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鶴)의 오딧세이(Odyssey)

스페인, 산티아고 까미노 길을 걷다. 24(06.09, 산 마르틴 델 카미노 - 아스트로가)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오늘의 걷기 길 : 산 마르틴 델 카미노 -  푸엔테 데 오르비고(6.8km) - 오스피탈 데 오르비고(1.1km) -  비아레스 데 오르비고(2.2km) - 산티바네스 데 발데이글레시아스(2.5km) - 산 후스토 데 라 베가(7.6km) -  아스토르가(3.8km)

 

 오늘은 산 마르틴 델 카미노에서 아스토르가까지 약 24km의 길을 걸어야 한다. 오늘은 두 개로 나누어진 까미노 길은 오르비고 다리를 건너기 전에 하나로 합쳐지지만 마을의 출구에서 다시 나뉜 길은 산 후스토 데 라 베가를 가기 전, 성 토르비오의 십자가에서 하나로 합쳐져 아스토르가로 이어진다.

 

 이제는 습관적으로 시간이 되면 일어나 짐을 챙기고 간단히 요기를 하고 길을 떠나는 시간은 인적이 없는 시간이다. 서양 사람들은 거의 아침을 늦게 시작한다. 그러니 새벽 같이 길을 걷는 사람은 순례자뿐이다.

 

어둠의 산 마르틴 델 카미노 거리

 

 산 마르틴 델 카미노의 출구 파라모 운하를 지난 순례자는 도로의 오른쪽으로 나란히 이어지는 길을 걸어야 한다. 길을 떠나면 오르비고라는 이름이 붙은 여러 마을을 만난다. 그 중에 가장 아름답고 인상적인 오스피탈 데 오르비고의 다리까지는 8km 정도로 약 2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넓은 농경지와 들판, 시원하게 뻗어있는 물푸레나무의 그늘이 순례자를 맞아주며 이윽고 길은 마을의 초입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도로와 멀어진다.

 

도로 옆을 따라 걷는 사람들

 

오스피탈 데 오르비고 표지판

 

 버드나무가 울창한 오스피탈 데 오르비고는 오르비고 강의 다리를 사이에 두고 두 개의 마을로 나뉘어져 있다. 오스피탈 데 오르비고(Hospital de Órbigo)는 레온지방, 리베라 델 오르비고 지역에 있는 소규모 자치단체로 중세시대 오르비고 강가에 있던 산타 마리아교회를 중심으로 작은 마을이 형성됐다. 당시 이 마을 명칭은 푸엔테 델 오르비고였다. 16세기말 푸엔테 델 오르비고에서 강 건너편에 순례자를 위한 산후안(성요한)예루살렘기사단이 병원(지금의 성당)을 짓고 이 근처에 '오스피탈 데 오르비고'란 마을이 형성됐다. 이 마을은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다. 오스피탈 데 오르비고는 농업과 목축업이 주축을 이루고 지금은 관광산업이 부상하고 있다고 한다.

 

오르비고 강 표시

 

명예로운 걸음의 다리(Puente del Passo Honroso)

 

 13세기에 세워진 오르비고 강 다리의 원 이름이 푸엔테 델 오르비고인데, 1434년 수에로 데 키뇨네스(Suero de Quinones)가 이 다리에서 파소온로소(paso Honroso, 마상창시합)을 열어 파소온로소다리라고도 불린다. 명예로운 걸음의 다리(Puente del Passo Honroso)는 여러 시대에 걸쳐 만들어진 19개의 아치로 가장 오래된 것은 13세기의 아치다. 다리 중간에는 아직까지 당시의 사건을 설명하는 이야기가 새겨져 있다. 이 다리는 아치의 보존상태가 아주 좋아 지나는 나그네들이 사진을 찍기에 여념이 없다. 19세기에 주민들은 나폴레옹 군대가 다리를 건너는 것을 막기 위해 다리의 양쪽을 파괴했다고 한다. 강에 비해 다리 크기가 엄청나게 커 보이지만 바리오스데루나 저수지를 건설하기 전까지 오르비고 강은 꽤 큰 강이었다고 한다. 여러 차례 보수작업이 이뤄졌으며 1939년 국가유적으로 지정됐다. 이 다리는 까미노 데 산티아고에서 가장 긴 다리이다. 또한 스페인에서 가장 유명한 기사도 정신이 발휘된 곳이다.

 

 이 다리의 이름에 얽힌 이야기는 아래와 같은 이야기가 있다.

 

 후안 2세 시절, 기사 돈 수에로 데 키뇨네스는 그의 연인인 도냐 레오노르 데 토바르와 기묘한 약속을 했다. 그녀에 대한 사랑의 표시로 매주 목요일 목 칼을 차고 다니기로 한 것이다. 만약 약속을 어기면 300개의 창을 부러뜨리거나 오르비고 강 위의 다리에서 한 달 동안 결투를 하기로 했다. 돈 수에로는 이 약속을 지키는데 지쳐서 싸움을 허락해 달라고 왕에게 요청하고, 유럽 전역에 있는 여러 명의 기사들에게 자신이 목 칼을 벗을 수 있게 도와달라는 편지를 썼다. 이에 수많은 기사들이 싸움에 참가해서 그의 편에 서기도 했고, 그와 맞서 싸우기도 했다. 1434710일부터 89일까지 725일 성 야고보의 축일을 제외하고 약속대로 한 달간 창 싸움이 이어졌다. 수많은 창이 부러졌고 기사들 중엔 부상자도 있었고, 한 명은 사망하기까지 했다. 마침내 결투가 끝나자 돈 수에로는 목 칼을 벗었다. 그 후 그는 자유의 상징인 도금된 은 족쇄를 성 야고보에게 바치기 위해 산티아고로 순례를 떠났다. 지금도 산티아고 대성당에는 그가 바친 족쇄가 보존되어 있다. 이 결투 중에 사망한 한 명의 기사는 기독교식 무덤에 잠들 수 없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가톨릭이 이러한 종류의 결투를 인정하기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돈 수에로는 24년 뒤 이 다리 위에서 또 다른 결투를 하다가 다른 기사의 손에 죽었다. 이곳에서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돈 수에로가 벌인 결투를 기리는 축제가 매년 6월의 첫 번째 주말에 열린다. 이때는 도시 전체를 중세 식으로 꾸며놓고 중세식 시장을 열고, 마을의 사람들이 중세 복장 축제를 즐긴다고 한다.

 

 다리를 건너면 바로 옆에 카페가 있다. 길을 걷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이 카페에 앉아 음료와 빵을 먹으며 다리를 감상한다. 카페에 들어가니 자리를 잡기가 어려웠는데 카페 밖 베란다에도 좌석을 마련해 놓아 앉아서 경치를 즐기니 길을 걸으면서 만났던 많은 사람들이 보인다. 앞에서 수차 이야기했던 한국인 모녀와 한국의 젊은이들 다른 외국인들이 모두 즐겁게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고 있다. 그 중에서 한 젊은 여자가 말을 걸어와 이야기를 하니  인천에서 와서 혼자서 이 길을 걷고 있다고 한다.

 

 쉬고 나서 다시 길을 시작하는 마을에 보이는 세례자 요한 성당(Iglesia Parroquial de San Juan Bautista)은 예루살렘의 성 요한 기사단에 속해 있던 성당으로 현대에 재건축되었다. 오늘날도 파사드에서 찬란히 빛나는 기사단의 십자가를 볼 수 있다.

 

오스피탈 데 오르비고 마을 안내

 

세례자 요한 성당(Iglesia Parroquial de San Juan Bautista)

 

 마을의 출구에서 길은 양쪽으로 갈라지는데 재미있게 길을 구분해 놓았다. 직진하는 길에는 우는 얼굴에  road(도로 따라 가는 길)라 표시되었고, 오른쪽 길은 웃는 얼굴로 way로 표시하여 마을길임을 알리고 있다. 레알 까미노를 걷기 위해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길을 선택해야 한다. 구 시가지와 소박한 들을 지나는 아름다운 길로 이어지는 중간에 오른쪽으로 산 펠리스 데 오르비고로 이어지는 길을 지나치면 비야레스 데 오르비고에 이르기까지 북서쪽으로 길이 이어진다.

 

 이 길을 걸으며 오스피탈 데 오르비고 마을의 카페에서 만났던 인천에서 온 젊은 여성과 함께 걷게 되어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그 여성은 30대 초반으로 회사를 다니다가 그만두고 무언가를 찾아보기 위해서 이 길을 걷기로 하였다고 말하며 자신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이 길에서 만난 젊은이는 대개가 직장을 그만두고 길을 걷는다 하였는데 우리가 젊었을 때는 상상도 못하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용기가 너무 부러웠고 그들의 도전이 너무 고마웠다. 젊을 때 자신을 찾아 떠나는 순례길은 그들을 크게 성장시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들을 위해 마음속으로 기도해 주었다.

 

비야레스 데 오르비고 표시

 

 다음 마을인 비야레스 데 오르비고(Villares de Órbigo)는 레온주에 있는 자치시로 산티아고 순례길의 영향 덕분에 의미 있는 종교시설이 다수 존재한다. 오르비고 강둑이 자치단체 영내에 위치하며, 농업이 발달하여 전통적으로 풍요로운 지역으로 발달했다.

 이 주변 마을 이름에 오르비고라는 강 이름이 모두 들어 있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마을과 강은 필연적인 관계이다. 오르비고 곳곳에 운하와 댐이 건설되어 비옥한 평야를 위한 관개시설로 활용되고 있고, 마늘, 부추, 고추가 주로 재배되며 품질이 좋다고 잘 알려져 있다.

 

마을의 십자가

 

 마을의 길을 따라가니 중간에 여러 나라의 국기를 늘어놓은 가게가 보인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알려진 가게로 한국어 표기도 많고 주인이 간단한 한국어를 구사하고 아주 단순한 한국 물품도 있었다. 잠시 들렀다가 지나쳤다.

 

비야데스 데 오르비고 마을

 

 비야레스 데 오르비고에서 산 후스토 데 라 베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샛길들이 있지만 노란 까미노 표시만 충실하게 따라가면 된다. 비야레스 데 오르비고에서 산티바네스 데 발데이글레시아스까지는 약 2km. 계속 걸어 마을에 들어서면 나무 사이로 이어지는 돌길을 따라 언덕을 올라가서 계속 길을 따라 내려가면 산티바네스 데 발데이글레시아스에 도착한다.

 

산티바네스 데 발데이글라시아 마을 안내

 

길가의 십자가

 

 산티바녜스 데 발데이글레시아스에서 시작된 평원은 언덕을 지나 레온 산과 텔레노 산으로 이어진다. 계속해서 길을 가면 포도나무와 밀밭이 넘실대고 버드나무와 소나무, 떡갈나무가 우거진 숲을 따라 부드럽게 이어진 길을 본다. 중간의 내리막 너덜지대를 조심해서 지나면 이 길의 끝에는 성 토르비오의 십자가가 있다. 이 부근에서 아스토르가가 보인다. 계곡을 따라 내려가면 아스토르가에 들어가는 순례자들이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산 후스토 데 라 베가에 도착한다.

 

말을 타고 가는 순례자(?)들

 

 고원 길을 계속해서 걸어가니 중간에 과일을 진열해 놓은 곳이 보인다. 여러 종류의 과일들이 진열되어 있고 지나가던 순례자들은 자리에 앉아 먹고 싶은 과일을 가져와서 먹는다. 그리고 자신이 내고 싶은 만큼의 기부를 하는 가게다. 옆에는 이 과일가게를 관리하는 사람이 있어 부족한 과일은 계속 보충해 주었다. 우리가 스페인에서 마켓에 가면 가장 싼 것이 과일이었다. 그래도 이곳에서는 자신이 먹은 과일 값을 기부라는 단어가 사람에게 묘하게 작용하여 후하게 지불한다. 

 옆에는 수공예로 팔찌를 만드는 사람이 있었다. 그도 가격을 정하지 않고 주는 대로 받으며 원하는 사람에게 즉석에서 매듭으로 팔찌를 만들어 주었다. 그 정성이 더 갸륵해서 팔찌를 하나 사고 과일 값을 지불하고 쉬다가 다시 길을 갔다.

 

길가의 순례자들을 위한 음식 - 기부제이다.

 

 

 산 후스토 데 라 베가는 순례자와 관광객에게 완벽한 시설을 제공하는 곳으로 아스토르가 인근의 마을이며 국도의 샛길에 위치해있다. 성인 후스토와 그의 형제였던 성인 파스토르가 이 마을에서 출생하여 마을의 이름을 따왔다.

 

 마을 입구에 있는 산토 토리비오 십자가(Crucero de Santo Toribio)5세기의 아스토르가의 주교였던 성 토리비오와 연관이 있다. 성 토리비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아스토르가에서 추방당했다. 그는 아스토르가로 향하는 높은 언덕에 앉아 샌들의 먼지를 털면서 아스토르가 소유라면 먼지도 가져가지 않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주교가 누명을 썼다는 것을 알게 된 아스토르가 사람들은 이 언덕에 그를 기리는 십자가를 세웠다. 이 십자가는 성 토리비오와 성모를 상징하는 석조 작품으로 이 십자가가 세워진 이후 작은 성당이 생겼고 많은 순례자들이 이곳을 찾기 시작했다. 십자가가 세워진 언덕에서는 아스토르가를 한눈에 볼 수 있고, 전망이 좋아 레온 산을 배경으로 투에르토 강이 또렷하게 보인다.

 

토르비오의 십자가

 

멀리 보이는 아스토르가

 

산 후스트 데 라 베가 표시

 

멀리 보이는 아스토르가

 

목마른 순례자상

 

산 후스토 데 라 베가 표지

 

길을 건너는 육교

 

 마을의 출구에서 순례자는 철제로 만들어진 다리로 투에르토 강을 건너 얼마 후 오른쪽으로 내려가 도로와 나란히 걸어 공장지대를 지난다. 길은 오래된 중세시대의 다리로 이어지고 다리를 건너 가파른 길을 올라 태양의 문으로 통과하면 아스토르가 구 시가지가 나온다.

 

아스토르가 표지

 

아스토르가 표시

 

 아스토르가(Astorga)는 레온 들판과 레온 산간지대의 중간 지역에 평균고도 868m의 고지대에 자리잡고 있으며 투에르토강(Río Tuerto)이 도시 한가운데를 통과한다. 아스토르가에서는 기원전 2750년의 주석으로 만든 인공물이 발견되었고, 기원전 1300~700년의 청동기시대 유물도 발견되었다. 철기시대인 기원전 275년 아스토르가에는 켈트족이 살았다. 이후 이곳에 고대 로마의 성채가 세워졌고 기원전 14년에는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Augustus)가 이름을 붙인 아스투리카(Asturica)라는 도시가 아스토르가의 기원이며, 당시의 대규모 목욕탕 유적이 아직도 시내에 남아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프랑스길과 은의 길이 교차하는 지역이다.

 

 로마시대 아스토르가는 기독교가 크게 성행했었다. 야고브과 사도 바울이 아스토르가에서 설교를 했다는 전설이 있으며 3세기에 주교관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스페인에서 가장 먼저 주교구가 설치된 지역이기도 하며, 아스토르가 주교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 직책이었다. 11세기 산티아고 순례길의 주요 중간기착지였지만 아스토르가는 종교적으로 쇠락했다가 성당 건축은 15세기에 다시 시작됐다.

 

 1528년 에르난 코르테스가 멕시코에서 카카오 콩을 스페인으로 들여왔다. 아스토르가는 유럽의 초콜릿 발상지로 아스토르가 산 초콜릿을 유럽 전역에서 볼 수 있다. 아스토르가 초콜릿 박물관에는 16세기의 핫초코 머그잔이 보관돼 있다.

 

 현재 도시 곳곳에 이와 같은 역사적 건축물을 비롯해 많은 관광 명소가 자리 잡고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중세시대에 건축한 주교궁(El Palacio Episcopal)과 산타마리아 대성당(Catedral de Santa María), 고대 로마 시대에 조성한 성벽(Wall of the Town) 등이 있다.

 

 아스트로가 구 시가지의 입구에 공립 알베르게가 오늘의 숙소다. 이 길을 걸으면서 공립 알베르게와 사립 알베르게를 비교해 보면 대체적으로 공립 알베르게가 시설면에서 좋은 것 같다.

 일찍 도착해서 샤워를 하고 일행들과 시내를 구경하려 나가니 숙소 앞에 조그마한 광장이 있다. 산 프란시스코 광장이었고, 거리를 건너서 수리를 하고 있는 산 바르톨레메라는 오래된 성당이 보여서 가보니 문을 닫아 놓아 들어가지를 못했다.

 

시내를 걸어가니 여러 옛 건물이 보이고 여러 동상을 비롯한 조형물도 보인다.

 

알베르게 앞의 순례자 상

 

알베르게 앞의 작은 공원

 

산 바르톨레메라 성당

 

 거리를 걸어가니 사람들이 많이 있는 마요르 광장이 있다. 마요르 광장에는 바로크 양식의 아름다운 파사드, 클라비호 전투의 군기가 소장되어 있는 아스토르가 시청(Ayuntamiento)과 쌍둥이 탑, 도시의 상징인 시계탑이 눈에 띈다. 시계에는 독특한 복식을 입은 두 사람이 망치로 종을 치는 모습이 있다. 이 두 사람은 콜로사와 후안 산쿠다라는 두 인물로, 이 시계는 정시는 알려주지만 15, 30, 45분은 알려주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 시계를 만든 장인이 인색한 도시 주민들을 비웃으며 시간은 알려주지만 15분은 알려주지 않겠다.’라고 결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시청(Ayuntamiento)

 

사자와 독수리상(도시의 수호자들을 기억하는 기념비)

 

 번잡한 광장을 지나 시내를 걸어가니 좌우에 초콜릿 가게가 엄청나게 많이 보인다. 유럽 초콜릿의 발상지라는 말이 전혀 과언이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알 수 있다. 여기서 아쉬운 것이 초콜릿박물관이 문을 닫아 놓아서 구경을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계속 시내를 걸어가니 주교궁과 대성당이 모여 있는 광장이 나타난다.

 

 산타 마리아 대성당(Catedral de Santa Maria)은 아스토르가에서 가장 중요한 건축물이자 로마네스크와 고딕, 바로크 양식이 혼합되어 있는 최고의 성당이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대성당을 확장하면서 고딕 양식이 되었는데, 아직도 로마네스크 양식의 요소가 남아 있다. 성당의 제단부는 고딕 양식, 파사드는 바로크, 위엄의 성모상은 12세기, 스테인드글라스와 주제단화는 16세기의 작품이다. 성당 내부의 아름다운 위엄의 성모상은 스페인 로마네스크 양식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모상이다. 합창단석의 조각 중엔 카드놀이를 하면서 파이프를 물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이 조각은 콜론(Colon; 콜럼버스)이 처음으로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지 불과 25년 후에 만든 작품이다. 이 작품은 유럽인들의 흡연 습관을 보여준 최초의 작품이라고 한다.

 

 옛 로마의 성터 위에 건립된 주교궁(Palacio Episcopal)은 안토니오 가우디가 설계한 환상적인 현대 건축물로 원래 주교의 거처로 건축되었으나 오늘날엔 까미노 박물관으로 사용된다. 주교궁을 보면 디즈니의 만화영화에서의 궁전이 바로 생각난다. 환상적인 궁전의 모형이 이 궁전에서 가져간 것은 아닌지가 의문이 들 정도로 닮았다. 그런데 주교궁이 문을 열지 않아 안을 볼 수가 없어 안타까웠다.

 

대성당 광장

 

주교궁(Palacio Episcopal)

 

주교궁

 

산타 마리아 대성당(Catedral de Santa Maria)

 

산타 마리아 대성당(Catedral de Santa Maria)의 여러 문 위의 장식

 

 산타 마리아 대성당(Catedral de Santa Maria) 내부를 구경하려니 입장권을 구입해야 했다. 누차 이야기했지만 나의 취향이 박물관이나 미술관은 꼭 구경하는 것이라서 입장권을 구입하여 안으로 들어가 내부를 보고 또 박물관을 구경하면서 레온이나 부르고스에 못하지 않는 곳임을 깨닫게 되었다. 스페인에서 최초의 주교령이 이곳이었다는 것이 허언이 아니었다.

 

산타 마리아 대성당(Catedral de Santa Maria)의 내부와 박물관

 

대성당 옆의 산타 마르타 성당

 

 대성당 옆에 종탑이 특이한 산타 마르타 성당이 있다. 이슬람이 지배하던 시절 마르타라는 이름의 여인을 개종시키려 했으나 그녀는 순교하였다 한다. 이후에 이슬람이 물러나고 마르타는 아스토르가의 수호성인의 칭호를 얻었고 그녀의 이름을 딴 성당과 수도원이 스페인 여러 곳에 지어졌다.

 

대성당과 주교궁

 

 주교궁과 대성당을 구경하고 시내를 배회하면서 가게에 들러 초콜릿을 사서 일행들과 나누어 먹고 광장으로 가니 많은 한국인이 햄버거를 먹고 있다. 맛 집이라는 곳이라 상당히 번잡한 곳이었지만 나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나도 먹는 것을 좋아하여 한국에서는 찾아도 다니지만 내 여행의 철학은 기회가 되면 그 지방의 특색 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초콜릿을 맛본 것이었다.

 

 사실 아스토르가에는 대표하는 두 가지 음식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코시도 마라가토(Cocido Maragato)인데 이것은 9가지 정도의 고기와 가르반소(Garbanzos; 병아리콩) 요리와 수프 등이 나오는 전통 음식으로 특이한 점은 보통 식사와 반대 순서 즉 고기를 먹고 그 다음에 나머지 곁들인 음식을 먹는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버터가 들어간 과자 만테카다(Mantecadas).

 

 시내를 배회한 뒤에 알베르게에 돌아와 저녁을 라면으로 해결하기로 의견을 모아 레온에서 구입한 라면을 가지고 엄청난 양을 끓이니 냄새가 온 주위에 퍼져 한국인들은 모두들 군침을 다신다. 라면으로 포식을 하고 쉬고 있으니 낯익은 반가운 얼굴들이 들어온다. 한국인 모녀와 인천에서 온 젊은 여성, 한국의 여러 젊은이들 모두가 이곳에서 오늘을 쉰다고 하여 서로가 서로의 안부를 물으면서 이야기를 하고 저녁을 해결한다. 이 공립 알베르게가 규모가 엄청 크서 우리나라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외국인도 많이 보였다.

저녁을 먹고 자리에 돌아오니 할 일이 없다. 그래서 침상에 누워 있다가 잠이 들었다. 잠을 자다가 깨어 밖에 소리를 들으니 비가 엄청 내리고 있다. 날씨의 변화가 아주 심하여 날이 맑았다가 금방 비가 오기도 한다.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니 대구에서 온 동생 같은 사람이 혼자 앉아서 고독을 삼키고 있어 가까이 가서 여러 이야기를 하다가 내일을 위해서 잠자리에 든다. 

스페인, 산티아고 까미노 길을 걷다. 23(06.08, 레온 - 산 마르틴 델 카미노)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오늘의 걷기 길 : 레온 - 산타아나 델 까미노 - 라 비르헨 델 카미노(7.6km) - 발바르데 데 라 비르헨(4.6km) -  산 미켈 델 카미노(1.4km) - 비야당고스 델 파라모(7km) -  산 마르틴 델 카미노(4.5km)

 

 레온에서 하루를 푹 쉬고 오늘은 레온에서 산 마르틴 델 카미노까지 약 25km의 거리를 다시 걷는다.

레온을 빠져 나오기에는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만약 내가 까미노 길을 걷지 않는 단순한 여행자라면 며칠을 더 머무르면서 차분하게 많은 곳을 천천히 돌아보아야 하는 도시였다. 하지만 나는 관광을 목적으로 이 도시를 찾아 온 것이 아니라 산티아고 까미노를 걷는 도중에 잠시 머문 도시였다.

 

 레온에서 산 마르틴 델 카미노에 이르는 구간은 약 25km로 약 7시간을 걸어야 한다. 그러나 길은 평탄하고 단조로워 어려움이 없다. 오늘의 길은 갈림길이 많으므로 조심해서 걸어야 한다.

 

 레온까지 꾸준하게 걸어온 순례자는 평원을 기대하게 되지만 라 비르헨 델 카미노까지는 참고 견뎌야 한다. 라 비르헨 델 카미노는 1505년 성모가 발현한 곳으로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이다. 이곳에서 길을 따라서 약 3km 정도를 걷다 보면 순례자는 고속도로와 자동차 전용도로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곳을 지나게 된다. 이곳에서 길은 두 갈래로 갈라지므로 왼쪽으로 가지 말고 정면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서 도로와 나란히 걷다 보면 비야당고스 델 파라모를 지나 산 마르틴 델 카미노에 도착할 것이다.

 

로바호 델 카미노 표시

 

 아침 일찍 일어나 숙소를 나와 버스정류장으로 가니 버스가 없다. 다시 숙소에 돌아와서 프론터의 직원에게 물어보니 7시부터 버스가 다닌다고 해서 산 마르코스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산 마르코스 단지에서 유유히 흐르는 베르네스가 강을 지나는 다리를 건너면 복잡한 시가지의 크루세로 지구까지 이어진다. 기찻길과 나란히 지나가며 십자가 광장에 다다르면 기찻길이 멀어진다. 이 광장을 지나가면 레온의 위성도시인 트로바호 델 카미노다.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던 트로바호 델 카미노는, 20세기 중반부터 레온의 인구가 지속적으로 늘어남에 따라 레온 근교의 베드타운으로 역할이 바뀌었다. 별로 특징도 없어 그냥 지나친다.

 

 도로를 건너면 오래된 포도주 저장고와 함께 불규칙적인 주택들과 공장지대가 어지럽게 보인다. 길을 가다가 보니 현대자동차 전시장이 보인다. 외국에 나가면 모두 애국자가 된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의 기업 표시를 보니 상당히 뿌듯하다. 조금 더 길을 따라가면 성모가 발현하였다는 라 비르헨 델 카미노에 도착한다.

 

현대자동차 전시장

 

 라 비르헨 델 까미노 표시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던 라 비르헨 델 카미노는, 조용한 마을로 까미노의 성모에게 봉헌된 까미노 성모 성당이 있다. 까미노의 성모는 여러 기도를 들어준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져서 해마다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이 마을을 찾는다고 한다.

 

 라 비르헨 델 카미노 마을에 들어가서 입구에 있는 바에서 가볍게 아침을 먹고 길을 떠나니 상당히 특이한 모습의 성당이 나타난다. 외벽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성당과는 다른 조각상이 장식하고 있는 성당이다. 바로 까미노의 성모 성당 (Santuario de la Virgen del Camino)이다.

 

 이 성당의 성모 발현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150572, ‘엘리사벳의 성모 방문 기념 축제에 벨리야 데 라 레이나의 목동 알바르 시몬 페르난데스가 가축을 돌보던 중 성모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성모에게 다가갔고 성모는 그에게 말했다. “도시로 가서 주교에게 알리고 이곳에 내 조각상을 보관하기 위한 성전을 세우도록 하라. 그러면 내 아들이 이 땅의 번영을 위해 이곳에 나타날 것이다.” 목동이 놀라서 대답했다. “성모님, 어떻게 하면 절 보낸 분이 성모님이라는 것을 그들이 믿겠습니까?” 그러자 성모 마리아는 목동의 새총과 작은 돌을 집어 들고 돌을 멀리 쏘아 보낸 후 말했다. “주교와 함께 돌아오면 이 돌이 거대한 바위가 되어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너를 보냈다는 증거가 되리라. 돌이 떨어진 자리가 나와 내 아들이 나의 조각상을 보관하도록 결정한 곳이다.” 목동이 주교에게 가서 사실을 말하고 주교와 함께 이곳으로 돌아오자 모든 것이 성모가 예언한 대로 일어났다. 주교는 이곳에 우미야데로 성당(Ermita del Humilladero)을 지었다. 이 성당은 1961년엔 현대식 성당으로 재건축되어 까미노의 성모 성당이라고 이름 붙여졌다.

 

 이 성당은 수사였던 프란시스꼬 꼬에요의 작품으로 현대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건물이다. 조각가 호세 마리아 수비락이 청동으로 만든 열세 개의 거대한 이 조각들은 성모 마리아와 열두 사도를 의미한다. 내부에는 성모의 발현으로 제작된 작가 미상의 16세기 성모상이 있다.

 

성당 외벽의 성모와 열두 사도 상

 

까미노의 성모 성당( (Santuario de la Virgen del Camino)

 

 길을 걷는 사람은 성당을 지나 라 비르헨 델 카미노 출구에 두 개의 길을 가리키는 표지판을 만난다. 두 개의 길 중 정면으로 향하면 발베르데 데 라 비르헨과 산 미구엘 델 까미노, 비야당고스 델 파라모를 거쳐 산 마르틴 델 카미노에 이르는 약 25km의 길이다.

 

 이 길은 표지판의 정면에 있는 도로와 평행하게 만들어진 보행자 길이다. 도로와 나란히 걷다가 왼쪽으로 전진하여 도로 밑을 지나는 터널을 지나면 커다란 안테나가 있는 곳까지 평범한 오르막을 오른다. 이어서 도로와 나란히 이어지며 물푸레나무가 이름다운 발베르데 데 라 비르헨에 도착한다.

 

길 안내 표지판

 

산티아고 300km 표시 - 이제 3/5은 걸었다.

 

발베르데 데 라 비르헨 표지

 

 원래는 발베르데 델 카미노(Valverde del Camino)였으나 이름이 바뀐 발베르데 데 라 비르헨의 주변은 우아한 물푸레나무와 상큼한 초원이 가득하다. 이 마을의 집들은 아담한 성당 주위에 모여 있고, 성당의 첨탑 위에는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어려운 황새들이 둥지를 틀고 새끼를 낳아 기르는 모습이 곳곳에 보인다. 길을 가는 일행이 왜 황새가 성당의 첨탑에만 둥지를 틀까?” 하고 의문을 가지니 다른 일행이 하느님과 가까운 곳이라서라는 답을 해서 잠시 웃었다.

 

산타 엔그라시아 교구 성당 (Iglesia Parrroquial de Santa Engracia) - 첨탑의 황새 둥지

 

폐쇄된 포도주 저장고

 10세기부터 존재했다고 전해지는 이 작은 마을의 끝에서 왼쪽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약 1.5km 가면 산 미겔 델 카미노에 도착한다.

 

 산 미겔 델 카미노는 작은 마을이나 화려한 성당과 수도원이 있어 순례자들이 많이 찾아온다. 그래서 산 미겔 델 카미노에는 순례자를 위한 휴식처가 많이 있다. 이곳에서 카페에 앉아 쉬고 있으니 길에서 만났던 많은 한국인들이 지나가기도 하고 잠시 머물기도 하면서 인사를 한다. 우리와 생장에서부터 같이 출발한 한국인 모녀 중에 딸만 보여 웃으면서 엄마와 헤어졌느냐? 하니 명랑하게 웃으며 따로 걷는다고 한다.

 

 이제 산 마르틴 델 카미노까지는 11km 정도가 남았다. 이곳에서 비야당고스 델 파라모까지는 1시간 반 가량이 걸린다. 비야당고스 델 파라모는 ‘라 마탄사’(La Matanza)라고도 알려져 있으며 드넓은 초원 위에 세워졌다. 기차역 부근은 전투왕 알폰소 1세와 그의 아내 도냐 우라까가 1111년경에 벌인 전투가 일어난 장소다. 마을의 중심부에 있는 산티아고 성당의 현관에 새겨져 있는 전투장면은 산티아고 성인이 나타났던 클라비호 전투가 아니라 이 부부 사이의 전투를 묘사한 것이라고 하는데 가 보지는 못하였다.

 

도로를 따라 난 길

 

비야당고스 델 파라모 표시

 

카페

 

 길을 가다가 현대식 건물로 지은 카페가 보여 들어가 잠시 쉬면서 시원한 오렌지 주스를 한잔 마시고 다시 길을 떠났다.

 

 비야당고스 델 파라모 마을의 중심을 통과하여 운하와 도로 사이로 이어진 직선 도로를 따라 1시간 정도를 걸으면 산 마르틴 델 카미노에 도착한다. 산 마르틴 델 카미노 마을을 가까이 두고 걷고 있으니 비가 오기 시작한다. 세차게 오는 비가 아니기에 그냥 맞으며 길을 가니 계속해서 비가 온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방수가 안 되는 옷으로는 감당하기가 조금 어렵다. 그러나 내가 입고 있는 옷은 어느 정도 방수가 되는 옷이라 그냥 계속 걸어 산 마르틴 델 카미노 마을 입구에 있는 알베르게에 도착하니 오후 1시가 지난 시간이었다. 비에 젖은 옷을 말리기 위해 갈아입고 몸도 씻고 알베르게의 식당에 가니 점심시간이 끝났다고 주문을 받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숙소로 돌아와 잠시 쉬고 마을의 슈퍼에 가니 슈퍼도 문을 닫아놓고 17시에 문을 연다는 종이가 붙어 있었다. 슈퍼 앞에서 배회하다가 시간이 되니 주인이 멀리서 차를 타고 와서 문을 열었다. 슈퍼에서 내일을 위한 여러 가지 식품을 사고 알베르게로 돌아오니 저녁을 먹을 시간이었다. 알베르게 식당에 미리 주문을 하였기에 시간이 되어 식당으로 가니 맛있는 파에야를 아주 풍성하게 탁자마다 주고, 스페인의 가장 유명한 음식인 돼지고기를 훈제한 하몬도 주었다. 사실 이 하몬은 점심 때 식당에서 주인에게 이야기를 하면서 조금 맛본 것인데 주인이 잊지 않고 서비스로 내어 주었다.

 

산 마르틴 델 카미노 표시

 

알베르게 장식

 

알베르게 마당의 닭

 

 저녁을 먹고 그 자리에서 가볍게 맥주를 한잔하면서 오늘의 길에 대해서 같이 걸은 사람들과 여러 이야기를 하고 잠자리로 돌아와서 누우니 잠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조용히 나와서 알베르게를 돌아보니 조금은 특이한 장식을 하고 있었고, 마당에는 닭들이 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한참을 혼자 앉아 멍을 때리다가 내일을 위해 잠자리에 들었다.

 

스페인, 산티아고 까미노 길을 걷다. 22(06.07, 레온에서의 하루)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오늘의 걷기 길 : 레온 시내

 

 오늘 하루를 쉬기로 하는 일정은 처음 이 길을 떠날 때부터 예정된 것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정해진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마음 편하게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날이었다. 그래서 레온 시내를 구 시가지를 중심으로 구경하기로 한다.

 

숙소 주변의 레온 대학 병원

 

 아무런 시간의 제약이 없어 아침도 늦게 시작한다. 잠은 깨었지만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누워 있다가 천천히 일어나서 오늘의 하루를 시작하려고 숙소를 나선 시간이 10시였다. 이 길을 걸으며 이렇게 아침을 늦게 시작한 날은 전혀 없었다, 그만큼 오늘은 여유롭다. 숙소 옆에 있는 대학병원이 레온 시내의 버스 노선의 대부분이 종점이라 구 시가지로 가기에 편했다. 그래서 먼저 버스를 타고 레온 대성당 쪽으로 가기로 하였다. 버스 정류장에 가서 노선도를 보니 상세히 설명이 되어 있어 버스 타기는 쉬웠다.

 그런데 버스를 타고 가는 도중에 해프닝이 일어났다. 버스가 아주 좁은 길을 가는데 양쪽으로 주차가 되어 있어 간신히 버스가 지나갈 수 있었지만 기사는 능숙하게 운행을 하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차가 멈추었다. 길가에 승용차가 조금 튀어나와 주차를 하여 버스가 지나갈 수가 없었다. 경적을 울리고 경찰을 불러도 승용차의 주인이 나타나지 않아 버스는 멈추었기에 제법 기다렸다가 버스에서 내려 걷기로 하였다. 여행지에서 겪는 황당한 일이었지만 그렇게 불쾌하지는 않았다.

 

도로를 가로 막은 승용차

 

 걸어서 구 시가지로 가서 먼저 성벽과 성문을 통과하여 주변을 구경하면서 간곳이 레알 바실리카 데 산 이시도로(Real Basilica de San Isidoro)다. 레온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은 레알 바실리카 데 산 이시도로(Real Basilica de San Isidoro) 성당이며, 현재 교회가 위치한 장소는 고대 로마의 신전이 있던 자리이다. 원래의 교회는 10세기에 아랍 군대의 장군 알만수르(Al-Mansur)가 레온 지역을 정복한 이후 지역 전체가 황폐화되면서 교회도 파괴되었다. 현재의 교회는 11세기 초엽에 레온 왕국의 알폰소 5(Alfonso V)가 재건축한 것이다. 10세기와 11세기에 만들어진 바실리카와 박물관, 왕가의 무덤이 있다. 남쪽 두 입구의 조각은 툴루스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조각과 유사하며 순례에 연관된 성당의 계열을 나타낸다. 서쪽에 교회에 딸린 왕실 판테온(Panteón Real)에는 중세시대 레온 왕국 11명의 왕을 비롯해 많은 왕비와 왕족의 무덤이 안치되어 있다. 수많은 왕과 왕비의 무덤이 많고 10세기의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있기 때문에 로마네스크의 시스티나 성당' (Capilla Sixtina del Romanico)이라고 불린다. 200개가 넘는 주두는 아름다운 장식으로 이뤄져 있고, 고딕 양식 패널화도 보존되어 있다. 왕궁이던 곳은 현재 박물관으로 이곳에는 세례자 요한의 턱뼈를 비롯한 여러 성인의 유해가 보존되어 있다. 보물관과 도서관에는 도냐 우라카의 성배(Caliz de dona Urraca)와 같은 보물들과 대리석 궤, 고사본(古寫本), 행진용 십자가 등 가치를 따질 수 없는 진귀한 유물들이 보존되어 있다.

 

 1063년 성인 이시도로의 유골이 이 교회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이후 유명한 순례 성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까지 가는 길목에 교회가 위치한다는 지리적 이점 때문에 많은 종교적 혜택을 누렸다. 처음에는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축했으나 이후 많은 부분을 보수·개조하면서 고딕 양식이나 르네상스 양식 등을 첨가하여 현재는 여러 건축 양식이 섞인 복합 양식의 건축물이 되었다.

 

성벽과 성문

 

알폰스 9세 상

 

 

 성당에 들어가 내부를 구경하다가 조그마한 성전이 있어 가니 아침 미사를 집전하고 있었다. 우연히 내가 성당에 들를 때에 미사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도 하나의 축복이라 생각하고 미사에 참석하여 영성체를 하니 신자가 아닌 다른 사람들은 그냥 구경을 하고 있었다.

 

이시도르 성당 내부

 

이시도르 성당 설명

 

이시도르 성당 전경

 

 이시도르 성당을 나와 가우디의 보티네스 건물로 가는 도중에 조그마한 공원이 있다. 무심코 지나가기 마련이지만 조금 주의를 기울려 보면 로마시대의 관개수로를 볼 수 있다. 공원을 지나 조금 가면 유명한 보티네스가 나온다.

 

보티네스 주변 공원 - 프로타 카스티요 내부에서 발견된 로마 수로

 

 보티네스 저택인 카사 데 보티네스 (Casa de Botines)는 안토니오 가우디(Antonio Gaudí)가 카탈루냐 지방에서 벗어나 조성한 소수의 건축물 중 하나이다. 이 건물은 호화로운 저택을 원하던 기업가 시몬 페르난데스(Simón Fernández)의 의뢰로, 근대 스페인 건축계의 거장 가우디가 1892년 건축을 시작해 이듬해 완성했다. 중세의 향기가 살아있는 모더니즘 건축물로 첨두아치로 된 창문과 검은 돌 판으로 이루어진 지붕은 고딕 양식의 분위기를 풍긴다.

 

 가우디는 레온의 기존 건물들과 조화를 이루도록 이 건물을 중세풍으로 설계하면서 곳곳에 네오고딕 특성을 가미했다. 마치 중세시대의 성을 연상케 하는 웅장한 건물은 전체를 4층으로 조성했으며 별도로 지하층과 다락층을 두었다. 1950년에 대대적인 보수 작업을 했으나 가우디가 건물에 부여한 특성은 그대로 보존했다. 1969년에 스페인의 역사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보티네스의 전경

 

 보티네스 건물 앞 광장에는 벤치에 앉아 책을 읽는 사람의 상이 있다. 관광객들은 대부분이 이 옆에 앉아서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는다. 바쁘게 움직이는 여정에서 여유를 찾으며 한가로이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의 표시인지도 모르겠다.

 

보티네스 광장의 책읽는 사람 상

 

보티네스 광장

 

 보티네스로 들어가니 스페인의 유소년들이 체험학습을 온 것 같이 많이 보였다. 무리를 지어 있는 어린이들이 귀여워 사진을 찍으려고 인솔한 선생님에게 허락을 구하니 안 된다는 대답이 돌아와서 아쉽지만 사진을 찍지 못하였다. 서양에서는 성인은 물론이고 어린 아이도 초상권이 엄격하게 보호된다. 그러니 함부로 다른 사람의 얼굴을 사진으로 찍어서는 안 된다.

 

보티네스 안의 여러 전시물

 

보티네스 내부에 있는 마법의 거울

 

 

 

 보티네스를 나와 주변을 조금 거닐다가 아시안 마켓을 찾아가기로 하고 구글 지도에 의존하여 시내를 걸어가다가 우리나라의 다이소와 비슷한 곳을 발견하고 들어가니 선글라스가 진열되어 있다. 선글라스를 분실하였기에 적당한 가격이면 하나를 사려고 값을 물어보니 상상이하의 가격이었다. 우리 돈으로 5,000원 정도고 성능도 나쁘지 않아 하나 사서 옆에 있던 일행들에게 이야기하니 너도 나도 하나씩 산다. 모두들 싼 가격에 만족하며 웃고 떠들며 더 걸어가 아세안 마켓에 도착하니 우리나라의 식품들이 즐비하다. 여기서 한국 라면을 좀 사서 앞으로의 길에서 끓여먹기로 생각하고 라면을 구입하였는데 라면 값은 엄청나게 비쌌다. 하지만 한국에서 수입하여 판매를 하려면 그 정도는 받아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세안 마켓을 나와 또 제법 뜨거운 햇빛 아래를 걸어 시내를 가로 질러 산 마르코스를 찾아갔다.

 

 레온의 산 마르코스 광장에 있는 산 마르코스(San Marcos)는 산 마르코스 광장 한쪽 면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대규모 건물로 조금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건물 전체가 황금빛으로 빛난다. 특히 건물 앞면 주 출입구 주변의 정교하게 제작한 수많은 조각상으로 유명하며 스페인 르네상스 양식 건축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로 손꼽힌다. 16세기에 건축한 유서 깊은 건물로, 처음에는 군대 시설로 조성했다가 이후 수도원, 병원, 감옥 등 용도가 여러 차례 변경되었다. 현재 일부는 호화로운 고급 호텔로 사용되고 있고, 일부에는 교회와 아담한 규모의 박물관이 있다. 이곳에는 플라테레스코 양식의 걸작인 파사드가 있다. 르네상스 양식 건축물이 단지를 이루는 주위는 산 마르코스 단지로 불리는데 이 단지에는 성당과 교육 센터, 신학교, 감옥이 있었다고 한다.

 성당에는 첨두아치로 된 아름다운 회랑이 있으며, 올리바레스 백작의 명령으로 스페인 바로크 시대의 대표적인 염세주의 문학가 프란시스코 데 케베도가 갇혀있던 감옥을 볼 수 있다.

 

 건물의 앞에는 호세 마리아 아퀴나(José Maria Aquña)가 조각한 순례자상이 있는데 메세타를 힘들게 걸어온 순례자가 신발을 벗어놓고 십자가에 기대어 하늘을 올려다보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모두들 이 순례자상 옆에 앉아서 하늘을 바라보며 자신이 걸어온 길을 생각하고 또 앞으로 걸어갈 길도 생각한다.

 

산 마르코스의 전경

 

광장에 있는 순례자상

 

산 마르코스 전경

 

신성한 은총의 어머니 상 설명

 

내부의 복도 - 기하학적 무늬로 돌을 깔았다.

 

내부의 여러 모습

 

산 마르코스 옆의 다리

 

 산 마르코스를 구경하고 어제 갔던 뷔페에서 늦은 점심을 먹기로 하고 찾아 갔다. 산 마르코스 광장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뷔페에 가니 같은 길을 걷는 한국인들이 제법 보였고 그들도 모두 즐겁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도 당분간은 마주치기 어려운 음식들이라 모두 기쁘게 떠들면서 배불리 먹고 나와서 슈퍼에서 내일을 위한 사과와 자두 복숭아(납작복숭아)와 바나나 등의 과일과 요플레와 빵을 장만하였다.

 

 슈퍼에서 먹거리를 장만하고 조금 옆에 있는 버스정류장으로 가서 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어제 갔던 뷔페 건물

 

 숙소로 돌아와 쉬다가 간단한 저녁을 먹고 여유로움을 즐기고 있으니 같은 길을 걷는 대구의 부부가 방으로 오라고 초청을 한다. 그 방에서 7명이나 모여서 와인과 맥주를 마시며 떠들고 웃으며 까미노의 여러 이야기를 하면서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 내일을 위해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은 또 순례자의 모습으로 돌아가 길을 걸어야 한다. 

스페인, 산티아고 까미노 길을 걷다. 21(06.06, 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 - 레온)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오늘의 걷기 길 : 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 -  비야모로스 데 만시야(4.5km) - 푸엔테 비야렌테(1.5km) - 아르카우에하(4.5km) - 푸엔테 카스트로(5.5km) - 레온(2.0km)

 

오늘은 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를 출발하여 유명한 레온까지 가는 길이다. 산티아고 가는 길에서 대부분의 순례자는 레온에서 하루를 더 쉰다. 제법 오래 길을 걸었기에 피로도 쌓이어서 피로도 풀 겸 레온을 구경하는 것이다. 그만큼 레온에서는 보아야 할 곳이 많다.

 

 아침 해도 솟아오르지 않은 시간에 길을 떠나니 주위가 아직 어둠에 덮여 있다. 꼭 이렇게 일찍부터 길을 걸어야 하는지가 의문이었으나 모두가 그 시간에 길을 걸으니 어쩔 수 없이 보조를 맞추어 길을 간다.

 

어둠이 짙은 거리

 

성 안내문

 

 오늘은 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에서 레온에 이르기까지 약 19km의 거리로 길은 대부분 평탄하여 걷기에는 아무런 무리가 없다. 오늘의 길을 나누어 보면 먼저 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를 나와 푸엔테 비야렌테에 이르는 약 6km로 길로, 이 길에서 순례자는 에슬라 강을 지나서 넓은 경작지와 포르마 강에 이르는 상쾌한 구간이다. 다음은 포르티요 언덕을 시작하기 전까지로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와 나란하게 걷게 되어 다소 지루하다. 마지막으로 포르티요 언덕을 넘어 레온 시가지에 이르는 길로, 특히 레온에 들어서기 전의 시가지 외곽의 초입은 순례자에게 상당한 인내심을 요구한다.

 

 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를 나오기 위해 먼저 마을 끝을 지나는 에슬라 강 위에 있는 돌다리를 건너 왼쪽으로 내려간다. 그러면 로마시대의 유적지가 남아있는 마을인 비야모로스 데 만시야까지 도로와 평행하게 이동한다. 처음 아스토르가에 작지만 강건한 야모로스 데 만시야라고 불리는 마을이 세워졌는데 이후 로마가 이곳을 점령하면서 회색담과 벽돌로 만들어진 비야모로스 데 만시야라고 불리는 작은 마을로 바뀌었다.

 마을에 도착하니 아직 너무 이른 시간이라 바나 카페는 문을 열지 않아 카페의 탁자에 앉아 가지고 있는 빵과 과일로 간단히 아침으로 대용하고 길을 떠난다.

 

길 안내도 - 우회하지 말고 직진해야 된다.

 

레온 주의 여러 다리 설명

 

 비야모로스 데 만시야에서 다음 마을인 푸엔테 비야렌테까지는 약 1.5km의 짧은 거리다. 마을 중심의 프로세시오네스 거리를 지나면 자동차도로가 나오며 옆으로 길이 이어지며, 눈앞에 있는 포르마 강 위의 다리만 건너면 된다. 마을로 들어가는 이 다리는 까미노 데 산티아고에서 만나는 가장 훌륭한 다리 중 하나지만 독특하게 휘어진 모양 때문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푸엔테 데 비야렌테는 포르마 강변에 위치한 마을로, 오래된 병원이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위중한 환자들을 오늘날의 앰블렌스와 같이 노새로 레온으로 실어 날랐다 한다.

 비야렌테 다리(Puente de Villarente)는 까미노 데 산티아고에서 만나는 다리 중에서 가장 훌륭한 토목 공사를 보여주는 곳으로 독특하게 휘어진 모양과 다리 길이가 눈에 띈다. 무려 20개의 아치로 이루어져 있는데 여러 번의 보수와 개축으로 각각의 모양이 다르다.

 

포르마 강을 건너는 비야렌테 다리(Puente de Villarente)

 

푸엔테 비야렌테 표시

 

푸엔테 데 비야렌테 거리

 

 포르마 강변에 위치한 마을의 출구를 나와서 도로를 지나쳐서 계속 걸으면 잠시 후 짧지만 가파른 오르막길을 만나게 되며 이 언덕을 다 오르면 아르카우에하에 도착한다. 이 마을은 순례자에게 특별한 볼거리는 없다. 마을 끝에 있는 공동묘지를 지나쳐 순례자는 부드러운 흙으로 만들어진 길을 지루함을 느끼며 계속 길을 따라가면 다소 복잡한 공장지대가 나오고, 이 공장지대를 통과하면 포르티요 언덕의 정상이다.

 

아르카우에라 표시

 

 

 이제 레온이 어렴풋이 보이나 아직도 두 시간 정도를 더 걸어야 한다. 내리막을 내려와 푸엔테 카스트로에 도착한 순례자는 이미 레온에 들어온 것과 마찬가지다. 푸엔테 카스트로를 지나면 까미노 표시는 토리오 강의 다리를 지나 알칼데 미구엘 카스타뇨 거리를 따라 가면 레온 시가지로 들어간다. 레온 구시가지에 들어가면 먼저 만나는 것이 성벽이다. 이 성벽을 지나 복잡한 시내를 통과하면 레온 대성당이 나타난다.

 

발데라푸엔테 표시

 

멀리 보이는 레온

 

푸엔테 카스트로 표시

 

레온의 시작

 

 푸엔타 카스트로로 들어가니 레온이라는 표시가 곳곳에 보인다. 길을 가다가 성당과 같은 곳이 보여 들어가 보니 성당이 아니고 관광안내소 같은 곳이다. 레온의 역사와 관광명소를 안내하는 곳으로 레온의 지도와 관광안내도를 얻고 잠시 쉬다가 길을 가니 길가에 자원봉사자인지 공무원인지 분간이 안 되는 사람들이 모여서 지나가는 순례자들에게 물도 주고 사탕을 주면서 뷰엔 까미노하면서 인사를 한다. 뜻밖의 환대에 답례를 하니 한국에서 왔느냐고 물으며 반가워한다. 지나는 한국인에게 유독 더 친절한 느낌을 받으니 아마 한국 사람이 동양인의 절대 다수라 환대를 하는 것 같았다.

 

성당 같은 관광안내소 - 첨탑 위에 황새의 둥지

 

 레온(León)은 카스티야 이 레온 자치지역(Comunidad Autónoma de Castilla y León) 북서부 끝에 위치한 레온 주()의 중앙부 평균 고도 838m의 메세타 고원지대에 자리 잡고 있다. 레온 주의 주도로, A.D. 1세기경 로마 인들이 건설한 도시이며 당시의 원탑(합계39)을 갖춘 성벽이 아직도 남아 있다. 레온이라는 도시의 이름도 레기온(Legion:군단)이라는 말에서 유래하듯이 68년 이 지역에 있던 로마 군대의 주둔지가 도시로 발전하는 데 기초가 되었다. 이후 이슬람 세력인 무어 족의 지배를 받았으며 서(西)고트족이 무어 족을 몰아내고 아스투리아 왕국을 건설하고 레온을 수도로 삼았다. 10세기에 들어서는 레온 왕국(914~1230)의 수도로 번성했으며, 카스티야 왕국과 병합하였다. 스페인의 초기 주교령이었고, 또 레온 왕국의 수도이자 종교회의가 열렸으며 산티아고로 가는 길의 주된 이정표가 된 도시이기도 했다. 역사적 사건이 넘쳐나는 레온은 풍성한 문화와 예술 유산이 많이 남아 있다. 역사적 건축물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16세기 후반에 완성된 레온 대성당(Catedral de León), 산 이시도로 바실리카(Basilica de San Isidoro), 구스마네스 궁전(Palacio de los Guzmanes), 콘데 루나 궁전(Palacio del Conde Luna) 등이 있고 스페인의 유명한 건축가인 안토니오 가우디가 설계한 카사 보티네스(Casa Botines)가 유명하다. 시내 서북부에 산 마르코스 구()수도원의 성당이 있다.

 

 현재 레온은 이베리아 반도 북서부의 경제의 중심지이며, 스페인 최고의 식도락을 전해주는 도시다. 또 레온에서는 일 년 내내 전통 축제와 행사가 열리기 때문에 까미노를 걷는 순례자들의 대부분은 레온의 풍요로운 매력에 흠뻑 빠져 하루 이상을 머물러 휴식도 하고 관광도 한다. 중세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구시가지의 중심지인 우메도 지구(Barrio Humedo)의 거리와 광장을 느긋하게 거닐면 포도주와 전통 음식을 즐길 수 있는 바와 선술집이 즐비하게 늘어선 것을 볼 수 있다.

 

레온 시내 초입 부분

 

 레온 구 시가지로 들어가니 먼저 로마 시대의 성벽이 보인다. 성벽은 원래 이 구 시가지를 둘러싸고 있는데 지금 내가 보는 좌우의 성벽만으로도 그 규모가 엄청나다.

 

구시가지를 둘러싸고 있는 성벽 설명

 

레온 성벽

 

 

 

 성벽을 지나니 아름다운 성당이 나타난다. 그 성당에 들어가 내부를 구경하고 대성당을 찾아서 길을 가니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우메도 지구(Barrio Humedo)라는 거리가 나온다. 구시가지의 우메도 지구(Barrio Humedo)는 중세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레온 구시가의 중심지다. 낭만적인 거리와 광장을 산책하기에 좋고, 포도주와 전통 음식을 즐길 수 있는 바와 선술집이 가득하다.

 

이름을 모르겠는 성당

 

레온 대성당으로 가는 거리

 

 드디어 거대한 성당이 눈앞에 나타났다. 성당 앞의 광장에는 엄청난 사람들이 성당 사진을 찍고 서로에게 이야기를 하며 떠들고 있다. 모두들 성당의 위용에 감탄을 하는 것이다. 성당을 자세히 보려면 가까이 가야 하지만 전경을 보려면 멀리 떨어져서 보아야 성당의 전경이 보인다. 사람들의 시각은 자신이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다. 레온 대성당은 아주 장엄하게 위용을 자랑하지만 화려함에서는 부르고스 대성당이 더 아름답다고 나는 느꼈다

 

 13~6세기에 걸쳐 지어진 레온 대성당(Catedral de las León)은 단순한 아름다움의 프랑스식 고딕 양식의 걸작이다. 늘씬한 탑과 우아한 이중 아치는 고딕 시대 거장의 대담함을 보여주고, 중앙 파사드에는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의 석조 조각과 유사한 화려한 조각이 있다. 레온 대성당의 장관 중 하나는 성당 벽의 황홀한 스테인드글라스가 만들어내는 장면으로 스테인드글라스가 차지하는 넓이는 무려 1700에 달하며, 석양이 질 무렵 화려하게 빛나는 스테인드글라스의 장관은 유럽 예술의 최고점을 보여준다고 한다.

대성당 내부에는 아름다운 레온에서 가장 좋은 성상들이 소장된 대성당 박물관이 있다.

 

 대성당의 외양이나 내부의 여러 유물에 대해서는 백과사전을 참조하기를 바란다.

 

대성당의 전경

 

대성당 광장에 있는 동판

 

레온 대성당 문 위의 장식

 

요금표(상황에 따라 다르다.)

 

 

 

 대성당 내부를 구경하면서 이곳저곳을 다니니 내부 한쪽의 조그마한 성전에서 미사를 드리고 있었다. 뜻하지 아니한 미사를 보고 참석하여 영성체를 하고 다시 성당 내부를 구경하니 그 화려함은 계속 경탄을 하게 만들었다.

 

희망의 성모 설명

 

대성당 내부의 여러 모습

 

대성당의 회랑과 뜰

 

 성당 내부를 구경하고 내부의 뜰이 있는 곳으로 가니 박물관이 있다. 어디에서 무엇을 보든지 박물관은 반드시 보아야 한다는 나의 여행 철학에 따라 박물관으로 들어가려니 성당의 입장료와는 별개로 또 입장료를 내라고 한다. 동행하던 일행은 모두 들어가지 않고 혼자서 들어가니 상상 이상으로 사람의 눈을 황홀하게 하였다. 여러 가지 종교적인 유물뿐만 아니라 현대의 그림들도 제법 보였다.

 대성당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꼭 박물관을 보기를 권한다.

 

박물관의 전시물

 

박물관 전경

 

 레온 대성당 앞에 도착한 시간이 오전 11시 경이었는데 성당을 나오니 오후 1시가 넘었다. 오늘은 레온에서 걸음을 멈추고 내일 하루 쉬기로 하였기에 레온의 나머지 구경거리는 내일 다시 와서 보기로 마음먹고 오늘은 편히 지내기로 했다. 지금까지 약 20일의 대부분을 스페인식 음식을 먹었기에 좀 입맛에 맞는 음식을 편안하게 먹고 싶었다. 그래서 지금부터 보편적으로 모두가 먹을 수 있는 중국식 음식점을 추천받아서 식당을 찾아가기로 했다. 구글 지도에 의존하여 식당을 찾아가는 도중에 한국의 젊은이들을 만났다. 며칠을 보이지 않았던 태백의 젊은이도 있어 이야기를 하여 보니 중간에 걷지 않고 차를 타고 이동하였다고 하였다. 이 길을 걷는 것은 남에게 보이고 자랑하려고 걷는 것이 아니니 자신의 건강상태를 철저히 살피고 거기에 맞추어 걸어야 한다. 태백의 젊은이 외에도 안면이 있는 젊은이들이 제법 보이기에 이야기를 하니 그들도 우리가 찾아가는 식당을 간다고 하였다.

레온 시내를 제법 걸어가면서 신시가지를 구경하고 식당에 도착해서 보니 중국 음식점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뷔페와 똑 같은 식당이었다. 뜻밖의 뷔페에 우리는 만족하고 들어가서 보니 진열해 놓은 음식이 우리가 좋아하는 음식들이었다. 완전히 우리나라의 뷔페와 같았고 생고기와 해산물은 쟁반에 담아가면 직접 구워주는 곳이었다. 우리 일행은 만족하면서 그 동안 제대로 먹지 못한 한을 풀듯이 떠들며 즐겁게 배불리 먹었다. 배불리 먹고 후식을 보니 아이스크림과 과일이 너무 좋았다. 특히 아이스크림은 스페인에서는 엄청 비싸서 아이스크림 하나가 와인 한 병 값이었다. 그래서 아이스크림 냉장고는 가게에서 열쇠를 채워 놓은 곳이 많았다. 그런 아이스크림을 무제한으로 먹을 수 있다는 것만 해도 너무 행복하고 즐거웠다.

혹시 레온에 가는 사람은 이 집을 찾아가면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가격에 비하여 엄청 좋은 음식들이다. 우리 표현으로 가성비가 엄청 좋다. 가격은 우리 돈으로 약 25,000원 정도이고 위치는 아래 사진에서 보여 드리는 곳으로 레온 프라자를 찾아가면 2층에 있고, 식당 이름은 Wok Hui Feng이다.

 

 배불리 먹고 즐겁게 이야기를 하고 일어서니 두 시간이 지났다. 오늘은 레온에서 쉬기에 호텔에 숙소를 정하였기에 숙소를 찾아가니 약간은 외곽에 있는 호텔이지만 시설은 아주 좋았다. 처음으로 알베르게가 아닌 곳이기에 욕탕에 물을 받아 몸을 담그고 쌓인 피로를 풀면서 편안하게 휴식을 취했다.

 

레온 시내의 여러 모습

 

뷔페 식당 wok

 

뷔페가 있는 레온 프라자

 

 

새로 지은 것 같은 호텔은 시설은 좋았으나 부대시설이 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 불편했다. 하지만 호텔이라 편안하게 휴식하면서 지나온 피로를 풀었다. 또 내일은 레온 시내를 구경할 것이라 마음도 여유로웠다.

 

스페인, 산티아고 까미노 길을 걷다. 20(06.05, 베르시아노스 델 레알 카미노 - 만시아 데 라스물라스)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오늘의 걷기 길 : 베르시아노스 델 레알 카미노 - 엘 부르고 라네로(7.6km) - 렐리에고스(13.0km) - 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6.2km)

 

 오늘은 베르시아노스 델 레알 카미노에서 만시아 데 라스 물라스까지 가는 약 27km의 길로 대부분이 메세타 고원의 자동차 도로 옆으로 난 평탄한 길이다.

 

 아침에 일어나니 아직은 어두운 시간이나 알베르게에 머물렀던 사람들은 거의 떠났거나 떠날 준비를 마치고 나간다. 함께 길을 걷는 우리 일행도 준비를 마치고 뜰에 나가니 아직 어둠이 개이지 않은 시간이다. 뜰의 탁자에 앉아 가볍게 아침을 과일과 커피로 먹고 알베르게를 나와 오늘의 걷기를 시작한다.

 

어둠의 알베르게

 

해가 떠오르는 모습

 

 알베르게에서 작은 마을을 지나 마을 출구에서 순례자는 앞쪽으로 작은 나무가 있는 길로 직진하면 베르시아노스 델 레알 카미노에서 엘 부르고 라네로, 렐리에고스를 지나 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까지 가는 길로, ‘레알 까미노 프란세스’(Real Camino Frances)라고 까를로스 3세는 이 길을 명명하면서 순례자들에게 이용을 독려했다고 한다.

 

 이 길은 엘 부르고 라네로까지 자동차 도로와 평행하게 이어지며 두 시간 정도 걸린다. 편안한 길이지만 자동차 도로와 평행하게 걷는 것은 정신적으로 자연의 오솔길을 걷는 것보다 인내를 필요로 하여 사람을 지루하게 만든다. 머리 위에는 세상 어디에나 있는 송전선이 지나고 길을 가며 오래된 십자가상까지 지나치면 엘 부르고 라네로에 도착한다. 엘 부르고 라네로는 인구가 300명도 안 되는 조그마한 마을이나 순례자에게는 편리한 각종 시설이 준비되어 있는 곳이다.

 

십자가 하단의 글은 '아이들을 기억하기 위해 -모세라니 호세, 바노스 로자노'이다(무엇을 기억?)

 

엘 부르고 라네로 표시

 

 마을의 이름은 라네로(Ranero; 언덕이 있는 땅)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설과 이 지역을 지나면서 많이 볼 수 있는 라나(Rana; 개구리)에서 나왔을 것이라고 설이 존재한다.

 

 엘 부르고 라네로의 산 페드로 교구 성당(Iglesia Parroquial de San Pedro)은 수수한 모습으로 예전 로마네스크 양식의 아름다운 성모상이 있었는데 현재는 레온의 대성당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산 페드로 교구 성당(Iglesia Parroquial de San Pedro)

 

 전통적인 까미노 프란세스로 엘 부르고 라네로에서 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까지의 길은 자동차 전용도로의 왼쪽으로 이어지며 매우 평탄하지만 상당히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길의 모습이다. 단조롭게 간격을 맞춰 심어져 있는 나무와 도로를 지나가는 자동차의 소음은 이 길을 걷는 사람을 편안하게 하지는 않는다.

 

 마을의 밖으로 빠져 나오려면 마요르 거리 끝에 위치한 성 페드로 성당을 오른쪽으로 두고 걸어 나가면 된다. 다음 마을인 렐레이고스까지는 13km 정도로 지나온 길과 마찬가지로 자동차 도로와 평행하게 지나는 길에는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순례자 쉼터와 샘터가 종종 있다.

 

자동차 도로 옆의 길

 

쉼터

 

 

 파랗게 빛나는 하늘은 계속 보지만 지겨움을 느끼게 하지 않는다. 단조로운 길을 걸으며 들판을 보면 유채와 비슷한 꽃이 아름답게 피어 있는 것을 본다. 식물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기에 이름이 궁금해서 사진을 찍어 인터넷이 제대로 되는 곳에서 꽃 이름을 물어보니 '탑시아 빌로사'라고 답이 왔다. 그래서 이 이름을 함께 걷는 사람들에게 알려 주었다.

 

탑시아 빌로사라는 이름의 꽃

 

목장

 

보호색으로 위장한 도마뱀

 

순례자들이 만든 길 표시

 

 단조로운 길을 걸어 도착하는 인구가 채 200명도 안 되는 작은 마을, 렐리에고스는 로마 시대의 가도가 지나가던 곳이었다. 이 지역에는 포도주 저장고로 사람들이 파놓은 굴이 많이 남아있는데, 오늘날에는 이 지역에서 포도주를 생산하지 않아 거의 대부분 방치되어 있다. 마을 안에서는 목재 골조에 벽돌과 흙으로 지어 아랍식 지붕을 얹은 오래된 전통 건축물을 볼 수 있다. 렐리에고스 마을의 카페에서 이르지만 간단히 점심을 먹고 쉬다가 나오니 너른 밀밭이 펼쳐져 있고, 멀리 지평선 너머로 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의 높은 탑이 희미하게 보인다.

 

렐리에고스 표시

 

 

 계속 걷다보면 송전탑 밑으로 지나는 길이 끝나고, 도로 위를 지나는 보행자 다리를 건너면 마을의 구시가지 입구가 보이기 시작하며 순례자를 반기는 동상이 있다.

 

 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는 포르마 평원과 에슬라 평원 사이의 드넓은 포도밭과 온갖 종류의 과수원 사이에 자리를 잡고 있는 도시로 맛있는 토마토 요리와 재미있는 전설이 이어진 곳이다. 순례자는 며칠 동안 걸어온 불모지 같은 길의 단조로움을 벗어날 수 있다. 이 도시는 레온 왕국과 까스띠야 왕국 사이에 있다는 점 때문에 중세 시대까지는 방어 도시의 역할을 했었다. 또한 까미노 데 산티아고 사이에서 상업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했었다. 과거의 유산은 거의 남아 있지 않으나, 돌로 포장된 거리와 중세풍의 아름다운 발코니가 있는 집은 당시의 풍요로움을 보여준다.

 

 또 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에서는 8월의 마지막 주에는 산 페르민 축제와 함께 스페인을 대표하는 토마토 축제’(Feria del Tomate)가 열린다. 이미 세계인에 널리 알려진 토마토 축제’(La Tomatina)는 팔렌시아의 작은 마을인 부뇰(Bunol)이 유명하지만, 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의 토마토 축제에서도 토마토를 이용한 다양한 요리를 맛볼 수 있으며 토마토 싸움을 즐길 수 있다.

 

만시아 데 라스 물라스 표시

 

십자가의 순례자상

 

 마을에 들어가 알베르게를 찾아가서 일상적인 일을 하고 쉬다가 저녁을 먹으러 밖으로 나갔다. 이 길을 걸으면서 점심과 저녁을 먹는 시간은 일정하지 않다. 하루의 걷기를 마치고 알베르게에 도착하는 시간에 따라 풍성한 점심을 먹기도 하고 저녁을 먹기도 한다. 물론 한 끼를 잘 먹으면 다른 끼니는 간단하게 반드시 먹는다.

 

 항상 무리를 지어 다니는 우리 4명은 알베르게를 나와 시내를 구경하면서 마을 사람들이 잘 가는 음식점을 찾아가기로 하고 구글 지도를 펼쳐 음식점을 찾아가는 도중에 성당과 같은 건물이 보여서 가니, 성당이 아니라 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의 수호성인인 감사의 성모상이 보관되어 있는 18세기에 만들어진 그라시아 성모 성소(Santuario de la Virgen de Gracia)였다. 안에 들어가 구경을 하고 나와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식당을 찾아가니 현지인들이 여럿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주인이 우리를 그들과는 좀 떨어진 안으로 안내를 하여 자리를 잡고 음식을 시키는데 영어가 통하지 않아 어려움이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주문을 하여 즐겁게 맛있고 풍부한 양의 식사를 마치니 주인이 인터넷에 자기 집의 평을 잘 해주기를 요청한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음식이 맛있다고 하면서 좋은 평을 하겠다고 한참 이야기하니 주인이 특별한 서비스를 주었다. 와인을 한 병 더 주고 아주 특이한 술을 주는데 많이 주지는 않고 우리 소주잔의 반만큼을 주었다. 마셔 보니 올리브 맛이 나면서 알콜이 제법 강하게 느껴졌다. 우리가 모두 한 잔을 더 청하니 주인이 줄 수 없다고 하여 하는 수 없이 그냥 나왔다.

 나중에 이 음료가 무엇인지를 대강 알았는데, 아주 특이한 술로 소중한 사람에게만 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런 일도 여행 중에 경험하는 소중한 추억이라고 할 것이다.

 

그라시아 성모 성소(Santuario de la Virgen de Gracia)

 

성모 성소 설명

 

 그라시아의 성모 성소 설명에 의하면 '이미 18세기에 산 로렌초의 옛 마을에 위치한 암자가 언급되었다. 현재 건물은 벽돌 띠와 벽돌로 지어진 것으로 나중에 지어진 것이다. 만시아와 그 지역에서 높이 존경받는 은총의 성모라는 제목의 조각은 라 롤다나(la Roldana)로 알려진 조각가가 엄청난 아름다움을 조각한 것이다. 19세기 말에 발생한 화재 후에 조각가 빅토르 데 로스 리오스(Victor de los Rios)가 복원하였다. 만시아의 수호성인인 그라시아 성모 성소는 만시아 사람들과 이 지역 사람들의 높은 방문과 사랑을 받는 신앙의 중심지이다.'라고 되어 있다.

 

성모상

 

 즐겁게 식사를 마치고 알베르게로 돌아와서 쉬다가 20시에 열리는 마을 성당의 미사에 참석했다. 우리 일행 4명 중에 천주교 신자는 나뿐이었지만 모두가 저녁의 무료함도 달래고 세요도 찍기 위해서 성당으로 갔다.

 마을에 있는 산타 마리아 교구 성당은(Iglesia Parroquial de Santa Maria)은 아름다운 첨탑이 있는 18세기의 건물로 바로크 양식의 아름다운 제단화가 보존되어 있다.

 천주교의 미사는 세계 어디에서나 같은 예식이기에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으나 따라 할 수 있었다. 스페인의 성당에서 거의 매일 미사를 보았는데 아주 작은 성당이 아니면 사제가 한명이 아니라 2명이나 3명이 미사를 집전하였다. 대충 진행하는 과정을 보니 연세가 많아 보이는 사제가 보조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은퇴한 원로 사제가 젊은 사제들을 도와주는 것 같아 보여 상당히 좋게 여겨졌다. 미사가 끝난 후 사제에게 세요를 청하니 조금 기다리라고 하고 사제복을 벗고 성당 입구의 조그마한 방으로 가서 사제가 직접 세요를 찍어준다. 바깥에 있는 일행들을 모두 불러 세요를 받고 성당을 구경하고 마을을 돌아보았다.

 

산타 마리아 교구 성당(Iglesia Parroquial de Santa Maria)

 

산타 마리아 성당 설명

 

성당 설명은 '현재 건물은 18세기에 12세기의 원 교회 위에 지어졌으며, 이곳에서 시의회가 열리고, 현관에서는 형이 선고되었다. 내부에는 옛 교회의 흥미로운 여러 예술작품이 있다. 주요 제단은 복원된 18세기의 바로크 양식이다.'라고 요약할 수 있다.

 

성당 내부의 모습

 

여성들을 위로하는 십자가를 진 예수

 

미사 전의 성당 내부

 

 

 

 미사를 마치고 성당을 나와 마을을 한 바퀴 돌며 슈퍼에 가서 콜라를 한 캔 사서 마시고 여유롭게 거닐어 보았다. 마을을 돌아보니 이 마을 곳곳에 성벽이 보이고 동서남북으로 마을로 들어가는 성문도 보여 이 마을이 상당히 큰 성으로 둘러싸인 마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마을의 모습을 보고 시간이 되면 어디에서든지 마을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성벽과 성문

 

 마을을 돌아보고 알베르게로 돌아오니 제법 시간이 되었다. 물론 한국에서의 평소 생활이라면 아직 초저녁이고 활동할 시간이지만 이곳에서의 시간은 우리가 평소에 생활했던 시간과 다르다. 내일도 새벽부터 일어나서 길을 떠나야 하기에 조금 쉬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스페인, 산티아고 까미노 길을 걷다. 19(06.04, 테라디요스 데 라 템플라리오스 - 베르시아노스 델 레알 카미노)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오늘의 걷기 길 : 테라디요스 데 라 템플라리오스 -  모라티노스(3.3km) - 산 니콜라스 델 레알 카미노(2.5km) - 사아군(7.2km) - 베르시아노스 델 레알 카미노(5.7km)

 

 오늘은 테라디요스 데 라 템플라리오스에서 베르시아노스 델 레알 카미노까지 가는 약 19km의 짧은 거리로 팔렌시아를 지나 레온으로 들어가는 첫 걸음이다.

 

 아침 일찍부터 한국인이든 서양인이든 길을 걷는 사람들은 아침 5시만 되면 움직이기 시작한다. 일어나 길을 떠날 준비를 마친 사람들은 빠르면 6시 전에 늦어도 7시 전에는 걷기를 시작한다. 그렇게 빨리 일어나서 길을 가기에 대부분은 아침을 먹지 않고 떠나 중간에 있는 카페나 바를 이용한다.

 

 아침 일찍 길을 떠나기에 거의 대부분 길을 걸으면서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본다. 물론 서쪽을 향해 가기에 해는 등 뒤에 떠오른다.

 

아침 해가 떠오르는 광경

 

 테라디요스 데 라 템플라리오스에서 사아군에 이르기까지 도로를 따라 이동할 수도 있으나 모라티노스와 산 니꼴라스 델 레알 까미노를 거치는 길로 방향을 잡고 걷는다.

이 길이 지나는 마을은 상당수의 건물들이 무너진 것을 보게 된다. 대부분의 건물들은 진흙과 짚을 섞어서 만든 소박한 벽돌로 만들어져 있는데, 이러한 양식의 건축법은 무데하르 양식(스페인에서 발달한 이슬람풍의 그리스도교 건축양식)의 영향으로 추측할 수 있고, 사아군에 남아있는 성당 건축물에서 무데하르 양식의 완성된 형태를 볼 수 있다. 이러한 무데하르 양식의 건축물들은 저녁 해질 무렵에는 붉은색이 하나가 되어 우리 마음속 깊이 새겨진다.

 

 길을 걸으며 만나는 이미 955년 역사에 등장하는 모라티노스는 다른 지역에서는 돌과 벽돌을 섞어서 건물을 지었지만 이 마을에서는 성당을 포함한 모든 건물을 오로지 벽돌로만 지었다는 작은 마을이다.

 

 티에라 데 캄포스 지역 주민 대부분은 중세 시대에 스페인 북부나 다른 유럽 왕국에서 이주한 사람들로 까미노 데 산티아고가 발전하자 많은 사람들이 이 곳으로 옮겨와 자신들의 꿈을 이루는 삶을 만들어갔다. 그러나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모라티노스 마을 주민들은 이베리아 반도 남쪽의 이슬람 왕국에 살던 기독교도였다. 이들은 이주와 함께 자신들의 고유한 건축 방식도 가지고 왔는데, 이것이 모라티노스만이 벽돌을 많이 쓰는 특이한 건축방식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작은 마을을 지나가면 마을 중심의 조그만 광장에 16세기의 건물로 교구 성당 역할을 하는 산 토마스 성당 (Iglesia de San Tomas)이 있다.

 

모나티노스 표시

 

산 토마스 성당

 

마을에 달아 놓은 깃발

 

모라티노스 서비스 시설 표시

 

 별로 특징이 없고 순례자들을 위한 서비스 시설도 없어 그냥 통과하여 마을 출구에서 왼쪽으로 표시되어 있는 까미노 표시를 따라 삼십 분 정도만 걸으면 팔렌시아 지방의 마지막 마을인 산 니콜라스 델 레알 카미노에 도착한다.. 이 마을은 1183년에 만들어졌다고 알려져 있으며 중세에는 이곳은 산티아고를 향해 계속 갈 수 없을 정도로 증세가 악화된 순례자와 나병 환자들을 돌보기 위한 병원이 있었다고 한다.

 사아군까지는 아직 7km 이상이 남았기에 마을 입구에 있는 카페에 들러 이제 습관이 된 커피와 빵으로 간단히 요기를 하고 휴식을 취하면서 보니 카페가 알베르게를 겸하면서 제법 오래 된 건물이다.

 

산 니콜라스 델 레알 카미노 카페

 

산 니콜라스 델 레알 카미노 표시

 

 카페에서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쉬다가 마을로 들어가니 산 니콜라스 주교 성당(Iglesia de San Nicolas Obispo)이 나타난다. 이 성당은 무데하르 양식의 벽돌로 지어졌으며 성당의 내부에는 고딕 양식의 아름다운 성모상과 바로크 양식의 봉헌화가 있다. 석양이 질 무렵에 성당을 바라보게 되면 특유의 붉은 색을 띤 벽돌의 색깔이 감동적이라 하는데 나는 아침에 이 곳을 지난다. 곳곳에서 제대로 볼 것을 못보고 지나가는 마음에는 항상 아쉬움이 가득하다. 하지만 지금 이 길을 걷는 목적이 관광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며 아쉬움을 달랜다.

 

산 니콜라스 주교 성당(Iglesia de San Nicolas Obispo)

 

 마을의 출구에서 이어지는 길을 따라 걸으면 세킬료 강을 건너 사거리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왼쪽으로 오래된 까미노 길을 따라가면 팔렌시아와 레온의 경계를 이루는 카라스코 언덕의 정상을 오르게 되고, 좁은 내리막길을 내려오면 팔렌시아와 레온을 거치는 발데라두에이 강을 지나는 다리를 건너 멀리 사아군의 성당 탑들이 보이며 이제 팔렌시아를 지나 카스티야 이 레온 자치지역(Comunidad Autónoma de Castilla y León)으로 들어간다.

 

 카스티야 이 레온 자치지역(Comunidad Autónoma de Castilla y León)은 스페인 북부 지방에 있는 주로 주도(州都)는 레온(León)이다. 알폰소 10세가 그의 연대기에 레온의 첫 번째 왕이었던 돈 펠라요 왕과 함께라고 기록한 것을 볼 때 카스티야보다 레온이 먼저 형성된 것을 알 수 있다. 레온 주의 많은 아름다운 도시는 오래된 역사만큼 예술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켈트의 옛 성터, 로마 시대 광산, 아스토르가에 있는 로마의 흔적, 산 미겔 데 에스칼라다 수도원의 모사라베 양식의 보물, ‘로마네스크의 시스티나라고 할 수 있는 레온 산 이시도로 성당의 소성당, 독특한 양식의 사아군 성당들, 레온 대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 르네상스 양식인 산 마르코스 병원, 그리고 안토니오 가우디의 작품인 아스토르가의 주교궁과 레온의 카사 보티네스 등등 셀 수가 없다. 그러나 레온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역사, 예술, 전통뿐만이 아니라 자연으로 북부는 칸타브리아산맥, 남부는 두에로강()의 지류 연변에 전개된 평지가 펼쳐져 있다. 이 밖에 산지에는 떡갈나무, 너도밤나무, 밤나무 등의 임산자원이 많고, , 당나귀, 양의 사육도 많이 한다. 이 길을 걷는 순례자는 마치 천국에 있는 것 같은 경험을 할 수 있다.

 

 

 

 이제 사아군에 도착하기 약 3km 전에 있는 푸엔테 성모성당에 도착하기 전까지 까미노 길은 포장된 길로 걸어간다. 성당을 지나면서 다시 부드러운 흙길로 변하고, 자동차 전용도로의 밑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가면 어느새 사아군에 도착한다. 사아군 기차역을 돌아가는 길을 따라서 철길을 옆으로 끼고 걷게 되면 사아군의 오래된 구시가지에 도달하게 된다.

 

 사아군에서 3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13세기 무데하르 양식의 푸엔테 성모 성당(Ermita de La Virgen del Puente)에는 성모상이 있는데 여러 번 기적을 일으켰다고 한다. 그 중 사아군에서 악당으로 악명 높은 히네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죄를 지어 사형을 선고 받았다. 감옥에서 히네스는 깊이 회개하고 성모에게 도움을 청하자 기적이 일어나 살아났다. 히네스는 이후 산티아고까지 순례를 한 뒤, 사아군에 남아서 많은 순례자를 도와주며 살았다고 한다.

 

푸엔테 성모 성당(Ermita de La Virgen del Puente)

 

 푸엔테 성모 성당을 지나 조금 가니 들판에 아치 같은 것이 서 있고 그 사이를 산티아고 데 카미노로 가는 길임을 표시해 놓고 있다. 이 아치가 언제 제작되어 이곳에 서 있는 것인지를 아무리 찾아도 자료가 없다. 아마 옛날의 것이 아니고 최근의 건축물인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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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아치를 지나 조금 가면 사아군에 도착한다.

 

 산티아고 순례길이 카스티야주를 지난 뒤 레온주에서 만나는 첫 도시로, 11세기 알폰소 6세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하는 사아군(Sahagún)은 자치단체로 티에라 데 사아군 지방의 중심지이다. 사아군이라는 지명은 성 파쿤두스에서 나왔다고 한다. 성 파쿤두스는 서기300년에 세아 강변에서 참수형에 처해져 세아 강에 버려졌다. 기독교도들이 유해를 수습해 304년에 지금의 사아군 자리에 매장하고 순교자로 숭배했다. 이 무덤은 상크투스 파쿤두스(Sanctus Facundus)’로 불렸는데 이 말이 차츰 축약되어 산파군(San Fagun)’사파군(Safa-gun)’이 되었고, 마지막에는 사아군이 되었다고 한다. 사아군은 중세 스페인의 클뤼니라 불릴 정도로 번성했던 산 베니토 수도원이 위치했던 곳으로 관광업이 경제의 주축을 이룬다. 사아군은 놀랄 만큼 아름다운 무데하르 양식의 유적들로 가득 차있다.

 

순례자의 여러 모습을 그린 벽화

 

사아군 표시

 

사아군의 철길

 

사아군 안내도

 

 중세 스페인 수도원 건축물은 후기 고딕양식이 주를 이루지만 13~16세기 스페인에서는 이슬람 양식의 영향을 받아 스페인 특유의 무데하르(Mudejar) 양식이라는 건축 양식이 발달했는데, 사아군은 가장 초기에 속하는 무데하르 양식의 건축물이 여러 개 보존되어 있는 것으로 특히 유명하다. 이 독특한 모습 때문에 사아군의 무데하르 건축유적은 관광업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기하학적 형태의 목재천정과 채색타일 등이 특징인 무데하르양식으로 대표적인 건축물은 산 티르소 성당이다. 12세기에 지어진 이 성당은16~18세기 사이에 여러 번 개축되었다. 12세기 무데하르 양식의 탑 구조가 잘 보존되어 있다. 13세기에 건축한 산 로렌소 교회(Iglesia de San Lorenzo), 16세기에 건축한 트리니다드 교회(Iglesia de la Trinidad), 17세기에 건축한 산 베니토 아치문(Arco de San Benito)을 비롯한 역사적 건축물이 다수 남아 있다.

 

 사아군 시내에서 오렌지 주스를 한잔 마시면서 잠시 쉬었다. 까미노 길을 걸으면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오렌지 주스를 마신다. 주스는 생 오렌지를 그 자리에서 직접 짜서 주는데 대략 한 잔의 주스를 만들기 위해 4개 정도의 오렌지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니 신선하고 맛도 있어 매일 마신 것이다.

 

 

 사아군 시내를 통과하니 여러 성당이 보였으나 그냥 지나치고 가니 순례자의 표주박을 나타내는 상이 보인다. 그 주위를 둘러보니 산 베니토 아치 (Arco de San Benito)와 알폰스 6세의 거주지라는 설명이 있는 건물이 보인다.

 산 베니토 아치(Arco de San Benito)17세기 산 베니토 데 사아군 수도원에서 만든 건축물로, 수도원은 동전을 주조할 만큼 부유했었으며 성 베니토는 훗날 스페인의 클뤼니로 불렸다.

 

 서고트시대에 앞에서 사아군의 이름 유래에서 이야기한 파쿤두스의 무덤 자리에 도모스 산토스 수도원이 세워졌다. 이 수도원은 무슬림들에 의해 여러 차례 파괴되었으나, 매번 재건되었다가 알폰소 6세 때 마지막으로 재건되었다. 알폰소 6세는 수도원 개혁을 지지하여 클뤼니 수도원을 중심으로 시작된 클뤼니 개혁운동(교회가 부패되어 가던 상황에서 그리스도교의 본연의 영적생활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스페인에 확산시키기 위해 도모스 산토스 수도원 자리에 산 베니토 수도원을 세우고 여러 특혜를 주었다. 산 베니토 수도원은 중세 말기에 스페인의 클뤼니로 불릴 정도로 발전했으나, 현재는 시계탑만 남아있는 수도원 유적과 도시 입구의 커다란 아치만이 남아있다.

 

산 베니토 아치 (Arco de San Benito)

 

알폰스 6세의 거주지 안내판

 

순례자의 표주박 조형물앞에서

 

 

 사아군에서 베르시아노스 델 레알 까미노로 가는 길은 편안하게 걸을 수 있으나 지난 며칠간의 길보다 많은 아스팔트길을 걸으니 자칫 다리에 무리를 줄 수도 있고, 도로 주위의 나무들은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지 않으므로 휴식을 할 곳이 거의 없다.

 

 사아군에서 먼저 마을 출구의 세아 강 위를 지나는 칸토 다리를 건너 왼쪽으로 이어진 좁은 길을 따라 계속 걸어가면 산타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고속도로 위를 지나는 다리가 나타나나 다리를 건널 필요도 없다. 약 한 시간 반 가량을 계속 직선으로 이어지는 길은 끝없는 평원 위로 이어져 있고 걷기에 매우 좋다

 

 베르시아노스 델 레알 까미노는 카스티야 지방의 전원 건축을 구경할 수 있는 작은 마을이다. 점토와 짚을 섞어 햇볕에 말린 가벼운 벽돌로 지은 집, 흙으로 만든 담, 바위를 파서 만든 저장고 등을 볼 수 있다. 또한 옛날에는 바위를 파서 만든 저장고에 포도주와 돼지로 만든 전통 음식이 보관되어 있었다.

 마을 이름의 기원은 마을의 첫 거주자가 엘 비에르소(El Bierzo) 출신인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베르시아노스 델 레알 까미노를 지나가는 길 주위에는 저수지와 작은 연못들이 많은데 여름철에는 무더위 때문에 물이 모두 증발하여 사라지기도 한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이 길은 중세의 순례자들에게 매우 위험한 길이었다고 전해진다.

 

카미노 알트란티보 표시

 

길가의 베르시아노스 델 레알 카미노 표시


.작은 연못을 지나면 이윽고 오래된 페랄레스 성모 성당이 나타나고, 성당을 지나서 조금 가면 베르시아노스 델 레알 카미노 마을을 들어가는 입구에 알베르게가 나타나고 오늘은 여기서 멈춘다. 페랄레스의 성모 성당
(Ermita de la Virgen de Perales)은 마을에 진입하기 전 순례자의 쉼터에 있는 성당으로 내부에는 라 페랄라’(La Perala)라고 부르는 성모상이 있어서 항상 마을 사람들이 와서 경배를 드리는 곳이다.

 

페랄레스의 성모 암자 표시

 

마을 입구에 있는 알베르게

 

알베르게에 걸려 있는 지도

 

알베르게 마당에 피어 있는 꽃

 

 알베르게에 도착하니 오후 1시 반이었다. 숙소는 아마 최근에 건축한 것으로 짐작되는 현대식 건물에 시설도 현대적이어서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마을과는 상당히 떨어진 마을 입구에 있어 식당이나 슈퍼 등을 주변에서  찾을 수 없어 알베르게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했다. 그래서 점심을 먼저 먹고 몸을 씻고 세탁을 하고 알베르게의 넓은 마당에 따갑게 비치는 햇빛 아래에 빨래를 늘어놓고 망중한을 즐기다 보니 또 저녁을 먹을 때가 되었다. 이 길을 걸으면서 인간이 가지는 원초적인 본능을 충실하게 한다. 먹고, 자고 걷는 것이 하루의 일과다. 그러니 또 시간이 되어 밥을 먹는 일은 무언가 의무적으로 하는 행동 같은 생각이 든다.

 

 저녁을 먹고 또 마당의 탁자에 무리를 지어 앉아 맥주와 와인을 시켜서 마시면서 온갖 잡담을 한다. 살아온 세월과 과정이 다른 사람들이 같이 길을 걷기에 화제는 항상 풍부하다. 하지만 얼마나 서로가 공감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스페인, 산티아고 까미노 길을 걷다. 18(06.03,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 - 테라디요스 데 로스 템플라리오스)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오늘의 걷기 길 :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 - 칼사디야 데 라 쿠에사(17.0km) - 레디고스(6.4km) - 테라디요스 데 로스 템플라리오스(3.2km)

 

 오늘은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를 출발하여 이름도 긴 테라디요스 데 로스 템플라리오스까지 약 27km를 걷는 길이다.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에서 테라디요스 데 로스 템플라리오스까지 27km는 평탄한 길이다. 스페인에서 가장 광활한 이 길을 걸은 순례자들은 한 마음으로 단조로움에 홀로 된 것 같은 외로움을 호소한다.

 

 아침 일찍부터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의 알베르게를 출발하여 시내를 가로 질러 올라가니 어제의 축제의 열기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인적이 없는 적막함만이 감돈다.

 

산타 마리아 성당을 지나 산티아고 성당으로 가는 시내는 어제 몇 번이고 지나갔던 길이다.

 

산타 마리아 성당 입구 장식

 

시청 광장

 

산티아고 성당

 

 시내를 지나 도시를 흐르는 카리온 강을 넘으면 카리온 데 콘데스의 출구로 이어진다. 오래된 돌다리를 넘으면 산 소일로 왕립 수도원(Real Monasterio de San Zoilo)이 나타난다. 아름다운 회랑과 로마네스크 양식의 현관이 있는 산 소일로 왕립 수도원은 12세기에 만들어진 로마네스크 양식 건물을 16, 17, 18세기에 걸쳐서 수차례 증 개축하였고, 현재는 고급 호텔로 개조하여 관광객들을 유혹하지만 숙박비가 만만하지 않다고 한다.

 

카리온 강

 

여러 문장의 모양

 

산 소일로 왕립 수도원(Real Monasterio de San Zoilo)

 

 도로를 가로질러 계속 이어지는 포장길을 따라 약 4.5킬로미터 정도 이어지는 이 구간은 자동차가 거의 없어 걷기에 편하다. 또 드넓게 펼쳐진 밀밭 사이로 드문드문 나무들이 보이고 길은 그 나무들을 이어주는 것을 볼 수 있다.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에서 칼사디야 데 라 쿠에사까지 17km의 길 중간에는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마을이나 쉴 수 있는 그늘이나 샘터도 없어 까미노 프란세스 중 마을과 마을 사이의 거리가 가장 먼 길이다. 그러므로 길을 걷기 전에 반드시 필요한 음식과 음료수를 준비해야 한다. 중간에 만나게 되는 둥글거나 네모난 형태의 조그만 벽돌집은 이 지역의 오래된 건축물로 비둘기를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약 10km 정도를 가니 반가운 푸드 트럭이 있다. 제법 먼 길을 걸어온 순례자들은 대부분이 이 푸드 트럭에 앉아 쉬면서 커피나 음료를 곁들여 약간의 음식을 먹고 떠난다. 산티아고로 가는 길 곳곳에 보이는 이 푸드 트럭은 스페인 사람뿐만 아니라 외국인들도 운영하는 것이 보이는데 누가 운영하든지 길손들에게는 소중한 쉼터가 된다.

 

푸드 트력

 

 이제 이 길을 걷는 순례자의 앞길은 피곤함과 지루함 외로움이 함께하는 구간이 나온다. 오른쪽으로는 멀리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고속도로가 보이고, 순례자는 포장도로를 지나서 계속해서 나타나는 밀밭을 지루하게 보면서 외롭게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은 자기 앞에서 걷고 있는 순례자의 모습만 보면서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저 길을 갈 뿐이다.

 

산티아고 400km 표지석

 

끊임없이 계속되는 밀밭

 

 칼사디야 데 라 쿠에사는 아담한 마을로 위치가 분지 아래에 있어서 멀리서 보면 지평선과 혼동하여 지나쳐 버리기 쉽다. 아주 가까이 가기 전까지는 마을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 수 없어 더 지루하고 피곤한 길이 될 수 있다. 칼사디야 데 라 쿠에사라는  마을 안에는 벽돌로 지은 아담한 집들이 있고, 마을의 소박한 산 마르틴 교구 성당(Iglesia Parroquial de San Martin)의 내부에는 푸안 데 푸니 화파가 그린 16세기의 봉헌화가 있다.

 

멀리 보이는 칼사디야 데 라 쿠에사

 

칼사디야 데 라 쿠에사 표시

 

쿠에사 강 표시

 

길가에 피어 있는 스페니쉬 블룸

 

 칼사디야 데 라 쿠에사를 지나기 위해서는 마을 중앙의 마요로 거리를 지나 마을의 왼쪽으로 도로를 지난다. 마을에서 다리를 통해 쿠에사 강을 건너면 여기에서 레디고스에 이르는 길은 두 가지로 나뉜다. 옛길과 새길이 있는데 주저 없이 옛길을 따라가는 것이 좋다. 새길은 우회하는 길이다. 레디고스에는 순례자를 위한 특별한 시설이 없어 대부분의 순례자는 그냥 통과하지만 시내를 구경하기를 권한다.

 

 레디고스는 1028년에 도냐 우라카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주교 영지로 이 마을을 기부했다. 당시 기부에는 비둘기 집과 함께 여러 건물들이 있었다고 한다. 산티아고 성인에게 봉헌된 성당을 비롯해서 현재에도 당시의 전통 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다.

 

레디고스 마을 전경

 

 

 레디고스를 떠난 순례자는 고속도로를 가로질러 도로의 왼쪽으로 이어지는 길을 걷는 것이 좋다. 쿠에사 강을 지나는 다리를 건너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길을 1시간 정도 걸어가면 붉은색의 벽돌로 만들어진 무데하르 양식의 건물들이 길게 자리 잡은 12세기에 설립된 템플 기사단의 영지였던 테라디요스 데 로스 템플라리오스 에 도착한다. 현재 마을에는 기사단과 관련된 것은 거의 남아 있지 않으나, 마을의 이름에 끌린 많은 순례자들이 마을을 찾는다. 이 마을에는 황금 알을 낳는 닭이 묻힌 자리에 대한 전설이 있는데 이 전설은 템플 기사단과 관련이 있어, 이 전설을 믿는 중세의 연금술사들과 보물 사냥꾼들이 끊이지 않고 이 마을을 찾아 왔다고 한다.

 

테라디요스 데 로스 템플라리오스 표시

 

 테라디요스 데 로스 템플라리오스에 도착하여 알베르게를 찾아가니 아직은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점심을 먹고 세탁을 하고난 뒤 알베르게 뜰에 앉아 일행들과 맥주를 한잔하고 있으니 옆에 있던 외국인들이 말을 걸어 왔다. 우루과이에서 왔다는 젊은이와 스페인 사람이라는 50대 정도의 남자. 그리고 40대로 보이는 루마니아에서 왔다는 여인이었다. 사람들은 여행을 제법 했다고 해도 루마니아를 가 본 사람은 드물다. 하지만 나는 루마니아를 일주일 정도 여행을 했기에 내가 여행을 한 곳들을 이야기하니 루마니아 여자는 아주 기뻐하며 이야기를 했다.

 

그들과 떠들고 이야기하며 쉬면서 보니 같이 길을 걸었던 한국의 모녀도 보이고, 태백의 젊은이도 보인다. 아마 이 마을에 알베르게가 없어 모두들 이곳에서 숙박을 하는 것 같았다. 제법 오랜만에 만나기에 반갑게 인사들을 하고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이 같은 일이 이 길을 걸으면서 항상 겪는 일이다. 한국에서 일면식도 없던 사람들이 같은 길을 걷는다는 사실만으로 동류의식을 가지고 함께 하는 것이다.

 

 한참을 쉬다가 저녁을 먹고 마을 구경을 나갔다. 오후 8시 경이었는데 아직 해는 중천에 떠 있다. 이곳은 낮이 길어서 오후 10시 경이 되어야 해가 떨어진다. 마을에는 산 페드로 교구 성당(Iglesia Parroquial de San Pedro)이라는 소박한 성당이 있는데 마을의 주민이 적어서인지 문을 열어 놓지 않았다.

 

산 페드로 교구 성당(Iglesia Parroquial de San Pedro)

 

마을에 있는 산티아고 길 표시

 

템플기사단의 문장이 새겨져 있는 알베르게

 

 조그마한 마을이라 한 바퀴 돌아보는 것도 시간이 별로 걸리지 않았다. 마을의 성당과 주변의 경치를 즐기며 함께 간 일행들과 여러 이야기를 하며 숙소로 돌아오니 9시가 되었다. 또 다시 가장 원초적인 행동을 계속하기 위해서 잠자리에 든다.

스페인, 산티아고 까미노 길을 걷다. 17(06.02, 프로미스타 -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오늘의 걷기 길 : 프로미스타 - 포블라시온 데 캄포스(3.5km) - 레벵가 데 캄포스(2.4km) - 비야르멘테로 데 캄포스(2.1km) - 비얄 카사르 데 시르가(4.1km) -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5.8km)

 

 오늘은 프로미스타에서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까지 가는 아주 평이한 18km 정도의 아주 짧은 길이다. 오늘의 길은 오랜 기간의 까미노에서 잠시 쉬어가듯이 너그럽게 그리고 편안하게 걷는 길이다. 프로미스타에서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에 가려면 자동차 도로와 나란히 이어져있는 편안하지만 지루하고 햇빛을 피하기 어려운 메세타 지역의 길을 걸어야만 한다. 이 길에는 갈림길이 없이 길게 뻗어있는 길이 있을 뿐이니 혼자서 생각에 잠기기에 좋다. 그러나 20km도 안 되는 짧은 길이기 때문에 잠시 쉬어가는 여정으로 생각하고 천천히 걸으면서 프로미스타와 비야카사르 데 시르가에 있는 아름다운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물들을 충분히 감상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다.

 

 이 길에는 카페와 작은 바들이 많아 순례자에게 좋은 서비스를 제공한다. 길이 단조로워 지루하다고 느낀다면 포블라시온 데 캄포스에서 마을 오른쪽의 출구로 나와서 레벵가 데 캄포스를 우회하여 비야르멘테로 데 캄포스로 가는 길을 택하면 된다. 잠시나마 도로를 따라 걷는 지루함에서 벗어나 작고 아름다운 마을인 비요비에꼬를 들릴 수 있으며, 까리온 데 콘데스로 향하는 여정의 마지막 마을인 비야카사르 데 시르가에 들러 템플 기사단이 만들었다는 블랑카 성모성당을 방문할 수도 있다.

 

 아침 일찍 프로미스타를 떠나면서 보는  산 마르틴 성당(Iglesia de San Martin)은 가장 순수하고 완벽한 11세기 로마네스크 양식의 좋은 성당으로, 늘씬한 탑과 문, 아치,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당나귀, 음악가, 곡예사, 여러 얼굴 등 각각 다른 장식이 되어 있는 주두와 300개가 넘는 추녀 받침이 독특하다. 또한 성당 내부의 후진 등이 완벽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작품을 구성한다. 성당 내부에는 식물, 동물, 복잡한 장식이 새겨진 주두가 있으며 13세기의 십자가상과 조각상들이 있다.

 성당 내부의 주두에 새겨진 인물들은 중세 석공들의 비밀결사 장소를 가리키는 것으로 알려져 오늘날까지도 그들의 후손들에게 은밀한 장소를 알려주는 힌트라고 한다.

 

 

산 마르틴 성당

 

프로미스타를 떠나는 안내도

 

 프로미스타를 나오는 길은 간단하다. 도로를 넘어 약 500미터 정도를 걷다 보면 버스 승차장과 안내소가 있고 성 마르틴 성당이 있는 넓은 마을 광장이 나온다. 성당을 지나 오른쪽으로 돌아서면 오늘 길의 첫 번째 마을인 포블라시온 데 캄포스로 향하는 길로 들어서게 된다. 특별한 어려움이 없는 평탄한 길이라 거침이 없으나 햇빛을 피할 그늘이 없는 메세타고원 지역이므로 해가 내리쬐지 않는 아침 시간에 속도를 좀 높이는 것이 좋다.

 

순례자 모형

 

해가 떠오른다.

 

거침없는 평원 길

 

 프로미스타를 출발하여 단조로운 메세타고원의 평원 길을 가면 연이어 마을들이 나타난다. 이름도 비슷한 무슨 캄포스라는 세 마을을 지나면 비얄 카사르 델 시르가에 도착한다.

 

포블라시온 데 캄포스 표시

 

 포블라시온 데 캄포스에 들어서기 직전 순례자는 왼쪽에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순례자 쉼터인 산 미겔 성당을 만난다. 포블라시온 데 캄포스는 1410년 알폰소 7세에 의해 예루살렘 성 요한 기사단에 기부되어 성 요한 기사단의 영지로 전해지고 있다. 포블라시온 데 캄포스가 있는 언덕 위에는 성당이 있다. 저 멀리 보이는 막달레나 교구 성당(Iglesia Parroquial de la Magdalena)에는 16세기의 아름다운 봉헌화가 있다.

 

지붕의 첨탑만 보이는 막달레나 교구 성당

 

 포블라시온 데 캄포스 마을의 출구에서 왼쪽으로 난 길을 선택하면 우시에사 강을 건너 12세기에 만들어진 레벵가 데 캄포스를 거쳐 비야르멘테로 데 캄포스까지는 그늘 한 점 없는 자동차 도로 옆길을 약 한 시간 반 정도를 걸어야 한다.

 

 다음에 나오는 레벵가 데 캄포스는 순례자의 십자가, 프랑스 길이라는 거리가 있을 정도로 전형적인 까미노 마을이다. 16~17세기의 오래된 집과 스페인 역사에서 유명한 사람들이 태어난 곳이다. 12세기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산 로렌소 교구 성당(Iglesia Parroquial de San Lorenzo) 옆에 있는 작은 기념물은 이 마을에서 태어난 바르톨로메 아모르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그는 독립전쟁 때 침략자들과의 전쟁에서 팔렌시아를 지켜낸 인물이다.

 

레뱅가 데 캄포스 표시

 

산 로렌소 교구 성당

 

야고브 상

 

 

 다음에 나타나는 비야멘테로 데 캄포스는 아담한 전형적인 까미노 마을로 성 마르틴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 곳이다. 까미노 마을이라고는 해도 순례자에게 제공하는 서비스가 거의 없는 곳이기 때문에 마을 출구의 크고 우람한 소나무가 이곳을 지나는 순례자들에게 편안한 그늘을 제공하며 소나무 숲 밑에 자리 잡은 순례자를 위한 쉼터가 반갑다. 이 마을의 산 마르틴 데 투르 성당(Iglesia de San Martin de Tours)은 아비뇽에서 사라진 산 마르틴 데 투르의 유해를 실은 노새가 이곳에 나타나자 성당의 종이 저절로 울렸다고 전해지는 성당으로 성당의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돌과 벽돌, 목재 들보로 지은 소박한 16세기 건축물이다.

 

비야르멘테로 데 캄포스 표시

왼쪽으로 멀리 보이는 산 마르틴 데 투르 성당

 

소나무 쉼터

 

 이 쉼터에서 잠시 쉬다가 다시 도로의 오른쪽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비얄카사르 데 시르가로 이동한다. 4km 정도 떨어진 비얄카사르 데 시르가로 가는 길에서 보는 하늘은 너무 맑다. 새파란 하늘은 항상 우리 마음을 깨끗하게 씻어주는 힘이 있다. 마을은 카리온 데 콘데스로 향하는 도로의 왼쪽에 위치하며 인구가 약 250명 정도의 작은 마을이지만 순례자들에게는 많이 알려져 있는 마을이다. 맛있는 음식과 중세 스페인 템플 기사단의 본거지였기에 순례자는 여기서 발길을 잠시 멈춘다. 까미노를 걷는 순례자라면 반드시 방문해봐야 할 마을 중에 하나다.

 마을로 들어가는 도로의 왼쪽으로는 현대식으로 지은 호스텔이 보이고 조금 올라가면 블랑카 성모 성당이 나타난다.

 

 

 

 마을에 올라가 성당외부를 보고 내부를 보려고 하니 문을 잠가 놓았다. 그리고 입구에 안내문이 붙어 있었는데 11시에 성당 문을 연다고 되어 있었다. 우리가 도착한 시간이 10시여서 같이 길을 걷는 안산의 채선생과 의논하여 여기서 아침 겸 점심을 먹고 기다려 보기로 하고 식당에 들어가 치킨을 시켜서 천천히 먹고 있으니 같은 길을 걷는 사람들이 들어왔다. 그들에게 11시에 성당이 문을 연다고 알려주고 식사를 마치고 다시 성당 주변을 구경하였다.

 

 블랑카 성모 성당은 블랑카의 성모 템플 기사단이 세운 성당 중에서 아주 중요한 곳으로, 블랑카 성모에게 봉헌되었고 기적이 일어나는 부조 조각에 대한 이야기도 전해질 뿐만 아니라, 성당 신랑에 있는 우물은 기사단의 비밀 은신처로 가는 비밀 통로라고 전해진다.내부의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희망의 성모상은 마치 임신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블랑카 성모는 수많은 기적을 일으켰는데 가장 유명한 기적은 성당 건축 중 일어났다.

성당을 짓던 중 건축용 석재가 도난당하자 한 순례자가 범인으로 몰렸다. 그가 교수형을 당하려는 순간 성모 마리아가 그의 발밑에 건축용 돌을 놓아주며 무죄를 입증했다고 한다.

 

블랑카 성모 성당 외부

 

 새롭게 정비된 듯 굉장히 깨끗한 성당 앞에 있는 마을 광장에는 식탁에 앉아 성당을 느긋이 쳐다보는 순례자의 동상이 있다. 오랜 길을 걸은 순례자는 이곳에 앉아 마음의 평화를 얻었을까? 아니면 앞으로 더 가야만 하는 길에 대한 걱정일까? 그런데 순례자의 표정을 보니 무엇인가 평화롭고 여유롭게 보인다. 현대에 이 길을 걷는 사람의 대부분은 여행이 목적이지 종교적인 순례가 목적이 아니다. 하지만 예전에는 대부분이 종교적인 깨우침을 얻고자 이 순례길을 걸었다. 그래서 이 길을 걸으면서 이 순례자는 무엇인지 평화를 얻고 예수님의 사랑을 깨달은 얼굴이다.

 이 순례자 상 곁에 나란히 앉아 사진을 찍어보는 것도 순례길에서 즐길 수 있는 즐거움이다.

 

순례자 상

 

산타 마리아 블랑카 성당

 

 11시가 다 되어가니 한 여인이 광장을 질러오고 있었다. 아마도 성당의 관리인 같아 따라가니 성당 문을 연다. 정확히 11시다. 시간을 엄청나게 잘 지킨다고 성당을 구경하려고 기다리던 사람들이 모두 감탄을 하면서 내부로 들어갔다.

 

 산타 마리아 성당(Iglesia de Santa Maria)으로도 불리는 블랑카 성모 성당(Iglesia de la Virgen Blanca)13세기 템플기사단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 성당은 팔렌시아의 고딕 양식 보물로 14세기의 산티아고 소성당이 추가되었다. 고딕 양식의 성상이 있는 박물관이 있고 거대한 석조 블랑카 성모상, 섬세한 고딕 양식 십자가의 길 조각이 있다.

 

 블랑카 성모 성당 안에는 고딕양식의 무덤이 세 개 있다. 템플 기사단 기사의 무덤, 알폰소 10세의 동생 돈 펠리페, 그리고 그의 두 번째 부인의 무덤이다. 이 성당에 있는 산티아고 상은 두통을 가라앉히는 효험이 있다는데, 두통이 있을 때 손수건을 성인상의 이마에 댔다가 자신의 이마에 갖다 대면 두통이 사라진다고 하는데 믿거나 말거나.

 

블랑카 성모 성당(Iglesia de la Virgen Blanca) 내부

 

 이제 오늘의 종착지인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까지는 한 시간 반 정도의 거리다.

 

 비얄카사르 데 시르카에서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로 향하는 길은 도로의 오른쪽을 따라 약 3km 지난 지점에서 만나는 조그만 언덕을 오르면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로 향하는 내리막길이 나온다. 이 길을 가는 도중에 보는 하늘과 땅은 너무 평화롭고 여유롭다. 파란 하늘에 떠 있는 하얀 구름은 사람의 마음을 풍요롭게 하여 이 길을 걸으면서 순례자들은 모두 기쁜 마음으로 피곤함도 잊어버리고 즐거워한다.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최상의 선물이다.

 

사람에게 풍요를 주는 들판

 

 팔렌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이자 까미노의 심장으로 불리는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는 카스티야 및 레온 자치지역에 위치한 팔렌시아 지방의 티에라 데 캄포스 지역에 있는 자치단체로 팔렌시아시에서 40km 떨어져 카리온 강가에 있으며, 로마시대 이전에도 사람들이 거주했던 흔적이 다수 발굴되어 오래 전부터 도시 기능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원래는 이슬람 세력인 무어인이 건설한 도시였으나 9세기 초에 기독교도에게 넘어갔다. 중세 초기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는 기독교 왕국들 사이에서 중요한 도시로 법정과 종교회의가 열렸고,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라는 마을 명칭은 1552년에 알돈사 만리케의 유서에 처음 등장한다.

 중세에 이미 12개의 크고 작은 성당 건축물과 병원이 있을 정도로 번성했던 도시였다. 유서 깊은 도시답게 곳곳에 많은 역사적 건축물이 남아 있는데, 특히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 양식의 건축물이 잘 보존되어 있다. 역사적 건축물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12세기의 산 소일로 수도원(Monasterio de San Zoilo), 13세기의 산티아고 교회(Iglesia de Santiago), 14세기의 산타 클라라 수도원(Monasterio de Santa Clara) 등이 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산타 마리아 성당(Iglesia de Santa Maria del Camimo)에는 이슬람 왕들에게 조공으로 바쳐지는 카리온 처녀들을 황소들이 구해냈다는 전설이 묘사된 그림이 있다. 특히 중세의 산 소일로 왕립 수도원에서는 카리온 데 꼰데스를 찾아오는 순례자에게 커다란 빵을 주고, 성직자에게는 빵과 계란, 포도주와 돈을 줄 정도로 번성했다고 전해진다. 1894년 도시로 승격했고, 대륙성 지중해 기후로 겨울이 춥고 서리가 잦으며 여름은 건조하고 온난하다.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 표시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에 도착하니 이제 오후 1시다. 시내 입구에 있는 알베르게를 찾아가니 아직 문을 열지 않아 의자에 앉아 조금 휴식을 하면서 주변을 보니 이 알베르게가 일반적인 숙소가 아니었다. 옛날에 산타 클라라 왕립 수도원 (Real Monasterio de Santa Clara)이었던 이곳은 현재는 순례자를 위한 숙소로 사용되고 있고, 옆에는 옛 성당과 박물관이 있다. 박물관에는 그레고리오 페르난데스의 피에타가 있으며 16세기부터의 다양한 작품들이 많다고 하는데 일요일이라 문을 닫아서 들어가지를 못했다.

 

수도원 뜰의 조형물

 

수도원 알베르게 표시

 

옛 성당

 

산타 클라라 수도원 설명

 

성당과 수도원 전경

 

 이 수도원 벽에 '내 이름을 위해 집이나 아버지나 어머니나 자녀나 재산을 바치는 사람은 백배를 받고 영생을 상속받을 것이다.'는 내용의 동판이 붙어 있는데  그 내용은 종교적인 헌신을 말하는 것이니 범인은 우리가 완전히 이해하고 깨닫기는 어렵지만 무엇인가를 생각은 하게 해 준다. 

 

벽에 붙어 있는 동판

 

 알베르게에 들어가 잠시 쉬다가 도시를 구경하기 위해 나가서 조금 가니 길을 꽃으로 장식해 놓고 사람들이 모여 사진을 찍으며 즐기고 있다. 처음에는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냥 사진을 찍으며 꽃으로 장식된 길을 구경했는데 꽃길이 길게 이어져 끝이 보이지 않았다. 계속 꽃길을 따라가니 엄청난 인파가 모여 있고 큰 축제를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무슨 종교적인 축제같이 어린 아이들과 성인들 그리고 노인들까지 화려한 옷을 입고 행렬에 참가하고 있고, 심지어 밴드와 큰 장식을 한 수레까지 동원되고 있었다. 이 축제가 무슨 의미인지 뜻도 모르고 그 축제의 행렬을 따라가며 같이 걸으며 사진도 찍으면서 동행을 하니 시내를 거의 일주하는 듯했다.

 

우리에게는 이런 축제가 없기에 의아했지만 뒤에 알베르게에 돌아와서 포스터를 보고 이 축제가 무슨 축제인지를 알았다. 이 축제는 바로 Corpus Christi(성체축일, 聖體祝日)다.

 

 라틴어로 Corpus Christi라 일컫는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Solemnity of Corpus Christi)은 성령 강림 대축일 후 제2주일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성체성사를 기념하고 그 신비를 묵상하는 날로 기독교의 축일의 하나로 전 세계에서 축일 행사를 하는 도시가 많다.

 벨기에의 리에주에서 1264년에 시작된 성체의 축일은 우르바노 4세에 의해서 모든 교회를 위해서 거론되고, 요한 22세에 의해서 1317년 결정되었다. 삼위일체제가 든 주의 목요일에 성체행렬 등에 의해서 성대하게 축하되었는데, 오늘날에는 다음의 일요일에 축하하는 지방이 많다. 이 축일의 미사와 성무일에 관한 전례문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작품이라고 한다..

 

 이 축제에서 마을을 통과하는 성체경로의 꽃 카펫에 사용하는 꽃은 들판에 있는 꽃들과 가족의 정원에서 키운 꽃들을 사용한다고 하며, 이 축제를 위해 며칠 동안 꽃과 나뭇잎을 준비하고, 길에 도형을 그리고 거기에 맞추어 온 시내를 장식한다. 다른 도시에서의 이 축제를 보지 못해서 잘 알 수 없지만 이곳의 축제는 규모나 질적으로 아주 뛰어나다고 한다. 이 시내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마을에서도 참가하여 모두가 즐기는 엄청난 축제에 내가 우연히도 참석한 것은 큰 행운이었다.

 

 

축제 포스터(2024. 06. 02)

 

길 장식

 

축제의 행렬과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

 

 의미도 제대로 모르면서 축제를 함께 즐기고 알베르게로 돌아와 쉬다가 저녁을 먹으려고 우리 무리 4명이 같이 나가 식당을 찾으니 시내의 식당 전체가 만원이다. 축제에 참여한 사람들이 모두 가족을 대동하고 무리를 지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아마 주변 마을 사람들 모두가 이곳에 모인 것 같았다. 어렵게 큰 식당에서 자리를 잡고 주문을 하니 너무 손님이 많아서 주문이 어려웠다. 여태까지 먹어왔던 순례자 메뉴를 시키지 않고 단품으로 여러 가지를 시켜 먹고 계산서를 요청하니 생각보다 많은 액수가 나왔다. 하지만 크게 우려할만한 액수는 아니라 모두 웃으면서 밖으로 나와 산타 마리아 성당의 주변을 조금 구경하고 시내를 따라 올라가며 구경을 했다.

 

 도시의 입구에 있는 산타 마리아 델 까미노 성당(Iglesia de Santa Maria del Camimo)12세기에 만들어진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물로 현관에는 동방박사의 경배와 파사드에는 이슬람교도에게 바쳐진 100명의 처녀의 전설에 관한 황소의 머리 조각상이 새겨져 있다. 전설에 따르면 카리온에서 이슬람교도들에게 처녀 백 명을 바쳐야 했다. 그 중 네 처녀가 성모 마리아에게 작별인사를 해달라고 청했고 그들을 동정한 성모가 황소 네 마리를 나타나게 해서 이슬람교도들을 쫓아내서 처녀들이 풀려났다고 한다. 이밖에 성당 내부에는 고딕 양식으로 만들어진 승리의 성모와 도움의 그리스도가 있다.

 

산타 마리아 성당 (Iglesia de Santa Maria del Camimo) 전경과 순례자상

 

산타 마리아 (Iglesia de Santa Maria del Camimo) 성당 설명

 

산타 마리아 성당 (Iglesia de Santa Maria del Camimo) 입구

 

 산타 마리아 광장을 통과하여 위로 올라가면 12세기의 로마네스크 건물로 파사드에는 스페인 로마네스크 양식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리스도 판토크라토르가 있는 산티아고 성당(Iglesia de Santiago)이 나온다. 이 성당 광장 입구의 아치에는 24개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는 조각이 숨겨져 있다.

 

산티아고 성당(Iglesia de Santiago) 광장

 

 시내를 한 바퀴 돌아보고 알베르게로 가면서 가볍게 맥주를 한잔하고 여러 이야기를 하였다. 그리고 숙소에 돌아와서 쉬다가 산타 마리아성당에서 순례자들을 위한 미사에 참석하여 성당 내부를 구경하였다. 미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수녀님에게 이 성당에 얽힌 전설에 관한 황소상이 어디에 있는지를 물으니 잘 모르고 계셨다.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 답을 얻을 수 없어서 숙소로 돌아왔다. 

 

산타 마리아 성당의 내부

 

 오늘의 하루를 마치고 잠자리에 든다. 오늘은 우연히 행운이 마주친 날이었다. 언제 우리가 유럽의 축제에 참가해서 함께 즐기며 볼 수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