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랑길 98코스는 검암역 광장에서 시작하여 경인아래뱃길 위로 난 고가도로를 걸어 독정역을 거친다. 거기에서 이름도 정겨운 힐메산으로 올라가서 가볍게 지나고 마전역을 지나 가현산으로 올라가서 김포시의 가현산 입구에서 끝이 나는 11.7km의 짧은 길이나 그렇게 쉽게 걸을 수 있는 길은 아니다.
98코스 안내판
어제 저녁에 인천 서구청 주변에서 인천에 사는 지인과 회포를 나누면서 가볍게 소주를 한잔하고 푹 쉬고 아침에 일어나 검암역 광장으로 와서 98코스를 시작한다. 광장에서 출발하여 잠시 길이 헷갈려 머뭇거리다가 고가도로 위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걷기를 시작한다. 고가도로 위를 걸어가야 한다는 생각은 미처 못하고 약간 머뭇거렸다.
검암역
고가도로는 경인아라뱃길 위로 난 길이라 길을 걸으며 보는 아라뱃길이 제법 볼만하다. 서천교에서 뱃깅의 동쪽을 보니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다.
경인아라뱃길은 2012년 5월 25일 개통한 국내 최초의 내륙 운하로 김포 한강에서 인천 서해 바다까지 연결된 물길로, 아라뱃길의 ‘아라’는 우리 민요 ‘아리랑’의 후렴구 ‘아라리오’에서 따온 말이다. 행주대교(서울시 강서구 개화동) 인근 아라 한강갑문에서부터 시작하는 물줄기는 김포시를 지나 인천시 계양구를 거쳐 인천시 서구를 통해 바다로 나아가, 서해와 한강을 잇는 우리 민족의 멋과 얼, 정서와 문화가 흐르는 뱃길이다. 경인아라뱃길에서는 수상에서는 유람선, 요트, 카누 등의 레저를 체험할 수 있고, 수변공간에서는 전망대, 함상공원, 문화관 등 문화시설을 관람하거나, 18Km 뱃길 수변을 따라가며 산책, 피크닉등을 할 수 있다.
주운수로는 인천시 서구 오류동(서해) ~ 서울 강서구 개화동(한강)에 이르는 18km (방수로 구간 14.2km 포함) 이며, 주민생활 편의를 위해 주운수로에 평균 1km 간격으로 횡단교량을 건설했다.
아라뱃길에는 총16개의 다리가 있는데, 다리의 형식은 여객선과 다리 위에서 뱃길 조망시 시야를 방해하지 않고 개방감을 느낄 수 있도록 주로 거더교 형식으로 건설되었다.
서천교에서 보는 아라뱃길
아라뱃길 위로 난 고가도로를 내려와서 시내를 걸으면 독정역이 나오고 조금 지나서 이름도 정겨운 힐메산으로 들어간다.
독정역과 완정역 사이의 남북으로 이어진 할메산은 고도 105m의 낮은 산이지만 본디 이름으로는 큰(한) 산(뫼)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강화 문수산으로 이어지는 한남정맥 구간으로, 산 자체보다는 산맥의 의미가 강하게 투영된 이름을 지녀 당하동 사람들의 뒷동산 쉼터로 자리매김해 가고 있다.
이름도 재밌는 할메산의 이름을 누가 정했는지는 모르지만 워낙에 변형되어 불리는 이름이 많으니 곧이곧대로 파악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데도 할머니 할아버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정겨운 산이다.
야트막한 할메산을 오르니 날이 몇일 따뜻해서인지 올해 처음 보는 진달래가 보인다. 아직 진달래가 피는 때가 아닌데 벌써 따뜻한 양지녁에 피었다.(내가 이곳을 지난 일시는 3월 23일이다.) 올해 처음 보는 진달래라 사진을 찍어 곳곳에 보내니 모두들 봄이 왔는가 보다고 감탄을 하였다.
양지에 핀 진달래
할메산 안내도
할메산을 내려와 검단도서관 옆을 지나 아파트 단지를 계속 지나가면 현무체육공원이 나오고 뒤이어 가현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타난다.
현무체육공원
가현산(歌鉉山)은 인천광역시의 서구와 경기도 김포시 양촌면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는 215m의 나지막한 높이의 산이다. 고려시대부터 산의 형세가 코끼리 머리와 같이 생겼다 하여 '상두산', 칡이 번성한다 하여 '갈현산'이라고도 불렸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서해바다의 빼어난 풍광을 감상하며 거문고를 타고 노래를 불렀다 하여 '가현산'이라 고쳐 불렀는데 이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안성 칠장산에서 시작해 김포 문수산까지 이어지는 한남정맥을 잇는 산들 중 하나로, 등산 난이도가 평이하면서도 정상의 풍광이 좋아 많은 등산객들이 즐겨 찾는다.
예전에는 서해바다가 가까워 풍광이 매우 좋았으나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바다가 멀리 떨어져 예전만큼은 아니라고 한다.
세자봉
가현산 정상
가현산 수애단 안내
정상의 팔각정
가현산 정상 팔각정에서 가현산을 내려오면 큰 도로가 보이고 그 도로를 가로지르는 육교가 놓여있고 거기에서 98코스는 끝이 난다. 아무 것도 없는 황량한 산의 초입에서 다음 코스가 시작하는 안내판이 서 있어 다소 황당하게 느껴지는 코스였다.
서해랑길 97코스는 대우하나아파트버스정류장에서 출발하여 천마산 계양산둘레길을 지나 피고개산을 넘어서 검암역에 도착하는 14.3km의 비교적 짧은 길이지만 쉽게 걸을 수 있는 길이 아니고 상당히 어려운 길이다. 97코스 안내판을 보면 난이도를 매우 어려움이라 표시해 놓았는데 그 안내가 정말로 느껴지는 곳이니 조심해야 한다.
97코스 안내판
대우하나아파트버스정류장에서 아파트로 들어가서 목이 말라 슈퍼에서 음료수를 하나 사서 마시면서 조금 쉬다가 아파트를 통과하여 천마산으로 올라간다.
천마산 안내도
천마산(天馬山)은 서구와 계양구를 가르는 산으로 서구 공촌동, 심곡동과 계양구 효성동 사이에 걸쳐 있는 산이다. 이 산에는 ‘천마와 아기장수’의 전설이 전해오며 오랫동안 ‘철마산’으로 잘못 불리웠는데 그 이유는 부평의 향토사학자인 고 조기준 선생에 따르면 1916년 조선총독부가 토지조사사업을 위해 세부 측량 때 도면에 ‘철마산’으로 표기하면서 ‘천마산’이 ‘철마산’으로 잘못 전해졌다고 한다.
천마산을 오르면서 남파랑길을 걸으며 만난 인천에 사는 지인에게 전화를 하니 천마산 정상에서 산불지킴이를 하고 있으니 정상에서 만나자고 하였다.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이라 산을 계속 걸어가면서 정상부의 육각정에 도달하니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전화를 하니 다른 정상부에 있는 것 같은데 전화가 제대로 통하지 않는 지역이라 간단히 통화하고 정상을 향해 갔다. 산에서 만나지 못하면 나중에 검암역에서 만나기로 미리 이야기를 해 두었기 때문이다.
천마산등산로 안내판
천마바위 설명
천마산 정상 표시와 설명
몇 개의 봉우리를 넘어가니 중구봉 팔각정이 보이고 그곳에서 지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이라 반가운 마음으로 여러 이야기를 하고 나중에 검암역에서 만나기로 하고 나는 길을 계속하고 그는 근무를 하러 갔다.
중구봉 표시
이정표
천마산을 내려오니 이어서 계양산이 나탄나다. 그리고 중심성이라는 표시가 보인다. 그런데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성같은 것은 보이지가 않았다. 그래서 이리저리 여러 번 헤매다가 성 찾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발을 장미원 쪽으로 돌렸다. 이 여정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 글을 쓰면서 중심성을 찾아보니 다음과 같았다.
중심성(衆心城)은 인천시 계양구와 서구의 경계에 위치하던 둘레 471m의 성이다. 1883년 고종의 명으로 축조되었으나, 1914년 헐렸다. 성이 있던 경명현(景明峴, 징매이고개)는 서해안부터 한강까지 모두 조망되는데다가 도성으로 통하는 요충지였다. 현재는 징매이고개 생태통로 인근에 표지석이 설치되어 있다.
중심성 표시
중심성 표시에서 길을 내려가니 계양산장미원이 나타난다. 계양산장미원은 계양구 계양산 일대에 조성된 대규모 장미 공원으로 면적 4,667㎡에 장미 67종 11,366주와 금낭화 등 야생화도 13종 12,000여 본에 달하는 꽃을 심어 놓았다. 벽천분수와 물레방아, 원두막과 수로 등 시설물도 다양하게 설치하여 여유 있게 산책하면서 마음껏 꽃밭을 감상할 수 있도록 마련하였다. 하지만 시절이 아직은 꽃이 피는 계절이 아니라 꽃구경은 하지 못하고 둘레를 돌아 내려갔다.
계양산장미원의 여러 모습
계양산장미원을 지나서 시내를 조금 걸어가니 경인여대가 나타난고 계속가니 계양문화회관과 계양산성박물관이 나오고 그 옆으로 계양산 둘레길로 올라가는 표시가 있다.
계양산성박물관
계양산은 해발 395m로 인천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봄엔 진달래 그리고 가을이면 단풍이 멋스러운 곳이다. 수도권의 많은 등산객이 찾는 숲으로 숲 탐방로, 계양산성 치유의 숲과 여러 개의 등산로가 조성되어 있다. 계양산 동쪽 기슭 봉우리에는 삼국시대에 축조된 계양산성이 있고, 서쪽으로는 조선 고종 20년(1883년)에 해안 방비를 위해 부평고을 주민들이 참여하여 축조한 중심성이 징매이고개능선을 따라 걸쳐 있었다. 계양산이란 이름은 지명의 변천에 따라 고려 수주 때에는 수주악, 안남도호부 때에는 안남산, 계양도호부 때에는 계양산으로 부르던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계양산의 산 이름 유래는 계수나무와 회양목이 자생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하며, 1944년 1월 8일 인천시 최초의 도시자연공원(계양공원)으로 결정되고, 그 후 계양산은 시 지정 제1호 공원이 되었다.
계양산 정상으로 가지 않고 산 주위를 둘러 나 있는 계양산둘레길을 걷는다. 계양산 둘레길은 인천 계양구에 위치하고 있는 계양산을 중심으로 한 산책로이다. 계양산 둘레길은 총거리 7.29km로 소요시간은 약 2시간이다. 계양산 야외공연장에서 시작하여 임학오거리, 무당골 약수터, 피고개, 장미원, 계양문화화관을 걸쳐 출발지인 계양산 야외공연장으로 되돌아오는 순환형 코스이다. 계양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과 사람들이 많아서 정상으로 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계양산 둘레길은 트레킹 하기 좋은 숲길로 둘레길을 따라 전 구간에 야자 매트가 깔려있고 무장애 데크길이 있어 장애인과 노약자도 걷는데 어려움이 없다.
계양산둘레길이 끝나는 곳에서 피고개산으로 가는 길은 상상이상으로 험하다. 코스를 따라가니 거의 60도도 더 되어 보이는 비탈길을 로프를 잡고 내려가야 하는데 조금만 삐끗하면 사고가 날 수 있는 위험한 코스다, 그리고 가파른 오르막과 내리막이 계속되기에 굉장히 조심해야 한다. 이 길을 걸으며 걷기에 집중하느라 사진을 한장도 찍지를 못했다. 그만큼 어려운 길인데 왜 이렇게 어려운 길을 가도록 하였는지를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피고개산으로 올라가서 제법 쉽지 않은 산길을 걸어가서 검암산을 넘어 내려가면 오늘의 종착점인 검암역이 나타난다.
피고개산
검암산
저녁의 산길
검암역
검암산을 내려오니 벌써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오늘의 여정을 이곳에서 끝내고 검암역 주변의 숙소를 검색하니 마땅한 곳이 없다. 그래서 서구청앞으로 가기로 작정하고 천마산에서 만났던 지인을 기다려서 만나 같이 서구청앞으로 가서 숙소를 정하고 오랜만에 둘이서 소주를 한잔하면서 회포를 풀었다.
다시 말하지만 이 코스는 너무 어려운 코스다. 남파랑길의 거제도 가라산 코스가 어려운데 이 코스는 상당히 위험하다. 코리아둘레길에서 새로운 코스를 개척하기를 희망한다.
95코스가 끝나고 아들내외와 손자를 만나 즐겁게 지내고 다음날 아침 96코스 시작점인 자유공원앞까지 아들이 차로 데려다 주어서 편하게 시작을 한다.그런데 96코스 시작점에서 아무리 찾아도 안내판이 보이지 않고 자유공원 들어가는 입구에 조그마한 인증표만 붙어 있다.
96코스 시작점 표시
서해랑길 96코스는 자유공원 입구에서 시작하여 신포 문화의 거리, 송림초등학교를 지나 백범로를 지나 장고개로를 걸어 함봉산과 원적산을 넘어가서 대우 하나 아파트 입구에서 끝이 나는 14.4km의 비교적 짧은 길이나 코스의 마무리가 산을 넘는 것이라 쉽지는 않다..
자유공원 올라가는 입구
인천광역시 중구 송학동 해발 69m의 야트막한 산인 응봉산 일대 전역에 조성돼 있는 자유공원(自由公園)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 근대식 공원이며, 개항 당시에는 각국조계에 해당된다. 이 공원이 조성된 것은 인천항 개항 초기인 1888년이다. 당시 인천항을 통해 들어온 외국인 거주자들이 꽤 있었는데 이들이 여가를 즐길 수 있는 공원이 필요했다. 그래서 러시아 출신 토목 기사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이 1888년 응봉산(鷹峰山) 일대에 공원을 설계했고 꾸준한 확장 작업을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서울의 탑골공원보다 조성 시기가 9년이나 빠르기 때문에 이곳이 대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이자 근대식 공원이다.
공원 조성 당시 시민들은 이를 각국공원(各國公園)이라고 불렀고 그 뒤 일본의 세력이 커지면서 1914년 각국 거류지의 철폐와 함께 공원 관리권이 인천부로 넘어가면서부터 공원 명칭이 '서(西)공원'으로 바뀌었고, 1945년 해방 후에는 공원 명칭이 만국공원(萬國公園)으로 바뀌었다. 명칭이 '자유공원'으로 바뀐 것은 1957년부터다. 1950년 9월 인천 상륙 작전을 지휘한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공을 기리는 뜻에서 시민들이 성금을 모아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만들었고 공원 남동쪽 부지에 장군의 동상을 세웠다. 그리고 당시 인천시장에 의해 공원 명칭이 '자유공원'으로 명명됐다.
공원 내에는 맥아더 장군 동상을 비롯해 1982년 한-미 수교 100주년 기념탑이 세워져 있고 석정루나 연오정 등 팔각지붕의 전통 형식의 건물도 있다. 특히 석정루나 자유공원 광장에서 내려다보는 인천항 전경이 꽤 멋있는데 석양이 아름다운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매년 12월 31일에 서구 정서진과 월미도 등과 함께 해넘이 행사가 자유공원 광장에서 진행되곤 한다.
또 1919년 4월 23일 24인의 국민대회 13도 대표자들이 이 공원에서 모여 <국민대회 취지서>를 발표하고 <임시정부 선포문>을 선언함으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 축이자 한반도 유일의 임시정부였던 한성 임시정부의 수립을 의결한 곳도 바로 이 공원이다. 자유공원 광장에 임시정부 수립의 터전이었다는 것을 기념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효도권장비
멀리 아침이 밝아오는 광경
자유공원 설명판
맥아더장군 동상
인천학도의용대 호국기념탑
자유공원을 통과하여 내려오니 신포국제시장이 보인다. 하지만 아직은 이른 아침이라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이라 멀리서 보면서 통과한다.
신포국제시장
신포국제시장을 조금 지나 골목길로 들어가면 답동성당이 나타난다.
답동성당(天主敎 仁川敎區 主敎座 沓洞 聖 바오로 聖堂)은 인천광역시 중구 답동에 위치한 천주교 인천교구의 주교좌 대성당으로, 주보성인은 성 바오로이다.
19세기말 제물포에 성당이 건립된 것은 이곳이 서울의 관문이고 외국 무역의 거점이 될 수 있는 좋은 입지라는 점을 중시한 당시 조선교구장 블랑(1884∼90년 파리외방전교회) 주교의 결정에 의해서였다.
구한말 1897년에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코스트 신부의 설계로 처음 건립되었고, 페낭신학교에 있던 빌렘(홍 요셉 1860∼1938년)신부가 초대 주임신부를 맡아 인천지역 첫 번째 본당인 제물포본당(답동본당의 원래 이름)을 설립하게 되는데, 이때가 1889년 7월 1일이다.
답동성전의 건립은 빌렘 신부가 이듬해 지금의 성당 자리인 답동 언덕에 대지를 매입함으로써 첫 발을 내딛게 된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잠시 중단되었던 성전 건립은 1895년 정초식을 갖고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간다. 이듬해 종탑이 완공되고 마침내 1897년 7월 4일 조선교구장 뮈텔(1890∼1933년 재임) 주교가 참석한 가운데 300평 규모로 전면에 3개의 종탑을 갖춘 로마네스크 양식의 역사적인 성전 축성식이 거행됐다. 1937년에 시잘레 신부의 설계로 증축된 991.74m²(300평) 규모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벽돌조 건물이며 한국의 성당 중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근대 건축물 중 하나이다. 웅장하고 화려한 자태로 인천 시민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아온 답동성당은 문화 예술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1981년 사적 287호로 지정됐다.
서울로 들어오는 관문이자 외국 무역의 거점이 될 수 있는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는 제물포에 건립된 이후 답동성당의 아름다운 자태와 위용으로 인천의 역사적인 건축물이자 종교 유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답동성당의 여러 모습
답동성당의 여러 곳을 둘러보고 성전에 들어가 잠시 기도를 한 후에 길을 다시 걸어 시가지로 향한다. 시가지 길을 이리저리 걸어가니 백범로가 나오고 백석중고등학교가 보인다.
시가지의 여러 모습
시가지 길을 계속 걸어가니 장고개라는 설명판이 보이고 이제 산으로 올라가게 한다. 여기서부터 함봉산으로 가는 길이다. 함봉산은 부평도서관 뒷산을 지칭한다. 옛날 이 산에는 나무가 울창하여 호랑이가 살았다는 말이 있어서 함봉산이란 호랑이가 우는 소리가 들리는 산이란 뜻인데 이것은 한자 풀이일 뿐 확실치 못하다.
장고개 설명
한남정맥 안내도
높지 않은 함봉산을 지나니 원적산이 나타난다. 원적산(元積山)은 부평구와 서구의 경계에 위치한 산이다. 원래 표기는 ‘元’이 아니라 ‘怨’으로 원한이 맺힌 산이란 뜻이라고 한다.그 이유는 조선시대 세곡을 뱃길로 운반할 때 삼남지방의 세곡선이 김포를 지나 강화해협을 지나는데 손돌목에서 자주 좌초되어 서해바다와 한강을 연결하는 굴포작업을 하는데 원통이 고개를 파니 암석만 나와 실패하고 또 다시 안아지 고개를 파도 뜻을 이루지 못하자 원통하고 원한이 맺힌 산이라 해서 원적산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원적산공원은 부평구 산곡동, 청천동 2개동에 걸쳐 남북으로 길게 위치한 공원으로, 인천의 중요한 녹지축이 되는 공원으로 인조잔디구장, 다양한 체육활동 공간과, 생태습지, 발물놀이터 등이 마련되어, 많은 시민의 사랑을 받고 있는 공원이다.
원적정
원적산 등산 안내도
원적산을 내려오니 멀리 종점인 대우하나아파트가 보이고 아파트 버스정류장에서 이 코스는 끝이 난다.
저번에 서해랑길 94코스를 걷고 겨울이 와서 눈도 내리고 기온이 많이 떨어져 걷기를 쉬다가 따뜻한 봄이 오길래 나머지 구간을 걷기로 마음먹고 집을 떠나 95코스로 갔다. 부산에서 인천의 선학역까지 가는 길이 만만하지 않으나 내가 걸어야 하는 길이기에 일찍 부산을 출발했다.
서해랑길 95코스는 선학역 3번 출구에서 시작하여 문학산을 넘고 인천의 신구 시가지를 따락 걸으며 인천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볼 수 있는 길로 마지막 종점은 차이나타운을 지나 자유공원 입구이다.
95코스 안내판
선학역 3번 출구에서 출발하여 문학산 입구로 가니 식당이 즐비하다. 점심 때도 되어 점심을 먹고 문학산으로 올라가려니 인천의 연수둘레길과 같이 가는 표시가 있다.
연수구 음식특화거리
연수둘레길 안내판
문학산은 인천의 고대 왕국이었던 미추홀의 진산으로 인천의 역사와 함께 하였지만, 1965년부터 50여 년간 군부대가 주둔한 때문에 시민들은 오래도록 정상을 오르지 못했다. 그러다가 2015년 10월 15일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제 옷을 갈아입는 문학산을 오르는 길은 다양하다. 문학산은 해발 217m로 그리 높지 않은 산이나 바위가 많아 등산화 착용은 필수다. 정상에 오르면 문학산 표지석과 예전 봉수대를 재현한 상징물을 만나게 된다. 도시 전경이 숨결처럼 산자락을 타고 오르고, 시계가 좋으면 청량산을 넘어 팔미도와 무의도까지 보인다고 하는데 오늘은 미세 먼지가 뿌옇게 덮여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이 산에 있는 문학산성은 인천광역시기념물 제1호로, 임진왜란 때는 인천부사였던 김민선이 백성과 함께 나라를 지킨 구국의 현장이기도 하다. 성 둘레는 577m, 현존하는 부분은 339m이다.
문학산 오르는 길
문학산에서 보는 풍경(문학야구장)
문학산 주변 문화유산 설명
문학산의 명칭은 조선 전기 관찬 지리지인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문학산이라는 명칭은 보이지 않고, 남산(南山)이라고만 기록되어 있어 이 때까지는 앞산이라는 의미에서 남산으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문학산은 원래 '학산(鶴山)'이라고 하던 것을 근처 문묘(文廟)에서 '문(文)'자를 따와 문학산으로 부르게 된 것인데, '학산'이라는 명칭은 이 산에 학이 많이 살았기 때문이라거나 산세가 날개를 펼친 학의 모양을 닮아서라는 설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문학산 정상의 모습
문학산 정상에서 내려오는 길가에는 문학산 주변의 여러 역사적 사실을 설명해 놓은 것이 많이 눈에 띈다. 특히 이곳이 비류백제의 미추홀이었다는 역사를 중시하여 미추홀에 대한 설명을 많이 해 놓았다.
일송정
산을 내려오면서 일송정을 지나 조금 더 내려오니 무슨 역사적 유적을 발굴하고 있다. 나도 한 때는 이 방면에 관심이 많아 참여도 해 보았기에 궁금해서 발굴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청동기시대의 주거지를 발굴 중이라고 하엿다.
발굴현장
산을 내려와 시내를 따라 걸으니 백제사신길이라는 표시가 있고 사신의 행렬들을 설명하고 있는 벽화가 계속 늘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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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중국으로 파견 가는 백제 사신들은 부평별 고개와 사모지 고개를 거쳐 지금의 옥련동 한나루에서 배를 타고 떠났다. 이곳에 서서 세 번 이름을 부르고 이별하던 고개라 하여 삼호현이라 불렀다.
조각의 거리에 서 있는 조각품
옥련시장
계속 시내를 따라 걸어가니 능허대가 나온다. 지금은 공원 일대를 공사중이라 통행을 금지해 놓아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 능허대(凌虛臺)는 백제가 근초고왕 27년(372년)에 처음으로 중국에 사신을 파견한 이래 중국으로 가는 우리의 사신들이 출발했던 나루터가 있던 곳으로 이 나루터는 한나루(漢津)라 불렸다. 능허대지(凌虛臺址)는 인천광역시 연수구 옥련동에 있는 문화재로 1990년 11월 9일 인천광역시의 기념물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아파트와 유원지가 개발되어, 도심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현재 능허대 공원으로 조성된 이곳에는 작은 정자와 연못이 있으며, 연못에는 인공폭포와 분수대가 있다.
능허대의 명칭은 소동파의「적벽부」에 나오는‘능만경(凌萬頃)’의 ‘능(凌)’과 ‘빙허어풍(憑虛御風)’의 ‘허(虛)’를 따서 ‘만경(萬頃)을 넘어(능 : 凌) 을 하늘(허 : 虛)을 오른다.’라는 뜻이다.
능허대의 여러 모습
능허대를 지나 남항해안공원으로 가는 길은 인천이ㅡ 갯벌을 옆에 끼고 걷는 시내 길이다. 한쪽에서는 자동차가 싱싱 달리고 한쪽은 바다 갯벌이 펼쳐지는 길을 따라 걷는다.
갯벌과 남항그린공원 모습
시내를 계속 걸어가면서 보니 조금 생소한 교회가 보인다. '천부교'라는 교회다. 집에 돌아와서 찾아보니 천부교(天父敎)는 박태선 장로가 1955년에 창시한 반기독교 성향의 신흥종교로 박태선을 하나님으로 믿으며 박장로교 또는 전도관(傳道館)이라고도 하며,우리에게는 교인들의 신앙공동체인 신앙촌으로도 유명하다. 박태선 교주를 육신을 입고 내려온 신(하나님)으로 주장하고 그를 ‘감람나무 하나님’이라고 부르기도 해서 영미권에서는 감람나무 교회(Olive Tree Church)라고 불린다고 한다.
천부교 교회
계속 길을 걸어가니 인천개항누리길이 나온다. 인천 개항 누리길은 인천광역시 중구 인천역 부근 개항장 일대에 조성된 길로 근대 개항기 역사와 문화를 체험하며 걷는 테마길이다.
인천의 올레길로 불리는 누리길(세상을 즐기는 길)은 2006년부터 운영해 온 도보 관광 코스로 근대 역사 건축물 등 문화유적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춘 문화관광해설사의 재미있고 유익한 해설을 들으며 도보로 관광할 수 있는 테마관광코스이다. 이 길을 걸어가면서 오래된 개항기의 건물들을 볼 수 있다.
구 인천유체국 건물
구 인천 일본 제1은행 지점(舊仁川日本第一銀行支店)은 일본 제1은행이 개화기 인천에 설치한 지점으로 근대건축물로 인천광역시 중구 신포로23번길에 있으며 1982년에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됐다.
1883년 인천을 개항한 후, 일본 제1은행 부산지점이 개설한 인천출장소가 전신으로, 초기에는 해관 통관세를 취급하였다. 1899년(고종 광무 3년)에 지금의 건물을 신축하여 1911년에는 조선은행 인천지점, 1950년 한국은행 인천지점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조달청 인천사무소, 법원 등기소 등으로 활용되다가 2010년 인천개항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건물은 일본인 니이노미 다카마사가 설계하여 모래, 자갈, 석회를 제외한 나머지의 모든 건축 재료를 일본에서 직접 가져와 만들었다. 1899년에 만들어진 지상 1층 건물로 석재 기단부와 수평 줄눈의 안정되고 견고한 외관을 지니고 있다. 돌출된 출입문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으로 구성된 석조 건축물이다. 현관 상부는 아치 구조이며 지붕에는 중앙 돔과 작은 천창을 설치하였다. 처마 부분에는 동그란 구멍이 뚫린 석조 난간을 올렸다.
구 인천제1은행 지점 건물
우리나라 최초의 태극기
인천의 개항누리길을 따라가면서 여러 건물을 구경라며 다다른 곳이 유명한 인천의 차이나타운이다.
인천차이나타운은 1883년 인천항이 개항되고 이듬해 청나라 조계지가 설치되면서 중국인들이 현 선린동 일대에 이민, 정착하여 그들만의 생활문화를 형성한 곳이다. 화교들은 소매잡화 점포와 주택을 짓고 본격적으로 상권을 넓혀 중국 산둥성 지역에서 소금과 곡물을 수입, 1930년대 초반까지 전성기를 누렸다. 1920년대부터 6·25전쟁 전까지는 청요리로 명성을 얻었는데 공화춘, 중화루, 동흥루 등이 전국적으로 유명하였다. 한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각종 제도적 제한으로 화교들이 떠나는 등 차이나타운의 화교사회가 위축되었으나 한중수교의 영향으로 활기를 되찾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차이나타운'이라고 말하면 이곳을 꼽는 이들이 많다. 서울, 부산, 대구 등에도 차이나타운이 있지만 인천 차이나타운의 규모가 압도적으로 넓은데다 대한민국에서 대표적으로 꼽는 중국 음식인 짜장면의 탄생지가 이곳이라서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차이나타운으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에는 역사적 의의가 깊은 관광명소로서 권역별로 변화하고 있으며, 현재 이곳에는 화교 2,3세들로 구성된 약 170가구, 약 500명이 거주하고 있다.
인천차이나타운에 공화춘이라는 식당이 있지만 그 공화춘은 1911년 개업한 공화춘이 아닌 판권을 구입하고 부지를 고친 공화춘이며 재한 화교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진짜 공화춘 창업자 가문이 운영하는 가게는 인천역 건너편에 있는 신승반점이다. 1983년 원조 공화춘이 폐업하기 3년 전에 공화춘 주방에서 일하던 창업주인 우희광의 막내딸 우란영과 사위 왕입영이 독립하여 세운 가게가 신승반점이다
차이나타운의 여러 모습
차이나타운을 지나면 이어지는 마을이 송월동 동화마을로 2013년 4월 인천광역시 중구 송월동 2가~3가에 조성된 벽화마을이다.
1883년 개항 이래로 송월동은 외국인들이 거주하던 부촌이었으나 마을이 노후화되며 젊은 사람들은 떠나 빈집이 늘고 고령층만 남게 되었다. 그래서2013년 4월에 열악한 주거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고전동화를 테마로 하여 낡은 담에는 벽화를 그리고, 곳곳에 조형물을 세웠고,. 몇몇 주택은 개조되어 카페나 음식점 등이 들어서기도 했다.
벽화 및 조형물의 모티브가 된 동화로는 서구의 신데렐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오즈의 마법사, 피노키오, 알라딘, 잠자는 숲속의 공주, 백설공주, 라푼젤, 밤비, 엄지공주, 빨간 모자, 미녀와 야수, 피터팬, 헨젤과 그레텔, 브레멘 음악대, 노아의 방주 등과 우리나라의선녀와 나무꾼, 도깨비 방망이, 혹부리 영감, 흥부전, 별주부전, 그리고 리틀 프린세스 소피아 등이 있으며, 이 외에도 마을에는 못난이인형, 무지개다리 포토존 등이 설치되어 있다.
송월동 동화마을의 여러 풍경
송월동 동화마을을 지나 자유공원 담장을 따라 조금 가면 삼국지의 여러 모습을 벽화로 그림 그림이 나오고 삼국지거리를 지나면 초한지를 벽화로 그림 거리가 나온다. 차이나타운의 벽화거리는 삼국지 벽화거리가 먼저 조성된 후 인기를 끌자 추후에 초한지를 주제로 초한지 벽화거리를 조성했다.초한지 이야기는 유방이 천하의 패권을 쥐고 새로운 통일제국 한나라에 황제로 취임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하지만 초한지 벽화거리의 마지막 벽화는 마치 역사와 이야기는 끝맺음 없이 흐른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 그 이후 한나라의 몰락과 위·촉·오 세 나라의 이야기인삼국지를 예고하고 있다. 벽화 거리에 있는 그림은 서양 미술에서 보던 작품과 구도를 공유한다. 이를테면 6번 그림은 진승·오광의 난을 묘사하는데 외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오마주(Homage)했다. 15번 항우의 무용은 말탄 나폴레옹 황제의 그림을 떠올리게 한다. 51번 그림 패왕별희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본떴다고 생각하면 된다.
벽화거리의 모습
인천역 앞의 차이나타운 올라가는 길
여기에서 자유공원으로 올라가는 입구에서 95코스는 끝이 난다. 오늘은 여기에서 끝을 내고 인천에 사는 큰 아들을 만나서 즐겁게 회포를 풀 생각이다. 그리고 편안하게 쉬고 내일의 여정을 시작할 것이다.
경주의 역사적 유적을 탐방하다가 오늘은 사람이 사는 시가지를 걸어 보기로 하였다. 경주시외버스터미널 앞의 버스정류장 부근에 경주읍성마을거리의 안내판이 서 있다. 그래서 오늘은 웁성마을을 중심으로 경주 시내를 소요해 보기로 한다.
경주읍성마을거리 안내
버스를 타고 가기에는 별로 멀지 안은 거리라 천천히 걸어서 읍성마을로 가니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물이 조금 특이한 것을 전시하는 경주 벼루박물관이다. 그래서 구경을 하려고 하니 출타 중이라면서 문을 닫아 놓았다. 하는 수 없이 외관만 보고 읍성으로 갔다.
경주벼루박물관
경주읍성 (慶州邑城)은 신라 왕경의 북쪽에 해당하는 경주시 동부동과 북부동 일대에 위치하는 둘레 2,412m의 석축 평지성이다. 경주읍성은 1933년에 발행된 지리서 『동경통지』에 ‘읍성의 시축 연대는 불명이지만, 고려 우왕(1378)에 개축하였고 둘레가 4,075척, 높이가 12척 7촌으로 석축이다’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고려 때의 석축 읍성으로 추정된다. 안타깝게도 일제의 근대 도시계획에 따라 개축된 읍성 대부분이 헐려 현재는 동쪽 성벽만 50m 남짓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다행으로 2002년부터 꾸준히 발굴 조사와 복원 사업이 추진되고 있지만 현재는 일부 성벽과 문만 복원되어 있다. 하지만 이 읍성을 돌아 다녀보면 어디가 어딘지를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관광객들을위해 안내판이나 표지판 정도는 세워 두어야 하는데 안타깝다. 복원이 끝나면 고려에서 조선을 거쳐 현대까지 경주 역사의 층위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경주읍성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걍주읍성 언내
복원된 성벽
향일문
반대쪽에서 보는 향일문
경주문화원과 이웃한 동경관(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은 본래 신라 왕실에서 집기를 보관할 용도로 지은 건축물이다. 고려와 조선 시대에는 외국 손님이나 서울의 벼슬아치가 지방에 오면 머무는 관아의 객사 건물로 이용했다. 일제강점기 때 학교로 사용되다가 광복 후 6.25전쟁을 거쳐 일부가 헐리고 서쪽 건물만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몇 차례 이전되면서 형태 변화가 발생했지만 영·정조 시기의 역사성을 품고 있는 건축물로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동경관
읍성을 나와서 조금 시내쪽으로 길을 가면 나오는 경주문화원과 동경관 사이 화랑수련원 간판을 내걸고 있는 건축물은 1920년경 경주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이었던 구 야마구치병원으로 추정되는 건물이다. 건축물 자체도 독특하지만 1930년대 이 병원 의사 다나카 도시노부가 경주의 어느 골동품상에서 ‘신라의 미소’로 일컬어지는 ‘경주 얼굴무늬 수막새’를 구입했고, 훗날 경주박물관에서 그로부터 어렵사리 수막새를 기증받은 이야기가 얽혀 있어 눈길을 주게 된다.
화랑수련원(구 야마구찌 병원)
금리단길
발길이 가는대로 가다가 보니 문정현이라는 곳이 보인다. 문정헌은 풀이하면 '글이 샘솟는 집'이란 뜻으로 2012년 경주에서 개최되었던 제78차 국제 PEN대회의 성공적인 마무리를 기념하여 건립한 한옥 도서관이자 북 카페이다. 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5천여 권의 도서는 대부분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회원들의 기증으로 채워져 의미를 더했다. 도서관은 북 카페로 커피 한 잔과 함께 여유롭게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졌다. 문정헌 안에는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작은 우물이 있다. 또 뒷마당의 쪽문은 봉황대가 있는 노동동 고분군으로 이어져 함께 둘러보기 좋다.
문정헌
다시 발을 돌려 구 경주역으로 갔다. 우리 세대에게는 너무 친근한 역이다. 어릴 때 경주를 올 때는 항상 이 역을이용하던 생각이 났다.
경주역(폐역)은 철도역 중앙선의 폐지된 철도역으로 1918년 11월 1일 협궤선 영업을 시작으로 2021년에 폐지된 역으로 지금은 경주문화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문을 닫아 놓아서 내부를 보지는 못했다.
경주역 일대는 경주 구시가지의 교통의 요지로 대부분의 대중교통이 경주역 앞을 통과한다. 역 앞에는 재래시장 성동시장이 위치하고 있으며, 대릉원 등 유적관광지와도 가까운 곳이다.
구 경주역(경주문화원)
역전 광장에 있는 황오동 삼층석탑은 원래 효공왕릉(孝恭王陵)부근인 경주시 동방동 장골의 사자사지(獅子寺址)에 무너져 있었는데,1936년경주역을 사정동으로부터 옮길 때 석탑재(石塔材)를 모아 이전·복원하였다. 1985년 8월 5일 경상북도의 문화재자료 제8호로 지정되었다.
이 탑은 신라 석탑의 형태를 보이나, 다른 석탑과는 달리 이중의 기단에 놓인 1층의 탑신은 너비에 비하여 높이가 매우 높다. 2·3층 탑신도 너비는 그다지 줄지 않으나 높이가 많이 줄었다. 이러한 특징과 함께, 전체적으로 안정된 기초 위에 조성된 날렵한 모습으로 미루어 고려 석탑으로 변천하는 과도기 양식으로 추정된다.
경주 황오동 삼층석탑
구 경주역 앞에는 경주에서 유명한 성동시장이 있다. 성동시장은 300여 개의 점포와 30여 명의 노점상들이 있다. 지난 1971년 개설 이래 지역의 대표적 재래시장으로 자리 잡았다. 날로 침체 상태로 접어드는 재래시장 환경개선 사업으로 경쟁력을 높여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기여하고자 시가 사업비 16억여 원을 투자해 착공에 들어간 성동시장 현대화 사업은 시장 입구 조형물 설치, 뒤 상가 및 먹자골목 아케이드 설치, 하수도 정비, 전기소방시설, 바닥정비, 와이드 칼라 250점을 게시해 새롭게 단장했다. 시는 성동시장 환경개선 사업을 신라 천년고도 이자 국제적인 문화·관광도시에 어울리는 재래시장으로 조성하고자 지역에 산재한 소중한 문화유산 250여 점을 소재로 와이드 칼라 사진에 담아 아케이드 벽면에 게시하여 경주를 찾아오는 관광객들에게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하는 또 하나의 명물로 부상함으로써 재래시장 활성화가 기대되고 있다.
성동시장의 풍경
성동시장을 벗어나 조금 길을 가니 성동성당이 보인다.올해가 천주교에서 말하는 전대사의 해인데 이성당이 '전대사 수여를 위한 순례성당'이라는 휘장이 걸려 있다. 그래서 성당에 들어가니 아무런 인기척도 없어 혼자서 본당에 들어가 잠시 기도를 하고 나왔다. 나오면서 성당 뜰을 보니 옛날 천주교인들이 박해를 받던 시절의 돌형구가 놀여 있었다.
성동성당
성당을 나와 아래로 더 걸어가면 중앙시장이 나온다. 경주중앙시장은 1900년대 초부터 농민 및 보부상들이 주축이 되어 장터를 형성하고 70여 년간 일반시장으로 운영된 오랜 역사가 있는 시장이다. 1983년에 현대화 시장으로 변화되었으며, 경주 사람들은 아래 시장으로 부르기도 한다. 천년고도 경주의 문화관광형시장으로 700여개의 점포가, 3개소의 주차장이 있는 비교적 규모가 큰 전통시장이다. 최근 대형 소매업체와의 경쟁력 향상을 위해 조형물설치, 시장통로 비가림시설 설치, 상하수도 및 바닥정비, 소방시설 설치등 시장현대화사업을 적극으로 추진해 쾌적한 전통시장으로 변화하고 있다.
경주중앙시장은 다양한 세대 간의 문화를 접할 수 있는 전통시장과 매 2, 7일째에 열리는 전통 오일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지역 주민들이 직접 재배한 싱싱한 현지 특산물과 토산품, 경주토종한우, 한우소머리곰탕, 활어회 센터, 돔베기, 두치, 닭강정등 다양한 먹거리와 볼거리 그리고 즐길거리가 준비되어있는 문화관광형 시장이다.
특히 매주 목, 금, 토, 일요일 오픈되는 경주중앙시장 야시장인 달빛미행은 많은 시민, 관광객들에게 인기있는 핫플레이스가 되고 있다.
경주중앙시장
한가롭게 시내 일대를 배회하면서 이곳 저곳을 구경하다가 보니 어느 새 시간이 많이 지났다. 오늘은 신라의 유적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그냥 배회하면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을 돌아다녔다.. 역사적 유물이나 유적도 중요하지만 일반적인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도 아주 중요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