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鶴)의 오딧세이(Odyssey)

아들과 함께 터키문명 산책 - 이스탄불 6 (톱카프 궁전)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오스만 제국의 정치 문화의 중심지 톱카프

 

 제법 많은 날을 이스탄불에 머물렀는데도 이스탄불의 아시아지역은 전혀 발걸음을 하지 못했다. 그만큼 이스탄불은 넓고, 보아야 할 것이 많다. 이스탄불에서의 마지막을 톱카프궁전으로 정했다. 이 궁전만 보면 역사지구를 비롯해서 탁심지구 등 웬만한것은 그래도 돌아본 것이다.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다.

 

  "고르지 못하고, 비대칭적이고 중심축이 없으며, 기념비적이지 않은 균형." 이 말은 톱카프에 대한 초기 유럽인 방문객의 묘사이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차지한 메흐메트 2세가 현재의 이스탄불 대학교가 있는 자리에 궁전을 짓고 옛 궁전이라는 뜻으로 에스키 사라이(Eski Sarayı)’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그 뒤 몇 년이 지난 후, 보스포루스 해협과 마르마라 해, 골드 혼이 합류하는 지점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새로 지은 궁전이 바로 이슬람 문화의 진수를 보여 주는 톱카프 궁전이다. 톱카프 궁전이 자리한 지역에는 동로마 제국이 세운 건축물이 있었으나, 톱카프 궁전이 들어서면서 모두 사라졌다 한다. 톱카프 궁전은 새로운 궁전이라는 뜻으로 처음에는 예니 사라이(Yeni Sarayı)’라고 불렸으나, 궁전 입구 양쪽에 대포가 배치되면서 이름을 톱카프 궁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은 대포라는 뜻이고 카프는 문이라는 뜻이다. 이 궁전은 1856년 돌마마흐체궁전으로 옮기기 전까지 400년 동안 끊임없이 증축과 개축이 진행되고 네 번의 대화재를 거치면서 현재의 규모는 원래의 규모에 비해 많이 축소되었다. 총 면적은 70만 평이나 되는 톱카프 궁전의 본래 규모는 오늘날의 시르케지 철도역과 귤하네 공원을 포함하면서 마르마라 해 방향의 아래쪽까지 분포했다고 한다. 터키공화국이 수립되고 1924년에 박물관으로 바뀌어 현재는 박물관으로 이용 중이다. 주변 풍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보스포루스 해협이 내려다보이는 높은 평지에 위치하는 톱카프 궁전은 단순한 왕족의 거처가 아니라 술탄과 중신들이 회의를 열어 국가 정치를 의논하던 장소였다. 궁전 내부는 정원 4개와 부속 건물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400여 년 동안 계속된 증·개축으로 오스만 건축 양식의 변화 과정을 순서대로 살펴볼 수 있다.

 

 톱카프 궁전은 비룬(외정)과 엔데룬(내정) 그리고 하렘 세 곳으로 나뉘어 있다.

 

 톱카프 궁전은 세 개의 문과 그에 딸린 네 개의 넓은 정원을 가지고 있다. 1 정원이 가장 넓고 내부로 들어갈수록 점차 규모가 작아진다. 제 1 정원은 궁전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살던 공간이고, 제 2 정원은 왕실의 부엌과 마굿간 등이 있었으며, 제 3 정원은 술탄의 가족이나 고위 인사들이 들어갈 수 있었던 제국의 기관이 있었으며, 제 4 정원은 술탄과 왕자들이 거처하던 개인의 공간이었다. 그래서 이 톱카프궁전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호화로운 건물과 볼거리가 많다.

 

 

톱카프의 모형도

 

 

 

톱카프에 들어가는 외부의 모습

 

 첫 번째 문은 황제의 문 또는 술탄의 문이라 부른다. 문의 바깥쪽에 새겨진 글은 메흐메트 2세가 이 궁전의 건축을 1478년에 완공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황제의 문을 들어서면 제 1 정원이 있다. 1 정원에는 여러 건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하기아 이레네 성당과 화폐 제작소만 남아 있다. 정원 왼쪽에 보이는 이레네 성당은 아야 소피아성당이 건설되기 전 세워졌으나 니카의 난으로 소실되어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재건되었다

 이레네 성당은 6세기경 건립된 전형적인 비잔틴 건축물이다. 오스만 제국이 모스크로 사용하지 않았고, 전리품과 무기 저장소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건축물의 원래 형태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다가 1846년에 오스만 제국 최초의 박물관으로 사용되었다.

 

 

황제의 문

 

 

잔디가 깔려 있는 제 1정원

 

 제1 정원을 지나면 경의의 문이 있다. 술탄 이외에는 모두 말에서 내려 경의를 표한 뒤에 들어간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여기서부터는 일반 백성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경의의 문 양쪽에는 감옥으로 사용했던 석탑이 세워져 있고, 이 문의 오른쪽 벽에는 사형 집행자의 손과 칼을 씻었다는 우물이 있었다. 그리고 문 옆에는 참수된 사람의 머리를 놓아둔 두 개의 대리석이 있었다고 한다. 경의의 문 뒤의 제 2 정원은 대신들이 국사를 논의하던 디완 건물과 거대한 황실 주방인 부엌 궁전이 자리하고 있다. 오른쪽에 굴뚝이 늘어선 건물이 요리사 수백 명이 음식을 준비하던 주방으로 하루에 두 번 궁중음식이 준비되었고, 해가 긴 여름철에는 해지고 두 시간 후쯤 군주와 하렘의 황실 가족들에게 음식이 제공되었다고 한다. 현재 도자기 전시실로 사용되고 있는데, 중국산 자기 12,000점과 일본산 자기 8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중국산 자기는 원 이후 시대의 것으로 청자기와 백자기가 주를 이룬다. 하지만 한국의 것은 보이지 않는다.

 

 

 

경의의 문

 

 

 

톱카프 모형도

 

 

옛날의 주방

 

 

옛 주방의 천정

 

 

제 2 정원

 

 세 번째 지복의 문(행복의 문)은 군주와 군주의 측근만이 통과할 수 있는 문으로, 이 문 뒤에 있는 제 3 정원에서는 군주의 즉위식이 성대하게 열렸던 곳이다. 지복의 문 바로 뒤쪽에는 외국 사절을 접견하는 알현실이 있다. 고관이나 외국 사신들도 이 알현실 이상은 들어갈 수가 없었다고 한다. 

 제 3 정원에 위치한 보물관은 톱카프 궁전 관람의 하이라이트다. 술탄이 사용하던 왕좌, 갑옷과 투구, 무기 등 호화로운 보석으로 장식된 물건들이 가득하다. 그 중에 황금과 에메랄드,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톱카프의 단검이 유명하다. 이곳에는 이슬람의 마호메드가 쓰던 외투와 칼, 턱수염과 치아 등이 있어 이슬람의 성지순례 장소이다. 또한 모세의 지팡이, 다윗의 칼, 세례 요한의 손뼈 등이 보관되어 기독교에도 성스러운 곳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곳은 엄격하게 사진 촬영이 금지된다. 그저 눈으로만 보고 나와야 한다.

 

 

지복의 문

 

 

제 3 정원의 알현실과 도서관

 

 

 

제 3 정원의 풍경

 

 이 제 3 정원에서 제 4 정원으로 가는 길에 건물의 내부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이스탄불에서 유명한 톱카프의 유일한 카페 겸 레스토랑 로칸다 콘얄르(Konyali)가 있다. 이스탄불의 풍경을 가장 아름답게 볼 수 있는 위치에 자리잡고 있는데, 철저하게 돈의 논리가 적용되는 곳이다. 카페를 세 구역으로 구분하여 바깥쪽은 간단히 빙과류나 차 등을 마시는 사람들이 앉아 있고 중간은 간단히 식사를 하는 사람들의 좌석이며, 테라스쪽으로 경치를 가장 즐길 수 있는 곳은 정식 식사를 하는 곳이다. 저번 봄에 왔을 때는 간단한 식사를 했는데 이번에는 아들 녀석이 먹는 것에 의미를 많이 두고 이번 여행의 마지막 점심이라 정식 코스를 먹기로 하고 테라스에 자리를 잡았다. 만만하지 않은 가격이지만 밖으로 보는 풍경은 값을 치를 만하였고, 서비스도 한층 업그레이드되어 만족했다.

 

 

 

 

두 번째 위치의 풍경

 

 

 

레스토랑에서 보는 보스포루스 해협

 

 

 

 

레스토랑 메뉴판

 

 

 

점심 식사

 

 술탄과 그가 선택한 특정 인물들만 제한적으로 출입할 수 있었던 제 4 정원은 가장 작지만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정원 곳곳에는 정자가 있어 골든 혼, 보스포루스 해협, 마르마라 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장소이다. 4 정원에는 오스만 조정 근위대의 지휘관과 관리를 양성하기 위한 궁전 학교가 있었다. ‘엔데룬이라 불리는 궁정 학교는 톱카프 궁전 안에 설립된 관리 양성 교육 기관이었다. 궁전학교를 졸업하면 무사이면서 학자와 신사의 면모를 겸비하게 되었고, 건전한 무슬림인 동시에 나라에 충성하는 헌신적인 신하가 되었다.

 

 

 

제 4 정원에서 보는 마르마라해와 고대 성벽

 

 

 

 

 

 

아름다운 제 4 정원의 바그다드 정자

 

 

 

 

바그다드 정자의 화려한 내부

 

 

 

 

 

화려함의 끝을 보여주는 제 4 정원의 다른 정자들

 

 

이프타리예 정자 - 금각만의 전망을 볼 수 있다.

 

 

제 4 정원에서 보는 갈라타 타워

 

 

 

 

 

 

 

 

제 4 정원 여러 정자의 외부와 내부 - 이렇게 화려하게 꾸며놓은 곳도 드물 것이다.

 

 

제 4 정원 모스크의 입구인 듯????

 

 

 *하렘

 

 중문을 지나 제 2 정원에 자리한 하렘(Harem)은 남성의 출입이 금지된 여성들만의 공간이었다. '금지된'이란 뜻의 하림에서 비롯된 하렘은 술탄과 거세한 환관들만 출입할 수 있었다. 미로처럼 복잡한 내부 통로로 이어진 하렘에는 약 400개 방이 있었다고 한다. 하렘의 모든 창에는 철창이 달려 있는데, 이는 외부의 침입과 여성 노예의 탈출을 막기 위해 설계된 것이다.

 톱카프 궁전의 서쪽에 자리한 하렘은 하나의 독립된 궁전으로 한평생 술탄만을 바라보며 살았던 여인들의 희로애락이 숨어 있는 장소이다.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이곳은 술탄을 제외한 어떤 남자도 들어갈 수 없었다. 그리고 하렘의 주인은 술탄의 어머니인데, 하렘의 수장인 모후는 궁궐의 실제 관리자로서 하렘 여성들과 술탄의 관계를 통제하고, 메카와 메디나에 보낼 종교기금도 관리했다고 한다. 술탄의 여인들이 살고 있는 하렘을 관리하는 일은 환관이 담당했다. 초기에는 코카서스 출신의 백인 환관들이 하렘을 수비했으나 16세기 말에 이르러 나일강 상류 출신의 흑인 환관들이 하렘을 지켰다. 흑인 환관들은 이스탄불로 실려 오는 도중에 거세되었다고 한다. 모후 아래에 왕자를 생산한 왕비들이 있었고 다시 그 아래에 후궁들과 젊은 여성들이 있었으며 여성 노예도 있었다. 세월이 흐르고 현대화되면서 하렘은 1909년에 그 기능을 잃어버리고 지금은 톱카프의 중요한 관광 명소로 남아 있다.

 

 현재 일부만 공개되고 있는데 푸른 타일 장식과 스테인드글라스 벽화들이 매우 섬세하고 화려하며 아름답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어두운 조명이고, 창에는 창살이 달려 있어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하지만 하렘의 아름다움에는 관광객들이 탄성을 내면서 아름다움에 감탄한다.

 

 

하렘 표지

 

 

 

 

하렘 입구

 

 

 

  

 

 

 

 

 

 

 

 

 

 

각양 각색의 타일로 호화롭게 장식된 하렘의 내부

 

 

하렘 외부의 모습

 

 

 

톱카프 출구에 있는 오래된 나무

 

 톱카프를 구경하면서 느낀 것은 오스만 제국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강대하고 엄청난 제국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아무리 술탄이 거주하던 곳이라지만 건물의 규모뿐만이 아니라 그 내부의 치장을 보면 그저 감탄만 할뿐이다. 타일을 하나하나씩 구워서 내부를 장식한 것은 얼마나 많은 인력과 경비가 사용되었는지 짐작도 할 수가 없다. 우리나라의 왕궁을 비교해 보면 그저 말이 나오지 않는다.

 

 

 사족을 한 가지 붙이면 이 사진의 위에 있는 카드는 터키의 박물관 카드이다. 공식적으로 정부가 관리하는 모든 유적지에 통용되는 카드이다. 이 카드는 여러 종류가 있다. 짧게는 5일부터 최장으로는 15일까지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는 카드가 있다. 유적지 방문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꼭 구입하기를 바란다. 15일짜리가 185리라(약 오만원)인데 조금 많이 보면 5-6배는 이용 가치가 있다. 참고로 아야 소피아, 톱카프, 하렘 정도만 해도 100리라가 넘는다. 꼭 유적지에서 박물관 카드를 구입해서 경비를 절약하기를 .......

 

 아래 카드는 이스탄불에서만 쓰이는 교통카드다. 우리나라의 교통카드라고 생각하면 된다. 카드에 돈을 먼저 넣고 지하철이나 트램 등을 타면 현금 가격의 반 값이다. 이스탄불에서는 지하철이나 트램을 많이 이용하게 되니 꼭 구입하시기를...... 카드 값이 10리라였는데 반화하면 돌려 준다. 하지만 기념으로 가져오는 것도 좋다. 반환하면 반 값밖에 주지 않는다.

 

 이 두개의 카드만 잘 이용해도 여행의 경비가 상당히 절약되니 터키를 가시는 사람은 꼭 기억해 두시기를..

 

 톱카프를 끝으로 아들과 그리스와 터키를 돌면서 고대 문명을 즐긴 여행이 끝이 났다. 한 달이 넘는 시간을 아들과 함께 다니며 같이 느끼고, 생각하고 여러 이야기를 하면서 즐겼다.

 이 글을 끝내면서 다시 아들에게 감사한다. 3년 전에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둘이서 한달 넘게 다녔고, 또 유럽의 문명산책을 한달 넘게 했다. 다 큰 아들과 이렇게 오래 여행을 같이 하는 아버지는 아마 나 하나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들아 고맙다.

 

 

 다음부터는 이스탄불에서 출발하여 발칸을 한달 반 정도 돌아다닌 여행기를 계속하겠습니다.

아들과 함께 터키문명 산책 - 이스탄불 5 (고고학박물관과 주변)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고대문명의 흔적을 간직한 이스탄불고고학박물관

 

 

 터키 이스탄불 역사지구 귤하네 공원에서 톱카프궁전 쪽으로 조금 가면 나타나는 고고학박물관은, 외부 모양은 많은 서구의 박물관에 비해 초라해 보이지만, 1891년 오토만 제국 시기에 세워진 세계 5대 고고학박물관에 속하는 세계적인 박물관으로 고고학 자료들이 100만 점 이상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원을 둘러싸고 고고학 박물관(The Archaeological Museum), 고대 동양 박물관(the Ancient Orient Museum) 그리고 타일 키오스크 박물관(Tiled Kiosk Museum) 3개의 박물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헬레니즘 시대부터 그리스·로마 시대까지의 조각과 석상을 주로 소장하고 있으며, 그 중에 기원전 305년경에 만들어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석관은 세계적으로 중요한 유물로 알려져 있다. 석관은 현재 레바논의 시든에서 1887년에 발견되어 이곳으로 가져와 이곳의 대표적 전시물이 되었다. 하지만 이것도 행운이 따라야 구경할 수 있다. 내가 박물관에 가서 아무리 찾아도 석관이 보이지 않아 관리인에게 물어보니 당분간 전시가 중단되었다고 하여 보지 못하고 아쉽지만 이것도 운이다는 생각을 하고 나왔다. 터키의 유적들을 프랑스와 영국이 발굴하고 조사한 것이 많기 때문에 터키 유적의 대부분은 프랑스와 영국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나, 1881년 이후에 발굴된 유물은 이곳에 대부분 소장되어 있다. 또 트로이 유물이 가장 많이 전시되어 있는 곳은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이다. 물론 하인리히 슐리만이 빼돌린 값비싼 유물에 비교할 수는 없지만 트로이 유적지의 아쉬움을 달랠 수는 있다

   

 

고고학박물관 전경

 

 

고고학박물관에서 톱카프궁전으로 가는 길

 

 

 

 

박물관 바깥 길가에 나뒹굴고 있는 유물들

 

 

박물관 정문

 

 박물관을 들어가면 먼저 왼쪽에 마주하는 건물이 고대 동양 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은 1883년 오스만 함디 베이에 의해 건축되었고, 1935년에 박물관으로 개관되었다가 복원과정을 거쳐 1974년 재개관된, 고대 동양 박물관에는 세계문명의 시작이 된, 소아시아와 메소포타미아, 고대 이집트, 아랍 반도 등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7만 5000여 개의 쐐기문자판도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이 건물의 계단 양쪽 아래에는 기원전 약 18세기경의 히타이트의 유물인 사자상이 우리를 반겨 준다.  이곳에는 그리스 이전에 터키를 지배했던 여러 왕조들의 유물과 주변 동양의 고대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많은 전시물을 모두 소개할 수는 없고 그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유물들만 소개한다. 유물은 각자의 선호도에 따라 호불호가 있을 수 있으니, 이곳에서 보여 드리는 것은 순전히 내가 좋아하여 본 부분이다.

 

 

카데시조약문 판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있는 이집트와 히타이트의 조약문으로  세계 최초의 평화조약으로 알려져 있다. 기원전 2000여년에 그 당시 최고의 제국이었던 히타이트 제국과 이집트 제국의 카데시전쟁 결과 맺은 조약으로 아주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다한다. 하지만 쐐기문자로 쓰여 있고,그  돌은 여러개로 깨져 있었다.
 히타이트본 조약문과 이집트본 조약문이 있는데, 주된 내용은 비슷하지만 내용이 다소 다르다. 이 것은 1906년 터키 보가즈쾨이에서 발굴된 히타이트본 조약문이다. 

 이 조약이 가지는 의미가 매우 컸기 때문에 뉴욕의 유엔 건물 들어가는 입구에 이 조약의 모형이 있다고 한다. 그러기에 평화를 추구하는 자라면 마땅히 알아야 하고 실천할 내용으로 그 문구를 살펴봐야 할 것이다. 

 

 내가 가진 사진에는 또렷하지 못해 이 사진은 위키백과에서 빌려 왔다.


 

 

쐐기문자로 비문이 쓰여 있는 입상

 

 

아시리아의 왕 살마네세르 3세 입상

 

 아시리아는 메소포타미아 북부 지역에서 티그리스강 상류를 중심으로 번성한 고대 국가로서, 그 명칭은 중심 도시였던 아수르(Assur) 시에서 유래했다. 바빌로니아와 같이 수메르문명의 계승국가다. 이 입상에 나타난 인물의 모양을 통해 오늘날의 그 지역 사람을 보는 듯하다.

 

 

중앙 부조가 신 아시리아의 왕 아슈르나시르팔 2세

 

 

 

여러 부조들

 

 

 

이슈타르문을 장식하고 있는 시루슈(용)와 오룩스(황소)

 

 고대 바빌로니아의 신화에 등장하는 시루슈는 신들의 지배자인 마르두크의 상징이며, 오룩스는 기후의 신 라만의 상징이다.

 마르두크(Marduk)는 고대 신으로 위대한 도시 바빌론의 수호신이다. 함무라비왕 시대부터 바빌로니아의 여러 신 가운데 주신(主神)의 역할을 하였고, 나중에 수메르의 신 벨과 합쳐져 '벨 마르두크'로 숭배되었다. 전설에는 에아와 엔릴의 후계자로 악한 용 티아마트를 죽이고, 티아마트의 시체를 이용하여 혼돈으로부터 세계를 창조하였다고 전해지며 상징 동물은 용이다. 전통적으로 바빌로니아의 왕은 마르두크의 현신으로 마르두크 신앙의 수호자로 여겨졌다. 글쓰기와 지혜의 신인 나부(Nabu)는 이 마르두크의 아들이다. 구약성경 예레미아(50:2)에 벨과 함께 잠깐 언급된다.

 

 

 

 

바빌론 이슈타르 문의 장식(용과 오로스 그리고 사자 : 기원전 6세기)

 

 사자는이슈타르 여신의 상징 동물로, 바빌론의 이슈타르문에서 마르두크 신전까지 이어지는 폭 16m, 길이 300m의 행진로 양쪽에 총 120마리의 사자가 부조되어 있었다고 한다. 채색 유약 벽돌을 한장씩 구워서 만들었는데 약 3,000년이 지난 지금도 색깔이 또렷하게 전해진다. 이 사자의 행진로 벽 장식은 독일 베를린의 페르가몬 박물관에 복원 전시되어 있다 한다.

 

 

고대 동양박물관을 나오면 고고학정원이라는 곳을 본다. 터키는 땅만 파면 고대 유물이 나온다고 한다. 그래서 유물을 따로 보관하지 않고 뜰에 아무렇게나 두었는데 오늘날은 하나의 정원으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믿거나 말거나...... 한가로이 이 정원을 거닐면서 벤치에 앉아 유물을 감상하는 재미도 있다. 이 정원에 있는 석조 유물들이 더 우리에게 친근함을 준다.

 

 

 

 

메두사 상

 

 

 

 

정원에 널려 있는 유물들

 

 잠시 정원에서 여러 유물을 보고 간 곳이, 화가 오스만 함디 베이(Osman Hamdi Bey)에 의해 1881년에 건축되었고, 1908년 오늘날의 박물관으로 완성된 고고학 박물관이다. 이곳은 2개 층에서 전시하고 있는데, 지하층에 있는 알렉산더 석관등 유명한 석관들을 비롯해 로마시대의 사포의 두상(The Head of Sappho), 헬레니즘시대의 마르시아스 상(The Statue of Marsyas) 등 고대부터 로마시대까지의 조각상들이 전시되어 있다. 하지만 내가 간 날은 수리한다고 지하층을 개방하지 않아서 아쉬움을 가지고 나머지만 보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여행하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여행도 운이 많이 작용한다. 카파도키아에서는 운이 좋아 발룬을 탈 수 있은 것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출처를 잘 모르겠다.. 하여튼 빌려 왔다.

 

 

알렉산더의 석관 부조(부분) 출처 : 미술대사전

 

 

청동 뱀 머리

 

이 청동 벰 머리는 바로 그리스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 있는 청동 기둥의 하나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다. 술탄 아흐멧 광잔에서도 청동 기둥을 이야기하면서 뱀의 머리가 이스탄불고고학박물관에 있다고 하였는데 진작 나는 사진을 찍지 못하여 다른 곳에서 빌려 왔다.

 

 

지혜와 전쟁의 여신 아테네(기원 전 5세기)

 

 

알렉산더 대왕(기원전 2세기)

 

 

헤르메스와 아포르디테의 아들로

여성성과 남성성을 한 몸에 가졌다는 헤르마프로디토스 상(기원전 3세기)

 

 

여류 시인 사포의 두상(기원전 6세기)

 

 

달과 처녀의 신 아르테미스 여신(기원 전 4세기)

 

 

누구의 상인지 모르겠다.

 

 

이 박물관안에서 사원의 복원을 보여 주는데 무슨 사원인지 설명이.........

 

 

 

아키트레이브(Architrave)에 켄타우로스와 스핑크스가 부조되어 있다.

 

 

 

 

사원을 꾸미는 장식

 

 

 

 

 

옛 무덤의 모습

 

 

 

사랑과 미의 여신 아포르디테(기원전 2-3세기)

 

 

고고학박물관 외부 모습

 

 

 고고학박물관을 나와 타일 키오스키박물관으로 간다. 타일 키오스크박물관은 1472년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술탄 마흐메드2(Mehmed II)에 의해 건축되었고, 이스탄불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준다. 1875년과 1891년에는 황제박물관으로 사용되었고, 1953년에 터키이슬람 예술박물관으로 대중에게 개관되었으며 이후 현재의 이스탄불고고학 박물관으로 통합되었다. 타일 키오스크 박물관에는 11세기부터 20세기까지 셀주크와 오토만 시대의 아름다운 기와, 타일 장식, 도자기 등 예술품 2000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타일 박물관의 아름다운 외양

 

 

 

 

 

 

 

공작새와 꽃들로 장식된 분수대

 

 

 

이 두장은 좀 흐릿하지만 이런 것이 있다는 것을 보여 드린다.

 

 

 

 

 

1432년에 제작된 미흐랍

 

 

타일 벽 장식 - 세밀하게 표현된 꽃과 기하학적 문양

 

이 타일 키오스크박물관은 역사적인 유물을 보면서 지난간 인류의 역사를 회상하는 곳이 아니라, 그저 아름답게 장식된 장식품을 보면 된다. 고고학 유물만 보다가 눈이 호사를 한다. 아니 눈 뿐만 아니라 머리도 가슴도 호사를 한다. 꼭 둘러서 시간의 여유를 가지고 보시기를.....

 

 귀국해서 이 글을 쓰면서 다시 이스탄불고고학박물관 관람을 생각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스탄불고고학박물관을 다시 가야겠다. 무엇인가 제대로 보지 못한 기분이 너무 많이 들어서 사실은 이 글에서 고고학박물관을 소개할까? 말까? 하고 고민을 많이 하였다. 나는 여행지에서 박물관은 꼼꼼하게 보는 편인데 이스탄불고고학박물관을 볼 때는 무엇에 홀렸는지 박물관의 유물을 제대로 보지 못한 느낌이 많이 들고 사진도 제대로 찍지 못한 느낌이라 후회가 너무 크다. 그리고 소개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 같아 미안한 생각도 많다. 그래도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을 소개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후회스럽지만 소개한다.

 

 언젠가 다시 이스탄불에 가서 고고학박물관을 세밀하게 보고 다시 소개할 날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 이스탄불의 여러 곳들

  

 

귤하네공원

 

 * 이스탄불대학교주변 야경

 

 숙소가 이스탄불대학교 바로 옆에 있어 아침 저녁으로 나가면 학생들을 많이 본다. 특히 저녁에는 식당에 저녁을 먹으러 오는 학생들이 많았다. 우리나 그들이나 젊은 학생들은 똑 같다.

 

 

 

 

 

 

 

 

 

 

* 이스탄불대학교

 

 

 

누군가 한국의 유학생인지, 관광객인지 한글로 글을 써 놓았다.

 

 

 

 * 시내풍경

 

 

 

트램이 다니는 선로

 

 

 

거리의 건물

 

 

 

 

제법 유명한 케밥집

 

 

곳곳에 있는 터키식 딜라이트를 파는 과자집

 

 

보스포루스해협 선착장 부근

 

 

오렌지 주스를 파는 가게

 

 

트램 : 멀리 아야소피아가 보인다.

 

 

길거리에서 파는 그림

 

 

갈라타다리에서 갈라타 타워쪽으로 가는 길가의 악기상점

 

 이스탄불을 돌아 다니면 곳곳에 보이는 것이 고대의 유적지다. 특히 역사지구 주변에는 고대와 현대가 같이 공존하고 있다. 물론 고대 유적지를 중심으로 관광객들이 모여들기에 현대에도 시장이 발달하고, 관광객들을 위한 편의시설이 발달하면서 시가지가 발전한 것이다.

 

 하지만 복잡한 시가지를 걸어다니며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다. 우리나 그들이나 모두 사람사는 모습은 비슷하다. 일상생활은 어디나 비슷한 것이다.

 

 이제 이 여행도 끝나가고 있다. 긴 여정이었지만 아들이 나를 잘 데리고 다니면서 많은 곳을 구경시켜 주었다. 항상 아들녀석의 마음가짐에 갘사한다.

 

 

아들과 함께 터키문명 산책 - 이스탄불 4 (아야소피아 박물관)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이 겹쳐진 고대 건축의 걸작 아야소피아 박물관

 

 ‘성스러운 지혜를 뜻하는 이름을 가진 아야소피아(그리스어 : 하기아소피아 : Hagia Sophia Museum)1453년 메흐메드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점거하기 직전까지 그리스 정교회의 총본산으로 바티칸의 성베드로 대성당이 지어지기 전까지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성당이었다.

 오늘날 비잔틴미술의 최고 걸작이라는 찬사를 받는 아야소피아 성당이 처음 건립된 것은 360년 콘스탄티누스 2세에 의해서였다. 이후 화재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으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인 532년부터 5년에 걸친 개축 공사로 현재의 대성당이 완성되었다. 황제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라는 당시의 기독교적 우주관을 한 눈에 볼 수 있게 네모난 건물위에 둥근 돔 모양의 지붕을 얹도록 했다. 그리고 교회가 하나임을 표현하기 위해 내부에는 기둥이 없도록 하였다. 당시 건축기술로는 말도 안되는 조건이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대성당은 완성되었다.

 이 건물의 구조에 대해서는 나는 자세히 설명할 재주가 없다. 백과 사전 등을 참조하시기를..... 

 

 그 아름다움이 극에 달하여, 재건축을 명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537년의 헌당식 날 솔로몬이여, 내가 그대에게 승리했도다!”를 외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성당은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과 레바논 바르베크의 아폴론 신전에서 운반해 온 기둥, 세계 곳곳에서 가져온 석재들을 이용해 건설되었다고 한다.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드 2세는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하자마자 곧장 이 전설적인 대성당으로 향하여 그 자리에서 아야소피아를 모스크로 사용하겠다고 선언했다. 오스만 정복자들은 성당 건물 주위에 이슬람식 첨탑(미나레)을 세웠고, 내부의 모자이크화는 회벽과 코란의 문자들로 덮었.

 헌당 당시, 성당을 빛내고 있었을 6세기의 모자이크는 89세기의 성상 파괴운동 때에 없어지고, 그 후에 제작된 모자이크도 15세기 이후, 이슬람교의 점거 하에 거의 없어졌으나, 최근의 조사에 의하여 앞방과 2층 복도의 벽면에서, 석회 속에 그려져 있던 913세기의 모자이크의 일부가 발견되어, 그 고도의 기술과 뛰어난 표현이 주목을 끌고 있다. 건물내에는 비잔틴의 세련된 장식 조각들이 적지 않게 남아 있다.

 

 1923년 터키공화국이 수립되었을 때 유럽 각국은 아야소피아의 반환과 종교적 복원을 강력하게 요구했지만, 터키 정부는 이곳에서 기독교든 이슬람이든 종교적 행위를 금지하고 박물관으로 운영하기로 결정하여 1935년에 박물관으로 공개되었다. 현재 이곳에는 성당으로서의 흔적과 모스크로서의 흔적이 사이좋게 같이 공존하고 있다. 현재 정식 명칭은 아야소피아 박물관이다.

세계 각지에서 종교적 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현대에 이 아야소피아는 오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종교적인 분쟁을 초월하고 살아남은 역사적 유적이다. 당시 이슬람 지도자들의 종교적 관용도 그 이유 중의 하나이겠지만, 시공을 뛰어 넘는 절대적 가치를 지닌 예술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보존된 것으로 생각된다.

 

 아야소피아는 외부 복도와 내부 복도, 본당 1~2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입구 왼쪽 안에 있는 나선형 통로를 지나 2층의 갤러리로 올라가면 금색으로 반짝이는 모자이크 화를 가까이에서 감상할 수 있다. 모자이크 화는 9세기 초 콘스탄티노플의 성상 파괴 이후 그려진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최후의 심판에 임하는 예수와 성모마리아,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묘사한 작품이 가장 유명하다. 또한 아야소피아 성당의 출구 뒤편에는 비잔틴제국의 황제들이 성모마리아에게 콘스탄티노플과 아야소피아 성당을 봉헌하는 모습을 나타낸 모자이크 화가 있다. 그냥 지나치기 쉬우니 성당 내부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눈여겨 찾아보자.

 

 

 

 

아야소피아 전경

 

 

아야소피아 구조 설명판

 

 

 *판토크라토르(전능하신 주) 그리스도와 황제 레오 6

 

 아야소피아의 입구를 지나면 외랑과 내랑을 거쳐 본당으로 들어가는 청동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문으로 들어가게 된다. 높고 웅장한 문은 황제가 사용하는 문으로 '황제의 문' 또는 '제국의 문'으로 불린다. 문 위에는 예수와 성모 마리아, 대천사 가브리엘이 그려져 있는 모자이크가 있는데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사람은 레오 6세이다. 레오 6세는 비잔틴제국의 기틀을 다진 뛰어난 황제였지만 그 자신의 삶은 기구했다고 한다이 모자이크의 내용은 네 번이나 결혼하면서까지 아들 콘스탄티누스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는 과정에서 자신이 저지른 죄를 속죄하는 모습이라고 한다. 천하를 다 가진 것 같은 황제도 신 앞에는 항상 겸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내부로 들아는 입구 : 제국의 문

 

 

 

 내부에 들어서면 입구 양쪽에 거대한 항아리가 눈에 보인다. 이 항아리는 페르가몬에서 가져 왔다고 하는 대리석으로 만든 항아리다. 발견 당시에는 세 개로 항아리 안에 은화가 가득했다고 하는데 이것을 발견한 농부에게 상으로 하나를 주고 두 개만 이곳에 남아 있다고 한다.

 

 본당에 들어서면 40개의 창문을 통하여 빛이 쏟아진다. 중앙 돔의 아래에는 원래 4명의 천사가 그려져 있었다는데, 모스크로 사용하는 도중에 세 명의 천사는 얼굴은 보이지 않고 날개와 몸 부분만 남아서 아쉬움을 자아낸다. 또 돔 바로 아래에는 원형 나무판에 금빛의 커다란 이슬람 문자가 새겨져 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성지를 빼앗긴 상처의 흔적으로 남았지만, 현재는 기독교의 성당과 코란 문자가 어우러져 아야소피아 그 자체로 보인다.

 돔의 가장 안쪽에는 술탄의 전용 좌석이 있으며, 원래는 성당의 제단이었던 곳을 이슬람의 제단으로 바꾸면서 메카를 향해 제단의 방향을 살짝 틀었다고 한다. 이 제단 뒤쪽으로는 섬세한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 있고 그 위의 작은 돔에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황금빛 모자이크가 새겨져 있다.

 

 이 아야소피아는 지금도 내부 복원을 위해 작업 중이다. 언제 이 복원이 완성되어 찬란한 모습을 보게 될는지????

 

 

복원 공사 중인 내부

 

 

 

 

 

 

 

 

 

 

 

 

 

아야소피아 본당 내부의 여러 모습

 

 

 

이슬람 문자판

 

 

소원의 기둥(일명 땀 흘리는 기둥)

 

 그레고리우스 성인이 자신의 치유 능력을 옮겨 놓았다는 본당 왼편에 위치한 대리석 기둥을 '소원의 기둥'이라 부른다. 아야소피아를 세 번째 지었던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머리가 아플 때 이 기둥에 기댄 뒤 두통이 나았다는 전설이 있는 곳으로, 아야소피아를 찾은 사람들은 이 기둥에 아픈 곳을 낫게 해달라는 소원을 빈다. 대부분의 시간에 사람들이 줄을 길게 늘어서 있으니 쉽게 찾을 수 있다. 낫고 싶은 곳을 손으로 문지르고, 가운데 구멍에 엄지손가락을 대고 나머지 손을 펼치고, 손을 떼지 않고 한 바퀴를 돌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회랑 

 나선형 구조로 실제로는 7층 정도의 높이를 올라가야 한다.

 

 

2층에 전시된 전시물들

 

아야소피아에서 유명한 것은 2층의 모자이크이다. 오스만 제국 시절 모자이크 대부분은 회칠로 덮이고, 그 위에 이슬람의 성경인 코란이 새겨졌었다. 이 과정에서 살아남은 모자이크 작품들을 보면 아피아 박물관이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성지순례 장소인 동시에, 이슬람교인의 성지순례가 되는 이유를 알 수 있게 해준다.

 

 

* 2층의 모자이크

 

 자미 안에 회벽으로 가려져 있던 모자이크는 1931년 미국의 조사단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 뒤 아타튀르크의 지시로 복원이 진행되었고 1964년까지 복원 작업이 계속되어 그 해 2층 회랑이 처음으로 개방되었다. 원래의 모자이크는 성상파괴운동 때 거의 다 지워졌고, 지금 우리가 감상하는 모자이크는  성화가 우상 숭배가 아니라고 규정한 787년 니케아 공의회 이후의 작품들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이레네 2세가 큰 역할을 하였기에 동방 정교회에서는 그녀를 성상 공경을 부활시킨 성인으로 추앙하고 있다.

 

 

천국의 문

 

 

 

 

데이시스(간청, 탄워) - 심판의 날 모자이크

 

 2층으로 올라가 천국의 문이라고 부르는 문을 지나면 데이시스(Deësis) 모자이크를 먼저 볼 수 있다. '데이시스'란 간청 혹은 애원을 의미한다. 심판을 주관하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세례 요한이 왼쪽에는 마리아가 죄인의 벌을 가볍게 해달라고 간청하는 내용을 표현한 것으로 1261년에 제작되었다. 아야소피아 박물관에 있는 성화들 가운데 가장 심하게 훼손되어 전체의 2/3 정도가 보이지 않지만 아야소피아에서 가장 아름답고 섬세한 모자이크로 꼽힌다. 그리스도와 세례자 요한은 상반신의 상당 부분이 남아 있지만 마리아는 얼굴과 왼쪽 어깨 부분만 남았다.

 

 남쪽 창에 가까이 걸려있는 이 그림은 창을 통하여 들어오는 자연의 빛을 받아 더 빛나고 있다. 모자이크에 등장하고 있는 세 사람의 배경으로 조개모양의 황금빛 문양이 보이는데 햇빛이 조개껍질의 가장자리를 따라 반사되는데, 특히 예수상의 후광 부분이 더욱 빛난다.

 

 

(위키 백과에서 가져옴)

 

 데이시스 모자이크의 맞은 편 바닥에는 HENRICUS DANDOLO라고 새겨진 대리석 판이 있다. 1204년 제4차 십자군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플에 쳐들어온 베네치아의 단돌로의 무덤이 있던 자리의 표시이다. 그는 평소 십자군들이 그동안 베네치아에 진 빚을 갚으려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는 길밖에 없다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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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점령은 기독교 역사에서 재앙이었다. 57년간 자행된 약탈로 비잔틴제국의 온갖 성물과 보물들은 해외로 팔려 나갔고 유적지는 황폐화되었다. 이 약탈로 동방정교회와 라틴 교회는 씻을 수 없는 불화에 빠졌고, 그 뒤 교황이  두 번에 걸쳐 사과와 유감을 표시했다. 그 골이 얼마나 깊었던 지 사건이 발생한지 800년 가까이 된 2001년에 아테네를 방문한 교황은 그리스 정교회 흐리스토둘로스 대주교에게 다음과 같이 사과의 뜻을 분명히 했다.

 

"저는 오랫동안 동방 그리스도 신앙의 보루였던 콘스탄티노플의 불행스러운 약탈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지 회복을 위해 떠난 십자군이 같은 그리스도교 형제들을 기습한 사건은 비극이었습니다. 특히 그들이 라틴교회에 속한 그리스도교들이었기에 가톨릭교회로서는 더더욱 유감스러운 마음을 갖게 됩니다."

 

 콘스탄티노플 탈환 이후 그의 무덤은 파헤쳐지고 뼈는 개에게 던져졌는데 개들조차 그의 뼈를 외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콘스탄티노플 사람들은 단돌로의 무덤을 파헤쳐 유골을 내다버린 것도 모자라 무덤이 있던 자리에 이름을 새겨 밟고 다녔다고 한다. 

 

 내 사진 기록에 아무리 찾아도 이 사진이 없어 위키 백과에서 가져 왔다.

 

 

 

 

요한 2세와 이레네 황후 가운데 왕좌에 앉아 있는 마리아와 축복을 내리는 아기 예수

 

 2층 회랑 끝에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를 중심으로 요한 2세 콤네누스 황제와 이레나 황후가 성모로부터 축복을 받는 모습을 표현한 성화 '콤네누스' 모자이크가 있다. 이 성화는 1122년에 제작된 것으로, 황제가 들고 있는 자루에는 돈이 들어 있고 황후가 들고 있는 것은 봉납명세를 적은 문서로 교회에 대한 황실의 기부를 의미한다. 그리고 황태자인 장남 알렉시오스 콤네누스의 모습은 성화의 옆으로 튀어나온 기둥의 옆면에 그려졌다. 황후는 항가리의 공주였는데 콘스탄티노플로 온 후에는 동방 정교회로 개종할 만큼 아주 신앙심이 깊었고, 황제도 유능하고 신앙심이 깊었으나 불행한 가족이다. 황제와 황후 그리고 아들들이 모두 병이 들어 일찍 죽었다.

 

 

 

콘스탄티누스 9세와 황후 조에 가운데 왕좌에 앉아 축복을 내리는 그리스도 모자이크

 

  2층 남쪽 회랑의 또 다른 쪽에는 황후 조에의 모자이크가 걸려 있다. 11세기에 제작된 이 모자이크는 파란색 옷을 입고 왼손에 성경을 든 그리스도가 조에 황후와 그녀의 세 번째 남편 콘스탄티노스 9세를 축복하는 모습을 담았다. 파란만장한 인생의 조에는 스스로가 여제가 되었다가 세 번째 결혼을 한 콘스탄티누스 9세의 황후가 된다. 조에 황후는 남편이 바뀔 때마다 남편의 얼굴과 명문, 조에의 얼굴 부분을 바꾸었다고 한다. 그래서 다른 성화와는 달리 이 성화를 조에의 모자이크라고 한다. 콘스탄티노스 9세 역시 교회에 헌납하는 돈 자루를 들고 있고 조에는 봉납명세를 적은 문서를 들고 있다.

 

   

 

 

 

설교단 모자이크

 

 1층 본당의 설교단 안쪽에 예수를 안은 성모를 중심으로 가브리엘과 미카엘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원래 6세기에 그려진 것인데 성상파괴운동으로 파괴되었다가 9세기에 다시 그린 것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그림으로 추정한다. 밑에서 위를 쳐다보면 아름다운 성상이 사람들에게 항상 희망을 주는 열굴로 내려 보고 있다.

 

 

 

1층 회랑의 유물

 

  

 

남서쪽문 모자이크

 

 2층을 한 바퀴 돌아 1층으로 내려 오면, 남서쪽문으로 나간다. 이 문위에는 예수를 안은 성모마리아와 좌우에 황제가 새겨져 있는 모자이크가 있는데, 오른쪽의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콘스탄티노플을, 왼족의 유스티아누스 황제는 소피아 대성당을 봉헌하는 장면이다.

 

 

 

 

아야소피아 외부 유물

 

 

 

아야소피아의 옆면

 

 

아야소피아 분수

 

 시내를 여러 곳 돌아다니다 아야소피아를 구경하기 전에 점심을 먹기로 하니 아들이 또 자기가 찾아 놓은 곳으로 가자고 한다. 아들을 따라 가니 아야소피아 바로 뒤의 골목에 있는 레스토랑인데 겉으로 보기에도 만만해 보이지는 않는 집이다. 그래도 이제 여행도 끝나가고 비용에 별로 구애를 받지 않고 싶고, 아들이 나를 이끌고 이 긴 여행을 무사히 마쳐 가는데 그 정도의 희망은 들어주어야 하기에 곧장 가자고 했다. 들어가 보니 상당히 고급의 레스토랑이다. Matbah라는 곳인데 원래의 이 단어의 뜻은 술탄의 부엌이라는 의미이다. 그만큼 고급스럽고 자부심이 강한 곳으로 값도 상당하지만 적당하게 음식을 시켜 먹었다. 분위기도 좋고 음식도 훌륭한 레스토랑이었다.

 

 

점심을 먹은 레스토랑 전경

 

 

 

 

 

메뉴판 - 고급스런 냄새가 난다.

 

 

식사가 나오기 전에 주는 음료

 

 

 

먼저 나온 에피타이저와 빵

 

 

레스토랑에서 보는 아야소피아

 

 

 

 

메인 디쉬와 후식

 

 

레스토랑 내부 모습

 

 이 집은 상당히 유명한 집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인터넷을 검색하니 이 집 상호만 넣어도 바로 이스탄불 구 시가지의 레스토랑이라고 검색이 된다. 가격이 절대 만만한 집이 아니니 적당히 조심해야 한다.

 

 아야소피아를 보고 나서 

 

 아야소피아는 이스탄불의 상징뿐만 아니라 인류 문화유산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처음의 성당 건설은 당시의 유명한 수학자인 밀레토스의 이시도로스와 트릴레이스의 안테미오스의 설계로  5년 10개월 동안 진행되었다 한다. 56m의 높이 위에 31m 짜리 돔을 기둥을 하나도 받치니 않고 올리겠다는 것은 당시의 기술로는 너무나 무모한 설계였다. 그래서 공사 중에 계속 설계가 바뀌고 외부 보강 공사를 하였다. 특히 돔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해 아치가 변형되어 완벽한 반원 형태가 아닌 곳이 많고, 외벽에는 돔이 바깥으로 밀려나는 것을 막기 위해 지지대가 계속 보강되었다. 그 뒤에도 많은 보강 공사가 있었지만 이런 여러 결함에도 불구하고 아야소피아는 고대건축사에 길이 남을 건물이다. 자세한 설명은 여기서 하지 않겠다.

 

 그리스와 터키를 여행하면서 많은 고대의 유적과 건축물을 보면서 감탄사를 끊임없이 토했다. 하지만 이 아야소피아를 보고 그 건물의 건축과정과 내부의 아름다운 모습, 종교적인 경건함을 함께 느낄 때 우리는 아무런 지적인 호기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그저 우리는 눈으로 아야소피아를 보고 가슴으로 감상하고 즐기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아야소피아를 내 눈으로 보는 것만 해도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아들과 함께 터키문명 산책 - 이스탄불 3 (탁심지구와 보스포루스해협)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이스탄불의 현대 - 이스티클랄 거리

 

 이스탄불은 너무나 크다. 그래서 한번에  한 구역을 선별하여 구경을 하고 소개를 한다.

오늘은 갈라타다리에서 시작하여 튀넬을 타지 않고 걸어서 갈라타 타워쪽으로 가서 이스티클랄 거리를 걸어가며 한가롭게 거리 주변을 구경하고 여유롭게 한 나절을 보내기로 했다. 이스티클랄 거리에서 탁심 광장까지 가는 도중에는 과거의 이스탄불보다 현대의 이스탄불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젊은이들과 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오가며 즐기고 있는 중간에는 중무장을 한 군인과 경찰들이 곳곳에서 경비를 서고 있는 모습도 볼 수 있다. 현재 이슬람국가의 테러에 대한 예방차원에서 경비를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외극을 다니면서 항상 느끼는 것은 남북으로 나누어 있다고 하지만 우리나라의 치안 상태는 정말 최고라는 것을 깨닫는다.

 오늘은 이스티클랄거리와 거리 주변의 여러 유적과 유물, 그리고 길가의 풍경 탁심광장 등을 보여드리고자 한다.

그리고 오후에는 보스포루스해협을 관광하는 크루즈를 타고 보는 모습을 보여 드린다.

 

 

탁심 광장의 터키 독립기념탑

 

 

보스푸르스 해협 설명판

 

 갈라타 다리를 건너 갈라타 타워에 올라가기 전에 복잡한 거리에서 잠시 왼쪽 바닷가쪽으로 들어가면 시장이 잇다. 여러 가지 물건을 팔고 있는 곳을 지나면 수산물시장이 나타난다. 카라카이다. 카라(kara)라는 뜻은 터키어에서는 '검다'라는 뜻이다. 이곳은 역사적으로 제 4차 십자군으로부터 콘스탄티노플을 수복한 비잔틴제국은 제노바의 상인들이 이곳에 정착하여 사업을 할 수 있도록 보장했다. 제노바사람들은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성벽과 탑을 지었는데, 이것이 갈라타탑과 지금 흔적이 남아 있는 성벽이다. 지금은 그저 조그만 수산 시장이라고 생각하고 어시장의 풍경을 구경하는 곳이다.

 

 

 

 

 

어시장의 모습

 

 

갈라타 타워

 

 갈라타타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도 않았고 중요하지는 않지만 소소한 재미가 있는 갈라타 메블레비하네시 박물관이 있다. 오스만 시대의 문학과 서예등을 보관하는 박물괸이지만, 대부분의 관광객은 이슬람 전통 춤인 세마 의식을 보기 위해 찾는 곳이다. 하지만 세마는 시간을 맞추기가 너무 어려워 보기가 쉽지 않다. 월요일에는 저렴한 가격에 세마댄스 공연을 한다고 하니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시간 맞춰 방문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갈라타 메블레비하네시 박물관 전경

 

 그냥 거리를 따라 걸으면서 구경을 하고 가다가 보니 카톨릭 성당이 눈에 띈다. 이슬람 국가에서는 상당히 드문 곳이다. 성 안토니오 성당이다. 이스티클랄 거리 중앙쯤에 있는 이스탄불 성당 중에서 가장 유명한 성당이다. 이슬람 국가에 있는 성당으로 1912년에 완공되었고,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 오는 성당으로현지인보다는 세계 여러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많았다. 관광객들을 위해 터키어, 영어, 이탈이아어 등 다양한 언어로 미사를 보기에 이스탄불을 여행하는 카톨릭 신자들은 주일에 이곳에서 미사를 드린다.

성당 경내의 설명에는 교황님도 이곳을 방문했다는 사진이 있다.

 

 성당을 나오면 옆에 이곳과는 좀 엉뚱한 갈라타사라이 고등학교가 있다. 우리나라의 특목고 처럼 터키 전국에 있는 우수한 학생들을 모아 교육시키는 명문고등학교로 터키에서 가장 오래된 학교로 1868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성당 입구

 

 

성당 전경

 

 

성 안토니오 상

 

 

 

 

 

성당 내부의 모습

 

 *이스티클랄 거리(Istiklal Avenue, Independence Avenue)

 

 이스티클랄 거리(터키어: İstiklâl Caddesi)는 이스탄불 신시가지의 중심가로 베이욜루 지구에 위치한 거리이다. 하루 유동인구가 3백만 명에 달하는 거리의 길이는 약 3km이며, 갈라타 타워(Galata Tower)에서 시작해 탁심 광장(Taksim Square)까지 이어진다. 일정 시간 다니는 노면전차를 제외한 차가 없는 완전한 보행자를 위한 1.4 km의 거리에는 옷 가게, 악기점, 서점, 갤러리, 영화간, 극장, 도서관, 카페, , 나이트클럽, 제과점, 초콜릿 가게, 식당 들이 죽 늘어서 있다. 이곳을 지나가는 빨간 트램은 19세기에 이 길을 달리던 노면전차를 복원한 것이다.

 오스만투르크 시대에는 카데-이 케비르(Cadde-i Kebir, 大路)로 불렸으며 19231029일에 터키 공화국 수립이 선포된 뒤, 이를 기리기 위하여 거리 명칭이 독립을 의미하는 이스티클랄로 바뀌었다. 거리를 따라 양 옆으로 수산시장, 각종 종교의 교회들, 19세기 초반에 유럽의 여러 국가에서 세운 교육기관 및 각국의 대사관과 영사관이 들어서 있다. 또한 19세기의 고풍스러운 건물이 보존되어 지금은 여러 종류의 가게로 사용되고 있다. 이 길을 걷지 않고는 이스탄불의 현재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스티클랄 거리 풍경

 

 *탁심광장

 

 이스티클랄 거리를 한가로이 거닐며 탁심광장에 도착한다.

이스티클랄 거리(독립 거리)라는 긴 보행자 거리와 연결된 탁심은 "분배" 또는 "분포"라는 뜻의 아랍어에 어원이 있다. 탁심은 원래 이스탄불 북쪽의 수도 공급원으로서 도시의 다른 부분과 분리되어 있는 지역이었다.

 탁심 광장(터키어: Taksim Meydanı) 현재 이스탄불의 중심지로 이스티클랄 거리와 이어져 있으며, 관광 중심지답게 수많은 상점, 호텔, 여행사 및 항공사, 음식점 등이 밀집해 있다. 탁심 광장 중앙에는 터키 공화국이 독립한 5주년을 기념하여 1928년 피에트로 카노니카가 만든 공화국 기념비(터키어: Cumhuriyet Anıtı)가 높이 11m로 서 있다.

 

 탁심은 이스탄불 현재의 중심지로 신년 축하 퍼레이드, 사교 모임 퍼레이드 등 공공 사교 모임이 활발하게 진행되는 곳이다.

 

 콘크리트 중간에 위치한 작은 녹지인 탁심 게지 공원이 있다. 2013, 지자체는 공원을 철거하고 쇼핑몰을 건설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공원 재개발에 반대해 수천 명의 사람들이 시위를 시작하면서 2013년 터키 반정부 시위가 시작되었다.

 

 광장은 많은 시위의 중심지로 터키의 다양한 정치단체 뿐 아니라 많은 NGO들은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이 탁심 광장에서 시위를 하여 많은 충돌이 있었다. 시위에 따른 많은 폭력 사건들이 있어 지금은 단체들의 광장 시위는 금지되고 경찰은 사고 예방을 위해 24시간 경비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 금지령은 주변 도로나 거리에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새해 축제(New Year's Eve), 공화국 기념일 같은 기념일 축제, 중요한 대형 축구 경기 경우에는 금지령에서 예외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탁심광장 표지판

 

 

 

 

 

독립기념탑

 

 이스티클랄거리에서 큰 대로로 내려가는 길에 여러 가지의 골목이 있다. 추쿨 주마라고 부르는 골목이다. 그냥 무작정 걸어가다 보면 우리나라 예전의 인사동과 같은 풍경이 나온다. 골목 구석 구석마다 골동품 가게와 옷 가게들이 보인다. 그렇게 오래 된 역사적 유물이 아니라 그저 일상생활에 사용되던 물건으로 제법 오래 된 것들이다. 눈요기를 하면서 걸어가다가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으면 적당한 가격을 흥정하여 사면 된다.  여러 곳의 골목이 있지만 아래의 대로를 향하여 가면 길을 잃을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

 

 

 

추쿨 주마 골목 풍경

 

 

 

 

해협 건너에 보이는 이스탄불 역사지구 전경

 

 

이스탄불 관광객들이 조심해야 하는 일들

 

 저번 나의 글에서 내 경험을 이야기한 내가 구두닦이가 제일 위에 있다. 구두닦이는 조그마한 애교로 보아 줄 수 있지만 나머지는 잘못하면 큰 손해를 입는다. 사기의 일종이니 항상 낯선 사람이 이유없이 베푸는 친절에는 의심을 가져야 한다.

 

 

 

 *페리를 타고 이스탄불을 보다. - 보스포루스해협 크루즈

 

 아시아와 유럽은 이스탄불에서 만난다. 보스포루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서쪽은 유럽, 동쪽은 아시아이다. 오스만 터키가 1453년 유럽 쪽의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면서, 오스만 터키는 두 대륙을 갈라놓은 보스포루스 해협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이 해협을 터키가 장악하게 되자 방위를 목적으로 해협 양쪽 해안을 요새화하였다. 흑해에 접한 국가들은 반드시 이 해협을 통해야만 큰 바다로 나갈 수 있기 때문에 터키의 허락이 없으면 사실상 호수에 접한 내륙국이나 마찬가지였다. 현재 터키는 민간선박의 통행은 자유롭게 허용하지만 군함은 국적불문하고 순양함 이하로 제한하고 있다.

 

 '보스포루스'라는 이름은 신화에서 제우스가 건드린 여자인 이오가 소로 변신해서 건넜다는 이야기에서 유래된 것으로 그리스어로 '소가 넘어 간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터키에서 부르는 이름인 İstanbul Boğazı는 단순히 '이스탄불의 목구멍' 혹은 '좁은 길목'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해협의 길이는 약 30km, 너비는 5503,000m, 수심 60125m에 불과한 작은 바다이지만 물살이 매우 거칠고 빨라서 소용돌이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보스포루스 해협 양쪽 기슭에는 돌마바흐체 궁전, 루멜리 히사르 요새 등 오스만 시대에 지어진 유서 깊은 건축물들과 고급 주택, 오래된 별장이 늘어서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준다.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이스탄불의 시가지를 둘러보는 보스포루스 크루즈 투어는 이스탄불의 일몰부터 야경까지 감상할 수 있는 저녁 시간에 맞춰 탑승하는 것이 가장 좋다. 투어의 종류는 다양한데 에미뇌뉘(Eminonu) 선착장에서 출발해 보스포루스 제2교까지 올라갔다가 되돌아 내려오는 코스가 일반적이다. 또 차량 이동이 불편하고 우회하는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두 지역을 통근하는 이스탄불 시민들은 주로 연락선(바푸르)을 이용하기도 한다.

 

 이곳에 처음 다리가 건설된 것은 1973년으로 두 대륙을 걸어서 왕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보스포루스 대교라 명명된 이 다리가 만들어진 이후, 두 번째 다리는 1988년에 완성되었는데 2의 보스포루스 대교혹은 파티하 술탄 메흐메드 교라 불린다. 보스포루스 해협 최북단에는 2016년 현대건설이 시공하여 개통한 제3대교인 야부즈 술탄 셀림 대교가 있다.

 

 

 

배에서 보는 갈라타 타워와 아야 소피아

 

 

 

 

 

일몰이 가까운 해협의 양안

 

 

 

 

 

 

오르타쾨이의 모습

 

 

 

 

 

 

해안에 보이는 돌마바흐체궁전

 

 

베벅

 

 이스탄불에서 가장 우아하고 아름답게 커피를 한잔하고 싶으면 이곳에서 마시라고 한다. 이스탄불에서 가장 부유한 동네로 물가가 비싸지만 보스포루스의 낭만을 즐기기에는 가장 좋은 곳으로 여행자들이 선호하는 곳이다.

 

 

 

 

보스포루스대교

 

 

에미뇌뉘 항구로 돌아오니 어두워졌다.

 

 배를 타고 보스포루스해협을 항해하는 시간이 제법 걸렸다. 코스에 따라 다르지만 보스포루스대교까지 왕복하는 크루즈는 한 시간이 훨씬 넘게 운행을 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해협의 바다 바람이 차므로 반드시 복장을 잘 갖추어야 추위를 막을 수 있다. 크루즈를 하는 동안 해협의 양쪽에는 아름다운 유적과 풍경이 많이 보이지만 안타깝게도 나의 이번 여정에는 이 코스가 예정에 없다. 이스탄불은 너무나 넓고 구경해야 할 것이 많아서 제대로 계획을 세워 구경하지 않으면 한달을 머물러도 무엇을 보았는지가 애매한 곳이다. 그래서 이번에 나의 여정은 이스탄불 역사지구를 중심으로 이스탄불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것만을 보는 최소한의 여정이다. 언젠가 다시 기회를 잡아 나머지 지역을 돌아 볼 수 있는 날을 기대하면서 아쉽지만 배를 타고 주마간산식으로 이 지역을 보는 것으로 만족한다.

 

 크루즈를 마치니 시간이 너무 늦었다.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먹으려 나갔다.

아들 녀석이 또 자기가 찾아 놓은 곳이 있다고 가자 한다. 숙소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 아니라서(약 트램 2구단) 걸어 가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한다. 이것이 아들과 여행하면서 느끼는 행복이다. 이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고 맥주를 마시려고 시키니 알콜을 팔지 않는다고 한다. 아마도 정통 이슬람이 운영하는 곳이라 생각하고 음식만 먹고 나와 숙소에 가면서 맥주를 구입해 갔다. 저번에도 이야기했지만 슈퍼에도 알콜을 파는 곳과 팔지 않는 곳이 있다. 아마도 종교적인 이유라고 생각된다.

 

 

레스토랑 전경

 

 

 

레스토랑 내부

 

 

 

 

 

저녁 음식

 숙소에 돌아와 오늘의 일정을 마치고 휴식을 취하다가 잠이 든다.

아들과 함께 터키문명 산책 - 이스탄불 2 (술탄 아흐멧지구)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이제는 흔적밖에 남지 않은 술탄 아흐멧광

 

 아야 소피아 건너편에는 블루 모스크가 있고 그 옆에는 넓게 펼쳐진 광장이 있다. 이 광장의 터키어 정식 명칭은 술탄 아흐멧광장이지만 히포드로모스(히포드롬)로 더 알려져 있다.

 서기 3세기경에 비잔티움에 세워진 히포드로모스(전차 경주에 사용되던 경기장)는 동로마 제국의 스포츠와 사교 생활의 중심지였다. 서기 324,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티움으로 이전하면서 콘스탄티노플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이고, 히포드롬 경기장을 450m×130m 넓이에 1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확장되었다. 콘스탄티누스와 그의 후계자들은 제국 곳곳에서 기념물을 가져와서 이곳을 장식하였다. 하지만 제 4차 십자군 전쟁으로 철저히 파괴되어 지금은 자취도 찾아보기가 어렵다. 지금 남아 있는 것으로는 콘스탄티누스의 명에 따라 델포이에 있는 아폴론 신전으로부터 이곳으로 옮겨온 청동기둥과 서기 390,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가져온 오벨리스크, 뼈대 부분이 남아 있는 콘스탄티누스의 오벨리스크 정도이다.

 히포드롬은 비잔틴 제국 시대에 중요한 정치적인 중심지로 전차 경주를 응원하던 집단들이 정치조직으로 바뀌어 종종 정치와 종교적인 소동이 일어나곤 했다. 십자군전쟁으로 콘스탄티노플이 약탈당한 이후 히포드롬은 사용되지 않고 버려지게 되었다. 1451년 이 도시를 탈환해 수도로 삼은 오스만투르크인들은 전차 경주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이곳에서 말을 타고 창을 던지는 경기를 하였기에 이곳을 '말의 광장'이라는 의미의 터키어 이름인 '앗 메이단'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이스탄불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이 광장을 중심으로 이스탄불 역사지구를 관광한다. 이 주변을 둘러보는 데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가장 중요한 아야 소피아, 블루 모스크, 톱카프 궁전, 고고학박물관, 지하저수조 등등 그 외 여러 유적을 이루 셀 수 없다. 또 여기에서 시르케지역이나 그랜드 바자르 등도 가깝기 때문에 여유가 있으면 걸어다니면서 구경하기를 권한다.

 

 우리가 머문 숙소와 술탄 아흐멧 광장은 얼마 떨어져 있지 않고, 또 술탄 아흐멧 광장 지역이 이스탄불 역사지구라 수시로 왔다 갔다 하였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아야 소피아는 뒤에 보기로 하고 주변의 여러 곳을 거닐면서 구경을 했다.

 

 

이 광장의 주인 블루 모스크

 

 

술탄 아흐멧광장에서 보는 아야 소피아

 

 

*예레바탄 지하저수조

 

 이스탄불의 아야 소피아 옆에 위치한 동로마 제국 시절의 저수조로, 로마 시대에 바실리카가 있던 자리라 바실리카 저수지(Basilica Cistern) 또는 터키어로 지하궁전이라는 예레바탄 사라이(Yerebatan Sarayi)’로 불리기도 한다. 콘스탄티누스 시대부터 시작해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대인 532년에 에 끝난 대규모 지하 저수조로 길이 141m, 73m에 달하는 거대한 공간이다. 원래는 예레바탄 사룬치(지하 저수장)’라 불리었으나, 그 규모로 인해 예레바탄 사라이(지하궁전)’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지하궁전이라고 불리는 12열로 정렬되어 있는 336개의 돌기둥은 당시 주변에 있던 수많은 신전 등의 기둥을 동원해서 세웠다고 한다. 기둥들을 잘 살펴보면 동일한 양식이 아닌 매우 다양한 양식의 기둥들이 쓰였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기둥들 중 헤라의 신전에서 가져왔다고 전해지는 눈물의 기둥과 메두사의 머리가 받침으로 사용된 기둥이 매우 유명하다. 여러 모양의 기둥들 중에서도 가장 이색적인 것은 거대한 메두사 얼굴이 초석으로 사용되고 있는 기둥으로, 옆으로 뉘어 있거나 거꾸로 놓여 있는 메두사의 얼굴은 음침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이 기둥이 놓인 방식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을 한다. 메두사라는 괴물자체가 마주보면 돌이 되는 저주에 걸려있기에 눈길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얼굴을 뒤집어놓은 거라는 얘기도 있고, 건설하던 기독교도들이 이교도를 멸시하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놓았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또 그냥 높이를 맞추기 위해서라는 설이 있다. 또 다른 추측으로는 비잔틴 제국에 기독교가 공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메두사를 은근히 수호신처럼 여기고 또 두려워하자 당시 황제였던 유스티니아누스가 메두사의 머리를 받침으로 사용해 이교도적인 믿음을 상징적으로 끝냈다고도 한다. 이 저수조에서 메두사의 얼굴은 가장 낮고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지만 현재는 가장 사랑받는 기둥으로 사람들에게 보여지고 있다.

 

현재 기둥 아래를 보면 물고기들이 보이는데 관상용으로 현대에 풀어 놓은 것만이 아니라, 과거에도 저수조에 물고기를 풀어 놓아 물의 수질을 확인했다고 한다. 어두운 열주 사이를 불빛을 따라 걷다 보면 물방울이 떨어진다.

 

신비롭고 인상적인 지하 풍경 덕분에 이곳에서 영화 007시리즈 '나를 사랑한 스파이'와 '인페르노'의 촬영지로 쓰이기도 했고, 간혹 콘서트나 여러 행사가 열리기도 한다.

   

한 가지 단점은 지하에 조명이 밝지 않아 사진을 찍기가 너무 어려웠다.

 

 

지하 저수조 외벽

 

 

 

예레바탄 지하저수조(지하궁전) 외부

 

 

지하 저수조 입구

 

 

지하 저수조로 내려 가는 입구

 

 

 

 

지하에 늘어 선 열주들 - 최소의 조명으로 어둡다.

 

 

 

눈물의 기둥 설명판

 

 다른 기둘들은 아무런 장식이나 문양이 없이 그냥 울퉁불퉁한 표면으로만 되어 있는데 이 기둥에는 독특한 문양이 새겨져 있다. 사람의 눈과 비슷한 문양으로 물이 기둥을 따라 흐르는 모양이 사람이 눈물을 흘리는 것과 비슷하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메두사의 기둥 설명판

 

 

 

메두사 두상

 

 이 저수조는 아직 밑에 쌓인 진흙을 걷어내면서 발굴이 진행중이었다. 내가 간 날에도 일부는 막아 놓고 인부들이 작업을 하고 있었다.

 

 

 *소욱 체쉬메 골목

 

 소욱 체쉬메 골목은 대개가 잘 돌아보지 않는 곳이다.  톱카프 궁전의 벽을 따라 길게 이어진 골목으로 그냥 걷고 보면서 지나가는 곳이다. 이 골목의 남동쪽 끝이 아야 소피아쪽의 작은 광장으로 통한다. 이곳을 지나면 자그마하지만 아름다운 건물이 눈을 끈다. 바로 술탄 아흐멧 3세의 샘이다. '차가운 샘'이라는 골목 이름이 이 샘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샘은 오스만 제국의 번성기를 열었던 대재상 아브라함이 1728년에 아흐멧 3세를 위해 지은 것으로 굉장히 인상적이다.

 

 

 

 

책 모형과 골목의 벽

 

 

 

 

 

 

황제의 샘

 

 

이 광장에는 조금 덜 알려졌지만 많은 유적들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이 술탄의 무덤이다. 이 술탄들의 무덤을 보면서 아주 화려하게 지어진 건물과 현란하게 치장된 아름다운 내부에 감탄한다. 여러 명의 술탄을 함께 모시고 내부에는 각각의 무덤이 따로 분리되어 있다. 아쉽게도 내가 지금 이 건축물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여튼 이 광장에 있으니 꼭 구경해 보시기를 바란다.

 

 

 

술탄들의 묘

 

 

 

내부의 아름다운 치장을 보면 술탄들의 권력과 권위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술탄 아흐멧 3세의 무덤 설명판

 

 

 

술탄 세림 2세의 무덤 설명판

 

 

외부 전경

 

 

 

 

술탄 무스타파 1세의 무덤 설명판

 

 

 

 

광장 주변의 유적

 

 

 *콘스탄티누스 오벨리스크

 

 콘스탄티누스 오벨리스크는 정확한 건축 연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4세기경으로 추정되는 술탄 아흐멧 광장 중앙에 있는 오벨리스크 중 하나이다. 원래 이 탑은 32미터 높이의 대리석에 금박 청동 장식물을 입한 아름다운 기둥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거칠게 깎은 벽돌 모양의 돌을 쌓아 올린 모습이다. 869년에 지진으로 꼭대기가 일부가 무너진 뒤 콘스탄티누스 7세가 보수했다. 당시에는 콘스탄티누스 7세의 조부인 바실 1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황금빛 청동으로 표면을 장식했던 아름다운 기념탑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제 4차 십자군이 청동을 벗겨 약탈해 가면서 옛 모습을 잃고 그것을 붙였던 자리만 보기 흉하게 남아있다. 현재의 것은 1894년 다시 복구한 것이다.

 

 이 광장에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그리스 델포이에서 가져와 경마장 광장에 세워두었던 2마리의 청동 말 조각이 있었는데 제4차 십자군들이 이 말들을 베네치아로 가져갔다고 한다.

 

 

콘스탄티누스의 오벨리스크 설명판

 

 

 

 

오벨리스크 전 후면의 모습

 

 

 

오벨리스크 기단

 

 * 세 마리 뱀의 기둥

 

 이 기둥은 그리스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 앞에 있던 것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새로운 수도를 장식하기 위해 330년에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나의 글 그리스 델포이편에서 아폴론 신전을 이야기하면서 이 청동 기둥의 복제품이 아폴론 신전에 남아 있고 진품은 이곳 술탄 아흐멧 광장에 있다고 소개하였다. 바로 그 기둥이다.

 기원전 479년에 있었던 플라테이아 전투에서 31개의 그리스 도시국가 연합군이 페르시아를 물리친 것을 기념하기 위해 페르시아에게서 빼앗은 전리품인 청동방패를 녹여 만들어 기원전 478년에 아폴론 신에게 바친 것으로 아직도 기둥 밑에는 31개 도시의 명칭이 새겨져 있다.

 원래는 기둥 꼭대기에 3개의 뱀 머리와 황금 그릇이 있었지만 제 4차 십자군 전쟁에서 황금 그릇이 사라졌고, 1,700년경에 뱀 머리가 사라졌다고 한다. 그러다가 1847년에 일부가 발견되어 지금은 이스탄불고고학박물관에 있다.

 

 

뱀의 기둥 설명판

 

 

일명 뱀의 기둥

 

*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Obelisk of Theodosius, Obelisk of Tutmoses III]

 

 히포드로모스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광장 한가운데 있는 '테오도시우스의 오벨리스크'. 기원전 15세기경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 투트모스 3세가 룩소르 카르나크신전의 제 7탑문 앞에 세운 오벨리스크로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2세가 357년에 알렉산드리아로 오벨리스크를 옮겼으며, 390년에 테오도시우스 1세가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이 오벨리스크는 원래60미터였고 총무게도 800톤이었는데 당시에 그대로 옮기기에 너무 무겁고 위험해서 당시 사람들이 이를 셋으로 잘라 그 가운데 윗부분만 이집트에서 가져와서 세웠다. 오벨리스크를 받치고 있는 기단 네 면에는 이것을 세울 당시의 조각품들이 있다.

 아스완(Aswan)에서 생산되는 붉은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오벨리스크의 높이는 본래 하단부를 포함해 30m 정도였으나 현재는 25.6m이다. 오벨리스크의 4면에는 각각 투트모스 3세가 유프라테스강 유역을 점령한 것을 기리는 내용이 상형문자로 새겨져 있다. 흰 대리석으로 된 하단부는 테오도시우스 1세 때 새로 만들어진 것으로, 히포드로모스의 전차 경주와 황제 가족들의 모습의 부조가 새겨져 있다.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 설명판

 

 

 

 

 

오벨리스크의 네 면의 모습

 

 

오벨리스크 기단의 모습

 

 

 * 술탄 아흐멧 자미(Sultan Ahmed Mosque : 일명 블루 모스크)

 

 터키를 대표하는 이스탄불 술탄 아흐멧광장에 서 주인같이 위용을 자랑하며 있는 사원으로, 사원의 내부에 3만 개의 파란색과 녹색의 타일로 장식되어 있기 때문에 '블루 모스크'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졌다. 이 모스크는 17세기 초에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술탄 아흐멧 1세가 1609년에 짓기 시작하여 1616년에 완공했다. 아야 소피아를 능가하는 건물을 짓겠다는 의도로 아야 소피아와 비슷한 구조를 가진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다 하는데.... 의문이다. 술탄 아흐멧 모스크는 건설 당시에 "alti(여섯)""altin(황금)"을 혼동한 번역상의 오류로 황금 미나레(Minare : 첨탑) 하나를 세우는 대신 6개의 미나레가 세워졌다고 한다. 다행히 술탄은 미나레를 너무나 마음에 들어 했고, 덕분에 6개의 미나레와 그리고 건축가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오늘날 술탄 아흐멧은 터키에서 유일하게 6개의 미나레를 자랑하는 모스크이다. 이스탄불의 아시아 쪽에서 볼 수 있는 최고의 풍경은 배로 이스탄불로 들어올 때 멀리서도 스카이라인을 장식하는 모스크의 웅장한 실루엣을 보는 것이다. 황혼 무렵 보스포루스 해협의 크루즈를 타면 이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뚝 서 있는 미나레 6개는 술탄의 권력을 상징하며, 이슬람교도가 지키는 15회의 기도를 뜻하기도 한다. 사원 앞의 정원에는 언제나 화사한 꽃이 피어 있어 사람들에게 편안한 휴식처를 제공한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며 정신없는 이스탄불 한복판에서 평화로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술탄 아흐멧 모스크에 들어가 한낮의 뜨거운 햇빛을 피하면서 잠시 경건한 마음을 가지도록 하자. 모스크 밖에는 뾰족하고 날렵한 미나레가 위용을 자랑하며 하늘을 찌르고 있다. 이 모스크는 외부 정원과 내부 정원, 본당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외부 정원에는 술탄 아흐멧 1세의 무덤이 있고, 내부 정원에는 기도를 드리기 전에 손발을 씻는 분수대가 있다.

 

 모스크의 정원에는 많은 사람들이 벤치에 앉아 분수를 바라보고 있다. 커다란 안뜰을 지나가면 모스크 내부로 이어지는데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과 관람객들의 출입구는 다르다. 관람객의 출입구로 실내로 들어갈 때는 신발은 벗어야 하며, 복장도 통제를 한다. 안으로 들어가면 낮게 매달린 샹들리에가 섬세하고 정교한 푸른 타일에 빛을 반사시키고 있다. 고요한 실내에서 차분하게 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보면 경탄과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며, 누구라도 한번은 자신을 잊어버리고 경건한 마음을 가진다. 기도 시간이 지나면 관람객에게 장소를 자유로이 비워준다.

 

 

블루 모스크의 미나레

 

 

 

 

블루 모스크의 전경

 

 

술탄 아흐멧 모스크(블루 모스크) 설명판

 

 

블루 모스크 전체 사진

 

 

 

 

 

 

 

블루 모스크 외부 모습

 

 

 

 

 

 

 

 

 

 

 

블루 모스크 내부의 화려한 모습

 

 

 

블루 모스크에서 보는 아야 소피아

 

 * 터키이슬람예술박물관(Türk ve İslam Eserleri Müzesi)

 

 터키이슬람예술박물관은 술탄 아흐멧 광장 북서쪽에 있는데 광장에서 길만 하나 건너면 된다. 터키 이슬람 문화와 역사를 살필 수 있는 예술품과 유물들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1983년에 개관했다. 박물관 건물은 1524년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수상이었던 이브라힘 파스하(İbrahim Pasha)의 궁전이었다. 그가 사망한 뒤 여러 용도로 사용되다가 1983년 박물관으로 개조한 뒤 일반에 공개했다.

 이 박물관에는 종교 미술품과 정교한 수공예품 등 총 4만점 이상의 터키 이슬람 문화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중에서 이곳에 소장되어 있는 카펫들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카펫으로 불린다. 가장 큰 전시실에 전시되어 있고, 꽃들을 모티브로 한 것에서 동양적인 테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양이 새겨진 카펫은 모두 수작업으로 만들었는데 섬세하고 화려한 문양과 정교함이 묻어 있으며, 크기에서도 세계적인 것으로 꼽힌다.

 또 금박으로 장식된 코란과 가위 등은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필사본 책자와 석공예품 등도 함께 전시돼 있다.

 

 

터키이슬람예술박물관 입구

 

 

터키이슬람예술박물관 전경

 

 

 

금박의 코란

 

 

 

 

화려한 공예품

 

 

 

 

 

엄청난 크기의 카펫들

 

*그랜드 바자르

 

 이스탄불에 위치한 그랜드 바자르(Grand Bazaar)는 터키의 전통 특산품과 기념품을 판매하는 대표적인 관광명소이다. 터키 이름으로 '지붕이 있는 시장'이라는 의미의 카팔르 차르쉬(Kapar Carsi)라는 시장은 아치형 돔 지붕으로 덮인 대형 실내 시장으로, 일반적으로 그랜드 바자르로 알려져 있다.

 

 1455~1461년 술탄 메메드 2(Mehmed II)의 명에 의해서 원래는 마굿간이었던 자리에 건축되었으며 16세기 술탄 술레이만 1(Suleiman I) 통치 시기의 대대적인 확장을 비롯하여 1896년 지진과 1954년 화재 이후에 대규모의 복원을 통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하나의 작은 도시라고도 할 수 있는 카팔르 차르쉬는 30,700의 면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실내 시장으로, 현재 60여 개의 미로 같은 통로에 5,000여 개의 상점이 있으며 2개의 주요 통로 끝에 있는 입구 4개를 포함하여 모두 20여 개의 입구가 있다. 시장에는 각종 보석류, 피혁류, 카펫, 향신료, 형형색색의 도자기와 기념품을 포함한 각종 공예품과 특산품 등등 없는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많은 물품을 판매하고 있다.

 

 이 곳은 유럽과 아시아 두 대륙을 연결하는 지리적 특성으로 비잔틴시대부터 동서양의 교역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 오늘날에는 하루에 3-4십만 명의 관광객이 터키를 관광한 기념품을 사는 곳이다. 관광객이 물건을 살 때는 상당히 흥정을 잘 해야 한다. 반값에 구입해도 바가지일 경우가 많다. 자신이 생각한 가격이 정가라고 믿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롭다.

 

 

 

 

시장의 외부와 한 출입구

 

 

 

Grand Bazaar라고 적혀있고 1461년이라는 표시가 있는 아름다운 문

 

 

 

 

 

 

 

 

 

 

 

시장 내부의 여러 모습

 

 우리가 머문 숙소가 이 시장과 가까워 그랜드 바자르를 몇 번이고 갔다. 그리고 간단한 선물을 사기도 하였다. 아들은 이 시장에서 구두와 가죽 신발을 구입했다. 가격과 기능에 만족하면서 짐만 되지 않으면 더 사고 싶은 물건이 많다고 아쉬움이 가득하며 말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제품의 품질이 뛰어나다. 특히 가죽제품은 우리가 말하는 가성비로 볼 때 우리 물건보다 나은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서 터키에서 가장 유명한 장미 오일을 구입했다. 물론 적당한 흥정을 하였는데, 내가 부른 가격에 별다른 의의를 달지 않고 선뜻 응하는 것을 보고는 더 깍아도 되지 않았나 생각하였으나, 내가 희망한 가격이라 만족했다.

 

 

아들과 함께 터키문명 산책 - 이스탄불 1 (갈라타지역 주변)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여러 겹겹의 도시, 이스탄불

 

 이스탄불은 발칸 반도와 아나톨리아, 흑해와 지중해 사이에 있는 보스포루스 반도에서 전략적 위치에 있다 이 도시는 북쪽으로는 자연 항구인 골든 혼(Golden Horn), 동쪽으로는 보스포루스 해협, 남쪽으로는 마르마라(Marmara) 해에 둘러싸인 반도에 있다.

 

 이스탄불은 인구 약 1400만으로 지중해와 흑해를 잇는 해상 교통과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육상교통의 요지다. 아시아와 유럽에 걸쳐 있는 이스탄불은 기원전 660년 그리스시대에는 비잔티움이라고 불렀으며, 서기 330년 콘스탄티누스가 동로마제국의 수도로 삼으면서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불렀다. 395년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열되면서 콘스탄티노플은 비잔틴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서로마제국은 쇠퇴하여 결국 멸망하였고, 비잔틴제국이 번성일로를 걷게 되자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동방무역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1453년 술탄 메메드 2세가 이곳을 점령하면서 오스만제국의 중심적인 도시가 되었다.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의 3대륙을 아우르는 대제국인 오스만제국의 수도로서의 이스탄불은 상업도시였을 뿐만 아니라 문화도시이기도 하여 전통적인 비잔틴 문화와 이슬람 문화가 조화된 새로운 복합문화가 창출되기도 하였다. 오랫동안 번영을 누려오던 이스탄불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만제국이 무너지자 전승국들에 의해 점령당한다. 1920810일 전승국은 오스만 정부에게 세브르 조약을 강요하고, 이스탄불을 포함한 해협지대를 국제 관리위원회의 관리를 받도록 하였다. 이 조약에 반대한 무스타파 케말 파샤가 앙카라에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여 소아시아에 침입한 영국군을 격파하였다. 이 승리로 신생 앙카라 정권과 전승국 간에 로잔 조약이 체결되었고, 이스탄불은 다시 터키인들의 수중으로 돌아왔다. 19241029일 터키공화국이 선포되고 앙카라가 수도로 결정되었다. 이로써 이스탄불은 수도로서의 위치를 잃고 터키공화국의 한 도시로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1923년까지 1,600년 동안 수도였던 이스탄불에는 그리스·로마시대부터 오스만 제국시대에 이르는 다수의 유적들이 분포해 있다.

 

 이스탄불은 보스포루스해협, 골든혼(Golden Horn), 마르마라해()에 의하여 베욜루, 이스탄불(파티프), 위스퀴다르의 3지구로 나뉘고, 골든혼의 갈라타교와 아타튀르크교로 연결되어 있다. 골든혼의 남쪽인 이스탄불은 옛날의 이스탄불이 자리 잡았던 전통 있는 지구로, 지금도 비잔틴시대의 성벽이 서쪽 경계를 둘러싸고 있다. 아흐메드 사원(블루모스크), 하기아 소피아(현재 박물관), 토프카 궁전(현재 박물관), 고고학박물관, 터키-이슬람 미술관, 고대 오리엔트미술관, 그리고 이스탄불대학 등이 있으며 이 도시의 전성기를 생각나게 하는 대시장(그랜드 바자르)도 있다. 대개의 관광객들이 머무는 곳이다.

 

 이스탄불은 오래된 역사의 도시고 넓기 때문에 여러 지역으로 나누어 소개한다. 상당한 날을 이스탄불에 머물렀지만 제대로 본 것 같지가 않다. 저번 봄에 이스탄불에 머무면서 구경한 것까지 포함해서 소개를 한다.

 

 먼저 소피아성당은 뒤에 보기로 하고 시르케지역 중심의 시내를 구경하면서 해협을 지나 갈라타 지역으로 간다.  

 

 

갈라타 타워

 

 

갈라타 타워 위에서 필자

 

 

 

 

점심을 먹은 케밥 집 - 자기 집이 유명한 집이라고 선전을 많이 하고 있다.

 

 

 

 

 

 

 

 

수선 중인 시르케지역

 

 처음 오리엔트 특급이 다니기 시작하던 시절의 시르케지 역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파리를 출발해 여러 도시를 거쳐 이스탄불로 오는 오리엔트 특급(Orient Express) 열차가 188310월부터 이 역에서 운행되기 시작했다. 유럽 대륙의 마지막 기차역인 시르케지 역은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의 유명세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지만, 그전부터 복잡하기는 마찬가지였다. 1883년부터 프랑스 파리와 터키 이스탄불 구간을 운행했던 오리엔트 특급 열차는 여러모로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었다. 파리에서 출발하여 로잔, 베네치아, 베오그라드, 소피아를 거쳐 이스탄불에 도착하는 이 열차는 사람들에게 유럽을 기차를 타고 횡단한다는 놀라움과 기쁨으로 호기심을 자극했다. 여러 인종과 민족으로 구성된 유럽 사람들은 이 기차 안에서 서로 겹쳐지고 섞여서 여행을 했다. 비행기의 발달로 19775월에 운행이 축소되어 부다페스트까지만 운행되다가 2007년부터 다시 비엔나까지 확장되어 운행한다. 지금 소피아로 가는 국제선은 다른 역에서 출발하지만 이 역에서 표를 팔고 버스로 이동을 한다. 역 안에는 오리엔트 특급열차를 주제로 한 레스토랑과 대합실이 남아 있다. 지금은 초라한 역사로 보이지만 오리엔트특급열차가 운행되던 때에는 유럽의 부호들이 모두 이 역사에서 열차를 기다렸다.

 

 

 

저 멀리 보이는 갈라타 타워

 

 

 

 

 

 

 어디에나 보이는 거리의 악사

 

 

 

 

 

갈라타 다리

 

 

 

갈라타 다리 위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 사람들

 

 갈라타 다리(터키어: Galata Köprüsü)는 도개교(跳開橋)로서, 총 길이는 490m이고, 폭은 42m, 이스탄불의 카라쾨이(Karaköy)와 에미뇌뉘(Eminönü)를 연결하는 다리이다. 양방향으로 각각 3차선 차도와 도보가 있으며, 중앙에 트램(Tram) 노선이 지나간다. 19세기 후반부터 갈라타 다리는 터키 문학, 영화, , 소설 등에서 꾸준히 등장하고 있다.

금각만에 세워진 다리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6세기경 유스티니아누스 1세 당시의 기록에서 볼 수 있다. 1453년에는 콘스탄티노플의 함락 당시 오스만 투르크 군대는 배를 서로 연결해서 임시 부교를 만들었다. 1502년에 세기의 천재였던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다리 설계를 하였으나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취소되었다. 현재의 갈라타 다리는 다섯 번째 다리로, 터키의 건설회사인 STFA가 네 번째 다리가 있던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지었다. 199412월에 완공됐다.

 현재는 갈라타 다리에서 낚시를 즐기는 터키인들로 유명하고, 이 모습을 지켜보고 이스탄불의 경치를 감상하고자 하는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다리 아래층에는 생선요리 식당과 술집 등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어 관광객을 끌고 있다.

 

 이 갈라타다리에서 겪은 에페소드 하나를 소개하면, 저번 봄에 왔을 때, 다리에는 구두를 딱는 사람들이 많다. 걸어 가는 도중에 그 중 한 사람이 솔을 흘리고 지나가서 주워주니 고맙다고 구두에 솔질을 해 주면서 딱아 준다. 처음에는 감사의 표시인 줄 알았는데 조금있다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돈을 요구한다. 아이들이 병이 들었다, 아내가 아프다는 등등의 이야기를 하면서 돈을 주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완전히 장사를 위해 일부러 도구를 흘리는 것이다. 뒤에 숙소로 돌아와서 보니 이스탄불에서 조심해야 하는 일 중의 하나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하지만 여행 중에 이런 조그마한 에피소드도 있는 것이 재미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그렇게 많은 돈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생 오렌지 주스

 

 주문을 하면 즉석에서 주스를 짜 준다. 너무나 달콤하고 시원한 맛에 반해서 아들은 이 주스를 수시로 사 먹었다. 값도 비싸지 않고, 여행에 지친 몸의 피로를 달래 줄 수 있는 좋은 음료다. 탄산 음료만 마시면서 여행을 하기보다 시원한 생과일 주스로 입안을 향긋하게 하고 피로를 씻기를 바란다.

 

 

 

 

 

 

 

 

 

에미 뇌뉘에서 보는 보르포루스 해협의 여러 모습

 

 에미뇌뉘는 보스포르스해협을 운행하는페리들이 출벌하는 중심지이다. 이곳은 항상 크루즈승객을 끌어 모우는 호객꾼의 모습과 음악소리가 시끄럽게 들린다. 고등어케밥과 홍합으로 만든 밥이 유명하며 노점상들이 북적이는 곳이다.

 

 갈라타 다리를 건너면 갈라타 타워쪽으로 올라가는 언덕에 조그마한 지하철인 튀넬이 있가. 튀넬 (Tünel)은 런던 지하철(1863) 다음으로 오래된 지하철로, 이스탄불의 지하에 지어진 강삭철도로 길이가 600m도 안되는 세계에서 가장 짧은 지하철이다. 1875117일에 개통된 튀넬은 금각만의 북쪽 해안에 위치하며, 카라쾨이(Karaköy)와 베이욜루(Beyoğlu)의 구역을 연결하는 2개의 역이 있다. 19세기 후반에 페라(현 베이욜루)와 갈라타(현 카라쾨이)의 지역은 큰 언덕으로 분리되고 경사가 심하여 이 두 지구를 오가는 것이 어려웠다. 1867년 프랑스 기술자인 유진 앙리 가방드가 이 두 지역을 연결하는 방법으로 언덕을 오르내리는 강삭철도를 생각해냈다. 건설은 1871730일에 시작되어 1875117일에 개통하였다.

아래 역은 카라쾨이이고 위쪽 역은 베이욜루다. 위쪽 역은 아래역보다 61.55m 높다. 이 노선은 원래 두 개의 평행선으로 지어졌으나, 현재는 두 개의 열차가 중간에 나란히 통과하는 복선 구간을 제외하고는 단선으로 운행한다. 현재는 수 많은 관광객들이 이용하는 관광열차다.

 

 

 

 

 

튀넬 기차

 

 

 

 

 

 

튀넬의 역사를 전시해 놓았다.

 

 튀넬에서 내려 조금 걸으면 갈라타 타워에 도착한다. 갈라타 타워는 이 지역의 랜드마크로 가장 높은 곳에서 위치하고 있으며 타워의 전망대에서는 유럽과 아시아를 가르는 해협인 보스포루스 해협과 골든혼 그리고 이스탄불 시내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특히 해질 무렵의 이스탄불의 풍경은 환상이라고 한다. 원래 있었던 타워는 제4차 십자군 전쟁 때 파괴되었고, 1348년에 제노아 자치령에 의해 타워 오브 크라이스트 (그리스도의 탑)라는 이름으로 재건축되었다. 전쟁포로를 가두는 감옥으로도 사용되었고, 화재감시탑으로도 사용되는 등 여러 용도로 사용되다가 1960년대에 목재로 된 내부를 콘크리트로 바꾸고 일반인들이 관람할 수 있도록 공개했다. 타워의 높이는 62.59m이며 꼭대기의 장식물까지 포함하면 66.90m이다. 이것이 건축될 당시에는 그 도시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다.

이 타워는 비잔틴 인들에게는 메가로스 피르고스’(Megalos Pyrgos: 큰탑이란 의미)로 불리었고, 1638년에 헤자르펜 아흐멧 첼레비라는 사람이 자신이 만든 날개를 달고 이 타워의 꼭대기에서 보스포루스 해협을 지나 아시아 쪽인 우스크다르 언덕까지 날아가는 비행을 성공하였다고 해서 일반인들에게는 그의 이름을 딴 헤자르펜 타워라고 불리기도 했다.

 

 

 

 

 

우리나라 경주와 실크로드 우호협력 기념비

 

 

 

 

분수와 설명판

 

 

 

갈라타 타워의 내부

 

 

 

 

 

 

 

 

 

 

 

 갈라타 타워 전망대에서 한 비퀴 돌면서 보는 이스탄불의 사방 풍경

 

 

 

터키식 커피

 

 * 므스르 차르쉬(이집션 바자르)

 

 1663년 메흐멧 4세의 어머니인 하티제가 지은 시장으로, 그 당시에 향신료의 대부분을 이집트에서 수입했기 때문에 므스르(이집트)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한다.지금은 관광객들을 위한 상품을 팔고 있지만 이스탄불의 향신료 거래의 중심지이다.  예니 자미에 딸린 복합건물로 음식물부터 온갖 종류의 물품이 있어 기념품을 사기에는 적합한 곳이다. 물품이 아주 다양하며, 값도 그렇게 비싸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물건을 흥정을 아주 잘 해야 한다. 그들이 부른 값에서 반이상을 깍아도 아마 될 것이다. 나도 여기서 가죽 신발을 한 컬레 사서 여행 중에 요긴하게 신었고, 한국에 돌아와서도 구두 대용으로 잘 신고 다닌다.

 

 

 

 

 

 

 

 

 

 

므스르 차르쉬 입구 현판 - 1664년이란 표시가 보인다.

 

 

 

 

 

 

여러 곳의 구경을 마치고 다시 시르케지 역 부근에 있는 과자점을 들렀다. 죽기전에 꼭 먹어야 하는 음식이다는 터키식 딜라이트를 먹기 위해서다. 과자점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집이라는 곳을 들어갔다. 여기서 케이크와 아이스크림을 먹고 나오면서 한국의 여러사람들에게 줄 기념품으로 과자들을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가게 상호와 연혁을 표시

 

 

 

 

 

가게 내부와 손님들

 

 창가에 앉아 바다를 보면서 과자를 먹으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겨우 자리가 나올 수 있다. 그런 기대는 아예 하지 마시고 자리가 있는대로 앉아서 그냥 맛있는 케익과 아이스크림을 맛보는 것이 상책이다.

 

 

가게 외부 전경

 

 이스탄불은 너무나 큰 도시이고 오랜 역사의 도시이기에 몇 일간의 여정으로는 주마간산식의 구경밖에 못한다. 그래서 구역을 나누어 보고 싶은 곳을 집중하여 볼 수 밖에 없다. 오늘은 주로 에미뇌뉘와 시르케지 주변, 그리고 갈라타 타워를 중심으로 하루를 즐겼다. 내일은 또 어디를 집중하여 갈 것인지를 아들과 상의를 해야 한다. 여태까지 아들을 따라 다녔지만 이스탄불은 내가 봄에 약 열흘을 머물렀던 곳이라서 대강은 알기에 아들도 내 의견을 물어 다니기로 한다. 

 

 

 

 

 

 

아들과 함께 터키문명 산책 - 셸축(셸주크)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초기 기독교의 성지 셸축

 

 에페소스가 있는 셸축은 셸주크라고도 한다. 셸축은 터키 서부 이즈미르(Izmir) 주에 있는 도시로 에페소스 유적이 있어 유명하다. 이즈미르 시에서 남쪽으로 73거리에 있으며, 인구는 약 40,000명이 채 안되는 조그만 도시다. 고대 지명은 아이오스 테올로고스(Ayios Theologos)이며, 현재 지명은 12세기 무렵 이 지역에 정착한 셀주크투르크족에서 유래하여 1914년에 붙여졌다. 도시 전체에는 그리스, 기독교, 이슬람 문화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평화로운 도시다. 시내에 성 요한교회와 비잔틴 수도교, 이사 베이(Isa Bey) 모스크가 있으며, 고고학박물관과 아르테미스 신전이 우리 눈길을 끈다. 시 외곽에는 성모 마리아의 집과 에페소스유적이 있다. 에페소수가 너무 유명해서 셸축에서 에페소스만 생각하지만, 사실 이 도시에는 그리스도교와 매우 많이 연관이 있는 도시다.

 

 

박물관에 있는 아르테미스 여신상

 

 *성모 마리아의 집 

 

 셸축 숙소에서 성모 마리아의 집까지 가려고 하니 교통편이 마땅하지 않다. 그래서 택시를 또 부르기로 했다. 여행의 경험상 택시비가 비싸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역시나 성모 마리아의 집을 왕복하고, 우리가 구경하는 시간까지 약 2시간 반이나 걸렸는데 50리라(우리돈 15,000원 정도)이다.

 

 택시로 편안하게 간 곳이 성모 마리아의 집(또는 동정녀 마리아의 집)이다.

 

성모 마리아의 집(터키어: Meryemana 또는 Meryem Ana Evi)은 터키 셀주크에서 7킬로미터 떨어진 에페소스 인근의 코레소스 산에 자리한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공동 순례지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이곳은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선종하여 승천할 때까지 사도 성 요한과 함께 머물렀던 곳이라고 한다.

 

 성모 마리아의 집터에 당도하면 집터의 중간지점에 작은 마리아의 동상이 자비롭게 서 있다. 세례 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곳을 지나면 돌로 쌓아 지어진 성모 마리아의 집이 나타난다. 전 세계의 많은 카톨릭 신자들이 참배하여 기도를 드리는 곳이다. 이곳을 찾은 사람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누구나 촛불을 밝히며 기도를 올리거나 소원을 빈다. 계단 아래엔 만병을 치료한다는 성수를 수도시설로 만들어 놓아 사람들이 성수를 마시거나 병에 담아가기도 한다. 성수 터 옆에는 개인의 간절한 소원을 적은 천 조각과 종이 조각들이 촘촘히 벽에 걸려 있다.

 

 이 곳에서 18811018일 프랑스의 아베 줄리앙 꾸예 신부가 작은 석조건물과 고대 에페소 유물을 발견했다. 신부는 그 건물이 클레멘스 브레타노의 저서에 기재된 독일 수녀 안나 가타리나 에메리히(1774-1824)가 환시를 통해 본 성모 마리아가 예수가 사망한 뒤 남은 생을 보냈던 집의 형태와 놀랍게도 일치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으나 발견 당시에는 별로 주목받지 못하였다. 10년 후, 프랑스의 마리 드 망다 그랑시 수녀에 의해 폴린 신부와 융 신부 등 두 명의 라자로회 선교사들이 1891729일 꾸예 신부의 안내서를 보고 그 건물을 재발견하였다. 이들은 폐허가 되어 지붕도 없는 이 돌집이 오랫동안 이곳 주민들이 거룩한 장소로 여기고 있는 곳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곳 주민들은 초대 교회 시절 에페소에 살던 그리스도인들의 후손들이었다. 그들은 이곳을 터키어로 동정녀의 문간(Panaya Kapulu)’이라고 불렀다. 마리 드 망다 그랑시 수녀는 이곳 마리아의 집에 조그마한 가톨릭 성당을 하나 세웠다. 동정 마리아의 집 발견은 12세기부터 이야기된 동정 마리아의 에페소 선종 전승의 신빙성을 한층 높여주었다. 1961년 교황 요한 23세는 이곳을 성모 마리아의 집으로 공식 선포한다. 이후 1967년 교황 바오로 6세와 1979년 요한 바오로 2세가 직접 방문하면서 성지로 자라매김을 하였다.

 

 

성모 마리아의 집 입구 표시판

 

 

입구에 보이는 구유

 

 

 

유네스코 유적 표시와 이정표

 

 

이곳을 소개하는 설명판이 여러 국어로 쓰여 있는데 그 중에 한국어 설명판도 있다.

 

 

성모상

 

 

 

 

 

 

 

성모 마리아의 집 외부와 내부

 

 내부에서는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바깥에서 내부를 찍은 사진인데, 이 사진을 찍고 아들 녀석에게 심한 질책을 들었다. 내부를 찍지 못하게 하면 안 찍어야 된다고......

 

 

성모상

 

 

 

이곳에서 나오는 성수 - 수도 시설을 해 놓았다.

 

 

 

성수 옆의 벽에 매달아 놓은 소원 쪽지

 

 

 

 

 

 

 

 

 

주변의 여러 모습

 

 

 

성모상

 

 이곳 구경을 마치고 입구쪽으로 가면 조그마한 기념품가게가 있다. 물론 기념품은 카톨릭의 용품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곳은 카톨릭에서는 중요하게 생각하는 성모 마리아의 승천지이다. 그러므로 많은 카톨릭신자들은 조그마한 병에 담긴 성수나 십자가, 묵주 등을 기념으로 구입한다.

 

 

점심 먹은 레스토랑의 간판

 

 

 

 

시내 풍경

 

 

 점심을 먹고 길을 걸으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하며 도착한 곳이 성 요한교회[St. John's Cathedral]이다.

 

 *성 요한교회

 

 성 요한교회는 예수의 12제자 중 사도 요한을 기념하는 교회다. 요한은 예루살렘에서 추방당한 뒤 셸축으로 들어와 노년을 보냈다. 4세기경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요한의 무덤에 세운 교회를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6세기경에 사도 요한을 추념하기 위해 교회를 증축했다.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에는 순례자들의 꼭 들러야 하는 가장 중요한 교회로 여겼다. 교회는 길이 110m, 폭 140m에 6개의 돔을 가진 거대한 십자가 형태의 건물이다. 7세기에는 교회 주변에 성을 쌓아 교회로 들어가려면 성벽 문부터 지나야 한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이곳에서 많이 순교했기에 박해의 문이라고 부른다. 14세기에는 자미로 사용되다가 몽고의 침입으로 파괴되었다. 오늘날에는 교회 터와 건물 유적이 남아 있으며 많은 유적들이 복원되어 있다. 본당의 동쪽 끝에는 사도 요한의 무덤이 있으며, 대리석 석판위에는 이곳은 나의 영원한 쉴 자리, 여기서 살게 될 것이다.’라는 글이 적혀 있다. 카톨릭의 중요한 성지순례 장소로 내가 이곳을 갔을 때에도 한국의 순례단이 버스 3대로 와 있었다.

 

 

멀리 보이는 성 요한 교회

 

 

성 요한 교회 표지판

 

 

성 요한 교회로 들어가는 입구

 

 

 

 

요한의 생애 설명판

 

 

 

 

성 요한의 무덤 표시판

 

 

 

 

성 요한의 무덤

 

 

십자가 모양의 건물 구조 조감도

 

 

 

 

 

 

 

성 요한 교회 설명판

 

 

성 요한 교회 전경

 

 

성 요한 교회 외부 성벽

 

 

요한 교회에서 보는 이사 베이 자미

 

 이 자미는 1375년에 다마스쿠스 출신의 건축가 디마쉬클리 알리가 설계한 것으로, 독특한 담백함이 있다.

 

 

 

Isa Bey Hamam 유적지 설명판

 

 

아르테미스 신전으로 가는 길에 있는 DR. SABRI YAYLA를 기념하는 거리 

 

 

 

 

 거리를 제법 걸어 가니 이름은 너무나 유명하지만 유적은 거의 폐허와 다름 없는 아르테미스 신전이 나온다.

 

 *아르테미스 신전

 

 아르테미스 신전(아르테미시온)은 드물게는 디아나 신전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여신의 신전으로 BC 8세기경에 120년에 걸쳐서 세워졌는데, 장대하고 화려하여 고대세계의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꼽힌다. 신전은 2중 주주식의 이오니아양식으로 바닥면이 세로 55m 가로115m에, 높이 19m의 기둥 수 127개의 거대한 규모이며, 원주 수십 기의 기단부에는 인물의 부조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그 자취도 없다. 현재는 신전의 토대와 조각 파편만이 기둥 하나와 외로이 남아있다.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의 목록을 작성한 시돈의 안티파트로스는 당대의 아르테미스 신전을 이렇게 묘사했다.

  "나는 전차(戰車)를 위한 길이 나 있는 바빌론의 높이 치솟은 성벽을 보았고, 알페우스가 세운 제우스 신상(神像), 공중정원, 태양의 거상과 수많은 노동력으로 지은 높은 피라미드와 거대한 마우솔로스의 묘를 봤었다. 그러나 내가 구름 위에 치솟은 아르테미스의 집을 보았을 때, 그들 다른 불가사의들은 그 빛을 잃었다. 그리고 나는 말했다. '보라, 올림푸스를 빼면, 어떤 장대한 것에도 태양이 비추지 아니하였구나'"

 

 아르테미스 여신 신앙은 1세기 무렵까지 강하게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약성서 사도행전 1921절에서 41절에는 바오로가 에페소스에서 겪은 아르테미스 신전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사도 바울이 신의 이름으로 우상 숭배를 금하자 에페소스인들이 격렬하게 저항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아르테미스 신전은 파괴된 뒤 오랫동안 잊혀졌다가, 대영박물관이 후원하고 존 터틀 우드가 이끄는 탐사대가 6년의 탐색 끝에 1869년에 발굴하였다. 그 때 발견된 유물의 대부분이 지금 대영박물관에 있다 한다. 지금 우리는 달랑 서 있는 기둥 하나만 본다. 거의 폐허와 같이 보이는 이 신전에서 과거의 영화롭던 시절의 신전의 모습을 찾을 수는 없다. 무상한 역사의 흐름에서 우리의 상상을 얼마나 끌어 올려야 이 신전을 회상할 수 있을까?

 

 

아르테미스 신전 표시판

 

 

신전 설명판

 

 

유네스코 표지판

 

 

옛 신전의 조감도

 

 

아르테미스 신전 전경

 

 

 

아르테미스를 마지막 지키고 있는 기둥 하나

 

  

 

 

 

 

아르테미스 신전의 여러 모습

 

 잡초 사이로 아르테미스 신전의 유적이 돌무더기로 뒹굴고 있다. 이 신전은 그리스도교를 공인하면서 버려졌다. 그 뒤에 신전의 돌들을 이용하여 성 요한 교회와 하기아 소피아 성당들을 짓는데 사용하였기에 복구는 영원히 불가능한 상태다. 그저 과거의 영광의 흔적만을 엿보고 우리는 발길을 돌린다.

 

 

 * 에페소스고고학박물관 

 

 에페소스고고학박물관은 터키 서부 이즈미르 주 셸축(Seljuk)에 있는 박물관이다. 에페소스 박물관은 에페소스 유적지, 아르테미스 신전 및 주위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대부분 영국이나 다른 유럽국가로 반출되자, 터키 정부는 이후 에페소스 유적지에서 발굴된 유물의 해외 반출을 엄격히 금지하고 독자적인 전시시설을 만들 계획을 세우고, 이 계획에 따라 1983년에 박물관을 세웠다.

 이 박물관 가장 큰 특징은 유물을 연대기별로 전시하지 않고, 대신 주제별로 전시를 하거나 유물이 발굴된 장소를 기준으로 전시하고 있는 점이다. 출토 장소별로 전시하며, 정확한 복원도를 함께 보여주기 때문에 관람객이 이해하기 쉽다. 전체 소장유물은 약 25000여 점으로 알려져 있으나 전시되는 것은 1,000여 점에 불과하여 조금 아쉬운 생각이 많이 드는 박물관이다. 가장 중요한 유물은 아르테미스 여신상인데, 하나는 아르테미스 신전, 다른 하나는 에페소스의 플리타네이온에서 출토된 것이다.

 

 로마시대에 에페소스는 소아시아와 로마를 잇는 중심 도시로 번영을 누렸고 이 때 유적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아르테미스 에페시아 상은 에페소스 유적 중 하나로 로마의 테오도시우스 1세가 그리스도교를 공식화하면서 그리스의 다신교를 박해하고 신전을 모두 닫게 했는데, 당시 종교 주관자들이 이 성상을 파괴하지 못하도록 몰래 숨겨왔다고 한다.

 

 

 

 

에페소스고고학박물관을 가리키는 이정표와 박물관

 

 

박물관 뜰에 있는 부조물

 

 

입구에 있는 입상

 

 

얼굴과 손 발이 다 잘린 아프로디테상

 

 

제우스의 두상

 

 

프리아포스 상

 

 프리아포스는 디오니소스와 아프로디테의 아들로 들판, 정원, 과수원의 신이다. 과장되어 있는 남근이 특징으로 다산과 풍요를 상징한다. 남근 위에는 농작물이 한 가득 놓여져 있다.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여러 전시물들

 

 

 

 

박물관 전시물에 대한 설명

 

 

 

 

 

 

 

 

 

여러 조각상과 부조들

 

 

 

 

두 개의 아르테미스 여신상

 

 가슴 부분에 달려 있는 20여 개의 알 모양은 여신의 유방, 소의 고환, 꿀벌의 알 등 다양하게 해석된다. 이런 알 모양이나 여신상에 새겨진 여러 조각은 모두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상징물들이다.

 

 

 에페소스고고학박물관을 끝으로 셸축과 에페소스의 산책을 마친다. 내가 전혀 꿈꾸지 못하고 있던 에페소스를 보게 된 것은 이번 여행에서 얻은 또 하나의 기쁨이며 즐거움이었다. 지나온 많은 유적지와 유물들에 비해서 에페소스는 전혀 규모나 아름다움에서 뒤떨어지지 않는 곳이다. 아니 내눈을 더 즐겁게 하고 내 가슴을 벅차게 만들었다. 지금으로부터 2 - 3천년전에 이런 장엄하고 거대한 신전과 건물을 지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도저히 내 생각으로는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인간의 위대함은 지금이나 미래가 아니라 인간 자체가 있었던 그날부터이다라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이제 이 여행도 막바지를 향해 간다. 이제 셸축을 떠나 이스탄불로 간다. 터키 여행의 백미인 이스탄불을 볼 것이다. 사실은 지난 봄에 이스탄불에서 약 열흘을 머물러 많은 것을 보고 즐겼지만 아들과 함께 또 이스탄불을 찾게 되니 새로운 느낌으로 가슴이 설렌다. 

 

 

 

아들과 함께 터키문명 산책 - 에페소스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장대하고 화려한 살아 있는 도시 에페소스

 

 에페소스는 터키에서는 에페소(Efes)라 부른다. 성경에서는 '에베소'라고 하며 소아시아 7대 교회중 하나가 있는 빼 놓을 수 없는 곳이다.

 소아시아 서쪽 연안의 옛날도시로, 기원전 2000년대로 역사가 소급되나 B.C. 334년 알렉산더 대왕에 의하여 해방되어 헬레니즘 문화, 이어서 로마 문화가 번영하고 중요한 건축물이 수없이 많이 세워졌다. 특히 풍요와 생명의 여신으로 숭배받던 아르테미스신전은 B.C. 7세기 이후 몇 번이고 중건되어 B.C 4세기에 이르러서는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꼽히는 대 건축물로 완성되었으나 그리스도교 시대가 되자 그 모습은 완전히 파괴되어 버렸다. 현존하는 고대 유적은 헬레니즘 시대의 아고라와 극장, 하드리아누스제의 신전, 켈수스의 도서관 등이 있고 또한 근래에 발굴된 남쪽 경사면의 고대 로마의 주거지로부터는 벽화가 다수 발견되었다.

 

 이 도시는 그리스도교 시대에 들어와 성 바울이 편지를 보낸 곳으로도 유명하지만 특히 431년에 종교회의가 열려 성모가 신의 어머니라 인정된 것이 역사상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리스도교 건축에서 가장 대규모인 것은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치세 때 건립한 하기오스 요안네스 테오로고스의 바실리카인데 현재는 거의 붕괴해 버렸다. 이슬람 시대의 것으로는 이사 베이의 모스크가 있다

 

 에페소스 유적의 거리를 걷는 것은 마치 로마시대의 세월이 비껴간 어느 모퉁이에 와 있는 느낌이다. 유적의 입구는 남쪽 북쪽 두 군데인데 나는 남문으로 들어가 북문으로 나오는 방법을 선택했다. 

 

 

 

에페소스의 상징 - 겔수스도서관

 

 

남문 입구

 

 

로마시대의 에페소스 설명판

 

 

고대도시 에페소스 조감도

 

 

 남쪽 입구로 들어서면 바실리카 스토아(열주)들이 연이어 늘어선 거리 앞으로 소극장터인 오데온이 있다. 지붕이 있던 약 1500명을 수용하는 소극장으로 시낭송이나 음악회가 열렸던 곳이었다. 오데온 앞으로는 거대한 아고라가 자리하고 있으며 오른쪽으로 2세기에 지어진 바리우스의 욕장터가 3개의 아치와 함께 흔적만을 남기고 남아있다.

 오데온 소극장 정상에 올라 앉아 지나간 시대의 흔적을 느껴보며 세월의 무상함을 느껴본다. 지금도 이곳을 오고 가는 사람들, 과거에도 이곳을 지나갔던 사람들, 그리고 흘러가는 시간은 오늘도 어제에 이어 유유히 흘러간다.

 

 

 

바리우스욕장 - 로마시대의 욕장

 

 

바실리카 스토아(열주량) 설명판

 

 

 

 

 

오데온 설명판 - 설명판에는 Bouleuterion이라고 적혀 있다.

 

 

오데온의 입구

 

 

 

 

 

관청건물 설명판

 

이 건물은 고대 에페소스의 행정을 담당하던 건물인데 지금은 옛 자취를 알 수 없고 기둥만 남아 있다. 이곳에서 발굴된 두개의 아르테미스 여신상이 지금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멤미우스 기념비

 

1세기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 멤미우스가 그의 할아버지 술라를 기념하여 건립한 것으로, 술라가 에페소스를 탈환하는 장면과 승리를 칭송하는 글이 새겨져 있다.

 

 

 

도미티아누스 신전 설명판

 

 

 

도미티아누스 신전

 

 81 -96년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대에 만들어진 신전으로 에페소스에 황제 이름을 따서 지은 최초의 건축물이다. 제2의 네로로 불리는 그는 그리스도교를 박해하였고, 가신들에게 암살 당한 후 그의 이름을 띤 모든 건물이 파괴되었다 한다.

 

 

폴리오 기념비와 도미티아누스 샘 설명판

 

 

 

 

그 당시의 기록물 보관소

 

 

Hydrekdocheion(물의 궁전) 설명판

 

 

 

 

승리의 여신 니케 부조

 

 멤미우스의 기념비 맞은 편에 있는 부조로 선명하게 월계관과 날개가 남아 있다. 다른 니케 여신상들보다 선명하게 조각되어 눈길을 끌지만 길가에 조그마한 부조라 모르고 지나칠 수 있다.

 

 

 

쿠레테스 거리

 

 쿠레테스 거리는 완만한 경사지로 바닥이 미끄럽다. 수 천년 전의 대리석이 닳고 닳아 반질반질한 정도가 유리알과 같다. 쿠레테스 거리 우측에는 2세기경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바쳐진 신전이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여신 티케, 메두사, 다양한 신과 황제의 모습을 조각한 부조들이 눈길을 끌고 주변으로는 스콜라스티카의 목욕장과 공중 화장실 등 당시의 삶의 흔적들과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헤라클레스문 설명판

 

 

 쿠레테스 거리가 시작되는 지점에 양쪽 기둥에 헤라클레스 상이 있는 개선문이 있다. 4세기에 운반되어 온 돌기둥으로 지어진 헤라클레스 문은 2층으로 된 개선문으로 6개의 기둥 중 현재는 2개만이 남아 있다. 헤라클레스의 상징인 사자의 가죽을 지닌 모습이 부조로 남아 있는데, 원래는 큰 건물의 일부였다고 하는데 다른 부분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누군가를 모르겠는 입상

 

 

트리아누스 샘 설명판

 

 

 

 2세기경 트리아누스 황제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분수로 12m 높이의 중앙에는 황제의 동상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조각상 일부만 남아 있다. 에페소스박물관의 디오니소스나 아프로디테 상 등이 여기서 발견되었다 한다.

 

 

로마주택지(Terrace House) 1 설명판

 

 

 

 

 

바리우스 욕장 설명판

 

 

스토아(열주) 설명

 

 

 

 

 

하드리아누스 신전 설명판

 

 

 

 

 

 2세기경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신전으로 쿠레테스 거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이중으로 된 아름다운 아치에 조각된 조각품과 대칭적으로 보이는 아치의 조형미는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한다. 이 신전의 앞쪽 아치에는 행운의 여신 디케의 조각이, 뒤의 아치에는 메두사의 조각이 보인다. 여기에는 비잔틴의 황제 테오도시우스, 그의 가족, 아르테미스 등등의 그림이 있는데 모조품이고 진품은 에페소스고고학박물관에 있다. 고대 에페소스를 건립한 안드로클로스의 전설이 조각된 벽도 있다.

 

 

 

Terrace House 2 설명판

 

 앞의 테라스 하우스 1은 아마도 일반 평민들이 살았던 주거지인 듯하여 주거지 모양을 띠고 있지만 아무런 꾸밈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 테라스 하우스 2는 귀족들과 부유층의 주거지였을 것으로 짐작한다. 세계에서 가장 잘 보존된 로마시대의 주택지로 알려져 있는 이 주거지는 기원전 1세기부터 7세기경까지 건축된 건물로, 안에는 수많은 벽화와 프레스코 모자이크 등이 잘 보존되어 있다. 이 테라스 하우스 2 구역은 차단벽으로 가려져 있으며 따로 입장료를 받고 있다. 아들과 나는 처음에는 그대로 지나치려고 하다가, 무언가가 있으니 입장료를 또 받겠지 하고 보고 가기로 했다. 결론만 말하면 보지 않았으면 진짜 후회했을 것이다. 이 테라스 하우스 2를 다 보고난 뒤 아들과 나는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입장료가 전혀 아깝지 않고 더 받아도 된다고. 그만큼 아름다운 벽화와 프레스코, 모자이크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게 아름답게 잘 보존되어 있는 유적이다. 아직도 발굴이 다 끝나지 않았는지 계속 발굴중이었다. 이 아름다운 건물 내부를 찍은 사진을 보여 드리니 감상해 보시기를......

 

 그리고 에페소스를 가는 사람은 꼭 이 테라스 하우스 2를 입장료를 또 주고도 보시기를 간절히 빈다.

 

 하드리아누스 신전 바로 앞에 있는 이 테라스 하우스 2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4층인지 5층인지로 되어 있다. 맨 아래에서 위로 올라 가면서 본 유적과 유물들이다. 아무런 설명을 할 지식이 없으므로 그냥 보여 드리겠다.

 

 

 

 

 

내부설명판

 

 

 

 

 

 

 

 

 

 

 곳곳에 설명판이 있다. 하지만 그냥 눈으로 보고 지나가는 것이 좋다. 우리가 전문적인 역사학도가 아닌 이상 그냥 보고 즐기면 된다.

 

 

 

건물의 내부 구조와 유물 설명판

 

 

 

 

 

 

 

 

 

 

 

 

 

 

 

 

 

여기까지가 테라스 하우스 2의 내부 광경입니다.

 

 

테라스 하우스 2의 상층으로 나와서 보는 에페소스

 

 

하드리아누스의 문 설명판

 

 

하드리아누스의 문

 

 

쿠레테스 거리

 

 

Heroon of Androclos의 설명판

 

이곳은 에페소스에 있는 기독교 성지순례지로 알려져 있다. 밑의 사진에서 선명하게 기독교의 문양과 십자가가 보인다.

 

 

 

 드디어 장대한 에페소스의 자랑 켈수스도서관에 도착했다. 화려한 코린트식 열주가 변함없이 당당한 자태를 자랑하는 켈수스 도서관 전면에 서면 그 장엄함에 압도 당한다. 

 2세기 중반 학문을 사랑하던 아시아 주 총독 켈수스를 기념하기 위해 그의 아들 율리우스 아킬라가 아버지의 묘 위에 지은 도서관은 화려한 석주 건물로 코린트식 열주의 정문 석주가 강한 인상을 풍긴다. 정면 4개의 입구 앞에는 지혜와 지식, 지성과 용기를 상징하는 여성의 동상들이 자리하고 있어 도서관의 웅장함에 아름다움을 더한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복제품이다. 진품은 비엔나박물관이 가지고 있다. 그 당시에 12,000여권의 두루마리 형태의 서적을 소장하고 있었고, 서적이 상하지 않게 온도와 습도를 조절하는 구조로 만들었다고 한다. 도서관 입구 계단에서는 여행자들이 휴식을 취하고 사진을 찍으면서 에페소스 신비에 휩싸인 듯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한다.

 

 

켈수스도서관 설명판

 

 

 

 

 

아고라의 남문(마제우스와 미트라다테스문) 설명판

 

 

 겔수스도서관을 바라보면서 오른쪽에 있는 문으로 상업아고라로 이어지는 문이다. 노예였던 마제우스와 미트리다테스가 노예에서 해방되면서 아우구스투스황제에게 감사의 표시로 바친 문이라 한다. 이런 거대한 문을 노예신분이었던 그들이 어떻게 지었는지 궁금할 뿐이다.

 

 

 

 

 

겔수스도서관의 내부와 측면 벽

발자국 표시

 

 켈수스 도서관 앞에 있는 마제우스 미트리다테스문 아래에는 대리석 거리의 지하도를 통해서 사창가로 가는 통로였다고 한다. 도서관 앞에 사창가가 있었다니 조금은 의아한데 좀 부끄러웠든지 지하를 통과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사창가 입구 골목의 길가 바닥에는 발 그림과 여인의 상체가 그려진 대리석이 있는데, 이것은 발자국보다 큰 발을 가진 사람, 즉 성인만 사창가를 출입할 수 있다는 표시였다고 하고, 그 발자국 오른쪽에 새겨진 여인은 미인이 있음을 알리는 세계 최초의 광고이고. 발자국 위편의 둥근 구멍은 화대를 내야 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상업아고라 설명판

 

 

 

 상업아고라는 고대 에페소스의 중앙시장으로 에페소스 주민들의 상업중심지로 번창하였으나, 지금은 모두 파괴되고 기둥만 남아 있다.

 

 

 대리석 길

 

마제우스와 미트리다테스 문을 나서면 마지막 회랑으로 이어지며 아고라가 펼쳐진다. 돌길이 아닌 흙길을 밟으며 세월의 흐름속에 사라진 에페소스를 다시 생각한다. 겔수스도서관에서 원형 대극장까지 이어져 있는 길로 고대에는 아르테미스 신전까지 이 길이 이어져 있었다고 한다.

 

 

 

대극장(원형극장) 설명판

 

 문명의 쇠락과 역사의 흔적을 더듬으며 피온의 언덕에 올라선다. 파나 유르산 언덕에 지어진 야외 대극장은 2만 5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규모로 그 웅장함에 압도당한다.

거의 완벽하게 원형이 보존되어 있고, 오늘날의 극장과 비교해도 현대의 극장이 따라가지 못한다. 극장은 기원전 3세기에 건설을 시작하여 여러 번의 개축을 거쳐 로마 초기인 41년 - 117년 사이에 대대적인 개축을 통해 로마식으로 바뀌어 지금 전한다. 중앙 무대정면 건물에는 부조와 조각들로 장식했다. 음향시설을 완벽하게 설계되어 지금도 에페소스 국제음악제가 여기에서 열린다 한다. 특히 이 극장은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여신 숭배와 기독교의 갈등이 빗어진 곳이다. 사도 바울이 이곳에서 우상숭배 철폐의 설교를 하다가 추방된 곳이다. 

 

 엄청난 규모와 아름다운 극장의 외형에 감탄하면서 잠시 객석에 앉아 지난 날의 영화를 회상하면서 지금은 묻혀버린 고대의 항만을 바라본다. 2,000년 전의 영화를 회상하며 시간의 도도한 흐름속에서 사라져 버린 인간의 모습을 흑백 필름처럼 가슴속에 떠 올려 본다. 헬레니즘 시대의 고대 유적지 에페소스의 신비를 바라보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깊은 역사의 지혜를 깨우친다.

 

 

 

대극장 앞부분

 

 

 

 

 

 

대극장의 여러 모습

 

 

 

 

아르카디아 거리

 

 대극장을 나오면 헬레니즘시대에 세워져 수 많은 사람들에 의해 반들반들해진 대리석 도로가 나온다. 아르카디아 거리다. 대극장에서 항구를 향하여 뻗어 있는 거리인데 비잔틴시대에 황제 아르카디아가 수리하면서 명명된 거리다. 너비가 약 11m이며 길이는 약 500m로 길 양 옆에는 상점이 늘어서 있어 번화한 거리였다고 한다. 강의 토사가 쌓여 항구가 제 기능을 상실하면서 점점 쇠퇴하였다.

 

 

극장연무장 설명판

 

 

 

 

 

항만체육장설명판

 

 

성모 마리아교회 설명판

 

 

 

 대극장에서 북문으로 나가기전에 보이는 유적으로, 성모 마리아를 모신 최초의 교회로 알려져 있다. 원래는 바실리카였는데 증축을 하여 교회로 사용한 곳이다. 431년 삼위일체를 그리스도교 정통 교의로 확인하는 에페소스공의회가 열린 곳이다.

 

 

 에페소스를 보고나니 가슴이 멍하다. 이런 장대한 유적을 인간이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인간의 위대함이 또 느껴진다. 오랜 세월의 흐름에서 이곳을 만든 사람들이나, 이곳에서 살던 사람들은 지금 사라져 버렸으나 그들의 삶의 흔적은 고스란히 우리에게 전해진다.

 

 이 에페소스에서 우리는 위대한 건축물을 수 없이 본다. 하지만 나는 무엇보다도 그들의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테라스 하우스 2가 마음속 깊이 새겨졌다. 에페소스를 가는 사람은 꼭 이 테라스 하우스 2를 구경하기를 다시 한번 말한다. 무엇보다 소중한 우리의 유산이며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보고이다.

 

 에페소스 유적에서 받은 감동을 제데로 간직하고 이 감동을 잃어버리기 전에 빨리 고고학박물관에 가서 에페소스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