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 함께하는 러시아여행(4) - 우수리스크 -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4. 한민족의 애환이 서린 땅 -우수리스크-
아침에 일어나 보니 창가에 비가 온 흔적이 있어 아들에게 물으니 어제 밤에 뇌성을 동반한 폭우가 내렸다고 한다. 나는 잠이 들어 비가 온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아침 날씨는 맑게 개어 파란 하늘이 내 눈을 상쾌하게 하고 있다.
오늘은 우리 민족의 애환이 서린 땅 우수리스크를 가기로 하였다. 우수리스크는 블라디보스토크 북쪽 약 112㎞ 지점, 한카호수 남쪽의 저지대에 위치하며, 동해로 흘러드는 우수리 강 지류에 자리하고 있다. 시베리아 철도와 하얼빈 무단 강(牧丹江)과 동녕(東寧)을 연결하는 철도와의 분기점으로, 극동지역의 경제적 중심지를 이루고 있는 산업도시이다. 그리고 우리 민족이 구한말부터 이주하여 독립운동을 하던 곳이며, 스탈린시대에 중앙아시아 쪽으로 강제 이주 당한 우리 동포들이 고르바초프시대에 다시 돌아와 고려인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에게는 슬픔과 희망이 한께 어울려 있는 곳이다.
블라디보스토크 중앙역에서 우수리스크행 기차를 타고 가기로 하였다. 러시아 기차역은 도시 근처를 가는 역과 장거리를 가는 역을 구별하고 표를 파는 곳도 다르니 러시아를 여행할 때에 유의해야 한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약 2시간 30분을 달려 우수리스크에 도착했다. 이 열차는 우리나라 1950년대의 기차와 비슷하여 기차안의 좌석이 나무로 만든 좌석이고 좌석 표는 아예 없다. 하루에 3번을 운행하고 있으니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우수리스크를 갔다 오려는 사람들은 열차시간을 잘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수리스크로 가는 도중에 시베리아의 풍경이 언뜻언뜻 보였다. 광활하게 펼쳐진 땅으로 끝을 모르게 평원만이 보이고 산이라고는 볼 수가 없는 곳인데 가꾸는 사람이 없이 그냥 그대로 놓아두고 있었다. 러시아어를 전혀 모르는 나는 기차가 정차하고 사람들이 내리는 것을 보고 기차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우수리스크’하고 말하니 사람들이 그렇다고 손짓을 하여 내렸다.
우수리스크로 가는 도중에 차창으로 보이는 평원
우수리스크행 열차 내부(손님이 없다)
우수리스크 가는 길에 펼쳐지는 광활한 대지
우수리스크 역
우리의 오늘 여정은 ‘우정마을’(고려인 집단촌), ‘고려인문화관’ ‘최재형이 살던 집’ ‘이상설유허비’ 등을 찾아보는 것이다. 시간이 되는 대로 찾아갈 생각을 하고 역을 벗어나니 막막했다.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를 아무 것도 모르고, 또 우리가 찾아가려는 곳은 우리에게나 중요하지 러시아에는 별 중요한 곳도 아니니 안내도를 전혀 찾을 수 없었다.
하여튼 먼저 ‘고려인문화관’을 가기로 하였다. 무턱대고 기차역에서 나와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며 걸었다. 주소도 정확하지 못해서 좀 헤매었으나 다행히도 찾아갈 수 있었다.
혹시 개인 여행객으로 이곳을 방문하게 된다면 Amurskaya(아무르스카야) 63번지로 찾아가면 되고, 길을 모를 때는 러시아인들에게 (여기는 더 영어 안 됨) Қорейсқий Қулътурный Центр로 어떻게 가면 되냐고 물으면 된다.
고려인문화관은 연해주에 살고 있는 고려인들의 삶이 기록되고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 구소련 스탈린시대 1937년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그리고 다시 돌아온 고려인(러시아에 사는 우리 동포들을 지칭하는 용어)의 역사가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고려인문화관은 고려인들의 고난과 시련의 역사와 앞으로의 희망을 함께 보여주려고 만든 곳으로 우수리스크뿐만 아니라 그 주위의 많은 고려인들의 행사에도 이곳을 이용하고 있다. 이 문화관에서 나는 우리세대에게는 학교에서 배운 적이 없었던 잘 알지 못하는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을 볼 수 있었다. 1945년 광복 후 이념의 대립에 의해 남북으로 갈라져 독립운동의 한 부분마저도 이념의 대립 때문에 무시되다시피 한 것이다. 그런데 명색이 ‘고려인문화촌’인데 고려인이 상주하는 것이 아니라 러시아인이 상주하면서 관람객이 오면 문을 열어 주는 것은 하나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었다. 왜 고려인이 없을까? 이 의문은 식당에서도 들었다. 이곳까지 왔으니 점심때도 되고 하여 아들과 함께 식당을 들어갔다. 우리 음식인 비빔밥, 된장국, 김치찌개 등등과 러시아 음식을 팔고 있어 아들은 비빔밥을 시키고 나는 된장국을 시켰는데 밥은 주지 않고 된장국만 주어서 밥은 따로 시켜서 먹었다. 그런데 이 식당의 주인은 역시 러시아인이고 일하는 사람들은 보아하니 고려인인 것 같았다. 참 기분이 묘했다. 러시아인에 의해 운영되는 ‘고려인문화촌’이라니......
고려인문화촌 입구와 전경(태극기가 보인다)
고려인문화촌 내부의 안내도
고려인문화촌에는 고려인의 역사를 '씨앗' '불꽃' '들꽃' '평화'의 네 쟝르로 구분하여 전시하고 있다. 조선말에 정든 고향을 떠나 먼 이국 땅에 뿌리를 내리는 과정. 잃어버린 나라를 찾기 위해 목숨까지도 바친 독립운동.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다시 돌아와서 희망찬 미래를 건설하는 모습 등을 보여 준다.
고려인문화촌을 나와 독립운동가인 ‘최재형’이 살던 집을 찾아 가기로 했다. 최재형은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를 걸쳐 활약한 연해주지방의 유명한 독립운동가이다. 최재형은 한말의 독립운동가로 어릴 때 부모를 따라 시베리아 노우키예프스크로 이주하였다. 상선의 선원과 장사를 통해 많은 돈을 벌어 젊은 한인을 선발하여 상트페테르부르그에 유학을 보내기도 했으며 러일전쟁 후 이범윤과 국민회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고 의병을 모집했다. 그리고 안중근 등과 함께 ‘동의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다. 안중근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의거의 실질적 주모자였으며, 안중근 의사의 서거 이후 그 가족을 돌보았다고 한다. 폐간되었던 《대동공보》를 재발행하고 한인학교를 설립하였다. 1919년 독립단을 조직하고 무장투쟁을 준비했다. 이듬해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 때 재러한인의병을 총규합하여 시가전을 벌이다가 붙잡혀 죽은 독립운동가로 1962년 독립훈장이 추서된 인물이다. 최재형이 살던 집도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없어 지도에 의지하며 7월의 땡볕을 쬐며 걸어 다녔다. 처음에는 길을 잘못 들어 헤매다가 우여곡절 끝에 살던 집을 찾게 되었다. Volodarskogo 38번지에 위치한 최재형 생가까지 휘적휘적 가는데 중간에 우수리스크 시민 공원(도라 공원)이 있었다. 공원은 보잘 것 없는 소도시의 조그마한 유원지이지만 그 공원 안에는 발해시대의 유물이라고 알려져 있는 거북상이 있었다. 그러나 설명문에는 금나라의 유물이라고 되어 약간은 실망했다. 이 우수리스크는 발해의 솔빈부라고 알려져 있는데 발해의 유물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아니라고 하는데 내가 무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 거북상은 한 쌍이라고 알고 있는데 하나만 있고 하나는 어디에 갔는지...... 아들이 말하기를 하바롭스크에 있다는 말이 있다 하였다. 우리나 이곳이나 유물은 그 자리에 좀 그냥 두는 것이 좋은 일인데 꼭 옮겨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하바롭스크를 갔을 때 그 지역 박물관에서 이 거북상을 보았다. 박물관 마당 한 구석에 있었다.) 이 공원을 나와서 오른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최재형이 살았던 집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집을 보고 나서는 실망뿐이다. 우리나라의 국력이 이것밖에 되지 않는지가 의문이다. 이 건물 벽면에 최재형이 살았던 집이라는 현판만 하나 있을 뿐이다. 그냥 전하는 말로는 이집 주인이 너무 집값을 고가로 불러서 우리 정부에서 구입하지 못하고 현판만 하나 달아 놓았다고 하는데 우리 독립 운동가를 기리고 후세에 그들의 정신을 전하는 교육의 장으로도 훌륭한 곳인데 돈으로만 따져서 구입하지 못했다니 안타깝다. 우리의 국력이 이 집 하나 구입하기가 어려운지......
우수리스크 시민공원(도라공원)
공원 안에 있는 거북상( 바석의 기단인 것 같은데 비석은 어디에??)
독립운동가 '최재형의 집'
최재형의 집을 보고 난 뒤 잠시 망설였다. 고려인 우정마을을 가려고 하니 가는 길을 도저히 알 수가 없다. 120번 버스를 타고 가면 된다고 하는데 버스정류장도 찾을 수 없고 120번 버스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고, 또 불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가려면 지금 시간적 여유도 없는 것 같고 하여 아들과 상의하여 ‘우정마을’은 포기하고 ‘이상설유허비’를 찾아가기로 했다. 하지만 ‘이상설유허비’는 또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찾을 방법이 난감했다. 아들놈이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인터넷을 통해 대략적 위치를 알아내고 무작정 또 걷기로 했다. 7월의 따가운 햇볕 아래를 무작정 걸으면서 우수리스크의 유원지를 지나가니 사람도 차도 다니지 않는 길을 약 1시간 30분 정도 걸으니 표지판이 나타났다. ‘이상설유허비’이다.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는 수이푼강(솔빈강)가에 외로이 비만 서 있다. 너무나 처량한 모습이다. 이상설 그는 누구였던가? 내가 어설프게 설명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잘 알려진 독립운동가이다. 간단히 소개하면 그는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뛰어나고 총명하여 25세 때 갑오문과에 급제하고 27살에 성균관 교수와 한성사범학교 교관을 역임하였다. 그는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하여 상소투쟁을 펼치고 이후 만주와 연해주로 망명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면서 1907년 광무황제의 특사로 이준, 이위종과 함께 헤이그에 파견되어 한국 독립을 호소하였다. 그는 1917년 3월 2일 48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그는 임종을 지킨 동지들에게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임종을 지킨 이들이 선생의 유언을 따라 화장하여 그 재를 수이푼강에 날렸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이 러시아정부와 협의하여 수이푼 강가에 그의 유허비를 2001년에 세웠다.
‘최재형이 살던 집’ ‘이상설유허비’ 사실 어떤 의미가 있는 곳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의미를 제대로 알기나 할까?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여행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 몇 명이나 이곳을 찾아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아니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을 알기나 하는지가 의문이다. 사실 ‘이상설유허비’는 마음만 먹으면 쉽게 갈 수 있다. 버스노선이 있다고 하지만 기다리기가 너무 어렵고 하니 택시를 타고 수이푼 강 철교 조금 못 미쳐 가면 안내 간판이 보인다. 그리고 그 유허비를 보고 수이푼강을 구경하면서 철교를 건너가면 넓게 펼쳐진 평원이 보인다. 전해지기로는 옛 발해의 솔빈부 터라고 하는데 아무런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우리 역사에서 발해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저 여기가 우리 조상들이 한 때나마 살고 있었던 곳인가 하고 감회에 잠길 따름이다.
이상설유허비 가는 길과 주변의 들판
이상설유허비 근방의 표지판
이상설유허비
솔빈강(수이푼강) : 비가 와서 흙탕물이 흐르고 있다.
솔빈강 다리를 건너 옛 발해의 성터라고 하는 평원 : 지금은 아무런 자취도 없다.
도도하게 흐르는 수이푼강과 수이푼강 다리
수이푼강 주변을 구경하고 다시 우스리스크 시내로 돌아오려는데 또 이 길을 하염없이 걷는다는 것이 아득했다. 그런데 마침 택시가 한 대 지나가고 있었다. 대뜸 택시를 타고 우수리스크역으로 가지고 했다. 그런데 택시에 미터기가 없었다. 아들과 나는 도대체 요금을 얼마나 지불해야 하는지 궁금하고 불안했다. 우리가 약 1시간 30분 정도 걸었으니 약 4km는 더 걸은 것 같은데 미터기도 없으니 외국에서 바가지나 당하지 않나하고 걱정했다. 역에 도착하여 요금을 물으니(물론 러시아어를 할 수 없어 계산기만 꺼내니 통했다.) 150루불(약 4,500원)이란다. 너무 놀랐다. 우리나라보다도 더 싼 것 같기도 하고 친절하고 속임이 없음이 너무 고마웠다. 한 가지 이야기를 한다면 어느 도시든지 정식으로 된 택시회사의 요금은 우리와 비슷했고 일명 바가지라는 것은 없었다.
우수리스크역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오는 기차를 기다리며 역에 있는데 웬 한국인이 때를 지어 들어왔다. 웬 한국인이지? 하고 보니 김일성 배지를 가슴에 단 북한인들이다, 아마 러시아에서 노동을 마치고 귀국하는 듯하였다. 그들은 상당히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그들도 우리 동포인데 말 한마디 붙여 보지 못하고 그냥 보고만 있었다. 아니 약간의 경외심과 두려움도 있었었는지 모른다. 우리는 나와 아들 두 명뿐이고 이곳은 아직 공산주의 사회인 러시아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진 아픔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장면이었다. 우수리스크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오는 기차는 거의 만원이었다. 그런데 러시아인들이 참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승객 한 명이 3인용 의자를 가로 질러 떡 앉아서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비켜 주지 않는 모습이 곳곳에 보였다. 그리고 또 아무도 비켜 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우리 생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그리고 근교열차는 기차승무원이 중간 중간에 차표를 검사하는 것이 옛날의 우리나라와 비슷했다.
우수리스크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오는 도중의 아무르만 : 비가 그치니 사람들이 바닷가에 나와 일광욕을 하고 있다.
한 가지 꼭 기억해야 하는 일은 러시아는 화장실 이용이 쉽지 않다. 길가에 많은 화장실이 있는데 모두 유료이다. 심지어 어떤 곳은 공공건물의 화장실도 유로이며, 공원 등은 말할 필요가 없이 유료다. 대개가 20루불(약 600원)로 만만치 않으니 알아서 처신해야 한다.
'鶴이 날아 갔던 곳들 > 발따라 길따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들과 함께하는 러시아여행(6) - 하바롭스크의 첫날 (2) | 2014.10.03 |
---|---|
아들과 함께하는 러시아여행(5) - 블라디보스토크 시내 서쪽 (0) | 2014.09.26 |
아들과 함께하는 러시아여행(3) - 블라디보스토크의 시내의 동쪽 (6) | 2014.09.15 |
아들과 함께하는 러시아여행(2) - 블라디보스토크의 첫날 (3) | 2014.09.09 |
아들과 함께하는 러시아여행(1) -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고- (2) | 2014.09.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