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鶴)의 오딧세이(Odyssey)

스페인, 산티아고 까미노 길을 걷다. 10(05.26, 나헤라 - 산토 도밍고 데 칼사다)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오늘의 걷기 길 : 나헤라 - 아소프라(5.8km) - 시루에냐(9.3km) - 산토 도밍고 데 칼사다(5.9km)

 

 오늘은 나헤라에서 산토 도밍고 데 칼사다까지 가는 약 20km의 비교적 짧은 길이다. 다른 날에 비해서 길이 짧지만 이제는 습관적으로 아침 6시만 되면 길을 떠나려고 준비를 하는 사람들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다. 왜 그렇게 모두들 일찍 출발하는지를 이해를 못하겠다. 좀 느긋하게 길을 즐기면서 가면 좋겠는데 모두들 길을 걷는 것이 지상 최고의 과제인 것 같다. 아침 일찍 숙소인 알베르게를 출발하여 길을 가니 아직 달이 하늘에 떠 있다.

 

 나헤라 거리를 지나니 붉은 퇴적층이 겹겹이 쌓인 특이한 지형이 언덕을 이룬 나헤라의 특색 있는 모습이 나온다. 석회암과 충적토가 많은 이 땅은 잡초를 억제하는 동시에 포도나무의 성장을 촉진해 준다고 한다. 그래서 평소에 먹는 일반 포도보다 훨씬 알이 작고 단맛이 강한 포도가 생산된다고 한다. 스페인의 태양을 닮은 이 붉은 황토와 포도나무는 레온까지 계속 이어진다. 강을 건너 길을 가며 먼저 만나는 건물이 나헤라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산타 마리아 라 레알 수도원(Monasterio de Santa Maria la Real)이다.

 

 산타 마리아 라 레알 수도원(Monasterio de Santa Maria la Real)은 산초 3세의 아들인 나바라의 왕 가르시아 6세에 의해 11세기에 세워진 클뤼니 수도원이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은 흔적만 남아있고 15,16세기에 재건축되었다. 건축 양식은 추리게레스코식 고딕 양식이며 15세기의 아름다운 성모상이 보관되어 있다. 수도원 안에는 성당, 왕가의 영묘, 기사들의 회랑 등이 있습니다. 이 중 산초 3세의 부인이자 알폰소 8세의 어머니인 도냐 블랑까 데 나바라의 무덤이 돋보인다.

 

 산타 마리아 라 레알 수도원의 건립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에 기반을 둔다.

 

 나바라의 왕 돈 가르시아의 매가 비둘기를 쫓고 있었는데 매와 비둘기가 숲으로 사라졌다. 매를 기다리다 지친 왕이 직접 매를 찾아 나섰다가 동굴을 발견했는데 그 동굴에서 신비로운 빛이 흘러나왔다. 왕이 동굴에 들어가자 찬란한 빛을 내는 백합 화병과 아름다운 성모 마리아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매와 비둘기가 마치 좋은 친구 사이처럼 나란히 앉아 있었다고 한다.

왕이 이 자리에 성소와 수도원을 지으라고 명령하여 땅을 파기 시작했는데, 이곳에서 수많은 성인과 순교자들의 유해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왕은 이곳을 나바라 왕의 묘지로 쓰기로 결정했는데, 이 전설이 산타 마리아 라 레알 수도원의 기원이며 성모상을 발견했을 때 성모상을 장식하고 있던 테라사(Terraza; 화병)를 기념하여 라 테라사 기사단이 결성되었다고 한다.

 

나헤라 주변의 풍경

 

산타 마리아 라 레알 수도원(Monasterio de Santa Maria la Real)

 

 나헤라를 빠져 나와 산타 마리아 라 레알 수도원의 가장자리를 돌아 조용하고 한적한 오래된 도로를 따라가면 붉게 물든 바위산 사이의 소나무 숲을 통해 비탈길로 된 통행로를 만나 마을을 빠져나올 수 있다. 마을을 나오면 답답한 가슴을 씻어 줄 넓게 펼쳐진 라 리오하 평원을 볼 수 있다. 길은 포도밭 사이로 아름답게 이어진다. 가슴 벅찬 풍경을 옆구리에 꿰차고 즐겁게 약 한 시간 반 정도를 걸으면 아소프라에 도착한다.

 

 이 길을 걸으면서 바라보는 하늘은 너무 푸르게 빛나고 티 없이 맑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보며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도 이 길을 걸으면서 얻는 큰 기쁨이었다. 인적이 없는 들판을 걸으면 때때로 길가의 돌위에 벗어 놓은 신발을 본다. 순례자는 자신의 순례길에서 무엇인가를 깨닫고 끝을 내고 집으로 돌아간 것일까? 아니면 이 길의 허망함을 깨닫고 순례를 끝낸 것일까? 자신의 발을 보호해 주던 신을 벗었다는 것은 무엇이든지 자신의 허물을 벗었다는 의미로 생각되었다. 또 길가에는 전날에 로드 킬 당한 동물들의 시체가 많이 눈에 띄었다. 같이 가던 일행이 일일이 그 동물들의 사체를 길가의 풀밭으로 치워 주었다. 뒤에 오는 사람들이 기분이 나빠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감사하게 느껴지는 행동이었다.

 

순례자가 벗어 놓은 신발 - 여기까지가 그의 길이었는지?

코르도뱅 여행 설명판

 

산티아고를 가리키는 이정표

 

끝없이 펼쳐지는 들판의 포도밭

 

길가에 로드 킬 당한 토끼

 

 

저 멀리 보이는 아소프라 마을

- 가운데가 천사들의 성모 교구 성당 (Iglesia Parroquial Nuestra Senora de Los Angeles)

 

 

 아소프라는 뚜에르또 강의 비옥한 계곡에 자리 잡은 중세 아랍인의 마을이었다. 1168년에 도냐 이사벨은 순례자를 위한 병원과 성당을 세우고 성 베드로에게 봉헌했다. 그리고 까미노 데 산티아고에서 죽은 순례자들을 위한 묘지도 만들었다. 병원 건립을 알리는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깔라오라와 나헤라의 주교인 나 로드리고는 도냐 이사벨에게 아소프라 마을에 순례자만을 위한 병원과 묘지를 세우는 것을 허락합니다.’ 이 병원은 19세기까지는 운영되었고 오늘날엔 폐허만 남아있다. 아소프라에 있는 천사들의 성모 교구 성당 (Iglesia Parroquial Nuestra Senora de Los Angeles)은 하나의 신랑과 세 개의 구획으로 나뉘어져 있는 17~18세기의 성당으로, 루네트가 있는 궁륭으로 덮여 있고 제단 쪽 돔은 별 무늬가 있는 16세기 양식으로 건축되었다. 마을을 약 1km쯤 빠져 나오면 시루에냐로 가는 까미노의 오른쪽에 있는 아소프라의 원주(Rollo de Azofra)는 땅에 정의를 세우는 칼을 연상시키며 악당들이 범죄를 저지르기 전에 경고하는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아소프라 마을의 바에서 커피와 빵으로 가볍게 아침을 먹었다.

 

아소프라 마을

 

아소프라의 원주 (Rollo de Azofra)

 

 아소프라에서 시루에냐에 가는 길은 두 길이 있는데, 작은 운하를 넘어 밀밭 사이로 나있는 평화로운 오른쪽 길을 선택하여 약 2시간 반 정도를 길을 걸으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포도밭과 밀밭 사이로 이어진 감동적인 조용한 마을인 시루에냐에 도착한다. 시루에냐는 작은 마을로 광장의 나무 밑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을 보면 이곳에 살았던 역사의 주인공들처럼 보인다. 이런 마을의 분위기와는 맞지 않게 길을 걷다 맨 처음 만나게 되는 시루에냐의 첫 모습은 근사한 골프장과 그 뒤로 만들어진 신축 빌라의 모습들이다. 새로 만들어진 현대식 계획도시로 신시가지를 지나다 보면 인적이 드물어 사람을 볼 수가 없어 마치 영화나 드라마의 세트장 같은 느낌을 받는다. 우리가 찾는 시루에냐 마을은 계획도시를 지나 포장된 도로를 따라가면 마을 끝에서 표지판을 만나게 된다.

 

 여기서 덧붙이면 왼쪽 길을 따라 이동하는 것은 도보 순례자에게 적당하지 않다. 오른쪽보다 적어도 13킬로미터를 더 이동하고, 포장된 도로는 자전거 순례자들에게 적합하다.

 

길을 가면서 보는 하늘은 너무나 파랗다. 구름 한 점이 없는 파란 하늘을 보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미세먼지나 환경오염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티 없이 맑은 하늘이다. 파란 하늘에는 수많은 비행운만이 기하학적 무늬를 만들어 지나가는 길손들의 눈을 즐겁게 한다.

  

파란 하늘에 수놓은 비행운

 

까미노 길의 식수 보급처

 

파란 하늘에 수놓은 비행운

 

골프장 클럽 하우스

 

 시루에냐에서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까지는 6킬로미터 정도의 길은 걷기 편안하다. 이 편안한 길을 걷는 도중에 많은 외국인을 만났다. 미국인, 일본인, 대만인, 캐나다인, 브라질 사람 등등의 많은 사람들 중에 어린 딸을 데리고 길을 걷는 독일인 부부가 있었다. 한 5살 정도로 보이는 꼬마는 무엇이 기쁜지 잠시도 쉬지 않고 재잘거리며 길을 뛰어 갔다왔다하면서 즐거워하였다. 내가 한국에서 가져간 초콜릿을 꺼내어 주니 처음에는 머뭇거리다가 엄마의 허락이 떨어진 후에 받으며 기뻐하였다. 이 꼬마가 이 길이 주는 의미를 깨닫게 될 때는 언제가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에게 이 길은 영원히 추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주로 감자 농사를 짓는 시루에냐를 지나 시계탑이 있는 성당을 지나 길을 따라가면 포도밭이 펼쳐진 넓은 평원에, 늘씬한 탑이 우뚝 솟아 있다. 이 탑은 나침반처럼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로 순례자들을 이끌어 주는 역할을 한다. 탑이 있는 대성당은 까미노의 건축가 성인이라고도 불리는 성인이 남긴 것이며 도시의 이름도 성인의 이름에서 가져온 것이다.

 

길을 걷고 있는 독일인 부부와 딸

 

조각품 - 교량 건설자

 

멀리 보이는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 마을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는 까미노 길 때문에 만들어진 마을로 순례자를 위한 모든 서비스가 갖춰져 있고, 친절한 마을사람들이 있어 순례자들로 붐빈다. 성인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에서는 이 까미노의 성인을 기리는 축제가 항상 벌어진다. 425일에는 닭이 작은 북과 함께 행진하는 축제, 51일에는 성인의 빵을 나눠주는 축제 또 510~15일에는 성인을 기리는 성대한 행렬이 이어진다.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에는 닭의 기적(El milagro de la gallina)이라는 전설이 있다.

 

 15세기에 독일 윈넨뎀 출신의 우고넬이라는 청년이 부모와 함께 산티아고 순례 길에 이곳에 도착했을 때 머물던 여인숙의 딸이 그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사랑을 고백했다. 그러나 신앙심이 깊었던 우고넬은 그녀의 고백을 거절했다. 상심한 처녀는 복수를 하려고 은잔을 우고넬의 짐 가방에 몰래 넣고 도둑으로 고발을 했다. 재판소로 끌려간 우고넬과 그의 부모는 결백을 주장했지만, 청년은 유죄 판결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절망에 빠진 그의 부모는 산티아고 성인에게 기도를 올리며 순례를 계속했는데 돌아오는 길에서 산티아고의 자비로 아들이 살아있다.는 하늘의 소리를 듣게 되었다. 이 소리를 들은 부모가 재판관에게 달려갔다. 마침 닭요리로 저녁식사 중이던 재판관은 그들을 비웃으며 말했다. “당신 아들이 살아 있다면 당신들이 날 귀찮게 하기 전에 내가 먹으려 하고 있었던 이 암탉과 수탉도 살아 있겠구려.” 그러자 닭이 그릇에서 살아나와 즐겁게 노래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재미있는 전설 덕택에 1993년부터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는 이 기적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었던 청년 우고넬의 고향인 윈넨뎀과 자매결연을 하였다. 산토 도밍고의 재판관들은 우고넬의 결백을 믿지 않았던 것에 대한 사죄로 수 백 년 동안 목에 굵은 밧줄을 매고 재판을 하는 전통이 있었다고 한다.

 

 이런 전설과 전통 때문에 중세부터 순례자들에게 여행 중에 수탉이 우는 소리를 듣는 것을 좋은 징조로 여겼다. 프랑스 순례자들은 길을 걸으며 닭의 깃털을 모았는데, 그것이 순례 중에 그들을 보호해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또 폴란드인들은 순례 지팡이 끝에 빵 조각을 얹어서 닭에게 주고 했는데, 닭이 빵을 쪼아 먹으면 순례에 좋은 징조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산토 도밍고 안내도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 거리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에서 먼저 마주친 건물은 수태고지의 성모 수도원(Monasterio de Nuestra Senora de la Anunciacion)이다. 

 시토 교단의 수도원인 수태고지의 성모 수도원(Monasterio de Nuestra Senora de la Anunciacion)1620년에 완공된 건물이다. 수도원의 성당은 라틴 십자가형 평면에 바로크 양식의 제단화가 있다. 성당 측면에는 세 명의 주교의 와상이 있는데, 이 중 가운데가 이곳의 설립자인 돈 페드로 만소다. 현재는 순례자들의 숙소로 쓰이고 있으며 수도원의 수녀들이 운영하고 있다.

 

수태고지의 성모 수도원 (Monasterio de Nuestra Senora de la Anunciacion)

 

알베르게 표시

 

성자의 천년기(Milenario de Santo, 1019 - 2019) 안내도

 

 

 

 드디어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의 상징인 대성당이 나타난다.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 대성당(Catedral de Santo Domingo de la Calzada)12세기에 건립되어 여러 번에 걸쳐 증축과 보수를 거쳤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제단부는 여덟 개의 기둥으로 마요르 소성당(Capilla Mayor)과 분리된다. 천장을 덮은 궁륭과 성인의 영묘, 주제단화, 15세기의 기적에서 유래한 암탉과 수탉이 살고 있는 닭장 등이 눈에 띈다. 닭장은 15세기의 고딕 양식인데, 아직까지도 성당 내부의 이 닭장에서 살아 있는 흰 닭 한 쌍을 키우고 있다고 한다. 성인이 잠들어있는 영묘는 성인이 누워 있는 무덤 부분은 로마네스크 양식이고 기적에 대해 기록되어 있는 탁자는 고딕, 소성당은 후기 고딕 양식이다.

 15세기 다미안 데 포르멘뜨에 의해 그려진 주제단화는 1994년까지 마요르 소성당에 있었는데, 이 그림은 스페인 르네상스의 보물로 알려져 있다

 

 대성당의 아름다운 탑은 세 번에 걸쳐 지어졌다고 한다. 처음 만들어진 로마네스크 양식의 탑은 1450년 번개를 맞아 무너졌고, 다음 만들어진 고딕양식의 탑은 붕괴 위험이 있어서 해체되었고, 마르띤 베라뚜아에 의해서 18세기에 현재의 탑이 건축되었다. 바로크 양식의 탑 높이는 무려 70미터에 달하는데, 땅 밑으로 흐르는 지하수 때문에 대성당 건물과 분리해서 지어야만 했다. 탑에는 일곱 개의 종이 있는데, 그 중 두 개가 시계 역할을 한다.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 대성당(Catedral de Santo Domingo de la Calzada) 설명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 대성당 (Catedral de Santo Domingo de la Calzada)

 

산티아고 5612km 이정표

 

산티아고 가는 길을 표시한 지도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에 도착하니 어느 새 200km를 넘게 걸었다. 하루에 걷는 거리가 무리가 되지 않는 거리라 별로 피곤함을 모르고 지금까지는 걷고 있는 중이다.

 

 일찍 도착했기에 식당에 들러 순례자 메뉴로 점심을 먹는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이 순례자 메뉴는 어느 마을에나 있고 메뉴도 어느 정도 일정하고 가격도 매우 합리적이라 수시로 이 메뉴를 청해서 먹는다. 점심을 먹고 대성당과 주변의 여러 곳을 돌면서 도시를 구경하고 저녁에 오랜만에 항상 길을 함께 걸은 4명이 모여서 가볍게 맥주를 마시면서 담소를 나누었다. 각자가 살아온 과정이 다르고, 나이도 내가 70이 넘었고, 안산의 채선생은 66살, 대구의 천진한 얼굴의 이사장은 60살, 서울에 사는 임사장은 58이었다. 나이 차이도 있지만 각자가 거쳐 온 직업도 달랐고 사는 지역도 달랐기에 각자 자기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다양한 생각을 통해서 서로에 대한 이해를 높였다. 그리고 왜 이 길을 걷는가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살아온 인생에서 지금은 무엇인가를 버려야 할 때임을 자각하고 버림의 이야기를 하였다.

 

 우리가 살아오는 인생에서 이렇게 오래 같이 밥 먹고 자고 걷고 하는 단순함을 가족이 아니고 생판 모르는 사람이 모여서 누구와 같이 하는 기회가 있었던가를 생각해 보면 기억에 없다. 남자들은 군대라는 특이한 집단에서 많은 사람들이 함께 지내는 시간이 있지만 그 시간과 이 길을 걷는 시간은 다르다. 우리 인생에서 이렇게 만난 것도 불교에서는 소중한 인연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 이야기는 앞으로도 계속 나올 것이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내일을 위해서 잠자리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