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길 22코스(화천대교 - 미륵바위 - 화천꺼먹다리 - 풍산교)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평화의 길 22코스는 화천대교에서 출발하여 북한강을 따라 올라가서 지류인 풍산천을 따라가면 풍산교가 나오고 거기서 끝이 나는 15.3km의 길이다.

22코스 출발점인 화천대교 안내판
북한강을 가로지르는 화천대교는 화천읍과 하남면을 잇는 다리로 연장 395m, 폭 11.4m의 2차로 교량이다.
현재의 화천대교 옆에는 2026년에 완공을 목표로 새로 가설하는 길이 408m, 폭 13.85m의 2차로 규모로 새로운 화천대교를 건설하는 중이었다.
화천대교를 건너지 않고 옆으로 난 길을 따라서 북한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원래 이름이 남강(南江)이라고 문헌에 기록된 지금의 북한강은 화천군 화천읍 휴전선 부근에서 시작되는 강이다. 금강산(金剛山) 부근에서 발원한 금강천이 남쪽으로 흐르면서 철원군에서 금성천(金城川)과 합친 후, 화천읍 휴전선 부근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다가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楊西面) 양수리(兩水里)에서 남한강과 합류하여 한강으로 흘러든다. <관동지>에는 ‘현의 남쪽 3리에 있다. 철령에서 발원하여 금강내산(金剛內山) 물과 합쳐지고 금성(金城)을 지나 본 현 경계로 들어가 서쪽으로 돌아 관불진이 된다. 서쪽으로 흘러 대이진이 되며, 남쪽으로 굽이쳐 흘러 남강진(南江津)이 되며 서쪽으로 흘러 춘천 경계로 들어가 모진강(毛津江)이 되고 소양강(昭陽江) 하류에서 만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해동지도>에도 지명에 남강이 표기되어 있다. 옛날에는 지역마다 강 이름을 다르게 불러, 북한강을 화천에서는 ‘낭천’, 춘천에서는 ‘모진강’으로 불렀고, 소양강과 북한강이 합류하여 가평으로 가는 강을 ‘신연강’이라고 불렀으나 현재는 ‘북한강’으로 통칭하여 불린다.
한강의 명칭에 대한 유래는 다수 전래하지만, 북한강의 유래는 별도로 전하지 않는다. 다만 한강의 수계는 크게 북한강 수계와 남한강 수계로 구분되는데, 북한강은 북쪽에서 발원하여 남서류하는 형태를 띠기 때문에 한강에 ‘북(北)’을 붙여 ‘북한강’으로 명명하였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할 뿐이다. 북한강은 남한강과 함께 한강 상류를 이루는 하천으로 강원도에서 경기도로 흐른다. 북한강(北漢江)은 한강의 지류 가운데 가장 긴 강으로, 유량이 풍부하여 댐 건설에 유리하다. 특히 북한강은 발원지가 북한에 있어 수공방지를 위해 상류 구간인 화천, 양구 일대에도 댐이 들어섰고 수공방지만을 목적으로 한 평화의 댐까지 등장했다.
도도하게 흐르는 북한강을 걸어 올라가는 길에는 사람의 통행은 전혀 보이지 않고 길을 걷는 사람은 나 혼자이다. 아무런 구속이나 번잡함이 없이 혼자 걸으며 마음의 여유로움과 사회적인 관계를 잠시라도 떠날 수 있는 것이 길을 걷는 즐거움이다. 그런데 코리아 둘레길을 걸으면서 항상 느꼈던 생각이 '우리나라의 길은 왜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와국의 길을 트레킹하러 가면서 한국의 길이 좋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다. 관련 기관에서 우리 길의 아름다움에 대해 적극적인 홍보가 필요하다고 생각이 길을 걸으면서 항상 들었다.








북한강을 따라 걷는 길

해병대화천지구전투전적비
강을 따라 계속 가니 강 건너에 화천수력발전소 (華川水力發電所)가 보인다. 화천수력발전소는 일제강점기인 1939년 7월 경인 공업지대에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당시의 한강수력전기주식회사가 댐 수로식 발전소를 착공, 1944년 5월에 제1호기가 준공되었다. 이어 10월에는 제2호기가 준공되었으며 제3호기는 기기 설치 도중에, 제4호기는 기초공사 완료 후에 광복을 맞이하여 공사가 중단되었다. 이 발전소는 38도선 이북에 위치하여 민족의 수난과 더불어 운명을 같이해야 했다. 한국전쟁의 발발로 광복 후 5년만인 1950년 9월에야 우리의 손으로 넘어왔으나 북한의 역습으로 빼앗기고 빼앗는 공방전을 다섯 차례나 치른 끝에 1951년 4월 완전히 우리에게 넘어왔다.
이 발전소를 사이에 두고 아군과 적군이 치른 격전은 극에 달하였고, 특히 1951년 4월과 5월에 걸쳐 보병 6사단과 해병 제12연대 장병들이 유엔군의 지원을 받아 중공군 제10 · 25 · 27군의 3개군을 완전섬멸하여 수장을 시키는 대 전과를 올렸다. 이 승리를 기념하여 당시 현지를 방문한 이승만(李承晩)대통령이 오랑캐를 격파한 호수라는 뜻으로 ‘파로호(破虜湖)’라는 휘호를 내리는 등을 보면, 당시 이 발전소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가는 짐작되고도 남음이 있다. 그 뒤 1952년 다시 복구공사를 시작하여 오랜 기간에 걸쳐 복구와 증설을 하여 1968년 8월 완공하여 전력생산과 방대한 저수지를 이용하여 한강수계의 홍수조절 및 수도권 용수를 확보하게 되었다.
2004년 9월 4일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제109호로 지정되었으며, 디자인의 조형미가 돋보이는 구조다.



화천수력발전소 전경
화천수력발전소를 지나 조금 가면 북한강을 가로지르는 아주 퇴락한 모습의 다리가 보인다. 이름도 이상하게 보이는 꺼먹다리다.
꺼먹다리는 화천의 근현대사를 목격한 산 증인으로, 화천군 화천읍과 간동면을 잇는 일제강점기에 건설된 우리나라 최초의 철근 콘크리트 교량으로, 일제가 남한 최초의 수력발전소 가동을 위해 화천댐과 화천수력발전소 건설과 함께 놓았으며, 교각은 일제, 철골은 소련, 상판은 한국전쟁 당시 남한이 얹어 완성되었다. 이상하게 들리는 이름은 나무 상판에 검은색 콜타르를 칠한 모습에서 ‘꺼먹다리’라 부른다고 한다.
그러나 이 다리의 아름다운 모습 뒤에는 한국전쟁의 포탄과 총알 흔적이 곳곳에 남아 외로운 슬픔을 고스란히 안고 있으며, 원형이 잘 보존되어 교량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새로운 다리의 건설로 1981년 폐쇄되었다가 이후 2004년 등록문화재 제110호로 지정된 꺼먹다리는 난간도 없이 일부 침목이 훼손돼 수십 년간 방치되다가 2007년 문화재청의 승인을 받아 재정비되어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 현재 복원된 꺼먹다리는 차량으로는 이동할 수 없고 도보로만 다닐 수 있다.
꺼먹다리는 최근 전해 오는 한 가지 이야기가 있다. 군대에 갈 20대 남자가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양 끝에서 출발하여 가운데에서 서로 만나면 남자가 군대에 입대해도 여자가 고무신을 거꾸로 신지 않는다고 한다.
이 다리는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영화나 TV 드라마에 자주 나오는 단골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유명한 전쟁영화 ‘전우’와 ‘산골 소년의 사랑 이야기’ 등의 배경이 바로 여기다.







화천 꺼먹다리의 여러 모습
꺼먹다리를 지나 계속 북한강을 따라 올라가니 642고지전투전적비라는 간판이 있다. 길을 건너 전적비를 보려고 가니 철망으로 막아서 올라갈 수가 없었다. 하는 수없이 멀리서 전적비를 사진을 찍고 보니 철망 바로 옆에 조그마한 수리봉전투전적비가 눈에 띄였다. 왜 이 전투전적비가 있는 곳을 철망으로 막았는지를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무슨 이유가 있어서 막았으리라 생각했다. 이 길을 걸으면서 수많은 전투전적비를 보면서 이 지역이 한국전쟁에서 너무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었다는 새삼스럽게 깨닫고 우리나라의 비극을 다시 되돌아볼 수 있는 것도 큰 소득이었다.



643지구전투전적비와 수리봉전투전적비
계속 올라가니 이름도 특이한 딴산이라는 표지가 나오고 조금 가니 유원지가 보인다. 울창한 산과 산천어와 수달이 사는 고장, 화천의 딴산유원지는 산이라기보다 섬같이 물가에 있는 작은 동산으로 산그늘과 강물이 시원해 쾌적한 쉼터로 사랑받는다. 평화의 댐 아래 파로호의 맑고 깊은 물에는 민물고기가 많아 화천 토속어류생태체험관은 유익한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곳이다.






딴산유원지의 모습
딴산유원지를 지나 도로를 따라 고갯길을 올라가니 다소 생소한 '처녀고개'라는 입석이 있다. 이 고개의 명칭에는 애달픈 사랑의 이야기가 얽혀 있다.
처녀고개는 딴산 옆에 있는 고개로 남녀의 애틋한 사랑을 배경으로 <화천군지>에 풍산리(豐山里)와 함께 지명유래가 아래와 같이 전해지고 있다.
사랑하는 남녀가 있었다. 도령은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갔고, 처녀는 도령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도령이 한양으로 떠난 다음 맞이한 첫봄에 처녀는 자기 키와 같은 나무를 골라 꽃버선을 만들어 매달아 놓았다. 이렇게 기다리기를 10년이 지나도 도령의 꽃버선을 곱게 만들어 소나무에 매달아 놓고 기다리는 처녀의 일편단심은 변하지 않았다. 어느 날 처녀는 빛이 바랜 도령의 꽃버선을 새로 만들어 소나무에 매달려고 나무에 올라갔다가 실족하여 그만 절벽으로 굴러 강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처녀가 죽던 날 도령은 장원급제하고 돌아왔다. 장원급제하였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려고 달려온 도령에게 처녀가 죽었다는 마을 사람들의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도령은 처녀가 죽은 자리에 좇아가 보니 처녀가 죽은 자리에는 초록색 물새가 처녀의 슬픈 넋인 양 슬프게 울고 있었다. 도령은 자기를 기다리다 죽은 처녀를 위해 벼슬을 버리기로 했다. 그는 양지바른 곳에 처녀를 묻고 그 옆에 초가를 지어 두문불출하며 농사를 짓고 살았다. 이때부터 이 일대는 해마다 풍년이 들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동리 이름을 ‘풍산리’라 짓고 처녀의 명복을 빌기 위해 그녀가 꽃버선을 매달았던 소나무를 성황으로 모시고 고개 이름을 ‘처녀고개’라고 하였다.
처녀고개 이야기로 다음과 같은 다른 전설도 같이 전하고 있다. 옛날 사랑골에 한 청년이 살고 있었다. 그는 큰 뜻을 품고 중국으로 공부를 하러 갔다. 그는 그곳에서 중국의 한 처녀와 깊은 정이 들어 장래를 약속하는 사이가 됐다. 그러나 청년은 공부를 마치고 중국을 떠나지 않을 수 없어 먼저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 후 중국에 있는 처녀는 아무리 청년을 기다려도 그 청년이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처녀는 사랑하는 청년을 찾아 나서 압록강을 건너 이국만리 머나먼 길을 걸어 천신만고 끝에 화천 땅 한 마을에 이르게 되었다.
그때 마침 지나는 사람이 있어 처녀는 청년에게 들은 마을 이름을 생각하여 “사랑골이 여기서 얼마나 됩니까?”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 행인은 “구만리를 지나야 하오.”하고 일러 주었다. ‘구만리’란 말을 들은 처녀는 지금까지 온 길만 하여도 까마득한데 구만리를 지나야 한다는데 기가 막혀 병풍바위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는 것이다. 행인이 알려준 ‘구만리’는 90,000을 말한 것이 아니라 사랑골까지 가려면 지나지 않을 수 없는 마을 이름이었다. 사랑골은 현재 화천읍 산농동의 다른 이름이다.

처녀고개 입석
고개를 넘어 북한강의 한 하천인 풍산천을 따라 올라간다. 물소리가 마음을 상쾌하게 해 주는 개울가를 계속 걸어가니 제법 많은 집이 있는 마을이 보이고 초등학교와 교회도 보인다. 마을 주민들이 공동식사를 하는 곳인지 마을식당도 보이는 곳을 지나 개울을 따라 계속 가니 어느새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오늘은 풍산리에서 숙박하기로 예정하였기에 미리 전화한 펜션에 들어가 하루의 일정을 마쳤다.



풍산리 숙소로 가는 길에서 보는 풍경



풍산교 가는 길의 아침 풍경
계곡 물소리가 아주 청량하게 들리는 펜션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일찍 일어나 배낭을 짊어지고 다시 길을 나서니 펜션은 아직 작막함에 덮여 있고, 나 혼자 개울을 따라 길을 올라가니 멀리서 들리는 닭 울음소리가 매우 정겹다. 항상 아침 일찍 길을 떠나기에 거의 매일 듣는 닭 울음소리는 들을 때마다 새롭다. 한 30분 정도를 걸어가니 풍산교가 보이고 여기서 22코스는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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