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鶴)의 오딧세이(Odyssey)

아들과 함께 터키문명 산책 - 카파도키아 2 (열기구, 발룬투어)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높이 나는 새가 더 많은 곳을 본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어제 타지 못했던 터키여행의 백미라 일컫는 발룬(열기구)을 타기 위해 다시 셔틀에 몸을 싣고 출발했다. 카파도키아에만 무한정 있을 수 없기에 우리가 카파도키아에 있는 동안 발룬을 타야 한다. 날씨는 상당히 좋아 기대를 하고 현장에 가니 어제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으며 발룬을 운행하는 사람들도 준비를 시작한다. 다행히 오늘은 발룬이 운행된다고 한다. 발룬이 가스를 주입하는 동안 발룬을 타기 위해 대기하는 사람들에게 이들은 차와 약간의 주전부리를 준비해 놓고 있다. 차를 한잔 마시고 쿠키를 몇 개 먹고 주변을 돌아보니 준비하고 있는 발룬이 엄청 많다. 적어도 내 눈에 보이는 것만도 백개는 넘는 것 같다.

 

 발룬은 서너명이 타는 것이 아니라, 한 발룬에 20명이 탄다. 이 사람들 말에 의하면 발룬은 높이 떠오르면 약 400m까지 올라간다고 한다. 공중에 높이 올라가므로 옷을 두껍게 입고 발룬을 탔다. 허공은 상당히 추웠다. 이 발룬의 운행은 계절에 따라 사간이 다른데 그 이유는 발룬을 타고 하늘에 올라 일출을 보기 위해서다.

 발룬은 한 시간 가량을 운행하는데 카파도키아 일대를 하늘에서 한 시간 구경하면 자연의 풍경은 거의 다 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제 하루 종일 걸어다니며 보았던 기괴한 모양의 암석군들, 카파도키아 평원, 아름다운 카파도키아의 계곡들 등등 카파도키아의 절경을 하늘 위에서 보는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으며, 하늘 위에서 일출을 보는 기분은 말로는 설명할 할 수 없고 직접 그것을 경험해 보아야 알 수 있다. 참고로 이야기하면 이 발룬투어는 여러 곳에서 예약을 할 수 있지만 숙소에서 예약을 하는 것이 교통편이나 다른 서비스측면 등 여러 면에서 가장 좋다.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이 발룬을 타고 어린 아이같이 기쁘하며 즐거워한다. 우리가 탄 발룬에는 중국인들이 많이 탔는데 중국인 특유의 떠들석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발룬을 조종하는 일명 조종사들은 능숙하게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카파도키아를 한바퀴 도는 것 같았다. 카파도키아를 여행하는 사람은 하늘 위에서 자유를 만끽하는 발룬을 꼭 타 보는 행운을 가지기를 빈다.

 

 첨언하면 터키를 여행하는 도중에 한국의 젊은이들을 만나서 이야기했다. 그 젊은이들이 카파도키아를 거쳐 왔다고 해서 발룬을 탔느냐 물으니 못탔다고 했다. 기상 상태가 좋지 않아 12월 26일에 발룬이 뜨고 그 뒤에는 한번도 뜨지 않았다고 하면서 현지인들이 당분간 발룬운행이 어려울 것이라 하더라고 전했다.

 

 바로 그 12월 26일 오늘이 내가 발룬을 탄 날이다. 나의 여행에 행운이 따랐다.

 

 

카파도키아 하늘을 수놓고 있는 발룬들

 

 

 

 

발룬을 띄우기 위해 준비하는 모습

 

 

 

 

 

 

 

 

하늘로 떠오르는 발룬들

 

 

 

 

 

 

하늘위의 발룬들

 

 이 발룬을 타고 나서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니 이구동성으로 위험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답은 아주 간단하다. 너무 편안하다. 우리가 자동차를 타고 가는 것보다 더 움직임이 없다. 가만히 있으면 하늘에 올라가서 오르락 내리락하면서 조종사가 조종하는대로 움직인다. 우리는 그냥 구경만 하면 된다. 물론 조심은 해야 한다. 아무런 보조장치가 없이 하늘에 올라가기 때문이다.

 하늘에 올라 얼마나 많은 발룬이 떠 있는지를 대강 헤아려 보았다. 적어도 300내지 400개 정도가 눈에 보였다. 엄청난 수의 발룬이 하늘을 덮고 있었다. 물론 하늘의 크기에 비하면 너무나 작지만. 그래서 속으로 계산을 해보았다. 발룬이 한번 뜨면 얼마나 이 동네에 수입이 될까?하고 한 발룬에 20명씩 탄다. 약 400개의 발룬이고 한 사람당 130유로다. 간단하다. 20×400×130 유로이다. 약 100만유로이다. 우리 돈으로 약 13억이다. 물론 매일 이렇게 많이 떠는 것은 아니겠지만..... 뒤에 알았지만 오늘이 전에 발룬이 뜨지 못해 손님을 다 모은 것이었지만... 그래도 엄청난 돈이다. 이 작은 마을에서 엄청난 수입을 보장하는 관광 아이템이다.

 

 하늘에서 카파도키아를 즐겁게 구경하고 있으니 동쪽에 붉은 기운이 비친다. 일출이다. 하늘위에서 보는 일출이다. 해가 이렇게 뜨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발룬은 일기가 좋은 날에 운행을 하며 일출시간에 맞추어 비행을 한다. 이들이 관광객을 위한 마음씀이 갸륵하다고 생각되었다.

 

 

 

 

 

 

 

해뜨는 카파도키아의 하늘 

 

 

 

 

 

 

 

 

 

 

 

하늘에서 보는 카파도키아 동영상

 

 

 

 

 

 

 

 

 

 

 

발룬에서 보는 카파도키아의 자연 풍경

 

 발룬을 조종하는 조종사들은 아주 능숙하여 우리가 아주 편안하게 카파도키아의 자연 풍경을 볼 수 있게 한다. 암석 가까이에도 비행하여 암석군을 자세히 보게 하기도 하고, 멀리서 계곡을 보게도 한다. 따로 다른 투어를 따라 가면서 카파도키아의 자연을 구경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물론 세밀한 자연 풍경은 가까이에서 보아야 제대로 볼 수 있지만 먼 원경은 하늘에서 보는 것이 더 아름다운 것 같다.

 

 

 

 

 

하늘에 떠 있는 발룬들

 

 

 

 카파도키아의 하늘을 비행기 창이 아니라 직접 발룬에 타서 호흡하며 온몸으로 공기를 숨쉬면서 보는 풍경은 장관이다. 밑을 보면 카파도키아의 자연이 색다르게 보이고, 하늘을 보면 푸른 하늘과 그 곳을 자유롭게 비행하는 발룬들을 보는 것이 더 장관이다. 수백개의 발룬이 하늘에 떠 있는 모습을 보라. 사람들은 발룬이 몇 개 정도 떠올라 그냥 선회하는 것 정도로 생각하지 이렇게 많은 발룬이 떠오르는 것을 상상도 못한다. 내가 여행을 마치고 돌어와서 사진을 보여 주니 모두들 감탄을 한다, 이렇게 많은 발룬이 떠 오르는 것은 상상도 못했고, 하늘에서 발룬을 보는 것이 더 장관이겠다고.....

 

 

 

 

운행을 마친 발룬이 착륙하는 모습

 

 

 

 발룬을 타고 나면 발룬 운행회사에서 간단한 다과와 샴페인을 준비해 놓고 축하를 해 준다. 물론 약간의 상술이 포함되어 있지만 샴페인을 한 잔 주고 팁을 넣는 통을 준비해 놓고 있다. 절대 강요는 아니니 주고 싶으면 자기가 알아서 주면 된다.

 

 

 마지막 정리를 하고 셔틀을 타려고 하니 이름을 부른다. 봉투를 하나 주기에 무엇인가 받아보니 발룬을 탔다는 증명의 사진이다. 아주 재미있는 장사다. 관광객들에게도 추억이 되고 자부심을 가지게 한다. 그만큼 발룬을 탄다는 것은 행운이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여행을 하면서 발룬만 타려고 무작정 카파도키아에 머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발룬을 탄 것이 이번 여행에서 재미있는 또 다른 경험이었다.

 

 내가 이글을 쓰고 있는데 뉴스에서 제주도에서 열기구가 추락해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하면서 여러 가지 이유를 설명한다. 그 뉴스를 보면서 카파도키아를 생각했다. 별로 기상 상태가 나빠 보이지도 않았는데 비행할 수 없다며 거의 한달에 하루 정도밖에 운행하지 않는 그들은 얼마나 안전을 우선하는지를 또 다시 생각하게 했다.

 

아들과 함께 터키문명 산책 - 카파도키아 1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사람들은 말한다. 그리스문명을 보고 싶으면 그리스보다 터키를 가라고, 그만큼 터키에는 고대 그리스 문명의 자취가 그리스보다 많이 남아 있다. 그래서 우리는 터키에 왔다.

 

 하루 종일 비행기를 타고 터키의 카이세르공항에 도착했다. 교통편이 그렇게 좋지 않아서 아침에 크레타에서 아테네로 비행을 하고 다시 이스탄불을 거쳐서 카파도키아의 카이세르 공항에 도착하니 밤 10시가 넘었다.

 

 카파도키아는 내가 이번 여행을 계획하면서 일정을 짜는 아들에게 강권하여 넣은 코스다. 내가 꼭 가야된다고 한 곳이 바로 이 카파도키아와 트로이다. 아들은 처음에는 이미 계획이 다 짜였다고 불평을 했으나 아버지의 요청을 수락하여 계획을 다시 수정하였다.

 이런 점이 내 아들이지만 참으로 고맙다.

 

 카파도키아는 너무 넓기 때문에 숙소를 잘 정해야 한다.

우리는 괴레메에 숙소를 정하였으므로 공항에서 괴레메로 숙소를 찾아가니 먼저 카파도키아에 가면 꼭 해야 되는 발룬 투어를 신청하라고 한다. 한 사람당 130유로라는 적지 않은 돈을 달라고 하지만 카파도키아에서 발룬을 타지 않으면 어디에서 발룬을 타겠는가? 죽기전에 꼭 해야 하는 일이 카파도키아 발룬 타기라고 모든 여행안내서나 사이트에서 떠들고 있다. 얼마나 좋은가를 직접 타 보아야 한다. 뒤에 다시 말하겠지만 발룬을 타는 것은 운이 따라야 한다. 아들은 처음부터 자기는 고소공포증이 좀 있어서 타지 않겠다고 했으나 애비가 여기에서 발룬을 타지 않는 것은 앙꼬가 없는 찐빵을 먹는 것과 같다고 강권하여 같이 타기로 했다.

 

 다음 날 아침 7시에 발룬을 타기 위하여 셔틀버스를 타고 발룬이 뜨는 장소로 갔다. 그런데 대기하고 있으라고 하면서도 발룬을 띄우기 위한 작업을 하지 않는다. 한 시간쯤 지나니 오늘은 발룬이 운행하지 않는다고 한다. 감독관청이 일기가 좋지 않다고 운행허가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별로 바람도 불지 않는데 엄격하게 규정을 지키는 것이다. 아마도 안전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듯하였다. 할 수 없이 숙소로 돌아오니 숙소 주인이 말하기를 최근 한 열흘 동안 발룬이 한번도 떠지 않았다 한다. 어쩔수 없이 내일을 다시 기약하며 아침을 먹고 괴레메 탐방에 나섰다. 여러 번 이야기하지만 아들과 나는 무작정 걷는 것을 특기로 한다. 괴레메의 전 지역을 걷기로 하고 구경을 시작했다.

 

 

카파도키아의 바위 중 가장 유명한 바위

 

 

 

 

하얀 눈이 보이는 카파도키아의 평원

 

 

 

 

 

 

이름도 모르는 카파도키아의 풍경 - 길을 걸으며 찍은 사진이다.

 

 

 우리가 사는 지구에는 우리 상식을 벗어나 그 앞에 서면 충격으로 몸이 굳어버리는 풍경을 가진 곳이 여러 군데가 있다. 터키 중부의 카파도키아(Cappadocia)는 그런 곳이다. 살아오는 동안 한 번도 본 적 없는 풍경 앞에 섰을 때 자연의 경이로움에 그 어떤 말도 나오지 않고 감탄사만 나올 뿐이었다.

 

 카파도키아 지역은 실크로드의 중간거점으로 예부터 동양과 서양을 잇는 중요한 교역로였다. 기원전 18세기에 히타이트인들이 정착한 이후, 수많은 제국이 차례로 이곳을 점령했다. 로마와 비잔틴 시대에 기독교인들의 망명지가 되었던 이곳은 초기 기독교 형성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기독교가 아직 공인되지 않았던 로마시대에 탄압을 피하여 기독교인들이 이곳에 몰려와 살았기 때문이다. 지금 남아있는 대부분의 암굴교회와 수도원들은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초기 기독교의 성지로도 알려져 있는 곳이다.

 

 8~9세기 전반에 비잔틴 제국에서 일어난 우상파괴 운동으로 인해 암굴교회의 수많은 초기 벽화들이 파괴되어 지금 제대로 모습이 전하는 것을 보기가 어렵고 그 흔적만 보는 것이 안타깝다. 11세기 후반에는 터키 셀주크 왕조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면서 카파도키아도 이슬람교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는 분쟁이 아니라 서로 평화적으로 공존했다. 모스크가 건설되는 과정에서 기독교의 건축물이 파괴되지 않아 지금까지 우리에게 남아 전한다.

 

 숙소를 출발하여 오늘은 자유롭게 구경을 하기로 하고 젤베야외박물관쪽으로 방향을 정했다. 이 거리는 무난히 걸어서 갔다 올 수 있는 거리라 생각하고 발길 닫는대로 가기로 했다. 우리는 차가 없고 버스를 이용하기가 어려워 좀 거리가 먼 곳에 있는 유적지는 내일 투어를 따라 가기로 하고 오늘은 그냥 걸으면서 구경하기로 한다.

 

 12월이지만 참 맑은 하늘은 우리를 상쾌하게 만들었고 또 제법 걸으면 이마에 땀이 맺히기도 하였다. 도로변이나 계곡근처를 보면 제법 눈도 쌓여 있는 풍경이 나타난다.

 

 

 

 

 

 

 

괴레메 시내 풍경

 

 

 

 

 

 

 

 

 

 

길을 걸으며 보는 여러 풍경

 

차츰 차츰 바위의 모습이 우리 눈을 자극한다. 기괴하게 보이는 바위들이 눈에 보이며, 겨울이라 눈이 쌓여 있으며 맑게 푸른 하늘이 우리 기분을 상쾌하게 한다. 이리 저리 눈을 돌리며 주변을 구경하며 처음 도착한 곳이  차우쉰이라는 옛날의 마을과 세례자 요한 교회다. 지금의 마을 위에 있는 옛날 사람들의 거주지는 암벽에 굴을 파고 그 안에서 살았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이 카파도키아지역에는 큰 돌기둥이나 큰 암벽의 중간중간에 굴을 파고 사람들이 살아왔다. 왜 그들은 넓은평지를 두고 암벽을 파고 살았을까?하는 의문이 생긴다.

 

 

 

 

 

 

 

 

 

 

 

 

암벽 동굴집의 여러 모습

 

 

 

 

 

 

 

 

 

 

 

 마을을 조금 지나 교회의 표지판이 있는 곳에서 제법 언덕을 올라가면 세례자 요한 교회가 나온다. 교회라고 설명을 하였기에 교회인가 하고 구경을 하지만 별다른 특색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곳을 구경하고 마을을 벗어나서 점심을 먹으려니 식당이 보이지 않는다. 길을 가다가 가게가 있어 음료수를 사니 식당을 겸하고 있다, 그래서 요기를 할 수 있는가 물으니 간단한 음식은 먹을 수 있다고 한다. 주문을 하고 잠간 기다려 식사를 하고 다시 카파도키아의 풍경을 보기 위해 제법 높은 언덕에 올라간다. 무엇인가 이름이 있었다고 생각이 나는데 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은 곳이다. 이 언덕에서 보는 카파도키아의 풍경은 우리를 매료시켰다. 각양 각색의 암석의 모습은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에 우리가 착륙해 있는 느낌을 가지게 한다. 오묘한 자연의 섭리를 우리 인간이 어찌 알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다.

 

 

주변의 경치를 찍은 동영상

 

 

 

 

 

 

 

 

 

 그 어떤 거대한 손을 가진 거인이나 신이 있어 어느 한가로운 오후, 심심풀이로 진흙을 이겨 빚어 놓았을까? 어떻게 이런 자연 풍경이 만들어졌을까? 학자들은 화산활동의 영향으로 생겨난 것이라 한다. 약 900만년전부터 300만년전까지 계속된 화산폭발과 대규모 지진활동으로 잿빛 응회암이 온 땅을 뒤덮었고, 그 후 오랜 풍화작용을 거쳐 특이한 암석군을 이루어 신비한 자연이 예술작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오랜 시간 뒤에 사람들은 이 기암괴석에 굴을 파고 거주를 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 풍경을 보고 한 가지 오해를 한다. 우리가 재미있게 본 영화 가운데 스타워즈라는 영화가 있다. 사람들은 그 스타워즈의 동굴 집이나 배경이 되는 지구가 아닌 듯한 계곡들을 이 카파도키아에서 찍은 것으로 오해한다. 너무나 이 카파도키아가 우리 지구의 모습이 아니게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타워즈는 카파도키아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스타워즈는 튀니지의 마트마타사막에서 촬영한 것이다.

 

 이 곳에서 카파도키아의 경치를 조망하고 다음으로 간 곳이 차우쉰동굴교회다. 여러 곳의 기념품 가게가 있고 그 뒤의 거대한 암석 절벽에는 교회가 있다. 차우쉰동굴교회이다. 이 교회에 들어가려면 입장료를 따로 내어야 한다.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지 한가로이 앉아 있는 관리인에게 표를 끊으니 동양인이 이곳을 찾는 것이 신기한 듯이 본다. 입장료를 내고 철계단을 올라가 동굴로 들어가니 초기 교회의 성화가 벽에 많이 보인다. 오랜 세월에 많이 퇴색된 것 같고 또 많이 훼손되어 있지만 초기 기독교의 성화로 가치가 있다.

 

 

 

마을과 교회 앞에 차우쉰이라는 표지

 

 

 

 

차우쉰동굴교회의 전경

 

 

 

 

 

 

차우쉰동굴교회 내부의 초기 기독교 성화들

 

 

교회에서 보는 전방의 풍경

 

 

 

멀리서 보는 차우쉰동굴교회 전경

 

차우쉰동굴교회를 구경하고 파사바아로 가는 도중에 파사바아와 유사한 버섯 모양의 바위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카파도키아는 사실 어느 곳을 꼭 정하고 구경을 하지 않아도 곳곳에 버슷 모양의 바위들이 비슷한 모습을 띠고 있는 곳이 너무 많다. 그리고 모두가 우리를 경탄하게 한다.

 

 

 

 

 

 

 

 

카파도키아 곳곳의 모습

 

 길을 걸어 가면서 곳곳에서 기괴한 모습을 가진 바위들을 보면서 감탄을 한다. 이것이 우리가 걸으면서 여행을 하는 즐거움이다. 차를 타고 가거나 투어를 따라 가면 이 아름다운 광경을 보지 못하고 지나가기가 쉽다. 정해진 곳을 정해진 길로만 가기에 여행사나 가이드가 보여 주고 싶은 것만 관광객이 본다. 하지만 나와 아들은 우리 발길이 닫는대로 움직일 뿐이다. 그리고 이정표를 보고 여기가 어딘지를 알아 차린다. 물론 현대 문명의 이기인 스마트폰의 구글 지도가 큰 공헌을 했다. 구글 지도만 따라가면 길을 잃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계속 구경을 하면서 길을 가니 카파도키아의 바위군중 가장 유명한 파샤바아에 도착한다.

 

 파샤바아(Paşabaĝa) 언덕에서 굽어보면 버섯모양의 바위들이 눈길을 끈다. 바위 위에 송이버섯처럼 생긴 바위가 하나, 둘 혹은 셋까지 올라앉아 있는 모습이 독특하다. 이런 바위의 모습을 보는 순간 만화영화 스머프가 떠오른다. 만화에서 스머프들은 버섯모양으로 된 집에서 살고 있다. 이곳이 스머프가 사는 마을과 흡사하다는 느낌이 드는 이유는 버섯처럼 생긴 바위도 한 몫을 하지만, 버섯바위에 구멍을 뚫어 생활공간을 만들고 여기에 사람들이 거주를 했다는 것이 결정적인 이유라고 생각한다.

 

파샤바아는 터키어로는 장군의 포도밭이라 한다. 이곳에서 포도를 많이 재배했다고 하여 그럼 의미가 붙여졌다. 화산 폭발로 퇴적된 지층이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독특한 모양을 만들었는데 누가 보아도 송이버섯 모양이다.

 파샤바아에서 가장 유명한 바위는 기둥위의 성자라고 던 시몬이 수도한 곳이다.

 

 

 

 

 

바위를 파서 거주했던 집의 모양

 

 

 

 

 

 

파샤바아의 가장 상징적임 바위

 

 

 

파샤바아의 여러 모습들

 

파샤바아를 구경하고 오늘의 최종 목적지인 젤베야외박물관으로 간다.

 

 젤베야외박물관은 괴레메 마을에서 북동쪽으로 약 8Km 떨어진 곳에 있는 계곡이다. 9~13세기 기독교도들이 은둔하면서 살았던 곳으로 교회와 수도원이 남아 있다. 이 계곡에는 15개의 교회의 흔적이 있는데 성화는 없고 여러 종교적 상징이 그려져 있다. 주거 지역에는 저장 시설도 따로 갖추고 있었으며 2층과 3층 등 각 층의 굴이 작은 땅굴로 연결되도록 유기적으로 설계됐다. 1950년대까지 이 지역에서는 실제 사람들이 살았는데 동굴의 붕괴 위험이 높아지면서 터키정부가 1952년 지역 주민들을 모두 이주시켰다. 이 젤베에서는 교회 외에도 계곡의 독특한 경치 자체가 볼거리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 야외박물관은 아주 장소가 넓어 한바퀴를 도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걱정하지는 마시라.  이정표가 이 야외박물관을 한 바퀴 빙 돌아 구경하도록 만들어 놓여있으니 그대로 따라만 가면 된다.

 

 

 

젤베야외박물관 표지

 

 

 

 

 

 

 

 

 

 

물고기와 포도 교회 설명

 

 

 

 

 

십자가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인다.

 

 

밀 생산 도구

 

 

 

안내 이정표

 

 

와이너리 설명

 

 

 

 

 

 

 

 

 

 

 

 

 

 

모스크 설명판

 

 

 

 

 

벽에 그려진 물고기 모양

 

 

 

 

수도원 설명

 

 

 

수도원

 

 이 젤베야외박물관은 상단히 크다. 자세히 돌아 보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린는지 모른다. 그냔 한바퀴를 돌아보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하지만 자유롭게 다니니 이 정도라도 볼 수 있었다. 투어를 따라 가면 과연 얼마나 볼 수 있을지...... 내가 여행을 다니면서 만난 투어 여행객들을 보면, 내가 하루를 소비하여 구경하는 곳도 30분도 안되어 구경을 마치고 가버리는 일이 허다했다. 심지어 진짜 구경은 하지도 안하고 겉 모양만 얼핏 보고 가는 것도 많이 보았다.  그래서 나는 투어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젤베야외박물관을 구경하고 나와서 카페에 앉아 괴레메로 돌아갈 생각으로 버스를 물어보니 조금 있으면 온다고 한다. 카페에 앉아 차를 한잔 마시고 아들과 오늘 구경한 여러 곳의 이야기를 하다가 버스가 와서 타고 괴레메로 돌아왔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적어도 15Km는 넘는 거리를 걸었는 것 같다.

 

 숙소에 돌아와 저녁을 먹으려고 나갔는데 우리집이라는 한식당이 있다. 그 옆에는 중국집이 있는데 아들과 오랜만에 한식당에 가서 밥을 먹자고 했다. 우리는 여행중에는 항상 현지 음식을 먹는 것을 불문율로 했지만 오랜만이라 아들도 동의한다. 식당에 가니 한국 사람들이 많이 밥을 먹으면서 왁짝지껄하게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낮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는데 모두들 투어를 따라 다닌 것 같다. 식당은 한국 사람이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터키인 부부가 운영하는데 그런대로 한국 음식 맛을 내고는 있었다. 비빔밥, 불고기 김치찌개 등 등 많은 종류의 한국 음식이지만 재료가 터키산이라 ......

 

 저녁을 먹고 들어오니 제법 피곤하다. 아마 오늘 제법 많은 거리르 걸은 듯하다. 내일 아침에 다시 발룬을 타기 위해서 일찍 일어나야 한다. 잠자리에 들었다.

 

아들과 함께 그리스문명 산책 - 크레타 크노소스 궁전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고대 유럽의 가장 오래된 도시 크노소스 

 

 크레타문명은 고대 그리스문명의 모태가 된 듯하다. 고대의 가장 강력한 국가는 이집트였다. 그리고 문화도 가장 발달되어 있었다. 그 이집트문명이 유럽으로 전파되면서 지중해에 처음 도달한 곳이 아마 크레타일 것이다. 그리고 크레타에서 펠레폰네소스반도로 상륙하여 미케네문명을 만들고 다시 이 미케네에서 아테네로 문명이 이동했으리라는 것이 대개의 의견인 듯하다.

 

 이 유럽문명의 기초가 되는 크레타문명의 중심은 바로 미노아문명이다. 그리고 신화의 궁전 크노소스는 미노아문명의 상징이다. 우리가 잘 아는 라비린토스(미궁), 미노타우로스, 테세우스, 다이달로스, 이카로스의 신화 등이 모두 여기가 배경이다.

 

 이 궁전은 그리스 신화에서 미노스왕이 아내가 낳은 반은 인간, 반은 황소였던 미노타우로스를 가두기 위해 지은 궁전이라 한다. 섬의 북쪽 해안 현재의 이라클리온시 남쪽 약 6km 지점 구릉 위에 있다. 크노소스에 있던 고대 왕국의 궁전으로, 궁전은 동서 170미터, 남북 180미터 규모로 장방형 구조를 이루고 있다. 60m×29m 정도의 직사각형의 중앙광장을 사이에 두고 동쪽으로 왕과 그 가족을 위한 거주구와 공방, 서쪽으로 제례와 정치를 위한 공실, 창고 등 약 1200내지 1400개의 작은 방이 미로와 같이 촘촘하게 들어서 있다. 심한 붕괴로 상부구조는 분명치 않으나 2층 또는 3층 부분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며, 일종의 수세식 변소, 도관()을 이용한 하수도 등도 발굴되었다.

 

 크노소스의 한 가지 특징은 다른 고대 도시들이 대개 신전 중심의 도시라면 크노소스는 왕궁 중심의 도시라서 신에 관한 장식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부의 벽이나 천장의 대부분은 궁정풍속, 동식물, 새, 물고기 등을 그린 회화로 장식되어 있다. 현재의 프레스코는 다 복제품이다. 진품은 이라클리온고고학박물관에 있다.

 

 크노소스는 고대의 왕궁건축 중 가장 규모가 큰 궁전 중의 하나이며, 또한 그 복잡한 설계로 옛날부터 ‘라비린토스(미궁)’로서 유명하였다. 그리스의 영웅 테세우스가 이 미궁 깊숙이 살고 있는 미노타우로스를 퇴치하고, 왕녀 아리아드네와 함께 섬을 탈출하는 이야기는 잘 알려졌다. 

 

 20세기가 되기 전까지만 해도 크레타 문명은 트로이와 같이 신화 속에나 존재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트로이의 슐리만과 비슷하게 미노스 왕의 전설을 믿고 크레타 문명을 찾아나선 사람이 바로 영국의 고고학자 아서 에번스(Authur Evans. 1851~1941)였다.

 

 그는 크레타 문명의 존재를 믿고 입증하기 위해 크노소스 궁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게파라 언덕을 사들여 1900년부터 발굴을 시작했다. 발굴을 시작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로마와 그리스에서는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양식의 건축물들이 차례로 발견되었다. 크레타문명이 3,000년 동안의 기나긴 잠에서 깨어나 세상의 빛을 보게 되는 순간이었다. 에번스는 그 자신의 예상대로 크레타 문명을 발굴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유적은 에번스에 의하여 어느 정도 복원되었으나 그가 콘크리트 같은 자재를 사용했기 때문에 원래 그대로의 설계와 건물의 진위 여부를 가려내는 데에 어려움을 남겼다고 현대에 비난을 받고 있다. 하지만 에반스의 공을 폄하할 수는 없다.

 

그 뒤 크레타 섬 이곳저곳에서 크레타 유적이 속속 발견되었다.

 

 에번스는 그의 전 생애를 크레타 문명 연구에 바쳤는데그의 공헌으로 크레타 문명에 대한 연구는 커다란 진전을 이루었다. 이 에반스의 공을 기려 크노소스궁전 입구에는 그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크노소스의 많은 출토품은 이라클리온고고학박물관에 수장 전시되어 있다.

 

 오늘날의 크노소스는 옛날의 궁전의 자취만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비록 복원하였다고 하지만 허물어져 있는 건물의 일부와 돌덩이들, 그리고 조금은 복원이 조잡해 보이는 프레스코화의 일부를 볼 수 있지만 여기는 크노소스다. 이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크노소스궁전

 

 

 

에반스의 업적을 설명하고 있는 안내판

 

 

크노소스 입구

 

 크노소스를 찾아가는 날에 비가 제법 내렸다. 비를 맞으며 크노소스궁전에 가니 입장객은 나와 아들뿐이다. 입구에서 입장권을 끊고 들어가니 어떤 노인들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보니 우리나라의 문화해설사와 같은 사람들이다. 안내문을 읽어보니 해설료가 제법 된다. 거절을 하고 들어가니 이런 사람들이 제법 있으면서 가격을 흥정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나름대로 보고 갈 예정이기 때문에 다시 거절하고 발걸음을 궁전쪽으로 향했다.

 

 

 

 

크노소스궁전 터와 주요 관람 안내도

 

이 궁전 안내도가 아주 상세하게 설명이 잘 되어 있기 때문에 이 안내도를 참고해서 그냥 구경하면 된다. 하지만 대부분이 비슷한 모습들이다.

 

 

크노소스의 상징처럼 알려진 검은 황소의 모양. - 궁전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South House 설명과 건물

 

 

 이 유적을 구경하는데 공작새가 처량하게 비를 맞고 앉아 있다. 조금은 생퉁맞은 느낌이 들었지만 그래도 이 고대 유적을 지키고 있는 듯해서 반가웠다. 조금 뒤에 다시 보았는데 이 크노소스에는 제법 많은 공작이 있었다.

 

 

 

크노소스의 상징인 황소뿔 모형이 있는 주된 궁전의 모습

 

 

 

 

 

남쪽 프로필라이움(propylaeum)에 그려져 있는 항아리를 든 사람의 벽화

 

 프로필라이움(propylaeum)은 고대 그리스의 신전이나 성지로 들어가는 입구에 세운 문으로 이 벽화로 유럽인의 특징을 가진 크레타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기름항아리로 사용되었다고 추정한다.

 

 

 

 

 

   

 

 

머리 부분은 공작의 모습이고 몸통은 사자의 형상의 프레스코

 

 

왕좌의 방에 대한 설명판

 

 

 

 

 크노소스는 정말 복잡하다. 건물이 정학하게 지하 몇 층인지도 모르겠고 지상의 건물과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도 분간할 수가 없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테세우스의 신화 중 미궁에 대한 부분만을 소개하면, 미노타우로스를 퇴치하기로 결심하여 스스로 제물이 되겠다고 자원한 테세우스는 무기를 갖고 들어갈 수 없었지만 맨손으로도 충분히 괴물을 쓰러뜨릴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 후의 탈출 방법이 문제였다. 일단 라비린토스(미궁)에 들어간 사람은 설령 미노타우로스를 죽인다고 해도 얽히고 설킨 미로를 헤매다가 두 번 다시 빠져나올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랑은 모든 것을 뛰어 넘는 것이다. 테세우스에게 한눈에 반한 미노스 왕의 딸 아리아드네가 미궁에서 탈출하는 방법으로 실뭉치를 주면서 실끝을 입구에 묶은 다음 미궁으로 들어가서 그 실을 따라 나오라고 한다. 아리아드네의 말을 따른 테세우스는 미노타우로스를 맨손으로 때려죽이고 실을 따라 무사히 미궁을 탈출했다. 약 1400개의 방이 있다니 오죽하였겠나 생각이 된다.

 

 

 

 이 궁정의 동쪽 면의 중간에 거대한 계단(Grand Staircase)이 있는데 이것을 따라 내려가면 동쪽 날개(East Wing)에 이른다. 이 동쪽날개에는 왕과 여왕을 위한 분리된 왕가의 방들이 있다. 거기에는 훌륭한 프레스코화와 욕실, 화장실, 왕좌의 방들이 있는 거대한 방들이 있다.

 

 

  

 

동쪽 건물

 

 

 

 

기름 항아리

 

 

 

 

궁전의 벽

 

 

 

크노소스 기념품가게 앞에 핀 꽃

 

 

 

 

 

 

 

 

 

 

크노소스궁전의 여러 모습들

 

비를 맞으며 크노소스를 이리 저리 다니면 구경을 하였다. 해가 밝게 비추는 크노소스도 좋을 것이나 폐허가 되어 있는 크노소스에 비가 내리니 과거의 번창하던 모습이 다 사라지고 황폐한 유적만 남아 있는 모습에 더 잘 어울린다는 느낌을 가진다.

 

 이 크노소스에는 모든 유물들은 복제품이고 건물들의 모습은 에반스 이후에 복원된 것이다. 크노소스의 진짜 유물과 프레스코벽화 등은 이라클리온고고학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제 자리에 있었으면 좋겠으나 크레타를 떠나지 않았다는 것만이라도 만족해야 한다.

 

 

 이렇게 번창했던 크레타는 왜 사라졌는가? 하는 의문은 지금까지도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에번스는 대규모 천재지변으로 멸망했을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일부 학자들은 B.C. 17세기에 일어난 산트리니 섬의 대폭발을 천재지변의 증거로 말하지만, 이 주장 역시 확실하게 증명되지는 않았다.
 현재도 크노소스를 비롯한 크레타 유적에 대한 발굴과 연구는 계속되고 있으니 크레타 문명이 사라진 원인은 이런 조사들이 모두 끝나게 되면 밝혀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크노소스 주변에는 기념품가게와 레스토랑이 많았으나 비수기라 대대부분이 문을 열지 않고 있어 아쉬운 마음이 가득했지만 버스를 타고 이라클리온으로 돌아 왔다. 크노소스를 마지막으로 나의 그리스 문명 산책여행은 끝났다. 숙소로 돌아와 저녁까지 가볍게 휴식을 하기로 했다. 

 

 숙소에서 쉬다가 저녁 때가 되니 아들이 숙소 가까운 곳에 보아둔 곳이 있다고 가자 한다. 자그마하지만 조용한 레스토랑에 가니 일본인으로 보이는 가족이 식사를 하고 있다. 아이들을 데리고 여행을 온 것이다. 아직 아이들이 어린 것을 보아 여행에서 고생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린시절부터 부모가 데리고 다니면서 책에서만 아니라 실제로 교육을 하는 것이 참 아름답게 보인다. 우리는 저와 같은 젊은시절에는 왜 그리도 바쁘게 살았는지를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안된다. 그래도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많은 곳을 여행하기는 했지만.....  한국사회가 이제야 좀 여유가 있는 사회인 것이다. 우리가 젊은 시절은 여유가 없는 시절이었다. 이제라도 나는 아들과 함게 배낭을 메고 여행을 하니 그것만이라도 만족할 일이다.

 

 식당은 나이가 제법 들어 보이는 부부가 운영을 하고 있었는데 식당의 벽에는 축구포스터와 유니폼이 걸려 있고, 또 각종 장식이 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레스토랑 전경

 

 

 

식당 벽에 걸려 있는 여러 장식들과 술병의 진열

 

 

 

 

 

맥주와 저녁식사

 

 아들이 어느 지방을 가던지 그 지방의 맥주가 있으면 꼭 한병을 시켜 함께 맛을 보고 맥주맛을 이야기 한다. 유럽의 각 지방 맥주는 다 맛이 조금씩 다르다. 조금 쓴 맛이 강한 것도 있고 보리 맛이 약간 강한 것도 있고 조금씩은 미묘하게 다르다. 유럽을 여행하면서 각 지방에서 그 지방의 맥주를 마셔 보는 것도 한 재미일 것이다.

 

 

 

식사를 마치니 후식 겸 서비스로 꿀에 절인 과일과 나프폴리오의 식당에서 주던 그리스 술 라키를 한 병 준다. 그래서 이 술도 마시고 쉬다고 숙소로 돌아 왔다. 이제 그리스여행은 이것으로 끝났다.

 

내일이면 터키로 간다.

 

 

- 그리스 여행을 마치며

 

 나의 그리스 문명산책은 아무런 지식이 없이 시작되었다. 남들이 다 가지고 가는 여행안내서도 없이, 아들이 가자는 곳을 그저 따라만 다닌 것이다. 물론 그리스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단순하게 책을 조금 읽고 옛날에 학교 다닐 때 세계사를 공부하면서 익힌 것이 대부분이지 실제로 그리스 문명이 어떠한지는 전혀 모르고 무작정 다닌 것이다.

 

 돌아와서 이 글을 쓰면서 다시 그리스에 대해 조사도 하였고, 그리스 문명에 대해서도 책을 좀 읽어 보았다. 그러면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여행을 떠나기전에 사전 지식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지 아니면 사전 지식이 없이 내 눈에 보이는대로 보아야 하는지를......

 나는 이점에 대해서 생각을 굳혔다. 사전 지식이 없이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을 보는 것이 좋다고. 왜냐하면 사전에 책을 통해 지식을 가져가면 문명이나 문화에 대해 선입견을 가지게 되고, 보는 것도 내가 가진 지식의 한계에 사로 잡혀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나는 자유롭게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다녔다. 물론 아들녀석이 다 계획을 세워서 애비를 데리고 다녔지만......

그래도 다녀와서 글을 쓰면서 다른 사람들의 기록을 여러 편 보니 나보다 더 많은 것을 본 사람이 거의 없는 것 같다. 이 점이 나를 행복감에 젖게 만들었다.

 

 이 글을 쓰면서 다시 내 아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다시 한다.

젊은 아들이 나이든 아버지를 데리고 여행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둘이서 배낭을 메고 한달 이상이나.

 

 하여튼 우리는 그리스여행을 마치고 내일은 터키로 가서 당분간 터키를 여행할 것이다.

 

 

 

 

 

 

 

 

 

 

 

 

아들과 함께 그리스문명 산책 - 크레타 이라클리온 주변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코린토스를 떠나 크레타로 간다.

 

 크레타에는 공항이 있어 비행기를 이용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여행을 하기 때문에 배를 타기로 해서 아들이 미리 배편을 예약해 놓았다. 기특하게 아들은 이런 면에서 나를 감탄하게 한다. 그러면서 크레타를 떠날 때는 비행기를 타자고 한다. 나는 아들 의견대로 따를 뿐이다.

 

 코린토스에서 기차를 타고 아테네로 갔다. 코린토스에서 출발하는 기차는 아주 쾌적하게 갖추어진 역에서 정시에 출발하여 우리를 아테네역에 내려 준다. 아테네에서 코린토스는 기차를 이용하는 것이 편리한 듯하다. 아테네역에 도착해서 지하철을 이용하여 피레우스항구로 가니 항구가 장난이 아니게 크다. 특히 여객선이 많아 자기가 가는 섬의 여객선을 찾기가 쉽지 않다. 항구를 계속 걸어가니 곳곳에 배표를 파는 창구가 있다. 우리가 가진 표를 보여주니 타는 곳을 가르쳐 준다. 뒤애 알았지만 이곳을 운행하는 셔틀 버스가 있었다.

 

 크레타로 가는 배를 찾아 탑승을 하고 내부를 구경하니 여객선이 우리가 생각하는 정도가 아니다. 크기가 장난이 아니게 크다. 배는 8층인가로 되어 있는데 크루즈와 같이 배안에는 온갖 시설이 다 갖추어져 있다. 객실 탑승권을 가지지 않는 사람들은 아무 곳에서나 잠을 잔다. 그래서 좋은 장소를 선점하기 위해서 경쟁이다. 우리는 객실을 신청했기에 그런 걱정없이 한가롭게 객실에 가니 웬만한 호텔과 같다. 크레타의 이라클리온항구까지는 약 10시간 걸리기 때문에 밤에 출발하여 새벽에 도착한다. 우리 부산에서 배로 제주도 가는 여정을 생각하면 비슷하다. 단 여객선을 우리가 쨉이 안된다.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우리도 이런 여객선을 가질 수 없는지.....

 

 아마 지중해라는 큰 바다를 가지고 많은 섬들이 관광자원으로 있기 때문에 이런 큰 여객선이 운행되리라 생각한다. 배에는 그리스인들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의 사람들로 가득했다.

 

 

 

 

 

 

 

 

크레타로 가는 여객선의 외부와 내부

 

 항구를 찾아 배를 타느라 저녁도 먹지 않아서 배에서 저녁을 먹으려고 식당으로 가니 처음에는 손님이 없이 한가했는데 조금 있으니 제법 많은 손님들이 들어 온다. 식사 도중에는 바이올린 협주를 해 주고 있는 제법 고급스런 곳이다. 나오면서 밖을 보니 일종의 대중음식점 같이 보이는 저가의 식당도 보였다. 저녁을 먹고 배위에서 항구의 야경을 조금 구경하고 있으니 배가 출항을 한다.

 바깥에서 잠시 거닐다가 선실로 돌아와 잠을 청한다.

 

 조금 소란스런운 느낌이 들어 잠을 깼다. 보니 벌써 도착할 때가 다 되어간다. 아마 조금 피곤했는지 나는 잠이 깊이 들어 잘잤는데 아들은 잠을 잘 못잤다고 한다. 배가 조금 출렁거렸던 모양이다. 나는 조금도 느끼지 못했는데 아들은 민감하게 느꼈다고 한다.

 하선을 준비하고 배를 내리니 비가 오고 있다.

 

 드디어 크레타의 대표적인 항구 이라클리온(혹은 헤라클리온)에 도착했다.

 

 크레타(Κρήτη, Crete)는 에게해 남단에 있는 그리스에서는 가장 큰 섬으로 신들의 아버지인 제우스의 고향이자 유럽 문명의 발상지다. 면적 약 8300km²로 에게 문명의 중심지로서 청동기시대에 번영하였다. 오늘날도 크레타는 그리스에서 문화적경제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지만 고대사에서 크레타는 중요한 요충지였다

 크레타 섬에 최초로 사람이 산 것은 신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고대 크노소스는 신석기(나중에는 미노아 문명) 유적지의 한 곳이다. 크레타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인 미노아 문명의 중심이었다. 초기 크레타의 역사는 미노스 왕, 테세우스, 다이달로스와 이카로스 같은 전설이 서려 있으며, 호메로스 같은 시인들의 입으로 전해졌다. 크레타는 미노아 시대부터 근대까지 다양한 유적이 있어 관광지로 유명하다.

 

 기후는 주로 지중해성 기후 지역에 속하여서 무척 온화하다. 공기는 상당히 습하고, 바다의 영향을 많이 받는데 겨울에도 꽤 따뜻하다.

 

 크레타는 고대부터 지중해의 교통의 중심지였기에 많은 전쟁을 겪어왔으며, 2차세계대전까지 전화에 휩쓸렸다. 현재 크레타 섬은 그리스에서 휴가지로 인기가 높다.

 현재의 수도는 북안의 이라클리온 (Iraklion, Herakleion, 옛이름은 칸디아 Candia)으로 이 시에는 이라클리온고고학박물관이 있어서 크레타 유적의 진수를 보여 준다.

 

 항구에서 호텔을 찾아가는데 곳곳에 유적이 눈길을 끈다. 나중에 구경하기로 하고 호텔을 찾아가 아침을 먹고 이라클리온 관광에 나선다.

 

 

 

 

비내리는 항구의 모습

 

 

 

 

베네치안 로지아

 

먼저 항구에서 가까운 곳에 베네치안 로지아가 있다. 크레타에서 가장 아름다운 베네치아 양식의 건축물로 1626년에서 1628년에 걸쳐 베네치아 총독 프란시스코 모로시니가 지었다. 옛날에는 이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한다. 특이하게 유적을 밑받침으로 하여 현대식 건물이 위에 들어서 있다.

 

 

이라클리온 시내 안내도

 

항구에서 바로 옆을 보면 성같은 곳이 해안에 보인다. 표시판을 보니 베네치아 성인 쿨레스요새다. 바다를 접하면서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2층으로 쌓은 성이다. 규모는 상당히 크고 외부에서 보는 성의 조형미가 아름답다. 성을 올라가 바라보는 바다는 망망대해였다. 내가 간 날은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 성벽을 때리는 파도가 힘차게 부딪혔다. 바로 바다를 접하고 지은 요새로 천연의 위치에 인공을 더하여 항구를 보호하고 있었다.

쿨레스요새부터 부두까지는 이라클리온의 놓치지 말아야 할 산책길이다.

 

 

 

요새 전경

 

 

요새성벽

 

 

 

 

요새 내부에 있는 조그마한 박물관의 소장품

 

 

 

 

 

 

 

 

 

 

 

쿨레스요새 2층의 모습

 

 

 

쿨레스 요새에서 보는 바다

 

 

 

 

 

 

성 티토스 교회

 

  이 교회는 이라클리온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이다. 성경에는 티토로 적혀 있는 티토스는 기적의 성인으로 크레타의 수호성인으로 알려져 있다. 바울(st. Paul)이 선교 여행을 하면서 생활수준이 낮았던 크레타 섬을 드르게 되어 기독교의 교회를 건설하고 또 조직하고 티토스를 크레타에 남겨 크레타섬을 기독교 사회로 만들도록 하였다. 신약성경 속 티토스에게 보낸 바울의 편지에 '그대를 크레타에 남겨 둔 까닭은, 내가 그대에게 지시한 대로 남은 일들을 정리하고 고을마다 원로들을 임명하라는 것이었습니다.'(티토에게 보낸 서간,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편찬 1:5) 라고 씌여져 있다. 바울은 크레타인들을 거짓말쟁이, 고약한 짐승, 게으른 먹보라고 하면서 티토에게 그들을 가르치라고 했다. 그가 잘못을 바로잡아서 일까? 티토스의 성인 찬양송은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므로 하느님의 모습이 온전히 보존한 행적으로, 사라질 육신보다 영원한 영성에 대해 가르쳤도다. 거룩한 티토스여, 천사들과 함께 기뻐하나이다.' 이다. 그래서 기적성인인가보다

 

 8월 25일 거리에 있는 교회로 주변에는 카페와 바 및 레스토랑이 즐비하게 둘러 싸고 있다.  

 

 

 

 

이라클리온 시청사

 

길을 따라 걸어 올라가니 매우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가진 건물이 나타난다. 처음에는 무슨 박물관인가 하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시청사였다. 옛날의 건물을 그대로 현재 시청사로 사용하고 있다. 물론 내부는 개조하였지만......

 이 건물은 1628년 Francesco Morosini에 의해 건립되었고, 베네치안 건물중 가장 아름답다고 말하여진다. 지었을 당시에는 일종의 클럽의 기능으로 상류층 귀족들이 모여 토론과 담소를 즐기던 장소였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1962년에 복원된것으로 원형을 아주 잘 살렸다고 한다.

 

 

이라클리온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8월 25일 거리

 

 이 거리를 따라 계속 걸어간다. 이 아름다운 거리의 이름은 특이하게 8월 25일 거리다. 무엇인가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 붙인 것이리라.

 

 크레타가 터키의 지배하에 있을 때 1889년에 터키 관리가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터키 당국은 살해사건을 빌미로 크레타 사람들을 학살했는데, 크레타 사람들이 터키인에게 학살당한 그날의 비극을 잊지 않고자 명명한 것이 825일 거리다. 그리스인 학살의 아픈 역사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붙여졌다.

 

 

 

베니젤로스광장의 사자분수

 

이라클리온의 랜드마크인 이 광장의 정식명칭은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광장이다. 사자분수는 베네치아인들이 남긴 유물로 도시 전체의 물을 공급하는 중요한 시설이었다. 아래의 안내판을 보면 1629년에 지금의 시청사를 건립한 모노시니가 만들었다 한다.

 

 

모로시니 분수 (사자분수임)

 

 

 

성마르크스교회

 

성당으로 묘지로 터키 지배하에서는 이슬람사원으로 사용되다가 지금은 갤러리로 사용

 

 

 

비오는 이라클리온 시내 풍경

 

 

시 소속의 악대

 

 거리를 돌아다니며 구경하다가 아침을 좀 부실하게 먹어 시장기가 들었다. 점심을 먹자하니 아들이 자기가 찾아본 곳이 있다고 가자 한다. 저번에도 이야기했지만 아들은 여행에서 먹는 것을 중시하는 타입이다. 항상 그 지역의 전통 음식을 먹어야 하고 제법 이름있는 레스토랑을 조사해서 나를 데리고 간다. 나는 아들을 따라 가서 맛있게 먹고 계산만 하면 된다. 나이가 든 아버지를 데리고 다니는 아들에게 할 수 있는 나의 최소한의 행동이다. 식당을 가니 아직 시간이 안되었다고 자리에 앉아만 있으라고 하면서 주문을 받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이들은 아주 철저하게 시간을 지킨다. 문을 여는 시간이 되자 메뉴판을 가지고 와서 주문을 받는다.

 

 

 

 

 

레스토랑 입구와 내부 - 아주 깨끗하고 아담하다.

 

 

 

 

 

식당의 용기에도 그들의 상호가 새겨져 있다.

 

 

 

음식은 대체로 우리 입맛에도 잘 맞았다.

 

점심을 맛있게고 잠시 휴식을 한 후에 드디어 이라클리온고고학박물관으로 향한다. 우리가 여행하는 각 지역에서 가장 중점을 두는 곳이 바로 그 지역의 박물관이다. 각 지역의 박물관에는 그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을 구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라클리온고고학박물관

 

크레타에서 가장 큰 고고학박물관으로 신석기시대부터 많은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크노소스와 크레타 각 지에서 발굴된 유물을 볼 수있다.  

 

 우리가 크레타를 가면 먼저 크노소스를 떠올린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크노소스에서 만족하지 못한다. 그 많은 유물이 어디에 있는가? 크노소스에서 부족했던 2%를 채워줄 곳이 바로 이라클리온고고학박물관이다. 크노소스 궁전에서 발굴된 유물이 전시돼 있는 곳이다. 이곳에선 크노소스 궁전을 장식했던 프레스코화들의 원본도 만날 수 있을뿐만 아니라 파이스토스 원반을 비롯한 뱀여신상, 황금뿔을 가진 황소 머리상 등 등  눈 여겨 보아야할 유물이 많이 있다. 다양한 그릇과 잔, 무기, 금으로 된 각종 장신구, 화려한 색깔의 벽화 등을 보는 것만으로 크레타 섬이 왜 유럽 문명의 발상지인지 가늠하기에 충분했다. 특히 뿔 모양의 술잔, 물고기와 문어 등이 그려진 도자기 등등은 섬세하고 화려한 크레타 문명의 진수를 보여준다.

 

 

박물관 전경과 현판

 

 

파이스토스 원반 - 아직 해석이 불가능

 

 파이스토스 원반(Phaistos Disc)은 크레타의 파이스토스에 있는 미노아문명의 궁전에서 발굴된 구운 점토원반으로, 그 제작 연대는 BC 제2천년기 청동기시대로 추측한다. 크기는 직경 약 15 cm인데 그 원반의 양면이 모두 나선형으로 찍힌 기호들로 뒤덮여 있다. 이 기호들의 목적과 의미, 심지어 무엇을 위해 어디서 만들어졌는지 정확한 위치조차 불확실하여, 현존하는고고학 최대의 미스터리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황금 뿔을 가진 검은 황소 머리상

 

 

 

금 장신구

 

 

특별히 'The Ring of Minos'라는 명칭이 붙어 있는 금 장신구

 

 

 

 

 

각종 도기들

 

 

크노소스궁전 모형도

 

 

무엇인지 기억이.....

 

 

뱀여신상

 

 

 

무기들

 

 

 

프레스코

 

이 박물관에서 미노아 문명의 진수라 할 수 있는 유물들을 구경하고 또 이라클리온 시내를 정처없이 거닐며 니코스 카잔자키스의 무덤을 찾아 간다. 가는 길에 마주치는 성벽이 있다. 바로 베네치아인이 크레타를 지배한 뒤에 남긴 여러 건축물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의 건축물인 베네치아성벽이다. 지금도 그 성벽 아래로 차들이 다닐 수 있는 큰 도로가 만들어져 있는 거대한 성벽이다. 이 섬에 이렇게 큰 성벽을 건립해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만큼 이 섬이 중요한 곳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베네치아 성벽

 

 

 

 

무덤 표지판

 

 

 

니코스 카잔자키스의 무덤

 

 이 성벽을 돌아 올라가면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희랍인 조르바'의 작가 니코스 카잔자키스의 무덤이 나온다. 그는 그리스의 시인이며 소설가며 극작가로 역사상 위인을 주제로 한 비극을 많이 썼는데, 그리스 난민의 고통을 묘사한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는 그리스도'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대표작으로 '희랍인 조르바' '오디세이아'등이 있다.

그의 묘는 명성에 비해서는 소박하다. 평범한 돌과 나무 십자가 아래에 묘가 있다. 그의 소박한 묘비에는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 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라고 적혀 있다. 장편 소설 ‘희랍인 조르바’로 유명한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남긴 이 명언이야말로, 크레타의 모든 것을 관통하고 있다고 하는 의견이 많다. 유럽 최초의 고등 문명인 미노아 문명이 탄생한 곳이자, 제우스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섬. 자유를 외친 카잔자키스와 독창적인 화풍으로 르네상스를 이은 천재화가 엘 그레코의 고향으로 수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크레타 섬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단, 하루만이라도 자유를 만끽하고 싶다면, 답답한 현실을 벗어나 제대로 숨 쉬고 싶다면 니코스 카잔자키스가 자유를 말한 크레타에서 살아봄직하다

 

 

 아내 엘리니 카잔자키스의  무덤

 

 

 

니코스 카잔자키스의 묘에서 보는 시내 풍경

 

 아들과 니코스 카잔자키스의 묘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한다. 희랍인 조르바를 비롯해서 여러 문학 작품을 이야기하며 카잔자키스에 대해서도 아는대로 이야기 한다. 이 크레타가 카잔자키스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가? 하는 의문도 가지면서......

 

 휴식을 잠시한 후 다시 묘를 내려와 찾아간 곳은 성 미나스성당이다. 성 미나스 성당(Cathedral of Saint Minas)은 크레타는 물론 그리스 전체에서도 알아주는 그리스 정교회 교회로 1862년에 건립하기 시작해서 무려 30년이 걸려서 1895년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이 곳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는 미나스 대성당은 장엄하게 보이는 외부 뿐 아니라 내부는 더 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며져 있으며 찬란한 샹들리에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돔 천장은 크레타의 오랜 전통을 가진 이콘(icon)이라 불리는 성화로 장식되어 있었다. 이라클리온의 수호성자인 성 미나스를 기리는 교회로 아름다운 돔 양식의 십자가상 구조가 특징이다. 약 8천명이 한자리에 모여 기도를 할 수 있는 규모를 자랑한다.

 

 

 

 

성 미나스 성당의 외부

 

 

성당입구

 

 

 

성당 내부의 아름다운 모습

 

 

 

 

이라클리온 해변 산책로

 

 

 미나스성당을 뒤로 하고 해변으로 내려 오니 해변 산책로이다. 아침에는 바람이 불고 비가 와서 파도가 제법 있었는데 지금은 조금 조용해졌다. 이 산책로를 걸으면서 아들과 여러 이야기를 한다. 아들은 온갖 방면에 관심이 많다. 물론 젊기 때문이겠지만 다양한 방변에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 특히 역사에 대해서는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며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 아버지라고 이것 저것을 물으면서 아버지의 생각을 묻는데 내가 제대로 답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얼버무려 버리는 경우에도 아들은 아버지를 생각해서 내색을 하지 않고 항상 이야기를 걸어 온다. 이 점이 무엇보다 고맙다. 나이 차이가 많다고 내 의견을 무시하거나 자기 의견만을 내세우지 않는다.

 

 이라클리온 시내는 좁기 때문에 천천히 걸어다녀도 하루만 하면 제대로 된 구경을 할 수 있다.

 

 호텔에 들어가 잠시 쉬다가 밤의 이라클리온을 구경하러 나간다. 

 

 

 

불을 밝힌 시청사

 

 

 

저녁은 오랜만에 피자와 햄버그로 했다.

 

 

식당 주변의 모습

 

오늘 하루도 이라클리온 시내를 정처없이 걸으면서 구경을 했다.

 

 내 여행의 방법은 걷는 것이다. 차를 타고 지나가면 제대로 무엇인가를 보기가 어렵다. 그러나 걸으면 우리 눈에는 많은 것이 보인다. 특히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오늘 하루도 끝내며 내일을 위해 잠자리에 든다.

아들과 함께 그리스문명 산책 - 고대 고린토스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영원한 형벌 시시포스의 신화가 전하는 곳

 

고대코린토스는 신 코린토스 시내에서 제법 떨어져 있다. 코린토스는 기원전 5000년 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해 기원전 8세기에는 25만 정도의 인구가 머문 거대 상업 도시로 발전했으며 그리스인, 로마인, 유대인, 동양인 등 여러 인종이 어울리는 국제도시로 성장했다. 그런데 이 도시는 사도 바오로의 서간 코린트 전서에서 보듯 타락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표적 도시다.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이 많이 걸려서 택시를 불러 타고 고대 유적지에 앞서 코린토스 옛성으로 갔다. 여담으로 이야기하면 그리스 택시비는 우리보다 싸다.

 

 먼저 아크로코린토스로 갔다. 고대 코린토스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들 중 하나인 아크로코린토스는 아크로폴리스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대 그리스시대부터 고도가 높은 이 지역에 요새를 지어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막았고 다양한 양식의 건축물을 세웠다. 입구는 산의 서쪽에 있고 문은 3개가 있는데 각각 투르크식, 프랑크식, 비잔틴 양식으로 지어졌다.

 이 성 안에 있는 아프로디테의 성역에는 1000명이나 되는 히에로두로이[신역 직속의 창부(娼婦)]가 있었다고 한다.

 

 하필 날씨가 좋지 않아 비안개가 심하게 끼였다, 잠깐 안개가 걷히기도 했으나 너무 안개가 자욱하여 성위에서는 코린토스 일대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안개가 자욱한 몽환적인 분위기에서 옛 성길을 거닐면 과거의 영광을 생각도 해 보았으나그래도 관람을 하기에는 좋지 않았다. 아들 녀석도 일기만 좋으면 경치가 환상적일 것이라고 한탄을 한다. 하지만 일기마저 우리 마음대로 할 수는 없다.

 

 아쉽지만 그런대로 구경을 한다.

 

 

 

 

위용을 자랑하는 외부 성문 입구

 

 아크로코린토스의 외성은 겉 모양은 매우 아름답게 보이나 이 성은 피로 반죽하고 살로 구웠다고 하는 처절한 역사가 숨어 있다.

 

 

 

 

입구를 통과하여 성을 올라가는 길 - 안개가 너무 끼여...... 

 

 

 

 

비안개가 자욱한 아크로코린토스성벽

 

아크로코린토스의 성주였던 평소 성정이 차갑고 잔인했던 레온 스구로스는 프랑크족이 침입하자 항복하지 않고 자신의 애마와 성벽에서 뛰어 내렸다 한다.

 

 

남서쪽 타워 설명도

 

 

 

자욱한 안개속에 보이는 성벽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는 아크로코린토스성문

 

 

코린토스 옛성과 고고학 유적지 표지

 

아크로코린토스의 입구 -  레온 스구로스가 뛰어내리자 비로소 이 성문이 열렸다고 한다. 지금의 이 문은 베네치아시대에 재건한 것이다.

 

 

아크로코린토스 설명도

 

 

 

안개속으로  얼핏 얼핏 보이는 성

 

 아크로코린토스의 성채가 있는 곳은 원래 아포르디테의 신전이 있었다고 한다. 물론 여러 가지의 측면이 있겠지만 아포르디테는 문제가 많은 여신이었다. 현대에서는 사랑의 여신, 미의 여신이라 불리지만 옛날에는 저속한 세속성이 강조되기도 했다 한다. 그래서 이 곳은 여사제이자 창녀, 또는 신도이자 창부인 히에로두로이(신역 직속의 창녀) 1000여명이 머물렀던 타락의 도시로 유명했던 코린토스의 일면이다.

 

 코란토 전,후서를 쓴 사도 바울의 눈에는 온갖 음행이 자행되는 도시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평은 다음과 같은 말로 대치한다.

 

"이 도시가 사람으로 붐비고 부유해진 것은 그 여인들 덕분이었다."

 (스트라보, 코린토스의 성스러운 매춘부들에 대하여)

 

 

 

아프로디테의 여사제들이 춤과 노래로 사내들을 유혹하여 웃음을 팔던 곳.

지금은 폐허뿐이다.

 

 

 

 

안개속으로 보는 성벽

 

 

성 내부 설명도

 

 

무슨 창고였던 것 같은데 이름이 기억이 안난다..

 

 

 

 

 

세번째 방어벽

 

 

 

 

두번째 방어벽

 

안개가 너무 끼여서 지척을 분간하기도 어려워 아크로코린토스는 아쉽지만 내려 가기로한다. 몇 명의 젊은이들이 구경을 하면서 성위로 계속 올라가면서 위에 무엇이 있는지를 묻는다. 우리도 더 이상 올라가지 않았다고 아들이 답하니 그들은 올라가 보겠다고 간다. 젊음이 좋은 것이다.

 

 아쉽지만 아크로코린토스를 뒤로 하고 고대코린토스 유적지로 내려 갔다.

 

 

고대코린토스 유적지

 

 코린토스는 옛날부터 아테네, 스파르타와 함께 그리스 3대 도시국가로 꼽힐만큼 번창했던 도시다. 하지만 아쉽게도 지금 남아있는 유적만으로는 상상하기가 어렵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도시의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현재 남아 있는 유적은 대부분이 유리우스 카이사 시절인 BC 44년에 재건한 도시의 흔적이다. 오랜 명성에 비해 유적의 규모는 작지만 남아 있는 유적을 통해 상상의 날개를 펼쳐보는 것도 재미있다.

 

 유적 중 가장 눈을 끄는 것은 아폴론 신전이다. 돌을 잘라서 쌓은 것이 아니라 하나의 돌을 이용해 기둥을 세웠다고 하는데 그 돌의 크기가 상상 이상이다. 그 시절에 어떻게 이런 석조물을 만들었는지 유적지를 돌아 볼 때마다 가지는 의문이다. 이 아폴론신전은 올림피아의 헤라신전 다음으로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유적의 바깥쪽에는 오데온과 극장의 자취만 남아 옛 영화를 보여준다.

 

 코린토스의 고대유적지는 저지대의 구코린토스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아크로코린토스를 배경으로 코린토만을 마당으로 삼은 곳이다. 유적은 아폴론신전을 제외하고는 제대로된 모습을 띠고 있는 것이 거의 없다. 아폴론신전만이 웅장한 위엄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스를 돌아다니며 느낀 것은 거의 대부분의 유적지를 폐허 상태로 그냥 두고 있다는 것이다. 곳곳에 너무 많은 유적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유적을 보존할 경제적인 뒷받침이 안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유적을 관광자원으로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보면 유적을 좀 더 잘 보존하였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아니 어쩌면 그대로 두는 것이 더 잘 보존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설프게 복원한다고 하면서 옛날의 원형을 무시하고 현대적으로 만드는 것보다는 폐허 그대로가 우리 눈을 더 자극하며 상상을 더할지도 모름다.

 

 

고대코린토스 안내도

 

 

 

 

 

 

 

 

아폴론신전의 여러 모습

 

 코린토스의 유일한 그리스 유적인 이 신전은 세울 때 자연과의 조화를 중시하여 지었다고 한다. 이 신전은 이 도시의 황금기였던 BC 6세기경에 처음 지어졌다가 BC 1세기경에 로마인들에 의해 재건되었다고 한다. 38개의 기둥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7개의 기둥만 남아 있다.

 

 

 

 

글라우케샘

 

 글라우케는 코린토스 왕국의 왕 크레온의 딸로 크레우사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이아손과 메데이아와 글라우케 사이에서 전설은 만들어졌다. 이 이야기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면 메데이아가 자기를 버린 이아손에 대한 복수를 감행하기로 결심하고 크레온 왕과 글라우케 공주 그리고 남편 이아손을 죽일 계획으로 글라우케에게 결혼 축하선물로 독이 묻은 웨딩드레스를 보낸다. 아무 것도 모르는 글라우케는 신랑의 전처인 메데이아가 보낸 웨딩드레스를 입는 순간, 글라우케는 옷에 묻은 독이 몸에 퍼지면서 온 몸에 불이 붙는다. 결국 글라우케는 불길에 싸여 고통 속에서 샘이 되게 해 달라고 청하고 이를 불쌍히 여긴 신들이 푸른 샘으로 만들었다 한다. 또 코린토스 지역에 내려오는 다른 전설에 의하면, 글라우케는 연기를 견디다 못해 우물에 몸을 던졌다고 한다. 이후로 그 우물은 글라우케 샘이라고 불린다. 글라우케는 그리스 말로 푸른 물빛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신화나 전설은 한 사람만 거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우리는 그저 그런 신화가 바탕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피레네샘

 

 피레네에게는 사랑하는 아들이 있었는데 어느 날 잘못 날아온 원반에 그 아들이 목숨을 잃게 되었죠. 자식을 잃은 피레네는 밤낮 눈물로 세월을 보냈어요. 눈물이 몸을 녹여 마르지 않는 샘으로 변하게 되었는데 그곳을 `피레네 샘`이라고 이름을 붙였다고도 한다. 

 

 그런데 또 다른 기록에는 피레네샘이 아크로코린토스에 있다고도 하는데 같은 샘인지 다른 샘인지 모르겠다.

 

 어찌 되었던 두 샘은 슬픈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코린토스 유적 전경도

 

 

 

 

 

로마시대의 시장

 

 

 

 

코린토스 유적에서 보는 아크로코린토스

 

 저 높고 가파른 산이 시시포스의 신화가 서려 있는 산이다. 아직도 시시포스는 바위를 산정으로 밀어 올리고 있다. 이 신화의 산을 보면서 우리 인생 자체가 모두 부조리한 것이 아닌가 하고 의문에 잠긴다.

 

 간단히 이 신화를 말하면, 시시포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코린토스의 왕으로 교활하고 못된 지혜가 많기로 유명했다. 시시포스는 제우스의 분노를 사 저승에 가게 되자 저승의 신 하데스를 속이고 장수를 누렸다. 하지만 시시포스의 속임수와 약은 행실은 나중에 저승에서 커다란 벌로 돌아왔다. 저승에서 시시포스가 받은 벌은 무거운 바위를 산 위로 밀어 올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힘겹게 정상까지 밀어 올리면 바위는 다시 아래로 굴러 내렸기 때문에 시시포스는 영원히 똑같은 일을 반복해야 했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알베르트 카뮈는 수필집 『시시포스의 신화』에서 이와 같은 시시포스의 노역을 인간이 처한 실존적 부조리를 상징하는 상황으로 묘사하였다.

 

 

 

 

 

 

사도 바울이 전도했다는 유적 - 십자가가 선명하게 보인다.

 

 산꼭대기 아프로디테 신전에는 제관(무녀)의 여자들이 천 명 이상 있었다. 그들 중에는 산 밑의 사내들과 불륜을 밥먹듯이 저지르고 그것도 애비와 아들을 같이 끼고 노는 무녀도 있었다고 한다. 에페소에서 그런 소식을 접한 사도 바오로가 코린트 사람을 향해 쓴 편지가 코린트 전서다. 신약 성서에 많은 글을 남겼으며 성 베드로와 더불어 가장 유명한 초기 기독교 전도자였던 사도 바울은 서기 51년 처음으로 코린토스를 방문했다. 그는 6년 후 도시를 다시 찾았고, 두 편의 서간을 썼다. 바로 고린도전서고린도후서, 이는 신약 성서에 포함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성지 순례로 찾는 곳이 코린토스다.

 

 그리하여 바오로는 일 년 육 개월 동안 그곳에 자리를 잡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사도행전 18:11)  

 

 

코린토스고고학박물관

 

 코린토스유적 한쪽에는 코린토스박물관이 있다. 이 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보관하고 있는 코린토스고고학박물관은 아담한 시골 도서관처럼 보이지만 규모와 내용면에서 상당한 수준이다. 건축가 스튜어트 톰슨(W. Stuart Thompson)이 1932년 완공한 것으로 전시실과 대형 뜰로 구성돼 있다. 외부 주랑과 뜰에는 대리석 조각상들이 줄지어 있고, 코린토스에서 발굴된 조각, 도자기, 선사시대의 유물들은 두 개의 주 전시관에 진열되어 있다.  대표적인 소장품으로는 아우구스투스(Augustus) 황제의 아들로 추정하는 <젊은이의 대리석 초상>, <디오니소스의 머리가 장식된 모자이크>, <비잔틴 꽃병> 등이 있다.

 

 

 

옥외 뜰의 조각상

 

 비바람에 훼손되는 것을 염려할만도 한데 그리스에는 이렇게 외부전시하는 것을 자주 보았다. 아마 이 정도는 너무 많아서일까? 그런데 이 박물관의 대리석 조각은 대개 로마시대의 복제품이라 아쉽다. 그리고 왜 그리스를 여행하면서 보는 조각상들은 거의 대부분이 머리가 잘려 있을까?

 

 

로마 지배의 흔적을 알 수 있는 조각상

 

 

아마 아포르디테라고 짐작된다.

 

 

 

 

여러 전시물

 

 

디오니소스를 위한 모자이크

 

 술의 신이며 제우스의 아들 디오니소스를 위한 모자이크다. 원근법에 따른 입체적 느낌이 드는데 네 장의 꽃잎을 펼쳐놓은 듯 섬세하게 만들었다. 바닥에 깔렸던 것을 벽에 걸어 놓은 것이란다. 중앙의 인물도는 디오니소스의 얼굴이라 한다.

 

 

 

 

코린토스 도기들

 

 

여러 조상들

 

 

 

코린토스 유적이 있는 마을 풍경

 

 코린토스 유적을 구경하고 나오니 또 비가 오기 시작한다. 유적지 주변은 이 유적지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상당히 큰 마을로 각종 기념품가게와 카페 레스토랑이 있다. 내가 간 때는 계절적으로 비수기라 번잡하지 않고 가게들도 대부분이 문을 닫고 있었다. 조그마한 마을이지만 아름다운 마을이다. 그리스의 고대 문명 유적지 마을은 대개 아름답다.  옛부터 도시가 만들어졌으니 그 자연의 아름다움은 말 할 것도 없을 것이지만 지금도 마을의 꾸밈 자체가 예쁘다.

 

 비가 오는 가운데 길을 물어 버스를 타고 신코린토스로 돌아 왔다.

 

 이제 그리스 본토의 여행은 아쉽지만 여기서 끝을 내고 크레타로 가기로 하고 잠시 휴식을 한다. 

아들과 함께 그리스문명 산책 - 코린토운하와 시내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펠로폰네소스반도의 관문 코린토스

 

 고대유적지와 운하로 유명하며 시시포스의 신화가 어려 있는 코린토스는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반도를 잇는 곳에 위치하며, 고대폴리스 및 현대도시로 구별되며 코린트(Corinth)라고도 한다. 옛날부터 이오니아해와 에게해를 잇는 해상교통의 요지였고, 시의 유적지에서 미케네시대 전기의 도기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먼 옛날부터 번영해 온 도시임을 알 수 있다.

 

 코린토스는 일찍부터 그리스 제일의 도기제조의 중심지가 되어 코린트식 도기를 생산하였다. BC 146년 로마가 이를 철저히 파괴해버렸는데 BC 44년에 재건되어 다시 번영하였으며, 사도 바울의 전도여행지로 유명하며 신약성서에도 코린토서라고 그 이름이 나온다. 1858년 지진으로 파괴되었다. 현재 사람들이 살고 있는 새 코린토스시는 유적지가 있는 고대코린토스시의 북동쪽 약 8 km의 지점에 있으며 코린토스현의 주도시이다.

 

 코린토스에 몇 일을 머물면서 주변의 여러 유적지를 탐방하고 저녁시간이나 여가의 시간을 이용하여 코린토스 시내를 돌아 보았다. 그 중에서 지금은 코린토운하와 신코린토스 시내를 보여 드리고자 한다.

 

 코린토스 운하는 고린토스만과 에게해의 사로니코스만을 연결하는 운하이다. 네로황제이전부터 수 많은 노예들을 동원하여 건설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다가 결국 1883년에 6.3 km의 길이로 건설되었다. 운하를 이용할 경우 펠로폰네소스반도를 돌아가는 것보다 700km 정도 운항거리가 줄어들지만, 운하의 폭이 24m, 깊이가 8m로 규모가 작기 때문에 운하를 이용하는 선박은 대부분 관광용 여객선이다.

 

 지금의 코린토스 시외버스정류장 가까이에 있기 때문에 다른 지역을 가기 위해 버스정류장에 가서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이 1시간만 되어도 구경할 수 있다.

 

 

 

 

코린토운하 지형 설명도

 

 

 

코린토운하를 건설하는데 공헌한 사람들을 기록한 기념동판

 

 

 

 

 

코린토운하 다리

 

 이 코린토운하는 깍아지른 협곡의 높이가 장난이 아니다. 아무리 항로를 개척한다고 해도 아득한 로마시대에 이 운하를 파려고 한 생각이 놀랍다. 하지만 현대는 교통수단이 발달하여 예전과 같은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는 못하고 있다. 지금의 화물선이 통과하기에는 수로가 너무 좁다. 그래서 지금은 화물선의 통과보다는 관광객유치의 한 방법으로 코린토운하를 다니는 관광여객선이 있다고 하는데 타 보지를 못해 좀 아쉬웠다. 또 이 코린토운하 다리에서 번지점프도 한다고 하는데 보지를 못했다.

 

 

코린토시내

 

 코린토스시내에 몇일을 머무면서 저녁이 되면 시내를 배회하면서 카페와 레스토랑 등에서 식사를 하기도 하고 휴식을 취하기도 했다. 새로 조성한 시내는 계획도시로 거리가 잘 정비되어 있다. 그리고 코린토스를 찾는 관광객들의 대부분이 머물기 때문에 깨끗하고 제법 번화했다. 시내의 번화가에는 주말을 맞아 사람들이 많이 나와 있었다. 가족들과 친구들 그리고 연인들도 거리를 거닐고 카페나 레스토랑에서 끼리끼리 담소를 하거나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시내 번화가에서 길을 따라 조금만 걸으면 해변이 나오며 바다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있는 몇 일동안 기상 상태가 그렇게 좋지 않아 비가 내리는 날이 많아 좀 우울하게 보였지만 시기가 년말이 가까운 12월 말이라 거리에는 크리스마스 장식과 조명으로 찬란하게 비치는 불빛이 아름다웠다.

 

 

 

 

코린토스 시내의 같은 장소의 밤과 낮의 풍경

 

 

 

 

 

 

 

 

 

비오는 오후 코린토스항구

 

 

 

 

 

 

 

 

 

 

밤이 되어 불을 밝히고 있는 거리와 그 거리 양쪽에 늘어서 있는 카페와 레스토랑들

 

 이 코린토스 시내는 참 다양한 카페와 음식점이 늘어 서 있다. 대부분의 가게가 가격도그렇게 비싸지는 않았지만 이곳도 현대화의 물결때문인지 그리스 전통적인 음식을 파는 곳을 찾았으나 눈에 잘 보이지 않고 대부분이 패스트 푸드점이었다. 이점이 좀 아쉽게 여겨졌다.

 

 우리나라에도 카페가 많지만 그리스에도 카페가 즐비하다. 그리고 나이를 가리지 않고 젊은 사람도 나이든 사람도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담소를 즐긴다. 이 점이 우리와는 좀 다르게 느껴졌다. 우리는 젊은이들이 잘 가는 카페에 나이든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인데 이곳은 그런 의식이 좀 없었다.

 

 물론 젊은이들만 가는 카페가 있겠지만......

 

 내가 가본 곳에는 함께 어울려 있었다.

아들과 함께 그리스문명 산책 - 미케네와 아르고스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신화에서 역사로

 

 오늘은 미케네와 아르고스로 간다. 이 두 곳은 그리스문명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지만 지금은 사람들의 시선을 크게 끌지 못하고 있는 곳이다.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반도 아르골리스만 북쪽에 위치한 '도시의 약탈자' 아가멤논 왕의 도시로 알려져 있는 미케네는 그리스 문명의 기반이 되었던 B.C. 1600 ~ B.C. 1200년경 고대 그리스문명 이전에 번영을 누렸던 미케네문명의 중심 도시다.

 미케네를 발굴한 사람은 독일의 하인리히 슐리만이다. 그는 1873년에 트로이를 발굴한 후 다음 목표를 미케네로 정하여 1876년 미케네의 성문인 '사자문' 안쪽에서 수혈묘를 발견함으로써 이 지역이 전설 속의 미케네라는 것을 증명하여 역사로 끌어내었다. 호메로스가 '황금이 흘러넘치는 미케네'라고 표현했던 것처럼 실제로 미케네에는 온갖 황금과 보물들로 가득 차 있었다는 사실이 무덤의 부장품을 통해 확인되었다. 그리고 부장품을 통해 당시 미케네가 이집트와 서아시아와 교류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미케네 도시는 대략 세 구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우선 도시 중앙에 궁전이 있으며, 그 동쪽으로 '열주의 집'이라고 불리는 건물 흔적, 궁전 서쪽으로 슐리만이 발견한 원형묘와 곡물 창고, 주거지구 등이 존재한다. 궁전 서쪽에는 티린스에서 본 것같은 '키클로프스 쌓기(거석쌓기라고도 한다.)'라는 독특한 방법으로 돌을 쌓아서 만든 성벽과 그 옆쪽으로 건물들이 나란히 서 있다.

 미케네 성벽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많은 무덤들이 발견되었는데 그 중에는 미케네 양식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평가받는 '아트레우스의 보고'도 들어 있었다.

 

 황금이 흘러넘쳤던 미케네는 B.C. 1200년경에 멸망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 원인이 무엇인지는 아직까지 밝혀지고 있지 않다.

 

.지금 남아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는 '미케네의 사자문', '아트레우스의 보물 창고' 등을 감상할 수 있으며, 발굴된 유물은 미케네고고학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투키디데스는 미케네를 이야기하기를 남아 있는 건축유물만 보고 미케네를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고 했지만 다른 유적지와 비교하면 작다.

 

 

미케네의 상징 사자문

 

아침에 고린토스 숙소를 출발하여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미케네행 버스를 탔다. 버스는 버스정류소도 없이 조그마한 표지판이 하나 서 있는 길가에 우리를 내려 준다. 부슬비가 조금씩 내리는 길을 표지판에 의존하여 따라 갔다. 길가에는 저번에도 말했듯이 오렌지가 지천으로 심어져 있다. 길가에 떨어져 있는 오렌지를 주워 먹어 보니 기가 막히게 맛이 있다. 우리가 마트에서 파는 오렌지와는 다른 맛이다. 너무 시원한 맛이라 아들에게 먹어보라고 주니 먹어보고는 맛있다고 탄복을 한다. 아마 자연적으로 익어 떨어진 것이기 때문이리라. 여기서 오렌지에 대해 이야기하면 그리스를 여행할 때 길에 떨어져 있는 오렌지를 보면 주워서 먹기를 바란다. 정말 맛있다. 그리고 오렌지는 길가에 지천으로 떨어져 있다. 뒤에 크레타에서는 나무에 달린 오렌지를 따 먹어 보았는데 아직 신맛이 많았다. 아마 무르 익어야 떨어지는 것 같았다. 오렌지를 몇 개 주워 배낭에 넣고 미케네 유적으로 향했다.

 

길가의 오렌지 나무

 

 

 

 

미케네 고고학 지역 표지판과 가는 길

 

 

 

미케네유적지 올라가는 도중의 마을

 

 

 미리 말하면 미케네 버스정류장에서 유적지는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일찍 알았으면 택시라도 타고 올라가야 되었는데 몰라서 아들과 나는 우리 특기를 살려서 하염없이 걸었다. 주위의 풍경도 보고 이런 저런 이야기도 하면서 걸어가는데 마을에서부터 개 한 마리가 우리 앞에 서서 간다. 참으로 의아하게도 이 개가 우리를 유적지로 안내하는 것 같았다. 길을 따라가는 이 개는 우리를 미케네 유적지까지 데려다 주고 유적지에서 거닐다가 사라졌다. 참으로 고맙다고 아들과 이야기하였다. 아들은 개를 싫어한다. 그런데 이 개는 아주 친근하게 우리와 보조를 맞추어 걸어갔다. 아들도 꼭 안내견같다고 연신 이야기했다.

 

 

 

 

 

멀리 보이는 미케네 유적지

 

유적지 가까이 가니 왼쪽편에 또 다른 유적이 보인다. 표지를 보니 아트레우스의 보물창고(Treasury of Atreus)이다. 이름은 보물창고이지만 실제는 무덤이라고도 한다. BC 14 ∼ BC 13세기에 건조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지름 14.6m, 높이 13.2m의 거대한 궁륭형의 제실과 직사각형의 부속 소묘실 및 산의 사면을 깎아 만든 길이 36m, 너비 6m의 널길로 이루어져 있다. 미케네시대에 만들어진 궁륭식 분묘 가운데 가장 대규모이며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원형이 완벽하게 남아 있다.. 미케네의 전설적 왕 아트레우스에 연유하여 슐리만이 이름을 지었으나 아트레우스의 묘가 아니고 아가멤논의 묘라고도 한다.

 

 

 

 

 

외부의 전경과 입구

 

 

내부의 모습

 

 

아트레우스의 보물창고 설명판

 

 

 

 

미케네유적 전경 - 거의 폐허가 되어 있다.

 

 

 

 

미케네성벽 - '키클로프스 쌓기(거석쌓기라고도 함)' 방식

 

 미케네유적을 올라가면 주입구에 웅장한 문이 마주한다. 미케네의 강력함을 상징하는 사자문이다. 성에 있는 BC 13세기에 건축된 많은 건물중에서도 이 '사자의 문'은 가장  당당하게 위용을 자랑한다. 그 크기는 놀랄 만한 정도로 특히 아테네의 주요 유적들이 건설된 시대보다 800년이나 먼저 세워졌다는 사실에 감탄했다. 이 문은 돌들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무게를 덜어 주는 삼각형'(상인방 돌에 걸리는 돌의 무게를 덜어 주기 위해 상인방 돌 위에 삼각형 공간을 만들어 그 양변에 무게가 나눠 실리도록 한 구조)꼴로 지어졌다고 한다. 이 문의 사자상 밑의 돌 무게가 20톤이나 된다고 하는데 그 시대에 어떻게 들어 올렸는지가 의문이다.

 그래서 이 거대한 문을 보고 후세의 그리스인들은 미케네의 이 성벽을 엄청난 덩치를 한 신화 속의 외눈박이 거인의 도움으로 지었다 하여 '키클롭스의 벽'이라 불렀다. 아치의 중간, 문이 되는 공간 위편에는 전령 같은 모습의 사자 두 마리가 있어 '사자의 문'이라는 이름이 여기서 생겨났다. 3m 높이로 돌에 조각된 이 사자들은 비록 머리가 떨어져 나갔지만 아직도 당당한 수호자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사자문

우리를 미케네 마을 입구에서부터 안내하듯이 동행한 개도 보인다.

 

 

 

곡물저장소(창고)

 

 

 

 

슐리만이 발굴한 원형 묘역

그저 여섯개의 구멍으로 보일뿐이다. 여기에서 모두 열아홉 구의 유해가 나왔다고 한다.

 

 

 

 

 

 

 

폐허의 돌무더기로만 보이는 미케네의 여러 유적들

 

 

소박한 정취가 있는 북문

 

 

 

 

지하저수조 표지와 저수조

 

이 지하저수조는 캄캄한 구멍을 내려가야 되므로 약간은 모험하는 느낌이 든다. 아마 물은 저장할 때는 계단까지 물을 채웠을 듯하다.

 

미케네유적을 돌아보고 밑으로 내려 와 박물관으로 갔다. 미케네의 위용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미케네유적지에서 발굴된 수 많은 유물들을 전시해 놓았다. 특히 미케네의 황금유물들이 나의 눈을 끌었다.

 

 

 

 

 

 

박물관의 여러 유물들

 

 

가장 유명한 가면 - 아가메논왕의 마스크라고 한다,

 

 

 박물관을 구경하고 나오니 내려 가는 일이 난감하다. 아마 버스가 다니는 듯한데 시간을 맞추기도 어렵고 해서 아들과 걸어서 내려가자 하고 걷고 있는데 차가 한 대 우리에게 다가 오더니 호객행위를 한다. 적당한 가격이면 타려고 요금을 물으니 아르고스까지 10유로를 요구한다. 적당한 가격이라(사실은 우리식으로 보면 굉장히 싸다.) 타고 내려 오는데 이 기사가 여러 곳을 말하며 가자고 한다. 거절하고 아르고스로 데려다 달라고 하여 아르고스 번화가에 도착했다.

 

 아르고스는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반도 북동부에 있는 아르골리스(Argolis) 지방의 중심 도시로 인구 2만 5000명 정도의 도시다. 미케네, 티린스와 함께 미케네문명의 중심도시로 페르세우스의 신화가 전해지는 도시다. 한 때는 스파르타와 계속 경쟁하던 막강한 나라로 티린스와 미케네도 암흑시대에는 아르고스의 신하가 되었다고 한다. 아르고스에는 멋진 아고라와 로마시대의 유적이 전해진다. 시 북동 약 8km인 곳에 유명한 헤라 신역이 있다.

 

 그리스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로 고대 유적이 많은 도시다.

 

 아르고스에서 점심을 먹기로 하고 레스토랑에 들어가니 웨이트가 모두 노인들이다. 생각보다 노인들이 이런 식당에 많이 일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우리도 노인 인력을 이런 곳에 사용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점심을 먹은 아르고스 식당

 

 

식당 내부 모습

 

 

식사를 시키니 포도주를 한 병 준다,

 

 

 

 

야채 샐러드, 양고기, 돼지고기 등등 모두 합하여 31유로(비싸지는 않은 가격이다.)

 

 

 

옛 건축물인데 무엇인지 기억이 안난다.

 

 

아르고스시내 안내도

 

 

 

 

시내에서 멀리 보이는 성

 

 

 

 

 

 

 Heroon(서양의 고전건축으로 신격화된 사자에게 바친 신사 또는 예배소)

이런 곳이 너무 많아서인지 황폐한 폐허로 그냥 두고 있다.

 

 

고대극장과 nymphaeum agora, 그리고 하드리아누스 수로 유적지 표지

 

 

 

 

고대극장

 

 

 

 

 

 

 이 유적지를 뒤로 하고 코린토스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그냥 아르고스시내를 걸으며 시내를 구경하다가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하여 코린토스행 버스를 자고 돌아와 코린토스시내를 저녁에 또 거닐며 한가로이 하루를 보냈다.

아들과 함께 그리스문명 산책 - 나프플리오와 티린스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피르고스를 떠나 고린토로 왔다. 지금부터는 고린토시내에 베이스를 치고 주변의 유적지를 답사하는 여정이다. 고린토는 옛 지구와 신시가지가 구분되어 있으므로 고대 고린토유적은 나중에 보기로 하고 시내에 숙소를정했다.

 

 이 고린토는 교통체계가 조금 복잡하다. 고린토에서 다른 곳으로 가려고 할 때는 시내에서 우리의 시외버스터미널까지 따로 가야한다. 거리는 크게 멀지는 않지만 교통편이 좀 불편했다. 버스를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아깝고 해서 주로 택시를 이용했다. 생각보다는 많은 요금이 나오지 않아 편리랬다.

 

 아침을 먹고 나프플리오로 향했다. 흔히들 아테네가 그리스의 첫번째 수도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나프플리오가 첫번째 수도다. 나프플리오는 그리스의 베네치아, 나폴리라 불리는 도시로 아름다운 자연과 옛 유적들이 우리 눈을 끌었다. 아르고스만의 위쪽 끝에 있는 도시로, 1822년 독립전쟁에 의해서 그리스령이 될 때까지 베네치아와 터키에 여러 차례 점령되었다.

 미케네관광의 중심을 이루는 나프플리오는 아기자기한 구시가지와 아름다운 자연 풍경으로 아테네 사람들의 주말 휴양지로 손꼽히는 곳으로 조용한 구시가지를 배회하면서 바닷가의 카페에 앉아 마음을 치유하는 에네지를 얻을 수 있는 곳이다.

 

 전체 시가지가 좁아서 한 나절만 돌아다니면 다 돌아 볼 수 있는 작은 도시이다.

 

 

아크로나프플리아 요새 전경

 

 

나프플리오 시가 안내도

 

 나프플리오 버스정류장에 내려 아기자기한 나프플리오 올드 타운 길을 따라 시내를 걸어가면 신다그마광장이 나온다. 올드타운 거리는 좁은 골목길로 오래된 도시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낭만적인 거리이다. 오랜 세월은 거치면서 사람들의 발길에 길바닥의 돌들이 반짝거린다. 옷, 미술품, 신발 그외 여러 가지의 물품을 파는 가게와 노천 카페들이 즐비하다. 낮에는 조용해 보이는 거리가 해가 지면 야외 식당 겸 술집으로 변하여  멋있는 치장을 한 카페들이 각자 자신의 특색을 나타낸다. 

 

 

 

 

 

 

 

 

 

 

올드타운 거리의 모습

 

올드타운 거리의 아름다운 모습을 즐기며 한가로이 걸으니 바닷가 가까이에 광장이 나온다. '신다그마 광장'이다. 나프플리오의 여러 이야기를 담고 있는 건물들이 여기에 모여 있어 아름다운 건축물을 눈으로 보며 바닷가를 조금 걸어가면 카페가 즐비하게 줄지어 있다. 꼭 부산 광안리 해변가의 카페식으로 바다를 보면서 식사와 음료를 즐길 수 있게 위치를 잡고 있다. 아직 점심식사 시간이 되지 않아 그 길을 따라 걸으니 바다 가운데 뜻밖의 성 같은 것이 보인다. 부르지섬이다.

 

 

 

 

 

 

 

 

신다그마 광장과 주변 바닷가

 

 나프플리오의 랜드마크일 정도로 잘 알려진 섬 전체는 제법 큰 석조 건축물이 있다. 1473년 베네치아인들이 항구를 지키기 위해 요새로 지은 것이다. 1865년까지 요새롤 사용되면서 외부의 침입자로부터 도시를 보호할 뿐만 아니라 항구 출입을 통제하는 기능도 했다 한다. 그 뒤에는 여러 용도로 사용하다가 193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는 호텔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지금은 아무도 머물지는 않고 여름에는 항구와 섬을 이어주는 보트가 있어 관광자원으로 사용된다고 한다.

 

 

 

 

 

부르지 섬

 

 

 

 

 

 

부르지 섬 앞의 해변 풍경

 

 

 

 

해변가에서 보는 팔라미디 성채

 

 여담을 하나 하면, 해변가를 돌아다니며 구경을 하다가 카페에 들어가 점심을 먹고 나오는데 옆 가게에 눈에 확 뜨이는 미인이 앉아 있다. 중국인인 것 같은데 중국의 어떤 영화 배우보다 더 아름답게 보이는 여인이다. 건장한 체격의 청년들이 함께 앉아 있는데 보디가드인듯 했다. 너무 눈에 뜨이는 미인이라 시선을 두다가 나오면서 아들과 이야기를 했다. 아들도 보고 중국의 어떤 배우보다 더 예쁘다고 감탄을 한다.

 

 나프플리오관광을 잠시 멈추고 티린스로 간다. 이곳에서 30분도 안되는 거리라 다녀오기로 하였다. 티린스는 그리스의 아르고리스 평야 거의 중앙에 있는 미케네 시대 왕성의 유적으로 아르고스만을 마주보고 있는 도시로 나프플리오 북쪽에 있다. 미케네 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이른바 ‘키크로페스 성벽’의 전형적인 예라고 하는 거석축조. 메갈론 터, 수도() 등이 남아 있다. 1884∼1885년 독일의 고고학자 슐리이만이 발굴하였으며, 그후에도 독일의 고고학자가 중심이 되어 발굴이 계속되었다. 미케네시대에 미케네와 함께 번영한 도시로, BC 1400년경부터 성벽으로 에워싸인 왕성()이 이루어져 있었고, 그 이전에도 항상 마을이 있었음이 밝혀졌다. 미케네시대의 왕궁은 벽화로 장식된 화려한 것이었으나 모두 불타 없어졌다고 하며 지금은 폐허의 돌무더기만 남아 옜 자취를 생각나게 한다.

 여러번 개축을 한 최후의 왕궁인, 현존하는 것은 B.C. 13세기의 것이라고 한다.

티린스가 폐허가 되어 있지만 키크로페스 성벽만으로도 너무 좋았다. 왜 거석 건조물이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도 흔드는지.... 시간만 많다면 곳곳을  보고 싶었으나, 시간도 부족했고 아직 발굴과 수리 중이라 반도 보지 못하였다. 여러 지하 공간들과 터널 등등....

 

 

티린스입구 표지판

 

 

 

 

티린스유적 설명

 

 

 

 

 

 

 

황폐한 폐허의 자취만 보이는 티린스 유적

 

 

 

 

 

 

 

 

 

 

티린스 성벽

 

티린스를 보고 나니 허무한 생각이 너무 든다. 완전히 폐허가 된 유벅만이 덩그렇게 지금 남아 있다. 아마 그리스를 여행하는 사람들 가운데 얼마나한 사람이 이 티린스를 찾아올까? 하고 생각해 보니 옛 영화는 다 필요가 없다.

 

 티린스를 떠나 다시 나프폴리오로 돌아왔다.

 

 

 

마른 땅의 문

 

 아크로나프플리아요새로 가는 길에 처음 마주치는 곳인 마른 땅의 문은 나프폴리오 성의 입구로 예전에는 해가 진 후에는 누구도 드나들 수 없게 굳게 잠겨 있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이 문 앞에 수로가 있어 작은 배들이 다니던 곳이라고 한다.

 

 이 문을 지나 아크로나프폴리오 요새로 간다. 가는 도중에 왼쪽으로 보면 멋있는 성채가 언덕 위에 보인다. 팔라미디요새(Fortress of Palamidi)다. 언덕위에 서 있는 모습이 장엄하기도 하지만 너무 아름답게 보인다.

 이 성채는 해발 216m 높이의 언덕에 베네치아인들이 지었다. 18세기 초에 세워져 지금까지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성채 위에 올라가려면 끝도 없이 펼쳐진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913개의 계단인데 현지인들은 999개라고 주장한다. 꼭대기에 올라가면 나프폴리오와 아르고스평야가 다 보인다 하는데 통행을 금지해 놓아 외양만 보고 만족한다. 외양으로만도 아름다운 모습에 감탄을 한다.

 

이 팔라미디성채는 그리스 독립전쟁의 영웅 테오도로스 콜로코트로니스가 오스만 제국의 공격을 15개월 동안 막아낸 천혜의 방어용 요새로 더 유명하다.

 

 

팔라미디성채(요새) 표지판

 

 

 

멀리서 보는 팔라미디 성채

 

 

 

아크로나프플리아 요새쪽에서 보는 팔라미디 성채

 

 

성채 올라가는 계단 통로

 

 

 

 

아크로나프폴리아 요새쪽에서 보는 팔라미디 성채

 

 이 팔라미디 성채를 보면서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아크로나프플리아 성(Akronafplia Castle)이다. 13세기경 이곳을 점령한 베네치아인들이 만든 것으로 팔라미디 성채보다는 규모는 작으나 이 성에서 보는 해변의 아름다운 모습은 반할만 하다. 이 성안에는 지금은 나프플리오의 최고급호텔인 나플리아궁전도 있다. 성벽밖으로는 언덕에 현대식의 집들이 보이는데 아마도 유럽부호들의 별장인 듯했다.

 

 

성과 성을 끼고 있는 작은 해변 표지

 

 

 

성에서 보는 나프플리오 광경

 

 

 

 

성 안내표지판

 

성안에 선인장이 많이 피어 있었다.

 

 

 

 

 

아르바니티아 비치(Arvanitia Beach)

 

 

 

 

쭉 늘어져 있는 성벽

 

 

성벽에 있는 부조

 

 

멀리서 보는 아크로나프플리아 요새

 

이 성을 구경하고 해변을 잠시 거닐고 있으니 어느 새 어둠이 잦아들었다. 나프플리오를 떠나기 전에 올드타운거리에서 저녁을 먹기로 하고 카페를 찾으니 낮과는 달리 불빛이 빛나며 손님을 끌고 있었다. 한 카페에 들어가니 제법 유명한 곳인지 벽에는 많은 장식물과 사인이 게시되어 있었다. 저녁을 주문하고 주위를 둘러보고 있으니 식당주인이 그리스 전통주를 서비스로 준다. 라크(Raki)라는 이름의 술인데 증류주였다. 제법 도수가 있었다. 우리나라의 소주와 중국의 배갈을 섞어놓은 듯한 술인데 맛이 괜찮았다.

 

 

 

 

 

 

 

 

올드타운 거리의 식당과 야경

 

저녁을 먹고나니 제법 어둠이 깔렸다. 오늘은 유적지보다 나프플리오 해변에서 휴식을 취한 편이다. 오랜 여행에서 이렇게 편안하게 망중한을 즐기기도 해야 다음 여정에 충실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저녁 늦게 고린토로 돌아와 숙소 주변 마트에서 맥주를 사서 아들과 호텔에서 마시면서 이런 저렁 이야기를 하다가 편안한 잠을 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