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산티아고 까미노 길을 걷다. 36(06.21, 무시아, 피스테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오늘의 여정 : 무시아, 피스테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오늘부터 귀국하는 날까지는 쉬면서 스페인의 몇 곳을 여행한다. 오늘은 산티아고에 머물면서 무시아와 피스테라를 다녀오고 대성당을 다시 가보고 그 주변을 다닐 예정이다. 아침에 여행사에서 마련한 버스를 타고 무시아로 가는 도중에 아름다운 다리가 있어 그 곳에 버스가 멈추어 구경을 한다. 어제까지 쉬지도 않고 걷다가 갑자기 버스를 타고 움직이니 새로운 세상에 온 것 같다.
폰테 마세이라(Ponte maceira)는 네그레이라 지방 동쪽에 탐브레 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작은 마을로, 2019년부터 '스페인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이 마을에는 13세기 탐브레 강 위에 지어진 원시 정착지, 오래된 방앗간, 댐, 예배당, 현대식 장원 집, 다리 등등 많은 기념비적인 건축물이 있다.
마을을 이어주는 폰테 마세이라 다리의 가장 뛰어난 모습은 탐브레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와 강 자체의 아름다움이다. 강이 흐르는 모습도 한 폭의 그림이지만 그 위의 다리는 화룡점정이다. 폰테 마세이라 다리는 12세기에 탐브레를 넘어 이 마을의 입구에 세워졌으며, 이 다리는 이전 로마 다리의 기둥을 사용했다고 한다. 5개의 메인 아치와 2개의 릴리프 아치로 구성되어 있으며, 다리의 중앙 아치에는 현저하게 뾰족한 둥근 천장이 있다. 오랜 기간 동안의 구조물의 안정성은 기반암 위에 기둥의 일부가 기초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도로서 야고보의 임무는 서유럽을 기독교화 하는 것이었다. 선교 후에 그는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서기 44년에 참수형을 당했다. 그의 제자들 중 아타나시에(Atanasie)와 테오도미로스(Teodomiros)는 산티아고의 시신을 되찾았고, 기독교인의 장례식을 위해 그를 갈리시아로 데려가는 데 성공했다. 갈리시아에 있는 산티아고의 제자들은 머리 없는 사도의 시신을 묻을 장소를 찾고 있었다. 사도 야고보의 제자들이 로마 군단의 추격을 받으면서 남쪽으로 피신할 때 기독교인들은 가까스로 폰테 마세이라 다리를 건넜으나 로마인들이 그들을 따라가려 하자 '신성한' 개입으로 다리가 무너져 기독교인들만 탈출할 수 있었다는 전설이 있다. 이 전설은 실제로 폰테 마세이라 다리 상류 또는 하류에서 일어났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네그레이라 문장에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이상한 것은 '머리 없는 몸'이라는 표현이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지하실에 있는 산티아고의 은관에 사도의 머리가 없다는 언급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있는 성 야고보 대성당의 붉은 대리석 조각으로 표시되고 6개의 봉헌 등불로 둘러싸인 제단 아래에 그의 머리가 묻혀 있다고 한다. 오직 가톨릭의 관계 성당만이 이 문제에 대해 해답의 빛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다리 아래를 흐르는 강물은 아침의 안개에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깨끗하고 맑은 물은 우리 마음을 깨끗하게 해 주는 것 같아서 사람들은 다리를 건너며 아름다운 경치에 감탄을 한다. 다리를 건너 강 아래로 내려가서 보는 풍경은 또 다른 매력이 있다. 다리 건너에 있는 성 블라사의 작은 예배당은 18세기의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졌고 19세기에 반원형의 네오 로마네스크 아페스가 추가되었다.
이 곳에서 다리도 건너고 다리 아래로도 내려가서 강을 보면서 제법 노닐다가 다시 버스를 타고 무시아로 향한다.
강 안개가 낀 몽환적인 분위기
산 블라사 예배당
폰테 마세이라 마을 설명판
스페인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 인증서
강 아래에서 보는 풍경
무시아(Muxía)는 갈리시아의 아코루냐주에 있는 피스테라 곶에 위치한 자치단체로, 무시아는 '죽음의 해안'을 뜻하는 코스타 다 모르트의 일부이다. 이는 이 지역을 코스타 데 라 무에르테라고 부른 것을 갈리시아어로 옮긴 것으로 해안에 돌이 너무 많아서 수많은 배들이 침몰했기 때문에 이 같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무시아라는 이름은 이곳에서 3km 거리에 위치하는 베네딕토회 수도원이었던 상 슐리앙 드 모라이므 성당을 처음 세운 수도사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고 전해지며 스페인어로는 무히아라고 한다. 본래 12세기 초에 세워진 모라이므 수도원이 성당의 모태이나 수도원은 1105년 노르만 해적의 약탈로 파괴되었는데 당시 미래의 알폰소 7세가 이곳에 머무르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그래서 1119년 알폰소 왕자는 막대한 자금을 출연하여 수도원을 복구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종착지 가운데 하나인 무시아의 대표적인 명소로는 상 슐리앙 드 모라이므 성당 외에 비르시 다 바르카 성소가 있다. 이곳은 본래 켈트족의 성소였으나 12세기 갈리시아 지역이 기독교화된 이후 주민들은 이곳을 기독교 성소로 만들었다. 전설에 따르면 갈리시아 지역의 선교가 지지부진해 좌절한 기독교도에게 성모 마리아가 나타나 위로한 장소라고 알려져 있다. 17세기 성소는 성당으로 개축되었으나, 2013년 번개가 떨어져 전소되어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무시아에 도착하여 성당을 한 바퀴 돌고 언덕위의 조형물로 올라가 구경을 하고 주변이 언덕에 올라가 일망무제로 펼쳐지는 대서양 바다와 주변을 눈에 담고 해안으로 갔다. 해안에는 배 모양과 흡사한 제법 큰 바위가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성 야고보가 타고 온 배가 돌로 변하였다고 하는데 믿고 말고는 각자의 몫이다.
성당 주변
전망탑 표시
옛날의 십자가
성 야고브의 배라는 돌
바닷가에 새로 지은 성당
무시아를 잠시 구경하고 이제 피스테라로 간다.
중세시대부터 갈리시아 토박이들은 코스타 다 모르트를 피스테라(Fisterra)라고 불렀다.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90km 떨어져 있는 작은 마을인 피스테라는 '지구의 땅 끝'이라는 라틴어의 Finis(끝) + Terrae(땅)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중세시대부터 세계의 끝(End of the world) 혹은 땅 끝(Land's end)이라고 불렸으나, 정확히는 스페인의 땅 끝도 유럽 대륙의 땅 끝도 아니다. 실제로 이베리아 반도에서 서쪽 땅 끝은 포르투갈의 호카 곶이고, 스페인 본토에서 가장 서쪽 땅 끝은 무시아 자치단체의 토리냥 곶이다. 그러나 고대 사람들은 이 지역의 피스테라 곶을 세상의 끝으로 여겼기 때문에 이 같은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진 것이다.
로마시대에 하루의 마지막 해를 볼 수 있는 피스테라 곶을 방문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중세에 병원들이 피스테라 곶 인근에 형성되어 순례자들을 보살폈기 때문에 이 풍습은 중세까지도 이어졌고, 지금도 순례자 일부는 피스테라 곶 인근에 위치한 피스테라 지방을 순례의 최종적인 목적지로 삼고 걷기도 한다.
피스테라는 서기 44년 예루살렘에서 순교한 야고보의 유해를 나룻배에 실어 보내자, 그 시신이 해안에 닿았다는 설화가 있어 많이 방문하는 순례지다. 성 야고보 유적 발견 이후 순례자들은 산티아고에서 피스테라까지 도착해 성 그리스도상 앞에서 예배를 드리고, 산 길레르메의 유물을 관람하며, '지구의 끝'을 보기 시작했다. 1479년에는 도착한 순례자들을 수용할 병원이 지어졌다. 항구에서 3km 정도 이동하면 등대를 향해 이동할 수 있으며, 0km라고 적힌 표지석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 도착한 순례자들은 신발이나 옷가지를 태워 대서양에 뿌리는 의식을 행했으나 현재는 금지되어 순례자들이 물건을 태운 흔적만 발견할 수 있다.
피스테라에는 18세기에 지어진 노사 세뇨라 도 본 수초 성당이 광장에 있다. 피스테라 곶 끝에 있는 600m 높이의 전망대 '몬테 파초'에 등대가 있다. 원래 몬테 파초는 켈트족 네리오족이 태양을 기리는 제물과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다. 등대로 올라가는 길에는 산토크리스토 예배당이 있는 산타 마리아 데 피스테라 교구 성당이 있다.
0km 표시석
피스테라 등대
멋어 놓은 신발 조형물
바닷가의 십자가
피스테라에 도착하여 버스를 타고 온 일행들은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자유롭게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보면서 즐긴다. 30일 넘게 제대로 구경이라고는 하지도 못하고 길만 걸은 사람들에게 이만큼의 자유로움도 마음에 벅차다.
순례자들이 벗어 놓은 신발의 조형물은 우리 모두의 가슴을 멍하게 만든다. 오랜 시간을 걸쳐 먼 길을 걸어 최종목적지에 도착한 순례자는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이 땅 끝에서 자신의 발을 보호하고 자신과 함께 고난을 겪으며 걸어온 신발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신발을 벗어 더 이상의 고생을 하지 않도록 바위위에 올려놓고 감사를 표시한다.
피레스테가 항구라 주변에는 여러 조형물이 보이는데 종교적인 의미를 가진 것은 별로 없고 비교적 현대에 만들어진 조형물들이다. 주변을 구경하다가 언덕위의 카페에 올라가 느긋하게 맥주를 한잔 마시면서 대서양을 바라보며 생각에 빠졌다가 돌아갈 시간이 되어 버스로 가니 길가에 백 파이프를 연주하는 사람이 있어 약간의 돈을 기부하고 버스를 타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돌아왔다.
누군가 벗어 놓은 신발 -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여러 나라의 도시를 가리키는 팻말 - 우리나라는 없다.
피스테라 안내 조형물
거리의 악사
산티아고로 돌아와서 점심을 먹고 대성당을 다시 보러 갔다. 대성당의 광장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순례를 마친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어제는 다소 황망하여 주마간산으로 보았던 정문으로 가까이 가서 영광의 문도 다시 보고 첨탑의 조각들도 조용히 다시 보고, 광장의 기념품 가게에서 산티아고의 기념품을 조금 사고 광장을 배회하고 있으니 길을 걸으면서 만났던 사람들의 모습이 또 보인다. 하루의 시차를 두고 도착한 것이었다.
대성당의 여러 모습
대성당 광장에서 대성당의 여러 모습을 눈에 담고 성당 밑의 음식점이 모여 있는 거리로 내려갔다. 함께 길을 걸은 4명이 여정을 끝낸 망중한을 즐기려고 음식점에 앉아 갈리시아의 해산물요리와 맥주를 시켜 마시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으니 낯익은 얼굴들이 많이 지나가며 인사를 한다. 이제 이 여정도 끝이 났기에 한가롭게 우리가 걸어온 길의 이모저모를 이야기하면서 담소를 즐기다가 숙소로 돌아왔다.
이제 까미노는 공식적으로 끝이 났다. 내일은 마드리드로 가서 이틀을 쉬고 귀국행 비행기를 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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