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鶴)의 오딧세이(Odyssey)

서해랑길 43코스(선운사버스정류장 - 연기제 - 미당서정주생가 - 상포마을회관 - 사포버스정류장)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서해랑길 43코스는 선운사버스정류장을 출발하여 연기제를 지나서 질마재를 넘어 미당 서정주의 생가로 내려 간다. 농촌 길과 해안 길을 따라 걸으면 상포마을회관을 나오고 만정 김소희의 생가가 보인다. 이곳을 지나서 조금 가면 나오는 사포버스정류장에서 이 코스는 끝이 나는 21.1km의 제법 긴 길이다.

 

43코스 안내판

 

 늦게 이곳에 도착하여 선운사버스정류장에서 조금 내려가 숙소를 정하고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이곳은 풍천장어의 고장이라 가격이 만만하지 않지만 이곳까지 와서 먹지 않는다는 것도 여행의 본 목적에 어긋난다. 내가 여행을 다니면서 항상 명심하는 것이 어느 지방에 가든지 그 지방의 특산 음식은 되도록 먹는 것이다. 그래서 정어구이 집에 들어가 혼자서 장어를 맛있게 먹고 숙소로 돌아와서 쉬다가 다음날 아침 일찍 길을 떠났다.

 

선운사 입구의 장어구이 집들

 

 선운사 입구로 내려가면 제법 큰 하천이 보인다. 이 하천을 따라가면서 보는 풍경도 매우 좋은데 코스를 보니 이 길로는 가지 않고, 하천을 가로질러 연기제로 길을 가게 한다

 

  이 하천이 주진천인데 일명 풍천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선운산을 뚫고 북으로 흘러 서해 바다 곰소만으로 유입되는 주진천은 풍천으로 더 이름이 알려져 있다. 원래 풍천은 풍수지리에서 북으로 흐르는 하천을 일컫는 이름이라 하는데 이곳에서 보통명사가 고유명사로 굳어진 모습이다.

 주진천 하류에는 댐이 없어 바닷물이 역류하여 하구에서 4km 들어간 선운사 입구에서도 더 상류로 치고 거슬러 올라와서 훌륭한 기수역을 형성하여 수많은 생물이 자라는 생태계를 형성한다. 특히 주진천에서는 실뱀장어잡이가 어민들에게 높은 소득을 안겨주고 있다. 실뱀장어는 인근 양만장에서 키워 음식점으로 간다. 고창 일대에는 풍천장어라는 이름을 단 음식점들이 어딜 가나 눈에 띈다.

 

주진천(일명 풍천)의 모습

 

연기제

 

 다리를 지나 조금 가니 마을이 나오고 마을에서 개가 한 마리 나와서 길을 인도하듯이 나를 앞서 간다. 저번에도 같은 경험을 하였는데 조금은 이상한 느낌이 든다 조금 가다가 개는 자기 갈 길로 가고 나는 임도를 따라 더 가니 연기제라는 저수지가 나온다. 처음에는 조그마한 저수지로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컸다. 이 연기제를 빙 돌아나가는 길이 이 코스였다.

 

 

 길을 따라 가다가 조그마한 오솔길로 코스가 나 있다. 조금 가니 '질마재'라는 표지가 있다. 미당 서정주의 '질마재 신화'라는 시를 내가 좋아하기에 참으로 반갑다. 이 질마재를 지나 제법 내려가면 미당 서정주의 생가가 나온다. 

 

질마재 표지

 

질마재에서 미당 생가 가는 길 주변의 풍경

 

 서정주(徐廷柱)는 토속적, 불교적, 내용을 주제로 한 시를 많이 쓴 생명파 시인이다. 전라북도 고창군 출신이며 호는 미당(未堂), 궁발(窮髮), 뚝술이다. 탁월한 시적 자질과 왕성한 창작 활동으로 해방 전후에 걸쳐 한국 문학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나, 일제강점기 친일 및 해방후의 여러 처신으로 역사적 평가에 있어 논란의 대상이다.

 

 미당에 대한 글은 나의 블로그 https://lhg5412.tistory.com/54, 서정주 시의 고향 질마재 - 미당생가와 미당문학관을 참조하기를 바란다. 아주 상세하게 많은 사진과 설명이 되어 있다.

 

 

미당 생가의 여러 모습

 

미당의 선운리 길

 

 미당의 생가를 벗어나 가을이 익어가는 들판을 보니 마음이 풍요로워진다. 누가 무엇이라 해도 우리 세대는 한국전쟁이 지나고 헐벗고 굶주린 세대이기 때문에 풍요로운 들판을 보면 마음이 푸근해진다. 들판을 지나고 다시 고창의 해안을 지나서 걸어가면 김소희의 생가가 나온다.

 

가을 들판

 

해안의 풍경

 

 국악계의 사표(師表)이며 국창(國唱)으로 불리는 김소희(金素姬)는 판소리 명창으로 호는 만정(晩汀)이며, 본명은 순옥(順玉)이다. 1917년에 태어나 1929년에 광주의 송만갑 문하로 들어가 판소리 공부를 하였는데, 15세에는 제1회 전국춘향제전명창대회에서 장원을 하였고, 이후 정정렬, 박동실, 정응민 등에게 사사하였다.

김소희는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마친 후,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를 다녔다. 이때 광주에 내려온 이화중선(李花仲仙) 일행의 공연을 보게 된 뒤 소리에 이끌려 소리의 세계에 푹 빠지게 되었다. 송만갑(宋萬甲)의 문하에 입문하여 송만갑에게 심청가와 단가(短歌)6개월 정도 배우면서 애기 명창이란 이름으로 서서히 알려지게 되었다.

 당대의 명창들로부터 판소리를 전수받으면서 김소희는 서편제의 한 흐름과, 그리고 송흥록(宋興祿)-송우룡(宋雨龍)-송만갑으로 이어지는 동편제의 흐름까지 꿰뚫게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그의 판소리의 성음이 유독 미려(美麗)한 것은 이런 가곡 발성의 영향도 있다고 평가된다.

김소희는 안향렬, 신영희, 이명희, 안숙선, 오정해 등의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으며, 미국, 유럽, 일본 등지에서 활동을 하면서 판소리를 세계화시키는 데에 공을 세웠다.

 

 고창군 흥덕면 사포리에 있는 김소희생가(金素姬生家)는 예전에는 주변이 줄포만(곰소만)에 자리 잡은 포구였으나 간척되어 지금은 대부분 논으로 바뀌었지만 하천을 따라 바다로 가는 물길이 남아 있다. 김소희 생가의 마루에 앉아서 보면 왼쪽으로부터 노령산맥이 포진하였고, 오른편으로는 변산반도가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자 형태의 초가지붕을 얹은 민가로, 온돌방 3칸과 부엌 1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황토와 지푸라기를 짓이겨 바람벽을 만들었고, 댓살로 문과 창문을 엮었다.

안방 문 위에 김소희 사진과 가족사진이 걸려 있다. 뒤뜰에 장독대와 우물이 남아 있으며 헛간도 한 채 있다.

 

김소희 생가의 여러 모습

 

 김소희 생가의 툇마루에 앉아 가지고 다니는 음식물로 가볍게 점심을 먹으며 김소희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을 하였다. 내가 예전에 들은 여러 일화들을 생각하며 참 대단한 어른이라는 생각을 하며 그 집의 여러 곳을 둘러보고 다시 길을 떠났다.

 

 

 김소희 생가를 지나 마을길을 따라 조금 가면 사포버스정류장이 나오고 여기서 이 코스는 끝이 났다. 버스정류장 주변에 쉼터도 없어 길가에서 잠시 쉬다가 다음 코스로 발길을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