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鶴)의 오딧세이(Odyssey)

스페인, 산티아고 까미노 길을 걷다. 16(06.01, 카스트로헤리스 - 프로미스타)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오늘의 걷기 길 : 카스트로헤리스 -  이테로 델 카스티요(9.3km) - 이테로 데 라베가(1.8km) - 보아딜랴 델 까미노(8.2km) - 프로미스타(5.7km)

 

 오늘 여정의 시작인 카스트로헤리스의 출구는 오르막길 모스텔라레스 언덕으로 이어진다. 이 언덕은 카스트로헤리스에서 멀지만 눈앞에 뻔히 보이기 때문에 순례자들을 압도한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피레네 산맥도 넘은 순례자가 아닌가? 이 오르막길만 지나면 오늘의 종착지인 프로미스타까지는 평탄한 길이라 26km의 거리도 큰 무리를 주지는 않는다. 또 이 코스는 산티아고로 향하는 까미노와 카스티야의 운하가 합쳐지는 곳이며 부르고스에서 팔렌시아로 넘어가는 곳이다.

 

 아침 일찍부터 길을 걷기 시작하려고 떠나기 전에 어제 저녁에 미리 아침을 주문하였기에 오랜만에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출발하니 아직 하늘에 달이 떠 있다. 아직은 어두운 길을 제법 걸어서 카스트로헤리스를 출발하니 어제 보았던 산토 도밍고 교구 성당(Iglesia Parroquial de Santo Domingo)이 나오고 곧 마을의 공동묘지가 나온다.

 

하늘에 떠 있는 달

 

알베르게에 붙어 있는 까미노 길 안내도

 

아침에 보는 산토 도밍고 교구 성당(Iglesia Parroquial de Santo Domingo)

 

공동묘지

 

 이곳을 지나 모스텔라레스 언덕으로 향하는 길은 넓은 평원이고, 이 평원을 지날 때 이제 해가 떠오르기 시작한다. 뒤를 돌아보니 하늘에 해가 떠올라 비추는 모습이 아름답다. 언덕을 향해 가는 길에 펼쳐지는 평원은 너무 고요하여 평화롭게 느껴진다.

 

파일럿 프로그램 200(자속 가능한 농촌 개발 프로그램) 설명판

 

 해발 940m의 모스테라레스 언덕 정상은 나무가 거의 없는 메세타 지역이다. 500미터 정도를 내려오다 보면 오른쪽으로 십자가상이 보이며 조금 더 가면 순례자의 피로를 씻겨줄 삐오호 샘을 만나게 된다. 샘터에서 휴식을 가진 뒤 오른쪽으로 돌아 약 1km 정도를 따라가면 왼쪽으로 푸엔테 피테로로 가는 길이 보인다.

 

길가의 십자가와 탑(무슨 탑인지?)

 

모스텔라레스 언덕 올라가는 길에서 보는 풍경

 

이테로 델 카스티요 안내판

 

대량학살을 중지하라는 문구

 

길가의 들꽃들

 

산티아고 455km 표지석

 

 모스텔라레스 언덕을 내려 가 부르고스와 팔렌시아를 구분하는 피수에르가 강 주위의 푸엔테 피테로에 가기 전에 성 니콜라스 성당이 나온다. 이곳에는 성 야고보 형제회가 있는데 이들은 산티아고 순례길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부터 지금까지 중세시대의 전통을 지켜가며 순례자들에게 정성을 다해 접대한다. 산 니꼴라스 성당(Ermita de San Nicolas)은 마을의 이름을 그대로 붙여서 이떼로 델 가스띠요라고도 불리는 13세기의 건물로 이테로 다리를 건너기 전에 까미노의 왼쪽에 있다. 현재는 페루자의 성 야고보회에서 운영하는 순례자를 위한 숙소로 쓰인다.

 

산 니콜라스 푸엔테 티테로(순례자의 병원) 표지판

 

 

 

 성 야고보 형제회에서 운영하는 성 니꼴라스 성당을 지나면 시작하는 사람들의 다리라고도 알려진 돌다리를 넘게 된다. 중세 연금술사들은 이 다리는 산티아고로 가는 길을 걷는 동안 가톨릭 사상에 위배되는 자신이 죽고 새로 태어나는 곳이라고 믿었다. 까미노 길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 중 하나로 알폰소 6세가 카스티야와 레온 왕국의 결합을 기리며 건축한 이테로 다리(Puente de Itero)는 열한 개의 아치와 부벽으로 이루어졌다.

이제 순례자는 팔렌시아를 걷는다.

 

 팔렌시아주(provincia de palencia)는 스페인 북부 카스티야와 레온 자치지역에 있는 주()로 주도는 같은 이름의 팔렌시아시(). 팔렌시아주는 191개의 자치시로 구성되어 있고, 그중 절반 이상은 인구 200명 미만의 소규모 마을이다. 팔렌시아는 다른 지역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의 아름다운 경관과 역사적,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프랑스의 여행가 다빌리에 남작은 여행자들에게 익숙한 경로에 포함이 안 되어 있을뿐더러 감춰진 보물들이 알려지지 않은 도시들이 있다. 팔렌시아는 그런 지방 중 하나다.”라고 팔렌시아를 평했다.

대륙에 변화된 지중해성 기후로 연평균 기온은 10°C를 넘지 않으며 강우량은 많은 편이다. 1208년 알폰소 8세에 의해 스페인 최초의 대학이자 세계 최초의 대학인 팔렌시아 대학교가 설립되었으나 이 대학은 나중에 남쪽 바야돌리드로 옮겼다.

 

 푸엔테 피테로(Puente Fitero)라고도 불리는 작고 오래된 마을인 이테로 델 카스티요는 피수에르가 강이 굽어진 곳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에서 잠시 쉬면서 커피를 곁들인 간식을 먹고 있으니 우리보다 조금 늦게 떠난 일행이 들어온다. 잠시 수다를 떨다가 다시 길을 걷는다.

 

마을 입구의 이테로 다리(Puente de Itero)

 

 이테르 델 카스티요를 떠나서 약 2km 정도 떨어진 이테로 데 라 베가까지 가면서 만나는 거대한 밀밭의 평원은 외로움과 호젓함이 동시에 느끼게 한다. 또 이테로 데 라 베가에서 보아디야 델 까미노까지 8km가 넘게 끝없이 이어지는 밀밭에서는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지평선을 감상 할 수 있다.

 

팔렌시아 지방 안내도

 

팔렌시아 지방 표시 입석

 

레온 주의 까미노 안내도

 

넓은 평원에 물을 뿌리는 살수기

 

 이테로 데 라 베가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의 아름다운 버드나무 숲 사이에 13세기의 단순한 고딕 양식인 자비의 성모 소성당(Ermita de Nuestra Senora de la Piedad)이 있고,  마을 광장에 세워진 고딕 양식의  심판의 기둥(Rollo Juridiscional)은 죄를 지은 사람들을 심판하는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1966년에 스페인 문화자산으로 선정되었다.

 

이테로 데 라 베가 마을 표시 

 

심판의 기둥 (Rollo Juridiscional)

 

 

 

 피수에르가 강변의 기름진 평야의 작은 마을인 이떼로 데 라 베가를 떠나면 이제 눈앞에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밀밭이 펼쳐진다. 순례자는 인적 없는 조그만 마을인 폼페드라사를 지나 피수에르가 운하를 만나게 된다. 운하를 지나면 멀리 보아디야 델 까미노 마을이 보이기 시작한다. 13세기에는 3개의 성당과 2개의 병원이 있었을 정도로 번창했던 마을인 보아디야 델 까미노는 현재에는 16세기에 만들어진 성모 승천 성당과 같은 시대 플랑드르 양식을 보여주는 심판의 기둥으로 불리는 원주탑이 유명하다. 마을을 나서면 길게 뻗어있는 까스띠야 운하를 따라 걷게 된다. 이 길은 검정 버드나무가 아름다우며 5km 정도 걷다보면 시원한 수문을 만나며 오늘의 목적지인 프로미스따에 도착한 것이다.

 

피수에르가운하 표지

 

끝없이 펼쳐지는 밀밭

 

까미노 안내

 

 

 

 이 운하 근방을 지나가려니 길 중간을 공사 중이라 길을 우회하라는 안내문이 있다. 사전에 이 정보를 미리 들었고 그냥 통과해도 된다고 하였기에 우리는 우회하지 않고 그대로 길을 가니 공사 구간은 아주 짧아 옆으로 지나가 거리를 많이 단축하고 운하의 아름다운 모습을 즐겼다.

 

공사 중인 운하 입구

 

칸타브리아 지방 까미노 안내도

 

운하 주변의 공사 구간

 

운하를 운행하는 유람선

 

운하 유람선 정류장

 

 프로미스타에는 폐쇄적이고 전통적인 스페인 역사에서 근대에 이루어진 토목공사 가운데 가장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는 카스티야 운하(El Canal de Castilla)가 있다. 카스티야 운하는 스페인 카스티야 이 레온 자치지역(Comunidad Autónoma de Castilla y León) 중앙부를 동서 방향으로 가로지르며 조성한 대규모 운하로 카리온 강과 피수에르가 강의 물을 티에라 데 캄포스 평원에 고루 분배한다.

 총 길이가 207km에 달하는 대운하는 모두 46개 도시를 통과하며 부르고스주(Provincia de Burgos), 팔렌시아주(Provincia de Palencia), 바야돌리드주(Provincia de Valladolid) 3개 주에 걸쳐 뻗어 있다. 18세기 후반기에 건설 공사를 시작해 19세기 전반기에 완성했다.

 예전에는 카스티야 내륙 지방과 칸타브리아 해안 사이의 물류 이동을 담당했고, 이후엔 관개수가 흐르는 운하로 사용되었으며 오늘날엔 배를 타고 운하를 따라 이동한다든가 말을 타고 운하를 따라 달리는 등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프로미스타로 들어가는 입구의 카스티야 운하

 

프로미스타 표시

 

 프로미스타는 매력적인 중세의 유적들과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살아있는 도시로 티에라 데 캄포스(Tierra de Campos)를 더욱 아름답게 해주는 마을이다. 도시를 감싸고 있는 밀밭으로 중세부터 농경의 중심지였으며 도시의 이름도 곡식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왔다. 여러 시대에 걸쳐 만들어진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있고, 카스티야 운하와 돌에 새겨져 있는 비밀스러운 메시지, 파문당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카스티야의 밀밭에서 태어나 뱃사람들의 수호자가 된 성인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프로미스타에는 11세기 스페인 로마네스크 양식의 가장 빛나는 건축물인 성 마르틴 성당이 가장 두드러진다. 또한 마을 중앙에 자리 잡은 고딕양식의 성당인 성 페드로 성당 광장에서 많은 순례자들의 느긋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산 페드르 성당 외부 모습

 

오늘의 숙소 알베르게의 모습

 

길가의 고양이

 

 프로미스타에 도착하니 이른 시간이라 알베르게도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그래서 광장에 무료하게 앉아 시간을 보내다가 주변을 돌아다니니 시간이 되어 알베르게가 문을 연다.알베르게에서 샤워를 하고 쉬다가 저녁을 먹기 전에 산 페드로 성당을 구경하러 갔다.

 

 산 페드로 성당(Iglesia de San Pedro)15세기에 만들어진 고딕 양식 성당으로 아름다운 현관과 봉헌화, 패널화 등이 있다. 성당 안엔 패널에 스페인 플랑드르 양식으로 그린 종교화 29점이 소장된 작은 미술관이 있다.

 

산 페드로 성당 안내 - 내부와 미술관의 설명이 잘 되어 있다.

 

 성당 앞에 있는 안내문의 설명을 간단히 요약하면 '15세기의 르네상스식 출입구를 가지고 있으며, 주요 제단은 1636년 프란시스코 토레도가 디자인하였고 호세 인판테와 니콜라스 델 베가가 제작하였다.내부의 미술관에는 플랑드르 양식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동정녀와 그리스도의 삶의 장면들이며 구약성서의 일부 에피소드다. 이 그림들은 페르난도 살레고의 제자가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이다.

 

성당의 입구

 

 성당에 들어가 제단을 보고 주변을 보니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일반적인 파이프 오르간과는 다른 모습의 이층에 있는 파이프 오르간이다. 그 오르간을 자세히 보려고 이층으로 올라가려고 하니 올라가지 못하게 줄을 쳐 놓았다. 어쩔 수없이 성당 안에 있는 작은 미술관으로 들어가니 상상 이상의 화려한 여러 장식품과 종교적인 의미를 가진 그림들이 시선을 끌었다.

 

2층의 파이프 오르간의 모습

 

미술관의 여러 소장품

 

미술관을 나와 성당 내부를 구경하면서 사진을 찍고 나가려니 아쉬운 마음이 너무 들었다. 그래서 다시 미술관 앞에서 관람객에게 미술관 입장을 안내하는 여인에게 오르간을 좀 보고 사진을 찍을 수 있게 해 달라고 손짓을 하며 짧은 의사소통을 하였다. 처음에는 안 된다고 하다가 내가 여러 번 이야기하자 그 여자 분이 올라가도록 허락을 하면서 차단해 놓은 끈을 풀어주었다. 감사한 마음으로 올라가서 보는 파이프 오르간은 너무 특이했다. 그리고 2층에서 보는 성당의 전경은 또 다른 모습이었다. 정성이 통하면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다는 경험을 한 결과여서 뿌듯한 생각이 들었다.

 

성당 내부의 모습

 

2층의 파이프 오르간과 그 주변의 모습

 

 아무도 올라가지 못한 2층을 올라가 파이프 오르간을 구경하고 만족하면서 성당을 나오니 일행들이 저녁을 먹으러 가지고 한다. 오늘의 저녁은 이 프로미스타에서 맛있다고 소문이 자자한 폭립을 먹기로 하고 그 식당이 문을 열기를 기다린 것이다. 크지 않은 식당은 문을 열자마자 곧 손님으로 가득 찼다. 미리 예약을 하였기에 주문을 하고 기다리니 맛있어 보이는 음식을 가져온다. 그런데 그 고기의 양이 아주 풍부하였다. 그래서 내가 다 먹지 않고 옆 사람에게 고기를 나누어 주었다. 여러 사람이 요란스럽게 떠들면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제법 늦게 숙소로 돌아와 쉬었다.

 

식당

 

저녁식사인 폭립

 

 오늘은 길도 운하를 보면서 적당하게 걷고, 성당에서 특이한 파이프 오르간을 구경하고, 성당 미술관에서 여러 작품들을 보고 저녁에는 맛있는 음식도 먹은 즐거운 하루였다. 이 즐거움을 간직하고 내일을 위해 오늘을 마감한다.

 

스페인, 산티아고 까미노 길을 걷다. 15(05.31, 오르니요스 델 카미노 - 카스트로헤리스)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오늘의 걷기 길 : 오르니요스 델 카미노 - 산볼(5.6km) - 온타나스(4.9km) -  콘벤토 데 산 안톤(5.6km) - 카스트로헤리스(3.6km)

 

 오늘은 오르니요스 델 까미노를 출발하여 카스트로헤리스까지 20km도 안 되는 길을 가는 아주 짧은 여정이다. 오늘은 출발하기 전에 일행과 함께 가볍게 아침을 먹고 떠나기로 하여 아침을 먹고 나니 조금 늦었다. 하지만 오늘 걸을 거리가 짧기에 전혀 걱정을 하지 않는다.

 

산 로만 교구 성당(Iglesia Parroquial de San Roman)과 수탉 탑

 

 오늘의 여정은 고원의 오르막을 제외하면 어려운 구간은 없다. 그러나 끝없이 펼쳐지는 평원을 걷다보면 처음에는 아름다운 경치에 즐거워하다가 계속되는 단순한 풍경에 지겨움과 외로움을 느끼기도 할 것이다. 특히 이 길에서는 10km나 떨어진 온타나스 이외에는 순례자를 위한 카페나 바가 없으므로 출발 전 충분한 준비를 해야 한다.

 오늘 여정에서는 카스티야 메세타의 전형을 볼 수 있고, 특히 온타나스와 산 안톤의 허물어진 성벽을 지날 때면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떠난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일 것이다.

 

 오르니요스 델 까미노를 출발하여 오르막길을 오르면 메세타고원이 나타난다. 좌우로 펼쳐지는 들판을 따라 약 한 시간 반 정도 길을 오르면 고원지대가 나타난다. 이곳에서 사람들이 살지 않는 아로요(Arroyo; 시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수수께끼의 마을인 아로요 마을 어귀의 십자가상이 보인다.  옛날 이 마을에 살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마을을 떠났다고 한다. 전염병 때문이라는 설도 있고, 주민 대부분이 유대인이었던 곳이라서 유대인 추방 이후 남은 주민이 없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나 1503년 아요로 산볼은 주민들에 의해 마을이 버려졌다고 전해지는데 기록상으로는 1352년 나환자를 위한 병원이 이곳에 존재했었다고 알려져 있다.

 

 

고원지대로 올라가는 오르막

 



좌우로 끝없이 펼쳐지는 밀밭

 

십자가

 

오르가 파수에르가 지역 성당터 표시

 

벌판에 활짝 핀 관상용 양귀비

 

외따로 떨어져 있는 알베르게

 

카스트로헤리스의 알베르게 선전

 

양귀비와 들꽃

 

 바위 위로 나있는 길을 지나 한 시간 정도 걸으면 언덕의 정상에 다다르게 되고 멀리 온타나스가 보인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메세타의 평원을 즐기면서 언덕을 내려와 마을로 들어서면,  밀밭에 둘러싸인 중세풍의 아름다운 마을 온타나스 입구에 시원하고 깨끗한 샘물이 있고, 또 주위에 소박한 바와 관광객을 위한 안내소가 보이며 이 길은 마을의 끝으로 이어진다. 마을에는 샘이 도처에 많은데, 마을의 이름 온타나스(Hontanas; )가 여기에서 유래했다. 온타나스의 석회암으로 지은 건물과 벽돌을 넣어 지은 목재 건물 사이로 까미노 길이 이어진다.

 

온타나스 표시

 

온타나스 마을 전경

 

온타나스 마을 소개

 

 온타나스 마을 입구에 돌로 만들어진 아주 조그마한 암자가 있다. 처음에는 설명이 없어 무엇인지를 몰랐으나 그 돌집 안에 있는 성녀상은 아주 자애롭다. 나와서 주변을 보니 이 암자와 샘에 대한 설명 판이 있다. 성 브리기다의 암자와 샘으로 이 외딴 곳에 암자와 샘이 있으니 아마 예전에는 제법 큰 곳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성 브리기다의 암자와 성 브리기다 상

 

온타나스 마을

 

성 브리기다의 암자와 샘 표시

 

산타 브리지다 알베르게 선전판

 

 온타나스에 도착하여 카페에서 커피를 한잔 마시면서 잠시 쉬고 마을의 대표적인 성당인 콘셉시온 성모 성당(Iglesia de Nuestra Senora Concepcion)으로 갔다. 성당은 신고전주의 양식이며 바로크 양식의 봉헌화가 아름답다. 이 성당은 특이하게 십자가상 위에 많은 사람들의 초상이 그려져 있고 기도초를 밝히게 마련해 놓았다. 국가와 종교, 성별을 가리지 않고 인간을 위해 사랑을 실천한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 중 대표적으로 알 수 있는 얼굴은 마더 테레사였다.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이들의 초상을 그려 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한 이들에 대한 공경일까? 더 낮은 곳으로 임하는 예수님을 보여주는 것일까? 여러 생각을 하지만 생각은 각자의 자유다.

 

 그들 앞에 기도초를 밝히고 잠시 묵상을 하였다. 이제는 성당에 들어가면 기도초를 밝히는 일이 습관이 되었다. 내가 이 길을 떠나기 전에 스스로 다짐하기를 종교적인 의미는 배제하고,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거기에서서만 미사에 참여하리라 생각했는데 나도 모르게 이 길을 걸으면서 그 다짐은 벌써 무색해졌다.

 

콘셉시온 성모 성당(Iglesia de Nuestra Senora Concepcion)

 

 

 

 

 또 특이하게 이 성당에는 많은 나라의 언어로 번역된 성경이 비치되어 있었다. 물론 우리나라의 한글 성경도 보인다. 아마 이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작은 배려라고 생각되어 고맙게 느껴졌다.

 

여러 국가의 성경

 

 

 

 온타나스에서 카스트로헤리스까지 약 10km의 구간에서 도보 순례자는 도로를 넘어 도로와 나란히 지나가는 완만한 언덕길을 택하는 것이 좋다. 한적한 좁은 길을 따라 까미노를 걷다 보면 산 비센테 수도원의 폐허를 만날 수 있다. 여기에서 3~4km 정도 지나다 보면 14세기의 아름다운 산 안톤 수도원을 만날 수 있다.

 

 온타나스 마을을 떠나 카스트로헤리스로 향하는 언덕 기슭 까미노의 오른쪽으로 비석 같은 것이 보인다. 호기심에 그 위로 올라가니 비석이 아니라 건물의 흔적이다. 모든 건물이 다 사라지고 기둥 하나만 남아 있는 이곳은 산 비센테 성당(Ermita de San Vicente)으로 현재는 모퉁이의 벽체만 남은 유적을 만나볼 수 있다. 이런 폐허가 된 유적을 볼 때마다 세월의 무상함과 허무함을 느낀다.

 

산 비센테 성당(Ermita de San Vicente) 유적

 

 오늘의 목적지인 카스트로헤리스로 가는 길에 산 안톤 수도회의 오래된 병원과 수도원 건물의 폐허가 있는 산 안톤 수도원을 지난다. 지금은 13~14세기에 만들어진 이 건물들의 일부가 보존되어 있고, 수도원 건물과 성당 건물을 좌우로 연결하고 있는 아름다운 고딕양식의 아치가 돋보인다. 과거 이 아치는 수도원의 문 구실을 했으며 밤에 이곳에 도착하거나 문밖에서 밤을 지세는 순례자를 위해 아치의 왼쪽 선반에 음식을 놓아두었다고 한다. 산 안톤 수도원을 만든 성 안토니오파의 수도회는 1095년 프랑스에서 만들어졌으며 특히 이 수도회는 하느님과 우주에 관한 독창적인 믿음과 순례자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이 수도원은 과거 유럽의 대 재앙이었던 산 안톤의 불이라고 불렸던 피부병을 치료하고 돌봐준 곳으로 잘 알려져, 병을 치료하는 능력 덕택에 유럽 전체에 약 400개의 병원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산 안톤 병원은 안토니오회 수사들이 운영하면서 중세의 순례자들이 병으로 고생한 산 안톤의 불에 걸린 환자들을 치료하고 돌보는 곳이었다. ‘산 안톤의 불은 몸속에 불이 나는 것 같은 고통과 손발의 끝이 썩어 들어가는 병이라고 전해지는데, 산 안톤 수도회는 이 병자들을 극진히 돌보았고, 병에 걸리지 않은 순례자들에게도 따뜻한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하였다.

 현대에 산 안톤의 불은 라이보리에 기생하는 곰팡이 때문에 생긴다는 것이 밝혀졌다. 북유럽에서는 주식이 라이보리였기 때문에 이 병이 널리 퍼졌는데, 병자들은 이 길을 순례하면서 라이보리를 먹지 못해 자연스레 증상이 완화되어 산티아고에 도착할 즈음이면 완치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도 야고보와 안토니오회 수사들의 도움으로 산 안톤의 불이 낫는다고 믿게 되었다고 전한다.

 

14세기 산 안톤 수도원 유적

 

산 안톤 아치(Arco de San Antón)

 

순례자병원 표시

 

기부함

 

산 안톤 수도원의 여러 모습

 

 산 안톤 수도원에서 여러 곳을 돌아보고 쉬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도우는 것은 말은 쉽게 하지만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하물며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면서 타인을 도우는 것은 인간에 대한 박애정신이나 확고한 신념이 없으면 어려운 일이다. 이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

 

 

 

 산 안톤 수도원에서 카스트로헤리스에 이르는 길은 자동차 도로를 따라가야 한다. 길을 지나는 자동차들은 도보 순례자들에게 엄청나게 친절하다. 유럽의 길 문화는 우리나라와는 전혀 다른 사람 우선의 문화다. 자동차 전용도로나 고속도로가 아닌 길에서는 항상 자동차가 먼저가 아니라 사람이 먼저다. 그래서 사람이 보이면 자동차는 항상 멈추고 사람이 지나가게 한다. 심지어는 건널목에 붉은 불이 있어도 차는 멈추고 사람이 지나가게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꿈도 꾸지 못하는 일이다. 그렇게 길을 가다보면 멀리 지평선 끝에 언덕 위 카스트로헤리스의 성이 보인다. 카스트로헤리스로 마을에 들어가서 알베르게로 가기 위해서는 다소 가파른 언덕에 길쭉하게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의 거의 끝부분까지 이동해야 한다.

 

멀리 보이는 카스트로헤리스의 성

 

카스트로헤리스 표시

 

 메세타고원의 언덕에 자리 잡은 카스트로헤리스는 중세 성곽의 흔적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도시는 산티아고 길을 따라서 길게 뻗어있다. 성벽 안의 마을에는 오래된 유적과 수도원, 성당, 병원, 집들이 빽빽하게 자리 잡고 있고 마을은 순례자를 위한 편의 시설도 잘 갖춰져 있다.

 

 마을에 있는 산타 마리아 델 만사노 부속 성당(Colegiata de Santa Maria del Manzano)은 로마네스크에서 고딕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만들어진 건축물로 13세기의 현관, 15세기의 유리 세공품, 13세기의 돌로 만든 석공의 수호자로 일컫는 만사노의 채색 성모상 등이 남아 있다.

 

 만사노의 성모상은, 전설에 따르면 산티아고 성인이 백마를 타고 카스트로헤리스 성에서 나와 길을 가던 중, 사과나무 둥치의 구멍에서 성모상을 발견했다. 후에 이 성모상을 카스트로헤리스 입구의 만사노 부속 성당에 모셨다. 이 성모상은 알폰소 10세가 지은 산타 마리아의 노래’(Cantigas de Santa Maria)의 주인공이 되었고, 성모 마리아에게 바치는 만사노 부속 성당을 짓는 공사를 하던 중 여러 사고가 생겼는데 그때마다 성모가 나타나 이들을 구해주었다라고 한다.

 

산타 마리아 델 만사노 부속 성당(Colegiata de Santa Maria del Manzano)

 

 

 

 카스트로헤리스에 도착하니 너무 빨리 와서 알베르게가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그래서 마을을 좀 돌아보고 알베르게로 가니 이곳에 한국인 주인이 있어 한국식 음식을 제공하고 있다. 음식을 크게 가리는 편이 아니라서 현지 음식도 잘 먹었지만 오랜만에 우리 입맛을 돋우는 라면과 김밥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바로 마을 위의 언덕에 있는 성으로 올라갔다. 성으로 올라가는 도로로 가지 않고 옆의 산길로 올라가니 상당히 가파른 길이었다.

 

카스트로헤리스의 역사적 유산에 관한 기록 표시

 

 이 성에 대한 기록을 아무리 찾아도 없다. 그래서 성에 있는 설명판을 참조하여 재구성해 본다.

 

 이 성은 9세기나 10세기 경에 고대 로마의 탑을 토대로 건설되었으며 중세시대에는 권력의 중심지가 되어 당시 수많은 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전한다. 13세기부터 여러 세기에 걸쳐 성벽이 강화되었고 카톨릭의 군주들과 함께 찬란한 시대를 보냈다.16세기부터 쇠퇴하기 시작하였으며 1755년 리스본 지진으로 인해 피해를 입고 결국은 버려졌다. 지금 탑과 성문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다고 한다.

 

 성에 올라가 여러 곳을 구경하면서 성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서 보는 카스트로헤리스의 광활한 사방의 풍경은 왜 여기에 성이 있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사위가 탁 트인 곳에서 바라보는 시야는 일망무제와 같다. 이러니 이곳에서는 사방에서 오는 적을 빨리 볼 수 있고 준비도 쉽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성의 구조에 대한 설명

 

성의 탑에 대한 설명

 

성 위에서 보는 사방의 풍경

 

성의 전경

 

성의 복원도 및 공격과 방어에 대한 설명

 

성에 대한 설명

 

 

성에서 도로를 따라 마을로 내려오면서 마을의 여러 곳을 구경하였다.

 

 

 

 성을 내려오면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산토 도밍고 교구 성당(Iglesia Parroquial de Santo Domingo)에서는 13세기부터의 세공품과 회화, 조각 작품 그리고 16세기의 아름다운 태피스트리를 감상할 수 있다.

 

산토 도밍고 교구 성당(Iglesia Parroquial de Santo Domingo)

 

 조금 옆에  1990년 스페인 문화 자산으로 선정된 산 후안 성당(Iglesia de San Juan)13세기의 고딕 양식 건물로 회랑은 15세기 양식을 띄고 있다. 부벽을 두 겹으로 세운 독특한 건축법은 성당보다는 성처럼 보이기도 한다.

 

산 후안 성당 설명

 

산 후안 성당(Iglesia de San Juan)

 

카스트로헤리스의 까미노 산티아고 표시

 

 

 

 성을 올라갔다가 와서 땀으로 젖은 몸을 씻고 휴식을 한다. 그러다가 저녁을 먹으러 가니 우리가 머문 알베르게에 들어온 사람이 아닌 사람이 아닌 다른 알베르게의 한국인도 상당히 눈에 띈다. 아마도 오랜 길에서 한국의 음식이 그리웠는가 보였다 .미리 주문한 한국식 비빔밥으로 먹고 가볍게 사람들과 모여서 맥주를 한잔하면서 담소를 나눈다.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웃으면서 순례가 아니라 술례를 하는 것 같다고 농담을 하지만 나는 답을 해 준다. 이 길에서 위로는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주()님에 계시고 아래에는 실제로 피곤한 우리를 기쁘게 하는 주()님이 계시니, 길을 걸을 때는 위의 주님을 경배하고 길을 걷기를 마치고 휴식을 할 때는 아래의 주님을 즐긴다고 궤변을 늘어 놓는다.

 

 

 오늘도 하루를 무사히 이 길을 걸은 모든 사람들에게 축하와 존경을 보내며 하루를 마친다.

스페인, 산티아고 까미노 길을 걷다. 14(05.30, 부르고스 - 오르니요스 델 카미노 )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오늘의 걷기 길 : 부르고스 - 타르다호스(10.8km) - 라베 데 라스 칼사다스(1.8km) - 오르니요스 델 카미노(8.0km)

 

 오늘은 부르고스에서 오르니요스 델 까미노까지 가는 22km가 안될 정도로 짧은 거리다. 부르고스에서 라베 데 라스 칼사다스까지는 아르란손 강의 계곡을 따라 부드러운 산책길이 이어지며 그 뒤로 오르니요스 델 까미노까지는 고원지대와 밀밭이 계속되는 전형적인 메세타고원 풍경이 이어진다.

 

 우리나라 한반도보다 더 넓은 메세타고원은 여름에는 사막과 같은 열기와 건조함을, 겨울에는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시베리아 동토의 차가움을 준다고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메세타고원은 순례자에게 진정한 순례의 기쁨을 느끼게 해주는 곳이다. 메세타고원은 순례자의 육체적 정신적 의지를 끊임없이 시험한다. 이러한 유혹을 뿌리치고 몸과 마음이 순례길과 하나가 되는 순간 주위의 풍경이 새롭게 다가온다. 메세타고원을 걸은 순례자는 어김없이 이 길이 주는 고독과 침묵, 평화와 여유의 기쁨에 대해서 말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순례를 원한다면 메세타고원을 두 발로 걸을 것을 권한다. 다행히 내가 걸은 5월 말과 6월 초는 너무 좋은 날씨가 계속되어 즐거운 마음으로 여유롭게 펼쳐지는 고원의 평원과 너무 맑은 하늘을 즐겼다. 이것도 축복이었다. 

 

아침 햇살을 받은 부르고스 대성당

 

 대성당을 옆에 두고 전망대 올라가는 길로 가서 왼쪽으로 까미노 길을 따라가 페르난 곤잘레스 문을 지나서 추모탑을 지나면 스페인에서 가장 중요하고 유명한 엘 시드의 집이 나온다. 엘 시드의 집(Solar del Cid)18세기에 만들어진 건축물로, 엘 시드라고 불린 로드리고 디아스의 집이 있었던 곳에 만들어졌다. 엘시드의 집을 지나면 이제 부르고스를 떠나는 문인  산 마르틴 아치(Arco de San Martin)를 지나간다. 이 문은 14~15세기에 걸쳐 건설된 도시를 둘러싸는 성벽의 일부였으며 왕족이 도시로 들어가기 위한 통로였다. 무데하르 양식의 이 문을 통해 순례자들은 아름다운 부르고스와 작별한다.

 

페르난 곤잘레스 문

 

엘 시드의 집

 

산 마르틴 아치

 

 산 마르틴 아치를 통과하면 여기서부터 비얄비야 데 부르고스까지는 아르란손 강의 비옥한 농지와 버드나무 숲을 걷는 기분 좋은 길이나 까미노는 비얄비야 데 부르고스를 통과하지는 않는다. 마을을 들어가기 전 철길을 건너면 이어지는 까미노는 현대적인 보행자 육교에 도착한다. 이 육교는 고속도로가 이어지는 복잡한 분기점을 넘어갈 수 있게 해 준다. 순례자는 아르소비스포 다리(Puente del Arzobispo)를 통해서 아를란손 강을 건넌 후 왼쪽으로 길을 따라가면 타르다호스 마을에 다다른다.

 

아일랜드 워크 설명판

 

산티아고 이정표

 

남은 까미노 길 501km 표시

 

데블리굴라 유적지 설명

 

타르다호스 입구 표시

 

타르다호스의 위치 표시

 

 부르고스에서 아침도 먹지 않고 약 11km를 걸어왔기에 시장기도 돌고 휴식도 취하기 위해 카페에 들러서 간단하게 커피와 빵으로 아침을 먹는다. 까미노 길은 항상 일찍 떠나기에 제대로 아침을 먹고 가는 날이 없어 처음 만나는 마을에서 커피와 빵으로 간단히 식사를 해결한다. 카페를 떠나 거리를 걸으면 만나는 카르다호스의 산타 마리아 성당(Iglesia de Santa Maria)13세기 고딕 양식 건축으로 바로크 양식의 조각품과 유물 컬렉션이 아름답다.

 

산타 마리아 성당

 

 타르다호스에서 다음 마을인 라베 데 라스 칼사다스까지는 2km가 채 안 되는 거리로 길은 매우 평탄하며 샛길이 없기 때문에 길을 잃을 염려도 없다.

 

 마을을 빠져 나와 우르벨 강(Rio Urbel)을 건너면 아를란손 평야에 위치한 아름다우면서 중세의 분위기를 풍기는 작은 마을 라베 데 라스 칼사다스에 도착한다. 이 도시가 언제 지어졌는지에 관하여서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라베(Rabe)라는 마을 이름의 유래는 이곳에 유대인 마을이 있었기 때문에 랍비(Rabi; 유대교 스승)라는 단어에서 나왔다는 이야기도 있고 축구 포지션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리베로(Ribero; )라는 단어에서 나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오래된 집 사이의 도로를 따라가면 샘터가 있는 광장이 있다. 13세기에 만들어져서 여러 번 개축되었으나 아직까지 고딕 양식 현관 등이 남아있는 산타 마리나 교구 성당(Iglesia Parroquia de Santa Marina)을 왼쪽으로 가면 공동묘지와 함께 모나스테리오 성모상을 보존하고 있는 모나스테리오 성모 성당(Ermita de Nuestra Senora Monasterio)이 나타난다. 이 길가의 조그마한 성당은 순례자에게는 아주 중요한 곳이다. 이 성당에 들어가면 수녀님이 모든 순례자의 안전을 위해서 강복을 해 주며 기념 목걸이를 걸어준다. 수녀님이 하루 종일 계시는 것이 아니기에 수녀님이 계시지 않을 때는 다른 종사자들이 목걸이를 걸어준다. 수녀님을 만나든지 다른 종사자를 만나는 것은 자신의 그날 행운이다. 물론 너무 빨리 지나가거나 너무 늦은 시간에 지나가면 아무도 없을 수가 있다.

 

 라베 데 라스 칼사다스  마을 표시

 

멀리 보이는 모나스테리오 성모 성당

 

샘터가 있는 광장

 

거리의 벽화(오른쪽 아래 글은 시편과 요한계시록이다.

 

모나스테리오 성모 성당

 

 성당에 들어가 기도초를 밝히고 잠시 기도를 하고 나오면서 기념목걸이를 받았다. 하지만 이 목걸이는 소중하게 간직한다고 크렌디시얼을 넣는 비닐 봉투안에 넣어 두었는데 크렌디시얼을 꺼내다가 어디에서 분실했는지도 모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잃어버렸다. 잠시는 아까운 마음이 들었으나 곧 내 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길을 걸으면서 내 것이 아닌 것에 대한 욕심을 버리는 것도 큰 얻음이었다.

 

 

 

 이곳에서 고원지대를 오르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이 좋다. 이제부터 메세타고원이 시작되는 것이다. 오르니요스 델 까미노의 분지로 내려가기 전까지는 오르막이 계속되고, 고원지대를 올라가면 오늘의 여정은 거의 끝난다. 내리막을 천천히 내려가서 오래된 십자가상이 있는 도로의 교차로를 건너면 평원에 자리 잡은 오르니요스 델 까미노 마을이 보인다.

 

 지명이 스페인어로 탁자란 뜻의 메세타 고원(스페인어: Meseta Central, Meseta)은 이베리아반도(스페인) 한가운데 있는 고원으로서  물론 높은 곳도 있지만 610~760m의 평균 고도를 유지한다.

 전체의 크기가 한반도보다 더 크며 스페인 약 4분의 3을 차지하는 테이블 모양의 내륙 대지(臺地)로 북쪽에 칸타브리아 산맥, 남쪽에 시에라모레나 산맥이 있다. 중심 도시는 마드리드이며 대륙성 기후의 건조지대로 인구밀도가 낮다. 전체가 서쪽으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서쪽으로는 완만하고 다수의 수원지가 위치해 강으로 흘러들어가 포르투갈과 국경을 이룬다. 메세타의 주변은 낙차(落差)가 커서 항행이 불가능하거나 매우 어려운 곳이 많아 이베리아의 개발을 지연시킨 큰 원인이 되었다. 메세타의 중앙에 있는 과다라마산맥은 카스티야를 남북으로 양분한다. 여름과 겨울의 기온차가 큰 대륙성 기후로 연강수량 적아서 반 건조지가 많아 전체가 건조한 목축지대라 할 수 있다.

 

고원을 올라가는 순례자들

 

고원지대의 여러 풍경

 

십자가

 

멀리 고원에서 보는 오르니요스 델 까미노 마을

 

나뭇 가지에 메달린 신발

 

마을 입구의 표시

 

 오르마수엘라 평원에 위치한 오르니요스 델 까미노의 오래된 전설에 따르면 샤를마뉴가 이곳 강변에서 오르노(Horno; 화덕)를 발견하고 군대가 먹을 빵을 구우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의 이름이 화덕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지는데, 이 이야기는 프랑스의 민요에서도 있다고 한다. 9세기 이 마을에는 카스티야 지방을 방어하기 위한 요새형 탑이 만들어졌고, 이 마을을 포르니에요스(Forniellos)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도자기 공장에 있는 작은 화덕을 의미한다.

 

 

 

 마을의 중앙에 있는 산 로만 교구 성당(Iglesia Parroquial de San Roman)16세기에 만들어진 고딕 양식 성당으로 성당 앞에 있는 수탉 조각의 탑이 이채롭다.

 

산 로만 교구 성당(Iglesia Parroquial de San Roman)

 

성당 앞에 있는 수탉 조각의 탑

 

마을의 공동묘지

 

 마을에 들어가니 아직은 이른 시간이다. 그래서 숙소인 알베르게를 찾아가기 전에 점심을 해결하고 숙소에 가서 몸을 씻고, 가볍게 빨래를 하고 난 뒤에 마을의 슈퍼에 둘러서 내일 먹을 여러 가지를 장만했다. 거의 매일 비슷하게 여러 과일과 요구르트, 빵 등을 구입하고 알베르게에 돌아와서 저녁때까지 쉬었다.

 

 저녁이 되자 우리 일행 4명과 또 좀 더 나이가 적은 젊은이와 나와 비슷한 연배의 일행이 함께 모여 닭과 소고기를 안주로 와인과 맥주를 마시며 즐겼다. 이 길을 걸으면서 거의 매일을 함께 길을 걷는 사람들과 가볍게 와인과 맥주로 하루의 피로를 푼다. 물론 많이 마시면 다음 날의 길에 지장이 있으므로 적당하게 조절을 한다.

 이 길을 걸으며 이렇게 평소에 알지도 못한 다방면의 여러 사람들을 만나서 함께 길을 걷고 함께 음식을 먹고 함께 잠을 잔다. 그리고 각자가 가진 여러 생각을 이야기 한다. 이것이 까미노가 우리에게 주는 즐거움이다.

 

스페인, 산티아고 까미노 길을 걷다. 13(05.29, 아헤스 - 부르고스)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오늘의 걷기 길 : 아헤스 - 아타푸에르카(2.5km) - 카르데 뉴엘라 리오피코(6.2km) - 오르바네하 리오피코(2km) - 비야 프리아(3.6km) - 부르고스(7.9km)

 

 오늘은 아헤스에서 출발하여 부르고스까지 가는 약 22km의 비교적 짧은 길이다. 일찍 San Anton Abad 알베르게서 일어나 옆에 있는 거실 같은 곳을 가니 아침 해가 떠오르는 경치가 장관이다. 이곳은 호텔을 겸하고 있기에 쉬는 공간도 아주 넓게 자리 잡고 소파도 갖추어져 있었다. 그리고 휴게실을 기품이 있으며 아름답고 여유롭게 꾸며 놓았다.

 

 San Anton Abad 알베르게 창밖으로 보는 일출의 모습

 

 San Anton Abad 알베르게에서  아헤스의 알베르게에서 보내준 차를 타고 아헤스에 도착하니 다른 날에 비해서는 상당히 늦은 시간이다. 하지만 오늘의 길은 그렇게 어려운 길이 아니기에 길을 떠났다. 길을 떠나면서 옆을 보니 텐트가 보인다. 어제 우리가 아헤스에 도착했을 때 개를 데리고 다니는 술에 취한 나그네가 있었는데 그가 개와 함께 텐트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아마 순례자인 것 같았는데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그 사람의 행동도 모두 자신의 인생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했다.

 

아헤스의 거리

 

 아헤스에서 아타푸에르카에 이르는 길은 산 후안 데 오르테가의 노력으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 사이에 펼쳐지는 평원은 중세 나바라의 왕 가르시아 엘 데 나헤라의 군대와 그의 형제 페르난도 데 카스티야의 군대가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이 전투에서 가르시아 왕이 사망하고 나바라의 군대는 패배하여 결국 이베리아 반도에서 나바라 왕국의 왕위 다툼이 끝났다.

 전설에 따르면 살아남은 왕의 부하들이 죽은 왕의 내장을 아헤스 성당의 입구 반석 밑에 묻었다고 한다.

 

아타푸에르카로 가는 길 표시

 

아타푸에르카로 가는 길의 평원

 

 아타푸에르카로 가는 길에 갑자기 돌들이 원형으로 늘어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고대 원시인의 형상이 그려진 아타푸에르카의 간판이 보인다. 이제 순례자는 유럽 대륙에서 제일 오래되었다는 인류의 고향 아타푸에르카(Atapuerca)에 도착한다. 마을 입구에는 마을에서 약 3km 정도 떨어져있는 최초의 인류인 안테세소르의 유적으로 가는 샛길이 있다. 이 유적의 발견은 유사이전 인류의 동굴생활과 매장관습 등 고고학적으로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궁금점이 생기고 호기심도 있었지만 내가 가야 하는 길과는 멀리 떨어져 있어 가 보지는 못했다. 그래서 자료로만 소개한다.

 

 부르고스주에 있는 자치시인 아타푸에르카(Atapuerca)는 전혀 20세기 최고의 고고학적 유적이 발견된 곳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작고 볼품없는 마을이지만, 지금까지 발견된 증거로 볼 때 언덕의 복잡한 동굴들은 약 100만 년 전부터 다양한 현생 인류의 주거지로 사용되었음이 확실하다. 80만 년 전에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인류의 유골 잔해가 발견된 그란돌리나와 시마 데 로스후에소스 유적에서는 아프리카에서 서유럽으로 이주한 초기 현생 인류의 신체적 특성과 풍습에 대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1977년에 이 새로운 종족을 '호모 안테세소르(Homo Antecessor)'라는 신종 인류로 명명하였는데 이는 라틴어로 '탐험가'라는 뜻이다. 호모 안테세소르는 네안데르탈인과 더불어 현생인류의 마지막 공동 조상으로 추정된다. 근처에 있는 시마 데 로스후에소스는 '뼈 구덩이'라는 뜻인데 수천 명에 달하는 유골이 발견되어 세계에서 연구 대상이 가장 풍부한 고고학적 유적지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아타푸에르카 고고 유적(Archaeological Site of Atapuerca)은 스페인의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2000년에 등재되었다.

 

 아타푸에르카 고고 유적(Archaeological Site of Atapuerca) 표시

 

 아타푸에르카(Atapuerca) 마을 주변의 여러 가지설명판

 

 유적지를 안내하는 표지를 지나 약간의 언덕을 따라 올라가니 아타푸에르카(Atapuerca) 마을이 나온다. 마을의 카페에서 시간이 제법 지난 아침이지만 커피와 빵으로 간단히 요기를 하고 다시 길을 떠난다.

 

 아타푸에르카 마을 출구에서 왼쪽으로 나있는 오르막길은 숲길로 이어지는데 철조망과 평행하게 까미노가 이어져 있다. 철조망 안에는 여러 종류의 목장이 보인다. 아마 목장과 까미노 길을 구별하기 위해서 철조망을 둘러친 것 같다. 떡갈나무 숲으로 이루어진 완만한 언덕을 올라 정상에 오르면 눈앞에 펼쳐져 있는 광활한 평원이 내려다보인다. 저 멀리 아스라이 보이는 부르고스 대성당의 높다란 탑을 바라보며 돌과 나무로 만들어진 높다란 십자가상을 지나면 비얄발에 도착한다. 조그만 마을 비얄발과 다음 마을인 카르데뉴엘라 리오 피코는 거의 붙어있다. 2km 정도 떨어져있지 않은 조그마한 마을 카르데뉴엘라 리오 피코와 오르바네하 리오피코를 지나간다.

 

 카르데뉴엘라 리오피코(Cardeñuela Riopico)는 부르고스 지방의 피코강 계곡에 있는 소규모 마을로 아타푸에르카 산의 남쪽에 위치하는 해발고도가 933m에 이르는 산간마을로 카르데뉴엘라 리오피코 마을과 비얄발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이 지역은 선사시대부터 인류가 살던 곳으로 석기와 동굴 벽화가 발견됐다. 오르바네하 리오피코(Orbaneja Riopico)는 부르고스주에 있는 산티아고로 가는 순례길이 지나는 피코 강변에 위치한 조용한 마을이다.

 

 

철조망 안에 보이는 목장

 

언덕 정상부의 십자가

 

비얄발 표지

 

카르델뉴엘라 리오피코 안내도

 

길가의 푸드 트럭

 

카르델뉴엘라 리오피코 마을

 

카르델뉴엘라 리오피코 마을 안내도

 

지나는 길에 보는 고목

 

 

 오르바네하 리오 피코의 출구에서는 자동차 전용도로를 따라 다리를 건너 오른쪽으로 향하면 고속도로와 평행하게 지나는 비야프리아를 지나는 까미노 길을 만나게 된다.

 비야프리야를 지나는 까미노는 약 10km에 걸쳐 공장지대의 어수선함과 고속도로가 주는 소음이 기다리고 있다. 원래의 루트보다는 약 1km가 짧지만 까미노가 주는 기쁨을 누리기에는 부족함이 많다. 대도시 부르고스의 입구에 도착한 순례자는 대성당까지 도착하기 위해서는 도시의 반대편까지 신시가지의 중심부를 통과하여야 하며 거리는 약 4km가 넘는다.

 

 

 부르고스(스페인어: Burgos)는 스페인 중북부의 도시로 카스티야 레온 지방 부르고스 주의 주도로 산티아고 순례길 루트 중에 있는 주요 도시 중 하나이다. 고대부터 켈트족의 취락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9세기 말 아스투리아스 왕국에 의해 요새 도시가 건설되었다. 해발 850m 정도의 언덕에 위치하고 있으며, 1035년부터 1560년까지 카스티야 왕국의 머리'라고 불렸던(Cabeza de Castilla) 중심지 중 하나인 유서 깊은 도시로 중세시대에 지은 교회와 성당, 수도원 등 역사 유적이 즐비하다. 11세기경 무어인을 상대로 활약한 전설적 영웅 시드 캄페아도르(엘시드)의 출생·활약지로서 스페인 사람들이 자랑으로 삼고 있다.

 스페인 내전 당시 국민파의 수도였으며, 1936년부터 1939년까지 스페인 군사 정부의 임시 수도였다. 엘 시드의 탄생지로 유명하고, 부르고스 대성당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고 그 외에 인류 진화 박물관이 있다. 부르고스를 대표하는 산타 마리아 대성당과 같은 아름다운 성당 건축물과 오래된 거리는 순례자들에게 중세의 장엄함을 아낌없이 나눠준다.

 현지 특산물로 모르씨야(morcilla)라 하는 순대는 생긴 거나 맛이 한국 순대와 거의 똑같아서 한국의 여행자들에게 아주 좋은 선물이다. 순댓국도 있으니 메뉴나 식당 점원에게 morcilla con caldo(모르씨야 꼰 깔도, 국물을 넣은 순대)라 물으면 된다.

 

 부르고스 시내로 들어가면 신시가지가 나온다. 알베르게가 집중되어 있는 곳은 구시가지인 대성당 주변이다. 도시가 아주 크지만 길을 잃을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 거리에 붙어있는 까미노 표시만 잘 보고 가면 시내를 벗어나 대성당 앞으로 인도한다. 도시의 아름다운 모습을 즐기며 신시가지를 걸어가면 여러 동상들을 본다. 부르고스와 연관이 있는 인물들이다. 

 

순례자상

 

'인간의 진화' 박물관 표시

 

부르고스 시내

 

로드리드 리아스 백작(엘 시드) 상

 

도나 히메냐 - 엘 시드의 아내상

 

 신시가지 시내를 지나 대성당 가까이에 가니 공원이 있다. 공원에 앉아 휴식을 좀 하고 대성당으로 가기로 했다. 아무래도 대성당에 가면 구경을 하느라 쉬지를 못할 것 같았다.

 

멀리 보이는 대성당의 탑

 

대성당 주변의 공원

 

카를로스 3세 상

 

 

 

 부르고스의 구 시가지에는 흥미로운 유적들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대성당을 중심으로 수많은 광장이 조성되어 있고 그 광장마다 부르고스의 많은 유명한 건축물들이 있다. 그 중에서 대성당 조금 위의 산 후안 단지는 16세기에 만들어진 산 후안 문, 15세기 건축물인 산 후안 수도원, 부르고스의 수호성인이 산 레스메스의 무덤이 있는 산 레스메스 성당 그리고 15세기에 만들어진 산 후안 병원이 모여 있는 구역이다. 순례자 사이에서 많이 알려져 있는 산 후안 단지의 문은 오래된 성벽을 따라서 줄지어 있다. 그 외에도 16세기에 까를로스 5세를 기려 만들어진 산타 마리아 아치, 돌과 벽돌이 조화를 이룬 건축물로 무데하르 양식의 영향이 두드러진 산 에스테반 문, 부르고스를 떠날 때 만나게 되는 두 개의 탑인 산 마르틴의 문 등등이 있다.

 

 수많은 광장 중에서 .이제 대성당이 있는 산타 마리아 광장으로 들어선다. 광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대성당을 구경을 하고 있다.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고딕 양식의 대성당은 외양만 볼 것이 아니라 꼭 내부도 둘러보아야 한다. 성당을 처음 본 느낌은 무어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외양만 보아도 너무 화려한 모양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사실 이 주변만 둘러보려고 해도 하루 이상을 부르고스에 머물러야 하는데 이 길을 걷는 나그네는 그럴 여유가 없다. 그래서 대성당을 중심으로 구경을 한다.

 

 부르고스 대성당(Burgos Cathedral)이라고 흔히 말하는 산타 마리아 대성당 (Catedral de Santa Maria)은 스페인에서 성당 건물 하나가 1984년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만큼 역사성, 예술성이 높은 건물이다. 레온 대성당과 카스티야를 대표하는 고딕 대성당으로서 경쟁하는 사이로 프랑스의 고딕 양식이 스페인에 융합된 훌륭한 예를 보여주는 건축물이다.

 이 성당은 이름에서 보듯이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하기 위하여 건축된 것으로, 1221년 마우리시오(Mauricio) 주교가 주도하여 공사를 시작하였다. 1293년 가장 중요한 첫 단계 공사가 완성된 후 중단되었다가 15세기 중반에 재개되어 1567년에 완공되었다. 뛰어난 건축 구조와 성화(聖畵), 성가대석, 제단 장식벽, 스테인드글라스 등의 예술 작품과 독특한 소장품 등 고딕 예술의 역사가 집약된 건축물로서 이후의 건축 및 조형 예술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대성당의 건축물에 대한 설명과 내부의 여러 성화나 예술품, 구조 등을 설명하기에는 우리가 가진 지식이 너무 적다. 그래서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으니 백과사전을 참조하는 것이 좋다.

 

 이 성당은 11세기 레콩키스타(Reconquista이슬람교도에게 점령당한 이베리아 반도 지역을 탈환하기 위한 기독교도의 국토회복운동)의 부르고스 출신의 영웅 로드리고 디아스 데 비바르(Rodrigo Díaz de Vivar)의 묘지로 유명하다. '엘시드(El Cid])'라는 별칭으로 더 잘 알려진 그의 유해는 1919년 아내인 도냐 히메나(Doña Jimena)의 유해와 함께 성당 중앙, 플라테레스크(Plateresque) 양식의 금속 세공으로 장식한 돔 아래에 안치되었다.

 

대성당 외부의 여러 아름다운 모습

 

 대성당 외부를 이곳저곳 다니면서 구경을 하고 내부로 들어가는 입장권을 구입하려니 순례자는 50%를 할인을 해 준다. 배낭에 매여 있는 조가비를 보고는 인정을 한다. 함께 간 일행은 바깥에서 나를 기다리고 혼자서 내부에 들어가니 장엄함과 황홀함에 눈을 둘 데가 없다. 대성당 내부만 돌아보려고 해도 한나절은 걸릴 것 같은 느낌이라 후일을 기약하고 대략 한 바퀴를 돌아보았다.

 

대성당의 내부

 

 이 길을 걸은 사람들 중에서 많은 사람이 레온이나 산티아고의 성당보다 이 부르고스의 성당이 더 아름답고 하는 이유를 조금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사람을 압도하는 여러 예술품을 보니 이것을 보지 못했다면 너무나 아쉬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당을 나와 광장을 지나 알베르게를 찾아가는 길에 산타 마리아 아치를 통과한다. 산타 마리아 아치(Arco de Santa Maria)는 황제 까를로스 5세를 기리며 16세기에 건설되었다. 성벽을 통해 부르고스로 들어가는 여러 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입구로, 현재는 부르고스 주의 수도인 이 도시에서 문화적으로 가장 중요한 곳으로 1943년 스페인 문화 자산으로 지정되었다.

 

산타 마리아 아치(Arco de Santa Maria)

 

부르고스를 흐르는 강

 

 대성당을 구경하고 알베르게를 찾아가 일행들과 오늘 저녁은 부르고스에 있는 한식당에 가기로 약속하고 잠시 쉬다가 식당문이 열리는 시간에 맞추어 식당으로 가니 한국 사람들이 많이 줄을 서고 있다. 소풍2라는 이름을 가진 한식당은 한국인이 운영하면서 한국에서 가져온 라면이나 소주, 그리고 여러 한국음식을 파는 곳이었다. 앞에서 말한 우리 일행 4명은 한 테이블에 앉아 비빔밥을 시키고 오랜만에 한국의 정취를 느껴 보려고 소주를 청하여 마셨다. 스페인에서는 주류 가운데는 와인이 가장 싸고 그리고 맥주도 싸기에 여태까지 주로 이 술을 마셨는데 오늘은 이곳에서는 아주 비싼 한국의 소주를 마신다.

 

소풍2 한식당

 

슈퍼 마켓 풍경

 

광장에 있는 병사 상

 

 저녁을 먹고 다시 대성당으로 가서. 대성당 뒤에 있는 부르고스를 일망무제로 볼 수 있는 전망대에 올라갔다. 전망대에서 보는 부르고스는 또 다른 풍경을 보여주었다. 우리가 대성당에 집착하여 대성당 주변을 보는 것은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한 것과 같았다. 전망대에서 보는 부르고스는 나무가 아니라 숲이었다. 넓게 펼쳐진 시내에는 여러 유적지의 건물들이 보이고 해가 지기 직전의 풍경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다리 밖에서 보는 대성당

 

산 에스테반 성당

 

전망대에서 보는 해질 무렵의 부르고스

 

 전망대에서 부르고스의 경치를 즐기다가 카페에 앉아 카페가 문을 닫을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 새 해가 지고 있었다. 전망대에서 내려오니 부르고스 대성당에 조명이 비치어 또 다른 경치를 자아낸다. 대성당의 밤경치가 좋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을 하였는데 의도하지 않게 대성당에 조명이 비치는 광경을 보게 되는 행운을 즐겼다.

 

조명을 밝힌 부르고스 대성당의 야경

 

밤의 부르고스 거리

 

 전망대에서 내려와 알베르게로 돌아오니 이번 까미노 길에서 가장 늦은 시간이었다. 보통 저녁 9시 이전에 잠자리에 드는 것이 보편적이었는데 오늘은 벌써 밤 11시가 되었다. 모두들 시간이 늦어 빨리 잠자리에 들고 내일을 기약한다.

 

스페인, 산티아고 까미노 길을 걷다. 12(05.28, 벨로라도 - 아헤스)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오늘의 긷기 길 : 벨로라도 - 토산토스(4.8km) - 비얌비스티야(1.9km) - 에스피노사 데 까미노(1.6km) - 비야프랑카 몬테스 데 오카(3.6km) - 산 후안 데 오르테가(12km) - 아헤스(3.6km)

 

 오늘은 아헤스까지 약 28km의 길로 길지도 짧지도 않은 거리이다. 이제는 익숙해진 시간을 맞추어 정해진 순서대로 기계와 같이 일어나고 움직여서 길을 떠나는 시간은 아침 6시 30분이다. 너무 일찍 떠나는 느낌도 있지만 알베르게에 머물던 순례자들은 거의 대부분이 벌써 떠나고 몇이 남아 있지 않다. 순례자를 위한 여러 서비스를 제공하는 마을 벨로라도를 떠나는 오늘의 여정은 거리는 길지 않지만 해발 고도를 400m 가까이 올라가야 한다. 하지만 어려운 길이 아니기에 평소와 같은 마음으로 길을 걸으면 된다.

 

 아쉬운 미련을 마음속에 가지고 벨로라도를 나와 토산토스를 거쳐 에스피노사 델 까미노까지의 길은 아주 완만한 구릉이 계속되는 평야지대로 지난 여정과 같이 고속도로와 나란히 도로의 오른쪽을 따라 이동한다.

 길을 걸어가면서 보는 그림자가 앞으로 길게 뻗어 이 길이 서쪽으로 쭉 이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나는 서쪽으로 계속해서 길을 가는 키다리 아저씨와 같은 모습이다.

 

 

 

알베르게 벽의 순례자 그림

 

길바닥의 표식(순례자를 격려하는 글인 듯하지만 의미를 모르겠다.)

 

벨로라도 거리

 

산티아고 까미노 길을 지나 - 부르고스 지방 안내 설명

 

벨로라도를 건너는 티룬 강의 다리

 

건물 벽에 그려진 뷰엔 까미노(Buen camino) 그림

 

키다리 아저씨의 그림자

 

 약 한 시간을 넘게 길을 따라 가서 오른쪽에 들어가면 나타나는 토산토스는 오카 산의 굽이치는 풍경 안에 자리 잡은 조그만 마을이다. 토산토스의 입구에서 정면에 보이는 거대한 돌산에는 몇 개의 동굴이 뚫려 있으며 가운데에 소박하고 단순한 모양의 라 뻬냐 성모의 바위 위 성당이 있다는데 올라가지 못했다. 토산토스에 도착하니 이른 아침인데도 문을 연 카페가 있어 들어가서 커피를 한잔 마시고 쉬다가 다시 길을 떠났다. 언제부터인가 아침에 길을 가면서 커피를 한잔 마시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마을 뒤로 이어지는 까미노 길을 따라 아름다운 밀밭 사이를 걷다 보면 어느새 밀밭 사이로 비얌비스티야 성당이 보이지만 그냥 지나 에스피노사 델 까미노로 향한다. 토산토스에서 비얌비스티야까지는 1.9km의 짧은 거리고 거기서 또 에스피노사 델 까미노까지는 1.6km의 짧은 거리다. 짧은 거리에 여러 마을이 계속해서 나오는 구간이다. 길을 가면서 보는 벌판과 하늘은 너무나 고요하고 맑아서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계속해서 보는 풍경이지만 볼 때마다 감탄을 하는 것은 우리가 너무 이런 풍경에 목말라 했던 것이 아닐까? 이런 풍경을 보고 즐기는 것만으로도 이 길을 걷는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티없이 맑게 파란 하늘

 

카페 선전 

 

비얌비스티야 입구

 

 밀밭 사이로 이어지는 까미노 길을 약 1km 걸으면 나오는 공원을 오른쪽으로 끼고 고속도로를 건너 가다보면 왼쪽에 에스피노사 델 까미노 마을이 보인다. 전원풍의 아름다운 목조건물들이 특색을 이루는 마을로 평화로운 모습이다. 별다른 특징이 없는 에스피노사 델 까미노 마을을 통과하여 비야프랑코 몬테스 델 오카로 가는 길은 평탄한 들판을 지나는 길이다. 스페인을 걸으며 엄청 보던 밀밭이 펼쳐지는 들판이다. 밀밭 사이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언덕을 올라가면 멀리 비야프랑카 몬테스 데 오카가 보인다. 내리막을 내려오면 산 펠리세스 수도원의 유적을 만나며 오카 강을 건너 마을에 도착한다.

 

리오질라 부르갈레사(오카계곡과 티란계곡 사이) 설명

 

계속 이어지는 밀밭길

 

쭉 뻗은 아스팔트길

 

비야프랑카 거리 표시

 

눈을 맑게 하는 탁 트인 벌판과 푸른 하늘

 

비야프랑카 몬데스 데 오카 안내도

 

 마을 입구의 안내도를 보며 마을로 들어선다. 비야프랑카 몬테스 데 오카는 맑고 푸른 개울이 있고, 마을의 근교에는 오래된 떡갈나무 서식지이면서 너도밤나무와 자작나무 숲이 있다. 이 숲에는 노루와 늑대가 살고 있다고 한다.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와 부르고스의 중간에 위치한 이 마을에는 여러 전설과 많은 전통이 남아 있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오카산의 전설은 다음과 같다.

 

 오카 산은 오랫동안 순례자들을 노린 도둑들이 들끓던 곳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이곳에서 한 순례자가 도둑에게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빼앗기고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슬픔에 잠긴 순례자의 부모가 간절하게 야고보에게 기도를 올리자 죽었던 순례자가 다시 살아났다고 한다.

 

비야프랑카 몬데스 데 오카 거리

 

 거리를 걸어가면서 보는 산티아고 교구 성당 (Iglesia Parroquial de Santiago)18세기 후반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성당으로, 필리핀에서 가져왔다고 전해지는 거대한 조개껍데기로 장식한 세례반이 있다.

 

비야프랑카 몬데스 데 오카의 유적 설명판

 

성당 옆에 비야프랑카 몬데스 데 오카의 유적을  설명하는 안내판이 서 있다. 이 안내판에는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쳤던 산 펠리세스 데 오카 수도원 (Monasterio de San Felices de Oca), 산티아고 교구 성당 (Iglesia Parroquial de Santiago), 오카의 성모 소성당 (Ermita de la Virgen de la Oca) 등이 설명되어 있고, 아헤스까지 길도 안내되어 있다.

 

 산티아고 교구 성당 (Iglesia Parroquial de Santiago)

 

 비야프랑카 몬테스 데 오카의 카페에서 주스를 마시고 쉬다가 길을 떠나 산티아고 교구 성당 (Iglesia Parroquial de Santiago)의 옆길로 올라가니 아주 옛날 건물의 느낌이 나는 알베르게가 있다. 이런 곳에서 숙박을 했으며 하는 안타까운 생각을 하고 지나쳤는데 우여곡절 끝에 결국 여기서 숙박을 하게 되었다. 그이야기는 뒤에서 다시 하겠다.

 

 비야프랑카 몬테스 데 오카를 출발하기 전에는 충분한 휴식과 물을 충분히 준비하는 것이 좋다. 떡갈나무와 소나무 숲으로 우거진 오카 산의 정상을 오르는 길과 산 후안 데 오르테가로 가는 내리막길의 12km나 되는 길에는 휴식을 취할만한 곳이 없다.

 

 비야프랑까 몬떼스 데 오까에서 나오는 길은 산티아고 성당을 왼쪽으로 끼고 오래된 병원의 모퉁이를 돌아 오카 산을 향한 험한 비탈길로 이어진다. 길은 떡갈나무와 소나무로 우거진 숲을 지나게 되며 까미노는 철책을 가로질러 내리막을 내려가면 조그마한 시내가 나오고 오늘의 길에서 가장 어렵다는 오르막 비탈길을 만나게 되지만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우리나라에서 산을 좀 올라 본 사람에게는 심하게 어려운 길이 아니다. 떡갈나무 숲을 통해 산의 정상을 오르면 거대한 고원지대를 만나게 되고, 길은 어렵지 않은 내리막 산책길로 변한다. 이제 산 후안 데 오르테가 마을이 이제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부르고스 지방 안내도(오카 산맥도 설명)

 

끝이 보이지 않는 숲길

 

공동묘지 표시

 

 오카 산의 정상에서 조금 내려오니 추모비 같은 것이 보였다. 비 표면을 보니 1936이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보는 순간,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기억은 바로 프랑코 정권에서의 스페인 내전이다. 국제정세의 복잡한 이해관계에 의한 내전을 한마디로 정리할 수는 없지만 우리에게는 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와 피카소의 걸작 '게르니카'로 잘 알려져 있는 전쟁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을 당한 비극적인 전쟁이었는데 역시나 그 학살당한 사람들을 추모하는 추모비였다.

 

1936년 스페인 내전에서 학살당한 사람들의 추모비

 

길가의 간이 푸드 트럭

 

산 후안 데 오르테가의 표시

 

산 후안 데 오르테가에서 부르고스까지 안내도

 

 산 후안 데 오르테가는 12세기부터 교황을 비롯하여 평범한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의 헌신과 노력으로 만들어진, 까미노에서 가장 오래된 유적 도시이다. 이들의 노력으로 외딴 마을은 순례자들은 편히 쉴 수 있는 아름다운 도시로 변했다. 산 후안 데 오르테가는 오래된 숲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마을로 로마네스크와 고딕, 바로크 양식 등의 우아한 건물이 있으며, 지금도 눈으로 경험 할 수 있는 빛의 기적이 일어나는 곳이다.

 

 빛의 기적이란 춘분(321)과 추분(921)이 되면 산 후안 데 오르테가 성당의 주두에 일어나는 단순한 우연이라고만은 할 수 없는 신기한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오후가 되면서 약 10분 정도 햇빛이 성당 주두의 부조를 비춘다. 처음으로 그리스도가 태어날 것이라고 성모에게 나타난 대천사의 부조부터 시작하여 예수의 탄생, 예수를 경배한 동방박사, 목동들에게 예수가 태어났다고 알려주는 장면을 차례로 비춘다.

 첫 번째 부조에서는 성모는 천사가 아니라 주두를 비추는 빛을 바라보는 것처럼 보인다. 빛이 만들어내는 신비로운 자연현상이자 잊을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이 현상을 빛의 기적이라고 부른다.

 

무슨 표시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 마을에 있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산 후안 데 오르테가 수도원 (Monasterio de San Juan de Ortega)12세기에 만들어졌다. 건물 내부에는 복잡하게 장식된 주두가 눈에 띄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인정되는 고딕 양식의 천개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조각된 산 후안 데 오르떼가 성인의 석관이 있다. 이 석관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진다.

 

 산 후안 오르테가 성인은 임신과 다산을 도와준다고 사람들이 믿어져 왔기에, 이사벨 여왕도 이 성인의 무덤을 찾아와 경배하며 자신이 무사히 아기를 낳기를 기도했다. 기도가 끝나고 여왕은 성인의 유해를 볼 수 있도록 돌로 된 석관을 열라고 지시했다. 성인의 무덤을 열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성직자와 수도사들은 망설였지만, 여왕의 고집으로 석관을 열자 하얀색의 벌떼가 쏟아져 나왔고, 여왕은 부패하지 않은 산 후안 데 오르테가의 시신을 볼 수 있었다. 놀라운 현상에 두려움에 떨던 여왕이 사람들을 시켜 석관을 닫자 벌들은 다시 석관의 작은 구멍으로 날아 들어갔다. 그래서 여왕과 사람들은 이 벌들이 성인이 구원해주기를 기다리는 태어나지 못한 영혼들이라고 여겼다.

 

고딕 양식의 발다친에 대한 설명

 

중앙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후진 설명

 

산토도밍고 데 라 칼사다의 조각 설명

 

산토도밍고 데 라 칼사다의 조각

 

산 후안 데 오르테가의 무덤(석관)

 

수도원 표석

 

산 후안 데 오르테가 수도원 (Monasterio de San Juan de Ortega)

 

 산 후안 데 오르테가에서 쉬면서 같이 걷는 일행과 가볍게 맥주를 한잔 마셨다. 제법 먼 길을 걸어 목이 마르기도 하고 이제 오늘의 목적지인 아헤스는 멀지 않기 때문이다.

 아헤스로 가기 위해서 마을을 빠져나오면 곧 철길이 나오고 길이 세 개가 있으나 바로 이어지므로 고민할 필요는 없다. 곧 커다란 두 개의 떡갈나무와 나무로 만들어진 십자가가 있는 언덕이 나오는데 앞쪽으로는 앞으로 끊임없이 걸어야 하는 황무지가 보이고 잠시 후에 나바라의 왕이었던 가르시아의 무덤이 있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는 아헤스가 순례자를 맞아준다.

 

아헤스 가는 길 안내도

 

멀리 보이는 아헤스 마을

 

 오래된 마을 아헤스는 중세 시대 기독교 왕국의 패권을 뒤흔든 중요한 장소였고, 또한 전원 속의 마을이라는 매력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까미노를 순례하는 순례자라면 이 그림 같은 풍경의 마을을 그냥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아헤스 안내도

 

아헤스의 풍경

 

 아헤스에 도착하여 숙소인 알베르게를 찾아가니 문제가 발생했다. 알베르게가 이중으로 예약을 받아서 많은 사람들이 입실을 못하고 있었다. 우리 팀의 인솔자는 예약한 영수증까지 제시하였지만 주인은 어느 쪽의 예약을 인정할 수가 없는 입장인 듯했다. 오랜 시간의 실랑이 끝에 알베르게의 주인이 다른 곳에 숙소를 마련해 놓았다며 차를 동원하여 약 10명 정도를 이동시켜 준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일 아침 일찍 다시 차를 동원하여 이곳 아헤스로 데려다 준다고 하였다. 아헤스에는 알베르게가 충분하지 않아 차를 동원하여 약 20km나 떨어져 있는 비야프랑카 몬데스 데 오카까지 이동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여행 중에 일어나는 한 해프닝으로 생각하고 이동하였다. 그런데 전화위복이라고 할까? 이동하여 간 곳은 낮에  비야프랑카 몬데스 데 오카를 지나면서 보았던 San Anton Abad라는 호텔과 알베르게를 겸해서 운영하는 아주 멋있는 고성과 같은 알베르게였다. 아마 아헤스의 주인이 다소 손해를 보더라도 성의를 다 한 것 같았다. 이 알베르게는 시설이나 음식 등 여러 면에서 최고의 알베르게로 인정할 만 하였다.

 

 San Anton Abad 알베르게 들어가는 입구

 

알베르게 안의 여러 장식품(정확히는 모르겠으나 십자군과 연과????)

 

알베르게의 뜰 풍경

 

 이 알베르게에서 제법 늦은 저녁을 먹었다. 식당에 가니 역시 순례자 메뉴를 팔고 있었고 가격은 거의 같았다. 식당의 등급이나 알베르게의 수준 등을 보면 좀더 비싸게 받을 수도 있었는데 아마 이 음식의 가격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는 것 같았다. 저녁을 배불리 먹고 이곳으로 같이 온 일행들과 담소를 나누고 침실로 향해 가니 저번에 에스테야에서 만났던 프랑스(?)인 일행이 모여 있었다. 말이 통하지 않아 그냥 반갑게 인사를 하니 그들도 모두 반가워한다. 까미노 길을 걸으며 만났다가 헤어지고 다시 만난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오랜만에 좋은 시설을 갖춘 알베르게에서 배불리 먹고 편안하게 잠자리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