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鶴)의 오딧세이(Odyssey)

마음대로 가는 발칸 여행 - 세르비아 우지체(Uzice) 2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사람들이 여유롭게 사는 도시 우지체

 

 아침에 일어나 식사를 하고 조금 있으니 주인이 조그마한 배낭을 메고 나온다. 내가 여행객인지 그가 여행객인지가 모호하다. 어디를 가는지도 설명하지 않고 버스를 타고 시내로 갔다. 그러면서 먼저 역으로 가잔다. 역에 가서 어제의 역장과 이야기를 하는데 막 화를 낸다. 그리고 나서 이야기를 끝내고 나와서는 설명을 한다. 모크라 고라에서 산악열차를 타고 사라예보를 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차편이 맞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사라예보를 가기 위해서는 국경을 넘어가는 버스를 타고 건너 가서 다시 버스를 갈아 타야 하는데 버스 시간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상당히 난감하였다. 모크라 고라에서 산악열차를 타는 것이 여정의 가장 큰 목적인데.....

 물론 산악열차에 대한 정보도 없이 왔지만..... 잠시 난감해 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라고 한다. 자기가 사라예보까지 책임지고 보내 준다는 것이다. 택시를 대절해서 가면 된다는 것이다. 더 더욱 어려운 일이 생겼다. 여기서 사라예보까지 거리가 얼마인데, 더구나 나라가 달라 국경을 넘어야 하는데.... 걱정을 하니 그 것도 걱정하지 마라고 한다. 자기가 아는 택시를 불러 줄테니 70유로(당시 환율로 약 십만원 미만이었다.)만 주면 된다고 한다. 이 사람의 신망을 보니 헛소리를 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되어 그렇게 하자고 했다. 결과를 먼저 말하면 다음날 70유로로 모크라 고라까지 데려다 주고, 모크라 고라에서 산악열차를 타는 동안 기다려 주고 다시 사라예보 숙소까지 갔다.

 

 그리고는 자기가 앞장 서서 안내를 시작한다.

 

 시내를 구경하면서 산쪽으로 간다. 나는 그냥 따라만 가면 된다. 가면서 모르는 것은 물으면 답을 해 준다. 나도 영어에 능통하지 않기에 가벼운 말만 하고 길을 걸어 간다.

 

 

 

 

 

우지체 시외에 자리한 게스트하우스 Little 15 풍경

 

 

숙소 주인과 나

 

 

우지체 기차역

 

 

세르비아 철도 노선

 

 

 

우지체의 독특한 담벽이라고 설명?

 

 

 

봄의 풍경

 

 제법 언덕길을 걸어 올라가면서 우지체 시내의 풍경을 즐겼다. 산위로 계속 올라가기에 무엇이 있나 보다 생각하며 안내판을 보니 우지체 옛 성이다. 이런 곳이 있었다니..... 전혀 모르는 곳이다. 이 사람이 아니었으면 그냥 지나치고 말았을 것이다. 영어로 된 안내판을 보니 14세기에 지어진 요새라고 한다. 우지체 시내를 일망무제로 조망할 수 있는 장소였다. 요새 위에 올라가니 제법 큰 요새다. 자연적인 지형애다가 석벽을 쌓고 길을 내고, 거주하는 공간도 만들고 한 것이 작은 요새가 아니라 큰 성과 같았다. 우지체 사람들도 여기에 올라와서 바람을 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우지체 올드 타운 설명판

 

 

요새에서 보는 우지체 시내

 

 

 

 

요새의 여러 모습

 

 

요새 위의 우지체 젊은이들

 

 

 

 

여러 요새의 모습

 

 

이 요새에 대한 설명

 

요새를 구경하고 내려와 산 중턱에 난 길을 따라 걷자고 한다. 우지체 사람들이 걷기 코스와 같은 곳이었다. 옛날의 길을 그대로 두고 아름다운 자연을 완상하면서 여유롭게 걷도록 만들어 놓은 길이다. 걷기를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참 좋은 걷기 코스였다. 아마 옛날에는 철길이 놓어 있었던 것 같은데 철도 노선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고 이 곳을 길로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설명판을 보면 철길이었다고 되어 있고, 지금은 Grenn Way라고 명칭을 붙여 놓았다. 예전에 철길이다 보니 터널과 다리가 아주 많았고, 경치가 아름다워 주변 경치에 취해서 계속 걸었다.

 

 

 

Grennway설명판

 

 

예전에 기차가 다닌 표시

 

 

 

 

 

 

터널의 양쪽 모습

 

 

 

길 주변의 풍경 - 계곡을 따라 길이 계속 된다.

 

 

 

 

옛날 철교

 

 

 

 

저 멀리 보이는 차들이 다니는 현재의 다리

 

 

계곡 물을 모아 놓은 댐

 

 

옛날 기차 설명판

 

 

 

 

Grennway 주변의 풍경

 

 

새 선로로 달리는 기차

 

 

 

맑은 물이 흐르고, 하늘은 깨끗하게 푸르렀다.

 

 공해나 오염이라고는 찾아 볼 수도 없는 곳이었다. 더구나 이 길은 차는 전혀 다니지 않고 사람들이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하이킹을 하는 길이었다.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낙원과 같은 길이다.

 

 

 

 

 제법 걷다가 물이 흐르는 계곡으로 내려 갔다. 어느 새 시간이 제법 지나 시장기가 돌았다. 가지고 간 간식과 음료수로 가볍게 요기를 하고 경치를 즐겼다. 이 길을 끝까지 가려고 하면 제법 더 먼 길을 가야한다고 한다. 그래서 돌아가기로 했다.

 

 

 

테슬라박물관 위의 터널과 교량

 

 

 

테슬라박물관

 

 

Grennway 설명판

 

 

 

테슬라박물관 앞의 하천 유원지

 

 이 유원지 근처에서 또 누군가와 이야기를 제법 한다. 그러고 나서 점심을 먹자하며 어떤 음식을 먹으려는지 묻는다. 그래서 서양식으로 먹자고 하니 그 사람과 이야기한 뒤 식당으로 안내한다. 프랑스식 식당으로 제법 고급스럽게 보였다. 메뉴판을 보니 가격은 그렇게 비싸지 않아, 음식을 주문하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조금 전에 본 사람이 들어와서 합석을 한다. 숙소 주인이 말하기를 자기의 사촌이라고 한다. 이야기를 잠시 하면서 식사를 마치니 이 사람의 음료를 사겠다며 식당 근처의 노천 카페로 이끈다.

 

 

 

 

 

점심 메뉴

 

 

 노천 카페에 앉아 여러 이야기를 했다. 이 지방은 물이 좋아 맥주가 맛이 있었다. 그래서 맥주를 한 병시키고 이야기를 하니 이 사람은 자기는 폐암 말기라 하면서 3개월 밖에 못 산다고 한다. 오스트리아에서 수술을 했는데 말기 판정을 받았다고 담담하게 말한다. 자기들에게는 생소한 한국에서 이 우지체를 찾아왔다니 호기심이 많이 생겨 합석을 한 것이라고 한다. 폐암 말기라면서 담배는 끊임없이 피우고 있었다. 내가 가지고 간 홍삼 가루를 좀 주면서 항암 효과가 있는 한국의 홍삼이라고 소개하며 가격을 말하니 웃으면서 헤로인보다 비싸다고 말한다. 그러더니 갑자기 나에게 무엇을 달라고 한다. 무엇인가 물으니 내가 대한항공을 타고 오면서 기내에서 받은 생수통(삼다수)다. 자기에게 기념으로 달라는 것이다. 그래서 기꺼이 주고, 한국 돈 지폐도 한장 주니 좋다고 댕큐를 연발한다. 이 사람들과 노천에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한다. 아마도 동양인 더구나 한국인이 여기까지 온 경우는 아주 드물어 이 작은 시내에 이야기거리가 된 것 같았다.

 

 참 조용하고 아늑한 우지체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도, 우리 나라 사람들이 방문한 경우도 거의 없다는 것이 신기했다.

 

 이야기를 하면서 주변을 돌아 돌아보니 많은 사람들이 여유롭게 오후의 한 때를 즐기고 있다. 어느 듯 시간이 제법 지나 저녁 때가 되어 숙소로 돌아가기로 하고 시내 슈퍼에서 먹을거리를 좀 사서 숙소로 돌아갔다.

 

 내일은 드디어 모크라 고라로 가서 기차를 탄다.

 

 

마음대로 가는 발칸 여행 - 세르비아 우지체(Uzice) 1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알려지지 않은 아름다운 도시 우지체

 

 베오그라드를 떠나 우지체로 간다. 우지체는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하지만 나는 이 우지체를 꼭 가 보고 싶었다. 약 십여년 전에 본 영화가 너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뒤에 이야기하겠다. 베오그라드에서 약 4시간을 버스를 타고 우지체에 도착했다.

 

 우지체는 세르비아 서부에 위치한 도시로, 도시 인구는 주변을 포함하여 약 십만 정도인 조그마한 도시이다. 제티나 강 좌안과 접하며 주요 산업은 섬유, 피혁, 기계, 금속 공업이다. 2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41728일 이 곳을 해방시킨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들이 세운 나라인 우지체 공화국의 수도가 되었지만, 1941121일 나치 독일과 체트니크 등 추축국 세력의 파르티잔 공세 때 이 지역이 점령되자 파르티잔들은 보스니아, 몬테네그로 등지로 피신하였고 우지체 공화국도 사라지고 만다. 코소보 전쟁 당시에는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의 공습으로 인해 크게 파괴되기도 했다.

 

 우리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곳은 생각보다 훨씬 관광지로도 좋고 휴양지로도 좋은 곳이다.

 

 먼저 우지체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어 버스에서 내려 다음 여행지인 사라예보로 가는 열차를 알아 보려고 역으로 갔다. 역에 가니 커다란 역사에 사람이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다. 하루에 두서너번 기차가 정차하는 작은 간이역인데 역사는 엄청나게 컸다. 역에서 우연히 역장을 만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면서 여러 가지의 정보를 얻고 예약해 둔 숙소로 갔다.

 

 

우지체 버스 터미널 부근

 

 

우지체 기차역장

 

 우연히 만난 이 사람 덕분에 여러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모크라 고라를 간다고 하니 모크라 고라의 기차는 4월 1일날 처음 운행을 시작한다고 하였다. 상당히 난감했다. 4월 1일에는 사라예보에 예약을 해 놓았는데 이곳에서는 교통편이 좋지 않아서 예정대로 움직이기가 어려웠다. 그렇다고 모크라 고라에서 기차를 타기 위해 왔는데 그 여정을 취소하기도 어렵고......

 

 역장이 말하기를 4월 1일 개통하는 기차를 타고 사라예보로 갈 수 있다고 해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역장은 자기들은 잘 알지도 못하는 한국에서 모크라 고라의 기차를 타러 왔다고 하니 신기한 모양이었다. 이것 저것 여러 가지 자료를 보여 주며 설명을 하였다. 자기가 모크라 고라의 기차 공사에도 참여했다고 하면서,,,,.

 

 

 

 

 

역장이 보여준 옛날 자료들

 

 

역에서 바라 본 우지체

 

 

내가 머문 숙소 'Guesthouse Little 15'

 

 역장과 모크라 고라에서 기차를 타는 것을 이야기하고 숙소에 가니 숙박객이 아무도 없다. 우리가 유일한 손님이다. 45살이라는 안드레이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가 주인이었다. 부인은 없이 아직 독신인데 참으로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손님도 없고 하니 자기가 가이드를 해 주겠다고 하면서 함께 시내로 나섰다. 미리 이야기하면 이 사람은 우지체의 아주 유명한 사람이었다. 자기 어머닉 83살인데 우지체 시가지를 설계하였다고 하였다. 자기는 이태리에서 음악을 하였는데 어머니가 이제 나이가 많아 귀국하여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사실 이 숙소에 올 때 택시를 탔는데 택시 기사가 아주 유명하다고 말은 했지만...... 그런데 시내를 돌아다니며 안내를 해 주는데 시내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사람에게 인사를 하는 정도였다. 하여튼 이 사람 덕분에 아무런 정보도 없이 왔는데 그냥 따라 다니며 우지체를 편하게 다녔다.

 

 

 

세르비아 정교회

 

 

 

우지체 시내

 

 

 

 

 

 

 

 

 

성 마르코 교회의 외부와 내부

 

 

 

 

시내의 아기자기한 모습

 

 시내의 이곳 저곳을 구경시켜 주다가 미술관으로 데려 갔다. 이 작은 도시에 미술관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은 현대적인 작품으로, 미술에 대해 별 지식이 없이 그저 보는 것만 좋아하는 내가 보기에는 상당한 작품들이었다. 관장도 이 사람의 친구라 마음껏 보고 즐기고 나왔다.

 

 

 

 

미술관의 작품

 

 

 

아름다운 도시의 건물

 

 날은 점점 어두워지는데 도시를 가로 지르며 흐르는 제법 큰 하천을 따라 올라 간다. 무작정 따라가니 하천 주위에 제법 오래된 집이 있다. 그러더니 테슬라를 아느냐고 묻는다. 그래서 전기를 만든 사람이라고 하니 기쁘하며 여기가 테슬라의 집이라고 한다. 테슬라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달라 무어라 말을 하지 않으니 여기에서 테슬러가 어릴 때 살았고, 그래서 여기에 박물관을 만들었다고 한다.

 

 오늘날 전기자동차 회사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는 니콜라 테슬라는 발명가로서 에디슨만큼 대중적으로 유명하지는 않지만, 공학도들 사이에서 테슬라라는 이름은 천재라는 말과 동의어로 여겨진다.

 

 

 

 

 

 

니콜라 테슬라 박물관

 

 

 

 

 

 

어둠이 짙게 깔린 테슬라박물관 주변의 철교

 

 여기를 구경하는 동안 날이 제법 어두워졌다. 다시 시내로 내려가 노천카페에 앉아 차를 마시고 나니 저녁을 무엇을 먹으려는지 묻는다. 그래서 이 지방의 음식을 먹고 싶다고 하니 일어서서 또 가자고 한다. 따라 가니 빵을 화덕에 구워 파는 집이다. 이 우지체에서 가장 유명한 집으로 이 지방의 특이한 빵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빵집 주인에게 또 장황하게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왔다고 소개한다. 하여튼 이 사람의 인지도는 정말 놀라웠다. 도시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듯했다. 빵집 주인은 빵을 굽는 화덕과 굽는 방법을 보여 주고 재료도 보여준다.  이 빵을 무어라 설명을 할 수가 없다. 이런 빵을 우리가 접해 보지 않았으니??? 하지만 현지인들은 매우 즐겁게 빵을 구입해 먹고 있었다. 이 집을 나오려니 빵집 주인이 자기 집이 만든 티셔츠를 기념품으로 두벌 준다.

 

 

 

빵 굽는 화덕

 

 

빵집 입구

 

 

 

빵속에 넣는 재료

 

 

 

 

빵집 주인 부부가 빵을 만드는 모습

 

 

다 구워진 빵

 

 

 

가게에서 빵을 먹는 우지체 사람들

 

 

개업 50년 기념 티셔츠

 

 

빵집 입구에거 - 왼쪽이 빵집주인, 오른쪽이 숙소주인

 

 

빵집의 표창장

 

 

 

빵집 내부의 사진들

 

 빵집을 방문하고 나와서 숙소로 돌아 왔다. 숙소로 오니 주인이 자신의 바를 구경시켜 주면서 간단하게 맥주를 대접한다. 이 주인도 아마 손님이 그리웠는지 이야기를 하다가 휴식을 취하며 잠자리로 갔다. 가면서 벽장의 여러 술이나 주스를 마셔도 된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 것이나 꺼내어 마시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 나도 조금 쉬다가 잠을 청했다.

 

우연히 만난 주인 덕분에 길을 찾아 헤매지도 않고 쉽게 우지체를 구영하였다. 이런 것도 여행 중에 만나는 행운이다.

 

 

 

마음대로 가는 발칸 여행 -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현대와 과거가 함께하는 낭만의 도시 베오그라드

 

 베오그라드(Beograd/Belgrade)는 인구 약 백이십만 도시로, '하얀'(Beo) '땅'(Grad)이라는 도시 이름에 맞게 건물들도 대부분 흰색으로 도색하게끔 조례가 잡혀 있다고 한다. 칼레메그단이라고 부르는 고대 로마시대의 성채가 있는 석회암대지를 중심으로 사바강이 도나우강에 합류하는 지점 우안에 위치한다. 도시의 역사는 BC 4세기부터 시작한다. 발칸 여러 민족의 항쟁중심지로 동로마 제국이 쇠락하고 세르비아 왕국이 일어서면서 거점으로 주목받았으며, 헝가리 왕국 역시 거점 지역으로 베오그라드를 주목하여 점차 중심지가 되어 갔다1521, 메흐메트 2세의 증손자인 쉴레이만 1세는 기습적으로 베오그라드를 공격해 함락시켰다. 이후 오스만 제국의 영토로 300년 이상 머물렀으며, 1878년 세르비아가 베를린 조약의 결과에 따라 독립을 쟁취했을 때 비로소 수도로 확정되었다. 2차 세계대전 때는 나치스 독일에 점령되었으나, 시민들의 저항과 소련군과 티토 수상이 이끄는 유고슬라비아 해방군에 의하여 194410월 해방되었다.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해체되면서 진통 끝에 신생 유고슬라비아 공화국의 수도로 결정되었으며, 1999년 코소보 전쟁 당시 NATO 군대의 폭격을 받기도 했다. 지금도 거리에는 폭격의 상흔을 그대로 보여 주는 곳이 많다. 2006결국 세르비아 공화국만의 수도가 되었다. 베오그라드 거리에는 고층건물과 상점이 늘어서는 등 개방적이며, 자유로운 분위기의 거리가 건설되었으나, 지나간 파괴의 역사 때문에 고대나 중세의 유적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늦게 베오그라드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니 방향감각이 무디다. 버스에서 같이 온 말레이지아 청년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세르비아 돈을 환전을 못해서 숙소로 가는 버스를 타기가 어려웠는데, 그 청년이 버스비를 내어 주고 자신들의 숙소와 비슷한 방향이라 함께 버스를 탔다. 운이 좋게 버스안에서 세르비아 처녀에게 숙소를 물으니 자기를 따라오라고 한다. 자기 집 부근이라 하면서 같이 버스를 내려 숙소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너무 고마웠다. 숙소는 좀 묘한 위치에 있었다. 베오그라드의 낭만이 물씬 느껴지는 스카다리야 거리라는 곳이다. 상세한 설명은 뒤에 다시 하겠다. 밤이 늦어 숙소에 들어가 먼저 잠을 청한다.

 

 아침에 일어나니 숙소에서 식권을 주면서 식당을 가르쳐 준다. 아마 체인을 맺은 곳인가 보다. 식당이 스카다리야 거리에 있었다. 어제 밤늦게 도착하여 주변을 잘 몰랐는데 아침에 보니 유명한 거리옆이 숙소다. 식당도 제법 이름이 알려진 집이었고, 음식도 풍부하고 맛이 있었다. 여행중에 먹는 것을 중요시하는 나에게는 만족스러운 집이다.

 

 

 

식당 입구와 전경

 

 

풍성한 아침

 

 

식당의 메뉴판

 

 

메뉴를 그려 놓았다.

 

 

숙소 부근에 있는 Sebils Fountain

 

 베오그라드를 모르면서 인터넷으로 예약한 숙소가 운이 좋게도 스키다리야거리 바로 옆이었다.

 

 예술의 거리로 잘 알려진 스카다리야 거리의 또 다른 이름은 보헤미안 거리인데 19세기 중반부터 세르비아에서 활동하는 유명 예술인들의 주 무대도 베오그라드의 몽마르트라 불리는 곳이다. 울퉁불퉁 자갈길로 된 약 500m 정도의 길을 걷기는 다소 불편하지만 천천히 걸으면서 거리를 즐기라는 예술가들의 아이디어라 생각하면 이곳을 더욱 여유롭고 운치 있게 만들어 준다. 이 거리를 양 쪽을 채우는 것은 세련된 분위기의 카페, 레스토랑, 골동품 숍, 부티크, 갤러리들이다. 19세기 말까지 가난한 자들의 동네였던 곳에서 비록 돈은 없지만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작가, 배우, 저널리스트들이 드나들면서 이토록 매력적인 베오그라드의 몽마르뜨로 변신했다. 빈티지스럽고 보헤미안적인 거리에 밤이 되면 낮과는 다르게 흥청거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야외 테라스엔 와인 잔이 오르고, 록 밴드의 음악이 연주되며, 마치 영화 같은 풍경은 밤늦게까지 멈출 줄을 모른다. 몽마르트르와도 비교되는 보헤미안 거리는 아름다운 꽃 장식과 화려한 색들로 장식해 놓은 고풍스러운 건물에서 예쁜 카페와 세르비아 전통음식을 파는 레스토랑은 예술가의 거리답게 독창적이고 예술적인 간판이 거리 곳곳을 아름답게 꾸미고 있다.

 

 “우리 몽마르뜨에 가요.” 베오그라드에 해가지면 사람들은 무언가에 홀린 듯 올드 타운에 있는 스카다리야로 발걸음을 옮긴다고 한다.

 

 

거리 입구에서 곳곳을 가리키는 이정표

 

 

차가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 놓았고, 자갈돌 길이다.

 

 

 

 

거리의 풍경

 

 

세르비아의 시인이자 화가이며, 극작가였던 Duro Jaksicdml 조각 상

- 사람들이 많이 만져 반들반들하다.

 

 

 

 

꽃으로 장식된 카페들

 

 

거리가 끝나는 곳의 모습

 

 

거리 주변의 안내도

 

 숙소가 이 거리옆에 있고 시내로 가기 위해서 이 거리를 통과해야 하기에 몇 번을 이 거리를 지나 다녔다. 거리를 지나갈 때마다 시간이 바뀜에 따라 거리의 주인들도 바귀고 있었다. 사진은 낮에 찍은 것이지만 밤의 거리 모습이 더 좋았다.

 

 스카다리야 거리를 지나 베오그라드의 중심지로 진입하면, 매력적인 여인들과 밝고 화사한 쇼핑 거리가 이어지는 광장이 나온다. 공화국광장이다. 서구의 거대 도시를 연상시키는 활기찬 분위기를 느끼면서 나의 마음도 너그러워졌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광경이다. 사회주의 국가 도시를 생각했던 어두운 분위기는 차츰 수그러들고, 자유와 낭만적인 도시의 활기와 당당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광장 주변에는 국립박물관, 국립극장, 기마상이 있는데, 기마상의 주안공은 1867년 오스만투르크로부터 세르비아를 해방시켜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는 미하일로 오브레노비치 3세이다.

 

 광장 주변은 카페, 레스토랑, 기념품 상점들이 즐비하게 늘어 서 있다. 나도 여기 카페에 잠시 앉아 주스를 마시면서 지나가는 매혹적인 여인들을 보면서 한가함을 즐겼다.

 

 

 

 

공화국 광장 부근

 

 

 

 

 공화국 광장에 있는 미하일로의 동상 앞은 시민들이 사랑하는 만남의 장소다. 한 시간만 서있으면 베오그라드 사람 다 봤다고 거짓말해도 될 정도로 북적거렸다. 시내가 조그마하고, 볼거리 대부분이 적당한 거리에 있어 직접 걸으며 보는 도보여행이 딱 알맞은 곳이다. 말동상 뒤의 건물이 국립박물관인데 하필 수리 중이라 문을 열지 않아서 아쉬운 마음을 달래야만 했다. 이 날이 마침 무슨 선거 유세날이라 연단을 만든다고 북적거렸다.

 

 

국립극장

 

 바로 옆에 국립극장이 있었다. 극장에 들어가 공연 일정을 보니 오늘 오페라 '오델로'를 공연한다고 한다. 티켓가격이 상상이상으로 얼마되지 않았다. 한국에서 웬만한 오페라라면 적어도 십만원은 주어야 하는데 약 삼만원 정도에 좋은 좌석을 가질 수 있었다. 얼른 구입하고 저녁에 다시 국립극장 내부를 구경하기로 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발길을 돌려 간곳은 화려한 현대의 거리였다. 공화국 광장에서 칼레메그단요새까지 이어지는 보행자 전용도로 크네즈 미하일로바 거리. 길 양쪽으로 갤러리, 서점, 쇼핑몰, 카페, 레스토랑이 즐비하게 늘어선 것이 어느 도시의 번화가보다 못하지 않다. 아침부터 밤까지 한가한 틈이 없이 사람들이 북적거리면서도 아주 여유로운 거리였다. 단순히 쇼핑 구역이 아니고, 우아한 핑크빛 건물의 과학 예술 아카데미 등 1870년대 후반에 지어진 빌딩과 맨션들이 많아 국가에서 법으로 보호하는 베오그라드의 랜드마크다. 남동부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로 꼽힌다고 하니길 위를  한가로이 다니면서 구경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길을 걷다가 피곤하면 카페에 들어가서 차를 한잔 마시거나 출출하면 식사를 하면서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솔솔하다. 나도 거리를 걷다가 점심을 먹었다.

 

 

 

 

 

 

거리의 여러 모습

 

 

거리 중앙에 있는 방위표

 

 

아름답게 핀 화단의 꽃

 

거리를 제법 걸어가면 칼레메그단 요새가 나오는데, 요새에 도달하기 조금 전 왼쪽으로 가면 사보르나교회가 있다. 세르비아 최대의 정교회로 중요한 행사가 열리는 곳인데 느낌은 카톨릭 성당과 비슷하다. 내부에는 아치형의 천장과 성화로 이루어진 벽이 눈길을 끌고 외부의 모습도 아름답다.

 

 

사보르나 교회 전경

 

 

첨탑

 

 

 

내부의 화려한 모습

 

 

 

 

 

교회 외벽및 스테인드그라스의 모습

 

 

사보르나 교회 맞은 편에 카톨릭 성당 - 문을 잠가 놓았다.

 

 

 드디어 베오그라드의 자랑 칼레메그단 요새(Kalemegdan Fortress)에 다다랐다.

 

 만약 성급한 여행자가 베오그라드를 잠깐만 구경하고 떠날 예정이라면, 세르비아 사람들은 그 여행자에게 꼭 데려가는 장소가 바로 칼레메그단 요새다. 사바강()과 도나우강의 합류지점인 스타리그라드(Stari Grad)의 높이 125.5m 지대에 위치하는 암벽 위에 있는 칼레메그단은 1세기 로마가 지배했던 시절부터 요새나 성이 서 있었으며, 현재 남아 있는 요새는 대 부분이 12세기로 예전에 파괴되어 버린 건물 위에 1740년대에 세워졌다. 성벽은 아직도 구 베오그라드 시의 경계선을 나타내고 있다.

 

 터키어로 '칼레''요새', '메그단''전장(戰場)'을 뜻한다오늘날 칼레메그단 요새는 오랫동안 침략을 받은 베오그라드의 역사와 나토의 폭격에도 여전히 온전한 모습을 유지한 채, 자랑스러운 상징으로 남아 있다. 요새의 벽 모든 곳에 남아 있는 전투의 상처는 전쟁에 시달린 베오그라드의 과거를 보여준다.

 

 이곳은 현재 베오그라드의 주요 관광 명소이다. 이 도시의 복잡한 역사가 남긴 유물로는 로마 시대의 유적, 파샤의 무덤, 천문대, 여러 개의 박물관 등이 있다. 주변을 둘러싼 공원에는 조각품이 가득하며, 또 다른 훌륭한 기념물 하나는 제 1차 세계대전 동안 도와준 것을 감사하기 위해 프랑스 국민에게 헌정한 거대한 청동 조각상이다.

 

 

칼레메그단요새 설명판

 

 

 

프랑스에 헌정한 청동 조각상

 

 

 

 

 

 

 

 

 

 

요새의 여러 모습 - 요새라기보다 공원이라고 하는 것이 마땅하다.

 

 천천히 걸으면서 주변의 풍경을 완상하다가 눈에 띄이는 풍경이 다뉴브강과 사바강 두 강이 만나는 풍경이다. 양수리의 풍경괴 비슷하게 두 강이 합류하는 아름다운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강을 끼고 있는 도시가 얼마나 아름답고, 그 강변을 바라보는 마음은 얼마나 여유로운지는 강을 낀 도시에서 살아 보아야 안다. 베오그라드 사람들에겐 다뉴브강과 사바강이 그런 곳이다. 하나도 아니고 두 개의 강이 칼레메그단 바로 앞에서 합류한다. 베오그라드를 감싸고 흐르는 두 강의 만남을 제대로 보는 방법은 칼레메그단의 오래된 성벽 끝에 걸터앉아 다리를 흔들면서 여유롭게 보는 것이다. 눈앞에 방해하는 자 하나 없는 순수한 풍광이 펼쳐진다. 베오그라드의 가장 아름다운 전망대로 꼽히는 곳이다.베오그라드의 한가한 시민들은 이곳에 낚시대를 던져놓고 물고기를 낚기도 하는데, 그들이 물고기를 낚는지 세월을 낚는지는 모르겠다.

 

 

 

 

 

두 강이 흐르면서 합쳐지는 풍경

 

 한가로이 강을 구경하다가 아래로 내려 가면 승리자라고 하는 거대한 탑이 보인다.

 

 강을 바라보고서 벌거숭이 엉덩이를 드러낸 남자의 정체는 빅토르(승리자). 세르비아가 오스만 투르크와 오스트리아-헝가리에게서 완전히 독립하게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승리자의 탑이다.이반 메슈트로비치의 작품으로 처음에는 시내 중심지에 있는 모스크바 호텔 앞에 세울 예정이었으나 1928년에 시민들이 불쾌하다고 난리를 쳐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 도리아식 기둥 위 14미터 높이로 떠있어서 누드는 제대로 보이는 게 하나 없었는데...... 아무튼 오늘의 베오그라드 시민들은 빅토르를 파리의 에펠탑과 비교할 정도로 자랑스러워 한다.

 

 

 

칼레메그단요새 구경을 마치고 다시 크네즈 미하일로바 거리를 통과하여 숙소로 가서 저녁에 오페라를 보기 위해 휴식하기로 한다.

 

 

 

크네즈 미하일로바 거리

 

저녁을 일찍 먹고 국립극장으로 향했다. 극장으로 가는 길이 보헤미안거리에는 저녁 장사를 준비하고 있는 모습들이 보였다. 극장은 그렇게 크지는 않았고, 관객도 엄청 많지는 않았으나 객석은 거의 다 찼다.

 

 

국립극장 무대

 

 

 

 

화려한 극장의 내부

 

 

 

 

공연이 끝난 뒤의 무대 인사

 

 

 2층에서 공연을 보는데 우연히 옆에 동양인들이 자리했다. 묘하게도 한국, 일본, 중국인이다. 왼쪽부터 필자, 한 사람 건너 중국의 젊은이, 그 다음이 일본인 회사원이었다. 중국의 젊은이는 휴가를 내고 일주일을 예정으로 베오그라드를 중심으로 세르비아 일대를 다닐 예정이라고 했고, 일본인은 아마도 이 오페라를 후원한 기업의 종사자인 듯했다. 하여튼 묘하게 아시아 세 국가의 사람들이 함께 오페라를 보게 된 것도 기념이라며 모두들 기뻐하고 사진을 찍었다.

 

 오페라를 구경하고 숙소로 돌아오니 너무 늦은 시간이라 잠을 청하여 자고 다음날 아침에 숙소 주변에 있는 시장에 가 보았다. 우리의 재래시장과 비슷한데 각종 채소와 과일, 꽃 그리고 여러 농산물을 팔고 있었다. 여기서 꿀을 조금 사고 구경을 하고 아침을 먹은 다음 여정을 계속하기 위해 버스터미널로 갔다.

 

 

 

 

 

시장의 여러 모습

 

 

 

 

 

 

시장 주변의 풍경

 

 베오그라드에서 길지는 않았지만 이틀을 보내면서 느낀 점을 간략하게 이야기하겠다.

다른 어떤 도시보다 여유로운 느낌을 많이 받았다. 과거와 현재가 함께 있으면서, 적당한 번잡함과 옛스러움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의 표정도 밝았고, 그들의 생활의 리듬이 아주 부드럽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이 도시는 한가롭게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이다. 언젠가 다시 시간이 되면 이 도시로 올 것이다. 여행 중에 여유를 좀 가지고 한가로이 거닐면서 먹고, 마시고, 생각도 하면서 지낼 수 있는 도시가 바로 베오그라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언제 다시 올는지....

 

 시간이 여유가 좀 있어서 시장 주위를 걸어 다니면서 구경을 하고 빵을 좀 사서 준비를 하고 숙소로 가서 짐을 챙겨 떠났다.

 

 이제 우지체로 간다.

 

 

 

 

마음대로 가는 발칸 여행 - 불가리아 소피아 2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아름다운 건물이 즐비한 소피아

 

소피아는 다른 도시와 달리 시내 중심부만 잘 이용하면 소피아의 대부분은 다 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내 중심지는 과거와 현재가 함께 혼재되어 발전하고 있다. 메트로를 파다가 발견된 고대도시 세르디카유적지를 보존하기 위해 메트로를 살짝 옆으로 틀은 것은 구 공산주의 국가에서 유적보호를 올바르게 한 대표적인 모습이다. 또 세르디카 유적지를 일반에게 공개하고 관광지로 개발한 것은 참 좋은 예이다.

 

 계속해서 소피아시내를 걸어다니며 관광하면서, 시장끼가 들면 주변의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고 좀 피곤하면 거리의 공원에서 잠깐 쉬면서 나의 특기를 살려 계속 걷는다.

 

 

아름다운 소피아 국립극장 건물

 

 계속 돌아다니다 마주친 곳이 성 니콜라이교회다. 국립자연사박물관과 인접해 있다.

 

 

 

성 니콜라이교회의 입구

 

 

 

니콜라이교회의 내부

 

 

 

니콜라이 교회의 전경

 

 니콜라이 교회는 규모는 작지만 매우 아름답고 화려한 교회이다. 원래 이곳에는 사라이 모스크가 있었는데 1882년에 기존의 사원을 파괴하고 러시아정교회가 들어선 것이다. 어디에서나 종교의 횡포가 대단하다고 생각이 든다.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였던 니콜라이 2세의 이름을 붙여서 지금의 이름이 되었는데, 건물의 공사는 1907년에 시작하여 1914년에 완공했다고 한다. 규모는 작지만, 화려한 타일 장식과 5개의 황금 돔으로 빛나는 이 러사아 정교회는 소피아의 아름다움을 더 빛내어 준다.

 

 

 

 

벼룩시장

 

 니콜라이교회 옆의 작은 공원에는 벼룩시장이 항상 열리고 있다. 그림과 제법 오래된 물건들 액서세리, 동전 구형 카메라 등등 수 많은 필요는 없는 물건들을 팔고 있다. 어떤 때는 제법 사고 싶은 물건이 보이기도 했는데 내 여행의 원칙이 물건은 사지 않는다는 것이기에 아쉽지만 눈으로 구경하면서 소요했다. 기념이 될만한 작은 물품을 사기에는 좋은 곳이지만 흥정을 잘해야 한다.

 

 

 아름다운 니콜라이교회를 뒤로 하고 시민공원옆에 있는 이반 바조프 국립극장으로 갔다. 시간이 맞으면 공연을 하나 볼 생각으로 가니 내가 소피아에 머무는 시간에 하는 마땅한 공연이 없다. 이번에 여행을 하면서 어느 도시든지 시간만 되면 꼭 공연을 하나씩 보려고 생각했는데 첫번째 시도에서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직 수 많은 도시가 남아 있다. 실망을 할 필요는 없다.

 

 불가리아에서 가장오래되고 권위있는 국립그장은 소피아의 랜드마크 중의 하나로 1904년에 설립되었으며, 불가리아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이반 바조프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화재와 전쟁으로 여러 번 재건된 건물로 극장 정면의 6개의 대리석 기둥에 바치고 있는 삼각형의 박공에는 태양의 신 아폴론과 음악의 신 뮤즈가 조각되어 있는 아름다운 건물이다.

 

 

 여담으로 이야기하면 아무리 찾아도 이 사진이 없었다. 그래서 극장 전경을 소개할 수 없어 아쉬워하다가 문득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 목록을 검색해 보니 이 사진이 있었다. 너무 반가웠다. 이 아름다운 극장의 전경을 내가 찍지 않았을리가 없는데...... 건축양식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익숙한 신고전주의 양식이다.

 

 

 

 

 

 

오페라하우스

 

 

 

내가 간 때가 3월 말 경이었는데 멀리 보이는 산위에는 흰 눈이 덮여 있다.

 

 다음으로 간 곳이, 소피아에서 가장 유명한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성당이다. 이 성당은 소피아 중심에서 동쪽 끝에 위치해 있으며, 러시아-투르크 전쟁(1877-1878)에서 불가리아 독립을 위해 싸우다 죽은 20만 명의 러시아 군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1882년 착공되어 1912년에 완공되었다.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성당(Cathedral Saint Alexandar Nevski)5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발칸반도 최대의 사원이자 가장 아름다운 사원이라고 한다.  성당의 명칭은 러시아 황제 Saint Alexander Nevsky에서 유래하였는데, 네프스키는 1240년경 벌어진 네바강변 전투에서 뛰어난 통찰력과 용기로 흉포한 스칸디나비아 유목민들로부터 나라를 지켰다.

 건물을 짓는 데 사용된 자재들은 전 세계에서 구해온 것들로, 아프리카의 설화 석고, 이탈리아의 대리석, 브라질의 오닉스 등이 포함되었다. 성당에서 가장 두드러진 45m 높이황금빛 돔이 태양빛을 받아 빛나고, 그 옆에 자리한 종탑은 총 12개의 종을 가지고 있는데 그 무게만 23톤에 달한다고 한다. 화려한 외관을 지닌 성당 내부의 지하 묘지에는 많은 성화 컬렉션이 있는데, 천 년이나 되는 세월에 걸쳐 수집된 성화들이다. 가장 오래된 작품은 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교회에는 세 개의 제단이 있다. 성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와 키릴문자를 만든 성 메토디우스와 성 키릴루스에게, 9세기에 불가리아에 기독교를 들여온 인물인 성 보리스에게 봉헌된 제단이다.

 

 그런데 문제는 내부의 사진 촬영을 금지해 놓았다는 점이다.

 

 

 

 

성당의 전경

 

 

소피아교회와의 사이에 있는 무명용사의 기념비

 

 

성당 주위의 건물인데???

 

 

성인의 프레스코

 

 

 

장엄한 성당의 전경

 

 

황금빛으로 빛나는 돔

 

 

 

입구의 아름다운 조각

 

 

무엇인가 기억이 안난다.

 

 

어느 성당에서 찍었는지가?????

 

 

국립미술관 건물

 

 

라이온 다리의 야경

 

 

 

세르디카 부근에서 멀리 보이는 파랗게 빛나는 하늘과 하얗게 쌓인 눈이 눈부신 산

 

 

 

소피아교회

 

 6세기 유스티아누스 황제의 통치기간에 세워진 교회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소피아라는 도시의 명칭과 밀접하게 연관이 있다. 전쟁과 자연재해로 건물이 거의 다 파괴되었다가 20세기에 복원과 발굴이 진행되어 4세기경에 이곳이 무덤이었음이 밝혀졌다. 아주 철저하게 내부 촬영을 금지한다.

 

 이제 소피아에서 마지막 볼거리로 국립고고학연구박물관으로 간다. 몇 번이나 지나치곤 했던 곳이다. 박물관은 시내 중심지 대통령궁을 마주 보고 있다. 원래 1474년에 지어진 9개의 돔이 있는 부육 모스크(Buyuk Mosque)로 사용된 품격 있는 사원이 1905년에 박물관으로 개관되었다. 많은 유물을 전시하기 위해 몇 번에 걸쳐 증축되었는데, 2층으로 이루어진 박물관은 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의 도구와 무기, 고대 모자이크, 종교적 성상, 도기 및 도자기가 많이 있다. 이 박물관에는 4개의 상설 전시실이 있는데 선사 시대 전시실에서 출발하여 구석기 시대를 거쳐 청동기 시대 중기에 이르는 공예품들을 구경할 수 있다. 이곳이 고대 트라키아인의 본거지였음을 보여주는 기원전 50,0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암각화 표본과 고대 트라키아의 석기를 구경할 수 있다. 중앙 전시실로 이동하면 청동기 시대 후기에서 중세 시대 후기에 이르는 공예품을 볼 수 있다. 중요한 유물로는 그리스 및 로마 조각품과 원래 모자이크 바닥을 포함한 성 소피아 교회(St. Sofia Church)의 출토품 등이 있다. 귀중품 보관실 구역에서는 금은 장식품과 보석 등 불가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고고학적 유물을 찾아볼 수 있는데 금의 무게가 총 12.5kg에 달한다고 한다. 박물관의 2층은 중세 시대 전시실로, 중세 시대의 갑옷, 가면, 그림, 도자기, 도구 등이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 앞에 흩어져 있는 유물들

 

 

 

국립고고학박물관 전경

 

 

 

 

 

 

 

 

 

 

 

 

 

 

 

역사적인 가치가 상당한 여러 유물들

 

 

박물관 내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그리스도

 

 

 

청동 투구

 

 

 

 

 

 

각종 금 세공품

 

 

어느 벽면 - 어디에서 가져 왔는지???

 

 

 

소피아 중앙 버스터미널

 

소피아 여행을 일단 마치고 다음 행선지인 베오그라드로 향했다. 불가리아는 기차보다 버스가 발달되어 있어 버스를 타기 위해 소피아 중앙역 근처에 있는 버스터미널에서 오후 3시경에 버스를 타고 출발했다. 중간에 세르비아국경에서 간단하게 입국심사를 하고 오후 9시경에 베오그라드에 도착한다.

 

 

 

세르비아 국경 검문소

 

 

 

처음 보는 세르비아 풍경

 

 

베오그라드로 가는 버스

 

 이 버스를 타고 가는데 누군가가 한국 말로 말을 건다. 놀라서 돌아보고 이야기를 하니, 말레이지아의 20대 청년으로 한국에서 유학생활을 했다고 한다. 엄청나게 살이 찐 젊은이는 같은 체구의 여자 친구와 여행 중이었다. 여자는 인도네시아인이라고 했다. 국경에서 여권심사를 하는데 이 여자에게는 조금 문제가 있는지 심사를 따로 하였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 지난 발칸전쟁에서 인도네시아가 상대방편에 우호적인 정책을 취해서 이 나라에서는 일종의 적국 비슷한 취급을 받는다고 하였다. 국제 관계는 참으로 미묘하다고 생각되었다. 직접 참전한 것도 아니고 우호적이었다는 문제로,,,,, 별다른 일은 없이 통과는 되었다. 이 청년과 한국어로 이야기를 하니 참 편리했다. 베오그라드까지는 참으로 먼 길이다. 버스에서 무료하게 잠을 청했다.

 

 

 

마음대로 가는 발칸 여행 - 불가리아 소피아 1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이제부터 발칸의 여러 나라를 무작정 돌아다닌 이야기를 하겠다. 여정을 짜면서 터키에서 시작하여 한바퀴 빙 돌고 다시 터키로 돌아오는 방법을 택했다. 그러다 보니 소피아는 두번을 가게 되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여행의 순서에 따라 전개하겠다.

 

 이스탄불에서 밤 기차로 소피아로 가기로 생각하고 시르케지역에 가서 국제선 표를 구입하니 밤 9시까지 역으로 오라고 해서 밤에 가니 버스에 태워 다른 역으로 데리고 간다. 시르케지에서 표를 팔고 출발은 이스탄불 교외의 다른 역에서 하고 있다. 소피아행 국제열차는 승객은 그렇게 많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보따리 장사꾼 같은 사람들이 제법 눈에 보이는데, 아마 이 주변 국가에서는 터키가 최고 강대국이라 상품을 사서 장사를 하는 것 같았다. 열차는 침대칸으로 예전의 오리엔트특급은 아니지만 흉내를 내는 정도인 것 같다. 밤 10시 40분에 출발하여 밤 내내 달려 다음날 오전 10시에 소피아역에 도착했다. 터키국경을 지날 때 불가리아 입국심사를 하기 위해 열차에서 내려 약 30분 정도를 지체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지장이 없이 열차는 달리고 나는 잠을 청한다.

 

 열차를 내리면 소피아역 주변애 중앙버스터미널이 있어 다음 행선지인 베오그라드행 버스를 먼저 알아보고 숙소로 정해 놓은 곳으로 갔다. 숙소로 가는 길에 소피아 재래시장이 있어 과일 등을 구입하고 숙소로 가니 예약과는 다르게 되어 있다. 그리고 무언가 기분이 좋지 않아 예약한 숙소를 포기하고 소피아의 라이온 다리옆에 있는 라이온 호텔에 숙소를 정했다.

 

 

소피아의 상징 성 소피아 상

 

 

국제열차의 내부

 

 

 

열차에서 보는 동트는 아침

 

 

소피아중앙역의 꼬마 기차

 

 

 

 

재래시장과 오렌지

 

 이 시장은 라이온호텧 맞은 편에서 조금 가면 있는데 규모가 엄청나다. 야채와 과일을 주로 파는 시장인데 때로는 소피아 주변의 마을에서 수제로 만든 요구르트나 유제품 등을 팔기도 하고 고깃집도 있어 소피아에 머문 몇 일간 요긴하게 이용했다.

 

 

 소피아는 불가리아의 수도로 소피아 분지의 해발 고도 550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 세르디카(Serdica) 또는 사르디카(Sardica)라고 불렀는데, 그리스어로 ‘지혜'를 뜻하는 소피아라는 명칭은 6세기에 로마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가 성 소피아 성당을 건설하면서 이 성당의 이름에서 붙여진 것이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 된 도시의 하나로 고대에는 트라키아인의 식민지였으며, 29년 로마에게 점령된 후 군사 근거지가 되어 교통의 요지로 발전하였다. 14세기 말부터는 투르크의 지배를 받아 발칸 반도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 지점이 되었다. 1877년 러시아에게 점령되었고, 이듬해 불가리아 인에게 넘어가 1879년 수도가 되었다. 이스탄불, 베오그라드 등과 철도와 도로로 연결되는 국제적인 교통로의 중심지이며, 농산물의 집산지이며 여러 공업이 발달하였다. 오래된 도시로 여러 유적들이 있고, 도나우강()으로 흘러드는 이스쿠르강의 두 지류가 시내를 흐르며, 배후에 산을 등지고 있어 경치가 아름답고, 푸른 숲이 우거진 공원이 많아 녹색의 도시로 알려져 있다.

 

 유명한 건축물로는 6세기에 건축된 성()소피아성당, 알렉산드르넵스키 대성당, 회교사원 등이 있고, 로마와 비잔틴, 투르크 등의 지배하에서 건축된 유적들이 있다. 부근의 온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라이온 다리 전경

 

 다음날 아침에 버스터미널에서 베오그라드행 버스를 예약하고 소피아 관광에 나섰다. 소피아는 비교적 작은 도시다. 그래서 걸어다니며 구경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숙소에서 시내로 길을 따라 걸어가니 눈에 아름답고 멋진 건물이 들어왔다. 무슨 궁전과 같은 모양이지만 소피아 공중목욕탕이다.

 

 

 

 

공중목욕탕 전경

 

 

 

목욕탕 외부에 온천수가 나오는 수도시설

 

 줄무늬의 모습이 우아하게 보이는 이 건물은 1986년까지 소피아의 공중목욕탕으로 사용되었다 한다. 1908년에 완공되어 1913년부터 사용된 이건물은 2차 세계대전 때 일부가 손상되었으나 복원하였고, 1986년까지 목욕탕으로 사용되었다가 지금은 도시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지금도 건물안에서 바깥으로 온천수가 흘러나오고 시민들은 이 물을 생수로 이용하기도 한다.

 

 목욕탕 옆에 바냐바시 모스크(Banya Bashi Mosque)가 있다. 이슬람 사원으로 1576년 오스만투르크 지배 당시에 지어진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이슬람 사원 중의 하나이다. 소피아에는 과거 70개에 달하는 모스크가 있었으나, 현재는 바냐바시만이 이슬람 사원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바냐바시라는 이름은 모스크 옆의 공중목욕탕에서 유래되었고, 오스만투르크제국의 최고 건축가인 미마르 시난(Mimar Sinan)이 설계하였다. 이 모스크는 붉은 외벽, 15m의 거대한 돔과 첨탑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철저하게 내부를 비공개로 하고 있다.

 

 

 

 

 

 

 *고대도시 세르디카 유적

 

 소피아의 중심부에 있는 세르디카의 유적지는 공산당 본부 앞 광장의 메트로 공사 때 발견된 고대도시의 유적으로 지금도 계속 발굴중이다. 세르디카(Serdica)는 소피아의 옛 지명이었다. 3세기경 로마인들에 의해 세르디카 지역에 강력한 성벽들이 건립되었으며, 지금 이곳에서 발굴된 유적은 세르디카의 시내를 구성하던 동문에 해당하는 성벽과 2개의 5각형 탑이다. 이것은 지하도를 건너가면서 구경할 수 있으며, 지하도에는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성곽의 모형과 발굴의 기록사진들이 전시돼 있다. 세르디카 고대도시의 많은 유적들이 현대 건물들 아래에 남아있다.

 

 

 

 

 

세르디카 유적지에서 보는 성 소피아 동상

 

 시내 중앙 광장에 자리한 성 소피아 동상은 공산주의 시절에 레닌 동상이 있던 곳에 대신 세워진 것이다. 24m 높이로 한 손에는 월계관을, 한 손에는 지혜의 상징인 부엉이가 앉아 있는 소피아의 수호성인이다.

 

 

 

 

 

 

 

 

 성 페트카 지하교회(St. Petka Samardjiiska Church)는 세르디카 유적 끝부분에, 독립 광장에서 바라보면 지붕만 나와 있는 불가리아 정교회로 페트카성인에게 바쳤다는 지하교회. 오스만투르크 지배 당시인 14세기에 건축되었으며 오스만투르크 지배 당시 투르크인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지하에 지었다고 한다.

 외부는 타일이 벗겨지고 깨어져 볼품이 없으나, 내부의 15, 17, 19세기 프레스코는 예수의 출생, 기적, 고통, 십자가에 못 박힘, 죽음과 부활 등의 다양한 삶의 면모를 매우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고 하나 출입을 금지해 놓았다. 미술역사가들은 이를 중세회화의 매우 귀중한 삽화이며, 오스만투르크시대의 불가리아 미술이 발전했다는 증거라고 말한다. 또 교회에는 19세기 불가리아 혁명가이자 국민적인 영웅인 바실 렙스키가 묻혀 있다고도 한다.

 

 

세르디카에서 보는 바냐바시모스크

 

 세르디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성 네델리야 교회(Sveta Nedelya Cathedral)가 있다. 우아한 네오비잔틴 양식의 옥색 돔이 눈길을 끄는 불가리아정교회의 교회로 소피아 쉐라톤 호텔 앞에 있다. 처음에는 10세기 경에 지어졌다고 하나 수차례 소실되고 파괴되어 재건되었다. 지금의 교회는 1856년에 건립을 시작하여 1863년에 완공되었다. 네오 비잔틴 건축의 대표적인 양식인 돔은 1898년에 증설된 것이다. 내부에는 화려한 벽화로 꾸며진 인테리어가 특징적이다. 1925년 차르 보리스(Boris) 3세가 참석한 장례행사에서 공산주의자들의 폭파로 거의 파괴되었다가 1927년부터 1933년까지 재건하였다. 폭파사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교회 남쪽 입구 가까이에 있는 조그만 명판에 기록되어 있다. 내부에는 1971년부터 1973년 사이에 Nicolay Rostovtsev가 제작된 벽화를 볼 수 있다.

 

 

 

 

 

 

 

네델리야교회의 내부

 

 

 

네델리야교회 설명판

 

 

 

 

 

네델리야교회 외부의 여러 모습

 

 성 게오르기 교회(St. George Rotunda)는 세르디카유적의 하나로 쉐라톤 호텔과 대통령궁이 둘러싸고 있는 소피아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 중의 하나다. 4세기에 로마인에 의해 지어져 로마시대에는 교회로 사용되다가 터키 지배시에는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었으며,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이곳 소피아에 매료되어 그의 로마로 칭하고 도시를 방문할 때마다 장대한 의식을 행하였으며, 이를 위해 훌륭한 건축물들을 건립하였다고 하는데, 그 시대를 대표하는 다양한 건축물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이 바로 성 게오르기 교회다. 이 교회는 정교한 건축물과 4,10,12,14세기에 걸쳐 여러 번 채색된 프레스코화로 유명하다는데, 사진촬영을 전면적으로 금지하였다.

 

 

 

 

 

 

 

 

현대식 건물과 묘한 앙상불을 보이는 성 게오르기교회

 

 

시내에서 보는 풍경 - 멀리 눈덮인 산이 보인다.

 

 

 

 

시내풍경 - 구 공산당 본부

 

 

 

국립고고학박물관 앞 광장 - 박물관은 다음 날 보기로 하고 지났다.

 

 

 

 

 

 

대통령궁의 근위병 교대식

 

 대통령궁이 시내 한복판에 있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과 관광객들이 자유롭게 그 앞을 지나다니며 구경을 한다. 대통령궁 주변에는 많은 관광지가 있어 아무도 통제하지 않는다. 권위지향적인 면을 벗어난 것이 보기에 좋았다. 또 시간을 맞추면 근위병 교대식도 볼 수 있다.

 

 

 

 

시내 공원의 모습

 

 소피아 시내는 그렇게 크지 않고 볼 만한 유적이 거의 한 곳 주변에 모여 있다. 여러 곳을 구경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지만 거리상으로는 멀지 않아 편하다.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알차게 관광을 할 수 있는 곳이 소피아다. 또 소피아는 특이하게 자유로운 투어를 실시하고 있었다. 누구든지 신청만 하면 무료로 가이드가 이끌고 다니면서 안내를 한다. 물론 시간이 정해져 있고 단체로 움직인다. 하지만 제법 알찬 것 같았다.

 가이드의 수고비는 안내가 끝났을 때 알아서 팁을 주면 돈다고 한다. 한번 참여해 보아도 좋을 듯했다.

 

물론 나는 내 마음대로 움직였지만......

황새바위 - 천주교 순교자 성지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황새바위 - 공주천주교순교유적[公州天主敎殉敎遺蹟]

 

 황새바위는 공주중학교 앞의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원래 황새바위라는 지명은 이곳 바위 위의 소나무에 황새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라고 하지만, 천주교 신자들이 사학죄인의 죄목으로 목에 항쇄(項鎖)’를 두르고 이곳에 끌려나와 처형을 당했다는 사실에서 유래한 명칭이라고도 한다.

 

 황새바위에서 최초로 순교한 천주교인은 신유박해 때 순교한 이존창(1759~1801)으로 180149일 이곳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그 뒤 많은 천주교인들이 이곳에서 참수형을 당했고, 1866년부터 시작된 병인박해 때 공주에서 순교한 사람으로는 기록상 190 여명이 확인되는데, 이들 중에서 다수가 이곳 황새바위에서 순교했을 것이라 짐작한다. 이곳에는 이름이 전해지는 순교자만 248명이며, 이름도 전해지지 않는 많은 천주교인들이 순교하였다.

 

 19146월 간행된 ‘Im Lande der Morgenstille(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는 책자에서 독일의 신부 노르베르트 베버(Norbert Weber)가 '공주의 형장에서 사형수의 무덤을 바라봄'이라는 제목의 삽화를 그려 황새바위에 대한 관심을 처음으로 표현하였다. 국내에서 그 뒤 여러 과정을 거쳐 황새바위 성역화 사업 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본격적인 성지개발에 나섰다. 1985년 기록상 전해오는 순교자 248명의 이름을 내부에 새긴 무덤경당과 순교탑 등을 완공하고, 무덤경당 앞 광장에 12사도를 상징하는 돌기둥을 세우고 고통의 성모자상(聖母子像)을 안치하고 십자가의 길을 조성했으며, 200211월에는 대경당을 완공하였다.

 

 황새바위 천주교순교지는 20081월에 교동본당에서 분리되어 독립 성지가 되었다.

 

 

황새바위 예수 그리스도상

 

 

 

황새바의 후문 표지석

 

처음에 공주 공산성을 향해 가다가 길을 잠깐 잘못 들어 간 곳이 황새바위 후문이었다. 사실 황새바위라는 것이 있는지도 모르고 왔다. 그냥 지나갈 뻔하다가 다시 정문을 찾아 답사를 했다.

 

 

정문 표지석

 

 

성전 전경

 

 입구를 조금 올라가니 조그마하지만 아담하고, 경건하게 보이는 성전이 있다. 일요일이라 혹시 미사를 드리면 나도 참여하려고 들어가니 미사가 끝나가고 있다. 잠시나마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를 한 후 나왔다.

 

 

 

성전 옆에 있는 화단과 그리스도상

 

 성당에 가면 예수 그리스도 상을 많이 본다. 그런데 대부분의 그리스도상은 고난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우리 인간의 죄를 모두 짊어지고 형장에서 못에 박혀 돌아가시는 모습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 그리스도상은 너무나 인자하다.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모습이다.

 

 

 

성지로 올라가는 문

 

 아주 좁은 문이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폭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좁은문의 의미가 생각난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마태오 복음서 7장 13-14절,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우리말성경)

 

 

기도소

 

 

 

 

열 두개의 빗돌

 

 

 

무덤경당의 전경

 

 

 

 

 

 

 

 

무덤경당의 내부

 

 

 

황새바위 순교성지 안내판

 

 

 

 

 

 

황새바위에서 순교한 사람들의 이름을 12개의 빗돌에 모두 새겨 놓았다.

 

 

 

순교자의 모후상

 

 

 

 

 

부활성당의 외부와 내부

 

아주 작은 성소이지만 무엇인가 경건함을 느끼게 하는 곳이다.

 

 

성지에서 보는 공주중학교

 

공주중학교 출신으로 메이저 리그에서 크게 활약한 박찬호의 모습이 간판으로 서 있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전혀 뜻하지 않은 곳을 보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자기가 목적지를 정해 놓고 차로 이동하면 이런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나와 같이 걸어다니면서 주변을 보면서 길을 찾아가면 많은 곳을 볼 수가 있다. 이 황새바위도 마찬가지이다. 이곳에 천주교 성지가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는데 뜻밖에 좋은 답사를 하게 되었다. 여행중에 잠시나마 경건한 마음을 가지게 해 주는 곳이었다.

 

 

 사족을 하나 붙이면 성지를 답사하면서 경건하게 올라가니 좁은 문위의 뜰에서 어디에서 왔는지 한 무리가 성지를 참배하고 점심을 먹고 있었다. 부페로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지나가는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고 나 혼자였는데 남은 음식이 많이 있었지만 식사를 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예수님의 사랑이 아직은 우리 실제 생활에는 실감되지 않은 것같아 씁쓸했다.

 

 그런데 이것도 나의 욕심이 아닌지......

 

 

공주 - 땅속에서 지켜온 천오백 년 시간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공주는 천오백 년의 시간을 건너 우리에게 왔다.

 

 부여를 떠나 공주로 향했다. 공주를 와 본 지도 어느 새 많은 시간이 흘렀고, 참 많이 변했다는 느낌이 든다. 공주에 아는 지인이 있어 함께 저녁을 먹고 공주한옥마을에 숙소를 정했다. 전주의 한옥마을을 본 떠 만든 것 같은 데 가격이 비교적 합리적이고 시설이 깨끗하고 좋았다. 장점을 덧붙이면, 이 한옥마을 주변에 공주의 대부분의 유적지가 자리하고 있어 걸어서 돌아다니기가 편리했다.

 

 공주는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기기 전에 475년부터 538년까지 64년 동안 백제의 수도였다. 북방진출을 꿈꾸던 개로왕이 강성한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전사하고 한성이 함락당해 밀려 내려온 곳이 바로 공주이다. 그러다가 성왕이 좀더 기름지고 국가의 큰 뜻을 펼칠 수 있는 곳을 찾아 부여로 다시 도읍을 옮겨가면서 공주는 역사에서 제 역할을 다했다고 하겠다. 물론 공주는 백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몇 곳 보이지 않는 구석기 유물이 석장리 금강가 언덕에서 발견되어 구석기 시대에도 이 땅에 사람이 살았음을 맨 먼저 알게 된 곳이다.

 

 백제 이후로 잊혀진 고장이었던 공주가 역사의 장소로 크게 떠오른 것은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다. 그 전쟁의 마지막 격전지가 되었고 그 상흔이 검붉은 핏빛으로 이곳에 남아 오늘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공주에서는 공산성이 꼭 올라야 할 곳이다. 금강을 북으로 하고 천연의 요새를 이루어 백제의 왕도로 선택된 곳이기 때문이다. 지금 백제 때의 유적이야 남아 있지 않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역사의 숨결을 느끼기에 이보다 좋은 곳은 없을 듯하다.

 

 공주를 내가 기억 하는 것은 곰나루 못미처 있는 무령왕릉이다. 무령왕릉이 없었다면 공주는 지금처럼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고, 그저 조용한 시골 소도시로서 만족해야 했을 것이다. 1971년에 아무도 손대지 않고 온전하게 발굴된 무령왕릉이 우리에게 백제 역사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를 너무나 많이 제공하고 있다.

 

 

공주 공산성

 

 

 

 

 

한옥마을의 모습

 

 

인조임금 공주 파천 기념비

 

 

고려현종임금 기념비

 

 

 

 

 

한옥마을의 여러 모습

 

 

 

 

충청도포정사

 

 

한옥마을의 전경

 

 한옥마을에서 한 200m 정도 떨어진 곳에 공주박물관이 있다. 내가 예전에 보던 박물관이 아니었다. 새로 지어 옮긴 것이다. 박물관이 옮긴 것도 모르는 시간을 내가 공주에 오지 않은 것이라 생각하니 세월이 많이 흘렀음을 실감한다. 옛날 조그마한 박물관이 지금은 현대식 건물로 제법 크게 자리잡고 있다.

 

 

박물관 입구

 

 

공주박물관 건물

 

 

 

 

박물관 건물입구에 있는 부처님

 

 위의 사진을 보면 부처상 뒤에 바로 광배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부처님과 광배는 거리가 제법 떨어져 있다. 사진을 찍으면 가장 잘 나오는 거리를 두고 배치해 놓았다. 관람객을 위한 서비스라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조그마한 일이지만 관광객을 배려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박물관을 들어서니 바로 보이는 것이 무령왕릉이다. 물론 실체가 아니고 모형이다. 무령왕릉은 백제 무령왕과 왕비가 합장된 능으로 1971년 여름, 송산리 고분 배수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 전혀 도굴당하지 않은 완전한 상태로 발견되어 당시에 언론을 흥분시켰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 때 급하게 서둘러 발굴조사를 진행한 결과(혹자들은 하루에 발굴을 마쳤다고도 한다.) 위대한 발견임에도 불구하고 50년이 가까이 흐른 지금까지도 졸속 발굴이라는 지탄을 받고 있다.

 

 내가 이것을 보려고 공주에 왔는지 모른다.

 

 처음 무령왕릉을 보았을 때가 언제였던가? 아마 발굴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 기억이다. 그 때는 왕릉의 현실이 모두 공개되어 왕릉안으로 들어갔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그 뒤에 한 십년이 지나서는 박물관으로 완전히 만들어져 무령왕릉을 뒤에 두고 공주박물관이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왕릉과는 제법 떨어진 곳에다 박물관을 만들고 왕릉의 모형을 만들어 놓았다. 지금 진짜 왕릉은 보존을 위해 폐쇄되어 다시는 보지 못하겠지만 모형이라도 구조를 그대로 만들어 관람객에게 구경하게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무령왕릉에 대한 구체적이고 학문적인 내용은 모두 인터넷이나 서적 등을 통해 전문가의 의견을 참조하기를 바란다.

 

 

무령왕릉 표지

 

 

 

 

 

 

왕릉의 수호자 석수

 

 

 

 

왕과 왕비가 누웠던 자리 모형

 

 

 

 

왕과 왕비의 금동신발

 

   

 

각종 장신구

 

 

금 귀걸이 - 아주 섬세하고 화려하면서 아름다운 세공에 감탄한다.

 

 

 

 

왕과 왕비의 왕관 장식

 

무령왕릉은 무덤의 주인이 정확하게 밝혀진 고대무덤이라는 것뿐만 아니라, 피장자가 백제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군주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되었다. 무덤 안에서는 모두 4,600여 점에 이르는 다량의 유물이 발굴되었으며, 절대연대가 확인된 유물로서 백제사는 물론 한국 미술사 연구에 있어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

 

 

농경문 청동기

 

 

 

계유명 천불비상의 앞 뒤

 

 

관음보살상

 

 

 

불상좌대 - 뒤에 홀로그램으로 불상의 모형이 비친다.

 

 박물관 건물을 나와 뜰에 가면 엄청난 크기의 석조가 있다. 부여박물관의 석조로 비슷한 용도로 만들어진 것인데 그 당시에 이런 거대한 석조를 만든 이유가 무엇일까? 하고 의문을 가진다.

 

 

 

공주 대통사 석조

 

  공주박물관은 규모가 크지 않고 소장품도 많지 않지만 알차게 전시된 소장품을 감상하는 것은 큰 즐거움이다.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유물을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느끼며, 박물관을 나와 송산리고분군으로 간다. 공주에 왔는데 송산리고분군을 보지 않고 지나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고분군을 보고는 역시 실망만 했다. 전부가 보존을 이유로 폐쇄해 놓았기 때문이다. 한 15년전에 이 송산리고분군에 왔을 때는 전부는 아니지만 내부를 볼 수 있는 고분이 있었는데.....

 

 

송산리고분군(무령왕릉) 입구

 

 

 

 

무령왕릉의 모형

 

 

 

 

입구를 봉쇄해 놓은 송산리 고분

 

 

 

유네스코 세계유산 표지

 

 

송장배미 표지

 

 공주 시내에서 곰나루로 이어지는 길 웅진동에 용못이라고 불리는 못이 하나 있다. 이 용못에 붙어 있는 논이 바로 ‘송장배미’이다.  동학농민전쟁 때 희생된 동학농민군의 시체를 한 곳에 모아 이곳 송장배미에 묻었다고 한다. 그 후 이곳에서 사람의 뼈와 해골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고, 이 논의 주인이었던 故 이상필 씨가 해마다 칠월 칠석에 제사를 지내왔다고 한다. 당시 농민군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송장배미 표지석과 조형물을 함께 설치해 매년 동학혁명을 기억하는 이들의 주요 순례지로 남아 있다.

 

 

 이곳을 지나면서 잠시 길을 잘못들어 시간을 좀 허비하였다. 그리고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이 공산성이다. 공산성도 많이 변하였다. 완전히 시가지로 주변이 관광지로 되었다.

 

 공주 시내 산성동에 있는 공산성은 백제 문주왕 1(475)에 웅진으로 천도하였다가 성왕 16(538)에 부여로 천도할 때까지 564년간의 도읍지인 공주를 수호하기 위하여 축조한 성으로 동서로 약 800m, 남북으로 약 400m 정도의 장방형을 이루고 있는, 총 연장 2,660m로 해발 110m의 능선에 위치하고 있는 자연의 요지이다. 원래는 백제시대의 토성이었던 것을 조선시대 때 석성으로 다시 쌓은 것이다. 조선시대 인조대왕이 이괄의 난을 피해 이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공산성 금서루 전경

 

 

 

금서루가 는 길

 

 

현대에 복원한 급서루

 

 

 

 

공산성 성벽 길

 

 

성벽에서 보는 금강

 

 

성벽 길에서 보는 북문 주변

 

 

공북루

 

 

금서루의 모습

 

 

망이 망소의 난 설명판

 

 

 

 

관광객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옛 성을 경비하던 군사들을 젊은이들이 재현한다.

 

 

 

 

공산성 금서루 일대 전경

 

긴 세월이 흘러 공산성에서 백제의 모습을 찾아보는 것은 어렵다. 그저 여기가 한 때나마 백제가 도읍을 정하고 있었다는 곳이라 생각하고 무심히 흐르는 금강을 보면서 저 강물처럼 흘러간 세월을 회상해 보는 것이다.

 

 

공산성 입구에 있는 무령왕릉 모형문

 

 공산성을 끝으로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짧은 백제 여행을 긑낸다. 혼자서 여행하는 재미를 사람들은 잘 모른다. 나를 아는 친구들도 혼자서 여행을 가는 나를 조금은 이상하게 본다. 하지만 여행의 참 맛은 혼자 가는 것이라고 나는 항상 생각한다. 여럿이 가는 것은 여행이라기보다 놀이에 가깝다. 여럿이 가면 반드시 의견의 불일치가 있다. 그래서 여행은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몇 일이 지나지 않아 싸운다는 말이 있다. 진짜 성향이 완전히 일치하거나, 아니면 한 쪽이 완전히 양보하지 않는다면, 사람 사이란 항상 좋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편안할 때는 좋았다가도 여행을 몇 일 하다가 피곤해지면 짜증이 나는 것이다. 상대를 이해해주지는 않고 자신의 피로함만 내세우며 싸우는 것이다. 그러나 혼자 여행은 그런 걱정이 전혀 없고, 내가 가고자 하는 대로, 내가 보고자 하는 대로 즐기면 되는 것이다.

 

 여하튼 백제를 조금이나마 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새벽의 고장 부여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갑자기 백제가 보고 싶어졌다.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서 부여로 향했다. 언제나 어디를 가서 무엇을 보고 싶으면 집을 떠나는 나를 보고 옛날부터 할머니와 부모님은 역마살이 끼였다고 했다. 하지만 떠나고 싶은 충동이 일면 떠나야만 마음이 편했다. 40년전 옛날대학을 다닐 때는 수업을 하던 도중에도 강의실을 나와 몇 일을 돌아다니다가 학교로 가곤 했는데, 그 때 교수님들이 이해를 잘 해 주셔서 무난하게 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열차를 타고 대전역에 내려 부여행 버스를 타고 시외버스터미널에 내리니 예전에 알던 부여가 아니라 너무 생소하다. 부여도 내가 나이를 먹은 것 처럼 참 많이 변했다.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가 사비성, 곧 부여다. 부여는 새벽의 땅으로 날이 부옇게 밝았다는 말에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한다. 고요한 고장으로 태평성대를 누릴 것 같은 부여는 나당 연합군의 침략으로 그 평화가 완전히 무너졌다. 이때 삼천궁녀가 낙화암에서 몸을 던졌다고 전해져 온다.

 백제의 고도 부여는 역사 속의 영화만 남긴 채 얼마 안 되는 백제 유적과 유물을 국립부여박물관에 두고 오늘도 말없이 흐르는 백마강과 부소산 낙화암 자락에 묵묵히 자리하고 있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공주의 서남쪽이 부여인데, 백마강변이며 백제의 옛 도읍터다. 조룡대, 낙화암, 자온대, 고란사는 모두 백제시대의 고적이며, 강변에 맞닿은 암벽이 기묘하고 경치가 매우 훌륭하다. 또 땅이 기름져서 부유한 자가 많으나, 도읍 터로 논한다면 판국이 좀 작고 좁아서 평양이나 경주보다는 훨씬 못하다라고 기록하였다.

 

 

백제의 자랑 백제금동대향로

 

 

성왕상

 

 

 

유적지 복원과 표지판

 

 

 

백제역사유적지구 설명판

 

 

 

부여현관아와 옛 부여박물관 건물

 

 

유네스코 세계유산 표지

 

 부소산성 앞에서 점심을 먹고 주인과 여러 이야기를 하였다. 주인은 부여도 많이 개발되고 변하였다고 하며 부소산성을 비롯해서 돌아볼 지역을 이야기 한다. 물론 나도 알고 있는 곳이지만 주인의 친절함에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부소산으로 향한다.

 

 부소산은 쓸쓸함 그 자체이다. 영화롭던 왕성은 자취도 없어지고 지금 유적이라고 남아 있는 것은 모두가 현대에 복원한다고 지은 것인데 얼마나 예전의 모습을 보여 주는지가 의문이다. 부소산은 부여의 진산으로 해발 100미터 정도 남짓한 작은 산이다. 백마강은 부소산을 동쪽으로 끼고 돌아 남쪽에 넓은 평야를 이루고 다시 동쪽으로 굽어 흘러 강경을 거쳐 서해 바다로 흘러간다. 북으로 강을 두르고 바로 산으로 막아선 배산임수의 형상이 북쪽에서 내려오는 고구려 군사를 방비하기에 알맞게 되어 있는 점에서 공주의 공산성과 흡사하다. 아마도 그 때 백제는 신라보다는 고구려를 더 경계하였던 모양이다.  이 부소산성은 백제의 초기 도읍지로 추정되는 경기도 하남 위례성터와 함께 백제식 도성방식을 보여준다.

 

 이 부소산에 있는 왕궁과 시가를 방비하는 최후의 보루였던 부소산성이 완성된 것은 성왕이 538년 수도를 사비로 옮기던 무렵으로 보이나, 그보다 앞서 동성왕500년경에 산봉우리에 산성을 쌓았다. 부소산 안에 백제 군대의 곡식 창고라 할 수 있는 군창터가 발굴되었는데, 검게 탄 쌀과 보리 콩 등의 곡식이 발견됐다. 이는 나당연합군이 쳐들어오자 백제군이 군량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불을 질렀던 흔적으로 추정한. 부소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사자루 아래, 백마강을 시원하게 볼 수 있는 6모 지붕의 백화정이 있다.

 

 

부소산 올라가는 입구의 산문

 

 

 

부소산 올라가는 길과 부소산 유적지 이정표

 

 

 

 

 

  

 

삼충사에 모신 백제의 충신 - 좌에서부터 성충, 흥수, 계백의 초상

 

 

 

 

영일루

 

 

 

 

 

군창지 설명판과 유적구조도

 

 

 

 

군창지

 

 

 

 

 

 

 

 

 

부소산성 수혈거주지

 

 

반월루

 

 

 

반월루에서 보는 풍경

 

 

 

 

사자루

 

 

사자루에서 보는 풍경

 

 

백마장강 현판

 

 

 

사자루에서 보는 백마장강의 풍경

 

 

 

백화정

 

 백화정은 부소산 정상 아래 백마강가 절벽에 위치한 육모정이다. 이곳에서 백마강 전경이 한눈에 들어 온다. 이름만으로는 100가지 꽃이지만, 낙화암에서 강물에 몸을 던진 궁녀를 생각하면, 백화는 곧 궁녀를 지칭하는 것이리라. 정자에 올라 넓게 펼쳐진 강 풍경에 시원함을 느끼다가도 금방 그 옛날 부여를 생각해 보면 아득하다. 아름다운 백화가 강물이 되어 흐른 곳이다.  이곳은 백제 역사의 흥망과 삼천궁녀의 한이 서린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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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화암 설명과 주변

 

  예전에는 이 낙화암 바위위에 올라갈 수 있었는데 지금은 안전을 고려하여 목책을 둘러 놓았다. 그저 여기가 낙화암이라는 설명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알 수가 없다. 좀 더 이곳을 관광객에게 자랑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고 생각한다. 낙화암에 전하는 이야기는 너무 과장이다. 삼천궁녀가 몸을 던졌다. 믿을 수 있는 숫자인가? 그 때 인구가 얼마인데 궁녀가 삼천명이 몸을 백마강에 던졌다는 말인가? 그러면 몸을 던지지 않은 궁녀까지 포함하면 왕성의 규모는 상상을 할 수 없을 정도여야 한다. 그저 그러러니 하고 지나가야 한다.

 

 

고란사전경

 

 

 

 

 

고란사보다 더 유명한 고란약수

 

 예전의 멋이 없어졌다. 현대식 정자를 겉에다 지어 약수터를 보호하고 있으나 잘못된 일이다. 바위틈에서 나는 샘물인데 자연 그대로 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고란초가 약수 주위에 자생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멋도 없다. 보존이라는 이름 아래 원래의 모습이 파괴되고 있다.

 

 고란사 뒤편의 약수는 백제 왕들의 어용수(御用水)로 유명하다. 임금이 고란사의 약수를 마실 적에 물위에 고란초 잎을 띄웠다. 고란초에 대해서는 조선 세종 때 편찬된 향방약성대전에 수록되어 있는데, 고사릿과에 속하며, 한방에서는 화류병(花柳病)에 즉효약으로 쓰였다고 한다. 신라의 고승 원효가 백마강 하류에서 강물을 마셔보고 그 물맛으로 상류에 고란초가 있음을 알았다는 황당한 이야기마저 전하는 신비의 여러해살이 풀이다 

 

 

백마강 유람선 고란사 선착장

 

 백마강 유람선을 탈까? 말까? 하고 잠시 고민하였다. 그러다가 그래도 백마강에 왔는데 달밤은 아니지만 유람선은 타야 백마강의 흥취를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해서 타기로 했다. 구드래선착장까지 운행한다.

 

 

백마강 유람선 황포돛배

 

 

 눈이 붉어 눈불개로 불리는 물고기로 관상용으로 그물로 막아 기르고 있다.

 

 

 

 

 

 

 

 

유람선에서 보는 백마강

 

 

구드래 선착장

 

 오늘도 구드래 나루터에는 백제 역사의 아픔만큼이나 애절한 백마강 뱃노래가 시도 때도 없이 흘러나온다. 부소산 낙화암에서 바라보는 백마강은 쓸쓸하기만 하다.

 

 

 

선착장에 정박하고 있는 황포돛배와 운항중인 배

 

 

 구드래선착장에서 부여박물관으로 가려니 거리가 제법 된다. 걸어가기에는 좀 멀고 시간도 아끼기 위해서 택시를 타려고 하니 택시가 없다. 선착장에서 택시를 발견하고 물으니 대기중이라면서 콜을 해서 택시를 불러 준다. 그리고 부여에서는 거리를 운행 중인 택시는 거의 없다고 하며 반드시 콜을 해서 택시를 타라고 한다. 택시를 기다려 타고 부여박물관으로 갔다. 이곳 역시 예전에 보던 곳이 아니다. 부소산성에 있던 구박물관이 더 조형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너무 현대식으로 지은 건물이다. 하지만 건물을 보려고 오지 않았다. 소장하고 있는 소중한 유물이 보고 싶었다.

 

 

국립부여박물관 전경

 

 

 

넓게 자리잡은 박물관 경내

 

 

동남리석탑

 

 

아름다운 동사리석탑

 

 박물관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중앙에 엄청나게 큰 석조가 맞이한다. 엄청나게 큰 돌 내부를 파내어 물 등을 보관하는 용기로 사용되었다 한다. 옛날에 이 돌을 파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을까? 하고 생각한다.

 

 

 

 

부여석조와 설명팜

 

 

 

 

박물관 소장품

 

 

 

인물무늬 기와(능산리 출토)

 

  드디어 백제금동대향로실에 왔다. 어쩌면 이 것을 보기 위해서 부여에 욌는지도 모르겠다. 무어라 전문적으로 설명할 지식이 없으니 설명은 모두 지식검색으로 찾아보시를... 

 그저 눈으로 보고 즐기며가슴으로 느낄 뿐이다.

 

 

 

 

 

여러 방향에서 보는 대향로

 

 

 

 

 

 

 

 

각 부분을 확대한 모습

 

 

 

너무나 유명한 칠지도

 

 

치미

 

 

서산마애삼존불

 

 깜짝 놀랐다. 여기에서 서산마애삼존불을 보다니..... 내가 우리나라의 각지를 돌아다니며 감동을 받은 곳이 그렇게 많지 않는데, 최고의 감동을 받은 곳이 서산마애삼존불이다. 한 20년도 더 된 어느 날, 서산마애삼존불을 찾아갔을 때가 아마 오후 1시경이었다고 생각되는데 햇빛이 삼존불의 얼굴에 비추었는데 그 순간 삼존불의 미소를 나는 평생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온화하고 평화롭게 보이는 미소.... 온 세상을 다 정화시키는 미소..... 말로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저 멍하게 바라만 보았다. 같이 갔던 일행이 무엇을 보는지 물었을 때도 아무런 말도 못했다. 다른 사람은 그 미소를 보지 못했다고 한다. 책에서 이론적으로 설명하던 '백제의 미소'라고 나는 지금도 생각하며 다시 그 감흥을 느끼기 위해 서산마애삼존불을 보러 가려고 항상 생각 중이다. 그런데 여기에 서산마애삼존불이 있다니, 놀라서 다시 보니 모조품이다. 그래도 반갑기가 한량없다.

 

 

 박물관을 나와 정림사지로 향했다. 

정림사지는 부여 읍내 한가운데에 있다. 정림사 터는 1942년 발굴했을 때에 대평팔년정림사대장당초(大平八年定林寺大藏當草)’라고 새겨진 기와조각이 발견돼 비로소 이 절의 이름이 밝혀졌다. 아무런 자취도 제대로 남은 것이 없는 정림사지를 빛나게 하는 것은 바로 절터 가운데 의젓하게 자리한 국보 9호 정림사지 5층석탑이다. 이 석탑은 돌로 세운 탑인데도 나무로 세운 듯이 부드럽고, 실제로 목조탑처럼 기둥과 모서리에 배흘림 기법이 남아 있고, 지붕을 받치고 있는 받침돌은 목조 건축에서 보이는 두공처럼 모서리를 둥글게 다듬어 마무리했다. 특히 지붕선은 처마를 살짝 들어 상승감을 주어 경쾌하게 마감했고, 전체적인 미감이 목조탑을 보는 것같이 부드럽다. 백제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은 부여에서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이 정림사지 5층석탑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직도 탑이 해체되지 않은 원형 그대로의 탑이니, 복장(腹藏)에 무슨 보물이 들어 있는지는 뒷날의 조사에 의해 밝혀질 것이다. 정림사지 5층석탑은 금석학에서도 중요한 유물로, 오층석탑의 기단부에 당나라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그 공을 기록한 대당평제탑(大唐平齊塔)’이라는 글이 낙인처럼 찍혀 오욕을 견디며 긴 세월을 꿋꿋하게 서 있다. 추사도 이 탑의 글자를 배관하고 그 옆에 배관기를 각해 놓았다. 역사의 쓰라린 아픔을 온몸에 새기고 천년의 세월을 버티고 서 있는 모습이 애처롭다.

 

 

 

정림사지 전경

 

 

 

 

 

오층석탑의 사면

 

 

 

 

정림사지터

 

 

유네스코 문화유산 표지

 

 

 황량한 정림사를 뒤로 하고 궁남지로 간다. 궁남지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 연못 정원으로, 삼국사기무왕 35(634) 조의 “3월에 궁 남쪽에 못을 파 20여 리 떨어진 먼 곳에서 물을 끌어들이고, 못 언덕에는 수양버들을 심고 못 가운데는 섬을 만들었는데, 방장선산(方杖仙山)을 모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궁남지는 6월경부터 많은 연꽃이 피면 주변을 거닐며 산책하는 재미가 우리를 즐겁게 해 준다. 하지만 내가 간 5월은 황량하였다. 그래도 인공적인 연못을 한가로이 거닐면서 백제의 숨결을 호흡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궁남지의 여러 풍경

 

 

 쓰라린 역사를 지닌 부여에서 내세우는 부여팔경은 부소산과 낙화암 그리고 그 아래를 흐르는 백마강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진 경치다. 미륵보살상과 탑 하나 덜렁 남은 정림사지에서 바라보는 백제 탑 뒤의 저녁노을과 수북정에서 바라보는 백마강가의 아지랑이, 저녁 무렵 고란사에서 들리는 은은한 풍경 소리, 노을 진 부소산에 이따금 뿌리는 가랑비, 낙화암에서 애처로이 우는 소쩍새 소리, 백마강에 고요히 잠긴 달, 구룡평야에 내려앉은 기러기 떼, 규암나루에 들어오는 외로운 돛단배로 장엄하고 화려한 경치라기보다는 무언가 애수를 자아내는 서글픔이 먼저 우리 가슴에 서며든다. 이 아픔이 서린 백제를 왜 내가 보고 싶었을까?

 

 궁남지를 끝으로 짧지만 부여를 뒤로 두고 공주로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