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산티아고 까미노 길을 걷다. 2(05.18, 생장 - 론세스바예스)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오늘 걷는 길 : 생장 - 온또 - 오리손 - 십자사 - 레푀데르 언덕 - 론세스바예스
까미노 프란세스(Camino Frances)의 출발점인 생장 피에드포르는 스페인 국경으로부터 약 8킬로미터 가량 떨어져 니브강(Nive)이 만나는 지점에 자리 잡고 있으며, 피레네를 건너 론세스바예스로 가기 직전의 마지막 구간으로, 전통적으로 산티아고 가는 길의 순례자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마을이다.
생장 피에드포르는 산티아고 가는 길을 열어준 마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생장 피에드포르를 통과해 피레네를 넘는 길은 과거 로마시대부터 시작하여 나폴레옹의 군대 등등 모두에게 역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피에드포르(Pied de Port)라는 말은 피레네지방의 방언으로 ‘통로의 발치’라는 말이라고 한다.
생장 피에드포르는 원래 사자왕 리차드에 의해 세워진 세장르비유(St. Jean le Vieux)에서 시작되었으며 이후 나바르의 왕에 의해서 현재의 위치에 새롭게 만들어졌다. 생장 피에드포르는 12세기 말 이후에 건설된 뒤 나바라 왕국 북 피레네의 중심 도시가 되었다. 론세스바예스에서 피레네 산맥을 가로지르는 핵심 포인트인 시세 언덕(Col de Cize)의 자락에 있는 생장 피에드포르는 이 도시를 산티아고 데 꼼포스텔라로 향하는 순례길의 핵심 경유지로 만들었다.
프랑크 왕조가 남겨놓은 많지 않은 유물 가운데, 론세스바예스와 생장 피에드포르에는 778년 롤랑과 샤를마뉴의 군대가 남긴 역사적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또한 우루쿠루로 가는 길에서는 샤토 피그뇽(Château Pignon)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것은 1512년 나바라의 정복자였던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 지어진 방어 성곽으로 나폴레옹 전쟁 당시 파괴되었으나, 현재까지도 피레네 산맥을 넘는 순례자들을 지켜보고 있다.
까미노의 본격적인 첫 시작은 생장에서 아침에 잠을 깨면서 시작되었다. 일어나 밖으로 나가니 한국의 여자 둘이서 같은 숙소에 머무르고 있었다면서 인사를 하였다. 보기에 자매 같아서 이야기를 하니 모녀간이라는 대답을 하여 엄마가 너무 젊게 보인다고 말했다. 그들은 개인으로 와서 배낭을 동키서비스로 보내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우리 일행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여하튼 그 모녀와는 일정이 같아 산티아고까지 같은 여정으로 걸으면서 거의 매일을 만났고 산티아고에도 같은 날에 도착했다.
어제 늦게 도착하여 크렌디시알도 받지 못하였기에 크렌디시알을 발급하는 사무소가 문을 여는 시간까지 여유가 있어 생장의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생장 피에드포르의 문장
여기서 먼저 생장 피에드포르의 문장(紋章)을 간단하게 소개해 본다.
생장 피에드포르의 문장(紋章)은 마을의 역사를 대표하는 다양한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수호성인 세례자 요한의 왼손에는 이름이 적혀진 깃발이, 발아래에는 어린양이 잠들어 있고, 세례자 요한의 오른손은 생장성을 가리키고 있고, 체인 뭉치가 중심의 에메럴드를 둘러싸고 있는 나바라 왕국의 문장이 성의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다.
숙소에서 나와서 스페인거리를 걸어가니 조그마한 강이 나오고 다리를 건너게 한다.
니브(Nive) 강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정확히는 니브 강의 조그마한 지류로 생장 피에드포르(Saint Jean Pied de Port)에 있는 니브드베에로비(Nive de Béhérobie) 강이다.
니브 강은 프랑스에 있는 강으로 아두르 강(Adour R.)의 왼쪽 지류이다. 생장 피에드포르(Sain Jean Pied de Port)에 있는 니브드베에로비(Nive de Béhérobie) 강, 로리바(Laurhibar) 강, 니브다르네귀(Nive d’Arnéguy) 강의 3개의 작은 강이 합쳐지는 지점에 있다. 프랑스령 바스크(Basque)를 가로질러 흘러 여러 마을을 지나 바욘(Bayonne) 마을에서 아두르 강으로 흘러든다.
생장 피에드포르(Saint-Jean-Pied-de-Port)에 있는 니브드베에로비강(Nive de Béhérobie) 주변 풍경
이 다리 입구에 있는 노틀담 문(Notre-Dame Gate)을 지나면 노틀담 뒤퐁 성당이 나온다. 1212년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Las Navas de Tolosa) 전투에서 무어인을 격퇴한 기념으로 나바라의 왕, 산초 엘 푸에르테에게 헌정된 것으로 13세기 초반 건물 원형이 남아있는 성모승천 성당으로, 바스크 지역에서 바욘 대성당과 함께 남아 있는 대표적인 고딕 양식 건축물이다. 장엄한 분홍빛의 사암 파사드는 조각된 기둥과 기둥머리의 고딕 문을 더욱 특색 있게 보여준다. 아쉽게도 이른 시간이라 문을 열어 놓지 않아 내부를 구경하지 못하고 외부만 조금 보고 지나쳤다.
노틀담 뒤퐁 성당 (Notre-Dame-du-Bout-du-Pont)
성당 앞을 지나 위로 난 작은 언덕길이 시따델르(Rue de la Citadelle) 거리이다. 생장 피에드포르를 방문한 순례자들이라면 꼭 사진에 담는 오르막길을 따라 집들이 모여 있는, 요새도시라는 이름에 걸맞은 거리로 돌출형 바닥, 목재 건물, 조각된 기둥을 이용한 처마는 이 거리 가옥들의 건축적 특징이다. 상인방에는 암시적인 명문이 음각되어 있으며 기하학적 디자인이나 종교적 상징들로 장식되어 있다.
이 길을 따라 순례자 사무실로 올라간다. 순례자 사무실로 올라가는 길 양쪽에는 아르캉 졸라 저택과 라라뷔레 저택 등등의 오래된 집들이 보이지만 이른 시간이라 그냥 지나쳤다.
순례자 사무실 가는 시타델르(Rue de la Citadelle) 길
안내지도
순례자 사무소( 메종 라보르드)
산티아고 순례자 사무소 가옥은 다비드 드 푸레(David de Fourré)에 의해 18세기 초반에 루이 14세 풍의 도시형 저택으로 지어졌다. 1950년부터 생장시 시청사로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
순례자 사무실도 아직 시간이 되지 않아 문을 열지 않고 있었다. 무료하게 기다리면서 그 길을 따라 올라가니 주교의 감옥이라는 건물이 나온다.
주교의 감옥
메종 라보르드(순례자 사무실)에서 정원으로 구분되어 떨어져 있는 주교의 감옥(La prison des Evêques)은 이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 중 하나로, 그 이름은 매우 흥미로운 두 가지 역사적 사실을 동시에 연상시킨다. 하나는 교황 분열기(14세기 후반~15세기 초반)에 주교좌 도시로서의 역할을 찾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최소 18세기 말까지도 유명한 감옥으로서의 역할이다.
현재 위치해 있는 건물은 조각돌로 조각된 입구는 초소를 향해 나있으며 곧장 감방으로 이어진다. 옛날의 감방은 좁은 계단을 지나 지하의 거대한 갈비뼈 모양의 방으로 연결되는데, 지금은 이곳에서 산티아고 순례자에 관련된 자료가 전시되고 있다.
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야고보의 문 (Porte de Saint-Jacque)이 나온다. 199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이 문은 순례자들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전통적인 출입구이다. 전통적으로 프랑스인들은 이 문을 통과해 론세스바예스로 향했다고 한다.
야고보의 문
야고브의 문에서 좀더 올라가면 생장 피에드포르 성이 나오는데 시간이 없어 그 성을 구경하지는 못하고 순례자 사무소가 문을 열어 들어가서 크렌데시알을 받고 가리비껍질을 받아 배낭에 묶고 길을 떠날 준비를 하였다. 전날에 이 과정을 모두 종료했어야 하는데 기차를 놓쳐 생장에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일정이 조금 지체되었다. 하여튼 까미노를 걸을 준비를 하고 까미노의 출발점으로 표시된 곳으로 갔다.
까미노 출발점
까미노 출발점에서 사람들은 까미노의 시작을 기념하여 신발을 신은 모습을 사진을 찍는다. 함께 걸을 우리 무리 21명도 삼삼오오 모여서 발을 내밀고 사진을 찍었다.
우리의 오늘 여정은 프랑스의 생장 피에드포르를 출발하여 시세언덕을 지나며 시련과 축복의 땅인 피레네의 산맥의 품에서 국경을 넘어 스페인의 론세스바예스에 도착하는 제법 긴 길이다. 이 길에서 순례자는, 해발 146m의 생장 피에드포르에서 해발 952m의 론세스바예스로 가기 위해서 해발 약 1450m 정도의 피레네 산맥을 넘어야 한다. 다소 힘든 구간이지만 이 구간은 피레네 산맥의 완만한 경사면이 남북으로 경계를 이루며 길게 이어져 그렇게 힘들지는 않다. 오히려 피레네 산맥의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면서 여유롭게 걸을 수 있기에 기나 긴 까미노 길에서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구간이라 할 수 있다.
스페인 거리에서 까미노를 시작하는 모습
까미노 출발점에서 다시 다리를 건너 스페인 거리를 걸어 스페인 문을 지나서 본격적인 까미노를 시작한다. 스페인 거리(Rue d’Espagne)의 집들은 상인방에 집 주인의 직업이나 거래품목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현재도 9번지에는 밀 가격이 주요 이슈였던 1789년의 높은 밀 가격의 기록이 남겨져 있다고 한다.
크렌데시알을 발급받느라 출발 시간으로는 조금 늦었기에 다른 까미노의 무리들은 보이지 않고 우리 무리만이 길을 재촉하였다.
스페인문
까미노 길 표시
나뭇잎 위의 달팽이들
론세스바예스로 가는 루트 안내도
생장 피에드포르에서 나와서. 그 후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산티아고 가는 길(Chemin de Saint Jacques)라고 표시되어 있는 길을 따라 걸으면 된다. 첫 번째 목적지인 오리손으로 가기 위해서 순례자는 시세 언덕길로 코스를 잡아야 한다.
피레네 산맥을 넘는 길은 보통 두 가지 길이 있다. 첫째는 도보 순례자들이 지나는 일반적인 길인 시세 언덕길(Ruta de los Puertos de Cize)로, 이 길은 걸으면 웅장한 피레네 산맥의 풍광이 길을 따라 아름답게 펼쳐지는 장관을 즐길 수 있지만 이 길을 지나기 위해서는 해발 1410m의 레푀데르 언덕(Col de Lepoeder)을 넘어야 한다.
둘째 길은 자전거 순례자들이 주로 이용하는 길인 발카를로스 길(Via Valcarlos)이다. 이 길은 시세 언덕길보다는 조금 긴 길로 순례자들은 이 길은 조금 편하지만 경치가 조금 부족하다고 말하지만 이 길도 피레네 산맥의 아름다운 계곡을 즐기기에는 충분하다고 한다. 아름다운 샤를마뉴의 계곡(Valle de Carlomagno)을 지나게 되며 해발 1,057m의 프에르토 데 이바녜타(Puerto de Ibañeta)를 넘어야 한다.
길을 걷기 시작하는 순례자들
온토 알베르게
생장을 벗어나 서로가 기쁜 마음으로 즐겁게 무리를 지어 이야기를 하면서 조금 걸으면 왼쪽으로 휴게소를 가진 알베르게가 나타난다. 온또 알베르게다. 아직은 걷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기에 모두들 그냥 무심하게 지나간다. 이곳을 지나면서 이제 피레네산맥으로 들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어렵지 않은 산길을 걸어가면서 보는 풍경은 가슴을 확 트이게 한다. 우리나라의 하늘은 우중충하다. 맑은 날이라고 해도 그렇게 깨끗하지 않다. 그런데 피레네의 하늘은 너무 푸르고, 산위에 펼쳐지는 넓은 벌판에는 소들과 말들이 뛰어 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전혀 상상하지 못한 풍경이다.
멀리 보이는 피레네의 여러 모습
피레네산맥에 있는 오리손을 가리키는 이정표
오리손으로 가는 시세 언덕길은 처음 이로우에야 (Irouleya)를 향해서 오르는 가파른 비탈길로 시작한다. 이후 한 폭의 그림이 언덕에 펼쳐지며 에뜨체베스떼아(Etchebestea)와 에레꿀루스(Erreculus) 사이에 있는 밤나무 숲에서부터 온또로 향하는 포장된 가파른 오르막길이 나온다. 온또를 지나 조금 가면 왼쪽으로 좁은 산길이 나온다. 그대로 직진을 하면 포장도로와 산길은 서로 만나게 되는데 왼쪽의 산길이 지름길이다. 길은 조금 경사가 있으나 피레네 산맥 특유의 완만한 구릉이 주는 부드러움이 마음을 포근하게 해 준다. 조금 걸으면 목초 사이로 부드럽게 아스팔트길이 나타나고 순례자는 오리손에 도착한다. 해발 792m의 오리손은 옛날에 론세스바예스의 부속 수도원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오리손 가는 길에서 보는 피레네산맥의 여러 모습
오리손의 카페
오리손의 카페에 도착하니 길을 걸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다양한 국가의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어디에서 그 많은 사람들이 나타난 것인지가 의문이 들 정도였다. 모두들 산길을 걸어 왔기에 잠시 휴식을 취하며 시원한 음료를 마시면서 주위에 펼쳐지는 피레네의 아름다움에 경탄하고 있었다. 내가 우리 일행 중에서는 비교적 빨리 도착했기에 함께 걷고 있는 내보다 나이가 좀 적게 보이는 우리 일행 다섯에게 맥주를 한잔씩 사서 주니 모두들 고마워하며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조그마한 친절이라도 베풀 수 있는 행동이 내가 이 길을 걸으면서 가져야 되는 태도로 인식되었다. 이 한 잔의 맥주가 계기가 되어 이 까미노가 끝날 때까지 4명이 함께 모여 길을 걷고 저녁을 먹고 술도 한잔씩 하면서 즐긴 것도 큰 인연이었다.
이 이야기는 앞으로도 계속 나올 것이다.
순례자들의 소망이 모인 돌무더기
숨맛히게 아름다운 피레네산맥의 여러 모습과 길걷는 사람들
오리손 카페를 지나 언덕을 오르면서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면 저 멀리에 환상적으로 펼쳐지는 풍경에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게 된다. 좌우를 돌아보면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이 눈에 들어와 황홀하게까지 느껴진다. 그 황홀한 풍경을 가슴에 담으면서 약 4Km 정도 올라가면 목장이 있는 아름다운 언덕에 도달하게 된다. 왼쪽으로 눈을 돌리면 바위 위에 알록달록하게 꾸민 비아코레 성모자상이 보인다. 피레네 산맥의 가장 깊은 품 안에서 아름다운 광경을 만끽 하며 걷다가 뜻밖의 성모자상을 발견하는 수많은 순례자들은 성모자상을 바라보며 자신과 함께 이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의 여정이 안전하고 평안하기를 기원한다.
비아코레 성모자상
고원에 펼쳐지는 길
계속해서 따라가며 나오는 고원에 펼쳐지는 이 길을 나폴레옹 길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전략적 요구에 따라서 1807년 나폴레옹의 부대가 이베리아 반도를 침공할 당시 이 루트를 이용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다음에 아스팔트길이 이어지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샛길이 오른쪽으로 나온다. 여기서 약 2Km 정도 직진하면 아스팔트길이 사라지고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으로 이어지는 작지만 위압적인 모습의 언덕이 나타난다. 여기서 계속 가면 마침내 까미노는 스페인으로 들어가게 된다. 산티아고까지 가는 길은 이제부터 시작인 것이다.
티바울트 십자가상
벤 따르페아(Col de Bentartea) 언덕 표시
추모의 돌 무더기
사랑했던 사람에게 보내는 추모의 글
길은 해발 1,344m의 벤따르떼아 언덕(Collado de Bentartea)를 지나 국경을 통과하기 이전에 까미노의 최초의 표지석(산티아고 765km)이 나온다. 그런데 아쉽게도 내 사진 철을 아무리 찾아도 이 사진이 보이지 않는다.내가 찍지 아니하지는 않았을 것인데..... 그리고 롤랑의 샘을 만나게 된다. 오리손을 지난 후에는 롤랑의 샘 이외에는 마실 물을 구할 수 없고, 이 샘도 갈수기에는 말라 버릴 때도 있다. 하지만 이곳은 이제 낭만적인 샘이 아니라 단지 수도꼭지를 달아 놓은 멋없는 시설물이다. 그러나 해발1378m에 있는 샘의 수도다.
롤랑의 샘
롤랑의 샘을 지나 조금 가면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이 나온다. 국경이라고 하지만 별다른 표시가 없다. 그저 산 언덕길에 나무 문을 달아 놓고 철판을 깔아 놓았다. 그리고 조금 지나면 스페인 나바라주라는 표시가 나타날 뿐이다. 국경을 넘어가는데 아무런 인증도 없고 국경을 지키는 사람도 없다.
프랑스 - 스페인 국경
산티아고 표석(스페인 나바라주 표시)
순례자의 앞에 계속 이어지는 숲길을 지나게 되면 마침내 이 날의 가장 높은 시세 언덕길의 정상 지점인 레푀데르 언덕(Collado de Lepoeder)에 도착하게 된다.
시세 언덕길의 정상을 지나면 왼쪽으로 난 급한 경사 길과 오른쪽으로 조금 완만한 경사 길을 만난다. 왼쪽으로 이어지는 급한 경사로는 지름길이기는 하나 경사가 심하고 너덜지대가 많아서 부상의 위험이 많은 길이니 가급적 오른쪽 길을 권한다. 내가 걸은 날은 비가 오기도 하여 너덜지대의 돌길이 매우 미끄러웠다. 하지만 스틱도 집지 않고 그냥 길을 내려가면서 돌을 밟았는데 그만 미끄러졌다. 같이 가던 일행이 깜짝 놀랐으나 다행히 큰 부상은 입지 않았고 단순하게 약간의 타박상 정도를 입었다. 숙소에 도착하니 나 이외에도 미끄러졌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너덜지대고 비가 온 뒤라 아주 조심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하지만 이 것을 계기로 경각심을 가지게 된 것도 큰 소득이었다.
위태로운 급경사 길
급경사의 너덜지대를 지나면 이바녜따 언덕에서 목적지인 론세스바예스까지는 편안한 내리막이 계속 이어진다. 어느 새 론세스바예스의 안내판이 보이기 시작하고 냇물을 건너니 오늘의 숙소인 수도원이 보인다. 수도원의 깨끗한 건물에 들어가기에는 우리 신이 너무 흙탕물에 더렵혀져 있었다. 그래서 냇물에 신을 깨끗이 씻고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론세스바예스 안내도
수도원 가는 길의 냇물
론세스바예스를 얘기할 때는 유명한 서사시 ‘롤랑의 노래'(La Chancon de Roland)를 뺄 수 없다. 이 작품은 기사의 영웅적인 행위를 예찬하기 위해 써진 서사시이다. 작자는 분명하지 않으며, 성립 연대는 1098년부터 1100년 사이인 것으로 추정되고, 12세기 후반의 옥스퍼드 고사본(古寫本)에 실제 노래로 불리던 이 시의 순수한 모습이 전해지고 있다.
롤랑은 프랑크 왕국의 황제 샤를마뉴의 조카이자 성 기사 중에서 가장 용맹하고 뛰어난 기사였다. 샤를마뉴는 자신이 아끼는 보검 두란다르트(Durandart)를 하사하였는데 이 검은 산을 쪼갤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졌다고 한다.
그 내용은 778년 8월 15일 에스파냐 원정에서 돌아오던 길에서 롤랑이 지휘하던 샤를마뉴 대제(大帝)의 후위부대가 피레네 산속 롱스포에서 바스크인(人)의 기습으로 전멸한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
롤랑은 왕의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전설의 뿔 나팔 올리판테(Olifante)를 불지 않았고, 롤랑은 죽는 순간 성 베드로의 치아가 포함된 자신의 칼 두란다르트를 파괴하기 위해서 커다란 바위에 내리쳤는데 바위만 갈라지고 칼은 멀쩡했다고 한다.
뒤늦게 알게 된 샤를마뉴는 죽은 병사들을 위한 그리스도교 식 무덤을 마련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아군과 적군을 구분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모두 함께 매장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하지만 적군과 아군을 함께 매장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샤를마뉴는 그들을 구분할 수 있는 증표를 달라고 기도를 했다고 한다. 그러자 조금 뒤 병사들이 달려와서 입에서 장미가 피어나는 시체가 있다고 전했다고 한다. 이에 샤를마뉴는 이들을 분리해서 그리스도교 무덤에 매장했다. 이것이 로시스 바예(Rosis Valle; 장미의 계곡) 즉 론세스바예스라는 지명의 기원이라고 한다.
그 외에도 론세스바예스는 롤랑의 노래와 관련된 것으로 넘쳐난다.
알베르게로 사용되는 수도원의 외부 모습
외부에서 보는 산타 마리아 왕립 성당의 모습
안에서 보는 산타 마리아 왕립 성당의 모습
론세스바예스의 알베르게 지구 안에 있는고딕 양식의 산타 마리아 왕립 성당 (Real Colegiata de Santa María)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고딕 양식으로 건축된 초기의 건물로 이곳에는 아름다운 고딕식 성모 마리아 조각이 보관돼 있다. 아름다운 성직자 회의실엔 산초 7세의 고딕 양식 무덤이 있고 라스 나바스 데 똘로사(Las Navas de Tolosa)의 전투에서 얻은 전리품 일부도 있다. 회랑은 17세기 양식이다. 현재의 성당 건물은 원래의 건물 자리에 13세기에 재건축된 것이다. 원래의 건물은 로마네스크 양식 성당이었다. 아름다운 고딕 회랑과 회의실, 다른 부속 건물 등이 있으나 세월의 무게 때문에 부분적으로 무너졌다. 1445년에 화재가 일어나 성당 건물이 훼손되었으며 1600년에는 지붕에 내려앉은 눈의 무게 때문에 남쪽 회랑과 성전의 지하층이 무너졌다. 따라서 1615년 건축가 돈 후안 데 아라네기에 의해 재건되었다. 하지만 늦은 시간이라 내부를 구경할 수 없었던 것이 매우 안타까웠다.
그 외에도 샤를마뉴의 헛간(Silo de Carlomagno) 으로도 불리는 성령의 소성당 (Capilla del Sancti Spiritus), 론세스바예스 박물관으로도 불리는 성당 박물관 (Museo de la Colegiata), 산 아구스띤 소성당 (Capilla San Agustín), 산 살바도르 데 이바녜따 소성당 (Capilla San Salvador de Ibañeta) 등등이 있었으나 첫날이라 다소 정신이 없이 보내느라 제대로 구경도 못하고 그냥 눈으로 보고 지나쳤다.
이 모든 것을 제대로 구경하려면 엄청나게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나는 관광객이 아니라 길을 걷는 것을 주 목적으로 하는 순례자이다. 아쉬움은 다음을 기약할 뿐이다.
알베르게 표시
성당의 첨탑
수도원 내부의 뜰에 있는 조형물
론세스바예스의 숙소는 과거에 수도원으로 사용되었던 국립알베르게로 철저하게 도착한 순서에 맞추어 숙소를 배정하였다. 비교적 시설은 깨끗하고 좋았으나 운영이 좀 아쉽게 생각되었다. 숙소에서 제법 땀을 흘렸고 비도 맞았으므로 샤워를 하고 저녁을 먹으려고 식당을 찾아갔으나 식당이 운영을 하지 않아 곤란했다. 별다른 슈퍼도 없고 하여 간단하게 매점 비슷한 곳에서 먹거리를 장만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같이 길을 걷는 사람들의 너그러운 마음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비교적 먹거리를 많이 가져온 사람들이 스스럼없이 자기의 배낭을 열어 다른 사람이 먹을 수 있게 나누어 주었다. 모두들 꺼내 놓은 음식을 다양하게 조리를 해서 함께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까미노의 원래 정신에 부합한다는 것을 여실히 깨닫게 해 주는 저녁이었다.
숙소는 옛날에 큰 수도원을 리모델링한 것으로 바깥에 나가면 많은 볼만한 건물이 있었으나 저녁을 해결하기에 바빠서 그럴 겨를이 없었다는 것이 돌아온 지금도 너무 아쉽다.
저녁을 먹고 하루를 정리하고 잠자리에 든다. 오늘의 노고는 잠시 접어두고 내일을 대비해야 한다. 내일은 오늘과 또 다른 풍경과 이야기가 내 앞에 나타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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