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鶴)의 오딧세이(Odyssey)

아들과 함께하는 러시아여행(5) - 블라디보스토크 시내 서쪽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5. 블라디보스토크 - 시내의 서쪽

 

 아침에 일어나니 비가 오고 있다. 오늘은 블라디보스토크를 구경하고 하바롭스크로 떠나는 날인데 비가 오니 새로운 감상에 젖는다. 아직 집을 떠난 지가 나흘밖에 되지 않으니 나그네로서의 객수를 느끼기는 빠르지만 여행에서 비를 만나니 무언가 착잡한 마음이다. 아침거리를 사러 슈퍼에 가는데 폭우가 쏟아졌다. 우리나라 여름의 소나기 같았다. 비를 맞으며 길을 가는데 거리에 물이 넘쳐흘렀다. 그럴 정도로는 비가 오지 않는데 하면서 길가를 보니 배수시설이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물이 계단을 그대로 흘러 내려 폭포수가 쏟아지는 것 같았고 하수시설이 전혀 되지 않은 것 같이 물이 거리를 휩쓸고 있었다. 잠시 내리는 비에도 이런데 비가 많이 오면 어떻게 하려고 배수시설을 제대로 만들지 않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마 이곳에는 비가 그렇게 자주 오지는 않는 듯하다.

 

 

 

비가 쏟아지는 블라디보스토크 거리

 

 먼저 블라디보스토크 역에 가서 미리 한국에서 예매해온 하바롭스크로 가는 열차표를 발권했다. 밤늦게 열차를 타야하기에 미리 발권을 하니 비로소 시베리아 횡단이 시작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러시아 기차역에는 거의 영어가 통용되지 않는다. 영어를 알아듣는 역무원도 거의 없다. 우리가 러시아어를 말할 줄을 모르기에 예매권을 내어주고 겨우 표를 받았다. 아직은 외국인에게 너무 불편하다.

 

 

러시아 기차표 : 대단히 복잡하다. 그래도 아주 내용이 자세하다.

 

 역에서 나와 오늘은 시내 서쪽 편을 돌아보기로 했다. 먼저 아르바트 거리로 갔다. 사실 이 거리의 이름은 아르바트 거리가 아니라, Admirala Focina 거리이다.

그럼에도 아르바트라고 부르는 이유는 모스크바에 있는 유명한 번화가 거리가 아르바트 거리인데 블라디보스토크에서도 이와 같은 거리를 만들게 되었는데, 여기에 우리나라의 KT가 투자해서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 거리에는 부산의 남포동 광복동 거리와 비슷하여 거리의 예술가들도 보이고 화장품 코너, 패션 옷집, 찻집, 거리의 분수 등등을 인공적으로 꾸며 놓아 젊은이들이나 가족들이 한가로이 거닐게 만든 거리이다. 이 거리에 지나가면 블라디보스토크의 축구장과 아무르만의 유원지 등이 이어져 새로운 시가지를 형성하고 있는 곳이다. 비가 그친 거리를 거닐며 축구장 쪽으로 가니 블라디보스토크와 자매결연한 세계의 도시들의 기념탑들이 쭉 늘어 서 있었다. 그 탑들을 구경해 보니 나의 고향인 부산도 보였다. 아마도 같은 항구 도시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듯하였다. 이 기념 조형물을 뒤로 하고 식당이 즐비한 곳으로 가니 아침에 내린 비로 식당들이 모두 침수가 되어 있었다. 이곳의 식당들은 대개가 반 지하로 만들어져 비가 오니 배수시설이 제대로 되지 않아 완전히 물에 잠겨 펌프로 물을 빼내고 있었다. 이곳에 인터넷에 소개된 유명한 식당이 있다 하여 왔는데 그 식당도 물에 잠겨 영업을 하지 않고 물을 빼내고 있었다. 나중에 저녁에 다시 와 보기로 하고 발길을 돌렸다.

 

 

 

 

아르바트거리

 

 

 

 

자매결연한 도시들을 기념한 조형물

 

 

 

비로 인해 건물에 가득찬 물을 빼내는 모습

 

 발길을 돌려 아무르만 유원지 쪽으로 가니 토요일 오후라 가족들의 나들이 모습이 많이 눈에 뜨이었다. 우리나 이들이나 인생을 사는 것은 매 한가지라고 생각이 들었다. 일주일 동안 직장에 나가 일하고 주말이면 가족들과 오붓이 나들이를 하는 모습은 세상 어디에나 있는 자연스러운 모습일 것이다. 주변을 구경하면서 한가로이 걷다가 블라디보스토크 요새박물관으로 갔다.(입장료 200루블) 제정러시아 때부터 1970년대까지 군사요새지였는데 지금은 박물관으로 바꾸어 놓은 곳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항구를 지키기 위해서 제정러시아 때 만들어진 요새였다. 이런 요새까지도 박물관으로 개조하여 구경거리로 만들어 놓은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요새박물관에는 제정러시아부터 1970년대까지의 여러 무기와 군인들의 생활을 보여주는 각종 전시물들이 있었다. 그저 한번 보는 것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이 박물관이 높은 곳에 있다 보니 이 요새박물관에서 일망무제로 바라보는 아무르만의 풍경은 이외로 좋았다.

 

 

 

유원지의 분수와 거리

 

 

 

 

 

요새박물관 입구와 외부 모습

 

 

 

 

 

 

 

요새박물관 내부 전시물(제정러시아부터 2차세계대전까지의 각종 자료를 전시) 

 

 요새박물관에서 내려오면 바로 아무르만과 유원지다. 날이 맑게 개였고 기온이 상당히 높아 유원지에는 사람들이 많이 나와 있었다. 아무르만을 한 바퀴 도는 보트들이 계속하여 손님을 태우고 바다로 나갔다가 돌아오곤 하였다. 한 20분 정도 걸리는 고무보트인데 요금이 일인당 400루블이다. 한가로이 아무르만의 해변에서 풍광을 즐기면서 아들과 이런 얘기 저런 얘기들을 하였다. 항상 어린 아들로만 생각했는데 이제 군에서 제대하고 자기 나름대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러시아여행을 하자고 한 이유가 아버지와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란다. 참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이제는 어린 아이가 아니다. 자기 인생을 설계하고 아버지에게 의견을 묻고 하는데 이 세대들이 가지고 있는 사고를 이제 내가 따라 가기가 쉽지 않았다. 그저 이야기를 들어주고 내가 생각하는 바를 간단히 말해 주는 정도로 만족해야 한다. 그래도 아버지라고 이야기를 살갑게 해 주는 아들이 너무 고맙게 느껴졌다.

 

해변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가지고 간 음식물로 점심을 간단히 때우고 유원지를 거쳐 아르바트 거리를 소요하면서 주말의 오후 풍경을 완상하며 보냈다. 비가 그친 주말이라 많은 젊은이들과 가족들이 나와 거리가 제법 북적거렸다. 유원지 옆에 있는 축구장에서는 프로팀은 아닌 것 같은데 축구 경기가 벌어지고 있었다. 제법 많은 관중이 응원하는 소리도 바깥으로 들리고 틈을 통해 보니 많은 관중들이 시합을 보면서 즐기고 있었다. 이제 이곳도 서구사회와 같이 자기가 응원하는 팀의 유니폼이나 응원 수건을 팔고 사는 사람들이 눈에 제법 보였다. 자본의 물결이 공산주의를 무너뜨리고 있는 듯했다.

 

 

 

 

 

 

아무르만을 시원하게 누비는 보트들

 

 

유원지를 거니는 러시아 사람들

 

 

 

 

공설운동장(축구장)과 유니폼과 응원용 수건를 파는 여인

 

 

 

갑자기 부산 버스가 나타났다.(중고 버스를 수출한 것으로 새로 칠을 하지 않았다)

 

 시간이 여유 있어 이곳에 도착하던 날부터 보려고 생각했던 미술관을 찾아 가기로 했다. 14세기에서 20세기 초 유럽의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었고, 따로 러시아 작품들을 한곳에 모아서 전시하고 있었다. 학생을 50% 할인하여 입장료를 받아 아들은 ISIC(국제학생증)을 제시하여 할인을 받았다. 러시아를 여행하는 학생들은 반드시 ISIC를 국내에서 발급받아 가기를 바란다. 매우 유용하게 사용된다. 러시아 각 도시의 박물관이나 미술관은 대부분 반값도 받지 않는다. 자국의 학생들에게 적용하는 할인을 정확하게 해 준다. 심지어 교통요금도 할인을 해 주는 곳이 있었다. 한국에서 발급비가 14,000원인데 그 몇 배의 가치를 가지는 것이 이 ISIC다. 외환은행에 가면 발급을 해 준다. 미술관 입장료는 200루블이었다.

 

 

 

 

미술관 건물과 관람표

 

 저녁이 되어 식사를 하고 하바롭스크로 떠나기 위해 오전에 들러 보았던 식당을 찾아가 보았다. 아침 일찍 온 비로 모두가 침수되어 있었는데 어느 새 물을 다 빼내고 영업을 하고 있었다. 이들에게는 이런 일이 종종 있는 것 같았다. 아침에 아들과 함께 둘러보았던 식당 앞에 가니 많은 우리나라 젊은 학생들이 있었다. 갑자기 무슨 학생들이 이렇게 많이 이 식당 앞에 있는지 궁금하여 이야기를 해 보니, 모 대학교의 학생들로 방학을 맞아 실습을 하면서 일본, 중국을 거쳐서 그리고 러시아에 왔다 하였다. 아마 실습 중에 각자가 식사를 해결하라고 한 듯 저녁을 먹으러 왔다고 하였다. 어떤 실습인지는 모르겠으나 세월이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학을 맞아 실습을 외국에서 하는 정도로 우리나라가 발전하였다는 사실이 뿌듯하기도 했다. 우리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은 방학이라야 농촌의 하계봉사활동이나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하여 학비를 마련한다고 노심초사하던 시대인데 지금은 외국에 실습을 하니 세상이 변해도 많이 변하였다. 아니 나도 러시아를 여행할 정도이니 참 많이 변했음을 실감할 수 있다.

 

 식당에서 이 집의 유명한 음식이라고 여행안내 책에 소개된 음식을 시키니 되지 않는다고 한다. 할 수 없이 다른 음식을 시켜서 먹었다. 아들은 불만이 대단했다. 우리가 동양인이라 불친절하다고..... 우리 주위에는 우리나라 학생들이 많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음식을 시키고 있었다. 일부는 그냥 식사를 하지 않고 나가고 일부가 남아 음식을 시키는데 그 학생들도 러시아 말을 못하는 것은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 중 한 학생이 여기는 손님이 왔는데 물도 안준다고 계속 불평을 큰 소리로 하였는데 러시아 종업원들이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기에 다행이었다. 러시아는 식당이나 찻집 어디에서도 우리나라와 같이 물을 그냥 주는 곳이 없다. 물도 반드시 돈을 지불하고 시켜서 먹어야 한다. 외국에 실습을 나왔으면 기본적인 생활 습관이나 그들의 풍습 정도는 미리 교육을 시켜서 나왔으면 했다.

 

 

 

 

 

 

식당 내부와 입구 간판

 

  저녁을 먹고 숙소로 돌아와서 샤워를 하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오늘 밤 늦게 본격적인 시베리아횡단열차의 첫 기착지인 하바롭스크로 가는 열차를 타야 한다. 우리는 여행계획을 짤 때 도시간의 이동인 시베리아횡단열차는 반드시 밤기차를 타기로 했다. 시간의 절약도 있고 기차에서 잠을 자게 되면 숙박비도 절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기차는 모두 모스크바 표준시를 사용한다는 것을 꼭 명심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모스크바와 자기가 있는 도시의 시차를 확인하여야 낭패를 당하지 않는다. 우리는 블라디보스토크 현지시간으로 21:00 기차를 예약했으나 기차가 연착하여 21:35분경에 출발하였다. 앞에서 이야기 한 대로 기차는 여러 가지의 객실이 있다. 우리는 6인실을 예약했기에 우리 좌석을 찾아 짐을 풀었다. 별로 불편하지 않는 공간이다. 잠을 자면서 가는 기차이므로 침구는 좌석위에 마련되어 있어 자유로이 꺼내어 사용하면 되었다. 그런데 승무원(차장)이 와서 무어라 하는데 말을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으니 답답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니 침구 덮개를 구입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무지해서 미처 예약을 할 때 덮개를 구입하지 않았던 것이다. 침구 덮개를 빌려 주는 제도는 상당히 위생적인 제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깨끗하게 세탁된 덮개 봉투에는 배게 덮개, 침구 덮개 2장, 수건 1장이 들어 있었다. 요금은 116루블이었다. 그런데 이 덮개를 하루에 사용하는 것인지 끝까지 사용하는 것인지를 알 수 없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자신이 기차를 타고 있는 동안에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기차를 내릴 때는 반드시 승무원에게 반납을 해야 한다. 상당히 합리적인 제도라고 생각했다. 하여튼 경험해 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다. 6인실은 모두가 개방되어 있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그냥 한 차량에서 함께 지낸다. 한 차량에는 약 70명이 함께 타고 있다. 열차는 거의 만원이다. 모두들 자신의 짐을 정리하고 익숙하게 침구를 깔고 잠을 청하고 있다. 나와 아들도 그들이 하는 모양을 보고 따라서 침구를 깔고 잠을 청했다. 기차 안에서 숙박을 한다는 것은 아득한 과거(1960년대)에 우리나라에 있던 일이다. 우리나라는 지금 기차에서 잠을 자면서 가는 열차는 없다. 기차는 어둠 속을 끝없이 달리고 있다. 어둠이 짙어가는 바깥을 내다보니 비로소 먼 여행을 한다는 실감이 느껴졌다.

아들과 함께하는 러시아여행(4) - 우수리스크 -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4. 한민족의 애환이 서린 땅 -우수리스크-

 

 아침에 일어나 보니 창가에 비가 온 흔적이 있어 아들에게 물으니 어제 밤에 뇌성을 동반한 폭우가 내렸다고 한다. 나는 잠이 들어 비가 온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아침 날씨는 맑게 개어 파란 하늘이 내 눈을 상쾌하게 하고 있다.

 

 오늘은 우리 민족의 애환이 서린 땅 우수리스크를 가기로 하였다. 우수리스크는 블라디보스토크 북쪽 약 112㎞ 지점, 한카호수 남쪽의 저지대에 위치하며, 동해로 흘러드는 우수리 강 지류에 자리하고 있다. 시베리아 철도와 하얼빈 무단 강(牧丹江)과 동녕(東寧)을 연결하는 철도와의 분기점으로, 극동지역의 경제적 중심지를 이루고 있는 산업도시이다. 그리고 우리 민족이 구한말부터 이주하여 독립운동을 하던 곳이며, 스탈린시대에 중앙아시아 쪽으로 강제 이주 당한 우리 동포들이 고르바초프시대에 다시 돌아와 고려인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에게는 슬픔과 희망이 한께 어울려 있는 곳이다.

 

 블라디보스토크 중앙역에서 우수리스크행 기차를 타고 가기로 하였다. 러시아 기차역은 도시 근처를 가는 역과 장거리를 가는 역을 구별하고 표를 파는 곳도 다르니 러시아를 여행할 때에 유의해야 한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약 2시간 30분을 달려 우수리스크에 도착했다. 이 열차는 우리나라 1950년대의 기차와 비슷하여 기차안의 좌석이 나무로 만든 좌석이고 좌석 표는 아예 없다. 하루에 3번을 운행하고 있으니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우수리스크를 갔다 오려는 사람들은 열차시간을 잘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수리스크로 가는 도중에 시베리아의 풍경이 언뜻언뜻 보였다. 광활하게 펼쳐진 땅으로 끝을 모르게 평원만이 보이고 산이라고는 볼 수가 없는 곳인데 가꾸는 사람이 없이 그냥 그대로 놓아두고 있었다. 러시아어를 전혀 모르는 나는 기차가 정차하고 사람들이 내리는 것을 보고 기차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우수리스크’하고 말하니 사람들이 그렇다고 손짓을 하여 내렸다.

    

 

 

 

 

 

 

 

우수리스크로 가는 도중에 차창으로 보이는 평원 

 

 

 

우수리스크행 열차 내부(손님이 없다)

 

 

 

 

우수리스크 가는 길에 펼쳐지는 광활한 대지

 

 

 

우수리스크 역

 

 우리의 오늘 여정은 ‘우정마을’(고려인 집단촌), ‘고려인문화관’ ‘최재형이 살던 집’ ‘이상설유허비’ 등을 찾아보는 것이다. 시간이 되는 대로 찾아갈 생각을 하고 역을 벗어나니 막막했다.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를 아무 것도 모르고, 또 우리가 찾아가려는 곳은 우리에게나 중요하지 러시아에는 별 중요한 곳도 아니니 안내도를 전혀 찾을 수 없었다.

 

 하여튼 먼저 ‘고려인문화관’을 가기로 하였다. 무턱대고 기차역에서 나와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며 걸었다. 주소도 정확하지 못해서 좀 헤매었으나 다행히도 찾아갈 수 있었다.

 혹시 개인 여행객으로 이곳을 방문하게 된다면 Amurskaya(아무르스카야) 63번지로 찾아가면 되고, 길을 모를 때는 러시아인들에게 (여기는 더 영어 안 됨) Қорейсқий Қулътурный Центр로 어떻게 가면 되냐고 물으면 된다.

 고려인문화관은 연해주에 살고 있는 고려인들의 삶이 기록되고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 구소련 스탈린시대 1937년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그리고 다시 돌아온 고려인(러시아에 사는 우리 동포들을 지칭하는 용어)의 역사가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고려인문화관은 고려인들의 고난과 시련의 역사와 앞으로의 희망을 함께 보여주려고 만든 곳으로 우수리스크뿐만 아니라 그 주위의 많은 고려인들의 행사에도 이곳을 이용하고 있다. 이 문화관에서 나는 우리세대에게는 학교에서 배운 적이 없었던 잘 알지 못하는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을 볼 수 있었다. 1945년 광복 후 이념의 대립에 의해 남북으로 갈라져 독립운동의 한 부분마저도 이념의 대립 때문에 무시되다시피 한 것이다. 그런데 명색이 ‘고려인문화촌’인데 고려인이 상주하는 것이 아니라 러시아인이 상주하면서 관람객이 오면 문을 열어 주는 것은 하나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었다. 왜 고려인이 없을까? 이 의문은 식당에서도 들었다. 이곳까지 왔으니 점심때도 되고 하여 아들과 함께 식당을 들어갔다. 우리 음식인 비빔밥, 된장국, 김치찌개 등등과 러시아 음식을 팔고 있어 아들은 비빔밥을 시키고 나는 된장국을 시켰는데 밥은 주지 않고 된장국만 주어서 밥은 따로 시켜서 먹었다. 그런데 이 식당의 주인은 역시 러시아인이고 일하는 사람들은 보아하니 고려인인 것 같았다. 참 기분이 묘했다. 러시아인에 의해 운영되는 ‘고려인문화촌’이라니......

 

 

 

 

고려인문화촌 입구와 전경(태극기가 보인다)

 

 

 

 

고려인문화촌 내부의 안내도

 

 

 

 

 

 

 

 

 

 

 

 고려인문화촌에는 고려인의 역사를 '씨앗' '불꽃' '들꽃' '평화'의 네 쟝르로 구분하여 전시하고 있다. 조선말에 정든 고향을 떠나 먼 이국 땅에 뿌리를 내리는 과정. 잃어버린 나라를 찾기 위해 목숨까지도 바친 독립운동.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다시 돌아와서 희망찬 미래를 건설하는 모습 등을 보여 준다.

   

 고려인문화촌을 나와 독립운동가인 ‘최재형’이 살던 집을 찾아 가기로 했다. 최재형은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를 걸쳐 활약한 연해주지방의 유명한 독립운동가이다. 최재형은 한말의 독립운동가로 어릴 때 부모를 따라 시베리아 노우키예프스크로 이주하였다. 상선의 선원과 장사를 통해 많은 돈을 벌어 젊은 한인을 선발하여 상트페테르부르그에 유학을 보내기도 했으며 러일전쟁 후 이범윤과 국민회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고 의병을 모집했다. 그리고 안중근 등과 함께 ‘동의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다. 안중근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의거의 실질적 주모자였으며, 안중근 의사의 서거 이후 그 가족을 돌보았다고 한다. 폐간되었던 《대동공보》를 재발행하고 한인학교를 설립하였다. 1919년 독립단을 조직하고 무장투쟁을 준비했다. 이듬해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 때 재러한인의병을 총규합하여 시가전을 벌이다가 붙잡혀 죽은 독립운동가로 1962년 독립훈장이 추서된 인물이다. 최재형이 살던 집도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없어 지도에 의지하며 7월의 땡볕을 쬐며 걸어 다녔다. 처음에는 길을 잘못 들어 헤매다가 우여곡절 끝에 살던 집을 찾게 되었다. Volodarskogo 38번지에 위치한 최재형 생가까지 휘적휘적 가는데 중간에 우수리스크 시민 공원(도라 공원)이 있었다. 공원은 보잘 것 없는 소도시의 조그마한 유원지이지만 그 공원 안에는 발해시대의 유물이라고 알려져 있는 거북상이 있었다. 그러나 설명문에는 금나라의 유물이라고 되어 약간은 실망했다. 이 우수리스크는 발해의 솔빈부라고 알려져 있는데 발해의 유물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아니라고 하는데 내가 무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 거북상은 한 쌍이라고 알고 있는데 하나만 있고 하나는 어디에 갔는지...... 아들이 말하기를 하바롭스크에 있다는 말이 있다 하였다. 우리나 이곳이나 유물은 그 자리에 좀 그냥 두는 것이 좋은 일인데 꼭 옮겨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하바롭스크를 갔을 때 그 지역 박물관에서 이 거북상을 보았다. 박물관 마당 한 구석에 있었다.) 이 공원을 나와서 오른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최재형이 살았던 집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집을 보고 나서는 실망뿐이다. 우리나라의 국력이 이것밖에 되지 않는지가 의문이다. 이 건물 벽면에 최재형이 살았던 집이라는 현판만 하나 있을 뿐이다. 그냥 전하는 말로는 이집 주인이 너무 집값을 고가로 불러서 우리 정부에서 구입하지 못하고 현판만 하나 달아 놓았다고 하는데 우리 독립 운동가를 기리고 후세에 그들의 정신을 전하는 교육의 장으로도 훌륭한 곳인데 돈으로만 따져서 구입하지 못했다니 안타깝다. 우리의 국력이 이 집 하나 구입하기가 어려운지......

 

 

 

 

우수리스크 시민공원(도라공원)

 

 

 

 

 

 

공원 안에 있는 거북상( 바석의 기단인 것 같은데 비석은 어디에??)

 

 

 

 

독립운동가 '최재형의 집'

 

 최재형의 집을 보고 난 뒤 잠시 망설였다. 고려인 우정마을을 가려고 하니 가는 길을 도저히 알 수가 없다. 120번 버스를 타고 가면 된다고 하는데 버스정류장도 찾을 수 없고 120번 버스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고, 또 불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가려면 지금 시간적 여유도 없는 것 같고 하여 아들과 상의하여 ‘우정마을’은 포기하고 ‘이상설유허비’를 찾아가기로 했다. 하지만 ‘이상설유허비’는 또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찾을 방법이 난감했다. 아들놈이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인터넷을 통해 대략적 위치를 알아내고 무작정 또 걷기로 했다. 7월의 따가운 햇볕 아래를 무작정 걸으면서 우수리스크의 유원지를 지나가니 사람도 차도 다니지 않는 길을 약 1시간 30분 정도 걸으니 표지판이 나타났다. ‘이상설유허비’이다.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는 수이푼강(솔빈강)가에 외로이 비만 서 있다. 너무나 처량한 모습이다. 이상설 그는 누구였던가? 내가 어설프게 설명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잘 알려진 독립운동가이다. 간단히 소개하면 그는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뛰어나고 총명하여 25세 때 갑오문과에 급제하고 27살에 성균관 교수와 한성사범학교 교관을 역임하였다. 그는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하여 상소투쟁을 펼치고 이후 만주와 연해주로 망명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면서 1907년 광무황제의 특사로 이준, 이위종과 함께 헤이그에 파견되어 한국 독립을 호소하였다. 그는 1917년 3월 2일 48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그는 임종을 지킨 동지들에게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임종을 지킨 이들이 선생의 유언을 따라 화장하여 그 재를 수이푼강에 날렸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이 러시아정부와 협의하여 수이푼 강가에 그의 유허비를 2001년에 세웠다.

 

‘최재형이 살던 집’ ‘이상설유허비’ 사실 어떤 의미가 있는 곳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의미를 제대로 알기나 할까?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여행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 몇 명이나 이곳을 찾아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아니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을 알기나 하는지가 의문이다. 사실 ‘이상설유허비’는 마음만 먹으면 쉽게 갈 수 있다. 버스노선이 있다고 하지만 기다리기가 너무 어렵고 하니 택시를 타고 수이푼 강 철교 조금 못 미쳐 가면 안내 간판이 보인다. 그리고 그 유허비를 보고 수이푼강을 구경하면서 철교를 건너가면 넓게 펼쳐진 평원이 보인다. 전해지기로는 옛 발해의 솔빈부 터라고 하는데 아무런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우리 역사에서 발해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저 여기가 우리 조상들이 한 때나마 살고 있었던 곳인가 하고 감회에 잠길 따름이다.

 

 

 

 

 

이상설유허비 가는 길과 주변의 들판

 

 

 

이상설유허비 근방의 표지판

 

 

 

 

 

이상설유허비

 

 

 

 

솔빈강(수이푼강) : 비가 와서 흙탕물이 흐르고 있다.

 

 

 

 

 

솔빈강 다리를 건너 옛 발해의 성터라고 하는 평원 : 지금은 아무런 자취도 없다.

 

 

 

 

 

도도하게 흐르는 수이푼강과 수이푼강 다리

 

 수이푼강 주변을 구경하고 다시 우스리스크 시내로 돌아오려는데 또 이 길을 하염없이 걷는다는 것이 아득했다. 그런데 마침 택시가 한 대 지나가고 있었다. 대뜸 택시를 타고 우수리스크역으로 가지고 했다. 그런데 택시에 미터기가 없었다. 아들과 나는 도대체 요금을 얼마나 지불해야 하는지 궁금하고 불안했다. 우리가 약 1시간 30분 정도 걸었으니 약 4km는 더 걸은 것 같은데 미터기도 없으니 외국에서 바가지나 당하지 않나하고 걱정했다. 역에 도착하여 요금을 물으니(물론 러시아어를 할 수 없어 계산기만 꺼내니 통했다.) 150루불(약 4,500원)이란다. 너무 놀랐다. 우리나라보다도 더 싼 것 같기도 하고 친절하고 속임이 없음이 너무 고마웠다. 한 가지 이야기를 한다면 어느 도시든지 정식으로 된 택시회사의 요금은 우리와 비슷했고 일명 바가지라는 것은 없었다.

 

 우수리스크역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오는 기차를 기다리며 역에 있는데 웬 한국인이 때를 지어 들어왔다. 웬 한국인이지? 하고 보니 김일성 배지를 가슴에 단 북한인들이다, 아마 러시아에서 노동을 마치고 귀국하는 듯하였다. 그들은 상당히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그들도 우리 동포인데 말 한마디 붙여 보지 못하고 그냥 보고만 있었다. 아니 약간의 경외심과 두려움도 있었었는지 모른다. 우리는 나와 아들 두 명뿐이고 이곳은 아직 공산주의 사회인 러시아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진 아픔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장면이었다. 우수리스크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오는 기차는 거의 만원이었다. 그런데 러시아인들이 참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승객 한 명이 3인용 의자를 가로 질러 떡 앉아서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비켜 주지 않는 모습이 곳곳에 보였다. 그리고 또 아무도 비켜 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우리 생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그리고 근교열차는 기차승무원이 중간 중간에 차표를 검사하는 것이 옛날의 우리나라와 비슷했다.

 

 

 

 

 

우수리스크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오는 도중의 아무르만 : 비가 그치니 사람들이 바닷가에 나와 일광욕을 하고 있다.

 

 한 가지 꼭 기억해야 하는 일은 러시아는 화장실 이용이 쉽지 않다. 길가에 많은 화장실이 있는데 모두 유료이다. 심지어 어떤 곳은 공공건물의 화장실도 유로이며, 공원 등은 말할 필요가 없이 유료다. 대개가 20루불(약 600원)로 만만치 않으니 알아서 처신해야 한다.

 

 

 

 

아들과 함께하는 러시아여행(3) - 블라디보스토크의 시내의 동쪽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3. 블라디보스토크 - 시내의 동쪽

 

 러시아에서의 첫날을 맞이했다. 한국에서도 아침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몸에 배여 일찍 잠을 깨니 주위의 모든 여행객들이 아직 잠을 자고 있다. 조용히 일어나 세면을 하고 나니 아들놈이 깨어났다. 아침을 어제 저녁에 간이슈퍼에서 산 요구르트와 빵 그리고 홍차로 간단히 때우고 숙소를 나서서 본격적으로 시내관광에 나섰다. 오늘은 블라디보스토크시내를 걸어 다니면서 구경할 생각이다. 인터넷을 통해 보니 우리나라에도 장마전선이 북상하여 날씨가 좋지 않다는 소식이 있었는데 이곳도 그 영향으로 날씨가 매우 흐리고 구름이 끼여 맑고 깨끗한 바다 풍경을 보지 못하게 될 것 같은 걱정이 들었다.

 

 오늘은 블라디보스토크 동쪽을 구경하기로 아들과 미리 의논을 했다.

먼저 블라디보스토크중앙역으로 갔다. 시베리아 횡단은 모스크바에서 출발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는 것이 정상 루트인 것 같았다. 왜냐하면 블라디보스토크중앙역에는 시베리아 횡단 종착점을 표시하는 기념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출발을 어디에서 해야 하는가는 우리에게 중요한 점이 아니다. 순서야 어떻게 되었든지 우리는 이곳을 출발점으로 삼고 여행을 시작할 것이다. 중앙역에는 시베리아횡단열차의 초기모형물이 있었다. 이 사람들이 시베리아횡단열차를 얼마나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중앙역은 우리나라 동해에서 배를 타고 오면 내리는 여객부두와 바로 이어져 있다. 배를 타고 오면 이점은 상당히 편리하다. 중앙역에서 내일 갈 예정인 우스리스크행 열차표를 사고(135루블) 역 근처의 슈퍼에서 물을 구입했다. 러시아에서는 유럽의 여러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물은 어디에서도 공짜로는 주지 않는다. 자기가 마실 물은 꼭 자기가 가지고 다니는 것이 좋다.(그런데 물 값이 장난이 아니게 비싸다. 그래서 우리는 대용량의 물을 구입하여 작은 물병에 넣어서 가지고 다니면서 마셨다.) 그런데 우리가 러시아어를 잘 모르고 구입한 물이 탄산수였다. 조심하여 구입해야 한다.

 

 

 

블라디보스토크 중앙역

 

 

 

 

 

옛 시베리아횡단열차와 시베리아횡단 표지석

(모스크바에서 9,288km임을 나타낸다)

 

 

 

구열차앞에서(오른쪽은 시베리아횡단 동판)

 

 역을 벗어나 오른쪽으로 시내를 계속 걸어가면서 시내의 풍경을 구경하면서 도착한 곳이 혁명전사광장(레닌혁명기념광장)이었다. 아직도 러시아에는 레닌을 신과 같이 숭배하고 있고 러시아혁명에 관한 유적이나 유물이 많이 남아 있다. 이런 면에서는 아무리 개방이 되었다 해도 아직은 이념적으로 공산국가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 광장에 상당히 많은 관광객들이 있었는데 대부분이 중국인이었다. 러시아를 여행하면서 많은 도시의 관광지에서 엄청난 중국인들을 보았다. 물론 중국이 인구도 많지만 그들이 해외여행을 다니는 수는 상상을 벗어나는 숫자였다, 그리고 그들의 여행 모습은 과거 일본인들이 때를 지어 다니던 모습보다 더했다.

 

 

 

 

 

 

혁명전사광장

 

혁명전사광장을 구경하고 다시 걸어서 간 곳이 C56 잠수함박물관이다.(입장료는 100루블) 잠수함박물관 주위에는 2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전몰장병위령탑(평화의 불)과 그들의 이름을 새긴 위령비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이곳뿐만 아니라 러시아 곳곳에서 이러한 기념비와 위령비를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조국을 위해 싸우다 죽은 용사들을 잊지 않고 항상 추모하고 있었다. C56 잠수함박물관은 잠수함의 내부를 개방하여 구조를 보여주는 것에 불과했다. 그래도 많은 러시아 사람들이 구경을 하고 있었다. 주변에는 니콜라이 2세가 시베리아횡단열차 개통을 축하하기 위해 이곳을 방문한 기념문과 막심고리키의 극장 등도 있었다. 그 밖에 여러 조형물들이 있었으나 러시아어를 읽을 제주가 없으니.....

 

 

 

 

 

잠수함박물관의 전경과 전몰장병 이름을 새긴 위령비

 

 

 

 

잠수함박물관 내부

 

 

 

꺼지지 않는 불꽃 -전몰장병 위령불꽃 -

 

 

 

니콜라이 2세 기념

 

 

 

막심고리키극장 안내와 앞의 휴식처

 

 잠수함박물관을 벗어나 블라디보스토크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는 독수리전망대를 찾아 가는 길에 점심 먹을 곳을 찾아보았다. 러시아도 개방이 많이 이루어져 패스트 푸드점이 눈에 많이 들어왔다. 그중 로얄 버그라는 간판이 붙은 집에 들어가 보니 우리나라의 패스트 푸드점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햄버거 가격도 우리나라와 비슷했다. 가볍게 점심을 러시아 햄버거로 먹고 독수리전망대를 향해 갔다. 우리는 철저하게 걸어서 찾아다니는 것을 원칙으로 했기에 지도를 보고 길을 찾아 갔다. 길을 찾아가는 도중에 보니 전망대를 올라가는 전동차(푸니쿨라)가 있는데 손님이 없어서 그런지 운행을 하지 않고 있었다. 독수리전망대는 명색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 하는데 고작 해발 210m의 높이다. 그래도 7월의 무더위에 걸어 올라가니 제법 땀이 솟았다. 독수리전망대는 과거에는 올라가서 사진을 찍는 것을 금지한 곳이다. 왜냐하면 과거의 블라디보스토크항은 군항으로 러시아 극동함대의 모항으로 군사적 보안을 위해 사진 찍는 것을 금지하였다. 하지만 요즈음은 자유롭게 사진을 찍을 수 있게 하였다. 이런 점은 러시아가 상당히 개방이 되었다는 점을 느끼게 하는 일이었다. 독수리전망대에서 사위를 둘러보면 블라디보스토크항이 환히 보인다. 2012년 APEC 정상회담을 기념하기 위해 놓은 금각교(golden horn bridge)는 항구를 가로지르며 이쪽 바닷가와 저쪽 바닷가를 연결해 주고 있었다. 조망대 위에는 러시아 문자인 키릴문자를 만든 키릴형제의 동상이 있고, 전망대 앞에는 세계 어디를 가도 보이는 살가운 연인들이 서로 사랑을 맹세하는 열쇠가 묶여 있었다. 도대체 어디에서 유래된 풍습이지.... 독수리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블라디보스토크항은 여느 항구와 별반 다를 바가 없는 항구이다. 항구도시인 부산에서 나서 자란 나에게는 부산보다 작은 항구가 그렇게 새롭게 보이지 않았다. 그저 이국의 항구일 뿐이다. 그래도 날씨가 맑으면 시원한 바다바람을 맞으며 항구의 경치와 시내의 풍경을 구경하겠는데 날씨가 장마전선의 영향으로 흐려 깨끗하고 맑은 경치를 볼 수 없어 조금 안타까웠다.

 

 

러시아 패스트 푸드점

 

 

 

 

 

 

 

독수리전망대와 키릴형제 동상, 블라디보스토크항 전경 

 

 독수리전망대에서 시원한 바닷바람을 쐬고 시내로 걸어 내려왔다. 시내와의 거리가 멀지 않다고 생각하며 걸어내려 오는 도중에 현대식의 고층건물을 건설하는 현장들도 보였고, 한국어로 식당 간판을 내건 식당(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도 보았다. 거리를 조금 걸어 지역사회박물관(Arsenyev Primorsky Krai Museum)이 보여 들어갔다.(입장료 200루블) 우리의 계획은 기본으로 각 도시의 박물관을 되도록 꼭 보고 간다는 것이었다. 아르세니예프 연해주 박물관은 1890년 개관한 박물관으로 여행가이자 현지 조사가인 아르세니예프의 이름을 따서 설립을 했다고 한다. 연해주(프리모르스키 주) 지역의 식생이라든지 고고학적 유물도 보관하고 있으며, 러시아가 이 지역을 점유한 이전,후의 개척 용품이라든지 그 역사에 관련된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 곳으로, 여러 차례 국제적 박물관 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박물관 건물의 앞쪽에는 삼성로고가 새겨져 있는 휴대폰가게가 있어 상가인줄 알았는데 그 뒤에 박물관이 있었다. 러시아박물관은 나이가 많은 할머니들이 많이 근무를 하고 있다. 이곳만 아니라 러시아를 여행하면서 간 박물관 모두에 할머니들이 근무를 하고 있었다. 노인들의 인력을 이용하는 것인지? 아니면 노인들이 돈벌이를 해야 하는 것인지? 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또 박물관 입장료는 왜 그렇게 비싼지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러시아 각지의 박물관을 많이 구경하였는데 우리나라의 박물관에 비하면 비교도 되지 않는 소장품을 가지고 있으면서 입장료는 우리나라보다 엄청 비싼 이유를 이해하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하지만 ‘목마른 놈이 우물 판다’고 구경을 해야 하는 것은 우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입장료를 지불하고 구경할 수밖에 없다.

 

 

 

 

박물관 안내 표지와 전경 

 

 

 

 

 

 

 

 

 

박물관 내부의 여러 전시물

 

 

박물관 건물의 전경

 

 박물관을 나와 그 옆에 있는 아르바트거리와 아무르만 유원지를 잠깐 구경하고 다음날 다시 오기로 하였다. 아들이 러시아 카페에 가보자 하여 갔는데 러시아 카페는 우리와 달라 음식을 파는 곳이었다. 물론 커피 등의 음료도 팔지만 주된 것은 음식이지 음료가 아니었다. 러시아를 여행하는 동안 카페라는 곳은 모두가 우리식으로 생각하면 음식점이라 여겨야 함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우리는 원래의 계획대로 나는 커피를 마시고 아들은 홍차를 마시고 휴식을 취했다. 러시아는 차 문화가 아주 발달하여 커피는 크게 보급되지 않아 아주 비쌌고 홍차는 러시아 사람들이 즐겨 마시는 음료로 아주 귀한 홍차가 아니면 값도 싸고 맛도 좋았다. 러시아를 여행하는 동안만이라도 커피 대신에 홍차를 마시면 좋을 것인데 커피에 이미 입맛이 들대로 들어 참 어려웠다. 이 이야기는 뒤에 또 할 것이다.

 

 오늘의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도중에 아침에 가 보았던 슈퍼에 가서 저녁거리와 내일 아침거리를 구입하였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여행자의 자세로 들어가는 것이다. 저녁도 내일 아침도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배낭여행자의 신세로 들어가는 것이다. 떠날 때부터 각오한 일인지라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당연하게 생각하며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하러 식당에 들어가니 또 다른 많은 외국의 나그네들이 있었다. 짧은 영어로 인사를 하고 저녁을 만들어 먹으며 물어보니 독일, 오스트리아, 캐나다, 미국 등등 세계 곳곳의 나그네들이 모두 자신의 음식을 만들어 끼니를 해결하고 있었다. 이런 풍경도 여행을 하면서 얻는 즐거움이리라 생각되었다.

아들과 함께하는 러시아여행(2) - 블라디보스토크의 첫날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극동의 유럽 - 블라디보스토크

 

 

블라디보스토크중앙역

 

 7월 16일 인천을 출발하여 블라디보스토크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러시아! 우리 세대에게는 구 소련이 더 친숙한 나라이다. 1884년 조러수호통상조약으로 조선과 러시아가 수교를 하였으나 1904년 러시아가 일본과의 전쟁에 패하면서 파기되었고 그 뒤에는 전쟁과 동서냉전으로 소련과는 수교가 이루어지지 않다가 1980년대 이후 동서데탕트의 효과로 우리도 구 소련과 1990년 정식으로 수교가 이루어졌다. 그 후 소련연방이 해체되고 러시아로 바뀌면서 우리와 교류가 활발해졌다. 그러다가 2014년부터 러시아가 무비자국이 되면서 더 편리하게 우리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아직 나이가 많은 세대들에게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는 나라이다. 젊은 세대에게는 이런 의식이 많이 없어져 그저 외국의 한 나라로 생각할 뿐이다. 우리세대에게는 러시아여행이란 젊은 시절 꿈도 꾸지 못하는 이야기였다. 하여튼 나는 러시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인천에서 약 두 시간 정도 거리였다. 시차도 우리나라와 두 시간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를 가는 방법은 강원도 동해항에서 배를 타고 가는 방법도 있으나 긴 여행을 할 것인데 처음부터 어렵게 여행을 시작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여 블라디보스토크까지는 비행기를 탔다. 블라디보스토크공항에 도착하니 우리나라의 작은 지방공항과 비슷했다.

    

 

 

 

 

블라디보스토크공항

 

 아들놈이 공항에서 스마트폰 러시아유심(가격 150루블)을 구입하여 자기 폰에 끼우는 사이에 공항 밖으로 잠시 나가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다시 공항에 들어오는데 무언가 이상했다. 공항직원이 무어라고 말을 하는데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잠시 상황을 살펴보니 공항에는 입구와 출구가 따로 있었다. 우리나라야 그런 것이 없으니...... 입구를 찾아 들어가려니 또 모든 짐 검사를 다시 해야 했다. 참 번잡하게 여겨졌다. 러시아는 아직 구 제도가 많이 남아 있어 공항이나 기차역에 들어갈 때 모든 짐을 형식적이지만 검사를 했다. 왜 이런 제도를 아직도 두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곳은 러시아다. 러시아의 규칙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아들놈이 제 애비를 잃어버릴까 걱정하여 나에게도 러시아유심을 끼운 구 스마트폰을 하나 주었다. 혹시 길을 잃거나 헤어져 있으면 러시아국내번호를 이용하여 통화를 할 수 있게 하였다. 또 심심하면 인터넷을 하고 놀아도 된다고 하였다. 시험을 해보니 모든 것이 잘되었다. 막내라고 어린 줄만 알았는데 애비 걱정도 해주는 다 큰 아이였다.

 

 공항에 들어와 아들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 시내로 가려고 보니 공항철도가 있었다.

 

 

 

공항철도입구와 자판기

 

 

 

공항철도 요금표와 승차권 자동발매기

 

 

 

 

공항철도와 내부

 

 이런 정보도 없이 ‘어떻게 버스를 타고 가나’하고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철도가 개통되어 있었다. 공항구내에서 바로 오른쪽에 철도역이 연결되어 편리하였다. 공항철도역에서 시간표를 보니 약 1시간마다 한편이 있었다. 공항에서 블라디보스토크 시내까지 지정석(비지니스)은 350루블, 일반석(스탠다드)은 200루블이었다. 열차를 기다리는 동안 음료수 자판기가 있어 사서 먹어 보았다. 우리나라와 비슷했다. 하지만 가격은 우리나라보다 비쌌다. 앞으로 이 이야기를 다시 하겠지만 대체로 러시아에서 음료수 가격은 우리나라보다 상당히 비싸다. 유의해야 한다. 일반석을 타고 약 50분이 걸려 블라디보스토크의 바다 아무르만 주변을 달려 블라디보스토크 중앙역 바로 옆에 있는 공항철도역에 도착했다. 열차는 일반석도 타는 사람이 별로 없어 빈자리는 많았다.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도중의 아무르만의 풍경

 

 

블라디보스토크시내

 

 숙소로 정한 호스텔이 철도역 근처에 있어 숙소에 배낭을 내려놓고 시내를 잠깐 나갔다. 블라디보스토크는 그리 큰 도시가 아니기에 내일부터 걸어서 구경하기로 하고 잠깐만 이국의 정취를 느끼기로 했다. 도시를 거닐다가 시장기가 돌아 밥을 먹기로 했다. 점심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저녁까지 있으니 배가 상당히 고팠다. 여러 곳을 찾아보다가 눈에 보인 집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아주 유명하다고 스스로 간판에 소개하고 있는 Porto Franco라는 레스토랑이었다. 1919년에 오픈한 집이라고 하는 보헤미안풍의 집이었다.

 

 그곳에서 ‘보르쉬’라는 수프와 ‘까르보나’ ‘파스타’ 등을 먹었는데 ‘보르쉬’는 우리나라 육개장과 흡사했다. 아들과 둘이서 적당히 먹고 후식으로 나는 커피를 마시고 아들은 홍차를 먹었다.

러시아에서의 첫 번째 먹는 저녁은 그런대로 만족했다. 또 가격도 그렇게 비싸다고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우리나라에서도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으면 그 정도는 지불해야 되지 않을까하는 정도였다.(1,450루블)

 

 

 

 

Porto Franco의 소개글과 입구 전경

 

 

 

 

 

브르쉬와 파스타, 커피와 홍차

 

 

 

Porto Franco 내부 모습

 

 

 

 

 

블라디보스토크 시내

 

 저녁을 먹고 첫날의 여정을 시작하면서 숙소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배정된 방에 들어가니 중국의 대학생들과 스위스의 젊은이를 만났다.(물론 뒤에 이야기하여 알게 되었음) 짧은 영어로 간단히 소통을 하였는데 특히 스위스의 젊은이는 3년을 계획으로 자전거를 타고 세계일주여행 중이었다. 모스크바에서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고 했다. 잠시도 중간에 내리지 않고 7박 8일 동안 기차만 타고 왔다고 하며, 중국을 거쳐 동남아시아와 호주 아프리카를 거쳐 갈 것이라고 자신의 여정지도를 보여 주었다. 그가 준 명함에 적혀있는 블로그를 검색한 아들이 말하기를 상당히 유명한 블로거라고 했다. 우리나라의 젊은이들도 입시나 시험이라는 중압감에서 벗어나 세계를 직접 배우는 일이 많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가슴에 새겨졌다. 그들과 잠시 이야기하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아들과 함께하는 러시아여행(1) -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고-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아들과 함께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고 한달간 시베리아를 횡단하면서 러시아를 여행하였습니다. 이제부터 그 여행기를 계속하여 올리겠습니다.

 

1. 여행을 준비하면서

<나의 여행 지도>

 시베리아!

 

 나이를 어느 정도 든 어른들에게는 동토의 땅으로 알려져 있고, 젊은이들에게는 엄청난 지하자원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개발이 되지 않은 땅으로 타이가 삼림과 툰트라의 평원으로 낭만의 땅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라. “꼭 여행해 보고 싶은 곳이 어디냐?”하고.... 아마 많은 사람들이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고 시베리아를 횡단해 보고 싶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시베리아횡단열차를 어떻게 타고, 어디에서 출발을 해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도 드물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오늘도 시베리아를 꿈꾸고 있다.

 

 지리적으로 시베리아를 정의하는 것은 쉽지 않다. 편의에 의해 태평양의 끝자락인 아시아 끝에서 모스크바 사이를 지칭하는데 우랄산맥을 기점으로 삼는 사람들도 많다.

 

 두산백과의 설명에 의하면 시베리아는 러시아 우랄산맥에서 태평양 연안에 이르는 북아시아 지역으로 러시아어로는 시비르(Sibir)라고 한다. 러시아 연방에서는 자연 ·인문 양면에서 우랄산맥 동쪽 사면에서 태평양 사면의 하천 분수령까지를 ‘시베리아’라고 부르고, 태평양 사면 부분을 ‘극동부’라고 하여 시베리아와는 명확히 구분한다. 또, 러시아 연방 국민경제회의의 경제지역 구분에서도 ‘넓은 의미의 시베리아’는 우랄, 서시베리아, 동시베리아, 극동지방 등으로 구분하고 있다. 즉, 러시아의 개념으로 시베리아는 동서 7,000 km, 남북 3,500 km, 면적 650만 km2이고, 극동지방을 포함한 광의(廣義)의 개념으로는 면적 1380만 7037km2으로 아시아 대륙의 1/4을 넘는다. 라고 말한다.

 

 이 광대한 대지를 열차를 타고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중간에 쉬지 않고 달리면 열차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7박 8일이 걸린다. 정확히 거리로 9,288km라고 러시아 국영철도회사에서 표시해 놓았다. 지구 둘레를 약 40,000km라고 하면 지구 둘레의 약 1/4을 기차로 여행하는 것이다. 웬만한 인내나 체력적으로 뒷받침이 되지 않으면 쉽게 도전해 보지 못하는 여행이다. 물론 중간 중간에 내려서 러시아 여러 도시를 구경하면서 간다. 그러면 시간이 더 많이 소요된다. 그래서 바쁜 사람들은 중간에 쉬지 않고 논스톱으로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는 사람들도 있다. 7박 8일 동안 열차만 타고 광활한 대륙을 건너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지금의 러시아와 수교를 하고 여행을 할 수 있게 되고 나서 나는 언젠가는 꼭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고 시베리아를 건널 것이라는 꿈을 꾸었다. 하지만 쉽게 실행에 옮길 수 없는 꿈이었다. 처음에는 러시아여행 자체가 어려운 시기였고, 또 직장에서 그 긴 시간을 휴가를 낼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2000년에 우리나라에 소개된 ‘러브오브시베리아’(2000년, 줄리아 오몬드, 리차드 해리스 주연)란 영화를 보고나서는 더욱 더 시베리아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그 장엄한 자연의 대지를 한번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하지만 항상 꿈을 꿀 수밖에 없었다. 차츰 나이가 들어가면서 실행에 옮기기에는 용기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세월이 지나가고 나이가 60이 넘어가면서 이제는 꿈으로만 생각하고 그저 모스크바나 바이칼호수 정도는 한번 가 봐야지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고 누가 말했던가?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러시아 여행을 하게 될 줄을......

 

 2014년 1월에 군에 가 있는 막내 놈이 휴가를 와서 갑자기 하는 말이 자기가 전역을 7월 14일에 하는데 전역을 하면 아버지하고 시베리아횡단기차를 타고 러시아여행을 하자고 제안했다. 물론 경비는 모두 아버지가 부담하는 조건으로. 不敢請固所願(불감청 고소원)이라 내가 아들놈에게 부탁을 해도 아들놈이 들어줄는지 모르는데 아들놈이 요청하는데 어찌 거절하랴. 옆에 있던 아내도 아무 말 하지 말고 무조건 가라고 했다. 그리고 자기도 가면 안 되는지 물었다. 아들의 말이 엄마하고는 중학교 때부터 함께 많이 여행했고 또 여행이 힘들 것도 같으니 아버지하고 둘이 가겠다고 했다. 아내도 선뜻 동의하여 감히 꿈으로만 여겼던 시베리아 횡단여행을 실행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아들이 아버지와 여행을 하면서 함께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은 기특한 욕망도 들어 있었다.

 

 이 계획이 잡히고 나서 실제 출발하는 7월까지는 계속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무더운 7월과 8월 한국을 떠나 시베리아를 여행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즐거운 몇 달을 보내며 준비를 했다. 준비래야 아들놈이 대부분을 계획하고 나는 그저 뒤에서 바라보며 따를 뿐이었다. 준비하는 도중에 러시아에 대한 여러 가지 정보를 수집하고 시베리아횡단열차에 대해서도 여러 정보를 수집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에 대한 정보는 생각보다 없었고 시중에 나온 러시아 여행기도 그저 감상문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아들놈이 휴가를 나오는 틈틈이 둘이서 함께 계획하고 준비를 하였다.

 

 그 계획의 대략적인 것은 다음과 같았다.

1. 여행일정은 7월 16일부터 8월12일가지로 예정하였다.

- 그 이유는 아들놈이 7월 14일에 전역하고, 돌아와서 복학을 하기 때문이었다.

2. 출발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작하여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간다.

3. 시베리아횡단열차는 6인실을 타고 간다.

4. 음식은 무조건 현지인들이 먹는 음식을 먹는다.

5. 숙박은 호스텔에서 한다.

6. 러시아 현지에서는 되도록 걷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둘 다 걷는 것은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7. 러시아 각 지방의 미술관, 박물관 등을 꼭 구경한다.

8. 되도록 모스크바의 볼쇼이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에서 발레를 관람한다.

- 왜냐하면 발레는 러시아가 최고이기 때문이다.

 

 이런 계획을 세우고 우리는 인천에서 출발하여 블라디보스토크까지는 비행기로 가서 여정을 시작하기로 했다. 우리의 여정은 블라디보스토크(우스리스크 포함), 하바롭스크, 이르크추크(바이칼 포함),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정하였다. 그리고 일정에 맞추어 항공권과 기차표를 예약하고 숙소를 예약하기로 했다. 항공권을 사는 것은 어느 시기에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었다. 여하튼 할인항공 사이트에서 항공권을 예약하고 기차표를 예약하기로 했다. 과거에는 러시아 철도를 예약하는 것이 스트레스를 받는 큰일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상당히 쉽게 할 수 있었다. 러시아가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을 개최하면서 러시아 국영철도사이트에 영어 안내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http://rzd.ru/에 접속하여 오른쪽 위에서 영어로 언어를 바꾸거나 또는 소치올림픽을 계기로 생긴 영문사이트- http://pass.rzd.ru/main-pass/public/en 에 접속하면 더 쉽게 이용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국내에서 우리 일정에 맞추어 모든 기차표를 예매를 할 수 있었다. 러시아 철도를 타려는 사람들은 국내에서 예매를 하는 것이 편리할 것이다. 괜히 말도 통하지 않는 러시아에서 열차표를 구입하려고 하지 마라. 러시아 기차역의 역무원들은 전혀 영어가 통하지 않는다. 자신이 러시아어를 능통하게 말할 수 있으면 모르지만..... 한 가지 덧붙인다면 열차는 모두 침대석이다. 러시아 열차는 한 열차 안에 2인 1실(룩스), 4인 1실(꾸뻬), 6인 개방형침대(쁠라찌까르뜨)가 있다. 2인실, 4인실은 방의 구조로 문을 잠그게 되어있고, 6인실은 완전히 개방형 구조다. 나는 오히려 6인실이 더 안전한 구조가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하여튼 열차의 침대는 2층보다 1층을 택하도록 하는 것이 여러 가지로 편리하다. 나중에 다시 말하겠다.

 

 열차표를 모두 예약하고 나서 이 일정에 맞추어 호스텔을 모두 예약하였다. 가난한 아버지와 아들이 하루 이틀도 아닌데 호화로운 호텔에서 잠을 잘 수는 없고 하여 하루에 우리 돈으로 25,000원 내외의 숙소를 구하였다. 숙소는 안전도를 우선으로 생각하면서 시내의 위치를 중시 여겨 여러 차례 사이트를 방문하면서 예약하였다. 결과적으로는 우리의 예약이 크게 잘못 되지 않았다고 우리는 돌아와서 생각했다. 아니 어느 정도 만족하는 숙소였다고 생각했다.

 

 또 볼쇼이극장에서 발레공연을 예매하려고 했는데 모르는 것이 죄라고 볼쇼이는 8월에는 모든 것을 멈추고 휴가를 가버린다는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극장을 수배해 보니 우리가 필요한 날에 발레 ‘지젤’을 공연한다고 했다. 그래서 한국에서 이 표도 미리 예매를 하고 갔다. 공연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이야기하겠다.

 

 

마린스키극장예매권

 

 이렇게 준비를 하고 난 뒤 아들놈이 마지막 휴가를 와서 떠나는 짐을 정리하고 아들놈은 부대로 돌아가 7월 14일 전역하고 나는 15일에 서울에 가서 만나 7월 16일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러시아 여행의 장도에 올랐다.

보수동 책방골목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부산 보수동에 헌책방가게가 밀집되어 있는 명물거리가 있다,

 

 부산 국제시장 부근의 보수동 쪽으로 나 있는 좁은 골목길에 헌책방들이 모여 있는데 이곳을 보수동책방골목이라 한다. 서점과 인쇄물이 홍수처럼 나오는 지금은 국내에 얼마 남아 있지 않은 헌책방 골목으로, 부산의 명물거리로 꼽힌다. 한국전쟁으로 부산이 임시수도가 되었을 때 미군부대에서 나온 헌 잡지와 만화, 고물상으로부터 수집한 각종 헌책으로 노점이 시작되었는데 그것이 보수동책방골목의 시초가 되었다.

 

 그 때는 먹고 살기가 어려워 많은 학생과 지식인들이 책을 내다 팔아 끼니를 해결하기도 했으며, 학업에 매진하는 학생들은 헌책을 구입하며 성황을 이루었다. 때때로 희귀본이나 값진 개인소장 고서도 흘러들어와 수집가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제는 과거와 달리 서점이 발달하였고, 또 인터넷의 발달 등으로 인하여 과거와 같이 책을 사고 파는 사람들보다 관광객들이 더 많이 붐비는 곳이 되었다.

 

 과거 1970년대 부산에서 대학을 다닌 대학생들은 보고 싶은 책을 찾아 서점의 먼지를 마시며 책을 뒤져가면서 책을 고르곤 했던 추억이 있다. 아마 부산의 대학생 중에 이 보수동 책방을 둘러보지 않은 학생은 없을 것이다. 또 그 때 하나의 즐거움으로 주인장과 안면이 많으면 그 때 당시에 숨겨 놓았던 외국의 도색 잡지들(플레이 보이, 허슬러 등등......)을 구해 보는 재미도 있었을 것이다,

 

 보수동책방골목번영회는 2005년부터 해마다 9월에 보수동책방골목축제를 열고, 홈페이지를 개설하여 적극적인 마케팅을 하고 있다. 보수동책방골목의 정기휴일은 첫째·세째주 일요일이다.

 

 보수동 책방골목을 보시며 옛날의 아련한 추억 속으로 빠져보자.

 

 

보수동 책방골목 표지석

 

 

 

책방골목과 일반주택이 함께 있는 곳

 

 

 

 

옛날과 다르게 책방골목도 변하고 있다. 카페가 들어서고 책방에서 팥빙수도 팔면서 문화공간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어린아이들이 좋아하는 인형을 그려 넣은 의자

 

 

 

 

책방골목에 여러 가지 먹거리를 파는 집도 있어 구경나온 젊은이들이 입맛을 돋우고 있다.

 

 

 

  

 

책방골목 안내도와 거리에 새겨진 명판들 - 우리 훈민정음과 작가들의 작품명이 새겨져 있다.

 

 

 

 

 

 

 

 

 

 

책방골목에 늘어선 책방과 책을 고르고 거리를 구경하는 사들의 모습 

 

 

 

대청동 올라가는 삼거리에 서 있는 책방골목 표지판

 

 

 

보수동 책방골목 입구와 책을 나르는 학생상

 

 보수동 책방골목은 나에게 추억이 어린 곳이다.

 

 1970년대에 부산에서 대학을 다닌 사람들은 모두 이 골목에 대한 추억이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이 골목을 자주 와서 책을 구경하고, 또 여가시간을 보내고 했다. 

그때는 보고싶은 책도 많았지만 책을 구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우연히 읽고 싶은 책을 구했을 때의 기쁨은 무어라 말하기가 어렵다. 지금의 젊은이들은 그 기쁨을 모를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보고 싶은 책을 마음껏 볼 수 있는데 예전만큼 책을 읽지 않는 것 같다. 전자매체가 발달하면서 우리가 책 읽기를 멀리하고 빨리 머리에 들어오는 영상매체만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한권의 책이 우리에게 주는 양식을 소홀히 하는 나 자신부터 반성하고 다시 책을 읽어 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이 보수동 책방골목을 되새겨 본다.

 

 

넓게 펼쳐진 백사장 - 부산 다대포 해수욕장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다대포에서 시원하게 여름을 보냅시다.

 

 다대포는 부산 사람이 아니면 잘 알지 못하는 곳이다. 하지만 넓게 펼쳐진 모래사장은 해운대보다도 더 넓고, 더 깨끗하다.

 또 물의 경사도 완만하여 어린 아이들이나 조용하게 바다에서 물놀이를 즐기려는 사람들에게는 안성맞춤이다.

 

 다대포는 부산시 사하구의 낙동강 하구 최남단에 있다.

낙동강과 바닷물이 합쳐지는 곳으로 모래톱이 형성되어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나 지금은 낙동강이 을숙도하구언으로 막혀서 더 이상 모래를 공급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파도에 실려 오는 모래가 성을 이루어 지금도 해수욕장 앞에는 새로운 모래톱이 만들어지고 있다. 잠시의 시간이 지나 가보면 새로운 모래톱이 생겨난 것을 볼 수 있는 곳이다.

 

 해수욕장 주변의 몰운대(沒雲臺)와 함께 주변 바다와 산의 경치가 아름다운데다가 곱고 부드러운 흰 모래사장이 전개되어 좋은 해수욕장을 이루고 있다.

 또한 역사의 고장으로사적이 있어 관광명소로도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에는 다대포진(多大浦鎭)이라 해서 국방의 요충지를 이루었다. 이곳 아미산(峨嵋山)의 응봉(鷹峰)에는 당시 봉화를 올렸던 봉수대가 남아 있다.

 

 철새 도래지인 을숙도와 감천동 항구 사이에 위치한 다대포는 몰운대·화손대·해수욕장·낙동강 하구로 구분할 수 있다.

 

다대포의 풍경을 사진으로 보시기를.......

 

 

 

넓은 백사장을 자랑하는 해수욕장 전경

 

 

해수욕장 왼쪽에서 바라보는 모습 : 바닷물이 드나들면서 아주 넓게 펼쳐진다.

 

 

 

넓은 백사장에서 패러글라이딩을 타는 모습 : 창공을 나는 즐거움

 

 

 

해수욕장과 다대포 일대의 아파트촌

 

 

 

 

넓은 창공을 날아 다니는 패러글라이더의 모습과 바다 물이 밀려 오면서 만든 해변의 기하학적 무늬가 아름답다.

 

* 지금부터 보는 사진은 다대포 해수욕장 왼쪽에 조성해 놓은 해변공원의 모습이다.

 

 

 

 

걸을 수 있게 나무 테크를 설치하여 바다를 보면서 산책하기에 알맞은 곳이다. 

 

 

산책길에서 보는 다대포 앞바다 

 

 

산책길에서 보는 다대포해수욕장 

 

 

 

 

 

나무테크 끝에서 바다가로 내려가면 펼쳐지는 풍경 

 

 

 

 

바다물이 들어오는 모습 

 

 

 

 

 

 

 

 

다대포를 조망하도록 만들어진 나무테크를 따라 걸으면서 보는 풍경

 

 

 다대포는 한 때 해수욕장의 기능을 상실한 땅이었다.

 

 백사장의 모래가 해수욕장의 모래라 할 수 없게 된 땅이었다. 그러나 행정관청이 오랜 시간을 걸쳐 정화하고 해수욕장을 가꾸어 지금은 훌륭한 해수욕장으로 탈바꿈하였다.

 또 해수욕장뿐만 아니라 주변에 동양 최대라고 일컫는 분수도 만들어 시간에 맞추어 분수쇼도 보여주고 있다. 또 해수욕장 주변에 물길을 만들어 바다물이 회전해 나가도록 만들어 놓아 바다에 들어가 해수욕을 하지 않아도 물에 발을 담그고 휴식을 취할 수 있게 하였다.

 또 주변에는 몰운대가 있어 숲속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여유를즐길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중 으뜸은 넓게 펼쳐진 백사장이다.

아마 부산의 해수욕장 가운데 가장 넓은 백사장을 자랑하는 곳일 것이다. 또 수심이 아주 완만하여 어린 아이들이나 수영에 자신이 없는 사람들도 아무런 부담없이 해수욕을 즐길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주변에는 활어판매센터가 있어 먹거리도 훌륭하게 장만할 수 있는 곳이다.

 

 한번 가셔서 즐겨 보시기 바란다. 결코 후회하지 않을 곳이다.

 

 사족으로 붙이면 이 곳의 해넘이 광경은 말로 할 수 없는 장관이다.

 각자가 구경하시기를...... 

 

서울에서 정남쪽 - 정남진(전라남도 장흥군)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망망한 바다가 보이는 곳

 

 새로운 명소로 가꾸어지는 정남진을 소개합니다.

 

 우리나라는 서울 광화문 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정동진이 있으며, 정북으로는 중강진이 위치하고, 남으로는 정남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정남진은 서울의 정남쪽에 있다고 알려진 옛날에는 나루터였으며며, 광화문으로부터 정남쪽을 가리키며 전라남도 장흥군에 해당한다.

 정남진은 전라남도 장흥군 관산읍 신동리 사금마을로 서울 중심점 표시돌(동경 126도 59분 04.5초)와 서울의 도로원표(동경 126도 58분 34.1초) 그리고 광화문으로부터 정남쪽에 위치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그래서 장흥군에서는 정남진 표지를 세우고 이 일대를 관광지로 개발하고 있다.

 

 물론 정남진은 바다다.

하지만 전라남도는 따뜻한 인정이 서려 있는 마을 이곳을 정남진이라고 명칭을 붙이고 그 주변에 정남진전망대를 세우고 공원을 만들어 개발 중이다. 전망대에서는 날이 맑으면 제주도도 보이고 일본 대마도 등도 보인다고 했는데 내가 간 날은 날이 흐려 그저 뿌연 바다만 보고 올 수밖에 없어 안타까웠다.

 

아직은 생소한 정남진을 사진으로라도 보시고 때가 되면 한번 들러 보시기를......

 

 

정남진 표지

 

 

 

정남진 가는길 표지석 : 장흥에 들어가면 볼 수 있다. 

 

 

정남진가는 도로 표지판

 

 

    

정남진 설명 표지 : 삼면을 모두 찍어 보았다.

 

 

정남진앞 바다 : 방파제를 만들어 가꾸고 있는 중이다.

 

 

 

 

 

 

정남진전망대의 여러 모습

 

 

  

 

 

정남진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남쪽 바다

 

          

 

엄청난 규모의 정남진 전망대

 

 

 정남진 전망대와 조형물

 

 정남진은 아직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지명이다.

 한적한 어촌 마을에 조용하게 자리잡은 곳이다. 지리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진다든지, 역사적인 어떤 사건이 있다든지 하는 곳도 아니다. 그저 서울에서 정남쪽에 위치하였다는 의미외에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꼭 어떤 의미가 있어야만 우리 눈을 끌고 우리 가슴을 적시는 것은 아니다.

이곳이 서울에서 정남쪽이라는 사실만으로도 한번쯤은 가 보아도 좋은 곳이다. 조용하게 바닷가를 거닐거나 전망대에서 망망하게 펼쳐지는 바다를 보아도 좋은 곳이다.

 아직은 잘 알려지지아 사람들이 많이 찾지를 않지만 지자체에서 유원지로 개발을 하고 있으니 곧 많은 사람들이 한번 구경하러 올 것이라 생각된다.

 

 전라남도 남쪽을 여행하는 길이 있으면 한번 둘러 보시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