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鶴)의 오딧세이(Odyssey)

서해랑길 55코스(진포해양테마공원 - 경암동철길마을 - 시비공원 - 금강하구둑관광지 - 장항도선장입구)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서해랑길 55코스는 진포해양공원을 출발하여 추억의 경암동철길마을을 지나서 군산만을 빙 돌아나가 금강하구둑관광지를 지나서 전라북도를 끝내고 충청남도로 들어간다. 서천군에 들어가 하구둑을 따라 걸어 장항읍의 장항도선장에 도착하는 14.9km의 길이다.

 

55코스 안내판

 

 55코스 출발지가 진포해양테마공원이다.

 

 진포해양테마공원은 고려 말 1380년 금강하구의 진포에 침입해 온 왜구들을 고려의 수군이 격퇴한 진포대첩당시에 최무선 장군이 화포를 이용하여 왜구를 물리친 곳을 기념하는 장소이다. 이곳에 있는 군함 위봉함은 진포대첩 관련 전시관으로 활용된다.

 

 공원에는 일제가 밀물과 썰물의 영향을 받지 않고 쌀 수백만 석을 배에 싣도록 설치한 군산내항 뜬다리부두(등록문화재 719-1)가 여전히 제자리를 지킨다. 전시관으로 활용되는 위봉함에선 세계 최초 함포 해전으로 기록된 진포대첩을 VR로 체험할 수 있다.

 

체험학습 중인 아이들

 

진포해양공원의 여러 모습

 

 진포해양공원을 지나 해안을 따라 가니 군산비어포트라는 다소 이색적인 건물이 나온다.

 

 군산비어포트는 수제맥주 체험관으로 군산맥아로 정통맥주를 만드는 로컬 브루어리이다. 크래프트월명 브루잉 컴퍼니, G3 크래프트비어, 드라마틱브루잉, 메인쿤 브루잉 총 4개의 브루잉 팀이 각자의 맥주를 만들어 판매하고 있고, 각기 다른 안주를 판매하기 때문에 다양한 먹거리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은 예전에 째보선창으로 불렸던 곳으로, 어선들로 불야성을 이루고 돈이 넘치는 동네였다는데 토사로 인해 어선들이 들어오지 못해 불이 꺼진지 오래된 매우 침체된 동네였다. 과거 수협창고였던 건물은 해안 일대가 배를 접안 할 수 없어져 기능을 상실하여 흉물스럽게 변하였으나 군산시의 도시재생 사업을 통해 리모델링의 과정을 거쳐 비어포트로 지역의 발전을 선도하고 있다.

 지금은 군산비어포트에서 보는 금강하구의 이색적인 전망과 양조과정을 보며 군산보리와 맥주 스토리에 대한 방문자들의 입소문이 이어져 관광명소로 부상하고 있다고 한다.

 

 

 군산비어포트를 돌아나가니 여러 가지 조형물이 눈길을 끄는 서래포구마을이 나온다.  '째보선창'을 휘돌아 금강하굿둑을 바라보고 있는 군산 중동 서래포구 마을은 쇠퇴를 계속하다가 중동 농촌중심지 활성화 사업을 통해 변화를 하고 있다.

 또 군산 유일한 동제(洞祭)인 당산제와 서래장 등 역사와 전통이 깊은 중동지역과 관련한 벽화와 조형물이 설치돼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며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고 한다.

 

서래포구마을의 풍경

 

 

 

 서래포구마을을 지나 조금 가면 철길이 나온다. 물론 지금은 기차가 다니지 않는 폐선로이지만 군산시는 이곳을 추억의 장소로 개발하여 관광객을 불러 들이고 있다. 바로 경암동철길마을이다.

 

 경암동철길마을은 낡은 기찻길 옆으로 다닥다닥 붙은 판잣집이 독특한 정취를 불러일으킨다. 1970~1980년대 교복 대여소나 추억의 흑백사진을 촬영해주는 스튜디오가 곳곳에 있다.

그러나 관광객의 눈길과 입맛을 사로잡는 건 단연 불량 식품들로 알록달록하게 색칠한 자극적인 과자의 유혹이다. 여기에 온 관광객들은 삼삼오오로 옛날의 교복을 입고 가스 냄새가 자욱한 연탄불 주위에 둘러앉아 쫀드기를 굽고, 달고나도 만들고 있다. 옛날의 잃어버린 그리운 추억을 되살리는 것이다. 내가 이곳을 걸어 지나는 시간에도 많은 중년의 관광객들이 옛날의 추억을 되살리며 남학생, 여학생의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깔깔거리며 추억을 즐기고 있었다.

 

경암동철길마을의 여러 모습

 

 경암동철길마을을 지나서 빤히 보이는 서천을 눈앞에 두고 금강하구의 군산만을 빙 돌아서 길을 간다. 넓게 펼쳐지는 군산만의 갯벌을 보면서 여유롭게 가니 금강하구가 나오고 금강하구를 가로지르는 금강하구둑이 나온다.

 

 금강하구둑은 장수군 소백산맥에서 발원하여 충청북도 남서부를 거쳐 충청남도와 전라북도의 도계를 이루면서 군산만(群山灣)으로 흘러드는 총길이 401의 금강 하구를 막아 건설한 둑이다. 방조제의 총길이는 1,841m로 충남 서천과 전북 군산을 잇는 교량역할을 하고 있으며 장항선의 일부인 신장항-군산 대야 철도가 놓여 있다. 금강하구둑은 20181227일 동백대교가 개통되기 이전까지 군산시와 서천군을 연결하는 유일한 도로였다.

 연간 약3 6천만 톤의 농업용수와 공업용수를 공급하고, 금강 주변 지역의 홍수를 조절하고, 토양과 모래가 흘러내려 강 하구에 쌓이는 것을 막아 군산항의 기능을 유지시키면서 바닷물의 역류를 막아 농경지의 염해 피해를 막고 있다.

 활짝 펼쳐진 금강하구는 갈대숲과 어우러져 새로운 철새도래지로 각광받고 있는데 겨울동안 고니와 청둥오리, 세계적인 희귀조인 검은머리물떼새와 검은머리갈매기 등이 서식하는 것으로 조사되어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철새도래지를 많은 사람들이 관람토록 하기 위하여 철새전망대도 세워져 있다.

 

군산만 갯벌

 

하구둑 철로

 

하구둑에서 보는 군산만 풍경

 

전라북도에서 충청남도로 넘어가는 이정표

 

 여기서부터 길고 길었던 전라남도와 북도의 길이 끝나고 충청남도 길이 시작된다. 서천군에 들어가 길을 가다가 이 길을 걷고 있는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부부를 만났다. 그런데 특이하게 배낭을 메고 가는 것이 아니라 조그만 가방을 메고 드렁크를 끌고 가고 있었다. 남의 일이라 무어라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너무 불편하게 다니는 것 같았다. 같이 조금 걷다가 나의 발걸음에 맞추어 내 길을 걸었다.

 

멀리 보이는 동백대교(군산과 서천을 잇는 다리)

 

 

 서천의 장항읍을 조금 걸어가니 이번 여정의 종착점 장항도선장이 나온다. 이번 여정은 출발할 때부터 여기까지 오는 것을 예정하였기에 종착점에서 조금 앉아 쉬다가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집으로 가는 길이 너무 멀다. 여기서 군산으로 가서 다시 전주로 가서 부산으로 가는 버스를 타야 한다. 하지만 길은 멀지만 일 주일 만에 집으로 가는 길이 고되지는 않다. 

서해랑길 54코스(외당마을버스정류장 - 은파유원지 - 월명호수 - 근대쉼터 - 진포해양테마공원)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서해랑길 54코스는 외당마을버스정류장을 출발하여 군산시의 외곽에서 시내를 통과하는 길이다. 군산 시민들의 휴식공간인 은파유원지와 월명호수를 지나면 군산의 근대문화유산거리가 나오고 이곳을 지나 진포해양테마공원에서 끝이 나는 11.65km의 비교적 짧고 평탄한 길이다.

 

54코스 안내판

 

 아침에 숙소에서 출발하여 외당버스정류장으로 가는 버스편을 기다리려니 시간이 오래 걸려 택시를 호출하여 가는데 기사님들도 이 외당버스정류장이라고는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당북초등학교 쪽으로 가자고 하여 중간에 내렸다.

 

버스정류장에서 약간의 언덕을 올라가니 제과, 제빵의 명인이라는 안영순의 집이 나온다. 이른 아침이라 빵을 팔지는 않고 있는 집을 지나 언덕을 넘으면 은파유원지의 호수가 펼쳐진다.

 

제과, 제빵의 명인 집

 

 군산시 나운동에 있는 은파호수공원(銀波湖水公園)으로 불리는 은파유원지(銀波遊園地)16세기에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미제지(米堤池)’로 나타나 있는 오래된 저수지에 조성된 호수 공원이다. 은파라는 이름은 유원지의 햇살을 받은 물결이 아름답게 반짝이는 모습 때문에 지어졌다고 하지만 다른 설도 있다. 원래는 농업용 저수지로 조성되었던 곳이지만 1985년에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어 지금에 이르렀다. 저수지 방죽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도 표시되어 있고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조선시대 이전에 쌓은 것으로 적혀 있다.

 입구 만남의 광장에는 군산 및 옥구 출신 독립유공자 충혼탑이 있고, 저수지 주변으로 6의 순환도로가 나 있다.

 

 호수를 가로지르는 물빛 다리는 길이 370m, 너비 3m의 보도 현수교로서 야간에는 조명으로 연출된 아름다운 빛을 비추어 휴식처와 볼거리를 제공한다. 음악 분수는 은파의 특성과 이미지를 반영한 꽃잎 형태의 분수로 매회 20분씩 하루 8회 운영되고 있다.

 

은파유원지의 여러 모습

 

 이른 아침이라 아직은 사람이 드문 은파유원지를 돌아나와서 도로를 조금 걸으니 다시 높지 않은 산으로 올라가게 한다. 산길을 걸어가면서 '왜 산으로 가지?' 하는 의문이 들었는데 조금 가니 밑에 터널이 있었다. 도로를 통과하지 못하여 산을 넘어가게 한 길이었다. 그 길을 따라 조금 가니 이번에는 월명공원(호수공원)이 나온다. 어제 지나온 군산저수지부터 은파유원지, 월명호수로 계속 이어진다. 왜 이렇게 호수(저수지)가 많은 것인지 조금 이상하였다. 아마도 김제와 만경의 들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서 옛날부터 만들어져야 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산길

 

 군산시 신흥동과 해망동에 걸쳐 있는 월명공원(月明公園)은 군산시의 상징인 월명산(月明山)을 비롯하여 주변의 여러 산으로 이어져 있다. 월명공원은 옛 도심에 위치한 시민의 안식처이자 관광지로서 산책로를 따라 공원으로 올라가면 군산 시가지와 서해 바다와 주변의 경관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월명공원은 1906년 군산 각국 거류 지역의 명승지인 해망정 인근 약 3.3를 개발하여 일명 각국 공원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각국이라는 단어를 떼어내고 군산공원이라고 불렀다. 1972년에는 해망동 수시탑에서 미룡동의 군산대 뒷산에 이르는 영역을 개발 제한 구역이자 공원 지역으로 지정하고 군산 공원월명공원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월명공원 안에는 1912년에 시민에게 식수를 공급하기 위해 만든 제1수원지가 물안개를 뿜어내는 산 속의 호수(월명호수)로 변하여 산새와 작은 동물들이 목을 축이는 곳이 되었다.

 

 

 월명공원의 호수가에는 많은 군산 시민들이 나와서 산책을 하고 있었다. 이름난 유원지가 아니라 동네 주민들에게 친근한 공원으로 사랑을 받고 있는 곳이었다. 대도시가 아닌 군산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산책을 하고 있는 공원이니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월명호수를 돌아나가니 계속 월명공원이 이어지고 있다. 약간의 산 언덕길을 계속 돌아나가는 공원길에는 수 많은 사람들이 산책을 하고 있었다.

 

월명공원의 여러 기념비들

 

 

 공원에서 내려오니 군산의 근대역사문화거리가 나타난다.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이 군산시간여행마을 먹거리타운이라는 표지다.

 

 군산은 구한 말 개항 이후 일본인들이 이주하면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전라북도와 충청남도라는 넓은 평야 지대를 배경으로 하고 금강과 서해안이 인접한 지리적 이점으로 지주와 상업 자본가들이 집중되며 도시의 기반 시설이 갖추어지기 시작하였다.

일제강점기에 군산 인근 지역에 설립된 일본인 농장들을 통해 생산된 미곡이 군산항에 집산되어 일본으로 반출되기 시작하였다. 군산 지역 자작농들은 일제의 정책과 일본 지주의 핍박으로 소작농으로 전락하게 되었고군산역과 군산항에서 일용 노동자 및 하역 노동자로 살아가게 되었다.

1930년대 이후에는 기존의 철도, 도로, 항만 등의 재정비를 통해 전쟁에 필요한 식량을 생산해 낼 수 있는 시설 확충이 이루어졌다.

 

 

 군산근대역사문화거리의 길목에 월명동성당이 있다. 오랜만에 보는 성당이라 안에 들어가 잠시 기도를 하려고 들어가니 평일 낮 미사를 드리고 있었다. 미사에 참석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하여 바깥에서 기도만 하고 잠시 보다가 그냥 나왔다.

 

 군산시 월명동에 있는 월명동성당(月明洞聖堂)은 천주교 전주 교구 소속으로 1960년 적산 가옥 연와제를 매입하여 성당과 사제관으로 개축하여 군산시 서북부 지역을 관할하다가, 인구 증가로 인해 주변의 여러 성당이 분리되었다. 구 시가지 일본인 거주 지역에 자리하고 있어서, 2012년 근대 시가지를 재현하는 군산시 근대 문화 추진 사업의 일환으로 성당 담쌓기 공사가 완공되어 근대 문화유산으로 한몫을 하고 있다.

 

월멍동성당

 

 이곳에서부터 군산의 근대역사문화거리가 쭉 계속된다. 군산시 원도심 월명동, 영화동 일원에 조성되어 있는 근대문화 거리는 원도심 지역의 근대문화 자원(근대 건축물)을 재조명해 근대 역사 문화가 살아 숨 쉬는 지역을 만들어 놓은 곳이다.

 근대문화 역사거리는 일제강점기 역사의 현장을 보수·복원하여 그 시대 우리 선인이 받은 치욕의 고통과 아픔을 가늠해 볼 수 있도록 하고, 우리 후손이 잊지 않을 공간으로 재조명하여 역사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국내 유일의 근대문화 창조도시거리다.

 군산의 옛 도심은 18996월 조계지(외국인 거주 지역)로 설정된 후 근대기 아픈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구 조선은행 군산 지점, 구 일본 제18은행 군산 지점, 구 군산 세관 본관, 일본식 사찰인 동국사 등 170여 채의 근대문화유산이 밀집돼 있다.

 

거리의 여러 모습

 

 이 거리를 걸으며 카페에 앉아 잠시 쉬면서 한적한 거리의 풍경을 한가로이 보다가 내가 이번 여정에서 군산에서 꼭 보려고 예정했던 '8월의 크리스마스'의 주 무대인 초원사진관으로 갔다. 서해랑길 코스에서는 좀 벗어나 있지만 꼭 보려는 마음이었기에 시간을 들여서 가니 친근한 사진관이 나온다.

 

 이 영화는 영화보기에 광적인 내가 가장 좋아하는 우리나라 영회이기에 다소 장황하지만 네이버의 여러 글을 간추려서 여기에 소개한다.

 

 1998년에 개봉한 8월의 크리스마스는 한적한 소도시에서 초원사진관을 경영하는 정원(한석규)과 주차단속원 다림(심은하)의 사랑을 절제된 감정으로 잔잔하게 풀어내 평단의 찬사를 받은 작품이다. "좋아하는 남자 친구 없어요?" 변두리 사진관에서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노총각 정원(한석규)’은 시한부 인생을 받아들이고 가족, 친구들과 담담한 이별을 준비하던 어느 날, 주차단속요원 '다림(심은하)'을 만나게 되고 차츰 평온했던 일상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아저씨, 왜 나만 보면 웃어요?" 다림(심은하)은 밝고 씩씩하지만 무료한 일상에 지쳐가던 스무 살 주차 단속요원이다. '다림'은 단속차량 사진의 필름을 맡기기 위해 드나들던 사진관의 주인 '정원'에게 어느새 특별한 감정을 갖게 되는데...

 

 어느 남자가 맞닥뜨리는 죽음의 과정을 다른 평범한 영화처럼 고통과 비극으로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담담하게 그려낸 작품으로, 정원과 다림이 만나고 헤어진, 여름과 겨울을 하나로 잇는, 삶과 죽음의 다름과 같음을 읽게 하는 의미로써 주목받았던 영화다.

 

 2013년에는 관객들이 뽑은 '다시 보고 싶은 명작' 1위에 올랐고, 같은 해 117일 디지털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복원, 재개봉되었다.

 

초원사진관의 외부와 내부 모습

 

 이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이 관광객으로 이 주변에서 사진을 찍고 웃고 즐기고 있었다. 또 젊은이들은 이 주변의 명소를 찾아다니며 스탬프를 찍어 확인을 받느라고 북적거리고 있었다. 한편의 영화가 엄청난 효과로 관광객을 끌어 모우고 있는 것이었다. 초원사진관에서 영화의 장면들을 보면서 이 영화를 몇 번이나 보면서 볼 때마다 감동을 느끼던 생각이 났다.

 

초원사진관에서 발을 돌려 다시 서해랑길을 걸으니 근대건축물들이 많이 눈에 보안다. 물론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 형태의 건물들이 예전의 시간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장미공연장 옆에는 채만식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상이 세워져 있다. 군산을 대표하는 소설가인 채만식(蔡萬植)1902년 대한제국 전라북도 임피군 군내면 동상리(전라북도 군산시 임피면 읍내리)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소설가, 극작가, 문학평론가, 수필가로 호는 백릉(白菱), 채옹(采翁)이다.

 1924조선문단에 단편 새길로를 발표하여 등단하였다. 카프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지만 초기의 작품 경향은 경향파 문학과 유사한 점이 있어 동반자 작가로 분류된다.

  대표작으로 중편 태평천하(1938)와 장편 탁류(1938)가 있다.

 

 내가 고등학생일 때 공부는 뒷전이었고 제법 많은 소설을 읽었는데 그 때 <태평천하>와  <탁류>를 읽고 일제강점기의 군산의 모습을 상상했던 일이 생각났다.

 

채만식의 소설광장

 

군산 시간여행거리의 여러 모습

 

 

 

 군산의 구석구석을 살펴보는 것이 이 여행의 목적이 아니라 서해랑길을 걷는 도중에 보는 군산의 모습이라 상세하게 설명은 하지 못하고 이 거리에서 중요한 건물 둘만 소개하기로 한다.

 

 먼저 군산시 장미동에 있는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舊朝鮮銀行群山支店)1923년에 건립된 일제의 건물로 일제가 식민 지배를 위해 운영한 대표적인 금융시설이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은행으로 사용되었고, 이후 상업 건축물로 사용되다가 근대 문화 중심 도시 조성 사업을 통해 전시 시설로 수리 및 보수하여 활용하고 있다.

채만식의 <탁류>에도 등장하는 은행으로, 해방 이후에도 한국은행, 한일은행 등 은행 건물로 쓰였다. 지금은 근대 건축관으로 군산의 근대건축물과 일제강점기 화폐, 역사 관련 유물을 전시한다.

 

 둘째로 군산근대역사박물관(群山近代歷史博物館)이다.

 

 조선 시대에 군산은 호남평야에서 거둔 세곡을 보관·수송하기 위한 조창이 설치된 경제적 요충지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참혹한 수탈이 할퀴고 간 군산은 상처투성이의 왜곡된 성장을 겪었다. 근대화의 상징인 기찻길이 놓이고 신작로가 뚫렸지만 모두가 일제의 약탈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된다던가.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은 이 같은 도시의 상처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은 역사는 미래가 된다.’라는 모토로 과거 무역항으로 해상물류유통 도시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던 군산시의 정체성을 확인하여 현재와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고 전국 최대의 근대 문화유산을 소유한 군산시의 문화적 특징을 관광 자원으로 홍보하고자 건립되었다.

관람객을 위한 전시실 구성은 박물관 1층 입구의 어청도 등대 모형을 시작으로 1층에 해양 물류 역사관, 어린이 박물관, 2층의 특별전시관, 3층의 근대 생활관과 기획 전시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 조선선은행 군산지점

 

 

 

 근대역사문화유산거리를 이곳저곳 구경하면서 길의 코스도 좀 벗어나고 하니 시간이 제법 흘렀다. 그래도 주마간산식이지만 군산의 근대거리를 구경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구 철길을 지나니 진포해양테마공원의 입구인 바다가 보이고 여기서 54코스는 끝이 난다. 잠시의 쉴 틈도 없이 그냥 다음 코스로 발을 옮긴다.

 

서해랑길 53코스(새창이다리 - 증석교 - 회현초등학교 - 백석버스정류장 - 외당마을버스정류장)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서해랑길 53코스는 새창이다리를 출발하여 느긋하게 아름다운 가을의 만경강 풍경을 즐기며 만경강 강안을 걸어가 증석교를 지나고 백석버스정류장을 지나 군산으로 들어가 외당마을버스정류장에서 끝이 나는 19.6km의 길이다.

 

53코스 안내판

 

53코스 시작점 알림표(처음 보는 시작점 표시다.)

 

여러 가지의 안내문

 

 새창이다리를 다 건너오니 여기에는 더 많은 안내문이 서 있다.

새창이 다리 이야기, 구 만경대교 역사 이야기, 새창이 연꽃 마당 이야기 등의 안내판이 서 있다. 그 중에서 구 만경대교 역사 이야기를 보면 193384일 동아일보 기사를 인용하고 있다.

 

 새창이다리를 지나 도로를 조금 따라 가니 만경강 강안으로 걷는 길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강안을 따라 긴 길을 가게 한다.  52코스에서는 만경강 옆을 걸어왔지만 제방이 가로 막아 만경강을 볼 수가 없었는데 여기에서부터는 만경강을 걷게 한다.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 강안을 혼자서 호젓하게 걸으며 가을 햇살에 빛나는 강물과 억새들 그리고 갈대들, 만경강의 흐름이 빗어내는 사구들 모두가 눈에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도 머리에도 각인되는 것 같았다. 아주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보며 마음의 여유로움을 즐기는 것이 여행의 참 모습이라고 생각하며 이 여유를 즐기면서 강안을 걸었다.

 

 만경강은 전북 완주의 원등산에서 발원하여 호남평야의 중심부인 가르며 서해로 흐르는 강으로 길이 74의 비교적 짧은 강이다. 충적평야 위를 흐르는 전형적인 곡류하천으로 하구에서 48떨어진 삼례부근까지 대조(大潮)시 하천수위가 상승하는 감조하천이다.

 ‘만경강이란 이름은 만경현(萬頃縣)에서 비롯된다. 만경의 ()’자는 백만이랑이란 뜻으로 넓은 들을 뜻하며, 만경강은 만경현으로 흐르는데서 유래되었다. 만경강의 본래 이름은 신창진(新倉津)으로 조선시대까지 사용해오다가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통폐합하면서 현재의 이름으로 바꾸었다고 하며, ‘동국여지승람을 보면 하류는 신창진, 상류는 안천(雁川, 현재의 고산천)과 남천(南川, 현재의 삼천천과 전주천)라고 적혀 있다.

 

연꽃 마당 표지석

 

도로 통행을 막아 놓았다.

 

만경강의 여러 풍경

 

이정표

 

 

 

 만경강을 지나 다시 넓은 만경들판과 마을을 지나니 군산으로 들어선다. 첫머리에 제법 작은 산이 나오고 크게 보이는 호수가 나타난다. 청암산과 군산호수다.

   

 군산시 옥산면에 있는 청암산은 해발 117m로 구릉성 산지이다. 이산은 해발 100m 내외의 저산성 산지와 충적 평야로 이루어져 있는 금성 산지에 해당된다. 북쪽으로 이어진 금성산과 함께 청암산은 군산 저수지, 또는 옥산 저수지로 불리는 제2 수원지를 품고 있다.

 청암산은 조선시대 이전 푸른산이란 의미의 취암(翠岩)산으로 불리다 일제강점기 청암(靑岩)산으로 명칭이 바뀐 것으로 전해진다.

 

멀리 보이는 군산호수

 

전북천리길 표지

 

 전라북도의 길을 걸으면 전북천리길이라는 표지를 자주 보게 된다. 전북 1,000리길은 14개 시군 44개 길이 있으며, 전라북도 명품길을 산들길, 해안길, 강변길, 호수길로 나누고 있다. 이리저리 구부러지고 숲이 우거진 길을 여유롭게 걸을 수 있는 군산도보행 길인 군산 구불길 중 4개코스(구불4길 구슬뫼길, 구불5길 물빛길, 구불6-1 탁류길, 구불8길 고군산길)가 포함되어 있다.

 

 군산호수 둘레길은 청암산 품에 안긴 군산호수공원의 수변산책로를 말한다. 예전에는 옥산저수지라고 불렀는데 회현면 주민들의 반대로 지금은 군산호수로 이름을 변경하여 공원으로 조성하였다고 한다. 군산호수공원 일대는 오래 동안 상수원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생태계가 그대로 보존되어 왔다. 수변산책로 주변은 보존 가치가 높은 다양한 습지식생환경으로 야생 동식물의 중요한 서식처이기도 하다. 둘레길을 걸어가야 아름다운 대나무 숲과 호반의 멋진 모습을 만날 수 있다. 군산호수공원을 돌아 나오는 길에 억새 숲으로 은빛 장관을 연출한다.

 

밀림 깉이 우거진 대숲

 

군산호수의 여러 풍경

 

 군산호수를 돌아 나오니 억새가 활짝 피어 나부끼는 곳이 있다. 하얀 억새가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을 보면 정녕 가을이라는 느낌을 느끼게 한다.

 

억새밭

 

호수공원 입구의 모습

 

 

 

 호수공원을 지나서 군산시의 외곽을 걸어가니 방송에서 자주 보던 백석교회의 표지가 보이고 그 길을 따라 계속 가니 당북초등학교가 나오고 외당사거리에 도착하여 이 코스는 끝이 난다.,

 

 외당사거리에는 숙박업소가 없어 사전에 조사해 둔 곳을 찾아가려니 버스편이 좀 늦고 드물다. 그래서 택시를 타고 군산시청 부근에 숙박업소가 엄청나게 밀접해 있는 곳으로 가서 숙박을 하면서 휴식을 취하고 내일을 기약한다.

 

서해랑길 52코스(심포항 - 망해사 - 진봉면사무소 - 만경낙조전망대 - 새창이다리)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서해랑길 52코스는 심포항에서 출발하여 언덕을 넘어 망해사에서 바다를 보고 길을 가면 엄청난 김제습지가 나온다. 그 습지를 빙 돌아나가서 진봉면사무소를 지나 만경강을 따라가면 만경낙조전망대가 나오고 계속 길을 가서 새창이다리를 건너서 끝이 나는 18.4km의 길이다.

 

52코스 안내판

 

 어제 저녁에 이 심포에 도착하여 시간도 있고 저녁도 먹기 위해서 심포항 해안을 잠시 걷다가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한잔 마시고 나와서 음식점을 보니 뜻밖에 중국음식점이 있어 오랜만에 그 집에 들어가서 짬뽕을 한 그릇 시켜서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일찍 길을 떠났다.

 

 만경강과 동진강이 서해와 만나는 지점에 조성된 심포항은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에 자리하고 있다. 예전에는 그 규모가 꽤 컸던 포구였으나 현재는 새만금간척지조성사업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다. 새만금방조제 공사가 끝나면서 이곳은 사실 바다로서의 운명을 다했다. 새만금방조제로 갇힌 거대한 호수로 변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우리나라 백합 생산의 60%를 차지하던 어항이었으나, 새만금사업으로 어업이 거의 중단되었다. 2019년 이후부터는 민물 조개인 재첩을 수확하여 "새만금 재첩"으로 판매하고 있다. 어민들의 치열한 생존공간이었던 갯벌은 요즘 체험학습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근처에 망해사가 있는데, 해거름녘 풍경이 일품이다.

 

심포항의 모습

 

김제시 표지

 

 아침에 해안에 나 있는 도로를 따라 조금 가니 진봉산으로 올라가게 한다. 언덕을 따라 올라가면서 동쪽을 보니 저 멀리서 해가 떠오르는 풍경이 보인다. 어디에서든지 해가 떠오르는 풍경은 멋있다.

 

 

진봉산을 올라가 잠깐 내려가니 진봉망해대라는 전망대가 있다.

 

 진봉망해대(進鳳望海臺)는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 뒷산인 나지막한 진봉산(進鳳山, 72.2m)에 있는 3층 규모의 전망대로, 서해에서 불어오는 해풍을 맞으며 멀리 바다 풍경과 만경평야를 동시에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진봉망해대는 남서쪽의 봉화산에서 시작하여 북동 방향으로 진봉산, 국사봉, 나성산으로 이어지는 진봉반도 북쪽의 산줄기에 있다. 북쪽은 만경강 하구에 해당하며, 군산시가 위치한다. 이곳에서 사방을 둘러보는 서해 바다의 풍경은 일품이다.

 

 진봉망해대에서 보는 사방 풍경

 

진봉망해대

 

 진봉망해대에서 아름다운 아침의 경치를 구경하고 산을 내려오니 망해사가 나타난다.

 

 진봉산 고개 넘어 깎은 듯이 세워진 기암괴석의 벼랑 위에 망망대해를 내려다보며 서서, 만경강 하류 서해에 접하여 멀리 고군산 열도를 바라보며 자리잡고 있는 망해사는 오랜 역사에 걸맞지 않게 규모가 초라한 편이다. 전하는 바로는 이곳은 본시 섬이었다 하여 642년에 부설거사가 사찰을 개창하여 수도하다가 입적하신 곳이라 하며, 그 후 754년에 당나라의 중 중도법사(일명 통장화상)가 중창하였으나 조선 시대 억불 정책으로 거의 폐허가 되었고 1609년에 진묵 대사(震默大師)가 중창하였다. 진묵 대사는 망해사에 머물면서 많은 이적을 남겼다고 하며 오늘날까지 널리 전승되고 있다. 그 후 여러 번의 중창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해의 섬들을 바라볼 수 있는 장소에 있고, 서해의 일몰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하여 망해사라 하였다고 한다.

 

 망해사에 있는 수령 약 400년의 팽나무 아래에는 1999년 가을에 세운 매향비(埋香碑)가 있다. 매향이란 1000년 뒤에 꺼낼 것을 기약하며 바닷물과 계곡수가 만나는 곳에 향나무를 묻어 복을 빌고 미륵불이 출연하기를 기원하는 불교 의식이며, 매향비는 그 기원과 향을 묻은 자리를 기록한 비석이다.

 

망해사

 

 이곳에서 망해사 쪽으로 발길을 돌리니 코스가 잘못되었다는 경고가 들린다. 지도를 보니 망해사 반대쪽으로 길을 가야 한다. 그래서 다시 길을 잡아 조금 가니 갯벌은 아닌 것 같은 습지가 펼쳐진다. 이곳에 이런 습지가 있었다니. 깜짝 놀랐다. 습지라면 잘 가꾸어 놓은 순천만이 대표적인데 이곳은 아직 사람의 손이 가미되지 안아 자연의 멋이 그대로 보였다. 이 길이 새만금바람길이라는 곳으로 습지 가에 제대로 난 길이 없어 그냥 자연의 길을 대부분 걷는 길이었다. 너무 낭만적인 길이다. 누구든지 한번쯤은 가 보면 좋을 것이다. 

 

새만금 바람길(전북천리길) 표지

 

 

 한 폭의 그림같이 느껴지는 습지를 계속 걸어가니 전선포 표지가 나온다.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에 있는 포구 전선포(戰船浦)는 옛날에는 지금의 해군기지와 같은 군항(軍港)으로서, 고려 후기에는 왜구와 접전을 벌였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만경강 입구에 위치해 있어 전라도를 적으로부터 지켜내는 요새의 역할을 하였으나, 1920년대 일본인들이 간척 사업으로 만든 전선포 제방으로 인해 일부는 농경지가 되고 일부는 해안이 되어 전선이 정박했던 포구의 흔적은 사라지고 없다. 지금은 전선포라는 작은 팻말을 세워 둔 것이 전부이다. 현재 전선포에는 습지 뒤에 10여 가구가 모여 있는 한적한 농어촌 전선포 마을이 있다. 남쪽에는 간척지 평야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으며, 북쪽에는 만경강을 사이로 군산시 대야들이 보인다

 

전선포 표지

 

김제 습지의 아름다운 풍경들

 

진봉방조제 표지

 

 습지를 벗어나 제방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만경강을 옆에 끼고 김제평야의 들판을 걸어가니 만경낙조전망대가 나온다. 하지만 나는 발걸음을 전망대로 가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 내가 지나는 시간이 낙조를 볼 수 있는 시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김제 들판

 

새만금 광역 탐방로 안내판

 

강가의 갈대와 억새

 

 

 

 계속 길을 가니 이름도 재미있는 새창이다리 표지가 나온다. 새창이다리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시멘트 다리라고 한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김제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평야다. 그리고 이 넓은 들에서 나는 쌀은 양과 맛에서 최고라고 알려졌었다. 그래서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제일 먼저 한 일이 김제의 질 좋은 쌀을 일본으로 가져가는 일이었다. 그래서 빼앗은 쌀을 보관할 창고를 새로 지은 곳이 이름 그대로 새로 지은 창고가 있는 곳이라는 지금의 신창마을이다.

그리고 그 창고에 쌓아둔 쌀을 실어간 항구가 군산이어서, 일제강점기의 군산은 북적거리는 풍요의 항구였다. 그런데 신창과 군산을 가로막는 교통상의 장애가 있었으니 바로 만경강이었다. 그래서 일제가 교통상의 장애를 해소하려고 서둘러 놓은 다리가 구 만경대교 혹은 지역말로 사창이다리, 새챙이다리라고 불리는 다리다. 새챙이다리, 사창이다리라는 명칭은 오랜 연원을 가진 강 연안의 거점이자 강의 이름인 신창진(新倉津)에서 유래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모든 정보를 종합하면 속칭, ‘새챙이다리라는 지역이름은 바로 배 나루인 신창진을 대체하고 바로 그 자리에 세워진 다리의 줄임말로 자연스럽게 그리 부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새창이다리는 김제의 쌀을 군산항으로 실어가기 위한 다리로 우리나라 농민들의 억장을 무너지게 했던 다리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그 다리가 아직도 끄떡없이 버티고 서 있다.

 

 새창이다리 입구에 들어서면 다리 입구에 아치를 만들어 새창이 다리라고 써여 있는데 다리 난간에 새겨진 다리 이름은 글자가 마모되어 잘 보이지도 않는 만경교라고 쓰여 있다. 그 옆에 풍요의 강, 만경강 이야기라는 입간판이 하나 서 있다.

 

이 다리는 지금은 붕괴 위험이 있어 자동차 통행을 금지하고 있으며 사람만 걸어서 건너가도록 허용하고 있다. 나무를 심은 커다란 돌 화분으로 차가 못 들어가게 막아놓은 새창이다리를 건너기 시작한다. 유유자적하게 편한 마음으로 한가롭게 다리를 건너면서 보니 김제의 관광명소를 소개하는 사진이 다리 양쪽 옆에 걸려 있다. 그중에서 나의 눈길을 끈 것은 수류성당이다. 내가 영화를 보는 것을 좋아하는데 예전에 본 영화 <보리울의 여름>의 촬영지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 영화시사회에서 배우 차인표씨에게 사인을 받은 기억도 있다. 나는 추억을 살리면서 이 다리를 건너고 있지만 일제강점기에 곡식을 수탈당하고 이 다리를 건너가던 사람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새창이다리와 그 주변 풍경

 

 새창이다리를 건너니 다리 입구에서 이 코스가 끝이난다.

 

 그늘에 앉아 잠시 쉬고 있으니 자전거로 여행을 하는 사람이 나에게 길을 묻는다. 하지만 나도 나그네인지라 갈을 알 수가 없다. 단지 내가 지도에서 본 것을 설명해 주고 쉬다가 다음 코스로 발을 옮긴다.

 

서해랑길 51코스(동진강석천휴게소 - 알콩쌀콩들녘체험관 - 성덕우체국 - 봉화산 -심포항)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서해랑길 51코스는 동진강석천휴게소를 출발하여 이름도 아름다운 알콩쌀콩들을 지나서 성덕우체국 주변에 가면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을 지나길을 걸어 나지막한 봉화산으로 올라가 산을 넘으면 심포항이 나타나고 여기서 끝이 나는 23.4km의 긴 길이다.

 

51코스 안내판

 

 석천휴게소라고 명명이 되어 있어 먹을거리나 음료수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도착하니 황량한 벌판이다. 아마 휴게소를 운영하기 위해서 건물을 지었는지 완공이 되지 않아 퇴락한 건물만 보이고 인적이라고는 전혀 없다. 다행히 쉴 정자는 있어 앉아서 요기를 잠깐 하고 동진강을 따라 길을 떠났다.

 

석천휴게소라는 이름의 폐허같은 건물들

 

장독과 호박의 정겨운 풍경

 

 길을 가면 아주 넓은 들판이 나온다. 동진강 옆의 들판이 이름도 특이한 '알콩쌀콩들판'이다. 쌀과 콩의 전국 최대 주산지인 동진강 권역에서 알찬 콩과 쌀이 나온다는 의미를 뜻하는 알콩쌀콩 들판은 쌀과 콩이 튀어나오는 듯한 모습으로 생동감 넘치는 마을과 넓은 들판을 뜻한다.

 

알콩쌀콩들

 

조그마한 배수 갑문

 

 

 우리나라 콩의 최대 산지라는 이름이 허명이 아니게 들판에는 콩을 심어 수확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여태까지는 콩을 이렇게 대량으로 심는 곳을 보지 못했기에 조금은 생소하였다. 이 들판을 걸어가니 성덕면이라는 표지가 보이고 길을 왼쪽으로 틀어서 나가니 아래의 한국기독교순교사적지라는 설명판이 있다.

 

남포 어린이집

 

 어린이 집을 지나 길을 조금 가니 시골 길을 걸으면서 좀처럼 보지 못했던 슈퍼가 보이고 식당이 있다. 지도에 의하면 성덕반점이라고 표시되어 있어서 처음에는 중국음식점인가 오인을 했는데 가까이 가니 문을 닫아 놓은 것 같았다. 여정을 시작하기 전에 항상 먹을 곳과 잘 곳을 검색하여 거기에 맞추어 걷고, 이번 여정에서 이곳에서 점심을 해결하려고 생각했는데 약간 난감했다. 그래도 문을 열어보니 다행히 문이 열리고 밥을 먹을 수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자리에 앉으니 주문도 받지 않고 그냥 돼지김치찌개를 가져다준다. 전혀 조금도 기분이 나쁘지 않게 집에서 밥을 먹듯이 편안하게 먹을 수 있었다. 밥을 먹는 도중에 아마 이 근방에서 공사를 하는 사람들인지 서넛이 들어와 점심을 먹는다. 정말 편안하게 집에서 밥을 먹듯이 맛있게 포식을 하였다. 아마 서해랑길을 걷는 많은 사람들은 이 잡에서 한 끼를 해결하고 가는지 주인아주머니가 길손들을 잘 알고 있었다. 주인아주머니와 여러 이야기를 하고 쉬다가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점심을 해결한 성덕반점

 

식당 앞의 슈퍼

 

넓게 펼쳐진 김제평야

 

 

 넓고 넓은 김제평야를 보면서 논밭 사이로 난 길을 걸어가면서 옛날에 우리나라에서는 이 김제평야에서만 지평선을 볼 수 있다는 말이 있었고 그 때 이 지방을 지나는 기차를 타고 가면서 넓은 들을 보던 생각이 났다 .들판을 지나고 거전마을을 지나니 봉화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온다.

 

 봉화산(烽火山)은 김제시의 진봉면 심포리에 위치한 산으로 높이는 85m이며, 남서쪽에 거전마을이 위치하고, 북동쪽에 심포항(深浦港)이 위치한다. 서해를 바라보는 봉화산(烽火山) 정상에 봉화대가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보이는데 정상부에 봉수대의 흔적이 있었으나 지금은 헬기장으로 사용하면서 거의 없어졌다. 봉수대는 고려시대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되며, 봉화산의 봉수대가 조선시대에 이르자 일반 백성에게 피해를 입힌다 하여 계화도로 옮겼다는 설이 있다.

 

봉화산 숲길 안내도

 

 봉화산 숲길 안내도가 있는 곳에서 봉화산으로 올라가려니 길을 안내하는 리본도 보이지 않고 GPS에 나오는 방향에는 길이 없다. 아마도 여름이 지나면서 잡풀이 우거져 길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잡풀을 헤치고 가면서 멀리 보니 리본이 보였다. 그래서 길이 아닌 언덕으로 잡풀과 숲을 헤치고 리본이 있는 곳에 도착하여 길을 걸었다. 길을 걸으면서 여름이 지나면서 잡풀이 우거져 길을 찾을 수 없는 곳이 숱하게 많이 보았다. 코리아둘레길 지킴이들이 있다고 알고 있는데 너무 무신경한 것 같아 아쉽게 생각이 되었다.

 

봉화산 올라가는 길에서 보는 김제평야

 

봉화산 봉수대터

 

봉수대 옆에 있는 새만금 바람길 안내도

 

 봉화산을 내려와 심포항으로 가니 주변에 공사가 한창이다.항구에 도착하기 전에 공사판을 지나니 항구 입구에서 이 코스는 끝이 난다.

 

심포항 입구의 표지

 

 짧지 않은 이 길에서 사람들의 따뜻한 인정도 맛보았고 넓게 펼쳐진 김제평야에서는 풍요로움도 느낄 수 있었다. 

 

 오늘은 이곳에서 숙박을 할 예정이었기에 미리 아침에 전화를 해 둔 모텔을 찾아가서 몸을 씻고 나와 저녁을 먹고 내일을 기약하며 쉰다.

 

서해랑길 50코스(부안군청 - 신흥버스정류장 - 고마농촌테마공원 - 창동경로당 - 동진강석천휴게소)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서해랑길 50코스는 부안군청 앞을 출발하여 도로를 따라 가다가 언덕을 넘어 다시 도로를 따라가서 또 농촌 길을 걸어가면 고마농촌테마파크가 나오고, 테마파크의 고마제를 우회하고 저수지 위의 테크를 통과하여 농촌 길을 계속 가서 만나는 동진대교를 지나 동진강석천휴게소까지 가는 11.1km의 짧은 길이다.

 

50코스 안내판

 

 아침 일찍 숙소를 출발하여 부안군청 앞에 도착하여 오늘의 여정을 시작한다. 부안군청 앞에서 큰 도로를 따라 제법 걸어가서 부안역사문화관이라는 작은 건물이 나온다. 어떤 의미가 있는 건물인지는 모르겠으나 역사문화관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는 너무 초라했다. 계속 도로를 따라 조금 걸어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가니 석정문학관이 나온다.

 

부안군청

 

부안역사문화관

 

사람도 차도 없는 아침 거리

 

석정문학관 표지

 

 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니 신석정의 고택이 나온다. 이 집의 주인이었던 신석정(辛夕汀)은 반속적(反俗的)이며 자연성을 고조한 동양적 낭만주의에 입각한 시를 썼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부안 출신의 시인으로 본명은 신석정(辛錫正). 아호는 석정(夕汀, 釋靜, 石汀) 외에 석지영(石志永), 호성(胡星), 소적(蘇笛)을 쓰기도 하였다. 우리나라 고등학교에서는 신석정 시인의 시가 입시에도 자주 나오기 때문에 자주 언급이 되는 시인이다.

 그는 부안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향리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그의 시작활동은 1924419일자 조선일보에 소적이라는 필명으로 기우는 해를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뒤 1931시문학지 동인이 되면서부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전개하였다.

 대표작으로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꽃덤불>, <들길에 서서>,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아직은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등이 있다.

 김기림은 그를 현대문명의 잡답(雜踏)을 멀리 피한 곳에 한 개의 유토피아를 흠모하는 목가적 시인이라 평가하였다.

 

 신석정고택이라는 집은 부안군 부안읍에 있는 시인 신석정과 관련된 주택으로 1993년 전라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신석정은 은행나무, 벽오동나무, 자귀나무, 측백나무로 울타리를 두른 이곳에서 시상(詩想)을 다듬으며 창작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신석정이 시인으로서 꿈과 청춘을 키우며 첫시집 촛불과 제2시집슬픈목가를 탄생시킨 곳이다.

 신석정이 이 집을 마련한 것은 1935년이다. 그는 시문학 동인이 되어 본격적인 시작(詩作) 활동을 하였으나 어머님의 부음을 받고 귀향하였다. 그 후 이 집을 마련하여 분가하였으며 스스로 청구원(靑丘園)이라 이름지었다. 1952년 전주시 노송동으로 이사하기 전까지 신석정이 이 집에서 살았다.

 원래는 초가 3칸이었으나 4칸의 목조기와집으로 개수하였다.

 

고택 주변에는 석정 문학관이 함께 조성되어 있다.

 

신석정고택과 그의 시비

 

석정문학관

 

언덕으로 올라가기 전의 별장과 같은 집들

 

 

 언덕을 넘어 길을 따라 조금 가니 제법 큰 저수지가 나온다. 고마제라고 알려져 있는 동고저수지다.

 부안군 동진면 내기리에 있는 대규모 저수지로 고마제, 고마지, 동고지라고도 한다. 고마 지구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농업 생산력을 높이기 위한 저수지 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19581230일 완공되었다. 제방은 길이 746m, 높이 8.5m, 계획수심 6.2m으로 제법 큰 저수지다. 주위가 한적하고 울창한 숲에 둘러싸여 있어 주말이면 가족 단위의 낚시인파가 많이 찾아온다고 한다.

 저수지 주변에 농촌 관광농원, 녹지 공원, 수변 테마 공원 등이 조성되어 있다.

 

저수지 전경

 

지금은 피어 있지 않은 연꽃군락지

 

고마지구농촌테마공원 안내판

 

고마저수지에 조성된 농촌테마공원은 자연과 문화, 사회자원을 토대로 다양한 형태의 테마공원으로 조성되어 지역특산물인 뽕 관련 산업 홍보와 부족한 지역주민 휴양시설 확보 등 농촌지역 활성화에 기여하고 있다.

 

못줄다리 설명

 

못줄다리

 

못줄다리와 고마제 전경

 

솟대

 

저수지 주변

 

 

 고마제의 풍경을 즐기면서 저수지를 가로지르는 테크 길을 걷기도 하고 저수지 둘레를 따라 걷기도 하며 저수지를 벗어나서 누렇게 익어 있는 벼를 보면서 마음의 풍요를 느끼며 길을 가니 내가 어릴 적에 보던 떡방앗간도 보이고 전형적인 농촌마을이 있다. 이 마을들을 지나 가니 하천이라기보다는 강의 모습이 보인다. 동진강이다.

 

 동진강(東津江)은 정읍시 산외면의 상두산(象頭山, 575m)에서 발원하여 김제평야를 지나 새만금 사업지구로를 지나 서해로 흘러드는 강으로 유로연장이 44.7인 짧은 강이다.

동진강(東津江)이라는 명칭에서 동진(東津)은 옛 부안 고을의 동쪽에 있던 동진 나루를 뜻한다. 동진의 별칭인 통진(通津)은 황해로 통하는 나루터를 뜻하는 이름으로 풀이된다.

 동진강의 하류에는 우리나라 최대의 곡창지대인 김제평야와 계화도 간척지의 드넓은 농경지가 있다. 동진강 유역은 대부분 평지여서 비옥한 농경지를 이루고 있다.

 

 

 동진강을 가로지르는 동진대교를 건너니 동진강석천휴게소가 나오고 여기서 50코스는 끝이 난다.

 

 잠시 쉬다가 다음 코스로 걸음을 옮긴다.

서해랑길 49코스(부안신재생에너지테미파크 - 구암리지석묘군 - 신월경로당 - 매창공원 -부안군청)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서해랑길 49코스는 부안신재생에너지테마파크를 출발하여 오랜만에 바다를 벗어나 육지 내륙 길을 걸어 간다. 농촌의 길을 여유롭게 걸어가면 뜻밖의 구암리지석묘가 나오고, 계속 길을 가면 부안읍으로 들어간다. 읍길을 따라가면 매창공원이 나오고 공원을 지나 부안군청 앞에서 끝이 나는 19.2km의 길이다.

 

49코스 안내판

 

인적이 없는 마을

 

 이 날은 안개가 엄청 자욱하게 끼여서 새로운 세상을 걷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가 몇 년째 길을 걷고 있는데 이런 안개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안개 자욱한 들판을 지나고 언덕길을 지나니 구암리라는 동네가 나온다.

 

안개 낀 들판

 

 구암리에 들어가니 지석묘공원이 나온다.

 

 지석묘란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무덤으로서 고인돌이라고도 하며, 책상처럼 세운 북방식과 큰 돌을 조그만 받침돌로 고인 남방식이 있다. 한반도에는 전 세계에 있는 지석묘의 40%가 넘는 40,000여 기가 존재한다고 한다. 이 중 20,000여 기가 호남지역에 위치해 있는데, 호남지역의 지석묘는 바둑판식(남방식) 지석묘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구암리에는 고인돌이 총 13기가 있었으나 현재는 10기만 남아있다. 대체로 자연암석을 떼어내 덮개돌로 사용한 바둑판식 지석묘로, 뚜껑돌이 큰 것은 길이가 6.35m, 너비 4.5m, 높이 70-100에 받침돌 8개를 돌아가며 세웠다. 보통 4개의 받침돌을 이용하는데 반해 8개의 받침돌을 돌려 다른 지역 고인돌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다. 구암리지석묘군(龜岩支石墓群)1956년에 처음 조사되었고, 1963121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03호로 지정되었다. 처음에는 민가의 울타리 안에 있던 것으로 처음 조사할 때는 모두 13기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현재 10기가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덮개돌의 모양이 타원형에 가깝고 가운데로 갈수록 두꺼워져서 거북이처럼 보인다. 거북이를 닮은 지석묘는 마을 사람들의 삶과 오랜 기간 함께 해왔으며 이로 인해 마을 이름도 구암리(龜巖里), 거북바위마을이라고 불리고 있다.

 

공원 입구의 팽나무

 

거북 모양의 지석묘

 

지석묘공원의 여러 모습

 

 지석묘를 구경하고 나오며 마을을 보니 아주 평화로운 마을이다. 구암리 지석묘군은 원래 가정집의 울타리 안에 있었다고 한다. 오래된 마을 사이사이를 이어주는 돌담길과 시골집들 그리고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석묘와 함께 오랜 세월을 살아온 것이다. 하지만 지석묘 주변이 공원이 형성되면서 지석묘는 구암리 사람들과는 약간은 거리기 있는 느낌을 준다. 문화유산을 보호한다는 미명이겠지만 사람들과 문화유산이 함께 어울려 지내는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아쉽게 느껴지기도 한다. 사실 솔직하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지석묘를 보러오겠는가를 생각하니 마을 주민들이 이 지석묘와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광경이 더 자연스러울 수 있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가을 들판

 

거두어 놓은 콩

 

새모양의허수아비

 

 멀리 부안경찰서가 보인다. 이제부터 부안읍으로 들어선 것이다. 길을 따라 가니 길 이름이 매창로이다. 그리고 가로수가 내가 봄이 되면 꼭 아름답게 핀 꽃을 보러 가는 이팝나무다. 아! 봄에 이 거리를 걸으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하고 생각하면서 계속 길을 가면서 이 길이름에 대해 궁금해 하였다.

 

매창로 표지

 

이팝나무 가로수 길

 

부안생활문화센터 건물

 

 도로를 따라 제법 가니 부안이라는 표지가 보이고 공원이 나타난다. 이름이 매창공원이다. 조선시대의 기생이면서 문인이었던 매창을 생각하며 이곳이 매창의 고향인가하고 생각하다가 주변의 내 또래로 보이는 사람들이 있어 물으니 이곳이 매창의 고향이고 옆에 매창의 묘가 있다가 가르쳐 주었다. 매창의 시를 엄청 이야기했으면서 매창의 고향인지를 몰랐다니 나도 참 모자라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길을 조금 가니 매창을 기려서 만든 매창공원이 나온다.

 매창공원(梅窓公園)은 부안군 부안읍 서외리에 있는 부안 출신의 여류 시인이자 명기였던 이매창을 추모하기 위해 조성한 공원이다.

 이곳은 원래 공동묘지가 있었던 곳이었는데 도시가 확장되면서 묘를 이전하게 되었으나 매창을 사랑하는 지역민들의 반대로 이매창의 묘와 부안 출신 명창 이중선의 묘만 남게 되었다고 한다. 1983824일 이매창 묘가 전라북도 기념물 제65호로 지정되었고, 2001년 전라북도 부안군이 매창의 묘가 있는 곳에 시문학 공원을 조성하였다. 2011년 매창 공원을 확장하는 기본 계획을 수립했고, 2013년 공원 조성 계획 수립을 완료하여 공사에 들어가 2019년 매창 사랑의 테마 공원, 매창 테마관과 부속 광장 등의 완공과 함께 공원 영역이 확대되며 부안의 중요 문화 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다. 공원을 문화공간으로 만든 아주 좋은 예로 생각된다.

 

매창공원 표지석

 

이중선의 묘

 

 공원을 들어가니 입구에서 먼저 반기는 것이 이중선의 묘이다. 우리에게 이화중선은 잘 알려져 있지만 이중선은 그렇게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중선은 부안의 뛰어난 명창이었다.

 

 이중선(李中仙)은 대한제국 말기와 일제강점기 때 활약했던 판소리 여류명창으로 본관은 경주다. 당시에 추월만정, 사랑가로 가장 명성이 높았던 이화중선(李花中仙)의 여동생이기도 하다. 자기만의 독특하고 애절한 한이 서린 흥타령과 육자배기 가락을 구성지게 잘하여 한이 어린 민족의 소리를 불렀다고 전해진다. 언니의 명성에 가려 크게 대중적인 인기를 얻지는 못하였으나 뛰어난 공력을 가진 명창이었다고 전해진다. 1932년 갓 30세를 넘긴 나이에 폐병으로 사망하였다.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매창공원에 묘소가 있으며, 19884월 국악인협회와 국악동호인들에 의해 새롭게 정비된 묘역에 돌비석이 세워졌다.

 

매창에 대한 허균의 글

 

매창의 시를 새긴 비

 

 이 돌비를 보고 조금 옆에 있는 매창의 묘를 찾아갔다.

 

 이매창(李梅窓, 1573~1610)은 조선 선조(宣祖) 때의 여류 시인으로 이름은 계생(癸生, 桂生) 또는 향금(香今)이라 했으며, 자는 천향(天香)이고 호는 매창(梅窓)이다. 전라북도 부안의 아전 이탕종(李湯從)의 딸로 태어나 어려서 어머니를 잃었다. 매창이 기생으로 살아간 것으로 보아 매창의 어머니는 부안현에 소속된 관비(官婢)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한테 글을 배워 시()에 뛰어났으며, 가무에도 소질이 있었고 특히 거문고를 잘 탔다고 한다.  황진이(黃眞伊)와 쌍벽을 이루는 조선의 명기(名妓)였고, 시문과 거문고에 뛰어난 유희경(劉希慶), 허균(許筠), 이귀(李貴) 등과 교우가 깊었다. 1610년에 38세의 나이로 죽어서 매창뜸에 거문고와 함께 묻혔으며, 죽은 지 45년 만인 1655년 묘비를 세웠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사랑했던 촌은 유희경(村隱 劉希慶)이 서울로 돌아간 뒤 소식이 없자 읊은 시조로 고등학교 때 대부분이 배웠던 작품이 있다.

 

이화우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져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1668에 개암사(開巖寺)에서 매창의 시 58편을 모아 매창집(梅窓集)을 펴내었다. 매창집은 현재 세권이 남아있는데 서울의 간송미술관에 두 권, 미국의 하버드 대학 도서관에 한 권이 보존되어 있으며, 1956년에 역시 부안이 고향인 시인 신석정이 최초로 대역한 매창집이 있다.

 매창의 묘제는 매년 음년 45일에 부풍율회 회원들에 의하여 지내지고 있다.

 

매창의 묘

 

 

 매창에 대한 여러 가지 소회를 생각하며 길을 돌아 공원 밖으로 나가니 바로 옆에 가을의 전령 국화전이 열리고 있다. 넓은 공원 부지에 형형색색의 모양으로 꾸며진 국화를 올 가을에 처음 접하는 것이다. 내가 꽃을 키우지는 못해도 보는 것을 좋아하여 곳곳에 꽃구경을 가는데 올해 가을에는 처음 보는 국화의 무리다.

 아름답게 피어 있는 국화를 보고 즐기며 공원을 돌아 나갔다.

 

국화가 피어 있는 모습

 

 국화전시를 하고 있는 곳을 돌아나가니 주변에 습지공원도 있고, 여러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그 중 특이하게 황토길 운동장을 만들어 이곳 주민들이 그 황토길을 걷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참 참신한 공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창의 시를 새긴 문

 

습지공원의 여러 모습

 

황토길 운동장

 

 이곳을 지나 부안읍내를 걸어가다가 보니 옆에 추어탕 집이 보인다. 무언가 포스가 느껴져 조금 늦었지만 점심을 먹으려고 들어가니 제법 알려진 집 같았다. 추어탕을 한 그릇 시켜서 맛있게 먹고 인사를 하고 다시 길을 떠났다. 추어탕도 맛있었고 특히 이 집의 반찬 중에서 어리굴젓은 나에게는 아주 입맛에 맞는 맛있는 반찬이었다. 부안을 가는 사람에게 권할만한 집이다.

 

추어탕집

 

 추어탕집에서 조금 가니 서림공원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온다. 이제 이 서림공원을 통과하면 부안군청에 도착하는 것이다.

 서림공원은 부안 읍내 북쪽 성황산에 위치해 있는 산으로 부안군민들이 자주 이용하는 산책코스이다.

이 서림공원과 임정유애비는 2016년에 국가산림문화자산으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국가산림문화자산이란 산림 생태, 경관, 문화적으로 보존 가치가 높은 유형 또는 무형의 자산을 산림청이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는 것이다. 서림공원의 서림이란 관아의 서쪽에 있는 숲이란 뜻으로 임정유애비는 숲과 정자를 가꾸었던 현감 조연명과 이필의의 공직을 치하하고 기념하기 위해 세운 기념비다.

 

울창한 서림공원 숲

 

서림공원 정자에서 보는 부안읍내

 

 

저 멀리 보이는 부안향교

 

 1414(태종 14)에 창건된 상소산 언덕에 자리하고 있는 부안 향교는 조선시대 유림의 구심점으로 부안 지역의 교육과 교화의 중심이 되었던 곳으로 전라북도 문화재 자료 제93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현재 건물로는 대성전, 명륜당, 만화루, 양사재, 동재, 서재 등과 입구에 홍살문과 하마비가 있고 대성전에는 5(五聖), 송조4(宋朝四賢), 우리나라 18(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연리목

 

서림공원의 매창시비

 

서림공원 안내도

 

 이 서림공원을 돌아나와 조금 내려가니 부안군청이 보이고 여기서 이 코스는 끝이 난다.

 

 이 코스에서는 해안의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 문화의 여러 흔적을 보는 길이라 더 의미있게 느껴졌다.

 

 이 부안군청에서 조금 길을 내려가 숙소를 정하고 오늘의 여정을 마쳤다.

 

서해랑길 48코스(변산해변버스정류장 - 새만금홍보관 - 해창쉼터 - 부안신재생에너지테마파크)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서해랑길 48코스는 변산해변버스정류장이 출발점이라 두루누비에는 나오지만 출발점은 사랑의 낙조전망대이다. 이곳에서 출발하여 해안에서 조금 들어온 길을 따라 걸으며 새만금홍보관과 해창쉼터를 지나 부안신재생 에너지테마파크에 이르는 10.2km의 아주 짧은 길이다.

 

48코스 안내판

 

 전날에 변산해변에 도착하여 해넘이를 구경하고 숙박하고 아침 일찍부터 길을 떠났다. 숙소에서 제법 걸어 사랑의 낙조전망대에서 이 코스를 시작하여 해안도로를 따라 길을 가면 펜션단지가 나타난다.

 

변산의 해안

 

 도로를 따라 가니 갑자기 방향을 틀어 조그마한 길로 내려가 해안으로 가게 인도한다. 좁은 오솔길을 걸어가니 뜻밖에 패총이 있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이 방면에 흥미가 많아 여러 패총을 직접 답사도 하고 파 보기도 하였기에 반가웠다. 그런데 이 패총은 내가 일반적으로 보았던 패총이라기보다 밭과 같은 모양을 띠고 있었다.

 

 부안군 변산면 대항리에 있는 대항리패총(大項里貝塚)은 변산해수욕장에서 북쪽으로 약 1km 떨어진 합구미 마을 동쪽 산 밑 밭에 있다. 바닷가에 접한 밭이 파도에 깎여 낭떠러지를 이루자 지층이 드러나 1947년 발견되었다. 규모는 남북 약 14m, 동서 약 10m이며, 130cm 깊이의 암반에 이르기까지 연속적으로 층위가 쌓여있다. 이 패총은 전라북도 지역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조개더미로 신석기에서 청동기시대에 걸치는 대규모 유적이나 정식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아 유적의 정확한 성격은 알 수 없으나 서해안 지역의 패총문화와 신석기인의 생계와 어로활동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대항리패총은 고고학적 자료로서 활용 가치가 있어 1981411일 전라북도의 기념물 제50호로 지정되어 보전하고 있다.

 

대항리패통으로 가는 이정표

 

패총 앞 바다

 

대항리패총의 모습

 

 

 대항리패총을 지나 그림같은 서해안의 아름다운 해안이 만들어내는 갯벌과 오밀조밀하게 빚어내는 해안을 즐기면서 제법 길을 가니 변산마실길 시작점이 나온다. 특별히 이름도 마실길이라 정감이 더 가는 길이다.

 

변산마실길 시작점 표지

 

변산마실길 안내판

 

부안변산마실길 66km의 시작점 부근

 

 저 밑에서부터 부안변산마실길을 거의 다 걸었는데 내가 걸은 코스는 반대로 걸어온 것이다. 원래는 여기서부터 아래로 가는 코스지만 서해랑길의 코스는 그 길을 꺼꾸로 걸어오는 길이니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곳에 아주 큰 고무신 모형이 돌로 만들어져 있다. 아마도 지난 날의 어려운 시절의 추억을 상기하면서 느긋하게 이 길을 걷자는 의미가 들어 있다고 생각되었다. 내가 살아온 시대를 상징하는 검정고무신 조형물을 보며 잠시 추억에 잠겼다.

 

 이곳을 지나면 올해(2023년) 우리에게 좋지 않은 뉴스로 한 때를 장식했던 유명한 새만금이 시작된다. 아주 넓은 간척지로 끝이 보이지 않는 곳이다. 아직 어떻게 사용될지는 확정되지 않았지만 우리가 이런 땅을 간척했다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다. 길을 가니 먼저 새만금간척박물관이 나온다.

 

새만금 간척박물관

 

 박물관을 지나니 본격적으로 새만금의 넓은 벌판이 보이기 시작한다. 아직 완전이 간척되지는 않은 흔적이 곳곳에 보이며 길게 뻗은 방조제 길도 보인다. 하지만 서해랑길은 방조제로 가지 않고 새만금을 우회하는 길이다.

 

 

 새만금 개발사업은 1960년대 말 심각한 가뭄과 세계적인 식량 파동을 계기로 안정적인 식량자급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새만금이라는 이름은 만경평야의 ""자와 김제평야의 ""자에 새롭게 확장한다는 뜻의 ""자를 덧붙여 만든 신조어로, 만경과 김제평야와 같은 옥토를 새로 만들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새만금 사업은 세계 최장의 방조제 33.9Km를 축조하여 부안과 군산 앞 바다를 매립하는 엄청난 공사였다. 이 간척지에 경제와 산업, 관광을 아우르는 동북아 경제중심지를 건설할 계획이었는데 지금은 뜻대로 되지 않아 안타깝기만 하다.

 

새만금방조제 표지석

 

 

 길을 따라 조금 가니 새만금홍보관이 나온다.

 

 새만금 홍보관은 우리나라의 기술력과 도전정신을 바탕으로 서해안 바다 위에 지어진 새로운 땅 새만금에서 앞으로 일구어 나갈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과 가능성을 공유할 수 있는 전시를 기획하는 곳이다. 또 자연과 인간의 어우러져 조화로운 삶을 일구어내는 곳을 희망하는 새만금 개발사업의 궁극적 모토를 내포하는 주제로, 개발중심의 도시형성이 아닌 지속가능한 친환경적 삶터의 개발을 지향함으로 알고 함께 살아갈 우리의 새 땅의 미래를 구상하여 알리고자 하는 곳이다.

새만금홍보관

 

간척지에 있는 장승

 

 

 길을 따라 가는데 10m 앞도 보이지 않게 안개가 자욱하게 끼었다. 앞이 잘 보이지는 않지만 길을 따라 계속 가니 길가에 만국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아마도 올해에 이곳에서 개최된 세계 잼버리에 참가한 국가들의 국기인 듯했다.

 

 길을 따라 가니 부안신재생에너지테마파크에 도착한다.

 

 20116월 세계 최장 33.9km의 새만금 방조제의 부안군 하서면에 신재생에너지테마파크를 조성하여, 고갈되지 않는 신재생에너지 세상을 꿈꾸고 만들어진 곳이다. 신재생에너지테마파크는 21C 환경 보존과 녹생성장의 기틀아래 국제신재생에너지산업의 첨병역할을 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이곳에 있는 연구소들은 세계 최첨단시험시설을 갖추고 기업의 신기술과 새로운 제품의 테스트를 매개로 대학, 과학자, 기업 개발자가 어우러져 신재생에너지 기술발전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무슨 의미의 조형물인지???

 

 

 신재생에너지테마파크를 통과하여 올라가니 경로단이 보이고 이 코스가 끝이 난다. 코스가 끝나는 지점에 쉼터가 있어 잠시 쉬면서 간단히 간식을 먹고 다음 길을 떠난다.

 

 이 코스는 아주 짧은 길이지만 굉장히 정감이 가는 곳이 많은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