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鶴)의 오딧세이(Odyssey)

스페인, 산티아고 까미노 길을 걷다. 30(06.15, 트리아카스테야 - 사리아)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오늘의 걷기 길 : 트리아카스테야 -  루시오(3.8km) - 렌체(1.7km) - 사모스(4.3km) - 산실 - 몬탄 - 푸렐라(6.5km) - 핀틴(1.3km) - 칼볼, 루고(1.4km) - 아구이아다(0.5km) - 산 마메데, 루고(1.3km) - 사리아(3.4km)

 

 오늘은 트리아카스테야를 출발하여 사리아까지 가는 약 25km의 길을 걷는다.

 

 트리아카스테야에서 사리아는 걷는 길이 두 가지나, 두 길은 모두 까미노 프란세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다. 산실로 가는 오른쪽 길은 아름다운 숲과 계곡을 지나 사리아까지 19km 정도로 약 6시간 걷는다. 왼쪽 길은 아름다운 훌리안 이 바실리사 왕립 수도원이 있는 사모스를 지나는 길로 검은 돌로 지붕을 얹은 시골집과 아름다운 목장, 강가의 숲길을 걸으며 근사한 갈리시아 지방의 매력적인 풍경을 감상하지만 25km 정도로 한 시간 이상을 더 걷는다. 갈리시아를 통과하는 까미노에서 가장 중요한 훌리안 이 바실리사 왕립 수도원이 있음에도 이 길은 개발의 논리에 밀려서 원래의 모습을 점차 잃고 있다. 숲은 벌목되고 길은 아스팔트로 포장되고 수도원 근처까지 공장지대가 침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이 길은 순례자의 마음을 끄는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왼쪽 길을 선택해서 사모스로 간다.

 

 아침에 일어나니 일찍 떠나는 사람들은 벌써 떠나고 있다. 그렇게 급하게 서두르지 않아도 되기에 나와 같이 길을 걷는 사람과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떠나기로 하고 식당에 가니 몇 사람이 간단한 아침을 먹고 있다. 간단한 식사를 하고 평상시에 비해 조금 늦게 알베르게를 나와 마을 출구로 가니 어제 와 본 곳에서 두 개의 까미노 표시석이 있다. 여기서 사모스로 가기 위해 왼쪽으로 발을 옮긴다.

 

마을 출구의 두 개의 표시석

 

마을 출구의 산티아고 십자가와 순례자상

 

안내 지도

 

 트리아카스테야에서 오리비오 강을 따라 걷게 되는 이 길은 거리는 더 길지만 완만한 평지를 걷기 때문에 편하다. 트리아카스테야를 통과하는 도로를 따라 오리비오 강 다리를 넘어서 피카카예 산의 울창한 숲을 감상하며 편안히 걸으면 루시오 마을을 지나 다음 마을인 렌체로 이어지는 오르막길을 걷는다. 렌체는 주민수가 아주 작은 마을로 마을의 바는 아직 문을 열지 않아 그냥 지나친다. 길은 부드러운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하며 작은 언덕을 오르면 산 마르티뇨 도 레알이 보이고 오리비오 강을 작은 다리를 건너면 산 마르티뇨 도 레알로 들어간다. 오래된 시골 가옥들 사이를 지나 마을을 통과하면 도로의 아래를 지나는 터널을 지나 로우사라 계곡으로 이어지는 길 주위에 오래된 돌담이 늘어서있는 좁은 오솔길로 들어간다. 오우테이로 이 폰타오 성당을 지나 가파르지 않은 내리막길을 잠시 내려가면 사모스에 도착한다.

사모스를 제외하고는 지나는 마을들은 휴식처도 없고, 특별한 유산을 없어 모두 그냥 지나친다.

 

라스트레스 표시

 

산 마르티노 표시

 

사모스 가는 길 표시

 

사모스로 내려가는 길에서

 

 갈리시아를 지나는 까미노 프란세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중에 하나를 간직한 사모스를 둘러싸고 있는 로우사라 자연보호구역은 산과 깊은 계곡, 시원한 개울과 짙은 초목 등으로 특별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곳인데, 원래의 의미와 형태를 잃은 채 건조한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안타깝다.

 사모스는 오랫동안 순례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도시답게 순례자들에게 친절한 도시다.

 

 산길을 내려가니 큰 건축물이 보인다. 이 길로 걸어온 순례자들은 모두 이 건축물을 보려고 온 것이다.

 

 우리가 베네딕토수도원이라고 알고 있는 산 훌리안과 산타 바실리사 왕립 수도원 건물이다. 이 수도원은 중세부터 현재까지 많은 순례자들이 꼭 보기를 원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 이유는 이 수도원이 건축적으로 대단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지만, 무엇보다 수사들이 부르는 환상적인 그레고리안 성가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신앙이 깊은 순례자라면 이 아름다운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에 묵을 수도 있다.

 

 사모스 수도원이라고도 불리는 이 수도원의 기원은 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현재 남아 있는 수도원 건물은 대개 16, 18세기에 건축된 것이다. 두 개의 회랑이 있는데, 고딕양식으로 지어진 하나의 회랑에는 16세기에 만들어진 네레이다스 분수(Fuente de las Nereidas)가 있고,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만들어진 다른 회랑에는 페이호 신부(Padre Feijoo)의 동상이 있다. 팔각형의 쿠폴라가 씌워진 감실과 거대한 바로크 양식 성당, 미완성으로 남은 거대한 파사드도 바로크 양식의 봉헌화도 눈여겨 볼만하다.

 

 이 수도원에서 철학을 가르치던 페이호 신부는 수도원이 환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이 수도원은 은둔하기에 적당하며 울창한 산속에 파묻혀 있습니다. 구석구석이 닫혀있는데다가 억눌려 있기 때문에 수직으로 위를 쳐다보지 않으면 별을 볼 수 없습니다.” 베니또 제로니모 페이호 신부는 스페인 계몽주의의 가장 유명한 석학으로 말년을 이 수도원에서 보냈으며, 그가 죽은 다음 그의 저서에서 나오는 저작권 수입으로 수도원을 재건했다고 한다.

 

멀리 보이는 수도원 전경

 

사모스의 수도원 순환 루트 설명 - 약사에 관한 설명

 

사모스 수도원 순환 루트 - 수도원의 특별한 유산 안내

 

수도원의 알베르게

 

수도원의 문장

 

수도원 정문

 

수도원 전경

 

수도원 외부의 여러 모습

 

사모스 수도원 표시

 

 수도원 주위를 한 바퀴 돌면서 수도원의 외부를 구경하고 수도원으로 들어가려니 아직 시간이 되지 않았다며 문을 열지 않았다. 고지해 놓은 것을 보니 10시, 11시, 12시에 문을 연다고 되어 있다. 10시부터가 아니라 매 시간 문을 연다니 조금의 의아해 하면서 같이 간 일행과 시간이 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약 한 시간을 기다려야 되지만 이곳을 보기 위해서 이 길을 걸어왔는데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주변의 카페에 가서 커피와 빵을 시켜서 먹으며 여러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수도원으로 갔다. 수도원 입구 옆 건물에 기념품 가게가 있어 구경을 하고 있다가 무언가 의아해서 보니 입장권을 팔고 있었다. 그래서 급히 구입하니 10시가 되자 안내인이 나와 인솔을 한다. 그리고 그 안내인이 안내하는 동선을 따라가야만 하였다. 조금이라도 동선을 벗어나면 불호령이 떨어지고 심지어는 퇴장을 시킨다고 한다. 수도원을 구경하는 도중에 한 사람이 옆에 있는 닫아놓은 문을 열고 안을 구경하려니 엄청나게 화를 내며 야단을 친다. 아마도 수도사들의 비밀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 공개하는 곳만을 안내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 시간에 한 번만 안내인이 관람객을 모아서 안내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스페인어로만 안내를 하여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고 안내 팜플렛도 없어 그냥 따라다니며 구경만 한다.

 

 

네레이다스의 분수  

 

 이 수도원에 있는 네레이다스의 분수에는 괴물의 모습을 하고, 거대한 가슴을 가진 여성의 조각상이 있다. 언젠가 한 신심 깊은 베네딕토회 신부가 이 조각상이 수사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친다고 분수를 없애자고 주장하여, 수사들은 분수를 해체하여 수도원 밖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처음에는 무겁지 않던 분수의 조각상은 점점 무거워져서 나중에는 기구를 써도 들어올리기 어려웠다. 결국 분수를 옮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수사들은 이 분수를 원래 있던 모습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내부에서 보는 건물들

 

내부의 벽화

 

페이호 신부(Padre Feijoo)의 동상

 

성당 내부의 여러 모습

 

수도원 내부 성당의 여러 모습

 

 약 한 시간이 걸린 수도원 관람은 시간이 아깝지 않게 보람찬 구경이었다. 이곳을 지나가며 시간이 없다고 그냥 지나간 사람들이 너무 불쌍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꼭 이 길을 지나는 사람들은 시간을 맞추어서 아니 시간을 기다려서라도 내부를 구경하기를 권한다.

 

 수도원을 나와 길을 돌려 산실로 향하여 원래의 사모스 길이 아니라 산실 길로 걷는다. 길을 걷는데 철조망이 쳐 있고 그 철조망에는 수많은 나무 십자가가 달려 있다. 길을 가는 순례자들이 신에 대한 자신의 기원을 담아 걸어놓은 것이다. 무슨 소망을 걸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의 정성이 갸륵하게 느껴졌다.

 

길가에 달아 놓은 십자가

 

 산실의 주거지를 왼쪽에 두고 약 30분가량 길을 오르면 해발 896m의 리오카보 언덕의 정상에 오르게 된다. 이곳에서 순례자는 아름다운 오리비오의 언덕과 계곡을 감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리아도 희미하게 볼 수 있다. 언덕을 내려가면서 갈리시아 지방 특유의 분뇨냄새가 진동하는 목장지대와 시내를 넘어서 오래지 않아 몬탄에 도착한다. 몬탄에서 아그레로 강 다리를 건너 왼쪽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가면 푸렐라, 핀틴, 칼볼 루고, 아구이아다 등의 작은 마을들이 이어 나오고, 아구이다아 마을에서 트리아카스테야에서 사모스를 지나는 길과 합류한다. 이제 포장된 길을 따라 산 마메데 루고 등 여러 작은 마을을 지나 사리아에 도착한다.

 

 사리아로 오는 도중에 마을이 아닌 곳에 바가 있었다. 제법 오래 걸어서 그 바에 들어가 맥주를 한 병 시켜서 마시면서 같이 간 일행이 과일을 꺼내니 외부 음식은 먹을 수 없다며 제지를 해서 그냥 맥주를 마시고 있으니 같이 길을 걷는 한국인들이 들어왔다. 그래서 외부 음식은 먹을 수 없다고 알려주고 화장실을 사용하려니 0.5유로를 내라고 한다. 자기 바의 손님에게도 화장실 사용료를 받는다는 것이 상당히 의아스러웠다. 계산을 하고 나오려니 주인이 돈을 더 내라고 한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 맥주 두 병 값을 지불하니 돈을 탁자에 던지며 화를 낸다 말도 잘 통하지 않아 다툴 수도 없고 해서 1유로를 더 주고 나왔는데 아마도 화장실 사용료를 더 내라고 한 것 같았다. 하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인데 주인 여자의 행동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길을 걸으면서 스페인 사람들의 친절함에 고마워했는데 한 순간에 그 고마운 마음이 다 사라지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물론 그 한 사람의 행동이 스페인 사람 모두를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행동을 보고 우리도 자신의 행동에 대해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으며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사리아 가는 길 주변의 풍경

 

사리아 표시

 

사리아 안내

 

 아스팔트 길을 따라 가니 사리아 시내가 나온다. 상당히 큰 규모의 사리아의 중심지 길에는 외양이 아름다운 각종 상점이 있고, 신시가지를 벗어나 구시가지족으로 가면 유명한 막달레나 수도원과 사리아 백작의 성곽 유적을 만날 수 있다. 고딕양식의 살바도르 성당을 지나고 강가의 도로에는 수많은 선술집, 그리고 유명한 뿔뽀(Pulpo)를 전문으로 요리하는 역사적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는 뿔뻬리아(Pulperias; 문어요리 전문 식당)가 있다. 이곳에서 순례자의 눈은 아름다운 거리와 여러 예술 작품으로, 코와 혀는 향기롭게 자극하는 맛있는 음식으로 즐겁다.

 

 사리아에 사람이 살았던 것은 로마 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도시의 역사가 시작된 것은 산티아고 순례길이 강화된 이후부터다. 12세기 후반에 알폰소 9세가 마을을 세웠다고 전해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알폰소 9세는 산티아고 순례 도중 창궐한 전염병 때문에 사리아에서 사망했고, 그의 순례를 기리기 위해서 그의 영묘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사리아 알베르게

 

 알베르게에서 라면을 끓여 점심을 대강 먹고 시내의 슈퍼에 가서 내일 먹을 먹거리를 장만하고 돌아와서 쉬다가 저녁에 미사에 참석하러 갔다.

 

 알베르게에서 조금 아래에 있는 성당에 가니 외부에는 버스들이 여러 대가 보이고, 스페인의 체험학습 온 것 같은 학생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일반적인 미사가 끝나고 사제가 순례자들을 따로 모아서 축성을 해 주면서 순례길의 안전을 빌었다. 이 길에서 어느 성당을 가든지 순례자들을 위해 따로 강복과 축성을 해 주는 모습을 보고 스페인이 얼마나 순례자들을 대우하고 아끼는지를 알 수 있었고, 그들의 종교적인 믿음과 헌신을 느꼈다.

 

Crucerio Santa Marina 성당 

 

Crucerio Santa Marina 성당 내부

 

 미사를 마치고 알베르게로 돌아와서 잠시 쉬다가 우리 일행은 또 모여서 하루의 피로를 풀기 위해서 간단한 맥주 파티를 연다. 걸을 때는 따로 떨어져서 자신을 찾으며 걷다가 저녁이 되면 모여서 또 하루를 보낸 것을 감사히 여기며 사소한 이야기를 한다. 우리가 여태 살아온 사회에서 이렇게 어떤 목적이나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 단순한 마음으로 소박하게 맥주를 한잔 마시는 일이 얼마나 있었을까?

스페인, 산티아고 까미노 길을 걷다. 29(06.14, 라 라구나 데 카스티야 - 트라아카스테야)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오늘의 걷기 길 : 라 라구나 데 카스티야 -  오 세브레이로 - 리냐레스 - 오스피탈 데 콘데사 - 파도르넬로 - 폰프리아 - 오비두에도 - 피요발 - 파산테스 - 트라아카스테야)

 

 오늘은 라 라구나 데 카스티야에서 트라아카스테야까지 약 26km의 길을 가야 한다.지나는 길은 계속해서 1,200m 정도의 산길을 걸어 피요발부터 내리막으로 가는 길이다. 그리고 이 길에서는 조금만 걸어도 마을이 나오기에 적당히 자신의 걸음에 맞추어 휴식을 취할 수가 있는 장점이 있다.

 

 오늘도 역시 아침 일찍부터 길을 떠나는데 약간의 비가 오기 시작한다. 출발할 때부터 비를 만나는 일은 이번 여정에서 처음이다.

 

 이제 오래 걸어온 레온을 지나는 길이다. 라 라구나 데 카스티야에서 조금 가면 순례의 마지막 지역인 갈리시아 지방으로 들어서게 된다. 라 라구나 데 카스티야에서 까미노 길을 따라 마을을 나오면 머리위로 보이는 가파른 언덕 너머에 오 세브레이로가 있다. 언덕을 오르며 뒤를 돌아보면 철 십자가상이 있는 이라고 산이 멀리 보인다. 이제 괴로운 오르막은 끝난 것이고, 레온과 루고의 환상적인 풍경을 까미노에서 가장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최고의 선물을 얻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걷는 오늘은 비가 와서 멀리 보는 풍경이 또렷하지는 않다. 하지만 비안개에 덮인 풍경은 또 다른 몽환적인 감흥을 준다.

 

운무에 덮인 산 풍경

 

 오 세브레이로로 올라가는 중간 지점에 갈리시아 표시석이 있다. 이제부테 레온을 벗어나 갈리시아로 들어가는 것이다.

 

 옛 이름이 갈레키아(Gallaecia)인 갈리시아(Galicia)는 스페인 북서부의 지방으로 북쪽과 서쪽은 대서양에 면하고 남쪽은 포르투갈에 접한다. 칸타브리아산맥의 서쪽 끝에 해당하며, 중앙부를 미뇨 강이 서쪽으로 흘러 대서양으로 들어간다. 산맥의 서쪽 가장자리가 함몰되어 많은 리아(ria:길고 좁은 쐐기형 후미)를 형성하여 양항이 많고 어업이 성하다. 리아스식 해안의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전반적으로 산이 많고 경작지가 적어서 농업은 부진하다. 중심 도시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다. 기원전 3~2세기 고대 로마인이 정복했고 8세기까지 이슬람이 지배를 하였다. 이들이 사용하는 갈리시아어()는 원래 라틴어에서 파생한 것으로 에스파냐어보다는 포르투갈어에 가깝다.

 

갈라시아 표시석

 

갈리시아 안내도

 

 이제 신비로운 성체와 성배의 기적이 일어났던 오 세브레이로는 바로 앞이다. 성당의 종소리가 들리는 듯하고 향기로운 포도주 냄새가 우리를 유혹하는 길을 따라 1km를 걸으면 마을에 도착한다. 오 세브레이로에는 전통적인 건축물인 빠요사가 있다.

 

 순례의 마지막 지역인 갈리시아 지방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오 세브레이로는 성체와 성배의 기적으로 유명한 마을이다.

 오 세브레이로에서 일어난 기적은 까미노 순례자들 사이에서 많이 알려져 있다. 날이 궂은 어느 날 한 순례자가 마을에 도착하여 성당에 미사를 보러 갔다. 신부가 미사를 집전하며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고,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할 것이라고 하자 순례자는 기도를 올리며 성체의 신비가 실제로 일어나게 해달라고 빌었다. 미사를 집전하던 사제가 하늘에 성체를 바친 후 경배하고 눈을 뜨자 성체는 고기 한 조각으로 변해 있었고, 성배에는 포도주가 피로 변하여 가득 차 있었다.

 이 기적은 유럽 전체에 널리 알려졌고 수많은 참배객이 이 성당을 찾아와서 크리스털로 장식한 주전자와 은으로 만든 유물함을 봉헌했다. 그런데 욕심 많고 고집 센 이사벨 여왕은 기적의 성배와 성체를 담은 접시를 탐냈다. 여왕의 명령으로 군인들은 성배를 바쳐야 했는데, 성배를 등에 실은 노새가 라 파바로 내려가는 길목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성배는 다시 오 세브레이로의 성당 안에서 현재까지 보관되고 있다.

 

청동여인상

 

 오 세브레이오에 도착하니 비가 제법 많이 온다. 작지만 수많은 순례자들이 반드시 들린다는 이 마을은 로마시대 이전부터 존재했던 소박한 전통을 보여주고,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간직하고 있다. 더욱이 오 세브레이로 근교에는 오스 안까레스 산맥이 펼쳐져 있어 울창한 숲을 가로지르며 시원하게 흐르는 개울이 있고, 2000미터에 달하는 고지엔 대뇌조, 곰 같은 동물들이 산다고 한다.

 

 오 세브레이오의 산타 마리아 라 레알 성당(Iglesia de Santa Maria la Real)은 오래된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라미레스 양식이 남아 있는 로마 시대 이전의 건축물로 세 개의 신랑에 궁륭으로 덮여 있는 지붕과 종탑으로 이루어져 있다. 성당의 내부에는 12세기에 만들어진 성모상과 로마네스크 양식의 전설의 성체 접시와 성배, 페드로 2세가 산티아고로 순례하는 동안 봉헌했던 유골함이 보관되어 있다는데 너무 이른 시간이라 성당은 문을 굳게 닫아서 안으로 들어가지를 못했다. 이 길을 걸으면서 시간이 맞지 않아 보고 싶은 것을 보지 못해 안타까운 때가 적지 않았지만 관광을 목적으로 하는 여행이 아니기에 감수하면서 지나간다.

 

비에 젖은 성당의 모습

 

 

 또 오 세브레이로는 한 인간이 만들어낸 드라마틱한 기적이 있다. 오 세브레이로의 교구 신부인 돈 엘리아스 발리냐는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부활시키는 일에 자신의 인생을 바친 사람이었다. 노란색의 페인트로 칠한 화살표 표시를 처음 만들었으며, ‘까미노의 친구 협회를 설립하고 강화한 인물이다. 그의 노력이 없었더라면 까미노 데 산티아고는 소수의 신앙의 순례길로 남았고 현재와 같은 대중적인 인기를 끌지는 못했을 것이다. 단 한 사람의 노력으로 까미노는 부활의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베네딕토 수도회에 대한 감사문(829년부터 이곳을 통과하는 순례자들을 보호하고 돌보봄에 감사)

 

 비가 제법 세차가 와서 바에 들어가 비를 피하면서 커피를 한잔 마시고 쉬다가 언제까지 비가 그치기를 기다릴 수가 없어 다시 빗속을 걸어서 길을 떠난다.

 

 오 세브레이로에서 트리아카스테야에 이르는 22km는 포이오 언덕을 오르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리 힘들지 않는 길이다. 이 길은 갈리시아 지방의 특색을 잘 나타내주는 곳이며 비옥한 땅과 목장, 시원한 샘물이 흐르는 길이다. 그러나 오 세브레이로에서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갈리시아를 지나는 까미노에서 가장 높은 해발 1,335m의 포이오 언덕이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정상의 고원에 오르면 멀리 그림 같이 펼쳐지는 풍광을 감상 할 수 있다. 포이오 언덕의 정상 뒤로 트리아카스테야까지는 내리막으로 이어진다.

 

오 세브레이로에서 출발하여 내리막으로 내려가지만 비는 계속해서 와서 시야를 가려 걷기는 매우 불편하다. 오 세브레이로에서 걷는 길은 짧은 오르막길로 소나무 숲 사이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오른쪽으로 리냐레스로 내려가는 길이 나온다.

 

비가 많이 와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리냐레스는 오 세브레이로에서 약 3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마을로 고속도로와 인접하여 있는 바와 몇 개의 건물이 전부다. 그런데 비가 많이 와서 바는 닫혀 있고 잠시도 비를 피할 곳이 없어 그냥 비를 맞으면 걷는다. 조금 가면 성 로케 언덕의 유명한 순례자 조각을 만나게 된다. 이곳에는 조각가 아쿠냐가 만들어놓은 바람을 뚫고 걸어가는 거대한 순례자의 동상이 계곡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런데 비가 계속해서 와서 조각상으로 가지도 못하고 옆을 지나치며 사진을 찍었는데 별로 만족스럽지가 못하다. 비가 오고 운무도 짙어서 사진에서 보듯이 모든 것이 흐릿하게 보인다. 아쉽지만 어디 자연의 변화에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이런 아쉬움이 어디 이곳에서만 있었던가? 엄청나게 많은 아쉬움을 겪으면서 이 모든 것이 이 길을 걸으면서 느끼고 깨닫는 한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순례자 조각상

 

비가 오는 도중에 잠시 보이는 마을

 

 여기서 피요발까지는 작은 마을 여러 곳을 지난다. 거의 붙어 있는 것 같은 마을들은 별로 큰 특징이 없는 시골의 마을이다. 순례자의 동상이 있는 산 로케의 언덕에서 오스피탈 데 콘데사까지는 30분 정도가 걸린다. 현재는 자취도 없으나 9세기 이 마을에는 가톤 백작의 부인 에힐로 백작부인이 순례자를 위한 병원을 만들어서 콘데사(Condesa; 백작)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고 전해진다. 이곳에서 조금만 가면 포이오 언덕의 산자락에 위치한 파도르넬로에 도착한다. 파도르넬로에서 포이오 언덕의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짧으나 매우 가파르고 험하다. 중세의 포이오 언덕에는 성 후안 기사단의 기사령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정상을 올라온 순례자에게 포이오 언덕은 또 다른 축복을 선사한다. 다음 마을인 폰프리아까지 순례자는 도로와 나란히 이어지는 아름다운 고원지대를 통과하며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경치를 카메라에 담는다고 하지만 오늘은 비가 너무 와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폰프리아 성당에는 '소이 데 폰프리아 (Soy de Fonfria; 난 폰프리아 출신이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는 은으로 도금된 성작이 보관되어 있다. 그런데 이 성작의 기원이 언제이며 새겨진 문구가 무슨 뜻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중간 마을에서 비도 피할 겸 카페에 들어가 잠시 쉬면서 뜨거운 커피와 빵으로 요기를 하며 몸을 녹였다. 비가 계속해서 와서 몸의 체온이 좀 떨어진 것도 같았다. 폰프리아를 지나고부터 약 1km 정도 지난 지점부터 가파른 내리막을 걸어야 한다. 폰프리아에서 다음 마을인 오 비두에도까지는 약 2.5km로 길은 두 갈래로 갈라지는데 도보 순례자들이 선택하는 왼쪽의 길은 오르비오산의 아름다운 풍경과 트리아카스테야를 멀리 조망할 수 있는 매력적인 길이다. 오 비두에도 마을을 통과하여 칼데이론 산의 중턱의 목축지 사이를 지나는 길은 상당히 가파르며 계곡을 지나야 한다. 여기에서 아름다운 오르비오 산의 풍경을 감상하기 좋으며 트리아카스테야가 멀리 내다보이는 피요발까지 상당히 가파른 내리막을 내려가야 한다.

 

피요발 표시

 

 피요발은 아주 작은 마을로 여기에서 트리아카스테야까지는 한 시간도 걸리지 않는다. 피요발을 지나니 비가 그치기 시작한다. 뒤를 돌아보니 산 위에는 아직 구름이 잔뜩 덮여 있다. 지나온 곳은 고산지대라 비가 오고 산을 내려오면서 날이 개는 것 같았다. 오전 내내 비를 맞으며 걸었기에 구름 사이를 뚫고 비치는 햇볕이 너무 반갑다. 햇볕이 따뜻하게 내리쬐는 평화로운 숲을 걷다 보면 도로를 만나고, 도로를 건너 돌담에 둘러싸인 오솔길을 따라 한참을 걷는다. 이 길은 중간에 있는 작은 마을인 파산테스와 트리아카스테야와 거의 붙어있는 라밀까지 이어진다.

 

 마을의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중세의 트리아카스테야는 세 개의 성이 있을 정도로 번성한 마을이었으나 현재 남아있는 유적은 하나도 없다. 10세기에 만들어졌다고 알려져 있는 이 마을은 13세기 알폰소 11세에 의해서 재건되고 부흥했다고 전해진다.

 

 

 트리아카스테야 마을의 입구에는 1993년 산띠아고의 해에 만들어진 4층짜리의 근사한 알베르게가 있고, 마을 사람들은 너무나 친절하게 순례자를 환대한다. 하루 종일 비를 맞아 추위와 피곤함에 지쳐 들른 트리아카스테야 입구의 알베르게에 숙소를 정하고 비에 젖은 몸을 씻고 라면을 끓여 점심을 먹었다.

 

오래 된 고목

 

 

 

점심을 먹고 날이 개어 시내를 돌아다녔다. 제법 오래된 건물이 눈에 많이 보였고 순례자들을 위한 카페와 바가 즐비하게 늘어 서 있었다. 그 중에 한 식당 앞에는 한글로 쓴 메뉴판을 길가에 세워 놓았다. 얼마나 많은 한국인이 오기에 메뉴판을 한국어로 써 놓았을까? 하는 의문이 아니라 감탄을 하게 만들었다.

 

 시내를 한 바퀴 돌아보고 돌아와 잠시 쉬다가 저녁을 먹으로 갔다. 다른 사람들은 한국어 메뉴판이 있는 식당으로 갔지만 우리 무리 4명은 상당히 좋은 식당으로 생각되는  알베르게 라래 층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거기에서 오늘의 메뉴를 시키고 갈리시아에 들어온 기념으로 문어(폴보)와 가리비에 고급 와인으로 알려진 알바리뇨를 시켜서 떠들면서 저녁을 맛있게 먹었다. 우리가 저녁을 먹고 있으니 길을 가면서 만났던 한국인들도 제법 들어온다. 특히나 젊은이들이 제법 들어와서 나름대로 저녁을 즐기는 모습이 보였다. 

 

오늘은 길을 걸으면서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가 너무 와서 주변의 경치도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작은 마을에서 무엇을 찾아서 볼 엄두가 나지 않아 그냥 지나치고 걸었다. 다행히 하루의 길을 다 걸었을 때 비가 멈추어 화창한 날씨가 보인 것도 행운이다. 그리고 만찬을 즐기며 한잔의 와인으로 하루를 끝내는 것도 다 행복이라고 생각되었다.

 

스페인, 산티아고 까미노 길을 걷다. 28(06.13,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 - 라 라구나 데 카스티야)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오늘의 걷기 길 :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 - 페레헤(5.5km) - 트라바델로(5,0km) -  라 포르텔라 데 발카르세(4.0km) - 베가 데 발카르세(2.8km) - 라스 에레리라스 베가 데 발카로세((3.6km) - 라 파바(3.4km) - 라 라구나 데 카스티야(2.4km)

 

 오늘은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에서 라 라구나 데 카스티야까지 약 26km를 걸어야 한다. 오늘의 길은 대부분이 산언덕 길을 걸어간다. 지나가는 마을은 조그마한 마을로 별 특이한 것이 없기에 그냥 길을 가면서 지나친다. 중간에 자전거를 타고 가는 순례자들을 위한 도로와 걷는 사람들의 길이 교차하는 경우가 있는데 도로를 따라가지 말고 산으로 길을 가야 한다.

 

 오늘도 역시 사람들은 새벽같이 길을 떠난다. 모두가 떠나기에 우리도 짐을 챙겨두고 밖의 뜰에 나가 잠시 아침 요기를 하고 길을 나서니 아직 어두운 시간이다. 어제 갔던 산타 마리아 성당을 지나 다리를 건너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를 떠나는 순례자는 카스티야에서 갈리시아로 이어지는 까미노를 따라 발카르세의 계곡 마을을 지나게 된다. 도로 왼쪽으로 좁은 길을 따라 한 시간 가량을 걸으면 밤나무 숲이 둘러 싼 마을 페레헤가 나온다

 

스페인 하숙 건물

 

부르비아 강(Rio Burbia)

 

멀리 보이는 성벽

 

까미노 길 표시

 

페레헤 표시

 

 중세풍의 작은 마을 페레헤는 중세 때에 오 세브레이로의 수도원장과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의 산타 마리아 수도원이 분쟁을 벌인 곳이었다. 분쟁의 시작은 페레헤에 오 세브레이로의 수도원장이 순례자를 위한 병원과 성당을 세우려고 했던 것이었다. 비야프랑카의 수사들은 자신들이 페레헤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다며 반대를 했다. 이 분쟁은 레온 왕 알폰소 9세와 교황 우르바노 2세가 끼어들면서 싸움이 더 격해졌다. 결국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가 이기게 되어 병원 건축의 독점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중세에 페레헤 주민은 세금과 군대 징집을 면제받았는데, 그 이유는 여왕 도냐 우라까가 페레헤의 허름한 호레오에서 출산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작은 마을이라 그냥 걸어서 지나쳐 약 5km를 걸으면 트라바델로에 도착한다. 중세에 이 마을은 부패한 귀족들이 순례자를 약탈했던 장소로 악명이 높았으나 현재는 페레헤보다 근대적인 건축물들이 시원한 계곡 사이에 자리를 잡고 있다. 트라바델로에서는 검고 넓적한 돌로 지붕을 올린 전통 가옥 만난다. 트라바델로는 바위투성이의 좁은 계곡에 있는 지형 때문에 부패한 귀족들이 순례자들을 강탈했다. 그들은 순례자를 보호한다는 미명 하에 통행료를 걷었고, 이를 거부하는 순례자들에게는 강도로 돌변해서 순례자의 발길이 뜸해졌다. 순례자들이 두려워하던 트라바델로에는 지금은 없는 아욱타레스 성에 도둑과 강도들의 은신처가 있었는데, 알폰소 6세와 템플 기사단이 이곳을 토벌하여 오랜 악습이 사라지게 되었다고 한다.

 

트라바델로 표시

 

 마을을 통과하여 계속해서 까미노 표시를 따라 걸어 여러 조그마한 마을들을 지나면 포르텔라 데 발카르세가 나온다. 작은 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이 마을의 이름은 발카르세 계곡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작은 문과 같은 좁은 길을 지나야만 했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마을을 떠나 도로를 벗어나면 지저귀는 새소리와 바람소리만이 귓가에 들리고, 시원한 밤나무의 그늘과 함께 목장지대를 지나 발보아 계곡과 발카르세 계곡이 만나는 곳에 자리 잡은 암바스메스타스에 도착한다. 나타나는 마을들이 아주 조그마하고 별 다른 특징도 없어 그냥 걸어서 계속 지나친다. 암바스메스타스를 뒤로하고 30분만 꾸준히 걸으면 베가 데 발카르세에 도착한다.

 

이 주변의 마을에는 발카르세라는 명칭이 붙어 있다. 그만큼 발카르세 계곡을 옆에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는 의미다.

 

라 포르텔라 표시

 

암바스메스타스 표시

 

베가 데 발카르세 표시

 

 발카르세 계곡에서 가장 큰 마을인 베가 데 발카르세는 두 개의 요새 유적과 성 때문에 전설이 가득한 중세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마을이다.

 

 사라신 성 (Castillo de Sarracín)은 마을의 남쪽, 밤나무 숲 사이 경사에 위치해 있었다. 현재에는 모두 형체를 알기 힘든 석재와 검은 돌기와만 남았다. 사라신 성은 10세기 아스토르가의 영주였던 사라신 백작의 성이었다. 한편 베이가 성은 11세기에 돈 네사노 구데스테이스라는 봉건 영주의 소유였다. 그는 주민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고, 순례자들에게 보호비로 통행료를 요구했다. 이 영주는 알폰소 6세에 의해 처벌을 받았다.

 

 

 베가 데 발카르세의 바에서 잠시 쉬고 길을 계속 이어나가 라스 에레리아스 베가 데 발카르세로 들어가기 위해 왼쪽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야 한다.

 

 라스 에레리아스 베가 데 발카르세는 아름다운 발카르세 계곡의 마을이다. 이곳에서 순례자가 마을을 나와 작은 다리를 건너면 피카르디 고개가 시작된다. 알페스 데 라 파바, 말라파바라고도 부르는 산길을 오르면 제법 숨이 차다. 도로의 오른쪽으로 자전거 순례자를 위해 아스팔트로 포장된 길이 보인다. 그러나 오를수록 가파른 산길이 마주하며, 또 밤나무 숲이 보이는 이 언덕길은 고생만큼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길을 가면서 내려다보는 경치는 힘들여 산길을 가는 보답을 한다. 그러니 길이 조금 힘들어도 보도 순례자는 원래의 길을 걷는 것이 좋다. 다시 조그만 개울을 따라가다 다리를 건너면 커다란 밤나무 숲 사이로 이어지는 급한 오르막길을 약 30분 동안 오르면 라 파바 마을에 도착한다.

 

라스 에레리아스  베가 데 발카르세 표시

 

산길

 

산길에서 보는 경치

 

라 파바 표시

 

 라 파바는 전통적인 목축업에 종사하는 작은 마을로 순례자를 위한 바가 있다. 이 바의 이름은 엘 울티모 리콘 데 엘 비에르소(El Último Rincón de El Bierzo; 엘 비에르소의 마지막 모서리)인데, 외로운 산촌 마을의 분위기를 읽을 수 있는 장소다. 예전에는 이곳에 바가 하나밖에 없었다고 하나 지금은 제법 많은 바가 길손들을 맞이한다.

 제법 산길을 올라왔기에 이 바에서 쉬면서 주스를 한잔 마시고 있으니 같은 길을 걷는 한국인들이 이 바의 라면이 맛있다고 추천을 한다. 시간도 점심때가 되어서 같이 길을 걷는 일행과 여기서 라면을 먹기로 하고 라면을 시키니 한 그릇에 우리 돈으로 7,500원 정도를 달라고 한다. 라면은 한국 라면으로 계란을 넣고 완전히 한국식으로 끓인 것으로 별미였다. 맛있게 라면을 먹고 쉬다가 다시 길을 간다.

 

라 파바 마을과 라면

 

 라 파바를 떠나 오르는 아이가 산의 비탈길은 제법 호흡을 어렵게 만든다. 오솔길을 따라 2.5km를 올라가면 레온 지방의 마지막 마을인 라 라구나 데 카스티야에 도착한다.

 

 라 라구나 데 카스티야는 해발 1000미터 이상 되는 초원 위에 높은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있는 마을이다. 눈앞에 펼쳐진 산꼭대기와 그늘진 계곡이 펼쳐지는 라 라구나 데 가스띠야는 언덕을 오르는 순례자들에게 편안한 휴식처 같이 느껴진다.

 

마을로 올라가는 산길

 

 라 라구나 데 카스티야는 알베르게도 하나밖에 없는 아주 조그마한 마을로 주변에 아무런 시설이 없어 오직 알베르게에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했다. 알베르게는 비교적 좋은 시설이었고 넓은 마당은 햇빛이 잘 들어 세탁을 하고 발래를 말리기는 그만이었다. 또 알베르게 안에 식당과 조그마한 슈퍼도 갖추고 있어 번잡함을 피하고 조용하게 머물기는 좋은 곳이었다.

 

 숙소에 도착하면 하는 일상적인 행동을 끝내고 바로 가니 새로운 한국인들이 보인다. 레온에서 출발했다는 약 60이 되어 보이는 사람과 그와 동행한 사람들과 여러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한국인 모녀 중에 딸만 혼자서 들어온다. 엄마와 잠시 떨어져 걷는다고 하며 해맑게 웃는 모습이 아주 건강했다.

 

 저녁을 먹고 그 자리에서 가볍게 맥주를 한잔하면서 일행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주인이 와서 여러 이야기를 한다. 약간의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주인은 한국인 손님이 많이 온다고 하며 아주 친근하게 이야기를 하면서 저번에 우리가 식당에서 얻어 마신 술과 비슷한 술을 특별하다며 한잔을 준다. 

 

 이제 길고 길었던 메세타 고원지대를 벗어나 산이 많은 지역으로 들어선다.

스페인, 산티아고 까미노 길을 걷다. 27(06/12, 폰페라다 - 비야 프랑카 델 비에르소)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오늘의 걷기 길 : 폰페라다 - 콜룸브리아노스(4.5km) - 푸엔테스 누에바스(3.0km) - 캄포나라야(2.0km) - 카카벨로스(5.7km) - 피에로스(3.0km) - 빌투일레 데 아리바 -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7.0km)

 

 오늘은 폰페라다에서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까지 약 25km를 걷는다. 오늘의 걷는 길은 크게 특징적인 마을이나 유적이 있는 길이 아니었으나 중간에 길을 걸으며 여러 추억에 남는 일도 있었고, 마지막 도시에서는 색다른 경험을 하게 만든 날이었다.

 

 오늘도 일찍부터 떠난 길은 템플 기사단의 성 옆에서 어제 오후에 다 지나갔던 성 안드레스 성당, 엔시나 바실리카 성모 성당이 있는 광장으로 이어지고 계속하여 렐로흐 거리를 통해서 시청 광장으로 이어진다. 시청 광장에서 길을 가려니 가게를 정리하던 한 여인이 길을 가르쳐 준다. 우리가 가려는 길이 아니고 아래로 가라고 해서 그 길을 따라가니  예스러운 마을을 지나 시내를 벗어나게 한다.

 

멀리서 보는 템플 기사단의 성

 

 폰페라다에서 도시를 관통하는 실 강변을 따라 공원을 지나서 아무런 구경거리도 없이 우리나라의 빌라 단지와 같이 비슷한 집들이 늘어서 있는 주거지역을 걸으면 콤포스티야에 도착한다. 주거용 단지를 계속 걸으면  축구장이 보이고, 십자가상이 있는 작은 성당 건물을 지난다. 도로와 포도밭을 지나고 아스팔트 도로를 걸으면 토레노와 비야브리노를 지나는 도로와 베가 데 에스피나레다를 지나는 도로가 교차하는 콜룸브리아노스에 도착한다. 마을을 지나가니 아직 시간이 일러 카페는 아무 곳도 문을 열지 않았고 큰 볼거리도 없어 그냥 지나친다.

 

조그마한 성당

 

콜룸브리아노스 표시- 왼쪽에 첨탑이 보이는 산 에스테반 성당

 

 콜룸브리아노스를 지나가며 멀리 보이는 산 에스테반 성당(Iglesia Parroquial de San Esteban)18세기에 만들어진 건축물로 전원분위기를 풍기며 주변의 포도밭과 아름답게 어울린다.

 

 콜룸브리아노스에서 갈라지는 길 중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까미노 표시들 따라 걸으면 부드러운 언덕에 숨어있는 농가와 과수원을 지나고 푸엔테스 누에바스에 도착한다. 마을의 출구에는 공동묘지가 있으며 마을 외곽을 따라 조금 걸으면 캄포나라야에 도착한다. 캄포나라야에서 카카벨로스는 6km 정도로, 이 길은 지친 발걸음을 가볍게 만들어주는 부드러운 흙길이며 완만한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반복된다. 이 길을 걸으면서 길가의 체리를 엄청나게 따 먹었다. 제철이 되어 익어가는 체리는 우리나라에서 먹는 것과는 다른 신선한 맛이었다. 주인도 없는 나무의 체리를 따 먹으며 걸으니 체리를 파는 아저씨가 있다. 너무 따 먹었기에 미안한 마음으로 한 봉지를 사니 1유로라고 하여 놀랐다. 같이 걷던 사람과 이야기하면서 우리나라에서는 최소 20,000원은 받을 정도라 고맙게 사서 마음껏 먹었다. 그러다가 길을 조금 더 가면서 보니 자동차가 한 대 오면서 길가는 사람들 옆에 멈춘다. 멀리서 보며 무엇인가 의문이 들었는데 우리 앞에도 멈추면서 차안의 젊은 운전자가 체리를  나누어 준다. 차에 체리를 싣고 가면서 순례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에게 격려의 표시로 체리를 나누어주는 것이다. 그 인정이 너무나 고맙게 느껴져 이 길을 걷는 의미를 또 달리 생각하게 만들었다. 베품과 나눔은 큰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가장 풍부한 것을 함께 가지는  것도 한 방법이라는 것을 알개 해 주어었다.

 

푸엔테스 누에바스 표시

 

캄포나라야 표시

 

체리를 파는 마을 주민

 

 

 별 특징이 없는 길을 그냥 걸으니 카카벨로스에 도착한다. 카카벨로스는 순례자를 위한 여러 편의 시설이 있는 곳이며, 역사적 사건과 흥미로운 전설이 많은 마을로 비에르소 지방의 특성이 살아있는 매력적인 마을이다. 온화한 날씨로 비에르소 포도주의 중심지이고, 낙천적이고 유머가 넘치는 마을 사람들은 카드놀이를 즐기며, 이 마을에서 타로 카드가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카카벨로스 마을 표시

 

넓게 펼쳐진 포도밭

 

포도밭의 와이너리 표시

 

포도밭

 

 산타 마리아 데 라 플라사 성당(Iglesia de Santa Maria de la Plaza)

 

 카카벨로스의 바에서 커피를 한잔 마시며 쉬다가 마을을 질러가면 보이는 산타 마리아 데 라 플라사 성당(Iglesia de Santa Maria de la Plaza)은 16세기에 재건된 성당으로 우아한 로마네스크 양식을 보여준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려니 문을 닫아놓았는데 문 사이로 제단이 보였다. 그래서 그 사이로 사진을 찍었는데 제단의 예수님이 다소 몽환적으로 보여 더 좋은 느낌이었다.

 

 카카벨로스에서 로마네스크 양식의 소박한 성당 건축물 이외에는 볼 것 없는 피에로스로 가는 도중에 조그마한 마을을 지나는데, 이곳이 포도주의 고장임을 보여주는 옛날의 포도를 짜는 기구가 전시되어 있다. 예전의 우리나라 디딜방아와 유사한 모습으로 포도를 짜내고 와인 생산에 사용될 포도즙을 얻는데 사용되는 전통 건물과 장치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피에로스 가까이 가니 스페인의 규모로 볼 때 강과 같은 제법 큰 개울이 흐르는 위에 그림 같은 집이 지어져 있다. 집 아래로 운하와 같이 물이 흐르는 구조를 보고 누구인지 복받은 사람의 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포도즙을 짜는 도구

 

물 위의 아름다운 집

 

피에로스 표시

 

 피에로스에서 순례자는 아스팔트 포장 길로 올라섰다가 포도나무 사이의 흙길로 들어가 조금 길지만 경치가 아름다운 길로 우회하여야 한다. 이제 순례자는 발투일레 데 아리바라고 불리는 작은 마을을 통과하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하지 못하는 순례자를 위해서 축복과 대사를 펼쳤던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의 산티아고 성당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라 비르헨 도로 끝에 포도밭과 체리나무 소나무 숲이 있고, 이곳을 지나면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다.

 

빌투일레 데 아비라 가는 길 표시

 

끝없이 펼쳐지는 포도밭

 

 

마르케스 후작의 궁전

 

 끝없이 이어지던 포도밭을 지나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에 가까이 가니 궁전은 아니면서 저택의 모퉁이에 탑을 세워 궁전의 위용을  나타내는 마르케스 후작의 궁전(Castillo Palacio de los Marqueses)이 보인다. 이 건물은 16세기 초 벽돌과 돌로 지어졌다..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 표시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에는 아름다운 초원과 숲이 많으며 그림 같은 포도나무 밭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오래된 전통 집, 기념품 가게, 순례자를 대하는 친절한 전통, 맛있고 다양한 요리 등이 이 마을의 볼거리다.

 아구아 거리(Calle del Agua)는 산티아고 가는 길의 특성을 많이 지니고 있는 전형적인 까미노 거리로, 많은 옛 건물을 볼 수 있다. 마을에서 나가는 길에 있는 누에보 다리 근처에는 15세기부터 한 가족이 운영해 온 오래된 여관이 있다.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의 산티아고 성당에서는 병이 들거나 지쳐 순례를 할 수 없는 사람들에 한해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받는 축복과 대사를 받을 수 있게 했다.

 

 

 마을의 입구에 성벽이 가로막고 있다, 그리고 옆에는 산 프란시스코 성당이 약간 높은 언덕 위에 서 있다. 까미노 길은 성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성벽 주변을 돌아 구시가지로 향한다. 오래된 수도원 터에 남아있는 산 프란시스코 성당(Iglesia de San Francisco)은 13세기 로마네스크 양식 현관이 남아 있고, 15세기 고딕 양식의 성당의 두 개의 탑은 17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수도원은 13세기 초반 여왕 도냐 우라까가 지신이 소유하고 있던 저택을 기증하여 설립되었다.

 

성벽

 

산 프란시스코 성당 설명

 

 구시가지로 들어가니 거리가 아주 삼엄하다. 경찰과 군인들이 총을 들고 경비를 서고 있다. 오늘 이 도시에 스페인국왕이 방문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바로 이 거리를 지나가는 것이었다. 산타 마리아 성당에서 국왕이 참석하는 행사가 있는 것이다. 시간이 좀 지난 뒤에 산타 마리아 성당에 가서 보니 산티아고와 비야프랑카 델 비에로스가 6월부터 11월까지 영혼의 이어짐이라는 의식을 거행한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직접 국왕을 보지 못했으나 일행 중에 국왕을 본 사람이 카톡에 사진을 올려놓아서 그 사진을 첨부한다.

 

거리를 통제하고 있는 모습

 

추기경을 비롯한 성직자들

 

대중과 인사 중인 국왕

 

거리의 모습

 

 국왕이 행사를 마치고 가서 조금은 조용해졌지만 여전히 사람이 많은 거리의 식당에 앉아 점심을 순례자 메뉴로 먹고 있으니 많은 성직자들이 지나가는 모습도 보이고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오가는 모습도 보인다.

점심을 먹고 알베르게를 찾아가니 오늘의 숙소인 알베르게는 우리에게 너무 잘 알려진 곳이었다. 원래는 산 니콜라스 엘 레알 수도원(Convento San Nicolas el Real)으로, 17~18세기에 만들어진 수도원 건물 내부에는 수도원의 설립자가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져왔다고 하는 희망의 그리스도’(Cristo de la Esperanza)가 보존되어 있고 현재는 자연사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는 곳이다. 그리고 건물의 일부는 조금 개조를 하여 알베르게로 사용하고 있는 곳이다.

 

 이 알베르게가 왜 우리에게 잘 알려졌는가 하면 모 TV에서 예능 프로로 방영한  '스페인 하숙'의 배경이었던 곳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조금 동경을 가지고 찾아가는 곳이지만 냉정하게 말하면 방송은 어디까지나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하루를 이곳에서 머문 우리 일행들은 대부분이 우리가 거쳐 온 다른 알베르게에 비해 시설이 뒤떨어진다고 말했다.

 

  산 니콜라스 엘 레알 수도원(Convento San Nicolas el Real) 전경

 

 이 수도원 앞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스페인하숙에 나오는 입구가 있고 여기를 통해서 알베르게로 들어간다. 물론 다른 입구로 들어가도 마찬가지이나 TV에 방영된 입구로 일부로 들어갔다.

 

'스페인 하숙' 입구

 

 알베르게에서 휴식을 하다가 저녁도 먹고 일대도 구경을 하기 위해 까미노를 함께 걷는 4명이 광장으로 가서 저녁을 먹고 거리를 통과하여 우리가 머무는 곳을 지나 올라갔다. 올라가니 큰 성당이 나타나는데 바로 오늘 국왕이 행사를 치른 클루니아코의 산타 마리아 성당(Colegiata de Santa Maria de Cluniaco)이었다. 성당으로 가니 행사의 현수막도 걸려 있고 표지도 있었다. 그리고 많은 관광객들이 나오면서 무어라고 말을 하는데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아마도 성당 문을 닫아 내부에는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 같았다.

 

 이 성당은 16세기 후반의 고딕 양식 건축물로 미완성된 상태로 남아 있다고 한다. 그리고 내부에는 바로크 양식의 다양한 봉헌화와 성가대석을 볼 수 있다고 하지만 보지를 못했다.

 

클루니아코의 산타 마리아 성당(Colegiata de Santa Maria de Cluniaco)

 

오늘의 행사 안내

 

행사 안내 현수막을 걸어 놓은 성당

 

 성당을 보고 그 옆으로 가니 부르비아 강(Rio Burbio)이 나타나고 내일 가야한 길 위에 다리(Puente Medieval de Villafranca)가 있다. 다리 위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구시가지가 모두 보인다.

 

 다리( (Puente Medieval de Villafranca ) 

 

부르비아 강(Rio Burbio)

 

누에보 다리에서 보는 시가의 여러 모습 -성당과 수도원 성벽 등등

 

 다리 위에서 시가의 여러 건물들을 보고 옛날 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골목길을 지나 숙소로 돌아오니 제법 시간이 늦었다. 모두가 잠자리에 들 시간이라 내 침상에 누우니 잠이 쉽게 오지 않는다. 잠자리에 누워 오늘 하루를 생각해 보니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졌다. 항상 같은 길을 걷기에 자주 보는 한국의 모녀, 많은 한국의 젊은이들, 대만인과 일본인 그리고 많은 서양인들과 만나면 인사를 하고 또 언제 헤어졌는지도 모르고 길을 걷다가 다시 만나면 인사를 한다. 언제 모르는 사람들을 이렇게 오래 만남과 헤어짐을 계속해 왔던가.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체리를 팔던 아저씨, 차를 타고 가면서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체리를 나누아 주던 젊은이, 이 모든 사람들에게서 인간의 따뜻함을 느낀 하루였다.

 

스페인, 산티아고 까미노 길을 걷다. 26(06.11, 폰세바돈 - 폰페라다)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오늘의 걷기 길 : 폰세바돈 -  철의 십자가(2.2km) - 만하린(2.3km) - 델 아세보(7.0km) - 리에고 데 임보로스(3.4km) - 몰리나세카(4.7km) - 캄포(4.3km) - 폰페라다(3.4km)

 

 오늘은 폰세바돈을 출발하여 산티아고 까미노 길에서 가장 유명한 철의 십자가를 지나 폰페라다까지 가는 약 27km의 길로, 철의 십자가를 지나면 계속 내려가는 길이다. 내리막길이라 쉬운 것 같으나 길은 올라가는 것은 힘이 들지만 내려오는 것은 어렵기도 하고 위험하기도 하다. 길을 걷는 것이 우리 인생을 사는 것과 비슷하다 자신이 노력하면 힘들지만 어느 위치에 올라갈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위치에서 내려오는 것은 나의 의지가 아니기에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더 힘들다. 그래서 내려올 때 더 조심하고 주의해야 한다.

 

 아침에 일어나니 내가 늦게 일어난 것이 아닌데 벌써 사람들이 떠나고 있다. 날이 갈수록 사람들의 출발 시간이 더 빨라진다. 왜 그렇게 서두르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인생을 살아가는 것도 마찬가지인데 조급해 한다고 더 잘 되고 더 크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이 길에서 아직 느끼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다.

 

 

 폰세바돈에서 언덕의 정상에 올라가면 산티아고 까미노 길에서 가장 상징적인 기념물 중 하나인 철 십자가(La Cruz de Ferro)가 있다. 십자가는 심플한 형태로 오래되어 녹이 잔뜩 슬어 있고, 5미터 정도 높이의 지주에 올라가 있다.

 

 원래 이 정상에는 선사시대의 제단이 있었고 로마 시대에 길과 교차로의 신이자 죽음의 신인 메르쿠리우스를 모시는 사제들의 제단이 있었다. 로마 여행자들은 메르쿠리우스에게 자갈을 제물로 바쳤고 이 풍습은 갈리시아인들에게 그대로 전해져서 당시 그들이 카스티야를 여행할 때도 자갈을 제물로 바쳤다고 한다. 그 후 가우셀모 수도원장이 이곳에 첫 번째 십자가를 세우면서 중세의 순례자들은 십자가에 경배하며 고향에서 가져온 돌을 봉헌했다. .

 

 폰세바돈에서 언덕을 오르며 뒤를 돌아보니 해가 떠오르기 시작한다.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평범한 해돋이지만 오늘은 뭉클해진다. 산매자 나무와 금작화 사이의 오르막을 오르면 철 십자가상이 있는 평평한 지역에 다다른다. 이 부근이 평평한 이유는 오랜 기간 순례자들이 주변의 돌멩이를 주워 십자가 주위에 쌓아 두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철 십자가 주위에는 돌멩이가 거의 없으므로 원하는 순례자는 자신의 소망을 담은 돌멩이를 미리 준비하는 것이 좋다. 현대의 순례자들은 고향의 돌을 가져왔던 옛날의 관습을 바꿔서 자신의 물건이나 사진, 쪽지, 기념물 등을 봉헌한다

 

해 뜨는 모습

 

철의 십자가 올라가는 길

 

 한 달이 가까운 시간 동안 까미노를 걸으면서 수많은 십자가상을 보았지만 단순한 모양의 철 십자가상은 커다란 의미로 다가온다. 이곳에는 천 년의 긴 세월 동안 순례자들의 사연이 적힌 돌멩이들이 가득 쌓여 있다. 끝나지 않은 순례자의 소망들은 앞으로도 크게 쌓일 것이지만 조금은 의아스럽다.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은 모두가 이기적인 욕심을 버리고 자신을 찾아 떠난 길이 아닌가? 그런데 아직도 현실적인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무엇을 채우기를 기원하는 것일까?

 

철의 십자가

 

주변의 기도소

 

 철의 십자가 주변에 조그마한 기도소가 있지만 문을 열어 놓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이 돌멩이에 자신의 기원을 담아 십자가 주위에 놓고 머리에 성호를 긋고 기도를 한다. 또 많은 사람은 하늘에 향해 솟아 있는 십자가를 가리키며 마음속으로 무언가를 빈다. 그리고 신앙심이 깊거나 간절한 소망을 가진 사람은 주변의 벤치에 앉아 제법 오랜 시간을 기도한다. 하지만 사실 이 길을 걸으면서 조그마한 성당에 들어가서 보는 십자가나 성모상, 그리고 길가의 작은 십자가들을 볼 때 감동을 느낀 일들도 많았다.

 

반대 방향에서 보는 철의 십자가

 

폐허로 변한 알베르게(?)

 

만하린 표시

 

 철 십자가상에서 오르막과 내리막으로 약 30분을 내려가면 폐허가 된 오래된 마을 만하린이 순례자를 맞아준다. 만하린에서 순례자는 다시 커다란 안테나가 서 있는 언덕의 정상까지 올라간다. 정상에 오르면 마침내 아름다운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며 길고 위험한 내리막길이 이어지는데 이 길은 순례자들에게 육체적 시련을 준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길고 가파른 내리막길은 무릎과 허벅지와 모든 근육에 무리를 줄 수도 있다. 7km 정도 가파른 내리막을 조심해서 내려오면 소박한 꽃들로 장식된 테라스가 인상적인 아름다운 마을  엘 아세보에 다다른다.

 

멀리 보이는 산의 여러 풍경

 

검은 지붕의 마을

 

 엘 아세보는 자연이 선사하는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한 마을로, 이라고 골짜기에서 내려가는 곳에 위치해 있고, 돌과 석판 지붕으로 만든 전통 집에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테라스에서 아름다운 경관을 보며 발을 뻗고 쉴 수도 있다고 한다. 목재로 만든 테라스에서는 돌계단을 통해 마을의 예쁜 길로 내려갈 수도 있다.

 엘 아세보는 오래 동안 가톨릭 왕에 의해 세금과 군대 징집을 면제받았다. 대신 그들은 산티아고 순례자들이 가는 산속 길이 눈으로 사라졌을 때 골짜기에 길을 표시하는 말뚝 400쌍을 박아놓아야 하는 의무를 가졌다. 얼마나 엘 아세보가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지를 증명해 주는 징표다.

 

엘 아세보 표시

 

 엘 아세보의 산 미겔 교구 성당(Iglesia Parroquial de San Miguel)은 전원풍의 건축물에 로마네스크 양식의 산티아고 상이 보존되어 있는 성당이다. 이 성당의 조각상에는 사도 야고보에게 나타나는 전형적인 특징인 조개껍데기와 표주박이 보이지 않는다. 성당을 들어가려고 하니 문이 잠겨 있어 바깥에서 잠시 쉬고 있으니 자전거로 순례를 하는 사람들이 와서 사진을 찍으며 휴식을 한다.

 

산 미겔 교구 성당(Iglesia Parroquial de San Miguel)

 

리에고 데 암보로스 표시

 

 엘 아세보에서 한 시간 가량 내리막길을 내려오면 리에고 데 암브로스가 보인다. 이 마을은 울창한 밤나무 숲 사이에 있는 전형적인 산속 마을로 순례자들은 숲에서 더위를 식히고 샘 옆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이 마을에는 아직까지도 아름다운 전통 시골 건축이 많이 남아 있는데, 목재로 만든 발코니는 엘 아세보와 비슷하다. 마을을 나가는 길에는 메루엘로 시내 위에 16세기의 다리가 있다.

 

리에고 데 암보로소 안내도

 

리에고 데 암보로소 마을에 조그마한 예배당이 있다. 현대에 지은 것 같은 건물인데 상당히 정감이 가 들어가니 일반적인 성당과는 조금은 다르게 보이는 조그마한 제단이 있고, 옆에는 기도초를 밝히도록 하여 놓았다. 그곳에서 기도초를 밝히고 잠시 기도를 하고 나와서 다시 길을 계속하니 다소 가파른 돌길을 따라 내려와야 했다. 길은 다소 험하였으나 주변을 돌아보면 경치는 감탄할 만하였다.

 

산 세바스티안 예배당

 

제단의 모습

 

몰리나세카 가는 길의 풍경

 

 마을을 나서서 시내를 지나는  메루엘로  강을 16세기에 중세의 돌로 만든 다리를 건너면 이제 몰리나세카까지는 4km 정도다.

 

 몰리나세카는 까미노 프란세스에서 중세의 외관과 분위기를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마을이다. 마요르 거리에는 중세에 만들어진 다리와 문장이 있는 전통 건축과 발보아의 저택, 16세기에 만들어진 순례자 병원 등이 모여 있다. 또한 다리가 있는 곳에 자연을 그대로 활용한 수영장이 있어서 몰리나세카는 자연스럽게 산티아고 가는 길에 손꼽히는 명소다.

 

 몰리나세카에는 포도주, 사과(Manzana Reineta), 고추(Pimiento), 소시지(Botillo), 육포(Cecina), (Pera)의 여섯 가지 음식이 이 마을을 대표한다고 한다. 이 마을의 여러 음식점에서는 여러 음식들을 즐길 수 있다. 또 순례자의 피로를 풀 수 있는 술로는 비에르소 포도주나 지역에서 빚는 아구아르디엔테(Aguardientes; 증류주의 일종)가 있다고 한다.

 

몰리나세카 표시

 

 마을 입구에서 안구스티아스 성모의 성소(Santuario de la Virgen de las Angustias)가 맞이한다. 18세기의 건축물로 이 성소의 문은 금속 덮개로 단단히 덮여 있는데, 그 이유는 순례자들이 이 성소의 나무문에 돌을 던지면 순례도중 행운이 따른다는 미신으로부터 나무로 만든 현관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현관문의 설명에는 조금 다르다. 하지만 나무문을 보호하기 위해서 철판을 덮었다는 결과는 같다.

 

안구스티아스 성모의 성소(Santuario de la Virgen de las Angustias) 문에 대한 설명

 

안구스티아스 성모의 성소(Santuario de la Virgen de las Angustias)

 

순례자의 다리 설명

 

 설명에 의하면 순례자는 이 다리를 건너 마을의 중심부에 도착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 다리는 여러 차례 확장이 이루어졌는데 최종 확장은 1980년에 이루어졌다고 한다.

 

순례자의 다리

 

몰리나세카 마을

 

십자가 상

 

 몰리나세카의 예스러운 거리를 지나 십자가상을 지나니 현대식으로 조성된 건물이 보인다. 가까이 가니 호텔과 식당을 겸하고 있는 곳이다. 바깥의 테이블에는 이 길을 걷는 서양인들이 앉아 음식을 먹고 있어서 시간도 점심때가 되어서 같이 길을 걷는 동행에게 점심을 먹고 가지고 하여 나는 햄버거를 시켰는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먹는 햄버거가 아니라 무슨 요리와 같았다. 버그 안의 소고기는 너무 커 하나의 스테이크 같았다. 점심을 먹으면서 한 시간 정도 휴식을 하고 난 뒤에 다시 길을 갔다. 

 

호텔 겸 음식점

 

몰리나세카 안내 설명

 

 몰리나세카를 지나 길을 걸으면 나무에 매달려 있는 체리를 수도 없이 본다. 길가에 주인도 보이지 않는 나무라 지나가면서 따 먹으니 제법 맛이 있다. 비교적 잘 익은 열매만 따서 먹으니 상큼한 맛이 입맛을 돋우었다. 이곳에서 단조로운 길을 걸어가면 있는 마을 캄포는 순례자의 발길을 잡는 특별한 건축물이나 이야기가 없는 평범한 농촌 마을이다. 마을을 나와서 도로의 왼쪽으로 걸으면 멀리 폰페라다와 파하리엘 산이 보인다. 이 구간은 엘 비에르소의 가운데를 관통하는 긴 내리막길이 이어지는 길이다. 몰리나세카에서 폰페라다까지는 약 8km로 마스카론 다리를 건너 폰페라다에 오후 3시경에  도착한다.

 

캄포 표지판

 

폰페라다 표지

 

 폰페라다(Ponferrada)는 마치 황금빛 갑옷을 입은 기사가 백마를 타고 나올 것 같은 템플 기사단의 성이 인상적인 산간도시로 레온주(Provincia de León) 서부에 위치한 실 강이 지나는 까미노 프란세스 길의 주요 도시다. 행정구역상 비에르소 지구(Comarca de El Bierzo) 최대의 도시이자 행정 중심지이며 평균 고도 544m의 고지대에 자리 잡고 있다. 로마 제국 시대부터 광업의 중심지로 성장했으며 도시 기반이 확립된 시기는 11세기로 현재 도시의 중심지는 로마 시대 이전의 주거지 위에 세워졌다. 현재의 도시 이름은 철로 된 다리'를 뜻하는 라틴어인 '폰스 페라타'(Pons Ferrata)에서 유래된 이름인데, 라틴어로 폰은 다리, 페라타는 철을 뜻하며, 1082년 아스토르가의 주교 오스문도(Osmundo)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자들이 실 강과 보에사 강을 안전하게 건널 수 있도록 건설한  고대 다리를 철재로 보강한 것에서 유래한다.

 페르난도 2세는 순례자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 이 도시를 템플 기사단에게 맡겼고, 폰페라다는 산티아고로 가는 순례자들을 보호하고 돌보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 때문에 도시에는 템플 기사단의 성벽이 세워졌다.

 

 한때 스페인 석탄 산업의 중심지였으나 1980년대 말에 들어서 많은 광산이 폐광되면서 광업이 쇠퇴했으며, 현재 산티아고 순례길이 활성화된 덕분에 관광업이 발달하고 농업, 포도주 산업 등이 주산업이 되었다. 폰페라다는 마법과 아름다운 풍경, 역사로 가득한 땅으로 비에르소 지방의 음식을 맛보기에 가장 좋다고 한다.

 

 폰페라다에는 역사적 건축물을 비롯한 많은 관광 명소가 자리 잡고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1178년 레온의 페르난도 2세가 순례자 보호를 위해 템플 기사단을 이곳에 설치했으며 이들이 주둔한 템플라리오스 성(Castillo de los Templarios)은 현재 복원돼 있다. 또 중세시대에 건축한 산안드레스 교회(Iglesia de San Andrés), 유서 깊은 시청사 등이 있다.

 

폰페라다 입구의 마스카론 다리

 

 마스카론 다리를 건너 숙소인 알베르게에 들어가 땀으로 제법 젖은 몸을 씻고 구경을 나갔다. 숙소에서 조금 가면 템플 기사단의 성(Castillo de los Templarios)이 우뚝 서 있는 모습을 본다.

 

 현재 중세 시대의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흔히 등장하는 붉은색 십자가가 표시된 흰색 겉옷이 상징인 템플기사단(Ordre des Templiers)은 십자군 전쟁 때 성지 순례자 보호를 목적으로 설립된 종교기사단으로 본래 명칭은 그리스도와 솔로몬 성전의 가난한 기사들(Pauperes commilitones Christi Templique Solomonici)’이며, '성전 기사단' 또는 '성전 수도회'로도 불린다. 1118년 성지 수호를 제창한 프랑스의 기사 위그 드 파양스(Hugues de Payens) 아래 9명의 기사들이 모여, 성 요한 기사단의 예를 모방하여 아우구스티누스회의 회칙을 지키며 살 것을 맹세하였다. 예루살렘의 보두앵 2(Baldwin II)는 예전에 솔로몬 왕이 건립한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지역에 그들의 거처를 주었는데, 여기서 이 단체의 명칭이 유래했다. 클레르보 수도원장 베르나르의 후원에 의해서 트로아교회회의(1128)에서 새로운 형식의 기사수도회로서 인가되고, 1129년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공인받으면서, 기사단은 빠르게 성장하였다. 단원들은 대부분 십자군전쟁의 격전지에서 활동하였고, ()전투 단원들은 금융업으로 엄청난 재산을 축적하고 많은 요새를 건설하였다. 하지만 성전 기사단의 비밀 입단식에 대한 루머가 만들어지면서 이단으로 의심을 받았다. 이후 1307년에 이르러 기사단에 큰 빚을 진 프랑스 왕 필리프 4세가 왕권 신장의 수단으로 이들을 이단으로 간주, 프랑스 각지에 있는 3,000여 수도원의 회원들을 모두 체포하고 재산까지 몰수한 뒤 고문을 통해 거짓 자백을 강요받고 화형에 처하는 이단 심문을 6년간 단행하였다. 교황 클레멘스 5세의 항의로 별도 조사를 하였으나, 1312년 클레멘스 교황은 결국 굴복하여 기사단에 해산령을 내려 이 기사단은 결국 해체되고, 재산도 요하네스기사수도회로 승계되었다. 최초의 기사수도회로서 십자군 전쟁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이 기사단은 다소 신비스러운 집단으로 평가를 받았고, 오늘날에도 그들의 후예가 비밀 결사로 존재한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고, 세계적 베스트셀러였던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 코드> 등에 등장한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향하는 순례자를 보호하는 임무를 부여 받아 1178년에 건축된 이 성은 돌로 만들어진 거대한 암호이자 템플기사단의 비밀스러운 기호가 숨어있다고 전해진다.

 

 당시 기사들은 세 겹의 성벽에서 세 번의 맹세를 해야 했고, 성벽에 있는 열두 개의 탑은 별자리를 의미했다. 기사단의 가장 중요한 보물인 성배와 성궤에는 전통에 따라 후세의 기사들에게 전달하는 메시지가 숨겨져 있다고 전해진다. 또한 템플 기사단의 기도문 속에는 이 두 보물의 위치를 알려주는 비밀스런 메시지가 숨겨져 있다고 전해진다.

 폰페라다에서는 매년 7월 중순 여름의 첫 번째 보름달이 뜰 때 중세의 템플 기사단을 기리며 밤을 보내는 축제를 벌인다. 중세의 복장을 한 사람들이 템플라리오 광장부터 성채까지 행진을 하고, 템플 기사들에게 성배와 성궤를 헌납하는 모습을 재현한다.

 

템플기사단 성

 

템플기사단 성 주위 마을

 

 성벽을 보고 성안을 구경하려고 성안으로 들어가는 다리를 건너니 시간이 아직 되지 않아서 들어갈 수가 없다는 표시가 붙어있어 어쩔 수 없이 주변을 잠시 구경하니 중세에 세워진 17세기의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축 된 성 안드레스 성당(Iglesia de San Andres)이 눈에 보인다. 성당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중세 성직자 복장을 한 상이 보이고, 성벽의 하천을 따라 맥주집이 줄을 지어 있었다. 바쁜 것도 없어 안산의 채선생과 맥주를 한잔하기로 하고 시키니 조금은 이상한 가격을 받았다. 실내와 실외의 맥주 가격이 조금 차이가 있었다. 실외의 가격이 조금 더 지불해야 했다. 아마도 주변 경치를 즐기는 조망권 가격이라고 생각하며 바깥에서 한가로이 맥주를 마시다가 우리 일행을 불렀다. 

 

성 안드레스 성당(Iglesia de San Andres)

 

성 앞의 중세 성직자상

 

템플 기사단의 성(Castillo de los Templarios)의 여러 모습

 

 지체없이 달려온 일행들과 가볍게 맥주를 한잔하고 시내를 구경하러 올라갔다. 성벽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이 도시의 대표적인 성당 엔시나 바실리카 성모 성당(Basilica de Nuestra Senora de la Encina)을 만난다. 이 성당은 르네상스 시대에 지어진 라틴 십자가 평면의 성당으로 1573년 로마네스크 양식 성당이 있던 자리에 다시 지어졌다. 성당의 내부에는 13세기 고딕 양식의 그리스도상이 있다. 수많은 순례자들과 신자들이 성당을 찾는 이유는 이 성당이 떡갈나무의 성모와 템플기사단의 전설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성당 안에는 16세기에 만들어진 비에르소의 수호성인인 엔시나의 성모상이 있다. 이성당의 떡갈나무의 전설을 대략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어떤 템플 기사단원이 성의 대들보로 쓸 나무를 구해오라고 나무꾼에게 명령했다. 대들보로 사용할 큰 나무를 얻기 위하여 숲으로 들어간 나무꾼들은 이상한 빛을 보았고, 그 빛은 신비스러운 광채를 뿜고 있는 떡갈나무로 그들을 인도했다. 나무꾼의 말을 듣고 숲으로 간 기사는 커다란 떡갈나무 구멍에 성모상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템플 기사단은 이 성모상을 위해 성전을 짓고 엔시나의 성모를 이 지역의 수호성인으로 삼았다. 당시 나무를 자르는 과정에서 성모상이 안고 있던 아기예수의 다리 부분이 도끼에 상처를 입게 되었고, 그 이후로 폰페라다의 사람들은 항상 성 모자에 기도를 올린다고 한다.

 

성당 벽에 붙어 있는 템플기사단 문장

 

엔시나 바실리카 성모 성당(Basilica de Nuestra Senora de la Encina)

 

엔시나 바실리카 성모 성당(Basilica de Nuestra Senora de la Encina) 내부

 

성당 앞의 템플가사상

 

 성당을 나와 슈퍼를 찾아가면서 마을의 이곳저곳을 구경하니 이 마을이 오래 된 전통을 가지고 있는 표시가 여러 곳에 나타난다. 옛 성벽이나 광장 그리고 성문 등이 곳곳에 눈에 띄이었다. 시내를 구경하고 슈퍼에서 내일을 위한 먹거리를 장만하고 알베르게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잠시 있다가 저녁 미사에 참석하려고 알베르게를 나서니 같은 길을 걷고 있던 여인이 함께 가자고 하여 조금 일찍 나가서 템플기사단 성을 구경하자고 했다.  성으로 가니 저번에 왔을 때 닫아놓았던 성은 문을 열어서 안으로 들어가 한 바퀴 돌면서 구경을 하고 성당으로 가서 저녁 미사를 드렸다. 일반 미사를 마치니 순례 길을 걷는 사람들을 위해 따로 모아서 사제가 강복을 해 주시고 기념품을 주셨다. 이 길을 걸으며 미사에 참석하면 대부분의 성당은 순례자들을 위해 따로 강복을 해 준다. 그것만으로도 이 길을 걸으면서 받는 축복이라 생각하며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옛 성문

 

구 시청사 건물과 왕립 감옥 표지판

 

마을의 모습

 

시청

 

폰페라다 시내의 여러 모습

 

템플기사단 성에서 보는 폰페라디

 

 12~13세기에 지어진 템플 기사단의 성은 8000㎡ 정도의 면적에 일정하지 않은 형태로 총안과 방어용 망루, 맹세의 탑 등이 있다. 외부에서 보는 성은 매우 장엄하고 견고한 모습으로 사람을 압도하지만 내부는 너무 단조롭다.

 

템플기사단 성 내부의 모습 - 단조로운 구조다.

 

 미사를 마치고 알베르게로 돌아오니 벌써 21시가 지났다. 이 길을 걷는 평소에 비하면 상당히 늦은 시간이었다. 그래서 오늘의 하루를 정리하고 내일을 위해 잠자리에 든다.

 

스페인, 산티아고 까미노 길을 걷다. 25(06.10, 아스토르가 - 폰세바돈)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오늘의 걷기 길 : 아스토르가 - 무리아스 데 레치발도(6.5km) - 산타 카타리나 데 소모사(4.6km) - 엘간소(4.1km) - 라바날 데 카미노(7.0km) - 폰세바돈(5.5km)

 

 오늘은 아스토르가를 출발하여 폰세바돈까지 가는 약 28km의 길로 대개 1,000m가 넘는 고원을 걷다가 마지막인 폰세바돈을 올라가는 길은 약 1500m 정도가 되는 고지대로 올라가는 길이다.

 

 이제 오래 동안 걸었던 메세타 고원이 끝나고 레온의 산맥들이 펼치는 새로운 풍경이 나타난다. 과거 이 고장은 마라가테리아로 불렸는데 짙은 황토밭과 기후는 사람들을 폐쇄적으로 만들어 이 지방의 사람들은 같은 지방의 사람들끼리 혼인을 하는 풍습을 가지고 있다. 이 길에서는 마라가테리아 마을의 포근한 정취를 느낄 수 있다. 라바날 델 카미노는 그런 정취가 살아있는 마을이며, 베네딕토회 수사들의 작은 수도회 미사에서는 황홀한 그레고리안 성가를 들으며 기도 할 수도 있다. 길을 걷다 보면 까미노 프란세스에서 가장 높은 폰세바돈을 멀리서 볼 수 있다.

 

 아침 일찍 길을 떠나 어제 거닐었던 거리와 광장을 지나니 그렇게 북적거리던 거리는 인적이 없고 적막하며 길 떠나는 순례자들의 모습만 보인다.

 

 

시청 앞 광장

 

 길을 걸으며 주교궁 주위에서 어제 보지 못한 로마 성벽을 보려고 잠시 발길을 돌려 오른쪽 밑으로 내려갔다. 원래 아스토르가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곳인데 중간 중간에 성벽이 끊어지고, 도시에 남아 있는 로마 성벽(Muralla Romana)은 로마인들이 회반죽과 돌로 지은 성벽을 13세기에 보수한 것으로 제대로 된 성벽을 보려면 주교궁 아래에 있는 성벽을 보아야 한다.

 

주교궁 아래의 로마 성벽

 

나폴레옹과의 전쟁 설명

 

로마의 문 표시

 

성벽 위에 지어진 주교궁의 모습

 

성벽 아치

 

 로마 성벽을 보고 대성당 뒤로 돌아가 다시 까미노 길에 합류하여 길을 걷는다. 아스토르가 산타 마리아 대성당을 지나 표시를 따라 도시 출구에서 현대식으로 지어진 교회를 만난다. 고딕과 로마네스크 양식이 대부분인 옛 성당만 보다가 현대식 건물인 교회를 보니 새삼 새롭다. 마드리드와 아 코루냐를 연결하는 도로를 건너 친절한 까미노 표시를 따라 계속 직진하여 오래된 에세 오모 수도원을 만나면 발데비에하스에 도착하게 된다.

 

 발데비에하스는 작은 마을로 에세 오모 수도원 이외에는 특별한 볼거리도 없어 마을을 지나 공장 지대를 지나면 도로와 만나게 된다. 도로를 지나면 세 갈래로 갈라진 길 중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길을 가면 헤르가 강의 다리 앞에서 다시 만난다. 다리를 건넌 왼쪽으로 무리아스 데 레치발도로 이어지는 길로 간다.

 

현대식 교회

 

산토 스피티투스 수도원

 

Ermita del ECCE Homo에 여러 나라 언어로 쓴 신앙의 글

 

Ermita del ECCE Homo

 

무리아스 데 레치발도 표시

 

 무리아스 데 레치발도는 작은 마을로 17세기에 만들어진 마라가테리아 전통양식의 소박한 집과 산 에스테반 성당과 같은 건축물이 있지만 그냥 지나서 간다. 마을을 등지고 이어지는 길은 약 4km에 걸쳐서 완만한 오르막길로 산타 카타리나 데 소모사까지 순례자를 인도한다.

 중간에 조그마한 성당에서 세요를 찍어 주고 있었다. 이 길을 걸으면서 작은 성당에서는 세요를 찍고 꼭 기도초를 밝히며 헌금을 하고 지나가는 것은 이제 일상이 되었다.

 

길가에 피어 있는 애니시다

 

지천으로 피어 있는 양귀비 꽃

 

산타 카타리나 데 소모사 표시

 

 산타 카탈리나 데 소모사는 덤불과 키 작은 떡갈나무, 목장으로 둘러싸여 있는 조그마한 마을이다. 소모사는 라틴어로 산 밑이라는 뜻으로, 마을 끝에는 순례자들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이라고 산이 있다. 이 마을도 마라가떼리아 전통 건축물이 있고, 종탑이 있는 성당도 있고, 마요르 광장에는 마라가테리아 지방의 유명한 탐보릴레로(Tamborilero; 작은 북) 연주자인 아킬리노 파스토르의 흉상이 있다.

 

 이 길을 가는 도중에 갑자기 비가 온다. 가랑비 정도가 아니라 제법 굵은 비가 오기에 길을 걷는 사람들은 우의를 입고 길을 걷느라 상당히 불편해 한다. 이제부터 비가 제법 오는 지방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산타 카탈리나 데 소모사 마을 입구와 안내도

 

마라가테리아의 전통적 마을 풍경

 

산티아고 250km 표지석

 

십자가

 

목장의 모습

 

마을을 지나는 레알 거리를 지나면 마을의 끝에서 십자가상을 만나게 되고 길들이 만나는 지점에서 200미터 정도 도로를 걷다가 오른쪽의 길을 약 한 시간 정도 꾸준히 오르막을 걸으면 멀리 폰세바돈의 모습이 보이면 이제 엘 간소에 도착한 것이다. 스페인어로 간소는 거위 혹은 조금 모자라는 사람을 의미한다는데. 어떻게 이런 이름이 붙었는지는 알 수 없다. 제법 오던 비는 그치고 파란 하늘이 보이니 마음이 상쾌해진다. 기상의 변화가 너무 심하다.

 

 엘 간소 입구에서 거리를 따라 마을을 통과하여 라바날 델 카미노까지는 오르막과 내리막이 계속 반복된다. 송전탑을 지나면 순례자의 앞길에 레게리나스 계곡의 시내가 지나고 평화스럽게 보이는 평원과 순례자의 쉼터로 안성맞춤인 100년은 넘어 보이는 커다란 떡갈나무는 마을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려주는 표지판이다.

 

라바날 데 카미노 표시

 

 서고트식 이름을 가진 마을의 기원에 대해서는 1700년경에 홍수가 나서 원래 있던 주거지가 모두 파괴되었고, 헤르가 강변에 현재의 마을이 재건되었다는 것 이외에는 정확히 기록된 것이 없다.

 

 라바날 델 카미노는 수많은 전설과 역사가 존재하며, 중세부터 순례자들이 찾아오는 마을로 오늘날까지도 많은 순례자들이 이곳을 찾는다. 마을 밖의 떡갈나무 숲은 순례자들에게 근사한 그늘과 휴식을 제공한다.

 

 마을의 성모 승천 성당(Iglesia Parroquial de la Asuncion)12세기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물로 성당의 전면에는 앞으로 구부러진 형태의 로마네스크 창문 세 개가 보존되어 있다.

 이 성당은 폭풍우가 마을로 다가오면 신도들이 성당에 모여 성 바르바라에게 도움을 청하며 성당의 종을 치면 폭풍우가 마을을 비켜가 해를 입지 않는다는 기적이 전해진다.

 

 이 마을에서 시간도 어느 정도 되었고 시장도 하여 같이 길을 걷는 동행과 간단히 식사를 하기로 하고 카페에 들어가 점심을 먹고 쉬다가 다시 길을 간다.

 

성모 승천 성당(Iglesia Parroquial de la Asuncion)

 

 

 

 폰세바돈을 가는 도중에 길가에 한글로 사람 이름 명기된 돌을 보았다. 처음에는 이 길에서 흔히 보이는 자신의 이름을 명기한 것으로 생각하고 지나려고 했으나 같이 가던 일행이 우리 이름이 쓰여 있다고 하여 자세히 살펴보니 생장에서 같이 출발한 사람들의 이름이 모두 써 있다. 우리를 인솔하는 사람이 기념으로 오늘 써 놓은 것이었다. 작은 정성이지만 사람을 감동시키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나중에 폰세바돈 숙소에 도착하여 이 이야기를 하니 아무도 그 돌을 보지 못했다고 하여 안타까웠다. 내가 사진을 찍어 놓았다고 하니 카톡으로 보내달라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카메라로 찍은 사진이라 공유할 수가 없었다.

 

길가에 순례길에 동행한 사람들의 이름 표시

 

 

 아주 작지만 쾌적한 마을 라바날 델 카미노에서 폰세바돈까지 5.5km는 언덕을 올라간다. 마을 출구에서 1km 정도를 걸어가면 자동차 전용도로가 나오며 까미노는 도로와 나란히 폰세바돈까지 이어진다. 약 1,500m의 언덕을 넘어가지만 경사가 심하지 않는 완만한 길이다. 언덕을 오르면 큰 나무들은 점차 사라지고, 세찬 바람을 맞으며 언덕의 정상을 향해 가야 한다. 중간에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황량한 마을의 벽돌집이 늘어선 길을 지나 너덜지대를 걸어가서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폰세바돈이 나온다. 오래전부터 버려진 집으로 가득했던 이 마을은 순례자의 수가 증가하며 점점 회복하기 시작해서 여러 알베르게가 생겼다. 산속의 위치한 작은 마을이지만 중세 레온의 왕 라미로 2세가 10세기에 회의를 개최했었던 곳이고, 수도원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 후 11세기에 수도원장이었던 가우셀모가 순례자를 위한 병원을 세웠고, 그의 이름을 따서 병원과 성당, 수도원의 이름을 바꾸었다. 분수와 종탑 이외에는 현재 남아있는 것은 없다.

 

폰세바돈 표시

 

마을 입구의 십자가

 

애니시다

 

 

 14시경에 알베르게에 도착하여 중간에 비를 맞은 몸을 씻고 세탁도 하고 난 뒤에 휴식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했다. 이제 길을 걸은 날도 많이 지나고 있기에 조금씩 피로도 느끼기 시작한다. 중간에 만난 사람들이 보이지 않다가 보여 이야기를 해 보면 몸이 불편해서 차를 타고 한 두 구간을 지났다는 사람도 있었다. 이 길을 걷는 것이 자신의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걸어야 하는 것은 아니기에 자기 몸의 상태를 잘 살펴서 걸어야 한다.

 

 폰세바돈이 제법 높은 곳에 위치하기에 이곳에 오는 도중에 보는 경치가 장관이었다. 평원이 아니라 산 언덕길을 걸었기에 멀리 보이는 경치는 지나온 길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풍경이었다.

스페인, 산티아고 까미노 길을 걷다. 24(06.09, 산 마르틴 델 카미노 - 아스트로가)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오늘의 걷기 길 : 산 마르틴 델 카미노 -  푸엔테 데 오르비고(6.8km) - 오스피탈 데 오르비고(1.1km) -  비아레스 데 오르비고(2.2km) - 산티바네스 데 발데이글레시아스(2.5km) - 산 후스토 데 라 베가(7.6km) -  아스토르가(3.8km)

 

 오늘은 산 마르틴 델 카미노에서 아스토르가까지 약 24km의 길을 걸어야 한다. 오늘은 두 개로 나누어진 까미노 길은 오르비고 다리를 건너기 전에 하나로 합쳐지지만 마을의 출구에서 다시 나뉜 길은 산 후스토 데 라 베가를 가기 전, 성 토르비오의 십자가에서 하나로 합쳐져 아스토르가로 이어진다.

 

 이제는 습관적으로 시간이 되면 일어나 짐을 챙기고 간단히 요기를 하고 길을 떠나는 시간은 인적이 없는 시간이다. 서양 사람들은 거의 아침을 늦게 시작한다. 그러니 새벽 같이 길을 걷는 사람은 순례자뿐이다.

 

어둠의 산 마르틴 델 카미노 거리

 

 산 마르틴 델 카미노의 출구 파라모 운하를 지난 순례자는 도로의 오른쪽으로 나란히 이어지는 길을 걸어야 한다. 길을 떠나면 오르비고라는 이름이 붙은 여러 마을을 만난다. 그 중에 가장 아름답고 인상적인 오스피탈 데 오르비고의 다리까지는 8km 정도로 약 2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넓은 농경지와 들판, 시원하게 뻗어있는 물푸레나무의 그늘이 순례자를 맞아주며 이윽고 길은 마을의 초입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도로와 멀어진다.

 

도로 옆을 따라 걷는 사람들

 

오스피탈 데 오르비고 표지판

 

 버드나무가 울창한 오스피탈 데 오르비고는 오르비고 강의 다리를 사이에 두고 두 개의 마을로 나뉘어져 있다. 오스피탈 데 오르비고(Hospital de Órbigo)는 레온지방, 리베라 델 오르비고 지역에 있는 소규모 자치단체로 중세시대 오르비고 강가에 있던 산타 마리아교회를 중심으로 작은 마을이 형성됐다. 당시 이 마을 명칭은 푸엔테 델 오르비고였다. 16세기말 푸엔테 델 오르비고에서 강 건너편에 순례자를 위한 산후안(성요한)예루살렘기사단이 병원(지금의 성당)을 짓고 이 근처에 '오스피탈 데 오르비고'란 마을이 형성됐다. 이 마을은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다. 오스피탈 데 오르비고는 농업과 목축업이 주축을 이루고 지금은 관광산업이 부상하고 있다고 한다.

 

오르비고 강 표시

 

명예로운 걸음의 다리(Puente del Passo Honroso)

 

 13세기에 세워진 오르비고 강 다리의 원 이름이 푸엔테 델 오르비고인데, 1434년 수에로 데 키뇨네스(Suero de Quinones)가 이 다리에서 파소온로소(paso Honroso, 마상창시합)을 열어 파소온로소다리라고도 불린다. 명예로운 걸음의 다리(Puente del Passo Honroso)는 여러 시대에 걸쳐 만들어진 19개의 아치로 가장 오래된 것은 13세기의 아치다. 다리 중간에는 아직까지 당시의 사건을 설명하는 이야기가 새겨져 있다. 이 다리는 아치의 보존상태가 아주 좋아 지나는 나그네들이 사진을 찍기에 여념이 없다. 19세기에 주민들은 나폴레옹 군대가 다리를 건너는 것을 막기 위해 다리의 양쪽을 파괴했다고 한다. 강에 비해 다리 크기가 엄청나게 커 보이지만 바리오스데루나 저수지를 건설하기 전까지 오르비고 강은 꽤 큰 강이었다고 한다. 여러 차례 보수작업이 이뤄졌으며 1939년 국가유적으로 지정됐다. 이 다리는 까미노 데 산티아고에서 가장 긴 다리이다. 또한 스페인에서 가장 유명한 기사도 정신이 발휘된 곳이다.

 

 이 다리의 이름에 얽힌 이야기는 아래와 같은 이야기가 있다.

 

 후안 2세 시절, 기사 돈 수에로 데 키뇨네스는 그의 연인인 도냐 레오노르 데 토바르와 기묘한 약속을 했다. 그녀에 대한 사랑의 표시로 매주 목요일 목 칼을 차고 다니기로 한 것이다. 만약 약속을 어기면 300개의 창을 부러뜨리거나 오르비고 강 위의 다리에서 한 달 동안 결투를 하기로 했다. 돈 수에로는 이 약속을 지키는데 지쳐서 싸움을 허락해 달라고 왕에게 요청하고, 유럽 전역에 있는 여러 명의 기사들에게 자신이 목 칼을 벗을 수 있게 도와달라는 편지를 썼다. 이에 수많은 기사들이 싸움에 참가해서 그의 편에 서기도 했고, 그와 맞서 싸우기도 했다. 1434710일부터 89일까지 725일 성 야고보의 축일을 제외하고 약속대로 한 달간 창 싸움이 이어졌다. 수많은 창이 부러졌고 기사들 중엔 부상자도 있었고, 한 명은 사망하기까지 했다. 마침내 결투가 끝나자 돈 수에로는 목 칼을 벗었다. 그 후 그는 자유의 상징인 도금된 은 족쇄를 성 야고보에게 바치기 위해 산티아고로 순례를 떠났다. 지금도 산티아고 대성당에는 그가 바친 족쇄가 보존되어 있다. 이 결투 중에 사망한 한 명의 기사는 기독교식 무덤에 잠들 수 없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가톨릭이 이러한 종류의 결투를 인정하기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돈 수에로는 24년 뒤 이 다리 위에서 또 다른 결투를 하다가 다른 기사의 손에 죽었다. 이곳에서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돈 수에로가 벌인 결투를 기리는 축제가 매년 6월의 첫 번째 주말에 열린다. 이때는 도시 전체를 중세 식으로 꾸며놓고 중세식 시장을 열고, 마을의 사람들이 중세 복장 축제를 즐긴다고 한다.

 

 다리를 건너면 바로 옆에 카페가 있다. 길을 걷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이 카페에 앉아 음료와 빵을 먹으며 다리를 감상한다. 카페에 들어가니 자리를 잡기가 어려웠는데 카페 밖 베란다에도 좌석을 마련해 놓아 앉아서 경치를 즐기니 길을 걸으면서 만났던 많은 사람들이 보인다. 앞에서 수차 이야기했던 한국인 모녀와 한국의 젊은이들 다른 외국인들이 모두 즐겁게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고 있다. 그 중에서 한 젊은 여자가 말을 걸어와 이야기를 하니  인천에서 와서 혼자서 이 길을 걷고 있다고 한다.

 

 쉬고 나서 다시 길을 시작하는 마을에 보이는 세례자 요한 성당(Iglesia Parroquial de San Juan Bautista)은 예루살렘의 성 요한 기사단에 속해 있던 성당으로 현대에 재건축되었다. 오늘날도 파사드에서 찬란히 빛나는 기사단의 십자가를 볼 수 있다.

 

오스피탈 데 오르비고 마을 안내

 

세례자 요한 성당(Iglesia Parroquial de San Juan Bautista)

 

 마을의 출구에서 길은 양쪽으로 갈라지는데 재미있게 길을 구분해 놓았다. 직진하는 길에는 우는 얼굴에  road(도로 따라 가는 길)라 표시되었고, 오른쪽 길은 웃는 얼굴로 way로 표시하여 마을길임을 알리고 있다. 레알 까미노를 걷기 위해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길을 선택해야 한다. 구 시가지와 소박한 들을 지나는 아름다운 길로 이어지는 중간에 오른쪽으로 산 펠리스 데 오르비고로 이어지는 길을 지나치면 비야레스 데 오르비고에 이르기까지 북서쪽으로 길이 이어진다.

 

 이 길을 걸으며 오스피탈 데 오르비고 마을의 카페에서 만났던 인천에서 온 젊은 여성과 함께 걷게 되어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그 여성은 30대 초반으로 회사를 다니다가 그만두고 무언가를 찾아보기 위해서 이 길을 걷기로 하였다고 말하며 자신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이 길에서 만난 젊은이는 대개가 직장을 그만두고 길을 걷는다 하였는데 우리가 젊었을 때는 상상도 못하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용기가 너무 부러웠고 그들의 도전이 너무 고마웠다. 젊을 때 자신을 찾아 떠나는 순례길은 그들을 크게 성장시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들을 위해 마음속으로 기도해 주었다.

 

비야레스 데 오르비고 표시

 

 다음 마을인 비야레스 데 오르비고(Villares de Órbigo)는 레온주에 있는 자치시로 산티아고 순례길의 영향 덕분에 의미 있는 종교시설이 다수 존재한다. 오르비고 강둑이 자치단체 영내에 위치하며, 농업이 발달하여 전통적으로 풍요로운 지역으로 발달했다.

 이 주변 마을 이름에 오르비고라는 강 이름이 모두 들어 있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마을과 강은 필연적인 관계이다. 오르비고 곳곳에 운하와 댐이 건설되어 비옥한 평야를 위한 관개시설로 활용되고 있고, 마늘, 부추, 고추가 주로 재배되며 품질이 좋다고 잘 알려져 있다.

 

마을의 십자가

 

 마을의 길을 따라가니 중간에 여러 나라의 국기를 늘어놓은 가게가 보인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알려진 가게로 한국어 표기도 많고 주인이 간단한 한국어를 구사하고 아주 단순한 한국 물품도 있었다. 잠시 들렀다가 지나쳤다.

 

비야데스 데 오르비고 마을

 

 비야레스 데 오르비고에서 산 후스토 데 라 베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샛길들이 있지만 노란 까미노 표시만 충실하게 따라가면 된다. 비야레스 데 오르비고에서 산티바네스 데 발데이글레시아스까지는 약 2km. 계속 걸어 마을에 들어서면 나무 사이로 이어지는 돌길을 따라 언덕을 올라가서 계속 길을 따라 내려가면 산티바네스 데 발데이글레시아스에 도착한다.

 

산티바네스 데 발데이글라시아 마을 안내

 

길가의 십자가

 

 산티바녜스 데 발데이글레시아스에서 시작된 평원은 언덕을 지나 레온 산과 텔레노 산으로 이어진다. 계속해서 길을 가면 포도나무와 밀밭이 넘실대고 버드나무와 소나무, 떡갈나무가 우거진 숲을 따라 부드럽게 이어진 길을 본다. 중간의 내리막 너덜지대를 조심해서 지나면 이 길의 끝에는 성 토르비오의 십자가가 있다. 이 부근에서 아스토르가가 보인다. 계곡을 따라 내려가면 아스토르가에 들어가는 순례자들이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산 후스토 데 라 베가에 도착한다.

 

말을 타고 가는 순례자(?)들

 

 고원 길을 계속해서 걸어가니 중간에 과일을 진열해 놓은 곳이 보인다. 여러 종류의 과일들이 진열되어 있고 지나가던 순례자들은 자리에 앉아 먹고 싶은 과일을 가져와서 먹는다. 그리고 자신이 내고 싶은 만큼의 기부를 하는 가게다. 옆에는 이 과일가게를 관리하는 사람이 있어 부족한 과일은 계속 보충해 주었다. 우리가 스페인에서 마켓에 가면 가장 싼 것이 과일이었다. 그래도 이곳에서는 자신이 먹은 과일 값을 기부라는 단어가 사람에게 묘하게 작용하여 후하게 지불한다. 

 옆에는 수공예로 팔찌를 만드는 사람이 있었다. 그도 가격을 정하지 않고 주는 대로 받으며 원하는 사람에게 즉석에서 매듭으로 팔찌를 만들어 주었다. 그 정성이 더 갸륵해서 팔찌를 하나 사고 과일 값을 지불하고 쉬다가 다시 길을 갔다.

 

길가의 순례자들을 위한 음식 - 기부제이다.

 

 

 산 후스토 데 라 베가는 순례자와 관광객에게 완벽한 시설을 제공하는 곳으로 아스토르가 인근의 마을이며 국도의 샛길에 위치해있다. 성인 후스토와 그의 형제였던 성인 파스토르가 이 마을에서 출생하여 마을의 이름을 따왔다.

 

 마을 입구에 있는 산토 토리비오 십자가(Crucero de Santo Toribio)5세기의 아스토르가의 주교였던 성 토리비오와 연관이 있다. 성 토리비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아스토르가에서 추방당했다. 그는 아스토르가로 향하는 높은 언덕에 앉아 샌들의 먼지를 털면서 아스토르가 소유라면 먼지도 가져가지 않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주교가 누명을 썼다는 것을 알게 된 아스토르가 사람들은 이 언덕에 그를 기리는 십자가를 세웠다. 이 십자가는 성 토리비오와 성모를 상징하는 석조 작품으로 이 십자가가 세워진 이후 작은 성당이 생겼고 많은 순례자들이 이곳을 찾기 시작했다. 십자가가 세워진 언덕에서는 아스토르가를 한눈에 볼 수 있고, 전망이 좋아 레온 산을 배경으로 투에르토 강이 또렷하게 보인다.

 

토르비오의 십자가

 

멀리 보이는 아스토르가

 

산 후스트 데 라 베가 표시

 

멀리 보이는 아스토르가

 

목마른 순례자상

 

산 후스토 데 라 베가 표지

 

길을 건너는 육교

 

 마을의 출구에서 순례자는 철제로 만들어진 다리로 투에르토 강을 건너 얼마 후 오른쪽으로 내려가 도로와 나란히 걸어 공장지대를 지난다. 길은 오래된 중세시대의 다리로 이어지고 다리를 건너 가파른 길을 올라 태양의 문으로 통과하면 아스토르가 구 시가지가 나온다.

 

아스토르가 표지

 

아스토르가 표시

 

 아스토르가(Astorga)는 레온 들판과 레온 산간지대의 중간 지역에 평균고도 868m의 고지대에 자리잡고 있으며 투에르토강(Río Tuerto)이 도시 한가운데를 통과한다. 아스토르가에서는 기원전 2750년의 주석으로 만든 인공물이 발견되었고, 기원전 1300~700년의 청동기시대 유물도 발견되었다. 철기시대인 기원전 275년 아스토르가에는 켈트족이 살았다. 이후 이곳에 고대 로마의 성채가 세워졌고 기원전 14년에는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Augustus)가 이름을 붙인 아스투리카(Asturica)라는 도시가 아스토르가의 기원이며, 당시의 대규모 목욕탕 유적이 아직도 시내에 남아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프랑스길과 은의 길이 교차하는 지역이다.

 

 로마시대 아스토르가는 기독교가 크게 성행했었다. 야고브과 사도 바울이 아스토르가에서 설교를 했다는 전설이 있으며 3세기에 주교관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스페인에서 가장 먼저 주교구가 설치된 지역이기도 하며, 아스토르가 주교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 직책이었다. 11세기 산티아고 순례길의 주요 중간기착지였지만 아스토르가는 종교적으로 쇠락했다가 성당 건축은 15세기에 다시 시작됐다.

 

 1528년 에르난 코르테스가 멕시코에서 카카오 콩을 스페인으로 들여왔다. 아스토르가는 유럽의 초콜릿 발상지로 아스토르가 산 초콜릿을 유럽 전역에서 볼 수 있다. 아스토르가 초콜릿 박물관에는 16세기의 핫초코 머그잔이 보관돼 있다.

 

 현재 도시 곳곳에 이와 같은 역사적 건축물을 비롯해 많은 관광 명소가 자리 잡고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중세시대에 건축한 주교궁(El Palacio Episcopal)과 산타마리아 대성당(Catedral de Santa María), 고대 로마 시대에 조성한 성벽(Wall of the Town) 등이 있다.

 

 아스트로가 구 시가지의 입구에 공립 알베르게가 오늘의 숙소다. 이 길을 걸으면서 공립 알베르게와 사립 알베르게를 비교해 보면 대체적으로 공립 알베르게가 시설면에서 좋은 것 같다.

 일찍 도착해서 샤워를 하고 일행들과 시내를 구경하려 나가니 숙소 앞에 조그마한 광장이 있다. 산 프란시스코 광장이었고, 거리를 건너서 수리를 하고 있는 산 바르톨레메라는 오래된 성당이 보여서 가보니 문을 닫아 놓아 들어가지를 못했다.

 

시내를 걸어가니 여러 옛 건물이 보이고 여러 동상을 비롯한 조형물도 보인다.

 

알베르게 앞의 순례자 상

 

알베르게 앞의 작은 공원

 

산 바르톨레메라 성당

 

 거리를 걸어가니 사람들이 많이 있는 마요르 광장이 있다. 마요르 광장에는 바로크 양식의 아름다운 파사드, 클라비호 전투의 군기가 소장되어 있는 아스토르가 시청(Ayuntamiento)과 쌍둥이 탑, 도시의 상징인 시계탑이 눈에 띈다. 시계에는 독특한 복식을 입은 두 사람이 망치로 종을 치는 모습이 있다. 이 두 사람은 콜로사와 후안 산쿠다라는 두 인물로, 이 시계는 정시는 알려주지만 15, 30, 45분은 알려주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 시계를 만든 장인이 인색한 도시 주민들을 비웃으며 시간은 알려주지만 15분은 알려주지 않겠다.’라고 결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시청(Ayuntamiento)

 

사자와 독수리상(도시의 수호자들을 기억하는 기념비)

 

 번잡한 광장을 지나 시내를 걸어가니 좌우에 초콜릿 가게가 엄청나게 많이 보인다. 유럽 초콜릿의 발상지라는 말이 전혀 과언이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알 수 있다. 여기서 아쉬운 것이 초콜릿박물관이 문을 닫아 놓아서 구경을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계속 시내를 걸어가니 주교궁과 대성당이 모여 있는 광장이 나타난다.

 

 산타 마리아 대성당(Catedral de Santa Maria)은 아스토르가에서 가장 중요한 건축물이자 로마네스크와 고딕, 바로크 양식이 혼합되어 있는 최고의 성당이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대성당을 확장하면서 고딕 양식이 되었는데, 아직도 로마네스크 양식의 요소가 남아 있다. 성당의 제단부는 고딕 양식, 파사드는 바로크, 위엄의 성모상은 12세기, 스테인드글라스와 주제단화는 16세기의 작품이다. 성당 내부의 아름다운 위엄의 성모상은 스페인 로마네스크 양식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모상이다. 합창단석의 조각 중엔 카드놀이를 하면서 파이프를 물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이 조각은 콜론(Colon; 콜럼버스)이 처음으로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지 불과 25년 후에 만든 작품이다. 이 작품은 유럽인들의 흡연 습관을 보여준 최초의 작품이라고 한다.

 

 옛 로마의 성터 위에 건립된 주교궁(Palacio Episcopal)은 안토니오 가우디가 설계한 환상적인 현대 건축물로 원래 주교의 거처로 건축되었으나 오늘날엔 까미노 박물관으로 사용된다. 주교궁을 보면 디즈니의 만화영화에서의 궁전이 바로 생각난다. 환상적인 궁전의 모형이 이 궁전에서 가져간 것은 아닌지가 의문이 들 정도로 닮았다. 그런데 주교궁이 문을 열지 않아 안을 볼 수가 없어 안타까웠다.

 

대성당 광장

 

주교궁(Palacio Episcopal)

 

주교궁

 

산타 마리아 대성당(Catedral de Santa Maria)

 

산타 마리아 대성당(Catedral de Santa Maria)의 여러 문 위의 장식

 

 산타 마리아 대성당(Catedral de Santa Maria) 내부를 구경하려니 입장권을 구입해야 했다. 누차 이야기했지만 나의 취향이 박물관이나 미술관은 꼭 구경하는 것이라서 입장권을 구입하여 안으로 들어가 내부를 보고 또 박물관을 구경하면서 레온이나 부르고스에 못하지 않는 곳임을 깨닫게 되었다. 스페인에서 최초의 주교령이 이곳이었다는 것이 허언이 아니었다.

 

산타 마리아 대성당(Catedral de Santa Maria)의 내부와 박물관

 

대성당 옆의 산타 마르타 성당

 

 대성당 옆에 종탑이 특이한 산타 마르타 성당이 있다. 이슬람이 지배하던 시절 마르타라는 이름의 여인을 개종시키려 했으나 그녀는 순교하였다 한다. 이후에 이슬람이 물러나고 마르타는 아스토르가의 수호성인의 칭호를 얻었고 그녀의 이름을 딴 성당과 수도원이 스페인 여러 곳에 지어졌다.

 

대성당과 주교궁

 

 주교궁과 대성당을 구경하고 시내를 배회하면서 가게에 들러 초콜릿을 사서 일행들과 나누어 먹고 광장으로 가니 많은 한국인이 햄버거를 먹고 있다. 맛 집이라는 곳이라 상당히 번잡한 곳이었지만 나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나도 먹는 것을 좋아하여 한국에서는 찾아도 다니지만 내 여행의 철학은 기회가 되면 그 지방의 특색 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초콜릿을 맛본 것이었다.

 

 사실 아스토르가에는 대표하는 두 가지 음식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코시도 마라가토(Cocido Maragato)인데 이것은 9가지 정도의 고기와 가르반소(Garbanzos; 병아리콩) 요리와 수프 등이 나오는 전통 음식으로 특이한 점은 보통 식사와 반대 순서 즉 고기를 먹고 그 다음에 나머지 곁들인 음식을 먹는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버터가 들어간 과자 만테카다(Mantecadas).

 

 시내를 배회한 뒤에 알베르게에 돌아와 저녁을 라면으로 해결하기로 의견을 모아 레온에서 구입한 라면을 가지고 엄청난 양을 끓이니 냄새가 온 주위에 퍼져 한국인들은 모두들 군침을 다신다. 라면으로 포식을 하고 쉬고 있으니 낯익은 반가운 얼굴들이 들어온다. 한국인 모녀와 인천에서 온 젊은 여성, 한국의 여러 젊은이들 모두가 이곳에서 오늘을 쉰다고 하여 서로가 서로의 안부를 물으면서 이야기를 하고 저녁을 해결한다. 이 공립 알베르게가 규모가 엄청 크서 우리나라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외국인도 많이 보였다.

저녁을 먹고 자리에 돌아오니 할 일이 없다. 그래서 침상에 누워 있다가 잠이 들었다. 잠을 자다가 깨어 밖에 소리를 들으니 비가 엄청 내리고 있다. 날씨의 변화가 아주 심하여 날이 맑았다가 금방 비가 오기도 한다.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니 대구에서 온 동생 같은 사람이 혼자 앉아서 고독을 삼키고 있어 가까이 가서 여러 이야기를 하다가 내일을 위해서 잠자리에 든다. 

스페인, 산티아고 까미노 길을 걷다. 23(06.08, 레온 - 산 마르틴 델 카미노)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오늘의 걷기 길 : 레온 - 산타아나 델 까미노 - 라 비르헨 델 카미노(7.6km) - 발바르데 데 라 비르헨(4.6km) -  산 미켈 델 카미노(1.4km) - 비야당고스 델 파라모(7km) -  산 마르틴 델 카미노(4.5km)

 

 레온에서 하루를 푹 쉬고 오늘은 레온에서 산 마르틴 델 카미노까지 약 25km의 거리를 다시 걷는다.

레온을 빠져 나오기에는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만약 내가 까미노 길을 걷지 않는 단순한 여행자라면 며칠을 더 머무르면서 차분하게 많은 곳을 천천히 돌아보아야 하는 도시였다. 하지만 나는 관광을 목적으로 이 도시를 찾아 온 것이 아니라 산티아고 까미노를 걷는 도중에 잠시 머문 도시였다.

 

 레온에서 산 마르틴 델 카미노에 이르는 구간은 약 25km로 약 7시간을 걸어야 한다. 그러나 길은 평탄하고 단조로워 어려움이 없다. 오늘의 길은 갈림길이 많으므로 조심해서 걸어야 한다.

 

 레온까지 꾸준하게 걸어온 순례자는 평원을 기대하게 되지만 라 비르헨 델 카미노까지는 참고 견뎌야 한다. 라 비르헨 델 카미노는 1505년 성모가 발현한 곳으로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이다. 이곳에서 길을 따라서 약 3km 정도를 걷다 보면 순례자는 고속도로와 자동차 전용도로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곳을 지나게 된다. 이곳에서 길은 두 갈래로 갈라지므로 왼쪽으로 가지 말고 정면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서 도로와 나란히 걷다 보면 비야당고스 델 파라모를 지나 산 마르틴 델 카미노에 도착할 것이다.

 

로바호 델 카미노 표시

 

 아침 일찍 일어나 숙소를 나와 버스정류장으로 가니 버스가 없다. 다시 숙소에 돌아와서 프론터의 직원에게 물어보니 7시부터 버스가 다닌다고 해서 산 마르코스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산 마르코스 단지에서 유유히 흐르는 베르네스가 강을 지나는 다리를 건너면 복잡한 시가지의 크루세로 지구까지 이어진다. 기찻길과 나란히 지나가며 십자가 광장에 다다르면 기찻길이 멀어진다. 이 광장을 지나가면 레온의 위성도시인 트로바호 델 카미노다.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던 트로바호 델 카미노는, 20세기 중반부터 레온의 인구가 지속적으로 늘어남에 따라 레온 근교의 베드타운으로 역할이 바뀌었다. 별로 특징도 없어 그냥 지나친다.

 

 도로를 건너면 오래된 포도주 저장고와 함께 불규칙적인 주택들과 공장지대가 어지럽게 보인다. 길을 가다가 보니 현대자동차 전시장이 보인다. 외국에 나가면 모두 애국자가 된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의 기업 표시를 보니 상당히 뿌듯하다. 조금 더 길을 따라가면 성모가 발현하였다는 라 비르헨 델 카미노에 도착한다.

 

현대자동차 전시장

 

 라 비르헨 델 까미노 표시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던 라 비르헨 델 카미노는, 조용한 마을로 까미노의 성모에게 봉헌된 까미노 성모 성당이 있다. 까미노의 성모는 여러 기도를 들어준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져서 해마다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이 마을을 찾는다고 한다.

 

 라 비르헨 델 카미노 마을에 들어가서 입구에 있는 바에서 가볍게 아침을 먹고 길을 떠나니 상당히 특이한 모습의 성당이 나타난다. 외벽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성당과는 다른 조각상이 장식하고 있는 성당이다. 바로 까미노의 성모 성당 (Santuario de la Virgen del Camino)이다.

 

 이 성당의 성모 발현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150572, ‘엘리사벳의 성모 방문 기념 축제에 벨리야 데 라 레이나의 목동 알바르 시몬 페르난데스가 가축을 돌보던 중 성모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성모에게 다가갔고 성모는 그에게 말했다. “도시로 가서 주교에게 알리고 이곳에 내 조각상을 보관하기 위한 성전을 세우도록 하라. 그러면 내 아들이 이 땅의 번영을 위해 이곳에 나타날 것이다.” 목동이 놀라서 대답했다. “성모님, 어떻게 하면 절 보낸 분이 성모님이라는 것을 그들이 믿겠습니까?” 그러자 성모 마리아는 목동의 새총과 작은 돌을 집어 들고 돌을 멀리 쏘아 보낸 후 말했다. “주교와 함께 돌아오면 이 돌이 거대한 바위가 되어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너를 보냈다는 증거가 되리라. 돌이 떨어진 자리가 나와 내 아들이 나의 조각상을 보관하도록 결정한 곳이다.” 목동이 주교에게 가서 사실을 말하고 주교와 함께 이곳으로 돌아오자 모든 것이 성모가 예언한 대로 일어났다. 주교는 이곳에 우미야데로 성당(Ermita del Humilladero)을 지었다. 이 성당은 1961년엔 현대식 성당으로 재건축되어 까미노의 성모 성당이라고 이름 붙여졌다.

 

 이 성당은 수사였던 프란시스꼬 꼬에요의 작품으로 현대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건물이다. 조각가 호세 마리아 수비락이 청동으로 만든 열세 개의 거대한 이 조각들은 성모 마리아와 열두 사도를 의미한다. 내부에는 성모의 발현으로 제작된 작가 미상의 16세기 성모상이 있다.

 

성당 외벽의 성모와 열두 사도 상

 

까미노의 성모 성당( (Santuario de la Virgen del Camino)

 

 길을 걷는 사람은 성당을 지나 라 비르헨 델 카미노 출구에 두 개의 길을 가리키는 표지판을 만난다. 두 개의 길 중 정면으로 향하면 발베르데 데 라 비르헨과 산 미구엘 델 까미노, 비야당고스 델 파라모를 거쳐 산 마르틴 델 카미노에 이르는 약 25km의 길이다.

 

 이 길은 표지판의 정면에 있는 도로와 평행하게 만들어진 보행자 길이다. 도로와 나란히 걷다가 왼쪽으로 전진하여 도로 밑을 지나는 터널을 지나면 커다란 안테나가 있는 곳까지 평범한 오르막을 오른다. 이어서 도로와 나란히 이어지며 물푸레나무가 이름다운 발베르데 데 라 비르헨에 도착한다.

 

길 안내 표지판

 

산티아고 300km 표시 - 이제 3/5은 걸었다.

 

발베르데 데 라 비르헨 표지

 

 원래는 발베르데 델 카미노(Valverde del Camino)였으나 이름이 바뀐 발베르데 데 라 비르헨의 주변은 우아한 물푸레나무와 상큼한 초원이 가득하다. 이 마을의 집들은 아담한 성당 주위에 모여 있고, 성당의 첨탑 위에는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어려운 황새들이 둥지를 틀고 새끼를 낳아 기르는 모습이 곳곳에 보인다. 길을 가는 일행이 왜 황새가 성당의 첨탑에만 둥지를 틀까?” 하고 의문을 가지니 다른 일행이 하느님과 가까운 곳이라서라는 답을 해서 잠시 웃었다.

 

산타 엔그라시아 교구 성당 (Iglesia Parrroquial de Santa Engracia) - 첨탑의 황새 둥지

 

폐쇄된 포도주 저장고

 10세기부터 존재했다고 전해지는 이 작은 마을의 끝에서 왼쪽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약 1.5km 가면 산 미겔 델 카미노에 도착한다.

 

 산 미겔 델 카미노는 작은 마을이나 화려한 성당과 수도원이 있어 순례자들이 많이 찾아온다. 그래서 산 미겔 델 카미노에는 순례자를 위한 휴식처가 많이 있다. 이곳에서 카페에 앉아 쉬고 있으니 길에서 만났던 많은 한국인들이 지나가기도 하고 잠시 머물기도 하면서 인사를 한다. 우리와 생장에서부터 같이 출발한 한국인 모녀 중에 딸만 보여 웃으면서 엄마와 헤어졌느냐? 하니 명랑하게 웃으며 따로 걷는다고 한다.

 

 이제 산 마르틴 델 카미노까지는 11km 정도가 남았다. 이곳에서 비야당고스 델 파라모까지는 1시간 반 가량이 걸린다. 비야당고스 델 파라모는 ‘라 마탄사’(La Matanza)라고도 알려져 있으며 드넓은 초원 위에 세워졌다. 기차역 부근은 전투왕 알폰소 1세와 그의 아내 도냐 우라까가 1111년경에 벌인 전투가 일어난 장소다. 마을의 중심부에 있는 산티아고 성당의 현관에 새겨져 있는 전투장면은 산티아고 성인이 나타났던 클라비호 전투가 아니라 이 부부 사이의 전투를 묘사한 것이라고 하는데 가 보지는 못하였다.

 

도로를 따라 난 길

 

비야당고스 델 파라모 표시

 

카페

 

 길을 가다가 현대식 건물로 지은 카페가 보여 들어가 잠시 쉬면서 시원한 오렌지 주스를 한잔 마시고 다시 길을 떠났다.

 

 비야당고스 델 파라모 마을의 중심을 통과하여 운하와 도로 사이로 이어진 직선 도로를 따라 1시간 정도를 걸으면 산 마르틴 델 카미노에 도착한다. 산 마르틴 델 카미노 마을을 가까이 두고 걷고 있으니 비가 오기 시작한다. 세차게 오는 비가 아니기에 그냥 맞으며 길을 가니 계속해서 비가 온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방수가 안 되는 옷으로는 감당하기가 조금 어렵다. 그러나 내가 입고 있는 옷은 어느 정도 방수가 되는 옷이라 그냥 계속 걸어 산 마르틴 델 카미노 마을 입구에 있는 알베르게에 도착하니 오후 1시가 지난 시간이었다. 비에 젖은 옷을 말리기 위해 갈아입고 몸도 씻고 알베르게의 식당에 가니 점심시간이 끝났다고 주문을 받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숙소로 돌아와 잠시 쉬고 마을의 슈퍼에 가니 슈퍼도 문을 닫아놓고 17시에 문을 연다는 종이가 붙어 있었다. 슈퍼 앞에서 배회하다가 시간이 되니 주인이 멀리서 차를 타고 와서 문을 열었다. 슈퍼에서 내일을 위한 여러 가지 식품을 사고 알베르게로 돌아오니 저녁을 먹을 시간이었다. 알베르게 식당에 미리 주문을 하였기에 시간이 되어 식당으로 가니 맛있는 파에야를 아주 풍성하게 탁자마다 주고, 스페인의 가장 유명한 음식인 돼지고기를 훈제한 하몬도 주었다. 사실 이 하몬은 점심 때 식당에서 주인에게 이야기를 하면서 조금 맛본 것인데 주인이 잊지 않고 서비스로 내어 주었다.

 

산 마르틴 델 카미노 표시

 

알베르게 장식

 

알베르게 마당의 닭

 

 저녁을 먹고 그 자리에서 가볍게 맥주를 한잔하면서 오늘의 길에 대해서 같이 걸은 사람들과 여러 이야기를 하고 잠자리로 돌아와서 누우니 잠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조용히 나와서 알베르게를 돌아보니 조금은 특이한 장식을 하고 있었고, 마당에는 닭들이 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한참을 혼자 앉아 멍을 때리다가 내일을 위해 잠자리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