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산티아고 까미노 길을 걷다. 26(06.11, 폰세바돈 - 폰페라다)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오늘의 걷기 길 : 폰세바돈 - 철의 십자가(2.2km) - 만하린(2.3km) - 델 아세보(7.0km) - 리에고 데 임보로스(3.4km) - 몰리나세카(4.7km) - 캄포(4.3km) - 폰페라다(3.4km)
오늘은 폰세바돈을 출발하여 산티아고 까미노 길에서 가장 유명한 철의 십자가를 지나 폰페라다까지 가는 약 27km의 길로, 철의 십자가를 지나면 계속 내려가는 길이다. 내리막길이라 쉬운 것 같으나 길은 올라가는 것은 힘이 들지만 내려오는 것은 어렵기도 하고 위험하기도 하다. 길을 걷는 것이 우리 인생을 사는 것과 비슷하다 자신이 노력하면 힘들지만 어느 위치에 올라갈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위치에서 내려오는 것은 나의 의지가 아니기에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더 힘들다. 그래서 내려올 때 더 조심하고 주의해야 한다.
아침에 일어나니 내가 늦게 일어난 것이 아닌데 벌써 사람들이 떠나고 있다. 날이 갈수록 사람들의 출발 시간이 더 빨라진다. 왜 그렇게 서두르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인생을 살아가는 것도 마찬가지인데 조급해 한다고 더 잘 되고 더 크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이 길에서 아직 느끼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다.
폰세바돈에서 언덕의 정상에 올라가면 산티아고 까미노 길에서 가장 상징적인 기념물 중 하나인 철 십자가(La Cruz de Ferro)가 있다. 십자가는 심플한 형태로 오래되어 녹이 잔뜩 슬어 있고, 5미터 정도 높이의 지주에 올라가 있다.
원래 이 정상에는 선사시대의 제단이 있었고 로마 시대에 길과 교차로의 신이자 죽음의 신인 메르쿠리우스를 모시는 사제들의 제단이 있었다. 로마 여행자들은 메르쿠리우스에게 자갈을 제물로 바쳤고 이 풍습은 갈리시아인들에게 그대로 전해져서 당시 그들이 카스티야를 여행할 때도 자갈을 제물로 바쳤다고 한다. 그 후 가우셀모 수도원장이 이곳에 첫 번째 십자가를 세우면서 중세의 순례자들은 십자가에 경배하며 고향에서 가져온 돌을 봉헌했다. .
폰세바돈에서 언덕을 오르며 뒤를 돌아보니 해가 떠오르기 시작한다.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평범한 해돋이지만 오늘은 뭉클해진다. 산매자 나무와 금작화 사이의 오르막을 오르면 철 십자가상이 있는 평평한 지역에 다다른다. 이 부근이 평평한 이유는 오랜 기간 순례자들이 주변의 돌멩이를 주워 십자가 주위에 쌓아 두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철 십자가 주위에는 돌멩이가 거의 없으므로 원하는 순례자는 자신의 소망을 담은 돌멩이를 미리 준비하는 것이 좋다. 현대의 순례자들은 고향의 돌을 가져왔던 옛날의 관습을 바꿔서 자신의 물건이나 사진, 쪽지, 기념물 등을 봉헌한다
해 뜨는 모습
철의 십자가 올라가는 길
한 달이 가까운 시간 동안 까미노를 걸으면서 수많은 십자가상을 보았지만 단순한 모양의 철 십자가상은 커다란 의미로 다가온다. 이곳에는 천 년의 긴 세월 동안 순례자들의 사연이 적힌 돌멩이들이 가득 쌓여 있다. 끝나지 않은 순례자의 소망들은 앞으로도 크게 쌓일 것이지만 조금은 의아스럽다.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은 모두가 이기적인 욕심을 버리고 자신을 찾아 떠난 길이 아닌가? 그런데 아직도 현실적인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무엇을 채우기를 기원하는 것일까?
철의 십자가
주변의 기도소
철의 십자가 주변에 조그마한 기도소가 있지만 문을 열어 놓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이 돌멩이에 자신의 기원을 담아 십자가 주위에 놓고 머리에 성호를 긋고 기도를 한다. 또 많은 사람은 하늘에 향해 솟아 있는 십자가를 가리키며 마음속으로 무언가를 빈다. 그리고 신앙심이 깊거나 간절한 소망을 가진 사람은 주변의 벤치에 앉아 제법 오랜 시간을 기도한다. 하지만 사실 이 길을 걸으면서 조그마한 성당에 들어가서 보는 십자가나 성모상, 그리고 길가의 작은 십자가들을 볼 때 감동을 느낀 일들도 많았다.
반대 방향에서 보는 철의 십자가
폐허로 변한 알베르게(?)
만하린 표시
철 십자가상에서 오르막과 내리막으로 약 30분을 내려가면 폐허가 된 오래된 마을 만하린이 순례자를 맞아준다. 만하린에서 순례자는 다시 커다란 안테나가 서 있는 언덕의 정상까지 올라간다. 정상에 오르면 마침내 아름다운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며 길고 위험한 내리막길이 이어지는데 이 길은 순례자들에게 육체적 시련을 준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길고 가파른 내리막길은 무릎과 허벅지와 모든 근육에 무리를 줄 수도 있다. 7km 정도 가파른 내리막을 조심해서 내려오면 소박한 꽃들로 장식된 테라스가 인상적인 아름다운 마을 엘 아세보에 다다른다.
멀리 보이는 산의 여러 풍경
검은 지붕의 마을
엘 아세보는 자연이 선사하는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한 마을로, 이라고 골짜기에서 내려가는 곳에 위치해 있고, 돌과 석판 지붕으로 만든 전통 집에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테라스에서 아름다운 경관을 보며 발을 뻗고 쉴 수도 있다고 한다. 목재로 만든 테라스에서는 돌계단을 통해 마을의 예쁜 길로 내려갈 수도 있다.
엘 아세보는 오래 동안 가톨릭 왕에 의해 세금과 군대 징집을 면제받았다. 대신 그들은 산티아고 순례자들이 가는 산속 길이 눈으로 사라졌을 때 골짜기에 길을 표시하는 말뚝 400쌍을 박아놓아야 하는 의무를 가졌다. 얼마나 엘 아세보가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지를 증명해 주는 징표다.
엘 아세보 표시
엘 아세보의 산 미겔 교구 성당(Iglesia Parroquial de San Miguel)은 전원풍의 건축물에 로마네스크 양식의 산티아고 상이 보존되어 있는 성당이다. 이 성당의 조각상에는 사도 야고보에게 나타나는 전형적인 특징인 조개껍데기와 표주박이 보이지 않는다. 성당을 들어가려고 하니 문이 잠겨 있어 바깥에서 잠시 쉬고 있으니 자전거로 순례를 하는 사람들이 와서 사진을 찍으며 휴식을 한다.
산 미겔 교구 성당(Iglesia Parroquial de San Miguel)
리에고 데 암보로스 표시
엘 아세보에서 한 시간 가량 내리막길을 내려오면 리에고 데 암브로스가 보인다. 이 마을은 울창한 밤나무 숲 사이에 있는 전형적인 산속 마을로 순례자들은 숲에서 더위를 식히고 샘 옆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이 마을에는 아직까지도 아름다운 전통 시골 건축이 많이 남아 있는데, 목재로 만든 발코니는 엘 아세보와 비슷하다. 마을을 나가는 길에는 메루엘로 시내 위에 16세기의 다리가 있다.
리에고 데 암보로소 안내도
리에고 데 암보로소 마을에 조그마한 예배당이 있다. 현대에 지은 것 같은 건물인데 상당히 정감이 가 들어가니 일반적인 성당과는 조금은 다르게 보이는 조그마한 제단이 있고, 옆에는 기도초를 밝히도록 하여 놓았다. 그곳에서 기도초를 밝히고 잠시 기도를 하고 나와서 다시 길을 계속하니 다소 가파른 돌길을 따라 내려와야 했다. 길은 다소 험하였으나 주변을 돌아보면 경치는 감탄할 만하였다.
산 세바스티안 예배당
제단의 모습
몰리나세카 가는 길의 풍경
마을을 나서서 시내를 지나는 메루엘로 강을 16세기에 중세의 돌로 만든 다리를 건너면 이제 몰리나세카까지는 4km 정도다.
몰리나세카는 까미노 프란세스에서 중세의 외관과 분위기를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마을이다. 마요르 거리에는 중세에 만들어진 다리와 문장이 있는 전통 건축과 발보아의 저택, 16세기에 만들어진 순례자 병원 등이 모여 있다. 또한 다리가 있는 곳에 자연을 그대로 활용한 수영장이 있어서 몰리나세카는 자연스럽게 산티아고 가는 길에 손꼽히는 명소다.
몰리나세카에는 포도주, 사과(Manzana Reineta), 고추(Pimiento), 소시지(Botillo), 육포(Cecina), 배(Pera)의 여섯 가지 음식이 이 마을을 대표한다고 한다. 이 마을의 여러 음식점에서는 여러 음식들을 즐길 수 있다. 또 순례자의 피로를 풀 수 있는 술로는 비에르소 포도주나 지역에서 빚는 아구아르디엔테(Aguardientes; 증류주의 일종)가 있다고 한다.
몰리나세카 표시
마을 입구에서 안구스티아스 성모의 성소(Santuario de la Virgen de las Angustias)가 맞이한다. 18세기의 건축물로 이 성소의 문은 금속 덮개로 단단히 덮여 있는데, 그 이유는 순례자들이 이 성소의 나무문에 돌을 던지면 순례도중 행운이 따른다는 미신으로부터 나무로 만든 현관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현관문의 설명에는 조금 다르다. 하지만 나무문을 보호하기 위해서 철판을 덮었다는 결과는 같다.
안구스티아스 성모의 성소(Santuario de la Virgen de las Angustias) 문에 대한 설명
안구스티아스 성모의 성소(Santuario de la Virgen de las Angustias)
순례자의 다리 설명
설명에 의하면 순례자는 이 다리를 건너 마을의 중심부에 도착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 다리는 여러 차례 확장이 이루어졌는데 최종 확장은 1980년에 이루어졌다고 한다.
순례자의 다리
몰리나세카 마을
십자가 상
몰리나세카의 예스러운 거리를 지나 십자가상을 지나니 현대식으로 조성된 건물이 보인다. 가까이 가니 호텔과 식당을 겸하고 있는 곳이다. 바깥의 테이블에는 이 길을 걷는 서양인들이 앉아 음식을 먹고 있어서 시간도 점심때가 되어서 같이 길을 걷는 동행에게 점심을 먹고 가지고 하여 나는 햄버거를 시켰는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먹는 햄버거가 아니라 무슨 요리와 같았다. 버그 안의 소고기는 너무 커 하나의 스테이크 같았다. 점심을 먹으면서 한 시간 정도 휴식을 하고 난 뒤에 다시 길을 갔다.
호텔 겸 음식점
몰리나세카 안내 설명
몰리나세카를 지나 길을 걸으면 나무에 매달려 있는 체리를 수도 없이 본다. 길가에 주인도 보이지 않는 나무라 지나가면서 따 먹으니 제법 맛이 있다. 비교적 잘 익은 열매만 따서 먹으니 상큼한 맛이 입맛을 돋우었다. 이곳에서 단조로운 길을 걸어가면 있는 마을 캄포는 순례자의 발길을 잡는 특별한 건축물이나 이야기가 없는 평범한 농촌 마을이다. 마을을 나와서 도로의 왼쪽으로 걸으면 멀리 폰페라다와 파하리엘 산이 보인다. 이 구간은 엘 비에르소의 가운데를 관통하는 긴 내리막길이 이어지는 길이다. 몰리나세카에서 폰페라다까지는 약 8km로 마스카론 다리를 건너 폰페라다에 오후 3시경에 도착한다.
캄포 표지판
폰페라다 표지
폰페라다(Ponferrada)는 마치 황금빛 갑옷을 입은 기사가 백마를 타고 나올 것 같은 템플 기사단의 성이 인상적인 산간도시로 레온주(Provincia de León) 서부에 위치한 실 강이 지나는 까미노 프란세스 길의 주요 도시다. 행정구역상 비에르소 지구(Comarca de El Bierzo) 최대의 도시이자 행정 중심지이며 평균 고도 544m의 고지대에 자리 잡고 있다. 로마 제국 시대부터 광업의 중심지로 성장했으며 도시 기반이 확립된 시기는 11세기로 현재 도시의 중심지는 로마 시대 이전의 주거지 위에 세워졌다. 현재의 도시 이름은 ‘철로 된 다리'를 뜻하는 라틴어인 '폰스 페라타'(Pons Ferrata)에서 유래된 이름인데, 라틴어로 폰은 다리, 페라타는 철을 뜻하며, 1082년 아스토르가의 주교 오스문도(Osmundo)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자들이 실 강과 보에사 강을 안전하게 건널 수 있도록 건설한 고대 다리를 철재로 보강한 것에서 유래한다.
페르난도 2세는 순례자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 이 도시를 템플 기사단에게 맡겼고, 폰페라다는 산티아고로 가는 순례자들을 보호하고 돌보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 때문에 도시에는 템플 기사단의 성벽이 세워졌다.
한때 스페인 석탄 산업의 중심지였으나 1980년대 말에 들어서 많은 광산이 폐광되면서 광업이 쇠퇴했으며, 현재 산티아고 순례길이 활성화된 덕분에 관광업이 발달하고 농업, 포도주 산업 등이 주산업이 되었다. 폰페라다는 마법과 아름다운 풍경, 역사로 가득한 땅으로 비에르소 지방의 음식을 맛보기에 가장 좋다고 한다.
폰페라다에는 역사적 건축물을 비롯한 많은 관광 명소가 자리 잡고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1178년 레온의 페르난도 2세가 순례자 보호를 위해 템플 기사단을 이곳에 설치했으며 이들이 주둔한 템플라리오스 성(Castillo de los Templarios)은 현재 복원돼 있다. 또 중세시대에 건축한 산안드레스 교회(Iglesia de San Andrés), 유서 깊은 시청사 등이 있다.
폰페라다 입구의 마스카론 다리
마스카론 다리를 건너 숙소인 알베르게에 들어가 땀으로 제법 젖은 몸을 씻고 구경을 나갔다. 숙소에서 조금 가면 템플 기사단의 성(Castillo de los Templarios)이 우뚝 서 있는 모습을 본다.
현재 중세 시대의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흔히 등장하는 붉은색 십자가가 표시된 흰색 겉옷이 상징인 템플기사단(Ordre des Templiers)은 십자군 전쟁 때 성지 순례자 보호를 목적으로 설립된 종교기사단으로 본래 명칭은 ‘그리스도와 솔로몬 성전의 가난한 기사들(Pauperes commilitones Christi Templique Solomonici)’이며, '성전 기사단' 또는 '성전 수도회'로도 불린다. 1118년 성지 수호를 제창한 프랑스의 기사 위그 드 파양스(Hugues de Payens) 아래 9명의 기사들이 모여, 성 요한 기사단의 예를 모방하여 아우구스티누스회의 회칙을 지키며 살 것을 맹세하였다. 예루살렘의 보두앵 2세(Baldwin II)는 예전에 솔로몬 왕이 건립한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지역에 그들의 거처를 주었는데, 여기서 이 단체의 명칭이 유래했다. 클레르보 수도원장 베르나르의 후원에 의해서 트로아교회회의(1128)에서 새로운 형식의 기사수도회로서 인가되고, 1129년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공인받으면서, 기사단은 빠르게 성장하였다. 단원들은 대부분 십자군전쟁의 격전지에서 활동하였고, 비(非)전투 단원들은 금융업으로 엄청난 재산을 축적하고 많은 요새를 건설하였다. 하지만 성전 기사단의 비밀 입단식에 대한 루머가 만들어지면서 이단으로 의심을 받았다. 이후 1307년에 이르러 기사단에 큰 빚을 진 프랑스 왕 필리프 4세가 왕권 신장의 수단으로 이들을 이단으로 간주, 프랑스 각지에 있는 3,000여 수도원의 회원들을 모두 체포하고 재산까지 몰수한 뒤 고문을 통해 거짓 자백을 강요받고 화형에 처하는 이단 심문을 6년간 단행하였다. 교황 클레멘스 5세의 항의로 별도 조사를 하였으나, 1312년 클레멘스 교황은 결국 굴복하여 기사단에 해산령을 내려 이 기사단은 결국 해체되고, 재산도 요하네스기사수도회로 승계되었다. 최초의 기사수도회로서 십자군 전쟁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이 기사단은 다소 신비스러운 집단으로 평가를 받았고, 오늘날에도 그들의 후예가 비밀 결사로 존재한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고, 세계적 베스트셀러였던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 코드> 등에 등장한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향하는 순례자를 보호하는 임무를 부여 받아 1178년에 건축된 이 성은 돌로 만들어진 거대한 암호이자 템플기사단의 비밀스러운 기호가 숨어있다고 전해진다.
당시 기사들은 세 겹의 성벽에서 세 번의 맹세를 해야 했고, 성벽에 있는 열두 개의 탑은 별자리를 의미했다. 기사단의 가장 중요한 보물인 성배와 성궤에는 전통에 따라 후세의 기사들에게 전달하는 메시지가 숨겨져 있다고 전해진다. 또한 템플 기사단의 기도문 속에는 이 두 보물의 위치를 알려주는 비밀스런 메시지가 숨겨져 있다고 전해진다.
폰페라다에서는 매년 7월 중순 여름의 첫 번째 보름달이 뜰 때 중세의 템플 기사단을 기리며 밤을 보내는 축제를 벌인다. 중세의 복장을 한 사람들이 템플라리오 광장부터 성채까지 행진을 하고, 템플 기사들에게 성배와 성궤를 헌납하는 모습을 재현한다.
템플기사단 성
템플기사단 성 주위 마을
성벽을 보고 성안을 구경하려고 성안으로 들어가는 다리를 건너니 시간이 아직 되지 않아서 들어갈 수가 없다는 표시가 붙어있어 어쩔 수 없이 주변을 잠시 구경하니 중세에 세워진 17세기의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축 된 성 안드레스 성당(Iglesia de San Andres)이 눈에 보인다. 성당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중세 성직자 복장을 한 상이 보이고, 성벽의 하천을 따라 맥주집이 줄을 지어 있었다. 바쁜 것도 없어 안산의 채선생과 맥주를 한잔하기로 하고 시키니 조금은 이상한 가격을 받았다. 실내와 실외의 맥주 가격이 조금 차이가 있었다. 실외의 가격이 조금 더 지불해야 했다. 아마도 주변 경치를 즐기는 조망권 가격이라고 생각하며 바깥에서 한가로이 맥주를 마시다가 우리 일행을 불렀다.
성 안드레스 성당(Iglesia de San Andres)
성 앞의 중세 성직자상
템플 기사단의 성(Castillo de los Templarios)의 여러 모습
지체없이 달려온 일행들과 가볍게 맥주를 한잔하고 시내를 구경하러 올라갔다. 성벽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이 도시의 대표적인 성당 엔시나 바실리카 성모 성당(Basilica de Nuestra Senora de la Encina)을 만난다. 이 성당은 르네상스 시대에 지어진 라틴 십자가 평면의 성당으로 1573년 로마네스크 양식 성당이 있던 자리에 다시 지어졌다. 성당의 내부에는 13세기 고딕 양식의 그리스도상이 있다. 수많은 순례자들과 신자들이 성당을 찾는 이유는 이 성당이 떡갈나무의 성모와 템플기사단의 전설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성당 안에는 16세기에 만들어진 비에르소의 수호성인인 엔시나의 성모상이 있다. 이성당의 떡갈나무의 전설을 대략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어떤 템플 기사단원이 성의 대들보로 쓸 나무를 구해오라고 나무꾼에게 명령했다. 대들보로 사용할 큰 나무를 얻기 위하여 숲으로 들어간 나무꾼들은 이상한 빛을 보았고, 그 빛은 신비스러운 광채를 뿜고 있는 떡갈나무로 그들을 인도했다. 나무꾼의 말을 듣고 숲으로 간 기사는 커다란 떡갈나무 구멍에 성모상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템플 기사단은 이 성모상을 위해 성전을 짓고 엔시나의 성모를 이 지역의 수호성인으로 삼았다. 당시 나무를 자르는 과정에서 성모상이 안고 있던 아기예수의 다리 부분이 도끼에 상처를 입게 되었고, 그 이후로 폰페라다의 사람들은 항상 성 모자에 기도를 올린다고 한다.
성당 벽에 붙어 있는 템플기사단 문장
엔시나 바실리카 성모 성당(Basilica de Nuestra Senora de la Encina)
엔시나 바실리카 성모 성당(Basilica de Nuestra Senora de la Encina) 내부
성당 앞의 템플가사상
성당을 나와 슈퍼를 찾아가면서 마을의 이곳저곳을 구경하니 이 마을이 오래 된 전통을 가지고 있는 표시가 여러 곳에 나타난다. 옛 성벽이나 광장 그리고 성문 등이 곳곳에 눈에 띄이었다. 시내를 구경하고 슈퍼에서 내일을 위한 먹거리를 장만하고 알베르게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잠시 있다가 저녁 미사에 참석하려고 알베르게를 나서니 같은 길을 걷고 있던 여인이 함께 가자고 하여 조금 일찍 나가서 템플기사단 성을 구경하자고 했다. 성으로 가니 저번에 왔을 때 닫아놓았던 성은 문을 열어서 안으로 들어가 한 바퀴 돌면서 구경을 하고 성당으로 가서 저녁 미사를 드렸다. 일반 미사를 마치니 순례 길을 걷는 사람들을 위해 따로 모아서 사제가 강복을 해 주시고 기념품을 주셨다. 이 길을 걸으며 미사에 참석하면 대부분의 성당은 순례자들을 위해 따로 강복을 해 준다. 그것만으로도 이 길을 걸으면서 받는 축복이라 생각하며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옛 성문
구 시청사 건물과 왕립 감옥 표지판
마을의 모습
시청
폰페라다 시내의 여러 모습
템플기사단 성에서 보는 폰페라디
12~13세기에 지어진 템플 기사단의 성은 8000㎡ 정도의 면적에 일정하지 않은 형태로 총안과 방어용 망루, 맹세의 탑 등이 있다. 외부에서 보는 성은 매우 장엄하고 견고한 모습으로 사람을 압도하지만 내부는 너무 단조롭다.
템플기사단 성 내부의 모습 - 단조로운 구조다.
미사를 마치고 알베르게로 돌아오니 벌써 21시가 지났다. 이 길을 걷는 평소에 비하면 상당히 늦은 시간이었다. 그래서 오늘의 하루를 정리하고 내일을 위해 잠자리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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