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鶴)의 오딧세이(Odyssey)

스페인, 산티아고 까미노 길을 걷다. 35(06.20, 오 페드로우소 -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오늘의 걷기 길 : 오 페드로우소 - 오 아메날(3.7km) -  산 파이오 아 코루냐(4,0km) -  아 라바코야(1.8km) -  산 마르코스 아 코루냐(5.3km) -  몬테 델 고소(0.4km) -  포르타도 카미노(4.6km) -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0.2km)

 

 오늘은 이 까미노의 마지막 길을 걷는다. 이제 오 페드로우소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는 약 20km가 남았다. 많은 사람들은 오 페드로우소에서 15km 떨어진 몬테 도 고소에서 머물고 다음날 출발하여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대성당 미사에 참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감격과 기쁨의 마지막 길은 기대에 못 미친다. 이 길에서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향하는 고속도로와 수많은 차로가 얽혀있는 풍경을 주로 볼 뿐이다. 또 주변의 작은 마을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위한 마을로 도시화되었고 라바코야 국제공항은 길을 멀리 돌아가게 만들지만, 이 여정의 진정한 기쁨과 아름다움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산 마르코스의 언덕에서 처음으로 산티아고 대성당의 탑을 바라보는 순간 당신은 이미 순례자의 왕이 되었음을 마음속에 느낄 것이다..

 

 오늘은 평소보다 더 일찍 길을 떠나야 한다. 12시에 있는 대성당의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 일찍 대성당의 광장에 도착해야 하기에 모두들 새벽에 일어나 길을 떠난다. 나도 새벽 5시에 길을 떠나니 다른 사람들은 벌써 떠나고 없다.

 

 오 페드로우소를 나오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나와 일행은 어제 지나온 길로 다시 가서 어둠 속에서 전등을 밝히고 까미노 표시를 따라 걸으니 서양인 한 사람도 같은 길을 걷고 있다. 사위가 어둠에 둘러싸여 지척도 구별하지 못해 잠시 길을 잘못 들었다가 그 사람과 같이 길을 바로 잡아 걸어서 어둠에 덮인 여러 마을을 지나며. 까미노 표시를 따라가서 도로를 넘어 유칼립투스 나무 사이로 편안하게 이어지는 완만한 오르막을 오르면 라바코야 국제공항을 볼 수 있다.

 다시 나무가 우거진 숲길을 지나 거대한 공장지대를 지나 이어지는 길을 따라 바레이라 언덕을 올라 얼마 걷지 않아서 산 파이오가 나온다.

 

산 파이오 표시

 

 산 파이오에서 까미노 표시를 따라 라바코야 국제공항으로 향하는 고속도로 밑으로 이어지는 터널을 통과하면 순례자는 라바코야로 내려가는 아스팔트 포장길을 만난다.

 부근에 아름다운 숲과 깨끗한 시내가 있는 라바코야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국제공항 근처의 작은 마을로, 칼릭스티누스 사본은 라바코야를 산티아고에서 10km 정도 떨어진 숲이 우거진 마을에 시내가 흐르는데, 프랑스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순례자들은 모두 이곳에서 사도 야고보를 만나기 위해 옷을 벗고 손발과 더러워진 몸을 모두 씻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이 마을 이름이 라바’(Lava; 씻다) ‘코라’(Cola; 꼬리)’에서 유래되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가장 설득력이 있는 주장은 이 시내에서 순례자들이 산티아고에 좀 더 우아한 모습으로 도착하기 위해 ‘코야스’(Collas; 중세에 사용하던 칼라)를 빨았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렇지만 이런 순례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을 먼 거리를 걸어온 사람들의 몸에는 좀처럼 지워 지지 않는 냄새가 남아있었을 것이다.

 

라바코야 성당

 

 라바코야에서 산 마르코스까지 내려가는 길에 순례자를 위한 캠핑장과 갈리시아의 지방 방송국인 TVG를 지난다. 방송국 건물을 지나기 전에 비는 부슬부슬 오기에 잠시 쉬어가려고 바에 들러 늦었지만 간단하게 오렌지 주스와 약간의 빵으로 허기를 때운다. 그런데 30여 일을 걸으면서 조금은 이상한 현상을 발견했다. 내가 비교적 음식을 많이 먹는 편인데 거의 매일 아침을 먹지 않고 먼 길을 걸어도 배가 고픈 것을 모르겠다.

 산 마르코스와 몬테 델 고소는 같은 마을로 볼 수 있게 붙어 있다. 오늘의 목적지가 바로 눈앞에 있을 것 같은 조급함에 지나칠 수도 있으나 산 마르코스 소성당의 왼쪽으로 유명한 몬테 델 고소가 있다. 대부분의 순례자가 이곳에서 처음으로 꿈처럼 떠오르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의 탑을 본다.

 

멀리 보이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포장도로를 따라 왼쪽으로 몬테 델 고소의 계단을 내려가서 다리를 건너 고속도로와 사르 강, 철길 위를 지나 콩코르디아 공원을 만나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산 라사로에 도착한 것이다. 이제는 정말로 마지막 길을 걷는다.

 

순례자 기사단 상

 

 12사도(使徒)의 한 사람인 성() 야고보(스페인어로 산티아고)의 순교지로 알려져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la)는 갈리시아 자치지역에 있는 도시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당의 이름을 따서 도시 이름이 지어졌다. 성 야고보(산티아고 )가 순교하여 유해의 행방이 묘연하던 중, 별빛이 나타나 숲속의 동굴로 이끌어 가보니 성 야고보의 무덤이 있었다고 한다. 그 후 그곳을 별의 들판이란 뜻으로 캄푸스 스텔라(Campus Stellae)라고 불렀다. 알폰소 2세 시절에 이리아의 테오데마르 주교가 성 야고보의 유해가 발견됐다고 주장하여 성 야고보를 기념하기 위해 그의 유해가 있던 곳에 성당을 세웠고 이를 계기로 순례자들의 중심지로 부상하여 산티아고는 로마와 예루살렘에 버금가는 가톨릭 성지가 되어 해외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왔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나폴레옹 전쟁 때 프랑스군에 점령되어 성 야고보의 것으로 보이는 유해가 1세기 넘게 실종되었다. 그러나 유해는 교회 지하에 있는 석실에 감춰져 있었다. 1884년 교황 레오 13세가 교서를 내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유해의 정통성을 인정했지만 이후 교황청은 그 유해가 성 야곱의 것인지에 대해 공인하지 않으면서 순례할 것을 권장했다. 19세기~20세기에 진행된 성당 발굴 과정에서 로마시대 순교자 묘지가 발견되었다. 2010년 스페인을 방문한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순례의식을 치렀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갈리시아지방 중심도시의 하나로 수공업이 성하다. 12세기에 건설된 성 야고보를 모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을 비롯하여 성 프란체스코회와 성 아우구스티누스회의 수도원, 성당, 교회, 대학 등 중세의 건물이 많이 남아 있다.

1985년 구도심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고, 대성당이 있는 오브라도이로 광장 주변에 시 청사, 수도원, 대학교 등 중세시대 건물들이 많다.

 

산티아고의 엠불렘

 

산티아고 시내 입구 Praza da Concordia의 조형물

 

십자가

 

멀리 보이는 첨탑

 

 계속 직진하여 아베니다 데 루고 거리를 지나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구시가지가 나오지만 대성당까지는 아직 한참을 걸어야 한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옛 시가지(Santiago de Compostela Old Town)  전설이 담긴 십자가상이 세워진 산 페드로 광장(Plaza de San Pedro)에서부터 시작한다. 산 페드로 거리를 내려와 포르타 도 카미뇨를 지나면 길은 여러 거리와 광장이 있는 마지막 구간을 지난다. 스페인의 기독교가 이슬람교와 벌인 항쟁을 상징하는 곳이기도 하는 이 도시는 10세기 말에 무슬림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11세기에 완전히 재건되었다. 로마네스크, 고딕, 바로크 양식으로 지은 건물들이 있는 산티아고(Santiago)의 옛 시가지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다. 가장 오래된 기념물들은 성 야고보(St James)의 무덤과 대성당 주변에 모여 있는데, 포르티코 데 라 글로리아(Pórtico de la Gloria, 영광의 문)가 특히 유명하다.

 

 포르타 도 카미노를 지나면 성인의 숨결이 느껴지는 산 페드로 거리에 도착한다. 이제부터는 눈에 보이는 건물이 모두 유적이다. 좁은 거리와 여러 광장을 지나면 대성당 옆에 여러 성당과 수도원 옛 병원 건물이 보인다. 그 건물들도 화려하고 눈을 끌지만 우리의 목적지는 대성당이다. 마침내 산티아고 대성당을 향한 마지막 길인 아시베체리아 거리로 들어서면 오른쪽에 17세기에 만들어 산 마르티뇨 피나리오 수도원(Monasterial San Martino Pinario)의 웅장한 정문이 있다. 이어서 스페인에서 가장 인상적인 회랑을 만나게 되고, 대성당의 오래된 로마네스크 양식의 천국의 문을 만난다. 윤이 나도록 닳은 돌로 만든 도로를 따라 아치를 통과하면 마침내 오브라도이오 광장이 나타나고 이제 순례자의 눈에는 그토록 갈망했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이 보인다.

 

성당 뒤의 건물(Hospedaria San Martino Pinario와  Mosteiro deSan Martino Pinario)

 

 오브라도이로 광장(Praza do Obradoiro)에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Cathedral of Santiago de Compostela)을 보는 순간 말도 나오지 않는 감탄을 한다. 이 길을 걸으면서 크고 작은 수많은 성당을 보았다. 작은 성당은 작은 성당대로 나름의 특징이 있었고, 얽힌 이야기도 있었다. 그리고 부르고스 대성당의 화려함과 레온 대성당의 장엄함을 보고 감탄을 하였다. 그런데 이 대성당은 무어라 말 할 수 없는 감동을 주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Cathedral of Santiago de Compostela)은 외관의 화려함이나 장엄함 그리고 크기가 모두를 압도했다. 광장에서 아무리 구도를 맞추어 보아도 한 컷에 다 들어가지가 않는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Cathedral of Santiago de Compostela)은 예수의 열두 사도 중 한 사람인 성 야고보의 유해를 보관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현재의 성당은 1078년에 주교 디에고 페라에스에 의해 기공되어 1128년경 미완성인 채 헌당식을 가졌다. 외부는 여러 시대에 걸쳐 증축과 개축이 이루어졌다. 거대한 둥근 지붕은 15세기에, 16세기에는 회랑이 완성되었다. 바로크 양식의 파사드는 관청들로 둘러싸인 커다란 오브라도이로 광장의 일부가 되었다. 네 개의 계단 위에 위치한 주 출입문 양쪽에는 다윗과 솔로몬의 상이 서 있다. 이 성당의 건축학적 보석은 12세기에 만들어진 포르티코 데 라 글로리아(영광의 문), 바로크 파사드 뒤에 있다.  대성당 앞의 마름모꼴 계단을 통해서 올라가면 오브라도이로 문(Fachada de Obradoiro)이 있고, 그 안으로 들어서면 영광의 문(Portico de la Gloria)이다. 네이브로 통하는 통로의 팀파눔과 세 개의 아치 위 장식 홍예 위에는 12세기 초 거장 마테오 데우스탐벤이 신약 성서의 요한 묵시록을 근거로 조각한 '최후의 심판'에 등장하는 200여 개의 상이 조각되어 있다. 바로크 풍의 토레 데 렐로(Torre de Reloj, 시계탑)1680년 도밍고 안드라데가 만든 것이다. 화강암을 주재료로 하였으며 라틴 십자가 모양의 평면 설계로, 길이는 98m, 너비는 67m로 이루어져 있다.  

 대성당은 갈리시아 지방의 화강암으로 지어졌는데, 좌우에 있는 두 개 탑의 높이는 각각 74m. 대성당 앞의

중앙의 기둥에는 성 야고보의 상과 함께 성모와 다윗의 아버지 이세의 가계도가 새겨져 있다. 중앙 기둥의 하단부에는 사도 마테오의 흉상이 있는데 이 흉상에 머리를 부딪치면 사도의 지혜를 닮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보호를 위하여 철책으로 막아놓아 감사의 의식을 치르기는 어렵다. 영광의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제단 위에 황금으로 만든 천사의 호위를 받으며 백마를 타고 칼을 휘두르는 있는 산티아고 마타모로스(Santiago Matamoros; 전사 산티아고) 상이 있다. 

 

산티아고 대성당의 전경

 

대성당의 여러 모습

 

 대성당 광장에 도착한 순례자들은 모두 감격에 겨워 서로를 끌어안고 축하한다. 이 먼 길을 걸어온 사람들은 누구나 축하를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다. 예전에는 이 광장에 도착한 순례자들 중에는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감격한다고 하였는데 이제는 우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나는 눈물이 났다. 왜 눈물이 나는지는 모르겠으나 앉아서 울고 있다가 감정을 추스르고 일어나니 같이 걸은 일행이 다가와서 서로 안으며 축하를 해 주고 사진도 찍고 광장에 주저앉아 광장의 사람들은 구경한다. 같은 길을 걸어오며 만났던 사람들의 모습도 보인다. 우리와 거의 같은 길을 걸은 한국의 모녀와 젊은이들, 대만의 여인, 일본인 모두 완주를 기뻐하며 서로 축하를 한다.

 

대성당 주변의 모습

 

 광장에 앉아 쉬다가 정오의 순례자 미사에 참석하려고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성당을 들어 갈 때 큰 짐이나 남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도구는 가지고 들어갈 수가 없으니 미리 조치해야 한다. 매일 정오에 시작되는 순례자를 위한 미사에는 여러 나라의 사제들이 자국어로 강복을 한다. 우리나라의 사제도 있어 한국어로 강복을 하니 느낌이 달랐다. 가끔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에서 집행하는 미사를 더욱 널리 유명하게 만든 보타푸메이로(Botafumeiro) 강복 의식을 하는데 이런 경우 8명의 수사들이 힘을 다해 흔드는 황금 빛 향로가 대성당의 천장을 크게 비행하는 감동적인 광경을 볼 수 있다. 보타푸메이로(Botafumeiro)의 원래 뜻은 연기 방출기라는 뜻이나 지금은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에 있는 거대한 향로를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된다. 오늘은 다행히도  보타푸메이로 강복 의식을 거행하려고 수사들이 준비를 하고 미사 끝부분에 거행하였다. 사람들은 누구나 휴대폰을 꺼내어 사진을 찍느라고 바쁘다. 

 

 순례자들끼리 많이 하는 농담 중에 파리는 순례자의 친구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이는 중세나 현재나 마찬가지로 한 달이 넘게 땀이 베인 단 몇 벌의 옷만을 가지고 보도 여행을 하는 순례자에게는 항상 냄새가 나기 마련이라는 자조 섞인 농담이다. 중세의 경우에는 더욱 심했을 것으로, 라바코야에서 아무리 깨끗이 몸을 씻었어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에 모여든 순례자의 몸에서는 냄새가 풍겼을 것이다. 그래서 보타푸메이로는 미사 도중 순례자들에게서 풍기는 고약한 냄새를 없애기 위해 순례자의 머리 위에서 커다란 향로를 피웠던 것에서 유래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보타푸메이로(Botafumeiro) 강복 의식

 

대성당 내부와 미사(향로 미사 포함)

 

 미사가 끝나고 사람들은 성 야고보의 유해가 안치된 관을 보러 간다.

 

 대성당의 후면에는 면죄의 문이라고 불리는 거룩한 문이 있고, 대성당의 지하묘소에는 순은을 입혀서 조각한 성 야고보의 유골과 그의 제자인 테오도로와 아타나시오의 유해가 들어있는 함이 안치되어 있다. 야고보의 관을 지나가면 대성당의 금빛 찬란한 중앙 제대에는 순례자들이 뒤에서 포옹을 하는 산티아고의 좌상이 모셔져 있다. 산티아고 상을 포옹하기 위해서는 제단 뒤의 별실로 가야 하는데 제대 오른쪽으로 가서 옆으로 난 좁은 계단을 올라가면 황금으로 장식된 산티아고 상의 뒷면에 도달하게 되고, 순례자들은 마침내 성인을 포옹하고 입맞춤을 한다.

 

 

성 야고보의 유골안치소 표시

 

성 야고보의 관

 

성 야고보상

 

성당 내부

 

 대성당을 방문한 순례자들은 순례를 마쳤음을 산티아고의 주교회에서 보증하는 순례인증 증서인 콤포스텔라(Compostela)를 순례자 사무실에서 발급받는다. 사무실에 순례를 하면서 받은 수많은 스탬프가 찍혀있는 순례자 여권인 크렌디시알을 제출하여 심사를 받고 라틴어로 쓰인 콤포스텔라를 받는다. 순례자에겐 이 순간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길의 마침표다.

 

 미사에 참석하고 나와 성당 주위를 구경하다가 오늘의 숙소를 찾아 시내를 걸어가다가 일본식 스시뷔페를 발견하고 점심을 먹으러 갔다. 이 뷔페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뷔페와 조금 다르게 특이했다. 뷔페라 많은 종류의 음식이 있는데 미리 만들어 늘어놓은 것이 아니라 메뉴판을 보고 음식을 주문하면 주방에서 그 음식을 만들어 주는 방식이었다. 

 

점심을 먹고 호텔에 가서 그 동안의 땀으로 절은 몸을 깨끗이 씻고 피로도 풀고 쉬었다.

 

 오늘로 공식적인 산티아고 까미노는 다 끝났다. 30일이 넘게 약 800km를 걸어 온 것이다. 무엇 때문에 왜 걸었는지는 답이 나오지 않지만 이 길을 걷고 난 뒤에 무엇인가를 얻는 것은 천천히 생각해 보아도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