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鶴)의 오딧세이(Odyssey)

경주4 - 낭산 일대와 분황사, 황룡사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저번에 경주를 갔다와서 겨울 추위가 매섭게 닥쳐 경주 순례를 삼사일 쉬다가 다시 경주로 향했다. 이번에는 좀처럼 잘 가지 않는 낭산 일대와 황룡사 부근을 보고 싶었다. 시외버스터미널에서 걷기를 시작하여 대릉원을 지나 잠시 방향을 잘못 들어서 쪽샘쪽으로 갔다. 경주는 올 때마다 다른 유적지가 발견되는 것 같다. 내가 제법 경주를 다녔지만 쪽생이라는 명칭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물론 내가 과문한 탓도 있겠지만.

 

  쪽샘지구는 대릉원 동쪽에 위치한 황오리 고분군(황오동, 황남동, 인왕동) 일대를 일컫는 것으로, 4~6세기 신라 왕족과 귀족의 집단 묘역으로 총면적은 384000m2 정도의 국내 최대 규모의 왕족과 귀족들이 집단 묘역으로 유물 발굴지다. 1960년대 이후 이곳에 민가가 들어서면서 고분 유적의 훼손이 심각해짐에 따라 문화재청과 경주시는 고분군 발굴을 위해 이 지역 민가와 사유지 등을 사들인 뒤 2007년부터 발굴을 시작하였다. 경주시는 연면적 1,900, 2층 규모의 쪽샘지구유적발굴관을 지어 수장고와 함께 내부에 유물 발굴 공간을 직접 볼 수 있는 관람 통로 등을 설치하였고, 2층 전체는 유리로 마감되어 쪽샘지구 발굴 현장을 한눈에 관람할 수 있도록 하였다. 경주시는 쪽샘을 정비하여 이 일대를 쪽샘지구로 명명하였다.

 

쪽샘의 모습

 

 이 쪽샘 주변의 여러 고분군을 구경하고 여러 유적지를 지나 걸어갔다. 내가 걷는 것은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기에 동궁과 월지를 지나 시내를 따라 난 도로를 걸어 낭산으로 향했다.

 

 낭산은 누에고치처럼 남북으로 길게 누워 높이 108m의 낮은 구릉을 이루는 산으로 예로부터 서라벌의 진산으로 신성한 산으로 여겨졌다. 신라 실성왕 12(413)에 구름이 일어 누각같이 보이면서 오랫동안 향기가 피어올랐다. 기록에는 왕이 낭산에 상서로운 구름이 서린 것을 보고 신하들에게 신령이 하늘에서 내려와 노는 곳이니 당연 복을 주는 지역이므로 이제부터는 낭산의 나무 한 그루도 베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7세기부터는 불교의 성스러운 산으로 왕실에 복을 주는 장소로 변하기 시작하였고, 선덕여왕의 유언에 따라 만든 여왕의 능을 비롯하여 신라 향가의 현장인 사천왕사지, 문무왕의 화장터로 여겨지는 능지탑, 바위에 부처를 새긴 마애불, 구황리 삼층석탑 등 신라 유적이 많이 있다.

 

낭산 표지

 

 길을 따라가니 낭산과 선덕여왕릉 표지가 나타났다. 내가 이곳을 온 주된 목적은 선덕여왕릉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약 20여년 전에 초등학생이었던 아들과 함께 이곳을 지나가다가 선덕여왕릉 표시가 너무 초라헤 되어 있는 것을 보고 아들이 문화재관리국(정확하지는 않다.)에 여왕이라고 표시가 소홀한 것이 아닌가하고 의견을 제시한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선덕여왕릉으로 올라 가면서 먼저 보는 것이 '능지탑지'다.

 

 능지탑은 남산에 흐트러져 있던 탑의 재료를 새로 맞추어 놓은 것으로 예로부터 능시탑 또는 연화탑이라고도 한다. 기단 사방에 12지신상을 새긴 돌을 세우고, 그 위에 연꽃무늬가 있는 석재를 쌓아 올린 5층 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문무왕이 임종 후 10일 안에 왕궁 밖 뜰에서 화장하고 장례를 검소하게 하라고 유언하였으며, 탑 주변에서 문무대왕릉비 조각이 발견되고 사천왕사, 선덕여왕릉, 신문왕릉 등과 가까운 것으로 보아 이곳이 문무왕의 유언을 받들어 왕을 화장한 터로 전해진다.

 현재의 능지탑의 외관은 1979년에 보수할 때 임시로 정사각형 평면의 2층 석조 축단(築壇)으로 복원되었다. 현재 터의 향좌측에는 보수할 때 사용하고 남은 연화석 36개가 쌓여 있고, 그 옆에 성격이 구명되지 않은 토단 유구가 남아 있다.

 

능지탑지

 

경주 낭산 설명판

 

 이곳을 지나 선덕여왕릉으로 가는 길은 제법 걸어가야 한다. 선덕여왕릉은 울창한 소나무 숲길을 지나 거의 산 정상까지 올라가야 한다.

 

선덕여왕릉 가는 길

 

 경주시 보문동 산79-2번지 낭산의 정상에 있는 신라 제27대 선덕여왕릉(善德女王陵)646년경에 조성되었고, 1969827일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낭산(狼山) 보호구역에 포함된다. 사천왕사(四天王寺) 위 낭산의 정상에 있는데, 현재의 상태는 봉토(封土) 밑에 둘레돌을 쌓은 원형의 토분(土墳)이다. 둘레돌은 잡석을 비스듬히 2단으로 쌓았고 그 밖으로 드문드문 둘레돌의 높이와 비슷한 대석을 기대어 놓았다. 그 외에는 다른 표식의물(表飾儀物)이 없고 다만 전면에 상석(床石)이 있으나 이것은 후세에 설치된 것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선덕여왕이 죽을 날을 예언하며 부처의 나라인 도리천에 묻어 달라고 했다고 한다. 도리천은 불교설화의 수미산 밑을 이야기하는데 어디를 말하는지 몰라 신하들이 묻자 낭산 기슭이라 대답하였고, 이 기슭에서 장사를 지냈다. 이후 문무왕이 삼국통일을 한 후 낭산에 사천왕사를 지었다. 사천왕이란 도리천의 호불신으로 선덕여왕의 무덤은 결국 도리천에 있는 셈이 되어 비로소 신하들이 낭산의 정상이 도리천이라 한 여왕의 뜻을 알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 밖에 유명한 선덕여왕 지기삼사라는 설화도 전해지고 있다. 주변에 신문왕릉, 효공왕릉, 신무왕릉, 효소왕릉 등 여러 왕릉이 있다.

 

선덕여왕릉

 

 선덕여왕릉을 내려와서 주변의 왕릉을 보지 않고 분황사로 향했다. 도로를 따라 걸어가니 선덕여왕릉으로 올 때 보았던  '독서당'이 나와서 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기에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독서당(讀書堂)은 배반동 낭산(狼山) 서쪽 기슭에 있는 서당으로, 신라 말기의 학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학문을 닦던 곳이라고 전하나 이후 여러 차례 보수가 이루어져 본래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1850(철종 1) 건립된 최치원유허비가 건물 왼쪽 비각 안에 놓여 있으며 담장 밖에 최치원이 심었다고 전하는 향나무가 있다. 그러나 문을 굳게 잠가 놓아서 밖에서 구경만하고 돌아섰다.

 

독서당의 여러 모습

 

 독서당을 내려와서 오랜만에 분황사로 간다. 지금은 황룡사 발굴터로 더 유명한 곳 바로 옆에 분황사가 있다.

 

멀리 보이는 황룡사 역사문화관

 

분황사 당간지주

 

 이 분황사 당간지주는 지금 황룡사 발굴 구역에 있다. 왜 분황사 당간지주가 분황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지가 의문이다. 분황사가 매우 큰 절이라 당간지주가 있는 이곳까지 분황사 터엿는지도 모를 일이다.

 

황룡사역사문화관

 

 황룡사 발굴타 바로 옆에 분황사가 있다. 내 기억에는 과거베 본 분황사의 '모전석탑'이 생생하다.

 

  분황사(芬皇寺)는 삼국시대 634(선덕여왕 3)에 창건한 사찰로 왕분사(王芬寺)라고도 한다. ‘분황(芬皇)’향기날 분’, ‘황제 황자로 향기나는 황제절이란 뜻으로, 신라 최초로 여왕이 왕위에 올라선 것을 알리는 상징적인 절이다. 분황사 석탑에서 나온 사리장엄구에도 가위 등 여자와 관련된 유물이 있었다. 창건 당시 가람은 석탑을 남쪽 중앙에 배치하고 그 북쪽에 남향의 삼금당을 ()’자형으로 배치한 소위 일탑삼금당식가람배치였다. 1~3차 중건으로 가람은 1동의 대형 금당을 배치한 일탑일금당식으로 바뀌었다.

신라를 지키는 호국룡이 살고 있는 신성한 절로 여겨졌고, 이 절의 석탑은 신라 석탑 중 가장 오래된 석탑이며, 솔거가 그린 분황사의 관음보살이 유명하다.

 국보 제30호로 지정된 모전석탑(模磚石塔)을 비롯하여, 화쟁국사비 비석대(和諍國師碑 碑石臺석정(石井석조(石槽초석(礎石석등·대석(臺石)과 사경(寺境) 이외에 당간지주(幢竿支柱)가 남아 있어 보존되고 있다.

 

분황사 입구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은 분황사 모전석탑(芬皇寺模塼石塔)은 높이 9.3m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모전석탑으로, 분황사 창건과 동시에 건립되었다고 생각되나 뒤에 몇 차례 보수되어 어느 정도까지 원형이 남아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기단(基壇)은 한 변 약 13m, 높이 약 1.06m의 막돌로 쌓은 토축(土築) 단층기단인데, 밑에는 상당히 큰 돌을 사용하였고 탑신(塔身) 밑이 약 36높아져 경사를 이루었다. 기단 위에는 서면 남북 모서리에 수사자상 각 한 마리씩과 동면 남북 모서리에 암사자상 각 한 마리씩이 지키고 있으나 원래 두 마리가 더 있어 총 여섯 마리의 사자가 있었다. 나머지 두 마리는 국립경주박물관의 정원으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현재 탑신부는 3층까지 남아 있으며 회흑색의 안산암(安山岩)을 작은 벽돌모양으로 잘라서 쌓았는데 위의 폭이 아래폭보다 약간 좁다. 탑신 4면에는 입구가 뚫려져 있는 감실(龕室)을 개설하고, 입구 좌우에 거의 원각(圓刻)에 가까운 인왕상(仁王像)을 배치하였으며 두 짝의 돌문을 달아 여닫게 하였다.

 <동경잡기(東京雜記)>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왜병에 의하여 허물어지고 그 뒤 분황사의 중이 개축하려다가 또 허물어뜨렸다고 하나 그 실상은 알 수 없다. 1915년에는 일본인들이 해체수리하였는데 현재의 상태는 이 때의 현상대로 복원한 것이다.

 지금 분황사 경내에는 이 탑을 수리할 때 남은 석재가 따로 보관되어 있어 지금의 모습이 창건 당시의 형태가 아님을 알 수 있으며, <동경잡기>에는 분황사9층탑(芬皇寺九層塔)’이라고 되어 있으나 그대로 믿을 근거가 못 된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모전석탑의 사면

 

분황사의 여러 모습

 

 분황사 뜰에는 석정이 있다. 분황사 석정(芬皇寺 石井)198585일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석정은 바위 틈 사이로 솟거나 흐르는 물을 고이게 바위를 옴폭하게 파고, 그 위에 다시 시설(施設)을 해 만든 우물이다. 분황사의 석정은 신라시대의 유물로, 벽체(壁體)를 둥글게 쌓아올리고 외부는 8각으로 다듬었다. 이런 형태는 불교의 팔정도(八正道)와 원융(圓融)의 의미를 지닌다.

 호국룡(護國龍) 변어정(變魚井)이라고 불리는 이 우물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분황사의 이 우물과 서라벌 동북쪽 금학산(琴鶴山) 기슭의 동천사(東泉寺)에 있는 동지(東池)와 청지(靑池)라는 두 우물에는 신라를 지키는 호국룡이 살고 있었다. 원성왕(元聖王) 때 신라에 온 당나라 사신이 이 용들을 3마리의 물고기로 변신시킨 뒤 잡아가지고 길을 떠났다. 하루 뒤 두 여인이 원성왕 앞에 나타나 이런 사실을 알리고 그들을 찾아 줄 것을 호소하였다. 왕이 사람을 시켜 당나라 사신을 쫓아가 그가 가지고 가던 물고기를 되찾아서 각각의 우물에 놓아주고 다시 살게 하였다고 한다.

 

석정

 

화쟁국사 비부

 

분황사 표석

 

 분황사를 나와 실제의 모습을 전혀 볼 수 없지만 지금 한참 복원이 논의 중이고 옛 발굴터에 여러 유물을 모아 놓은 황룡사역사문화관으로 발을 옮겼다.

 

 황룡사(皇龍寺)는 월성(月城)의 동쪽 용궁의 남쪽에 있었던 절로 칠처가람지(七處伽藍址, 과거 7불이 주석했다는 경주 일원의 일곱 사찰의 유적지)의 하나로서 규모나 사격(寺格)에서 신라 제일의 사찰이며, 신라의 사상과 예술에서도 그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553(진흥왕 14)에 새로운 대궐을 본궁 남쪽에 짓다가 거기에서 황룡이 나타났으므로 이를 불사(佛寺)로 고쳐 황룡사라 하고 17년 만인 569년에 완성하였다. 불국사와 함께 신라를 대표하는 사찰이며, 백제의 미륵사, 고구려의 정릉사와 함께 삼국시대를 대표하는 호국 사찰이었다.

 

삼국유사에서 설명한 칠처가람지는

금교(金橋) 동쪽 천경림(天鏡林) - 흥륜사(興輪寺)

삼천기(三川歧) - 영흥사(永興寺)

용궁(龍宮) 남쪽 - 황룡사(皇龍寺)

용궁 북쪽 - 분황사(芬皇寺)

사천미(沙川尾) - 영묘사(靈妙寺)

신유림(神遊林) - 사천왕사(四天王寺)

서청전(婿請田) - 담엄사(曇嚴寺)로 알려져 있다.

 

 신라인들은 과거불인 가섭불(迦葉佛)의 연좌석(宴坐石)이 있는 이 절을 가섭불시대부터 있었던 가람터로 보았는데, 이는 신라인이 염원하는 불국토(佛國土)가 먼 곳이 아닌 신라 땅이라는 자각과 관련된 것이다.

신라삼보(新羅三寶) 중에서 이보(二寶)인 장륙존불(丈六尊佛)과 구층탑이 이 절에 있었고, 화성(畵聖) 솔거(率居)의 금당벽화가 이곳에 있었다.

 

황룡사 발굴터

 

 황룡사역사문화관에는 옛날의 황룡사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많은 노력을 한 흔적이 보인다. 그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목조구층탑이다. 이 절의 중심인 구층목탑은. 당나라로 유학갔던 자장이 태화지(太和池) 옆을 지날 때 신인(神人)이 나와서, “황룡사 호국룡은 나의 장자로 범왕(梵王)의 명을 받아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본국에 돌아가서 그 절에 9층탑을 이룩하면 이웃나라가 항복하고 구한(九韓)이 와서 조공하며 왕업이 길이 태평할 것이요, 탑을 세운 뒤에 팔관회(八關會)를 베풀고 죄인을 구하면 외적이 해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자장은 643(선덕여왕 12)에 귀국하여 탑을 세울 것을 왕에게 청하였다. 자장은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 100()을 탑 속에 봉안하였다.

 이 탑의 각 층은 아래에서부터 일본, 중화(中華), 오월(吳越), 탁라(托羅), 응유(鷹遊), 말갈, 단국(丹國), 여적(女狄), 예맥(濊貊)의 아홉 나라를 상징하는데, 이는 이들 나라로의 침략을 막을 수 있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고 한다. 이 탑은 1238(고종 25)에 몽고군의 병화(兵火)로 가람 전체가 불타버린 참화를 겪은 뒤 중수되지 못하였다.

 

복원을 고대하는 목조구층탑의 모형

 

황룡사에서 발굴된 거대한 치미

 

황룡사역사문화관 내부

 

 이 밖에도 이 절에는 국립경주박물관의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보다도 4배나 더 크고 17년 앞서서 주조된 종이 있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전하지만, 이 종도 몽고군의 병화 때 없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절터는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현재 황룡사 복원은 초반 단계인 고증 연구와 발굴 탐색, AR복원에 머물러있다. 현재 중문과 남측 회랑을 AR로 복원하였으며 20년대 중반까지 금당과 내부 불상, 9층목탑의 AR복원 계획을 명시했다. 하지만 경주시와 정부는 여전히 황룡사의 실물 복원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AR복원으로 잠정 확정된 복원 안들에 대해 국민들의 사회적 공감대를 얻으면 실물 복원을 추진하는 것으로 초장기 로드맵을 구상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꼭 복원을 하여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복원을 한다고 처음 그대로 만들 수는 전혀 없으니 폐허는 폐허대로 두는 것도 역사의 한 면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황룡사터

 

 황룡사역사문화관을 둘러 보는 것으로 오늘의 경주 탐방을 끝내고 집으로 향한다. 올해의 겨울 날씨가 비교적 한파가 많아 날씨를 보아가면서 경주 나들이를 계속할 것이나 다음의 일정이 언제일는지가 의문이다. 이제 젊은 나이도 아니고 해서 기상상태를 보고 다시 올 것이다.

 

 다음은 남산 일대를 돌아볼 계획이다.

 

경주3 - 계림과 교촌마을 오릉 일대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오늘은 대릉원 주변에서 저번에 가지 못한 반대방향을 돌아보기로 하고 경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대릉원 경내를 지나 먼저 간 곳이 숭혜전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는 않지만 신라왕을 모시고 있는 곳으로, 경주의 유적지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대부분 민가에 가까이 있듯이 이 숭혜전 주변도 민가가 많이 들어서 있다.

 

 경주시 황남동에 있는 신라시대 사묘재실인 숭혜전(崇惠殿)1992718일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숭혜전에는 신라 최초의 김씨 임금인 13대 미추왕(味鄒王)과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룩한 30대 문무대왕(文武大王), 그리고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敬順王)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원래는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敬順王)의 덕을 기리기 위해 경주시 인왕동의 경주 월성에 지은 사당으로 경순왕의 영정을 모시고 제향해 왔다.

 

 조선시대 1592(선조 25)에 임진왜란으로 사당이 소실되었고 그 뒤부터 위패를 모시고 제향했다. 1627(인조 5) 당시 관찰사 김시양(金時讓)이 동천촌에 사당인 동천묘를 다시 짓고 경순왕의 위패만 모셨다. 1723(경종 3) 조태억의 간청으로 경순왕전으로 고쳐 부르다가 1794(정조 18)에 당시의 도백 조진택이 나라의 허락을 받고 지금의 자리로 옮겨 짓고 이름을 황남전으로 바꾸어 불렀다. 1887(고종 24)에는 김만제(金滿濟)의 간청으로 미추왕(味鄒王)의 위패도 이곳에 모시게 되었으며 이듬해 판부사 김홍집(金弘集)의 간청으로 문무대왕의 위패도 함께 모시게 되었다.

그뒤 고종이 경주부윤 김철희(金喆熙)에게 명하여 사당을 증축하게 하고 숭혜전으로 선액(宣額)하였다.

 

 앞면 5, 옆면 3칸인 맞배집으로 왼쪽에 영육재(永育齋), 오른쪽에 경모재(敬募齎)가 있다. 앞에는 경순왕 신도비와 비각이 있고, 길 건너에 계림세묘(雞林世廟)가 있다.

 

숭혜전의 여러 모습

 

 숭혜전을 나와 계림쪽으로 걸어가면 오른쪽으로 동부사적지대가 보인다.내물왕릉을 비롯하여 여러 왕릉이 있고 아직 발굴을 진행하고 있는 듯하다.

 

 경주 동부사적지대(慶州 東部史蹟地帶)는 황남동에 위치한 신라의 여러 사적이 모여있는 곳을 보존하기 위해 하나의 단위로 1968년 사적으로 지정된 구역이며, 지정면적은 669293이다. 유적으로 동서는 동궁과 월지부터 교동까지, 남북은 월성 남쪽의 남천에서 고분공원 앞 첨성로가 있는 곳까지의 지역이다.

 

 이곳에는 동궁과 월지, 경주 월성, 첨성대, 계림, 내물왕릉 등 외에도 수십기에 달하는 신라 무덤이 완전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경주시 전역에 흩어져 있는 신라시대의 역사 유적들은 그 성격에 따라 5개 지구로 나뉘는데, 이들 5개 지구는 모두를 통틀어 경주역사문화지구로 일컬어지며,그 런데 경주 월성(사적, 1963년 지정), 첨성대(국보, 1962년 지정), 계림(사적, 1963년 지정), 내물왕릉(사적, 1969년 지정) 등과 함께 1968년 사적으로 지정된 경주 동부 사적지대도 경주역사문화지구에 포함되면서 200012월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

 

유네스코 경주역사문화우산 표석

동부사적지대의 여러 고분들

 

 동부사적지대의 옆으로 난 길을 걸어가니 왼쪽으로 첨성대가 보이고 앞으로는 월성이 보인다. 월성으로 가지 않고 오른쪽으로 발을 옮기니 계림이 나타난다.

 

 경주 계림(慶州 鷄林)의 어원에는 두 가지 이설이 있는데, 원래 이름은 시림(始林)이었지만 김알지가 태어난 이후 계림으로 바꿨다고 한다. 신라 김씨 왕조의 시조 김알지가 태어났다고 알려진 장소의 이름이었지만, 후에 신라 전체를 뜻하는 이름이 되었다는 설이 일설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서기 65년 봄 3월에 김알지를 발견하며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 왕이 금성 서쪽 시림 숲 사이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리고 온통 환한 빛으로 가득하여, 날이 밝은 후 신하를 보내어 살피도록 하였다. 신하가 시림에 이르러 보니 금으로 된 조그만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 울고 있어 돌아와 고하니, 왕이 즉시 시림으로 가서 궤짝을 열어 보았다. 그 속에는 총명하게 생긴 사내아이가 있었고, 왕은 하늘에서 보낸 아이라 하여 태자로 삼았다. 또한 시림의 이름을 계림으로 바꾸었으며 국호로 삼았다고 전한다. 반면 삼국유사에서는 서기608월에 호공이 직접 시림을 걷다가 신령한 기운이 내려와 발견하는 것으로 달리 전한다. 또한 여기서는 계림의 어원이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같은 책 혁거세조에서는 처음 왕이 난 곳이 계정(鷄井)이므로 국호를 계림이라 하였다고 전하여 차이가 있다.

 혹은 높은 땅을 가리키는 '''서벌(서라벌=경주)'이 합쳐지면 '달스벌/달스불'이 되고, 당시 닭()을 닥, 달 등으로 발음했기 때문에 '달스벌/달스불'을 각자 음차 및 훈차하는 방식으로 닭+수풀, 즉 계림(鷄林)으로 표기하였다는 설이 있다.

 같은 시기 중국과 일본에서 신라의 국호를 계림으로 인식했던 기록도 전해진다. 구당서에서는 당고종이 신라에 계림도독부를 세웠다고 전하며, 김대문 역시 자신의 책 이름을 계림잡전으로 지었다. 고려의 이야기를 중국에서 적은 책의 제목도 계림유사로 지어졌다. 일본서기에서도 신라의 국호를 계림으로 적은 부분이 있다.

 

 다만 현재 알려진 계림은 사실은 경주 향교의 홍수 방지용 숲이고 실제 계림은 다른 곳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설도 있다.

 

 1963년 사적 제19호로 지정되었다. 지정면적 7,273m2으로 신라의 건국초부터 있던 숲으로 알려져 있고 느티나무와 물푸레나무, 회화나무, 싸리나무 등의 교목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계림에서 보는 월성

 

계림 설명판

 

계림의 여러 모습

 

 계림을 벗어나 조금 가면 경주향교가 나타난다.

 

 경주시 교동에 있는 경주향교(慶州鄕校)19851015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경북향교재단이 소유하고 있으나 언제 창건되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경상북도에서 가장 큰 향교로, 향교의 위치는 계림(鷄林) 서쪽, 문천(文川) 북쪽에 해당하는데, 신라의 국가 최고교육 기관인 국학(國學)이 있었던 자리로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원효(元曉)가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의 과부 공주를 만난 요석궁(瑤石宮)에 대해 지금의 학원이 이곳이다.’(今學院是也)라는 주석을 남기고 있다. 신라 멸망 뒤에 서라벌이 경주로 개칭되면서 고려시대에는 향학(鄕學), 조선시대에는 향교로 이어져온 유서 깊은 곳으로 나주향교(羅州鄕校)와 함께 향교 건물 배치의 표본이 된다.

 

 2011127일 경주향교 대성전이 대한민국 보물 제1727호로 지정되었다. 향교 안에는 선조 34(1601) 당시 제독관 손기양(孫起陽)이 흩어져 있던 각종 학규(學規)를 엮어서 작성한 <경주향교학령>(慶州鄕校學令)이 남아 전하고 있는데, 일종의 교내 학칙으로써 이는 조선 전기 향교 교육의 실태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 중 하나이다.

 

경주향교 표석

 

향교가 있는 교촌마을 표지

 

경주향교 안내판

 

 향교 정문은 열어 놓지 않고 동쪽문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동쪽문으로 들어가니 먼저 반기는 것이 우물이다. '총명수'라고 이름이 붙어 있는 우물로 지금도 사용하고 있지는 않는 것 같아 보였다. 우물울 지나 향교의 여러 곳을 돌아보니 대단히 규모가 큰 것 같아 보였다.

 

경주향교의 여러 모습

 

 향교를 나와 앞에 흐르는 남천을 보니 예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월정교가 보인다.

 

 월정교란 이름은 <삼국사기>에 통일신라 경덕왕 19궁궐 남쪽 문천에 월정교, 춘양교 두 다리를 놓았다.’는 기록을 통해 알려졌다.

 조선시대에 유실되어 없어진 것을 10여 년간의 조사 및 고증과 복원을 진행해 20184월 모든 복원을 완료했다. 2013년 교량복원을 먼저 마치고, 이후 다리 양쪽의 문루(門樓)를 마저 지었다. 문루 2층에는 교량의 복원과정을 담은 영상물과 출토 유물을 볼 수 있는 전시관이 있다.

낮에는 월정교의 자태를 오롯이 볼 수 있어 좋고, 밤의 월정교는 또 다른 매력으로 우리를 유혹한다고 한다.

 

월정교를 앞에 두고 한옥으로 마을을 이루고 있는 교촌마을의 아름다운 풍경이 보인다. '교촌마을'은 향교가 있는 마을을 뜻한다. 즉 교촌마을이 경주에 있는 교촌마을을 뜻하는 것만은 아니다. 경주 교촌마을은 신라 신문왕2(682)에 설립된 신라 최초의 국립대학인 국학이 있던 곳으로 교육기관인 국학의 변화는 고려시대에는 향학, 조선시대에는 향교로 이어졌다.

 교촌마을 주변에는 삼국유사 속 이야기보따리가 곳곳에 숨겨져 있다. 김알지가 태어난 계림, 원효스님과 요석공주의 사랑을 이어준 문천교(蚊川橋), 김 유신이 살던 재매정, 월정교와 충담스님, 도화녀를 사랑한 진지왕, 선덕여왕이 만든 첨성대 등 수 많은 이야기 현장이 교촌과 남천을 따라 흩어져 있다.

 

 교촌마을은 새롭게 복원 조성되어 문화유적의 원형을 잘 보존하면서도 보고 즐기는 관광지가 될 수 있도록 힘을 쓰고 있다. 국내 최대 규모의 목조 교량인 월정교가 새롭게 복원되어 목조건축의 웅장함을 느낄 수 있고, 야간에는 화려한 조명으로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해 관광객들이 꼭 찾는 야경코스가 되었다.

 

 교촌마을에는 국가민속문화재 경주 최부자댁, 중요무형문화재 경주교동법주가 있다.

 

교촌마을

 

월정교

 

교동법주

 

교동법주양조장

 

 음식점으로 모양을 바꾼 '요석궁'과 교동법주 양조장 등을 포함한 이 구역이 유명한 경주 최부자집이다.

 

 경주 최부자집은 조선조 최진립의 가문인 경주 최씨가 17세기 초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약 300년 간 부를 이어온 것을 의미한다. 12대로 대대손손 가훈을 지켜가며 부를 쌓았고, 나그네나 거지들 에게 돈을 나누어 주고 밥을 먹여주는 좋은 선행을 했다. 이렇듯 후손을 엄격하게 교훈하며 탐욕을 줄여갔던 최부잣집은 조선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예로 여겨지며, 세간의 존경을 받았다.

12대 최준은 일제강점기에도 독립자금 마련을 위해 백산무역주식회사를 세워 안희제와 운영하며 임시정부 재정부장을 맡아 독립운동 자금줄 역할을 했으며 그 증거 문서들이 2018년 고택 광에서 발견되기도 하였다. 해방 후엔 전 재산을 모두 털어 대구대학(현재의 영남대학교)과 계림학숙을 세웠다.

 

 최부자집이 후손들에게 항상 지킬 것을 마음에 새기게 한 육훈은 다음과 같다.

  1.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말라

  2. 1년에 1만 섬 이상 재산을 모으지 말라

  3. 흉년에는 남의 논밭을 사지 말라

  4. 집에 온 손님은 융숭하게 대접하라

  5.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6. 가문에 시집 온 며느리들은 3년 동안 무명옷을 입도록 하라

 

최부자집의 여러 모습

 

교촌교에서 보는 남천과 월정교

 

 교촌마을을 나와 오릉쪽으로 발을 옮기면 바로 사마소가 나온다.

 

 경주사마소(慶州司馬所)는 조선시대 과거에 합격한 그 지방의 생원과 진사들이 이곳에서 유학(儒學)을 가르치거나 정치(政治)를 토론하던 건물로 지위가 높은 사람도 자기 수양을 위해 이곳을 찾아왔다고 한다.

 처음 세워진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선조 25(1592)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진 뒤 영조 17(1741)에 다시 지어 풍영정(風詠亭)이라 불렀다. 이 건물은 원래 이곳으로부터 동쪽으로 300m 거리에 있는 신라시대 월정교(月精橋)터의 북쪽 교대(橋臺) 위에 세워져 있던 것을 1984년 이곳으로 옮겨왔다. 건물 안에는 건물을 고친 내용이 담긴 현판들이 걸려 있어 그 내력을 알려주고 있다.

건물은 앞면 4, 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사마소(司馬所)’라는 현판은 영조 38(1762) 당시 부윤벼슬을 지내던 홍양한이 쓴 것이다.

 

사마소의 여러 모습

 

사마소 바로 옆에 황량한 벌판에 '재매정'이 있다.

 

 재매정(財買井)은 신라의 김유신 장군 집에 있던 우물로 화강암을 벽돌처럼 쌓아 올려 만들었는데, 이 일대가 장군의 집이 있었던 자리로 추정된다. 김유신 장군이 오랜 기간을 전쟁터에서 보내고 돌아오다가 다시 전쟁터로 떠날 때, 자신의 집 앞을 지나면서 가족들을 보지도 않고 우물물을 떠오게 하여 말위에서 마시고는, “우리집 물맛은 옛날 그대로구나하고 떠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1993년 발굴조사에서 재매정을 중심으로 사방 70m 지역을 발굴하였다. 우물의 깊이는 5.7m이며, 가장 넓은 부분은 1.8m이고, 바닥의 지름이 1.2m로 벽돌같이 다듬은 돌로 만들었다. 우물 옆에 비각이 있고 비각안에 조선 고종 9(1872)에 이만운이 쓴 비석이 있다.

 1976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지정면적 5,481로 현재 위치는 경주 흥륜사(興輪寺)터와 월성(月城)터의 중간에 있다.

 

 

재매정의 여러 모습

 

문천교에서 보는 남천

 

 문천교를 지나 큰 길을 따라 제법 가면  '오릉'이 나타난다.

 

 경주 오릉(慶州 五陵)은 탑동에 있는 능묘(陵墓)4기의 봉토무덤과 1기의 원형무덤이다. 1969827일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봉분의 높이는 10m 내외이고, 지름은 20m 내외이다.

 

 신라 초기의 왕릉으로 시조(始祖) 박혁거세(朴赫居世)와 알영부인(閼英夫人), 2대 남해왕(南解王), 3대 유리왕(儒理王), 5대 파사왕(婆娑王) 5명의 분묘라 전해진다. 네 왕들의 공통점은 모두 박씨라는 것으로, 가운데 하나를 두고 나머지 네 무덤이 한쪽 면에 자리하였다. 일명 사릉(蛇陵)이라고도 하는데 이러한 명칭은 박혁거세가 승하 후 7일 만에 그 유체(遺體)가 다섯 개로 되어 땅에 떨어졌으므로 이를 합장하려 하자 큰 뱀이 나와 방해하므로 그대로 다섯 군데에다 매장하였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연유되었다. 능 입구의 홍살문을 세운 기둥은 원래 당간지주(幢竿支柱)로 이곳에 담엄사(曇嚴寺)가 있었다는 설과 일치한다.

 

 오릉 경내에 알영부인이 계룡에 의해 탄생한 전설상의 장소인 알영정 우물과, 혁거세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당 숭덕전, 조선시대에 세운 왕릉비가 있으며, 능원 서남쪽 소나무숲에는 숭덕전 남쪽에 있던 담암사지에서 출토된 석재를 옮겨 놓았다. 멀지 않은 거리에 박혁거세 탄생설화의 배경인 나정이 있다.

 

오릉 주위로 숲이 울창하게 조성되었는데, 별로 넓지도 않은데도 능역에 고라니가 살아 가끔 관람하다 마주친다고 한다. 오릉 경내에는 곳곳에 여러 야생 동물에 대한 주의가 붙어 있다.

 

오릉의 여러 모습

 

 오릉을 한 장면으로 사진을 찍으려면 여러 구도를 맞추어 보아야 한다. 그래서 여러 곳을 배회하다가 한 컷에 들어오는 제법 먼 곳에서 사진을 찍었다.

 

 오릉을 보고 알영정으로 갔다. 알영정(閼英井)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비() 알영부인이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우물로 경주오릉 내 숭덕전 대나무 숲 속에 위치하고 있다. <삼국사기><삼국유사>에 알영정에 관한 기록이 전하는데, 이와 같은 정천신앙에 따른 탄생설화는 동북아시아에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다. 현재 알영정의 정확한 위치를 확인할 수는 없으나 <동경잡기>에 따르면, 경주부의 남쪽 5리에 있었다고 한다.

 

알영정의 모습

 

 알영정에서 바로 이어진 있는 숭덕전(崇德殿)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왕(朴赫居世王)의 제향을 받드는 제전(祭殿)으로 오릉(五陵)의 남쪽에 있다. 조선 세종 11(1429)에 세웠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선조 33(1600)에 다시 지었고 숙종 20(1694)에 수리하였다. 지금 경내에는 조선 영조 35(1759)에 세운 박혁거세와 숭덕전의 내력을 적은 신도비가 있다.

 

숭덕전의 모습

 

 오릉을 끝으로 오늘의 계획한 여정을 마쳤다. 오릉을 나와 버스정류장에서 시내버스를 조금 기다려서 타고 시외버스정류장으로 가서 집으로 향했다. 예정한 시간에 맞추어 오늘도 하루를 재미있게 보냈다.

 

경주2 - 월성일대와 박물관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대릉원 주변의 고분군에서 길을 따라가면 첨성대가 나온다. 봄과 가을에는 첨성대 주변의 야생화단지에 아름다운 꽃이 만발하여 눈을 즐겁게 하지만 지금은 한겨울이라 꽃은 보지 못하고 첨성대를 구경하는 사람들만 본다. 오랜만에 보는 첨성대는 예전에 보는 것과 다르다. 첨성대뿐만 아니라 경주의 유적지 모두가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것같다.

 

 첨성대(瞻星臺)는 다른 별칭으로 점성대(占星臺)라고도 하며 삼국시대 신라 시기의 천문관측소다. 높이는 약 9.5m로 첨성대가 위치한 곳은 옛날에는 경주부(慶州府) 남쪽 월남리(月南里)라고 하였고, 계림(鷄林)의 북방 약 150200m, 내물왕릉 동북방 약 300m 되는 곳이다. 이 근방을 속칭 비두골이라고도 한다.

 첨성대는 <삼국유사> 기이(紀異) 2의 별기(別記)이 왕대(王代)에 돌을 다듬어서 첨성대를 쌓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신라 선덕여왕 때(재위 632647)에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같은 책 왕력(王曆) 1에 신라 제17대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 이야기 끝에 능은 점성대(占星臺) 서남에 있다.’라는 기사가 있는데 현재의 내물왕릉과 첨성대의 위치 관계와 잘 부합된다. 이 기록에서 첨성대가 별명으로 점성대라고 불렸던 것을 알 수 있다.

 구조는 아래의 기단부(基壇部), 그 위의 술병형의 원통부(圓筒部), 다시 그 위의 정자석(井字石) 정상부(頂上部) 등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고, 1315단에 걸쳐서 정남에서 동쪽으로 약 16°가 되는 방향을 향하여 한 변이 약 95인 정방형의 창구(窓口)가 나 있다.

 첨성대의 석재는 화강석(花崗石)인데 표면에 노출된 부분은 모두 다듬어져 있다. 한편 첨성대의 문이 탑의 중간에 위치한 것은 석가모니가 어머니 마야부인의 겨드랑이(혹은 옆구리)에서 태어난 것을 상징하며, 첨성대에 사용된 364개의 화강암 벽돌은 각각 1년의 하루를 상징하고 거기에 선덕여왕의 1이 추가되어 1365일이 완성된다는 해석이 있다. 석재의 개수는 종래 365개라고 하였으나 기단석까지 포함하느냐 않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따라서 정확히 365개는 아니다.

 첨성대를 중심으로 경주의 대릉원 내 고분과 미추왕릉, 중요 유적들은 하늘의 별자리가 그대로 지상에 내려와 앉은 것처럼 모양새가 일치한다는 주장도 있었으며, 첨성대에서 창문으로는 반월성의 궁궐 전각이 바로 보인다.

 20169월 경주에 발생한 지진의 여파로 석축이 지진 발생 전에 비해 약 1.2 cm 정도 벌어졌지만 균열은 없었다고 한다.

 

첨성대 옆에 있는 문호사

 

첨성대에서 보는 고분들

 

첨성대의 여러 모습

 

 이제는 내가 나이를 들었는지 예전에 보던 첨성대보다는 작게 보인다. 첨성대는 그대로인데 내가 보는 시선이 달라진 것이다. 세월이 참 많이도 흘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첨성대를 벗어나 월성쪽으로 가는 길에 경주 동부사적지대라는 입간판이 보이고 발굴이 진행 중이다. 경주는 땅만 파면 유적이고 유물이 나온다는 말과 같이 아직도 곳곳에서 발굴이 진행 중이다.  무려 천년의 세월 동안을 한 국가의 수도였으니 그럴만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경주동부사적지대

 

 동부사적지대 발굴지를 지나니 월성이 보이기 시작하고 월성 앞에 펼쳐져 있는 해자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해자를 따라 걸으니 해자 안의 물고기를 노리는 새가 띄이어 새가 날아오르기를 기다렸으나 새는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의 먹이만 노리고 있었다. 자연에서의 생존 본능을 느끼게 하는 광경이었다.

 

월성해자 앞에서 멀리 보이는 첨성대

 

월성해자

 

 월성(月城)은 경주시 인왕동에 있는 101(파사왕 22)에 축조한 신라 때의 성으로 196312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재성(在城)이라고도 하였고, 반월성(半月城)이라고도 불린다. <삼국사기>에서는 101(파사 이사금 22)에 월성을 쌓았다고 전하나, 2021년의 발굴조사 결과 문헌 기록과 약 250년 차이 나는 4세기 중엽부터 쌓기 시작해 5세기 초에 이르러 완공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삼국사기>에 보면 주위가 1,023()이며, 자연적인 언덕 위에 반월형으로 흙과 돌을 혼용하여 쌓았고, 여기에 신라 역대 왕들의 궁성이 있다고 기록되었다. <동경잡기(東京雜記)>에는 290(유례왕 7) 큰 홍수로 월성이 무너져 이듬해 보수하였으며, 487(소지왕 9)에 다시 이곳으로 옮겼다고 적혀 있다.

 

 옛 기록에 따르면 월성을 중심으로 궁성의 많은 문과 누각이 있었으며. 또 관청도 많았다고 한다. 왕궁으로는 내성(內省) 임해전(臨海殿) 안압지(雁鴨池) 동궁(東宮) 동궁만수방(東宮萬壽房) 영창궁(永昌宮) 영명궁(永明宮) 월지궁(月池宮) 내황전(內黃殿) 내전(內殿) 내정(內庭) 등이 있다. 영명궁은 태후의 궁이었고 월지궁은 왕태자의 궁이었다. 천존고(天存庫)에는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文武王)의 전설과 관계가 있는 만파식적(萬波息笛)이 보관되어 있었다.

 

 <삼국유사>를 보면 월성터(月城址)는 원래 충신인 호공(瓠公)의 거주지였는데, BC 19(박혁거세 39) 석탈해(昔脫解)가 금성(金城)의 지리를 살펴본 뒤에 가장 좋은 길지(吉地)로 호공의 집터를 지목하여 거짓 꾀를 부려 호공의 집을 빼앗아 월성을 쌓았다. 이 공으로 석탈해는 남해왕(南解王)의 맏사위가 되었고, 그 후에 신라 제4대 왕위에 올랐다. 기록에 따르면 월성의 주인은 여러 차례 바뀌었다. 처음에는 왜계 사람인 호공이 소유하였다가 얼마 뒤에는 바깥으로부터 경주분지로 진입한 석탈해의 점유가 되었다. 특이하게도 외부 세계로부터 사로 지역으로 진입한 새 이주민이 교대로 월성을 장악하였다는 것은 서로 점거하기 위해 다툴 만한 대상지로 이곳이 갖는 중요성을 시사해주는 증거로 채택된다. 그 뒤 박씨인 파사 이사금이 월성을 축성한 사실은 곧 패권 장악과 함께 석씨 족단에게서 넘겨받았음을 뜻하는 것으로도 여겨진다. 마침내 정치적 주도자로 새롭게 부상한 김씨 마립간이 신라왕조의 건설에 성공하자 그 표상으로서 자신들의 원래 거소 대신 월성을 왕궁으로 삼게 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결과적으로 월성은 사로국 및 신라의 패권을 장악한 자의 몫이 되었다.

 

 성의 동쪽 서쪽 북쪽은 흙과 돌로 쌓았으며, 남쪽은 절벽인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성벽 밑으로는 물이 흐르도록 인공적으로 마련한 방어시설인 해자가 있었으며, 동쪽으로는 경주 동궁과 월지로 통했던 문터가 남아있다. 성 안에 많은 건물터가 남아있으며, 1741년에 월성 서쪽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석빙고가 있다.

 

 성 바로 북동쪽에 동궁과 월지가 있다. 지금은 월성과 동궁 사이에 원화로라는 도로가 났지만 원래는 하나의 궁처럼 연결되었다고 추정한다. 또한 바로 남동쪽에는 국립경주박물관이 있는데 여기도 1974년 건설 당시, 그리고 2000년에 왕궁터로 추정되는 유물이 발굴되어 역사학자들이 동궁과 함께 남궁(南宮)이 있었는데 그 터에 박물관을 세웠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월성탐방로

 

 월성탐방로를 한가로이 걸어가면서 이곳저곳을 구경하고 있으니 제법 많은 사람들이 한가하게 이 곳을 거닐고 있었다. 탐방로를 따라 계속 가니 석빙고가 나타난다. 그런데 이 석빙고는 신라 시대의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막연하게 신라시대의 것이려니 하고 착각을 하지만 신라의 것은 아니다.

 

 경주 석빙고(慶州 石氷庫)는 얼음을 저장하기 위하여 만든 석조 창고를 말한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얼음을 채취하여 저장하는 일은 신라 때부터 있었다고 하는데, 그러나 신라 때 축조된 빙고는 현재 남아 있는 것이 없으며, 고려시대에도 정종, 문종 때 얼음을 나누어주는 기록이 나오지만 그 얼음을 저장했을 석빙고 유구(遺構)는 지금까지 발견되거나 조사된 바 없다. 경주 석빙고는 1738년 경주시 인왕동 월성(月城)의 북쪽에 축조한 조선시대의 화강석 얼음창고로 1963121일 보물로 지정되었고, 규모는 길이 18.8m, 홍예(紅霓) 높이 4.97m, 너비 5.94m이다.

 

 내부는 연석(鍊石)으로 5개의 홍예를 틀어 올리고 홍예와 홍예 사이에 길쭉한 네모 돌을 얹어 천장을 삼았다. 천장에는 3곳에 환기 구멍을 마련하여 외기와 통하게 하였는데, 조각한 돌로 구멍을 덮어 비와 이슬을 막고 있어 다른 석빙고와는 달리 정연한 양식과 축조를 보여 주목을 끈다. 석빙고 옆에는 석비가 있어 축조연대를 알 수 있는데, ‘崇禎紀元後再戊午1738(영조 14)에 해당하고, 다시 입구의 미석(楣石)崇禎紀元後再辛酉移基改築이라 새겨져 있어, 축조한 지 4년 만에 현위치에 옮겨 개축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서쪽으로 약 100m 되는 곳에 옛터로 전하는 자리가 있다.

 

 조선 후기에 곳곳에 여러 석빙고를 축조하였으나, 그 규모나 기법에서 이 석빙고가 가장 정연한 걸작으로 꼽힌다.

 

경주 석빙고

 

아직도 진행 중인 월성 발굴지

 

 월성을 한가로이 거닐며 구경하고 내려와서 길을 건너면 동궁과 월지가 나타난다. 사실 이곳은 옛날부터 안압지로 우리에게 더 잘 알려진 곳이다.

 

 경주 동궁과 월지(慶州 東宮月池)는 안압지 서쪽에 위치한 신라 왕궁의 별궁터이다. 다른 부속건물들과 함께 왕자가 거처하는 동궁으로 사용되면서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이곳에서 연회를 베풀었다고 한다. 674(문무왕 14) 경주시 인왕동에 신라 왕궁의 별궁(別宮)으로 동궁(東宮) 안에 창건된 전궁(殿宮) 터로 196312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삼국사기>의 임해전에 관한 기록을 보면 임해전은 정사(政事)를 보는 궁이 아니고, 잔치나 나라의 손님들을 모시는 기능을 하였으며, 그 시기는 대개 3월 또는 9월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는 임해전과 월지의 경치가 가장 좋은 때이기도 하다.

 

 이 월지와 임해전의 유적은 1974~1976년에  발굴 조사되었다. 월지는 이 동궁에 붙은 정원의 못이다. <삼국사기>에는 임해전에 대한 기록만 나오고 안압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는데, 조선시대 <동국여지승람>에서 안압지의 서에는 임해전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현재의 자리를 안압지로 추정하고 있다. 임해전은 별궁에 속해 있던 건물이지만 그 비중이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이며 안압지는 신라 원지(苑池)를 대표하는 유적이다.

 

 그래서 1980년에 임해전으로 추정되는 곳을 포함하여 서쪽 못가의 신라 건물터로 보이는 5개 건물터 중 3곳과 안압지를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동궁과 월지의 여러 모습

 

 동궁과 월지를 이곳저곳 구경하며 다니니 한 무리의 여인들이 사진을 찍어 달라고 요청하여 여러 장 찍어 주었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여인들은 친구들인 것같은데 여가를 틈타서 옛날의 추억을 살리고 있는 듯했다.

 

 동궁과 월지를 벗어나서 조금 걸어가면 국립경주박물관이 나온다. 여러 번 이곳에서 말했듯이 나는 박물관 탐방을 아주 좋아한다. 그래서 어디를 가든지 꼭 박물관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래서 경주박물관은 숱하게 왔지만 올 때마다 새롭다.

 

박물관입구

 

 박물관을 들어가면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이 일명 에밀레종이라고 알려져 있는 성덕대왕신종이다.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은 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범종이다. 742년부터 신라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의 공덕을 널리 알리기 위해 만들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손자 혜공왕이 771년에 완성했다. 봉덕사에 달았다가 조선시대인 1460년 수해로 봉덕사가 없어지자 영묘사(靈妙寺)로 옮겼으며, 다시 봉황대(鳳凰臺) 아래에 종각을 짓고 보존하다가 경주읍성 남문인 징례문에 걸어두었다가 19158월 경주고적보존회에 의해 구()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다. 19755월 국립경주박물관이 신축됨에 따라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이 종은 처음에 봉덕사에 달았다고 해서 봉덕사종이라고도 하며, 아기를 시주하여 넣었다는 전설로 아기의 울음소리를 본따 에밀레종이라고도 한다. 19621220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29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3.66m, 입지름 2.27m, 두께 1125cm이며, 무게는 1997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정밀측정한 결과 18.9톤으로 확인되었다.

 

 종의 맨 위에는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音筒)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동종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이다. 종을 매다는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龍鈕)는 용머리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다. 종 몸체에는 상하에 넓은 띠를 둘러 그 안에 꽃무늬를 새겨 넣었고, 종의 어깨 밑으로는 4곳에 연꽃 모양으로 돌출된 9개의 연꽃봉우리를 사각형의 연곽(蓮廓)이 둘러싸고 있다. 유곽(乳廓) 아래로 2쌍의 비천상(飛天像)이 있고, 그 사이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撞座)가 연꽃 모양으로 마련되어 있으며, 몸체 앞·뒷면 두 곳에는 종에 대한 내력이 새겨져 있다. 특히 종 입구 부분이 꽃모양으로 굴곡진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어 이 종의 특징이 되고있다.

 

 1992년 제야에 서른세 번 종을 친 뒤 한동안 타종을 중단하였다가, 1996년 학술조사를 위해 시험으로 다시 타종을 하였다. 200412월 안전 보존을 위해 더 이상 타종을 중단했다.

 

 지금은 정해진 시간에 예전 타종 시에 녹음을 해 두었던 소리를 들려준다. 내가 약 45년 전에 이곳을 찾았을 때 이 박물관에 학예관으로 있던 선배가 이 종을 그날 타종한다고 해서 듣고 가라고 해 기다렸다가 실제 타종의 모습과 종소리를 들은 기억이 새롭다. 이런 것도 나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하나의 좋은 추억이다.

 

성덕대왕신종의 사면

 

 성덕대왕신종을 구경하며 녹음된 소리를 듣고 박물과 내부로 향했다.

 

 경주시에 있는 국립경주박물관(國立慶州博物館)은 성덕대왕신종(국보)를 비롯한 신라시대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1913년 경주고적보존회(慶州古蹟保存會)가 결성되고, 1915년 옛 객사(客舍) 건물을 이용하여 신라 유물을 수집·전시하였다. 1929년 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慶州分館)이 되었으며, 19458·15광복과 함께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으로 출범하였다. 197572일 인왕동 신박물관으로 이전하였으며 같은 해 820일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승격되었다.

 소장유물은 8만 여 점이며 그 중 3,000여 점을 상설 전시하고 있다. 2009225일 기준 소장하고 있는 지정문화유산은 국보 13, 보물 30점이다. 옥외전시관에는 성덕대왕신종(국보), 고선사터 삼층석탑(국보) 등의 석조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박물관 본관의 여러 전시 유물

 

특별전시관의 유물들

 

 박물관을 나오니 벌써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원래 집에서 출발할 때에 정했던 여정을 반밖에 돌아보지 않았는데 벌써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아무런 바쁜 일정도 없기에 편안하게 마음대로 다니니 제법 시간이 많이 걸렸다. 하지만 남는 것이 시간이니 천천히 다음 날을 기약하고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경주1 - 대릉원주변 고분들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경주는 우리나라 최고이자 최대의 유적이 있는 도시다. 그러므로 예전에는 숱하게 많이 가 보았지만 최근에는 좀 드물어 이번 기회에 경주를 통괄하여 답사해 보기로 마음을 먹고 경주시에 관광지도와 책자를 요청해서 받아서 날을 잡아 먼저 대릉원 부근의 고분을 중심으로 답사하기로 하였다.

 

 예전에 비하여 교통이 아주 편하게 발전하여 경주역까지 기차를 타고 가서 경주시외버스터미널로 가서 고분군으로 갔다.

 

경주역 전경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내려 조금 걸어가니  먼저 노서리고분군이 나타난다. 노서리고분군(慶州路西里古墳群)은 넓은 평지에 크고 작은 고분 14기가 있다. 노동리의 봉황대 고분과 더불어 그 규모에 있고, 쌍벽을 이루는 제130호 고분을 비롯해, 1921년에 금관이 출토된 금관총, 1926년에 일본 방문 길에 스웨덴의 황태자이며 고고학자인 구스타프 6세 아돌프가 들러 발굴을 조사 참관한, 서봉총, 1946년에 고구려 광개토왕의 이름이 새겨진 청동 그릇이 발견되어, 신라 고분 연대 추정에 도움을 준 호우총과 은평총, 쌍상총, 마총 등도 있다. 쌍상총에서 토기 조각, 마총에서 말뼈와 안장 조각이 출토하였다고 한다.

 

노서동고분군

 

 노서동고분군 가운데 가장 중요한 금관총은 과거와 달리 고분이 아주 잘 정비되어 관람을 하기에 편리하게 되어 있다.

 

 금관총(金冠塚)은 경주시 노서동에 소재한 사적 제39호 노서리 고분군 가운데 하나인 고분으로 신라 왕족 혹은 귀족으로 추정되는 이사지왕의 무덤으로 신라의 고분 중에서 금관이 처음 발견되어 금관총이라고 부른다. 금관총에서 나온 금관은 국보 제87호로 지정되었고, ()자 모양의 장식과 사슴뿔 모양의 장식으로 신라 금관의 특징적인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금관총은 1921년 집터를 파던 중 우연히 발견되었는데, 이미 파괴된 고분인데다 정식으로 조사된 것이 아니어서 무덤의 구조나 유물 등 상태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그 뒤 많은 조사와 발굴을 통해 금관총은 신라 때만 있었던 돌무지덧널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원래 모양은 지름이 50미터, 높이 13미터 정도로, 무덤 안에 옻칠한 덧널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덧널이란 나무로 만든 널방(관을 넣어두는 방)을 뜻하는데, 이러한 구조는 신라 특유의 무덤 양식으로, 불교의 영향이 있는 점으로 보아 통일 신라 이전인 6세기 무렵에 만들어진 왕릉으로 추측된다.

 

 2013년 발견된 검에서 이사지왕이라는 글이 확인되었고, 2015년 금관총 재발굴에서 '이사지왕도' 라고 새겨진 칼집부속구가 추가로 확인되고, 금관총에서 출토된 이사지왕 관련 명문 환두대도 3점의 실존이 모두 확인됨에 따라 금관총=이사지왕의 무덤으로 거의 확실시되었다. 지금까지 발굴된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들 중 유일하게 피장자의 이름이 확인된 무덤이다. 그러나 이사지왕이 신라의 '국왕'인지 귀족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등을 두고 논란이 많다. 연구성과들을 기초로 500년 전후에 축조했다고 본다.

 

 현대식 전시 공간은 20233월 완전 개방되었다.

 

금관총의 내부

 

 금관총을 나와 옆에 있는 신라고분정보센터에 가니 신라고분의 역사를 영상으로 소개하고 있었다.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꼭 한번 들러보기를 권한다. 이러한 것은 예전에는 없던 것인데 이제는 문화에 대한 투자가 엄청 많이 이루어져 좋은 환경에서 유익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신라고분정보센터 내부

 

 신라고분정보센터를 나오면 바로 왼쪽에 노동리고분군이 나타난다. 노동리고분군(慶州路東里古墳群)은 노동동에 있는 고분군이다. 이들 중 봉황대는 밑둘레 230m, 직경 82m, 높이 22m로 대한민국에서는 큰 규모의 무덤이다. 봉황대 남쪽에 1924년 발굴 조사한 금령총 터와 식리총 터가 있는데, 내부 구조는 모두 돌무지 덧널무덤이다.

 

봉황대 표석

 

노동리고분군 표석

 

노동리고분군의 여러 모습

 

 노동리고분군을 벗어나서 대릉원으로 가는 길에 신라대종을 본다. 옛날에 만들어진 종이 아니라 옛날의 성덕대왕신종을 본떠서 현대에 만든 종이다.

 

신라대종 설명

 

 신라대종에서 길을 건너면 바로 앞에 대릉원이 있다.

 

 경주시 황남동(皇南洞)에 있는 신라시대의 고분군인 대릉원(大陵苑)이란 이름은 미추왕(味鄒王)을 대릉(大陵:竹長陵)에 장사지냈다.’<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서 딴 것이다.

 

 125400평의 평지에 신라시대의 왕과 왕비, 귀족 등의 무덤 23기가 모여 있다. 평지에 자리잡고 있는 신라시대만의 독특한 무덤군()으로, 크게 다음과 같은 7개의 지역으로 나뉜다. 신라미추왕릉(사적 175) 경주 황남리 고분군(皇南里古墳群:사적 40) 경주 노서리 고분군(路西里古墳群:사적 39) 신라 오릉(五陵:사적 172) 경주 동부사적지대(東部史蹟地帶:사적 161) 경주 노동리 고분군(路東里古墳群:사적 38) 재매정(財買井:사적 246) 등이다.

 본래 사적 경주노동리고분군(慶州路東里古墳群), 사적 경주노서리고분군(慶州路西里古墳群), 사적 경주황남리고분군(慶州皇南里古墳群), 사적 경주황오리고분군(慶州皇吾里古墳群), 사적 경주인왕리고분군(慶州仁旺里古墳群)으로 분리되어 있었으나, 2011728일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이 역사성과 특성을 고려하여 경주 평야 한복판에 서로 인접해 있는 신라 시대의 고분군을 통합하여 재지정하였다.

 

대릉원안내

 

대릉원의 여러 고분과 석조유물

 

 대릉원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발길이 천마총으로 향한다. 천마총은 대릉원의 고분들 중에서 유일하게 공개하고 있는 155호 고분이다. 과거에도 여러 번을 온 곳이지만 주변이 제법 많이 바뀌었다.

 

 경주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시기의 돌무지덧널무덤인 천마총(天馬塚)은 경주분지 내의 거의 중심지인 황남동에 조성한 고분공원(大陵苑) 안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고, 황남동 제155호분으로 21대 소지왕 혹은 22대 지증왕 중 잠정적으로 지증왕의 능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분의 규모는 분구 높이 12m 70cm, 분구의 바닥지름 47m인 원형의 봉토분(封土墳)이다. 분구의 자락에는 돌로 쌓아 만든 호석(護石)이 돌담 형식으로 돌려 있다. 1973년에 발굴되어, 천마도(국보 제207), 금관(국보 제188), 금모(국보 제189) 11,297점의 부장품이 출토되었다. 부장품 중에 순백의 천마(天馬) 한 마리가 하늘로 날아 올라가는 그림이 그려진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천마도가 출토되어 천마총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특히 천마총 금관은 지금까지 출토된 금관 중 가장 크고 화려한 것이라 한다. 그 밖에 서조도(瑞鳥圖)와 기마인물도(騎馬人物圖)도 출토되었다. 현재 무덤 내부를 복원하여 공개하고 있다. 2017년 보수 후 원래 위치에서 조금 밀려서 복원된 목곽을 원 위치로 옮기고 적석과 봉분을 제대로 복원하였으며 관리용 복도 부분도 전시 부분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 곳에서 발굴된 천마도장니(天馬圖障泥)의 천마는 비상하는 모습으로 고구려벽화의 무용총(舞踊塚) 수렵도(狩獵圖)의 그것과 매우 유사한 점을 보여주고 있다. 신라 지역의 거의 유일한 영주 태장리의 고분벽화와 함께 고구려벽화고분의 영향을 잘 나타내 준다. 고구려나 백제와는 달리 고분벽화가 별로 없는 신라의 회화자료로서 천마총의 천마도는 매우 귀중하다고 하겠다. 근자에 천마에 대하여 기린이라는 이견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일반인들에게는 거대한 언덕들만 있는 공원처럼 보이는 대릉원 관람의 핵심이 천마총이 된다. 천마총 입구는 대릉원 담벼락 방향으로 나있는데 대릉원 주 동선에서는 바로 눈에 띄지 않으므로 관심이 없거나 대충 보고 지나가는 사람은 그냥 지나쳐버릴 수도 있다.

 

천마총입구

 

천마도

 

 천마도는 1973년 155호 고분 발굴 당시 가른 금제 유품들과는 달리 왕의 머리맡에 있던 부장품 유물 상자 속 말다래에 그려저 있었다. 아주 예전에 이곳에서 대 천마도를 직접 본 기억이 있었는데 지금은 복제품만 이곳에 있고 진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천마총의 여러 전시품

 

 대릉원의 여러 왕릉을 구경하고 천마총을 끝으로 구경한 뒤에 다시 발을 옮겨 월성지구로 향한다.

 

 여기서 내가 길을 걸으며 문화유적을 구경하며 다니는 중에 많은 외국인을 만났다. 경주는 외국인들에게도 관광지로 잘 알려져 있고 시설도 수준급으로 갖추어진 곳이라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여러 곳의 문화재 입장료도 65세 이상은 무료라 편안하게 관람을 하였다. 

 

서해랑길 94코스(남동체육관입구 - 오봉산 - 논현포대근린공원 - 선학역 3번출입구)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서해랑길 94코스는 남동체육관입구에서 출발하여 높지 않은 오봉산을 넘어서 논현포대근린공원을 통과한다. 공원을 지나 조금 가면 대한상공회의소인력개발원이 나오고 시내를 걸어 선학역 3번 출입구에서 끝이 나는 12.5km의 비교적 짧은 길이다.

 

94코스 안내판

 

 아침에 일어나 출발을 하려고 하니 기온이 많이 떨어졌고 눈이 오기 시작한다. 많이 오지는 않고 조금씩 내리기에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남동체육관입구로 이동하여 길을 걷기 시작한다.

 

 남동체육관입구에 가니 제법 눈이 오기 시작한다. 그래도 올 겨울 들어 처음 보는 눈이라 반갑게 맞이하며 장수천 가를 걸어가니 제법 눈이 덮인 하천가의 풍경이 아름답다.

 

장수천 가의 풍경

 

 장수천 가를 따라 걷다가 마을로 발길을 돌리니 오봉산 입구라는 푯말이 보인다. 전형적인 마을 뒷산인 오봉산은 인천광역시 남동구에 위치한 높이는 106m 정도인  나지막한 산으로,마을 주민들을 위한 시설과 등산로가 잘 가꾸어져 있다.

 

오봉산 안내판

 

  오봉산을 오르기 시작하니 눈발이 제법 세차지기 시작하며 눈이 쌓여 길이 제법 미끄러워 가기가 상당히 불편하다. 눈이 오리라 생각도 하지 않아서 눈에 대한 대비가 없이 길을 떠난 것이라 걱정이 되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어제 스틱을 잃어버리고 저녁에 홈플러스에서 스틱을 새로 구입한 것이다, 어제 저녁에 무엇인가 스틱을 꼭 구입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찾아서 준비한 것이 신의 한수가 된 것이다. 스틱마자도 없었다면 굉장히 고생을 할 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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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봉산 정상에서의 풍경

 

 오봉산 정상에서 잠시 쉬면서 설경을 구경하고 다시 길을 걷기 시작하니 마을 주민인 듯한 사람들이 제법 산에 보였다. 아마 눈도 오고 하니 산책을 나온 것 같았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눈은 펑펑 내려 시야를 가려 길을 가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큰 산이면 등산로가 있어 눈이 제법 와도 길 표시가 잘 되어 있으나 이곳은 마을 뒷산이라 금방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표시 리본을 찾아가며 길을 따라 걸어 산을 내려오니 평소보다 배나 시간이 걸렸다.

 

눈이 쌓인 오봉산

 

눈으로 덮인 시내

 

 눈으로 덮인 산길을 즐기며 시가지로 내려오니 장난이 아니게 눈이 오고 있다. 눈오는 시내 길을 걸어 조금 가니 '논현포대근린공원'이 나타난다. 논현포대근린공원은 인천의 문화재 중 하나인 논현포대가 존재하는 역사적 공간의 상징을 지닌 인천광역시 남동구 논현동의 근린공원이다. 명칭은 논현포대(論峴砲臺)에서 유래되었는데 이곳은 1879년에 건립된 조선군 포대의 장소였다. 조선시대 인천 연안은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기에 많은 포대가 있었지만 지금은 오로지 논현포대만 남아 근린공원 남측으로 오면 실제 포대가 있는 장소를 볼 수 있다. 논현포대는 역사적으로는 장도포대와 함께 인천광역시와 부평 연안의 군사방어시설이었다.

 논현동이 일대 개발과 동시에 내륙화된 지역의 역사적 가치는 살리고, 위치와 지리적으로도 중요한 자리였던 만큼 구민과 시민의 공원 역할로서 현재는 자리하고 있다.

 

논현포대근린공원

 

옛 송기철교 안내판

 

 

 눈을 맞으며 눈으로 덮인 하천가를 따라 걸어가니 언덕위로 올라가게 한다. 자그마한 둔덕 위를 올라가니 거대한 기와집이 보여 팻말을 보니 '인천이씨대종회'라고 되어 있다. 그 기와집을 옆에 두고 숲 사이로 난 길을 걸아가면서 보는 눈 덮인 풍경은 그만이다. 내가 사는 부산은 일 년에 한 번도 눈이 오지 않는 곳이니 눈을 보면 참 반가운 마음이 든다.

 

인천이씨대종회 건물

 

눈으로 덮인 풍경

 

 눈을 맞으며 눈 덮인 길을 계속 걸어 시내로 들어가도 엄청나게 눈이 와서 길을 가기가 상당히 힘들었다. 번잡한 시내도 흰눈으로 덮여서 모두가 하얀왕국이 되어 있다. 길을 계속하여 종점인 선학역에 도착하여 지하로 내려가니 빵냄새가 너무 코를 자극하였다. 보니 역 구내에 빵을 굽고 있는 집이 있었다. 너무 먹음직하여 빵을 구입하여 역의 의자에 앉아 먹고 이번 여정을 이곳에서 마치기로 하였다. 기상을 보니 눈이 그칠 줄을 모르는 것 같고 또 다음 코스가 산을 넘어야 하기에 중단하고 돌아가기로 하였다. 결론만 말하면 이 판단은 너무 잘한 판단이었다. 이날의 눈은 오후에 폭설이 되어 서울과 수도권에 11월 들어 온 눈으로는 최고라고 뉴스에 계속 나오고 있었고, 밤까지도 눈이 와서 엄청 어려움을 겪은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