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鶴)의 오딧세이(Odyssey)

스페인, 산티아고 까미노 길을 걷다. 4(05.20, 수비리 - 팜플로나)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오늘의 길 : 수비리 - 라라소냐 - 수리아인 - 트리니닷 데 아레 - 팜플로나

 

 오늘은 팜플로나까지 가는 길은 비교적 평탄한 21km의 길이 계속 이어진다. 아침 일찍 일어나 떠날 준비를 하고 07시 경에 숙소를 나와 길을 떠났다.

 

 순례자는 어제 건너온 마을 입구에 있는 라 라비아 다리를 건너 오른쪽으로 돌아서 강기슭을 따라 평탄하고 부드러운 길을 걷는다. 길을 조금 가면 예상하지 않았던 상당히 긴 공장지대를 지나게 되며 돌을 깐 좁은 길을 따라서 일야라츠(Ilarratz)와 에스키로츠(Ezkirotz)를 지나 작은 시내까지 숲으로 우거진 좁은 길을 따라가 목장 사이의 도로를 지나면 아름다운 중세 다리인 시글로 14세의 다리를 건너서 라라소냐에 도착한다.

 

이 구간의 안내판

 

걷는 길에서 돌아보는 수비리 마을

 

일야라츠(Ilarratz) 1.3kn라는 이정표

 

 길을 가며 오른쪽을 바라보니 채석장을 비롯하여 여러 공장이 보이고, 비안개가 마을을 덮어 산을 올라가는 아름다운 경치가 나타난다. 날이 흐려서 비옷을 입고 걷는 사람도 보이지만 비는 오지 않고 비안개만 자욱하게 끼여 시야를 조금 가린다.

 

저 멀리 비안개가 자욱한 풍경

 

우리 말로 '문화를 느낌'이라는 표어가 보인다.

 

지나가는 집 마당에 있는 순례자상

 

조용히 흐르는 아르가 강

 

라라소냐 가까이에 있는 바로 들어가는 다리

 

 길을 가며 조금은 시장기가 들 무렵 조그마한 아르가 강을 건너는 다리를 지나가니 바로 바가 나타난다. 모두들 엄청 반가워한다. 아침도 먹지 않고 출발했기에 이 바에 들어가 커피와 빵으로 가볍게 요기를 하고 쉬고 있으니 여러 나라의 많은 순례자들도 보이고 우리 일행들도 연이어 들어온다. 모두들 여기에서 쉬고 또 자기가 갈 길을 가는 것이다.

 

바의 전경

 

 라라소냐는 까미노와 함께 발전하여 순례자들에게 필요한 병원과 숙소를 제공하여 왔다. 그래서 라라소냐의 주민들은 순례자들에게 친절하며, 마을을 지나는 까미노의 양 옆에는 상점들과 아름다운 목재 발코니의 집들이 늘어서 있다.

 라라소냐에서 약간의 언덕을 지나면 예전 왕실의 영지였던 아케레타에 도착하게 된다. 아케레타에서 도로를 가로질러 숲이 우거진 좁은 계곡 길을 따라 걸으면 인공적인 소음은 모두 사라지고 자연의 소리가 순례자의 마음을 감싸준다.

 이어서 나타나는 좁은 숲길은 아르가 강과 나란히 강변의 산책로와 같이 편안하게 수리아인으로 이어진다. 수리아인 마을을 나와 소나무와 떡갈나무로 우거진 좁고 꼬불꼬불한 숲길을 따라 아르가 강과 나란히 걸으면 이로츠에 도착한다.

이로츠에 도착하면 팜플로나로 향하는 두 가지 까미노 길 중에 트리니닷 데 아래를 지나 팜플로냐까지 약 9km를 가는 공식적인 까미노 길을 택한다. 공식적인 까미노는 노란 화살표를 따라가면 된다.

 

 바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세요를 찍고 라라소냐, 아케레타, 수리아인, 이로츠 등을 지나 아를레타를 지나면 앞에 나올 마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나온다. 벌써 반 이상을 걸었다.

 

팜플로나 분지로 돌아가기의 안내도

 

쉼터

 

아틀레타를 지나 비야바와 부를라다 등을 가리키는 이정표

 

유채가 벌판을 덮고 있는 모습

 

 팜플로나에 바로 근처에 있는 부를라다는 까미노 데 산티아고로 인해 발전했고, 이 때문에 순례자를 돕는 두 종교 단체 산 살바도르 협회(La Cofradía de San Salvador)와 세례자 요한 협회(La Cofradía de San Juan Bautista)가 이곳에서 설립되었다.

 

 부를라다 다리 (Puente de Burlada)는 여섯 개의 아치의 다리이나 언제 만들어졌는지 확실히 알 수 없다. 이 석조 다리는 모양이 다른 여섯 개의 아치가 있는데 첨두아치와 반원아치이다.

 

부를라다 다리

 

팜플로나를 가리키는 이정표

 

 

 

 도심지에 길게 늘어선 돌벽을 따라 엄청나게 긴 길을 가면 시가지가 나오고 계속 길을 가면 멋진 다리가 나타난다. 노란 화살표를 따라가서  고딕양식의 중세 다리인 막달레나 다리를 지나면  팜플로나의 성문인 수말라카레기 문(Portal de Zumalacárregui)이 나오고, 가까이에 웅장하게 서있는 거대한 성채와 멀리 팜플로나 대성당의 모습이 보인다.

 

 팜플로나는 나바라(Navarra)주의 주도로 아르가 강변의 고지대에 자리 잡고 있으며, 10세기부터 16세기 초반까지 나바라 왕국의 수도로 번영을 누렸다. 이 도시는 기원전 1세기경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한 폼페이우스에 의해 건설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민족의 침략 때문에 시가지는 성채로 둘러싸여 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순례길이 지나는 곳으로 성지 순례자들과 도보 여행자들이 많이 찾는다. 오랜 역사와 갖가지 전설로 전통을 느낄 수 있으며 동시에 현대의 편리성과 이름다움이 있는 산업도시이다. 중세부터 이베리아 반도의 전략적인 도시이면서, 이베리아 반도와 갈리아를 잇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팜플로나는 여러 작은 마을이 모여 구성된 도시라고 한다. 그래서 마을들이 서로 대립하는 경우도 많아서 성벽으로 분리되어 있었다고 한다. 현재 곳곳에서 구획이 나뉘어 있는 길은 이런 역사를 보여주며, 가장 오래된 구역인 라 나바레리아(La Navarrería)는 고대 로마의 구획을 아직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팜플로나는 원래 나바라의 원주민이 살고 있던 곳으로 11세기부터 프랑스인과 유태인이 이주해오면서부터 다양한 전통을 받아들이는 역사적인 도시가 되었다. 지금은 현대적인 도시가 된 팜플로나에는 일 년 내내 중요한 문화 행사가 많이 열린다.

 

 그 중에서 매년 76~14일에 소떼가 시가지를 달리는 소몰이행사(El encierro) '산 페르민 축제(Fiesta de San Fermín)'가 열려 전 세계의 관광객이 찾는다. 13세기부터 시작되어 온 이 축제는 3세기 말 팜플로나의 주교였고 도시의 수호성인인 산 페르민을 기념하는 행사로, 헤밍웨이의 소설 '태양은 또다시 떠오른다.(The Sun Also Rises)'에 그 광경을 묘사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축제기간 동안 투우에 쓰일 소들이 수백 명의 사람들과 뒤엉켜 산토 도밍고(Santo Domingo) 사육장에서 투우장까지의 800m 가량의 거리를 질주하는 모습이 이 축제의 하이라이트이다.

 

 팜플로나는 어네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가 오랫동안 머물며 글을 쓰기도 하여 그가 머문 여러 곳이 추억의 장소가 되었고, 미국의 유명 소설가 시드니 셀던(Sidney Sheldon)의 장편소설 '시간의 모래밭(The Sands of Time)'의 무대로도 유명하다.

 

막달레라 다리

 

 아르가 강 위의 고딕 양식의 막달레나 다리 (Puente de la Magdalena)를 지나온 순례자들은 성벽을 따라 조금 걸어가서 수말라카레기 문 (Portal de Zumalacárregui)을 통해 팜플로나로 들어간다. 프랑스 문이라고도 부르는 수말라카레기 문의 아치는 1553년 까를로스 5세의 부왕이었던 알부르케르케 공이 건설하였다.

 이 문이 수말라까레기의 문이라 불리는 이유는 돈 까를로스를 지지하던 군인 토마스 수말라카레기(Tomás Zumalacárregui)가 카를리스타 전쟁 발발 이후 전쟁에 참가하기 위해 어두운 밤에 홀로 이 다리를 건너 팜플로냐를 떠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치 위엔 황제의 문장 즉 머리가 두 개 달린 독수리가 있는데, 18세기에 개폐식 다리의 바깥쪽 문을 추가했으며 부벽과 평형추 등이 아직 남아 있다.

 

팜플로나 성벽

 

수말라까레기 문과 문위의 문장

 

 수말라카레기 문을 통과하여 조금 올라가면 번잡한 시가지가 나오며 수많은 관광객들이 분주하게 오간다. 순례자들은 잠깐 방심하면 길의 표시를 잃어버릴 수가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여러 조형물과 아름다운 건물들을 보면서 넋을 잃고 있으면 우리는 잠시 시간과 방향을 잃어버린 나그네가 될 수도 있다.

 

 

 

 팜플로나의 대표적인 건축물은 누가 무엇라고 해도 대성당이다. 길을 가면서 왼쪽을 보니 대성당이 보인다.

 

 산타 마리아 대성당(La catedral de Santa María)으로도 불리는 대성당은 팜플로냐의 구시가지인 카스코 비에호(Casco Viejo)에 있다. 1397년에 시작되어 1530년에 세워진 고딕 양식의 건축물은 오래된 로마네스크식 성당 위에 지어졌는데, 정면은 신고전주의 양식이고 프랑스의 영향을 받은 회랑이 매우 아름답다고 한다.

 성당의 평면은 라틴 십자가의 형태이고 내부에는 로마네스크식 성모상이 있으며, 까를로스 3(Carlos III)와 왕비 레오노르의 환상적인 고딕 양식 무덤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대성당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누구나 회랑이라고 한다. 미술 전문가들에 따르면 팜플로냐 대성당의 회랑은 유럽의 고딕 양식 건축물 중에서도 가장 상징적인 곳이라고 한다.

18세기 후반에 대성당 정문이 원래의 프랑스식 고딕 양식보다 수수한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교체되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웅장하고 아름다운 성당에 들어갈 수가 없어 내부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고 외관만 보면서 만족해야 했다. 하루의 일정을 마치고 도착하니 성당은 닫혀 있었고 다음 날에는 아침 일찍 길을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관광객이 아니고 순례길을 걷는 순례자라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관광을 위해서는 여러 날을 이 도시에 할애해야 하는데 우리가 머무는 시간은 자는 시간까지 포함해서 약 12시간에 불과하다. 그것도 밤의 시간이다.

 

팜플로냐 대성당의 여러 모습

 

팜플로나 거리 모습

 

 숙소가 대성당 바로 옆에 있었는데 처음에 숙소를 찾지 못하여 성당 밑에 있는 길을 걸어 지나갔다. 가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길을 잘못 든 것같은 생각이 들어 구글 지도에서 숙소를 검색하여 찾아가는 도중에 일행을 만나 대성당 옆의 숙소로 갔다. 숙소에서 잠시 쉬다가 점심도 먹고 가볍게 팜플로나를 구경하러 나와 함께 걷는 일행과 나갔다. 숙소 조금 아래에 있는 제법 큰 식당에 들어가 스페인의 대표적인 음식인 파에야를 시켜서 배불리 먹고 거리에 나가니 수많은 관광객들이 거리를 오가고 있었고 가게의 여러 상점에는 다양한 물품을 팔고 있었다. 심지어 한국의 라면도 파는 곳이 있었지만 아직은 라면에 그렇게 끌리지는 않았기에 일단 눈으로 구경만하고 지나갔다.

 

 숙소로 돌아오니 일행의 대부분이 도착했고 모두들 아직은 피곤함보다는 즐거운 마음으로 팜플로나를 구경하러 나가기로 한다. 일행을 따라 먼저 간 곳이 팜플로나의 도심 한복판에 있는 카스티요광장이다.

 

카스티요 광장의 헤밍웨이가 자주 들렀다는 이루나(Iruna) 카페

 

카스티요 광장

 

 함께 간 일행들이 헤밍웨이가 자주 갔다는 카페에 가서 커피를 한잔 마신다며 무리를 지어 갔으나 나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헤밍웨이가 마신 그 커피도 아니고 그냥 갔다는 곳인데 스페인에는 헤밍웨이의 흔적이 너무 많이 있다. 그래서 나와 함께 다니는 4명은 성벽을 한 바퀴 돌아보기로 하고 대성당 뒤로 가서 팜플로나 성을 조망하고 성벽을 따라 걸었다.

 

대성당의 뒷면

 

 대성당의 뒤에서는 팜플로나의 성의 여러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바깥을 향하여 뻗어 있는 성벽을 보면 이 성이 얼마나 튼튼하게 지어졌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16세기부터 팜플로나를 지켜주었던 현재의 팜플로나 성벽 (Murallas)은 펠리페 2세가 건설했다. 5각형 형태의 튀어나온 수비 거점이 있는 이 성벽은 스페인에 남아있는 방어용 성벽 중에서 역사적인 의미가 많은 유적으로 이 성벽이 함락된 것은 역사상 단 한차례였다고 한다. 1808218일의 일이었는데, 함락되기까지 단 한차례의 전투나 유혈 사태도 없었다고 한다. 겨울이 되어 눈이 쌓이자 나폴레옹의 병사들은 꾀를 내어 눈싸움을 하는 척 했고, 이 모습이 너무나 평화롭고 재미있어 보여서 성벽을 방어하던 스페인 군사들이 이 놀이에 끼기 위해 성문을 열었다. 프랑스 병사들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눈 속에 숨겨놓았던 무기를 꺼내 스페인군의 항복을 받아 무혈로 성벽을 함락했다고 한다.

 중세시대 군사 요충지였던 팜플로나의 성벽 가운데 3곳이 남아 있다. 16~18세기 대포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별 모양의 8각형으로 지은 성채는 현대에는 쓸모가 없어져서  성벽의 주변에 현재 라 부엘타 델 가스티요(La Vuelta del Castillo)라고 하는 근사한 공원으로 바뀌었다.

 

대성당 뒤에서 보는 팜플로나 성의 여러 모습

 

 

 

 성의 전체적인 모습을 대강이나마 구경하고 성벽을 따라 걸으니 가톨릭의 국가답게 곳곳에 성당이 나타난다. 그 중에서 산 세르닌 성당(Iglesia de San Cernin)으로도 불리는 성 사투르니노 교구 성당 (Iglesia Parroquial de San Saturnino)은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이 결합된 성당으로 나바라의 수호성인인 까미노의 성모(La Virgen del Camino)를 모시고 있다. 원래 있던 로마네스크 양식 성당 위에 13세기에 현재의 성당이 건축되었다. 고딕 양식의 작은 회랑이 있었지만, 18세기에 까미노의 성모 소성당으로 바뀌었다.

 

성 사투르니노 교구 성당

 

아주 오래 되어 보이는 나무

 

성벽을 따라 걸으니 성의 또 다른 여러 모습도 보인다. 'Baluarte de Labrit'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이곳은 이 문이 건설된 이후에 붙여진 이름으로, 팜플로나에 수도를 두고 있던 나바라왕국의 마지막 군주 후안 드 라브리트가 1512년 7월 침략군이 들어오기도 전에이 문을 통해 도망쳤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Baluarte de Labrit'라는 표지판

 

 

성벽을 따라 한 바퀴를 돌고 시내 중심가의 여러 거리를 지나 다시 카스티요 광장을 거쳐 숙소로 돌아오니 숙소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음식을 해서 먹으며 먹기를 권한다. 특히 한국의 라면을 끓여서 주는 고마운 사람도 있어 맛있게 얻어먹었다. 처음 시내에서 라면을 무시했는데 외국에서 먹는 역시 우리 라면은 완전히 별미였다. 라면과 여러 음식으로 저녁을 먹고 이제는 내일을 위해서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시간이었다.

 

팜플로나 시내의 여러 모습

 

 잠자리에 들어 오늘을 돌이켜 보았다. 이제 까미노를 시작한  3일인데 숱한 일을 겪었고, 수많은 사람들을 만난 것 같다. 한발을 절고 있었던 아버지와 20살 정도 되어 보이던 캐나다의 부자로 아들이 아버지의 짐을 지고 가는 모습이 대견해 보였다. 그리고 무엇이 그렇게 즐거운지 웃고 이야기하면서 걷던 아주 생기발랄한 독일의 젊은 아가씨들, 그리고 많은 한국의 젊은이들, 모두가 무엇을 얻기 위해서 이 길을 걷고 있는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한 가지 말하고 넘어가야 할 일은 우리 일행 중에서 숙소를 찾지 못하여 약 5km 정도를 더 걸어갔다가 돌아온 사람들이 있었다. 팜플로나 대성당 옆이 숙소인데 지도를 잘못 보고 수말라카레기 문으로 들어오지 않고 바깥 길로 갔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가도 숙소가 나오지 않으니 연락을 하였기에 팜플로나 대성당을 찾아오라고 전하여 무사히 돌아왔다.

 

 숙소를 지도만 보여 줄 것이 아니라 좀 더 자세히 설명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