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鶴)의 오딧세이(Odyssey)

스페인, 산티아고 까미노 길을 걷다. 6(05.22, 푸엔테 라 레이나 - 에스테야)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오늘의 길 : 푸엔테 라 레이나 - 마네루 - 시라우키 - 로르카 - 비야투에르타 - 에스테야

 

 오늘은 푸엔테 라 레이나에서 에스테야까지 약 22km의 길이다.

 

오늘 역시 일찍 일어나 간단하게 과일과 빵으로 아침을 먹고 알베르게를 나와 길을 떠난다. 아직은 해도 뜨지 않아서 조금은 어두운 마을길을 걸어 여왕의 다리(Puente la reina)’를 건너서 고속도로를 지나 좁은 비포장도로를 통해서 계곡의 끝으로 깊숙이 들어간다. 계곡을 통해 마네루 입구의 십자가상까지 오르는 가파른 비탈길은 오래된 수도원과 성당건물 사이에서 시작된다. 마네루는 향기로운 로즈 와인의 생산지로 유명한데 스페인에서 로즈 와인을 찾았으나 나타나지를 않아 마시지를 못했다. 마네루의 언덕 위에는 외롭게 서있는 산따 바르바라 성당이 있다. 마네루에 다음 마을인 시라우키까지는 약 40분이 소요된다. 시라우키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포도밭을 지나다 보면 이 고장이 스페인 북부의 포도주의 고장임을 다시 깨닫게 된다.

 

우리가 머문 알베르게

 

이른 아침의 푸엔테 라 레이나 거리 풍경

 

아침의 푸엔테 라 레이나 다리

 

이 구간의 안내도

 

공동묘지

 

에스테야(16.1km), 시라우키(2.1km)를 가리키는 이정표

 

 이정표가 나오고  여기에서 길을 따라 걸으면 멀리  바스크어로 살모사의 둥지 라고 불리는 시라우키가 한 폭의 그림과 같은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이 이름은 로마 시대와 중세에 붙여진 이름으로, 이 마을의 전략적인 위치 때문에 지나가기가 어려운 곳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내가 이 마을의 사진을 찍어 한국의 여러 곳에 보내니 모두들 그림 같다고 탄복을 하였다.

 평탄한 언덕길을 따라 올라서면 오래된 성벽으로 둘러싸인 중세의 마을 시라우키에 다다른다. 마차가 다니기 위해서 폭이 최소 5미터가 넘었던 길에 배수로를 가지고 있는 바닥은 커다란 돌을 토대로 기초공사를 한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중세의 길을 가진 시라우키를 지나면 지나온 현대에 만들어진 다리와 팜플로나와 로그로뇨를 이어주는 고속도로를 만나게 된다. 불과 몇 십 미터 사이에서 중세와 현대의 도로를 동시에 걷게 되는 것이다.

 

저 멀리 보이는 그림같은 시라우키(Cirauqui)마을

 

넓게 펼쳐지는 포도밭

 

시라우키 마을

 

도로 옆의 교각이 고속도로의 교각이다.

 

 

 

 시라우키 마을의 바에 둘러서 주스와 오물렛 비슷한 약간의 음식을 먹고 다시 길을 걷는다. 약 한 시간이 넘게 걸으면 로르까에 도착한다. 과거 로르까의 주민들은 돈벌이를 위해 소금기가 많은 강물을 독이 있는 강물이라고 순례자들을 속여 포도주를 팔았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는 맛 좋은 포도주를 생산하는 인심이 좋은 친절한 마을이다.

 로르카의 산 살바도르 교구 성당 (Iglesia Parroquial de San Salvador)은 롬바르디아 양식의 로마네스크 성당으로 원통형으로 건축된 아주 독특한 형식을 보여준다. 창문 위는 아치, 제단 위는 원형 궁륭으로 덮여 있으며 정문과 탑은 20세기에 지어진 현대 건축물이다.

 

로르카 산 살바도르 교구 성당(원통형 건물)

 

교구성당 옆의 성당

 

 마을을 지나가는 도중의 카페에 우리말로 '맛집'  '아이스 커피'라고 쓴 입간판으로 한국인 손님을 유혹하고 있는 카페를 만났다. 아이스 커피는 한국인이 아니면 잘 마시지 않는 메뉴다. 까미노 길을 가면 많지는 않으나 제법 보이는 우리말 표기이다. 이 표시는 보고 이 길을 걷는 사람 중에 한국인이 엄청 많다는 통계를 본 일이 있는데 거짓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길을 걸으며 만나는 동양인의 90%는 한국인인 것 같았다.

 

우리말로 선전 문구를 만든 카페 - 한국인이 얼마나 많이 오는지를 보여 주는 모습이다.

 

공사로 인해 도로가 차단되었다는 표시

 

 약 한 시간을 걸으면 중세의 로마인들의 주거지이기도 하였고, 성직자들의 거주지이기도 했던 비야 투에르타에 도착한다. 비야 투에르타 마을에 들어가니 여기서 로스 아르고스까지를 안내하고 있는 까미노 안내판이 나온다. 하지만 나의 오늘 여정은 에스테야까지다.

 

 과거 산띠아고 데 꼼포스텔라를 향하는 까미노는 비야투에르타에서 지금은 폐허만 남아 있는 사라푸스 수도원으로, 그리고 다시 이라체 수도원으로 에스테야를 지나지 않고 곧장 이어졌다고 한다. 그러다가 1090년에 산초 라미레스가 넘쳐나는 도보순례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에스테야를 세우면서부터 까미노 길이 바뀌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비야투에르타에는 예전의 까미노 길에 그대로 남아 있다.

 

까미노 안내도(비야 투에르타 - 로스 아르고스)

 

까미노 표시

 

 길을 가다가 왼쪽을 보니 큰 성당이 보이는데 성 베르문도의 마을 성당이다. 성당 전면에 휘장이 걸려 있었는데 휘장의 내용은 베르몬도의 밀레니엄(1020 - 2020) 기념휘장이었다. 내일 지나갈 이라체 수도원의 수도원장이었던 성 베레문도의 고향은 확실하지 않다. 예전부터 비야투에르타와 인접한 아레야노(Arellano) 사람들은 성 베레문도의 고향이 자기 마을이라는 논쟁을 계속하고 있다. 그래서 성인의 유해는 5년마다 번갈아 가며 두 마을에서 보관하지만 매월 38일에는 모두 성 베레문도의 날을 기원한다고 한다..

 

성 베르문도 마을 성당

 

성 베르문도 데 이라체의 발자취를 따라 가는 안내도

 

에스테야 주변 안내도

 

산 미겔 성당(맞는지 솔직히 자신이 없다.)

 

산 미겔 수도원

 

 비야 투에르타 마을을 지나 한 시간 정도를 아스팔트길을 걸어가면서 많은 성당을 보고 지나간다. 스페인은 가톨릭 국가라 성당이 너무 많다. 천년도 넘는 시간에 걸쳐 수많은 성당들이 세워져 지금은 거의 폐허가 된 성당의 모습도 보인다. 그리고 현대적인 성당도 많이 또 세워지고 있다.

 

이름을 모르는 성당

 

 강을 건너 에스테야로 들어가 오늘의 종점인 알베르게를 찾아서 도시의 대로 가를 걸어 갔다. 따가운 햇살 아래 길을 제법 걸어가니 예스런 성당이 보인다. 그리고 그 성당에 이어져서 알베르게가 있고, 거기가 오늘의 숙소였다. 숙소에 도착하니 너무 일찍 와서 아직 짐도 도착하지 않았고 숙소도 문을 열지 않았다. 그래서 주변을 돌아보며 사진을 찍고 기다리니 숙소의 문이 열리고 들어가게 하였다.

 

좋은 빵과 훌륭한 포도주, 모든 종류의 행복함이 있는 도시로 알려져 있는 스페인어로는 에스테야(Estella), 바스크어로는 리사라(Lizarra)라고 하는 이 마을은 스페인 나바라 중서부에 있는 산티아고 순례 길에 있는 도시다. 팜플로나 및 아라곤 왕국의 산초 라미레스 왕이 1090년 고대 리사라 지역에 마을을 건설했다. 왕은 프란크스(상인, 귀족이나 교회에 복속되지 않는 자유인)가 이곳에 정착하도록 권장했다. 유럽 전역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향해 여행하는 순례자들이 늘어남에 따라 이들을 돌볼 사람들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에스테야에는 바스크인, 유대인, 프랑스인 등 여러 인종이 모여 살았다. 왕의 주도한 개발로 인해 도시는 항상 부유했는데, 당시 번성한 상업과 수공업 때문에 에스테야는 까미노 길에서 매우 중요한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북부의 톨레도로 불릴 만큼 기념비적인 유적들이 다수 있고, 해발고도 421m로 산에 둘러싸여 있어서 바람이 적고 날씨가 비교적 온화하다.

 

 에스테야는 바스크어로 별이라는 뜻으로 도시의 문장에도 별이 하나 그려져 있다. 이 별은 사도 야고보가 잠들어 있는 콤포스텔라로 우리를 인도한다. 지금은 도시의 크기가 줄었지만 에스테야는 과거 나바라의 왕은 왕위를 받을 때 에스테야의 성당에서 선서를 했으며 에스테야의 로마네스크 양식 궁전에서 살았다고 한다.

 

숙소 옆의 Rocamador 성당의 모습

 

숙소 안의 그림

성당과 숙소 앞의 모습

 

숙소의 알베르게의 종사자에게 옆에 있는 성당의 이름을 물어 종이에 적어 달라고 하여 이 성당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는데 이름이 Recamador였고, 이 알베르게의 이름은 성당의 이름과 같은 Capuchinos Recamador였다.

 

 

알베르게 조금 위에 있는 슈퍼

 너무 일찍 도착하여 비로소 점심을 먹을 시간이었다. 그래서 같이 길을 걷는 동료와 함께 점심을 먹기 위해서 식당을 찾아 나섰다. 숙소를 나가 시내를 조금 올라가니 식당이 보여 들어가니 무어라 하면서 막았다. 종업원들은 영어가 통하지 않고 우리는 스페인어를 알아들을 수 없어 조금 있으니 자리를 안내해 주었다. 아마 자리가 없어 그렇게 된 것 같았다. 자리에 앉아 영어 메뉴판을 청하니 메뉴판이 없어 종사자가 영어로 글을 써서 가지고 와서 설명하는데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겨우 이해를 한 것이 전채와 본 메인 요리, 후식으로 나누어진다는 것을 알고 각 코스마다 하나씩 시켰다 첫 코스는 샐러드와 닭 수프, 파스타, 본 메뉴는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후식은 아이스크림 푸딩 요구르트 등이 있었는데, 닭 고기 수프와 돼지고기 아이스크림을 시키니 음료는 무엇을 할는지를 물었다. 우리는 이해를 못하고 콜라를 시켰는데 나중에 보니 와인이나 물을 고르는 것이었다.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고 주문을 하고 기다리니 수프를 한 접시 가득 가져다주고 빵도 주었다. 수프가 맛있으면서 엄청난 양이라 빵과 함께 먹으니 배가 부를 지경이었다. 그 뒤에 나오는 돼지고기와 후식도 배불리 먹고 가격을 물으니 콜라까지 포함하여 17유로(약 2만원)이었다. 가격에 비하여 너무 좋은 음식이었다.

 

 이 때는 몰랐으나 한 이틀 뒤에 이 음식을 알게 되었다. 스페인이 길을 걷는 사람들을 위해서 각 마을마다 오늘의 메뉴라고 해서 순례자들을 위한 음식을 파는 것이다. 가격은 약 15유로 안팎으로 마을마다 약간 차이가 있었지만 코스는 3가지로 동일했고 음료는 와인과 물중에서 택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말하는 가성비에 비교하면 너무 값이 싼 음식으로 양과 질 면에서 충분히 만족할 만했다. 마을마다 메뉴는 조금 다르지만 기본적으로는 비슷한 음식 코스니 이 까미노를 걷는 사람들에게 권할 만한 음식이었다.

 

 점심을 배불리 먹고 숙소로 돌아오니 일행들이 거의 도착하였다. 그래서 우리가 갔다 온 식당 앞에 아주 큰 슈퍼마켓이 있다고 알려주니 대부분이 그 슈퍼에 갔다. 우리 무리도 슈퍼에 가서 나중에 먹을 맥주와 간단한 안주를 사서 돌아왔다. 조금 쉬고 있다가 오늘 여행사에서 우리 일행을 위해서 저녁 회식을 베풀어 준다고 하여 식당에 가니 슈퍼에서 사온 여러 가지 재료를 같이 간 일행 중에 여성분들이 한국식으로 요리하여 풍부하게 마련해 놓았다. 시끌벅적하게 떠들면서 맛있게 저녁을 먹고 즐겁게 이야기를 하며 놀았다.

 

 저녁을 먹고 잠시 있다가 우리 일행 4명은 알베르게의 뒷마당의 탁자에 앉아 맥주를 마시면서 여러 이야기를 하며 즐기고 있었는데 뜰에서 요가와 비슷한 자세를 취하며 운동을 하는 사람이 보였다. 우리 일행 중에 다소 장난기가 많은 쾌활한 사람이 그에게 이야기를 걸면서 자세를 따라 해 보았다. 그리고 그 사람과도 인사를 하였다. 잠시 맥주를 마시고 있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져 안으로 들어가 식당에 가니 조금 전에 뜰에서 요가를 하던 사람이 일행 6명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다. 뒤에 또 이야기 하겠지만 이 6명과는 같은 길을 걷기 때문에 자주 만나서 인사를 나누었다.

 

 오늘 하루를 즐겁게 걷고 또 배불리 먹고 하였으므로 아무런 생각도 없이 잠자리에 들었다.

 

 

스페인, 산티아고 까미노 길을 걷다. 5(05.21, 팜플로나 - 푸엔테 라 레이나)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오늘의 길 : 팜플로나 - 시수르메노르 - 사리키에기 - 페르돈 고개 - 우테르가 - 오바노스 - 푸엔테 라 레이나

 

 오늘은 팜플로나를 출발하여 까미노 길에서 유명한 '용서의 언덕'인 해발 750m의 페르돈 고개를 지나서 푸엔테 라 레이나까지 가는 약 22km의 길이다. 오늘은 까미노의 가장 상징적인 용서의 언덕을 지나게 되는 길로. 용서의 언덕이 있는 페르돈 고개까지는 조금 산길을 올라가지만 거기서부터는 내리막길을 걷는 어렵지 않은 길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걸을 준비를 하고 7시부터 길을 나섰다. 팜플로나 구 시가지를 관통하는 길에서는 어제 보지 못했던 여러 건물들과 아름다운 거리의 풍경이 보였다. 길을 조금 가니 어제는 미처 보지 못했던 화려하고 아름다운 건물이 나타난다. 바로 팜플로나 시청 건물이다.

 

 팜플로나 시청은 1755년에 시작하여 1760년에 완성된 바로크식 파사드(Fachada : 건조물에서 중요한 전면, 정면을 일컫는 말이다.)를 간직하고 있는 건물이다. 이 건물이 세계에 잘 알려진 것은 매년 76일 시청의 발코니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산 페르민 축제의 시작을 알리기 때문이다.

 

 시청 내부에 있는 문틀위의 상인방(上引枋)은 바로크 양식인데 이 문은 모든 이를 위해 열려 있으며 마음은 더 많이 열려 있다라는 나바라의 까를로스 3세 아름다운 문구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아름다운 팜플로나 시청

 

 시청을 지나 거리를 걸어가니 아직은 이른 시간이라 아무도 거리에 나와 있는 사람들은 없고 길을 걷는 일행들만이 발길을 재촉한다. 여러 거리를 지나 서쪽 문을 통과하니 뜻밖에 대학교가 나타난다. 나바로대학이다. 까미노 길은 이 대학의 경내를 통과해야 하므로 평탄한 길을 걸어간다.

 

팜플로나 성의 서쪽 문

 

나바라 대학 표지

 

이 구간의 안내도

 

 대학을 빠져 나와 조그만 사다르 강에 걸쳐있는 나무다리를 건너면 저 멀리에 내가 넘어야 하는 페르돈 고개가 보인다. 정상 주변의 여러 봉우리에는 풍차를 본뜬 현대의 풍력발전의 바람개비들이 줄지어 서 있다. 직선으로 시원하게 뻗어있는 자동차 전용도로의 보도를 따라 직진하면 시수르 메노르에 다다른다.

 시수르 메노르 마을에는 이미 12세기부터 예루살렘의 성 요한 기사단(Los Caballeros de San Juan de Jerusalén)이 운영하는 순례자병원과 수도원이 있었다고 한다. 성 요한 기사단은 순례자들에게 숙소를 제공했고 까미노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이었던 팜플로나부터 페르돈 고개(Alto del Perdón)까지 순례자들을 도적들에게서 보호해주었다고 한다.

 

 시수르 메노르의 마을 출구에서 오른쪽으로 진행하면 고속도로를 통과하여 경기장이 나온다. 여기부터 페르돈 고개가 시작하는 출발점이다. 페드론 고개의 풍력발전 바람개비가 손에 잡힐 듯이 가까이 보이지만 부지런히 걸어도 2시간 반이 걸리는 제법 먼 거리다. 다음 마을인 사리키에기로 오르는 좁은 도로 좌우로 넓게 펼쳐져 있는 밀밭은 순례자의 마음을 더욱 평화롭게 만든다.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넓게 펼쳐진 평원은 사람의 마음을 풍요롭게 하고 너그럽게 한다. 사위가 막힌 산에서만 사는 사람과 사위가 탁 트인 넓은 평원에서 사는 사람들의 생각은 다를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길가에는 관상용 양귀비가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며 시선을 끈다. 왼쪽으로 사리키에기를 향하는 마지막 오르막을 오르면 여러 사진과 글귀들이 붙어있고 조그마한 돌로 이루어진 소박한 순례자의 무덤인 것 같은 십자가가 나오고 두 번째 마을인 사리키에기에 도착한다.

 

멀리 보이는 그림같은 마을

 

밀밭 주위에 핀 양귀비 꽃

 

저 멀리 보이는 페르돈의 성모 수도원(Ermita de Nuestra Señora del Perdón)

 

길가의 양귀비와 들꽃

 

계속 이어지는 밀밭과 보리밭을 걷는 순례자들

 

소박한 순례자의 무덤

 

사리끼에기 - 사도 안드레아 성당 (La Parroquia de San Andrés)

 

 사리키에기 마을의 입구에는 고딕양식의 아름다운 성당이 보이며 순례자는 이 성당의 그늘에 앉아서 휴식을 취한다. 사도 안드레아 성당 (La Parroquia de San Andrés)은 13세기의 고딕 양식으로 만들어진 건축물이나, 성당의 정문에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남아 있다. 한 개의 신랑과 단순한 형태의 고딕 양식 아치가 있는 석조 건물로 성당의 내부에는 12,13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앉아 있는 성모상이 있다.

 

 페르돈 고개(Alto del Perdón) 기슭에 있는 작은 마을인 사리끼에기 마을을 지나면 길이 험해진다. 험한 길을 걸어 페르돈 고개에 오르면 넓게 펼쳐진 밀밭을 감상할 수 있다. 사리키에기 마을을 벗어나 페르돈 고개 정상까지는 약 1시간 정도가 걸린다.

 

 

 

 산길을 걸으면서 좌우를 보면 유채와 비슷한 노란 꽃을 많이 본다. 우리에게는 낯선 꽃이지만 이곳에는 너무 많다. 하지만 꽃 이름을 아무도 모른다. 이런 궁금증을 참을 수 없기에 인터넷이 되는 곳에서 꽃 이름을 가르쳐 주는 사이트에 접속해서 물어보니 '스페니쉬 블룸'이라는 답이 왔다. 아주 짙은 향기가 나는 꽃이다.

 

'스페니쉬 블룸'이 피어 있는 모습

 

 

 

 드디어 '용서의 언덕'에 도착한다. 힘들게 페르돈 고개 정상에 오른 순례자는 철 조각품을 만난다. 원래 이 언덕에는 페르돈 성모를 기리는 성당이 있었는데, 그 성당이 노후화되어 1996년에 나바라 까미노 친구의 협회에 의해 순례자 모습을 철 조각으로 만들어 놓았다. ‘용서의 언덕이라 불리는 것은 이 언덕에서 회개를 통해 자신이 지은 모든 죄를 용서받고, 또 다른 사람이 나에게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해 준다는 곳이다. 한 무리의 순례자의 행렬을 나타낸 조각을 자세히 보면 맨 앞에는 길잡이가 있다. 그리고 그 뒤를 말을 탄 순례자가 따르고 그 뒤로 짐을 지고 있는 말과 개 그리고 병사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철 구조물에는 여러 글귀가 새겨져 있는데 그 중에서 가운데 말을 자세히 보면 ‘donde se cruza el camino del viento con el las estrellas'라는 글귀를 볼 수 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바람의 길과 별의 길이 교차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내가 지나가는 시간은 한낮이라 바람의 소리와 길은 듣고 느낄 수 있으나 별의 길은 보지 못했다.

 이 조형물 앞에서 사람들은 여러 가지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는다. 그 중에서 순례자의 모형을 따라 걷는 모습을 취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그리고는 스스로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 '용서의 언덕'을 지나왔기에 마음이 좀 더 너그러워지고 평화로워지기 때문이다. 

 

용서의 언덕의 조형물

 

용서의 언덕에서 보는 조망

 

 용서의 언덕 왼쪽으로 바로 밑에 예전에는 없었다는 돌들이 둥글게 원을 그리며 놓여 있는 모습을 본다. 메모리 알라의 기념 무덤이라는 곳으로 스페인의 어두운 역사를 상징하는 프랑코 정권에 항거하다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기념물로 나바라의 역사적 기억 장소에 의한 법으로 보호하고 있다고 하는 곳이다.

 

메모리 알라의 기념 무덤 설명판

 

메모리 알라의 기념 무덤

 

 엄청난 크기의 풍력발전 바람개비를 배경으로 휴식을 청한 순례자는 도로를 가로질러 맞은편 내리막길로 우떼르가로 향한다. 이 길은 상당히 경사가 급하며 너덜지대가 많으므로 걸으면서 상당히 신경을 기울여야 한다. 가파른 비탈길을 힘들게 내려간 순례자에게 까미노는 황홀한 기쁨을 준다. 순례자를 위한 쉼터에 아름답게 자리한 순백의 성모상은 자비로운 미소로 그 동안의 어려움을 잊게 한다.

 성모상을 지나 조금 가면 우테르가에 도착한다. 마을의 입구에는 중세의 분위기가 풍기나 마을로 들어가면서 점차 현대적인 모습으로 변하는 우테르가를 빠져 나온 순례자는 지대는 상당히 높은 야트막한 언덕 능선을 연이어 계속 넘어야 한다.

 

성모상

 

이름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 성당

 

이름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 성당

 

 발디사르베 포도원이 있는 오바노스는, 역사적, 종교적 유산이 많아 관광객들이 흥미를 느낄만한 마을이다. 특히 오바노스는 고관대작과 왕으로부터 자신의 권력을 지키려는 나바라 토호들의 모임인 인판소네스 회의(Junta de Infanzones)가 열리는 장소가 되면서 나바라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다.

 

오바노스 마을 안내도

 

 

 오바노스의 대표적 건축물인 세례자 요한 성당(Iglesia de San Juan Bautista)은 19121117일에 완성된 20세기의 신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건축물이다. 14세기 고딕 시대에 지어진 같은 이름의 성당을 대체하여 건축되었고 과거의 성당에서 문과 가구를 옮겨와서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14세기의 고딕 양식 문은 건물 끝에 위치하며 현관이 문을 보호해주는 모습을 하고 있다. 내부에는 13세기 후반 로마네스크 양식의 블랑까 성모상이 있다. 이 성당에는 오바노스 전설의 주인공인 기옌의 두개골이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세례자 요한 성당 (Iglesia de San Juan Bautista)

 

성당 앞 광장의 십자가

 

까미노 설명인데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순례자 기념물 (Monumento Peregrino)

- 프랑스 길과 아라곤 길이 만나는 푸엔떼 라 레이나로 들어가는 입구에 순례자를 형상화한 기념물

 

 

 프랑스 길과 아라곤 길이 만나는 푸엔떼 라 레이나로 들어가는 입구에 서 있는 순례자를 형상화한 기념물을 지나 푸엔테 라 레이니 마을의 숙소 알베르게에 들어가 몸을 씻고 나서 마을을 구경하러 갔다. ‘푸엔떼 라 레이나 다리’(여왕의 다리)라고 불리는 다리는 내일 까미노 길을 갈 때 지나가지만 시간이 충분히 여유가 있을 때 구경하는 것도 좋을 것으로 생각하여 우리 4몀의 무리는 소요하듯이 마을을 구경하면서 다리로 갔다.

 

 

마을의 성당

 

 까미노 길에서 가장 많이 사진을 찍는 곳 중 하나라는 ‘푸엔떼 라 레이나 다리로 불리는 이 중세의 다리는 푸엔떼 라 레이나 출구에 순례자의 길을 따라 아르가 강에 건축된 다리다. 11세기에 지어진 이 석조 다리는 순례자들이 아르가 강을 건너기 쉽도록 지어졌으며 까미노 중 가장 아름다운 로마네스크 양식 다리다. 일곱 개의 아치로 되어 있으나 가장 동쪽의 아치는 땅 속에 묻혀 여섯 개의 아치로 된 다리로 보인다고 한다. 양 끝과 가운데에 방어용 탑이 있으며 가운데 탑에는 초리의 성모라고 하는 르네상스 양식의 성모상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산 페드로 성당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푸엔떼 라 레이나에는 여러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나는 여행객이 아니고 까미노 길을 걷는 순례자라 시간적 여유가 없어 전설의 고장을 찾아갈 수가 없다.

 

푸엔테 라 레이나 다리 (Puente de Puente la Reina)

 

다리 입구에 여러 곳을 가리키는 이정표

 

다리 앞 관광안내소 앞에 있는 푸엔테 라 레이니 마을 안내도

 

다리 위에서 보는 마을 풍경

 

다리 입구의 방어용 탑의 모습

 

 여왕의 다리를 구경하고 알베르게로 돌아와서 저녁을 먹고 조금 쉬다가 하는 일이 없이 잠을 청하였다.

 

 오늘 길에서 보는 넓은 구릉지대에 펼쳐지는 평원은 우리에게는 너무 낯선 풍경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이 산이고 평야라고 해도 넓지 않은 지역에 펼쳐지는데 이곳에서는 산이 보이지 않고 구릉만 보이며 그 지역에는 넓게 펼쳐지는 평원이 있었다. 축복받은 땅이라 느껴졌다.

 

스페인, 산티아고 까미노 길을 걷다. 4(05.20, 수비리 - 팜플로나)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오늘의 길 : 수비리 - 라라소냐 - 수리아인 - 트리니닷 데 아레 - 팜플로나

 

 오늘은 팜플로나까지 가는 길은 비교적 평탄한 21km의 길이 계속 이어진다. 아침 일찍 일어나 떠날 준비를 하고 07시 경에 숙소를 나와 길을 떠났다.

 

 순례자는 어제 건너온 마을 입구에 있는 라 라비아 다리를 건너 오른쪽으로 돌아서 강기슭을 따라 평탄하고 부드러운 길을 걷는다. 길을 조금 가면 예상하지 않았던 상당히 긴 공장지대를 지나게 되며 돌을 깐 좁은 길을 따라서 일야라츠(Ilarratz)와 에스키로츠(Ezkirotz)를 지나 작은 시내까지 숲으로 우거진 좁은 길을 따라가 목장 사이의 도로를 지나면 아름다운 중세 다리인 시글로 14세의 다리를 건너서 라라소냐에 도착한다.

 

이 구간의 안내판

 

걷는 길에서 돌아보는 수비리 마을

 

일야라츠(Ilarratz) 1.3kn라는 이정표

 

 길을 가며 오른쪽을 바라보니 채석장을 비롯하여 여러 공장이 보이고, 비안개가 마을을 덮어 산을 올라가는 아름다운 경치가 나타난다. 날이 흐려서 비옷을 입고 걷는 사람도 보이지만 비는 오지 않고 비안개만 자욱하게 끼여 시야를 조금 가린다.

 

저 멀리 비안개가 자욱한 풍경

 

우리 말로 '문화를 느낌'이라는 표어가 보인다.

 

지나가는 집 마당에 있는 순례자상

 

조용히 흐르는 아르가 강

 

라라소냐 가까이에 있는 바로 들어가는 다리

 

 길을 가며 조금은 시장기가 들 무렵 조그마한 아르가 강을 건너는 다리를 지나가니 바로 바가 나타난다. 모두들 엄청 반가워한다. 아침도 먹지 않고 출발했기에 이 바에 들어가 커피와 빵으로 가볍게 요기를 하고 쉬고 있으니 여러 나라의 많은 순례자들도 보이고 우리 일행들도 연이어 들어온다. 모두들 여기에서 쉬고 또 자기가 갈 길을 가는 것이다.

 

바의 전경

 

 라라소냐는 까미노와 함께 발전하여 순례자들에게 필요한 병원과 숙소를 제공하여 왔다. 그래서 라라소냐의 주민들은 순례자들에게 친절하며, 마을을 지나는 까미노의 양 옆에는 상점들과 아름다운 목재 발코니의 집들이 늘어서 있다.

 라라소냐에서 약간의 언덕을 지나면 예전 왕실의 영지였던 아케레타에 도착하게 된다. 아케레타에서 도로를 가로질러 숲이 우거진 좁은 계곡 길을 따라 걸으면 인공적인 소음은 모두 사라지고 자연의 소리가 순례자의 마음을 감싸준다.

 이어서 나타나는 좁은 숲길은 아르가 강과 나란히 강변의 산책로와 같이 편안하게 수리아인으로 이어진다. 수리아인 마을을 나와 소나무와 떡갈나무로 우거진 좁고 꼬불꼬불한 숲길을 따라 아르가 강과 나란히 걸으면 이로츠에 도착한다.

이로츠에 도착하면 팜플로나로 향하는 두 가지 까미노 길 중에 트리니닷 데 아래를 지나 팜플로냐까지 약 9km를 가는 공식적인 까미노 길을 택한다. 공식적인 까미노는 노란 화살표를 따라가면 된다.

 

 바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세요를 찍고 라라소냐, 아케레타, 수리아인, 이로츠 등을 지나 아를레타를 지나면 앞에 나올 마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나온다. 벌써 반 이상을 걸었다.

 

팜플로나 분지로 돌아가기의 안내도

 

쉼터

 

아틀레타를 지나 비야바와 부를라다 등을 가리키는 이정표

 

유채가 벌판을 덮고 있는 모습

 

 팜플로나에 바로 근처에 있는 부를라다는 까미노 데 산티아고로 인해 발전했고, 이 때문에 순례자를 돕는 두 종교 단체 산 살바도르 협회(La Cofradía de San Salvador)와 세례자 요한 협회(La Cofradía de San Juan Bautista)가 이곳에서 설립되었다.

 

 부를라다 다리 (Puente de Burlada)는 여섯 개의 아치의 다리이나 언제 만들어졌는지 확실히 알 수 없다. 이 석조 다리는 모양이 다른 여섯 개의 아치가 있는데 첨두아치와 반원아치이다.

 

부를라다 다리

 

팜플로나를 가리키는 이정표

 

 

 

 도심지에 길게 늘어선 돌벽을 따라 엄청나게 긴 길을 가면 시가지가 나오고 계속 길을 가면 멋진 다리가 나타난다. 노란 화살표를 따라가서  고딕양식의 중세 다리인 막달레나 다리를 지나면  팜플로나의 성문인 수말라카레기 문(Portal de Zumalacárregui)이 나오고, 가까이에 웅장하게 서있는 거대한 성채와 멀리 팜플로나 대성당의 모습이 보인다.

 

 팜플로나는 나바라(Navarra)주의 주도로 아르가 강변의 고지대에 자리 잡고 있으며, 10세기부터 16세기 초반까지 나바라 왕국의 수도로 번영을 누렸다. 이 도시는 기원전 1세기경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한 폼페이우스에 의해 건설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민족의 침략 때문에 시가지는 성채로 둘러싸여 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순례길이 지나는 곳으로 성지 순례자들과 도보 여행자들이 많이 찾는다. 오랜 역사와 갖가지 전설로 전통을 느낄 수 있으며 동시에 현대의 편리성과 이름다움이 있는 산업도시이다. 중세부터 이베리아 반도의 전략적인 도시이면서, 이베리아 반도와 갈리아를 잇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팜플로나는 여러 작은 마을이 모여 구성된 도시라고 한다. 그래서 마을들이 서로 대립하는 경우도 많아서 성벽으로 분리되어 있었다고 한다. 현재 곳곳에서 구획이 나뉘어 있는 길은 이런 역사를 보여주며, 가장 오래된 구역인 라 나바레리아(La Navarrería)는 고대 로마의 구획을 아직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팜플로나는 원래 나바라의 원주민이 살고 있던 곳으로 11세기부터 프랑스인과 유태인이 이주해오면서부터 다양한 전통을 받아들이는 역사적인 도시가 되었다. 지금은 현대적인 도시가 된 팜플로나에는 일 년 내내 중요한 문화 행사가 많이 열린다.

 

 그 중에서 매년 76~14일에 소떼가 시가지를 달리는 소몰이행사(El encierro) '산 페르민 축제(Fiesta de San Fermín)'가 열려 전 세계의 관광객이 찾는다. 13세기부터 시작되어 온 이 축제는 3세기 말 팜플로나의 주교였고 도시의 수호성인인 산 페르민을 기념하는 행사로, 헤밍웨이의 소설 '태양은 또다시 떠오른다.(The Sun Also Rises)'에 그 광경을 묘사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축제기간 동안 투우에 쓰일 소들이 수백 명의 사람들과 뒤엉켜 산토 도밍고(Santo Domingo) 사육장에서 투우장까지의 800m 가량의 거리를 질주하는 모습이 이 축제의 하이라이트이다.

 

 팜플로나는 어네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가 오랫동안 머물며 글을 쓰기도 하여 그가 머문 여러 곳이 추억의 장소가 되었고, 미국의 유명 소설가 시드니 셀던(Sidney Sheldon)의 장편소설 '시간의 모래밭(The Sands of Time)'의 무대로도 유명하다.

 

막달레라 다리

 

 아르가 강 위의 고딕 양식의 막달레나 다리 (Puente de la Magdalena)를 지나온 순례자들은 성벽을 따라 조금 걸어가서 수말라카레기 문 (Portal de Zumalacárregui)을 통해 팜플로나로 들어간다. 프랑스 문이라고도 부르는 수말라카레기 문의 아치는 1553년 까를로스 5세의 부왕이었던 알부르케르케 공이 건설하였다.

 이 문이 수말라까레기의 문이라 불리는 이유는 돈 까를로스를 지지하던 군인 토마스 수말라카레기(Tomás Zumalacárregui)가 카를리스타 전쟁 발발 이후 전쟁에 참가하기 위해 어두운 밤에 홀로 이 다리를 건너 팜플로냐를 떠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치 위엔 황제의 문장 즉 머리가 두 개 달린 독수리가 있는데, 18세기에 개폐식 다리의 바깥쪽 문을 추가했으며 부벽과 평형추 등이 아직 남아 있다.

 

팜플로나 성벽

 

수말라까레기 문과 문위의 문장

 

 수말라카레기 문을 통과하여 조금 올라가면 번잡한 시가지가 나오며 수많은 관광객들이 분주하게 오간다. 순례자들은 잠깐 방심하면 길의 표시를 잃어버릴 수가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여러 조형물과 아름다운 건물들을 보면서 넋을 잃고 있으면 우리는 잠시 시간과 방향을 잃어버린 나그네가 될 수도 있다.

 

 

 

 팜플로나의 대표적인 건축물은 누가 무엇라고 해도 대성당이다. 길을 가면서 왼쪽을 보니 대성당이 보인다.

 

 산타 마리아 대성당(La catedral de Santa María)으로도 불리는 대성당은 팜플로냐의 구시가지인 카스코 비에호(Casco Viejo)에 있다. 1397년에 시작되어 1530년에 세워진 고딕 양식의 건축물은 오래된 로마네스크식 성당 위에 지어졌는데, 정면은 신고전주의 양식이고 프랑스의 영향을 받은 회랑이 매우 아름답다고 한다.

 성당의 평면은 라틴 십자가의 형태이고 내부에는 로마네스크식 성모상이 있으며, 까를로스 3(Carlos III)와 왕비 레오노르의 환상적인 고딕 양식 무덤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대성당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누구나 회랑이라고 한다. 미술 전문가들에 따르면 팜플로냐 대성당의 회랑은 유럽의 고딕 양식 건축물 중에서도 가장 상징적인 곳이라고 한다.

18세기 후반에 대성당 정문이 원래의 프랑스식 고딕 양식보다 수수한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교체되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웅장하고 아름다운 성당에 들어갈 수가 없어 내부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고 외관만 보면서 만족해야 했다. 하루의 일정을 마치고 도착하니 성당은 닫혀 있었고 다음 날에는 아침 일찍 길을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관광객이 아니고 순례길을 걷는 순례자라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관광을 위해서는 여러 날을 이 도시에 할애해야 하는데 우리가 머무는 시간은 자는 시간까지 포함해서 약 12시간에 불과하다. 그것도 밤의 시간이다.

 

팜플로냐 대성당의 여러 모습

 

팜플로나 거리 모습

 

 숙소가 대성당 바로 옆에 있었는데 처음에 숙소를 찾지 못하여 성당 밑에 있는 길을 걸어 지나갔다. 가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길을 잘못 든 것같은 생각이 들어 구글 지도에서 숙소를 검색하여 찾아가는 도중에 일행을 만나 대성당 옆의 숙소로 갔다. 숙소에서 잠시 쉬다가 점심도 먹고 가볍게 팜플로나를 구경하러 나와 함께 걷는 일행과 나갔다. 숙소 조금 아래에 있는 제법 큰 식당에 들어가 스페인의 대표적인 음식인 파에야를 시켜서 배불리 먹고 거리에 나가니 수많은 관광객들이 거리를 오가고 있었고 가게의 여러 상점에는 다양한 물품을 팔고 있었다. 심지어 한국의 라면도 파는 곳이 있었지만 아직은 라면에 그렇게 끌리지는 않았기에 일단 눈으로 구경만하고 지나갔다.

 

 숙소로 돌아오니 일행의 대부분이 도착했고 모두들 아직은 피곤함보다는 즐거운 마음으로 팜플로나를 구경하러 나가기로 한다. 일행을 따라 먼저 간 곳이 팜플로나의 도심 한복판에 있는 카스티요광장이다.

 

카스티요 광장의 헤밍웨이가 자주 들렀다는 이루나(Iruna) 카페

 

카스티요 광장

 

 함께 간 일행들이 헤밍웨이가 자주 갔다는 카페에 가서 커피를 한잔 마신다며 무리를 지어 갔으나 나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헤밍웨이가 마신 그 커피도 아니고 그냥 갔다는 곳인데 스페인에는 헤밍웨이의 흔적이 너무 많이 있다. 그래서 나와 함께 다니는 4명은 성벽을 한 바퀴 돌아보기로 하고 대성당 뒤로 가서 팜플로나 성을 조망하고 성벽을 따라 걸었다.

 

대성당의 뒷면

 

 대성당의 뒤에서는 팜플로나의 성의 여러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바깥을 향하여 뻗어 있는 성벽을 보면 이 성이 얼마나 튼튼하게 지어졌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16세기부터 팜플로나를 지켜주었던 현재의 팜플로나 성벽 (Murallas)은 펠리페 2세가 건설했다. 5각형 형태의 튀어나온 수비 거점이 있는 이 성벽은 스페인에 남아있는 방어용 성벽 중에서 역사적인 의미가 많은 유적으로 이 성벽이 함락된 것은 역사상 단 한차례였다고 한다. 1808218일의 일이었는데, 함락되기까지 단 한차례의 전투나 유혈 사태도 없었다고 한다. 겨울이 되어 눈이 쌓이자 나폴레옹의 병사들은 꾀를 내어 눈싸움을 하는 척 했고, 이 모습이 너무나 평화롭고 재미있어 보여서 성벽을 방어하던 스페인 군사들이 이 놀이에 끼기 위해 성문을 열었다. 프랑스 병사들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눈 속에 숨겨놓았던 무기를 꺼내 스페인군의 항복을 받아 무혈로 성벽을 함락했다고 한다.

 중세시대 군사 요충지였던 팜플로나의 성벽 가운데 3곳이 남아 있다. 16~18세기 대포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별 모양의 8각형으로 지은 성채는 현대에는 쓸모가 없어져서  성벽의 주변에 현재 라 부엘타 델 가스티요(La Vuelta del Castillo)라고 하는 근사한 공원으로 바뀌었다.

 

대성당 뒤에서 보는 팜플로나 성의 여러 모습

 

 

 

 성의 전체적인 모습을 대강이나마 구경하고 성벽을 따라 걸으니 가톨릭의 국가답게 곳곳에 성당이 나타난다. 그 중에서 산 세르닌 성당(Iglesia de San Cernin)으로도 불리는 성 사투르니노 교구 성당 (Iglesia Parroquial de San Saturnino)은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이 결합된 성당으로 나바라의 수호성인인 까미노의 성모(La Virgen del Camino)를 모시고 있다. 원래 있던 로마네스크 양식 성당 위에 13세기에 현재의 성당이 건축되었다. 고딕 양식의 작은 회랑이 있었지만, 18세기에 까미노의 성모 소성당으로 바뀌었다.

 

성 사투르니노 교구 성당

 

아주 오래 되어 보이는 나무

 

성벽을 따라 걸으니 성의 또 다른 여러 모습도 보인다. 'Baluarte de Labrit'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이곳은 이 문이 건설된 이후에 붙여진 이름으로, 팜플로나에 수도를 두고 있던 나바라왕국의 마지막 군주 후안 드 라브리트가 1512년 7월 침략군이 들어오기도 전에이 문을 통해 도망쳤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Baluarte de Labrit'라는 표지판

 

 

성벽을 따라 한 바퀴를 돌고 시내 중심가의 여러 거리를 지나 다시 카스티요 광장을 거쳐 숙소로 돌아오니 숙소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음식을 해서 먹으며 먹기를 권한다. 특히 한국의 라면을 끓여서 주는 고마운 사람도 있어 맛있게 얻어먹었다. 처음 시내에서 라면을 무시했는데 외국에서 먹는 역시 우리 라면은 완전히 별미였다. 라면과 여러 음식으로 저녁을 먹고 이제는 내일을 위해서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시간이었다.

 

팜플로나 시내의 여러 모습

 

 잠자리에 들어 오늘을 돌이켜 보았다. 이제 까미노를 시작한  3일인데 숱한 일을 겪었고, 수많은 사람들을 만난 것 같다. 한발을 절고 있었던 아버지와 20살 정도 되어 보이던 캐나다의 부자로 아들이 아버지의 짐을 지고 가는 모습이 대견해 보였다. 그리고 무엇이 그렇게 즐거운지 웃고 이야기하면서 걷던 아주 생기발랄한 독일의 젊은 아가씨들, 그리고 많은 한국의 젊은이들, 모두가 무엇을 얻기 위해서 이 길을 걷고 있는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한 가지 말하고 넘어가야 할 일은 우리 일행 중에서 숙소를 찾지 못하여 약 5km 정도를 더 걸어갔다가 돌아온 사람들이 있었다. 팜플로나 대성당 옆이 숙소인데 지도를 잘못 보고 수말라카레기 문으로 들어오지 않고 바깥 길로 갔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가도 숙소가 나오지 않으니 연락을 하였기에 팜플로나 대성당을 찾아오라고 전하여 무사히 돌아왔다.

 

 숙소를 지도만 보여 줄 것이 아니라 좀 더 자세히 설명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일이었다.

 

스페인, 산티아고 까미노 길을 걷다. 3(05.19, 론세스바예스 - 수비리)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오늘의 길 : 론세스바예스 - 부르게테 - 헤렌디안인 - 에로고개 - 수비리

 

 오늘은 론세스바예스에서 수비리까지 약 22km의 길을 걸어야 한다. 아침 5시 경에 잠이 깨어 일어나니 바깥에 비가 오는 소리가 들린다. 걷는 도중에 비를 만나는 것은 썩 반가운 일은 아니지만 자연의 현상을 우리 인간이 어떻게 마음대로 바꿀 수 있으랴! 그저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받아들이면서 길을 걸어야 한다. 비가 온다고 멈출 수는 없는 일이다. 다행히 많은 비가 오는 것은 아니고 가랑비 정도라서 판초를 둘러 쓴 사람도 있고 비옷을 입은 사람도 있으나 나는 가볍게 파커 잠바를 걸치고 길을 떠났다.

 

아침에 다시 길을 떠나는 순례자들은 이 길에서 피레네 산맥의 정상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부드러운 평원의 단조로움과 고독감을 느끼는 구간이다. 길옆의 나무는 초록의 계절을 맞아 잎들이 무성하게 자라서 마치 터널을 지나는 느낌을 주며, 이런 풍경은 수비리를 향해 내려가는 동안 계속 이어진다. 아르가 강을 향해 내려가는 이 길 중간에는 메스키리츠 고개와 에로 고개를 넘어야 하지만 어제 피레네 산맥을 넘어온 순례자들에게는 그렇게 부담스러운 길이 아니다.

 

길을 떠나는 사람들의 모습

 

 알베르게 경내에 있는 까미노 표시를 따라 조금 내려가면 오래 된 성당이 보인다. 산타 마리아 왕립성당 남쪽, 산티아고 소성당 옆에 있는 샤를마뉴의 헛간(Silo de Carlomagno)으로도 불리는 성령의 소성당(Capilla del Sancti Spiritus)은 12세기 로마네스크 양식 건물로 론세스바예스에서 남아 있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롤랑이 두란다르테(Durandarte)로 내려친 바위 위에 지었다고 한다. 17세기 초반에 반원 아치의 현관문이 추가되었고 론세스바예스의 전투를 묘사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으나 현재는 소실되었다고 한다.

 

중간에 있는 건물이 성령의 소성당 (Capilla del Sancti Spiritus)

 

호스텔과 바, 레스토랑 건물

 

까미노 구간(수비리까지) 안내도

 

숲길을 지나면서 보는 풍경

 

 알베르게를 떠나 약 한 시간 정도를 걸으면 론세스바예스의 오래된 마을 부르게테가 나타난다. 부르게테에 도착한 순례자는 대부분 아침을 이곳에서 해결 한다. 모두들 아침도 먹지 않고 길을 떠났기에 첫 번째 마주치는 마을의 바에서 커피나 주스 그리고 빵으로 간단하게 아침을 먹는다. 여기서 무엇이라도 먹어야 길을 가기에 편한 이유다.

 

부르게테 마을 길

 

부르게테 마을의 바와 아침

 

바 주변에 있는 마을 안내도

 

16세기에 지은 부르게테 마을의 바리의 성 니콜라스 성당 (Iglesia de San Nicolás de Bari)

- 바로크 양삭의 정문이 아름답다.-

 

 부르게테는 순례자와 여행자들이 휴식을 취하기에 좋은 조용한 마을이다. 실제로 도시의 번잡함을 피해 머물렀던 유명한 작가들의 많다. 빅토르 위고(Victor Hugo), 구스타보 아돌포 베케르(Gustavo Adolfo Bécker), 어네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헤밍웨이는 팜플로나의 번잡함을 피해 이곳으로 와서 대표작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를 집필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부르게테는 작은 마을이지만 휴가를 즐기러 오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시설들이 모두 갖춰져 있다고 한다. 또한 부르게테의 거리에서 보는 오래된 집들의 현관문과 대문을 보고 있노라면 중세로 시간이동을 하는 것 같다.

 부르게테는 롤랑의 전설과 론세스바예스 전투가 있었던 장소이기도 하며, 이베리아 반도와 현재의 프랑스가 연결되는 나바라의 역사가 일어났던 곳이기도 한다.

 

  또 프랑스의 여러 영웅들이 스페인 원정 중 부르게떼를 거쳐 갔다. 또한 보르도(Burdeos)에서 아스토르가(Astorga)로 이르는 로마 가도, 나폴레옹의 길, 전설적인 묵시록의 길이 모두 부르게테를 지나간다.

 

  부르게테에서 간단히 요기를 한 순례자들은 다음 마을인 에스피날로 가기 위해서 까미노 길 표시를 따라가면 두 개의 조그만 시내를 지나고 넓은 농장 길을 지나게 된다. 에스피날은 피레네 산맥의 전형적인 마을로 1269년 나바라의 왕인 떼오발도 2세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에스피날을 가리키는 이정표

 

세요를 찍는다고 표시된 카페

 

멀리 보이는 에스피날 마을

 

 에스피날 마을을 옆에 두고 들르지 않고 옆으로 난 길을 계속 간다. 아침부터 오던 비는 계속 그쳤다가 오기를 반복하기에 우의 대신으로 입은 파커를 벗을 수가 없어 계속 입고 간다. 우리 일행 모두는 비가 오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무리를 지으면 길을 걷는다. 아직은 피곤함보다는 설렘에 더 기쁜 모양이다.

 

곳곳에 보이는 공동묘지

 

 에스피날을 지나고 비 오는 길을 계속 걸어 비스카렛 마을을 멀리 지나고  이름도 이상하게 들리는 에로계곡의 린소아인을 지나서 에로고개를 넘으면 수비리에 가깝게 다가선다.

 

 소로가인(Sorogain) 자연공원에서 가까운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비스카렛(Biscarret)은 과거에는 상당히 큰 마을이었으나 론세스바예스에 숙박 시설이 많이 생기고 나서는 순례자길로서의 역할이 줄어들고 인구도 점차 감소했다고 하는 아주 작은 마을이다. 비스카렛의 어원은 바스크어로 등이라는 뜻인 비스카르(Bizcar)에서 나온 것으로, 에스피날 언덕의 산등허리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린소아인은 에로 계곡 중앙에 위치하는 작은 마을이다. 린소아인은 아직도 목동들이 그들의 풍습을 지켜나가며 살고 있다고 하는데 볼 수가 없어 아쉬웠다. 중세에는 에로 계곡 위에 순례자를 위한 숙소가 있었다고 하며. 에로 골짜기에는 숟가락과 구두 틀을 만드는 마지막 장인들이 살았다고 한다. 린소아인은 론세스바예스 전투의 격전이 벌어졌던 곳 중 하나로 오늘날에도 에로 골짜기에서 롤랑의 발자국(Huella de Roldán)’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까미노 길 표시

 

에로 고개(4.3km)와 수비리(6.9km)를 가리키는 이정표

 

까미노 순례자의 추모판

 

푸드 트럭에서 쉬고 있는 순례자들

 

옛날의 집터

 

 100년은 넘어 보이는 소나무와 떡갈나무, 자작나무가 우거진 에로 고개에서 중세시대 순례자를 위협하는 도둑들의 보금자리였을 숲을 지나 언덕에서 포장도로를 가로지르면 벤타 델 푸에르토(Venta del Puerto)로 향하는 길로 접어든다. 이후 포르티요 데 아고레타 계곡의 뒤로 내리막은 심해지고 숲의 끝에 수비리가 보이기 시작한다. 이 내리막은 비가 많이 오면 엄청난 진창길로도 변하므로 피곤한 순례자에게 주의를 필요로 한다.

 

너덜지대의 내리막

 

수비리 마을 안내도

 

 드디어 수비리에 도착한다. 마을의 입구에는 우리나라의 큰 하천보다 작은 아르가 강(Río Arga)이 흐르고 있다. 수비리 입구에 까미노와의 경계에 있는 라 라비아(La Rabia)라는 중세 시대의 다리를 건너 마을의 알베르게에 가니 여주인이 아주 명랑하게 맞이한다. 이름이 마리아라는 여인은 한국인들을 아주 많이 접했는지 한국인들에게 아주 친절했다. 하루 종일 비를 맞으면 걸었기에 수비리 숙소 부근의 냇가에 가서 신발을 씻고 차가운 물에 발을 담그고 발의 열기를 식혔다.

 

 

수비리의 강인지 냇물인지?

 

수비리 마을 풍경

 

 수비리는 에스테리바르 계곡(Valle de Esteríbar)의 주요 도시로 나바라를 지나는 까미노 길에서 인구가 많은 도시이다. 수비리는 바스크어로 다리의 마을이라는 의미로 이 도시가 아르가 강(Río Arga)을 끼고 있기 때문에 예전부터 다리가 많아서 유래되었을 것이라고 추측되고 있다. 수비리 입구에는 까미노와의 경계에 라 라비아(La Rabia)라는 중세 시대의 다리가 있고 산 에스테반(San Esteban; 성 스테파노)에게 봉헌된 교구 성당이 있다. 또 수비리는 스페인이 낳은 위대한 철학자 하비에르 수비리(Xabier Zubiri)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다음 날 아침에 보는 수비리 마을 풍경

 

 수비리 마을에서 저녁을 먹으려고 식당을 찾아가니 인솔자가 추천한 식당은 이미 문을 닫았었다. 그래서 주변을 살펴보니 알베르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식당이 있어 내가 짧은 스페인어로 물으니 저녁 8시까지 영업을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나와 함께 움직이는 4명은 수비리 마을을 한 바퀴 빙 돌면서 구경을 하고 그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저녁을 먹고 같이 맥주를 한잔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에 폭우가 쏟아졌다. 숙소가 가까이 있었으나 비가 너무 심하게 와서 맥주잔을 앞에 놓고 여러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한 50이 되어 보이는 여인과 우리 일행이 대화를 하게 되었는데 일본인이라고 하면서 이름은 니코라고 하였다. 아주 순하게 생겼고 웃는 모습이 순수한 그 여인은 일행 중에 영어에 능통한 사람이 있어 주로 그와 이야기하고 우리는 듣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그 여인과 일행 중 한 사람만 남고 우리는 숙소로 돌아왔다. 까미노에서 온갖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정말로 생각되었다.

 

스페인, 산티아고 까미노 길을 걷다. 2(05.18, 생장 - 론세스바예스)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오늘 걷는 길 : 생장 - 온또 - 오리손  - 십자사 - 레푀데르 언덕 - 론세스바예스 

 까미노 프란세스(Camino Frances)의 출발점인 생장 피에드포르는 스페인 국경으로부터 약 8킬로미터 가량 떨어져 니브강(Nive)이 만나는 지점에 자리 잡고 있으며, 피레네를 건너 론세스바예스로 가기 직전의 마지막 구간으로, 전통적으로 산티아고 가는 길의 순례자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마을이다.

 생장 피에드포르는 산티아고 가는 길을 열어준 마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생장 피에드포르를 통과해 피레네를 넘는 길은 과거 로마시대부터 시작하여 나폴레옹의 군대 등등 모두에게 역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피에드포르(Pied de Port)라는 말은 피레네지방의 방언으로 통로의 발치라는 말이라고 한다.

 

 생장 피에드포르는 원래 사자왕 리차드에 의해 세워진 세장르비유(St. Jean le Vieux)에서 시작되었으며 이후 나바르의 왕에 의해서 현재의 위치에 새롭게 만들어졌다. 생장 피에드포르는 12세기 말 이후에 건설된 뒤 나바라 왕국 북 피레네의 중심 도시가 되었다. 론세스바예스에서 피레네 산맥을 가로지르는 핵심 포인트인 시세 언덕(Col de Cize)의 자락에 있는 생장 피에드포르는 이 도시를 산티아고 데 꼼포스텔라로 향하는 순례길의 핵심 경유지로 만들었다.

 

 프랑크 왕조가 남겨놓은 많지 않은 유물 가운데, 론세스바예스와 생장 피에드포르에는 778년 롤랑과 샤를마뉴의 군대가 남긴 역사적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또한 우루쿠루로 가는 길에서는 샤토 피그뇽(Château Pignon)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것은 1512년 나바라의 정복자였던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 지어진 방어 성곽으로 나폴레옹 전쟁 당시 파괴되었으나, 현재까지도 피레네 산맥을 넘는 순례자들을 지켜보고 있다.

 

 까미노의 본격적인 첫 시작은 생장에서 아침에 잠을 깨면서 시작되었다. 일어나 밖으로 나가니 한국의 여자 둘이서 같은 숙소에 머무르고 있었다면서 인사를 하였다. 보기에 자매 같아서 이야기를 하니 모녀간이라는 대답을 하여 엄마가 너무 젊게 보인다고 말했다. 그들은 개인으로 와서 배낭을 동키서비스로 보내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우리 일행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여하튼 그 모녀와는 일정이 같아 산티아고까지 같은 여정으로 걸으면서 거의 매일을 만났고 산티아고에도 같은 날에 도착했다.

 어제 늦게 도착하여 크렌디시알도 받지 못하였기에 크렌디시알을 발급하는 사무소가 문을 여는 시간까지 여유가 있어 생장의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생장 피에드포르의 문장

 여기서 먼저 생장 피에드포르의 문장(紋章)을 간단하게 소개해 본다.

 생장 피에드포르의 문장(紋章)은 마을의 역사를 대표하는 다양한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수호성인 세례자 요한의 왼손에는 이름이 적혀진 깃발이, 발아래에는 어린양이 잠들어 있고, 세례자 요한의 오른손은 생장성을 가리키고 있고, 체인 뭉치가 중심의 에메럴드를 둘러싸고 있는 나바라 왕국의 문장이 성의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다.

 

 숙소에서 나와서 스페인거리를 걸어가니 조그마한 강이 나오고 다리를 건너게 한다.

 

 니브(Nive) 강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정확히는 니브 강의 조그마한 지류로 생장 피에드포르(Saint Jean Pied de Port)에 있는 니브드베에로비(Nive de Béhérobie) 강이다.

 니브 강은 프랑스에 있는 강으로 아두르 강(Adour R.)의 왼쪽 지류이다.  생장 피에드포르(Sain  Jean Pied de Port)에 있는 니브드베에로비(Nive de Béhérobie) 강, 로리바(Laurhibar) 강, 니브다르네귀(Nive d’Arnéguy) 강 3개의 작은 강이 합쳐지는 지점에 있다. 프랑스령 바스크(Basque)를 가로질러 흘러 여러 마을을 지나 바욘(Bayonne) 마을에서 아두르 강으로 흘러든다.

 

생장 피에드포르(Saint-Jean-Pied-de-Port)에 있는 니브드베에로비강(Nive de Béhérobie) 주변 풍경

 

 이 다리 입구에 있는 노틀담 문(Notre-Dame Gate)을 지나면 노틀담 뒤퐁 성당이 나온다. 1212년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Las Navas de Tolosa) 전투에서 무어인을 격퇴한 기념으로 나바라의 왕, 산초 엘 푸에르테에게 헌정된 것으로 13세기 초반 건물 원형이 남아있는 성모승천 성당으로, 바스크 지역에서 바욘 대성당과 함께 남아 있는 대표적인 고딕 양식 건축물이다. 장엄한 분홍빛의 사암 파사드는 조각된 기둥과 기둥머리의 고딕 문을 더욱 특색 있게 보여준다. 아쉽게도 이른 시간이라 문을 열어 놓지 않아 내부를 구경하지 못하고 외부만 조금 보고 지나쳤다.

 

노틀담 뒤퐁 성당 (Notre-Dame-du-Bout-du-Pont)

 

 성당 앞을 지나 위로 난 작은 언덕길이 시따델르(Rue de la Citadelle) 거리이다. 생장 피에드포르를 방문한 순례자들이라면 꼭 사진에 담는 오르막길을 따라 집들이 모여 있는, 요새도시라는 이름에 걸맞은 거리로 돌출형 바닥, 목재 건물, 조각된 기둥을 이용한 처마는 이 거리 가옥들의 건축적 특징이다. 상인방에는 암시적인 명문이 음각되어 있으며 기하학적 디자인이나 종교적 상징들로 장식되어 있다.

 이 길을 따라 순례자 사무실로 올라간다. 순례자 사무실로 올라가는 길 양쪽에는 아르캉 졸라 저택과 라라뷔레 저택 등등의 오래된 집들이 보이지만 이른 시간이라 그냥 지나쳤다.

 

순례자 사무실 가는 시타델르(Rue de la Citadelle) 길

 

안내지도

 

순례자 사무소( 메종 라보르드)

 

 산티아고 순례자 사무소 가옥은 다비드 드 푸레(David de Fourré)에 의해 18세기 초반에 루이 14세 풍의 도시형 저택으로 지어졌다. 1950년부터 생장시 시청사로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

 순례자 사무실도 아직 시간이 되지 않아 문을 열지 않고 있었다. 무료하게 기다리면서 그 길을 따라 올라가니 주교의 감옥이라는 건물이 나온다.

 

주교의 감옥

 

 메종 라보르드(순례자 사무실)에서 정원으로 구분되어 떨어져 있는 주교의 감옥(La prison des Evêques)은 이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 중 하나로, 그 이름은 매우 흥미로운 두 가지 역사적 사실을 동시에 연상시킨다. 하나는 교황 분열기(14세기 후반~15세기 초반)에 주교좌 도시로서의 역할을 찾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최소 18세기 말까지도 유명한 감옥으로서의 역할이다.

 현재 위치해 있는 건물은  조각돌로 조각된 입구는 초소를 향해 나있으며 곧장 감방으로 이어진다. 옛날의 감방은 좁은 계단을 지나 지하의 거대한 갈비뼈 모양의 방으로 연결되는데, 지금은 이곳에서 산티아고 순례자에 관련된 자료가 전시되고 있다.

 

 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야고보의 문 (Porte de Saint-Jacque)이 나온다. 199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이 문은 순례자들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전통적인 출입구이다. 전통적으로 프랑스인들은 이 문을 통과해 론세스바예스로 향했다고 한다.

 

야고보의 문

 

 야고브의 문에서 좀더 올라가면 생장 피에드포르 성이 나오는데 시간이 없어 그 성을 구경하지는 못하고 순례자 사무소가 문을 열어 들어가서 크렌데시알을 받고 가리비껍질을 받아 배낭에 묶고 길을 떠날 준비를 하였다. 전날에 이 과정을 모두 종료했어야 하는데 기차를 놓쳐 생장에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일정이 조금 지체되었다. 하여튼 까미노를 걸을 준비를 하고 까미노의 출발점으로 표시된 곳으로 갔다.

 

 

까미노 출발점

 

 까미노 출발점에서 사람들은 까미노의 시작을 기념하여 신발을 신은 모습을 사진을 찍는다. 함께 걸을 우리 무리 21명도 삼삼오오 모여서 발을 내밀고 사진을 찍었다.

 우리의 오늘 여정은 프랑스의 생장 피에드포르를 출발하여 시세언덕을 지나며 시련과 축복의 땅인 피레네의 산맥의 품에서 국경을 넘어 스페인의 론세스바예스에 도착하는 제법 긴 길이다. 이 길에서 순례자는, 해발 146m의 생장 피에드포르에서 해발 952m의 론세스바예스로 가기 위해서 해발 약 1450m 정도의 피레네 산맥을 넘어야 한다. 다소 힘든 구간이지만 이 구간은 피레네 산맥의 완만한 경사면이 남북으로 경계를 이루며 길게 이어져 그렇게 힘들지는 않다. 오히려 피레네 산맥의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면서 여유롭게 걸을 수 있기에 기나 긴 까미노 길에서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구간이라 할 수 있다.

 

스페인 거리에서 까미노를 시작하는 모습

 

 까미노 출발점에서 다시 다리를 건너 스페인 거리를 걸어 스페인 문을 지나서 본격적인 까미노를 시작한다. 스페인 거리(Rue d’Espagne)의 집들은 상인방에 집 주인의 직업이나 거래품목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현재도 9번지에는 밀 가격이 주요 이슈였던 1789년의 높은 밀 가격의 기록이 남겨져 있다고 한다.

크렌데시알을 발급받느라 출발 시간으로는 조금 늦었기에 다른 까미노의 무리들은 보이지 않고 우리 무리만이 길을 재촉하였다. 

 

스페인문

 

까미노 길 표시

 

나뭇잎 위의 달팽이들

 

론세스바예스로 가는 루트 안내도

 

 생장 피에드포르에서 나와서. 그 후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산티아고 가는 길(Chemin de Saint Jacques)라고 표시되어 있는 길을 따라 걸으면 된다. 첫 번째 목적지인 오리손으로 가기 위해서 순례자는 시세 언덕길로 코스를 잡아야 한다.

 피레네 산맥을 넘는 길은 보통 두 가지 길이 있다. 첫째는 도보 순례자들이 지나는 일반적인 길인 시세 언덕길(Ruta de los Puertos de Cize), 이 길은 걸으면 웅장한 피레네 산맥의 풍광이 길을 따라 아름답게 펼쳐지는 장관을 즐길 수 있지만 이 길을  지나기 위해서는 해발 1410m의 레푀데르 언덕(Col de Lepoeder)을 넘어야 한다.

 둘째 길은 자전거 순례자들이 주로 이용하는 길인 발카를로스 길(Via Valcarlos)이다. 이 길은 시세 언덕길보다는 조금 긴 길로 순례자들은 이 길은 조금 편하지만 경치가 조금 부족하다고 말하지만 이 길도 피레네 산맥의 아름다운 계곡을 즐기기에는 충분하다고 한다. 아름다운 샤를마뉴의 계곡(Valle de Carlomagno)을 지나게 되며 해발 1,057m의 프에르토 데 이바녜타(Puerto de Ibañeta)를 넘어야 한다.

 

길을 걷기 시작하는 순례자들

 

온토 알베르게

 

 생장을 벗어나 서로가 기쁜 마음으로 즐겁게 무리를 지어 이야기를 하면서 조금 걸으면 왼쪽으로 휴게소를 가진 알베르게가 나타난다. 온또 알베르게다. 아직은 걷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기에 모두들 그냥 무심하게 지나간다. 이곳을 지나면서 이제 피레네산맥으로 들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어렵지 않은 산길을 걸어가면서 보는 풍경은 가슴을 확 트이게 한다. 우리나라의 하늘은 우중충하다. 맑은 날이라고 해도 그렇게 깨끗하지 않다. 그런데 피레네의 하늘은 너무 푸르고, 산위에 펼쳐지는 넓은 벌판에는 소들과 말들이 뛰어 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전혀 상상하지 못한 풍경이다.

 

멀리 보이는 피레네의 여러 모습

 

피레네산맥에 있는 오리손을 가리키는 이정표

 

 오리손으로 가는 시세 언덕길은 처음 이로우에야 (Irouleya)를 향해서 오르는 가파른 비탈길로 시작한다. 이후 한 폭의 그림이 언덕에 펼쳐지며 에뜨체베스떼아(Etchebestea)와 에레꿀루스(Erreculus) 사이에 있는 밤나무 숲에서부터 온또로 향하는 포장된 가파른 오르막길이 나온다. 온또를 지나 조금 가면 왼쪽으로 좁은 산길이 나온다. 그대로 직진을 하면 포장도로와 산길은 서로 만나게 되는데 왼쪽의 산길이 지름길이다. 길은 조금 경사가 있으나 피레네 산맥 특유의 완만한 구릉이 주는 부드러움이 마음을 포근하게 해 준다. 조금 걸으면 목초 사이로 부드럽게 아스팔트길이 나타나고 순례자는 오리손에 도착한다. 해발 792m의 오리손은 옛날에 론세스바예스의 부속 수도원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오리손 가는 길에서 보는 피레네산맥의 여러 모습

 

오리손의 카페

 

 오리손의 카페에 도착하니 길을 걸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다양한 국가의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어디에서 그 많은 사람들이 나타난 것인지가 의문이 들 정도였다. 모두들 산길을 걸어 왔기에 잠시 휴식을 취하며 시원한 음료를 마시면서 주위에 펼쳐지는 피레네의 아름다움에 경탄하고 있었다. 내가 우리 일행 중에서는 비교적 빨리 도착했기에 함께 걷고 있는 내보다 나이가 좀 적게 보이는 우리 일행 다섯에게 맥주를 한잔씩 사서 주니 모두들 고마워하며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조그마한 친절이라도 베풀 수 있는 행동이 내가 이 길을 걸으면서 가져야 되는 태도로 인식되었다. 이 한 잔의 맥주가 계기가 되어 이 까미노가 끝날 때까지 4명이 함께 모여 길을 걷고 저녁을 먹고 술도 한잔씩 하면서 즐긴 것도 큰 인연이었다.

 이 이야기는 앞으로도 계속 나올 것이다.

 

순례자들의 소망이 모인 돌무더기

 

숨맛히게 아름다운 피레네산맥의 여러 모습과 길걷는 사람들

 

 오리손 카페를 지나 언덕을 오르면서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면 저 멀리에 환상적으로 펼쳐지는 풍경에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게 된다. 좌우를 돌아보면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이 눈에 들어와 황홀하게까지 느껴진다. 그 황홀한 풍경을 가슴에 담으면서 4Km 정도 올라가면 목장이 있는 아름다운 언덕에 도달하게 된다. 왼쪽으로 눈을 돌리면 바위 위에 알록달록하게 꾸민 비아코레 성모자상이 보인다. 피레네 산맥의 가장 깊은 품 안에서 아름다운 광경을 만끽 하며 걷다가 뜻밖의 성모자상을 발견하는 수많은 순례자들은 성모자상을 바라보며 자신과 함께 이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의 여정이 안전하고 평안하기를 기원한다.

 

비아코레 성모자상

 

고원에 펼쳐지는 길

 

 계속해서 따라가며 나오는 고원에 펼쳐지는 이 길을 나폴레옹 길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전략적 요구에 따라서 1807년 나폴레옹의 부대가 이베리아 반도를 침공할 당시 이 루트를 이용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다음에 아스팔트길이 이어지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샛길이 오른쪽으로 나온다. 여기서 약 2Km 정도 직진하면 아스팔트길이 사라지고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으로 이어지는 작지만 위압적인 모습의 언덕이 나타난다. 여기서 계속 가면 마침내 까미노는 스페인으로 들어가게 된다. 산티아고까지 가는 길은 이제부터 시작인 것이다.

 

티바울트 십자가상

 

벤 따르페아(Col de Bentartea) 언덕 표시

 

추모의 돌 무더기

 

사랑했던 사람에게 보내는 추모의 글

 

 길은 해발 1,344m의 벤따르떼아 언덕(Collado de Bentartea)를 지나 국경을 통과하기 이전에 까미노의 최초의 표지석(산티아고 765km)이 나온다. 그런데 아쉽게도 내 사진 철을 아무리 찾아도 이 사진이 보이지 않는다.내가 찍지 아니하지는 않았을 것인데..... 그리고 롤랑의 샘을 만나게 된다. 오리손을 지난 후에는 롤랑의 샘 이외에는 마실 물을 구할 수 없고, 이 샘도 갈수기에는 말라 버릴 때도 있다. 하지만 이곳은 이제 낭만적인 샘이 아니라 단지 수도꼭지를 달아 놓은 멋없는 시설물이다. 그러나 해발1378m에 있는 샘의 수도다.

 

롤랑의 샘

 

 

 

 롤랑의 샘을 지나 조금 가면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이 나온다. 국경이라고 하지만 별다른 표시가 없다. 그저 산 언덕길에 나무 문을 달아 놓고 철판을 깔아 놓았다. 그리고 조금 지나면 스페인 나바라주라는 표시가 나타날 뿐이다. 국경을 넘어가는데 아무런 인증도 없고 국경을 지키는 사람도 없다. 

 

프랑스 - 스페인 국경

 

산티아고 표석(스페인 나바라주 표시)

 

 순례자의 앞에 계속 이어지는 숲길을 지나게 되면 마침내 이 날의 가장 높은 시세 언덕길의 정상 지점인 레푀데르 언덕(Collado de Lepoeder)에 도착하게 된다.

 시세 언덕길의 정상을 지나면 왼쪽으로 난 급한 경사 길과 오른쪽으로 조금 완만한 경사 길을 만난다. 왼쪽으로 이어지는 급한 경사로는 지름길이기는 하나 경사가 심하고 너덜지대가 많아서 부상의 위험이 많은 길이니 가급적 오른쪽 길을 권한다. 내가 걸은 날은 비가 오기도 하여 너덜지대의 돌길이 매우 미끄러웠다. 하지만 스틱도 집지 않고 그냥 길을 내려가면서 돌을 밟았는데 그만 미끄러졌다. 같이 가던 일행이 깜짝 놀랐으나 다행히 큰 부상은 입지 않았고 단순하게 약간의 타박상 정도를 입었다. 숙소에 도착하니 나 이외에도 미끄러졌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너덜지대고 비가 온 뒤라 아주 조심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하지만 이 것을 계기로 경각심을 가지게 된 것도 큰 소득이었다.

 

위태로운 급경사 길 

 

 급경사의 너덜지대를 지나면 이바녜따 언덕에서 목적지인 론세스바예스까지는 편안한 내리막이 계속 이어진다. 어느 새 론세스바예스의 안내판이 보이기 시작하고 냇물을 건너니 오늘의 숙소인 수도원이 보인다. 수도원의 깨끗한 건물에 들어가기에는 우리 신이 너무 흙탕물에 더렵혀져 있었다. 그래서 냇물에 신을 깨끗이 씻고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론세스바예스 안내도

 

수도원 가는 길의 냇물

 

 론세스바예스를 얘기할 때는 유명한 서사시 롤랑의 노래'(La Chancon de Roland)를 뺄 수 없다. 이 작품은 기사의 영웅적인 행위를 예찬하기 위해 써진 서사시이다. 작자는 분명하지 않으며, 성립 연대는 1098년부터 1100년 사이인 것으로 추정되고, 12세기 후반의 옥스퍼드 고사본(古寫本)에 실제 노래로 불리던 이 시의 순수한 모습이 전해지고 있다.

 

 롤랑은 프랑크 왕국의 황제 샤를마뉴의 조카이자 성 기사 중에서 가장 용맹하고 뛰어난 기사였다. 샤를마뉴는 자신이 아끼는 보검 두란다르트(Durandart)를 하사하였는데 이 검은 산을 쪼갤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졌다고 한다.

 그 내용은 778815일 에스파냐 원정에서 돌아오던 길에서 롤랑이 지휘하던 샤를마뉴 대제(大帝)의 후위부대가 피레네 산속 롱스포에서 바스크인()의 기습으로 전멸한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

롤랑은 왕의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전설의 뿔 나팔 올리판테(Olifante)를 불지 않았고, 롤랑은 죽는 순간 성 베드로의 치아가 포함된 자신의 칼 두란다르트를 파괴하기 위해서 커다란 바위에 내리쳤는데 바위만 갈라지고 칼은 멀쩡했다고 한다.

 뒤늦게 알게 된 샤를마뉴는 죽은 병사들을 위한 그리스도교 식 무덤을 마련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아군과 적군을 구분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모두 함께 매장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하지만 적군과 아군을 함께 매장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샤를마뉴는 그들을 구분할 수 있는 증표를 달라고 기도를 했다고 한다. 그러자 조금 뒤 병사들이 달려와서 입에서 장미가 피어나는 시체가 있다고 전했다고 한다. 이에 샤를마뉴는 이들을 분리해서 그리스도교 무덤에 매장했다. 이것이 로시스 바예(Rosis Valle; 장미의 계곡) 즉 론세스바예스라는 지명의 기원이라고 한다.

 

 그 외에도 론세스바예스는 롤랑의 노래와 관련된 것으로 넘쳐난다.

 

알베르게로 사용되는 수도원의 외부 모습

 

 

 

외부에서 보는 산타 마리아 왕립 성당의 모습

 

안에서 보는 산타 마리아 왕립 성당의 모습

 

 론세스바예스의 알베르게 지구 안에 있는고딕 양식의 산타 마리아 왕립 성당 (Real Colegiata de Santa María)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고딕 양식으로 건축된 초기의 건물로 이곳에는 아름다운 고딕식 성모 마리아 조각이 보관돼 있다. 아름다운 성직자 회의실엔 산초 7세의 고딕 양식 무덤이 있고 라스 나바스 데 똘로사(Las Navas de Tolosa)의 전투에서 얻은 전리품 일부도 있다. 회랑은 17세기 양식이다. 현재의 성당 건물은 원래의 건물 자리에 13세기에 재건축된 것이다. 원래의 건물은 로마네스크 양식 성당이었다. 아름다운 고딕 회랑과 회의실, 다른 부속 건물 등이 있으나 세월의 무게 때문에 부분적으로 무너졌다. 1445년에 화재가 일어나 성당 건물이 훼손되었으며 1600년에는 지붕에 내려앉은 눈의 무게 때문에 남쪽 회랑과 성전의 지하층이 무너졌다. 따라서 1615년 건축가 돈 후안 데 아라네기에 의해 재건되었다. 하지만 늦은 시간이라 내부를 구경할 수 없었던 것이 매우 안타까웠다.

 

 그 외에도 샤를마뉴의 헛간(Silo de Carlomagno) 으로도 불리는 성령의 소성당 (Capilla del Sancti Spiritus), 론세스바예스 박물관으로도 불리는 성당 박물관 (Museo de la Colegiata), 산 아구스띤 소성당 (Capilla San Agustín), 산 살바도르 데 이바녜따 소성당 (Capilla San Salvador de Ibañeta) 등등이 있었으나 첫날이라 다소 정신이 없이 보내느라 제대로 구경도 못하고 그냥 눈으로 보고 지나쳤다. 

 

 이 모든 것을 제대로 구경하려면 엄청나게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나는 관광객이 아니라 길을 걷는 것을 주 목적으로 하는 순례자이다. 아쉬움은 다음을 기약할 뿐이다.

 

알베르게 표시

 

성당의 첨탑 

 

수도원 내부의 뜰에 있는 조형물

 

 론세스바예스의 숙소는 과거에 수도원으로 사용되었던 국립알베르게로 철저하게 도착한 순서에 맞추어 숙소를 배정하였다. 비교적 시설은 깨끗하고 좋았으나 운영이 좀 아쉽게 생각되었다. 숙소에서 제법 땀을 흘렸고 비도 맞았으므로 샤워를 하고 저녁을 먹으려고 식당을 찾아갔으나 식당이 운영을 하지 않아 곤란했다. 별다른 슈퍼도 없고 하여 간단하게 매점 비슷한 곳에서 먹거리를 장만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같이 길을 걷는 사람들의 너그러운 마음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비교적 먹거리를 많이 가져온 사람들이 스스럼없이 자기의 배낭을 열어 다른 사람이 먹을 수 있게 나누어 주었다. 모두들 꺼내 놓은 음식을 다양하게 조리를 해서  함께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까미노의 원래 정신에 부합한다는 것을 여실히 깨닫게 해 주는 저녁이었다.

 

 숙소는 옛날에 큰 수도원을 리모델링한 것으로 바깥에 나가면 많은 볼만한 건물이 있었으나 저녁을 해결하기에 바빠서 그럴 겨를이 없었다는 것이 돌아온 지금도 너무 아쉽다.

 

 저녁을 먹고 하루를 정리하고 잠자리에 든다. 오늘의 노고는 잠시 접어두고 내일을 대비해야 한다. 내일은 오늘과 또 다른 풍경과 이야기가 내 앞에 나타날 것이다.

스페인, 산티아고 까미노 길을 걷다. 1(프롤로그 : 생장에 도착)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뷰엔 까미노(Buen camino)!

 뷰엔 까미노(Buen camino)의 원래 뜻은 '좋은 여행 되세요.'이지만 산티아고 순례길을 상징하는 용어가 되어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하는 보편적인 인사로,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은 하루에도 수십 번을 이 인사를 하고 받는다.

 

 내가 까미노에 관심을 가지고 내 여행의 버킷 리스트에 올린 지는 벌써 오래 되었다. 그러다가 실제로 실행을 하려고 떠날 준비를 하면서 여러 가지를 알아가고 있을 때 느닷없이 코로나가 전 세계를 강타하여 강제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코로나가 끝나고도 여러 가지 사정으로 차일피일하다가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생각에 2024년에는 꼭 떠나기로 마음을 먹고 2023년부터 마음의 준비와 여러 준비를 하였다. 더구나 함께 여행을 많이 한 아들이. 작년에 이 길을 걸었으므로 나도 이 길을 걷고 싶은 욕망이 끓어올랐다.

 

 그러면서도 가끔은 회의가 들곤 하였다. 까미노는 과연 무엇이며, 왜 나는 이 길을 걸으려고 하는가? 무엇을 얻기 위해서 이 길을 걷는가? 등등의 의심이 들었다. 누군가는 말하기를 까미노 길은 '나를 찾아 가는 길'이라 하였고,'용서의 길'이라고도 하였다. 이제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훨씬 적은 나이에 무엇을 찾겠다고 내가 이 길을 걸어야 하는가? 무엇을 얻겠다는 것 자체가 헛된 욕심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를 아는 친구들은 한국의 '코리아 둘레길'을 걷는 나에게도 왜 길을 걷느냐?는 의문을 끊임없이 제기했는데 까미노를 걷겠다는 이야기를 하자 대부분은 의아해 하였다. 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면서 무언가에 이끌려서 제대로 된 이유도 찾지 못하면서 하는 일도 있지 않은가. 나는 이 길을 그냥 걷고 싶을 뿐이었다. 이 까미노를 끝내는 날에 무언가를 얻을 수가 있다면  그것 또한 나에게 주어지는 축복이고, 아무 것도 얻지 못하면 그냥 즐겁게 여행을 한 것도 보람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나는 떠나기로 하였다.

 

 떠나기로 결정하고 작년에 다녀온 아들에게 이야기를 하니, 혼자서 길을 걸은 아들이 나에게 당부하기를 아버지는 나이가 많아 숙소잡기가 쉽지 않으니 숙소를 잡아주는 여행사의 상품을 택하여 가는 것이 좋다는 조언하여 2월에 여러 여행사에 문의를 하여 검토를 한 뒤에 나에게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까미노를 전문으로 하는  '까미노여행사'에 예약을 하고 떠날 날을 기다리며 여러 가지를 준비하였다. 준비 중에는 여행에서 사용되는 간단한 스페인어와 숫자를 익히고 가라는 아들의 말을 참고하여 매일 글자는 모르면서 스페인어를 익혔는데 결과적으로는 큰 도움이 되었다.

 

 준비가 끝나고 5월 16일에 인천공항에서 북경을 거쳐 프랑스 파리로 가는 비행기에 탑승하면서 이 여정은 시작되었다. 먼저 인천에서 북경으로 가서 환승하여 파리로 가는데 북경에서 환승하는 방법은 상당히 불편했다. 내가 많이는 아니라도 여러 곳에서 환승을 해 보았는데 중국은 환승객에게도 짐 검사를 다시 하는 이상한 방법을 실시하고 있었다. 다른 공항에서 환승을 할 때는 그냥 환승 통로를 따라 가서 대기하다가 환승하는 비행기를 타면 되었는데 중국은 완전히 입국하는 형태를 취하여 중국에서는 처음 환승하는 나에게는 너무 낯선 풍경이었다.

 

 오랜 비행 끝에 파리 공항에 도착하여 몽파르나스역에서 생장으로 가는 기차를 타려고 몽파르나스역으로 가는 도중에 길이 막혀서 시간을 맞추지 못해서 열차는 이미 출발하고 없었다. 여행사의 인솔자가 미안해하면서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역에 호소한 결과 다음 차를 탈 수가 있었는데 좌석이 없어 입석을 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것도 까미노가 우리에게 주는 첫 시련이라고 생각하였다. 기차는 인솔자가 역관계자들에게 여러 사정을 이야기하고 노력한 덕분에 해결된 것으로 지금도 고맙게 생각한다.

 

파리 드골공항의 여러 풍경

 

 몽파르나스역에 도착하여 생장으로 가는 열차가 언제 있을지를 몰라 역에서 대기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며 바쁘게 오고가는 사람들이 많은 역에서 여러 곳을 구경하다가 밖으로도 나가서 파리의 한 부분을 보고도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화장실 사용이었다. 화장실을 찾으니 이 큰 역에 화장실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겨우 찾은 화장실은 사용료를 1유로(약 1,500워)를 내어야 하였다. 너무 어의가 없어 의아했다. 공식적인 역의 시설인 화장실에 사용료를 받는다는 것은 우리 입장에서는 이해기 전혀 되지 않는 일이었다. 예전에 중국을 여행하다가 프랑스 여자를 만나 중국의 여러 가지 불편함을 이야기하다가 한국에서는 화장실 사용 등등은 모두 프리라고 말하니 놀라던 기억이 났다. 

 

몽파르나스역과 주변 풍경

 

 우여곡절 끝에 열차를 타고 먼저 바욘으로 가서 생장으로 가는 기차를 갈아타야 했다. 기차를 타고 가면서 여행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의 설렘은 여기서도 잘 나타났다. 좌석이 아니고 입석이라 통로에 쭈그리고 앉고서고 하면서도 전혀 불편함이 없이 떠들고 농담을 주고받으며 이야기하고 창밖으로 보이는 푸른 하늘에 감탄하면서 즐거워했다.

 

생장으로 가는 열차 안 풍경

 

 늦은 시간에 생장역에 도착하여 생장을 구경을 못하고 숙소를 찾아서 거리를 걸어갔다. 가는 도중에 까미노를 걷는 순례자의 모습과는 조금 거리가 먼 젊은이가 함께 길을 갔다. 호기심에 어디서 왔는지를 물어보니 남미의 파라과이에서 왔다고 하였는데 이름은 리하르트라고 했다. 산티아고를 간다고 하였는데 산티아고까지 걷는 도중에 한 번도 본 일이 없었던 젊은이였다. 거리에는 공사 중이라는 표시가 여러 곳 보였고 사람들의 통행은 드물어 한적하게 보이는 동네 같았지만 이곳은 까미노를 시작하는 곳이다.

 

생장의 모습

 

 생장에 도착하여 숙소를 찾아가니 비교적 늦은 시간이었다. 몽파르나스역에서 기차를 놓쳤기 때문에 인솔자는 매우 미안해하면서 여행사에서 사죄의 뜻으로 오늘 저녁의 식사 경비를 모두 부담하겠으니 많이들 드시라면서 미리 음식을 준비시켜 놓아서 맛있게 배불리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지금도 여행사의 현명한 처사에 감사한다.

 

 밥을 먹고는 내일의 첫 까미노 여정을 위해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스페인, 산티아고 까미노 길을 걷다 - 까미노란?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까미노를 가기 전에

 

 내가 까미노에 관심을 가지고 내 여행의 버킷 리스트에 올린 지는 벌써 오래 되었다. 그러다가 실제로 실행을 하려고 떠날 준비를 하면서 여러 가지 사항을 알아가고 있을 때 느닷없이 코로나가 전 세계를 강타하여 강제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코로나가 끝나고도 여러 가지 사정으로 차일피일하다가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생각에 2024년에는 꼭 떠나기로 마음을 먹고 2023년부터 마음의 준비와 여러 준비를 하였다.

 

 그런데 까미노란 과연 무엇이고, 사람들은 왜 그 길을 걷고, 무엇을 얻는 것일까? 까미노에 대한 일반적인 상식을 잠시 고찰해 보고 나의 까미노 여정을 이어가기로 한다.

 

 인간은 누구나 길을 떠나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가벼운 짐을 꾸린 뒤 세상사를 모두 잊고 훌쩍 떠나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길을 걸으며 자신을 돌이켜 보는 상상을 누구든지 한번쯤은 해 보았을 것이다. 최근에는 국내에도 걷는 길이 많이 개척되고, 좋은 코스도 많아 사람들은 국내의 길을 많이 걷는다. 하지만 그 중 가장 유명한 길인 까미노라는 세 글자만 들어도 가슴이 벅차오름을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용기다. 프랑스의 생장 피에드포르에서 시작해 피레네산맥을 넘고 나바라와 라 리오하 지방, 메세타, 칸타브리아 산맥을 돌아 성 야고보의 무덤이 있는 산티아고로 이어지는 약 800km, 약 40일간의 길이다. 그런데 까미노는 무엇이고 어떻게 가는 것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막연하게는 알지만 자세히는 모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저 막연하게 남이 산티아고 까미노를 걷는다고 하니 나도 까미노 길을 걸어야지.’하는 동경을 가지고 떠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부르는 산티아고'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지칭하는 곳으로 산티아고(Santiago)는 야고보를 칭하는 스페인식 이름이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별빛 들판의 성 야고보'라는 뜻으로 Compostela라는 단어는 라틴어 Campus Stellae의 변형으로, 이 이름은 신의 계시를 받은 사람이 별빛이 비추는 들판을 따라 걸어 야고보의 시신을 발견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스페인에서는 야고보가 이베리아 반도에 와서 선교하였고, 그의 시신이 스페인으로 다시 옮겨져 매장되었다고 전해지기 때문에 예수의 12제자 중에서 야고보가 가장 존경을 받고 있다.그래서 지금도 그가 묻혔다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종교적인 성지로 칭송받고 있다.

 

까미노의 여러 루트를 보여 주는 지도

 

 까미노는 원래 종교적인 의미로 순례자의 길이다. 야고보의 무덤이 있는 스페인 북서쪽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길에는 여러 코스가 있고 지금도 많은 코스가 새로 만들어지고 있다. 심지어 유럽 사람들은 자기 집에서 떠나는 그 길을 하나의 코스로 인식한다고도 한다. 그 수많은 코스 가운데 순례자의 약 70%가 선택하는 길은 프랑스 길이라고 한다. 보통 많은 순례자들이 프랑스 루트 즉, 까미노 프란세스(Camino Frances)를 걷는다. 그리고 까미노 프란세스 중에서도 가장 일반적인 프랑스의 국경마을 생장 피에드포르(St Jean Pied de Port)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la)까지 걷는 것을 까미노 프란세스를 완주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어떤 순례자들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산티아고 데 꼼포스텔라에서 무시아(Muxía)와 피스떼라(Fisterra)까지 연장해서 대서양의 노을을 바라보면 앞으로 인생의 까미노를 다시 계획하기도 한다. 또 일주일 정도밖에 시간이 없다면 그 길을 레온에서 시작해 사리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약 115km 구간을 걷는 방법도 있으며 그 과정을 걸어도 인증을 해 준다고도 한다. 그래서 사리아부터는 순례자의 숫자가 크게 늘어나기도 한다.

 

크렌디시알에 표시된 까미노 프란세스 노선도

 

두번째 크렌디시알에 표시된 노선도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이 목적지로 하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9세기경에 성 야고보의 유해가 발견되고, 성 야고보를 스페인의 수호성인으로 삼으면서 야고보의 길을 따라 걸으려는 순례자들이 생겨났었다. 그러다가 1189년 교황 알렉산더 3세는 예루살렘, 로마와 함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성스러운 도시로 선포했는데 교황의 칙령에 따라 성스러운 해(산티아고의 축일인 725일이 일요일이 되는 해)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하는 순례자는 그간 지은 죄를 모두 속죄 받고, 다른 해에 도착한 순례자는 지은 죄의 절반을 속죄 받는다고 한다.

 

 이러한 영향으로 산티아고 순례 길은 그리스도교 순례 세계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까미노 프란세스는 국가와 교회의 지지가 줄어들면서 그 중요성을 상실하고 사람들에게 잊혀 갔다. 그러다가 19세기 말 산티아고 가는 길을 재건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 20세기 중반까지 이어졌으며 오늘에 이르러서는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걷기를 동경하는 길로 널리 알려져 옛날의 까미노가 속속 복구되었다.

 

 까미노를 떠나기 전에 간단히 알고는 있어야 하는 사항들을 간단히 정리해 본다.

 

 첫째는 노란 화살표와 가리비 껍질 표시이다. 까미노 데 산티아고의 순례길을 걸으면서 수없이 마주하게 되는 노란 화살표와 가리비 껍질은 순례자에게 갈 길을 가르쳐 주는 고마운 존재로 이 표시만 따라가면 길을 잃을 염려는 조금도 없다. 길이 약간 애매한 곳은 순례자들이 직접 돌을 모아 화살표를 만들어 두기도 하여, 모두 한마음으로 같은 길을 걷는 심리적 버팀목이 되기도 하다. 또 수많은 표지석이 있으니 길을 잃은 염려는 전혀 하지 않아도 된다.

 

길을 가리키는 각종 표시와 표석

 

길을 걷는 순례자들이 만들어 놓은 돌무더기의 안내

 

도시의 길 바닥 표시 - 도시에는 조가비의 표시도 있다.

 

 둘째는 순례자 여권인 크렌디시알이다. 크렌디시알은 프랑스 길의 시작점인 생장 피에드포르의 순례자 사무실에서 여권과 신청서를 제출하고 약간의 기부금을 내고 발급을 받는다. 이 때 가리비 껍질도 함께 받는다. 크렌디시알을 가지고 있으면 순례자 숙소(알베르게)에 머무를 수 있고, 자신이 걷는 길에서 지나치는 레스토랑, 성당 등의 장소에서 세요라고 일컫는 스탬프를 받고, 숙소에서도 스탬프를 받아 본인이 그 길을 걸은 순례자임을 증명하는데, 이렇게 스탬프를 받은 순례자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해 순례 완주 증서를 받을 수 있다. 이 크렌디시알은 스탬프를 찍다 보면 더 찍을 공간이 없는 경우도 생기는데 중간에 있는 성당에서 구입할 수 있다.

 또 자신이 순례자임을 나타내는 표시로 배낭에 가리비 껍질을 달고 여정을 시작한다.

 

왼쪽이 생장에서 처음 받은 크렌디시알, 오른쪽은 성당에서 두번째 구입한 크렌디시알

 

나의 크렌디시알에 찍힌 도장의 일부(전체는 약 130개 정도를 찍었다.)

 

생장에서 받은 가리비 - 배낭에 매고 끝까지 함께 했다.

 

 셋째로는 걷기에 알맞은 시기는 언제일까? 40일간의 여유가 있어야 하기에 각자의 사정에 맞추어야 하지만, 순례자가 끊이지 않는 까미노에서 걷기에 좋은 시기는 4~6월과 9~11월이라고 할 것이다. 겨울과 이른 봄은 춥고 눈이 많이 내려 걷기 쉽지 않고, 6월이 넘어가면 스페인의 뜨거운 햇빛으로 걷기에 적당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이 이 시기를 택하여 걷기에 분잡함을 피하려면 다른 시기를 택해도 좋다.

 

 넷째로는 숙소다. 일반적인 순례자의 숙소는 알베르게(Albergue). 마을마다 있는 알베르게라 불리는 순례자 전용 숙소에서 잠자리를 해결해 주고 또 많은 알베르게는 취사를 해결할 수도 있어 유럽의 비싼 물가를 극복할 수 있게 해 준다. 대부분의 알베르게가 유스호스텔 같은 개방된 구조로 남녀노소의 구별이 없이 함께 머문다. 공립 알베르게는 도착순으로 침상을 배정하기에 빨리 알베르게에 도착하여 배낭을 입구에 놓고 순서를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사립 알베르게는 조금 비싸지만 그런 수고는 하지 않아도 된다. 침상이 비어만 있으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숙소는 대체적으로 충분한 편이다.

 

 길이 끝나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하면 완주증명서가 선물로 주어진다. 모두들 이 증서를 받으면 감격한다. '내가 그 먼 길을 정말 완주했는가?'하고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러면서 고이고이 그 증서를 간직한다. 하지만 그 길의 완주가 끝났을 때 나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800km를 걸어가 산티아고 대성당의 광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끌어안고 함께 기뻐하는 자신을 돌이켜 보아라. 광장의 천 년 된 돌기둥에 기대어 눈물을 흘리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당신을 찾을 수도 있다. 지나온 삶에 대해 기쁨과 감사에 가득 찬 그 순간을 느끼면 세상은 다르게 보일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나를 지탱하는 힘이 당신 안에 있다는 것을 이미 깨닫고 있을 것이다.  물론 얼마니 오래 간직할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완주증명서

 

 까미노 데 산티아고가 우리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은 그 길을 걷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일이다.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누구나 허물없이 친구 이상이 된다. 다리를 절고 있는 사람에게는 파스를 붙여주고, 아픈 사람에게는 약을 나눠주고, 목마른 사람에게는 물을 건네고, 배고픈 사람에게는 먹을 것을 준다. 냄새나는 발바닥의 물집을 따주며 마음속으로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을 도울 수 있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세상에서 마음이 가장 따뜻한 사람들을 길을 걸으면서 여기저기에서 만난다. 생판 모르는 사람들도 지나가며 부엔 까미노하고 인사를 하며 지나가면서 어디에서 왔는지를 묻고 답한다. 당신도 금방 친절이라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그 기쁨과 베푸는 행복을 체험한다. 그러면서 길을 걸으며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 닫히었던 마음의 문이 열리고, 현실의 아픈 기억들은 정화되고 추억이라 불리는 아름다운 기억들이 쌓여간다.

 

 이것이 까미노가 우리에게 주는 힘이다.

 

서해랑길 68코스(송현1리버스정류장 - 파도2리마을회관 - 어은돌해수욕장 - 모항항 - 만리포해변노래비)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서해랑길 68코스는 큰 도로에 있는 송현1리버스정류장에서 출발하여 파도2리마을회관과 어은돌해수욕장을 지나서 그 이름도 유명한 만리포해변의 노래비에서 끝이 나는 22.3km의 길이다.

 

아주 큰 도로에 있는 68코스 안내판

 

 68코스 시작점인 큰 도로가의 버스정류장에서 잠시 쉬면서 발의 상태를 살펴보니 신발이 너무 꽉 조여서 물집이 생기고 많이 아프다. 잠시 신발을 벗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휴식을 취하고 다시 길을 가기로 작정했다. 처음에는 발이 많이 아파서 가는 곳까지만 가려고 생각하고 중간의 마을에 버스정류장이 있으면 여정을 멈추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내가 몇 년을 걷고 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런데 결과만 말하면 미련하게 발이 아픈 것을 참아가면서 결국은 이 코스를 다 걸었다.

 

버스정류장에서 마을로 내려가는 길을 따라 마을로 내려가서 해안을 따라 걸으면 서해 땅끝이라는 표시가 보인다. 그런데 어디가 땅끝인지를 알 수가 없다.

 

 

 신발이 조여 발이 아프지만 참으면서 길을 걸으며 여러 마을을 지나니 파도리라는 지명이 나온다.

 태안군 소원면 파도리에 있는 파도리해수욕장(波濤里海水浴場)은 만리포해수욕장 아래 소원면 남쪽 끝 파도리초등학교 옆에 있다. 백사장 옆으로 울퉁불퉁한 검은 갯바위가 늘어서 있고, 해변은 특이하게 파도에 씻긴 작은 돌 해옥으로 덮여 있다. 이 해옥은 채취는 금지되어 있으며 기념품으로 마을의 해옥전시장에서 구입할 수 있다.

 해수욕장은 1980년대에 개장되었지만 지리적인 요인 때문에 외부인의 발길이 뜸하다가 반대편에 있던 바닷가가 간척사업으로 육지로 변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서해안의 다른 해수욕장들과는 달리 바닷물이 맑고 깨끗하며 바다 생물이 많이 살고 있어 가족 피서지와 자연학습장으로 좋다.

 

 

 

 이 해변에는 제법 많은 관광객들이 있으며 편의시설도 제대로 갖추어져 있었다. 특히 버거집이 있어 들어가서 점심으로 버거를 하나 청하여 맛있게 먹고 쉬었다. 내가 여행 중에 버거를 먹은 일이 있었던가를 생각하니 처음인 것 같았다. 여기에서 여정을 멈추고 돌아갈까? 하고 버스정류장을 물으니 아르바이트를 하는 젊은이가 자기도 모른다고 해서 다시 길을 떠났다.

 

버거집

 

파도리해변

 

파도리해수욕장의 모습

 

 파도리해수욕장을 지나 태안 해안길 3코스 파도길을 따라 조금 가면 자그마하지만 정감이 가는 해수욕장이 나타난다. 이름도 생소한 어은돌해수욕장이다. 태안군 소원면 모항리에 있는 어은돌해수욕장은 다른 서해안의 해수욕장에 비하면 규모는 크지 않은 편이지만 낚시를 즐길 수 있으며, 어은돌해변은 좁은 모래사장으로 영화 드라마에 나오는 전통적인 해변을 연상시킨다. 해변 형태는 자갈 모래로 되어 있다. 해안의 끝으로 보이는 석양이 그야말로 장관이라고 전하지만 내가 지나는 시간은 아직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시간이다.

 

어은돌해수욕장 풍경

 

 어은돌해수욕장을 지나 높지 않은 산길을 따라 걸으니 뜻밖에도 길 이름이 해변길이다. 해변은 저 멀리에나 가끔 보이는 산길인데 해변길이라니 조금 의아했다. 물론 뒤에 해변이 나오기는 하지만......

 

 이 길을 따라 가면 모항저수지가 나오고 저수지를 돌아서 산길을 걸어가면 행금이 쉼터가 나오고 계속 길을 가면 해안이 나오면서 모항항이 나온다. 모항항(茅項港)은 태안군 소원면 모항리에 있는 어항이다. 모항항은 어업근거지로서의 역할은 물론 피난항으로써의 역할도 수행하고 있는 항구로 1992년 기본시설에 대한 계획을 수립하면서 개발에 착수했다. 모항항에는 모항항 수산물직판장이 있는데, 규모는 크지 않지만 도시에서는 보기 힘든 여러 종류의 활어, 자연산 해산물, 젓갈류, 건어물과 수입산 수산물에 이르기까지 없는 게 없다 할 만큼 풍성한 수산물들을 만날 수 있다고 한다.

 

해변길 표지

 

모항저수지

 

행금이 쉼터

 

모항항의 풍경

 

 이제 만리포해변까지는 얼마 남지 않은 거리다. 발이 아픈 것을 잘 참아가며 미련하게 길을 계속해서 걸으니 어느 새 거의 다 온 것이다. 모항항을 벗어나 조금 걸으니 멀리에 만리포의 해변이 보이기 시작한다. 만리포는 워낙 유명한 해수욕장이라 일찍부터 개발이 잘 되어서 큰 건물들이 보이기도 한다.

 

멀리 보이는 만리포해수욕장

 

 태안군 소원면 모항리에서 의항리 구간에 있는 만리포해수욕장(萬里浦海水浴場) 북서방향으로 발달된 사빈이다. 대천해수욕장, 변산해수욕장과 더불어 서해안의 3대해수욕장으로 손꼽히며, 북쪽으로 이어져 있는 천리포해수욕장과 함께 태안해안국립공원의 명소를 이루는 만리포해수욕장은 바닷물이 비교적 맑고 모래질이 고우며 경사가 완만하여 수심이 얕은 데다 해변에 담수(淡水)가 솟아난다.

 백사장 뒤쪽으로 송림(松林)이 우거져 있어 주로 하계수련장으로 이용된다. 해수욕장까지의 교통도 편리하며 호텔·여관 등 숙박시설도 갖추어져 있어서 매년 많은 피서객이 찾는다.

 

 2007127일 태안군 만리포 북서방 약 10해상에서 원유 12,547kl가 해상에 유출되는 내 최대 해양 기름유출 사고가 발생하였다. 만리포해수욕장은 최대 피해지역으로, 유출된 원유가 바다를 검게 뒤덮었다. 당국의 다양한 방제와 전국에서 모여든 100만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힘을 합쳐 오랜 시간에 거쳐 기름을 제거하여  아름답고 깨끗한 해변으로 거듭났다.

 

만리포 노래비

 

 

 

 아픈 발을 가지고도 이 코스를 무난히 다 걸으니 역시 내가 걷기는 잘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발도 어는 새 진정이 되어 참을 만하였다. 

만리포에 도착하여 '여정을 계속하느냐? 여기서 멈추느냐?'를 고민하다가 만리포 시외 버스정류장의 시간표를 보니 서산가는 막차가 있었다. 그래서 여러 생각 끝에 이번 여정을 멈추기로 하였다. 내가 걷기를 하면서 여정을 멈추는 일은 전혀 없었는데 이번에는 신발이 맞지 않아 이 곳에서 멈추어야만 했다. 그리고 기상예보가 다음날 비가 많이 온다는 예보도 있고, 또 내가 곧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날 예정이라 몸에 무리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만리포에서 조금 쉬다가 서산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서산으로 가서 서산에서 대전으로 가서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가는 긴 귀향길을 시작했다.

 

 결론만 말하면 서산에서 대전으로 가는 막차의 표가 매진되어 하는 수없이 서산에서 일박을 하고 다음 날 일어나니 비가 엄청 쏟아지고 있었다. 멈추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면서 집으로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