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유산 탐방 7(백제 고도의 길 - 익산 미륵사지)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왕궁리 유적을 탐방하고 부근에 잇는 미륵사지로 발길을 옮겼다. 그런데 미륵사지로 가는 교통편이 너무 어렵다. 버스가 다니기는 하는데 거의 한 시간이 넘게 기다려야 버스가 오는 시간이었다. 거리로는 두 시간 정도 걸으면 가는 거리였지만 이번 여행이 걷기가 목적이 아니기에 버스를 타려고 정류장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데 다행히도 택시가 한 대 보였디. 그래서 망설임없이 택시를 타고 미륵사지로 향했다. 택시비가 조금 아까웠으나 시간을 아끼는 것이 더 이득이 되기에 망설임이 없었다.
미륵사지에 도착하니 보이는 광경은 내가 머리 속에서 생각하던 예전의 풍경이 아니었다. 오래 전에 이곳을 찾아왔을 때는 넓은 벌판에 탑만 외롭게 우뚝 서 있는 것을 보았고, 그 뒤에는 여러 시설물이 갖추어진 것도 보았는대 이제는 주변이 완전히 개발되어 박물관도 있고 정비가 잘 되어 있다.

미륵사지 안내판
익산 미륵사지(益山 彌勒寺址)는 마한(馬韓)의 옛 도읍지로 추정되기도 하는 금마면 용화산(龍華山) 남쪽 기슭에 자리 잡은, 한국 최대의 사찰 터다. 601년(백제 무왕 2)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며, 무왕과 선화공주의 설화로 유명한 사찰이지만 언제 없어지게 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조선 시대 17세기경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되며, 1962년 국보로 지정된 동양 최대 석탑인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1963년 보물로 지정된 익산 미륵사지 당간지주가 있으며, 1974년 8월 원광대학교의 발굴조사 때 동탑지도 발견되었다. 건물지는 백제와 고구려의 유구가 복합되어 있다.
미륵사는 미륵신앙의 용화삼회의 영향을 받아, 1탑 1금당식 절 세 개가 합쳐진 특이한 구조로 이루어져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삼탑 삼금당이 배치된 사찰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아울러 백제 무왕이 세운 곳으로서 최근 발굴된 사리기를 통해 창건 연대가 정확히 밝혀져, 백제사와 불교미술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이다.
백제 사찰로는 이례적으로 <삼국유사 권지2, 무왕조>에 전하는 미륵사 창건 설화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무왕 부부가 사자사(師子寺)에 가던 도중 용화산 밑의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났는데, 왕비의 소원에 따라 이 연못을 메우고 세 곳에 탑과 금당, 회랑을 세웠다고 전해 오고 있다.
미륵사가 창건되던 7세기 초는 삼국의 영토 경쟁이 최고조에 달한 시기로, 각국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국력 신장에 힘을 쏟는 한편, 불교의 힘을 이용하여 대내적 국론 통일을 꾀하여 대규모 국찰들이 건립되었다. 고구려의 금강사나 정릉사, 백제의 미륵사, 신라의 황룡사 등의 사찰은 모두 넓은 대지 위에 대규모 전각들을 화려하게 조성하였고, 중심에는 매우 높은 초고층 목탑들을 건립하였다.


미륵사지 안의 박물관





여러 사지터의 발굴된 모습
사지터를 한가롭게 거닐며 구굥을 하니 석타비 눈에 들어온다.미륵사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미륵사 석탑이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 (益山 彌勒寺址 石塔)은 백제 최대의 사찰이었던 미륵사의 세 개의 탑과 금당 가운데 이 미륵사지 석탑은 세 개의 탑 중 서쪽에 있는 탑이다. 우리나라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크고 건립 시기가 명확하게 밝혀진 석탑 중 가장 이른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원래는 9층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반파된 상태로 6층 일부까지만 남아 있다. 건립 당시의 정확한 원형은 알 수 없으며, 17~18세기 이전 1층 둘레에 석축이 보강되고 1915년 일본인들이 무너진 부분에 콘크리트를 덧씌운 상태로 전해졌다. 2019년 4월, 장장 20년에 걸친 미륵사지 석탑 복원 작업이 끝나 탑을 지탱하던 흉물스러운 콘크리트를 걷어내고 새단장했다. 미륵사지 석탑은 단일 문화재 복원 역사상 가장 오래 걸린 것으로 기록됐다. 작업이 끝난 왼쪽 탑은 6층까지만 복원됐고 그마저도 사방 면이 전부 달라 마치 미완성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해서 이름에 몇 층인지를 넣지 않고 석탑이라고만 부른다.
남아 있는 6층까지의 높이는 약 14.2m이고 이 층으로 구성된 기단의 전체 폭은 약 12.5m이다. 1층은 각 면이 3칸으로 구성되고 가운데 칸에는 문을 내달아 계단을 통해 사방으로 통하게 하였다. 석탑의 1층 내부에는 ‘十’자형 공간이 조성되어 동서남북 모두에서 들어가게 하였으며, 탑의 중심에는 여러 개의 사각형 돌을 수직으로 쌓아 올린 기둥(심주)이 4층까지 연속된다. 이러한 모습은 다른 석탑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이며, 2009년 1층의 첫 번째 심주석에서 발견된 사리봉영기(舍利奉迎記)의 기록을 통해 639년이라는 석탑의 건립연대가 명확하게 밝혀졌다. 금판 앞뒷면에 194자로 된 사리 봉안 기록판에는 시주자의 신분이 무왕의 왕후로, 좌평(백제의 최고 관직)인 사택적덕의 딸이라는 사실이 새겨져 있다. 이는 백제 서동 왕자(무왕)가 향가 ‘서동요’를 신라에 퍼뜨려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와 결혼했으며, 그 뒤 선화공주가 미륵사를 건립했다는 『삼국유사』의 내용과는 다른 것이어서 논란이 되고 있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고대의 목탑에서 석탑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충실하게 잘 보여준다. 또 고대 건축의 실제 사례로써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아 우리나라 불탑건축 연구에서 대단히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여러 방향에서 보는 미륵사지 석탑


사지터를 이곳 저곳 다니며 구경을 하니 발굴현장이 눈에 들어왔다.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나도 이 방면에 관심이 있었고 아마츄어의 발굴도 해 보았기에 생소하지는 않았다. 미륵사지에서는 지금도 땅속에 묻힌 역사를 끄집어내고 숨을 불어 넣는 발굴이 한창이다. 1000년도 넘는 세월을 찾는 일은 말할 수 없이 섬세하다. 커다란 바위를 덮은 흙먼지를 털어내고 솔의 모가 닳아 없어질 정도로 정성스레 문질러 닦는다. 발굴되는 모든 유물마다 번호를 붙여서 위치를 확인한다. 섬세한 망치질 소리는 1000년의 세월을 깨우는 소리다.

아직도 발굴 중인 모습



사지의 여러 장소 설명
'미륵사지 9층 석탑'이라고도 불리는 동탑은 1992년에 복원을 추진했다. 옛 모습을 알 수 있는 문헌이나 그림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고 효율성만 따져 2년 만에 졸속으로 탑을 완성했다. 동탑의 복원은 국내 문화재 복원 역사상 최악의 사례로 꼽힌다. 그래서 서탑을 복원하면서 '추정에 의한 복원은 하지 않겠다'를 원칙으로 세웠다. 온갖 자료를 찾았으나 서탑의 층수에 대한 언급은 어떤 문헌에도 없었다. 그래서 서탑은 있는 그대로 서 있다.




복원이라기 보다는 새로 만든 동탑의 모습


미륵사지 당간지주


석탑과 당간지주를 모두 보는 사지터의 전경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외국의 유적을 돌아볼 때도 폐허가 된 모습을 흔히 본다. 그 때마다 역사의 허망함을 느낀다. 한 때의 화려했던 시절이 지나 긴 시간의 흐름에서 사람만이 아니라 역사의 자취도 사라져 버렸다는 것에 대해 무한한 자연의 시간에서 사람이 만든 역사는 한갖 신기루에 불과함을 느낀다. 오늘 이 미륵사지에서 또 같은 느낌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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