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鶴)의 오딧세이(Odyssey)

서해랑길 70코스(의항출장소 - 학암포해변)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서해랑길 70코스는 의항출장소를 출발하여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사구 중의 하나인 신두리해안사구를 지나서 아름다운 구례포해수욕장을 지나 해넘이가 너무 멋진 학암포해변에서 끝이 나는 19.2km 의 길이다.

 

70코스 안내판

 

 69코스를 끝내고 이어서 바로 70코스 길을 걷는다. 원래 예정이 오늘 70코스까지 걷는 것을 목표로 하였기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길을 간다. 의항포구에서 해안을 따라 가니 오랜만에 갯벌의 물이 빠져서 생기는 기하학적인 무늬를 본다. 항상 물이 빠진 갯벌을 보면 자연의 신비로움을 느낀다. '왜 물이 빠지면 정해진 곳에만 고랑이 생길까?'하는 의문을 항상 가지면서 길을 간다.

 

의항포구 버스 정류장

 

의항포구의 모습

 

이정표

 

물이 빠진 갯벌에서 고기를 잡는 낚시꾼

 

 의항포구를 지나 해안 길을 따라 걸어가면서 물이 빠진 서해 바다를 보고 걸으니 갯벌의 물이 조금 있는 곳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는 사람이 모습이 보인다. 그곳에 어떤 물고기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유유자적하며 낚싯대를 드리운 그 사람의 모습은 세월을 낚는  강태공과 같았다.

 

 여유로운 풍경을 보면서 길을 가니 소근진성이라는 표지가 보이고 조금 가니 성이 있는 마을 입구가 나온다.

소근진성(所斤鎭城)은 태안군에서 서북쪽으로 13.6km 떨어진 소원면 소근리에 해안가에 있는 조선시대 읍성으로 조선 중종 9(1514)에 쌓은 것이다. 이 곳에 성을 쌓게 된 동기는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였는데, 특히 고려 말부터 이 지역에 나타난 왜구의 침입으로 인해 지역 주민들의 피해가 심각했다고 한다. 19931231일 충청남도의 기념물 제93호로 지정되었다.

 

소근진성 안내판

 

 

 소근진성을 지나 해안을 따라가면 넓게 펼쳐지는 모래밭이 나오고 국내 최대의 모래언덕이라는 신두리해안사구가 나타난다.

 

 2001년 천연기념물 제431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는 신두리 해안사구는 길이 3.4km, 0.5~1.3km 국내 최대의 모래언덕으로 뒤에 위치한 두웅습지와 함께 한국지리 교과서에도 많이 나오며 바다 풍경도 좋아 관광지로도 인기가 많은 곳이다.

아프리카나 아메리카의 사막을 가 본적은 없지만 영화나 TV를 보면 가도 가도 끝없이 펼쳐지는 모래밭과 모래바람만 휘몰아치는 사막을 본다. 그런데 광활하게 펼쳐진 해변에서 만나는 모래벌판은 때로는 꿈을 꾸는 무대가 되기도 한다. 그런 분위기를 느끼는 동양 최고의 해안사구인 신두리해안사구는 물은 맑고 깨끗하며 고운 모래로 된 넓은 백사장의 해수욕장을 끼고 있다. 신두리해안사구는 빙하기 이후 약 15,000년 전부터 서서히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강한 바람에 모래가 파랑에 의해 해안가로 운반되면서 오랜 세월을 거쳐 모래언덕으로 만들어졌다. 북서계절풍을 직접 받는 지역으로, 강한 바람에 모래가 파도에 의해 해안가로 운반되어 무한한 세월에 걸쳐 이룬 퇴적지형의 모래언덕이다. 이 모래언덕은 내륙과 해안을 이어주는 완충 역할과 해일로부터 보호 기능을 하고 있다.

신두리해안사구는 자연이 그대로 살아 있는 생태계의 보고로 독특한 생태계가 조성되어 식물군으로는 전국 최대의 해당화 군락지, 통보리사초, 모래지치, 갯완두, 갯매꽃을 비롯하여 갯방풍과 같이 희귀식물들이 분포하여 있다. 동물군으로는 표범장지뱀, 종다리, 맹꽁이, 쇠똥구리, 사구의 웅덩이에 산란을 하는 아무르산개구리, 금개구리 등이 서식하고 있다.

 

 해안사구를 구경하면서 걸어가니 쇠똥구리보호구역이라는 팻말이 보이고 넓은 들판에 몇 마리의 소가 한가로이 서 있는 모습도 보인다.

 

신두리해안사구의 여러 모습

 

 해안사구를 지나 해안을 조금 따라 걷다가 산으로 올라간다. 산이라고 하지만 작은 언덕과 같은 길을 따라 가니 탁 트인 바다를 바라보는 곳에 조그마한 능파사라는 절이 있다. 그 절을 지나 언덕을 내려가 바닷가로 가니 시원한 약수가 나오는 거북 모형의 수도시설이 있다. 시원하게 물을 마시고 세수를 하고 다시 높지 않은 산길을 걸어간다.

 

이정표

 

능파사

 

거북 모양의 약수 수도

 

먼동전망대에서 보는 서해

 

먼동해변 풍경

 

 

 

 계속 해안을 보면서 서해의 아래쪽 해안은 갯벌이 발달되어 있는데 위로 오면 갯벌도 나타나지만 넓게 펼쳐지는 모래밭이 많이 보인다. 그러니 해수욕장이 발달하여 여름에는 많은 피서객들이 이곳에서 즐기는 것이다. 계속 가니 아주 넓게 펼쳐진 백사장이 보이고 구례포라는 이정표가 있다.

 원북면 황촌리에 있는 구례포해수욕장(九禮浦海水浴場)1993KBS 1TV 사극 먼동의 촬영지로 널리 알려져, 방영 이후 구례포의 바다에 반해 피서객이 몰렸고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이다. 잔잔한 바닷물과 양쪽으로 펼쳐진 백사장 그리고 아름다운 해변은 한 편의 그림을 보는 느낌을 준다.

 

구례포해변

 

 구례포를 지나니 바로 이어서 오늘의 종점인 학암포가 보이기 시작한다. 이제는 날이 제법 싸늘해져서 물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없지만 넓게 펼쳐져 있는 모래밭에는 제법 사람들이 보였다.

 

 해변에 물이 빠졌을 때 드러나는 바위의 형상이 마치 학의 모습처럼 보인다 하여 유래된 학암포(鶴岩浦)해변은 태안읍에서 북쪽으로 20km 떨어진 원북면 방갈리에 있는 포구이다. 이 포구 앞의 대분점도(大盆店島)에 커다란 학바위(鶴岩)가 있는데 거기서 지명이 유래하였다. 그전에는 분점포(盆店浦)라고 하여 조선 시대에 명나라와 교역을 하던 무역항이었는데, 교역품으로 질그릇을 만들어 수출하였으므로 분점(盆店)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주변 일대의 백리포, 천리포, 만리포해변을 포함하여 태안해안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학암포해수욕장 풍경

 

학암포이야기와 학 모형

 

태안 바라길 안내 벽화

 

 학암포에서 머물기로 예정을 하여 숙소를 정하고 시간을 맞추어 해넘이를 보러 갔다. 학암포의 해넘이가 장관이라는 말을 들었기에 시간을 맞추어 나가니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기 위하여 일명 대포 카메라를 들고 모여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카메라를 가져가지 않았기에 좋다고 생각되는 자리를 잡고 휴대폰을 이용하여 사진을 찍었다. 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시간의 변화에 따라 해가 지는 광경을 한 지점만을 중심으로 찍는 것도 묘미가 있었다. 학암포의 해넘이는 다른 곳에서 보는 해넘이와는 달리 크게 바다를 물들이지는 않고 다른 느낌을 주었다.

 

학암포의 해넘이 풍경

 

 해넘이를 구경하고 숙소에 붙어 있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숙소로 올라가 피곤한 몸을 자리에 눕히고 내일을 위해 잠을 청하였다.

서해랑길 69코스(만리포해변노래비 - 의항출장소)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서해랑길 69코스는 만리포해수욕장을 출발하여 해안의 언덕길을 걸어 태안의 아름다운 천리포, 백리포, 십리포, 구름포해변을 보고 즐기고, 서해를 한눈에 조망하는 태배전망대를 지나서 의항출장소까지 가는 13.4km의 비교적 짧은 거리다.

 

 오랜만에 서해랑길을 다시 걷는다. 4월말까지 서해랑길을 갇다가, 나의 버킷리스트를 실행하려고 5월부터 6월까지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왔다. 그리고 조금 쉬다 보니 이번 여름은 너무 더워서 길을 걸을 엄두도 내지 못하고 산티아고 까미노길 여행기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새 9월도 지나고 10월이 되니 기온도 내려가고 가을 하늘이 맑았다. 그러니 방랑하는 병이 있는 내 몸이 먼저 반응을 하여 또 다시 길을 떠나기로 했다.

 

 그런데 시작점인 만리포까지 가는 길이 너무나 멀었다. 부산에서 아침에 출발하여 천안으로 가서 다시 만리포가지 가는 버스를 타고 만리포해수욕장에 도착하니 벌써 하루가 지났다.

 

서해랑길 69코스 안내판

 

 숙소를 정하고 만리포해수욕장을 구경하러 나갔다. 만리포사랑 노래비가 있는 옆에 '정서진'이라는 표석이 있고, 표석에는 대한민국 서쪽 땅끝이라고 표기되어 있으나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표석이다. 물론 관광지로 선전을 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를 하지만 좀 더 사실에 맞아야 한다.

 

만리포사랑 노래비와 정서진 표시

 

만리포해변

 

해변을 거닐다가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해변의 야경을 즐기려고 제법 긴 해안을 따라 걸으며 밤바다의 파도소리를 들었다. 한가하게 왔다 갔다 하면서 보니 나 말고도 여러 사람들이 해변의 야경을 즐기고 있었다.

 

밤의 해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예전과 같이 걷기에 나선다. 오랜만에 걷는 길이 다소 생소하게 느껴졌으나 몇 년이나 길을 걸었기에 곧 익숙해지리라 생각을 하였다. 아침의 만리포해변에는 아무런 인적도 없이 혼자서 해변을 걷다가 곧 언덕길로 올라간다. 산도 아니면서 산과 비슷한 길을 따라 조금 가면 멀리 천리포해변이 보인다.

 

아침의 만리포 해변

 

만리포의 옛이름 설명

 

해변 끝에 있는 희망광장의 희망의 고리

 

이정표

 

산 언덕길

 

  소원면 의항리에 있는 천리포해수욕장(千里浦海水浴場)은 수심은 1~2m, 백사장 길이는 약 1km이고 따뜻한 수온의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다. 남쪽으로 2km 떨어진 곳에 만리포해수욕장이 있고, 북쪽으로는 2km 정도 떨어져 백리포(방주골) 해수욕장이 있다. 원래는 고기를 잡던 어막이 많아서 막동이라고 불리던 곳이나 1955년 만리포 해수욕장을 개장하면서 이곳에도 피서 인파가 몰려들어 천리포로 불리게 되었다.

 저녁 일몰의 천리포 해변 바다 풍경은 매우 아름다워 여름이 아닌 계절에도 많은 이들이 찾는다. 주변에 2개의 닭섬이 있는데 육지에 붙어 있는 산을 뭍닭섬, 바다에 떠 있는 섬을 섬닭섬이라 하며 자연적인 방파제 역할을 한다. 주변에는 미국인 밀러(한국이름은 민병갈)60ha 면적으로 일군 천리포수목원이 있다.

 

멀리 보이는 천리포해변

 

국사봉에서 보는 천리포해변

 

태안 해변길 2코스 안내판

 

 

 

 천리포를 벗어나 조금 가면 이어 백리포가 나온다. 만리포, 천리포. 백리포는 그냥 이어진 해변이라고 해도 그렇게 틀렸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가까이 붙어 있다.

 태안군 소원면 의항리에 있는 백리포해수욕장은 천리포 수목원을 지나 북쪽으로 산기슭을 넘으면 비탈진 숲 아래에 있는 자그마한 해변으로 서해안의 절경 중 바닷물이 맑고 모래가 제일 으뜸이다. 원래 '방주골해수욕장'이라는 이름이었으나 만리포해수욕장, 천리포해수욕장과 연결되어 있어 현재 이름으로 바뀌었다.

 숲과 숲 사이에 해변이 펼쳐져 있고 해변 양쪽에 절벽이 있는데 어떤 유명한 절벽보다 더 아름답다. 병풍처럼 펼쳐진 주변의 소나무 숲이 아름답고, 인적이 드문 바닷가 해변에는 껍질이 예쁜 꽃 조개가 심심치 않을 정도로 많고, 물에 빠진 바위에는 홍합이 제법 많다. 원하는 만큼 주워 끓여 먹는 맛이 일품이다.

 

멀리 보이는 백리포해변

 

망산고개를 가리키는 이정표

 

수망산 산길

 

망산고개에서 보는 서해

 

 

 

 망산고개를 넘어가면 멀리 의항해수욕장이 보인다.

 일명 십리포해수욕장이라고도 부르는 의항리에 있는 의항해수욕장(蟻項海水浴場)은 남쪽으로 백리포, 천리포, 만리포, 어은돌, 파도리 해수욕장이 이어진다. 해변의 지형적인 생김새가 개미의 목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으로, 경사가 완만하며 밀물 때에도 깨끗한 바닷물 상태를 유지하여 준다. 온통 조약돌로 구성된 백사장이 햇볕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일품이며 포근한 곡선 모양의 해변은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백사장은 가지각색의 조약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경사가 완만하고 바닷물이 깨끗해 가족 피서지로 적합하다.

 

의항해수욕장

 

 여름에는 많은 사람들이 들끓었을 해변에는 인적이 없다. 이제 해수욕철이 지나고 내가 걷는 날이 주말도 아니어서 넓은 백사장에는 바다물만 넘실거리고 있을 뿐이다.

 

화영섬의 여러 모습

 

태배전망대로 가는 이정표

 

 길을 가는 도중에 뜻밖에 이태백의 동상이 있고 그의 시가 쓰여 있는 비석이 있다. '이곳에 무슨 이태백이?' 하고 의아심을 가지고 지나니 여러 곳에 비석이 보였다. 그리고 구름포라는 이색적이며 꿈같은 이름의 해수욕장이 보인다.

 

 태안군 소원면 의항리에 있는 구름포해수욕장은 해변의 길이가 짧고 규모가 작은 해수욕장으로 만리포에서 북쪽으로 가면 천리포수목원을 지나고 천리포, 백리포, 십리포, 구름포해수욕장이 차례대로 나온다. 물이 맑고 수심이 얕아 가족 단위의 휴양지로 적합하지만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아 한산한 편이다

 ‘옛날 중국의 시성인 이태백이 조선에 왔다 이 지역의 빼어난 자연경관에 빠져 머물렀다는 유래에서 지명이 붙여질 만큼 경관이 빼어난 이곳엔 국토교통부가 2010년 전국의 아름다운 해안경관 풍광 17곳을 선정해 해안경관 조망 공간장소로 조성한 태배 전망대가 있다.

 

이태백의 동상과 시판

 

구름포해수욕장

 

 

 

구름포해변을 지나 높지는 않지만 편안하지는 않는 산길을 걸어가면 태배전망대가 나온다.

 

 태배전망대에서는 광활한 서해바다와 칠뱅이섬(일곱개의 섬) 등 아기자기한 섬들, 불같이 타오르는 황홀한 낙조의 아름다운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또 전망대에는 2007년 유류사고 당시 피해극복을 위해 바위의 기름을 닦는 자원봉사자의 모습 등 극복과정이 사진에 생생하게 담겨져 전시돼 있어 당시의 아픔과 치유의 과정을 모두 체험할 수 있는 공감과 역사의 장이기도 하다.

 

태배전망대에서 보는 서해

 

 전망대에서 서해를 조망하고 내려오니 옆의 휴게소에 나 정도의 나이의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나도 휴식을 하기 위해 그 옆에 앉으니 그들은 태안의 노인자원봉사자로 해변길을 돌아보는 중이었다. 잠시 이야기를 나무며 커피를 한잔 얻어 마시고 인사를 하고 내가 갈 길을 다시 떠났다.

 

전망대를 내려와 해안을 따라 걸으니 해변에서 조금 안으로 들어간 곳에 돌로 띠를 두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나라 해안의 곳곳에 보이는 전통적인 고기잡이인 독살이었다. 이와 같은 모습을 보면 항상 드는 생각은 '어린 아이들이 이런 경험을 하게 해 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것이다. 도시의 어두운 환경에서 이런 자연을 보면서 즐겁게 놀 수 있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니 안타까운 생각만 든다.

 

독살

 

 

 

 나지막한 산을 내려와 바다 가를 걸어가니 여러 조형물과 그림이 그려진 해안 벽이 보인다. 의항(개목)마을이다. 그리고 이 마을의 이름의 유래를 알리기 위해서 꾸며 놓은 곳이었다. 이 해안을 지나 조금 가니 의항출장소가 나오고 69코스는 끝이 난다.

 

의항(개목)마을 이름의 유래

 

해안길의 조형물과 그림

 

오랜만에 걷는 길이지만 예전에 걷던 습관이 남아 있어 힘들거나 어려움은 전혀 느끼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걷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즐겁게 길을 가니 지루함도 없이 즐거움만 있다.

 

스페인, 산티아고 까미노 길을 걷다. 36(06.21, 무시아, 피스테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오늘의 여정 : 무시아, 피스테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오늘부터 귀국하는 날까지는 쉬면서 스페인의 몇 곳을 여행한다. 오늘은 산티아고에 머물면서 무시아와 피스테라를 다녀오고 대성당을 다시 가보고 그 주변을 다닐 예정이다. 아침에 여행사에서 마련한 버스를 타고 무시아로 가는 도중에 아름다운 다리가 있어 그 곳에 버스가 멈추어 구경을 한다. 어제까지 쉬지도 않고 걷다가 갑자기 버스를 타고 움직이니 새로운 세상에 온 것 같다.

 

 폰테 마세이라(Ponte maceira)는 네그레이라 지방 동쪽에 탐브레 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작은 마을로, 2019년부터 '스페인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이 마을에는 13세기 탐브레 강 위에 지어진 원시 정착지, 오래된 방앗간, , 예배당, 현대식 장원 집, 다리 등등 많은 기념비적인 건축물이 있다.

 

 마을을 이어주는 폰테 마세이라 다리의 가장 뛰어난 모습은 탐브레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와 강 자체의 아름다움이다. 강이 흐르는 모습도 한 폭의 그림이지만 그 위의 다리는 화룡점정이다. 폰테 마세이라 다리는 12세기에 탐브레를 넘어 이 마을의 입구에 세워졌으며, 이 다리는 이전 로마 다리의 기둥을 사용했다고 한다. 5개의 메인 아치와 2개의 릴리프 아치로 구성되어 있으며, 다리의 중앙 아치에는 현저하게 뾰족한 둥근 천장이 있다. 오랜 기간 동안의 구조물의 안정성은 기반암 위에 기둥의 일부가 기초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도로서 야고보의 임무는 서유럽을 기독교화 하는 것이었다. 선교 후에 그는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서기 44년에 참수형을 당했다. 그의 제자들 중 아타나시에(Atanasie)와 테오도미로스(Teodomiros)는 산티아고의 시신을 되찾았고, 기독교인의 장례식을 위해 그를 갈리시아로 데려가는 데 성공했다. 갈리시아에 있는 산티아고의 제자들은 머리 없는 사도의 시신을 묻을 장소를 찾고 있었다. 사도 야고보의 제자들이 로마 군단의 추격을 받으면서 남쪽으로 피신할 때 기독교인들은 가까스로 폰테 마세이라 다리를 건넜으나 로마인들이 그들을 따라가려 하자 '신성한' 개입으로 다리가 무너져 기독교인들만 탈출할 수 있었다는 전설이 있다. 이 전설은 실제로 폰테 마세이라 다리 상류 또는 하류에서 일어났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네그레이라 문장에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이상한 것은 '머리 없는 몸'이라는 표현이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지하실에 있는 산티아고의 은관에 사도의 머리가 없다는 언급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있는 성 야고보 대성당의 붉은 대리석 조각으로 표시되고 6개의 봉헌 등불로 둘러싸인 제단 아래에 그의 머리가 묻혀 있다고 한다. 오직 가톨릭의 관계 성당만이 이 문제에 대해 해답의 빛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다리 아래를 흐르는 강물은 아침의 안개에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깨끗하고 맑은 물은 우리 마음을 깨끗하게 해 주는 것 같아서 사람들은 다리를 건너며 아름다운 경치에 감탄을 한다. 다리를 건너 강 아래로 내려가서 보는 풍경은 또 다른 매력이 있다. 다리 건너에 있는 성 블라사의 작은 예배당은 18세기의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졌고 19세기에 반원형의 네오 로마네스크 아페스가 추가되었다.

 

 이 곳에서 다리도 건너고 다리 아래로도 내려가서 강을 보면서 제법 노닐다가 다시 버스를 타고 무시아로 향한다.

 

강 안개가 낀 몽환적인 분위기

 

산 블라사 예배당

 

폰테 마세이라 마을 설명판

 

스페인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 인증서

 

강 아래에서 보는 풍경

 

 무시아(Muxía)는 갈리시아의 아코루냐주에 있는 피스테라 곶에 위치한 자치단체로, 무시아는 '죽음의 해안'을 뜻하는 코스타 다 모르트의 일부이다. 이는 이 지역을 코스타 데 라 무에르테라고 부른 것을 갈리시아어로 옮긴 것으로 해안에 돌이 너무 많아서 수많은 배들이 침몰했기 때문에 이 같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무시아라는 이름은 이곳에서 3km 거리에 위치하는 베네딕토회 수도원이었던 상 슐리앙 드 모라이므 성당을 처음 세운 수도사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고 전해지며 스페인어로는 무히아라고 한다. 본래 12세기 초에 세워진 모라이므 수도원이 성당의 모태이나 수도원은 1105년 노르만 해적의 약탈로 파괴되었는데 당시 미래의 알폰소 7세가 이곳에 머무르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그래서 1119년 알폰소 왕자는 막대한 자금을 출연하여 수도원을 복구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종착지 가운데 하나인 무시아의 대표적인 명소로는 상 슐리앙 드 모라이므 성당 외에 비르시 다 바르카 성소가 있다. 이곳은 본래 켈트족의 성소였으나 12세기 갈리시아 지역이 기독교화된 이후 주민들은 이곳을 기독교 성소로 만들었다. 전설에 따르면 갈리시아 지역의 선교가 지지부진해 좌절한 기독교도에게 성모 마리아가 나타나 위로한 장소라고 알려져 있다. 17세기 성소는 성당으로 개축되었으나, 2013년 번개가 떨어져 전소되어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무시아에 도착하여 성당을 한 바퀴 돌고 언덕위의 조형물로 올라가 구경을 하고 주변이 언덕에 올라가 일망무제로 펼쳐지는 대서양 바다와 주변을 눈에 담고 해안으로 갔다. 해안에는 배 모양과 흡사한 제법 큰 바위가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성 야고보가 타고 온 배가 돌로 변하였다고 하는데 믿고 말고는 각자의 몫이다.

 

성당 주변

 

전망탑 표시

 

옛날의 십자가

 

성 야고브의 배라는 돌

 

바닷가에 새로 지은 성당

 

 무시아를 잠시 구경하고 이제 피스테라로 간다.

  

 중세시대부터 갈리시아 토박이들은 코스타 다 모르트를 피스테라(Fisterra)라고 불렀다.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90km 떨어져 있는 작은 마을인 피스테라는 '지구의 땅 끝'이라는 라틴어의 Finis() + Terrae()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중세시대부터 세계의 끝(End of the world) 혹은 땅 끝(Land's end)이라고 불렸으나, 정확히는 스페인의 땅 끝도 유럽 대륙의 땅 끝도 아니다. 실제로 이베리아 반도에서 서쪽 땅 끝은 포르투갈의 호카 곶이고, 스페인 본토에서 가장 서쪽 땅 끝은 무시아 자치단체의 토리냥 곶이다. 그러나 고대 사람들은 이 지역의 피스테라 곶을 세상의 끝으로 여겼기 때문에 이 같은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진 것이다.

 

 로마시대에 하루의 마지막 해를 볼 수 있는 피스테라 곶을 방문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중세에 병원들이 피스테라 곶 인근에 형성되어 순례자들을 보살폈기 때문에 이 풍습은 중세까지도 이어졌고, 지금도 순례자 일부는 피스테라 곶 인근에 위치한 피스테라 지방을 순례의 최종적인 목적지로 삼고 걷기도 한다.

 

 피스테라는 서기 44년 예루살렘에서 순교한 야고보의 유해를 나룻배에 실어 보내자, 그 시신이 해안에 닿았다는 설화가 있어 많이 방문하는 순례지다. 성 야고보 유적 발견 이후 순례자들은 산티아고에서 피스테라까지 도착해 성 그리스도상 앞에서 예배를 드리고, 산 길레르메의 유물을 관람하며, '지구의 끝'을 보기 시작했다. 1479년에는 도착한 순례자들을 수용할 병원이 지어졌다. 항구에서 3km 정도 이동하면 등대를 향해 이동할 수 있으며, 0km라고 적힌 표지석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 도착한 순례자들은 신발이나 옷가지를 태워 대서양에 뿌리는 의식을 행했으나 현재는 금지되어 순례자들이 물건을 태운 흔적만 발견할 수 있다.

 

 피스테라에는 18세기에 지어진 노사 세뇨라 도 본 수초 성당이 광장에 있다. 피스테라 곶 끝에 있는 600m 높이의 전망대 '몬테 파초'에 등대가 있다. 원래 몬테 파초는 켈트족 네리오족이 태양을 기리는 제물과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다. 등대로 올라가는 길에는 산토크리스토 예배당이 있는 산타 마리아 데 피스테라 교구 성당이 있다.

 

0km 표시석

 

피스테라 등대

 

멋어 놓은 신발 조형물

 

바닷가의 십자가

 

 

 

 피스테라에 도착하여 버스를 타고 온 일행들은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자유롭게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보면서 즐긴다. 30일 넘게 제대로 구경이라고는 하지도 못하고 길만 걸은 사람들에게 이만큼의 자유로움도 마음에 벅차다.

 

 순례자들이 벗어 놓은 신발의 조형물은 우리 모두의 가슴을 멍하게 만든다. 오랜 시간을 걸쳐 먼 길을 걸어 최종목적지에 도착한 순례자는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이 땅 끝에서 자신의 발을 보호하고 자신과 함께 고난을 겪으며 걸어온 신발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신발을 벗어 더 이상의 고생을 하지 않도록 바위위에 올려놓고 감사를 표시한다.

 

 

 피레스테가 항구라 주변에는 여러 조형물이 보이는데 종교적인 의미를 가진 것은 별로 없고 비교적 현대에 만들어진 조형물들이다. 주변을 구경하다가 언덕위의 카페에 올라가 느긋하게 맥주를 한잔 마시면서 대서양을 바라보며 생각에 빠졌다가 돌아갈 시간이 되어 버스로 가니 길가에 백 파이프를 연주하는 사람이 있어 약간의 돈을 기부하고 버스를 타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돌아왔다.

 

누군가 벗어 놓은 신발 -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여러 나라의 도시를 가리키는 팻말 - 우리나라는 없다.

 

피스테라 안내 조형물

 

거리의 악사

 

산티아고로 돌아와서 점심을 먹고 대성당을 다시 보러 갔다. 대성당의 광장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순례를 마친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어제는 다소 황망하여 주마간산으로 보았던 정문으로 가까이 가서 영광의 문도 다시 보고 첨탑의 조각들도 조용히 다시 보고, 광장의 기념품 가게에서 산티아고의 기념품을 조금 사고 광장을 배회하고 있으니 길을 걸으면서 만났던 사람들의 모습이 또 보인다. 하루의 시차를 두고 도착한 것이었다.

 

대성당의 여러 모습

 

대성당 광장에서 대성당의 여러 모습을 눈에 담고 성당 밑의 음식점이 모여 있는 거리로 내려갔다. 함께 길을 걸은 4명이 여정을 끝낸 망중한을 즐기려고 음식점에 앉아 갈리시아의 해산물요리와 맥주를 시켜 마시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으니 낯익은 얼굴들이 많이 지나가며 인사를 한다. 이제 이 여정도 끝이 났기에 한가롭게 우리가 걸어온 길의 이모저모를 이야기하면서 담소를 즐기다가 숙소로 돌아왔다.

 

  이제 까미노는 공식적으로 끝이 났다. 내일은 마드리드로 가서 이틀을 쉬고 귀국행 비행기를 탄다. 

스페인, 산티아고 까미노 길을 걷다. 35(06.20, 오 페드로우소 -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오늘의 걷기 길 : 오 페드로우소 - 오 아메날(3.7km) -  산 파이오 아 코루냐(4,0km) -  아 라바코야(1.8km) -  산 마르코스 아 코루냐(5.3km) -  몬테 델 고소(0.4km) -  포르타도 카미노(4.6km) -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0.2km)

 

 오늘은 이 까미노의 마지막 길을 걷는다. 이제 오 페드로우소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는 약 20km가 남았다. 많은 사람들은 오 페드로우소에서 15km 떨어진 몬테 도 고소에서 머물고 다음날 출발하여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대성당 미사에 참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감격과 기쁨의 마지막 길은 기대에 못 미친다. 이 길에서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향하는 고속도로와 수많은 차로가 얽혀있는 풍경을 주로 볼 뿐이다. 또 주변의 작은 마을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위한 마을로 도시화되었고 라바코야 국제공항은 길을 멀리 돌아가게 만들지만, 이 여정의 진정한 기쁨과 아름다움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산 마르코스의 언덕에서 처음으로 산티아고 대성당의 탑을 바라보는 순간 당신은 이미 순례자의 왕이 되었음을 마음속에 느낄 것이다..

 

 오늘은 평소보다 더 일찍 길을 떠나야 한다. 12시에 있는 대성당의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 일찍 대성당의 광장에 도착해야 하기에 모두들 새벽에 일어나 길을 떠난다. 나도 새벽 5시에 길을 떠나니 다른 사람들은 벌써 떠나고 없다.

 

 오 페드로우소를 나오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나와 일행은 어제 지나온 길로 다시 가서 어둠 속에서 전등을 밝히고 까미노 표시를 따라 걸으니 서양인 한 사람도 같은 길을 걷고 있다. 사위가 어둠에 둘러싸여 지척도 구별하지 못해 잠시 길을 잘못 들었다가 그 사람과 같이 길을 바로 잡아 걸어서 어둠에 덮인 여러 마을을 지나며. 까미노 표시를 따라가서 도로를 넘어 유칼립투스 나무 사이로 편안하게 이어지는 완만한 오르막을 오르면 라바코야 국제공항을 볼 수 있다.

 다시 나무가 우거진 숲길을 지나 거대한 공장지대를 지나 이어지는 길을 따라 바레이라 언덕을 올라 얼마 걷지 않아서 산 파이오가 나온다.

 

산 파이오 표시

 

 산 파이오에서 까미노 표시를 따라 라바코야 국제공항으로 향하는 고속도로 밑으로 이어지는 터널을 통과하면 순례자는 라바코야로 내려가는 아스팔트 포장길을 만난다.

 부근에 아름다운 숲과 깨끗한 시내가 있는 라바코야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국제공항 근처의 작은 마을로, 칼릭스티누스 사본은 라바코야를 산티아고에서 10km 정도 떨어진 숲이 우거진 마을에 시내가 흐르는데, 프랑스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순례자들은 모두 이곳에서 사도 야고보를 만나기 위해 옷을 벗고 손발과 더러워진 몸을 모두 씻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이 마을 이름이 라바’(Lava; 씻다) ‘코라’(Cola; 꼬리)’에서 유래되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가장 설득력이 있는 주장은 이 시내에서 순례자들이 산티아고에 좀 더 우아한 모습으로 도착하기 위해 ‘코야스’(Collas; 중세에 사용하던 칼라)를 빨았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렇지만 이런 순례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을 먼 거리를 걸어온 사람들의 몸에는 좀처럼 지워 지지 않는 냄새가 남아있었을 것이다.

 

라바코야 성당

 

 라바코야에서 산 마르코스까지 내려가는 길에 순례자를 위한 캠핑장과 갈리시아의 지방 방송국인 TVG를 지난다. 방송국 건물을 지나기 전에 비는 부슬부슬 오기에 잠시 쉬어가려고 바에 들러 늦었지만 간단하게 오렌지 주스와 약간의 빵으로 허기를 때운다. 그런데 30여 일을 걸으면서 조금은 이상한 현상을 발견했다. 내가 비교적 음식을 많이 먹는 편인데 거의 매일 아침을 먹지 않고 먼 길을 걸어도 배가 고픈 것을 모르겠다.

 산 마르코스와 몬테 델 고소는 같은 마을로 볼 수 있게 붙어 있다. 오늘의 목적지가 바로 눈앞에 있을 것 같은 조급함에 지나칠 수도 있으나 산 마르코스 소성당의 왼쪽으로 유명한 몬테 델 고소가 있다. 대부분의 순례자가 이곳에서 처음으로 꿈처럼 떠오르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의 탑을 본다.

 

멀리 보이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포장도로를 따라 왼쪽으로 몬테 델 고소의 계단을 내려가서 다리를 건너 고속도로와 사르 강, 철길 위를 지나 콩코르디아 공원을 만나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산 라사로에 도착한 것이다. 이제는 정말로 마지막 길을 걷는다.

 

순례자 기사단 상

 

 12사도(使徒)의 한 사람인 성() 야고보(스페인어로 산티아고)의 순교지로 알려져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la)는 갈리시아 자치지역에 있는 도시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당의 이름을 따서 도시 이름이 지어졌다. 성 야고보(산티아고 )가 순교하여 유해의 행방이 묘연하던 중, 별빛이 나타나 숲속의 동굴로 이끌어 가보니 성 야고보의 무덤이 있었다고 한다. 그 후 그곳을 별의 들판이란 뜻으로 캄푸스 스텔라(Campus Stellae)라고 불렀다. 알폰소 2세 시절에 이리아의 테오데마르 주교가 성 야고보의 유해가 발견됐다고 주장하여 성 야고보를 기념하기 위해 그의 유해가 있던 곳에 성당을 세웠고 이를 계기로 순례자들의 중심지로 부상하여 산티아고는 로마와 예루살렘에 버금가는 가톨릭 성지가 되어 해외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왔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나폴레옹 전쟁 때 프랑스군에 점령되어 성 야고보의 것으로 보이는 유해가 1세기 넘게 실종되었다. 그러나 유해는 교회 지하에 있는 석실에 감춰져 있었다. 1884년 교황 레오 13세가 교서를 내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유해의 정통성을 인정했지만 이후 교황청은 그 유해가 성 야곱의 것인지에 대해 공인하지 않으면서 순례할 것을 권장했다. 19세기~20세기에 진행된 성당 발굴 과정에서 로마시대 순교자 묘지가 발견되었다. 2010년 스페인을 방문한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순례의식을 치렀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갈리시아지방 중심도시의 하나로 수공업이 성하다. 12세기에 건설된 성 야고보를 모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을 비롯하여 성 프란체스코회와 성 아우구스티누스회의 수도원, 성당, 교회, 대학 등 중세의 건물이 많이 남아 있다.

1985년 구도심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고, 대성당이 있는 오브라도이로 광장 주변에 시 청사, 수도원, 대학교 등 중세시대 건물들이 많다.

 

산티아고의 엠불렘

 

산티아고 시내 입구 Praza da Concordia의 조형물

 

십자가

 

멀리 보이는 첨탑

 

 계속 직진하여 아베니다 데 루고 거리를 지나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구시가지가 나오지만 대성당까지는 아직 한참을 걸어야 한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옛 시가지(Santiago de Compostela Old Town)  전설이 담긴 십자가상이 세워진 산 페드로 광장(Plaza de San Pedro)에서부터 시작한다. 산 페드로 거리를 내려와 포르타 도 카미뇨를 지나면 길은 여러 거리와 광장이 있는 마지막 구간을 지난다. 스페인의 기독교가 이슬람교와 벌인 항쟁을 상징하는 곳이기도 하는 이 도시는 10세기 말에 무슬림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11세기에 완전히 재건되었다. 로마네스크, 고딕, 바로크 양식으로 지은 건물들이 있는 산티아고(Santiago)의 옛 시가지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다. 가장 오래된 기념물들은 성 야고보(St James)의 무덤과 대성당 주변에 모여 있는데, 포르티코 데 라 글로리아(Pórtico de la Gloria, 영광의 문)가 특히 유명하다.

 

 포르타 도 카미노를 지나면 성인의 숨결이 느껴지는 산 페드로 거리에 도착한다. 이제부터는 눈에 보이는 건물이 모두 유적이다. 좁은 거리와 여러 광장을 지나면 대성당 옆에 여러 성당과 수도원 옛 병원 건물이 보인다. 그 건물들도 화려하고 눈을 끌지만 우리의 목적지는 대성당이다. 마침내 산티아고 대성당을 향한 마지막 길인 아시베체리아 거리로 들어서면 오른쪽에 17세기에 만들어 산 마르티뇨 피나리오 수도원(Monasterial San Martino Pinario)의 웅장한 정문이 있다. 이어서 스페인에서 가장 인상적인 회랑을 만나게 되고, 대성당의 오래된 로마네스크 양식의 천국의 문을 만난다. 윤이 나도록 닳은 돌로 만든 도로를 따라 아치를 통과하면 마침내 오브라도이오 광장이 나타나고 이제 순례자의 눈에는 그토록 갈망했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이 보인다.

 

성당 뒤의 건물(Hospedaria San Martino Pinario와  Mosteiro deSan Martino Pinario)

 

 오브라도이로 광장(Praza do Obradoiro)에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Cathedral of Santiago de Compostela)을 보는 순간 말도 나오지 않는 감탄을 한다. 이 길을 걸으면서 크고 작은 수많은 성당을 보았다. 작은 성당은 작은 성당대로 나름의 특징이 있었고, 얽힌 이야기도 있었다. 그리고 부르고스 대성당의 화려함과 레온 대성당의 장엄함을 보고 감탄을 하였다. 그런데 이 대성당은 무어라 말 할 수 없는 감동을 주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Cathedral of Santiago de Compostela)은 외관의 화려함이나 장엄함 그리고 크기가 모두를 압도했다. 광장에서 아무리 구도를 맞추어 보아도 한 컷에 다 들어가지가 않는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Cathedral of Santiago de Compostela)은 예수의 열두 사도 중 한 사람인 성 야고보의 유해를 보관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현재의 성당은 1078년에 주교 디에고 페라에스에 의해 기공되어 1128년경 미완성인 채 헌당식을 가졌다. 외부는 여러 시대에 걸쳐 증축과 개축이 이루어졌다. 거대한 둥근 지붕은 15세기에, 16세기에는 회랑이 완성되었다. 바로크 양식의 파사드는 관청들로 둘러싸인 커다란 오브라도이로 광장의 일부가 되었다. 네 개의 계단 위에 위치한 주 출입문 양쪽에는 다윗과 솔로몬의 상이 서 있다. 이 성당의 건축학적 보석은 12세기에 만들어진 포르티코 데 라 글로리아(영광의 문), 바로크 파사드 뒤에 있다.  대성당 앞의 마름모꼴 계단을 통해서 올라가면 오브라도이로 문(Fachada de Obradoiro)이 있고, 그 안으로 들어서면 영광의 문(Portico de la Gloria)이다. 네이브로 통하는 통로의 팀파눔과 세 개의 아치 위 장식 홍예 위에는 12세기 초 거장 마테오 데우스탐벤이 신약 성서의 요한 묵시록을 근거로 조각한 '최후의 심판'에 등장하는 200여 개의 상이 조각되어 있다. 바로크 풍의 토레 데 렐로(Torre de Reloj, 시계탑)1680년 도밍고 안드라데가 만든 것이다. 화강암을 주재료로 하였으며 라틴 십자가 모양의 평면 설계로, 길이는 98m, 너비는 67m로 이루어져 있다.  

 대성당은 갈리시아 지방의 화강암으로 지어졌는데, 좌우에 있는 두 개 탑의 높이는 각각 74m. 대성당 앞의

중앙의 기둥에는 성 야고보의 상과 함께 성모와 다윗의 아버지 이세의 가계도가 새겨져 있다. 중앙 기둥의 하단부에는 사도 마테오의 흉상이 있는데 이 흉상에 머리를 부딪치면 사도의 지혜를 닮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보호를 위하여 철책으로 막아놓아 감사의 의식을 치르기는 어렵다. 영광의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제단 위에 황금으로 만든 천사의 호위를 받으며 백마를 타고 칼을 휘두르는 있는 산티아고 마타모로스(Santiago Matamoros; 전사 산티아고) 상이 있다. 

 

산티아고 대성당의 전경

 

대성당의 여러 모습

 

 대성당 광장에 도착한 순례자들은 모두 감격에 겨워 서로를 끌어안고 축하한다. 이 먼 길을 걸어온 사람들은 누구나 축하를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다. 예전에는 이 광장에 도착한 순례자들 중에는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감격한다고 하였는데 이제는 우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나는 눈물이 났다. 왜 눈물이 나는지는 모르겠으나 앉아서 울고 있다가 감정을 추스르고 일어나니 같이 걸은 일행이 다가와서 서로 안으며 축하를 해 주고 사진도 찍고 광장에 주저앉아 광장의 사람들은 구경한다. 같은 길을 걸어오며 만났던 사람들의 모습도 보인다. 우리와 거의 같은 길을 걸은 한국의 모녀와 젊은이들, 대만의 여인, 일본인 모두 완주를 기뻐하며 서로 축하를 한다.

 

대성당 주변의 모습

 

 광장에 앉아 쉬다가 정오의 순례자 미사에 참석하려고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성당을 들어 갈 때 큰 짐이나 남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도구는 가지고 들어갈 수가 없으니 미리 조치해야 한다. 매일 정오에 시작되는 순례자를 위한 미사에는 여러 나라의 사제들이 자국어로 강복을 한다. 우리나라의 사제도 있어 한국어로 강복을 하니 느낌이 달랐다. 가끔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에서 집행하는 미사를 더욱 널리 유명하게 만든 보타푸메이로(Botafumeiro) 강복 의식을 하는데 이런 경우 8명의 수사들이 힘을 다해 흔드는 황금 빛 향로가 대성당의 천장을 크게 비행하는 감동적인 광경을 볼 수 있다. 보타푸메이로(Botafumeiro)의 원래 뜻은 연기 방출기라는 뜻이나 지금은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에 있는 거대한 향로를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된다. 오늘은 다행히도  보타푸메이로 강복 의식을 거행하려고 수사들이 준비를 하고 미사 끝부분에 거행하였다. 사람들은 누구나 휴대폰을 꺼내어 사진을 찍느라고 바쁘다. 

 

 순례자들끼리 많이 하는 농담 중에 파리는 순례자의 친구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이는 중세나 현재나 마찬가지로 한 달이 넘게 땀이 베인 단 몇 벌의 옷만을 가지고 보도 여행을 하는 순례자에게는 항상 냄새가 나기 마련이라는 자조 섞인 농담이다. 중세의 경우에는 더욱 심했을 것으로, 라바코야에서 아무리 깨끗이 몸을 씻었어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에 모여든 순례자의 몸에서는 냄새가 풍겼을 것이다. 그래서 보타푸메이로는 미사 도중 순례자들에게서 풍기는 고약한 냄새를 없애기 위해 순례자의 머리 위에서 커다란 향로를 피웠던 것에서 유래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보타푸메이로(Botafumeiro) 강복 의식

 

대성당 내부와 미사(향로 미사 포함)

 

 미사가 끝나고 사람들은 성 야고보의 유해가 안치된 관을 보러 간다.

 

 대성당의 후면에는 면죄의 문이라고 불리는 거룩한 문이 있고, 대성당의 지하묘소에는 순은을 입혀서 조각한 성 야고보의 유골과 그의 제자인 테오도로와 아타나시오의 유해가 들어있는 함이 안치되어 있다. 야고보의 관을 지나가면 대성당의 금빛 찬란한 중앙 제대에는 순례자들이 뒤에서 포옹을 하는 산티아고의 좌상이 모셔져 있다. 산티아고 상을 포옹하기 위해서는 제단 뒤의 별실로 가야 하는데 제대 오른쪽으로 가서 옆으로 난 좁은 계단을 올라가면 황금으로 장식된 산티아고 상의 뒷면에 도달하게 되고, 순례자들은 마침내 성인을 포옹하고 입맞춤을 한다.

 

 

성 야고보의 유골안치소 표시

 

성 야고보의 관

 

성 야고보상

 

성당 내부

 

 대성당을 방문한 순례자들은 순례를 마쳤음을 산티아고의 주교회에서 보증하는 순례인증 증서인 콤포스텔라(Compostela)를 순례자 사무실에서 발급받는다. 사무실에 순례를 하면서 받은 수많은 스탬프가 찍혀있는 순례자 여권인 크렌디시알을 제출하여 심사를 받고 라틴어로 쓰인 콤포스텔라를 받는다. 순례자에겐 이 순간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길의 마침표다.

 

 미사에 참석하고 나와 성당 주위를 구경하다가 오늘의 숙소를 찾아 시내를 걸어가다가 일본식 스시뷔페를 발견하고 점심을 먹으러 갔다. 이 뷔페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뷔페와 조금 다르게 특이했다. 뷔페라 많은 종류의 음식이 있는데 미리 만들어 늘어놓은 것이 아니라 메뉴판을 보고 음식을 주문하면 주방에서 그 음식을 만들어 주는 방식이었다. 

 

점심을 먹고 호텔에 가서 그 동안의 땀으로 절은 몸을 깨끗이 씻고 피로도 풀고 쉬었다.

 

 오늘로 공식적인 산티아고 까미노는 다 끝났다. 30일이 넘게 약 800km를 걸어 온 것이다. 무엇 때문에 왜 걸었는지는 답이 나오지 않지만 이 길을 걷고 난 뒤에 무엇인가를 얻는 것은 천천히 생각해 보아도 될 것이다.

 

스페인, 산티아고 까미노 길을 걷다. 34(06.19, 아르수아 - 오 페드로우소)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오늘의 걷기 길 : 아르수아 -  아 페로사(3.3km) - 아 칼자다(2.5km) - 아 카야(2.0km) - 살세다(3.3km) - 아 브레아2.5km) - 산타 이레네(2.7km) - 아 루아 오 피노 아 코루냐(1.6km) - 오 페드로우소(1.3km)

 

 아르수아에서 오 페드로우소에 이르는 오늘은 약 20km로 쉽게 걸을 수 있는 길이다. 오늘만 걸으면 내일 산티아고에 입성한다는 생각에 길을 떠나는 순례자들은 이제 정말 다 왔다는 흥분감과 안도감에 급하게 걷기도 하지만 이 길은 짧고, 부드러운 산길이 아름답다. 마지막 부분에 살세다를 지나서 페드로우소에 도착하기까지는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와 자주 마주치게 되므로 안도감을 버리고 교통에 조심해야 한다. 이 길의 중간에서 만나게 되는 살세다와 아 브레나에는 두 명의 순례자가 사망한 기념물이 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넘어 피스테라와 무시아의 바다냄새를 맡을 수 있다는 산타 이레네의 언덕도 완만하며 이곳에서 3km 정도의 내리막을 내려가면 오 페드로우소에 도착한다. 이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는 단 하루만이 남았다.

 

 아침에 일어나니 길을 걷던 일행들은 모두들 가벼운 흥분에 들떠있는 것 처럼 보인다. 오랜 시간에 먼 거리를 걸어서 이제 마지막 목적지가 눈앞에 들어오니 누군들 흥분하지 않겠는가!

 

알베르게 앞의 아르수아 엠블렘

 

 알베르게에서 큰 도로를 따라 걷다가 왼쪽으로 걸어가면 산티아고 39km의 표시가 나오고 조금 더 가면 오래 된 성당이 나온다. 어제 미사를 본 lgrexade Santiago de Arzua 성당 바로 옆에 오래 된 막달레나 소성당(Capilla de la Madalena)이 있다. 어제 사진도 찍지 못하여 사진을 찍고 지나간다.

 

산티아고 39km 표지석

 

막달레나 소성당(Capilla de la Madalena)

 

 막달레나 소성당(Capilla de la Madalena)은 고딕 양식 건물로 르네상스 양식이 일부 결합되어있는 성당으로 옛날에는 순례자를 위한 병원과 함께 수도원의 일부였으나, 지금은 바로 옆에 새 성당을 있어 성당으로서의 역할은 끝이 난 곳이다.

 

 막달레나 소성당(Capilla de la Madalena)을 지나 산길과 언덕길을 따라 조금 가니 수녀원은 아닌 것 같은데 수녀님들이 나와서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물을 나누어 주며 은총을 빌어 준다. 너무나 고마워 물을 한 병 가져오면서 약간의 헌금을 하였다.

 

수녀원(?)

 

 이 건물에는 두 개의 현판이 붙어 있는데, 위의 글은 '순례자들, 라 프로비덴시아의 성모 마리아의 딸들 우리는 여러분을 위해 여기 있습니다.'이며 아래의 글은 '하느님과 함께 즐겁게 걷는 사람'이다.

 

 아르수아의 루고 거리와 까미뇨 데 산티아고 길을 통과하여 완만한 경사의 오솔길을 오르면 프레곤토뇨 마을에 도착한다. 순례자는 아 카야에 도착하기 전에 아 페로사, 아 칼사다와 같은 작은 마을을 지난다. 아 페로사를 떠나 떡갈나무 숲과 라드론 강변을 지나 유칼립투스 나무 사이로 이어지는 길을 걸으면 아 칼사다에 다다른다. 이어서 마을 출구의 다리를 넘고 완만한 경사 길을 따라서 올라가면 아 카야를 만난다. 아 카야를 떠나 완만한 언덕을 넘으면 살세다에 도착한다. 이 길을 걷는 도중에 가랑비가 오기 시작하더니 제법 굵은 비가 내려 모두들 우의를 입고 길을 걷는다. 갈리시아에서는 일 년에 300일은 비가 온다는 이야기가 있듯이 비는 거의 매일 오다가 멈추고를 반복한다.

 

어느 신부님의 추모비

 

스위스의 Tuyet han이라는 이름의 여인

 

 비가 계속 오기에 잠시 쉬었다 가려고 바에 들러 따뜻한 커피를 한잔 마시고 있으니 옆의 좌석에 며칠을 계속 보아온 미소가 너무 예쁜 여인이 자리를 하고 쉬고 있었다. 그래서 이야기를 해 보니 너무 상냥하게 말을 받으며 웃는다. 내가 먼저 나는 한국에서 왔다고 하며 이름을 밝히고, 어디에서 왔으며 이름이 무엇인가를 물으니 종이에 이름을 적어 주었다. 오래 이야기하기에는 외국어 능력이 짧아 간단히 이야기하고 사진을 찍어도 되느냐고 물으니 허락을 해서 사진을 찍었다. 이 길을 걸으며 많은 사람을 만나고 헤어졌지만 이렇게 순박한 웃음을 웃는 사람은 보지 못하였다. 사람에 대한 인상은 각자가 느낌이 다 다르지만 나에게는 이 여인이 웃는 모습이 사람을 편안하게 해 주는 느낌을 받아 너무 좋았다.

 

체험학습에 나온 스페인 학생들

 

호레오

 

 이제 비도 가늘어져 걷기에는 별로 어렵지 않아 비를 계속 맞으며 걸어가니 곳곳에 곡식저장 창고인 호레오가 눈에 보인다. 지나는 길에 초등학생 쯤 되어 보이는 스페인 학생들이 무리를 지어 걷는 것도 보인다. 아마도 우리나라의 체험학습 비슷한 것을 하는 것 같았다.

 

벗어 놓은 신발들

 

순찰 중인 기마 경찰

 

 별 특이점도 없는 길을 그냥 목적지를 향하여 걸어가니 말을 탄 경찰이 여유롭게 순찰을 돌고 있다. 여러 번을 보았는데 아마 순례자들의 안전을 위해 순찰을 도는 것 같았다. 이 길에서는 다른 특이한 건물이나 유적 성당도 보이지 않는다. 아마 산티아고가 지척에 있기에 다른 유적은 없는 것이라 생각된다.

 

 

 살세다에서는 잠시 포장도로를 벗어나 오솔길을 따라 걸으면, 순례 중에 유명을 달리한 기예르모 와트를 기리는 기념비가 있다. 그는 1993825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하루 남기고 69세의 나이로 하느님을 영접했다고 새겨져 있다. 청동으로 만든 등산화 안에는 지나가던 순례자들이 놓아둔 꽃과 여러 추도를 하는 물품과 글들이 넘쳐난다. 다시 도로를 건너서 오솔길을 걸어가 오 센을 지나면 완만한 내리막길이다. 이제부터 순례자는 촘촘하게 붙어있는 마을들을 지난다. 라스를 통과하는 길을 따라가면 아 브레아로 향하게 되며 중간에는 왼쪽에 1993년 순례 중 사망한 마리아노 산체스 코비사를 기리는 비석이 서 있다.

 

기예르모 와트의 추모비

 

 까미노 길은 아 브레아를 거쳐 산타 이레네 언덕의 정상에서 도로의 아래를 지나는 터널로 이어지다 산타 이레네를 만난다. 산타 이레네는 까미노 데 산티아고에서 바다의 산들바람 냄새를 처음으로 맡을 수 있는 곳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전통적인 가옥이 있는 작은 마을이다. 길을 가다가 보니 바다가 60m 떨어져 있다는 표시가 있었지만 가서 보지는 못했다.

 

바다 60m 표시

 

 산타 이레네에서 오 페드로우소까지는 3km도 남지 않았다. 까미노 표시를 따라 유칼립투스 숲길을 내려가면 곧 아 루아가 나온다. 마을을 통과하여 아스팔트 길을 따라 걸어가면 학교가 나오고 계속 아스팔트를 걸어가면 오 페드로우소에 도착한다. 아르카도 피노(Arcado Pino)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오 페드로우소는 철저하게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향하는 순례자를 위하여 만들어진 마을로 많은 알베르게와 식당 슈퍼 등이 잘 갖추어져 있다. 그래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하루가 남은 순례자들은 여기서 머물면서 마지막 휴식을 한다..

 

 

 오 페드로우소의 알베르게를 찾아가서 비에 젖은 몸을 씻고 주변 슈퍼에 가서 마지막 날을 보낼 준비를 한다. 오늘이 산티아고에 들어가기 전날이라 모두들 약간의 들뜸이 있다. 약 30일을 걸어왔는데 내일 하루쯤이야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오늘은 푹 쉬기로 한다. 일행들이 모여 슈퍼에서 닭을 비롯해 여러 음식물을 사서닭을 삶아 먹기로 했다. 물론 남자들의 세계이니 알콜이 빠질 수는 없었다.

 닭에 파, 마늘, 홍합 등을 넣고 푹 고아서 닭은 꺼내고 쌀을 넣어 죽을 끓였다. 닭고기를 안주로 삼아 와인과 맥주를 마시며 여태까지 걸어온 길에 대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웃고 떠들고 있으니 주방을 지나가던 많은 사람들이 인사를 한다. 모두가 같은 길을 걸었기에 어느 새 동료의식이 생긴 것이다. 우리와 많은 날을 걸어오면서도 인사만 했던 다리를 절면서 걸은 대만의 여인은 유봉영이라는 이름을 가르쳐 주고, 일본인 여인은 영어로 AIKO MATSUMOTO라고 적어 준다. 둘 다 70에 가까운 나이였다. 조금 있으니 한국의 김해에서 왔다며 우리와 자주 만나 인사를 했던 60 정도의 남자가 합석을 하여 술을 마시고 떠들면서 회포를 풀었다.

 

 제법 마신 술과 이제는 다 왔다는 안도감에 취기가 조금 돌아 쉬다가 저녁에 미사에 참석했다. lgrexa de Santa Eulalia de Arca 성당에서 미사가 끝나니 며칠 전부터 보이던 성가대가 이곳에서 합창을 한다고 한다. 아마도 순회를 하면서 각 마을에서 성가를 합창하는 모양이었다. 성가대의 합창을 끝까지 듣고 나니 제법 늧은 시간이었다. 낮에 마신 술로 약간 취기가 오라서 알베르게로 돌아와 빨리 잠자리에 든다.

 

lgrexa de Santa Eulalia de Arca 성당

 

lgrexa de Santa Eulalia de Arca 성당 앞에 예쁘게 핀 수국

 

lgrexa de Santa Eulalia de Arca 성당 앞의 십자가

 

성당 내부와 합창

 

 오늘도 길을 걸으며 많은 만남과 헤어짐을 하였다.

 

 나만 그런지 모르겠으나 사람이란 누구나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거의 다 이루어졌다고 생각이 들면 조금은 정신이 해이해지는 것 같다. 여태까지 아주 엄격하게 자신을 통제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긴장의 끈이 조금 풀어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