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鶴)의 오딧세이(Odyssey)

마음대로 가는 발칸 여행 - 불가리아 소피아 1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이제부터 발칸의 여러 나라를 무작정 돌아다닌 이야기를 하겠다. 여정을 짜면서 터키에서 시작하여 한바퀴 빙 돌고 다시 터키로 돌아오는 방법을 택했다. 그러다 보니 소피아는 두번을 가게 되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여행의 순서에 따라 전개하겠다.

 

 이스탄불에서 밤 기차로 소피아로 가기로 생각하고 시르케지역에 가서 국제선 표를 구입하니 밤 9시까지 역으로 오라고 해서 밤에 가니 버스에 태워 다른 역으로 데리고 간다. 시르케지에서 표를 팔고 출발은 이스탄불 교외의 다른 역에서 하고 있다. 소피아행 국제열차는 승객은 그렇게 많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보따리 장사꾼 같은 사람들이 제법 눈에 보이는데, 아마 이 주변 국가에서는 터키가 최고 강대국이라 상품을 사서 장사를 하는 것 같았다. 열차는 침대칸으로 예전의 오리엔트특급은 아니지만 흉내를 내는 정도인 것 같다. 밤 10시 40분에 출발하여 밤 내내 달려 다음날 오전 10시에 소피아역에 도착했다. 터키국경을 지날 때 불가리아 입국심사를 하기 위해 열차에서 내려 약 30분 정도를 지체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지장이 없이 열차는 달리고 나는 잠을 청한다.

 

 열차를 내리면 소피아역 주변애 중앙버스터미널이 있어 다음 행선지인 베오그라드행 버스를 먼저 알아보고 숙소로 정해 놓은 곳으로 갔다. 숙소로 가는 길에 소피아 재래시장이 있어 과일 등을 구입하고 숙소로 가니 예약과는 다르게 되어 있다. 그리고 무언가 기분이 좋지 않아 예약한 숙소를 포기하고 소피아의 라이온 다리옆에 있는 라이온 호텔에 숙소를 정했다.

 

 

소피아의 상징 성 소피아 상

 

 

국제열차의 내부

 

 

 

열차에서 보는 동트는 아침

 

 

소피아중앙역의 꼬마 기차

 

 

 

 

재래시장과 오렌지

 

 이 시장은 라이온호텧 맞은 편에서 조금 가면 있는데 규모가 엄청나다. 야채와 과일을 주로 파는 시장인데 때로는 소피아 주변의 마을에서 수제로 만든 요구르트나 유제품 등을 팔기도 하고 고깃집도 있어 소피아에 머문 몇 일간 요긴하게 이용했다.

 

 

 소피아는 불가리아의 수도로 소피아 분지의 해발 고도 550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 세르디카(Serdica) 또는 사르디카(Sardica)라고 불렀는데, 그리스어로 ‘지혜'를 뜻하는 소피아라는 명칭은 6세기에 로마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가 성 소피아 성당을 건설하면서 이 성당의 이름에서 붙여진 것이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 된 도시의 하나로 고대에는 트라키아인의 식민지였으며, 29년 로마에게 점령된 후 군사 근거지가 되어 교통의 요지로 발전하였다. 14세기 말부터는 투르크의 지배를 받아 발칸 반도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 지점이 되었다. 1877년 러시아에게 점령되었고, 이듬해 불가리아 인에게 넘어가 1879년 수도가 되었다. 이스탄불, 베오그라드 등과 철도와 도로로 연결되는 국제적인 교통로의 중심지이며, 농산물의 집산지이며 여러 공업이 발달하였다. 오래된 도시로 여러 유적들이 있고, 도나우강()으로 흘러드는 이스쿠르강의 두 지류가 시내를 흐르며, 배후에 산을 등지고 있어 경치가 아름답고, 푸른 숲이 우거진 공원이 많아 녹색의 도시로 알려져 있다.

 

 유명한 건축물로는 6세기에 건축된 성()소피아성당, 알렉산드르넵스키 대성당, 회교사원 등이 있고, 로마와 비잔틴, 투르크 등의 지배하에서 건축된 유적들이 있다. 부근의 온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라이온 다리 전경

 

 다음날 아침에 버스터미널에서 베오그라드행 버스를 예약하고 소피아 관광에 나섰다. 소피아는 비교적 작은 도시다. 그래서 걸어다니며 구경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숙소에서 시내로 길을 따라 걸어가니 눈에 아름답고 멋진 건물이 들어왔다. 무슨 궁전과 같은 모양이지만 소피아 공중목욕탕이다.

 

 

 

 

공중목욕탕 전경

 

 

 

목욕탕 외부에 온천수가 나오는 수도시설

 

 줄무늬의 모습이 우아하게 보이는 이 건물은 1986년까지 소피아의 공중목욕탕으로 사용되었다 한다. 1908년에 완공되어 1913년부터 사용된 이건물은 2차 세계대전 때 일부가 손상되었으나 복원하였고, 1986년까지 목욕탕으로 사용되었다가 지금은 도시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지금도 건물안에서 바깥으로 온천수가 흘러나오고 시민들은 이 물을 생수로 이용하기도 한다.

 

 목욕탕 옆에 바냐바시 모스크(Banya Bashi Mosque)가 있다. 이슬람 사원으로 1576년 오스만투르크 지배 당시에 지어진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이슬람 사원 중의 하나이다. 소피아에는 과거 70개에 달하는 모스크가 있었으나, 현재는 바냐바시만이 이슬람 사원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바냐바시라는 이름은 모스크 옆의 공중목욕탕에서 유래되었고, 오스만투르크제국의 최고 건축가인 미마르 시난(Mimar Sinan)이 설계하였다. 이 모스크는 붉은 외벽, 15m의 거대한 돔과 첨탑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철저하게 내부를 비공개로 하고 있다.

 

 

 

 

 

 

 *고대도시 세르디카 유적

 

 소피아의 중심부에 있는 세르디카의 유적지는 공산당 본부 앞 광장의 메트로 공사 때 발견된 고대도시의 유적으로 지금도 계속 발굴중이다. 세르디카(Serdica)는 소피아의 옛 지명이었다. 3세기경 로마인들에 의해 세르디카 지역에 강력한 성벽들이 건립되었으며, 지금 이곳에서 발굴된 유적은 세르디카의 시내를 구성하던 동문에 해당하는 성벽과 2개의 5각형 탑이다. 이것은 지하도를 건너가면서 구경할 수 있으며, 지하도에는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성곽의 모형과 발굴의 기록사진들이 전시돼 있다. 세르디카 고대도시의 많은 유적들이 현대 건물들 아래에 남아있다.

 

 

 

 

 

세르디카 유적지에서 보는 성 소피아 동상

 

 시내 중앙 광장에 자리한 성 소피아 동상은 공산주의 시절에 레닌 동상이 있던 곳에 대신 세워진 것이다. 24m 높이로 한 손에는 월계관을, 한 손에는 지혜의 상징인 부엉이가 앉아 있는 소피아의 수호성인이다.

 

 

 

 

 

 

 

 

 성 페트카 지하교회(St. Petka Samardjiiska Church)는 세르디카 유적 끝부분에, 독립 광장에서 바라보면 지붕만 나와 있는 불가리아 정교회로 페트카성인에게 바쳤다는 지하교회. 오스만투르크 지배 당시인 14세기에 건축되었으며 오스만투르크 지배 당시 투르크인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지하에 지었다고 한다.

 외부는 타일이 벗겨지고 깨어져 볼품이 없으나, 내부의 15, 17, 19세기 프레스코는 예수의 출생, 기적, 고통, 십자가에 못 박힘, 죽음과 부활 등의 다양한 삶의 면모를 매우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고 하나 출입을 금지해 놓았다. 미술역사가들은 이를 중세회화의 매우 귀중한 삽화이며, 오스만투르크시대의 불가리아 미술이 발전했다는 증거라고 말한다. 또 교회에는 19세기 불가리아 혁명가이자 국민적인 영웅인 바실 렙스키가 묻혀 있다고도 한다.

 

 

세르디카에서 보는 바냐바시모스크

 

 세르디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성 네델리야 교회(Sveta Nedelya Cathedral)가 있다. 우아한 네오비잔틴 양식의 옥색 돔이 눈길을 끄는 불가리아정교회의 교회로 소피아 쉐라톤 호텔 앞에 있다. 처음에는 10세기 경에 지어졌다고 하나 수차례 소실되고 파괴되어 재건되었다. 지금의 교회는 1856년에 건립을 시작하여 1863년에 완공되었다. 네오 비잔틴 건축의 대표적인 양식인 돔은 1898년에 증설된 것이다. 내부에는 화려한 벽화로 꾸며진 인테리어가 특징적이다. 1925년 차르 보리스(Boris) 3세가 참석한 장례행사에서 공산주의자들의 폭파로 거의 파괴되었다가 1927년부터 1933년까지 재건하였다. 폭파사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교회 남쪽 입구 가까이에 있는 조그만 명판에 기록되어 있다. 내부에는 1971년부터 1973년 사이에 Nicolay Rostovtsev가 제작된 벽화를 볼 수 있다.

 

 

 

 

 

 

 

네델리야교회의 내부

 

 

 

네델리야교회 설명판

 

 

 

 

 

네델리야교회 외부의 여러 모습

 

 성 게오르기 교회(St. George Rotunda)는 세르디카유적의 하나로 쉐라톤 호텔과 대통령궁이 둘러싸고 있는 소피아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 중의 하나다. 4세기에 로마인에 의해 지어져 로마시대에는 교회로 사용되다가 터키 지배시에는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었으며,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이곳 소피아에 매료되어 그의 로마로 칭하고 도시를 방문할 때마다 장대한 의식을 행하였으며, 이를 위해 훌륭한 건축물들을 건립하였다고 하는데, 그 시대를 대표하는 다양한 건축물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이 바로 성 게오르기 교회다. 이 교회는 정교한 건축물과 4,10,12,14세기에 걸쳐 여러 번 채색된 프레스코화로 유명하다는데, 사진촬영을 전면적으로 금지하였다.

 

 

 

 

 

 

 

 

현대식 건물과 묘한 앙상불을 보이는 성 게오르기교회

 

 

시내에서 보는 풍경 - 멀리 눈덮인 산이 보인다.

 

 

 

 

시내풍경 - 구 공산당 본부

 

 

 

국립고고학박물관 앞 광장 - 박물관은 다음 날 보기로 하고 지났다.

 

 

 

 

 

 

대통령궁의 근위병 교대식

 

 대통령궁이 시내 한복판에 있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과 관광객들이 자유롭게 그 앞을 지나다니며 구경을 한다. 대통령궁 주변에는 많은 관광지가 있어 아무도 통제하지 않는다. 권위지향적인 면을 벗어난 것이 보기에 좋았다. 또 시간을 맞추면 근위병 교대식도 볼 수 있다.

 

 

 

 

시내 공원의 모습

 

 소피아 시내는 그렇게 크지 않고 볼 만한 유적이 거의 한 곳 주변에 모여 있다. 여러 곳을 구경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지만 거리상으로는 멀지 않아 편하다.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알차게 관광을 할 수 있는 곳이 소피아다. 또 소피아는 특이하게 자유로운 투어를 실시하고 있었다. 누구든지 신청만 하면 무료로 가이드가 이끌고 다니면서 안내를 한다. 물론 시간이 정해져 있고 단체로 움직인다. 하지만 제법 알찬 것 같았다.

 가이드의 수고비는 안내가 끝났을 때 알아서 팁을 주면 돈다고 한다. 한번 참여해 보아도 좋을 듯했다.

 

물론 나는 내 마음대로 움직였지만......

황새바위 - 천주교 순교자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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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새바위 - 공주천주교순교유적[公州天主敎殉敎遺蹟]

 

 황새바위는 공주중학교 앞의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원래 황새바위라는 지명은 이곳 바위 위의 소나무에 황새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라고 하지만, 천주교 신자들이 사학죄인의 죄목으로 목에 항쇄(項鎖)’를 두르고 이곳에 끌려나와 처형을 당했다는 사실에서 유래한 명칭이라고도 한다.

 

 황새바위에서 최초로 순교한 천주교인은 신유박해 때 순교한 이존창(1759~1801)으로 180149일 이곳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그 뒤 많은 천주교인들이 이곳에서 참수형을 당했고, 1866년부터 시작된 병인박해 때 공주에서 순교한 사람으로는 기록상 190 여명이 확인되는데, 이들 중에서 다수가 이곳 황새바위에서 순교했을 것이라 짐작한다. 이곳에는 이름이 전해지는 순교자만 248명이며, 이름도 전해지지 않는 많은 천주교인들이 순교하였다.

 

 19146월 간행된 ‘Im Lande der Morgenstille(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는 책자에서 독일의 신부 노르베르트 베버(Norbert Weber)가 '공주의 형장에서 사형수의 무덤을 바라봄'이라는 제목의 삽화를 그려 황새바위에 대한 관심을 처음으로 표현하였다. 국내에서 그 뒤 여러 과정을 거쳐 황새바위 성역화 사업 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본격적인 성지개발에 나섰다. 1985년 기록상 전해오는 순교자 248명의 이름을 내부에 새긴 무덤경당과 순교탑 등을 완공하고, 무덤경당 앞 광장에 12사도를 상징하는 돌기둥을 세우고 고통의 성모자상(聖母子像)을 안치하고 십자가의 길을 조성했으며, 200211월에는 대경당을 완공하였다.

 

 황새바위 천주교순교지는 20081월에 교동본당에서 분리되어 독립 성지가 되었다.

 

 

황새바위 예수 그리스도상

 

 

 

황새바의 후문 표지석

 

처음에 공주 공산성을 향해 가다가 길을 잠깐 잘못 들어 간 곳이 황새바위 후문이었다. 사실 황새바위라는 것이 있는지도 모르고 왔다. 그냥 지나갈 뻔하다가 다시 정문을 찾아 답사를 했다.

 

 

정문 표지석

 

 

성전 전경

 

 입구를 조금 올라가니 조그마하지만 아담하고, 경건하게 보이는 성전이 있다. 일요일이라 혹시 미사를 드리면 나도 참여하려고 들어가니 미사가 끝나가고 있다. 잠시나마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를 한 후 나왔다.

 

 

 

성전 옆에 있는 화단과 그리스도상

 

 성당에 가면 예수 그리스도 상을 많이 본다. 그런데 대부분의 그리스도상은 고난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우리 인간의 죄를 모두 짊어지고 형장에서 못에 박혀 돌아가시는 모습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 그리스도상은 너무나 인자하다.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모습이다.

 

 

 

성지로 올라가는 문

 

 아주 좁은 문이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폭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좁은문의 의미가 생각난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마태오 복음서 7장 13-14절,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우리말성경)

 

 

기도소

 

 

 

 

열 두개의 빗돌

 

 

 

무덤경당의 전경

 

 

 

 

 

 

 

 

무덤경당의 내부

 

 

 

황새바위 순교성지 안내판

 

 

 

 

 

 

황새바위에서 순교한 사람들의 이름을 12개의 빗돌에 모두 새겨 놓았다.

 

 

 

순교자의 모후상

 

 

 

 

 

부활성당의 외부와 내부

 

아주 작은 성소이지만 무엇인가 경건함을 느끼게 하는 곳이다.

 

 

성지에서 보는 공주중학교

 

공주중학교 출신으로 메이저 리그에서 크게 활약한 박찬호의 모습이 간판으로 서 있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전혀 뜻하지 않은 곳을 보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자기가 목적지를 정해 놓고 차로 이동하면 이런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나와 같이 걸어다니면서 주변을 보면서 길을 찾아가면 많은 곳을 볼 수가 있다. 이 황새바위도 마찬가지이다. 이곳에 천주교 성지가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는데 뜻밖에 좋은 답사를 하게 되었다. 여행중에 잠시나마 경건한 마음을 가지게 해 주는 곳이었다.

 

 

 사족을 하나 붙이면 성지를 답사하면서 경건하게 올라가니 좁은 문위의 뜰에서 어디에서 왔는지 한 무리가 성지를 참배하고 점심을 먹고 있었다. 부페로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지나가는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고 나 혼자였는데 남은 음식이 많이 있었지만 식사를 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예수님의 사랑이 아직은 우리 실제 생활에는 실감되지 않은 것같아 씁쓸했다.

 

 그런데 이것도 나의 욕심이 아닌지......

 

 

공주 - 땅속에서 지켜온 천오백 년 시간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공주는 천오백 년의 시간을 건너 우리에게 왔다.

 

 부여를 떠나 공주로 향했다. 공주를 와 본 지도 어느 새 많은 시간이 흘렀고, 참 많이 변했다는 느낌이 든다. 공주에 아는 지인이 있어 함께 저녁을 먹고 공주한옥마을에 숙소를 정했다. 전주의 한옥마을을 본 떠 만든 것 같은 데 가격이 비교적 합리적이고 시설이 깨끗하고 좋았다. 장점을 덧붙이면, 이 한옥마을 주변에 공주의 대부분의 유적지가 자리하고 있어 걸어서 돌아다니기가 편리했다.

 

 공주는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기기 전에 475년부터 538년까지 64년 동안 백제의 수도였다. 북방진출을 꿈꾸던 개로왕이 강성한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전사하고 한성이 함락당해 밀려 내려온 곳이 바로 공주이다. 그러다가 성왕이 좀더 기름지고 국가의 큰 뜻을 펼칠 수 있는 곳을 찾아 부여로 다시 도읍을 옮겨가면서 공주는 역사에서 제 역할을 다했다고 하겠다. 물론 공주는 백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몇 곳 보이지 않는 구석기 유물이 석장리 금강가 언덕에서 발견되어 구석기 시대에도 이 땅에 사람이 살았음을 맨 먼저 알게 된 곳이다.

 

 백제 이후로 잊혀진 고장이었던 공주가 역사의 장소로 크게 떠오른 것은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다. 그 전쟁의 마지막 격전지가 되었고 그 상흔이 검붉은 핏빛으로 이곳에 남아 오늘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공주에서는 공산성이 꼭 올라야 할 곳이다. 금강을 북으로 하고 천연의 요새를 이루어 백제의 왕도로 선택된 곳이기 때문이다. 지금 백제 때의 유적이야 남아 있지 않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역사의 숨결을 느끼기에 이보다 좋은 곳은 없을 듯하다.

 

 공주를 내가 기억 하는 것은 곰나루 못미처 있는 무령왕릉이다. 무령왕릉이 없었다면 공주는 지금처럼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고, 그저 조용한 시골 소도시로서 만족해야 했을 것이다. 1971년에 아무도 손대지 않고 온전하게 발굴된 무령왕릉이 우리에게 백제 역사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를 너무나 많이 제공하고 있다.

 

 

공주 공산성

 

 

 

 

 

한옥마을의 모습

 

 

인조임금 공주 파천 기념비

 

 

고려현종임금 기념비

 

 

 

 

 

한옥마을의 여러 모습

 

 

 

 

충청도포정사

 

 

한옥마을의 전경

 

 한옥마을에서 한 200m 정도 떨어진 곳에 공주박물관이 있다. 내가 예전에 보던 박물관이 아니었다. 새로 지어 옮긴 것이다. 박물관이 옮긴 것도 모르는 시간을 내가 공주에 오지 않은 것이라 생각하니 세월이 많이 흘렀음을 실감한다. 옛날 조그마한 박물관이 지금은 현대식 건물로 제법 크게 자리잡고 있다.

 

 

박물관 입구

 

 

공주박물관 건물

 

 

 

 

박물관 건물입구에 있는 부처님

 

 위의 사진을 보면 부처상 뒤에 바로 광배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부처님과 광배는 거리가 제법 떨어져 있다. 사진을 찍으면 가장 잘 나오는 거리를 두고 배치해 놓았다. 관람객을 위한 서비스라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조그마한 일이지만 관광객을 배려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박물관을 들어서니 바로 보이는 것이 무령왕릉이다. 물론 실체가 아니고 모형이다. 무령왕릉은 백제 무령왕과 왕비가 합장된 능으로 1971년 여름, 송산리 고분 배수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 전혀 도굴당하지 않은 완전한 상태로 발견되어 당시에 언론을 흥분시켰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 때 급하게 서둘러 발굴조사를 진행한 결과(혹자들은 하루에 발굴을 마쳤다고도 한다.) 위대한 발견임에도 불구하고 50년이 가까이 흐른 지금까지도 졸속 발굴이라는 지탄을 받고 있다.

 

 내가 이것을 보려고 공주에 왔는지 모른다.

 

 처음 무령왕릉을 보았을 때가 언제였던가? 아마 발굴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 기억이다. 그 때는 왕릉의 현실이 모두 공개되어 왕릉안으로 들어갔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그 뒤에 한 십년이 지나서는 박물관으로 완전히 만들어져 무령왕릉을 뒤에 두고 공주박물관이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왕릉과는 제법 떨어진 곳에다 박물관을 만들고 왕릉의 모형을 만들어 놓았다. 지금 진짜 왕릉은 보존을 위해 폐쇄되어 다시는 보지 못하겠지만 모형이라도 구조를 그대로 만들어 관람객에게 구경하게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무령왕릉에 대한 구체적이고 학문적인 내용은 모두 인터넷이나 서적 등을 통해 전문가의 의견을 참조하기를 바란다.

 

 

무령왕릉 표지

 

 

 

 

 

 

왕릉의 수호자 석수

 

 

 

 

왕과 왕비가 누웠던 자리 모형

 

 

 

 

왕과 왕비의 금동신발

 

   

 

각종 장신구

 

 

금 귀걸이 - 아주 섬세하고 화려하면서 아름다운 세공에 감탄한다.

 

 

 

 

왕과 왕비의 왕관 장식

 

무령왕릉은 무덤의 주인이 정확하게 밝혀진 고대무덤이라는 것뿐만 아니라, 피장자가 백제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군주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되었다. 무덤 안에서는 모두 4,600여 점에 이르는 다량의 유물이 발굴되었으며, 절대연대가 확인된 유물로서 백제사는 물론 한국 미술사 연구에 있어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

 

 

농경문 청동기

 

 

 

계유명 천불비상의 앞 뒤

 

 

관음보살상

 

 

 

불상좌대 - 뒤에 홀로그램으로 불상의 모형이 비친다.

 

 박물관 건물을 나와 뜰에 가면 엄청난 크기의 석조가 있다. 부여박물관의 석조로 비슷한 용도로 만들어진 것인데 그 당시에 이런 거대한 석조를 만든 이유가 무엇일까? 하고 의문을 가진다.

 

 

 

공주 대통사 석조

 

  공주박물관은 규모가 크지 않고 소장품도 많지 않지만 알차게 전시된 소장품을 감상하는 것은 큰 즐거움이다.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유물을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느끼며, 박물관을 나와 송산리고분군으로 간다. 공주에 왔는데 송산리고분군을 보지 않고 지나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고분군을 보고는 역시 실망만 했다. 전부가 보존을 이유로 폐쇄해 놓았기 때문이다. 한 15년전에 이 송산리고분군에 왔을 때는 전부는 아니지만 내부를 볼 수 있는 고분이 있었는데.....

 

 

송산리고분군(무령왕릉) 입구

 

 

 

 

무령왕릉의 모형

 

 

 

 

입구를 봉쇄해 놓은 송산리 고분

 

 

 

유네스코 세계유산 표지

 

 

송장배미 표지

 

 공주 시내에서 곰나루로 이어지는 길 웅진동에 용못이라고 불리는 못이 하나 있다. 이 용못에 붙어 있는 논이 바로 ‘송장배미’이다.  동학농민전쟁 때 희생된 동학농민군의 시체를 한 곳에 모아 이곳 송장배미에 묻었다고 한다. 그 후 이곳에서 사람의 뼈와 해골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고, 이 논의 주인이었던 故 이상필 씨가 해마다 칠월 칠석에 제사를 지내왔다고 한다. 당시 농민군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송장배미 표지석과 조형물을 함께 설치해 매년 동학혁명을 기억하는 이들의 주요 순례지로 남아 있다.

 

 

 이곳을 지나면서 잠시 길을 잘못들어 시간을 좀 허비하였다. 그리고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이 공산성이다. 공산성도 많이 변하였다. 완전히 시가지로 주변이 관광지로 되었다.

 

 공주 시내 산성동에 있는 공산성은 백제 문주왕 1(475)에 웅진으로 천도하였다가 성왕 16(538)에 부여로 천도할 때까지 564년간의 도읍지인 공주를 수호하기 위하여 축조한 성으로 동서로 약 800m, 남북으로 약 400m 정도의 장방형을 이루고 있는, 총 연장 2,660m로 해발 110m의 능선에 위치하고 있는 자연의 요지이다. 원래는 백제시대의 토성이었던 것을 조선시대 때 석성으로 다시 쌓은 것이다. 조선시대 인조대왕이 이괄의 난을 피해 이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공산성 금서루 전경

 

 

 

금서루가 는 길

 

 

현대에 복원한 급서루

 

 

 

 

공산성 성벽 길

 

 

성벽에서 보는 금강

 

 

성벽 길에서 보는 북문 주변

 

 

공북루

 

 

금서루의 모습

 

 

망이 망소의 난 설명판

 

 

 

 

관광객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옛 성을 경비하던 군사들을 젊은이들이 재현한다.

 

 

 

 

공산성 금서루 일대 전경

 

긴 세월이 흘러 공산성에서 백제의 모습을 찾아보는 것은 어렵다. 그저 여기가 한 때나마 백제가 도읍을 정하고 있었다는 곳이라 생각하고 무심히 흐르는 금강을 보면서 저 강물처럼 흘러간 세월을 회상해 보는 것이다.

 

 

공산성 입구에 있는 무령왕릉 모형문

 

 공산성을 끝으로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짧은 백제 여행을 긑낸다. 혼자서 여행하는 재미를 사람들은 잘 모른다. 나를 아는 친구들도 혼자서 여행을 가는 나를 조금은 이상하게 본다. 하지만 여행의 참 맛은 혼자 가는 것이라고 나는 항상 생각한다. 여럿이 가는 것은 여행이라기보다 놀이에 가깝다. 여럿이 가면 반드시 의견의 불일치가 있다. 그래서 여행은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몇 일이 지나지 않아 싸운다는 말이 있다. 진짜 성향이 완전히 일치하거나, 아니면 한 쪽이 완전히 양보하지 않는다면, 사람 사이란 항상 좋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편안할 때는 좋았다가도 여행을 몇 일 하다가 피곤해지면 짜증이 나는 것이다. 상대를 이해해주지는 않고 자신의 피로함만 내세우며 싸우는 것이다. 그러나 혼자 여행은 그런 걱정이 전혀 없고, 내가 가고자 하는 대로, 내가 보고자 하는 대로 즐기면 되는 것이다.

 

 여하튼 백제를 조금이나마 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새벽의 고장 부여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갑자기 백제가 보고 싶어졌다.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서 부여로 향했다. 언제나 어디를 가서 무엇을 보고 싶으면 집을 떠나는 나를 보고 옛날부터 할머니와 부모님은 역마살이 끼였다고 했다. 하지만 떠나고 싶은 충동이 일면 떠나야만 마음이 편했다. 40년전 옛날대학을 다닐 때는 수업을 하던 도중에도 강의실을 나와 몇 일을 돌아다니다가 학교로 가곤 했는데, 그 때 교수님들이 이해를 잘 해 주셔서 무난하게 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열차를 타고 대전역에 내려 부여행 버스를 타고 시외버스터미널에 내리니 예전에 알던 부여가 아니라 너무 생소하다. 부여도 내가 나이를 먹은 것 처럼 참 많이 변했다.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가 사비성, 곧 부여다. 부여는 새벽의 땅으로 날이 부옇게 밝았다는 말에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한다. 고요한 고장으로 태평성대를 누릴 것 같은 부여는 나당 연합군의 침략으로 그 평화가 완전히 무너졌다. 이때 삼천궁녀가 낙화암에서 몸을 던졌다고 전해져 온다.

 백제의 고도 부여는 역사 속의 영화만 남긴 채 얼마 안 되는 백제 유적과 유물을 국립부여박물관에 두고 오늘도 말없이 흐르는 백마강과 부소산 낙화암 자락에 묵묵히 자리하고 있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공주의 서남쪽이 부여인데, 백마강변이며 백제의 옛 도읍터다. 조룡대, 낙화암, 자온대, 고란사는 모두 백제시대의 고적이며, 강변에 맞닿은 암벽이 기묘하고 경치가 매우 훌륭하다. 또 땅이 기름져서 부유한 자가 많으나, 도읍 터로 논한다면 판국이 좀 작고 좁아서 평양이나 경주보다는 훨씬 못하다라고 기록하였다.

 

 

백제의 자랑 백제금동대향로

 

 

성왕상

 

 

 

유적지 복원과 표지판

 

 

 

백제역사유적지구 설명판

 

 

 

부여현관아와 옛 부여박물관 건물

 

 

유네스코 세계유산 표지

 

 부소산성 앞에서 점심을 먹고 주인과 여러 이야기를 하였다. 주인은 부여도 많이 개발되고 변하였다고 하며 부소산성을 비롯해서 돌아볼 지역을 이야기 한다. 물론 나도 알고 있는 곳이지만 주인의 친절함에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부소산으로 향한다.

 

 부소산은 쓸쓸함 그 자체이다. 영화롭던 왕성은 자취도 없어지고 지금 유적이라고 남아 있는 것은 모두가 현대에 복원한다고 지은 것인데 얼마나 예전의 모습을 보여 주는지가 의문이다. 부소산은 부여의 진산으로 해발 100미터 정도 남짓한 작은 산이다. 백마강은 부소산을 동쪽으로 끼고 돌아 남쪽에 넓은 평야를 이루고 다시 동쪽으로 굽어 흘러 강경을 거쳐 서해 바다로 흘러간다. 북으로 강을 두르고 바로 산으로 막아선 배산임수의 형상이 북쪽에서 내려오는 고구려 군사를 방비하기에 알맞게 되어 있는 점에서 공주의 공산성과 흡사하다. 아마도 그 때 백제는 신라보다는 고구려를 더 경계하였던 모양이다.  이 부소산성은 백제의 초기 도읍지로 추정되는 경기도 하남 위례성터와 함께 백제식 도성방식을 보여준다.

 

 이 부소산에 있는 왕궁과 시가를 방비하는 최후의 보루였던 부소산성이 완성된 것은 성왕이 538년 수도를 사비로 옮기던 무렵으로 보이나, 그보다 앞서 동성왕500년경에 산봉우리에 산성을 쌓았다. 부소산 안에 백제 군대의 곡식 창고라 할 수 있는 군창터가 발굴되었는데, 검게 탄 쌀과 보리 콩 등의 곡식이 발견됐다. 이는 나당연합군이 쳐들어오자 백제군이 군량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불을 질렀던 흔적으로 추정한. 부소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사자루 아래, 백마강을 시원하게 볼 수 있는 6모 지붕의 백화정이 있다.

 

 

부소산 올라가는 입구의 산문

 

 

 

부소산 올라가는 길과 부소산 유적지 이정표

 

 

 

 

 

  

 

삼충사에 모신 백제의 충신 - 좌에서부터 성충, 흥수, 계백의 초상

 

 

 

 

영일루

 

 

 

 

 

군창지 설명판과 유적구조도

 

 

 

 

군창지

 

 

 

 

 

 

 

 

 

부소산성 수혈거주지

 

 

반월루

 

 

 

반월루에서 보는 풍경

 

 

 

 

사자루

 

 

사자루에서 보는 풍경

 

 

백마장강 현판

 

 

 

사자루에서 보는 백마장강의 풍경

 

 

 

백화정

 

 백화정은 부소산 정상 아래 백마강가 절벽에 위치한 육모정이다. 이곳에서 백마강 전경이 한눈에 들어 온다. 이름만으로는 100가지 꽃이지만, 낙화암에서 강물에 몸을 던진 궁녀를 생각하면, 백화는 곧 궁녀를 지칭하는 것이리라. 정자에 올라 넓게 펼쳐진 강 풍경에 시원함을 느끼다가도 금방 그 옛날 부여를 생각해 보면 아득하다. 아름다운 백화가 강물이 되어 흐른 곳이다.  이곳은 백제 역사의 흥망과 삼천궁녀의 한이 서린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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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화암 설명과 주변

 

  예전에는 이 낙화암 바위위에 올라갈 수 있었는데 지금은 안전을 고려하여 목책을 둘러 놓았다. 그저 여기가 낙화암이라는 설명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알 수가 없다. 좀 더 이곳을 관광객에게 자랑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고 생각한다. 낙화암에 전하는 이야기는 너무 과장이다. 삼천궁녀가 몸을 던졌다. 믿을 수 있는 숫자인가? 그 때 인구가 얼마인데 궁녀가 삼천명이 몸을 백마강에 던졌다는 말인가? 그러면 몸을 던지지 않은 궁녀까지 포함하면 왕성의 규모는 상상을 할 수 없을 정도여야 한다. 그저 그러러니 하고 지나가야 한다.

 

 

고란사전경

 

 

 

 

 

고란사보다 더 유명한 고란약수

 

 예전의 멋이 없어졌다. 현대식 정자를 겉에다 지어 약수터를 보호하고 있으나 잘못된 일이다. 바위틈에서 나는 샘물인데 자연 그대로 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고란초가 약수 주위에 자생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멋도 없다. 보존이라는 이름 아래 원래의 모습이 파괴되고 있다.

 

 고란사 뒤편의 약수는 백제 왕들의 어용수(御用水)로 유명하다. 임금이 고란사의 약수를 마실 적에 물위에 고란초 잎을 띄웠다. 고란초에 대해서는 조선 세종 때 편찬된 향방약성대전에 수록되어 있는데, 고사릿과에 속하며, 한방에서는 화류병(花柳病)에 즉효약으로 쓰였다고 한다. 신라의 고승 원효가 백마강 하류에서 강물을 마셔보고 그 물맛으로 상류에 고란초가 있음을 알았다는 황당한 이야기마저 전하는 신비의 여러해살이 풀이다 

 

 

백마강 유람선 고란사 선착장

 

 백마강 유람선을 탈까? 말까? 하고 잠시 고민하였다. 그러다가 그래도 백마강에 왔는데 달밤은 아니지만 유람선은 타야 백마강의 흥취를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해서 타기로 했다. 구드래선착장까지 운행한다.

 

 

백마강 유람선 황포돛배

 

 

 눈이 붉어 눈불개로 불리는 물고기로 관상용으로 그물로 막아 기르고 있다.

 

 

 

 

 

 

 

 

유람선에서 보는 백마강

 

 

구드래 선착장

 

 오늘도 구드래 나루터에는 백제 역사의 아픔만큼이나 애절한 백마강 뱃노래가 시도 때도 없이 흘러나온다. 부소산 낙화암에서 바라보는 백마강은 쓸쓸하기만 하다.

 

 

 

선착장에 정박하고 있는 황포돛배와 운항중인 배

 

 

 구드래선착장에서 부여박물관으로 가려니 거리가 제법 된다. 걸어가기에는 좀 멀고 시간도 아끼기 위해서 택시를 타려고 하니 택시가 없다. 선착장에서 택시를 발견하고 물으니 대기중이라면서 콜을 해서 택시를 불러 준다. 그리고 부여에서는 거리를 운행 중인 택시는 거의 없다고 하며 반드시 콜을 해서 택시를 타라고 한다. 택시를 기다려 타고 부여박물관으로 갔다. 이곳 역시 예전에 보던 곳이 아니다. 부소산성에 있던 구박물관이 더 조형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너무 현대식으로 지은 건물이다. 하지만 건물을 보려고 오지 않았다. 소장하고 있는 소중한 유물이 보고 싶었다.

 

 

국립부여박물관 전경

 

 

 

넓게 자리잡은 박물관 경내

 

 

동남리석탑

 

 

아름다운 동사리석탑

 

 박물관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중앙에 엄청나게 큰 석조가 맞이한다. 엄청나게 큰 돌 내부를 파내어 물 등을 보관하는 용기로 사용되었다 한다. 옛날에 이 돌을 파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을까? 하고 생각한다.

 

 

 

 

부여석조와 설명팜

 

 

 

 

박물관 소장품

 

 

 

인물무늬 기와(능산리 출토)

 

  드디어 백제금동대향로실에 왔다. 어쩌면 이 것을 보기 위해서 부여에 욌는지도 모르겠다. 무어라 전문적으로 설명할 지식이 없으니 설명은 모두 지식검색으로 찾아보시를... 

 그저 눈으로 보고 즐기며가슴으로 느낄 뿐이다.

 

 

 

 

 

여러 방향에서 보는 대향로

 

 

 

 

 

 

 

 

각 부분을 확대한 모습

 

 

 

너무나 유명한 칠지도

 

 

치미

 

 

서산마애삼존불

 

 깜짝 놀랐다. 여기에서 서산마애삼존불을 보다니..... 내가 우리나라의 각지를 돌아다니며 감동을 받은 곳이 그렇게 많지 않는데, 최고의 감동을 받은 곳이 서산마애삼존불이다. 한 20년도 더 된 어느 날, 서산마애삼존불을 찾아갔을 때가 아마 오후 1시경이었다고 생각되는데 햇빛이 삼존불의 얼굴에 비추었는데 그 순간 삼존불의 미소를 나는 평생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온화하고 평화롭게 보이는 미소.... 온 세상을 다 정화시키는 미소..... 말로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저 멍하게 바라만 보았다. 같이 갔던 일행이 무엇을 보는지 물었을 때도 아무런 말도 못했다. 다른 사람은 그 미소를 보지 못했다고 한다. 책에서 이론적으로 설명하던 '백제의 미소'라고 나는 지금도 생각하며 다시 그 감흥을 느끼기 위해 서산마애삼존불을 보러 가려고 항상 생각 중이다. 그런데 여기에 서산마애삼존불이 있다니, 놀라서 다시 보니 모조품이다. 그래도 반갑기가 한량없다.

 

 

 박물관을 나와 정림사지로 향했다. 

정림사지는 부여 읍내 한가운데에 있다. 정림사 터는 1942년 발굴했을 때에 대평팔년정림사대장당초(大平八年定林寺大藏當草)’라고 새겨진 기와조각이 발견돼 비로소 이 절의 이름이 밝혀졌다. 아무런 자취도 제대로 남은 것이 없는 정림사지를 빛나게 하는 것은 바로 절터 가운데 의젓하게 자리한 국보 9호 정림사지 5층석탑이다. 이 석탑은 돌로 세운 탑인데도 나무로 세운 듯이 부드럽고, 실제로 목조탑처럼 기둥과 모서리에 배흘림 기법이 남아 있고, 지붕을 받치고 있는 받침돌은 목조 건축에서 보이는 두공처럼 모서리를 둥글게 다듬어 마무리했다. 특히 지붕선은 처마를 살짝 들어 상승감을 주어 경쾌하게 마감했고, 전체적인 미감이 목조탑을 보는 것같이 부드럽다. 백제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은 부여에서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이 정림사지 5층석탑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직도 탑이 해체되지 않은 원형 그대로의 탑이니, 복장(腹藏)에 무슨 보물이 들어 있는지는 뒷날의 조사에 의해 밝혀질 것이다. 정림사지 5층석탑은 금석학에서도 중요한 유물로, 오층석탑의 기단부에 당나라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그 공을 기록한 대당평제탑(大唐平齊塔)’이라는 글이 낙인처럼 찍혀 오욕을 견디며 긴 세월을 꿋꿋하게 서 있다. 추사도 이 탑의 글자를 배관하고 그 옆에 배관기를 각해 놓았다. 역사의 쓰라린 아픔을 온몸에 새기고 천년의 세월을 버티고 서 있는 모습이 애처롭다.

 

 

 

정림사지 전경

 

 

 

 

 

오층석탑의 사면

 

 

 

 

정림사지터

 

 

유네스코 문화유산 표지

 

 

 황량한 정림사를 뒤로 하고 궁남지로 간다. 궁남지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 연못 정원으로, 삼국사기무왕 35(634) 조의 “3월에 궁 남쪽에 못을 파 20여 리 떨어진 먼 곳에서 물을 끌어들이고, 못 언덕에는 수양버들을 심고 못 가운데는 섬을 만들었는데, 방장선산(方杖仙山)을 모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궁남지는 6월경부터 많은 연꽃이 피면 주변을 거닐며 산책하는 재미가 우리를 즐겁게 해 준다. 하지만 내가 간 5월은 황량하였다. 그래도 인공적인 연못을 한가로이 거닐면서 백제의 숨결을 호흡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궁남지의 여러 풍경

 

 

 쓰라린 역사를 지닌 부여에서 내세우는 부여팔경은 부소산과 낙화암 그리고 그 아래를 흐르는 백마강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진 경치다. 미륵보살상과 탑 하나 덜렁 남은 정림사지에서 바라보는 백제 탑 뒤의 저녁노을과 수북정에서 바라보는 백마강가의 아지랑이, 저녁 무렵 고란사에서 들리는 은은한 풍경 소리, 노을 진 부소산에 이따금 뿌리는 가랑비, 낙화암에서 애처로이 우는 소쩍새 소리, 백마강에 고요히 잠긴 달, 구룡평야에 내려앉은 기러기 떼, 규암나루에 들어오는 외로운 돛단배로 장엄하고 화려한 경치라기보다는 무언가 애수를 자아내는 서글픔이 먼저 우리 가슴에 서며든다. 이 아픔이 서린 백제를 왜 내가 보고 싶었을까?

 

 궁남지를 끝으로 짧지만 부여를 뒤로 두고 공주로 떠난다.

아들과 함께 터키문명 산책 - 이스탄불 6 (톱카프 궁전)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오스만 제국의 정치 문화의 중심지 톱카프

 

 제법 많은 날을 이스탄불에 머물렀는데도 이스탄불의 아시아지역은 전혀 발걸음을 하지 못했다. 그만큼 이스탄불은 넓고, 보아야 할 것이 많다. 이스탄불에서의 마지막을 톱카프궁전으로 정했다. 이 궁전만 보면 역사지구를 비롯해서 탁심지구 등 웬만한것은 그래도 돌아본 것이다.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다.

 

  "고르지 못하고, 비대칭적이고 중심축이 없으며, 기념비적이지 않은 균형." 이 말은 톱카프에 대한 초기 유럽인 방문객의 묘사이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차지한 메흐메트 2세가 현재의 이스탄불 대학교가 있는 자리에 궁전을 짓고 옛 궁전이라는 뜻으로 에스키 사라이(Eski Sarayı)’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그 뒤 몇 년이 지난 후, 보스포루스 해협과 마르마라 해, 골드 혼이 합류하는 지점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새로 지은 궁전이 바로 이슬람 문화의 진수를 보여 주는 톱카프 궁전이다. 톱카프 궁전이 자리한 지역에는 동로마 제국이 세운 건축물이 있었으나, 톱카프 궁전이 들어서면서 모두 사라졌다 한다. 톱카프 궁전은 새로운 궁전이라는 뜻으로 처음에는 예니 사라이(Yeni Sarayı)’라고 불렸으나, 궁전 입구 양쪽에 대포가 배치되면서 이름을 톱카프 궁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은 대포라는 뜻이고 카프는 문이라는 뜻이다. 이 궁전은 1856년 돌마마흐체궁전으로 옮기기 전까지 400년 동안 끊임없이 증축과 개축이 진행되고 네 번의 대화재를 거치면서 현재의 규모는 원래의 규모에 비해 많이 축소되었다. 총 면적은 70만 평이나 되는 톱카프 궁전의 본래 규모는 오늘날의 시르케지 철도역과 귤하네 공원을 포함하면서 마르마라 해 방향의 아래쪽까지 분포했다고 한다. 터키공화국이 수립되고 1924년에 박물관으로 바뀌어 현재는 박물관으로 이용 중이다. 주변 풍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보스포루스 해협이 내려다보이는 높은 평지에 위치하는 톱카프 궁전은 단순한 왕족의 거처가 아니라 술탄과 중신들이 회의를 열어 국가 정치를 의논하던 장소였다. 궁전 내부는 정원 4개와 부속 건물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400여 년 동안 계속된 증·개축으로 오스만 건축 양식의 변화 과정을 순서대로 살펴볼 수 있다.

 

 톱카프 궁전은 비룬(외정)과 엔데룬(내정) 그리고 하렘 세 곳으로 나뉘어 있다.

 

 톱카프 궁전은 세 개의 문과 그에 딸린 네 개의 넓은 정원을 가지고 있다. 1 정원이 가장 넓고 내부로 들어갈수록 점차 규모가 작아진다. 제 1 정원은 궁전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살던 공간이고, 제 2 정원은 왕실의 부엌과 마굿간 등이 있었으며, 제 3 정원은 술탄의 가족이나 고위 인사들이 들어갈 수 있었던 제국의 기관이 있었으며, 제 4 정원은 술탄과 왕자들이 거처하던 개인의 공간이었다. 그래서 이 톱카프궁전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호화로운 건물과 볼거리가 많다.

 

 

톱카프의 모형도

 

 

 

톱카프에 들어가는 외부의 모습

 

 첫 번째 문은 황제의 문 또는 술탄의 문이라 부른다. 문의 바깥쪽에 새겨진 글은 메흐메트 2세가 이 궁전의 건축을 1478년에 완공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황제의 문을 들어서면 제 1 정원이 있다. 1 정원에는 여러 건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하기아 이레네 성당과 화폐 제작소만 남아 있다. 정원 왼쪽에 보이는 이레네 성당은 아야 소피아성당이 건설되기 전 세워졌으나 니카의 난으로 소실되어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재건되었다

 이레네 성당은 6세기경 건립된 전형적인 비잔틴 건축물이다. 오스만 제국이 모스크로 사용하지 않았고, 전리품과 무기 저장소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건축물의 원래 형태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다가 1846년에 오스만 제국 최초의 박물관으로 사용되었다.

 

 

황제의 문

 

 

잔디가 깔려 있는 제 1정원

 

 제1 정원을 지나면 경의의 문이 있다. 술탄 이외에는 모두 말에서 내려 경의를 표한 뒤에 들어간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여기서부터는 일반 백성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경의의 문 양쪽에는 감옥으로 사용했던 석탑이 세워져 있고, 이 문의 오른쪽 벽에는 사형 집행자의 손과 칼을 씻었다는 우물이 있었다. 그리고 문 옆에는 참수된 사람의 머리를 놓아둔 두 개의 대리석이 있었다고 한다. 경의의 문 뒤의 제 2 정원은 대신들이 국사를 논의하던 디완 건물과 거대한 황실 주방인 부엌 궁전이 자리하고 있다. 오른쪽에 굴뚝이 늘어선 건물이 요리사 수백 명이 음식을 준비하던 주방으로 하루에 두 번 궁중음식이 준비되었고, 해가 긴 여름철에는 해지고 두 시간 후쯤 군주와 하렘의 황실 가족들에게 음식이 제공되었다고 한다. 현재 도자기 전시실로 사용되고 있는데, 중국산 자기 12,000점과 일본산 자기 8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중국산 자기는 원 이후 시대의 것으로 청자기와 백자기가 주를 이룬다. 하지만 한국의 것은 보이지 않는다.

 

 

 

경의의 문

 

 

 

톱카프 모형도

 

 

옛날의 주방

 

 

옛 주방의 천정

 

 

제 2 정원

 

 세 번째 지복의 문(행복의 문)은 군주와 군주의 측근만이 통과할 수 있는 문으로, 이 문 뒤에 있는 제 3 정원에서는 군주의 즉위식이 성대하게 열렸던 곳이다. 지복의 문 바로 뒤쪽에는 외국 사절을 접견하는 알현실이 있다. 고관이나 외국 사신들도 이 알현실 이상은 들어갈 수가 없었다고 한다. 

 제 3 정원에 위치한 보물관은 톱카프 궁전 관람의 하이라이트다. 술탄이 사용하던 왕좌, 갑옷과 투구, 무기 등 호화로운 보석으로 장식된 물건들이 가득하다. 그 중에 황금과 에메랄드,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톱카프의 단검이 유명하다. 이곳에는 이슬람의 마호메드가 쓰던 외투와 칼, 턱수염과 치아 등이 있어 이슬람의 성지순례 장소이다. 또한 모세의 지팡이, 다윗의 칼, 세례 요한의 손뼈 등이 보관되어 기독교에도 성스러운 곳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곳은 엄격하게 사진 촬영이 금지된다. 그저 눈으로만 보고 나와야 한다.

 

 

지복의 문

 

 

제 3 정원의 알현실과 도서관

 

 

 

제 3 정원의 풍경

 

 이 제 3 정원에서 제 4 정원으로 가는 길에 건물의 내부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이스탄불에서 유명한 톱카프의 유일한 카페 겸 레스토랑 로칸다 콘얄르(Konyali)가 있다. 이스탄불의 풍경을 가장 아름답게 볼 수 있는 위치에 자리잡고 있는데, 철저하게 돈의 논리가 적용되는 곳이다. 카페를 세 구역으로 구분하여 바깥쪽은 간단히 빙과류나 차 등을 마시는 사람들이 앉아 있고 중간은 간단히 식사를 하는 사람들의 좌석이며, 테라스쪽으로 경치를 가장 즐길 수 있는 곳은 정식 식사를 하는 곳이다. 저번 봄에 왔을 때는 간단한 식사를 했는데 이번에는 아들 녀석이 먹는 것에 의미를 많이 두고 이번 여행의 마지막 점심이라 정식 코스를 먹기로 하고 테라스에 자리를 잡았다. 만만하지 않은 가격이지만 밖으로 보는 풍경은 값을 치를 만하였고, 서비스도 한층 업그레이드되어 만족했다.

 

 

 

 

두 번째 위치의 풍경

 

 

 

레스토랑에서 보는 보스포루스 해협

 

 

 

 

레스토랑 메뉴판

 

 

 

점심 식사

 

 술탄과 그가 선택한 특정 인물들만 제한적으로 출입할 수 있었던 제 4 정원은 가장 작지만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정원 곳곳에는 정자가 있어 골든 혼, 보스포루스 해협, 마르마라 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장소이다. 4 정원에는 오스만 조정 근위대의 지휘관과 관리를 양성하기 위한 궁전 학교가 있었다. ‘엔데룬이라 불리는 궁정 학교는 톱카프 궁전 안에 설립된 관리 양성 교육 기관이었다. 궁전학교를 졸업하면 무사이면서 학자와 신사의 면모를 겸비하게 되었고, 건전한 무슬림인 동시에 나라에 충성하는 헌신적인 신하가 되었다.

 

 

 

제 4 정원에서 보는 마르마라해와 고대 성벽

 

 

 

 

 

 

아름다운 제 4 정원의 바그다드 정자

 

 

 

 

바그다드 정자의 화려한 내부

 

 

 

 

 

화려함의 끝을 보여주는 제 4 정원의 다른 정자들

 

 

이프타리예 정자 - 금각만의 전망을 볼 수 있다.

 

 

제 4 정원에서 보는 갈라타 타워

 

 

 

 

 

 

 

 

제 4 정원 여러 정자의 외부와 내부 - 이렇게 화려하게 꾸며놓은 곳도 드물 것이다.

 

 

제 4 정원 모스크의 입구인 듯????

 

 

 *하렘

 

 중문을 지나 제 2 정원에 자리한 하렘(Harem)은 남성의 출입이 금지된 여성들만의 공간이었다. '금지된'이란 뜻의 하림에서 비롯된 하렘은 술탄과 거세한 환관들만 출입할 수 있었다. 미로처럼 복잡한 내부 통로로 이어진 하렘에는 약 400개 방이 있었다고 한다. 하렘의 모든 창에는 철창이 달려 있는데, 이는 외부의 침입과 여성 노예의 탈출을 막기 위해 설계된 것이다.

 톱카프 궁전의 서쪽에 자리한 하렘은 하나의 독립된 궁전으로 한평생 술탄만을 바라보며 살았던 여인들의 희로애락이 숨어 있는 장소이다.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이곳은 술탄을 제외한 어떤 남자도 들어갈 수 없었다. 그리고 하렘의 주인은 술탄의 어머니인데, 하렘의 수장인 모후는 궁궐의 실제 관리자로서 하렘 여성들과 술탄의 관계를 통제하고, 메카와 메디나에 보낼 종교기금도 관리했다고 한다. 술탄의 여인들이 살고 있는 하렘을 관리하는 일은 환관이 담당했다. 초기에는 코카서스 출신의 백인 환관들이 하렘을 수비했으나 16세기 말에 이르러 나일강 상류 출신의 흑인 환관들이 하렘을 지켰다. 흑인 환관들은 이스탄불로 실려 오는 도중에 거세되었다고 한다. 모후 아래에 왕자를 생산한 왕비들이 있었고 다시 그 아래에 후궁들과 젊은 여성들이 있었으며 여성 노예도 있었다. 세월이 흐르고 현대화되면서 하렘은 1909년에 그 기능을 잃어버리고 지금은 톱카프의 중요한 관광 명소로 남아 있다.

 

 현재 일부만 공개되고 있는데 푸른 타일 장식과 스테인드글라스 벽화들이 매우 섬세하고 화려하며 아름답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어두운 조명이고, 창에는 창살이 달려 있어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하지만 하렘의 아름다움에는 관광객들이 탄성을 내면서 아름다움에 감탄한다.

 

 

하렘 표지

 

 

 

 

하렘 입구

 

 

 

  

 

 

 

 

 

 

 

 

 

 

각양 각색의 타일로 호화롭게 장식된 하렘의 내부

 

 

하렘 외부의 모습

 

 

 

톱카프 출구에 있는 오래된 나무

 

 톱카프를 구경하면서 느낀 것은 오스만 제국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강대하고 엄청난 제국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아무리 술탄이 거주하던 곳이라지만 건물의 규모뿐만이 아니라 그 내부의 치장을 보면 그저 감탄만 할뿐이다. 타일을 하나하나씩 구워서 내부를 장식한 것은 얼마나 많은 인력과 경비가 사용되었는지 짐작도 할 수가 없다. 우리나라의 왕궁을 비교해 보면 그저 말이 나오지 않는다.

 

 

 사족을 한 가지 붙이면 이 사진의 위에 있는 카드는 터키의 박물관 카드이다. 공식적으로 정부가 관리하는 모든 유적지에 통용되는 카드이다. 이 카드는 여러 종류가 있다. 짧게는 5일부터 최장으로는 15일까지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는 카드가 있다. 유적지 방문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꼭 구입하기를 바란다. 15일짜리가 185리라(약 오만원)인데 조금 많이 보면 5-6배는 이용 가치가 있다. 참고로 아야 소피아, 톱카프, 하렘 정도만 해도 100리라가 넘는다. 꼭 유적지에서 박물관 카드를 구입해서 경비를 절약하기를 .......

 

 아래 카드는 이스탄불에서만 쓰이는 교통카드다. 우리나라의 교통카드라고 생각하면 된다. 카드에 돈을 먼저 넣고 지하철이나 트램 등을 타면 현금 가격의 반 값이다. 이스탄불에서는 지하철이나 트램을 많이 이용하게 되니 꼭 구입하시기를...... 카드 값이 10리라였는데 반화하면 돌려 준다. 하지만 기념으로 가져오는 것도 좋다. 반환하면 반 값밖에 주지 않는다.

 

 이 두개의 카드만 잘 이용해도 여행의 경비가 상당히 절약되니 터키를 가시는 사람은 꼭 기억해 두시기를..

 

 톱카프를 끝으로 아들과 그리스와 터키를 돌면서 고대 문명을 즐긴 여행이 끝이 났다. 한 달이 넘는 시간을 아들과 함께 다니며 같이 느끼고, 생각하고 여러 이야기를 하면서 즐겼다.

 이 글을 끝내면서 다시 아들에게 감사한다. 3년 전에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둘이서 한달 넘게 다녔고, 또 유럽의 문명산책을 한달 넘게 했다. 다 큰 아들과 이렇게 오래 여행을 같이 하는 아버지는 아마 나 하나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들아 고맙다.

 

 

 다음부터는 이스탄불에서 출발하여 발칸을 한달 반 정도 돌아다닌 여행기를 계속하겠습니다.

아들과 함께 터키문명 산책 - 이스탄불 5 (고고학박물관과 주변)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고대문명의 흔적을 간직한 이스탄불고고학박물관

 

 

 터키 이스탄불 역사지구 귤하네 공원에서 톱카프궁전 쪽으로 조금 가면 나타나는 고고학박물관은, 외부 모양은 많은 서구의 박물관에 비해 초라해 보이지만, 1891년 오토만 제국 시기에 세워진 세계 5대 고고학박물관에 속하는 세계적인 박물관으로 고고학 자료들이 100만 점 이상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원을 둘러싸고 고고학 박물관(The Archaeological Museum), 고대 동양 박물관(the Ancient Orient Museum) 그리고 타일 키오스크 박물관(Tiled Kiosk Museum) 3개의 박물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헬레니즘 시대부터 그리스·로마 시대까지의 조각과 석상을 주로 소장하고 있으며, 그 중에 기원전 305년경에 만들어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석관은 세계적으로 중요한 유물로 알려져 있다. 석관은 현재 레바논의 시든에서 1887년에 발견되어 이곳으로 가져와 이곳의 대표적 전시물이 되었다. 하지만 이것도 행운이 따라야 구경할 수 있다. 내가 박물관에 가서 아무리 찾아도 석관이 보이지 않아 관리인에게 물어보니 당분간 전시가 중단되었다고 하여 보지 못하고 아쉽지만 이것도 운이다는 생각을 하고 나왔다. 터키의 유적들을 프랑스와 영국이 발굴하고 조사한 것이 많기 때문에 터키 유적의 대부분은 프랑스와 영국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나, 1881년 이후에 발굴된 유물은 이곳에 대부분 소장되어 있다. 또 트로이 유물이 가장 많이 전시되어 있는 곳은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이다. 물론 하인리히 슐리만이 빼돌린 값비싼 유물에 비교할 수는 없지만 트로이 유적지의 아쉬움을 달랠 수는 있다

   

 

고고학박물관 전경

 

 

고고학박물관에서 톱카프궁전으로 가는 길

 

 

 

 

박물관 바깥 길가에 나뒹굴고 있는 유물들

 

 

박물관 정문

 

 박물관을 들어가면 먼저 왼쪽에 마주하는 건물이 고대 동양 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은 1883년 오스만 함디 베이에 의해 건축되었고, 1935년에 박물관으로 개관되었다가 복원과정을 거쳐 1974년 재개관된, 고대 동양 박물관에는 세계문명의 시작이 된, 소아시아와 메소포타미아, 고대 이집트, 아랍 반도 등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7만 5000여 개의 쐐기문자판도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이 건물의 계단 양쪽 아래에는 기원전 약 18세기경의 히타이트의 유물인 사자상이 우리를 반겨 준다.  이곳에는 그리스 이전에 터키를 지배했던 여러 왕조들의 유물과 주변 동양의 고대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많은 전시물을 모두 소개할 수는 없고 그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유물들만 소개한다. 유물은 각자의 선호도에 따라 호불호가 있을 수 있으니, 이곳에서 보여 드리는 것은 순전히 내가 좋아하여 본 부분이다.

 

 

카데시조약문 판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있는 이집트와 히타이트의 조약문으로  세계 최초의 평화조약으로 알려져 있다. 기원전 2000여년에 그 당시 최고의 제국이었던 히타이트 제국과 이집트 제국의 카데시전쟁 결과 맺은 조약으로 아주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다한다. 하지만 쐐기문자로 쓰여 있고,그  돌은 여러개로 깨져 있었다.
 히타이트본 조약문과 이집트본 조약문이 있는데, 주된 내용은 비슷하지만 내용이 다소 다르다. 이 것은 1906년 터키 보가즈쾨이에서 발굴된 히타이트본 조약문이다. 

 이 조약이 가지는 의미가 매우 컸기 때문에 뉴욕의 유엔 건물 들어가는 입구에 이 조약의 모형이 있다고 한다. 그러기에 평화를 추구하는 자라면 마땅히 알아야 하고 실천할 내용으로 그 문구를 살펴봐야 할 것이다. 

 

 내가 가진 사진에는 또렷하지 못해 이 사진은 위키백과에서 빌려 왔다.


 

 

쐐기문자로 비문이 쓰여 있는 입상

 

 

아시리아의 왕 살마네세르 3세 입상

 

 아시리아는 메소포타미아 북부 지역에서 티그리스강 상류를 중심으로 번성한 고대 국가로서, 그 명칭은 중심 도시였던 아수르(Assur) 시에서 유래했다. 바빌로니아와 같이 수메르문명의 계승국가다. 이 입상에 나타난 인물의 모양을 통해 오늘날의 그 지역 사람을 보는 듯하다.

 

 

중앙 부조가 신 아시리아의 왕 아슈르나시르팔 2세

 

 

 

여러 부조들

 

 

 

이슈타르문을 장식하고 있는 시루슈(용)와 오룩스(황소)

 

 고대 바빌로니아의 신화에 등장하는 시루슈는 신들의 지배자인 마르두크의 상징이며, 오룩스는 기후의 신 라만의 상징이다.

 마르두크(Marduk)는 고대 신으로 위대한 도시 바빌론의 수호신이다. 함무라비왕 시대부터 바빌로니아의 여러 신 가운데 주신(主神)의 역할을 하였고, 나중에 수메르의 신 벨과 합쳐져 '벨 마르두크'로 숭배되었다. 전설에는 에아와 엔릴의 후계자로 악한 용 티아마트를 죽이고, 티아마트의 시체를 이용하여 혼돈으로부터 세계를 창조하였다고 전해지며 상징 동물은 용이다. 전통적으로 바빌로니아의 왕은 마르두크의 현신으로 마르두크 신앙의 수호자로 여겨졌다. 글쓰기와 지혜의 신인 나부(Nabu)는 이 마르두크의 아들이다. 구약성경 예레미아(50:2)에 벨과 함께 잠깐 언급된다.

 

 

 

 

바빌론 이슈타르 문의 장식(용과 오로스 그리고 사자 : 기원전 6세기)

 

 사자는이슈타르 여신의 상징 동물로, 바빌론의 이슈타르문에서 마르두크 신전까지 이어지는 폭 16m, 길이 300m의 행진로 양쪽에 총 120마리의 사자가 부조되어 있었다고 한다. 채색 유약 벽돌을 한장씩 구워서 만들었는데 약 3,000년이 지난 지금도 색깔이 또렷하게 전해진다. 이 사자의 행진로 벽 장식은 독일 베를린의 페르가몬 박물관에 복원 전시되어 있다 한다.

 

 

고대 동양박물관을 나오면 고고학정원이라는 곳을 본다. 터키는 땅만 파면 고대 유물이 나온다고 한다. 그래서 유물을 따로 보관하지 않고 뜰에 아무렇게나 두었는데 오늘날은 하나의 정원으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믿거나 말거나...... 한가로이 이 정원을 거닐면서 벤치에 앉아 유물을 감상하는 재미도 있다. 이 정원에 있는 석조 유물들이 더 우리에게 친근함을 준다.

 

 

 

 

메두사 상

 

 

 

 

정원에 널려 있는 유물들

 

 잠시 정원에서 여러 유물을 보고 간 곳이, 화가 오스만 함디 베이(Osman Hamdi Bey)에 의해 1881년에 건축되었고, 1908년 오늘날의 박물관으로 완성된 고고학 박물관이다. 이곳은 2개 층에서 전시하고 있는데, 지하층에 있는 알렉산더 석관등 유명한 석관들을 비롯해 로마시대의 사포의 두상(The Head of Sappho), 헬레니즘시대의 마르시아스 상(The Statue of Marsyas) 등 고대부터 로마시대까지의 조각상들이 전시되어 있다. 하지만 내가 간 날은 수리한다고 지하층을 개방하지 않아서 아쉬움을 가지고 나머지만 보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여행하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여행도 운이 많이 작용한다. 카파도키아에서는 운이 좋아 발룬을 탈 수 있은 것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출처를 잘 모르겠다.. 하여튼 빌려 왔다.

 

 

알렉산더의 석관 부조(부분) 출처 : 미술대사전

 

 

청동 뱀 머리

 

이 청동 벰 머리는 바로 그리스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 있는 청동 기둥의 하나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다. 술탄 아흐멧 광잔에서도 청동 기둥을 이야기하면서 뱀의 머리가 이스탄불고고학박물관에 있다고 하였는데 진작 나는 사진을 찍지 못하여 다른 곳에서 빌려 왔다.

 

 

지혜와 전쟁의 여신 아테네(기원 전 5세기)

 

 

알렉산더 대왕(기원전 2세기)

 

 

헤르메스와 아포르디테의 아들로

여성성과 남성성을 한 몸에 가졌다는 헤르마프로디토스 상(기원전 3세기)

 

 

여류 시인 사포의 두상(기원전 6세기)

 

 

달과 처녀의 신 아르테미스 여신(기원 전 4세기)

 

 

누구의 상인지 모르겠다.

 

 

이 박물관안에서 사원의 복원을 보여 주는데 무슨 사원인지 설명이.........

 

 

 

아키트레이브(Architrave)에 켄타우로스와 스핑크스가 부조되어 있다.

 

 

 

 

사원을 꾸미는 장식

 

 

 

 

 

옛 무덤의 모습

 

 

 

사랑과 미의 여신 아포르디테(기원전 2-3세기)

 

 

고고학박물관 외부 모습

 

 

 고고학박물관을 나와 타일 키오스키박물관으로 간다. 타일 키오스크박물관은 1472년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술탄 마흐메드2(Mehmed II)에 의해 건축되었고, 이스탄불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준다. 1875년과 1891년에는 황제박물관으로 사용되었고, 1953년에 터키이슬람 예술박물관으로 대중에게 개관되었으며 이후 현재의 이스탄불고고학 박물관으로 통합되었다. 타일 키오스크 박물관에는 11세기부터 20세기까지 셀주크와 오토만 시대의 아름다운 기와, 타일 장식, 도자기 등 예술품 2000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타일 박물관의 아름다운 외양

 

 

 

 

 

 

 

공작새와 꽃들로 장식된 분수대

 

 

 

이 두장은 좀 흐릿하지만 이런 것이 있다는 것을 보여 드린다.

 

 

 

 

 

1432년에 제작된 미흐랍

 

 

타일 벽 장식 - 세밀하게 표현된 꽃과 기하학적 문양

 

이 타일 키오스크박물관은 역사적인 유물을 보면서 지난간 인류의 역사를 회상하는 곳이 아니라, 그저 아름답게 장식된 장식품을 보면 된다. 고고학 유물만 보다가 눈이 호사를 한다. 아니 눈 뿐만 아니라 머리도 가슴도 호사를 한다. 꼭 둘러서 시간의 여유를 가지고 보시기를.....

 

 귀국해서 이 글을 쓰면서 다시 이스탄불고고학박물관 관람을 생각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스탄불고고학박물관을 다시 가야겠다. 무엇인가 제대로 보지 못한 기분이 너무 많이 들어서 사실은 이 글에서 고고학박물관을 소개할까? 말까? 하고 고민을 많이 하였다. 나는 여행지에서 박물관은 꼼꼼하게 보는 편인데 이스탄불고고학박물관을 볼 때는 무엇에 홀렸는지 박물관의 유물을 제대로 보지 못한 느낌이 많이 들고 사진도 제대로 찍지 못한 느낌이라 후회가 너무 크다. 그리고 소개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 같아 미안한 생각도 많다. 그래도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을 소개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후회스럽지만 소개한다.

 

 언젠가 다시 이스탄불에 가서 고고학박물관을 세밀하게 보고 다시 소개할 날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 이스탄불의 여러 곳들

  

 

귤하네공원

 

 * 이스탄불대학교주변 야경

 

 숙소가 이스탄불대학교 바로 옆에 있어 아침 저녁으로 나가면 학생들을 많이 본다. 특히 저녁에는 식당에 저녁을 먹으러 오는 학생들이 많았다. 우리나 그들이나 젊은 학생들은 똑 같다.

 

 

 

 

 

 

 

 

 

 

* 이스탄불대학교

 

 

 

누군가 한국의 유학생인지, 관광객인지 한글로 글을 써 놓았다.

 

 

 

 * 시내풍경

 

 

 

트램이 다니는 선로

 

 

 

거리의 건물

 

 

 

 

제법 유명한 케밥집

 

 

곳곳에 있는 터키식 딜라이트를 파는 과자집

 

 

보스포루스해협 선착장 부근

 

 

오렌지 주스를 파는 가게

 

 

트램 : 멀리 아야소피아가 보인다.

 

 

길거리에서 파는 그림

 

 

갈라타다리에서 갈라타 타워쪽으로 가는 길가의 악기상점

 

 이스탄불을 돌아 다니면 곳곳에 보이는 것이 고대의 유적지다. 특히 역사지구 주변에는 고대와 현대가 같이 공존하고 있다. 물론 고대 유적지를 중심으로 관광객들이 모여들기에 현대에도 시장이 발달하고, 관광객들을 위한 편의시설이 발달하면서 시가지가 발전한 것이다.

 

 하지만 복잡한 시가지를 걸어다니며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다. 우리나 그들이나 모두 사람사는 모습은 비슷하다. 일상생활은 어디나 비슷한 것이다.

 

 이제 이 여행도 끝나가고 있다. 긴 여정이었지만 아들이 나를 잘 데리고 다니면서 많은 곳을 구경시켜 주었다. 항상 아들녀석의 마음가짐에 갘사한다.

 

 

아들과 함께 터키문명 산책 - 이스탄불 4 (아야소피아 박물관)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이 겹쳐진 고대 건축의 걸작 아야소피아 박물관

 

 ‘성스러운 지혜를 뜻하는 이름을 가진 아야소피아(그리스어 : 하기아소피아 : Hagia Sophia Museum)1453년 메흐메드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점거하기 직전까지 그리스 정교회의 총본산으로 바티칸의 성베드로 대성당이 지어지기 전까지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성당이었다.

 오늘날 비잔틴미술의 최고 걸작이라는 찬사를 받는 아야소피아 성당이 처음 건립된 것은 360년 콘스탄티누스 2세에 의해서였다. 이후 화재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으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인 532년부터 5년에 걸친 개축 공사로 현재의 대성당이 완성되었다. 황제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라는 당시의 기독교적 우주관을 한 눈에 볼 수 있게 네모난 건물위에 둥근 돔 모양의 지붕을 얹도록 했다. 그리고 교회가 하나임을 표현하기 위해 내부에는 기둥이 없도록 하였다. 당시 건축기술로는 말도 안되는 조건이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대성당은 완성되었다.

 이 건물의 구조에 대해서는 나는 자세히 설명할 재주가 없다. 백과 사전 등을 참조하시기를..... 

 

 그 아름다움이 극에 달하여, 재건축을 명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537년의 헌당식 날 솔로몬이여, 내가 그대에게 승리했도다!”를 외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성당은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과 레바논 바르베크의 아폴론 신전에서 운반해 온 기둥, 세계 곳곳에서 가져온 석재들을 이용해 건설되었다고 한다.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드 2세는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하자마자 곧장 이 전설적인 대성당으로 향하여 그 자리에서 아야소피아를 모스크로 사용하겠다고 선언했다. 오스만 정복자들은 성당 건물 주위에 이슬람식 첨탑(미나레)을 세웠고, 내부의 모자이크화는 회벽과 코란의 문자들로 덮었.

 헌당 당시, 성당을 빛내고 있었을 6세기의 모자이크는 89세기의 성상 파괴운동 때에 없어지고, 그 후에 제작된 모자이크도 15세기 이후, 이슬람교의 점거 하에 거의 없어졌으나, 최근의 조사에 의하여 앞방과 2층 복도의 벽면에서, 석회 속에 그려져 있던 913세기의 모자이크의 일부가 발견되어, 그 고도의 기술과 뛰어난 표현이 주목을 끌고 있다. 건물내에는 비잔틴의 세련된 장식 조각들이 적지 않게 남아 있다.

 

 1923년 터키공화국이 수립되었을 때 유럽 각국은 아야소피아의 반환과 종교적 복원을 강력하게 요구했지만, 터키 정부는 이곳에서 기독교든 이슬람이든 종교적 행위를 금지하고 박물관으로 운영하기로 결정하여 1935년에 박물관으로 공개되었다. 현재 이곳에는 성당으로서의 흔적과 모스크로서의 흔적이 사이좋게 같이 공존하고 있다. 현재 정식 명칭은 아야소피아 박물관이다.

세계 각지에서 종교적 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현대에 이 아야소피아는 오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종교적인 분쟁을 초월하고 살아남은 역사적 유적이다. 당시 이슬람 지도자들의 종교적 관용도 그 이유 중의 하나이겠지만, 시공을 뛰어 넘는 절대적 가치를 지닌 예술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보존된 것으로 생각된다.

 

 아야소피아는 외부 복도와 내부 복도, 본당 1~2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입구 왼쪽 안에 있는 나선형 통로를 지나 2층의 갤러리로 올라가면 금색으로 반짝이는 모자이크 화를 가까이에서 감상할 수 있다. 모자이크 화는 9세기 초 콘스탄티노플의 성상 파괴 이후 그려진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최후의 심판에 임하는 예수와 성모마리아,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묘사한 작품이 가장 유명하다. 또한 아야소피아 성당의 출구 뒤편에는 비잔틴제국의 황제들이 성모마리아에게 콘스탄티노플과 아야소피아 성당을 봉헌하는 모습을 나타낸 모자이크 화가 있다. 그냥 지나치기 쉬우니 성당 내부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눈여겨 찾아보자.

 

 

 

 

아야소피아 전경

 

 

아야소피아 구조 설명판

 

 

 *판토크라토르(전능하신 주) 그리스도와 황제 레오 6

 

 아야소피아의 입구를 지나면 외랑과 내랑을 거쳐 본당으로 들어가는 청동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문으로 들어가게 된다. 높고 웅장한 문은 황제가 사용하는 문으로 '황제의 문' 또는 '제국의 문'으로 불린다. 문 위에는 예수와 성모 마리아, 대천사 가브리엘이 그려져 있는 모자이크가 있는데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사람은 레오 6세이다. 레오 6세는 비잔틴제국의 기틀을 다진 뛰어난 황제였지만 그 자신의 삶은 기구했다고 한다이 모자이크의 내용은 네 번이나 결혼하면서까지 아들 콘스탄티누스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는 과정에서 자신이 저지른 죄를 속죄하는 모습이라고 한다. 천하를 다 가진 것 같은 황제도 신 앞에는 항상 겸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내부로 들아는 입구 : 제국의 문

 

 

 

 내부에 들어서면 입구 양쪽에 거대한 항아리가 눈에 보인다. 이 항아리는 페르가몬에서 가져 왔다고 하는 대리석으로 만든 항아리다. 발견 당시에는 세 개로 항아리 안에 은화가 가득했다고 하는데 이것을 발견한 농부에게 상으로 하나를 주고 두 개만 이곳에 남아 있다고 한다.

 

 본당에 들어서면 40개의 창문을 통하여 빛이 쏟아진다. 중앙 돔의 아래에는 원래 4명의 천사가 그려져 있었다는데, 모스크로 사용하는 도중에 세 명의 천사는 얼굴은 보이지 않고 날개와 몸 부분만 남아서 아쉬움을 자아낸다. 또 돔 바로 아래에는 원형 나무판에 금빛의 커다란 이슬람 문자가 새겨져 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성지를 빼앗긴 상처의 흔적으로 남았지만, 현재는 기독교의 성당과 코란 문자가 어우러져 아야소피아 그 자체로 보인다.

 돔의 가장 안쪽에는 술탄의 전용 좌석이 있으며, 원래는 성당의 제단이었던 곳을 이슬람의 제단으로 바꾸면서 메카를 향해 제단의 방향을 살짝 틀었다고 한다. 이 제단 뒤쪽으로는 섬세한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 있고 그 위의 작은 돔에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황금빛 모자이크가 새겨져 있다.

 

 이 아야소피아는 지금도 내부 복원을 위해 작업 중이다. 언제 이 복원이 완성되어 찬란한 모습을 보게 될는지????

 

 

복원 공사 중인 내부

 

 

 

 

 

 

 

 

 

 

 

 

 

아야소피아 본당 내부의 여러 모습

 

 

 

이슬람 문자판

 

 

소원의 기둥(일명 땀 흘리는 기둥)

 

 그레고리우스 성인이 자신의 치유 능력을 옮겨 놓았다는 본당 왼편에 위치한 대리석 기둥을 '소원의 기둥'이라 부른다. 아야소피아를 세 번째 지었던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머리가 아플 때 이 기둥에 기댄 뒤 두통이 나았다는 전설이 있는 곳으로, 아야소피아를 찾은 사람들은 이 기둥에 아픈 곳을 낫게 해달라는 소원을 빈다. 대부분의 시간에 사람들이 줄을 길게 늘어서 있으니 쉽게 찾을 수 있다. 낫고 싶은 곳을 손으로 문지르고, 가운데 구멍에 엄지손가락을 대고 나머지 손을 펼치고, 손을 떼지 않고 한 바퀴를 돌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회랑 

 나선형 구조로 실제로는 7층 정도의 높이를 올라가야 한다.

 

 

2층에 전시된 전시물들

 

아야소피아에서 유명한 것은 2층의 모자이크이다. 오스만 제국 시절 모자이크 대부분은 회칠로 덮이고, 그 위에 이슬람의 성경인 코란이 새겨졌었다. 이 과정에서 살아남은 모자이크 작품들을 보면 아피아 박물관이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성지순례 장소인 동시에, 이슬람교인의 성지순례가 되는 이유를 알 수 있게 해준다.

 

 

* 2층의 모자이크

 

 자미 안에 회벽으로 가려져 있던 모자이크는 1931년 미국의 조사단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 뒤 아타튀르크의 지시로 복원이 진행되었고 1964년까지 복원 작업이 계속되어 그 해 2층 회랑이 처음으로 개방되었다. 원래의 모자이크는 성상파괴운동 때 거의 다 지워졌고, 지금 우리가 감상하는 모자이크는  성화가 우상 숭배가 아니라고 규정한 787년 니케아 공의회 이후의 작품들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이레네 2세가 큰 역할을 하였기에 동방 정교회에서는 그녀를 성상 공경을 부활시킨 성인으로 추앙하고 있다.

 

 

천국의 문

 

 

 

 

데이시스(간청, 탄워) - 심판의 날 모자이크

 

 2층으로 올라가 천국의 문이라고 부르는 문을 지나면 데이시스(Deësis) 모자이크를 먼저 볼 수 있다. '데이시스'란 간청 혹은 애원을 의미한다. 심판을 주관하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세례 요한이 왼쪽에는 마리아가 죄인의 벌을 가볍게 해달라고 간청하는 내용을 표현한 것으로 1261년에 제작되었다. 아야소피아 박물관에 있는 성화들 가운데 가장 심하게 훼손되어 전체의 2/3 정도가 보이지 않지만 아야소피아에서 가장 아름답고 섬세한 모자이크로 꼽힌다. 그리스도와 세례자 요한은 상반신의 상당 부분이 남아 있지만 마리아는 얼굴과 왼쪽 어깨 부분만 남았다.

 

 남쪽 창에 가까이 걸려있는 이 그림은 창을 통하여 들어오는 자연의 빛을 받아 더 빛나고 있다. 모자이크에 등장하고 있는 세 사람의 배경으로 조개모양의 황금빛 문양이 보이는데 햇빛이 조개껍질의 가장자리를 따라 반사되는데, 특히 예수상의 후광 부분이 더욱 빛난다.

 

 

(위키 백과에서 가져옴)

 

 데이시스 모자이크의 맞은 편 바닥에는 HENRICUS DANDOLO라고 새겨진 대리석 판이 있다. 1204년 제4차 십자군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플에 쳐들어온 베네치아의 단돌로의 무덤이 있던 자리의 표시이다. 그는 평소 십자군들이 그동안 베네치아에 진 빚을 갚으려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는 길밖에 없다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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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점령은 기독교 역사에서 재앙이었다. 57년간 자행된 약탈로 비잔틴제국의 온갖 성물과 보물들은 해외로 팔려 나갔고 유적지는 황폐화되었다. 이 약탈로 동방정교회와 라틴 교회는 씻을 수 없는 불화에 빠졌고, 그 뒤 교황이  두 번에 걸쳐 사과와 유감을 표시했다. 그 골이 얼마나 깊었던 지 사건이 발생한지 800년 가까이 된 2001년에 아테네를 방문한 교황은 그리스 정교회 흐리스토둘로스 대주교에게 다음과 같이 사과의 뜻을 분명히 했다.

 

"저는 오랫동안 동방 그리스도 신앙의 보루였던 콘스탄티노플의 불행스러운 약탈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지 회복을 위해 떠난 십자군이 같은 그리스도교 형제들을 기습한 사건은 비극이었습니다. 특히 그들이 라틴교회에 속한 그리스도교들이었기에 가톨릭교회로서는 더더욱 유감스러운 마음을 갖게 됩니다."

 

 콘스탄티노플 탈환 이후 그의 무덤은 파헤쳐지고 뼈는 개에게 던져졌는데 개들조차 그의 뼈를 외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콘스탄티노플 사람들은 단돌로의 무덤을 파헤쳐 유골을 내다버린 것도 모자라 무덤이 있던 자리에 이름을 새겨 밟고 다녔다고 한다. 

 

 내 사진 기록에 아무리 찾아도 이 사진이 없어 위키 백과에서 가져 왔다.

 

 

 

 

요한 2세와 이레네 황후 가운데 왕좌에 앉아 있는 마리아와 축복을 내리는 아기 예수

 

 2층 회랑 끝에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를 중심으로 요한 2세 콤네누스 황제와 이레나 황후가 성모로부터 축복을 받는 모습을 표현한 성화 '콤네누스' 모자이크가 있다. 이 성화는 1122년에 제작된 것으로, 황제가 들고 있는 자루에는 돈이 들어 있고 황후가 들고 있는 것은 봉납명세를 적은 문서로 교회에 대한 황실의 기부를 의미한다. 그리고 황태자인 장남 알렉시오스 콤네누스의 모습은 성화의 옆으로 튀어나온 기둥의 옆면에 그려졌다. 황후는 항가리의 공주였는데 콘스탄티노플로 온 후에는 동방 정교회로 개종할 만큼 아주 신앙심이 깊었고, 황제도 유능하고 신앙심이 깊었으나 불행한 가족이다. 황제와 황후 그리고 아들들이 모두 병이 들어 일찍 죽었다.

 

 

 

콘스탄티누스 9세와 황후 조에 가운데 왕좌에 앉아 축복을 내리는 그리스도 모자이크

 

  2층 남쪽 회랑의 또 다른 쪽에는 황후 조에의 모자이크가 걸려 있다. 11세기에 제작된 이 모자이크는 파란색 옷을 입고 왼손에 성경을 든 그리스도가 조에 황후와 그녀의 세 번째 남편 콘스탄티노스 9세를 축복하는 모습을 담았다. 파란만장한 인생의 조에는 스스로가 여제가 되었다가 세 번째 결혼을 한 콘스탄티누스 9세의 황후가 된다. 조에 황후는 남편이 바뀔 때마다 남편의 얼굴과 명문, 조에의 얼굴 부분을 바꾸었다고 한다. 그래서 다른 성화와는 달리 이 성화를 조에의 모자이크라고 한다. 콘스탄티노스 9세 역시 교회에 헌납하는 돈 자루를 들고 있고 조에는 봉납명세를 적은 문서를 들고 있다.

 

   

 

 

 

설교단 모자이크

 

 1층 본당의 설교단 안쪽에 예수를 안은 성모를 중심으로 가브리엘과 미카엘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원래 6세기에 그려진 것인데 성상파괴운동으로 파괴되었다가 9세기에 다시 그린 것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그림으로 추정한다. 밑에서 위를 쳐다보면 아름다운 성상이 사람들에게 항상 희망을 주는 열굴로 내려 보고 있다.

 

 

 

1층 회랑의 유물

 

  

 

남서쪽문 모자이크

 

 2층을 한 바퀴 돌아 1층으로 내려 오면, 남서쪽문으로 나간다. 이 문위에는 예수를 안은 성모마리아와 좌우에 황제가 새겨져 있는 모자이크가 있는데, 오른쪽의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콘스탄티노플을, 왼족의 유스티아누스 황제는 소피아 대성당을 봉헌하는 장면이다.

 

 

 

 

아야소피아 외부 유물

 

 

 

아야소피아의 옆면

 

 

아야소피아 분수

 

 시내를 여러 곳 돌아다니다 아야소피아를 구경하기 전에 점심을 먹기로 하니 아들이 또 자기가 찾아 놓은 곳으로 가자고 한다. 아들을 따라 가니 아야소피아 바로 뒤의 골목에 있는 레스토랑인데 겉으로 보기에도 만만해 보이지는 않는 집이다. 그래도 이제 여행도 끝나가고 비용에 별로 구애를 받지 않고 싶고, 아들이 나를 이끌고 이 긴 여행을 무사히 마쳐 가는데 그 정도의 희망은 들어주어야 하기에 곧장 가자고 했다. 들어가 보니 상당히 고급의 레스토랑이다. Matbah라는 곳인데 원래의 이 단어의 뜻은 술탄의 부엌이라는 의미이다. 그만큼 고급스럽고 자부심이 강한 곳으로 값도 상당하지만 적당하게 음식을 시켜 먹었다. 분위기도 좋고 음식도 훌륭한 레스토랑이었다.

 

 

점심을 먹은 레스토랑 전경

 

 

 

 

 

메뉴판 - 고급스런 냄새가 난다.

 

 

식사가 나오기 전에 주는 음료

 

 

 

먼저 나온 에피타이저와 빵

 

 

레스토랑에서 보는 아야소피아

 

 

 

 

메인 디쉬와 후식

 

 

레스토랑 내부 모습

 

 이 집은 상당히 유명한 집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인터넷을 검색하니 이 집 상호만 넣어도 바로 이스탄불 구 시가지의 레스토랑이라고 검색이 된다. 가격이 절대 만만한 집이 아니니 적당히 조심해야 한다.

 

 아야소피아를 보고 나서 

 

 아야소피아는 이스탄불의 상징뿐만 아니라 인류 문화유산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처음의 성당 건설은 당시의 유명한 수학자인 밀레토스의 이시도로스와 트릴레이스의 안테미오스의 설계로  5년 10개월 동안 진행되었다 한다. 56m의 높이 위에 31m 짜리 돔을 기둥을 하나도 받치니 않고 올리겠다는 것은 당시의 기술로는 너무나 무모한 설계였다. 그래서 공사 중에 계속 설계가 바뀌고 외부 보강 공사를 하였다. 특히 돔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해 아치가 변형되어 완벽한 반원 형태가 아닌 곳이 많고, 외벽에는 돔이 바깥으로 밀려나는 것을 막기 위해 지지대가 계속 보강되었다. 그 뒤에도 많은 보강 공사가 있었지만 이런 여러 결함에도 불구하고 아야소피아는 고대건축사에 길이 남을 건물이다. 자세한 설명은 여기서 하지 않겠다.

 

 그리스와 터키를 여행하면서 많은 고대의 유적과 건축물을 보면서 감탄사를 끊임없이 토했다. 하지만 이 아야소피아를 보고 그 건물의 건축과정과 내부의 아름다운 모습, 종교적인 경건함을 함께 느낄 때 우리는 아무런 지적인 호기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그저 우리는 눈으로 아야소피아를 보고 가슴으로 감상하고 즐기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아야소피아를 내 눈으로 보는 것만 해도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아들과 함께 터키문명 산책 - 이스탄불 3 (탁심지구와 보스포루스해협)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이스탄불의 현대 - 이스티클랄 거리

 

 이스탄불은 너무나 크다. 그래서 한번에  한 구역을 선별하여 구경을 하고 소개를 한다.

오늘은 갈라타다리에서 시작하여 튀넬을 타지 않고 걸어서 갈라타 타워쪽으로 가서 이스티클랄 거리를 걸어가며 한가롭게 거리 주변을 구경하고 여유롭게 한 나절을 보내기로 했다. 이스티클랄 거리에서 탁심 광장까지 가는 도중에는 과거의 이스탄불보다 현대의 이스탄불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젊은이들과 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오가며 즐기고 있는 중간에는 중무장을 한 군인과 경찰들이 곳곳에서 경비를 서고 있는 모습도 볼 수 있다. 현재 이슬람국가의 테러에 대한 예방차원에서 경비를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외극을 다니면서 항상 느끼는 것은 남북으로 나누어 있다고 하지만 우리나라의 치안 상태는 정말 최고라는 것을 깨닫는다.

 오늘은 이스티클랄거리와 거리 주변의 여러 유적과 유물, 그리고 길가의 풍경 탁심광장 등을 보여드리고자 한다.

그리고 오후에는 보스포루스해협을 관광하는 크루즈를 타고 보는 모습을 보여 드린다.

 

 

탁심 광장의 터키 독립기념탑

 

 

보스푸르스 해협 설명판

 

 갈라타 다리를 건너 갈라타 타워에 올라가기 전에 복잡한 거리에서 잠시 왼쪽 바닷가쪽으로 들어가면 시장이 잇다. 여러 가지 물건을 팔고 있는 곳을 지나면 수산물시장이 나타난다. 카라카이다. 카라(kara)라는 뜻은 터키어에서는 '검다'라는 뜻이다. 이곳은 역사적으로 제 4차 십자군으로부터 콘스탄티노플을 수복한 비잔틴제국은 제노바의 상인들이 이곳에 정착하여 사업을 할 수 있도록 보장했다. 제노바사람들은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성벽과 탑을 지었는데, 이것이 갈라타탑과 지금 흔적이 남아 있는 성벽이다. 지금은 그저 조그만 수산 시장이라고 생각하고 어시장의 풍경을 구경하는 곳이다.

 

 

 

 

 

어시장의 모습

 

 

갈라타 타워

 

 갈라타타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도 않았고 중요하지는 않지만 소소한 재미가 있는 갈라타 메블레비하네시 박물관이 있다. 오스만 시대의 문학과 서예등을 보관하는 박물괸이지만, 대부분의 관광객은 이슬람 전통 춤인 세마 의식을 보기 위해 찾는 곳이다. 하지만 세마는 시간을 맞추기가 너무 어려워 보기가 쉽지 않다. 월요일에는 저렴한 가격에 세마댄스 공연을 한다고 하니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시간 맞춰 방문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갈라타 메블레비하네시 박물관 전경

 

 그냥 거리를 따라 걸으면서 구경을 하고 가다가 보니 카톨릭 성당이 눈에 띈다. 이슬람 국가에서는 상당히 드문 곳이다. 성 안토니오 성당이다. 이스티클랄 거리 중앙쯤에 있는 이스탄불 성당 중에서 가장 유명한 성당이다. 이슬람 국가에 있는 성당으로 1912년에 완공되었고,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 오는 성당으로현지인보다는 세계 여러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많았다. 관광객들을 위해 터키어, 영어, 이탈이아어 등 다양한 언어로 미사를 보기에 이스탄불을 여행하는 카톨릭 신자들은 주일에 이곳에서 미사를 드린다.

성당 경내의 설명에는 교황님도 이곳을 방문했다는 사진이 있다.

 

 성당을 나오면 옆에 이곳과는 좀 엉뚱한 갈라타사라이 고등학교가 있다. 우리나라의 특목고 처럼 터키 전국에 있는 우수한 학생들을 모아 교육시키는 명문고등학교로 터키에서 가장 오래된 학교로 1868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성당 입구

 

 

성당 전경

 

 

성 안토니오 상

 

 

 

 

 

성당 내부의 모습

 

 *이스티클랄 거리(Istiklal Avenue, Independence Avenue)

 

 이스티클랄 거리(터키어: İstiklâl Caddesi)는 이스탄불 신시가지의 중심가로 베이욜루 지구에 위치한 거리이다. 하루 유동인구가 3백만 명에 달하는 거리의 길이는 약 3km이며, 갈라타 타워(Galata Tower)에서 시작해 탁심 광장(Taksim Square)까지 이어진다. 일정 시간 다니는 노면전차를 제외한 차가 없는 완전한 보행자를 위한 1.4 km의 거리에는 옷 가게, 악기점, 서점, 갤러리, 영화간, 극장, 도서관, 카페, , 나이트클럽, 제과점, 초콜릿 가게, 식당 들이 죽 늘어서 있다. 이곳을 지나가는 빨간 트램은 19세기에 이 길을 달리던 노면전차를 복원한 것이다.

 오스만투르크 시대에는 카데-이 케비르(Cadde-i Kebir, 大路)로 불렸으며 19231029일에 터키 공화국 수립이 선포된 뒤, 이를 기리기 위하여 거리 명칭이 독립을 의미하는 이스티클랄로 바뀌었다. 거리를 따라 양 옆으로 수산시장, 각종 종교의 교회들, 19세기 초반에 유럽의 여러 국가에서 세운 교육기관 및 각국의 대사관과 영사관이 들어서 있다. 또한 19세기의 고풍스러운 건물이 보존되어 지금은 여러 종류의 가게로 사용되고 있다. 이 길을 걷지 않고는 이스탄불의 현재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스티클랄 거리 풍경

 

 *탁심광장

 

 이스티클랄 거리를 한가로이 거닐며 탁심광장에 도착한다.

이스티클랄 거리(독립 거리)라는 긴 보행자 거리와 연결된 탁심은 "분배" 또는 "분포"라는 뜻의 아랍어에 어원이 있다. 탁심은 원래 이스탄불 북쪽의 수도 공급원으로서 도시의 다른 부분과 분리되어 있는 지역이었다.

 탁심 광장(터키어: Taksim Meydanı) 현재 이스탄불의 중심지로 이스티클랄 거리와 이어져 있으며, 관광 중심지답게 수많은 상점, 호텔, 여행사 및 항공사, 음식점 등이 밀집해 있다. 탁심 광장 중앙에는 터키 공화국이 독립한 5주년을 기념하여 1928년 피에트로 카노니카가 만든 공화국 기념비(터키어: Cumhuriyet Anıtı)가 높이 11m로 서 있다.

 

 탁심은 이스탄불 현재의 중심지로 신년 축하 퍼레이드, 사교 모임 퍼레이드 등 공공 사교 모임이 활발하게 진행되는 곳이다.

 

 콘크리트 중간에 위치한 작은 녹지인 탁심 게지 공원이 있다. 2013, 지자체는 공원을 철거하고 쇼핑몰을 건설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공원 재개발에 반대해 수천 명의 사람들이 시위를 시작하면서 2013년 터키 반정부 시위가 시작되었다.

 

 광장은 많은 시위의 중심지로 터키의 다양한 정치단체 뿐 아니라 많은 NGO들은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이 탁심 광장에서 시위를 하여 많은 충돌이 있었다. 시위에 따른 많은 폭력 사건들이 있어 지금은 단체들의 광장 시위는 금지되고 경찰은 사고 예방을 위해 24시간 경비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 금지령은 주변 도로나 거리에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새해 축제(New Year's Eve), 공화국 기념일 같은 기념일 축제, 중요한 대형 축구 경기 경우에는 금지령에서 예외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탁심광장 표지판

 

 

 

 

 

독립기념탑

 

 이스티클랄거리에서 큰 대로로 내려가는 길에 여러 가지의 골목이 있다. 추쿨 주마라고 부르는 골목이다. 그냥 무작정 걸어가다 보면 우리나라 예전의 인사동과 같은 풍경이 나온다. 골목 구석 구석마다 골동품 가게와 옷 가게들이 보인다. 그렇게 오래 된 역사적 유물이 아니라 그저 일상생활에 사용되던 물건으로 제법 오래 된 것들이다. 눈요기를 하면서 걸어가다가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으면 적당한 가격을 흥정하여 사면 된다.  여러 곳의 골목이 있지만 아래의 대로를 향하여 가면 길을 잃을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

 

 

 

추쿨 주마 골목 풍경

 

 

 

 

해협 건너에 보이는 이스탄불 역사지구 전경

 

 

이스탄불 관광객들이 조심해야 하는 일들

 

 저번 나의 글에서 내 경험을 이야기한 내가 구두닦이가 제일 위에 있다. 구두닦이는 조그마한 애교로 보아 줄 수 있지만 나머지는 잘못하면 큰 손해를 입는다. 사기의 일종이니 항상 낯선 사람이 이유없이 베푸는 친절에는 의심을 가져야 한다.

 

 

 

 *페리를 타고 이스탄불을 보다. - 보스포루스해협 크루즈

 

 아시아와 유럽은 이스탄불에서 만난다. 보스포루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서쪽은 유럽, 동쪽은 아시아이다. 오스만 터키가 1453년 유럽 쪽의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면서, 오스만 터키는 두 대륙을 갈라놓은 보스포루스 해협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이 해협을 터키가 장악하게 되자 방위를 목적으로 해협 양쪽 해안을 요새화하였다. 흑해에 접한 국가들은 반드시 이 해협을 통해야만 큰 바다로 나갈 수 있기 때문에 터키의 허락이 없으면 사실상 호수에 접한 내륙국이나 마찬가지였다. 현재 터키는 민간선박의 통행은 자유롭게 허용하지만 군함은 국적불문하고 순양함 이하로 제한하고 있다.

 

 '보스포루스'라는 이름은 신화에서 제우스가 건드린 여자인 이오가 소로 변신해서 건넜다는 이야기에서 유래된 것으로 그리스어로 '소가 넘어 간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터키에서 부르는 이름인 İstanbul Boğazı는 단순히 '이스탄불의 목구멍' 혹은 '좁은 길목'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해협의 길이는 약 30km, 너비는 5503,000m, 수심 60125m에 불과한 작은 바다이지만 물살이 매우 거칠고 빨라서 소용돌이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보스포루스 해협 양쪽 기슭에는 돌마바흐체 궁전, 루멜리 히사르 요새 등 오스만 시대에 지어진 유서 깊은 건축물들과 고급 주택, 오래된 별장이 늘어서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준다.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이스탄불의 시가지를 둘러보는 보스포루스 크루즈 투어는 이스탄불의 일몰부터 야경까지 감상할 수 있는 저녁 시간에 맞춰 탑승하는 것이 가장 좋다. 투어의 종류는 다양한데 에미뇌뉘(Eminonu) 선착장에서 출발해 보스포루스 제2교까지 올라갔다가 되돌아 내려오는 코스가 일반적이다. 또 차량 이동이 불편하고 우회하는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두 지역을 통근하는 이스탄불 시민들은 주로 연락선(바푸르)을 이용하기도 한다.

 

 이곳에 처음 다리가 건설된 것은 1973년으로 두 대륙을 걸어서 왕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보스포루스 대교라 명명된 이 다리가 만들어진 이후, 두 번째 다리는 1988년에 완성되었는데 2의 보스포루스 대교혹은 파티하 술탄 메흐메드 교라 불린다. 보스포루스 해협 최북단에는 2016년 현대건설이 시공하여 개통한 제3대교인 야부즈 술탄 셀림 대교가 있다.

 

 

 

배에서 보는 갈라타 타워와 아야 소피아

 

 

 

 

 

일몰이 가까운 해협의 양안

 

 

 

 

 

 

오르타쾨이의 모습

 

 

 

 

 

 

해안에 보이는 돌마바흐체궁전

 

 

베벅

 

 이스탄불에서 가장 우아하고 아름답게 커피를 한잔하고 싶으면 이곳에서 마시라고 한다. 이스탄불에서 가장 부유한 동네로 물가가 비싸지만 보스포루스의 낭만을 즐기기에는 가장 좋은 곳으로 여행자들이 선호하는 곳이다.

 

 

 

 

보스포루스대교

 

 

에미뇌뉘 항구로 돌아오니 어두워졌다.

 

 배를 타고 보스포루스해협을 항해하는 시간이 제법 걸렸다. 코스에 따라 다르지만 보스포루스대교까지 왕복하는 크루즈는 한 시간이 훨씬 넘게 운행을 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해협의 바다 바람이 차므로 반드시 복장을 잘 갖추어야 추위를 막을 수 있다. 크루즈를 하는 동안 해협의 양쪽에는 아름다운 유적과 풍경이 많이 보이지만 안타깝게도 나의 이번 여정에는 이 코스가 예정에 없다. 이스탄불은 너무나 넓고 구경해야 할 것이 많아서 제대로 계획을 세워 구경하지 않으면 한달을 머물러도 무엇을 보았는지가 애매한 곳이다. 그래서 이번에 나의 여정은 이스탄불 역사지구를 중심으로 이스탄불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것만을 보는 최소한의 여정이다. 언젠가 다시 기회를 잡아 나머지 지역을 돌아 볼 수 있는 날을 기대하면서 아쉽지만 배를 타고 주마간산식으로 이 지역을 보는 것으로 만족한다.

 

 크루즈를 마치니 시간이 너무 늦었다.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먹으려 나갔다.

아들 녀석이 또 자기가 찾아 놓은 곳이 있다고 가자 한다. 숙소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 아니라서(약 트램 2구단) 걸어 가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한다. 이것이 아들과 여행하면서 느끼는 행복이다. 이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고 맥주를 마시려고 시키니 알콜을 팔지 않는다고 한다. 아마도 정통 이슬람이 운영하는 곳이라 생각하고 음식만 먹고 나와 숙소에 가면서 맥주를 구입해 갔다. 저번에도 이야기했지만 슈퍼에도 알콜을 파는 곳과 팔지 않는 곳이 있다. 아마도 종교적인 이유라고 생각된다.

 

 

레스토랑 전경

 

 

 

레스토랑 내부

 

 

 

 

 

저녁 음식

 숙소에 돌아와 오늘의 일정을 마치고 휴식을 취하다가 잠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