다고 사람들이 믿어져 왔기에, 이사벨 여왕도 이 성인의 무덤을 찾아와 경배하며 자신이 무사히 아기를 낳기를 기도했다. 기도가 끝나고 여왕은 성인의 유해를 볼 수 있도록 돌로 된 석관을 열라고 지시했다. 성인의 무덤을 열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성직자와 수도사들은 망설였지만, 여왕의 고집으로 석관을 열자 하얀색의 벌떼가 쏟아져 나왔고, 여왕은 부패하지 않은 산 후안 데 오르테가의 시신을 볼 수 있었다. 놀라운 현상에 두려움에 떨던 여왕이 사람들을 시켜 석관을 닫자 벌들은 다시 석관의 작은 구멍으로 날아 들어갔다. 그래서 여왕과 사람들은 이 벌들이 성인이 구원해주기를 기다리는 태어나지 못한 영혼들이라고 여겼다.

 

고딕 양식의 발다친에 대한 설명

 

중앙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후진 설명

 

산토도밍고 데 라 칼사다의 조각 설명

 

산토도밍고 데 라 칼사다의 조각

 

산 후안 데 오르테가의 무덤(석관)

 

수도원 표석

 

산 후안 데 오르테가 수도원 (Monasterio de San Juan de Ortega)

 

 산 후안 데 오르테가에서 쉬면서 같이 걷는 일행과 가볍게 맥주를 한잔 마셨다. 제법 먼 길을 걸어 목이 마르기도 하고 이제 오늘의 목적지인 아헤스는 멀지 않기 때문이다.

 아헤스로 가기 위해서 마을을 빠져나오면 곧 철길이 나오고 길이 세 개가 있으나 바로 이어지므로 고민할 필요는 없다. 곧 커다란 두 개의 떡갈나무와 나무로 만들어진 십자가가 있는 언덕이 나오는데 앞쪽으로는 앞으로 끊임없이 걸어야 하는 황무지가 보이고 잠시 후에 나바라의 왕이었던 가르시아의 무덤이 있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는 아헤스가 순례자를 맞아준다.

 

아헤스 가는 길 안내도

 

멀리 보이는 아헤스 마을

 

 오래된 마을 아헤스는 중세 시대 기독교 왕국의 패권을 뒤흔든 중요한 장소였고, 또한 전원 속의 마을이라는 매력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까미노를 순례하는 순례자라면 이 그림 같은 풍경의 마을을 그냥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아헤스 안내도

 

아헤스의 풍경

 

 아헤스에 도착하여 숙소인 알베르게를 찾아가니 문제가 발생했다. 알베르게가 이중으로 예약을 받아서 많은 사람들이 입실을 못하고 있었다. 우리 팀의 인솔자는 예약한 영수증까지 제시하였지만 주인은 어느 쪽의 예약을 인정할 수가 없는 입장인 듯했다. 오랜 시간의 실랑이 끝에 알베르게의 주인이 다른 곳에 숙소를 마련해 놓았다며 차를 동원하여 약 10명 정도를 이동시켜 준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일 아침 일찍 다시 차를 동원하여 이곳 아헤스로 데려다 준다고 하였다. 아헤스에는 알베르게가 충분하지 않아 차를 동원하여 약 20km나 떨어져 있는 비야프랑카 몬데스 데 오카까지 이동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여행 중에 일어나는 한 해프닝으로 생각하고 이동하였다. 그런데 전화위복이라고 할까? 이동하여 간 곳은 낮에  비야프랑카 몬데스 데 오카를 지나면서 보았던 San Anton Abad라는 호텔과 알베르게를 겸해서 운영하는 아주 멋있는 고성과 같은 알베르게였다. 아마 아헤스의 주인이 다소 손해를 보더라도 성의를 다 한 것 같았다. 이 알베르게는 시설이나 음식 등 여러 면에서 최고의 알베르게로 인정할 만 하였다.

 

 San Anton Abad 알베르게 들어가는 입구

 

알베르게 안의 여러 장식품(정확히는 모르겠으나 십자군과 연과????)

 

알베르게의 뜰 풍경

 

 이 알베르게에서 제법 늦은 저녁을 먹었다. 식당에 가니 역시 순례자 메뉴를 팔고 있었고 가격은 거의 같았다. 식당의 등급이나 알베르게의 수준 등을 보면 좀더 비싸게 받을 수도 있었는데 아마 이 음식의 가격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는 것 같았다. 저녁을 배불리 먹고 이곳으로 같이 온 일행들과 담소를 나누고 침실로 향해 가니 저번에 에스테야에서 만났던 프랑스(?)인 일행이 모여 있었다. 말이 통하지 않아 그냥 반갑게 인사를 하니 그들도 모두 반가워한다. 까미노 길을 걸으며 만났다가 헤어지고 다시 만난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오랜만에 좋은 시설을 갖춘 알베르게에서 배불리 먹고 편안하게 잠자리에 든다.

스페인, 산티아고 까미노 길을 걷다. 11(05.27,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 - 벨로라도)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오늘의 길 :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 - 그라뇽(7km) - 레데시알 데 카미노(4km) - 빌로리아 데 라 리오하(4km) - 비야 마요르 델 리오(3.4km) - 벨로라도(5.5km)

 

 오늘은 산토 도밍고 데 칼사다를 출발하여 벨로라도까지 약 22km의 비교적 짧은 길이다. 처음 출발하여 그라뇽까지 가는 제법 긴 길은 휴식할 곳도 없지만 그 뒤에는 한 시간의 거리마다 마을이 있기에 걷기에 편리한 길이다.

 

 이제는 익숙한 걷기라 정해진 시간만 되면 길 걷기를 준비하고 간단히 아침을 먹고 길을 떠난다.

 마요르 거리를 따라 걷는 순례자는 대성당을 오른쪽으로 두고 도시를 감싸고 있는 성벽 사이를 통과하여 오하 강을 건너야 한다. 강을 건너면 까미노 길은 순례자에게 악마의 유혹과도 같은 쭉 뻗은 고속도로와 평행하게 이어져 있다.

 

 5km 정도의 이 길은 부드러운 흙길이나 트럭의 소음이 심하고 과속하는 트럭이 많으니 안전을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고속도로와 나란히 걷다보면 자동차 도로와 이어지는 길이 나온다. 이 길이 그라뇽과 가깝지만 이 도로를 피해서 좌측으로 꼬불꼬불 이어지는 농지를 따라 3km 정도를 걷는 것이 안전하.

 

 길을 따라 언덕을 오르면 용감한 자들의 십자가라 불리는 단순한 디자인의 십자가를 만나게 된다. 역사적으로 비옥한 그라뇽의 땅은 늘 다툼의 대상이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19세기 초반에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와 그라뇽 두 마을 사이에 위치한 데에사 밭을 두고 싸운 것이었다. 마을에서 대표로 한 명씩을 뽑아서 목숨을 걸고 결투를 해서 이긴 쪽 마을이 땅을 차지하기로 정했는데, 싸움에서 승리한 사람은 그라뇽의 마르띤 가르시아였다. 마을 사람들은 이 결투를 용감한 자들의 십자가’(Cruz de los Valientes)라고 불렀는데, 그 이유는 이 사건을 기리기 위해 결투가 일어난 자리에 십자가를 세웠기 때문이었다. 그라뇽에는 마르띤 가르시아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으며 마을의 주일미사에서는 그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풍습이 남아있다.

 

산토도밍고 데 칼사다의 마요로 거리

 

지역 트레일 네트워크(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안내판

 

용감한 자들의 십자가

 

 이제 라 리오하주의 조용하고 오래된 마을인 그라뇽에 도착하게 된다. 비옥한 토지에 둘러싸여 있는 이 마을은 까미노 데 산티아고에서 지나는 라 리오하 주의 마지막 마을로,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에 인접해 마리벨 언덕 위에 알폰소 3세가 세운 중세에 호황을 누렸던 마을이었다. 특히 여름 몇 달 동안은 순례자들로 인해 마을은 더욱 생동감이 넘친다고 한다.

 

 마을의 오래된 거리를 걸으면 순례자들의 모습을 형상화한 여러 벽화가 나와 이 마을이 순례자들에게 얼마나 친근한 지를 보여준다. 이 마을의 카페에 앉아 주스와 빵을 시켜 아침을 먹으며 보는 카페의 벽에 개미들의 행진하는 모양이 붙어 있다. 이 개미들이 늘어서 가고 있는 모양이 순례자기 묵묵히 길을 걷는 모습이 연상되었다. 마을을 통과하면서 만나는 산 후안 바우티스따 성당(Iglesia de San Juan Bautista)15세기와 16세기에 건축된 건물로 세 부분으로 구성된 본당, 노회, 세 개의 패널로 구성된 팔각의 성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라뇽에서 8월의 마지막 주에 열리는 감사의 축제(Fiesta de Gracias)까라스께도 성당 후원회’(Amigos de la Ermita de Carrasquedo)의 주관으로 산 후안 바우티스따 성당에서 빛과 소리의 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그라뇽 역사의 주요 에피소드를 연극으로 보여주고, 까미노 데 산티아고와 관련된 이야기도 나오며 마지막으로 빛과 소리가 어우러져 주제단화를 비추면서 마무리된다고 한다.

 

멀리 보이는 그라뇽 마을 

 

그라뇽의 순례자 벽화

 

그라뇽의 카페 벽

 

그라뇽의 산 후안 바우티스타 성당

 

 포도밭이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는 라 리오하의  마지막 마을 그라뇽을 떠나는 순례자는 마을 중심의 마요르 거리를 따라 성당 옆을 지나 마을을 빠져 나간다. 이제 오늘의 두 번째 마을인 레데시아 델 까미노까지는 1시간의 거리다. 도로의 끝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돌려 고속도로와 평행하는 길을 30분 정도 걸어가면 부르고스 주의 경계를 만난다.

 

 생장에서 시작한 순례 길은 나바라와 라 리오하를 거쳐 드디어 부르고스에 들어가는 것이다.

 

 부르고스주는 스페인 카스티야 이 레온 자치지역을 구성하는 9개 주 가운데 하나로 카스티야 이 레온 자치지역 북동부에 위치하며 주도는 부르고스이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취락지가 발견되었고, 로마 시대에는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 속주의 수도였다. 현재의 코루냐 델 콘데(Coruna del Conde)에는 9,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로마 시대의 극장이 있다. 또 이곳은 10세기 중반부터 존재했던  카스티야 왕국의 탄생지이며 카스티야어로 쓴 첫 번째 서사시인 유명한 엘 시드의 노래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부르고스는 카스티야 왕국의 수도로 '카스티야의 머리'라 불릴 만큼 번성했으며, 1833년 베르무데스 총리의 지방 행정 개편 과정에서 부르고스주가 처음 형성되었다. 주에 모두 371개의 도시가 있으며 그중 큰 도시 몇 개를 제외하고 대부분은 인구가 수백 명에 불과한 소도시이다. 주 전체 인구의 거의 절반 정도가 부르고스에 몰려 있다. 주 남부를 관류하는 두에로 강 연안에는 스페인에서도 품질 좋기로 유명한 포도 산지인 방대한 포도원이 있다.

 

 부르고스 출신인 산 후안 데 오르테가는 순례자들을 위해 다리를 건설하고 길을 뚫었다. 로마네스크 영향이 가득한 이 지방에서 여러 아름다운 수도원을 만나게 되며, 또한 아름다운 고딕 양식의 부르고스 대성당, 라스 우엘가스 수도원 등등을 볼 수 있다.

 

 이제부터 푸른 포도밭은 서서히 사라지면서 카스티야의 들판이 펼쳐진다. 부르고스의 첫 마을 레데시아 델 까미노는 까미노 때문에 발달한 전형적인 마을로 마요르 거리에는 마을의 문장이 장식된 시골 풍 벽돌집이 늘어서 있다.

 

부르고스 지방의 산티아고 순례길 안내도

 

카스티야 레온의 산티아고 순례길 안내도

 

레데시아 데 카미노 마을의 광장

 

 마을의 까미노의 성모 성당(Iglesia de Nuestra Senora del Camino)11세기에 만들어 진 로마네스크 양식 성당으로, 17~18세기에 재건축되어 로코코 양식의 제단화와 가구 그리고 스페인 로마네스크 미술의 보물이라고 불리는 11세기 작품으로 아름다운 세례반으로 유명하다. 비잔틴, 모사라베 양식의 영향을 받은 세례를 받음으로써 하느님의 도시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가 있다고 하는 세례반은 스페인 로마네스크 미술 중 가장 흥미로운 작품이다. 여섯 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기단부와 세례반 둘레에는 도시 모양이 장식이 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하느님의 도시인 천상의 예루살렘이 요새 같은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다. 반원형 탑과 삼각형으로 튀어나온 휘장으로 덮여있는 전망대 등도 천상의 예루살렘을 표현한 것이다.

 과거부터 이곳은 중세 프랑크 왕국의 중요한 점령지여서 많은 순례 객들로 항상 붐볐다고 한다. 그래서 이 마을에는 순례자를 위한 병원이 두 개나 있었다고 한다.

 

레데시아 델 까미노의 문장

 

레데시아 델 까미노 까미노의 성모 성당 (Iglesia de Nuestra Senora del Camino)의 세례반 설명

 

레데시아 델 까미노의 까미노의 성모 성당

 

 길을 가다가 이정표를 보니 무슨 글귀가 쓰여 있다. 궁금해서 보니 '대부분의 경우 당신이 답변을 얻지 못할 때, 그것은 당신이 좋은 질문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라는 의미다. 무언가를 생각하게 해 주는 글귀였다. 사람은 항상 자신이 무엇인가를 받으려고만 하는 성향이 있다. 그러다가 무엇을 얻지 못하면 자신의 잘못보다 상대에게 원망을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자신을 다시 돌이켜 보면 모든 잘못은 자신에게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정표의 글귀

 

 레데시아 델 까미노를 지나 30분 정도 가면 비옥한 땅과 산 훌리안 강가에 자리 잡은 화려한 과거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작고 조그마한 마을인 가스틸델가도에 도착한다. 캄포 성당과 궁전은 이곳에서 태어난 역사적인 인물들을 떠올려주며, 순례자의 병원은 몇 백 년 동안 이곳을 지나간 순례자들의 고난을 떠올리게 해준다.

 이 마을의 이름은 원래 비야푼(Villapun)이었는데, 16세기에 베르베라나 백작 가문이 여기서 시작되어 루고와 하엔의 주교였던 돈 곤살로 힐 델가도(Don Gonzalo Gil Delgado)를 기리면서 마을의 이름을 가스틸델가도로 바꾸었다.

 

 이 마을의 산타 마리아 라 레알 델 캄포 소성당(Ermita Santa Maria la Real del Campo)은 중세에 순례자를 위한 병원에 딸려있던 부속 성당으로 18세기의 현관이 아름답다.

 산 페드로 교구 성당(Iglesia Parroquial de San Pedro)16세기에 만들어진 후기고딕 양식의 성당으로 아름다운 봉헌화와 조각, 유화 등이 보존되어 있다. 특히 성모 마리아가 무릎에 예수를 앉힌 13세기 성모상이 돋보인다. 성당에는 돈 프란시스코 델가도의 무덤이 있다.

 

오카계곡과 티란계곡 사이의 까스틸델가도 안내도

 

산 페드로 교구 성당 (Iglesia Parroquial de San Pedro)

 

산타 마리아 라 레알 델 캄포 소성당(Ermita Santa Maria la Real del Campo)


 가스틸델가도를 떠나 30분 정도 걸으면
 어느새 순례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빌로리아 데 리오하에 도착한다. 산티아고 길을 사랑하는 순례자라면 꼭 들러야 할 마을인 빌로리아 데 리오하는, 조그마한 마을로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는 백 명이 안 되는 마을 주민은 모든 순례자들에게 친절하다. 또 스페인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가 태어난 곳이다.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는 1019 5 12일 이곳에서 태어나 1109년 산또 도밍고 데 라 깔사다에서 90세에 사망했다. 그는 까미노에 다리를 축조하고 길을 닦고, 병원을 설립하는 등 산띠아고로 가는 순례자를 위해 평생을 살았다.

 

 성인이 세례를 받았다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세례반을 보관하고 있는 고딕 양식으로 건축된 성모 승천 교구 성당(Iglesia Parroquial de la Asuncion de Nuestra Senora)이 순례자를 맞아준다. 순례자라면 산또 도밍고 데 라 깔사다의 생가 유적과 그가 세례 받은 세례반을 둘러보는 것이 좋다. 512일 마을에서는 산또 도밍고 데 라 깔사다를 기리는 축제가 열린다.

 

빌로리아 데 리오하 이정표

 

빌로리아 데 라 리오하의 표지

 

성모 승천 교구 성당 (Iglesia Parroquial de la Asuncion de Nuestra Senora)

 

성모 승천 교구 성당 (Iglesia Parroquial de la Asuncion de Nuestra Senora) 앞의 도밍고 가르시아 상

 

산토 도밍고 탄생 천년 기념

 

 빌로리아 데 라 리오하를 떠나 끝없이 펼쳐지는 평원을 한 시간 정도를 걸으면 나오는 비야마요르 델 리오는, 벨로라도와 같은 마을이었다가 18세기에 분리되었다. 바쁘게 걷는 순례자들이 벨로라도의 들어가기 전에 마음의 여유를 가다듬기에 최상의 장소로 도시의 긴장감에서 벗어나도록 한다.

 

 비야마요르 델 리오 마을을 지나 벨로라도를 향해 가는 길에서 보는 평원과 저 멀리 보이는 나지막한 산은 너무 평화롭다. 5월의 신록은 우리 마음에 여유로움과 풍요로움을 가져다준다. 물질적인 풍요가 아니라 무언가 말할 수 없는 마음의 풍요를 가져다주는 것이다. 아마 이것이 이 까미노를 걸으며 얻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현실의 욕심에서 벗어나 나를 잊어버리고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이 진정한 이 길의 의미가 아닐까? 

 

 

 

 비야 마요르 델 리오 마을을 지나면 까미노 길은 왼쪽으로 이어진다. 순례자는 다시 부드러운 내리막길을 따라 벨로라도의 공장지대가 나타날 때까지 고속도로를 오른쪽으로 두고 나란히 걷는다. 이제 순례자는 벨로라도에 들어서면, 마요르 광장에서 아름다운 산타 마리아 성당과 산 페드로 성당을 볼 것이다.

 

 스페인 카스티야 이 레온자치지방 부르고스주에 있는 자치시 벨로라도는, 티론 강변에 위치한 도시로 벨로라도라는 이름의 어원은 ‘belle(아름다움)’이라는 단어에서 왔다고 한다. 벨로라도의 까미노 길이 지나가는 도중에 보는 모든 건물은 특유의 아름다움을 뽐낸다. 중세 왕국들이 치열하게 얻고자 했던 이 도시는 과거에는 레온과 카스티야 왕국의 영토였다. 1,000년경에 하늘에서 불이 비처럼 쏟아져 온 도시를 휩쓸었다는 전설이 있으나, 이후 이 도시는 마치 불사조처럼 살아나 활력으로 가득한 곳이 되었다.

 

 벨로라도와 세레소 데 리오티론에는 두 마을의 수호성인인 비토레스 성인에 관한 전설이 전해온다. 성인은 사라센 인들에게 참수당해 머리가 땅에 떨어져서도 3일 동안 살아 있어서 이 광경을 본 사라센인들이 감복하여 개종했다고 전해진다.

 

벨로라도 입구 표지

 

길을 걷는 순례자들

 

멀리 보이는 벨로라도 성

 

벨로라도 안내도

 

 벨로라도에 도착하니 너무나 빠른 시간이다. 성당을 지나가려고 하니 그 앞에서 어제 길을 걷는 도중에 만났던 연주 중인 방랑하는 음악인이 있다. 아마도 우리와 같은 허울만 순례자가 아니라 진짜 경건하게 순례를 하는 것 같았다. 매일 길가에서 연주를 하며 길손들의 기부를 받아 그 돈으로 순례의 경비를 충당하는 것 같았다. 항상 거리의 음악인의 연주를 들으면 적당한 액수를 기부하여 그의 음악에 보답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므로 나는 어디에서든지 여행할 때 그들을 만나면 소액을 기부한다. 심지어 한국에서도 마찬 가지다. 그래서 2유로를 기부하니 고맙다고 인사를 한다. 내가 더 고마운 일이었다. 조그마하지만 남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마을 입구에 있는 산따 마리아 성당(Iglesia de Santa Maria)은 16세기에 만들어진 건축물로 고딕 양식의 아름다운 성모상과 순례자 산티아고, 이슬람인들을 죽이는 산티아고상이 보존되어 있다.

 

산타 마리아 성당 설명 안내도

 

산타 마리아 성당 (Iglesia de Santa Maria)

 

 

 

 산타 마리아 성당을 지나 마을로 들어가서 만나는 산 페드로 성당 (Iglesia de San Pedro)은 아름다운 파이프 오르간이 있는 17세기 성당이다.

 

산 페드로 성당 (Iglesia de San Pedro)

 

 

 

 마을을 계속 가면 야트막한 언덕이 보이고 그 앞에 클라라회 수녀들이 있는 16세기의 건축된 브레토네라 성모 수도원 (Convento Nuestra Senora Bretonera)이 보인다.

 

브레토네라 성모 수도원 (Convento Nuestra Senora Bretonera)

 

 알베르게에 도착하여 샤워를 한 후에 빨래를 간단히 하고 마을로 나가니 우리의 5일장과 비슷한 장이 서 있었다. 그래서 구경을 하면서 빵과 과일 등을 구입하고 돌아와서 순례자 메뉴로 점심을 먹었다. 자주 이야기하지만 이 순례자 메뉴는 너무 길을 걷는 사람에게는 알맞은 메뉴다. 점심을 배불리 먹고 잠시 쉬다가 마을 뒤에 있는 요새(성)로 올라갔다. 가는 길을 몰라 요새가 보이는 쪽으로 길을 가니 10대로 보이는 마을의 젊은 여자애들이 무리를 지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에게 짧은 스페인어로 길을 물으니 친절하게 가르쳐 주어 성으로 올라갔다.

 

 벨로라도 성은 언제 건설되었는지는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연구에 의하면 알폰스 3세의 10세기 전반에 건설되었다고 한다. 성은 거의 폐허가 되어 있지만 벨로라도의 역사를 상징하는 곳으로 여기에서 보는 풍경이 가슴을 환하게 펼쳐 준다. 사방을 둘러보면 왜 이곳에 성이 있었는지를 알 수 있게 사위가 트이어 사방에서 오는 적군을 감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방을 둘러보니 벨로라도가 상당히 큰 도시임을 깨달을 수가 있었다. 우리는 그저 마을 하나만을 보고 벨로라도를 다 보았던 것 같은 착각에 빠졌음을 알게 해 주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만이 모두가 아니라는 진실을 다시 깨닫게 해 준 시간이었다.

 

벨로라도성 전망대 설명(중세시대에는 벨로라도 주변에 많은 마을이 있었습니다.)

 

'티론 강 계곡을 바라보고 위에서 벨로라도를 보세요.'라는 안내도

 

벨로라도성 설명

 

성에서 보는 벨로라도 도시

 

성에서의 필자

 

마을의 벽화

 

 성을 내려와 알베르게에 가니 한국의 젊은이가 보였다. 몇 일전부터 보였던 젊은이라 이야기를 하여 보니 강원도 태백에 살고 있으며, 군대를 막 제대하고 무료하게 시간을 허비하는 것보다 무엇인가 의미있는 시간을 보내겠다고 생각하여 이 까미노 길을 걷는다고 하였다. 상당히 긍정적이고 건전한 사고를 가진 젊은이라 여러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그리고 빨래를 늘어놓은 알베르게의 옥상에 올라가니 휴식을 취할 수 있게 소파가 있었다. 한가하게 소파에 앉아 망중한을 즐기다가 저녁때가 되어 내려와 가볍게 저녁을 먹으면서 맥주를 마시며 오늘의 길을 생각해 보았다. 아직도 답이 보이지 않는 길이다.

스페인, 산티아고 까미노 길을 걷다. 10(05.26, 나헤라 - 산토 도밍고 데 칼사다)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오늘의 걷기 길 : 나헤라 - 아소프라(5.8km) - 시루에냐(9.3km) - 산토 도밍고 데 칼사다(5.9km)

 

 오늘은 나헤라에서 산토 도밍고 데 칼사다까지 가는 약 20km의 비교적 짧은 길이다. 다른 날에 비해서 길이 짧지만 이제는 습관적으로 아침 6시만 되면 길을 떠나려고 준비를 하는 사람들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다. 왜 그렇게 모두들 일찍 출발하는지를 이해를 못하겠다. 좀 느긋하게 길을 즐기면서 가면 좋겠는데 모두들 길을 걷는 것이 지상 최고의 과제인 것 같다. 아침 일찍 숙소인 알베르게를 출발하여 길을 가니 아직 달이 하늘에 떠 있다.

 

 나헤라 거리를 지나니 붉은 퇴적층이 겹겹이 쌓인 특이한 지형이 언덕을 이룬 나헤라의 특색 있는 모습이 나온다. 석회암과 충적토가 많은 이 땅은 잡초를 억제하는 동시에 포도나무의 성장을 촉진해 준다고 한다. 그래서 평소에 먹는 일반 포도보다 훨씬 알이 작고 단맛이 강한 포도가 생산된다고 한다. 스페인의 태양을 닮은 이 붉은 황토와 포도나무는 레온까지 계속 이어진다. 강을 건너 길을 가며 먼저 만나는 건물이 나헤라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산타 마리아 라 레알 수도원(Monasterio de Santa Maria la Real)이다.

 

 산타 마리아 라 레알 수도원(Monasterio de Santa Maria la Real)은 산초 3세의 아들인 나바라의 왕 가르시아 6세에 의해 11세기에 세워진 클뤼니 수도원이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은 흔적만 남아있고 15,16세기에 재건축되었다. 건축 양식은 추리게레스코식 고딕 양식이며 15세기의 아름다운 성모상이 보관되어 있다. 수도원 안에는 성당, 왕가의 영묘, 기사들의 회랑 등이 있습니다. 이 중 산초 3세의 부인이자 알폰소 8세의 어머니인 도냐 블랑까 데 나바라의 무덤이 돋보인다.

 

 산타 마리아 라 레알 수도원의 건립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에 기반을 둔다.

 

 나바라의 왕 돈 가르시아의 매가 비둘기를 쫓고 있었는데 매와 비둘기가 숲으로 사라졌다. 매를 기다리다 지친 왕이 직접 매를 찾아 나섰다가 동굴을 발견했는데 그 동굴에서 신비로운 빛이 흘러나왔다. 왕이 동굴에 들어가자 찬란한 빛을 내는 백합 화병과 아름다운 성모 마리아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매와 비둘기가 마치 좋은 친구 사이처럼 나란히 앉아 있었다고 한다.

왕이 이 자리에 성소와 수도원을 지으라고 명령하여 땅을 파기 시작했는데, 이곳에서 수많은 성인과 순교자들의 유해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왕은 이곳을 나바라 왕의 묘지로 쓰기로 결정했는데, 이 전설이 산타 마리아 라 레알 수도원의 기원이며 성모상을 발견했을 때 성모상을 장식하고 있던 테라사(Terraza; 화병)를 기념하여 라 테라사 기사단이 결성되었다고 한다.

 

나헤라 주변의 풍경

 

산타 마리아 라 레알 수도원(Monasterio de Santa Maria la Real)

 

 나헤라를 빠져 나와 산타 마리아 라 레알 수도원의 가장자리를 돌아 조용하고 한적한 오래된 도로를 따라가면 붉게 물든 바위산 사이의 소나무 숲을 통해 비탈길로 된 통행로를 만나 마을을 빠져나올 수 있다. 마을을 나오면 답답한 가슴을 씻어 줄 넓게 펼쳐진 라 리오하 평원을 볼 수 있다. 길은 포도밭 사이로 아름답게 이어진다. 가슴 벅찬 풍경을 옆구리에 꿰차고 즐겁게 약 한 시간 반 정도를 걸으면 아소프라에 도착한다.

 

 이 길을 걸으면서 바라보는 하늘은 너무 푸르게 빛나고 티 없이 맑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보며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도 이 길을 걸으면서 얻는 큰 기쁨이었다. 인적이 없는 들판을 걸으면 때때로 길가의 돌위에 벗어 놓은 신발을 본다. 순례자는 자신의 순례길에서 무엇인가를 깨닫고 끝을 내고 집으로 돌아간 것일까? 아니면 이 길의 허망함을 깨닫고 순례를 끝낸 것일까? 자신의 발을 보호해 주던 신을 벗었다는 것은 무엇이든지 자신의 허물을 벗었다는 의미로 생각되었다. 또 길가에는 전날에 로드 킬 당한 동물들의 시체가 많이 눈에 띄었다. 같이 가던 일행이 일일이 그 동물들의 사체를 길가의 풀밭으로 치워 주었다. 뒤에 오는 사람들이 기분이 나빠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감사하게 느껴지는 행동이었다.

 

순례자가 벗어 놓은 신발 - 여기까지가 그의 길이었는지?

코르도뱅 여행 설명판

 

산티아고를 가리키는 이정표

 

끝없이 펼쳐지는 들판의 포도밭

 

길가에 로드 킬 당한 토끼

 

 

저 멀리 보이는 아소프라 마을

- 가운데가 천사들의 성모 교구 성당 (Iglesia Parroquial Nuestra Senora de Los Angeles)

 

 

 아소프라는 뚜에르또 강의 비옥한 계곡에 자리 잡은 중세 아랍인의 마을이었다. 1168년에 도냐 이사벨은 순례자를 위한 병원과 성당을 세우고 성 베드로에게 봉헌했다. 그리고 까미노 데 산티아고에서 죽은 순례자들을 위한 묘지도 만들었다. 병원 건립을 알리는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깔라오라와 나헤라의 주교인 나 로드리고는 도냐 이사벨에게 아소프라 마을에 순례자만을 위한 병원과 묘지를 세우는 것을 허락합니다.’ 이 병원은 19세기까지는 운영되었고 오늘날엔 폐허만 남아있다. 아소프라에 있는 천사들의 성모 교구 성당 (Iglesia Parroquial Nuestra Senora de Los Angeles)은 하나의 신랑과 세 개의 구획으로 나뉘어져 있는 17~18세기의 성당으로, 루네트가 있는 궁륭으로 덮여 있고 제단 쪽 돔은 별 무늬가 있는 16세기 양식으로 건축되었다. 마을을 약 1km쯤 빠져 나오면 시루에냐로 가는 까미노의 오른쪽에 있는 아소프라의 원주(Rollo de Azofra)는 땅에 정의를 세우는 칼을 연상시키며 악당들이 범죄를 저지르기 전에 경고하는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아소프라 마을의 바에서 커피와 빵으로 가볍게 아침을 먹었다.

 

아소프라 마을

 

아소프라의 원주 (Rollo de Azofra)

 

 아소프라에서 시루에냐에 가는 길은 두 길이 있는데, 작은 운하를 넘어 밀밭 사이로 나있는 평화로운 오른쪽 길을 선택하여 약 2시간 반 정도를 길을 걸으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포도밭과 밀밭 사이로 이어진 감동적인 조용한 마을인 시루에냐에 도착한다. 시루에냐는 작은 마을로 광장의 나무 밑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을 보면 이곳에 살았던 역사의 주인공들처럼 보인다. 이런 마을의 분위기와는 맞지 않게 길을 걷다 맨 처음 만나게 되는 시루에냐의 첫 모습은 근사한 골프장과 그 뒤로 만들어진 신축 빌라의 모습들이다. 새로 만들어진 현대식 계획도시로 신시가지를 지나다 보면 인적이 드물어 사람을 볼 수가 없어 마치 영화나 드라마의 세트장 같은 느낌을 받는다. 우리가 찾는 시루에냐 마을은 계획도시를 지나 포장된 도로를 따라가면 마을 끝에서 표지판을 만나게 된다.

 

 여기서 덧붙이면 왼쪽 길을 따라 이동하는 것은 도보 순례자에게 적당하지 않다. 오른쪽보다 적어도 13킬로미터를 더 이동하고, 포장된 도로는 자전거 순례자들에게 적합하다.

 

길을 가면서 보는 하늘은 너무나 파랗다. 구름 한 점이 없는 파란 하늘을 보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미세먼지나 환경오염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티 없이 맑은 하늘이다. 파란 하늘에는 수많은 비행운만이 기하학적 무늬를 만들어 지나가는 길손들의 눈을 즐겁게 한다.

  

파란 하늘에 수놓은 비행운

 

까미노 길의 식수 보급처

 

파란 하늘에 수놓은 비행운

 

골프장 클럽 하우스

 

 시루에냐에서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까지는 6킬로미터 정도의 길은 걷기 편안하다. 이 편안한 길을 걷는 도중에 많은 외국인을 만났다. 미국인, 일본인, 대만인, 캐나다인, 브라질 사람 등등의 많은 사람들 중에 어린 딸을 데리고 길을 걷는 독일인 부부가 있었다. 한 5살 정도로 보이는 꼬마는 무엇이 기쁜지 잠시도 쉬지 않고 재잘거리며 길을 뛰어 갔다왔다하면서 즐거워하였다. 내가 한국에서 가져간 초콜릿을 꺼내어 주니 처음에는 머뭇거리다가 엄마의 허락이 떨어진 후에 받으며 기뻐하였다. 이 꼬마가 이 길이 주는 의미를 깨닫게 될 때는 언제가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에게 이 길은 영원히 추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주로 감자 농사를 짓는 시루에냐를 지나 시계탑이 있는 성당을 지나 길을 따라가면 포도밭이 펼쳐진 넓은 평원에, 늘씬한 탑이 우뚝 솟아 있다. 이 탑은 나침반처럼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로 순례자들을 이끌어 주는 역할을 한다. 탑이 있는 대성당은 까미노의 건축가 성인이라고도 불리는 성인이 남긴 것이며 도시의 이름도 성인의 이름에서 가져온 것이다.

 

길을 걷고 있는 독일인 부부와 딸

 

조각품 - 교량 건설자

 

멀리 보이는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 마을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는 까미노 길 때문에 만들어진 마을로 순례자를 위한 모든 서비스가 갖춰져 있고, 친절한 마을사람들이 있어 순례자들로 붐빈다. 성인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에서는 이 까미노의 성인을 기리는 축제가 항상 벌어진다. 425일에는 닭이 작은 북과 함께 행진하는 축제, 51일에는 성인의 빵을 나눠주는 축제 또 510~15일에는 성인을 기리는 성대한 행렬이 이어진다.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에는 닭의 기적(El milagro de la gallina)이라는 전설이 있다.

 

 15세기에 독일 윈넨뎀 출신의 우고넬이라는 청년이 부모와 함께 산티아고 순례 길에 이곳에 도착했을 때 머물던 여인숙의 딸이 그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사랑을 고백했다. 그러나 신앙심이 깊었던 우고넬은 그녀의 고백을 거절했다. 상심한 처녀는 복수를 하려고 은잔을 우고넬의 짐 가방에 몰래 넣고 도둑으로 고발을 했다. 재판소로 끌려간 우고넬과 그의 부모는 결백을 주장했지만, 청년은 유죄 판결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절망에 빠진 그의 부모는 산티아고 성인에게 기도를 올리며 순례를 계속했는데 돌아오는 길에서 산티아고의 자비로 아들이 살아있다.는 하늘의 소리를 듣게 되었다. 이 소리를 들은 부모가 재판관에게 달려갔다. 마침 닭요리로 저녁식사 중이던 재판관은 그들을 비웃으며 말했다. “당신 아들이 살아 있다면 당신들이 날 귀찮게 하기 전에 내가 먹으려 하고 있었던 이 암탉과 수탉도 살아 있겠구려.” 그러자 닭이 그릇에서 살아나와 즐겁게 노래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재미있는 전설 덕택에 1993년부터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는 이 기적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었던 청년 우고넬의 고향인 윈넨뎀과 자매결연을 하였다. 산토 도밍고의 재판관들은 우고넬의 결백을 믿지 않았던 것에 대한 사죄로 수 백 년 동안 목에 굵은 밧줄을 매고 재판을 하는 전통이 있었다고 한다.

 

 이런 전설과 전통 때문에 중세부터 순례자들에게 여행 중에 수탉이 우는 소리를 듣는 것을 좋은 징조로 여겼다. 프랑스 순례자들은 길을 걸으며 닭의 깃털을 모았는데, 그것이 순례 중에 그들을 보호해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또 폴란드인들은 순례 지팡이 끝에 빵 조각을 얹어서 닭에게 주고 했는데, 닭이 빵을 쪼아 먹으면 순례에 좋은 징조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산토 도밍고 안내도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 거리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에서 먼저 마주친 건물은 수태고지의 성모 수도원(Monasterio de Nuestra Senora de la Anunciacion)이다. 

 시토 교단의 수도원인 수태고지의 성모 수도원(Monasterio de Nuestra Senora de la Anunciacion)1620년에 완공된 건물이다. 수도원의 성당은 라틴 십자가형 평면에 바로크 양식의 제단화가 있다. 성당 측면에는 세 명의 주교의 와상이 있는데, 이 중 가운데가 이곳의 설립자인 돈 페드로 만소다. 현재는 순례자들의 숙소로 쓰이고 있으며 수도원의 수녀들이 운영하고 있다.

 

수태고지의 성모 수도원 (Monasterio de Nuestra Senora de la Anunciacion)

 

알베르게 표시

 

성자의 천년기(Milenario de Santo, 1019 - 2019) 안내도

 

 

 

 드디어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의 상징인 대성당이 나타난다.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 대성당(Catedral de Santo Domingo de la Calzada)12세기에 건립되어 여러 번에 걸쳐 증축과 보수를 거쳤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제단부는 여덟 개의 기둥으로 마요르 소성당(Capilla Mayor)과 분리된다. 천장을 덮은 궁륭과 성인의 영묘, 주제단화, 15세기의 기적에서 유래한 암탉과 수탉이 살고 있는 닭장 등이 눈에 띈다. 닭장은 15세기의 고딕 양식인데, 아직까지도 성당 내부의 이 닭장에서 살아 있는 흰 닭 한 쌍을 키우고 있다고 한다. 성인이 잠들어있는 영묘는 성인이 누워 있는 무덤 부분은 로마네스크 양식이고 기적에 대해 기록되어 있는 탁자는 고딕, 소성당은 후기 고딕 양식이다.

 15세기 다미안 데 포르멘뜨에 의해 그려진 주제단화는 1994년까지 마요르 소성당에 있었는데, 이 그림은 스페인 르네상스의 보물로 알려져 있다

 

 대성당의 아름다운 탑은 세 번에 걸쳐 지어졌다고 한다. 처음 만들어진 로마네스크 양식의 탑은 1450년 번개를 맞아 무너졌고, 다음 만들어진 고딕양식의 탑은 붕괴 위험이 있어서 해체되었고, 마르띤 베라뚜아에 의해서 18세기에 현재의 탑이 건축되었다. 바로크 양식의 탑 높이는 무려 70미터에 달하는데, 땅 밑으로 흐르는 지하수 때문에 대성당 건물과 분리해서 지어야만 했다. 탑에는 일곱 개의 종이 있는데, 그 중 두 개가 시계 역할을 한다.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 대성당(Catedral de Santo Domingo de la Calzada) 설명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 대성당 (Catedral de Santo Domingo de la Calzada)

 

산티아고 5612km 이정표

 

산티아고 가는 길을 표시한 지도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에 도착하니 어느 새 200km를 넘게 걸었다. 하루에 걷는 거리가 무리가 되지 않는 거리라 별로 피곤함을 모르고 지금까지는 걷고 있는 중이다.

 

 일찍 도착했기에 식당에 들러 순례자 메뉴로 점심을 먹는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이 순례자 메뉴는 어느 마을에나 있고 메뉴도 어느 정도 일정하고 가격도 매우 합리적이라 수시로 이 메뉴를 청해서 먹는다. 점심을 먹고 대성당과 주변의 여러 곳을 돌면서 도시를 구경하고 저녁에 오랜만에 항상 길을 함께 걸은 4명이 모여서 가볍게 맥주를 마시면서 담소를 나누었다. 각자가 살아온 과정이 다르고, 나이도 내가 70이 넘었고, 안산의 채선생은 66살, 대구의 천진한 얼굴의 이사장은 60살, 서울에 사는 임사장은 58이었다. 나이 차이도 있지만 각자가 거쳐 온 직업도 달랐고 사는 지역도 달랐기에 각자 자기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다양한 생각을 통해서 서로에 대한 이해를 높였다. 그리고 왜 이 길을 걷는가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살아온 인생에서 지금은 무엇인가를 버려야 할 때임을 자각하고 버림의 이야기를 하였다.

 

 우리가 살아오는 인생에서 이렇게 오래 같이 밥 먹고 자고 걷고 하는 단순함을 가족이 아니고 생판 모르는 사람이 모여서 누구와 같이 하는 기회가 있었던가를 생각해 보면 기억에 없다. 남자들은 군대라는 특이한 집단에서 많은 사람들이 함께 지내는 시간이 있지만 그 시간과 이 길을 걷는 시간은 다르다. 우리 인생에서 이렇게 만난 것도 불교에서는 소중한 인연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 이야기는 앞으로도 계속 나올 것이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내일을 위해서 잠자리에 든다.

스페인, 산티아고 까미노 길을 걷다. 9(05.25, 로그로뇨 - 나헤라)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오늘의 길 : 로그로뇨 - 그라헤라저수지(5.9km) - 나바레떼(6.5km) - 벤토사(7.6km) - 나헤라(9.4km)

 

 오늘은 로그로뇨에서 나헤라까지 약 30km의 긴 길을 가야 한다.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하여 아침에 일어나고 출발하는 시간이 거의 같은 시간이다. 06시 30분경에 출발을 하니 아직 해는 뜨지 않았다. 아직은 어두운 로그로뇨 거리를 지나니 순례자의 샘이 나오고 조금 가면 산티아고 엘 레알 성당 (Iglesia de Santiago el Real)이 다가온다.

 

 오까 광장에는 마치 조그만 집을 연상시키는 두 기둥 사이의 아치, 처마 둘레의 무늬와 박공으로 된 순례자의 샘 (Fuente del Peregrino)이라는 석조물이 있다. 오른쪽에는 십자가형 문장, 왼쪽으로는 도시의 문장, 가운데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산띠아고 엘 레알 성당 (Iglesia de Santiago el Real)1513년 가톨릭 왕(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왕) 시대에 본격적으로 건설되었다. 부벽이 세워진 신랑 하나에 소성당이 있으며, 성가대석과 소성당은 16세기에 만들어졌다. 성당의 현관은 바로크 양식이며 벽감 안엔 거대한 산티아고 마타모로스(Santiago Matamoros, 전사 산티아고)상이 있다.

 

로그로뇨 거리

 

순례자의 샘

 

산티아고 엘 레알 성당

 

 

 성당을 지나 거리를 따라 걸으니 아침 일찍부터 빵을 굽고 있는 가게가 보인다. 새벽부터 길을 따나는 순례자들을 위해서 신선한 빵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빵을 만들고 있는 모습

 

 로그로뇨를 나오려면 2명의 순례자 조각상이 있는 공원을 통과한다. 여기에서 서두를 필요 없이 풍경을 즐기면서 까미노 표시를 따라 걸으면 아래쪽에 나무로 우거진 자전거 도로와 연결된 산책로를 만나게 되며, 이 길은 그라헤라 저수지를 둘러싸고 있는 그라헤라 공원까지 약 2km에 걸쳐서 이어져 있다. 공원을 가로질러 저수지를 돌아가면 자동차 도로위로 평행하게 이어져 있는 철망에 순례자들이 걸어놓은 작은 십자가들이 반갑게 맞이한다.

 

 

 

그라헤라 저수

 

 여기서부터 힘든 그라헤라 언덕의 정상을 향하는 오르막길이 펼쳐진다. 하지만 까미노를 걷고 있는 순례자에게 이 언덕은 그리 힘들지 않다. 언덕 위의 정상을 넘고 나서 나바레떼까지는 내리막길이다. 길을 걷다 보면 조그마한 무인 가게가 보인다. 이름을 '지나가는 순례자의 암자(Marcelino Labato Castrillo)'라고 붙여진 재미있는 가게다. 내리막길은 나바레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산 후안 데 아끄레 순례자 병원의 유적지와 창고들의 옆으로 지나 마을로 들어간다.

 나바레떼는 오래된 도자기 공장들과 창고들이 많으며, 또한 나바레떼는 카스티야와 나바라 사이의 전투가 치열했던 장소이면서 로그로뇨보다 더 이전에 만들어진 도시답게 오래된 문장으로 장식되어있는 아름다운 집들을 볼 수 있다.

 

 지나가는 순례자의 암자(Marcelino Labato Castrillo)라는 가게

멀리서 보는 그라헤라 저수지

 

까미노 이정표

 

황소상

 

멀리 보이는 나바레떼 마을

 

 나바레떼의 마을 입구에 현재 그 자취만 남아있는 산 후안 데 아끄레 순례자 병원은 마리아 라미레스에 의해 1185년에 설립된 순례자를 위한 병원으로 창문과 정문은 모두 무너지고 벽체의 일부만 남아 있다. 현재 나바레떼 공동묘지의 입구로 사용되고 있다.

 

산 후안 데 아끄레 병원터 표시

 

산 후안 데 아끄레 병원의 조감도와 설명

 

산 후안 데 아끄레(San Juan de Acre) 병원터

 

코럴 와이러니(산티아고 576km 포시)

 

  이곳은 떼데온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는 지형적인 이유 때문에 나바레떼는 지역 방어에 중요한 도시였다. 오랫동안 나바레떼는 언덕 위에 있는 성에 위치한 마을이어서 성곽 안에는 수많은 중세풍 집들이 있다.

 나바레떼는 현재 라 리오하 주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대 도기 터가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마을 외곽의 데에사 언덕에서 라 리오하 주에서 가장 높은 로렌소 산을 볼 수 있다.

 

 마을을 지나가며 만나는 성모 승천 성당(Iglesia Asuncion de la Virgen)은 사각형 기단에 세 개 신랑과 아치형 궁륭이 있는 성당으로, 1553년에 건축이 시작되어 한참 중지되었다가 1645년에 완공되었다. 내부의 제단화는 리오하 바로크 양식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품일 뿐만 아니라 17세기 말, 18세기 초 후기 바로크 양식의 모든 경향이 모여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성모 승천 성당 (Iglesia Asuncion de la Virgen)

 

 성당 앞에 있는 마을의 광장에서 마을 사람들이 모여 음료와 빵, 쿠키, 케이크, 과일 등을 늘어놓고 모여서 담소를 나누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이 길을 지나던 우리는 당연히 먹어도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음료와 쿠키 등을 먹으니 마을 주민들도 아무도 막지 않아서 고맙게 생각하며 먹고 그냥 지나쳤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오순절이라 마을 사람들이 광장에 모여서 서로 축하를 하는 자리였다. 예수님의 은총을 길가는 나그네들에게 그들이 베푼 아름다운 모습으로 기억하였다. 아무튼 모르는 것이 약이 된 일이었다.

 

광장에 모여 있는 마을 사람들

 

성당 내부의 모습

 

성당 설명

 

 성당 앞의 광장에는 도공의 조각상이 있다. 이 도공 기념물 (Monumento al Alfarero)은 라 리오하 주에 유일하게 고대 도기 터가 남아있는 나바레떼의 도공들을 기념하기 위한 기념물이다.

 

도공 기념물 (Monumento al Alfarero)

 

산 미얀 데 라 코골라라는 세계유산의 흔적

 

묘지의 덮개

 

 길을 가며 보니 아름다운 덮개를 가진 공동묘지가 있다. 나바라와 라 리오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념물 중 하나인 이 묘지의 덮개는 원래는산 후안 데 아끄레(San Juan de Acre)의 오래된 병원에 있던 것이라고 한다.

 

 나바레떼에서 나헤라까지 가는 길은 벤또사를 향하는 구간의 가장 높은 언덕인 산 안톤 언덕(Alto de San Antón)을 오르는 그리 높지 않은 오르막을 제외하고는 힘든 구간이 없다. 나바레떼를 나와 언덕길을 올라 내리막을 가면 1986년 자전거 교통사고로 죽은 벨기에 순례자 앨리스 그래이머를 추모하는 기념비를 볼 수 있다.

 순례자는 소떼스(Sotés)에서 잘 알려진 포도주 양조장의 포도밭 사이로 왼쪽으로 조금 비스듬히 샛길을 따라 길을 걸으면 나지막한 언덕 기슭에 아름답게 자리 잡고 있는 벤또사가 내려다보인다.

 


 

나헤라 12km를 나타내는 이정표

 

넓게 펼쳐지는 포도밭 사이로 가는 자전거 순쳬자

 

추모비

 

순례자상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있는 벤토사의 중심에는 사뚜르니노 성인에게 바쳐진 성당이 있고 전원풍 건물들이 있다. 기록에 따르면 11세기에 산초 3세가 산 미얀 데 라 꼬고야 수도원에 이 마을을 기부했다는 것이 남아 있다.

 중세 벤토사 부근 까미노에는 산 안톤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병원이 있었다고 한다. 오래 전 폐허가 된 이 병원에는 아름다운 예수의 상이 있었는데, 밭을 갈던 농부가 발견하여 현재는 로그로뇨의 순수미술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벤토사의 거리

 

 

 벤토사 중심에 있는 산 사투르니노 교구 성당 (Iglesia Parroquial de San Saturnino)은 벤토사 중심의 나지막한 언덕 위에 있다. 사각형 기반에 벽돌로 만든 13세기 후반의 탑이 있다. 탑의 끝부분은 여덟 면으로 피라미드형으로 끝난다. 탑의 16세기의 고딕 양식 현관은 동식물 무늬로 장식되어 있고, 위에 올라가면 매력적인 마을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내부의 궁륭과 창미창이 아름다우며 14세기에 제작된 누워 있는 그리스도상과 펠리컨(인류를 위해 피 흘린 그리스도를 상징)이 피를 흘리며 새끼들을 먹이는 조각상이 있다.

 

산 사투르니노 교구 성당 (Iglesia Parroquial de San Saturnino)

 

포도 농원

 

벤토사 - 시간 속의 장소 설명

 

 작고 조용한 마을인 벤또사 마을의 출구를 나오면 가파른 오르막을 통해서 산 안톤의 정상에 오르면 이곳에 있었던 안토니아노스 수도원의 유적을 보면 세월의 허망함을 느낄 수 있다.

산 안톤 정상부터는 내리막길이 시작되어 멀리 보이는 나헤라까지가 축복받은 포도밭으로 끊임없이 이어진다. 순례자는 나헤리아 계곡을 따라 걸으며 까미노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느낄 수 있다. 계속 걷다보면 순례자의 왼쪽으로는 높이 솟아있는 통신용 안테나와 불모지가 나타나기 시작하며 이내 얄데 강 위를 지나는 보행자용 다리를 건너 나헤리로 들어간다.

 

 

끝없이 펼쳐지는 포도밭

 

포도밭에 있는 빌라 선전

 

알레손 - 야코비아 전설의 현장 설명(롤랑과 페라구트의 전투)

 

길을 가면 알레손 - 야코비아 전설(롤랑과 페라구트의 전투)의 현장이라는 설명이 붙은 안내도가 보인다.

 

 나헤라는 샤를마뉴의 조카 롤랑과 골리앗의 후손인 거인 페라구트의 전투에 관한 전설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롤랑과 페라구트의 싸움은 피가 낭자하고 치열했으며 승자가 가려지지 않았다. 롤랑은 휴전을 제안하고 페라구트를 만나 친구가 되고 싶다고 가장하며 거인에게 술을 먹였다. 거인은 술에 취해서 자신의 약점은 배꼽이라고 고백했다. 다음날 롤랑은 그를 화나게 만든 다음 그와 맞붙어 싸우다가 배꼽에 창을 찔렀다. 그리하여 롤랑은 페라구트를 쓰러뜨리고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나헤리야 강을 중심으로 나헤라는 바리오 데 아덴뜨로(Barrio de Adentro)라고 하는 구시가지와 바리오 데 아푸에라(Barrio de Afuera)라고 하는 신시가지로 나뉜다. 로마 시대에 세워진 이 도시를 아랍인들은 바위 사이의 도시라는 의미인 나사라(Naxara)라고 불렀다. 산초 엘 마요르 왕은 나헤라를 왕국의 수도로 삼았으며 까미노 데 산띠아고를 지나가게 함으로써 도시를 발전시켰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나헤라에는 산따 마리아 라 레알 수도원같이 훌륭한 건축물이 많다. 이곳에는 서른 명 가량의 왕의 무덤이 있다. 거대한 벌통을 연상시키는 구멍이 뚫려있는 붉고 커다란 바위산들을 끼고 있는 나헤라는 라 리오하의 주도였으며 10세기와 11세기를 거치면서 나바라 왕국의 본거지 역할을 했고 그 이후에는 이슬람교도들이 팜플로나를 무너뜨렸던 거점이 되기도 했었다.

 

 

 

나헤라 시내

 

 오늘은 제법 먼 거리를 걸어서 15시경에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점심도 제대로 먹지 못하였기에 몸을 씻은 후에 시내로 나가 중국식당(Sofia Restaurant)으로 가서 오랜만에 우리가 흔히 먹었던 음식으로 포식을 하고 슈퍼에 들러 내일 먹을 간단한 먹거리를 사고신시가지  시내를 소요하였다.

 

 시내를 간단히 돌아보고 숙소로 돌아오니 아직 시간이 일렀으나 별로 할 일도 없어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다가 잠이 들었다.

 

스페인, 산티아고 까미노 길을 걷다. 8(05.24, 로스 아르코스 - 로그로뇨)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오늘의 길 : 로스 아르코스 - 산솔(6.8km) - 토레스 델 리오(0.8km) - 비아나(9.6km) - 로그로뇨(10.4km)

 

 오늘 여정은 나바라 왕국의 오래된 까미노를 걷는 상당히 쉬운 길로 중간에 만나는 마을인 산솔과 토레스 델 리오, 비아나는 모두 아름답고 친절한 마을로 순례자를 맞이한다. 산솔까지 7km 정도의 길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이는 길고 긴 포도밭이 계속 이어진다. 산솔부터 비아나까지는 높지 않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연속으로 이어져서 전날의 외로움과 지루함을 떨쳐낼 수 있다. 그러나 언덕에 올라서자마자 11km 정도 거리의 비아나가 손에 잡힐 듯 보이면서 순례자는 빨리 가야겠다는 마음으로 조급해진다. 조급한 마음은 접어두고, 여유롭게 길을 걷는 것이 좋다.

 많은 순례자들이 비아나에서 하루의 길을 멈추지만 힘이 남았고, 시간과 날씨가 걷기에 적합하다면 비아나에서 10km 정도를 더 걸어 로그로뇨까지 이동하는 것도 좋다.

 

 오늘은 약 28km의 제법 긴 길을 가여 하는 여정이다. 평상시와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 가볍게 과일과 요구르트로 아침을 먹고. 제법 먼 길을 가야하기에 조금 일찍 서둘러 06시 30분경에 알베르게를 나왔다.

 길에 나가니 아직 사람의 기척도 없고 마을은 정적에 덮여 있고 지나가는 순례자들의 발자국 소리만 들린다. 숙소를 벗어나 길을 가면 동네를 지나는 지점에 카스티야문이 있고 이 문을 지나 아르코스를 벗어난다.

 

비아나까지 안내도

 

 길을 떠날 때는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았는데 좀 걷다가 뒤를 돌아보니 해가 떠오르기 시작한다. 우리가 서쪽을 향해 걷고 있음을 여실히 알 수 있게 우리 등 뒤에서 해가 비친다.

 

뒤를 돌아보면 해가 떠오른다.

 

멀리 보이는 산솔 마을

 

 첫 번째 마을인 산솔까지는 순례자의 눈에 포도밭과 밀밭이 펼쳐져 어제의 길을 걷는 듯이 착각에 빠지며 편안하고도 쓸쓸한 길을 걷는다. 저 멀리에 산솔 마을이 보이기 시작하면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같이 아름답다. 스페인의 마을은 멀리서 보면 너무 아름다워 그 마을을 향해 밀밭과 보리밭 사이로 난 길을 걸으면 마치 동화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산솔을 향하는 마지막 구간은 가벼운 오르막길로 데소호(Desojo)를 향하는 자동차 전용도로를 등지고 마을로 들어간다.

 

서쪽을 향해 가는 그림자 - 키다리 아저씨

 

밀밭 사이로 난 길로 산솔을 향해 가는 순례자들

 

산솔 마을 표지

 

산솔 마을 입구의 버스정류장

 

산솔 마을

 

 산솔은 원래 산 소일로 수도원(Monasterio de San Zoilo)의 영지로 마을과 수도원, 성당의 이름은 순교한 코르도바 출신의 성인 산 소일로(San Zoilo)에서 유래한 것으로, 그의 유해는 현재 까리온 데 로스 꼰데스 수도원에 보관되어 있다.

 

로그로뇨(20.7km) 비아나(11.2km) 토레스 델 리오(800m)를 가리키는 이정표

 

 마을의 맨 꼭대기에 위치하고 있는 산 소일로 성당 (Iglesia de San Zoilo)17세기 후기 바로크 시대의 석조 건물로 아름다운 로마네스크 양식의 십자가상과 합창단 석에 위치한 거대한 성 베드로 상이 있다. 성당의 외부에는 사각형의 높은 기둥과 종이 있는 날씬한 탑이 돋보이는데 멀리서 보기만 하고 둘러보지는 못했다.

 

산솔 마을 맨 위에 있는 성당이 산 소일로 성당(Iglesia de San Zoilo)이다.

 

토레스 델 리오 마을 안내도

 

토레스 델 리오로 들어가는 다리

 

 산솔에서 1km도 안 되는 거리의 산솔언덕 위에 위치한 토레스 델 리오는 경관이 뛰어난 아름다운 마을이다. 이 마을은 로마인들이 농사를 짓던 흔적이 발견되어 아주 오래 된 마을로 알려져 있다. 그러다가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점령되었다가 10세기 초반 산초 가르세스 1세가 몬하르딘에 이어 기독교지역으로 탈환했다고 한다. 그래서 까미노 길을 따라 있는 성당에는 여러 가지의 문화가 조화롭게 섞여 있다. 좁은 길에는 파사드(건물의 출입구로 이용되는 건물 외벽 부분)에 문장이 장식된 바로크 양식의 집이 가득하다. 1109년에 히메노 갈린데스가 이라체 수도원에 마을 기증했다고 한다.

 

 또레스 델 리오의 성묘 성당(Iglesia del Santo Sepulcro)12세기에 템플 기사단이 아랍의 건축양식을 차용하여 예루살렘의 성묘 성당과 유사하게 만든 팔각형 평면의 성당이다. 스페인 로마네스크 양식의 걸작으로 나바라의 후기 로마네스크 양식의 특징이 잘 나타나며 팔각형 평면에 건물 동쪽에는 단순한 반원형 소성당, 서쪽에는 원통형 탑이 있다.

 팔각형 평면은 템플 기사단의 특징이며 성묘 성당의 쿠폴라 정탑은 죽은 이들의 정탑이라고 불렸다. 그 이유는 이 탑이 길을 잃은 순례자들을 이끄는 역할을 했고 순례자가 죽으면 불을 켜서 알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성당 안의 공간은 두 층으로 나뉘어 있는데, 벽에는 거대한 사각형 기둥이 붙어있고 위층에는 로마네스크 양식 창문이 나있으며 주두에는 아름다운 조각이 있다. 외부는 3층으로 나뉜 구조이며 3층엔 각 면에 창문이 나 있다.

 

토레스 델 리오의 성묘 성당

 

 토레스 델 리오를 지나 너덜지대의 자갈과 오솔길로 이어진 오르막과 내리막이 계속 되어 중세부터 다리를 부러뜨리는 길이라고 불렸던 이 길을 걸어가면, 뜻밖에 길가에 16세기 고딕양식의 작고 아담한 성당이 나타나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일반적으로는 거의 모르는 포요의 암자라고 불리는 성당이다. 벽면에 그려져 있는 성모상 밑의 글귀는 '바르가타 마을을 축복하시고 순례자들을 보호하소서.'라는 의미다.

 

 이 조그마한 성당을 지나 다시 협곡과 언덕 사이를 반복해서 지나면 멀리 보이는 비아나를 향해 걸음을 재촉하면 순례자는 마침내 라 리오하로 이어지는 평야에 도착한다. 이제 비아나는 그리 멀지 않다.

 

성당과 포도밭을 그린 벽화

 

순례자들이 길가에 달아놓은 자기 나라의 국기

 

'포보의 암자'라 불리는 조그마한 성당

 

이정표

 

비아나 마을 표시

 

 비아나라는 이름의 기원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까미노 데 산티아고’의 까미노와 같은 의미인 비아(Via)에서 파생되었다는 주장과, 로마의 여신이자 주술사였던 디아나(Diana)와 관련돼 있다는 주장이 있다.

 비아나는 오래된 성곽으로 둘러싸인 언덕 위의 사각형 도시다. 카스티야와 가까워서 산초 7세가 기존의 성벽을 합쳐서 비아나의 성벽을 만들었다. 비아나의 까미노 표시는 도시의 오래된 성벽을 통해 화려한 저택으로 가득 찬 도시의 내부로까지 올라가게 한다. 까미노를 걷는 사람은 카스티야와 나바라의 왕국 사이에 번성했던 이 아름다운 도시를 보지 않고 지나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비아나는 양송이, 소시지, 비스킷과 함께 리오 하 원산지의 향기로운 포도주를 생산한다. 비아나의 외곽에는 까냐스 연못(Laguna de las Cañas)이 있는데, 자연 보호 구역이자 조류 보호 구역으로 여러 종류의 어류와 수많은 조류들이 서식하고 있다.

 

비아나로 들어가는 문

 

비아나 마을 시장(우리의 5일장 비슷)

 

비아나 마을을 통과하는 길

 

 마을 시장을 조금 지나면 비아라에서 가장 유명한 성당을 만난다. 일부는 수리 중이라 차양을 두르고 있는 산타 마리아 성당 (Iglesia de Santa Maria)이다. 

 

산타 마리아 성당

 

비아나 시청 발코니(Balcon del Ayuntamiento)

 

 산타 마리아 성당 옆에는 후안 데 라온(Juan de Raon)1685년에 짓기 시작한 시청이 있는데 이 건물은 바로크 양식을 나타내는 파사드가 있고 발코니, 토스카나식 기둥, 처마의 띠 장식 위의 문장, 벽돌로 된 탑 등이 있는 아름다운 건물이다.

 

산타 마리아 성당 표지

 

 성당 입구에 있는 동판에는 아래와 같은 설명문이 붙어 있다.(정확한 해석이 되었는지는 장담할 수 없다.)

 

 13세기 고딕양식의 대규모의 성당에는 트리포리움 갤러리가 눈에 뜨인다. 17세기 지롤라(Girola), 바로크 양식의 제단화 및 비아네스 조각가가 제작한 다양한 작품, 마드리드 루이스 파레트의 그림이 있는 산 후안 델 라모 예배당, 18세기 말 회화, 금세공, 장식품,상아, 찬토랄 컬렉션으로 구성된성물.16세기의  후안 드 고야르(Juan De Goyaz)의 르네상스 정문이 있고 그리고 그밑에는 세자르 보르지아의 무덤이 있다 -비아나 시의회-

 

 산타 마리아 성당의 반석 아래에 묻혀 있는 르네상스 시대의 유명한 인물은 바로 교황 알레한드로 6세의 아들인 케사르 보르지아(Cesar Borgia).

 그는 16세에 팜플로나의 주교, 19세에는 추기경, 22세에 가톨릭 군대의 장군이었고 24세엔 나바라 왕의 처남이 되었다. 그는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쓸 때 영감을 준 사람으로 군주론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나바라의 총수라고 불렸던 보르지아는 1507년 레린백작과의 전투에서 사망하여 비아나에 묻혔다. 그의 무덤에는 비아나와 팔렌시아 (보르지아는 스페인 팔렌시아의 보르하 가문 출신이다)의 흙이 함께 뿌려졌고, 아직까지도 그의 무덤 위에는 남녀 어린이가 두 지역의 꽃을 걸어놓는 전통이 전해져 오고 있다.

 

성당 입구

 

성당 외부

 

성당 내부의 여러 모습

 

성당 외부의 모습

 

 성당을 지나 조금 가면 나오는 산 페드로 수도원 (Monasterio de San Pedro)13세기의 원래 건물에 18세기 후반까지 증축이 여러 번 되었으며 그 중 바로크 양식의 거대한 현관이 돋보인다. 현재까지 보존상태가 매우 좋은 이 건물의 제단은 시토 교단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산 페드로 수도원의 모습

 

비아나에서 로그로뇨까지 안내도

 

비아나 마을 전경

 

 비아나의 까미노 표시를 따라서 반대편으로 도시를 빠져나가면 로그로뇨까지는 10km 정도의 길이다.

 

 이제부터 스페인에서 가장 작은 자치주 라 리오하로 들어선다. 라 리오하의 땅은 크기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풍성한 문화와 예술, 다양한 경관을 보여준다. 이 지역은 대서양과 지중해 기후, 내륙의 메세타 지역의 영향이 모두 만나는 접점이다. 라 리오하의 땅은 비옥했기 때문에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했고 늘 이곳을 차지하기 위한 쟁탈전이 벌어졌다. 라 리오하는 다른 지역보다 로마네스크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 있다.

 라 라오하의 자연은 사람들에게 값진 선물 포도주를 주었다. 스페인에서 여기만큼 좋은 포도주를 생산하는 곳은 없다고 한다. 특히 적포도주는 세계 최고라고 할 수 있는 비노 호벤(Vinos Jovenes), 끄리안사(Crianzas), 레세르바(Reservas), 그란데스 레세르바(Grandes Reservas)와 같은 포도주가 생산되고 있다.

 

 순례자들은 로그로뇨 시가지로 들어가기 위해 에브로 강의 삐에드라 다리를 통해서 건너간다. 다리를 건너 오른쪽 건물 사이로 이어져있는 까미노 표시를 따라가면 오래된 성벽의 일부처럼 보이는 레벨린 문(Puerta del Revellín)이 나온다. 이 문을 통과한 순례자는 광장에 도착하고 여기에서 계속 직진하면 도로의 끝이다. 여기에서 뚜게스 데 나헤라 거리를 따라 왼쪽으로 300미터 가량 직진하면 된다.

 

 비아나에서 로그로뇨까지는 제법 먼 길이라 중간의 숲에서나 곳곳의 쉼터에서 쉬면서 길을 가니 15시 경에 로그로뇨에 도착한다.

 

저 멀리 보이는 로그로뇨 마을

 

멀리 보이는 로그로뇨 성당의 탑들

 

 로그로뇨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에브로 강 위에 서있는 삐에드라 다리 (Puente de Piedra)를 건넌다. 이 다리는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산또 도밍고 데 라 깔사다의 제자인 산 후안 데 오르떼가가 12개의 아치와 세 개의 방어용 탑이 있는 석조 다리를 지었다고 한다. 1917년 늘어나는 교통량 때문에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다리를 현대화했다.

 

삐에드라 다리

 

라 리오하의 와인길 표시

 

 로그로뇨에 도착하여 알베르게에 들어가니 길을 가며 자주 만났던 모녀가 같은 알베르게에 들어와 있었다. 오는 길에 딸이 다리를 절고 있어 파스를 하나 주었더니 고맙다는 인사를 하였다. 딸에게 엄마와 여행하는 것이 쉽지 않은데 용기를 내어 왔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싸우지 말고 모녀가 끝까지 길을 잘 걸으라고 당부를 하고 여러 이야기를 하며 잠시 쉬고, 저녁도 먹을 겸 시내 구경을 나갔다.

 

 시내를 가니 가장 눈에 띄는 곳이 대성당이다. 로그로뇨 대성당(La Catedral de Logroño)으로도 불리는 산타 마리아 라 레돈다 대성당 (Catedral Santa Maria la Redonda)15세기 르네상스 시대에 건축되었으나 고딕 양식도 보인다. 세 개의 신랑(교회당 건축에서좌우의 측량 사이에 끼인 중심부), 세 개의 후진이 있고, 측면에 소성당이 위치하며 지붕은 궁륭으로 덮여 있다. 문은 철책으로 가려져 있으며 늘씬한 쌍둥이 탑은 바로크 양식이다.

 성당 안에 있는 십자가의 길은 천재 미켈란젤로 부오나로가 그린 것이라고 한다.

산타 마리아 라 레돈다 대성당 (Catedral Santa Maria la Redonda)

 

 대성당의 쌍둥이 탑이 두드러져 보이는 도시 내부 중심지에는 정원 같은 공간이자 산책로인 파세오 델 에스폴론이 있다. 이 산책로를 경계로 신시가지와 구시가지가 나눈다. 구 시가지에는 흥미로운 건물들과 가죽 공예, 이 고장의 맛있는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선술집을 만날 수 있다. 엘 에스폴론(El Espolon)과 그란 비아(Gran Via) 주변은 상점과 카페 등이 밀집해 있는 지역으로 밤에는 펍과 음식점이 호황을 이루고 있다. 우리도 이 거리를 돌아다니다 저녁을 먹으려 간 곳이 튀르크식 케밥 비슷한 음식을 파는 곳이었다. 4명이 떠들면서 저녁을 먹고 거리를 배회하다가 알베르게로 돌아와서 오늘 하루를 끝내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카메라를 가져가지 않아서 대성당을 휴대폰으로만 찍은 사진이 있고 다른 사진이 없다는 것이다.

스페인, 산티아고 까미노 길을 걷다. 7(05. 23, 에스테야 - 로스 아르코스)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오늘의 길 : 에스테야 - 이라체와인샘 - 아스케타 - 비야마요르데 몬하르딘 - 로스 아르코스

 

 오늘은 에스테야에서 로스 아르코스까지 약 22km의 길을 가야 한다. 이제 조금은 익숙하게 아침 6시 경에 일어나 떠날 준비를 하고 가볍게 아침을 먹고 길을 떠나는 시간은 7시 경이다.

 

 숙소를 나와 에스테야 시내를 제법 걸어가면서 시내 아침의 여러 풍경을 즐긴다. 에스테야에서 2킬로미터 정도 거리에 도시의 일부로 여겨지는 첫 번째 마을인 아예기는 포장된 도로의 오르막길을 조금 오르면 도착한다. 산초 가르세스 4세의 양도로 이라체 수도원에 소속된 중세 교회의 영지였던 아예기는 전원 마을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애쓰고 있다. 아예기에서 포도주 수도꼭지로 순례자에게 유명한 이라체 수도원이 눈에 잡힐 듯 가깝다. 아예기를 지나 조금 가면 길가에 고로를 피어놓고 쇠를 두드리는 대장간이 보인다. 호기심에 들어가 보니 까미노의 기념품을 수공예로 만들어 파는 곳이었다. 기계로 찍어내는 기념품이 아니라 직접 불에 주물을 녹여서 두드려가며 만드는 것이었다. 그 정성이 너무 고마워 조그마한 기념품을 하나 사고 조금 가니 유명한 이라체의 포도주가 나오는 수도꼭지가 나온다.

 

에스테야 공원의 조형물

 

이 구간의 안내도

 

기념품을 수작업으로 만드는 대장간

 

 이제 순례자는 책과 블로그 등을 통해 가장 많이 보았던 장소인 까미노에서 가장 특이하면서 유명한 수도꼭지 보데가스 이라체에 도착한다. 이곳에는 두 개의 수도꼭지가 있는데 한 곳에서는 물이 나오고 다른 한 곳에서는 포도주가 나온다. 까미노를 다녀온 순례자는 누구나 여기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며 한 잔의 포도주를 마셨을 것이다.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한 잔의 포도주는 힘든 길을 걷는 순례자의 몸과 마음을 재충전할 수 있게 해주며, 포도주의 땅으로 들어온 것을 실감하게 한다. 한 잔의 포도주는 순례자의 마음을 여유롭고 풍요롭게 적셔주는데, 사실 이것은 까미노를 빙자한 포도주 마케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중세시대 이 길을 힘없이 걸어야 했던 굶주린 순례자에게 한 조각의 빵과 한 잔의 포도주는 어떤 의미였을지 생각해 보면 너무나 감격할 만한 일이다.

 

 이곳을 지나가는 시간이 일러 아직 포도주 수도를 청소하고 있었다. 그래서 잠시 기다리니 수도에서 포도주가 나왔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컵에 한 잔의 포도주를 받아 마시며 기뻐하였다. 저번에 만나 같은 길을 걷는 모녀가 있어 우리를 인솔하는 여행사에서 미리 준비한 종이컵을 하나 주니 고마워하였다.

 사실 이 수도는 Bodegas Irache라는 와인회사가 홍보용으로 순례자에게 주는 와인이다. 한 때는 무분별한 사람들이 병에 가득 담아 가기도 하여서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수도꼭지 옆에 붙어 있는 글귀는 '순례자여! 이 훌륭한 와인의 힘과 활력을 가지고 산티아고에 도착하고 싶다면, 한잔 마시고 행복을 위해 건배하세요. -이라체 샘, 와인 샘'이라는 글이다. 동기야 어찌되었던 한잔의 와인이 순례자에게 힘을 준다면 그것도 좋은 일이다. 사족으로 말하면 이 와인은 우리나라에도 한국 나바라 주식회사와 한국 이라체 주식회사를 통해서 수입되고 있다

 

fuente de irache에서 와인을 받는 사람들

 

 나바라의 가장 유명한 수도원 중 하나인 이라체 수도원은 보데가스 이라체를 지나면 보인다.

 

 이라체 수도원 (Monasterio de Santa Maria de Irache)은 베네딕토 수도회의 오래된 수도원으로 기록은 958년부터 존재한다. 공식 명칭이 산타 마리아 데 이라체 수도원으로 전성기는 11세기에 수도원장 베레문도가 이곳을 순례자를 위한 나바라의 첫 번째 병원으로 바꾸었을 때였다고 한다. 12세기에 현재의 성당 건물을 짓기로 계획하면서 전성기는 계속되었다.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축되었고 12세기 중반에 후진과 십자가상도 완성되었다. 17세기 초에 베네딕토 수도회의 학교가 생겼고 대학교로 바뀌었다.

 

 까미노의 수호성인 성 베레문도(San Veremundo)11세기에 이라체에서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수도사가 되고 싶었으나 거절당한 후 수도원의 문지기 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그는 수도원에서 나오는 빵 조각을 조금씩 모아 가난한 사람을 도왔다고 한다. 어느 날 수도원장이 옷 속에 감춘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어린 베레문도는 약간의 빵 조각이라고 대답했는데, 그가 그 빵 조각들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줄 때마다 빵 조각이 커져서 나왔다고 한다.

 성 베레문도에 관해 전하는 이야기 중 많은 내용은 그가 순례자들이 걷는 길을 개선하기 위해 많이 애써 수도원, 병원을 세우고 까미노가 지나는 지역에 사람들을 거주하게 했다는 내용도 있다. 성 베레문도는 산토 도밍고 데 라 깔사다(Santo Domingo de la Calzada), 산 후안 데 오르테가(San Juan de Ortega)와 함께 순례자를 위해 헌신했던 동시대의 3대 까미노 성인 중 하나며, 그들 성인들의 덕에 순례자가 지나는 까미노 데 산띠아고가 많이 좋아졌다고 전해진다.

 

이라체 수도원

 

 수도원을 지나 오른쪽 길을 따라가서 호텔의 뒤 왼쪽으로 나있는 길을 따라 산 미겔의 들판을 지나 자동차 전용 도로의 밑을 지나는 터널을 통과하면 까미노는 바위투성이 산 위에 펼쳐진 떡갈나무 숲으로 들어간다. 숲으로 난 구부러진 길을 따라가면 언덕 위의 작은 마을 아스께타에 도착한다.

 

까미노 데 산티아고 - 야고브의 길 이정표

 

두 갈래 길의 안내도

 

 이 길을 따라가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의 안내도가 나온다. 어느 길을 가더라도 얼마 아니 가서 만나는 길이지만 우리는 왼쪽 산길로 들어섰다. 평탄한 도로를 따라가는 길보다는 경치가 아름답다고 이 길을 안내하는 분이 우리에게 말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면서 저 멀리를 보니 산봉우리에 암벽 비슷한 것이 보였다. 처음에는 길을 가던 사람들이 암벽이니 건축물이니 의견이 분분하였는데 길을 더 가서 산봉우리가 잘 보이는 곳에서 보니 무슨 요새와 같았다. 바로 몬하르딘 성 (Castillo de Monjardín)으로 산 에스테반 데 데이오 성(Castillo San Esteban de Deyo)으로도 불리는 9세기에 지어진 성인데 10세기엔 데이오 팜플로나 왕조의 요새로 10세기에 산초 가르세스가 이슬람교도를 물리친 요새다. 이 성은 14세기에 보수되었으며 현재도 복원 작업이 한창이라고 한다.

 

멀리 산봉우리 위에 보이는 비야마요르 데 몬하르딘의 몬하르딘 성

 

길에서 보는 여러 풍경

 

아스께야 마을 근처의 샘

 

 아스케따에서 비야마요르 데 몬하르딘까지는 약 1km 정도다. 이 마을은 언덕 위에 솟아있는 아름다운 풍경을 가진 조그만 까미노 마을로 성벽에 맞대어져 있는 바로크의 화사한 탑을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성 안드레아 성당이 인상적이다.

 

산 마르틴 칼레 길

 

비야마요르 데 몬하르딘 마을의 성당

 

 비야마요르 데 몬하르딘을 떠난 순례자들은 까미노 길을 따라 길게 늘어선 포도밭 사이로 내려가야 한다. 이 길은 까미노 표시가 잘되어 있는 직진으로 넓은 농지를 지나기 때문에 로스 아르코스까지 길을 잃을 염려는 없지만 12km의 길을 마을도 없이 약 3시간 정도를 탁 트인 공간을 침묵과 함께 걸으면 자신도 모르게 '무엇 때문에 왜 이 길을 걷는가?'에 대해 회의도 들 수 있고, 자신이 살아온 지나온 세월의 희로애락이 생각나기도 할 것이다.

 

 

넓게 펼쳐진 포도밭

넓게 펼쳐진 평원길을 걷는 순례자들

 

 다행히도 이 길의 중간에 뜻밖에 푸드 트럭이 순례자들을 반겨 주었다. 길을 걷는 순례자들은 삼삼오오 둘러앉아 커피를 마시거나 주스를 마시면서 서로의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피로를 풀었다.

 

푸드 트럭

 

넓게 펼쳐진 평원

 

 길을 가다가 보니 '인간의 역사'라는 제목의 안내판이 보였다. 아마 오래 전의 무덤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는 것 같았는데 정확한 사실은 잘 모르겠다.

 

쉼터에서 쉬고 있는 세 여인

 

쉼터에서 신발과 양말도 벗고 망중한을 즐기는 순례자

 

아주 넓은 평원에펼쳐지는 양귀비 꽃

 

로스 아르코스 입구

 

 덤불과 로즈마리, 침엽수의 언덕 발치에 위치한 조그만 농업 도시 로스 아르코스는 1516세기를 거치면서 카스티야 왕국과 나바라 왕국의 경계에 위치한 도시로 두 왕국 어느 곳에도 세금을 내지 않으며 두 왕국의 상업적 특성을 잘 이용해 부를 축척했던 마을이었다. 도시가 건설되고 왕은 마을 사람들의 용기를 치하하여 활이 그려진 그림을 하사하며 이 마을을 아르코스(Arcos; 활 모양의)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발코니가 있는 아름다운 집들 사이의 조그만 골목길을 지나가면 조그만 광장 왼쪽으로 아름다운 산타 마리아 성당이 나타나고 성당을 지나 조금 가면 카스티야 문이 나타난다.

 

줄지어 길을 가는 거위들

 

로스 아르코스 거리

 

 산타 마리아 성당(Iglesia de Santa Maria)12세기의 로마네스크 양식이 바로크 양식으로 바뀌는 변화가 느껴지면서 조화를 이루는 성당이다. 십자가 평면의 성당은 그리스와 로마식 신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6세기에 보수되어 성당의 일부 요소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요소를 간직하고 있다.

외부에는 거대한 쿠폴라(둥근 지붕)16세기 중반에 세워진 팔각형의 아름다운 르네상스 풍의 탑은 산띠아고로 가는 길에 볼 수 있는 가장 높으면서 가장 아름다운 탑 중 하나이다.

 산타 마리아 성당의 아름다운 복도 한가운데에는 그늘에서 보관중인 성모상이 있다. 이 성모상은 615일에만 햇빛에 내놓는다고 한다.

 

산타 마리아 성당

 

산타 마리아 성당 앞 석탑

 

 산타 마리아 성당 옆 강변에 위치하고 있는 카스티야 문(Puerta de Castilla)17세기에 만들어졌고 1739년 펠리페 5세에 의해 보수되었다. 로스 아르코스를 나설 때는 이 문을 통과하여야 한다.

 

양쪽의 건물 사이로 멀리 보이는 카스티야 문

 

 로스 아르코스에 도착하니 아직은 이른 시간이었다. 아르코스 마을에 들어와서 숙소를 조금 벗어나 광장의 성당까지 갔다가 다시 길을 돌아와서 숙소를 찾아서 가니 이제 13시 30분이었다. 까미노에서 주변도 살피고 자신도 돌아보아야 하는데 아직은 까미노를 너무 걷는 것에만 열중하는 것 같았다. 혼자서 길을 걷는 사람들은 숙소를 구하기 위해서 빨리 걷는다고 하지만 우리는 숙소가 예약이 되어 있기에 천천히 걸어도 아무런 지장이 없는데 걷기에만 열중하여 아무 것도 올바르게 살피지 않으니 숙소에 너무 일찍 도착한다.

 숙소에 도착하여 함께 하루 종일 걸어온 일행과 알베르게 식당에서 오늘의 메뉴인 순례자 음식을 코스로 시켜서 배불리 먹고 조금 있으니 일행들이 모두 도착한다. 알베르게 2층의 휴식처에 앉아 따뜻한 햇볕을 쬐며 한가하게 휴식을 취했다.

 

 길을 걸으며 많은 사람들을 보았다. 아주 나이가 많은 조그마한 할머니가 혼자서 자기보다 더 큰 배낭을 지고 아주 힘든 모습으로 걷고 있었다. 인사를 해도 인사를 받을 힘이 없는지 조그마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여자에게는 이 길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하고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많은 한국 사람들과 서양인들 이 걷고 있는 광경을 본다. 과연 그들 모두에게 어떤 절실함이 있어 이 길을 걷는 것일까? 아니면 여행을 하는 것일까? 단순하게 여행을 하기 위해서 이 길을 걷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아직은 답을 모르겠다.

 이 길을 다 걷고 나면 답을 얻을 수 있을까?

스페인, 산티아고 까미노 길을 걷다. 6(05.22, 푸엔테 라 레이나 - 에스테야)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오늘의 길 : 푸엔테 라 레이나 - 마네루 - 시라우키 - 로르카 - 비야투에르타 - 에스테야

 

 오늘은 푸엔테 라 레이나에서 에스테야까지 약 22km의 길이다.

 

오늘 역시 일찍 일어나 간단하게 과일과 빵으로 아침을 먹고 알베르게를 나와 길을 떠난다. 아직은 해도 뜨지 않아서 조금은 어두운 마을길을 걸어 여왕의 다리(Puente la reina)’를 건너서 고속도로를 지나 좁은 비포장도로를 통해서 계곡의 끝으로 깊숙이 들어간다. 계곡을 통해 마네루 입구의 십자가상까지 오르는 가파른 비탈길은 오래된 수도원과 성당건물 사이에서 시작된다. 마네루는 향기로운 로즈 와인의 생산지로 유명한데 스페인에서 로즈 와인을 찾았으나 나타나지를 않아 마시지를 못했다. 마네루의 언덕 위에는 외롭게 서있는 산따 바르바라 성당이 있다. 마네루에 다음 마을인 시라우키까지는 약 40분이 소요된다. 시라우키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포도밭을 지나다 보면 이 고장이 스페인 북부의 포도주의 고장임을 다시 깨닫게 된다.

 

우리가 머문 알베르게

 

이른 아침의 푸엔테 라 레이나 거리 풍경

 

아침의 푸엔테 라 레이나 다리

 

이 구간의 안내도

 

공동묘지

 

에스테야(16.1km), 시라우키(2.1km)를 가리키는 이정표

 

 이정표가 나오고  여기에서 길을 따라 걸으면 멀리  바스크어로 살모사의 둥지 라고 불리는 시라우키가 한 폭의 그림과 같은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이 이름은 로마 시대와 중세에 붙여진 이름으로, 이 마을의 전략적인 위치 때문에 지나가기가 어려운 곳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내가 이 마을의 사진을 찍어 한국의 여러 곳에 보내니 모두들 그림 같다고 탄복을 하였다.

 평탄한 언덕길을 따라 올라서면 오래된 성벽으로 둘러싸인 중세의 마을 시라우키에 다다른다. 마차가 다니기 위해서 폭이 최소 5미터가 넘었던 길에 배수로를 가지고 있는 바닥은 커다란 돌을 토대로 기초공사를 한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중세의 길을 가진 시라우키를 지나면 지나온 현대에 만들어진 다리와 팜플로나와 로그로뇨를 이어주는 고속도로를 만나게 된다. 불과 몇 십 미터 사이에서 중세와 현대의 도로를 동시에 걷게 되는 것이다.

 

저 멀리 보이는 그림같은 시라우키(Cirauqui)마을

 

넓게 펼쳐지는 포도밭

 

시라우키 마을

 

도로 옆의 교각이 고속도로의 교각이다.

 

 

 

 시라우키 마을의 바에 둘러서 주스와 오물렛 비슷한 약간의 음식을 먹고 다시 길을 걷는다. 약 한 시간이 넘게 걸으면 로르까에 도착한다. 과거 로르까의 주민들은 돈벌이를 위해 소금기가 많은 강물을 독이 있는 강물이라고 순례자들을 속여 포도주를 팔았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는 맛 좋은 포도주를 생산하는 인심이 좋은 친절한 마을이다.

 로르카의 산 살바도르 교구 성당 (Iglesia Parroquial de San Salvador)은 롬바르디아 양식의 로마네스크 성당으로 원통형으로 건축된 아주 독특한 형식을 보여준다. 창문 위는 아치, 제단 위는 원형 궁륭으로 덮여 있으며 정문과 탑은 20세기에 지어진 현대 건축물이다.

 

로르카 산 살바도르 교구 성당(원통형 건물)

 

교구성당 옆의 성당

 

 마을을 지나가는 도중의 카페에 우리말로 '맛집'  '아이스 커피'라고 쓴 입간판으로 한국인 손님을 유혹하고 있는 카페를 만났다. 아이스 커피는 한국인이 아니면 잘 마시지 않는 메뉴다. 까미노 길을 가면 많지는 않으나 제법 보이는 우리말 표기이다. 이 표시는 보고 이 길을 걷는 사람 중에 한국인이 엄청 많다는 통계를 본 일이 있는데 거짓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길을 걸으며 만나는 동양인의 90%는 한국인인 것 같았다.

 

우리말로 선전 문구를 만든 카페 - 한국인이 얼마나 많이 오는지를 보여 주는 모습이다.

 

공사로 인해 도로가 차단되었다는 표시

 

 약 한 시간을 걸으면 중세의 로마인들의 주거지이기도 하였고, 성직자들의 거주지이기도 했던 비야 투에르타에 도착한다. 비야 투에르타 마을에 들어가니 여기서 로스 아르고스까지를 안내하고 있는 까미노 안내판이 나온다. 하지만 나의 오늘 여정은 에스테야까지다.

 

 과거 산띠아고 데 꼼포스텔라를 향하는 까미노는 비야투에르타에서 지금은 폐허만 남아 있는 사라푸스 수도원으로, 그리고 다시 이라체 수도원으로 에스테야를 지나지 않고 곧장 이어졌다고 한다. 그러다가 1090년에 산초 라미레스가 넘쳐나는 도보순례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에스테야를 세우면서부터 까미노 길이 바뀌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비야투에르타에는 예전의 까미노 길에 그대로 남아 있다.

 

까미노 안내도(비야 투에르타 - 로스 아르고스)

 

까미노 표시

 

 길을 가다가 왼쪽을 보니 큰 성당이 보이는데 성 베르문도의 마을 성당이다. 성당 전면에 휘장이 걸려 있었는데 휘장의 내용은 베르몬도의 밀레니엄(1020 - 2020) 기념휘장이었다. 내일 지나갈 이라체 수도원의 수도원장이었던 성 베레문도의 고향은 확실하지 않다. 예전부터 비야투에르타와 인접한 아레야노(Arellano) 사람들은 성 베레문도의 고향이 자기 마을이라는 논쟁을 계속하고 있다. 그래서 성인의 유해는 5년마다 번갈아 가며 두 마을에서 보관하지만 매월 38일에는 모두 성 베레문도의 날을 기원한다고 한다..

 

성 베르문도 마을 성당

 

성 베르문도 데 이라체의 발자취를 따라 가는 안내도

 

에스테야 주변 안내도

 

산 미겔 성당(맞는지 솔직히 자신이 없다.)

 

산 미겔 수도원

 

 비야 투에르타 마을을 지나 한 시간 정도를 아스팔트길을 걸어가면서 많은 성당을 보고 지나간다. 스페인은 가톨릭 국가라 성당이 너무 많다. 천년도 넘는 시간에 걸쳐 수많은 성당들이 세워져 지금은 거의 폐허가 된 성당의 모습도 보인다. 그리고 현대적인 성당도 많이 또 세워지고 있다.

 

이름을 모르는 성당

 

 강을 건너 에스테야로 들어가 오늘의 종점인 알베르게를 찾아서 도시의 대로 가를 걸어 갔다. 따가운 햇살 아래 길을 제법 걸어가니 예스런 성당이 보인다. 그리고 그 성당에 이어져서 알베르게가 있고, 거기가 오늘의 숙소였다. 숙소에 도착하니 너무 일찍 와서 아직 짐도 도착하지 않았고 숙소도 문을 열지 않았다. 그래서 주변을 돌아보며 사진을 찍고 기다리니 숙소의 문이 열리고 들어가게 하였다.

 

좋은 빵과 훌륭한 포도주, 모든 종류의 행복함이 있는 도시로 알려져 있는 스페인어로는 에스테야(Estella), 바스크어로는 리사라(Lizarra)라고 하는 이 마을은 스페인 나바라 중서부에 있는 산티아고 순례 길에 있는 도시다. 팜플로나 및 아라곤 왕국의 산초 라미레스 왕이 1090년 고대 리사라 지역에 마을을 건설했다. 왕은 프란크스(상인, 귀족이나 교회에 복속되지 않는 자유인)가 이곳에 정착하도록 권장했다. 유럽 전역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향해 여행하는 순례자들이 늘어남에 따라 이들을 돌볼 사람들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에스테야에는 바스크인, 유대인, 프랑스인 등 여러 인종이 모여 살았다. 왕의 주도한 개발로 인해 도시는 항상 부유했는데, 당시 번성한 상업과 수공업 때문에 에스테야는 까미노 길에서 매우 중요한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북부의 톨레도로 불릴 만큼 기념비적인 유적들이 다수 있고, 해발고도 421m로 산에 둘러싸여 있어서 바람이 적고 날씨가 비교적 온화하다.

 

 에스테야는 바스크어로 별이라는 뜻으로 도시의 문장에도 별이 하나 그려져 있다. 이 별은 사도 야고보가 잠들어 있는 콤포스텔라로 우리를 인도한다. 지금은 도시의 크기가 줄었지만 에스테야는 과거 나바라의 왕은 왕위를 받을 때 에스테야의 성당에서 선서를 했으며 에스테야의 로마네스크 양식 궁전에서 살았다고 한다.

 

숙소 옆의 Rocamador 성당의 모습

 

숙소 안의 그림

성당과 숙소 앞의 모습

 

숙소의 알베르게의 종사자에게 옆에 있는 성당의 이름을 물어 종이에 적어 달라고 하여 이 성당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는데 이름이 Recamador였고, 이 알베르게의 이름은 성당의 이름과 같은 Capuchinos Recamador였다.

 

 

알베르게 조금 위에 있는 슈퍼

 너무 일찍 도착하여 비로소 점심을 먹을 시간이었다. 그래서 같이 길을 걷는 동료와 함께 점심을 먹기 위해서 식당을 찾아 나섰다. 숙소를 나가 시내를 조금 올라가니 식당이 보여 들어가니 무어라 하면서 막았다. 종업원들은 영어가 통하지 않고 우리는 스페인어를 알아들을 수 없어 조금 있으니 자리를 안내해 주었다. 아마 자리가 없어 그렇게 된 것 같았다. 자리에 앉아 영어 메뉴판을 청하니 메뉴판이 없어 종사자가 영어로 글을 써서 가지고 와서 설명하는데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겨우 이해를 한 것이 전채와 본 메인 요리, 후식으로 나누어진다는 것을 알고 각 코스마다 하나씩 시켰다 첫 코스는 샐러드와 닭 수프, 파스타, 본 메뉴는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후식은 아이스크림 푸딩 요구르트 등이 있었는데, 닭 고기 수프와 돼지고기 아이스크림을 시키니 음료는 무엇을 할는지를 물었다. 우리는 이해를 못하고 콜라를 시켰는데 나중에 보니 와인이나 물을 고르는 것이었다.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고 주문을 하고 기다리니 수프를 한 접시 가득 가져다주고 빵도 주었다. 수프가 맛있으면서 엄청난 양이라 빵과 함께 먹으니 배가 부를 지경이었다. 그 뒤에 나오는 돼지고기와 후식도 배불리 먹고 가격을 물으니 콜라까지 포함하여 17유로(약 2만원)이었다. 가격에 비하여 너무 좋은 음식이었다.

 

 이 때는 몰랐으나 한 이틀 뒤에 이 음식을 알게 되었다. 스페인이 길을 걷는 사람들을 위해서 각 마을마다 오늘의 메뉴라고 해서 순례자들을 위한 음식을 파는 것이다. 가격은 약 15유로 안팎으로 마을마다 약간 차이가 있었지만 코스는 3가지로 동일했고 음료는 와인과 물중에서 택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말하는 가성비에 비교하면 너무 값이 싼 음식으로 양과 질 면에서 충분히 만족할 만했다. 마을마다 메뉴는 조금 다르지만 기본적으로는 비슷한 음식 코스니 이 까미노를 걷는 사람들에게 권할 만한 음식이었다.

 

 점심을 배불리 먹고 숙소로 돌아오니 일행들이 거의 도착하였다. 그래서 우리가 갔다 온 식당 앞에 아주 큰 슈퍼마켓이 있다고 알려주니 대부분이 그 슈퍼에 갔다. 우리 무리도 슈퍼에 가서 나중에 먹을 맥주와 간단한 안주를 사서 돌아왔다. 조금 쉬고 있다가 오늘 여행사에서 우리 일행을 위해서 저녁 회식을 베풀어 준다고 하여 식당에 가니 슈퍼에서 사온 여러 가지 재료를 같이 간 일행 중에 여성분들이 한국식으로 요리하여 풍부하게 마련해 놓았다. 시끌벅적하게 떠들면서 맛있게 저녁을 먹고 즐겁게 이야기를 하며 놀았다.

 

 저녁을 먹고 잠시 있다가 우리 일행 4명은 알베르게의 뒷마당의 탁자에 앉아 맥주를 마시면서 여러 이야기를 하며 즐기고 있었는데 뜰에서 요가와 비슷한 자세를 취하며 운동을 하는 사람이 보였다. 우리 일행 중에 다소 장난기가 많은 쾌활한 사람이 그에게 이야기를 걸면서 자세를 따라 해 보았다. 그리고 그 사람과도 인사를 하였다. 잠시 맥주를 마시고 있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져 안으로 들어가 식당에 가니 조금 전에 뜰에서 요가를 하던 사람이 일행 6명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다. 뒤에 또 이야기 하겠지만 이 6명과는 같은 길을 걷기 때문에 자주 만나서 인사를 나누었다.

 

 오늘 하루를 즐겁게 걷고 또 배불리 먹고 하였으므로 아무런 생각도 없이 잠자리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