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鶴)의 오딧세이(Odyssey)

서해랑길 39코스(답동버스정류장 - 영광노을전시관 - 영광대교 - 법성리버스정류장)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서해랑길 39코스는 답동버스정류장을 출발하여 도로를 조금 걸으면 봉화령 산길로 들어가게 한다. 제법 긴 산길을 걸어 다시 도로로 내려와서 백수해안도로를 걸으며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면 영광노을전시관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해안을 따라 걸어 영광대교를 지나면 굴비로 유명한 법성포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 코스는 법성포 법성리버스정류장에서 끝이 나는 16.3km의 길이다.

 

39코스 안내판

 

안내판 옆에 있는 38코스 우회도로 안내도

 

백수해안도로 안내도

 

답동마을 펜션단지 안내

 

 아침 일찍 일어나 길을 떠나는 것이 습관이라 길을 떠나니 아직 해가 떠오르지 않았다. 도로를 따라 조금 가니 등산로로 들어가라고 한다. 그런데 등산로라는 것이 사람이 전혀 다니지 않은 것같은 아주 좁은 길로 길도 제대로 보이지 않은 길이다. 도로를 따라가면 위험하다고 산길로 가라고 인도하는 것 같은데 코리아둘레길을 계속 걸으면서 느끼는 것이 너무 도로를 피한다는 것이다. 조금만 조심하면 아무런 위험이 없는데 유별나게  구경할 것도 없는 산길을 걷는 것이 그렇게 편하지는 않다.

 

산길로 가는 입구 표시

 

길도 제대로 없는 산길

 

이정표

 

 

봉수 유적지

 

중간에 있는 전망대에서 보는 영광 앞 바다

 

가자봉 정상 표시

 

구수산 등산로 입구 표시

 

 산을 돌아 나오니 구수산등산로 입구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그러니 답동마을에서는 등산로가 제대로 없고 반대쪽에는 제법 등산로가 갖추어져 있었다.

 

 산을 내려와 조금 걸어 해안으로 가니 사당이 보인다. 모열사(慕烈祠)라는 사당인데 정문이 한자가 상당히 어려운 도해문(蹈海門)이다. 처음에는 이곳이 어떤 곳인지를 몰라서 주변을 둘러보니 역사적 사실이 설명되어 있다. 우리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영광정유재란열부순절지'라는 곳이었다.

 

 이 순절지는 우리가 잘 모르는 곳이니 다소 긴 설명이지만 알리고자 한다.

 

  영광군 백수읍 해안로 847-8(대신리)에 정유재란열부순절지(丁酉再亂烈婦殉節地)가 있다.

 정유재란 때 함평군 월야면에 살던 동래 정씨, 진주 정씨 두 문중의 아홉 부인들이 왜적을 피해 영광군 묵방포까지 피신하였다가, 왜군을 만나서 의롭게 죽을 것을 결심하고 모두가 바다에 몸을 던져 순절한 곳이다. 아홉 부인들이 죽음으로 정절을 지킨 것을 기리기 위하여 숙종 7(1681) 이곳에 순절비를 세웠다.

 순절지에 있는 작은 사당 모열사(慕烈祠)는 바닷물에 몸을 던진 12명의 여인의 정절을 기려 칠산 앞 바다가 바라보이는 해안 언덕에 세운 사당이다. 모열사와 열부 순절소 비각을 묶어 정유재란열부순절지라고 부르는데 이곳은 1976930일 전라남도 기념물 제23호로 지정되었다.

 모열사의 정문이 도해문인데 도해(蹈海)는 바다에 몸을 던져 죽는다는 뜻으로, 고결한 절개와 지조를 지킴을 이르는 말이다. 이 어려운 이름을 누가 찾아서 명칭을 정했는지 참으로 알맞게 잘 지은 이름이었다.

 

  정유재란 열부순절지 비각(丁酉再亂 烈婦殉節地 碑閣)은 팔각의 돌기둥 4개를 세우고 그 위에 팔작지붕형 옥개석을 배치하였다. 바다를 뒤로하여 오른쪽에 8열부의 비각 그 옆에 정박(鄭博)의 처 밀양박씨의 비각(1946 건립)이 같은 규모로 배치되어 있다.

 

 몇 해 전에 후손들이 세운 건립기는 아래와 같다.

 

 당시(1597) 함평군 월야면 월악리에 거주하던 동래정씨와 진주정씨 집안사람들이 정유재란을 당하여 서울로 피난을 가기 위해 영광군 백수읍 대신리 묵방포 앞 바다에서 배를 타고 가던 중 왜적선을 만나 피랍위기에 처하자 일행 중 12부녀가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그 사실이 널리 알려져 광해 9(1617) 동국신삼강행실도에 그 내역과 그림이 수록되었으며, 숙종7(1681)에 열부로 지정되어 정려가 내려졌다.

당시 함께 피난을 가다 왜구에 붙잡혀 일본에서 3년간을 억류되었다 귀환한 정경득은 만사록(萬死錄)을 남겼고, 동생 정희득은 해상록(海上錄)을 남겼다. 조카인 정호인은 정유피난기(丁酉避難記)를 남겼는데 그들의 일기에도 그 날의 동시순절 기록이 그대로 남아 있다.

8열부는 동래 정운길(鄭雲吉)의 처 함양오씨(咸陽吳氏), 장남 정경득(鄭慶得)의 처 순천박씨(順天朴氏), 차남 정희득(鄭希得)의 처 함평이씨, 족질 정호인(鄭好仁)의 처 함평이씨이며, 진주 정함일(鄭咸一)의 처 함평이씨(咸平李氏)와 그의 딸 정씨, 진주 정주일(鄭主一)의 처 함평이씨, 진주 정절(鄭節)의 처 영광김씨(靈光金氏) 등이다.

 

 

도해문(蹈海門)

 

모열사(慕烈祠)

 

순절지 설명판

 

순절비각

 

순절비각 앞 바다

 

 순절지를 지나며 참으로 수난이 많았던 우리의 역사를 잠시 생각해 보았다. 어떤 고난의 역사든지 온갖 어려움을 겪고 피해를 입는 것은 항상 민초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바다를 보다가 옆에 나 있는 나무 테크로 걸음을 옮겼다.

 

 

 해안에서 한가로이 날고 있는 새들을 보며 서해의 바닷가를 걸으니 노을전망대가 나타난다. 얼마나 노을이 좋으면 이런 벽지의 해안에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을까? 하고 생각만 했다. 내가 지나가는 시간은 한낮이어서 노을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노을전망대

 

 

 노을전망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영광노을전시관이 있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가운데 하나인 백수해안도로에 위치하여 서해안을 대표하는 해넘이 관광지인 영광노을전시관은 2009년에 개관하여 운영 중인 곳으로, 천혜의 자연경관이 빼어나 찾아오는 관광객에게 영광 노을의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서해의 아름다운 풍광을 볼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내가 지나는 시간은 한낮이라 노을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예전에 이곳에서 해넘이의 풍광을 즐기며 찍은 사진으로 대신한다.(아래의 나의 블그에 있음)

 https://lhg5412.tistory.com/214 칠산 바다의 저녁 노을 - 백수해안도로(전남 영광)

 

 

영광노을전시관

 

물결이 일고 있는 서해 바다

 

 영광노을전시관에서 백수해안도로를 따라 가지 않고 해안에 나 있는 나무테크 길을 따라 걸어가면 여러 가지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노을종각에 이르러서는 설명에 있는 대로 종을 껴안고 작게 종을 울려 소리의 공명으로 마음의 편화로움을 느끼기도 하였다. 노을종을 지나면 백수해안도로로 올라간다.

 

조미미의 '바다가 육지라면' 노래비

 

노을종

 

 

 도로를 따라 계속 가니 멀리영광대교가 보이기 시작한다. 가까이 다가오는 영광대교를 계속 보면서 해안을 따라 걸으니 물결에 의해 침식당한 해안의 풍경과 갯벌 등을 보면서 가니 영광대교가 나타난다.

 

멀리 보이는 영광대교

 

영광대교

 

 영광대교 가까이 가니 영광의 자랑인 굴비집들이 보이고 굴비 냄새가 코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대교 가까이에 아주 평화로운 해수욕장이 보여 이름을 보니 이름도 아름답고 평화로운 '모래미 해수욕장'이다. 너무나 조용하고 평화롭게 보여 마음도 평화롭게 느껴졌다.

 

모래미해변

 

 영광대교는 영광군 백수읍과 홍농읍을 잇는 다리로 2016년에 완공된 다리다. 주탑과 주탑 간 거리는 320m에 달하는 영광대교의 완공으로 영광 지역발전에 큰 도움을 주고 있으며, 관광 산업에도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 다리다. 바다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갈 때는 나도 모르게 조금은 두려운 느낌을 가진다. 바다를 가로지르는 수 많은 다리를 건넜는데 그 때마다 아래를 보면 아찔해진다.

 

영광대교

 

영광대교에서 보는 바다

 

이정표

 

 

 대교를 건너 다시 해안으로 내려와 걸으면 백제불교최초도래지에 도착한다.

 우리나라 불교 전파는 삼국시대 고구려(소수림왕 2년 전진의 왕 부견)와 신라(눌지 마립간 때 묵호자)의 경우는 불교의 전래 경로와 초전 법륜지가 분명하나, 백제불교의 전래는 불확실하였으나 삼국사기(백제본기 제2 침류앙), 삼국유사(제3권 홍법 제3 나타백제). 해동고승전(권제1 마라나타) 등에 인도의 명승 마라난타 존자가 영광의 법성포로 들어와 불법을 전하고 불갑사를 개창하여 백제 불교가 시작되었다고 전하여 왔다

 그러다가 1998년 동국대학교 교수진들의 연구와 고증을 통해서 현재의 영광 법성포 지역이 백제 불교의 도래지였다는 것이 알려졌고, 법성포 좌우두는 인도승 마라난타가 A.D 384년에 중국 동진을 거쳐 백제에 불교를 전하면서 최초로 발을 디딘 곳으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영광군은 관광명소로 개발하고 있다. 법성포의 법()은 불교를, ()은 성인인 마라난타를 가리키는 명칭이라고 한다.

일주문은 인도 간다라 양식의 관문이며 간다라 불교의 유물이 전시되어있는 간다라유물관과 법당 등이 있다.

 

백제불교최초도래지의 이모 저모

 

이름도 요상한 '숲쟁이동산'

 불교도래지를 관통하여 법성짐성쪽으로 가니'숲쟁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영광 법성진 숲쟁이(靈光 法聖鎭 숲쟁이)는 고려시대 번창한 포구였던 법성포와 마을을 보호하기 위한 법성진성(法聖鎭城) 및 숲을 지칭하는 것으로 2007년에 대한민국의 명승 제22호로 지정되었다.

 숲쟁이는 법성포 마을에서 홍농 방향의 지방도로 고개 마루 부분에 좌우측으로 산 능선을 따라 약 300m에 걸쳐 조성된 숲으로, ‘쟁이란 재, 즉 성()이라는 뜻으로 숲쟁이란 숲으로 된 성을 의미한다고 한다. 법성포구와 마을을 보호하는 방풍림의 역할을 해 왔으며, 예로부터 이 숲에서 단오행사를 개최한 것을 시작으로 용왕제와 단오날 선유놀이 등 지금의 영광 단오제와 각종 민속행사가 이 곳에서 열렸다고 한다.

 

 이곳을 지나 조금 가니 많이 허물어져보이는 조그마한 성이 보인다. 길을 걸으며 해안의 각 고장에서 마을을 보호하기 위한 많은 성을 보았는데 그러한 성 중 하나로 법성진성이다.

 

.영광 법성진성(靈光 法城鎭城) 영광군 법성면 진내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성으로 2002년에 전라남도의 기념물 205호로 지정되었다.

법성진성은 남쪽으로 바다와 접한 구릉의 남사면에 있으며, 평면상 직사각형의 형태를 이루고 있는 조선시대 진성(수군들이 전투를 위해 해안 벽에 쌓는 성곽)터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둘레 1,688, 높이 12척으로 기록되어 있는 법성진성은 석성으로, 동서 너비 약 200m, 잔존 최대 높이 300㎝ 내외, 성벽의 너비 700㎝ 내외의 규모이다. 남벽이 모두 파괴되어 남북의 길이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동서의 길이는 250m이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의 길이는 동벽 75m, 북벽 250m, 서벽 125m, 남벽 10m로 총 길이는 460m인데 밖으로 돌출된 치부분을 포함하면 더 길어진다. 성벽은 외벽을 돌을 쌓아 올리고 그 안쪽으로는 잡석과 흙을 섞어 채워 넣은 형태이다. 법성진성의 성벽은 잔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동벽은 북쪽의 성벽이 잘 남아 있으며, 동벽과 북벽이 만나는 모서리 부분은 광주이동통신 중계탑이 설치되면서 파괴되었다. 북벽은 대부분 흙으로 덮여 있는데, 북벽의 중간에서 동쪽으로 약간 치우친 지점에 반원형을 이루면서 돌출된 치()가 설치되어 있다. 서벽은 남쪽 일부를 제외하고는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서벽의 중간지점에는 문터로 추정되는 부분이 있고 이 문터를 중심으로 북쪽과 남쪽에 각각 치가 설치되어 있다.

 한편 성벽에는 성을 쌓기 위해 동원된 전라도 관내의 군현명과 쌓은 척(), 그리고 감관(監官도색(都色) 등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글에 나타난 내용으로 보아 인원 동원은 물론 성의 축조와 관련한 당시의 제도 등을 파악하는 데 좋은 자료로 판단된다.

 

법성진성 표지

 

법성진성의 여러 모습

 

 법성진성을 내려와 평탄한 길을 걸어가니 법성포 표시가 나온다. 이제 이 코스도 거의 다 온 것이다.

 

 법성포(法聖浦)는 영광군 북부 해안가에 위치한 포구로 국방상교통상 중요한 지역으로 이른바 '영광굴비' 의 본고장이다. 법성포항구는 좁은 만구(灣口)에 뻗은 작은 반도의 남안에 자리하여 북서계절풍을 막을 수 있는 천연의 항구이다. 그래서 고려 성종(成宗) 때 조창(漕倉)을 설치하여 세곡(稅穀)을 받아 저장하였고, 조선시대에도 조창제도는 계속 실시되었다. 조선시대에는 1514년에 법성포에 진()을 설치하고 수군만호(水軍萬戶)를 두었다가, 1708년 첨사(僉使)로 승격시켜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1명 배치하고 관할하도록 하였다. 1514년 진성(鎭城)을 쌓았는데 법성포는 조선 말기까지도 수군통제부를 설치하는 등 국방상 중요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현재의 법성포는 수심이 얕고 간만의 차가 심하며 토사가 쌓여 선박의 출입이 불편하여 항구로서 부적합하여 조창제도의 폐지와 함께 쇠퇴하여 오늘날은 영광굴비의 어항으로 이름이 나 있다.

 

법성포 표지

 

 39코스는 법성버스정류장에서 끝난다. 종점에 도착하여 편의점에 음료수를 사러 갔더니 종업원이 외출 중이라 문을 닫고 있다. 버스정류장의 편의점이 문을 잠시라도 닫고 있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었지만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일도 아니라 의자에 앉아 잠시 쉬고 있으니 주변의 노인들이 말을 걸어오며 물을 마시라고 주어 고맙게 받아 마셨다. 잠시 여러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음 길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