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鶴)의 오딧세이(Odyss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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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경주9 - 동쪽(골굴사, 기림사)
  2. 경주8 - 동해안
  3. 경주7 - 서악 일대 1
  4. 경주6 - 남산지역, 서남산 일대 3
  5. 경주5 - 남산지역, 동남산 일대 1

경주9 - 동쪽(골굴사, 기림사)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겨울의 매서운 추위가 한동안 기승을 부려 경주 순례를 멈추었다가 날씨가 풀려 다시 경주로 향했다. 이번 길에는 동쪽을 돌아 보기로 작정하고 경주시외버스터미널 앞에서 골굴사를 가는 버스를 기다리니 배차 간격이 길어 제법 기다려야 했다. 기다렸다가 버스를 타고 약 한 시간이 걸려 골굴사입구에 도착했다. 경주의 동쪽은 아직은 답사하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골굴사 가는 길 표시

 

 버스에서 내려 제법 먼 길을 걸어가면 골굴사 입구가 나온다. 예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변한 것을 보고 세월의 무상함도 느끼고 '나도 이제 나이가 많이 들었구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골굴사 입구 표시

 

골굴사 입구에서 산문을 향해 가는 길에는 골굴사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선무도의 형상이 늘어서 있다.

 

골굴사 산문의 선무도 형상

 

 골굴사는 함월산에 위치한 선무도(禪武道)의 총본산으로 한국의 소림사라는 별명이 붙어 있는 사찰이다. 1,500여 년 전 인도에서 온 광유 선인 일행이 함월산에 정착하면서 골굴사와 기림사를 창건하였는데, 골굴사는 광유스님 일행이 인도를 본떠 석굴사원 형태로 조성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석굴사원이다.

조선 중기 겸재 정선의 <골굴 석굴도>로 볼 때 골굴사는 여러 석굴들 앞에 목조 전실을 만들고 여기에 기와를 얹은 형태였다. 조선 중후기에 화재로 소실된 상태로 방치되었다가 지금으로부터 약 70여 년 전 경주에 사는 박씨 일가가 상주하면서 다시 사찰로 만들었고, 1989년에 한 개인에게 매매되어 넘어간 상태였던 것을 당시 기림사 주지였던 설적운 스님이 매입해서 지금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본사 불국사의 말사로 등록되었다.

 근래에 이르러 골굴사에는 불가의 전통 수행법인 선무도 수련원이 개설되어 내국인은 물론 수많은 외국인들이 전통의 불교무예를 배우는 도량으로 자리 잡았다.

 

범종루

 

 

 산문을 통과하여 임도길을 따라가는 길 중간에 포대화상과 개 동상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골굴사의 마스코트인 ‘동아보살’ 상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외국에도 소개되었던 골굴사의 마스코트다. 동아보살이 처음 TV에 등장했던 건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프로그램이었다. 새벽 4시만 되면 일어나 법당에서 방석을 차지하고 앉아 새벽예불을 드리는 개로 소개되어 화제가 되었다. 지금은 생이 다해 이 땅에 없지만 골굴사 주지 설적운이 동아보살상 옆에 쓴 글을 보면 뭉클해온다.

 

 ‘동아보살

강아지 때부터 새벽예불을 대중들과 함께했으며

모든 행이 예사롭지 않았으며 여느 개 답지 않게

살생을 하지 않았다. 만년에 치매와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하였으나 죽는 날 아침까지 새벽예불에 참석했다.

매년 음력 215일을 동아의 기제사일로 정했다.

모든 불자들은 그를 동아보살이라 불렀다.

 

'동아보살' 상

 

여러 전각들

 

 길을 따라 올라가면 거의 맨 위에 마애불이 보인다. 멀리서 보는 마애불은 암벽위에 우둑 서 있다.

 

 함월산 기슭의 골굴암에는 수십 미터 높이의 거대한 응회암에 12개의 석굴이 나있으며, 암벽 제일 높은 곳에는 돋을새김으로 새긴 마애불상이 있다. 9세기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골굴사 마애여래좌상은 응회암 재질의 암벽에 조성된 불상으로 골굴사의 주불이라 할 수 있다. 동해를 바라보게 조성된 이 불상은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상호에 화려한 연꽃과 불꽃이 조화를 이룬 광배가 바라보는 사람들 마음까지 편안하게 한다. 굴과 굴로 통하는 길은 바위에 파놓은 가파른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정상에 새겨진 마애불로 오르려면 자연 동굴을 지나게 되어 있다. 절벽 꼭대기에 새겨진 높이 4m, 2.2m 정도의 보물로 지정된 마애불상은 모래기가 많이 섞인 화강암에 새긴 터라 보존상태가 썩 좋지 않고 오랜 풍화 작용에 의해 훼손이 심해 유리 지붕을 씌어 놓았다. 마애여래좌상은 문무대왕의 수중릉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골굴사에 석굴사원이 조성되고 지금은 불교 고유의 무술인 선무도가 전승되는 도량으로 자리 잡는 데에 있어 같은 축선 상에 놓인 감은사와 대왕릉은 서로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닌가 추측하게 된다. 이 중심으로 주변에 관음굴, 지장굴, 약사굴, 나한굴, 신중단, 칠성단, 산신당 등의 굴법당과 더불어 남근바위, 여궁 등의 민간 전례신앙의 흔적까지 있어 한국적인 석굴사원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마애불 설명판

 

마애불로 올라가는 계단

 

멀리 보이는 마애불

 

마애불 올라가는 도중의 모습

 

마애불

 

마애불에서 보는 동쪽

 

골굴암 전경

 

 마애불을 내려와 조금 올라가면 휴식을 할 수 있게 만들어진 공간이 있고 여기에 오륜탐이 세워져 있다. 여기서 잠시 앉아 쉬다가 골굴암을 내려 왔다.

 

오륜탑

 

 골굴사는 일반적으로 선무도(禪武道)로 알려져 있는 불교 무술 금강영관의 본원이 있는 절이기도 하다. 매일 오후 3시에 대적광전(돌계단을 올라가다 보면 표지판이 보이는 '큰법당')에서 무술 시범을 하는데 흔히 아는 소림사의 공연과 비슷한 느낌이다.

 

매일 공연이 벌어지는 대적광전

 

 골굴사를 돌아보고 내려와서 약 3km 떨어진 기림사로 간다. 기림사는 내가 유별하게 좋아하는 사찰이라 여러 번 왔기에 새로울 것이 없지만 항상 정감이 가는 절이다. 사람들마다 느끼는 것이 다르겠지만 나는 네 계절 중에서 기림사의 여름이 제일 좋다. 봄의 기림사도 단풍이 든 가을의 기림사도 고즈녁한 겨울의 기림사도 좋지만 수국이 만발하는 무렵의 기림사는 온갖 꽃들이 피어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 당긴다. 그래서 기림사의 사진은 예전에 찍어 놓은여름과 가을의 사진을 원용하였다.

 

기림사 입구의 돌다리

 

기림사는 27대 선덕여왕 때인 643년 창건되었다고 전하며, 당시 이름은 임정사였는데 원효대사가 와서 기림사로 바꾸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31대 본산의 하나로 불국사를 비롯해 60여 개의 말사를 거느린 거대한 사찰이었다.

 

지금은 불국사의 말사가 되었지만, 비로자나 삼신불이 봉안된 대적광전(보물제 833)과 약사전, 오백나한을 모신 응진전, 임진왜란 당시 승군들의 지휘본부로 사용된 진남루 등 귀한 유산을 품고 있다.

 

대적광전은 기림사의 본전이다. 보물 415호인 대적광전은 조선 초기 불상의 전형을 갖추고 있는 삼존불을 모시고 있다. 대적광전과 진남루 사이 서쪽에 오백나한전이 있고, 그 바로 앞에 높이 3m쯤 되는 아담한 3층 석탑이 있다. 배흘림 양식으로 세워진 탑은 처마 끝은 살짝 들리어 가뿐한 느낌을 주고, 위로 갈수록 줄어들면서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대적광전을 마주보고 좌측계단에 오르면 삼천불전이 있다. 삼천 개의 하얀 불상이 본존불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데 한 눈에 들어오기 힘들만큼 웅장하다.(경주문화관광에서 가져 옴)

 

기림사 입구의안내판

 

기림사 일주문

 

 

기림사 오종수 이야기 설명

 

매월당 영당

 

기림사 표시

 

진남루

 

대웅전 앞의 소나무와 삼층석탑

 

대적광전의 전경과 현판

 

대적광전의 처마와 문 창살의 기하학적 무늬

 

삼천불전

 

삼천불전 주변의 여러 모습

 

유물관 앞의 돌절구

 

1920년대의 기림사 전경

 

 기림사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으나번잡한 산사는 아니디. 그러니 세사의 번잡함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고 싶으면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기 좋은 곳이다. 수 많은 볼거리 가운데 나의 마음에 다가온 것은 돌절구였다. 돌절구에 새겨져 있는 세월의 흔적이 보이기도 하고 비바람의 풍상에 절은 모습이 마음을 아프게도 하였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뛰어 넘은 돌절구 자체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은 무어라 말할 수 없었다.

 

 기림사를 돌아보고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길은 먼길이었으나 천천히 걸어가면서 나를 돌이켜 보는 시간을 가졌다. 버스정류장에서 제법 기다려 경주 시내 버스를 타고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하니 하루가 지났다. 경주 동쪽은 아직 거리도 멀고 교통이 그렇게 편하지 않음을 다시 생각하게 했다.

 

경주8 - 동해안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경주를 탐방하는 사람들이 놓치기 쉬운 곳이 경주의 동해안이다. 요즈음은 대중교통수단이 발달하여 비교적 쉬워졌지만 아직도 먼길이라 쉽게 다가가지 못한다. 하지만 동해안은 시내 일대에서 보기 어려운 여러 가지가 있으니 경주를 탐방하는 분들은 꼭 동해안을 가 보시기를 둘러 보시기를 바란다.

 

 동해안은 제법 길이 멀기에 하루에 돌아보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내가 해파랑길을 걸을 때 경주 일대의 동해안을 걸으면서 보았던 것을 기본으로 기록한다.

 

 경주의 문화적 유적이 아니고 자연의 특이한 풍경을 구경하는 첫째가 주상절리다. 우리나라 여러 곳에 주상절리가 많지만 경주의 주상절리는 솟아 오른 것도 있지만 누워 있는 것이 특징이다.

 

 주상절리(Columnar joints, 柱狀節理)는 기둥모양의 절리(節理, joint)라는 뜻으로, 절리는 지형 용어로 암석에 생기는 갈라진 틈 또는 결을 의미한다. 주로 화산 지대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화산암인 현무암에서 주상 절리가 많이 나타난다. 마그마가 흘러나와 급격히 식을 때에는 부피가 수축하여 사이사이에 틈이 생기게 되는데, 오랜 시간 동안 풍화 작용을 받게 되면 굵은 틈이 나타난다. 이것이 바로 절리인데, 주상 절리는 단면의 모양이 4~6각형의 긴 기둥 모양을 이루는 절리를 말한다. 보통 단면의 크기는 수 센티미터에서 수 미터에 이르기도 하며, 기둥의 길이는 수 미터에서 긴 것은 수십·수백 미터에 이르기도 한다. 주상절리는 보통 육각형의 단면을 가지는 돌기둥들이 규칙적으로 붙어서 연속적으로 나타나, 그 독특한 형상으로 인해 관광지로 개발된 곳이 많다.

  제주도 중문해안에는 기둥 모양의 주상 절리가 절벽을 이루고 있으며, 정방폭포와 천지연 폭포가 주상 절리에 해당 한다. 광주 무등산의 입석대와 서석대를 이루는 주상절리는 둘레가 7m, 길이가 약 10m가 되는 큰 규모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경기도 연천의 재인폭포, 임진강 주상절리, 강원도 철원의 직탕폭포, 경북 포항 달전리 주상절리, 경주 읍천리 해안가 와상절리 등 여러 곳이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국가지질공원 및 각종 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으며,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북한에 있는 총석정도 유명한 주상절리에 해당하는데 가 볼 수가 없으니 안타깝다.

  한편 주상절리와는 달리 쪼개지는 절리의 방향이 수평으로 넓게 나타나는 절리를 판상(板狀)절리라 한다.

 

 경주 양남 주상절리군(慶州 陽南 柱狀節理群)은 경주시 양남면 읍천항과 하서항 사이의 해안을 따라 약 1.5km에 이르는 2012925일에 천연기념물 제536호로 지정된 주상절리이다. 신생대 제3기의 에오세(5400만 년 전)에서 마이오세(460만 년 전) 사이에 경주와 울산 해안지역 일대의 활발했던 화산활동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이곳의 주상절리는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거나 수평 방향으로 발달해 있으며, 부채꼴(방사형)로 퍼져나간 것도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렇게 형태가 다양한 것은 마그마가 지표면 위로 분출하지 못하고 지각 얕은 곳으로 스며들어간 상태에서 냉각과정을 거쳤기 때문인 것으로 본다. 수평, 수직, 경사, 방사 형태 등 모든 방향의 주상절리가 대규모로 모여 있고, 흔히 볼 수 없는 부채꼴 주상절리가 발달해 있다는 점에서 희소성이 있다.

  이곳 해변에는 10m가 넘는 정교한 돌기둥들이 1.7에 걸쳐 분포해 있으며, 주름치마, 부채꼴, 꽃봉오리 등 다양한 형태의 주상절리가 존재한다. 그리고 몽돌길, 야생화길, 등대길, 데크길 등 해안 환경을 고려한 테마로 1.7에 걸쳐 주상절리 전 구간을 산책할 수 있는 파도소리길이 조성되어 있다.

 

주상절리의 여러 모습

 

멀리 보이는 양남면 주상절리 전망대

 

여러 형태의 주상절리

 

양남면 주상절리 전망대

 

 양남녕 주상절리 전망대에 올라가서 보는 주상절리는 실제로 아래에서 보는 것보다 못하다. 더구나 2층의 테라스는 바람이 조금 불어도 개방을 하지 않으니 무용지물이다, 내려와서 전망대 주변에서 보는 주상절리가 더 깨끗하고 아름답게 보인다. 예전에 이 전망대가 없을 때도 주상절리를 잘 보았는데 별 쓸모도 없는 전망대를 만들어 놓은 것 같은 기분이다. 전망대를 만드는데 들어간 예산도 많을 것이고 지금 유지하는 경비도 적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니 전형적인 행정의 오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월성원자력발전소의 도움으로 건립되었다 하지만......

 

여러 형태의 주상절리

 

 양남면 주상절리지대를 지나 바닷가를 따라가면 문무대왕릉이 나온다.

 

 경주 문무대왕릉(慶州 文武大王陵)은 경상북도 경주시 문무대왕면 봉길리 봉길해수욕장 맞은 편 동해 바다에 있는 작은 바위섬으로 사적 제158호로 대왕암(大王岩)이라고도 한다. 삼국통일을 이룬 문무왕(文武王)은 국가의 안위를 위해 죽어서도 국가를 지킬 뜻을 가졌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7 문무왕 편에 의하면 ‘71일에 왕이 돌아가시므로 문무라 시호하였는데 그 유언에 따라 동해구의 대석상에 장사하였다. 속전에는 왕이 용으로 화하였다하여 그 돌을 가리켜 대왕석이라고 하였다.’(김종권역)고 전한다.

 육지에서 불과 200여 미터 떨어진 가까운 곳에 있는 대왕암은 큰 바위가 주변을 둘러싸고 있고, 중앙에 약간의 넓은 공간이 있는데, 이 공간에 대석을 이동하여 배치한 것으로 여겨진다. 중앙의 대왕암 주변 네 방향으로 자연적으로 물길이 나 있는 상태이나 약간의 인공을 가하여 튀어나온 부분을 떼어내어 물길이 난 가운데 공간을 약간 가다듬은 흔적이 발견되었다.

 대석의 안치 방법과 유골의 수장 여부에 대한 의문점을 풀기 위해 20013월 한 방송사에서 역사연구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 초음파 탐지기 등을 이용하여 바위의 조직과 바위의 내부 및 수면 아래를 조사한 결과 유골이나 부장품이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하였다.

 대왕암이 1967년에 '발견'했다고도 알려져 있지만, 이미 일제강점기인 1939년에 고유섭이 발표한 <경주기행의 일절>에서도 '모름지기 경주에 가거든 동해의 대왕암을 찾아 문무왕의 정신을 기려 보라'고 할 정도로, 이미 대왕암이 문무왕의 유적이란 건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결론적으로 대왕암은 문무왕의 유골함이나 부장품은 없지만, 문무왕을 기리는 추모 공간이자 사적으로서 '해중왕릉'의 의미는 여전히 충분하다.

 

 문무대왕릉 부근은 그냥 평범한 바닷가다. 이 부근을 유적지로 개발하여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예를 들면 문무대왕릉 주변을 도는 유람선 같은 것을 정기적으로 취항하면 어떨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문무대왕릉 주변과 안내판

 

  여기서 감은사지로 발길을 돌려 걸으면 제법 큰 하천이 나오는데 이름이 대종천이다. 그리고 그 하천을 건너는 다리 이름이 대종교이다. 왜구가 침입하여 큰 종을 약탈해 가다가 이 하천에 종을 빠뜨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대종천

 

이정표

 

 대종천을 거슬러 올라가면 오른쪽으로 조금 높은 땅에 두개의 석탑이 보인다. 감은사지 석탑이다.

 

 경주 감은사지(慶州 感恩寺址)는 신라를 통일하고 동해 바다의 용이 된 문무왕을 위하여 만들었다는 설화가 전해지는 감은사 절터로 사적 제31호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이곳은 동해에서 서라벌로 들어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 길을 통해 왜구의 침입이 잦아지자 부처님의 힘으로 물리치기 위하여 문무왕이 감은사를 짓기 시작하였으나 끝내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신문왕이 그 뜻을 이어 682년에 절을 완공하여 감은사라 이름하였다. 이는 불심을 통한 호국이라는 부왕의 뜻을 이어받는 한편 부왕의 명복을 비는 효심의 발로였던 것이다. 절터는 동해에 이르기 직전의 산기슭에 있는데, 거기에는 큰 3층 석탑 2기가 동남으로 흐르는 대종천(大鐘川)을 앞에 두고 서 있다. 감은사지 삼층석탑은 통일시기 신라인의 기상을 나타내는 큰 탑으로, 이후 만들어지는 신라 삼층석탑의 원형이 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멀리서부터 잘 보이는 두 개의 삼층석탑은 금당 앞으로 동과 서에 하나씩 놓여 있다.

 

 두 개의 탑보다 이야기로 남아 오랫동안 기억되는 것은 금당 자리의 석축이다. 금당 아래 석축 사이로 제법 큰 공간이 비어 있음을 볼 수 있는데, 동해 바다의 물이 드나드는 길로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이 오가던 길이라고 한다. 문무왕이 죽어서 묻혔다는 수중 능도 가까이 있어 그 이야기가 정말일까 고개를 끄떡이게 한다. 곳곳에 놓인 석재에는 보통 절에서 사용하지 않는 문양인 태극무늬가 새겨져 있어 이색적이다.

 또한 중문의 남쪽으로 정교하게 쌓은 석축이 있으며, 이 석축의 바깥으로는 현재 못이 하나 남아 있다. 이를 용담이라 부르는데, 통일신라 당시 감은사가 대종천변에 세워졌고 또 동해의 용이 드나들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이 못이 대종천과 연결되어 있고 또 금당의 마루 밑 공간과도 연결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감은사지 석탑의 여러 모습

 

 경주 동해안의 자연과 문화유적은 과거 해파랑길을 걸으며 찍어두었던 사진을 추려서 편집하엿다. 해파랑길 소개에는 더 많은 사진이 있으니 나의 블로그 해파랑길 10코스와 11코스를 참조하시기를 바란다.

경주7 - 서악 일대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서남산을 다녀온 뒤에 우리 명절 설날이 다가와서 잠시 경주 순례를 멈추었다가, 설날이 지나고 다시 경주로 향했다. 경주라는 곳은 보면 볼수록 무궁무진하게 즐길 곳이 많다. 몇 년을 다녀도 경주를 다 볼 수는 없기에 내가 보고 싶은 곳을 중심으로 경주를 다녀보기로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서악 일대를 중심으로 돌아보기로 하고 집을 나섰다. 시외버스터미널에 가니 내가 도착해서 가장 가까운 버스는 만차가 되어 다음 차를 타고 경주로 갔다. 처음부터  계획하는 것과 시간의 차이가 생겼다. 하지만 바쁠 것이 없기에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돌아볼 생각이었다.

 

경주시외버스터미널 옆에 있는 읍성 안내판

 

 경주시외버스정류장에서 내려 먼저 김유신장군묘를 찾아가기로 하고 형산강을 가로지르는 서천교를 건너 길을 걸어갔다. 제법 거리가 멀었지만 교통 정보를 보니 버스를 타고 가는 시간이나 걸어가는 시간이나 비슷하기에 나의 특기를 살려서 걸기로 하엿다. 그런데 이날 따라 기온이 급강하하였고 바람도 세차게 불어 걷기는 상당히 어려웠으나 걷기에는 어느 정도 익숙하기에 무리가 되지는 않앗다.

 

서천교

 

서천교에서 보는 형산강

 

김유신장군(흥무대왕)묘 입구

 

 김유신장군묘 입구에서 묘까지는 상당한 거리를 걸어야 한다. 호젓하게 오솔길을 걸어가니 장군의 묘역이 나온다. 장군의 묘역은 신라의 여러 왕보다도 더 크고 더 장식이 잘 되어 있어 장군의 위용을 알 수가 있다.

 

 김유신묘(金庾信墓)는 경주시 충효동에 있는 옥녀봉 동쪽 능선 한가운데에 위치한 고분으로, 신라의 장군이자 재상이었던 김유신의 무덤으로 전하고 있다. 1963년 사적 제21호로 지정되었다.

 신라에 투항한 금관가야 왕족의 후손인 김유신은 김춘추(후의 태종무열왕)와 혈연 관계를 맺어 정치적 발판을 마련하고,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대로 멸망시키고 당()의 침략을 막아 당대 신라의 중요한 공신이 되었다. 그가 죽었을 때 문무왕이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르고 그의 공덕을 기리는 비를 세웠으며, 흥덕왕(興德王)은 그를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받들었다.

 

 무덤은 신라의 역대 왕릉 가운데 가장 넓은 부지를 차지하고 있다. 직경 15.8m에 높이는 5.6m이고, 묘제는 횡혈식 석실분에 해당한다. 봉분 자락에는 면석과 탱석(각각 24개씩)을 사용한 호석 구조를 하고 회랑에는 박석을 깔았다. 탱석에는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부조되어 8세기 후반에서 9세기 전반에 이르는 기간 동안 조영된 전형적인 신라 왕릉의 형식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서남쪽에는 조선 숙종 36년에 당시의 경주부윤이었던 남지훈이 세운 '신라태대각간김유신묘(新羅太大角干金庾信墓)'라고 새긴 묘표가 있다.

 

  흥덕왕 때 김유신을 흥무대왕으로 높여 부르면서 둘레돌과 십이지신상을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통설과는 달리 이 무덤이 실제 김유신의 무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주장은 사학자 이병도가 최초로 ()김유신묘고()(1968)를 발표하여, 세간에 김유신의 묘라고 알려진 바와는 달리 이 무덤은 사실 신라 신무왕(神武王)의 무덤이며, 태종무열왕릉 옆의 전()김인문묘(속칭 각간묘角干墓)가 진정한 김유신의 무덤이라고 주장하였지만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김유신묘라고 인정한다.

 

묘지 입구의 안내 표시

 

묘지 입구의 신도비각

 

묘지 입구

 

묘지 올라 가는 길

 

김유신장군묘

 

흥무왕릉비

 

태대각간김유신묘비

 

십이지신상 중 말과 쥐

 

 

 옛날의 기록에는 이 묘역을 관리하는 금산재가 있었다고 하였는데 사라져서 새로 금산재를 지어 이 묘역을 관리한다고 하였으나 금산재는 문을 굳게 닫아 놓아 안으로 들어가 볼 수가 없었다.

 

금산재의 여러 모습

 

 김유신장군묘역을 벗어나 형산강을 따라 걸어 금장대를 찾아갔다. 영하의 날씨에 강바람이 세차게 불어 얼굴을 때려 걷기가 편하지 않았으나 버스도 다니지 않기에 무작정 걸으며 겨울 형산강의 풍경을 즐겼다. 강의 둔치에는 요즈음 성행하고 있는 파크 골프장이 잘 조성되어 있었다.

 

 

 형산강(兄山江)은 동해로 흐르는 강 중 가장 긴 강으로, 현재까지 발원지가 어디인지의 논란이 많으나 환경부에서 발간한 한국하천일람에서 공인한 형산강의 최장 발원지는 '경주시 서면 도리, 인내산'이다. 평야는 형산강평야(兄山江平野)라고 부르며, 현재는 동해선과 국도 제7호선이 강을 따라 위치하고 있어 교통은 편리하다. 신라 시대에는 수도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하천 중의 하나였다. 강 주변에는 신라 때의 고분군이나 유적들이 많아, 경주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형산이라는 이름은 경주시와 포항시의 접경에서 제산(弟山)과 마주하고 있는 형산(兄山)에서 유래됐다. 옛날 포항과 경주 사이에 형제산이 있었다. 형제산은 형산과 제산으로 갈라지고, 그 사이로 강이 흐르게 되었는데, 그 강을 형산강이라고 하였다는 민간에 전하는 설이 있다.

 

장군교의 모습

 

형산강의 여러 모습

 

금장대 가는 길의 김동리의 '무녀도' 소개 글

 

 경주에는 세 가지 진귀한 보물과 여덟 가지 기이한 현상을 뜻하는 삼기팔괴에 대한 이야기가 전한다. 이 중 금장대는 금장낙안(金丈落雁)이라고 하여 경주의 서천과 북천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금장대에서 바라본 아름다운 풍경 때문에 기러기도 쉬어간다는 이야기로 알려졌다.그만큼 금장대는 빼어난 경치와 조망을 자랑한다.

2010년 이 이야기의 위치로 유력한 곳을 발굴 조사한 결과 건물터와 다량의 기와, 공양석상, 철판 등의 유물이 나왔고 이후 2012년 복원을 완료하여 대중에 공개하였다. 발굴된 유물로는 언제 지어졌는지를 정확히 가늠할 수 없지만 대략 8~9세기 경에 지어진 건물로 예상하고 있다.

 

금장대는 김동리의 소설 '무녀도'의 무대가 된곳으로 위에서 보는 것과 같이 '무녀도' 입간판이 서 있다.

 

금장대와 금장대에서 보는 풍경

 

 금장대 바로 밑에는 우리가 잘 알지 못하지만 고고학적으로는 중요한 '석장동 암각화'가 있다. 지금은 거의 다 마모되어 쉽게 식별하기는 어렵지만, 전문가ㄷ들의 연구에 의하면 경주석장동암각화(慶州錫杖洞岩刻畵)는 초기철기시대에 속하는 바위그림 유적으로 금장대(金丈臺) 수직 암면 8부 능선쯤에 서천을 향하여 만들어져 있다. 이 바위그림은 1994년 동국대 경주캠퍼스 고고미술사학과 학술조사팀이 발견하였다. 이곳에서는 가로, 세로가 9.0×1.7m 크기의 남변 긴 바위면에 검파형(劍把形) 바위그림 8점을 비롯하여 돌검(石劍), 돌화살촉(石鏃), 돌창(石槍)의 요소를 갖춘 그림 11, 사람 발자국 4, 여자 성기 3, () 1, 그 외 동물상과 동물 발자국, 기타 해석이 곤란한 기하학문 바위그림이 있다. 이와 비슷한 유적으로는 영일 칠포리 유적이 있으며, 사람 발자국 그림은 안동 수곡리(水谷里) 한들 마을의 신선바위에도 1점 있다.

 

 이 암각화가 더 이상 마모되지 않게 보존을 하였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경주 삭장동 암각화

 

금장대 습지공원

 

 금장대를 나와 무열왕릉을 찾아가는 길은 너무 멀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활 수도 없기에 지도를 보니 약 한 시간을 걸으면 갈 수잇는 거리라 걸어가기로 하였다. 우리나라를 전부 걸어다니고 있는 나이기에 걷는 것은 크게 무리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약 한 시간을 걸어 서악지구에 도착하니 멀리 산등성이에 고분들이 보인다.

 

멀리 보이는 고분군

 

서악지구 안내판

 

 서악지구에 도착하여 길을 따라 먼저 서악서원으로 갔다. 서악서원(西岳書院)은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서원으로 조선 명종(明宗) 16(1561) 당시의 경주부윤(慶州府尹) 이정(李楨)이 김유신(金庾信)을 기리기 위해 선도산 아래에 처음 세웠다. 이정은 이퇴계의 의견을 따라 선도산 아래에 서악정사를 세워 김유신의 제사 및 교육을 위한 장소로 삼게 되었다. 이것이 서악정사(西岳精舍)이다. 이후 경주 유생들에 의해 홍유후 설총(薛聰)과 문창후 최치원(崔致遠)의 위패(位牌)도 합사하자는 건의가 들어오자, 이정은 다시 이퇴계와 의논하여 두 사람도 함께 모시게 되었고, 이퇴계가 '서악정사'라는 친필 현판을 써주었다고 한다.

인조 1(1623) 경주의 유학자였던 진사(進士) 최동언(崔東彥) 등이 부윤 여우길(呂祐吉)을 통해 조정에 사액(賜額)을 청하였고, 조정에서는 서악서원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폐쇄되지 않고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로 경주에서 옥산서원(玉山書院)과 함께 단 두 곳만이 존속했을 만큼 유서 깊은 서원이다.

 

서악서원의 여러 모습

 

서악서원 앞의 선도산 유적안내도

 

 서악서원을 나와 무열왕릉으로 갔다. 경주시 서악동 구릉의 동사면에 종렬한 5기의 대형 원분 가운데 가장 아래쪽에 위치한 무열왕릉(武烈王陵)196312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신라 최초의 진골 출신인 무열왕릉의 외형은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밑지름 36.3 m, 높이 8.7m이다. 밑둘레를 따라 비교적 큰 자연석을 사용하여 무덤의 보호석으로 드문드문 놓았으며, 능 앞에는 혼유석(魂遊石)이 있다. 경내의 비각에는 국보 제25호로 지정된 태종무열왕릉비의 귀부와 이수만이 남아있는데, 이수에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 새겨져 있어 흥덕왕릉과 함께 신라 왕릉 가운데 매장된 왕이 명확한 유이한 능이다. 발굴조사는 하지 않았으나, 형태는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으로 추정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다른 무덤에 비해 봉분장식이 소박한 편이다.

 

무열왕릉 입구에 있는 무열왕과 문명왕후의 이야기 판

 

무열왕릉 입구

 

 무열왕릉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바로 보이는 전각이 태종무열왕릉비(太宗武烈王陵碑)가 있는 전각이다. 무열왕릉에 있는 신라 중기(7세기)에 건립된 신라 태종무열왕의 능비(陵碑)19621220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25호로 지정되었다.

 귀부(龜趺)의 길이 약 3.33미터, 2.54미터, 이수(螭首)의 높이 약 1.1미터이다. 비신(碑身)은 현재 없고 귀부와 이수만이 남아 있는데 화강석으로 되었으며, 귀부는 장방형의 기석(基石) 위에 얹혀 있다. 이수는 6()이 서로 능을 향해 구부리고 있는 모습으로 윤곽을 이루는데, 웅장한 구 자세는 당시 석조 예술의 뛰어난 솜씨를 잘 보여준다.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 의하면 이 비는 무열왕이 승하한 661년에 건립되었으며, 이수 중앙에는 김인문(金仁問)의 글씨로 전하는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는 글이 전서(篆書)로 양각되어 있으나 정확한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태종무열왕릉비

 

태종무열왕릉

 

 무열왕른 바로 뒤에 서악동 고분군이 있다. 서악동 고분군(西岳洞 古墳群)은 경주시 서악동 무열왕릉 바로 뒷편의 구릉에 분포하는 4개의 대형 무덤을 가리키며, 1964829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이 고분들은 경주분지의 대형 고분과 비슷한 형태로 둥글게 흙을 쌓아 올린 원형봉토 고분이다. 아직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내부구조를 알 수는 없으나, 봉분이 거대한 점, 자연돌을 이용해 둘레돌을 두른 점 및 무열왕릉보다 높은 곳에 있는 점, 고분들이 일렬을 이루며 능선의 상위에서 하위로 조영되었을 가능성과 일렬을 이룬다는 것은 직계의 가계를 의미하고 있을 가능성 등을 고려하면 학계 일부에서 왕릉으로 추측하나 아직 증거는 불충분한 상태라 하겠다.

 무덤의 주인에 대해 첫 번째 무덤은 경주 법흥왕릉, 두 번째 무덤은 경주 진흥왕릉, 세 번째 무덤은 경주 진지왕릉, 네 번째 무덤은 문흥대왕릉 등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또 이 고분들의 북서에 있는 선도산성 안 곳곳에서도 고분들이 조사되었고, 동편의 왕릉들을 감싸고 길게 뻗는 능선들과 남편의 대구-경주간 국도가 통과하는 소태고개의 좌우 능선들에도 많은 고분들이 분포하고 있다.

 

서악동 고분군

 

서악동 고분군에서 내려보는 무열왕릉

 

 무열왕릉의 앞 길을 건너면 무열왕의 직계 자손인 김인문(金仁問)의 묘와 김양(金陽)의 묘가 자리잡고 있다,

 

 김인문의 묘 앞에는 서악동 귀부라고 일컫는 비석이 있다. ()김인문묘 옆에 위치한 귀부는 193112월 경주 서악서원(西嶽書院) 누문 근처 땅속에서 발견되었다. 발견될 당시 비석은 두 조각으로 쪼개진 채 상당히 풍화되어 있었다. 현재의 두께는 18 cm, 1m, 높이는 75 cm 정도이며 원래 서있었을 당시의 크기는 대략 폭 4자 이상, 높이는 6자 정도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비석의 보존상태는 완벽하지 않아 겨우 원형의 3분의 1 정도 남은 비면이지만 400자 이상의 글자가 있다. 글자 중엔 누군가에 의해 고의로 글자를 쪼아서 훼손시킨 흔적도 있다.

 묘비의 절반 이상은 결손되고 마멸이 심해 글자를 알아보기 힘들다. 다만, 비면에 남아 있는 글귀로 미루어보아 김인문묘비로 추정된다.

 

서악동 귀부

 

 귀부를 지나면 김인문의 묘가 나타난다. 김인문묘(金仁問墓)는 신라 문무대왕의 친동생 김인문의 묘는 198284일 경상북도의 기념물 제32호로 지정되었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책을 많이 읽었고 특히 글씨를 잘써 태종 무열왕의 비문을 썼고 활쏘기와 말타기에도 능하였다. 또한 넓은 식견과 훌륭한 재주와 솜씨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외교술에 능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 당나라에게 신라 측 협조사항을 받아내는데 큰 공을 세워 신라의 삼국통일에 큰 역할을 하였다. 당나라에서 관직을 지내다가 효소왕 3(694)에 죽었다. 당 고종은 그의 시신을 호송하여 신라로 보냈으며 효소왕은 그에게 태대각간(太大角干)의 벼슬을 내렸고 서악에서 장례를 치르게 했다. 특별한 시설이 없이 높이 6.5m의 흙으로 높이 쌓아 올린 원형봉토분이다.

 

김인문의 묘

 

 김인문의 묘 바로 뒤에 다소 작은 묘는 김양의 묘다. 김양은 신라 45대 신무왕 때의 공신이며 무열왕의 9대손으로 알려져 있다. 봉분은 별다른 특징이 없는 흙무덤이다.

 

김인문과 김양의 묘

 

멀리 보이는 고분들

 

 이곳을 벗어나 효현동 삼층석탑과 서악동 마애여래삼존입상을 찾아가려고 했으나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무열왕릉 입구에 표시가 한번 있고 주변을 돌아다녀도 다른 이정표가 없어 찾을 수가 없었다. 시간도 많이 지났기에 이것도 내가 볼 정도를 벗어난 것으로 생각하고 다음을 기약하고 그냥 집으로 향한다.

 

 오늘의 탐방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는 금장대다. 경주를 찾는 사람은 꼭 이 금장대를 보기를 바란다.

경주6 - 남산지역, 서남산 일대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동남산을 갔다와서 친구도 만나고 사람이 살아가는 일상의 일을 처리하느라 사나흘이 지나 다시 남산으로 향했다. 오늘은 서남산 일대를 순례하듯이 느긋하게 걸어 볼 생각이었다. 불국토를 구현한 신라의 자취를 종교적인 느낌으로 경건하게 돌아볼 마음으로 집을 출발하여 경주로 가서 다시 문천 옆에 있는 윤경렬 기념관에 갔다. 저번에 보지 못했던 기념관 내부를 간단히 구경하고 나와서 문천교를 지나 저번에 갔던 동남산의 반대 방향인 서남산 삼릉가는 길로 걸음을 옮겼다.

 

윤경렬기념관 내부

 

 기념관을 구경하고 나와 문천교쪽으로 걸음을 옮기니 윤경렬 고택에서 차를 한잔하고 가라고 부른다. 그러나 사양을 하고 내가 갈 길로 걸음을 옮겼는데 지금 생각하니 차 한잔을 마시고 천천히 가도 좋았으리라 생각이 든다.

 

문천교 건너 잔치국수 집

 

 길을 따라 조금 걸으니 '해맞이 마을'이라는 표석이 보인다. 최햇빛님이 세운 것으로 순수힌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살려서 지은 것으로 정감이 갔다.

 

해맞이 마을 표석과 정자

 

 길을 따라가니 최치원의 고운대가 나오고 그 위에는 '상서장'이 있다. 상서장 (上書莊)은 신라 말엽의 뛰어난 문필가 최치원(崔致遠)이 머무르면서 공부하던 곳이라 전한다. 상서장이라는 이름은 이 집에서 왕에게 상서를 올렸다는 데서 유래한 듯하다. 1984년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현재 영정각 3, 상서장 5, 추모문 3, 수호실 3칸으로 구성된 3동으로 되어 있으며, 1874(고종 11)에 건립된 비가 있다. 지금은 최치원의 초상화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고 있다.

 

고운대

 

상서장의 여러 모습

 

 상서장에서 '김호장군 고택'을 찾아가는 길은 큰 길을 따라가다가 터널이 나오면 터널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계속 가면 된다. 이정표가 없어 다소 당황스럽지만 야트막한 산길만 따라가면 나오니 그냥 한가하게 걸어가면 된다.

 

올레길 표시

 

이정표

 

 경주 월암 종택(慶州 月菴 宗宅)으로도 불리는 김호장군고택은 17세기전후에 세운 것으로 추정하며 집터는 신라시대 절터였다는 설이 있는데, 주변에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여러 석조물이 있고 마당의 우물돌은 지금까지도 사용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김호장군의 후손이 살고 있는 집으로 현재 14대 종부가 관리하고 있는 중요민속문화재 34호로 지정된 고택이다. 197718일 대한민국의 국가민속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되었다.

문화재 지정 당시 명칭은 '경주탑동김헌용고가옥(慶州塔洞金憲容古家屋)'이었으나, 임진왜란때 의병장으로 순국한 김호 장군(?1592)의 고택임을 감안하여 경주 김호장군 고택'으로 명칭을 변경(2007.1.29)하였다가, 2017228일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월암(月菴) 김호의 종택임을 감안하여 '경주 월암 종택'으로 문화재 지정명칭이 변경되었다.

 

 

 월암종택은 문을 열어 놓아 관광객이 드나들도록 개방해 놓았기에 안으로 들어가 보니 화려하지는 않지만 무언가 기풍이 넘치는 위엄이 느껴지는 집이었다. 사람이 살고 있는 모습이 보여서 잠간만 둘러보고 나와 주변을 돌아 보았다.

 

월암 종택

 

 월암종택 조금 옆에 있는 집에 '누비장 무형문화재'라는 표지가 있다. 누비장 (縷緋匠)은 일반 바느질은 물론 누비는 기술을 겸한 특수한 장인이다. 누비는 옷감의 강도와 보온을 위해 사용된 기법으로 우리나라에서 누비가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고구려 고분벽화 감신총(龕神冢)의 누비갑주나 다른 기록에서 보면 이미 삼국시대부터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누비는 기법이 단순하고 쉽지만 세탁 후 바느질 모양이 틀어지지 않고 솜에 의해 시접 자국이 생기지 않아 실용적이다. 근대 이후 손누비는 대중화되지 못했고, 1910년 이후에는 재봉틀의 사용으로 기계 누비가 유행하기도 하였다. 누비장은 1996년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고 김해자는 1996년 중요무형유산 기능보유자로 지정받아 생전에 활발히 홛동하였다.

 

누비장 김해자 표시

 

 이곳에서 일성왕릉으로 가는 길에 배씨문중의 경덕사라는 사당이 보이고 마을 뒤산으로 올라가니 일성왕릉이 나타난다.

 

 일성왕릉(逸聖王陵)1969827일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경주 남산 서쪽 기슭의 약간 경사진 지형을 이용하여 마련하였고 그 상단에 봉분(封墳)이 있다. 상당한 규모의 대형 분묘여서 일반 서민의 무덤이 아님을 곧 알 수 있으나, 일성왕의 장지에 관한 기록이 없어 구전(口傳)에 의하여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제도상으로 보아 특이한 점은 없다.

 일성왕은 <삼국사기>에는 제3대 유리왕의 맏아들로, <삼국유사>에는 제3대 유리왕의 조카 혹은 제7대 지마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일성왕은 농토를 늘리고 제방을 수리하여 농업을 권장하였으며 민간에서 금, , 주옥의 사용금지를 하는 등 백성을 위한 정치에 주력하였다.

 

경덕사

 

일성왕릉

 

여러 곳을 가리키는 이정표

 

 일성왕릉을 내려와 남간사지 당간지주로 향했다. 남간사지 당간지주(南澗寺址 幢竿支柱)는 탑동 남간사지에 있는 당간지주로 198739일 보물 제909호로 지정되었다.

 

 이 당간지주는 남간사의 옛터에서 약 500m 떨어진 논 가운데에 세워져 있다. 논을 경작하면서 지주의 아래부분이 약 50cm정도 드러나 있으며, 바닥돌은 없어진 상태이다. 기단부가 없어서 기단 위에 당간을 세우던 받침돌도 찾아볼 수 없다. 지주 안쪽 면에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구멍을 세 군데에 뚫어 놓았는데, 특히 꼭대기에 있는 것은 십()자 모양으로 되어 있어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이다.

원래 산재되어 있는 당간지주의 대부분이 특별한 장식이 없지만 이 남간사지 당간지주는 소박하고 간단한 형태의 보존된 상태도 양호한 통일신라 중기의 작품이다.

 

남간사지 당간지주

 

 

 이곳에서 나정쪽으로 조금 내려가니 육부전이 나온다. 과거 양산재로 불렸던 육부전은 신라 건국 이전 서라벌에 있었던 6부 촌장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기원전 57년 알천양산촌, 돌산고허촌, 취산진지촌, 무산대수촌, 금산가리촌, 명활산고야촌의 6부 촌장들이 알천 언덕에 모여 알에서 탄생한 박혁거세를 신라의 첫 임금으로 추대하였다. 이후 신라 3대 왕인 유리왕이 이들의 건국 공로를 기리기 위해 양산촌은 이 씨, 고허촌은 최 씨, 진지촌은 정씨, 대수촌은 손 씨, 가리촌은 배 씨, 고야촌은 설 씨로 각각의 성을 내려 이들이 각 성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전한다. 육부전 홍익문 안에는 주건물인 입덕묘가 세워져 있는데, 이 공간은 제례가 있는 날을 제외하고는 일반에 개방하지 않는다고 한다.

 

육부전 전경

 

 육부전 바로 밑에 박혁거세의 탄생설화가 서려 있는 나정이 있다.

 

 탑동에 있는 나정(蘿井)은 <삼국유사> 1 기이 제1편에서 박혁거세 탄생 설화가 있고, 삼국사기에 따르면 2대 왕 남해 차차웅 3(서기 6)에 이곳에 시조묘를 세웠고, 이후에 이 자리에 신궁을 세웠다고 한다.

 19751120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2002년에 전각과 초석들을 두른 담장 일부가 허물어져 보수할 필요가 생겨 발굴조사작업을 하였다. 본디 그 이름대로 우물()이 있었다고 추정했으나, 2002년에 발굴을 시작한 후, (기존에 우물 터라고 생각한 자리가 아닌) 다른 자리가 원 우물 터라는 주장과 처음부터 우물이 없었다는 주장이 나왔다. 발굴단은 다른 자리가 원 우물 터라고 판단하고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문무왕 때 이 자리에 신궁을 새로 만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사 결과 한 변이 8 m, 지름이 20 m 정도 되는 8각 목조건물을 세웠던 흔적인 초석 50여 개와 둥근 돌기단의 흔적이 나왔다.. 출토된 '의봉 4(679)'이란 명문이 씐 기와로 신라의 유적임도 확인하였다. 이로써 나정에 신궁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한다.

나정의 여러 모습

 

포석정 앞에 있는 경주 여행 안내판

 

 나정을 지나 제법 걸어가서 포석정으로 갔다. 경주를 자주 왔으나 포석정은 정말로 오랜만에 다시 보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경주는 올 때마다 모습이 바뀐다. 유적지 주변은 하루가 다르게 관광객의 편의를 맞추고 있다. 포석정에 들어가려니 안내인이 사정상 동영상상영이 중단되었고 포석정에 물도 흐르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포석정만 둘러 보기로 하였다.

 

 포석정(鮑石亭)은 배동에 있는 신라의 별궁이 있던 자리로, 사적 제1호로 건물은 없어지고 석조구조물만 남아 있다. 자연환경을 최대로 활용하고 주위의 아름다운 경관에 인공적인 기술을 가미하여 이룩한 조화미는 신라 궁원기술(宮苑技術)의 독특한 면모를 보여 주고 있다고 평가된다. 신라 시대에 유상곡수(流觴曲水)의 연회를 행하던 곳이다. 하지만 최근 연회를 행하던 장소보다는 의식이 행해졌던 곳이라는 설이 더 힘을 받고 있다. 학자들은 후백제의 견훤이 포석정에 군사들을 이끌고 침입한 것이 포석정이 연회를 행하던 곳으로 불리게 된 것과 다소 연관이 있다고 추측하고 있다.

 

실내의 포석정 모형

 

포석정지

 

 포석정을 돌아보고 벤치에 앉아 가지고 다니는 커피와 빵으로 간단하게 간식을 먹고 주변에 있는 지마왕릉으로 향했다.

 

신라 제6대 지마왕(재위 112~134) 릉은 포석정에서 약 200m 떨어진 남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으며 봉분은 밑둘레 38m, 높이 3.4m로 크지 않은 규모로 굴식돌방무덤으로 추정되고, 무덤의 입지조건이나 봉분의 형태 등으로 볼 때 통일신라 때 무덤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경사를 이용하여 높은 곳에 안치하였으며, 아무 표지가 없고 능 앞에 혼유석이 있으나, 최근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지마왕릉

 

곳곳에 보이는 삼릉 가는 길 안내도

 

소나무 숲길

 

 지마왕릉에서 옆으로 나 있는 숲길을 따라 걸어가면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의 안내도가 나오고 옆에 망월사가 나온다. 망월사 안에 삼존입상이 있는 줄로 생각하고 절에 들어가 찾으니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스님에게 물으니 친절하게 있는 곳 주변까지 안내를 해 주엇다. 망월사 경내가 아니아 뒷쪽 언덕에 있었다.

 

석조여래삼존입상 안내도

 

망월사 석탑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拜洞 石造如來三尊立像)은 남산 기슭 내남면 용장리에 있는 삼국 시대 신라의 석조 여래 삼존 입상이다. 경주 남산 기슭에 흩어져 있던 것을 1923년 지금의 자리에 모아 세웠다.

1963121일 보물 제63호 경주배리석불입상(慶州拜里石佛立像)으로 지정되었다가, 2010825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이 석불들은 기본양식이 똑같아 처음부터 삼존불(三尊佛)로 모셔졌던 것으로 보인다. 조각솜씨가 뛰어난 다정한 얼굴과 몸 등에서 인간적인 정감이 넘치면서도 함부로 범할 수 없는 종교적 신비가 풍기고 있는 작품으로 7세기 신라 불상조각의 대표작으로 평가된다.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拜洞 石造如來三尊立像)

 

삼존입상 옆의 삼불사 석탑

 

 

 망월사는 배동에 자리한 대한 불교 원효종 사찰이며 원효종의 중요한 사찰로 꼽힌다. 오랜 역사와 위상에 비해 소박한 사찰이며 대웅전, 요사채가 있으며 연못 안에 놓인 불탑인 연화탑이 인상적이다. 인근에는 삼불사와 배동삼존여래입상이 있다.

 지금은 폐사된 옛 신라시대 사찰 선방사지에 있는 망월사와 삼불사, 배동삼존여래입상 세곳을 선방골이라 부른다.

 

 삼존입상과 망월사를 지나 계속 숲길을 걸어가먀 삼릉이 나온다.

 

 배리삼릉(拜里三陵)은 경주 남산의 서쪽 기슭에 동서로 3개의 왕릉이 나란히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밑으로부터 신라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 등 박씨 3왕의 무덤이라 전하고 있으며, 무덤은 모두 원형으로 흙을 쌓아올린 형태를 하고 있다.

 배동 삼릉의 주인공이 신라의 박씨 3왕이라 전하고 있지만 확실한 기록은 없고 신라 초기의 아달라왕과 신덕왕, 경명왕 사이에는 무려 700여년의 차이가 있어 이들의 무덤이 한곳에 모여있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리고 신라 초기에는 이와 같은 대형무덤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었다.

 

남산일원 설명

 

삼릉

 

 삼릉을 지나 숲길을 걸어가면 오래된 돌다리가 나오고 다리를 건너면 경애왕릉이 나온다. 왕릉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하다.신라가 완전히 망해 가는 시기의 왕이었기에 그런지 너무 초라하다. 경애왕릉(景哀王陵)1971428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무덤은 삼릉계곡 입구의 소나무 숲 안에 있으며, 밑 둘레 43m, 지름 12m, 높이 4.2m 규모로 흙을 둥글게 쌓은 형태의 평범한 원형토분이다. 무덤을 쌓은 석축도 없고 표식물(表飾物)은 오직 최근에 설치한  능 앞에 상석(床石)이 있을 뿐이다. 초라한 무덤을 감싸주는 송림이 주변에 울창하다.

 삼국사기에는 경애왕을 남산 해목령에 장사 지냈다고 되어있으나 해목령은 경애왕릉에서 떨어져 있어서 맞지 않으며, 해목령 가까이에 있는 지금의 일성왕릉을 경애왕릉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경애왕릉

 

도로변에 있는 삼릉 표석

 

 여기에 도착하니 어느 새 오늘의 여정을 끝내야 하는 시간이다. 그래서 길을 따라 내려가 남산관광안내소에 가서 다음에 갈 남산의 여러 자료를 얻었다. 지도와 안내책자, 남산을 소개하는 소책자 등을 얻어 요긴하게 사용할 생각이었다.

 

 삼릉골은 봄이 오면 돌아 볼 예정으로 다음을 기약하고 다른 남산의 여러 곳부터 또 걸어야겠다.

경주5 - 남산지역, 동남산 일대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제법 긴 날을 한파가 계속되다가 추위가 조금 진정되면서 겨울이라기에 너무 따뜻한 어느 날 남산을 돌아보려고 집을 떠났다. 남산은 너무 넓기에 하루에 다 돌아볼 수도 없고 모든 문화의 자취를 돌아보기에도 어려워 경주시에서 나온 안내도를 따라 먼저 동남산쪽으로 오늘의 여정을 정하였다.

 

 안내도에 의하면 경주박물관 옆에서 난 길을 따라가도록 되어 있지만 이정표가 하나도 없다. 이런 점이 상당히 아쉽게 생각되었지만 현대문명의 이기인 스마트폰으로 지도를 찾아 박물관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갔다.

겨울 박물관 옆 벌판

 

 박물관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제법 걸어가니 문천이 나타나고 양지마을이 나온다. 햇볕이 잘드는 마을이라 양지마을이라고 일컫는 곳에는  남산과 관련된 인물로 유명한 고청 윤경렬(古靑 尹京列1916~1999)기념괸이 있다. 선생은 남산의 수호신이 되고 싶다고 하실 정도로 남산을 사랑했다. 함경북도 주을 출신으로, 40년대 경주로 내려오시어 '마지막 신라인'으로 살며 경주 남산과 우리의 토우, 조각을 연구하고 만들었다. 그의 생가(고청정사)는 경주시 인왕동 남산 바로 앞 양지마을에 있으며, 고청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기념관을 구경하려고 가니 하필 월요일이라 문을 닫고 있어 내부는 돌아보지 못하고 외부만 보고 남산의 한 구역인 동남산으로 발길을 옮겼다.

 

 경주남산(慶州南山)은 경주시에 있는 불교 유적과 관련된 산으로 금오산이라고도 하며, 북쪽 금오산과 남쪽 고위산 사이의 산들과 계곡 전체를 통칭해서 남산이라 한다. 또한 남산은 신라 사령지(四靈地) 가운데 한 곳으로 <삼국유사>에 의하면, 이곳에서 모임을 갖고 나랏일을 의논하면 반드시 성공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남산에 얽힌 전설과 영험의 사례가 풍부하고 다양하다. 박혁거세가 태어난 곳이 남산 기슭의 나정이며, 불교가 공인된 528(법흥왕 15) 이후 남산은 부처님이 상주하는 신령스러운 산으로 존숭되어 왔다.

남산의 지세는 크게 동남산과 서남산으로 나뉜다. 동남산과 서남산에는 각각 16개의 계곡이 있고, 남쪽의 2개와 합하여 모두 34개의 계곡이 있다. 현재까지 발견된 유물과 유적의 숫자로 보면 서남산쪽이 동남산보다 월등히 많다. 수십 곳의 골짜기에는 100여 곳의 절터와 80여 구의 석불, 60여 기의 석탑 등 다양한 불교 문화재가 남아 있으며 신라의 불교 문화를 폭넓게 볼 수 있는 노천박물관으로 불리고 있다.

 김시습이 한국 최초의 소설 금오신화를 쓴 곳이 이 산에 있던 용장사다. '금오'는 남산의 주봉우리인 금오봉을 의미한다. 참고로 금오신화라는 이름은 '금오산의 신화'라는 뜻의 金鼇神話가 아닌, '금오산의 새 이야기'라는 뜻의 金鼇新話이다.

 이곳에 있는 남산성은 남산 해목령을 중심으로 사방 4되는 성으로서 진덕여왕 때 쌓았던 것을 문무왕 때 대규모로 수축하였다. 성벽의 높이는 일정하지 않고, 다만 지세에 맞추어 그 높낮이를 조정하였다.

 유적뿐만 아니라 남산은 자연경관도 뛰어나다. 변화무쌍한 많은 계곡이 있고 기암괴석들이 만물상을 이루며, 등산객의 발길만큼이나 수많은 등산로가 있다. 엄지손가락을 곧추 세워 남산을 일등으로 꼽는 사람들은 남산에 오르지 않고서는 경주를 보았다고 말할 수 없다.”라고 한다. , 자연의 아름다움에다 신라의 오랜 역사, 신라인의 미의식과 종교의식이 예술로서 승화된 곳이 바로 남산인 것이다.

 

문천의 겨울

 

 윤경렬 기념관을 지나 문천을 따라 내려가면 먼자 나타나는 이정표는 불곡마애여래좌상으로 이제부터 동남산의 불국토를 탐방하는 것이다. 길에서 제법 떨어진 산위로 올라가면 여래좌상이 나온다.

 

이정표

남산고분지구 표시

 

 산길을 제법 걸어 언덕을 넘어가면 고분지구가 나오고 길을 따라 내려가면 마애여래좌상이 나타난다.

 

 경주 남산 불곡 마애여래좌상(慶州 南山 佛谷 磨崖如來坐像)은 경주시 남산 동쪽 기슭 부처 골짜기의 한 바위에 깊이가 1m나 되는 석굴을 파고 만든 삼국시대 마애불 좌상으로, 1963121일 보물 제198호 경주남산불곡석불좌상(慶州南山佛谷石佛坐像)으로 지정되었다가, 2010825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이 석불은 높이 3m, 4m 정도 되는 바위에 높이 1.7m, 1.2m, 깊이 0.6m의 감실을 파 그 안에 새긴 것으로 불상의 높이는 1.4m 정도이다. 감실은 입구가 아치형으로 되어 있고 석굴의 느낌을 주는데 산죽이 무성한 대숲 사이 작은 바위 속에 새겨진 석불좌상은 조각양식으로 보아 고 신라의 것으로 보이며 현재 남아 있는 남산의 불상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 불상으로 인하여 계곡 이름을 부처 골짜기라고 부르게 되었다.

 

불곡마애여래좌상

 

 불곡마애여래좌상에서 탑곡마애불상군으로 가는 이정표를 따라 탑곡으로 갔다. 그런데 가는 길에 보이는이정표가 탑곡 혹은 탑골로 표기되어 있다. 물론 한자어 표기와 우리말 표기의 차이지만 하나로 통일하고 병기하는 것이 올바른 표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는 길에 울창한 대숲

 

 

 탑곡(塔谷)은 남산 전망대 부근에서 북동쪽으로 흐르는 계곡이다. 마애불상군이 있는 부처바위에 삼층석탑이 한 기 서 있는데, 그 탑 때문에 탑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탑골은 남산의 동쪽 면인 동남산에서 세 번째로 깊다. 남산 북쪽 기슭에 신라의 궁성인 반월성이 있고, 그 앞에 남천이 흐르고 있는데, 반월성 앞 남천을 동쪽으로 1.6킬로미터쯤 거슬러 가면 탑골의 계곡물이 남천으로 흘러드는 곳에 탑골마을이 있다. 마을에서 탑골 여울을 거슬러 150미터쯤 들어가면 옥룡암이라는 작은 암자가 있다. 이육사가 이곳에서 요양한 적이 있으며, 지금은 불무사라 이름을 고쳤으나, 여전히 옥룡암이라 부르는 이들이 많다. 이 암자의 산령각과 칠성각 사잇길로 들어가면 자그마한 대숲이 있고, 대숲을 지나면 마애불상군이 새겨진 바위가 나타난다.

 

곳곳에 보이는 유적 설명

 

 경주 남산 탑곡 마애불상군(慶州 南山 塔谷 磨崖佛像群)은 경주시 남산 탑곡에 있는 남북국 시대 신라의 마애불 여럿이다. 9미터나 되는 사각형의 커다란 바위의 네 면에 거의 빈틈없이 마애불상군의 만다라적인 조각이 회화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불상, 보살상, 스님의 조각상, 비천상 등 23구의 조상이 있을 뿐 아니라 9층탑·7층탑과 사자상, 보리수로 보이는 나무 등을 조각하여, 천상과 지상의 정토를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모두 암벽을 갈아 부조로 새긴 것이며, 남면에 입체 여래상 1구가 있다.

 1963121일 보물 제201호 경주남산탑곡마애조상군(慶州南山塔谷磨崖彫像群)으로 지정되었다가, 2010825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남산 탑곡 마애불상군의 여러 모습

 

옥룡사

 

 여기에서 하나 의아스러운 점이 보였다. 남산 탑곡 마애불상군을 가리키는 표시에 옥룡사 경내에서는 남산 탑곡 마애조상군이라는 옛 명칭으로 표시가 되어 있었다. 이런 점은 제대로 고쳐서 표시를 만들어야 하는데 무언가 조금은 미흡한 것 같았다. 그래서 경주시 관광안내국에 전화로 알려 주었다.

 

옥룡사를 내려오니 미륵곡석조여래좌상으로 가는 이정표가 보여 발길을 옮겼다.

 

이정표

 

 미륵곡 석조여래좌상(彌勒谷 石造如來坐像)은경주시 배반동 미륵골에 있는 보리사(菩提寺)에 있는 석불좌상으로 통일신라시대의 화강석제 불상이며 1963121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전체 높이 4m, 불상 높이 2.35m, 광배(光背) 2.7m이다. 얼굴은 둥글지만 풍만하지 않으며, 가는 눈과 날카로운 코, 뚜렷한 입에 침잠(沈潛)한 웃음이 8세기 신라인의 정신적 고고함과 비범한 조각솜씨를 보여준다. 1,300여년 전에 조성된 8세기 신라 불상의 세련된 불격(佛格)을 사실주의 조각으로 성공시킨 당대의 역작으로 높이 평가된다.

 

미륵곡 석조 여래좌상

 

보리사에서 보는 경주 일원

 

 미륵곡 석조 여래좌상을 보고 보리사 마애불상을 보려고 하니 제법 가파른 산길로 올라가야 했다. 산을 오를 준비도 하나도 갖추지 않아 포기를 하고 보리사를 내려와 길을 따라 걸으니 경상북도 산림환경연구소의 울창한 숲이 나오고 계속 길을 따라 가니 화랑교육원이 나온다.

 

경상북도 산림환경연구소의 울창한 숲

 

 화랑교육원(花郞敎育院)1971년 착공해서 1973530일에 준공된 우리나라 최초의 학생교육원으로 개원한 이래 화랑의 얼을 계승하여, 국가관을 확립해 바른 품성과 인격을 도야하기 위해 교원 연수교육과 청소년 수련교육, 재외 교포학생, 교육과 사관생도 교육 그리고 일반 대학교 학생들은 교육과 공무원 교직 등을 담당하고 있다.

 

 

 

 화랑교육원을 지나 조금 가면 헌강왕릉이나오고 조금 더 가면 정강왕릉이 나온다. 별다른 특징이 없고 다른 왕릉에 비하며 다소 작은 릉이다.

 

 헌강왕은 이름은 정()이며, 경문왕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문의왕후(文懿王后), 비는 의명부인(懿明夫人)이다. 875년에 즉위하여 886년에 승하할 때까지 12년간 재위하면서 문치와 내정에 힘썼다. 헌강왕릉은 1969827일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면적은 69,626이다.

 무덤 양식은 널길을 동벽에 편향해서 설치한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墓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헌강왕이 승하한 뒤 보리사(菩提寺)의 동남쪽에 장사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보리사를 기준으로 이에 해당하는 무덤을 헌강왕릉으로 비정하는 것이다.

 

헌강왕릉

 

 정강왕릉(定康王陵)1969827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보호구역이 356,400m2이고, 887(진성여왕 즉위)경에 조성되었다. 정강왕은 신라 제50대 왕으로 별로 치적이 없음에도 능의 형식이 선왕인 헌강왕릉의 것과 같은 것은 태평성세를 누렸기 때문인 듯하다.

 

정강왕릉

 

 정강왕릉을 내려와 통일전으로 가는 길에 굽은 소나무가 눈길을 끌었다. 우리나라 곳곳에 굽은 나무가 보이는 곳이 많지만 또 다른 자태를 나타내고 있었다.

 

굽은 소나무

 

 통일전에 도착하여 안으로 들어가려니 월요일이라 문을 열지 않았다. 그래서 안내원과 잠시 이야기를 하고 지도를 얻고 서출지로 향했다.

 통일전은 삼국통일의 정신을 계승하고, 다가올 남북통일을 기원하는 국민의 전당이다. 경내에는 태종무열왕, 문무대왕, 김유신 장군의 영정이 모셔져 있으며, 통일의 격전을 생생히 보여주는 기록화가 긴 회랑을 따라 전시되고 있다. 남산 답사 도중 잠시 호국영령을 참배하고 너른 잔디밭에서 쉬는 것도 좋을 듯하다.

 

통일전

 

 통일전 바로 옆에 서출지라는 연못이 있다. 서출지(書出池)는 남산동에 있는 삼국시대의 연못으로 신라 소지왕 때 이 못 근처에서 왕비의 비행(非行)을 알리는 봉투가 나온 곳이라 해서 서출지라 부른다. 1964년 사적 제138호 서출지로 지정되었다가, 2011년 경주 서출지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488년에 왕이 남산 기슭에 있던 천천정이라는 정자로 가고 있을 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더니 쥐가 사람의 말로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쫓아 가보라하니 괴이하게 여겨 신하를 시켜 따라 가보게 하였다. 신하는 이 못에 와서 두 마리의 돼지가 싸우는 것에 정신이 팔려 까마귀가 간 곳을 잃어버리고 헤맸다. 못 가운데서 한 노인이 나타났는데 그 노인이 어떤 봉투를 건네줘서 왕에게 그것을 올렸다. 왕은 봉투 속에 있는 내용에 따라 궁에 돌아와 화살로 거문고집을 쏘게 하니, 왕실에서 향을 올리던 중과 궁주가 흉계를 꾸미고 있다가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 못에서 글이 나와 계략을 막았다 하여 이름을 서출지(書出池)라 하고, 정월 보름날은 오기일(烏忌日)이라 하여 찰밥을 준비해 까마귀에게 제사지내는 풍속이 생겨났다. 서출지의 전설은 전통적 민속신앙 속에 새로운 불교문화가 전래되는 과정에 빚어지는 갈등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서출지 가에 있는 이요당은 조선시대의 정자이다. 조선후기의 학자 이요당(二樂堂) 임적(任勣:1612~1672)1664(현종 5)에 건립하였다고 한다. 서출지에 둘러싸여 있는 이요당 주변은 경주에서도 명승지로도 꼽힌다. 특히 한여름에 연꽃이 만발하고 배롱나무가 만화할 때 연못 풍경은 가히 환상적이라 할 수가 있다. 배롱나무들이 붉은 꽃을 피우고, 연못의 연꽃들이 피어올라 다양한 색채의 장관을 이루기도 한다고 전한다.

 

서출지와 이요당

 

서출지 옆의 무량사

 

 서출지에서 다시 길을 따라 가면  나오는. 남산동 동·서 삼층석탑(南山洞 東西 三層石塔)은 통일신라 시기에 조성된 2기의 석조 불탑으로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동탑 높이 7.04m, 서탑 높이 5.55m로 탑의 규모와 제작된 형식이 서로 다르게 생겼으며 동쪽과 서쪽에 마주하며 배치되어 있다. 남산 사지의 쌍탑 중 동탑은 모전석탑(模塼石塔)이고 서탑은 일반형 석탑이다.

 

남산동 동·서 삼층석탑

 

 

 여기서 칠불암가는 길을 따라 제법 가면나오는 이름도 조금 이상한 ()염불사지 동·서 삼층석탑(傳 念佛寺地 東西 三層石塔)은 남산동에 있는 삼층석탑 2기로 동탑의 높이는 583cm, 서탑의 높이는 585cm로 남산동 전 염불사지에 있으며 20221125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석탑이 위치한 장소는 8세기에 창건되어 12세기까지 운영된 사찰이 있었던 자리로 추정된다. 이곳에 위치했던 사찰의 명칭은 '염불사', '피리사', '봉구곡사' 등 다양한 명칭이 기록으로 전하고 있으나, 사찰의 명칭을 단정할 수 있는 결정적인 자료가 부족하여 전(: 전할 전) 염불사지로 명명되었다.

 

 석탑 건립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언제 석탑이 세워졌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석탑의 건축양식을 볼 때 8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에 촬영된 사진에 의하면 그때 당시에도 사찰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았고, 염불사지 대부분이 농경지로 사용되고 있었으며, 석탑도 모두 붕괴된 상태였다. 이후 여러 차례 발굴 조사를 거쳐 2007년부터 2009년까지 동탑과 서탑의 이전 및 복원 공사를 진행하였고, 2009년 복원이 완료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염불사지 동·서 삼층석탑

 

  경주 동남산 전경

 

 여기까지를 돌아보고 나니 벌써 시간이 많이 지났다. 오늘만이 날이 아니기에 다음날을 기약하고 통일전까지 걸어가서 버스를 타고 경주시외버스터미널로 가서 집으로 향했다.

 

 다음은 남산 삼릉골 주변을 돌아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