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鶴)의 오딧세이(Odyssey)

서해랑길 45코스(곰소항회타운 - 곰소초입구 - 왕포선착장 - 국립변산자연휴양림 - 도정리모항)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서해랑길 45코스는 곰소항회타운을 출발하여 해안을 따락 걸으면 왕포선착장이 나온다. 여기서도 계속 해안을 따라 걸어서 국립변산자연휴양림을 거쳐서 도정리모항에 이르는 14.7km의 길이다. 

45코스 안내판

 

 44코스가 끝나는 지점에 도착하니 아직 해가 하늘에 떠 있다. 그래서 조금 더 걷기로 하고 45코스를 따라 갔다. 원래 여정에 나서기 전에 코스를 연구하면서 45코스를 조금 걸어가면 숙소가 많이 있는 곳을 찾았기 때문에 길을 계속했다.

 

곰소항회타운

 

 곰소항회타운을 지나 곰소방파제 쪽으로 가니 많은 식당과 펜션이 보여서 오늘을 멈추기로 하고 숙소를 찾아가니 예상보다 값이 비싸다. 좀 비싸다고 하니 주말이라 가격이 다르다고 한다. 제법 큰 펜션인데 가족단위의 여행객이 많이 보이고 혼자 숙박하는 사람은 나뿐이다. 주변에 있는 식당을 찾아가 저녁을 맛있게 먹고 내일의 음식을 사서 돌아와 쉬다가 잠을 청했다.

 

 다음날 일찍 일어나 출발하여 곰소초등학교를 지나 다시 해안으로 내려가 걸어가니 방송에서 항상 보던 낚시꾼들의 원픽인 왕포가 나온다.

 

숙소에서 보는 저녁의 곰소바다

 

곰소초등학교

 

왕포로 가는 길의 풍경

 

 왕포선착장에 도착하여 주변을 보니 조그마한 어항인데 제법 숙소가 갖추어져 있다. 아마도 많은 낚시꾼들을 위한 숙소라고 생각이 들었다.

 부안군 진서면 운호리 200-19에 위치한 왕포선착장은 연예계를 대표하는 낚시꾼이라고 스스로 자칭하는 이덕화, 이경규 등이 도시어부라는 낚시 여행프로그램에서 자신들만의 황금어장이라고 칭하던 곳이다.

바닷가도 풍경이 좋지만 마을은 집집마다 온통 벽화가 그려있어 마을에서 벽화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왕포의 여러 모습

 

 왕포를 지나 도로를 따라 조금 가니 길가에 좀은 어울리지 않은 카페가 보인다. 길을 걸으며 항상 보는 것인데 우리나라의 경치가 좋은 곳이라면 어디든지 카페가 있다. 손님이 그만큼 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길을 가다가 휴식을 취하기에는 안성마춤이다. 하지만 아직 이른 시간인지 문을 열지 않아서 그냥 지나쳤다.

 

카페

 

 길을 따라가면 곳곳에 부안마실길이라는 표지가 보인다. 부안의 아름다운 해안과 농촌 길을 아주 정겨운 마실길이라는 이름을 붙여 놓았는데 서해랑길이 많은 부분이 이 길과 겹치니 부안마실길 표지를 유심히 보고 가면 편리하다.

 

부안의 해변과 마실길 표지

 

부안정명 600년 표지

 

부안의 갯벌과 해안

 

상계제 아홉구비길 표지(부안마실길 6코스)

 

 

 해안을 따라가면 변산자얀휴양림이 나온다. 아름다운 자연을 자랑하는 변산반도국립공원에 위치한 변산자연휴양림은 산을 등지고 바다를 품은 배산임수를 취하며 변산반도의 여러 관광 명소와 인접해 있으며, 쌍계재 주변으로 30번 국도와 인접해 있다. 또 국립자연휴양림 최초의 바다를 품은 해안생태형 휴양림으로 해안과 산림의 독특한 해안생태형 숲을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다.

 

대가 울창한 길

 

옛날의 해안초소

 

 

 산 언덕길을 계속 걸어가니 조가비에 이름을 적고 길가에 매달아 놓은 철조망들이 자주 보인다. 사랑의 자물쇠라고 하여 다리의 난간이나 유명한 명승지의 철책에 걸어 놓은 것은 흔히 보았는데 이 궁벽한 산길에 무슨 조가비가 하는 의문이 조금 들었지만 자물쇠보다는 친근감이 있었다.

 

사랑의 조가비

 

 

 

 산길을 제법 걸어서 나가니 모항이라는 표지가 나온다.

 부안군 변산면 도청리 모항항은 어항이다. 모항(茅項)은 격포에서 남동쪽으로 해안 도로를 따라 약 6쯤에 위치한 마을로 줄포만(茁浦灣)에 돌출되어 삼면이 바다에 둘러싸여 있다. 모항해수욕장과 거의 인접해 있어 여름이면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고 있으며 모항항 가까이에 여러 숙박시설과 수련원 등이 있다.

 1940년대 초 곰소항이 개설되기 이전에는 위도(蝟島)는 물론이고 고창, 영광, 흑산도를 내왕하는 요지의 항구이기도 하였다.

모항이라는 이름은 나에게는 생소한 이름이었다. 내가 제법 많은 곳을 다니기 때문에 왠만한 곳은 다 안다고 자부했는데 전혀 모르는 곳이었다. 그런데 조금 가다가 보니 많은 조그마한 어촌에 비해서는 거의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었다. 

 

모항표지

 

 

 

 모항해안을 따라 길을 가니 최근에 들어섰다는 갯벌체험장도 있다. 모항 갯벌은 줄포만의 만입된 갯벌 중 유일하게 간척되지 않은 곳이다. 모항마을 서쪽에는 해변의 소나무 숲이 일품인 모항 해수욕장이, 남쪽에는 암반 해안과 선착장이 있고, 동쪽은 깊숙이 파고든 만(灣)으로 썰물 때면 만 전체에 갯벌이 드러난다. 바다 위로 테크를 설치해 산책도 할 수 있게 해 놓았다. 그리고 아주 크지는 않지만 해수욕장도 마련되어 있다.

 모항은 사계절 관광객으로 붐비는 곳으로 여러 놀이시설과 숙소가 잘 갖추어져 있는 곳이다.

 

모항갯벌체험장건물

 

모항갯벌

 

펜션인 듯?

 

모항해수욕장

 

 모항해수욕장에 도착하여 이 코스도 끝이 났다. 예상하지 못한 아름다운 경치를 즐겼다는 것이 이 코스에서 얻은 즐거움이다.

 

 잠시 쉬다가 다음 코스로 걸음을 옮긴다..

서해랑길 44코스(사포버스정류장 - 줄포만갯벌생태공원 - 호암마을 -곰소염전 - 곰소항회타운)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서해랑길 44코스는 사포버스정류장을 출발하여 조금 길을 걸으면 고창을 지나 부안으로 넘어간다. 해안을 따라 가면 줄포만갯벌생태공원이 나오고 계속 걸어 호암마을을 지나면 유래가 오래된 곰소염전에 도착한다. 여기서 잠시 머물다 걸어가면 곰소항회타운에서 이 코스는 끝이 나는 14km의 코스다.

 

44코스 안내판

 

 44코스 안내펀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으니 대략 오십은 아직 되어 보이지 않은 남자가 배낭을 메고 길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길 건너편에는 아마 부인인 듯한 여인이 차를 몰고 있으며 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같이 걸으며 이야기를 하여 보니 나와 같은 부산 사람이었다. 그러면서 자기 부인의 고향이 이곳이라 자기만 길을 걷고 부인은 차를 타고 가서 목적지에서 기다린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아직 생업에 종사하고 있어 오랜 시간은 걷지 못하고 휴일이 있으면 띄엄띄엄 코스를 걷는다고 하였다. 이길을 걸으면서 길을 걷는 사람을 제법 보는데 나와 같이 1코스부터 순서대로 걷는 사람은 보지를 못하고 대부분이 띄엄띄엄 코스를 몇 개씩 걷고 있었다.

 그 사람과 함께 걷다가 나는 사진도 찍고 해야겠기에 길 잘 걸으라는 인사를 하고 헤어져 내 속도에 맞추어 길을 걸었다.

 

길가에 핀 꽃

 

 

누렇게 익은 가을 들판

 

 들을 돌아 길을 가니 줄포만갯벌생태공원을 가리키는 표지가 나오고 조금 더 가니 해안이 나타난다. 줄포만갯벌생태공원이다.

 

 줄포면 우포리 앞바다는 옛날에는 주요 항구로 이용되었으나 점차 갯벌이 퇴적됨에 따라 1960년대 후반에 줄포항은 폐항되고 줄포면 소재지가 상습적인 바닷물 침수 피해를 입고 있었다. 줄포갯벌생태공원은 침수에 대비하여 제방을 쌓은 것이 쉼터로 자리잡은 것이다. 제방을 쌓은 후 갈대와 띠풀 등이 무성해지고, 담수습지가 형성되면서 자연스레 생태늪지로 발전했다. 공원의 총 면적은 20여만 평으로 각종 들꽃들이 계절에 따라 만발해 지나가는 나그네의 걸음을 멈추게 한다. 생태공원 앞 갯벌은 지난 20101월 람사르 습지로 등록될 만큼 갯벌이 살아 있는 곳으로 많은 조류와 염생 식물, 갯벌동물 등이 한데 어울리며 살아간다. 칠면초 군락도 넓게 펼쳐져 있어 초가을이 되면 빨갛게 물들어 볼거리를 제공하며 좋은 추억을 남겨 주는 곳이기도 하다. 생태공원의 하얀 2층집 건물은 2005년 방영됐던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이 촬영됐던 곳이다.

 

줄포갯벌생태공원 표지

 

줄포갯벌생태공원의 여러 풍경

 

줄포만 탐방로 안내판

 

 줄포갯벌생태공원을 지나 해안과 들판을 번갈아 지나가면 호암마을이 나오고 마을을 지나 더 걸어가면 유명한 곰소염전이 나온다.

 

 부안군 진서면 곰소만에 있는 곰소염전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조선시대부터 천일염을 생산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조선시대에는 줄포만에서 곰소만까지 화염(바다물을 끓여 만든 소금)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생산된 천일염은 서울 노량진과 마포나루를 통해서 도성으로 운송되었다. 지금의 곰소염전은 1942년에 이곳에 제방을 축조하면서 곰소 일대는 간척지가 되었으며 북쪽으로 넓은 염전지대가 형성되었다.

 소금은 보통 3월 말에서 10월까지 생산되는데 5,6월에 소금 생산량이 가장 많고 맛도 좋기 때문에 이 시기가 염부들에게는 수확의 계절이라고 한다. 연간 생산량은 20kg 소금포대로 약 10~15만 가마를 생산하는데, 신안군 일대의 다른 염전에 비해서 생산량이 많은 편은 아니나 '곰소천일염'이라는 브랜드로 판매되고 있다.

 

 곰소염전 일대에는 갯벌이 발달해 있으며 바닷물에 미네랄이 많기 때문에 소금의 맛을 더욱 풍부하다고 한다. 그래서 곰소 앞바다에서 잡힌 싱싱한 생선을 천일염으로 절여서 만든 젓갈이 유명해졌다.

곰소염전에 대해서는 예전에 내가 곰소염전에서 염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많은 지식을 얻었는데 아래의 나의 블로그를 참조하기 바란다.

  https://lhg5412.tistory.com/50, 곰소 염전 - 잘 말려진 천일염

곰소염전의 모습

 

 염전주변에 주차장이 만들어져 있고 예전과는 다르게 완전히 관광지로 변하여 있었다. 우연히 나이가 지긋하게 보이는 주차장의 차량운행을 관리하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며 내가 예전에 왔을 때와 달리 곰소가 엄청 변하였다고 하니 지금 곰소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예전과는 다르게 발전했다고 하였다. 내가 이 염전에서 염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소금도 구입했다고 하니 그 염부가 누군가를 물었지만 그 염부를 나는 지금 알 수가 없다고 하였다. 내가 저 멀리 보이는 함초를 보면서 함초를 재배하는가를 물으니 재배하는 곳은 따른 곳에 있고 염전의 함초는 자생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 교통 관리하는 사람과 여러 이야기를 하고 주위에 있는 카페에서 쉬려고 하니 소금커피가 아주 맛있다고 추천을 하면서 여행을 잘 하라고 인사를 했다.

 

카페의 외부와 내부

 

 내가 예전에 왔을 때는 없었던 카페에 들어가니 많은 사람들이 카페에서 휴식을 취하며 주변의 경치를 즐기고 있었다.

 주차장 관리인이 추천한 소금커피를 한잔시켜서 느긋하게 음미를 하면서 마셨다. 커피를 받아서 살펴보니 커피 잔 주위에 소금을 둘러놓아 커피를 마시면 자연히 소금을 맛보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묘하게 커피와 소금 맛이 조화를 이루어 아주 색다른 맛이 있었다.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권할 만한 커피였다.

 

소금커피

 

곰소항 주변

 

 카페에서 쉬다가 나와 다시 길을 걸으니 곰소의 해변이 나타난다. 해변을 따라 걸으니 철길이 보이고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곰소역이 나온다. 아마도 관광지로 개발하면서 옛 철길을 살려 역을 만든 것이라 여겨졌다.

 

곰소역

 

곰소 표지

 

 곰소항 해안을 따라 길을 가니 젓갈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내가 젓갈을 좋아하여 이 곰소에 젓갈정식을 먹으려 몇 번이나 왔었는데 예전에 보던 그 음식점은 보이지 않고 시장도 예전과 달리 많이 커졌다.

 

 곰소항은 부안군 진서면 진서리에 있는 지방어항으로 하루에 130여척의 어선들이 드나들 정도로 활성화된 어항이다. 곰소항 주변으로 대규모 곰소염전이 있고, 대한민국 최대의 젓갈시장인 곰소 젓갈시장과 수산시장, 건어물시장이 있어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이 항구는 일제강점기 말엽 우리에게서 착취한 농산물과 군수물자를 반출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항구이다.

진서에는 곰소염전이 있어 소금 생산지로도 유명하지만, 근해에서 나는 싱싱한 어패류를 재료로 각종 젓갈을 생산하는 대규모 젓갈 단지가 조성돼 있어 주말이면 젓갈 쇼핑을 겸한 관광객들로 붐비는 곳이다.

 

 곰소젓갈의 맛있는 젓갈정식은 아래의 나의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https://lhg5412.tistory.com/51, 곰소 젓갈정식 : 깨끗한 천일염으로 담근 정갈한 맛

 

풍악소리가 들리는 젓갈축제장

 

젓갈시장

 

 

해안의 조형물

 

 해안을 따라 조금 가니 이 코스가 끝나고 다음 코스의 안내판이 보인다.

 

 이길을 걸으면서 예전의 추억도 되살리고 변화된 모습을 보면서 추억에 잠기기도 하였다.

 

서해랑길 43코스(선운사버스정류장 - 연기제 - 미당서정주생가 - 상포마을회관 - 사포버스정류장)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서해랑길 43코스는 선운사버스정류장을 출발하여 연기제를 지나서 질마재를 넘어 미당 서정주의 생가로 내려 간다. 농촌 길과 해안 길을 따라 걸으면 상포마을회관을 나오고 만정 김소희의 생가가 보인다. 이곳을 지나서 조금 가면 나오는 사포버스정류장에서 이 코스는 끝이 나는 21.1km의 제법 긴 길이다.

 

43코스 안내판

 

 늦게 이곳에 도착하여 선운사버스정류장에서 조금 내려가 숙소를 정하고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이곳은 풍천장어의 고장이라 가격이 만만하지 않지만 이곳까지 와서 먹지 않는다는 것도 여행의 본 목적에 어긋난다. 내가 여행을 다니면서 항상 명심하는 것이 어느 지방에 가든지 그 지방의 특산 음식은 되도록 먹는 것이다. 그래서 정어구이 집에 들어가 혼자서 장어를 맛있게 먹고 숙소로 돌아와서 쉬다가 다음날 아침 일찍 길을 떠났다.

 

선운사 입구의 장어구이 집들

 

 선운사 입구로 내려가면 제법 큰 하천이 보인다. 이 하천을 따라가면서 보는 풍경도 매우 좋은데 코스를 보니 이 길로는 가지 않고, 하천을 가로질러 연기제로 길을 가게 한다

 

  이 하천이 주진천인데 일명 풍천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선운산을 뚫고 북으로 흘러 서해 바다 곰소만으로 유입되는 주진천은 풍천으로 더 이름이 알려져 있다. 원래 풍천은 풍수지리에서 북으로 흐르는 하천을 일컫는 이름이라 하는데 이곳에서 보통명사가 고유명사로 굳어진 모습이다.

 주진천 하류에는 댐이 없어 바닷물이 역류하여 하구에서 4km 들어간 선운사 입구에서도 더 상류로 치고 거슬러 올라와서 훌륭한 기수역을 형성하여 수많은 생물이 자라는 생태계를 형성한다. 특히 주진천에서는 실뱀장어잡이가 어민들에게 높은 소득을 안겨주고 있다. 실뱀장어는 인근 양만장에서 키워 음식점으로 간다. 고창 일대에는 풍천장어라는 이름을 단 음식점들이 어딜 가나 눈에 띈다.

 

주진천(일명 풍천)의 모습

 

연기제

 

 다리를 지나 조금 가니 마을이 나오고 마을에서 개가 한 마리 나와서 길을 인도하듯이 나를 앞서 간다. 저번에도 같은 경험을 하였는데 조금은 이상한 느낌이 든다 조금 가다가 개는 자기 갈 길로 가고 나는 임도를 따라 더 가니 연기제라는 저수지가 나온다. 처음에는 조그마한 저수지로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컸다. 이 연기제를 빙 돌아나가는 길이 이 코스였다.

 

 

 길을 따라 가다가 조그마한 오솔길로 코스가 나 있다. 조금 가니 '질마재'라는 표지가 있다. 미당 서정주의 '질마재 신화'라는 시를 내가 좋아하기에 참으로 반갑다. 이 질마재를 지나 제법 내려가면 미당 서정주의 생가가 나온다. 

 

질마재 표지

 

질마재에서 미당 생가 가는 길 주변의 풍경

 

 서정주(徐廷柱)는 토속적, 불교적, 내용을 주제로 한 시를 많이 쓴 생명파 시인이다. 전라북도 고창군 출신이며 호는 미당(未堂), 궁발(窮髮), 뚝술이다. 탁월한 시적 자질과 왕성한 창작 활동으로 해방 전후에 걸쳐 한국 문학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나, 일제강점기 친일 및 해방후의 여러 처신으로 역사적 평가에 있어 논란의 대상이다.

 

 미당에 대한 글은 나의 블로그 https://lhg5412.tistory.com/54, 서정주 시의 고향 질마재 - 미당생가와 미당문학관을 참조하기를 바란다. 아주 상세하게 많은 사진과 설명이 되어 있다.

 

 

미당 생가의 여러 모습

 

미당의 선운리 길

 

 미당의 생가를 벗어나 가을이 익어가는 들판을 보니 마음이 풍요로워진다. 누가 무엇이라 해도 우리 세대는 한국전쟁이 지나고 헐벗고 굶주린 세대이기 때문에 풍요로운 들판을 보면 마음이 푸근해진다. 들판을 지나고 다시 고창의 해안을 지나서 걸어가면 김소희의 생가가 나온다.

 

가을 들판

 

해안의 풍경

 

 국악계의 사표(師表)이며 국창(國唱)으로 불리는 김소희(金素姬)는 판소리 명창으로 호는 만정(晩汀)이며, 본명은 순옥(順玉)이다. 1917년에 태어나 1929년에 광주의 송만갑 문하로 들어가 판소리 공부를 하였는데, 15세에는 제1회 전국춘향제전명창대회에서 장원을 하였고, 이후 정정렬, 박동실, 정응민 등에게 사사하였다.

김소희는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마친 후,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를 다녔다. 이때 광주에 내려온 이화중선(李花仲仙) 일행의 공연을 보게 된 뒤 소리에 이끌려 소리의 세계에 푹 빠지게 되었다. 송만갑(宋萬甲)의 문하에 입문하여 송만갑에게 심청가와 단가(短歌)6개월 정도 배우면서 애기 명창이란 이름으로 서서히 알려지게 되었다.

 당대의 명창들로부터 판소리를 전수받으면서 김소희는 서편제의 한 흐름과, 그리고 송흥록(宋興祿)-송우룡(宋雨龍)-송만갑으로 이어지는 동편제의 흐름까지 꿰뚫게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그의 판소리의 성음이 유독 미려(美麗)한 것은 이런 가곡 발성의 영향도 있다고 평가된다.

김소희는 안향렬, 신영희, 이명희, 안숙선, 오정해 등의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으며, 미국, 유럽, 일본 등지에서 활동을 하면서 판소리를 세계화시키는 데에 공을 세웠다.

 

 고창군 흥덕면 사포리에 있는 김소희생가(金素姬生家)는 예전에는 주변이 줄포만(곰소만)에 자리 잡은 포구였으나 간척되어 지금은 대부분 논으로 바뀌었지만 하천을 따라 바다로 가는 물길이 남아 있다. 김소희 생가의 마루에 앉아서 보면 왼쪽으로부터 노령산맥이 포진하였고, 오른편으로는 변산반도가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자 형태의 초가지붕을 얹은 민가로, 온돌방 3칸과 부엌 1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황토와 지푸라기를 짓이겨 바람벽을 만들었고, 댓살로 문과 창문을 엮었다.

안방 문 위에 김소희 사진과 가족사진이 걸려 있다. 뒤뜰에 장독대와 우물이 남아 있으며 헛간도 한 채 있다.

 

김소희 생가의 여러 모습

 

 김소희 생가의 툇마루에 앉아 가지고 다니는 음식물로 가볍게 점심을 먹으며 김소희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을 하였다. 내가 예전에 들은 여러 일화들을 생각하며 참 대단한 어른이라는 생각을 하며 그 집의 여러 곳을 둘러보고 다시 길을 떠났다.

 

 

 김소희 생가를 지나 마을길을 따라 조금 가면 사포버스정류장이 나오고 여기서 이 코스는 끝이 났다. 버스정류장 주변에 쉼터도 없어 길가에서 잠시 쉬다가 다음 코스로 발길을 옮긴다.

서해랑길 42코스(심원면사무소 - 화산교 - 천마봉 - 선운사 - 선운사버스정류장)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서해랑길 42코스는 모처럼 해안을 벗어나서 걷는 구간이다. 시작점인 심원면사무소를 출발하여 화산교를 지나면 선운산으로 올라가게 한다. 제법 산을 타고 천마봉을 지나 내려오면 유명한 선운사에 도착한다. 선운사를 지나 절입구에 나오면 이 코스는 끝이 나는 11.6km의 짧은 길이나 산을 넘어오는 길이 만만하지 않다.

 

42코스 안내판

 

 아침도 제대로 먹지 않고 구시포해변에서 출발하여 이곳에 도착하니 아직은 이른 점심시간이다. 하지만 밥을 먹을 수 있는 곳을 발견하면 시간에 구애됨이 없이 밥을 먹어야 한다. 언제 어디서 식당을 발견할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면사무소 주변에 특이하게 'tv에 한 번도 안 나온 집'이라는 음식점이 보여 재미있게 생각하여 가니 여러 음식 중에 도시에서는 잘 보기 어려운 흔하지 않는 민물 새우탕이 있었다. 그래서 시켜서 맛있게 먹었다. 새우탕의 시원한 맛이 일품이었다. 여행을 다니면서 흔하지 않는 음식을 먹는 것도 큰 재미다.

 

심원면사무소

 

심원면 거리

 

화산마을 안내판

 

 화산마을을 지나 산으로 조금 가니 서해랑길 42코스를 검색하다가 우연히 보게 된 카페가 나온다. 이 외진 곳에 손님이 과연 있는지가 의문인 곳인데 카페와 펜션이 있다. 이런 곳에서 세상과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자신만의 삶을 누리면서 사는 것도 멋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카페와 펜션

 

 카페를 지나 조금 올라가니 선운사로 가는 이정표가 나오고 선운산으로 올라가는 산길로 코스가 나 있다.

 

선운산으로 올라가는 길

 

 고창군 심원면, 아산면, 해리면에 걸쳐 있는 높이가 334.7m인 선운산(禪雲山)은 그다지 높지는 않으나 호남의 내금강이라 불릴 만큼 계곡미가 빼어나고 숲이 울창하다. 577(위덕왕 24)에 검단선사(黔丹禪師)가 선운사(禪雲寺)를 창건하면서 불리던 이름으로, 선운이란 말은 신선이 구름 속에서 참선을 한다는 뜻이다. 선운산의 유래에 대해 잘못된 견해로 선운사에서는 미륵부처가 있는 도솔천을 의미해서 도솔산(兜率山)으로 부른다거나 진흥왕이 왕위를 버리고 진흥굴에서 수도하며 왕비 도솔의 이름을 따서 도솔산으로 지었다고 말하나 이는 속설에 불과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보면 선운산의 선은 봉선한다’, ‘참선한다는 뜻의 선()인데, ()으로도 쓰인다고 하였다.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도 선운산으로 나와 있고, <고려사(高麗史)>악지에 백제 유민들이 부르던 선운산가선운산곡이라는 기록도 전해지니 선운산이 원래 이름이었던 것이라 추측된다.

 선운산의 주봉은 선운사 뒤에 있는 도솔봉 또는 수리봉, 제일 상봉은 경수봉, 그밖에 청룡봉, 천마봉, 개이빨봉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러 이정표

 

저 멀리 보이는 서해 바다

 

울창한 조릿대

 

이정표 밑에 서해랑길 표지(화살표)

 

 

 

 아무도 보이지 않는 산길을 혼자서 계속 올라가니 여러 방면으로 가는 갈림길이 보이고 서해랑길의 표시를 따라 가니 어느 새 천마봉에 도착하였다. 선운산 천마봉은 선운사 사찰 서쪽3.6km 지점에 위치한 해발 336m로서 정상에 올라서면 주위의 풍광에 감탄하게 하는 산이다. 서해바다가 한눈에 들어오고 도솔천의 비경이 발아래 내려다보인다. 인접한 낙조대와 함께 가장 많이 오르는 관광명소이다.

 

천마봉 안내판

 

 낙조대에서 도솔암 쪽으로 내려오는 길에는 제법 사람들이 보였다. 아마도 도솔암 쪽에서 올라왔다가 다시 내려가는 짧은 등산로를 택하여 산을 올라온 것이다. 서해랑길은 산을 넘어가는 코스이기에 심원면 쪽에서 올라가서 산을 넘어가는 길에는 사람들이 드물었다. 산을 내려오는데 오십 정도 되어 보이는 영인이 이야기를 걸어와서 같이 걸으며 여러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다가 도솔암 근처에서 방향을 달리 하여 다시 혼자 걸었다.

 

도솔암 내려가는 길에서 보는 풍경

 

 도솔암에서 유명한 것은 마애불이다.  

 보물 제1200호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은 도솔암 주변 암벽에 새겨진 고려 시대의 대형 마애불상이다. 마애불상은 양감을 살리지 못한 저부조로 새겨져 세련된 조형미가 떨어지지만 규모 면에서 국내 마애불 중에서 큰 편이지만, 거친 암질과 평면적인 조각 수법 등으로 토속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마애불상의 가슴 중앙에는 사각형 구멍이 남아 있다. 이곳에 복장 유물을 넣기 위한 용도로 추정되지만, 이곳에 비결(祕訣)을 넣었다는 조선 후기의 전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실제로 이를 믿는 동학의 주도 세력이 무력으로 책을 탈취하다가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한국 조각사에서 제작 시기를 알려주는 기록이 드문데, 이 마애불상은 조성 시기를 알려주는 기록이 전하고 있어 편년 설정에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마애여래좌상

 

도솔암의 여러 모습

 

 

 

 도솔암에서 내려와 도솔천을 따라 걸어 내려오니 선운사가 나타난다. 선운사는 내가 좋아하는 절 중의 하나라 너무나 많이 온 곳이라서 경내로 들어가지 않고 앞으로 그냥 지나친다. 선운사에 대한 여러 소개는 나의 블로그에 있는 다음의 글을 참조하기 바란다.

 

https://lhg5412.tistory.com/213 꽃무릇 - 선운사, 불갑사

https://lhg5412.tistory.com/57 선운사 - 내리는 봄비에 흩날리는 벚꽃

https://lhg5412.tistory.com/47 선운사 동백꽃 - 20124

 

선운사 템플스테이

 

선운사 돌 담장

 

선운사의 여러 모습

 

선운사 입구의 여러 풍경

 

 선운사입구에 나오면 버스정류장 옆에서 42코스는 끝이 난다.

 

 시간이 되면 선운사를 좀더 둘러보았으면 좋았겠지만 오늘은 너무 많이 걸었고 너무나 많이 왔던 선운사이기에 아쉬움을 뒤로 하고 이 코스를 끝낸다.

 

서해랑길 41코스(구시포해변 - 동호해수욕장 - 서해안바람공원 -심원면사무소)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서해랑길 41코스는 구시포해변에서 출발하여 계속 해안을 따라 걸으면 동호해수욕장에 도착한다. 이곳을 지나면 서해안바람공원이 나오고 해안을 따라 걷다가 조금 안쪽으로 들어가면 심원면이 나오고 심원면사무소앞에서 끝이 나는 19.7km의 제법 긴 길이다.

 

41코스 안내판

 

 여행을 하면서 항상 아침 6시에 일어나 가볍게 아침을 먹고 빠른 시간부터 길을 떠나기 시작한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길을 떠나니 구시포해변에 인적이 없다.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 구시포해변을 걸어간다.

 

구시포해수욕장 풍경

 

 구시포해변 끝에서 잠시 바다를 벗어나 안쪽으로 걸어가면서 보니 아침이 밝아오고 있다. 잠시 길을 따라 걸어가니 명사십리라는 이정표가 나온다. 명사십리는 우리나라 곳곳에 있지만 이곳의 명사십리는 서해의 해안으로서는 좀 특이하다.

 

한국해상풍력 발전회사

 

 이 해안에는 바람이 아주 세게 불기 때문에 해상풍력발전이 이루어져서 풍력발전회사가 자리잡고 있다.

 

 고창군 상하면과 해리면으로 이어진 약 8.5km 명사십리 해변은 서해안에서는 보기 드문 직선형 해안으로 파도와 조수에 의해 계절에 따라 퇴적물이 다르게 나타나는 해안이라 한다. 명사십리는 해변에는 넓은 모래사장이 있으면서 갯벌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단순 해수욕만이 가능한 해변이 아닌 갯벌 체험을 겸할 수 있는 있는 곳으로 인기가 높다. 강한 계절풍의 영향으로 해변과 인접한 육지에는 풍성한 해안사구가 형성되어 있다. 이렇게 형성된 해안사구에는 해송 등의 다양한 식생이 분포하고 있어 바람, 해일 등으로부터 해안 마을을 보호해 주는 방풍림 역할을 하고 있다.

명사십리해변 옆의 직선으로 난 길은 어디에서 끝이 나는지를 알 수가 없게 길었다. 이 해변을 걸어가면 여러 마을이 나오고 해수욕장도 여러 곳이 나온다.

 

그 중에 대표적인 마을이 장호어촌체험마을이다.

 

 2011년도부터 시작되었다는 장호어촌체험마을에는 1년에 약 1만 명 정도가 온다고 한다. 그래서 이 마을은 예전에 농사 위주였으나 체험프로그램들을 시작한 뒤로 관광산업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고 한다.

긴 백사장에 물이 빠지면 거대한 갯벌이 생기는데 발이 푹푹 빠지는 갯벌이 아니라서 모래로 이루어진 갯벌이라 단단해서 차도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이고 예전엔 소형 비행기 활주로로도 쓰였다고 한다.

갯벌이 아주 길고 넓으며 조개도 많이 나오고, 발이 빠지는 갯벌이 아니라 어린 아이들도 안전하게 체험을 할 수 있다. 2016년에 삼시세끼고창 편에서 양동이 가득 조개를 캐는 모습이 TV에 나왔었다. 그리고 동네 주민들이 이 해변을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내가 길을 걸으면서 보니 곳곳에 쓰레기통이 보이고 그 쓰레기통을 비우는 마을 사람들도 보았다

 

 

장호어촌체험마을 안내판

 

국가생태문화탐방로 안내판

 

명사십리해변

 

장호어촌체험마을

 

명사십리 해양파크

 

 

 명사십리를 계속 따라 가니 특이하게 해안가의 도로 옆에 텐트를 칠 수 있는 정도의 넓이의 나무판이 즐비하게 깔려 있다. 앞으로는 탁 트인 명사십리 해변을 구경할 수 있께 만들어 놓은 것이 참신하다고 생각되었다. 이 길을 따라가니 동호해수욕장이 나온다.

 

 부안 변산반도와 고창군 사이의 곰소만 남쪽에 자리한 동호해수욕장(冬湖海水浴場)은 노을이 아름다운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고창군 해리면 동호리에 있으며 1967년에 개장하였다.

 명사십리의 일부분으로 백사장 길이는 주변을 합하여 약 4이나 하지만 그 경계는 모호하다. 모래사장은 모래가 가늘고 경사가 완만하여 어린이들도 안심하고 물놀이를 즐길 수 있으며, 해변 가에는 수백 년 된 소나무 숲이 천연 그늘과 바람을 만들어 주어 더위를 씻겨 준다.

 

 

 아침 일찍 길을 떠났기에 잠시 쉬려고 주위를 돌아보니 해수욕장에 바다를 바라보는 명소에 카페가 있다. 이른 시간이지만 들어가서 커피를 주문하고 한가롭게 앉아서 넓게 펼쳐지는 바다를 바라보며 망중한을 즐겼다.

 

카페 전경

 

 

 해수욕장을 벗어나니 마을이 있고 조그마한 포구가 있다.

 

 고창군 해리면 동호리에 있는 포구인 동호항(冬湖港)은 조선 시대에 동백정포(冬柏亭浦)와 영신당이 있었던 곳이다. 동백정포는 동호마을의 북쪽 언덕에 있는 동백정이라는 정자로 인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추측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동백정 주변은 몇 리에 걸쳐 동백나무가 푸르게 우거져 있다고 하였으나 지금은 흔적이 없다.

 

동호항 표시

 

고창컨트리클럽 표지

 

 

 동호항을 지나 해안을 걸어가니 이국적인 모습이 보인다. 빨간 풍차와 여러 모양의 바람개비가 보이며 나무테크도 정비되어 있고 벤치도 있는 공원이다. 이름도 특이한 바람공원이다. 고창 서해안 바람공원은 빨간 풍차와 바람개비 등 많은 조형물과 시원한 바닷바람, 서해안의 해넘이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는 공원이다. 누구나 휴식을 하기에 좋은 곳으로 다양한 편의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바람공원 앞 고창 갯벌(세계자연유산)

 

 고창갯벌은 고창군과 부안군 사이에 있는 곰소만(줄포만)에 위치한 반폐쇄적인 내만형 갯벌로서 새만금 갯벌이 간척으로 사라짐에 따라 그 중요성이 날로 더해지고 있다. 20071231에 우리나라의 연안습지 중에서 일곱 번째로 습지보호구역으로 지정된 고창갯벌은 갯벌의 원시성을 유지하고 있으며, 생물다양성도 풍부하다. 고창갯벌의 주요 생태계는 조개류, 갯지렁이 등 저서동물 68종이 서식하며, 풀게, 동죽 등 수산 자원이 13종에 이른다. 또한, 곰소만(줄포만) 연안에는 갈대, 칠면초, 나문재 등 염생식물 22종이 서식하고 있다. 물새의 경우 여러 종이 출현했으나 그 중에 전 세계 생존 계체 1% 이상의 종으로 흰물떼새 1종이 출현하였다.

 고창갯벌은 부안갯벌과 합하여 고창·부안갯벌로 201021일에 우리나라에서 14번째로 람사르습지에 등록되었다. 고창·부안갯벌은 기존의 고창갯벌 습지보호구역 10.4와 부안 줄포만갯벌 습지보호구역 4.9, 그리고 고창군 주변갯벌 30.2를 합하여 부르는 명칭으로 등록면적은 45.5이다. 이 지역들은 동일한 생태계를 이루고 있는 점이 감안되어 람사르습지에 고창·부안갯벌이라는 명칭으로 등록되었다.

고창·부안갯벌은 펄과 모래 및 갯벌·혼합된 갯벌이 조화롭게 분포되어 다양한 저서동물과 칠면초 · 나문재 등 염생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해안의 반대편의 들판

 

엄청난 크기의 고창갯벌

 

염전

 

고창갯정식물워 표지

 

갯벌에서 조개캐는 모습의 벽화

 

람사르습지로 지정된 고창갯벌의 여러 전시관

 

 

 고창갯벌을 벗어나 조금 안쪽으로 들어가 가을 들판을 걸어가니 심원면사무소가 나오고 여기서 41코스는 끝이 난다. 상상하지 못할 정도의 백사장과 갯벌을 보면서 자연이 얼마나 우리 인간이 상상하는 이상인가를 생각하게 하였다.

 

서해랑길 40코스(법성리버스정류장 - 홍농버스터미널 - 영광승마장입구 - 고리포 - 구시포해변)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서해랑길 40코스는 법성리버스정류장에서 출발하여 농촌 마을길을 걸어 홍농버스터미널을 지나고 계속 가을 농촌의 여유로움을 즐기며 고리포에 도착한다. 여기서 해안을 따라 조금 걸으면 저녁 해넘이의 노을이 아름다운 구시포해변에서 끝이 나는 13.7km의 비교적 짧은 길이다.

 

40코스 안내판

 

 40코스의 시작이 법성포 중심을 가로지르는 길이다. 약 한 달전에 법성포에 왔다가 이곳의 유명한 굴비정식을 먹지 못해 아쉽게 생각하며 돌아갔기 때문에 이번에는 꼭 굴비정식을 먹기로 마음속으로 깊게 명심하였다. 비교적 내가 식탐이 있는 편이라 어느 지방이든지 그 지방의 명품 음식을 꼭 먹어야만 분이 풀리는 성격이다. 그래서 아는 굴비 파는 집에 가서 식당을 추천받아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법성포의 명품 굴비 다리 조형물

 

 굴비는 조기를 소금에 절여 말린 것으로 참조기로 만든 영광굴비가 유명하다. 특히 산란을 위해 3월 중순 영광 법성포 칠산 앞바다를 지나는 참조기를 쓴 굴비를 영광굴비라 하며 가장 유명하다.

 전통적인 영광굴비는 조기의 아가미를 헤치고 조름을 떼어낸 후 깨끗이 씻어 물기를 뺀 다음, 아가미 속에 가득히 소금을 넣고 생선 몸 전체에 소금을 뿌려 항아리에 담아 이틀쯤 절인다. 절인 조기를 꺼내어 보에 싸서 하루쯤 눌러 놓았다가 채반에 널어 빳빳해질 때까지 말린다. (식품과학기술대사전에서) 영광굴비는 섶간이라 하여 1년 넘게 보관해서 간수가 완전히 빠진 천일염으로 조기를 켜켜이 재는 것이 특징이다.

 

 사람들은 굴비를 연상하면 법성포 굴비를 떠올리지만 이제는 법성포 인근의 칠산 바다에서 조기가 더 이상 살지 않고, 대신 추자도 인근에 조기 어장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법성포 굴비는 추자도산 조기를 많이 사용하여 만들어진다. 더구나 중국산 조기로 굴비를 만드는 일이 허다하여 국내산 조기는 많이 귀하다. 그리고 전통적인 방법으로 굴비를 제조하는 집은 거의 없다. 그래도 영광에서 조기가 건조되니 '여전히 영광굴비는 영광굴비다'라는 주장이 있다.

 굴비라는 어원은 고려 인종 때 난을 일으킨 이자겸이 정주(지금의 법성포)로 귀양을 왔다가 해풍에 말린 조기를 먹어보고 그 맛이 뛰어나 임금에게 진상하였다 한다. 그는 말린 조기를 보내며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겠다()'는 의미의 '굴비'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때부터 영광굴비는 수라상에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예전에는 "돈 실로 가세. 돈 실로 가세. 영광 법성으로 돈 실로 가세."라는 뱃노래를 부를 만큼 참조기 어업이 성행했었고 엄청난 양의 조기가 잡혔다고 하지만 이제는 참조기가 그만큼 잡히지 않아 모양이 비슷한 수조기를 이용하여 속여 파는 일도 제법 있다.

 

굴비 가게가 쭉 늘어서 있는 거리

 

 굴비거리를 지나가서 가리켜준 식당을 찾아가니 굴비정식은 1인분은 팔지 않고 2인분이상으로만 주문할 수 있다고 하였다. 왜 그러는지는 익히 알고 있다. 상차림이 2인분이 기본이니 1인분으로는 수지가 맞지 않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각 지방을 돌아다니며 그 지방의 특산음식을 먹으려고 할 때 항상 일어났다. 내가 전국을 걸어다니며 느끼는 현상인데 좀 합리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으면 한다. 요즈음은 홀로 여행하는 사람도 많은데 언제까지 홀로 음식을 먹으려는 사람은 이런 어려움을 겪어야 하는지가 의심스러웠다. 내가 작년에 남파랑길을 걸으며 강진에 갔을 때 음식점에서 혼자라니 상차림비를 좀 더 주면 1인분을 주겠다 하여 굉장히 합리적이라고 글을 썼던 일이 있다. 그래서 주인장에게 상차림비를 더 줄테니 1인분을 주문하자 하니 굉장히 난감해 하면서 안된다고 하였다. 굴비정식은 먹어야 하겠기에 혼자서 2인분을 시켜서 배불리 먹고 남은 굴비를 포장해 달라고 하니 기꺼이 포장을 해 준다. 이런 점은 또 굉장히 친절하였다. 어찌 되었던 맛있게 굴비정식을 먹었으니 만족하였다.

 사실은 이 굴비정식에 나온 굴비구이나 굴비매운탕ㄷ도 맛있었지만 간장새우절임장과 간장꽃게장, 양념꽃게장이 더 맛있었다. 내가 게장과 새우장을 좋아하기 때문이지만 이것을 먹기 위해서라도 다시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밥을 배불리 먹고 주인장과 이야기를 나누니 주인장이 자기는 강화도 출신이라면서 내가 걷는 종착점을 잘 알고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고 커피를 한잔 마시고 충분히 쉬고 나서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굴비정식 상차림

 

내가 점심을 먹은 식당

 

 

 법성포를 벗어나 농촌의 길을 걸어가니 홍농읍이라는 이정표가 나온다.

 1985년 읍으로 승격한 영광군의 서북단 맨 끝에 위치한 홍농읍(弘農邑)은 북동쪽으로 전북 고창군 공음면(孔音面), 남쪽으로 법성면(法聖面), 북쪽으로 고창군 상하면(上下面)에 접하고, 서쪽으로 서해에 면해 있으며 구암천이 남쪽 경계를 지나 서해로 유입된다.. 서부의 금정산(264m) 일대는 200m 내외의 산지를 이루며, 그 밖의 지역은 대체로 100m 이하의 저평한 산지와 평지를 이루고 있다. 계마리에 영광 원자력발전소와 가마미 해수욕장이 있다.

 

홍농읍의 여러 모습

 

 

 홍농읍거리를 걸어가니 영광승마장 입구가 나오고 멀리서 음악소리가 들려온다. 지나가며 보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즐기고 있다. 제22회 홍농읍민의 날이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고 많은 관광버스들이 주변에 보이기도 한다. 가을걷이를 앞두고 읍민들이 모여 친목도 도모하며 하루를 즐기는 것이다.

 

홍농읍민의 날 모습

 

이정표

 

가을의 풍경

 

 홍농읍을 지나 농촌을 조금 지나면 전라남도를 벗어나 전라북도로 들어선다. 기니긴 남도를 드디어 다 걸은 것이다. 구시포가는 길의 이정표도 나오고 유명한 풍천장어집을 가리키는 안내판도 보이니 고창으로 들어선 것은 확실했다.

 

구시포해수욕장 가는 이정표

 

 

 구시포를 가는 길에 조그마하지만 갯벌이 넓게 펼쳐져 있고 조용하게 아주 친근해 보이는 어항이 나타난다. 고리포다.

 전라북도 고창군 상하면 자룡리에 있는 고리포(古里浦)는 조선 시대 봉화를 올렸던 고리포 봉수대가 있었던 포구로 유명하며 봉군들이 머물렀던 마을로 추정된다. 봉수대는 포구 북동쪽 600m 지점의 안산의 정상에 있었다고 한다.

현 고창 지역의 포구 중 유일하게 그 위치가 이동되지 않고 원형이 유지되고 있는 포구로 모래사장에 있는 고리포 포구는 10척의 소형 선박들이 이용하고 있다. 그리고 안쪽의 해변에는 1.3정도에 걸쳐 양어장이 건설되어 있다.

 

고리포의 풍경

 

 고리포에서 고개를 넘어가면 바로 구시포다. 그런데 고개이름이 주씨고개다. 무슨 이야기가 있을 것 같은데 알지를 못한다.

 

 

 조금 가니 송림이 나온다. 바로 40코스의 마지막 지점인 구시포 송림이다. 이 송림을 지나 해안을 따라 조금 가면 종착점이 나온다.

 

구시포 송림

 

구시포해수욕장 전경

 

구시포해변의 고창 그네

 

 고창군 상하면 자룡리에 있는 구시포(九市浦)는 조선 전기부터 확인되는 옛 포구로 한자로 구시포(仇時浦)로도 표기한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3월에 법성포를 출발한 세곡 선단이 첫 번째 정박하는 곳이었으나 조운 제도가 폐지된 1895년 이후에는 마을 어항으로서의 기능만 유지해오고 있다. 구시포의 원래 이름은 새나리불영(새 바닷가의 불같이 일어날 마을)이었으나 현재 이름은 아홉 개의 도시, 혹은 아홉 개의 저자를 먹여 살릴 마을이란 뜻으로 일제강점기 시절 구시포로 바뀌었다.

 조선 시대에는 구시포 마을의 앞이 포구였고 당시에는 구시포 마을 안쪽에 있는 섬포(蟾浦)마을까지 바다였고 조수가 구시포 마을 앞 좁은 물목을 통하여 섬포까지 왕래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구시포 마을 앞을 막는 간척으로 인하여 섬포는 바닷물이 차단되어 1955년 구시포 염전으로 바뀌어 운영되고 있으며, 구시포는 주변 경치가 아름다워 해양수산부에서 선정한 '아름다운 어촌 100'에 뽑혔으며, 울창한 송림과 넓고 단단한 모래사장을 갖춘 구시포 해수욕장과 해수 찜이 잘 알려져 있다.

 

 구시포에는 각종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었다. 음식점과 편의점뿐만 아니라 숙박을 할 수 있는 시설이 많았다. 그러나 숙박시설에 전화를 하니 방이 없다는 답이 많이 돌아왔다. 순간적으로 조금 당황하였으나 어느 펜션에 전화를 거니 방이 있다고 한다. 주인장과 이야기를 해 보니 혼자서 숙박할 수 있는 시설은 드물고 대부분이 단체나 가족 단위로 숙박을 하는 시설이라 하였고 더구나 주말이라 방이 없다고 하였다.

 

 숙소에 배낭을 풀고 시간이 되어 구시포의 해넘이를 구경하러 나갔다. 해넘이 풍경을 보는 것은 여행을 하면서 수시로 보는 풍경이지만 볼 때마다 그 장엄하고 신비로움에 감탄을 한다.

 

구시포의 해넘이

 

 해넘이를 구경하고 편의점에 가서 다음 날 아침에 먹을 빵과 음료수 등을 구입하고 오랜만에 맥주를 한 캔 마시기로 하고 맥주와 주전부리를 구입하였다. 내가 길을 걸으면서 술은 마시지 않기로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거의 지키고 있지만 이런 날은 조금의 알콜은 필요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품을 구입하고 숙소롤 돌아와 한가로이 쉬면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냈다.

서해랑길 39코스(답동버스정류장 - 영광노을전시관 - 영광대교 - 법성리버스정류장)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서해랑길 39코스는 답동버스정류장을 출발하여 도로를 조금 걸으면 봉화령 산길로 들어가게 한다. 제법 긴 산길을 걸어 다시 도로로 내려와서 백수해안도로를 걸으며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면 영광노을전시관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해안을 따라 걸어 영광대교를 지나면 굴비로 유명한 법성포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 코스는 법성포 법성리버스정류장에서 끝이 나는 16.3km의 길이다.

 

39코스 안내판

 

안내판 옆에 있는 38코스 우회도로 안내도

 

백수해안도로 안내도

 

답동마을 펜션단지 안내

 

 아침 일찍 일어나 길을 떠나는 것이 습관이라 길을 떠나니 아직 해가 떠오르지 않았다. 도로를 따라 조금 가니 등산로로 들어가라고 한다. 그런데 등산로라는 것이 사람이 전혀 다니지 않은 것같은 아주 좁은 길로 길도 제대로 보이지 않은 길이다. 도로를 따라가면 위험하다고 산길로 가라고 인도하는 것 같은데 코리아둘레길을 계속 걸으면서 느끼는 것이 너무 도로를 피한다는 것이다. 조금만 조심하면 아무런 위험이 없는데 유별나게  구경할 것도 없는 산길을 걷는 것이 그렇게 편하지는 않다.

 

산길로 가는 입구 표시

 

길도 제대로 없는 산길

 

이정표

 

 

봉수 유적지

 

중간에 있는 전망대에서 보는 영광 앞 바다

 

가자봉 정상 표시

 

구수산 등산로 입구 표시

 

 산을 돌아 나오니 구수산등산로 입구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그러니 답동마을에서는 등산로가 제대로 없고 반대쪽에는 제법 등산로가 갖추어져 있었다.

 

 산을 내려와 조금 걸어 해안으로 가니 사당이 보인다. 모열사(慕烈祠)라는 사당인데 정문이 한자가 상당히 어려운 도해문(蹈海門)이다. 처음에는 이곳이 어떤 곳인지를 몰라서 주변을 둘러보니 역사적 사실이 설명되어 있다. 우리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영광정유재란열부순절지'라는 곳이었다.

 

 이 순절지는 우리가 잘 모르는 곳이니 다소 긴 설명이지만 알리고자 한다.

 

  영광군 백수읍 해안로 847-8(대신리)에 정유재란열부순절지(丁酉再亂烈婦殉節地)가 있다.

 정유재란 때 함평군 월야면에 살던 동래 정씨, 진주 정씨 두 문중의 아홉 부인들이 왜적을 피해 영광군 묵방포까지 피신하였다가, 왜군을 만나서 의롭게 죽을 것을 결심하고 모두가 바다에 몸을 던져 순절한 곳이다. 아홉 부인들이 죽음으로 정절을 지킨 것을 기리기 위하여 숙종 7(1681) 이곳에 순절비를 세웠다.

 순절지에 있는 작은 사당 모열사(慕烈祠)는 바닷물에 몸을 던진 12명의 여인의 정절을 기려 칠산 앞 바다가 바라보이는 해안 언덕에 세운 사당이다. 모열사와 열부 순절소 비각을 묶어 정유재란열부순절지라고 부르는데 이곳은 1976930일 전라남도 기념물 제23호로 지정되었다.

 모열사의 정문이 도해문인데 도해(蹈海)는 바다에 몸을 던져 죽는다는 뜻으로, 고결한 절개와 지조를 지킴을 이르는 말이다. 이 어려운 이름을 누가 찾아서 명칭을 정했는지 참으로 알맞게 잘 지은 이름이었다.

 

  정유재란 열부순절지 비각(丁酉再亂 烈婦殉節地 碑閣)은 팔각의 돌기둥 4개를 세우고 그 위에 팔작지붕형 옥개석을 배치하였다. 바다를 뒤로하여 오른쪽에 8열부의 비각 그 옆에 정박(鄭博)의 처 밀양박씨의 비각(1946 건립)이 같은 규모로 배치되어 있다.

 

 몇 해 전에 후손들이 세운 건립기는 아래와 같다.

 

 당시(1597) 함평군 월야면 월악리에 거주하던 동래정씨와 진주정씨 집안사람들이 정유재란을 당하여 서울로 피난을 가기 위해 영광군 백수읍 대신리 묵방포 앞 바다에서 배를 타고 가던 중 왜적선을 만나 피랍위기에 처하자 일행 중 12부녀가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그 사실이 널리 알려져 광해 9(1617) 동국신삼강행실도에 그 내역과 그림이 수록되었으며, 숙종7(1681)에 열부로 지정되어 정려가 내려졌다.

당시 함께 피난을 가다 왜구에 붙잡혀 일본에서 3년간을 억류되었다 귀환한 정경득은 만사록(萬死錄)을 남겼고, 동생 정희득은 해상록(海上錄)을 남겼다. 조카인 정호인은 정유피난기(丁酉避難記)를 남겼는데 그들의 일기에도 그 날의 동시순절 기록이 그대로 남아 있다.

8열부는 동래 정운길(鄭雲吉)의 처 함양오씨(咸陽吳氏), 장남 정경득(鄭慶得)의 처 순천박씨(順天朴氏), 차남 정희득(鄭希得)의 처 함평이씨, 족질 정호인(鄭好仁)의 처 함평이씨이며, 진주 정함일(鄭咸一)의 처 함평이씨(咸平李氏)와 그의 딸 정씨, 진주 정주일(鄭主一)의 처 함평이씨, 진주 정절(鄭節)의 처 영광김씨(靈光金氏) 등이다.

 

 

도해문(蹈海門)

 

모열사(慕烈祠)

 

순절지 설명판

 

순절비각

 

순절비각 앞 바다

 

 순절지를 지나며 참으로 수난이 많았던 우리의 역사를 잠시 생각해 보았다. 어떤 고난의 역사든지 온갖 어려움을 겪고 피해를 입는 것은 항상 민초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바다를 보다가 옆에 나 있는 나무 테크로 걸음을 옮겼다.

 

 

 해안에서 한가로이 날고 있는 새들을 보며 서해의 바닷가를 걸으니 노을전망대가 나타난다. 얼마나 노을이 좋으면 이런 벽지의 해안에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을까? 하고 생각만 했다. 내가 지나가는 시간은 한낮이어서 노을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노을전망대

 

 

 노을전망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영광노을전시관이 있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가운데 하나인 백수해안도로에 위치하여 서해안을 대표하는 해넘이 관광지인 영광노을전시관은 2009년에 개관하여 운영 중인 곳으로, 천혜의 자연경관이 빼어나 찾아오는 관광객에게 영광 노을의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서해의 아름다운 풍광을 볼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내가 지나는 시간은 한낮이라 노을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예전에 이곳에서 해넘이의 풍광을 즐기며 찍은 사진으로 대신한다.(아래의 나의 블그에 있음)

 https://lhg5412.tistory.com/214 칠산 바다의 저녁 노을 - 백수해안도로(전남 영광)

 

 

영광노을전시관

 

물결이 일고 있는 서해 바다

 

 영광노을전시관에서 백수해안도로를 따라 가지 않고 해안에 나 있는 나무테크 길을 따라 걸어가면 여러 가지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노을종각에 이르러서는 설명에 있는 대로 종을 껴안고 작게 종을 울려 소리의 공명으로 마음의 편화로움을 느끼기도 하였다. 노을종을 지나면 백수해안도로로 올라간다.

 

조미미의 '바다가 육지라면' 노래비

 

노을종

 

 

 도로를 따라 계속 가니 멀리영광대교가 보이기 시작한다. 가까이 다가오는 영광대교를 계속 보면서 해안을 따라 걸으니 물결에 의해 침식당한 해안의 풍경과 갯벌 등을 보면서 가니 영광대교가 나타난다.

 

멀리 보이는 영광대교

 

영광대교

 

 영광대교 가까이 가니 영광의 자랑인 굴비집들이 보이고 굴비 냄새가 코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대교 가까이에 아주 평화로운 해수욕장이 보여 이름을 보니 이름도 아름답고 평화로운 '모래미 해수욕장'이다. 너무나 조용하고 평화롭게 보여 마음도 평화롭게 느껴졌다.

 

모래미해변

 

 영광대교는 영광군 백수읍과 홍농읍을 잇는 다리로 2016년에 완공된 다리다. 주탑과 주탑 간 거리는 320m에 달하는 영광대교의 완공으로 영광 지역발전에 큰 도움을 주고 있으며, 관광 산업에도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 다리다. 바다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갈 때는 나도 모르게 조금은 두려운 느낌을 가진다. 바다를 가로지르는 수 많은 다리를 건넜는데 그 때마다 아래를 보면 아찔해진다.

 

영광대교

 

영광대교에서 보는 바다

 

이정표

 

 

 대교를 건너 다시 해안으로 내려와 걸으면 백제불교최초도래지에 도착한다.

 우리나라 불교 전파는 삼국시대 고구려(소수림왕 2년 전진의 왕 부견)와 신라(눌지 마립간 때 묵호자)의 경우는 불교의 전래 경로와 초전 법륜지가 분명하나, 백제불교의 전래는 불확실하였으나 삼국사기(백제본기 제2 침류앙), 삼국유사(제3권 홍법 제3 나타백제). 해동고승전(권제1 마라나타) 등에 인도의 명승 마라난타 존자가 영광의 법성포로 들어와 불법을 전하고 불갑사를 개창하여 백제 불교가 시작되었다고 전하여 왔다

 그러다가 1998년 동국대학교 교수진들의 연구와 고증을 통해서 현재의 영광 법성포 지역이 백제 불교의 도래지였다는 것이 알려졌고, 법성포 좌우두는 인도승 마라난타가 A.D 384년에 중국 동진을 거쳐 백제에 불교를 전하면서 최초로 발을 디딘 곳으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영광군은 관광명소로 개발하고 있다. 법성포의 법()은 불교를, ()은 성인인 마라난타를 가리키는 명칭이라고 한다.

일주문은 인도 간다라 양식의 관문이며 간다라 불교의 유물이 전시되어있는 간다라유물관과 법당 등이 있다.

 

백제불교최초도래지의 이모 저모

 

이름도 요상한 '숲쟁이동산'

 불교도래지를 관통하여 법성짐성쪽으로 가니'숲쟁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영광 법성진 숲쟁이(靈光 法聖鎭 숲쟁이)는 고려시대 번창한 포구였던 법성포와 마을을 보호하기 위한 법성진성(法聖鎭城) 및 숲을 지칭하는 것으로 2007년에 대한민국의 명승 제22호로 지정되었다.

 숲쟁이는 법성포 마을에서 홍농 방향의 지방도로 고개 마루 부분에 좌우측으로 산 능선을 따라 약 300m에 걸쳐 조성된 숲으로, ‘쟁이란 재, 즉 성()이라는 뜻으로 숲쟁이란 숲으로 된 성을 의미한다고 한다. 법성포구와 마을을 보호하는 방풍림의 역할을 해 왔으며, 예로부터 이 숲에서 단오행사를 개최한 것을 시작으로 용왕제와 단오날 선유놀이 등 지금의 영광 단오제와 각종 민속행사가 이 곳에서 열렸다고 한다.

 

 이곳을 지나 조금 가니 많이 허물어져보이는 조그마한 성이 보인다. 길을 걸으며 해안의 각 고장에서 마을을 보호하기 위한 많은 성을 보았는데 그러한 성 중 하나로 법성진성이다.

 

.영광 법성진성(靈光 法城鎭城) 영광군 법성면 진내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성으로 2002년에 전라남도의 기념물 205호로 지정되었다.

법성진성은 남쪽으로 바다와 접한 구릉의 남사면에 있으며, 평면상 직사각형의 형태를 이루고 있는 조선시대 진성(수군들이 전투를 위해 해안 벽에 쌓는 성곽)터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둘레 1,688, 높이 12척으로 기록되어 있는 법성진성은 석성으로, 동서 너비 약 200m, 잔존 최대 높이 300㎝ 내외, 성벽의 너비 700㎝ 내외의 규모이다. 남벽이 모두 파괴되어 남북의 길이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동서의 길이는 250m이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의 길이는 동벽 75m, 북벽 250m, 서벽 125m, 남벽 10m로 총 길이는 460m인데 밖으로 돌출된 치부분을 포함하면 더 길어진다. 성벽은 외벽을 돌을 쌓아 올리고 그 안쪽으로는 잡석과 흙을 섞어 채워 넣은 형태이다. 법성진성의 성벽은 잔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동벽은 북쪽의 성벽이 잘 남아 있으며, 동벽과 북벽이 만나는 모서리 부분은 광주이동통신 중계탑이 설치되면서 파괴되었다. 북벽은 대부분 흙으로 덮여 있는데, 북벽의 중간에서 동쪽으로 약간 치우친 지점에 반원형을 이루면서 돌출된 치()가 설치되어 있다. 서벽은 남쪽 일부를 제외하고는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서벽의 중간지점에는 문터로 추정되는 부분이 있고 이 문터를 중심으로 북쪽과 남쪽에 각각 치가 설치되어 있다.

 한편 성벽에는 성을 쌓기 위해 동원된 전라도 관내의 군현명과 쌓은 척(), 그리고 감관(監官도색(都色) 등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글에 나타난 내용으로 보아 인원 동원은 물론 성의 축조와 관련한 당시의 제도 등을 파악하는 데 좋은 자료로 판단된다.

 

법성진성 표지

 

법성진성의 여러 모습

 

 법성진성을 내려와 평탄한 길을 걸어가니 법성포 표시가 나온다. 이제 이 코스도 거의 다 온 것이다.

 

 법성포(法聖浦)는 영광군 북부 해안가에 위치한 포구로 국방상교통상 중요한 지역으로 이른바 '영광굴비' 의 본고장이다. 법성포항구는 좁은 만구(灣口)에 뻗은 작은 반도의 남안에 자리하여 북서계절풍을 막을 수 있는 천연의 항구이다. 그래서 고려 성종(成宗) 때 조창(漕倉)을 설치하여 세곡(稅穀)을 받아 저장하였고, 조선시대에도 조창제도는 계속 실시되었다. 조선시대에는 1514년에 법성포에 진()을 설치하고 수군만호(水軍萬戶)를 두었다가, 1708년 첨사(僉使)로 승격시켜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1명 배치하고 관할하도록 하였다. 1514년 진성(鎭城)을 쌓았는데 법성포는 조선 말기까지도 수군통제부를 설치하는 등 국방상 중요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현재의 법성포는 수심이 얕고 간만의 차가 심하며 토사가 쌓여 선박의 출입이 불편하여 항구로서 부적합하여 조창제도의 폐지와 함께 쇠퇴하여 오늘날은 영광굴비의 어항으로 이름이 나 있다.

 

법성포 표지

 

 39코스는 법성버스정류장에서 끝난다. 종점에 도착하여 편의점에 음료수를 사러 갔더니 종업원이 외출 중이라 문을 닫고 있다. 버스정류장의 편의점이 문을 잠시라도 닫고 있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었지만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일도 아니라 의자에 앉아 잠시 쉬고 있으니 주변의 노인들이 말을 걸어오며 물을 마시라고 주어 고맙게 받아 마셨다. 잠시 여러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음 길을 떠났다.

 

서해랑길 38코스(하사6구버스정류장 - 복수분등소공원 - 서해특산시험장입구 - 답동버스정류장)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서해랑길 38코스는 하사6구버스정류장에서 출발하여 계속 해안을 따라 걸으면 복수분등소공원에 도착한다. 여기서 계속 걸으면 유명한 백수해안도로가 나오고 그 길을 따라 간다. 종점 가까이에 가면 도로 공사 중이라 우회노선이 나온다. 가까운 길을 두고 먼 길을 돌아 백수해안도로 중간의 답동버스정류장에서 끝이 나는 15.4km의 길이다.

 

38코스 안내판

 

칠산갯길 300리 안내도

 

갯벌의 칠면초와 바람개비의 조화

 

갯벌에 협곡같이 보이는 위에 피어 있는 칠면초

 

 

 길을 따라 해안과 조금 안의 내륙으로 들어가니 풍력발전의 바람개비와 태양열 발전단지가 아주 넓게 펼쳐져  있다. 이 길을 걸으면서 많이 보이는 것이 태양열발전단지다. 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평지에도 넓은 땅에 집열판을 조성해 놓았다. 평지에 농사를 짓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상식인데 조금은 의아했다.

 

이정표

 

태양열집열판

 

넓게 펼쳐져 있는 천일염전

 

염전 주변의 칠면초

 

 길을 따라 제법 가면 복수분등소공원이 나온다. 지도상 공원이라고 되어 있어 간식거리나 음료수를 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도착하니 편의시설이라고는 화장실밖에 없다. 아마도 주변 마을 사람들에게 휴식처로 만들어 놓은 듯했다. 그래도 화장실이 있어 들어가 수도를 틀어보니 물이 나온다. 이런 면에서는 우리나라의 화장실시설은 전 세계에 자랑할 만하다. 화장실에서 땀으로 젖은 얼굴을 씻고 앉아서 조금 쉬다가 발걸음을 다시 시작했다.

 

복수분등소공원

 

 

 복수분등소공원을 지나 조금 가니 아래 사진에서 보이는 노지장어직판장이 있다. 혹시나 물을 얻을 수 있을까? 하고 가서 보니 식당을 겸하고 있다. 이 외진 곳에 장어집이 있다니 조금은 의아해 하면서 안의 사람들에게 물을 좀 얻을 수 있느냐고 물으니 자기들은 손님이고 주인이 없다고 한다. 그래도 물을 얻고자 하니 정수기를 가리켜 준다. 그래서 시원하게 물을 들이켜 마시고 패트병에 물을 꽉 채울 수 있었다. 너무나 반갑고 고마운 집이었다. 길을 떠난 아침부터 오후도 늦어가는 지금까지 편의점이나 가게라고는 하나도 볼 수 없어 가지고 다니던 비상식량만을 소진하였고 물도 아껴 마시고 했는데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 같았다.

 

노지장어직판장

 

바람개비 중 가장 크게 생각한 것. 다른 바람개비보다 엄청 컸다.

 

노랗게 무들인 들판

 

 해안과 들판을 지나쳐 가니 공사 중이라서 우회하라는 표시가 보인다. 안내판을 보니 38코스의 종착점인 답동마을까지 바로 가면 1.9km인데 우회하는 길은 3.9km이다. 하루 종일을 걸어 조금은 피곤한데 막바지에 느닷없이 2km를 더 걸어야 해서 조금 짜증이 났으나 어쩔 수 없는 길이라 우회하는 길을 걸어갔다.

 

우회안내판

 

우회하는 길에서 보는 풍경

 

 

 마을을 지나 백수해안도로로 나가는 길목에 큰 나무가 서 있었다. 길을 가다가 큰 나무를 보면 꼭 유심히 살펴보는데 아니나 다를까 수령이 500년 정도 되는 느티나무다. 느티나무  사진을 찍고 옆을 보니 모싯잎송편을 파는 가게가 있다. 가게에 들어가니 음료수를 팔아 두 병을 사서 한 병을 그대로 들이키고 다른 음식물을 파는지 물으니 팔지 않다고 해서 아쉬웠다.

 

느티나무

 

 영광에는 예로부터 모싯잎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고 하는데 그 중에서도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 바로 영광 모싯잎송편이다.

 예전부터 해안가에서 나는 모시는 향이 강하여 풍미가 좋고 그 자체로 천연방부성분이 있어 음식을 모싯잎으로 감싸두곤 했다 한다. 그러니 더운 호남지역에서 모싯잎 음식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모시잎송편은 삶은 모시잎과 불린 쌀을 가루로 만들어 익반죽한 다음 여러 가지의 소를 넣고 송편을 빚어 찐 떡이다. 경남에서는 쪄낸 떡에 참기름을 바르고 감잎에 싸기도 한다.

모시잎이 들어간 송편은 쫄깃한 맛과 쉽게 굳지 않는 장점이 있으며 특히 전라도에서 주로 먹는 별미 떡이었다. 전라남도에서는 옛날에는 2월 초하루 중화절식을 노비일(奴婢日, 머슴날)이라 하여 노비들에게 노비송편을 나이 수대로 먹여 머슴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하여 노비송편이라고도 불리었다.

 

모싯잎송편 가게

 

 송편 가게를 나와 백수해안도로를 걸어가면서 잠시 후회를 했다. 하루 종일 먹을거리를 파는 곳이 없어 저녁을 걱정해야하는데 이곳에서 송편을 구입해서 자야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되돌아가기가 귀챦아 그냥 걸을을 옮겨 종점 가까이 가니 모싯잎송편을 파는 가게가 있어 여기서 송편을 구입하였다.

 

백수해안도로

 

숙소로 가는 길에서 보는 풍경

 

 38코스 종착점에 도착하여 아침에 전화로 예약한 숙소를 찾아가니 큰 펜션단지에 있는 숙소에 주인이 없다. 전화를 하니 출타 중인데 문을 열어 놓았으니 들어가서 쉬라고 한다. 예약한 곳으로 가니 넓은 방에 음식을 조리해 먹을 수 있는 펜션이다. 아침에 전화를 하면서 근처에 식당이 있는가를 물으니 없다고 해서 라면 두 봉지만 줄 수 없겠는가 하고 사정을 말했는데 라면도 두 봉지를 가져다 놓았다. 너무 고마웠다.

 

 땀으로 찌들은 몸을 씻고 라면을 끓여 먹고 송편도 먹고 배부르게 쉬고 있으니 주인장이 와서 요금을 치르면서 염치없게 커피 믹스가 있으면 두개만 얻고자 한다 하니 또 가져다 주었다. 너무 고마웠다. 누워서 TV를 보다가 내일을 위해 잠자리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