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鶴)의 오딧세이(Odyssey)

서해랑길 54코스(외당마을버스정류장 - 은파유원지 - 월명호수 - 근대쉼터 - 진포해양테마공원)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서해랑길 54코스는 외당마을버스정류장을 출발하여 군산시의 외곽에서 시내를 통과하는 길이다. 군산 시민들의 휴식공간인 은파유원지와 월명호수를 지나면 군산의 근대문화유산거리가 나오고 이곳을 지나 진포해양테마공원에서 끝이 나는 11.65km의 비교적 짧고 평탄한 길이다.

 

54코스 안내판

 

 아침에 숙소에서 출발하여 외당버스정류장으로 가는 버스편을 기다리려니 시간이 오래 걸려 택시를 호출하여 가는데 기사님들도 이 외당버스정류장이라고는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당북초등학교 쪽으로 가자고 하여 중간에 내렸다.

 

버스정류장에서 약간의 언덕을 올라가니 제과, 제빵의 명인이라는 안영순의 집이 나온다. 이른 아침이라 빵을 팔지는 않고 있는 집을 지나 언덕을 넘으면 은파유원지의 호수가 펼쳐진다.

 

제과, 제빵의 명인 집

 

 군산시 나운동에 있는 은파호수공원(銀波湖水公園)으로 불리는 은파유원지(銀波遊園地)16세기에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미제지(米堤池)’로 나타나 있는 오래된 저수지에 조성된 호수 공원이다. 은파라는 이름은 유원지의 햇살을 받은 물결이 아름답게 반짝이는 모습 때문에 지어졌다고 하지만 다른 설도 있다. 원래는 농업용 저수지로 조성되었던 곳이지만 1985년에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어 지금에 이르렀다. 저수지 방죽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도 표시되어 있고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조선시대 이전에 쌓은 것으로 적혀 있다.

 입구 만남의 광장에는 군산 및 옥구 출신 독립유공자 충혼탑이 있고, 저수지 주변으로 6의 순환도로가 나 있다.

 

 호수를 가로지르는 물빛 다리는 길이 370m, 너비 3m의 보도 현수교로서 야간에는 조명으로 연출된 아름다운 빛을 비추어 휴식처와 볼거리를 제공한다. 음악 분수는 은파의 특성과 이미지를 반영한 꽃잎 형태의 분수로 매회 20분씩 하루 8회 운영되고 있다.

 

은파유원지의 여러 모습

 

 이른 아침이라 아직은 사람이 드문 은파유원지를 돌아나와서 도로를 조금 걸으니 다시 높지 않은 산으로 올라가게 한다. 산길을 걸어가면서 '왜 산으로 가지?' 하는 의문이 들었는데 조금 가니 밑에 터널이 있었다. 도로를 통과하지 못하여 산을 넘어가게 한 길이었다. 그 길을 따라 조금 가니 이번에는 월명공원(호수공원)이 나온다. 어제 지나온 군산저수지부터 은파유원지, 월명호수로 계속 이어진다. 왜 이렇게 호수(저수지)가 많은 것인지 조금 이상하였다. 아마도 김제와 만경의 들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서 옛날부터 만들어져야 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산길

 

 군산시 신흥동과 해망동에 걸쳐 있는 월명공원(月明公園)은 군산시의 상징인 월명산(月明山)을 비롯하여 주변의 여러 산으로 이어져 있다. 월명공원은 옛 도심에 위치한 시민의 안식처이자 관광지로서 산책로를 따라 공원으로 올라가면 군산 시가지와 서해 바다와 주변의 경관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월명공원은 1906년 군산 각국 거류 지역의 명승지인 해망정 인근 약 3.3를 개발하여 일명 각국 공원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각국이라는 단어를 떼어내고 군산공원이라고 불렀다. 1972년에는 해망동 수시탑에서 미룡동의 군산대 뒷산에 이르는 영역을 개발 제한 구역이자 공원 지역으로 지정하고 군산 공원월명공원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월명공원 안에는 1912년에 시민에게 식수를 공급하기 위해 만든 제1수원지가 물안개를 뿜어내는 산 속의 호수(월명호수)로 변하여 산새와 작은 동물들이 목을 축이는 곳이 되었다.

 

 

 월명공원의 호수가에는 많은 군산 시민들이 나와서 산책을 하고 있었다. 이름난 유원지가 아니라 동네 주민들에게 친근한 공원으로 사랑을 받고 있는 곳이었다. 대도시가 아닌 군산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산책을 하고 있는 공원이니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월명호수를 돌아나가니 계속 월명공원이 이어지고 있다. 약간의 산 언덕길을 계속 돌아나가는 공원길에는 수 많은 사람들이 산책을 하고 있었다.

 

월명공원의 여러 기념비들

 

 

 공원에서 내려오니 군산의 근대역사문화거리가 나타난다.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이 군산시간여행마을 먹거리타운이라는 표지다.

 

 군산은 구한 말 개항 이후 일본인들이 이주하면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전라북도와 충청남도라는 넓은 평야 지대를 배경으로 하고 금강과 서해안이 인접한 지리적 이점으로 지주와 상업 자본가들이 집중되며 도시의 기반 시설이 갖추어지기 시작하였다.

일제강점기에 군산 인근 지역에 설립된 일본인 농장들을 통해 생산된 미곡이 군산항에 집산되어 일본으로 반출되기 시작하였다. 군산 지역 자작농들은 일제의 정책과 일본 지주의 핍박으로 소작농으로 전락하게 되었고군산역과 군산항에서 일용 노동자 및 하역 노동자로 살아가게 되었다.

1930년대 이후에는 기존의 철도, 도로, 항만 등의 재정비를 통해 전쟁에 필요한 식량을 생산해 낼 수 있는 시설 확충이 이루어졌다.

 

 

 군산근대역사문화거리의 길목에 월명동성당이 있다. 오랜만에 보는 성당이라 안에 들어가 잠시 기도를 하려고 들어가니 평일 낮 미사를 드리고 있었다. 미사에 참석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하여 바깥에서 기도만 하고 잠시 보다가 그냥 나왔다.

 

 군산시 월명동에 있는 월명동성당(月明洞聖堂)은 천주교 전주 교구 소속으로 1960년 적산 가옥 연와제를 매입하여 성당과 사제관으로 개축하여 군산시 서북부 지역을 관할하다가, 인구 증가로 인해 주변의 여러 성당이 분리되었다. 구 시가지 일본인 거주 지역에 자리하고 있어서, 2012년 근대 시가지를 재현하는 군산시 근대 문화 추진 사업의 일환으로 성당 담쌓기 공사가 완공되어 근대 문화유산으로 한몫을 하고 있다.

 

월멍동성당

 

 이곳에서부터 군산의 근대역사문화거리가 쭉 계속된다. 군산시 원도심 월명동, 영화동 일원에 조성되어 있는 근대문화 거리는 원도심 지역의 근대문화 자원(근대 건축물)을 재조명해 근대 역사 문화가 살아 숨 쉬는 지역을 만들어 놓은 곳이다.

 근대문화 역사거리는 일제강점기 역사의 현장을 보수·복원하여 그 시대 우리 선인이 받은 치욕의 고통과 아픔을 가늠해 볼 수 있도록 하고, 우리 후손이 잊지 않을 공간으로 재조명하여 역사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국내 유일의 근대문화 창조도시거리다.

 군산의 옛 도심은 18996월 조계지(외국인 거주 지역)로 설정된 후 근대기 아픈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구 조선은행 군산 지점, 구 일본 제18은행 군산 지점, 구 군산 세관 본관, 일본식 사찰인 동국사 등 170여 채의 근대문화유산이 밀집돼 있다.

 

거리의 여러 모습

 

 이 거리를 걸으며 카페에 앉아 잠시 쉬면서 한적한 거리의 풍경을 한가로이 보다가 내가 이번 여정에서 군산에서 꼭 보려고 예정했던 '8월의 크리스마스'의 주 무대인 초원사진관으로 갔다. 서해랑길 코스에서는 좀 벗어나 있지만 꼭 보려는 마음이었기에 시간을 들여서 가니 친근한 사진관이 나온다.

 

 이 영화는 영화보기에 광적인 내가 가장 좋아하는 우리나라 영회이기에 다소 장황하지만 네이버의 여러 글을 간추려서 여기에 소개한다.

 

 1998년에 개봉한 8월의 크리스마스는 한적한 소도시에서 초원사진관을 경영하는 정원(한석규)과 주차단속원 다림(심은하)의 사랑을 절제된 감정으로 잔잔하게 풀어내 평단의 찬사를 받은 작품이다. "좋아하는 남자 친구 없어요?" 변두리 사진관에서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노총각 정원(한석규)’은 시한부 인생을 받아들이고 가족, 친구들과 담담한 이별을 준비하던 어느 날, 주차단속요원 '다림(심은하)'을 만나게 되고 차츰 평온했던 일상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아저씨, 왜 나만 보면 웃어요?" 다림(심은하)은 밝고 씩씩하지만 무료한 일상에 지쳐가던 스무 살 주차 단속요원이다. '다림'은 단속차량 사진의 필름을 맡기기 위해 드나들던 사진관의 주인 '정원'에게 어느새 특별한 감정을 갖게 되는데...

 

 어느 남자가 맞닥뜨리는 죽음의 과정을 다른 평범한 영화처럼 고통과 비극으로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담담하게 그려낸 작품으로, 정원과 다림이 만나고 헤어진, 여름과 겨울을 하나로 잇는, 삶과 죽음의 다름과 같음을 읽게 하는 의미로써 주목받았던 영화다.

 

 2013년에는 관객들이 뽑은 '다시 보고 싶은 명작' 1위에 올랐고, 같은 해 117일 디지털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복원, 재개봉되었다.

 

초원사진관의 외부와 내부 모습

 

 이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이 관광객으로 이 주변에서 사진을 찍고 웃고 즐기고 있었다. 또 젊은이들은 이 주변의 명소를 찾아다니며 스탬프를 찍어 확인을 받느라고 북적거리고 있었다. 한편의 영화가 엄청난 효과로 관광객을 끌어 모우고 있는 것이었다. 초원사진관에서 영화의 장면들을 보면서 이 영화를 몇 번이나 보면서 볼 때마다 감동을 느끼던 생각이 났다.

 

초원사진관에서 발을 돌려 다시 서해랑길을 걸으니 근대건축물들이 많이 눈에 보안다. 물론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 형태의 건물들이 예전의 시간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장미공연장 옆에는 채만식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상이 세워져 있다. 군산을 대표하는 소설가인 채만식(蔡萬植)1902년 대한제국 전라북도 임피군 군내면 동상리(전라북도 군산시 임피면 읍내리)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소설가, 극작가, 문학평론가, 수필가로 호는 백릉(白菱), 채옹(采翁)이다.

 1924조선문단에 단편 새길로를 발표하여 등단하였다. 카프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지만 초기의 작품 경향은 경향파 문학과 유사한 점이 있어 동반자 작가로 분류된다.

  대표작으로 중편 태평천하(1938)와 장편 탁류(1938)가 있다.

 

 내가 고등학생일 때 공부는 뒷전이었고 제법 많은 소설을 읽었는데 그 때 <태평천하>와  <탁류>를 읽고 일제강점기의 군산의 모습을 상상했던 일이 생각났다.

 

채만식의 소설광장

 

군산 시간여행거리의 여러 모습

 

 

 

 군산의 구석구석을 살펴보는 것이 이 여행의 목적이 아니라 서해랑길을 걷는 도중에 보는 군산의 모습이라 상세하게 설명은 하지 못하고 이 거리에서 중요한 건물 둘만 소개하기로 한다.

 

 먼저 군산시 장미동에 있는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舊朝鮮銀行群山支店)1923년에 건립된 일제의 건물로 일제가 식민 지배를 위해 운영한 대표적인 금융시설이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은행으로 사용되었고, 이후 상업 건축물로 사용되다가 근대 문화 중심 도시 조성 사업을 통해 전시 시설로 수리 및 보수하여 활용하고 있다.

채만식의 <탁류>에도 등장하는 은행으로, 해방 이후에도 한국은행, 한일은행 등 은행 건물로 쓰였다. 지금은 근대 건축관으로 군산의 근대건축물과 일제강점기 화폐, 역사 관련 유물을 전시한다.

 

 둘째로 군산근대역사박물관(群山近代歷史博物館)이다.

 

 조선 시대에 군산은 호남평야에서 거둔 세곡을 보관·수송하기 위한 조창이 설치된 경제적 요충지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참혹한 수탈이 할퀴고 간 군산은 상처투성이의 왜곡된 성장을 겪었다. 근대화의 상징인 기찻길이 놓이고 신작로가 뚫렸지만 모두가 일제의 약탈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된다던가.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은 이 같은 도시의 상처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은 역사는 미래가 된다.’라는 모토로 과거 무역항으로 해상물류유통 도시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던 군산시의 정체성을 확인하여 현재와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고 전국 최대의 근대 문화유산을 소유한 군산시의 문화적 특징을 관광 자원으로 홍보하고자 건립되었다.

관람객을 위한 전시실 구성은 박물관 1층 입구의 어청도 등대 모형을 시작으로 1층에 해양 물류 역사관, 어린이 박물관, 2층의 특별전시관, 3층의 근대 생활관과 기획 전시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 조선선은행 군산지점

 

 

 

 근대역사문화유산거리를 이곳저곳 구경하면서 길의 코스도 좀 벗어나고 하니 시간이 제법 흘렀다. 그래도 주마간산식이지만 군산의 근대거리를 구경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구 철길을 지나니 진포해양테마공원의 입구인 바다가 보이고 여기서 54코스는 끝이 난다. 잠시의 쉴 틈도 없이 그냥 다음 코스로 발을 옮긴다.

 

서해랑길 53코스(새창이다리 - 증석교 - 회현초등학교 - 백석버스정류장 - 외당마을버스정류장)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서해랑길 53코스는 새창이다리를 출발하여 느긋하게 아름다운 가을의 만경강 풍경을 즐기며 만경강 강안을 걸어가 증석교를 지나고 백석버스정류장을 지나 군산으로 들어가 외당마을버스정류장에서 끝이 나는 19.6km의 길이다.

 

53코스 안내판

 

53코스 시작점 알림표(처음 보는 시작점 표시다.)

 

여러 가지의 안내문

 

 새창이다리를 다 건너오니 여기에는 더 많은 안내문이 서 있다.

새창이 다리 이야기, 구 만경대교 역사 이야기, 새창이 연꽃 마당 이야기 등의 안내판이 서 있다. 그 중에서 구 만경대교 역사 이야기를 보면 193384일 동아일보 기사를 인용하고 있다.

 

 새창이다리를 지나 도로를 조금 따라 가니 만경강 강안으로 걷는 길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강안을 따라 긴 길을 가게 한다.  52코스에서는 만경강 옆을 걸어왔지만 제방이 가로 막아 만경강을 볼 수가 없었는데 여기에서부터는 만경강을 걷게 한다.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 강안을 혼자서 호젓하게 걸으며 가을 햇살에 빛나는 강물과 억새들 그리고 갈대들, 만경강의 흐름이 빗어내는 사구들 모두가 눈에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도 머리에도 각인되는 것 같았다. 아주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보며 마음의 여유로움을 즐기는 것이 여행의 참 모습이라고 생각하며 이 여유를 즐기면서 강안을 걸었다.

 

 만경강은 전북 완주의 원등산에서 발원하여 호남평야의 중심부인 가르며 서해로 흐르는 강으로 길이 74의 비교적 짧은 강이다. 충적평야 위를 흐르는 전형적인 곡류하천으로 하구에서 48떨어진 삼례부근까지 대조(大潮)시 하천수위가 상승하는 감조하천이다.

 ‘만경강이란 이름은 만경현(萬頃縣)에서 비롯된다. 만경의 ()’자는 백만이랑이란 뜻으로 넓은 들을 뜻하며, 만경강은 만경현으로 흐르는데서 유래되었다. 만경강의 본래 이름은 신창진(新倉津)으로 조선시대까지 사용해오다가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통폐합하면서 현재의 이름으로 바꾸었다고 하며, ‘동국여지승람을 보면 하류는 신창진, 상류는 안천(雁川, 현재의 고산천)과 남천(南川, 현재의 삼천천과 전주천)라고 적혀 있다.

 

연꽃 마당 표지석

 

도로 통행을 막아 놓았다.

 

만경강의 여러 풍경

 

이정표

 

 

 

 만경강을 지나 다시 넓은 만경들판과 마을을 지나니 군산으로 들어선다. 첫머리에 제법 작은 산이 나오고 크게 보이는 호수가 나타난다. 청암산과 군산호수다.

   

 군산시 옥산면에 있는 청암산은 해발 117m로 구릉성 산지이다. 이산은 해발 100m 내외의 저산성 산지와 충적 평야로 이루어져 있는 금성 산지에 해당된다. 북쪽으로 이어진 금성산과 함께 청암산은 군산 저수지, 또는 옥산 저수지로 불리는 제2 수원지를 품고 있다.

 청암산은 조선시대 이전 푸른산이란 의미의 취암(翠岩)산으로 불리다 일제강점기 청암(靑岩)산으로 명칭이 바뀐 것으로 전해진다.

 

멀리 보이는 군산호수

 

전북천리길 표지

 

 전라북도의 길을 걸으면 전북천리길이라는 표지를 자주 보게 된다. 전북 1,000리길은 14개 시군 44개 길이 있으며, 전라북도 명품길을 산들길, 해안길, 강변길, 호수길로 나누고 있다. 이리저리 구부러지고 숲이 우거진 길을 여유롭게 걸을 수 있는 군산도보행 길인 군산 구불길 중 4개코스(구불4길 구슬뫼길, 구불5길 물빛길, 구불6-1 탁류길, 구불8길 고군산길)가 포함되어 있다.

 

 군산호수 둘레길은 청암산 품에 안긴 군산호수공원의 수변산책로를 말한다. 예전에는 옥산저수지라고 불렀는데 회현면 주민들의 반대로 지금은 군산호수로 이름을 변경하여 공원으로 조성하였다고 한다. 군산호수공원 일대는 오래 동안 상수원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생태계가 그대로 보존되어 왔다. 수변산책로 주변은 보존 가치가 높은 다양한 습지식생환경으로 야생 동식물의 중요한 서식처이기도 하다. 둘레길을 걸어가야 아름다운 대나무 숲과 호반의 멋진 모습을 만날 수 있다. 군산호수공원을 돌아 나오는 길에 억새 숲으로 은빛 장관을 연출한다.

 

밀림 깉이 우거진 대숲

 

군산호수의 여러 풍경

 

 군산호수를 돌아 나오니 억새가 활짝 피어 나부끼는 곳이 있다. 하얀 억새가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을 보면 정녕 가을이라는 느낌을 느끼게 한다.

 

억새밭

 

호수공원 입구의 모습

 

 

 

 호수공원을 지나서 군산시의 외곽을 걸어가니 방송에서 자주 보던 백석교회의 표지가 보이고 그 길을 따라 계속 가니 당북초등학교가 나오고 외당사거리에 도착하여 이 코스는 끝이 난다.,

 

 외당사거리에는 숙박업소가 없어 사전에 조사해 둔 곳을 찾아가려니 버스편이 좀 늦고 드물다. 그래서 택시를 타고 군산시청 부근에 숙박업소가 엄청나게 밀접해 있는 곳으로 가서 숙박을 하면서 휴식을 취하고 내일을 기약한다.

 

서해랑길 52코스(심포항 - 망해사 - 진봉면사무소 - 만경낙조전망대 - 새창이다리)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서해랑길 52코스는 심포항에서 출발하여 언덕을 넘어 망해사에서 바다를 보고 길을 가면 엄청난 김제습지가 나온다. 그 습지를 빙 돌아나가서 진봉면사무소를 지나 만경강을 따라가면 만경낙조전망대가 나오고 계속 길을 가서 새창이다리를 건너서 끝이 나는 18.4km의 길이다.

 

52코스 안내판

 

 어제 저녁에 이 심포에 도착하여 시간도 있고 저녁도 먹기 위해서 심포항 해안을 잠시 걷다가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한잔 마시고 나와서 음식점을 보니 뜻밖에 중국음식점이 있어 오랜만에 그 집에 들어가서 짬뽕을 한 그릇 시켜서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일찍 길을 떠났다.

 

 만경강과 동진강이 서해와 만나는 지점에 조성된 심포항은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에 자리하고 있다. 예전에는 그 규모가 꽤 컸던 포구였으나 현재는 새만금간척지조성사업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다. 새만금방조제 공사가 끝나면서 이곳은 사실 바다로서의 운명을 다했다. 새만금방조제로 갇힌 거대한 호수로 변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우리나라 백합 생산의 60%를 차지하던 어항이었으나, 새만금사업으로 어업이 거의 중단되었다. 2019년 이후부터는 민물 조개인 재첩을 수확하여 "새만금 재첩"으로 판매하고 있다. 어민들의 치열한 생존공간이었던 갯벌은 요즘 체험학습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근처에 망해사가 있는데, 해거름녘 풍경이 일품이다.

 

심포항의 모습

 

김제시 표지

 

 아침에 해안에 나 있는 도로를 따라 조금 가니 진봉산으로 올라가게 한다. 언덕을 따라 올라가면서 동쪽을 보니 저 멀리서 해가 떠오르는 풍경이 보인다. 어디에서든지 해가 떠오르는 풍경은 멋있다.

 

 

진봉산을 올라가 잠깐 내려가니 진봉망해대라는 전망대가 있다.

 

 진봉망해대(進鳳望海臺)는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 뒷산인 나지막한 진봉산(進鳳山, 72.2m)에 있는 3층 규모의 전망대로, 서해에서 불어오는 해풍을 맞으며 멀리 바다 풍경과 만경평야를 동시에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진봉망해대는 남서쪽의 봉화산에서 시작하여 북동 방향으로 진봉산, 국사봉, 나성산으로 이어지는 진봉반도 북쪽의 산줄기에 있다. 북쪽은 만경강 하구에 해당하며, 군산시가 위치한다. 이곳에서 사방을 둘러보는 서해 바다의 풍경은 일품이다.

 

 진봉망해대에서 보는 사방 풍경

 

진봉망해대

 

 진봉망해대에서 아름다운 아침의 경치를 구경하고 산을 내려오니 망해사가 나타난다.

 

 진봉산 고개 넘어 깎은 듯이 세워진 기암괴석의 벼랑 위에 망망대해를 내려다보며 서서, 만경강 하류 서해에 접하여 멀리 고군산 열도를 바라보며 자리잡고 있는 망해사는 오랜 역사에 걸맞지 않게 규모가 초라한 편이다. 전하는 바로는 이곳은 본시 섬이었다 하여 642년에 부설거사가 사찰을 개창하여 수도하다가 입적하신 곳이라 하며, 그 후 754년에 당나라의 중 중도법사(일명 통장화상)가 중창하였으나 조선 시대 억불 정책으로 거의 폐허가 되었고 1609년에 진묵 대사(震默大師)가 중창하였다. 진묵 대사는 망해사에 머물면서 많은 이적을 남겼다고 하며 오늘날까지 널리 전승되고 있다. 그 후 여러 번의 중창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해의 섬들을 바라볼 수 있는 장소에 있고, 서해의 일몰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하여 망해사라 하였다고 한다.

 

 망해사에 있는 수령 약 400년의 팽나무 아래에는 1999년 가을에 세운 매향비(埋香碑)가 있다. 매향이란 1000년 뒤에 꺼낼 것을 기약하며 바닷물과 계곡수가 만나는 곳에 향나무를 묻어 복을 빌고 미륵불이 출연하기를 기원하는 불교 의식이며, 매향비는 그 기원과 향을 묻은 자리를 기록한 비석이다.

 

망해사

 

 이곳에서 망해사 쪽으로 발길을 돌리니 코스가 잘못되었다는 경고가 들린다. 지도를 보니 망해사 반대쪽으로 길을 가야 한다. 그래서 다시 길을 잡아 조금 가니 갯벌은 아닌 것 같은 습지가 펼쳐진다. 이곳에 이런 습지가 있었다니. 깜짝 놀랐다. 습지라면 잘 가꾸어 놓은 순천만이 대표적인데 이곳은 아직 사람의 손이 가미되지 안아 자연의 멋이 그대로 보였다. 이 길이 새만금바람길이라는 곳으로 습지 가에 제대로 난 길이 없어 그냥 자연의 길을 대부분 걷는 길이었다. 너무 낭만적인 길이다. 누구든지 한번쯤은 가 보면 좋을 것이다. 

 

새만금 바람길(전북천리길) 표지

 

 

 한 폭의 그림같이 느껴지는 습지를 계속 걸어가니 전선포 표지가 나온다.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에 있는 포구 전선포(戰船浦)는 옛날에는 지금의 해군기지와 같은 군항(軍港)으로서, 고려 후기에는 왜구와 접전을 벌였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만경강 입구에 위치해 있어 전라도를 적으로부터 지켜내는 요새의 역할을 하였으나, 1920년대 일본인들이 간척 사업으로 만든 전선포 제방으로 인해 일부는 농경지가 되고 일부는 해안이 되어 전선이 정박했던 포구의 흔적은 사라지고 없다. 지금은 전선포라는 작은 팻말을 세워 둔 것이 전부이다. 현재 전선포에는 습지 뒤에 10여 가구가 모여 있는 한적한 농어촌 전선포 마을이 있다. 남쪽에는 간척지 평야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으며, 북쪽에는 만경강을 사이로 군산시 대야들이 보인다

 

전선포 표지

 

김제 습지의 아름다운 풍경들

 

진봉방조제 표지

 

 습지를 벗어나 제방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만경강을 옆에 끼고 김제평야의 들판을 걸어가니 만경낙조전망대가 나온다. 하지만 나는 발걸음을 전망대로 가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 내가 지나는 시간이 낙조를 볼 수 있는 시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김제 들판

 

새만금 광역 탐방로 안내판

 

강가의 갈대와 억새

 

 

 

 계속 길을 가니 이름도 재미있는 새창이다리 표지가 나온다. 새창이다리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시멘트 다리라고 한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김제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평야다. 그리고 이 넓은 들에서 나는 쌀은 양과 맛에서 최고라고 알려졌었다. 그래서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제일 먼저 한 일이 김제의 질 좋은 쌀을 일본으로 가져가는 일이었다. 그래서 빼앗은 쌀을 보관할 창고를 새로 지은 곳이 이름 그대로 새로 지은 창고가 있는 곳이라는 지금의 신창마을이다.

그리고 그 창고에 쌓아둔 쌀을 실어간 항구가 군산이어서, 일제강점기의 군산은 북적거리는 풍요의 항구였다. 그런데 신창과 군산을 가로막는 교통상의 장애가 있었으니 바로 만경강이었다. 그래서 일제가 교통상의 장애를 해소하려고 서둘러 놓은 다리가 구 만경대교 혹은 지역말로 사창이다리, 새챙이다리라고 불리는 다리다. 새챙이다리, 사창이다리라는 명칭은 오랜 연원을 가진 강 연안의 거점이자 강의 이름인 신창진(新倉津)에서 유래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모든 정보를 종합하면 속칭, ‘새챙이다리라는 지역이름은 바로 배 나루인 신창진을 대체하고 바로 그 자리에 세워진 다리의 줄임말로 자연스럽게 그리 부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새창이다리는 김제의 쌀을 군산항으로 실어가기 위한 다리로 우리나라 농민들의 억장을 무너지게 했던 다리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그 다리가 아직도 끄떡없이 버티고 서 있다.

 

 새창이다리 입구에 들어서면 다리 입구에 아치를 만들어 새창이 다리라고 써여 있는데 다리 난간에 새겨진 다리 이름은 글자가 마모되어 잘 보이지도 않는 만경교라고 쓰여 있다. 그 옆에 풍요의 강, 만경강 이야기라는 입간판이 하나 서 있다.

 

이 다리는 지금은 붕괴 위험이 있어 자동차 통행을 금지하고 있으며 사람만 걸어서 건너가도록 허용하고 있다. 나무를 심은 커다란 돌 화분으로 차가 못 들어가게 막아놓은 새창이다리를 건너기 시작한다. 유유자적하게 편한 마음으로 한가롭게 다리를 건너면서 보니 김제의 관광명소를 소개하는 사진이 다리 양쪽 옆에 걸려 있다. 그중에서 나의 눈길을 끈 것은 수류성당이다. 내가 영화를 보는 것을 좋아하는데 예전에 본 영화 <보리울의 여름>의 촬영지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 영화시사회에서 배우 차인표씨에게 사인을 받은 기억도 있다. 나는 추억을 살리면서 이 다리를 건너고 있지만 일제강점기에 곡식을 수탈당하고 이 다리를 건너가던 사람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새창이다리와 그 주변 풍경

 

 새창이다리를 건너니 다리 입구에서 이 코스가 끝이난다.

 

 그늘에 앉아 잠시 쉬고 있으니 자전거로 여행을 하는 사람이 나에게 길을 묻는다. 하지만 나도 나그네인지라 갈을 알 수가 없다. 단지 내가 지도에서 본 것을 설명해 주고 쉬다가 다음 코스로 발을 옮긴다.

 

서해랑길 51코스(동진강석천휴게소 - 알콩쌀콩들녘체험관 - 성덕우체국 - 봉화산 -심포항)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서해랑길 51코스는 동진강석천휴게소를 출발하여 이름도 아름다운 알콩쌀콩들을 지나서 성덕우체국 주변에 가면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을 지나길을 걸어 나지막한 봉화산으로 올라가 산을 넘으면 심포항이 나타나고 여기서 끝이 나는 23.4km의 긴 길이다.

 

51코스 안내판

 

 석천휴게소라고 명명이 되어 있어 먹을거리나 음료수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도착하니 황량한 벌판이다. 아마 휴게소를 운영하기 위해서 건물을 지었는지 완공이 되지 않아 퇴락한 건물만 보이고 인적이라고는 전혀 없다. 다행히 쉴 정자는 있어 앉아서 요기를 잠깐 하고 동진강을 따라 길을 떠났다.

 

석천휴게소라는 이름의 폐허같은 건물들

 

장독과 호박의 정겨운 풍경

 

 길을 가면 아주 넓은 들판이 나온다. 동진강 옆의 들판이 이름도 특이한 '알콩쌀콩들판'이다. 쌀과 콩의 전국 최대 주산지인 동진강 권역에서 알찬 콩과 쌀이 나온다는 의미를 뜻하는 알콩쌀콩 들판은 쌀과 콩이 튀어나오는 듯한 모습으로 생동감 넘치는 마을과 넓은 들판을 뜻한다.

 

알콩쌀콩들

 

조그마한 배수 갑문

 

 

 우리나라 콩의 최대 산지라는 이름이 허명이 아니게 들판에는 콩을 심어 수확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여태까지는 콩을 이렇게 대량으로 심는 곳을 보지 못했기에 조금은 생소하였다. 이 들판을 걸어가니 성덕면이라는 표지가 보이고 길을 왼쪽으로 틀어서 나가니 아래의 한국기독교순교사적지라는 설명판이 있다.

 

남포 어린이집

 

 어린이 집을 지나 길을 조금 가니 시골 길을 걸으면서 좀처럼 보지 못했던 슈퍼가 보이고 식당이 있다. 지도에 의하면 성덕반점이라고 표시되어 있어서 처음에는 중국음식점인가 오인을 했는데 가까이 가니 문을 닫아 놓은 것 같았다. 여정을 시작하기 전에 항상 먹을 곳과 잘 곳을 검색하여 거기에 맞추어 걷고, 이번 여정에서 이곳에서 점심을 해결하려고 생각했는데 약간 난감했다. 그래도 문을 열어보니 다행히 문이 열리고 밥을 먹을 수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자리에 앉으니 주문도 받지 않고 그냥 돼지김치찌개를 가져다준다. 전혀 조금도 기분이 나쁘지 않게 집에서 밥을 먹듯이 편안하게 먹을 수 있었다. 밥을 먹는 도중에 아마 이 근방에서 공사를 하는 사람들인지 서넛이 들어와 점심을 먹는다. 정말 편안하게 집에서 밥을 먹듯이 맛있게 포식을 하였다. 아마 서해랑길을 걷는 많은 사람들은 이 잡에서 한 끼를 해결하고 가는지 주인아주머니가 길손들을 잘 알고 있었다. 주인아주머니와 여러 이야기를 하고 쉬다가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점심을 해결한 성덕반점

 

식당 앞의 슈퍼

 

넓게 펼쳐진 김제평야

 

 

 넓고 넓은 김제평야를 보면서 논밭 사이로 난 길을 걸어가면서 옛날에 우리나라에서는 이 김제평야에서만 지평선을 볼 수 있다는 말이 있었고 그 때 이 지방을 지나는 기차를 타고 가면서 넓은 들을 보던 생각이 났다 .들판을 지나고 거전마을을 지나니 봉화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온다.

 

 봉화산(烽火山)은 김제시의 진봉면 심포리에 위치한 산으로 높이는 85m이며, 남서쪽에 거전마을이 위치하고, 북동쪽에 심포항(深浦港)이 위치한다. 서해를 바라보는 봉화산(烽火山) 정상에 봉화대가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보이는데 정상부에 봉수대의 흔적이 있었으나 지금은 헬기장으로 사용하면서 거의 없어졌다. 봉수대는 고려시대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되며, 봉화산의 봉수대가 조선시대에 이르자 일반 백성에게 피해를 입힌다 하여 계화도로 옮겼다는 설이 있다.

 

봉화산 숲길 안내도

 

 봉화산 숲길 안내도가 있는 곳에서 봉화산으로 올라가려니 길을 안내하는 리본도 보이지 않고 GPS에 나오는 방향에는 길이 없다. 아마도 여름이 지나면서 잡풀이 우거져 길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잡풀을 헤치고 가면서 멀리 보니 리본이 보였다. 그래서 길이 아닌 언덕으로 잡풀과 숲을 헤치고 리본이 있는 곳에 도착하여 길을 걸었다. 길을 걸으면서 여름이 지나면서 잡풀이 우거져 길을 찾을 수 없는 곳이 숱하게 많이 보았다. 코리아둘레길 지킴이들이 있다고 알고 있는데 너무 무신경한 것 같아 아쉽게 생각이 되었다.

 

봉화산 올라가는 길에서 보는 김제평야

 

봉화산 봉수대터

 

봉수대 옆에 있는 새만금 바람길 안내도

 

 봉화산을 내려와 심포항으로 가니 주변에 공사가 한창이다.항구에 도착하기 전에 공사판을 지나니 항구 입구에서 이 코스는 끝이 난다.

 

심포항 입구의 표지

 

 짧지 않은 이 길에서 사람들의 따뜻한 인정도 맛보았고 넓게 펼쳐진 김제평야에서는 풍요로움도 느낄 수 있었다. 

 

 오늘은 이곳에서 숙박을 할 예정이었기에 미리 아침에 전화를 해 둔 모텔을 찾아가서 몸을 씻고 나와 저녁을 먹고 내일을 기약하며 쉰다.

 

서해랑길 50코스(부안군청 - 신흥버스정류장 - 고마농촌테마공원 - 창동경로당 - 동진강석천휴게소)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서해랑길 50코스는 부안군청 앞을 출발하여 도로를 따라 가다가 언덕을 넘어 다시 도로를 따라가서 또 농촌 길을 걸어가면 고마농촌테마파크가 나오고, 테마파크의 고마제를 우회하고 저수지 위의 테크를 통과하여 농촌 길을 계속 가서 만나는 동진대교를 지나 동진강석천휴게소까지 가는 11.1km의 짧은 길이다.

 

50코스 안내판

 

 아침 일찍 숙소를 출발하여 부안군청 앞에 도착하여 오늘의 여정을 시작한다. 부안군청 앞에서 큰 도로를 따라 제법 걸어가서 부안역사문화관이라는 작은 건물이 나온다. 어떤 의미가 있는 건물인지는 모르겠으나 역사문화관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는 너무 초라했다. 계속 도로를 따라 조금 걸어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가니 석정문학관이 나온다.

 

부안군청

 

부안역사문화관

 

사람도 차도 없는 아침 거리

 

석정문학관 표지

 

 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니 신석정의 고택이 나온다. 이 집의 주인이었던 신석정(辛夕汀)은 반속적(反俗的)이며 자연성을 고조한 동양적 낭만주의에 입각한 시를 썼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부안 출신의 시인으로 본명은 신석정(辛錫正). 아호는 석정(夕汀, 釋靜, 石汀) 외에 석지영(石志永), 호성(胡星), 소적(蘇笛)을 쓰기도 하였다. 우리나라 고등학교에서는 신석정 시인의 시가 입시에도 자주 나오기 때문에 자주 언급이 되는 시인이다.

 그는 부안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향리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그의 시작활동은 1924419일자 조선일보에 소적이라는 필명으로 기우는 해를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뒤 1931시문학지 동인이 되면서부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전개하였다.

 대표작으로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꽃덤불>, <들길에 서서>,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아직은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등이 있다.

 김기림은 그를 현대문명의 잡답(雜踏)을 멀리 피한 곳에 한 개의 유토피아를 흠모하는 목가적 시인이라 평가하였다.

 

 신석정고택이라는 집은 부안군 부안읍에 있는 시인 신석정과 관련된 주택으로 1993년 전라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신석정은 은행나무, 벽오동나무, 자귀나무, 측백나무로 울타리를 두른 이곳에서 시상(詩想)을 다듬으며 창작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신석정이 시인으로서 꿈과 청춘을 키우며 첫시집 촛불과 제2시집슬픈목가를 탄생시킨 곳이다.

 신석정이 이 집을 마련한 것은 1935년이다. 그는 시문학 동인이 되어 본격적인 시작(詩作) 활동을 하였으나 어머님의 부음을 받고 귀향하였다. 그 후 이 집을 마련하여 분가하였으며 스스로 청구원(靑丘園)이라 이름지었다. 1952년 전주시 노송동으로 이사하기 전까지 신석정이 이 집에서 살았다.

 원래는 초가 3칸이었으나 4칸의 목조기와집으로 개수하였다.

 

고택 주변에는 석정 문학관이 함께 조성되어 있다.

 

신석정고택과 그의 시비

 

석정문학관

 

언덕으로 올라가기 전의 별장과 같은 집들

 

 

 언덕을 넘어 길을 따라 조금 가니 제법 큰 저수지가 나온다. 고마제라고 알려져 있는 동고저수지다.

 부안군 동진면 내기리에 있는 대규모 저수지로 고마제, 고마지, 동고지라고도 한다. 고마 지구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농업 생산력을 높이기 위한 저수지 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19581230일 완공되었다. 제방은 길이 746m, 높이 8.5m, 계획수심 6.2m으로 제법 큰 저수지다. 주위가 한적하고 울창한 숲에 둘러싸여 있어 주말이면 가족 단위의 낚시인파가 많이 찾아온다고 한다.

 저수지 주변에 농촌 관광농원, 녹지 공원, 수변 테마 공원 등이 조성되어 있다.

 

저수지 전경

 

지금은 피어 있지 않은 연꽃군락지

 

고마지구농촌테마공원 안내판

 

고마저수지에 조성된 농촌테마공원은 자연과 문화, 사회자원을 토대로 다양한 형태의 테마공원으로 조성되어 지역특산물인 뽕 관련 산업 홍보와 부족한 지역주민 휴양시설 확보 등 농촌지역 활성화에 기여하고 있다.

 

못줄다리 설명

 

못줄다리

 

못줄다리와 고마제 전경

 

솟대

 

저수지 주변

 

 

 고마제의 풍경을 즐기면서 저수지를 가로지르는 테크 길을 걷기도 하고 저수지 둘레를 따라 걷기도 하며 저수지를 벗어나서 누렇게 익어 있는 벼를 보면서 마음의 풍요를 느끼며 길을 가니 내가 어릴 적에 보던 떡방앗간도 보이고 전형적인 농촌마을이 있다. 이 마을들을 지나 가니 하천이라기보다는 강의 모습이 보인다. 동진강이다.

 

 동진강(東津江)은 정읍시 산외면의 상두산(象頭山, 575m)에서 발원하여 김제평야를 지나 새만금 사업지구로를 지나 서해로 흘러드는 강으로 유로연장이 44.7인 짧은 강이다.

동진강(東津江)이라는 명칭에서 동진(東津)은 옛 부안 고을의 동쪽에 있던 동진 나루를 뜻한다. 동진의 별칭인 통진(通津)은 황해로 통하는 나루터를 뜻하는 이름으로 풀이된다.

 동진강의 하류에는 우리나라 최대의 곡창지대인 김제평야와 계화도 간척지의 드넓은 농경지가 있다. 동진강 유역은 대부분 평지여서 비옥한 농경지를 이루고 있다.

 

 

 동진강을 가로지르는 동진대교를 건너니 동진강석천휴게소가 나오고 여기서 50코스는 끝이 난다.

 

 잠시 쉬다가 다음 코스로 걸음을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