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6 - 남산지역, 서남산 일대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동남산을 갔다와서 친구도 만나고 사람이 살아가는 일상의 일을 처리하느라 사나흘이 지나 다시 남산으로 향했다. 오늘은 서남산 일대를 순례하듯이 느긋하게 걸어 볼 생각이었다. 불국토를 구현한 신라의 자취를 종교적인 느낌으로 경건하게 돌아볼 마음으로 집을 출발하여 경주로 가서 다시 문천 옆에 있는 윤경렬 기념관에 갔다. 저번에 보지 못했던 기념관 내부를 간단히 구경하고 나와서 문천교를 지나 저번에 갔던 동남산의 반대 방향인 서남산 삼릉가는 길로 걸음을 옮겼다.
윤경렬기념관 내부
기념관을 구경하고 나와 문천교쪽으로 걸음을 옮기니 윤경렬 고택에서 차를 한잔하고 가라고 부른다. 그러나 사양을 하고 내가 갈 길로 걸음을 옮겼는데 지금 생각하니 차 한잔을 마시고 천천히 가도 좋았으리라 생각이 든다.
문천교 건너 잔치국수 집
길을 따라 조금 걸으니 '해맞이 마을'이라는 표석이 보인다. 최햇빛님이 세운 것으로 순수힌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살려서 지은 것으로 정감이 갔다.
해맞이 마을 표석과 정자
길을 따라가니 최치원의 고운대가 나오고 그 위에는 '상서장'이 있다. 상서장 (上書莊)은 신라 말엽의 뛰어난 문필가 최치원(崔致遠)이 머무르면서 공부하던 곳이라 전한다. 상서장이라는 이름은 이 집에서 왕에게 상서를 올렸다는 데서 유래한 듯하다. 1984년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현재 영정각 3칸, 상서장 5칸, 추모문 3칸, 수호실 3칸으로 구성된 3동으로 되어 있으며, 1874년(고종 11)에 건립된 비가 있다. 지금은 최치원의 초상화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고 있다.
고운대
상서장의 여러 모습
상서장에서 '김호장군 고택'을 찾아가는 길은 큰 길을 따라가다가 터널이 나오면 터널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계속 가면 된다. 이정표가 없어 다소 당황스럽지만 야트막한 산길만 따라가면 나오니 그냥 한가하게 걸어가면 된다.
올레길 표시
이정표
경주 월암 종택(慶州 月菴 宗宅)으로도 불리는 김호장군고택은 17세기전후에 세운 것으로 추정하며 집터는 신라시대 절터였다는 설이 있는데, 주변에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여러 석조물이 있고 마당의 우물돌은 지금까지도 사용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김호장군의 후손이 살고 있는 집으로 현재 14대 종부가 관리하고 있는 중요민속문화재 34호로 지정된 고택이다. 1977년 1월 8일 대한민국의 국가민속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되었다.
문화재 지정 당시 명칭은 '경주탑동김헌용고가옥(慶州塔洞金憲容古家屋)'이었으나, 임진왜란때 의병장으로 순국한 김호 장군(?~1592)의 고택임을 감안하여 ‘경주 김호장군 고택'으로 명칭을 변경(2007.1.29)하였다가, 2017년 2월 28일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월암(月菴) 김호의 종택임을 감안하여 '경주 월암 종택'으로 문화재 지정명칭이 변경되었다.
월암종택은 문을 열어 놓아 관광객이 드나들도록 개방해 놓았기에 안으로 들어가 보니 화려하지는 않지만 무언가 기풍이 넘치는 위엄이 느껴지는 집이었다. 사람이 살고 있는 모습이 보여서 잠간만 둘러보고 나와 주변을 돌아 보았다.
월암 종택
월암종택 조금 옆에 있는 집에 '누비장 무형문화재'라는 표지가 있다. 누비장 (縷緋匠)은 일반 바느질은 물론 누비는 기술을 겸한 특수한 장인이다. 누비는 옷감의 강도와 보온을 위해 사용된 기법으로 우리나라에서 누비가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고구려 고분벽화 감신총(龕神冢)의 누비갑주나 다른 기록에서 보면 이미 삼국시대부터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누비는 기법이 단순하고 쉽지만 세탁 후 바느질 모양이 틀어지지 않고 솜에 의해 시접 자국이 생기지 않아 실용적이다. 근대 이후 손누비는 대중화되지 못했고, 1910년 이후에는 재봉틀의 사용으로 기계 누비가 유행하기도 하였다. 누비장은 1996년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고 김해자는 1996년 중요무형유산 기능보유자로 지정받아 생전에 활발히 홛동하였다.
누비장 김해자 표시
이곳에서 일성왕릉으로 가는 길에 배씨문중의 경덕사라는 사당이 보이고 마을 뒤산으로 올라가니 일성왕릉이 나타난다.
일성왕릉(逸聖王陵)은 1969년 8월 27일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경주 남산 서쪽 기슭의 약간 경사진 지형을 이용하여 마련하였고 그 상단에 봉분(封墳)이 있다. 상당한 규모의 대형 분묘여서 일반 서민의 무덤이 아님을 곧 알 수 있으나, 일성왕의 장지에 관한 기록이 없어 구전(口傳)에 의하여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제도상으로 보아 특이한 점은 없다.
일성왕은 <삼국사기>에는 제3대 유리왕의 맏아들로, <삼국유사>에는 제3대 유리왕의 조카 혹은 제7대 지마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일성왕은 농토를 늘리고 제방을 수리하여 농업을 권장하였으며 민간에서 금, 은, 주옥의 사용금지를 하는 등 백성을 위한 정치에 주력하였다.
경덕사
일성왕릉
여러 곳을 가리키는 이정표
일성왕릉을 내려와 남간사지 당간지주로 향했다. 남간사지 당간지주(南澗寺址 幢竿支柱)는 탑동 남간사지에 있는 당간지주로 1987년 3월 9일 보물 제909호로 지정되었다.
이 당간지주는 남간사의 옛터에서 약 500m 떨어진 논 가운데에 세워져 있다. 논을 경작하면서 지주의 아래부분이 약 50cm정도 드러나 있으며, 바닥돌은 없어진 상태이다. 기단부가 없어서 기단 위에 당간을 세우던 받침돌도 찾아볼 수 없다. 지주 안쪽 면에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구멍을 세 군데에 뚫어 놓았는데, 특히 꼭대기에 있는 것은 십(十)자 모양으로 되어 있어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이다.
원래 산재되어 있는 당간지주의 대부분이 특별한 장식이 없지만 이 남간사지 당간지주는 소박하고 간단한 형태의 보존된 상태도 양호한 통일신라 중기의 작품이다.
남간사지 당간지주
이곳에서 나정쪽으로 조금 내려가니 육부전이 나온다. 과거 양산재로 불렸던 육부전은 신라 건국 이전 서라벌에 있었던 6부 촌장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기원전 57년 알천양산촌, 돌산고허촌, 취산진지촌, 무산대수촌, 금산가리촌, 명활산고야촌의 6부 촌장들이 알천 언덕에 모여 알에서 탄생한 박혁거세를 신라의 첫 임금으로 추대하였다. 이후 신라 3대 왕인 유리왕이 이들의 건국 공로를 기리기 위해 양산촌은 이 씨, 고허촌은 최 씨, 진지촌은 정씨, 대수촌은 손 씨, 가리촌은 배 씨, 고야촌은 설 씨로 각각의 성을 내려 이들이 각 성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전한다. 육부전 홍익문 안에는 주건물인 입덕묘가 세워져 있는데, 이 공간은 제례가 있는 날을 제외하고는 일반에 개방하지 않는다고 한다.
육부전 전경
육부전 바로 밑에 박혁거세의 탄생설화가 서려 있는 나정이 있다.
탑동에 있는 나정(蘿井)은 <삼국유사> 권1 기이 제1편에서 박혁거세 탄생 설화가 있고, 삼국사기에 따르면 2대 왕 남해 차차웅 3년(서기 6)에 이곳에 시조묘를 세웠고, 이후에 이 자리에 신궁을 세웠다고 한다.
1975년 11월 20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2002년에 전각과 초석들을 두른 담장 일부가 허물어져 보수할 필요가 생겨 발굴조사작업을 하였다. 본디 그 이름대로 우물(井)이 있었다고 추정했으나, 2002년에 발굴을 시작한 후, (기존에 우물 터라고 생각한 자리가 아닌) 다른 자리가 원 우물 터라는 주장과 처음부터 우물이 없었다는 주장이 나왔다. 발굴단은 다른 자리가 원 우물 터라고 판단하고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문무왕 때 이 자리에 신궁을 새로 만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사 결과 한 변이 8 m, 지름이 20 m 정도 되는 8각 목조건물을 세웠던 흔적인 초석 50여 개와 둥근 돌기단의 흔적이 나왔다.. 출토된 '의봉 4년(679)'이란 명문이 씐 기와로 신라의 유적임도 확인하였다. 이로써 나정에 신궁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한다.
나정의 여러 모습
포석정 앞에 있는 경주 여행 안내판
나정을 지나 제법 걸어가서 포석정으로 갔다. 경주를 자주 왔으나 포석정은 정말로 오랜만에 다시 보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경주는 올 때마다 모습이 바뀐다. 유적지 주변은 하루가 다르게 관광객의 편의를 맞추고 있다. 포석정에 들어가려니 안내인이 사정상 동영상상영이 중단되었고 포석정에 물도 흐르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포석정만 둘러 보기로 하였다.
포석정(鮑石亭)은 배동에 있는 신라의 별궁이 있던 자리로, 사적 제1호로 건물은 없어지고 석조구조물만 남아 있다. 자연환경을 최대로 활용하고 주위의 아름다운 경관에 인공적인 기술을 가미하여 이룩한 조화미는 신라 궁원기술(宮苑技術)의 독특한 면모를 보여 주고 있다고 평가된다. 신라 시대에 유상곡수(流觴曲水)의 연회를 행하던 곳이다. 하지만 최근 연회를 행하던 장소보다는 의식이 행해졌던 곳이라는 설이 더 힘을 받고 있다. 학자들은 후백제의 견훤이 포석정에 군사들을 이끌고 침입한 것이 포석정이 연회를 행하던 곳으로 불리게 된 것과 다소 연관이 있다고 추측하고 있다.
실내의 포석정 모형
포석정지
포석정을 돌아보고 벤치에 앉아 가지고 다니는 커피와 빵으로 간단하게 간식을 먹고 주변에 있는 지마왕릉으로 향했다.
신라 제6대 지마왕(재위 112~134) 릉은 포석정에서 약 200m 떨어진 남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으며 봉분은 밑둘레 38m, 높이 3.4m로 크지 않은 규모로 굴식돌방무덤으로 추정되고, 무덤의 입지조건이나 봉분의 형태 등으로 볼 때 통일신라 때 무덤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경사를 이용하여 높은 곳에 안치하였으며, 아무 표지가 없고 능 앞에 혼유석이 있으나, 최근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지마왕릉
곳곳에 보이는 삼릉 가는 길 안내도
소나무 숲길
지마왕릉에서 옆으로 나 있는 숲길을 따라 걸어가면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의 안내도가 나오고 옆에 망월사가 나온다. 망월사 안에 삼존입상이 있는 줄로 생각하고 절에 들어가 찾으니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스님에게 물으니 친절하게 있는 곳 주변까지 안내를 해 주엇다. 망월사 경내가 아니아 뒷쪽 언덕에 있었다.
석조여래삼존입상 안내도
망월사 석탑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拜洞 石造如來三尊立像)은 남산 기슭 내남면 용장리에 있는 삼국 시대 신라의 석조 여래 삼존 입상이다. 경주 남산 기슭에 흩어져 있던 것을 1923년 지금의 자리에 모아 세웠다.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63호 경주배리석불입상(慶州拜里石佛立像)으로 지정되었다가, 2010년 8월 25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이 석불들은 기본양식이 똑같아 처음부터 삼존불(三尊佛)로 모셔졌던 것으로 보인다. 조각솜씨가 뛰어난 다정한 얼굴과 몸 등에서 인간적인 정감이 넘치면서도 함부로 범할 수 없는 종교적 신비가 풍기고 있는 작품으로 7세기 신라 불상조각의 대표작으로 평가된다.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拜洞 石造如來三尊立像)
삼존입상 옆의 삼불사 석탑
망월사는 배동에 자리한 대한 불교 원효종 사찰이며 원효종의 중요한 사찰로 꼽힌다. 오랜 역사와 위상에 비해 소박한 사찰이며 대웅전, 요사채가 있으며 연못 안에 놓인 불탑인 연화탑이 인상적이다. 인근에는 삼불사와 배동삼존여래입상이 있다.
지금은 폐사된 옛 신라시대 사찰 선방사지에 있는 망월사와 삼불사, 배동삼존여래입상 세곳을 선방골이라 부른다.
삼존입상과 망월사를 지나 계속 숲길을 걸어가먀 삼릉이 나온다.
배리삼릉(拜里三陵)은 경주 남산의 서쪽 기슭에 동서로 3개의 왕릉이 나란히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밑으로부터 신라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 등 박씨 3왕의 무덤이라 전하고 있으며, 무덤은 모두 원형으로 흙을 쌓아올린 형태를 하고 있다.
배동 삼릉의 주인공이 신라의 박씨 3왕이라 전하고 있지만 확실한 기록은 없고 신라 초기의 아달라왕과 신덕왕, 경명왕 사이에는 무려 700여년의 차이가 있어 이들의 무덤이 한곳에 모여있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리고 신라 초기에는 이와 같은 대형무덤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었다.
남산일원 설명
삼릉
삼릉을 지나 숲길을 걸어가면 오래된 돌다리가 나오고 다리를 건너면 경애왕릉이 나온다. 왕릉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하다.신라가 완전히 망해 가는 시기의 왕이었기에 그런지 너무 초라하다. 경애왕릉(景哀王陵)은 1971년 4월 28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무덤은 삼릉계곡 입구의 소나무 숲 안에 있으며, 밑 둘레 43m, 지름 12m, 높이 4.2m 규모로 흙을 둥글게 쌓은 형태의 평범한 원형토분이다. 무덤을 쌓은 석축도 없고 표식물(表飾物)은 오직 최근에 설치한 능 앞에 상석(床石)이 있을 뿐이다. 초라한 무덤을 감싸주는 송림이 주변에 울창하다.
삼국사기에는 경애왕을 남산 해목령에 장사 지냈다고 되어있으나 해목령은 경애왕릉에서 떨어져 있어서 맞지 않으며, 해목령 가까이에 있는 지금의 일성왕릉을 경애왕릉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경애왕릉
도로변에 있는 삼릉 표석
여기에 도착하니 어느 새 오늘의 여정을 끝내야 하는 시간이다. 그래서 길을 따라 내려가 남산관광안내소에 가서 다음에 갈 남산의 여러 자료를 얻었다. 지도와 안내책자, 남산을 소개하는 소책자 등을 얻어 요긴하게 사용할 생각이었다.
삼릉골은 봄이 오면 돌아 볼 예정으로 다음을 기약하고 다른 남산의 여러 곳부터 또 걸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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