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鶴)의 오딧세이(Odyssey)

공주 - 땅속에서 지켜온 천오백 년 시간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공주는 천오백 년의 시간을 건너 우리에게 왔다.

 

 부여를 떠나 공주로 향했다. 공주를 와 본 지도 어느 새 많은 시간이 흘렀고, 참 많이 변했다는 느낌이 든다. 공주에 아는 지인이 있어 함께 저녁을 먹고 공주한옥마을에 숙소를 정했다. 전주의 한옥마을을 본 떠 만든 것 같은 데 가격이 비교적 합리적이고 시설이 깨끗하고 좋았다. 장점을 덧붙이면, 이 한옥마을 주변에 공주의 대부분의 유적지가 자리하고 있어 걸어서 돌아다니기가 편리했다.

 

 공주는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기기 전에 475년부터 538년까지 64년 동안 백제의 수도였다. 북방진출을 꿈꾸던 개로왕이 강성한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전사하고 한성이 함락당해 밀려 내려온 곳이 바로 공주이다. 그러다가 성왕이 좀더 기름지고 국가의 큰 뜻을 펼칠 수 있는 곳을 찾아 부여로 다시 도읍을 옮겨가면서 공주는 역사에서 제 역할을 다했다고 하겠다. 물론 공주는 백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몇 곳 보이지 않는 구석기 유물이 석장리 금강가 언덕에서 발견되어 구석기 시대에도 이 땅에 사람이 살았음을 맨 먼저 알게 된 곳이다.

 

 백제 이후로 잊혀진 고장이었던 공주가 역사의 장소로 크게 떠오른 것은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다. 그 전쟁의 마지막 격전지가 되었고 그 상흔이 검붉은 핏빛으로 이곳에 남아 오늘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공주에서는 공산성이 꼭 올라야 할 곳이다. 금강을 북으로 하고 천연의 요새를 이루어 백제의 왕도로 선택된 곳이기 때문이다. 지금 백제 때의 유적이야 남아 있지 않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역사의 숨결을 느끼기에 이보다 좋은 곳은 없을 듯하다.

 

 공주를 내가 기억 하는 것은 곰나루 못미처 있는 무령왕릉이다. 무령왕릉이 없었다면 공주는 지금처럼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고, 그저 조용한 시골 소도시로서 만족해야 했을 것이다. 1971년에 아무도 손대지 않고 온전하게 발굴된 무령왕릉이 우리에게 백제 역사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를 너무나 많이 제공하고 있다.

 

 

공주 공산성

 

 

 

 

 

한옥마을의 모습

 

 

인조임금 공주 파천 기념비

 

 

고려현종임금 기념비

 

 

 

 

 

한옥마을의 여러 모습

 

 

 

 

충청도포정사

 

 

한옥마을의 전경

 

 한옥마을에서 한 200m 정도 떨어진 곳에 공주박물관이 있다. 내가 예전에 보던 박물관이 아니었다. 새로 지어 옮긴 것이다. 박물관이 옮긴 것도 모르는 시간을 내가 공주에 오지 않은 것이라 생각하니 세월이 많이 흘렀음을 실감한다. 옛날 조그마한 박물관이 지금은 현대식 건물로 제법 크게 자리잡고 있다.

 

 

박물관 입구

 

 

공주박물관 건물

 

 

 

 

박물관 건물입구에 있는 부처님

 

 위의 사진을 보면 부처상 뒤에 바로 광배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부처님과 광배는 거리가 제법 떨어져 있다. 사진을 찍으면 가장 잘 나오는 거리를 두고 배치해 놓았다. 관람객을 위한 서비스라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조그마한 일이지만 관광객을 배려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박물관을 들어서니 바로 보이는 것이 무령왕릉이다. 물론 실체가 아니고 모형이다. 무령왕릉은 백제 무령왕과 왕비가 합장된 능으로 1971년 여름, 송산리 고분 배수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 전혀 도굴당하지 않은 완전한 상태로 발견되어 당시에 언론을 흥분시켰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 때 급하게 서둘러 발굴조사를 진행한 결과(혹자들은 하루에 발굴을 마쳤다고도 한다.) 위대한 발견임에도 불구하고 50년이 가까이 흐른 지금까지도 졸속 발굴이라는 지탄을 받고 있다.

 

 내가 이것을 보려고 공주에 왔는지 모른다.

 

 처음 무령왕릉을 보았을 때가 언제였던가? 아마 발굴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 기억이다. 그 때는 왕릉의 현실이 모두 공개되어 왕릉안으로 들어갔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그 뒤에 한 십년이 지나서는 박물관으로 완전히 만들어져 무령왕릉을 뒤에 두고 공주박물관이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왕릉과는 제법 떨어진 곳에다 박물관을 만들고 왕릉의 모형을 만들어 놓았다. 지금 진짜 왕릉은 보존을 위해 폐쇄되어 다시는 보지 못하겠지만 모형이라도 구조를 그대로 만들어 관람객에게 구경하게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무령왕릉에 대한 구체적이고 학문적인 내용은 모두 인터넷이나 서적 등을 통해 전문가의 의견을 참조하기를 바란다.

 

 

무령왕릉 표지

 

 

 

 

 

 

왕릉의 수호자 석수

 

 

 

 

왕과 왕비가 누웠던 자리 모형

 

 

 

 

왕과 왕비의 금동신발

 

   

 

각종 장신구

 

 

금 귀걸이 - 아주 섬세하고 화려하면서 아름다운 세공에 감탄한다.

 

 

 

 

왕과 왕비의 왕관 장식

 

무령왕릉은 무덤의 주인이 정확하게 밝혀진 고대무덤이라는 것뿐만 아니라, 피장자가 백제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군주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되었다. 무덤 안에서는 모두 4,600여 점에 이르는 다량의 유물이 발굴되었으며, 절대연대가 확인된 유물로서 백제사는 물론 한국 미술사 연구에 있어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

 

 

농경문 청동기

 

 

 

계유명 천불비상의 앞 뒤

 

 

관음보살상

 

 

 

불상좌대 - 뒤에 홀로그램으로 불상의 모형이 비친다.

 

 박물관 건물을 나와 뜰에 가면 엄청난 크기의 석조가 있다. 부여박물관의 석조로 비슷한 용도로 만들어진 것인데 그 당시에 이런 거대한 석조를 만든 이유가 무엇일까? 하고 의문을 가진다.

 

 

 

공주 대통사 석조

 

  공주박물관은 규모가 크지 않고 소장품도 많지 않지만 알차게 전시된 소장품을 감상하는 것은 큰 즐거움이다.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유물을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느끼며, 박물관을 나와 송산리고분군으로 간다. 공주에 왔는데 송산리고분군을 보지 않고 지나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고분군을 보고는 역시 실망만 했다. 전부가 보존을 이유로 폐쇄해 놓았기 때문이다. 한 15년전에 이 송산리고분군에 왔을 때는 전부는 아니지만 내부를 볼 수 있는 고분이 있었는데.....

 

 

송산리고분군(무령왕릉) 입구

 

 

 

 

무령왕릉의 모형

 

 

 

 

입구를 봉쇄해 놓은 송산리 고분

 

 

 

유네스코 세계유산 표지

 

 

송장배미 표지

 

 공주 시내에서 곰나루로 이어지는 길 웅진동에 용못이라고 불리는 못이 하나 있다. 이 용못에 붙어 있는 논이 바로 ‘송장배미’이다.  동학농민전쟁 때 희생된 동학농민군의 시체를 한 곳에 모아 이곳 송장배미에 묻었다고 한다. 그 후 이곳에서 사람의 뼈와 해골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고, 이 논의 주인이었던 故 이상필 씨가 해마다 칠월 칠석에 제사를 지내왔다고 한다. 당시 농민군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송장배미 표지석과 조형물을 함께 설치해 매년 동학혁명을 기억하는 이들의 주요 순례지로 남아 있다.

 

 

 이곳을 지나면서 잠시 길을 잘못들어 시간을 좀 허비하였다. 그리고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이 공산성이다. 공산성도 많이 변하였다. 완전히 시가지로 주변이 관광지로 되었다.

 

 공주 시내 산성동에 있는 공산성은 백제 문주왕 1(475)에 웅진으로 천도하였다가 성왕 16(538)에 부여로 천도할 때까지 564년간의 도읍지인 공주를 수호하기 위하여 축조한 성으로 동서로 약 800m, 남북으로 약 400m 정도의 장방형을 이루고 있는, 총 연장 2,660m로 해발 110m의 능선에 위치하고 있는 자연의 요지이다. 원래는 백제시대의 토성이었던 것을 조선시대 때 석성으로 다시 쌓은 것이다. 조선시대 인조대왕이 이괄의 난을 피해 이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공산성 금서루 전경

 

 

 

금서루가 는 길

 

 

현대에 복원한 급서루

 

 

 

 

공산성 성벽 길

 

 

성벽에서 보는 금강

 

 

성벽 길에서 보는 북문 주변

 

 

공북루

 

 

금서루의 모습

 

 

망이 망소의 난 설명판

 

 

 

 

관광객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옛 성을 경비하던 군사들을 젊은이들이 재현한다.

 

 

 

 

공산성 금서루 일대 전경

 

긴 세월이 흘러 공산성에서 백제의 모습을 찾아보는 것은 어렵다. 그저 여기가 한 때나마 백제가 도읍을 정하고 있었다는 곳이라 생각하고 무심히 흐르는 금강을 보면서 저 강물처럼 흘러간 세월을 회상해 보는 것이다.

 

 

공산성 입구에 있는 무령왕릉 모형문

 

 공산성을 끝으로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짧은 백제 여행을 긑낸다. 혼자서 여행하는 재미를 사람들은 잘 모른다. 나를 아는 친구들도 혼자서 여행을 가는 나를 조금은 이상하게 본다. 하지만 여행의 참 맛은 혼자 가는 것이라고 나는 항상 생각한다. 여럿이 가는 것은 여행이라기보다 놀이에 가깝다. 여럿이 가면 반드시 의견의 불일치가 있다. 그래서 여행은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몇 일이 지나지 않아 싸운다는 말이 있다. 진짜 성향이 완전히 일치하거나, 아니면 한 쪽이 완전히 양보하지 않는다면, 사람 사이란 항상 좋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편안할 때는 좋았다가도 여행을 몇 일 하다가 피곤해지면 짜증이 나는 것이다. 상대를 이해해주지는 않고 자신의 피로함만 내세우며 싸우는 것이다. 그러나 혼자 여행은 그런 걱정이 전혀 없고, 내가 가고자 하는 대로, 내가 보고자 하는 대로 즐기면 되는 것이다.

 

 여하튼 백제를 조금이나마 보고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